'피터 싱어 읽기' 리스트를 만들어놓은 김에 관련기사를 찾았다. 작년 봄에 방한했던 것이 기억나서다. <오늘의 세계적 가치>(문예출판사, 2007)에 실린 피터 싱어의 문답강연에 대해 몇 마디 적어놓을까 했지만 시간이 여의치가 않다. 도올인터뷰 기사로 소개를 대신한다.

중앙일보(07. 05. 21) [도올인터뷰] '실천윤리학'의 거장 피터 싱어 교수를 만나다

미국 프린스턴대 석좌교수이자 타임지에서 세계를 움직이는 100인의 한 사람으로 꼽은 피터 싱어(Peter Singer) 교수가 내한했다(본지 5월 18일자 18면 기사 참조). 도올 김용옥 기자가 17일 서울대 호암관에서 그를 만나 점심을 같이 했다. 싱어 교수는 21일 오후 2시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강연을 한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상가로서 우리는 재미있는 대화를 많이 나누었다. 싱어 교수는 보통 철학자들과는 달리 어법이 진솔하고 직설적이며 간결했다. 버트런드 러셀 이후로 가장 많은 사회적 논쟁을 생산하고 가장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철학자로서 정평이 있다"는 것이 도올의 말이다.

-좀 거칠게 질문하겠는데 윤리학(ethics)이란 무엇인가?

"윤리학이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마땅한가(how we ought to live)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정의가 간결해서 좋다. 그대는 전통적 윤리학 학파 중에 어디에 속하는가? 혹은 속하지 않는지….

"나는 공리주의 학파(utilitarianism)에 속한다."

-그대의 주장이 전통적 공리주의와 다른 것이 있다면?

"전통적 공리주의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말이 있듯이 인간의 쾌락의 정도의 기준에 의하여 윤리적 가치를 결정한다. 그러나 나는 쾌.불쾌의 문제에 집착하지 않는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모든 지각.의식 있는 존재(sentient being)의 선호(preference)에 관한 것이다. 그 선호의 만족을 최대화시키거나, 선호를 방해하는 불만을 최소화시키는 것에 관한 것이다."



-당신의 선호공리주의(preference utilitarianism)에 의하면 인간이 살기를 선호할 때도 있지만 죽기를 선호할 때 그것을 합법적으로 허용해야 한단 말인가?

"그렇다. 그것이 내가 주장하는 안락사 허용의 문제다."

-그러한 허용에 도달케 되는 윤리적 과정에 더 큰 문제가 있지 않은가? 존엄한 인간의 의식적 결정이라면 몰라도, 뇌사 상태에 있는 인간이라든가, 유아의 경우 본인이 결정할 수 없는 생명의 종료를 누가 감히 결단하겠는가?

"내가 말하는 것은 불가피한 비극적 상황에 관한 것이다. 소생 가능성 없는 뇌사의 인간이라든가, 너무도 심각하게 불구로 태어난 신생아의 경우, 주변의 식구나 양식을 가진 의사가 어려운 논의 끝에 도달한 합의(선호)를 인정해 주는 것이 더 자비로울 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 인간의 오판이라든가 보험금, 범죄 동기 등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가 개입될 우려가 많다.

"안락사는 현재 네덜란드와 벨기에에서 시행되고 있는데 실제적으로 큰 사회적 부작용이 없다. 나의 논의에 많은 사람이 부정적 견해를 표방하는 가장 큰 이유는 논리적이라기보다는 인도주의(humanitarianism)에 관한 그들의 관념이 편향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편향의 대부분은 기독교적 신념에 기초하고 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메시지는 유대교의 경우는 좁은 울타리의 동네사람이나 선민의식에 절어있는 유대인종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예수가 말하는 '이웃'도 기껏해야 인간이라는 종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성차별(sexism), 인종차별(racism)이 악이라면 물론 인간을 동물과 구별하는 종차별주의(speciesism)도 악이다. 내가 말하는 것은 앞서 언급했듯이 모든 지각.의식 있는 존재의 고통의 경감이나 이해 관심에 관한 동등한 배려다. 저등 의식의 유아보다 더 고등한 의식을 가지고 있는 동물도 많다. 이런 동물은 마음대로 죽이면서 안락사 문제에만 인도주의라는 존엄성의 잣대를 운운하는 것은 위선이다. 절대적인 듯이 보이는 윤리적 직관(intuition)이라는 것도 편견투성이다. 직관 자체가 진화해야 한다."



-그대는 유대인인가?

"그건 왜 묻나? 우리의 논의와 유대인은 아무 상관이 없다. 나는 혈통상 분명한 유대인이지만 사상이나 종교로 말하면 날 유대인으로 규정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나는 그냥 사람이다."

-유대인들이 미국의 상층권력의 핵심을 장악하고 국제세계에 부도덕한 많은 영향을 행사하고 있는데 당신은 책임이 없나?

"당신이 말하는 것은 미국정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매우 조직화된 유대인 로비스트를 지칭하는 것이나 그들이 곧 유대인은 아니다. 유대인 중에는, 촘스키, 프로이트, 아인슈타인, 칼 마르크스 같은 이도 있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사람 탄압은 잘못된 것이다."

-당신은 무신론자인가?

"하나님이라는 전지전능한 존재가 있어 이 세계를 창조했고 지배하고 있다면 도대체 인간세상을 왜 이따위로 작동시키고 있는가? 어렸을 때부터 이런 질문을 나는 극복하지 못했다. 인간의 문제를 궁극자에게 맡길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우리의 가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은 나의 확고한 신념이다. 나의 입장을 지각 있는 모든 존재의 입장과 항상 환치(換置)해 보는 것이 모든 종교적 명제에 우선한다. 대체적으로 종교는 공평성(impartiality)을 결여하고 있다."



-지각 있는 존재에 관한 당신의 주장은 불교의 중생(衆生)이론과 통한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의 호가 '도올'이듯이 불교는 돌멩이에도 저급한 의식이 있을 수 있다고까지 보는 것 같다. 내 이론은 존재를 거기까지 넓히지는 않는다."

-신경계(nerve system)의 유무인가?

"고통을 느낄 수 있음에 관한 것이다."

-식물에도 정보 전달 체계는 있다.

"식물이 고통을 느낄 수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나무를 톱으로 자를 때 나무가 통증을 안 느끼는 줄 어떻게 아는가?

"현대과학의 상식 수준에서 이야기하자."



-당신 강연 제목을 묻겠는데, 21세기에 윤리적으로 산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첫째 이 세계의 불필요한 고통(unnecessary suffering)을 줄이는 방향으로 행동해야 한다. 둘째 이 세계는 이미 이 세계의 사람들이 충분히 먹고살 수 있는 부를 축적해 놓았다. 단지 분배가 잘못되고 있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 못사는 나라의 음식.의료.교육을 위해 힘써야 한다. 셋째 환경을 파괴시키지 않는 방향에서 우리의 문명생활을 영위해야 한다. 환경파괴 가스와 연료의 사용을 억제해야 한다."

-미국은 에너지 낭비 체제의 확보를 위해 이라크까지 침공하지 않았나?

"에너지 이유만 아니라 남의 나라에 민주를 만들어 주겠다고 간 것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그 결과는 수천 수만의 생명이 아무 이유 없이(for no good reason) 죽어만 갔다. 유엔의 결정을 무시하고 단독으로 행동한 것은 미국역사의 치명적인 도덕적 결함이다."

-부시는 좋은 사람인가?

"그는 대체적으로 기만적이다. 아주 자비로운 보수인 것처럼 가장했으나 약자와 가난한 자를 무시했고 개인의 자유를 짓밟는 감시체제를 강화시켰다. 그리고 오리건주의 안락사법을 뒤엎으려 했다. 보수적 기독교인의 지지에 지나치게 의존한다."

-나는 최근 '요한복음'을 새로 번역하고 강해했다. 예수를 어떻게 생각하나?

"그는 나나 당신과 같은 사상가(윤리교사)의 한 사람이다. 그에 관한 정보는 대부분 그가 죽은 지 40.50년 후부터 집필된 것인데 별 신빙성이 없다."

-한국에 대한 생각은?

"한국은 세계적으로 매우 지위가 높은 나라다. 경제적으로 11위권에 든다면, 한국인은 이제 글로벌한 사유를 해야 한다. 해외원조금을 너무 적게 내놓고 있다. 그리스 같은 나라도 국민총소득의 0.17%를 내놓는데 한국은 0.1%밖에 안 내놓고 있다."



-북한에 대한 생각은?

"인민의 고통에 대한 배려가 매우 부족한 나라 같다."

-그래도 '악의 축'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

"내 말을 오해하지 말라. 그 나라의 지배자와 선의의 피해를 받는 대중을 혼동해서는 아니 된다. 북한의 인민들에게는 보편적 자비의 가치를 동일하게 적용해야 한다. 북한 인민들을 도와야 한다."

-남북관계 개선에 관한 의견은?

"나는 구체적 정황은 잘 모른다. 그러나 남한과 북한이 평화롭게 접촉하고 핵문제를 해결하고 개성공단이나 철도와 같은 경협을 추진하는 문제에 관해 미국이 보다 너그럽고 적극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미국에 이익이 된다는 것을 미국인들은 깨달아야 한다."

피터 싱어는 1946년 호주 멜버른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나치 탄압을 피해 오스트리아 빈에서 이주한 유대인들이다. 현재 프린스턴대 생명윤리학 드캠프석좌교수로서 범세계적 기아퇴치.생명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멜버른대에서 "나는 왜 도덕적이어야 하는가?"라는 제목의 석사논문을 썼고, 옥스퍼드대에서 '시민 불복종'을 주제로 박사논문을 썼다. 그의 조부는 심리학자 프로이트에게 영향을 준 고전학자였다. 그의 명저 '동물해방' '실천윤리학'은 세계 철학계의 매우 인기있는 텍스트이다. 철저한 채식주의자.

08. 0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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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나무 2008-04-28 14:36   좋아요 0 | URL
인터뷰가 실질적이고 간결하네요. 정말 좀 거친 직설적인 질문들이 현실감 있습니다. 마치 싸우는 사람들 같기도 하고...^^ 묻는 이나 대답하는 이나 학문적 수식이 없어 좋습니다. 피터싱어의 공리주의 혹은 윤리학을 눈치채기에 부족하지 않네요.
'독설의 팡세'를 읽고 에밀 시오랑과 로쟈님은 매치가 안되는 듯 하다고 생각했답니다. 역자는 그가 주는 충격이 유쾌하거나 즐겁지 않으며 절망적이고 불편하다고 했는데 내겐 이보다 유쾌하고 통렬한 사고는 없어 보입니다.

행복이란 아주 희귀한 것이다. 늙은 후에나 노망했을 때만 느낄 수 있는 것이니까. 행복은 극히 소수의 인간에게만 베풀어진 혜택이다./
나는 노망하면 행복해질 수 있다. ㅎㅎ 내가 지금 불행한 것은 너무도 당연하고 노망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으니 이보다 더 나를 기쁘게 하는 책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로쟈 2008-04-28 23:38   좋아요 0 | URL
시오랑에 대해서는 몇 차례 다룬 적이 있는데요. 잘 안 맞아 보이나요?^^

비로그인 2008-04-29 12:18   좋아요 0 | URL
도올의 질문과 싱어의 대답이 모두 명쾌합니다.
싱어의 생각에 공감하는 편이랍니다.
저의 서재에 옮기고 싶습니다.
의미심장한 인터뷰기사소개 고맙습니다. 로쟈님.


로쟈 2008-04-29 13:46   좋아요 0 | URL
별말씀을요.^^;
 

도서관에 갔다가 피터 싱어의 <동물해방>(인간사랑, 1999)를 대출해왔다. 표지가 너무도 유치해서 구입하지 않은 책인데 이번에 <죽음의 밥상>(산책자, 2008)도 번역된 김에 손길이 갔다. 같이 대출한 책은 최훈의 <벤담 & 싱어>(김영사, 2007)이다. 아마도 싱어는 국내에 가장 많이 소개돼 있는 윤리학자일 텐데 그 자신이 많은 책들을 펴내고 있기도 하다. 리스트를 만들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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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에 윤리적으로 살아가기- 현대 사회와 실천윤리, 다산 기념 철학 강좌 10
피터 싱어 지음, 구영모 외 옮김 / 철학과현실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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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 어떻게 세계의 절반을 가난으로부터 구할 것인가
피터 싱어 지음, 함규진 옮김 / 산책자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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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세계화의 윤리- 실천윤리학의 거장 피터 싱어의
피터 싱어 지음, 김희정 옮김 / 아카넷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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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One World: The Ethics of Globalization, Second Edition (Paperback, 2)
Singer, Peter / Yale Univ Pr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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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8-04-27 20:55   좋아요 0 | URL
벤담&싱어 재밌습니다. ^^ 저는 <죽음의 밥상> 나오자마자 사서 집에 모셔놨어요. 전에 사놨던 싱어의 책이 몇 권 있는데 아직 못 읽었네요. 싱어에게 개인적으로 관심이 많아서.

로쟈 2008-04-27 23:23   좋아요 0 | URL
이 시리즈가 대부분 잘 읽힙니다. 별로 주목받지 못하고 있지만...

2008-04-28 09: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4-28 23:39   좋아요 0 | URL
싱어의 책들은 대부분 도서관들에 비치돼 있을 겁니다...

소경 2008-04-28 23:52   좋아요 0 | URL
몇몇 권들은 단대(법대) 도서관에만 비치되어 있더군요 ..쩝 ㅠㅠ

로쟈 2008-04-28 23:55   좋아요 0 | URL
돈이 없으면 발품이죠.^^;
 

낮에 학교 연구실에 다녀온 사이에 전화선 공사를 하는 바람에 서재가 폭탄을 맞은 꼴이 돼 버렸다. 주로 바닥에 쌓아놓았던 책들이 뒤죽박죽이 된 탓에 마침 읽어보려던 책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런저런 시름이 늘어서 가뜩이나 찌푸린 날씨 같은 기분인데 책들마저도 '비협조적'이니 무얼로 울적함을 달래야 할는지. 예전에 쓴 시나 한편 옮겨놓는다. 접시에 코라도 박고 싶은 마음에...

Lost Highway

불안은 종이들을 잠식한다

어느 한순간이다, 한순간 불안은 종이들을 잠식한다 
어느 한순간 깨알같은 생의 일지(日誌)들은 백열등 아래 잠 못 이루며
얇은 가슴팍 갈피마다 눌러 적힌 글자들을 뒤적여야 한다
무얼 자백하고 무얼 숨겨야 할 것인가
언젠가 부질없는 마음이 긁고 간 이 치욕스런 오점들
언젠가 다시 불꽃 속으로 사그라질 이 덧없는 회한들
어느 한순간이다, 바로 한순간 불안은 종이들을 잠식한다
어느 한순간 접시에 코를 박고 종이들은 숨을 죽인다

08. 04. 26.

P.S. 시의 제목은 물론 파스빈더의 영화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1973)를 패러디한 것이다. 하지만 이미지는 데이비드 린치의 <로스트 하이웨이>(1997)의 것이고 지금 듣는 음악은 그 주제가 데이비드 보위의 '나는 착란에 빠졌어요(I'm Deranged)'이다(http://www.youtube.com/watch?v=OtpHR3d0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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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굴까 2008-04-26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배경화면을 로쟈님 서재사진으로 한번 바꿔보심이..

로쟈 2008-04-26 23:47   좋아요 0 | URL
제가 온라인 서재를 만든 이유가 없어집니다.^^;

Mephistopheles 2008-04-28 00:03   좋아요 0 | URL
지젝을 로쟈님 서재로 초대하면 아마도 가능할지도...

노이에자이트 2008-04-27 0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를 좋아하시나봐요.이 영화가 대표작이라서 그의 전기도 이 제목이던데요....로날드 헤이만이 쓴 전기 국역판은 도서관에도 없고...저는 독일 역사논쟁에서 이 감독을 처음 알았어요.장정일씨가 되게 좋아하더라구요.근데 요절했네요.

로쟈 2008-04-27 09:22   좋아요 0 | URL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을 좋아하고 사실 <불안>은 보지 않은 영화입니다. 전기는 읽어봤지만.^^

다락방 2008-04-27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그러니까 로쟈님, 시도 쓰시는군요! 덕분에(?) 잘 읽었습니다. :)

로쟈 2008-04-27 09:21   좋아요 0 | URL
옛날에 쓰던 걸 가끔씩 올려놓고 있습니다.^^;

Mephistopheles 2008-04-27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스트 하이웨이의 마지막 부분 그로테스크한 외모를 출동시킨 누구를 많이 닮은 마를린 맨슨의 기억이 자꾸 나는군요..^^
 

오언 깅거리치(깅그리치)의 <아무도 읽지 않은 책>(지식의숲, 2008)과 관련하여 마이리스트만 만들어두었는데(http://blog.aladin.co.kr/mramor/2058799), 마침 적당한 리뷰도 있기에 옮겨놓는다. 한 서평대로 '책에 관한 책에 관한 책'이라지만 저자의 품이 상당히 많이 든 책이라는 걸 알 수 있다(가끔씩 만나게 되는 일급 학자들의 전문성과 대중성이 경탄스럽다). ‘위대한 책에 관한 집요한 책에 관한 매혹적인 책’이란 평도 무색하지 않다. 우리 과학사와 관련해서도 이런 책들이 나왔으면 싶다...  

경향신문(08. 04. 26) ‘태양중심설’ 논문에 누가 주석 달았을까

과학비평가 아서 케스틀러는 초기 천문학의 역사를 다룬 베스트셀러 ‘몽유병자들’에서 16세기의 한 논문에 대해 “아무도 읽지 않은 책”이자 “역사상 가장 판매가 신통치 않은 책”이라는 혹평을 남겼다. 이 논문의 이름은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코페르니쿠스가 지구중심설에 의문을 제기하며 태양중심설을 정교하게 설명해놓은 기록이다.

1970년 가을, 근대과학혁명을 불러온 코페르니쿠스의 탄생 500주년 기념행사 준비에 참여하게 된 저자는 문제의 논문이 출간 당시보다 20세기 이후에 더 많이 읽혔을 것이라 추정한다. 태양중심 우주론을 다룬 첫 5%는 “지적으로 즐길 수 있게” 쓰였지만 나머지 95%는 “무시무시할 정도로 전문적”이었기 때문이다. “구입해서 읽고 활용하시기 바랍니다”라는 선전문구가 무색하게도, 당시의 독자로 추정할 수 있는 사람은 케플러·튀코 브라헤·갈릴레이 등 천문학자와 출판업자 9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중 일부는 이 책을 읽지도 않았을 것이 확실했다.

그러던 중 저자는 에든버러 왕립천문대에서 충격적인 책 한권을 만난다. 희귀도서들을 둘러보던 중 그가 발견한 ‘회전…’ 초판본에는 여백 가득히 그림과 글이 적혀있었다. 너무 어려워서 아무도 읽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과 달리 가장 전문적인 뒷부분에 집중적으로 적힌 주석의 주인공은 1540년대 유명 천문학자 에라스무스 라인홀트로 밝혀진다. 이 특별한 책 한권에 홀린 그는 오르후스에서 베이징, 코임브라에서 더블린, 멜버른에서 모스크바, 장크트갈렌에서 샌디에이고까지 수십만 ㎞를 여행하며 도서관을 뒤진다. 성인, 이단자, 불량배, 음악가, 영화배우, 의사, 장서광들이 소유했던 수백권의 초판·재판본들 속의 필체와 제본방식은 그를 미궁에 빠지게도 하고 불타는 연구경쟁 속에 던져넣기도 한다. 결국 그는 놀라운 결론에 도달한다. “아서 케스틀러는 완전히 틀렸다”는 것이었다.



저자인 하버드대 과학사 교수 오언 깅거리치는 자신의 이름이 붙은 소행성을 갖고 있을 정도로 저명한 천문학자다. 그는 30년 동안 600여권의 ‘회전’ 초판·재판본을 찾아냈고 그 결과를 “코페르니쿠스의 ‘회전에 관하여’의 주석에 관한 조사”라는 책으로 펴냈다. ‘아무도 읽지 않은 책’은 이 ‘주석’을 펴내는 과정에 대한 흥미로운 회고록이다. 표지나 여백에 남겨진 필체와 흔적을 통해 책의 원주인과 이동경로를 찾아내는 집요한 조사과정이 박진감 넘치게 그려진다. ‘천문학사 저널’에 실린 서평의 “책에 관한 책에 관한 책”이라는 표현에서 더 나아가 ‘위대한 책에 관한 집요한 책에 관한 매혹적인 책’이라 말해도 될 것 같다.



책 한권에 대한 이 완벽한 연구는 이제 종종 경매에 나온 희귀본이 도난본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데 사용되곤 한다. 책 말미에 ‘회전…’ 초판과 재판본을 소장하고 있는 나라 목록이 나오는데 아쉽게도 우리나라에는 한권도 없다. 이웃나라 일본에는 8권, 중국에 1권이 있다하니 속이 쓰려온다.

08. 04. 26.

P.S. 기사의 서두에서 인용된 아서 케스틀러(Arthur Koestler, 1905-1983)의 얘기는 책의 '들어가는 글'에 들어있다. 국내엔 '아서 케슬러'로 소개되었고 소설 <한낮의 어둠>(한길사, 1982), 과학에세이 <야뉴스>(범양사, 1993) 등이 번역되었다. 그 케슬러가 쓴 "초기 천문학의 역사"가 <몽유병자(The Sleepwalkers)>(1959)라는 것이고, 찾아보니 623쪽의 방대한 분량이다. 그렇다고 해서 한물 간 베스트셀러는 아니고 지난 1990년에 재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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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4-27 01:37   좋아요 0 | URL
케스틀러가 천문학에 관한 책도 썼군요.저는 한낮의 어둠의 작가로만 알았는데...일본인들은 천문학에 관심이 많아서 일본이름이 붙은 별이름도 꽤 된다고 하던데요.그래서 천문학에 관한 희귀본이 많나보죠.

로쟈 2008-04-27 18:38   좋아요 0 | URL
자연과학쪽도 일본은 노벨상 수상자가 여럿 되니까요...

네모선장 2008-04-29 12:32   좋아요 0 | URL
수학분야도 뛰어납니다.
수학의 노벨상 격인 필즈상도 동남아시아권에서는 일본이 세번 중국이 한 번 수상했습니다^^

로쟈 2008-04-29 13:49   좋아요 0 | URL
저도 생각납니다. 일본의 수상자 한 사람이 <학문의 즐거움> 저자였죠...

네모선장 2008-05-01 13:23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히로나카 헤이스케 현재 서울대 수학과에 초빙되어 수업하고 계신걸로 알고 있습니다~~
 

금요일 밤이면 토요일자 신문들의 북리뷰가 온라인에 올라오기 때문에 이곳저곳 기웃거리게 되는데, 다행히(?) 이번주에는 이미 소개한 책들 외에 눈길이 가는 책이 따로 없다. 헤겔의 <자연철학>, <법철학>, 그리고 셸링의 <초월적 관념론 체계> 등은 당장에 읽을 일이 없을 듯하여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뤄볼 예정이다. 지금 당장은 구입한 책과 대출한 책 들이나 얼른 '처리'를 해야할 형편이다(요즘은 도서관에서 대출해놓은 책들만 해도 50권이 된다). 밀린 일 몇 가지만 해치우고서. 그 중 하나는 데이비드 스토브의 <다윈의 동화>(영림카디널, 2008)에 대한 리뷰를 옮겨놓는 것이다. 책이 나온 건 두 주쯤 됐고 내가 책을 눈에 띄자 마자 '비종교인의 진화론 비판'이란 특이성 때문에 구입해놓은 지도 그 정도 됐지만 그간에 마땅한 리뷰를 읽어보지 못했다. 아래 리뷰는 우연찮게도 며칠전 도서관에서 원서를 대출해온 날 읽은 것이다. 옮겨놓고 몇 마디 보탠다.

한겨레21(08. 04. 24) 진화론, 인간에 대한 명예훼손

“유기체의 모든 개체군에서는 언제나 변이가 존재했다. 이들 중 몇몇은 유전되고 그것의 소유자에게 유익하다. 그리고 먹이 공급에 대한 압력이 존재한다. 이것이 생존을 위한 동종 간의 지속적인 경쟁을 낳는다. 이 경쟁에서 경쟁자에 비해 유전적인 장점을 지니고 있는 유기체들이 자연적으로 선택될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선호되는 변이가 새로운 종이 되어 나타날 것이다.”

아시다시피다.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설파한 ‘진화론’의 정수다. 신심 깊은 독자들에겐 죄송한 얘기지만, 바야흐로 21세기다. 종교인들 중에도 성서 창세기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이 드물지 않다. 오스트레일리아 출신 철학자 데이비드 스토브가 쓴 <다윈의 동화>(신재일 옮김·영림카디널 펴냄)에 눈길이 가는 것도 이 때문이다.

1927년생인 저자가 1994년 생을 마감하기 직전에야 탈고했다는 이 책은 ‘과학’이란 외피를 두른 진화론, 그 ‘당연함’에 대한 비판적 에세이 11편을 묶은 사색의 기록이다. 스토브는 책 첫 문장부터 의도적인 ‘도발’을 감행한다. “이 책은 진화론을 반박하는 책이다. 내 목표는 다윈주의가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데 있다. 적어도 ‘우리 인간’에게는 진리가 아니라는 뜻이다.”

뒤늦게 ‘계몽의 시대’를 살아내느라 허덕이고 있다. ‘털 없는 유인원’이란 조소와 ‘이기적 유전자’라는 비난에도 아랑곳없이 ‘다윈주의자’를 자처한다. <다윈의 동화>는 이런 ‘지적 무기력’을 겨냥한 ‘우상 파괴’ 시도다. 창조론자의 억지가 아니냐고? ‘신앙고백’이라도 하듯 그는 서둘러 이렇게 썼다.

“나는 창조론자가 아니며, 기독교도는 더더욱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언급해야겠다. 사실 내게는 종교가 없다. 내가 속한 종이 육지 포유동물에 속한다는 것은 진화론자들과 마찬가지로 내게도 아주 명백해 보인다. 그리고 우리 종이 다른 동물로부터 진화해왔다는 사실 역시 진화론자들과 마찬가지로 내게도 아주 그럴듯해 보인다.”

스토브는 자연선택이 ‘과거의 종에서 새로운 종이 생겨나게 하는 주된 원인’이라는 다윈의 주장을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자연선택이 ‘현재’ 인간에게서 ‘진행 중’임을 부인한다. 그리고 자연선택이 과거의 인간에게서 일어났었다는 것도 부인한다. 그가 내세운 ‘비판의 무기’는 딱히 특별할 게 없다. 진화론이 옳다면 모든 종이 생존을 위해 무자비한 경쟁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데, 이타적인 행동을 곧잘 하는 인간의 삶은 그렇지 않다는 게 “너무나도 명백하다”는 게다. 무엇보다 스토브는 인간을 “토끼나 파리, 대구나 소나무”처럼 취급하는 것에 분노한다. “유전자라고 알려진 이기적인 분자를 보존하기 위해 맹목적으로 프로그램된 로봇 운반수단”이라는 식의 주장은 그에게 ‘인간에 대한 우스꽝스런 명예훼손’일 뿐이다.

“18세기 후반 프랑스 계몽주의의 독창적이고 전형적인 생각”이었던 초기 진화론은 자연스레 왕정 폐지와 공화주의란 ‘혁명적’인 사상과 맞물렸다. 이 때문에 다윈은 “진화론이 지니고 있는 ‘무신앙’과 ‘혁명’이라는 원초적인 모체에서 진화론을 떼어놓기 위해” 고민했다고 스토브는 지적한다. 어떻게? “<종의 기원>에서 가장 흥미로운 종인 인간의 기원에 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아주 철저하고도 묘한 방법을 통해서”였다.

그럼에도 진화론은 “본질적으로 계몽주의의 지적 무기고에 들어 있는 요소”였다. ‘진화의 실마리’를 푼 논리를 제공해준 게 반계몽주의의 화신이었던 토머스 맬서스였다는 점은 그래서 지독한 역설이다. 스토브는 “인구는 주로 식량 획득의 어려움 때문에 제한된다는 맬서스(그리고 다윈)의 생각이 옮은 것이라면 영국은 아주 오래전에 귀족들의 국가가 되었을 것”이라고 지적한 ‘최초의 아나키스트’ 윌리엄 고드윈의 말에 손뼉 친다.

‘적자생존’을 지나치게 강조한 진화론자들이 자연스레 우생학으로 흘러간 역사에 대한 ‘경계’도 빼놓을 수 없다. “피임은 불가피하고 필연적인 생존경쟁을 억누르는 위협 중 하나”로 인식했던 다윈이 남긴 유산일 게다. 생의 황혼길에 ‘인간’이라는 ‘종’에 천착한 철학자의 치열함이 흐뭇하다. 그러니 이 책은 ‘한 인본주의자의 인간예찬론’으로 읽으면 족하겠다. ‘우리 시대의 에라스무스’라고나 할까.(정인환기자)

08. 04. 25.

P.S. 저자의 특이한 포지션은 종교인이나 지적 설계론자가 아니면서 다윈주의 진화론을 반박한다는 것인데, 어지간한 저자라면 그냥 지나쳤겠지만 데이비드 흄 전문가라는 저자의 철학자로서의 이력이 만만찮다. 게다가 마틴 가드너나 하비 맨스필드 같은 저명인사들이 추천사를 쓰고 있기에(서문은 로저 킴볼이 썼다) '이게 뭔가' 싶어서라도 책은 들춰보게 된다. 그리고 저자 서문 정도는 읽어봐야겠지.

그럴 계산으로 도서관에서 대출한 원서는 1995년판이다. 저자가 원고를 마무리하고 세상을 떠난 그 이듬해에 나온 것인데, 따져보면 저자 스토브 교수는 책의 출간을 못 본 게 아닌가 싶다. 이 95년판에는 저자 서문만이 붙어 있고 Avebury출판사의 철학 시리즈 중 한권으로 나온 것이어서 표지도 밋밋하다. 국역본은 95년판이 아닌 2006년판을 옮긴 것이고 킴볼의 서문은 이 책에만 붙어 있다. 여기서는 스토브의 서문만 읽어본다.

"이 책은 진화론을 반박하는 책이다. 다윈의 진화론과 다윈의 19세기 제자들은 물론이고 윌리엄스나 해밀턴과 같은 20세기의 영향력 있는 다윈주의자와 그 제자들 모두를 비판하는 책이다."

여기서 '윌리엄스'는 <적응과 자연선택>(1966)의 저자 '조지 윌리엄스'를 말하고, '해밀턴'은  '붉은 여왕' 이론의 대표적인 이론가 '윌리엄 해밀턴'을 가리킨다. 둘다 도킨스의 책에서 자주 거명되는 20세기 최고의 진화생물학자들이다. 스토브는 이 책에서 이들을 상대해주겠다는 것. 참고로 '붉은 여왕 이론'에 대한 설명을 과학평론가 이인식씨의 칼럼에서 옮겨놓는다. 

붉은 여왕 이론은 루이스 캐롤의 ‘거울 속의 세계’(1871)에 나오는 여왕의 이름에서 따온 명칭이다. 붉은 여왕은 앨리스 소녀의 손을 끌어당기며 빠른 속도로 내달린다. 그러나 그들이 제아무리 빨리 달릴지라도 항상 같은 장소에 머물게 된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앨리스에게 붉은 여왕은 “네가 같은 곳에 머물려면 지금처럼 전력을 다해서 달려야 한다. 그러나 만일 다른 곳으로 가기를 원한다면, 너는 적어도 지금보다 두배는 더 빨리 달리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말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생물이 기생생물과 싸울 때 무성생식으로 태어난 개체는 모두 동일하므로 만일 한 개체를 파괴할 수 있는 기생생물이 출현한다면 순식간에 다른 개체를 모두 정복할 수 있을 테지만, 유성생식으로 태어난 개체는 모두 다르기 때문에 한개의 열쇠로 모든 자물쇠를 열 수 없는 것처럼 기생생물이 다양한 개체를 효율적으로 공략할 수 없다. 요컨대 성은 모든 세대에 걸쳐 개체가 질병을 일으키는 기생생물의 공격을 방어하는 수단으로 개발한 전략무기이다. 대표적인 이론가는 영국의 윌리엄 해밀턴이다.(이인식, '성은 왜 존재하는가')

 

 

 

 

그렇다면 조지 윌리엄스와 윌리엄 해밀턴, 그리고 이들의 제자인 리처드 도킨스 같은 대표적인 진화생물학자들을 비판하고자 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내 목표는 다윈주의가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데 있다. 적어도 '우리 인간'에게는 진리가 아니라는 뜻이다. 다윈주의가 해면동물이나 뱀, 파리, 또는 다른 종의 경우엔 진리라고 할지라도, 또는 아주 진리에 가깝다고 할지라도 나는 개의치 않는다.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다윈주의가 인간에게 마치 진리인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관심을 갖는다'고 옮긴 동사는 'mind'이다. '내가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은'이라고 옮길 수 있겠다. 그러니까 스토브의 주장은 진화론이 다른 종의 생물들에겐 진리일지 모르지만 인간에겐 아니라는 것. 왜? 인간은 '동물'이 아니니까? 딱히 그런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내가 늘 말해왔듯이 나는 '창조론자'가 아니며 기독교도는 더더욱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언급해야겠다. 사실 내게는 종교가 없다. 내가 속한 종이 육지 포유동물에 속한다는 것은 진화론자들과 마찬가지로 내게도 아주 명백해 보인다. 그리고 우리 종이 다른 동물로부터 진화해 왔다는 사실 역시 진화론자들과 마찬가지로 내게도 아주 그럴듯해 보인다. 나는 자연선택이 과거의 종에서 새로운 종이 생겨나게 하는 주된 원인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자연선택이 '현재' 인간에게서 '진행중'임을 부인한다."

사실 진화는 장구한 '진화론적 시간'에 걸쳐서 일어나는 것인지라 '현재 진행중'이라는 사실이 감지될 수 없고 따라서 스토브의 주장에 일리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의 입장은 자신이 확증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 신뢰할 수 없다는 것처럼 보인다. 거기에 "하지만 나는 어떻게 인간이 현재의 인간으로 나타나게 되었는지, 또는 어떤 조상으로부터 진화해 왔는지에 대해서는 이 책에서 다루지 않을 것이다."라고 그는 못박고 있다. 그가 진화론 대신에 다른 어떤 이론을 제안하려는 게 결코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단지 그는 진화론이 '현재에 우리 종에 대해 잘못 그려준 초상화에 바보처럼 속지 않'겠다는 결심을 다질 따름이다(그러니까 대안을 내세울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가 그의 포지션이다). 그리고 유의할 대목.

"내가 진화론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은 여기서 밝혀야겠다. 나는 생물학자가 아니라 철학자이다. 다만 우연히 40여 년 동안 진화론 문헌들을 접하며 인간에 대한 우스꽝스런 명예훼손에 강한 반감을 지녀왔다. 물론 이것이 인간에 대한 진화론적 견해를 비판할 수 있는 이상적인 자격증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진화론은 현재 명확한 과학의 한 분야이다. 그래서 이방인이 그것을 비판하면 자격이 없다는 소리를 듣게 마련이다." 

진화론을 비판하려는 자신의 '자격' 문제를 거론하고 있는 대목인데, 유의해야 한다고 한 건 강조한 문장들의 국역본 번역이 거꾸로 돼 있기 때문이다. 스트보가 말하고 있는 건 국역본대로라면 (1)나는 진화론 전문가가 아니다. 생물학자가 아니라 철학자니까. (2)다만 오랜동안 진화론 문헌들을 읽으며 반감을 가져왔다. (3)진화론은 명확한 과학의 한 분야다. (4)따라서 이방인(문외한)의 비판은 자격에 대한 시비를 듣게 된다, 가 될 터인데, 이건 '자멸적인' 논리 아닌가? "나는 진화론을 비판하지만 생물학의 문외한이다. 통상 문외한은 비판의 자격이 없다."라는 얘기니까.

그럴 리는 없는 노릇이고 원문은 이렇다: "But on the other hand, Darwinism is not yet so arcane  a branch of science that criticism of it by an outsider can be automatically assumed to be incompetent." 다시 옮기면,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다윈주의는 문외한의 비판이 곧장 자격미달로 간주될 만큼 비밀스런 과학의 한 갈래가 아직 아니다." 그의 주장은 진화론(다윈주의)이 아직 전문화되고 성역화된 과학으로서의 권위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문외한이더라도 시비를 제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모두 11편의 '에세이'를 담고 있는 이 책 <다윈의 동화>의 기본 전제이자 출발점이다. 

일견 별로 가망이 없어 보이는 '시도'이긴 한데, 한편으론 그가 어디까지 가는 것인지 궁금하기도 하다. 게다가 명예훼손이란 '사실 혹은 허위사실로 당사자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에 모두 적용된다고 하니까, 설사 진화론이 진리라 하더라도 명예훼손죄는 피하지 못하겠다. 해서 "진화론은 유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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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08-04-26 02:34   좋아요 0 | URL

매우 유익하고 알찬 핵심 논평, 정말 잘 읽었습니다. 과학적 논점이나 철학적 쟁점에 대해 “문외한(outsider)”이더라도, 얼마든지 시비를 제기할 수 있다는 얘기가 새삼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는군요.

만약 이런 이방인 비판이 가능하지 않거나, 외부 비판을 금기시하는 풍토라면, 진화론에서 말하는 근친혼이나 근친교배 · 근친상간의 폐해를 가져올 위험이 매우 높으리라 생각합니다. 문외한적 비판에 관한 자격 문제를 언급하는 데이비드 스토브(David Stove) 역시 분명 이런 맥락의 함축을 고려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데이비드 스토브가 『다윈의 동화 Darwinian Fairytales』에서 깔고 있는 “문외한적인 다윈주의 비판”의 기본전제이자 출발점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진화론의 과학적 논리를 옹호하는 것으로 낙착되는 것 같습니다.

결국, 인간에 대한 다윈주의적 견해를 비판하고자 했던 데이비드 스토브의 비판 논리는 역으로 다윈주의의 유효성을 더 강화하는 것이 아닐까요? 진화론 비판이든 옹호든 결국은 모두 진화론의 과학적 타당성을 강화하고 입증하는 데 어떻게든 기여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다음 말도 가능할 듯합니다.

“진화론은 인간에 대한 증언이다.”




로쟈 2008-04-26 09:02   좋아요 0 | URL
"결국, 인간에 대한 다윈주의적 견해를 비판하고자 했던 데이비드 스토브의 비판 논리는 역으로 다윈주의의 유효성을 더 강화하는 것이 아닐까요?" 결국 그런 것인지는 마저 읽어봐야 알겠습니다.^^

kimdan 2008-04-26 01:51   좋아요 0 | URL
"Darwinism is not yet so arcane a branch of science that criticism of it by an outsider can be automatically assumed to be incompetent." 이 문장 굉장히 (생물학도로서) 불편하네요. ㅠㅠㅠ 그렇다고 로쟈님의 서재에서 진화론은 이러이러하다라고 일방적인 강의(!)를 할 수는 없으니 그냥 이 정도에서 마치겠습니다. 하하.

로쟈 2008-04-26 09:01   좋아요 0 | URL
스토브의 입장은 진화론이 아직 엄밀한 과학은 아니라는 것 같은데, 논란의 여지가 있는 주장입니다(생물학자들은 코웃음칠 만한). 대신에 제가 동의할 수 있는 건 진화론이 '명예훼손'이라는 주장입니다. kimdan님도 '불편한' 책을 한번 읽어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공부에는 적들이 친구들보다 유익하니까요.^^

노이에자이트 2008-04-27 01:46   좋아요 0 | URL
보수적인 창조론 찬성자들이 적자생존론을 사회이론으로는 맞다고 여기고 기묘하게 동맹한 사실이 있는 걸 볼 때 인간의 조상론만 빼놓으면 근본주의자들도 다윈을 표절했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요.그것도 아전인수격으로...

로쟈 2008-04-27 18:45   좋아요 0 | URL
스토브는 창조론자는 아닙니다. 그 점이 다른 보수주의자들과의 차별점이라고 헐까요...

노이에자이트 2008-04-28 00:40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맘에 들어요.

로쟈 2008-04-28 09:49   좋아요 0 | UR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