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시사IN에 실린 리뷰를 옮겨놓는다. 최근의 (말 그대로) 시사적인 이슈와 관련하여 피터 싱어/조지 메이슨의 <죽음의 밥상>(산책자, 2008)을 읽고 적은 소감이다.

시사인(08. 05. 10) 도대체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

미국산 쇠고기 수입 전면개방에 대한 반대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안전성에 대한 보장이 미흡한 상태에서 성급하게 국민건강권과 검역 주권을 포기했다는 비판이다. 비록 미국소라 하더라도 광우병 발생 확률은 극히 낮은 수준이라는 반론도 있지만 고기만 먹는 것이 아니라 뼈까지 고아서 먹는 한국 식문화의 특성 때문에 광우병 감염에 대한 우려는 쉽게 해소되지 않을 전망이다. 때문에 “과연 미국산 쇠고기를 먹어도 좋은가?” 하는 것이 우리의 새로운 근심거리가 됐다. 그런 근심의 연장선상에서 아예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도 있겠다. “도대체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 호주 출신의 세계적인 실천윤리학자 피터 싱어가 농부이자 변호사인 짐 메이슨과 같이 쓴 <죽음의 밥상>(산책자 펴냄)에서 던지는 좀더 근본적인 물음이다.  

이미 싱어는 <동물해방>(1975)에서 ‘인간 동물(human animal)’이 ‘인간이 아닌 동물들(nonhuman animals)’에 대해 갖고 있는 오랜 편견과 독단적인 차별을 비판한 바 있다. 그는 그런 태도를 ‘종차별주의’라고 불렀다. 종차별이라고? 인간의 역사가 인종차별과 성차별의 굴레에서 해방되어온 역사라면 이제는 종차별, 곧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차별’의 철폐와 극복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볼 때라는 것이다. 싱어도 지적하는 것이지만, 사실 영국에서 메리 울스톤크래프트가 <여성의 권리옹호>(1792)를 통해서 남성과 동등한 여성의 권리를 요구한 것이 불과 두 세기 전이다. 지금은 너무도 당연한 듯 보이는 이 요구는, 하지만 당시엔 많은 반발과 조롱을 불러일으켰다. 저명한 남성 철학자가 <짐승의 권리옹호>라고 패러디했을 정도다.

‘동물의 권리옹호’를 주창하는 싱어는 한때 자연스러운 것으로 간주됐던, 여성에 대한 차별이 지금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것처럼 동물에 대한 차별 또한 결코 정당화될 수 없으며 윤리적이지 않다고 말한다. 그가 주된 근거로 내세우는 것은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다. 만약 동물들도 우리와 똑같이 고통을 느낄 수 있다면, 우리가 그 고통을 무시하는 것은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만큼이나 윤리적으로 정당화하기 어렵다는 것이 그의 견해이다.     

‘전형적인 현대식 식단’과 ‘양심적인 잡식주의자’, 그리고 ‘완전채식주의자들’로 분류된 세 가족의 ‘밥상’을 따라가면서 먹을거리의 선택에서 우리가 어떤 윤리적 선택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는 <죽음의 밥상>에서도 저자들의 출발점은 동일하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동물성 단백질의 주요 공급원으로 삼고 있는 닭, 돼지, 소 등의 ‘권리’와 ‘복지’를 고려해야 할 필요성은 그들의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서 나온다. 즉 닭들이 우리 생각보다 똑똑한가 아닌가는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윤리적으로 정말 중요한 문제는 닭이 얼마나 똑똑한지가 아니라 닭이 고통을 느낄 수 있느냐이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고통을 경험할 수 있다면, 불필요한 고통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것, 그것이 우리가 동의할 수 있는 윤리적 태도이다.

하지만 윤리보다는 비용과 편리가 우선적으로 고려되는 현실은 비정하며 잔혹하다. 도살할 때 돼지의 고통을 줄이는 일에 인센티브를 주어지지 않는 한 양돈업자들은 돼지의 고통을 던다고 쓸데없는 비용을 낭비하지 않는다. 소들은 사육장에 도착하자마자 근육강화제에 해당하는 합성 호르몬 임플란트를 이식받으며, 초식동물이지만 목초 대신에 항생제가 잔뜩 들어간 옥수숫대를 먹는다. 심지어는 광우병을 유발한 양의 골분(骨粉)까지도 먹는다. 그리고 저렴한 육류에 대한 소비자의 선택은 이러한 비인도적 공장식 사육의 논리와 비윤리를 묵인하며 지속시킨다. 먹을거리에 대한 우리의 선택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남이 무얼 먹거나 말거나 무슨 참견인가 싶겠지만, 무얼 먹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보다 더 양심적일 수도 있고 덜 양심적일 수도 있다. 단적으로 말해서, 무엇을 먹느냐는 식성의 문제가 아니라 윤리의 문제이다. 저자들의 인용에 따르면, 간디는 어떤 나라의 위대함과 도덕적 발전 정도는 그 나라에서 동물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달렸다고 말했다. 개인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08. 05. 07.

P.S. '당신은 이제 죽음의 식탁앞에 앉는다'를 타이틀로 한 시사인의 이번주 특집기사는 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89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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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영화,드라마] 고통스럽게 사는것과 고통없이 죽는것. 행복한 엠마,행복한 돼지 그리고 남자(Emma's Bliss, Emmas Glück, 2006)
    from 월풍도원(月風道院) - Delight on the Simple Life. 2010-07-29 15:19 
    이미지출처 : tmrw.tistory.com 농장에서 혼자 가축들을 기르며 사는 여자와 췌장암에 걸린 남자가 주인공이다. 암에 걸린 남자는 말기라,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함께 일한 친구의 비자금을 훔쳐서 마지막 여행을 가려고 한다. 하지만 친구한테 걸려서 도망가던중에 차가 여자가 사는 농장으로 추락하게 되고… 엠마와 막스. 둘은 이렇게 우연히 만나서, 서로 다른부분에 대해 갈등도 가지지만,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비로그인 2008-05-07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희노애락의 감정을 명백히 갖고 있으며,
더불어 어린 아동 수준의 지능을 지닌 고등 동물을 죽여서 그 고기를 먹는 일에 관하여
깊이 생각해 봐야할 시점이 되었습니다..
저는 물론 고기를 즐겨 먹습니다만..


로쟈 2008-05-07 18:57   좋아요 0 | URL
싱어는 '지능'보다는 '고통'에 방점을 두고 있습니다. 지능이 모자란다고 사람을 차별할 수도 없으니까요.^^;

라주미힌 2008-05-07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식품'으로 태어난 생명체들에게 행해지는 인간의 '반윤리'적인 일들이 인간에게까지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할 텐데 말이죠... 쩝. 소, 닭, 돼지가 뭔 죄여... 때만 되면 대량학살이나 하고...

로쟈 2008-05-07 18:58   좋아요 0 | URL
사육하더라도 최소한의 '예의'는 있다고 봅니다...

드팀전 2008-05-07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채식주의자들을 존중하지만 윤리적,정치적 이유로 채식주의자가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더우기 때도 때이어서 그렇겠지만 낭만적 생태주의에는 반대합니다. 영화<행복한 엠마,행복한 돼지 그리고 남자> 중간 중간에 시골사는 엠마가 돼지를 평소처럼 산책가자고 안심시킨 후 살짝 목을 긋고 .."괜찮아..아프지 않지...1.2.3.."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도시에서 간 남자는 그 장면이 충격적이지요.비인간적으로 보이기도 할 겁니다.창졸간에 죽음이기에 그 유혹이 더 비윤리적으로 보이기도 하겠지요.

전 저를 포함한 도시인들이 그런 '낭만성'과 '생태주의'를 윤리적을 브랜딩하는 경향이 있다고 봅니다.한국인의 문화적 코드이기도 한 노자,장자의 자연주의까지 슬쩍 첨가해서 말이지요. 그런 경향이 계몽적 각성처럼 느껴지게 하는 '라이프 스타일화하는 트렌드 '는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소를 소로 키우지 않고 소고기로 키우는 것,닭을 닭으로 키우지 않고 닭고기로 키우는 것'에 대한 문제 제기는 윤리적 측면 뿐만이 아니라 근대적 농업 생산양식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전근대적 방식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지만-그런 상호관계적인 역사성을 탈취시키고 윤리문제로만 한정시키면-싱어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수용자가 낭만적으로 전유해버릴 수 있기때문에-또 다른 벽을 만나고 만다고 생각합니다..

로쟈 2008-05-07 22:33   좋아요 0 | URL
윤리적 이유로 채식주의에 반대하기는 어려울 듯싶은데요. 저도 채식주의자는 아니지만, 문제가 되는 건 육식 자체라기보다는 근대식/공장식 사육체제라고 해야겠습니다. 그게 '저렴하다'고는 하나 모두 사회적 비용으로 전가된 것이라는 게 싱어의 지적이고요(환경오염 등). 거기에 비하면 엠마의 돼지들은 매우 '인간적인' 대우를 받은 것이죠. 해서, 첫째 인도주의적 사육과 도축이 이루어져야 하고(고통을 최소화한다는 의미에서), 둘째 육식은 좀 줄여 나가야겠습니다(대부분의 경우 동물성 단백질을 과다섭취하고 있으니까요)...

군자란 2008-05-07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팀전 말씀에 공감합니다.무엇보다 노장사상이나 리프킨의 육식의 종말을 읽었던 사람들에게 누구에게나 그럴수 있는 현실과 유리된 생각으로 자신을 착각하는 경향이 있는것은 사실인것 같습니다. 저도 그럴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은 있지만 저의 집의 종량제 봉투를 채우는 3분의2이상이 비닐쓰레기이고 날마다 버려지는 음식물쓰레기를 보면서 어쩌면 제자신이 이 거대한 종말의 문화에 한쪽끝에서 어쩌지 못하고 죄의식만 쌓여가고 있습니다.충분히 걸어갈수 있는 길을 꼭 자동차를 이용하고,한주에 몇번의 육식을 해야 힘을 쓸것 같고...도대체 방법이 없습니다.

로쟈 2008-05-07 19:06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혼자만 자연주의 섭식 혹은 채식주의를 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고요, 현재의 공장식 사육의 문제점(광우병도 기본적으로 거기서 파생되는 문제니까요)에 대한 인식의 필요하고 개선해나가야겠다는 것이죠...

노이에자이트 2008-05-07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가인 존 쿳시도 동물 권리를 주장하던데요.

로쟈 2008-05-07 23:30   좋아요 0 | URL
그게 동양문화권의 생각과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유교에서는 인간과 동물을 엄밀히 구별하고, 불교에서는 모든 생명을 다 동급으로 치니까 그 '사이'(특정한 동물에 대한 권리옹호)가 낯설지 받아들여지는 듯해요...

소경 2008-05-08 0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싱어의 책을 읽다보니(주로 <동물해방>) 공장식 사육에 대한 폐해에 대해서 동물의 '고통'과 더불어 문제점이 대단하더군요(철분의 섭취를 막기 위해 햇볕에 노출을 막는다든지, 그로 인해 소는 자신의 분뇨를 통해 철분을 섭취하려 한다든지). 더불어 예전에 코를 먹아도 역겨운 오리 농가의 냄새에 기억이 나더군요(한켠으로는 X-파일의 광인육에 대한 에피소드도...).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고기를 먹지만.

걱정이 드는게, 미국의 소의 개방으로 오히려 공장식 사육방법이 도입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로쟈 2008-05-08 11:42   좋아요 0 | URL
이번주 시사인 특집을 참고하셔도 좋겠습니다. 공장식 사육은 우리도 하고 있습니다. 규모에서 차이가 좀 나지만...

노이에자이트 2008-05-09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80년대부터 농촌에선 가정집 뒤곁에서 돼지를 키우지 않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식용동물의 대량사육이 우리나라에도 시작된 시점이라고 봅니다.그 무렵 식용견 업자들이 덩치 큰 새 견종을 만들기 시작했구요.

로쟈 2008-05-11 11:22   좋아요 0 | URL
가내수공업제에서 공장제로의 전환이겠군요...

드팀전 2008-05-11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70년대 '녹색혁명'이라는 것,즉 보릿고개를 없애자라는 구호아래 시작된 농업혁명 부터 이미 공장식 사육제도는 도입된 것 아닐까 합니다. 그 후 담론은 공장식 사육제도의 위생문제였지 공장식 사육제도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지적은 한동안 없어왔지요. 당시에는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문제가 모든 성찰을 미루어 둘 수 있게끔 했을테니까요..

그런데 로쟈님이 '윤리적 이유로 채식주의를 반대하기 힘들다"라고 하셨느데 저는 그것에도 의문이 듭니다. 이 말은 채식주의가 윤리적으로 정합적이다라고 볼 수 있는데..전 그 지점에 대해 동의할 수 만은 없다는 생각인거죠. 잡식성이라는 인간의 존재조건 역시 문명화 과정에서 생긴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것이 이미 수 천 수 만년동안 지속되어 종의 특성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육식을 포함한 잡식성 조차 인간의 존재 조건이고 그것을 비윤리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물론 공장식 사육의 인위성에 대해서는 저 역시 비판하고 있지만 그것이 윤리의 문제와 연결시키는 일부 채식주의자들의 문제의식과는 좀 다른 선을 긋고 싶군요. 동물도 동물을 잡아먹지요..인간이 동물이라면 -최소한 식물은 아닐테니까-동물섭취 자체에대해서 윤리적 잣대를 긋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아...그리고 로쟈님은 전공하셧으니까..ㅆㅆ ...저 보수동 헌책방 골목에서 나보코프의 <어느 망명작가의 참인생>을 샀답니다.그 책 요즘 안나오은 거 맞지요? 호호호...원제목은 <세바스천 나이트의 참인생>이었지요.<청하>에서 나왔더군요..알라딘 검색에서는 아예 책 자체가 뜨지도 않던데..제가 잘 주워온거 맞지요.ㅆㅆ 개별 가격은 얼마였는지 모르지만 그날 산 책이 모두 5권에 2만 3천원이었으니까..몇 천 원 안했을거 같아요..ㅋㅋ

로쟈 2008-05-11 11:30   좋아요 0 | URL
가령 윤리적인 이유로 육식에 반대할 수는 있지만 채식에 반대하는 건(채식은 비윤리적이야) 어려운 일이 아닌가라는 것입니다. 잡식성 동물의 딜레마에 대해선 저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필요 이상의 육식이 자랑할 만한 것은 아니겠지요. '인간조건'이 비윤리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라고 하셨는데, 윤리라는 것 자체가 칸트나 사드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조건을 초과한다는 점에서) 비인간적인 것 아닐까요? 배가 고프지만 자기 빵을 남과 나누어먹는 걸 그래도 우리는 윤리적이라고 하지요. 동물도 동물을 잡아먹지만, 우리처럼 착취하면서 필요 이상으로 잡아먹지는 않지요. 저로선 육식 자체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게 아니고 현재의 (과다한)육식과 비인도적 사육/도축과정에 우리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얘기였습니다.

<어느 망명작가의 참인생>은 나름 재미있는 책입니다. 저도 긴 리포트를 쓴 적이 있지요(언젠가 서재에 옮겨놓았습니다).^^

드팀전 2008-05-11 23:20   좋아요 0 | URL
^^ 예. 저도 알고 있습니다.그리고 대량생산/소비에 의존하는 사육/도축 과정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저도 100% 동의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5-11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용소나 감옥처럼 가두어 대량사육하는 방식이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그 부작용이 요즘의 조류 인플루엔자나 광우병 아닐까요.

로쟈 2008-05-11 22:38   좋아요 0 | URL
다 자업자득이라고 해야겠지요. 온난화도 그렇고...

도다리맨 2009-08-29 0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팀전님께 질문이 있는데요. 인간이 잡식성 동물이 되었다는 것이 종의 특징이 되었다는 말씀을 하실 때 인간과 다른 동물에 대해서 특별히 층을 지어 구분하시지 않는걸로 보입니다. 즉 법이나 <인간끼리만> 소통되는 윤리가 들어갈 영역을 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즉 법이나 인간끼리의 윤리를 제외하고 단지 하나의 동물로서(다른 동물과 구별되지 않는다는 층위에서)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이것도 비윤리적이지 않을 수 있을까요? 로쟈님 생각도 듣고 싶네요
 

잠시 읽어보다가 어처구니가 없어서 기사를 옮겨온다(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60080504095610). 이번 '광우병' 사단을 불러일으킨 한미간의 합의문 내역에 대한 법학자의 해석인데, 그에 따르면 이번 협상 결과를 정부는 은폐했다. 그리고 그 핵심이란 건 '굴욕'이다. 이 해석에 대한 정부 차원의 정확한 해명이 듣고 싶다. 

프레시안(08. 05. 04) [송기호 칼럼] 국민이 몰랐던 네 가지 진실  

나폴레옹의 진짜 업적은 전쟁 승리보다는, 나폴레옹 법전(Code Napoleon)이라 할 수 있다. 그의 법전은 최초의 근대적 민법으로, 사유 재산제와 계약 자유를 담았다. 그리고 그의 법은 나폴레옹 자신의 말처럼 영원히 사라지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민법을 만들 때, 조문의 해석에 다툼의 소지가 전혀 없는 완벽한 법을 만들고 싶었다. 그는 완성된 법전에 만족하면서, 이 정도면 장차 어떤 프랑스인이 읽더라도 그 의미가 명확할 것이라며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하지만, 바로 그 다음날에, 파리에서는 그의 법률 조항의 의미를 놓고 해석론의 대립이 발생했다고 한다.
  
아무리 훌륭한 법이라도 그 해석에서 다툼이 있기 마련이다. 하물며, 서로 언어와 가치가 다른 나라 대 나라 사이의 합의문을 놓고 그 해석에 다툼이 없을 수 없다. 그래서 아예 1969년에, 유엔 회원국은 비엔나에 모여, '조약법에 관한 비엔나 협약'이라는 것을 만들어, 그 안에 국가 간의 합의문을 어떻게 해석할 지 그 원칙을 정해두기까지 했다. 여기서 합의된 일반 원칙은, "합의문의 문맥에 부여되는 통상적인 의미(ordinary meaning to be given to the terms of the treaty)"에 따라 해석한다는 것이다.
  
나라 간 합의문의 해석의 출발은 그 문항의 문언이다. 아무리 훌륭한 법률가라도 조문 없이 해석을 할 수는 없다. 그런데 정운천 농림부 장관은 지난 4월 18일 미국과의 쇠고기 광우병 검역 협상을 타결하면서도 합의문을 공개하지 않았다. 대신 보도 자료만을 냈다. 법률가가 합의문 문항을 보지 못하고, 보도 자료를 보고 그 의미를 새겨야 한다면 이는 불행한 일이다. 법률가에게 필요한 것은 조문이지 보도 자료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즉시, 미국과의 합의 내용을 정확히 해석하고자, 농림부 장관에게 합의문 영문본과 한글본 공개를 청구했다.


  
은폐 1 : 국제수역사무국 결정 없이 검역 주권 행사 못한다
나는 농림부 장관의 공개를 기다리면서, 보도 자료라도 읽었다. 그런데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보도 자료였다.  

미국 내에서 추가로 광우병이 추가로 발생할 경우 미국 측은 즉시 역학조사를 실시하고, 그 결과를 한국 정부에 통보하고 상호 협의키로 하였으며, 동 역학조사 결과가 미국의 광우병 위험에 대한 국제수역사무국의 광우병 위험 통제국 지위에 반하는 상황일 경우 수입을 전면 중단키로 하였음.


가슴이 꽉 막혔다. 알다시피, 한국은 세계무역기구(WTO)의 창설 회원국이다. 그리고 세계무역기구 위생검역협정(SPS 협정)이 보장하는 검역 주권을 누리고 있다. 특히 국제 검역법은 조류독감, 광우병 등과 같이 확실한 과학적 설명을 하기 어려운 전염병에 대하여, 관련 과학적 증거가 불충분한 경우라도 회원국이 잠정적으로 검역 조치를 취할 국제법적 권한을 주고 있다. 해당 조문을 간단히 소개하면 이렇다.
  

관련 과학적 증거가 충분하지 않은 경우, 회원국은 이용가능한 적절한 정보를 토대로 잠정적으로 위생 검역 조치를 취할 수 있다. (In cases where relevant scientific evidence is insufficient, a Member may provisionally adopt sanitary or phytosanitary measures on the basis of available pertinent information…) : 위생검역협정 5조 7항


만일 미국에서 광우병이 추가로 발생할 경우, 이는 일단 미국의 광우병 통제 정책의 실패를 의미한다. 미국에서 왜 광우병이 추가 발생했고, 그 위험성이 어느 정도인지를 과학적으로 정확히 판명하여 거기에 맞는 수준의 검역 조치를 취하자면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바로 위 조문은 이와 같이 관련 과학적 증거가 불충분할 경우라도, 그 시점에서 여러 이용 가능한 자료를 토대로 잠정적으로 검역 조치를 취할 권한을 한국에게 주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미국에서의 광우병 추가 발생을 급히 살펴보고, 필요한 경우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잠정 중단할 수 있다. 일단 그렇게 해 놓고 나서, 광우병 추가 발생에 대한 과학적 조사를 한 후, 심각하지 않은 사건으로 밝혀질 경우에는 다시 수입을 하면 된다. 이는 국제법이 보장한 한국의 검역 주권이다. 그리고 이는 농림부 장관의 고시인 '지정 검역물의 수입 금지 지역'에도 그대로 반영돼 있다. 이 고시는 악성 가축 전염병인 광우병이 발생할 우려가 있는 때에도 수입 금지 조치를 내릴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제5조(수입 금지 등) 농림부장관은 제3조 제1항의 수입 금지 지역으로 지정되지 아니한 지역에서 악성 가축 전염병이 발생하였거나 발생할 우려가 있는 때에는 법 제32조의 규정에 의하여 당해 지정 검역물의 수입을 금지하거나 법 제52조 제2항의 규정에 의하여 검역 중단·출고 중지 등 당해 병원체의 국내 유입 방지 조치를 취할 수 있다.


위 농림부 보도 자료는 한국이 국제법적으로 누리고 있는 잠정 조치 권한과 농림부 고시 규정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미국에서 오늘 광우병이 추가로 발생하더라도 한국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미국의 역학 조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미국산 쇠고기를 계속 수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 놀라운 일은 미국의 역학조사 결과가 나온 다음이다. 그 결과가 "미국의 광우병 위험에 대한 국제수역사무국의 광우병 위험 통제국 지위에 반하는 상황일 경우"가 아니면, 미국산 쇠고기를 계속 수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누가 무엇을 기준으로 위와 같은 "상황"인지 아닌지를 판단한단 말인가? 나는 도저히 그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농림부 장관의 합의문 영문본 공개를 기다리고 있었다. 뜻밖에도, 농림부 장관은 지난 4월 22일, 미국과의 합의 내용을 입법 예고를 했다. 이제 위 보도 자료는 이렇게 5항으로 조문화되어 있었다.
  

5. 미국에 광우병이 추가로 발생하는 경우, 미국 정부는 즉시 철저한 역학조사를 실시하여야 하고 조사 결과를 한국 정부에 알려야 한다. 미국 정부는 조사 내용에 대해 한국 정부와 협의한다. 추가 발생 사례로 인해 국제수역사무국의 미국 광우병 지위 분류에 부정적인 영향을 가져올 경우 한국 정부는 쇠고기와 쇠고기 제품의 수입을 중단할 것이다.


법률가의 눈으로 보았을 때, 이는 앞의 보도 자료와 다르다. 앞에서는 마치 미국의 역학조사 결과를 통보받은 한국이 마치 어떤 독자적 상황 판단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위 입법 예고안에서는 미국의 조사 결과는 조사 결과일 뿐이다. 닫혀 있다. 그리고 한국의 자주적 권한은 점점 사라진다. 아예 문장의 주어가 "추가 발생 사례"라고 하는 과거의 사건, 곧 한국이 개입할 수 없는 사건이 된다. 그리고 국제 기구의 지위 분류라는 사건에 한국이 개입할 여지도 없다.
  
나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애써 희망을 잃지 않으려고 위 조항을 다시 읽었다. 한국의 실낱같은 희망처럼 보이는 단어로 "부정적인 영향을 가져올 경우"를 새겼다. "영향"이란 말의 통상적인 의미는 "어떤 사물의 효과나 작용이 다른 것에 미치는 일"이다. 미국에서 광우병 추가 발생은 본질상 미국의 광우병 등급 지위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지 못하며, 부정적 영향을 줄 것이다. 그런데 누가 부정적 영향 여부를 결정할 것인가? 결국 내겐 합의문 영문본이 필요했다.
  
그런데 농림부 장관은 지난 28일에, 내게 통지를 했다. 아직 자구 수정이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영문본 공개를 거부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지난 22일에 그 한글본을 입법 예고를 할 수 있었을까? 결국 영문본을 보기 위해 농림부 장관을 제소하는 수밖에 없었다. 통상법을 한다는 법률가가 통상법 조문을 보려면 장관을 제소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 내게는 미국의 인터넷 사이트에 올라 온 합의문 영문본이 있다. 그래서 오늘은 이 영문본을 보고 해석하지만, 나는 소송에서 장관으로부터 당당히 영문본을 건네받을 것이다. 앞으로 통상법과 식품법을 하려는 후학들을 위해서라도, 꼭 그렇게 할 것이다. 마침내 영문 합의문의 문항을 보면서 해석의 궁금증은 모두 풀렸지만, 결론은 비참했다. 이렇게 되어 있었다.
  

5. In the event (an) additional case(s) of BSE occur(s) in the Untietd States, the US government shall immediately conduct a thorough epidemiological investigation and inform the Korean government of the results of the investigation. The U.S. government will consult with the Korean government about the findings of the investigation. The Korean government will suspend the importation of beef and beef products if the additional case(s) results in the OIE recognizing an adverse change in the classification of the U.S. BSE status. (미국에서 광우병 추가 사례(들)이 발생하는 경우, 미국 정부는 즉시 철저한 역학조사를 실시하여야 하고 조사 결과를 한국 정부에 알려야 한다. 미국 정부는 조사 사항에 대해 한국 정부와 협의한다. 미국 광우병 추가 발생 사례(들)이 국제수역사무국의 미국 광우병 지위 분류 '하향 변경(adverse change)' '공인(recognizing)'으로 귀결되는 경우 한국 정부는 쇠고기와 쇠고기 제품의 수입을 중단할 것이다.)


명확했다. 마치 나폴레옹이 만들려고 했던 민법처럼, 위 조항은 다른 해석의 여지가 없었다. 한국은 미국에서 광우병이 아무리 많이 발생하더라도 자주적으로 검역 주권을 행사할 수 없다. 모든 것은 농림부 장관이 그토록 사랑하는 국제수역사무국에 달려 있다.
  
영문본과 한글본을 대조하면서, 나는 농림부 장관의 능력을 재발견했다. 그는 영문 합의문에는 있는 "case(s)"의 복수 명사를 한글 보도 자료와 입법 예고안에서 제대로 번역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합의문의 "adverse change"를 한글에서는 "반하는 상황" 혹은 "부정적인 영향"으로 옮겼다. 아마도 농림부의 영어 사전에서는 "change"란 "상황" 혹은 "영향"이라고 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매우 유감스러운 것은 농림부 장관의 유능한 대가로, 한국은 WTO 회원국으로서 가지고 있는 잠정 조치 권한, 그러니까 국제법에 의하여 한국이 보유하고 있는 중요한 법적 권한을 포기했다. 이것은 헌법 위반 행위이다. 그 어떠한 장관도 국회의 동의 없이 주권의 제약을 가져오는 합의를 외국과 할 수는 없다.



  
은폐 2 : 미국 쇠고기의 월령 표시는 어떻게 되는가?
농림부 장관의 능력은 여기에 멈추지 않는다. 핵심적인 부분에서, 그의 능력은 빠짐없이 발휘되었다. 쇠고기 월령 구분제를 보자. 30개월령이 넘은 쇠고기를 포장 상자에 표시하도록 하는 문제(Marking requirements for OTM meat)는 한국으로서는 검역의 실효성을 좌우하는 본질적 문제이다. 눈앞의 쇠고기나 등뼈만을 달랑 보고 그 나이를 판별할 수 있는 검역 공무원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무현 정부의 검역 기준에는 미국 정부의 검역 공무원은 쇠고기 수출 검역 증명서에 반드시 소의 월령이 30개월 미만임을 확인한다는 서명을 해야 했다(19조 1항). 그런데 농림부는 이 문제에 대하여 예의 그 보도 자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번 협상에서 주요한 쟁점으로 부각된 수출 검역 증명서상의 도축 소 월령 표시 여부와 관련해서는 개정된 수입 위생 조건 발효 후 180일간 등뼈가 정상적으로 포함되어 가공되는 티-본 스테이크 수출품 등에 한해 해당 쇠고기가 30개월령 이하임을 표기하고 180일 이후 계속 표시 여부에 대해 추가 협의키로 하였음….


이 보도 자료가 우리에게 정말로 말하려고 하는 것은 무엇이었나? 미국 검역 공무원이 발행하는 수출 검역 증명서에, 도축소의 월령 표시를 하지 않기로 한국이 합의해 주었다는 것이다. 미국 공무원이 수출 검역 증명서에 기재해야 할 사항에서 소 월령 표시는 삭제되었다(합의문 22조 1항). 이로써 미국 정부는 개개의 쇠고기 제품에 대한 월령 보장 책임에서 벗어났다. 미국 도축장의 입장에서는 한국으로 선적되는 제품에 대해 미국 정부로부터 쇠고기 월령 확인을 받아야 하는 번거로운 절차가 사라졌다.
  
나의 해석이 맞는다면, 앞으로 한국의 검역 공무원은 초능력자가 돼야 한다. 노무현 정부 때 그는 쇠고기 상자에서 뼈와 살을 구별하면 되었다. 소의 나이는 미국 공무원이 보장해 주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보이지 않는 미국 도축업자를 직접 상대해야 한다. 눈앞의 등뼈가 실은 30개월령이 넘는 소의 광우병 위험 부위인데도 미국 도축업자가 그만 나이를 잘못 감별하는 바람에 한국으로 불법 수출된 것은 아닌지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을 보고? 나의 해석대로라면 단지 그 등뼈만을 보고.
  
그래서 미국 도축장을 직접 철저 현지 점검하시겠다고? 불가능하다. 첫째, 노무현 정부의 기준에서는 한국이 개별 승인해 준 도축장만이 한국으로 쇠고기를 수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미국 농무부의 검사를 받는 모든 도축장이 자격이 있다. 둘째, 노무현 정부 시절의 기준에서는 한국 검역관은 모든 미국 도축장에 대해 현지 점검 권한을 가졌다. 그리고 중대한 위반을 적발해서 해당 작업장에서 한국으로의 수출 작업이 중단되도록 요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대표성 있는 표본에 대해서만 현지 점검을 할 수 있다. 한국이 도축장에서 중대한 위반을 적발하더라도 그 결과를 미국정부에 통보할 수 있을 뿐이다(8항). 이 표본에 포함되지 않으면, 미국의 도축장은 한 차례 정도의 심각한 위반을 저질러도 한국의 현지 점검 대상에 들어가지도 않는다(24항).


  
은폐 3 : 한국은 미국산 쇠고기 전수 검사를 할 수 없다
더 놀라운 것은 한국은 미국산 쇠고기에 대해 전수 검역 검사를 할 권한을 정면으로 포기했다(는 점이다). 물론 연간 약 2억3000만㎏ 의 미국산 쇠고기 선적 물량을 전수 검사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특별 점검 대상이 되는 도축장의 제품이라든지, 혹은 특정 상황에서는 전수 검사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합의문 영문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23. If an SRM is found, FSIS will conduct an investigation to determine the cause of the problem. Product produced by the pertinent meat establishment shall continue to be eligible for import quarantine inspection. However, the Korean government will increase the rate of inspection of subsequent beef and beef products from the meat establishment. After the Korean government inspects five lots of equal or greater quantity of the same product without finding a food-safety hazard, the Korean government shall apply its standard inspection procedures and rates.(광우병 특정 위험 부위가 발견될 경우, 미국 식품안전검사국은 그 원인을 판정하기 위한 조사를 진행할 것이다. 해당 도축장에서 생산된 제품은 한국의 수입 검역 검사를 받을 자격을 계속 가져야 한다. 단, 한국 정부는 해당 도축장의 향후 쇠고기 및 쇠고기 제품에 대한 검사 비율을 높일 것이다. 동등 혹은 그 이상의 수량인 동일 제품 5개 수입분에 대해 한국 정부가 검사를 한 후, 식품 안전 위해 요인을 발견하지 못할 경우, 한국 정부는 표준 검사 절차와 비율을 적용해야 한다.)


이 조항이 존재하는 한, 한국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 검사에서는 표준 검사 비율을 적용해야 한다. 즉 전수 검사는 안 된다. 이렇게 새기지 않는다면, 이 조항은 존재 의의를 잃는다. 왜냐하면, 눈으로 보다시피 광우병 위험 특정 부위가 발견된 경우라 해도, 한국은 그저 검사 비율을 높일 수 있을 뿐이고, 그것도 5회 검사 합격이면 그 비율을 다시 내려야만 하도록 되어 있는데, 이런 조항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전수 검사를 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해석하는 것은 국제법의 조약 해석 원칙에 어긋난다. 조약을 해석하는 데에서, 어느 조약 문구를 무의미하게 하는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국제법상 인정되지 않는다(effective interpretation principle).
  
농림부 장관의 능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합의문 시행 후 180일이 지나면, 한국의 소비자는 눈앞의 갈비 스테이크(티본 스테이크)만 보고, 그 월령을 구별할 능력을 지녀야 한다. 앞에서 보았던 보도 자료는 마치 180일 이후 계속 표시 여부가 아직 확정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180일이 지나면 갈비 스테이크 월령 표시 제도는 폐지된다. 대신 한국과 미국의 협의가 시작될 뿐이다. 이 협의에서 미국은 자신에게 불리할 경우, 결코 갈비 스테이크 월령 표시 제도 부활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합의문 부칙 3항에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The Korean government and the U.S. government agree to have consultations upon the completion of the 180 day period with a view to addressing concerns after reviewing the notation's effect on beef trade and its inspection.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는 180일 기간이 다하면, 쇠고기 교역과 검사에 미치는 표시의 영향을 검토한 다음, 관심사항을 해결하기 위해 협의를 진행하기로 합의하였다.) : 부칙 3항


은폐 4 : 미국에서는 '주저앉는 소' 등의 뇌, 척수를 동물 사료로 사용한다
  
글이 길어지지만, 마지막으로 농림부의 노력이 얼마나 핵심적 주제를 대상으로 일관되게 진행되는 지를 확인하자. 농림부는 지난 2일, 그러니까 기자들과의 이른바 끝장 토론에서 미국의 이른바 강화된 사료 조치를 놓고 '미국산 쇠고기 안전성 관련 문답 자료'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모든 광우병 감염 소, 30개월 이상 된 소에서 광우병 위험 물질이 있을 수 있는 뇌나 척수를 제거하도록 하였고, 30개월 미만 소라 하더라도 도축 검사에 합격하지 못한 소의 경우 돼지 사료용으로 사용을 금지하고 있어 사료로 인한 광우병 추가 감염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임(2면).


그러나 나는 미국의 사료 조치에 대해 달리 해석한다. 미국의 사료 조치는 '주저앉는 소'와 같이, 사람의 식용을 위한 도축 검사에 합격하지 못해 식용 부적합 처리된 소라도 30개월이 되지 않는 경우에는 그 뇌와 척수마저도 동물 사료로 급여하도록 하는, 그런 것이다. 그 원문은 이렇다(73FR22720).
  

The FDA is amending the agency's regulations to prohibit the use of certain cattle origin materials in the food or feed of all animals. These materials include the following: The entire carcass of bovine spongiform encephalopaty(BSE)-positive cattle; the brains and spinal cords from cattle 30 months of age and older; the entire carcass of cattle not inspected and passed for human consumption that are 30 months of age or older from which brains and spinal cords were not removed; tallow that is derived from BSE-positive cattle; tallow that is derived from other materials prohibited by this rule that contains more than 0.15 percent insoluble impurities; and mechanically separated beef that is derived from the materials prohibited by this rule. These measures will further strengthen existing safeguards against BSE. (미국 식약청은 소에서 나온 특정의 물질을 모든 동물 사료로 급여하는 것을 금지하도록 규정을 개정한다. 이 사료 급여 금지 물질에는 다음이 포함된다. 광우병 감염 소의 전체 부위, 30개월령이 넘은 소의 뇌와 척수, 30개월령이 넘는 소로서 도축 검사에 합격하지 못해 식용 부적합 처리된 소에서 뇌와 척수를 제거하지 않은 경우 그 소의 전체 부위, 광우병 감염 소에서 나온 우지, 이 규정에서 금지 물질로 정한 것에서 나온 우지로서 불용성 불순물 함유가 0.15% 이상인 것, 그리고 이 규정에서 금지 물질로 정한 것에서 나온 기계적 분리육. 이러한 조치는 현행 광우병 안전 조치를 더 강화시켜 줄 것이다.)


이를 두고, 농림부는 "30개월 미만 소라 하더라도 도축 검사에 합격하지 못한 소의 경우 돼지 사료용으로 사용을 금지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바로 이 문제에 대하여, 미 식약청은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73FR22733).
  

Further, the regulations were revised to exclude from the definition of CMPAF certain cattle that have not been inspected and passed for human consumption. Under the proposed rule, cattle that were not inspected and passed for human consumption were excluded from the definition of CMPAF if their brains and spinal cords were removed. The final rule was revised to indicate such cattle are not considered CMPAF if the animals were shown to be less than 30 months of age, regardless of whether the brain and spinal cord have been removed. (또 당해 규정은 도축 검사에 합격하지 못해 식용 부적합 처리된 특정 소를 사료 급여 금지 물질의 정의에서 제외하도록 개정되었다. 종래의 입법 예고에서는 도축 검사에 합격하지 못해 식용 부적합 처리된 소는 그 뇌와 척수가 제거되어야 사료 급여 금지 물질의 정의에서 제외했었다. 본 최종 규정에서는 그런 소라도 뇌와 척수의 제거를 불문하고 30개월령 미만인 경우에는 사료 금지 물질로 보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이를 개정한다.)


나폴레옹이 그랬던 것처럼, 모든 조항에 항상 유일한 해석을 요구하는 것은 실패한다. 나의 해석이 틀릴 수 있다. 그러나 내가 학자적 소신으로 문언적으로 살펴보았을 땐, 이건 굴욕의 합의문이다. 그리고 핵심적인 굴욕은 은폐되었다.(송기호/변호사·조선대법대 겸임교수)

08. 05. 04.

P.S. 프레시안의 후속기사로는 진중권의 '대중은 무엇에 분노하는가?'(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4008050512432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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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ead Cow Walking
    from 암흑의마법에서정의의칼로 2008-05-05 11:52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를 생각합니다. 예전처럼 어려운 용어들, 특히 확률, 유전자, 통계 용어가 난무하고, 금방 이에 익숙해져 이를 구사하게 되었습니다. 석유로 만든 물건들이 넘쳐나는 시대지만 주변에 소/돼지로 만든 물건과 음식 또한 아직도 다양하다는 지식도 새삼스레 알게 되었습니다. 국민(투표권을 갖지 못한 유아, 어린이, 미성년자를 포함함), (검역)주권, 정치(탄핵)라는 추상용어가 쇠고기라는 상품 속에 담겨진 '돈'과 '과학'그리고 '미국'이..
 
 
yoonakim 2008-05-04 23:11   좋아요 0 | URL
소고기 먹고 광우병으로 죽는거보다 속이 터져서 먼저 죽겠음돠!

로쟈 2008-05-05 16:56   좋아요 0 | URL
당분간 뉴스를 끊으셔야겠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5-04 23:24   좋아요 0 | URL
야...내용이 어렵네요.두 번 째 읽고 있습니다.그런데 이번 협상에 참여한 한국대표단들이 부른 노래가 <다 줄거야>라는 소문이...

로쟈 2008-05-05 16:50   좋아요 0 | URL
근거 없는 거 같진 않습니다. 협상인지 접대인지...

Mephistopheles 2008-05-05 03:11   좋아요 0 | URL
혈압이....파바박....대체 무슨 생각으로 협상에 임했을까요??

로쟈 2008-05-05 16:49   좋아요 0 | URL
영어로 협상하느라 국적도 혼동한 모양입니다...

순오기 2008-05-05 13:10   좋아요 0 | URL
책임자들이 어떤 생각으로 협상에 임하는지 의문이군요. 개인이나 국가적인 자존심을 팽개쳐버린 인간들만 2MB정부에 있나 봐요.ㅠㅠ

로쟈 2008-05-05 16:49   좋아요 0 | URL
'국익' 개념이 일반 국민들과는 다른가 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5-05 22:03   좋아요 0 | URL
그런데 5번에서 adverse change가 뭔가요?

로쟈 2008-05-05 23:06   좋아요 0 | URL
'하향 변경'이란 뜻의 전문용어라면 '부정적인 영향'이란 농림부의 번역은 애매모호합니다. '전문가'가 없는 듯...

Koni 2008-05-05 22:44   좋아요 0 | URL
대체 이런 협상으로 우리나라 정부가 얻고자 했던 건 무엇입니까? 단체로 미치기라도 한건지...

로쟈 2008-05-05 23:07   좋아요 0 | URL
미국 정부의 '박수'겠지요...

노이에자이트 2008-05-05 23:12   좋아요 0 | URL
전문용어라 참 어렵군요.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은 실용을 표방하지만 이번 일로 보면 알겠지만 장사도 잘 못해요.그리고 굉장히 교조적인 이념에 얽매어 있어요.한미동맹을 너무 이념적으로만 접근하고 있어요.미국 외에 다른 나라를 섬기지 말라면서...

로쟈 2008-05-05 23:15   좋아요 0 | URL
거기가 원조 '하나님의 나라'라서 그런지도...

노이에자이트 2008-05-06 00:23   좋아요 0 | URL
근본주의,원리주의는 원래 미국의 보수적 개신교들이 성경해석하는 방법을 가리키는 말인데 자기들 보고 근본주의자라고 하면 되게 싫어해요.우리나라 근본주의 개신교는 한 술 더 뜹니다.
그런데 뉴욕 한인회의 성명서는 정말 가관...그 회장이 미국의 쇠고기 유통업자랍니다.

로쟈 2008-05-06 13:51   좋아요 0 | URL
그런 미국에서도 근본주의 교파는 많지 않은 걸로 아는데, 언젠가 보니 한국교회의 경우는 80%더군요...

짱구아빠 2008-05-06 17:49   좋아요 0 | URL
알라딘에서는 로쟈님 서재를 흄쳐보기만 했는데요,쇠고기 협상과 관련된 좀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자 님의 서재에 실린 글을 제 서재로 퍼담아 가도 괜찮을지요??

로쟈 2008-05-06 19:46   좋아요 0 | URL
저도 가져온 글들인데요, 뭐. 당연히 괜찮습니다.^^

L.SHIN 2008-05-06 18:10   좋아요 0 | URL
미쳐....
"숭례문이 불타거나 손실되면 차후 나라가 망한다" 라는 어떤 이의 역사 전력을
정리해 놓은 글을 읽었는데, 그게 자꾸 마음에 맴도는군요.
사신은 뭐하나~ 저것들 안 잡아가고. ㅡ.,ㅡ

로쟈 2008-05-06 19:47   좋아요 0 | URL
당초 미국 협상단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적극적으로 퍼준 것 같더군요.--;

노이에자이트 2008-05-07 00:42   좋아요 0 | URL
근본주의라는 교파 자체가 있는 게 아니랍니다.대충 뭉뚱그려서 보수적 복음주의라 하죠.여러 교파가 망라되어 있어요.간단히 말해서 성경 축자 영감설을 믿는 이들이죠.당연히 창조론 신봉자들이구요.
근데 오늘 뭐 끝장토론이라나 뭐라나 봤더니 역시 adverse change가 문제더군요.아...그런데 민동석 씨,그 사내 정말 베짱 두둑하고 말도 잘하더군요.눈을 부릅뜨고 기자들한테 한마디도 안 지고...어깨도 떡 벌어지고...

털세곰 2008-05-08 22:47   좋아요 0 | URL
이 소식 때문에 황금같던 저번주 연휴를 그냥 공쳤습니다. 비록 늦었지만 서둘렀으면 그래도 마감 조금 넘겨 접수시킬 수 있었던 원고도 있었는데...
그것 뿐 만은 아니지만, 정말 이명박은 대통령감은 결단코 네버 아니고, 나라 운영이란 그냥 빨리빨리 그해 보이는 실적만 내면 되고 이윤만 어떻해든지 많이 남기면 되는 '좀 더 큰 규모'의 회사 경영정도로 밖에 안 보는 것 같습니다.
이명박에 대해 저는 요즘 울컥울컥 <살의>를 느낍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5-09 00:18   좋아요 0 | URL
이윤도 잘 못 남기던데요.
 

외장이 화려하고 값도 어지간한 양서를 뛰어넘는 책들이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그런 만큼 양질의 책들이 출간되고 있는지는 의문인데, '외화내빈'의 책들이 드물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번역과 편집 등에서 발견되는 실수와 오류 들이 결코(!) 줄지 않는 것은 유감스러운데 이를 꼬집는 기사가 있어서 옮겨놓는다. 출판에서도 실수나 오류가 '관행'으로 굳어지는 걸 자주 경계할 필요가 있다(물론 사람이 저지르는 게 실수다. 문제는 '태만한' 실수이고 그런 실수의 '구조적인' 방조다). 어느 분야나 가만 앉아있어도 알아서 좋아지는 경우는 거의 없지 않은가.

경향신문(08. 05. 03) [책동네 산책] ‘책 만드는 장인정신’ 아쉽다

존 뮤어(1838~1914)는 미국 국립공원의 아버지로 불리는 환경주의자이자 자연주의 작가다. 지난주 나온 책 ‘나의 첫 여름’(사이언스북스)은 1869년 여름 요세미티 지역을 탐험한 경험을 기록한 책으로 미국 생태문학의 고전으로 칭송받는 작품이다.

호기심에 차서 책장을 넘겨보다가 의아스러운 대목이 눈에 띄었다. 옮긴이의 글에서다. 뮤어가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아이젠하워를 요세미티로 초청해 이틀간 야영을 같이한 후 아이젠하워가 백악관으로 돌아가 이 지역을 국립공원으로 선포하게 한 사실은 매우 잘 알려진 일화”라고 썼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으로 재임한 시기는 1953~61년. 뮤어가 타임머신을 타고 가지 않는 한 그를 만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단순한 실수’라고 보기에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출판사 측은 이 같은 내용을 그대로 담은 보도자료를 내놓았다. 인터넷서점의 책 소개에도 버젓이 올라있다. 허술한 교정·교열 문제는 새삼스러운 게 아니라지만 너무한다 싶었다. 게다가 상대는 국내 유수의 출판사인 민음사의 계열사 아닌가.

그런데 이런 일이 우연히 발생한, 예외적인 경우는 아닌 모양이다. 같은 주 나온 피터 드러커의 ‘경제인의 종말’(한국경제신문). 몇 장 펼치지도 않았는데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 나왔다. 이번에도 옮긴이 해설이다. “ ‘경제인의 종말’ 이후 드러커의 모든 저서들을 분석하고 예측한 것을 시간의 검증을 거쳐 ‘경제인의 종말’에서 다시 분석하고 예측하였다.” 솔직히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됐다. 그 앞 문장에 비슷한 문장이 있긴 했다. 담당편집자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최종교정을 편집장이 봤다며 바꿔준다. 그의 대답이다. “이런, 실수했네요. 앞 문장을 잘못 반복한 것 같습니다.”

이름깨나 날린다는 출판사들이 이 모양이니 무슨 말을 더 해야 할까. 사실 요즘 출간되는 책들 가운데는 과연 교정·교열을 꼼꼼하게 봤나 싶을 정도로 오·탈자와 비문이 심심찮게 발견된다. ‘오·탈자의 발견’은 책읽기의 일상적인 사건이 됐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한 도서평론가는 “이제 그런 일이 너무 많아서 그냥 포기하고 읽는다”고 씁쓸하게 말했다.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한 출판인은 “아주 구조적인 문제”라고 잘라 말했다. 출판사들이 ‘양’으로 승부를 내다보니 책을 ‘찍어내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서 책에 대한 ‘장인정신’은 뒷전이라는 것이다. 교정·교열 능력을 제대로 갖춘 유능한 편집자들이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지 못하는 출판계 시스템도 문제다. 요즘에는 교정·교열을 아예 외주로 돌리는 출판사도 많아서 편집자가 자신이 내놓는 책의 세부적인 내용을 모르는 사태까지 벌어지고 있다.



최근 문학과지성사가 내놓은 ‘한국문학선집 1900~2000’ 중 작가 김성동씨에 관한 해제에 심각한 오류가 발견된 사실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혹 이 사건이 한국 출판이 자초할 위기를 경고하는 ‘탄광 속의 카나리아’ 같은 게 아닐까. 화려한 장정과 디자인을 앞세운 한국 출판이 정작 속으로는 곪아가고 있다는.(김진우기자)

08. 05. 04.

P.S. 기자의 지적대로 부실한 편집/교정은 현행 출판시스템의 문제이다. 교정/편집자가 전문화되어야 하고 그에 걸맞은 대우가 보장되어야 하지만 현재의 시스템은 오히려 정반대로 가는 듯하다. 양적인 팽창이 질적인 내실을 동반하지 못하는 현실을 언제까지 방치해두어야 하는지 의문이다. 교정/편집의 부실은 사소한 경우라도 책에 대한 신뢰를 치명적으로 잠식하는 수가 있다. 최근의 경험을 들자면, <한나 아렌트의 정치이론과 정치철학>(삼우사, 2008)의 '감사의 글'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폴리티출판사 사람들, 특히 나의 편집자 존 톰슨, 길 모틀리, 데비 세이무어, 팜 토머스 그리고 제니퍼 스피크와 함께 일하는 기쁨을 가졌다. 어떤 저자도 훌륭한 출판인이 되고 싶어하지 않는다...

저자가 출판 편집자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는 상례적인 문구이다. 한데, "어떤 저자도 훌륭한 출판인이 되고 싶어하지 않는다"? 역자의 무지야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편집자는 이 대목을 어떻게 그냥 지나칠 수 있었을까? 그것도 책의 두번째 페이지인데(원서로 치면 첫페이지이다!). 이 문장은 "No author could wish a better publisher."를 옮긴 것이다. "어떤 저자도 이보다 더 좋은 출판사를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정도의 뜻 아닌가('publisher'는 '발행인'을 뜻하기도 한다). 물론 저자가 상찬하고 있는 건 폴리티출판사(Polity Press), 혹은 그 발행인이다. 그것이 어떻게 "어떤 저자도 훌륭한 출판인이 되고 싶어하지 않는다"로 번역되는 것인지는 미스터리다.   

사소한 한 문장이지만, 이런 대목은 저자/역자나 편집/출판인이 그다지 '훌륭하지 않다'는 걸 암시해준다. 미심쩍어하면서 더 읽어봤지만 아래 대목에 이르면 (역자의 노고에도 불구하고) 원서와 대조하지 않으면 독서의 의미가 없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나는 아렌트의 저작에 있어서 공적 삶과 정치적 생각함 사이의 결합 및 각자가 다른 사람을 아는 방식을 추적하려 한다."(17쪽)

"In this book, then, I attempt to trace out the connections in Arendt's work between public life and political thinking, and the ways in which each informs the other."(4쪽)

여기서 "the ways in which each informs the other"를 역자는 "각자가 다른 사람을 아는 방식"이라고 옮겼는데, 나로선 의외이다. 상식적으로 'each'는 바로 앞에 나오는 'public life'와 'political thinking'을 가리키는 것 아닌가? 저자가 이 책에서 따라가보고자 하는 것은 아렌트의 저작에서 (1)공적인 삶과 정치적 사유간의 관계, 그리고 (2)공적인 삶과 정치적 사유가 서로를 특징짓는 방식, 이다. 나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한다. 모처럼 소개된 무게 있는 연구서를 반갑게 손에 들 수 없는 건 울적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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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5-04 23:13   좋아요 0 | URL
제가 과외 가르쳤던 학생에게 했던 말...비교급에 부정문 나오는 것 제대로 해야해요.이거 하다가 영어포기하는 사람이 많아요...한나 아렌트 번역 오류를 보다가 갑자기 이 생각이 나네요.

로쟈 2008-05-05 16:59   좋아요 0 | URL
간혹 눈이 믿기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너무도 단순한 오역들이 창궐해서요...

turnleft 2008-05-05 06:41   좋아요 0 | URL
제 생각에는 번역자들이 초벌 번역을 컴퓨터 영한 번역 프로그램으로 돌리는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도 들더군요 -_-+
(제 전공이 컴퓨터공학인데 과 교수님이 개발한 영한 번역기가 있었어요. 거기서 "Time flies like arrow" 를 넣으면 "시간 파리들은 화살을 좋아한다"라고 결과가 나오더라는..;;)

로쟈 2008-05-05 17:00   좋아요 0 | URL
거의 그런 수준의 오역들이 너무 많습니다. 비상식적인...

드팀전 2008-05-05 09:29   좋아요 0 | URL
파하하...시간 파리..

로쟈 2008-05-05 17:00   좋아요 0 | URL
'시적인' 번역이죠...

노이에자이트 2008-05-05 21:59   좋아요 0 | URL
인도네시아를 지배한 폴란드...라고 해서(제프리 배러글러프:현대사의 성격 김봉호 역 삼성문화문고92번)이거 뭔 소리? 했는데 홀란드를 폴란드라고...그리고 리델 하트 전략론(신상초 번역)엔 캠페인이라는 단어가 하도 많이 나와서 이게 뭐야...했는데 군사영어에선 대규모 전투를 캠페인이라고 한다는 걸 알고 실소...아마 번역자는 캠페인은 침뱉지 말자...줄서자...그렇게만 알았던 모양이예요.

로쟈 2008-05-05 23:08   좋아요 0 | URL
'세르비아'를 '시베리아'로 옮기는 등 코믹한 경우들이 적지 않습니다. 시적이고 유머러스한 사례들이죠...

노이에자이트 2008-05-05 22:12   좋아요 0 | URL
아,,,그리고 문지사와 김성동 씨의 갈등은 지금 어떻게 되나요?

로쟈 2008-05-05 23:07   좋아요 0 | URL
보도로는 법정 분쟁에 들어간 상태로 보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5-06 00:29   좋아요 0 | URL
김성동 씨 성깔 있는데...제가 문단 뒷이야기...그런 류의 책을 즐겨 읽거든요.적나라한 것 좋아해서...예전에 유신시절 김성동 씨가 스님일 때 결혼식 하객으로 갔는데 주례사하는 김동리 씨가 내내 유신체제 찬양만 하길래 김성동 씨 왈...저러니 늙으면 죽어야지...

로쟈 2008-05-06 13:52   좋아요 0 | URL
ㅎㅎ 언젯적인가요!..

노이에자이트 2008-05-07 00:28   좋아요 0 | URL
만다라 쓰기 전이니까 70년대 중반에서 말 무렵이나 될까요? 우리나라 문인들 중 김동리 문하생들이 많잖아요.이문구 씨도 그렇고 박경리 씨도...그런데 김성동 씨 성향은 김동리 씨같은 강경한 반공하고는 안 맞죠.박헌영을 정통으로 보는 것 같아요.게다가 김동리 씨는 5공 때도 유명했잖아요.이병주 씨와 막상막하였죠.

로쟈 2008-05-07 23:27   좋아요 0 | URL
김동리 사단이라고 했지요. 박경리, 오정희 선생도 다 '문하'인데, 박완서 선생만 예외인가 싶은데요...

노이에자이트 2008-05-09 00:26   좋아요 0 | URL
서영은 씨도 빠질 수 없죠.손소희 씨 타계후 재혼상대였으니까요.제가 소장한 손소희 작품집엔 김동리 씨와 찍은 사진이 있어서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합니다.

로쟈 2008-05-09 11:05   좋아요 0 | URL
그러고 보니, 서영은씨는 요즘 작품활동이 뜸하시군요...

노이에자이트 2008-05-09 23:53   좋아요 0 | URL
글쎄요.아직은 작가로는 한창인데요...
 

고인의 1주기를 맞아 출간된 책들을 몇 권 주문할 생각이다. 그의 동화들은 '어린이날' 선물로 쓸 생각이고, 나는 <우리들의 하느님> 등을 읽어볼 작정이다. 이 참에 리스트를 만들어둔다. 동화의 경우 일부의 리스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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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생 - 동화나라에 사는 종지기 아저씨
이원준 지음 / 작은씨앗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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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생의 삶과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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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하느님- 권정생 산문집, 개정증보판
권정생 지음 / 녹색평론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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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토리 예배당 종지기 아저씨- 신정판
권정생 지음, 이철수 그림 / 분도출판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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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북리뷰에서 가장 인상적인 기사는 이번에 1주기를 맞는 권정생의 삶과 문학을 조명한 기사이다. 작년 5월 그의 죽음을 계기로 '권정생의 삶과 문학'(http://blog.aladin.co.kr/mramor/1119478)이란 페이퍼를 올려두기도 했는데, 어느새 1년이다. 비록 고인은 아프고 슬프고 외로운 삶을 살았지만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은 건 다행스럽다. 이달의 첫주문은 그의 책들로 할 작정이다. 

한겨레(08. 05. 03) 민들레 꽃씨로 돌아온 노란 그리움

이름 그대로 ‘정생’(正生)이었다. ‘바른 삶’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이름값을 다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바른 삶’을 ‘사랑하는 삶’이라고 고쳐 부를 수 있다면, 그 사랑은 자신이 닿을 수 없는 아득한 높이에 있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를 나는 알고 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라면 너무 어려워 도저히 사람을 사랑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특히 나와 같은 인간은 생전에 아무도 사랑해보지 못하고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단호한 겸손 때문에 그는 ‘사랑이라는 진리에 가장 가까이 간 정신’이었다. 오는 17일은 바로 그 정신이 하늘로 간 지 꼭 1년이 되는 날이다.


아동문학가 권정생(1937~2007) 타계 1주기에 즈음해 그를 기리는 책들이 한꺼번에 나왔다. 아동문학 평론가 원종찬 인하대 교수가 엮은 <권정생의 삶과 문학>은 ‘기림’의 뜻에 가장 충실한 책이다. 고인을 추억하는 시들을 앞세운 이 책은 권정생 연구를 위해 참고가 될 만한 평론과 회고글들을 가려 뽑았다. 그런가 하면 <권정생-동화나라에 사는 종지기 아저씨>는 어린이들이 읽기 좋게 쓴 전기다. 가난과 고난의 참담한 생애를 보낸 뒤 아름다운 작품만 남기고 병고의 몸을 벗어버리기까지 70년 삶이 단출하게 담겼다.

<우리들의 하느님>은 1996년에 나왔던 고인의 첫 산문집에 그 뒤 쓴 두 편의 글을 보태 펴낸 개정증보판이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은 “이제 우리는 더는 저 조탑리의 작고 어두운 골방으로부터 나오는 유례없이 부드럽고 간곡한, 그러면서도 더할 나위 없이 무서운 목소리를 듣는 행복을 누릴 수 없게 되었다”며 그 아쉬움을 조금이라도 달래려 이 증보판을 낸다고 책머리에 밝혔다. <랑랑별 때때롱>은 타계하기 넉 달 전에 연재를 마친 고인의 유작이다. <강아지 똥>에서부터 <몽실 언니>를 거쳐 40년 동안 이어진 권정생의 문학적 삶의 마침표에 해당하는 작품인 셈이다. 과학문명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생명에 대한 사랑임을 거듭 일깨우는 동화다.

권정생의 일생은 20세기의 모든 고통이 한데 집결한 것과도 같은 일생이었다. 부모는 먹고살려고 식민지를 떠나 제국의 수도 도쿄에서 밑바닥 삶을 살았다. 그 부모에게서 태어난 재일 조선인 2세가 어린 권정생에게 할당된 첫 번째 삶이었다. 1946년 귀국선을 타고 아버지의 고향 경북 안동으로 돌아왔으나, 해방된 조국이 안겨준 건 헐벗음과 굶주림뿐이었다. 하루 세끼 끼니를 때울 수 없었던 가족은 말 그대로 먹을 것을 찾아 안개처럼 이리저리 흘러다녔다. 한국전쟁 중에 가까스로 초등학교를 졸업한 권정생은 중학교에 갈 학비를 마련하려고 피란지 부산에서 점원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5년의 극빈 생활이 그에게 남겨준 것은 늑막염에 폐결핵뿐이었다. 스무 살 청년의 생기를 파먹고 들어앉은 결핵은 평생토록 숙주의 몸을 떠나지 않고 창궐했다.

집으로 돌아왔으나, 가난의 냄새가 코를 찌르는 집은 결핵 환자에게 힘이 되기는커녕 남은 기운마저 빼앗았다. 슬픔과 눈물이 꼬막만한 오두막을 넘쳐 흘렀다. 결핵균이 폐를 뚫고 신장과 방광까지 덮쳤다. 병에 곯은 청년에게 유일한 위안은 교회에서 듣는 말씀이었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고통의 나날 속에 살아 있는 주검 같은 몸을 지탱해준 것이 교회였다. 64년, 겪은 것이라곤 오직 굶주림과 막노동뿐이었던 어머니가 68년의 삶을 등졌다. 동생이라도 장가를 보내야 하는데 병든 형이 지키고 있으면 누가 시집오겠느냐는 아버지의 한숨에 권정생은 이듬해 집을 떠났다. 석 달 동안 풍찬노숙보다도 못한 유랑걸식을 했다. 밥을 빌어먹고 거적때기를 덮고 자는 병자-거지에게 그 석 달은 “가장 혹독한 밑바닥 생활”이었다. 그러나 정신은 여기서 더 푸르게 살아났으니, 그는 뒷날 이때를 돌이켜보며 “일생에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인생 체험”이었다고 썼다. “예수님의 40일간 금식 기도만큼 나에게 산 교훈을 일깨워준 기간이기도 했다.”(권정생, ‘오물덩이처럼 딩굴면서’)

아픈 몸으로 돌아와 보니 아버지가 몸져누웠다. 그해 겨울 아버지마저 영영 어머니 곁으로 떠났다. 결핵균이 홀로 남은 그 몸에 결정적 일격을 가했다. 신장 하나를 잘라내고 방광을 드러내는 대수술을 받았다. 의사는 남은 목숨이 2년이라고 했는데, 어쩐 일인지 2년이 지나고도 살아남았다. 죽음의 두려움을 잊으려고 몰두하기 시작한 것이 책 읽기와 글쓰기였다. 그 무렵 그는 이웃 일직교회 문간방에 종지기로 들어갔다. 새벽마다 종을 치고, 힘이 남으면 글을 썼다. 1969년 그의 첫 작품 <강아지 똥>이 제1회 기독교아동문학상 현상공모에 뽑혔다. 모두들 더럽다고 피하는 강아지 똥이 스스로 거름이 되어 민들레꽃을 피운다는 내용은 권정생 자신의 삶의 투영이었다. “‘돌이네 흰둥이가 누고 간 똥입니다’로 시작하는 이 짧은 동화는 한국 아동문학의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선을 그어놓았다.”(이현주, ‘동화작가 권정생과 강아지똥’)

82년 권정생은 16년 동안 살았던 교회 문간방을 떠나 작은 흙집으로 이사했다. 아픈 몸에서 활활 타오르는 창작열도 함께 흙집으로 이사했다. 84년 불후의 명작 <몽실 언니>가 태어났다. “절뚝거리며 걸을 때마다 몽실은 온몸이 기우뚱기우뚱했다. 그렇게 위태로운 걸음으로 몽실은 여태까지 걸어온 것이다. 불쌍한 동생들을 등에 업고 가파르고 메마른 고갯길을 넘고 또 넘어온 몽실이었다.”(권정생, <몽실 언니>) 다리를 절면서도 강인한 생명력으로 동생을 돌보는 몽실 언니는 둘로 나뉘어 불구가 된, 그러나 희망을 놓을 수 없는 한반도의 은유였다.

어린 것들, 아픈 것들을 언제나 애틋한 마음으로 감싸안았던 권정생은 이런 말을 남겼다. “역사는 잔인하지만 생명은 아름답다.” 그의 작품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나의 동화는 슬프다. 그러나 절대 절망적인 것은 없다.” 무소유라는 말이 외려 사치스러울 정도로 완전한 가난 속에 산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하루치 생활비 외에 넘치게 쓰는 것은 모두 부당한 것입니다. 내 몫 이상을 쓰는 것은 벌써 남의 것을 빼앗는 행위니까요.” 그는 생전에 인세로 들어온 돈을 꼬박꼬박 모아 모두 뒷세대에게 돌려주었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평생 모은 5000만원으로 옥수수를 사서 북한 어린이들에게 보내 달라는 것이었다.(고명섭기자)

권정생은 타계하기 2년 전, 그를 따르던 지인 정호경 신부의 권유로 유언장을 작성했다. 피고름 오줌을 쏟고 정신이 혼몽한 중에도 그는 자기 삶을 정리하는 글을 쓰면서 유머를 잃지 않았다. 그의 따뜻하고 겸허한 성품을 그대로 보여주는 유언장 전문을 싣는다.(고명섭기자)

유언장

내가 죽은 뒤에 다음 세 사람에게 부탁하노라.
1. 최완택 목사 민들레 교회
이 사람은 술을 마시고 돼지 죽통에 오줌을 눈 적은 있지만 심성이 착한 사람이다.
2. 정호경 신부 봉화군 명호면 비나리
이 사람은 잔소리가 심하지만 신부이고 정직하기 때문에 믿을 만하다.
3. 박연철 변호사
이 사람은 민주변호사로 알려졌지만 어려운 사람과 함께 살려고 애쓰는 보통사람이다. 우리 집에도 두세 번쯤 다녀갔다. 나는 대접 한 번 못했다.

위 세 사람은 내가 쓴 모든 저작물을 함께 잘 관리해 주기를 바란다. 내가 쓴 모든 책은 주로 어린이들이 사서 읽는 것이니 여기서 나오는 인세를 어린이에게 되돌려주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만약에 관리하기 귀찮으면 한겨레신문사에서 하고 있는 남북어린이 어깨동무에 맡기면 된다. 맡겨놓고 뒤에서 보살피면 될 것이다.

유언장이란 것은 아주 훌륭한 사람만 쓰는 줄 알았는데 나 같은 사람도 이렇게 유언을 한다는 게 쑥스럽다. 앞으로 언제 죽을지는 모르지만 좀 낭만적으로 죽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도 전에 우리 집 개가 죽었을 때처럼 헐떡헐떡거리다가 숨이 꼴깍 넘어가겠지. 눈은 감은 듯 뜬 듯 하고 입은 멍청하게 반쯤 벌리고 바보같이 죽을 것이다. 요즘 와서 화를 잘 내는 걸 보니 천사처럼 죽는 것은 글렀다고 본다. 그러니 숨이 지는 대로 화장을 해서 여기저기 뿌려주기 바란다.

유언장치고는 형식도 제대로 못 갖추고 횡설수설했지만 이건 나 권정생이 쓴 것이 분명하다. 죽으면 아픈 것도 슬픈 것도 외로운 것도 끝이다. 웃는 것도 화내는 것도. 그러니 용감하게 죽겠다. 만약에 죽은 뒤 다시 환생을 할 수 있다면 건강한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 태어나서 25살 때 22살이나 23살쯤 되는 아가씨와 연애를 하고 싶다. 벌벌 떨지 않고 잘할 것이다. 하지만 다시 환생했을 때도 세상엔 얼간이 같은 폭군 지도자가 있을 테고 여전히 전쟁을 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환생은 생각해 봐서 그만둘 수도 있다.

2005년 5월1일 쓴 사람 권정생

여기까지가 기사다(세상엔 아직 얼간이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권졍생의 '환생'은 물 건너간 게 아닌가 싶다). 다른 자료들을 둘러보다 보니 이후에 남긴 편지도 눈에 띈다. 아마도 그가 남긴 마지막 글이 아니었을까 싶다. 

정호경 신부님.

마지막 글입니다. 제가 숨이 지거든 각각 적어놓은 대로 부탁 드립니다. 제 시체는 아랫마을 이태희 군에게 맡겨 주십시오. 화장해서 해찬이와 함께 뒷 산에 뿌려 달라고 해 주십시오.

지금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3월 12일부터 갑자기 콩팥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뭉퉁한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계속되었습니다. 지난 날에도 가끔 피고물이 쏟아지고 늘 고통스러웠지만 이번에는 아주 다릅니다. 1초도 참기 힘들어 끝이 났으면 싶은데 그것도 마음대로 안됩니다. 하느님께 기도해 주세요. 제발 이 세상 너무도 아름다운 세상에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은 없게 해 달라고요.

재작년 어린이날 몇 자 적어 놓은 글이 있으니 참고해 주세요. 제 예금통장 다 정리되면 나머지는 북측 굶주리는 아이들에게 보내 주세요. 제발 그만 싸우고, 그만 미워하고 따뜻하게 통일이 되어 함께 살도록 해 주십시오. 중동, 아프리카, 그리고 티벳 아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하지요. 기도 많이 해 주세요. 안녕히 계십시오. 

2007년 3월 31일 오후 6시 10분 

08. 05. 04.

P.S. 어제는 아이의 체육대회가 있어서('운동회'란 말이 없어졌다!) 반나절 동안 운동장에 나가 있었다. 당초 김유정과 요네하라의 '유언'들까지 묶어서 세 사람의 유머에 대해 다루려고 했으나 여기저기 쑤시는 곳이 많아서 기사만을 옮겨놓는다. 이달 안으로 다룰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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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8-05-04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ㅜㅜ ..ㅜㅜ

로쟈 2008-05-04 18:48   좋아요 0 | URL
......

섬나무 2008-05-04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치 생활비 외에 넘치게 쓰는 것은 모두 부당하다는 선생님을 닮은 유언장이네요.
이오덕 선생님과 주고받은 짧은 편지글들이 있던데 어떤 심오한 이론이나 아름다운 문장들보다 가슴에 깊이 닿았습니다.
건강한 남자로의 환생을 잠깐 언급하는 부분이 가장 가슴 아픕니다.
환생할 유일한 이유일지도 모르겠네요.

로쟈 2008-05-04 18:05   좋아요 0 | URL
그런 태도를 초등학교 때부터 '주입'시켜야겠어요! 그럼 좀 나이지려나 싶기도 하고...

파란여우 2008-05-04 1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해 권샘님 댁을 갔었습니다.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 7번지...
일직교회가 저만치 보이는 얕으막한 동산 아래 아주아주 작은 집에요.
열평도 될까말까한 그 집 마당에 걸린 솥과 포도나무를 보고 한참 울먹였습니다.
모두 그 현장에 꼭 가보시길 권합니다.
그 이유는 가 보심 알게 되지요.
저는 권샘님 댁 갔다와서 한동안 글을 못썼습니다.

참고로 30여분 걸리는 의성의 사찰 '고운사'도 가 보세요.
권샘께서 즐겨 찾아가시던 곳입니다.
솔향이 그윽하니 좋습니다.

로쟈 2008-05-04 18:47   좋아요 0 | URL
사진으로만 본 곳이군요. 유택의 보존 여부를 놓고 말들이 좀 있었던 거 같은데 어떻게 됐나 모르겠습니다. 권정생 문학관이라도 꾸며지면 좋을 듯한데, 고인이 싫어하실 것 같기도 하네요...

Mephistopheles 2008-05-04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월이...참 빨라요...
벌써 1주년이라니, 1년동안 기가막힌 일들이 참 많이도 일어나고 있기도 하고요.

로쟈 2008-05-04 20:40   좋아요 0 | URL
갈수록 가관인 것 같습니다.--;

마늘빵 2008-05-04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운동회 가서 열심히 뛰셨군요!

로쟈 2008-05-04 21:32   좋아요 0 | URL
그럴리가요! 사실 운동회랑은 별 관계가 없고, 아침에 어정쩡한 자세로 다림질을 한 시간 하는 바람에 그만... 워낙에 근육들을 잘 안 쓰는지라.--;

노이에자이트 2008-05-04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며칠 전 홍성원,정공채 씨도 저 세상으로...

로쟈 2008-05-05 16:57   좋아요 0 | URL
아, 그렇지요...

프레이야 2008-05-05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호경 신부에게 쓴, 권선생님의 마지막 글 앞에 먹먹해집니다.
여우님이 자세히 써 둔 주소대로 선생님의 집에 꼭 가봐야겠단 생각만
다시 합니다.... 한 시간동안 다림질을 하셨군요. ^^

로쟈 2008-05-05 16:58   좋아요 0 | URL
제가 잘하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순오기 2008-05-05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 5월 17일 제가 '몽실언니' 리뷰를 올리고 난 두 시간 후에 그분이 돌아가셨습니다. 한동안 마음 붙이기가 힘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권정생님 같은 분을 또 만날 수 있을까요?
광주의 5.18뿐 아니라, 4년전 5월 18일에 돌아가신 시어머님 제사도 있고 5월은 제게 여러가지로 근신하게 하는 달이랍니다.

로쟈 2008-05-05 16:56   좋아요 0 | URL
그런 인연이 있으시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