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저명 미학자 아서 단토의 책 오역논쟁'이란 기사 타이틀이 있기에 뭔가 해서 클릭해봤더니 '로쟈의 저공비행'에서 벌어진 일을 정리해놓은 기사다(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806/h2008061802344784210.htm). '알라딘통신'에나 들어갈 만한 내용이 일간지에 실려 있어서 흥미롭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다. 필경 기사거리가 부족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렇다 하더라도 관심있게 읽어주는 분들이 있다는 건 불쾌한 일이 아니다. 기사를 자료 삼아 '창고'에 넣어둔다. 

한국일보(08. 06. 18) 美 저명 미학자 아서 단토의 책 오역논쟁

미국 저명 미학자ㆍ미술평론가인 아서 단토(84)의 국내 번역 저서를 둘러싼 인터넷 상의 오역 논쟁에 저자까지 가세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최근 국내 소장학자 및 번역가들이 인터넷을 통해 펼치는 번역비평의 수준과 활력을 보여주는 사례다.

발단은 ‘로쟈’라는 필명으로 잘 알려진 러시아문학 전문가 이현우씨가 지난달 21일 자신의 알라딘 블로그(http://blog.aladin.co.kr/mramor)에 지난달 번역 출간된 아서 단토의 <일상적인 것의 변용>(김혜련 옮김)의 일부 구절에서 발견한 오역을 지적한 일이었다. 이 책은 한길사에서 1996년부터 출간 개시한 고전 시리즈 ‘그레이트북스’의 100번째 책이다.

이씨는 남성용 소변기를 ‘샘’이란 제목으로 미술전에 출품하는 등 일상적 소재를 예술 영역으로 끌어들인 작업으로 유명한 프랑스 조각가 마르셀 뒤샹의 예술 세계를 설명하고 있는 이 책 57쪽의 두 문장을 오역 사례로 제시했다. 해당 구절은 이렇다. “그(뒤샹)의 행위는 하찮은 대상들을 모종의 미적 거리 안에 배치했고, 그 결과 그것들이 미적 향수(享受)에 부적합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간단하게 평가할 수도 있다. 즉 가장 가당치 않은 곳에서 모종의 아름다움이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을 실제로 입증하려던 시도로 볼 수 있다.”

이씨는 두 문장이 얼핏 봐도 모순적이라며 번역자가 앞 문장 ‘그 결과…’ 이하 구절에 해당하는 원문 ‘rendering them as improbable candidates for aesthetic delectation’에서 ‘improbable’(가능할 것 같지 않은)의 반어적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 결과 가능할 법하지 않은 그것들(빗자루, 병걸이, 자전거 바퀴, 소변기 등)을 미적 향수의 대상으로 연출했다’로 번역해야 옳다는 것.

글이 게재된 다음날부터 ‘노이에자이트’ ‘juin’ ‘규’ ‘qualia’ ‘carboni68’ ‘palefire’을 각각 필명으로 쓰는 알라딘 블로거가 차례로 ‘댓글 논쟁’에 가담했다. 이 중 ‘지방 중소도시에 사는 번역가’로 자신을 소개한 ‘qualia’는 이씨의 지적에 동의하면서 문제의 두 문장에서 두 개의 쟁점을 새로 제시하며 논쟁을 주도했다.

하나는 번역자가 ‘하찮은 대상들’로 번역한 ‘these unedifying objects’는 ‘미적 감흥을 불러 일으키지 않는 대상들’로 표현해야 정확하다는 점, 또 하나는 ‘가장 가당치 않은 곳(the least likely places)’에서 ‘places’를 ‘전시장’으로 해석하는 다른 논쟁자들에 맞서 그 단어는 소변기, 빗자루 등 뒤샹의 ‘전시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는 “자기가 듣고 본 것들을 몇 문장에 투사해 과시 대회 같은 분위기로 흘러간다”면서 논쟁에서 빠지겠다고 쓴 한 블로그를 “뜻하지 않게 서로 감정을 다치게 했더라도 끝까지 가는 것이 토론의 기본이라고 생각한다”고 설득, 마음을 돌리기도 했다. 인터넷 논쟁 문화의 성숙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50개의 댓글이 달리며 열흘 넘게 진행된 논쟁을 끝맺은 사람은 저자 아서 단토였다. ‘qualia’가 지난달 25일 세 쟁점에 대한 해답을 요청하며 보낸 이메일 질문지에 이달 2일 답신을 한 것. 단토는 “관심과 열정에 감사한다. 복잡하고 평이한 문장을 함께 구사하는 내 글쓰기 스타일에서 비롯된 의문 같다”면서 질문마다 명확한 입장을 밝혔다. 모든 쟁점에서 ‘qualia’의 손을 들어주는 답장이었고, 논쟁은 유익하고 평화롭게 마무리됐다.(이훈성기자)

08. 06. 18.

P.S. 내가 쓴 페이퍼는 '앤디 워홀의 비누상자'(http://blog.aladin.co.kr/mramor/2102426) 이고, qualia님의 관련 페이퍼는 '아서 단토 교수님, 답장을 보내주시다'(http://blog.aladin.co.kr/qualia/2120870) 이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Gene님의 의견은 http://geneghong.blogspot.com/2009/01/9.html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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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미국의 저명한 러시아사가 리처드 스타이츠의 <러시아의 민중문화: 20세기 러시아의 연예와 사회>(한울, 2008)가 번역돼 나왔다. 덕분에 올해 나온 몇 권의 책을 모아서 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로 20세기 러시아의 정치와 문화를 다룬 책들이다.


6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지젝이 만난 레닌- 레닌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슬라보예 지젝.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 레닌 외 지음, 정영목 옮김 / 교양인 / 2008년 5월
32,000원 → 28,800원(10%할인) / 마일리지 1,600원(5% 적립)
2008년 06월 17일에 저장
절판
혁명의 시간- 러시아 혁명 120일 결단의 순간들
알렉산더 라비노비치 지음, 류한수 옮김 / 교양인 / 2008년 3월
29,000원 → 26,100원(10%할인) / 마일리지 1,450원(5% 적립)
2008년 06월 17일에 저장
구판절판
러시아의 민중문화- 20세기 러시아의 연예와 사회
리처드 스타이츠 지음, 김남섭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8년 5월
30,000원 → 30,000원(0%할인) / 마일리지 300원(1% 적립)
*지금 주문하면 "12월 31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08년 06월 17일에 저장

거장과 마르가리타
미하일 불가코프 지음, 김혜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5월
23,000원 → 20,700원(10%할인) / 마일리지 1,15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12월 30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08년 06월 17일에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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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 로스의 <미국 사회과학의 기원1,2>(나남, 2008)에 대한 소개기사를 올려놓은 적이 있는데(http://blog.aladin.co.kr/mramor/2122007), 막상 서점에서 손에 들어보니 쉽게 읽게 될 성싶지 않았다. 당면한 일들과는 좀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냥 덮어놓긴 뭐해서 조금 더 자세한 서평기사를 하나 더 챙겨놓는다(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6380). 미국 학문의 '역사성'에 대한 주목은 우리에게도 통용되고 있는 학문의 '미국식 표준'에 대해서 진지하게 재고해볼 것을 요구한다.

교수신문(08. 06. 16) 자연과학·개인주의에 충실한 ‘미국 예외주의’ 비판

우리는 언제 족보(族譜)를 따지는가. 대체로 먹고살만해졌을 때, 아니면 가족사에 뭔가 문제가 발생했을 때다. 학문 활동에 몰두하는 전문가도 마찬가지다. 자기 전문분야의 기원을 돌아보는 일은 매우 드물다. 학계의 경우 십중팔구는 해당 분과가 난관에 봉착했을 때 기원을 돌아보게 된다.

도로시 로스(Dorothy Ross)의 『미국 사회과학의 기원』(The Origins of American Social Science, 1991)도 그러하다. 그는 20세기 미국문화가 점점 더 방향성을 상실하고, 사회윤리가 지속적으로 침식됨에 따라 미국 사회과학을 지배해온 자연과정에 입각한 사회모델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저자는 ‘미국 예외주의적 사고 자체를 역사화’하려는 노력의 일부분으로 ‘미국 사회과학을 역사화’하고자 이 책을 썼다고 지적한다.  

미국 예외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해 저자는 그것을 미국의 독특성으로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판 국가주의(nationalism)로 비판하는 입장을 취한다. 미국의 국가주의는 미국을 유럽으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해 형성됐으며, 미국과 유럽을 상극으로 보려는 성향에 의해 고취됐다. 또한 미국 예외주의 담론의 두 번째 특징은 이상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을 융합시키는 경향인 ‘이상주의의 형이상학’이다. 처음부터 미국 국가주의자들은 미국 역사에 개인의 자유와 정치적 평등, 사회적 조화, 그리고 어느 정도 사회적 평등까지 결부시켰다. 그렇지만 이런 사고는 때때로 제국주의적 충동을 일으키기도 했다고 본다.

저자는 미국 사회과학의 삼대 핵심 분야인 경제학, 사회학, 정치학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있다. 역사학, 심리학, 인류학과 그 밖의 사회과학 분과학문들은 체계적으로 포함시키지 않고 다만 선택적으로 가끔 언급할 뿐이다. 이 책은 미국 사회과학 분과학문들의 형성기인 대략 1870년에서 1929년 사이의 기간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사실 계량모델이나 체계분석, 기능주의 그리고 행태과학 등이 크게 유행했던 1950년대에 미국 사회과학의 과학적 열망이 최고조에 달했다. 그렇지만 저자는 사회역사과정을 자연과정의 한 영역으로 보는 기본 관점과 자연과학적 방법을 추구하려는 결정은 이미 1920년대에 이뤄졌다고 본다.

이처럼 미국의 사회과학이 역사학보다 자연과학에 더 기울고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라는 고전적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연유를 추적하면서, 저자는 이것이 ‘미국 예외주의(American exceptionalism)’라는 미국식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에 입각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미국은 세계사상 특수한 지위를 차지한다는 예외주의 이데올로기가 청교도이념, 자유주의 그리고 공화주의에 깊이 스며들어 미국 사회과학에 경로의존성을 부과했다는 것이다. 저자가 미국 예외주의를 지목해 역사적 비판을 가하는 의도는 앞으로 그것의 영향력을 줄여나가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 사회과학이 선택한 특수한 과학주의적 입장은 그들의 특수한 역사의식에 의거하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미국 사회과학이 실용적인 양키들에 의해 발전된 것이 아니라, 도적철학에 뿌리를 두고 미국 사회의 엘리트층 가치를 신봉하는 학자층에 의해 이뤄졌다고 본다. 그런데 미국의 학자층은 실제로는 현실권력에 관계했으면서도 스스로는 권력과 거리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저자는 1965년 콜롬비아대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프린스턴대, 버지니아대를 거쳐 현재 존스 홉킨스대 역사학 교수로서 미국 지성사, 현대 사회사상과 정치사상, 인문과학사를 강의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 사회과학의 핵심 흐름을 이루는 담론을 재구성하는 지성사의 방법을 동원한다. 그리하여 미국의 역사와 사회과학을 연결시키는 한편, 사회과학자들이 전제하는 가치들이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방식을 탐구한다. 저자는 역사적 전환점마다 담론을 주도한 인물을 중심으로 사회과학담론을 소개하고 있다. 그의 논의는 근대 사회와 정체 그리고 경제를 둘러싸고 진행된 학계의 논의와 미국 예외주의를 둘러싼 국가 엘리트들의 논의에 국한된다.

책의 메시지는 무척 명료하다. 미국 사회과학의 역사는 한마디로 각 시기별로 가장 중요한 사회문제들과 지적, 정치적으로 대결해온 역사라는 것이다. 미국 예외주의와 자유주의가 결합해 미국 사회과학계에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합의가 형성됐다. 따라서 사회과학자들은 자유주의 사회를 어떻게 통치해나갈 것인가에 집중했다. 저자는 자신의 의도가 “미국 사회과학을 역사화하는 것”이며, “역사세계를 자연화하려는 미국 사회과학의 노력 자체가 바로 역사적 기획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정리한다. 사회과학자들이 과학주의적 선택을 한 데는 ‘충분한 이유들’이 있었겠지만, 그 이유들은 역사적 의도들에 의해 항상 제약된 이유들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객관적 과학’이라는 미국 사회과학의 실증주의적 자기묘사를 부정하는 것이다. 미국에서 공부한 사회과학자들은 거의 대부분 미국 사회과학의 가치중립성, 객관성, 전문성을 옹호한다. 문제의식은 ‘가치부하적’, ‘주관적’이고 따라서 ‘과학적’이거나 ‘전문적’이기 어렵다고 기각한다.

그런데 미국 사회과학의 과학주의 자체가 ‘역사적’인 것이라면, 우리가 미국 사회과학을 바라보는 시각은 뿌리부터 바뀌어야 할 것이다. 미국 사회과학자들에게 학문의 과학성은 국가에 대한 헌신이나 국익 또는 기업이익에 대한 봉사와 전적으로 양립가능한 것이다. 아니, 과학적이어야 더욱 더 권력효과를 창출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나는 역사사회학 전공자로서 한미관계를 주로 연구한다. 최근에 기밀해제된 미국 정부문서를 읽으면서 가끔씩 미국 사회과학자들이 정부의 프로젝트를 수행한 보고서들을 접하곤 한다. 로스토우 교수와 헌팅턴 교수의 보고서가 기억에 남는다. 둘 다 월남전 관련 보고서를 미국 정부에 제출한 바 있다. 로스토우 교수는, 우리에게는 ‘개발경제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미국의 월남전 개입에 결정적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유명하다. 헌팅턴 교수는, 우리에게는 ‘민주주의의 제3의 물결’이나 ‘문명충돌’로 유명하지만, 월남전 당시 ‘베트콩’의 게릴라전술에 맞서 물고기를 없애기 위해서는 물을 말려버려야 한다는 전술 즉, 강제 도시화를 추진해야 한다는 제안을 한 장본인이었다. 미국 사회과학계가 미국정부나 기업계와 맺는 관계는 한국의 그것보다 훨씬 전면적이고 제도적이다. 우리가 미국 사회과학계는 가치중립적이며 엄격한 과학적 방법론에 입각해 연구와 강의를 진행해나갈 것이라고 믿는 동안 그들은 국익과 사익을 위해 열심히 복무했다.

공역자인 백창재 교수와 정병기 교수는 한국학술진흥재단 학술명저 번역총서의 일환으로 이 책을 옮겼다. 옮긴이는 1권 끝에 보론으로 「한국 사회과학 정체성 논의」를 싣고 있다. 또 2권 끝에는 이 책의 해제를 싣고 있다. 아마도 이 책을 번역해냄으로써 문제의식의 중요성을 발견하고 과학주의를 넘어서려는 작업에 동참하고자 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미국 사회과학의 기원을 파헤치는 작업소개는 한국 사회과학의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노력과 맞닿아 있는 것 같으면서도 기실은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 사회과학의 정체성은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문제를 우리의 머리로 고민하는 데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지난 100여 년 간 한국의 근대화는 ‘타율적 근대화’라 부를 만큼 바깥으로부터의 도전에 대한 때늦은 응전, 그것도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한, 대응이었다. 지금부터라도 날개(wings)와 뿌리(roots)를 함께 보듬고 나가는 한국 사회과학을 실천해야한다. 미국의 사회과학이 우리에게 덧입힌 ‘과학주의’의 속박에서 벗어나 주체적 문제의식과 독특한 문제틀을 제시할 때다. 그러기 위해 한국 사회과학에 뿌리내린 미국 사회과학에 대한 성찰은 필수적이다. 한국 사회과학의 정체성이란 우리와 마주한 상대방과의 관계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정일준/ 고려대·사회학과)

08. 06.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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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6-18 23:39   좋아요 0 | URL
로스토우나 헌팅턴이 베트남전 당시에 했던 구린 짓은 촘스키와 허만이 근거 자료까지 인용해서 시원하게 두들겨 줬죠(워싱턴 커넥션과 제3세계 파시즘).거기에 베트남사 전공교수인 더글라스 파이크도 별책부록으로 가볍게 한 방...파이크는 로스토우나 헌팅턴 정도의 파렴치한은 아니라고 여겼던 모양입니다.

로쟈 2008-06-19 00:07   좋아요 0 | URL
그런데, 그 '구린 짓'이 저로선 사례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가 아닌가 싶어요. 사이드도 지적하고 있는데, 그보다 더 주의할 문제는 오히려 '전문분야'주의라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비판받지 않으면서 통용되는...

노이에자이트 2008-06-19 00:53   좋아요 0 | URL
그래요.촘스키와 허만도 그 책에서 그 문제를 지적합니다.미국 국방성과 CIA가 종속국들의 군인들을 데려다 친미사상을 주입하고 개인적 친분관계를 이용해서 제3세계 군부를 친미일색으로 만드는 과정을 파헤쳤죠.이번에 광우병이 안전하다고 군대에서 정신교육 시간에 사병들에게 홍보하는 우리나라 군대를 보면...군인들만 그렇겠어요.제3세계 유학생들을 뭣 때문에 유치하겠습니까?이윤기의 <하늘의 문>을 보면 미국과 자국의 이익이 부딪히는데 충성스럽게도 미국 편이 되는 후진국 지식인 이야기가 나옵니다.자기를 미국인과 동일시하는 거죠.당연히 미국 유학생 출신.
 

고려대 대학원신문의 한 기사를 학술저널 담비에서 옮겨온다(http://www.dambee.net/news/read.php?section=S1N5&rsec=&idxno=10777). 점심을 먹고 커피도 마신 뒤라 잠시 '여흥' 삼아 읽은 '춤' 관련기사이다. 젊은 세대들에겐 왕가위의 영화 <해피 투게더>로 각인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춤, 탱고의 문화사를 잠시 짚어주고 있는데, 가난한 이민자들의 애환이 탱고에는 서려 있다는 걸 알게 한다(비슷한 근대화를 경험한 우리에겐 왜 이런 춤이 없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그냥 캬바레 춤이 아닌 것이다. 생각해보니 우리에겐 자유만 부족한 것이 아니라 춤도 부족하다... 

고려대 대학원신문(147호) 아르헨티나 근대문화로서의 탱고

부에노스아이레스는 항구도시다. 항구도시는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문화의 집결지라는 특성이 있다. 또한 외지인이 빈번하게 드나드는 가운데 이들이 경험하는 서러움과 고독, 향수 등이 풍요로운 문화를 낳기도 한다. 뉴올리언스 항에서 재즈가 탄생한 것이 그렇고, 리버풀이 비틀스를 탄생시킨 것이 그러하다. 부에노스아이레스처럼 외지인의 유입이 국가 정책적으로 이루어진 곳이라면 더할 나위가 있을까. 탱고는 바로 이 부에노스아이레스 항구, 그 중에서도 가장 남쪽 하구였던 보카에 정착한 이민자들 사이에서 탄생했다.

19세기 후반의 아르헨티나는 근대국가로 자리잡기 위해 박차를 가하던 시기였다. 국가헌정을 수립하고 유럽인이민정책 및 무상 공교육제도를 통해 공화국을 ‘문명화’하는 것이 실증주의자였던 이 시기 통치자들의 최대목표였다. 이민정책의 첫 번째 목적은 인디오를 축출한 지역에 사람을 거주시킴으로써 광활한 대지를 개척하고자 함이었지만, 유럽인의 유입이 선진적인 문명을 도입하는 데 기여하리라는 계산도 있었다. 통치자들은 ‘유럽화’를 곧 ‘문명화’와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들어온 이민자들은 부유한 유럽국의 중산층이 아니라 가난한 남유럽 출신의 하층민들이었다. 특히 내 소유의 땅을 갖겠다는 꿈을 안고 온 남부 이탈리아의 농민들이 상당수였다. 돈을 벌겠다고 떠난 엄마를 찾아나선 이탈리아 소년의 이야기인 <엄마 찾아 삼만리>도 이 역사를 배경으로 한 것이다. 그러나 이민자들은 뿌리깊은 대토지 소유제 때문에 꿈을 이루지 못하고 대부분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일용 잡부로 전락했다. 이민자들이 주로 정착한 곳은 보카 지구였다. 남아메리카와 유럽을 잇는 주요 하구였던 보카는 일용직을 구하기 쉬웠기 때문이었다.



고달프고 서러운 항구의 노동은 태양이 서쪽 지평선으로 사라질 즈음에야 끝이 나고, 어둑한 선술집에서 서민적인 음악을 들으며 술잔을 기울이는 것으로 이민자들의 고단한 하루가 또 저문다. 때로 여흥으로 술파는 여인들과 춤을 추기도 한다. 대부분 돌아갈 것을 기약하고 가족을 두고 온 남자들이거나 미혼이었던 이민자들은 이 여인들과 외로움을 달래기도 한다. 이렇게 탱고는 향수에 시달리던 이민자들과 몸 파는 여자들 사이의 춤에서 비롯되었다.

하층민의 춤으로 탄생한 탱고는 처음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안에서도 보카 지역에만 머물러 있었다. 유곽에서 탄생했다는 원죄 때문이었다. 더구나 춤을 춘 사람들이 대개 유럽에서 온 이민자들이었고, 당시에 이민자들에 대한 토착인들의 편견과 증오심이 팽배해 있던 상황을 고려하면 토착 아르헨티나인들이 탱고에 대해 느꼈을 거부감이 충분히 짐작된다. 서로 몸이 스치고 다리를 교차시키기도 하는 춤 동작이 외설스럽다고 여기기도 했거니와 빈민촌에서 탄생한 춤이다보니 더더욱 아르헨티나 상류층은 탱고를 경멸했다.

그러던 탱고가 유럽에 전파된 것은 유명한 탱고 작곡가들이나 빈민촌을 드나들며 탱고를 배운 일부 부유층 남자들이 유럽 여행을 통해 선보이기 시작하면서였다. 유럽 대륙은 탱고의 에로틱한 춤 동작에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당시 유럽 사교춤에는 탱고처럼 남녀가 몸을 가까이 맞대는 예가 없는 데다 탱고가 남미의 끝자락에서 건너온 춤이라는 이국성도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탱고가 유럽 상류층의 호응을 받자 탱고를 저속하고 수치스러운 춤이라고 배척하던 아르헨티나 상류층의 태도에도 변화가 생겼다. 유럽으로 수출되었던 탱고가 다시 아르헨티나로 역수입되는 기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탱고의 확산은 아르헨티나 정치 지형의 변화와도 맞물려 전개되었다. 1912년 보통선거법이 제정되고 하층민들도 투표권을 갖게 되면서 중하류층을 대변하는 급진시민당의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다. 이렇게 하류층의 참정권이 보장과 급진당 세력의 확산의 결과 하류층 문화도 제도권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탱고의 확산도 이러한 사회적 수용의 분위기에 힘입었음은 물론이다.

탱고는 근대국가 아르헨티나가 그 정체성의 기초를 마련하던 시기의 문화 산물이다. 탱고가 탄생한 곳은 도시와 농촌이 만나는 접경지대, 이민자와 크리오요 사이의 갈등이 상존하던 빈곤의 공간이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라는 대도시 문명과 크리오요 농촌 전통 사이에 존재한 근대적 삶의 긴장이 탱고를 낳은 것이다. 탱고의 탄생지인 빈민촌, 그 변두리 공간은 바로 근대화 시대의 산물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가 겪은 근대화, 도시화, 유럽화의 역사가 없었더라면 탱고라는 춤은 발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혹은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연방수도로 변모하지 못하고 일개 주(州) 수도에 머물렀더라면, 탱고 또한 한 지방의 민속음악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19세기 말의 부에노스아이레스, 세계화되어가던 연방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있었기에 탱고의 탄생이 가능했다는 뜻이다. 근대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모든 욕망과 애환은 바로 탱고 속에 오롯이 담겨있는 것이다.(조영실/ 서울대학교 서어서문학과 강사)

08. 06. 16.

P.S. 탱고하면 <해피 투게더> 말고도 떠오르는 영화는 많다. 먼저, 샐리 포터가 감독과 주연을 맡은 <탱고 레슨>. 일단은 스텝이라도 배워야 출 것 아닌가? 그녀가 파블로 베론과 추는 탱고는 http://kr.youtube.com/watch?v=yi1dprxgEz8 에서 볼 수 있다. 영화 <여인의 향기>에 나오는 알파치노의 탱고도 너무 유명하니 빼놓을 수 없겠다(http://kr.youtube.com/watch?v=dBHhSVJ_S6A). 아니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도 있군(http://kr.youtube.com/watch?v=qX_4A6d_Q-U). 내친 김에 <해피 투게더>의 한 장면까지(http://kr.youtube.com/watch?v=ea1pM0qhudI).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밤거리를 피아졸라의 음악과 함께 잠시 둘러보아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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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두부 2008-06-16 22:26   좋아요 0 | URL
덕분에 '여인의 향기' 동영상 감사하게 다시 볼 수 있었네요...

로쟈 2008-06-17 00:29   좋아요 0 | URL
^^

노이에자이트 2008-06-18 23:32   좋아요 0 | URL
아스트로 피아졸라의 오블리비옹...좋죠.
 

미국산 쇠고기 수입조건에 대한 재협상도, 내각의 쇄신도 모두 지지부진한 상태에서 화물연대의 파업까지 가세한 탓에 정국은 더욱 어수선하다. '불도저'란 기대치에 걸맞지 않게 정말로 '대책 없는' 정부와 마주하고 있는 탓에 '촛불' 국면 또한 당분간 해소되지 않을 듯하다(물론 국민의 '정치의식'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켜놓은 건 이명박 정부의 최대 공로다. '경제 대통령'은 아무래도 헛말이었다). 국정을 책임질 의사나 능력이 없다면 일찌감치 '사후'를 대비해야 하지 않나 싶기까지 하다. 혹 브레히트의 시집이 그럴 때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씨가 어떤 시들을 읽어야 할지도 친절하게 짚어주고 있다.  

한겨레21(08. 06. 12) 브레히트가 대통령에게

참여정부가 물러나고 ‘오해정부’가 들어섰다는 농담을 들었다. 영어몰입 교육도 오해, 숭례문 국민모금도 오해, 언론사 성향조사도 오해, 급기야 검역주권 포기도 오해. “이해란 가장 잘한 오해이고 오해란 가장 적나라한 이해”(김소연, <마음사전>)라는 한 시인의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불과 100일 만에 이 정부의 정체를 ‘적나라하게’ 이해한 셈이다. 국민이 정부와의 결별을 심각하게 고민하자 이 정부는 그제야 소통 운운하면서 반성하는 척한다. 다들 알다시피 부인에게 폭력을 일삼는 남편도 술 깨고 나면 처절하게 반성은 잘하는 법이다. 이 정부는 도대체 소통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심란한 마음으로 신간 시집을 뒤적였으나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그러다 오랜만에 브레히트의 시집을 꺼내 읽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필요해요.”// 그래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걷는다/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 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 되겠기에.”(‘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전문)

나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기 전에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으나 “당신이 필요해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생기면서 나는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이제 나는, 나를 사랑하는 바로 그 사람을 위해, “정신을 차리고” 산다. 행여나 빗방울에 맞아 죽을까봐 두렵다는 이 엄살은 또 얼마나 애틋한가. 정부와 국민의 소통이란 이런 것이다. 당신의 말을 듣고 당신을 위해 산다.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듣는 것이고, 당신을 바꾸는 게 아니라 내가 바뀌는 것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하고 있는 ‘소통’은 정반대에 가깝다. 일방적으로 말하려 하고 오히려 국민을 바꾸려 한다.

“6월17일 인민봉기가 일어난 뒤/ 작가연맹 서기장은 스탈린가(街)에서/ 전단을 나누어주도록 했다./ 그 전단에는, 인민들이 어리석게도/ 정부의 신뢰를 잃어버렸으니/ 이것은 오직 2배의 노동을 통해서만/ 되찾을 수 있다고 씌어져 있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정부가 인민을 해산하여버리고/ 다른 인민을 선출하는 것이/ 더욱 간단하지 않을까?”(‘해결방법’ 전문)

이미 다른 칼럼에서 한 번 인용했지만 다시 옮겼다. 1953년 6월에 스탈린이 사망한 직후 동독의 노동자들이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동독 정부의 대답이 걸작이다. ‘정부는 인민들에게 실망했다.’ 브레히트의 냉소는 더 걸작이다. ‘차라리 인민을 다시 뽑아라.’ 이명박 정부도 2 대 8로 싸우려거든 차라리 국민을 다시 뽑는 편이 낫겠다.

이 두 편의 시는 소통의 극과 극을 보여준다. 앞의 시는 “아침저녁으로” 곱씹어야 할 진정한 소통의 방법을, 뒤의 시는 실로 간단하기 짝이 없는 “해결방법”을 알려준다. 이 시들을 대통령과 함께 읽고 싶다. 이 정부는 어떤 쪽을 선택할 것인가. 그래도 감을 못 잡으실까봐 한 편 더 읽는다.

“이제 한 사람의 지도자가 된 당신은 잊지 말아라,/ 당신이 옛날에 지도자들에게 의심을 품었었기 때문에, 당신이 지금 지도자가 되었다는 것을!/ 그러므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의심하는 것을 허용하라!”(‘의심을 찬양함’에서)

그래도 안 된다면, 그래서 만약 쇠고기 문제 어물쩍 넘어가고 마침내 대운하까지 강행한다면, 그때는 이런 시.

“칠장이 히틀러는/ 말했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나에게 일할 기회를 주십시오!/ 그리고 그는 갓 만든 회반죽을 한 통 가져와/ 독일 집을 새로 칠했다네./ (…) 이 신축가옥은 곧 완공됩니다!/ 그리고 구멍 난 곳과 갈라진 곳과 빠개진 곳들/ 모든 곳을 모조리 발라버렸다네./ 모든 똥덩이를 온통 발라버렸다네.// (…) 칠장이 히틀러는/ 색깔을 빼놓고는 아무것도 배운 바 없어/ 그에게 정작 일할 기회가 주어지자/ 모든 것을 잘못 칠해서 더럽혔다네.”(‘칠장이 히틀러의 노래’에서)

청년기에 화가를 지망했던 히틀러를 ‘칠장이 히틀러’라 조롱하고 있는 시다. 대운하 강행을 발표하는 순간 우리는 ‘칠장이 히틀러’를 ‘불도저 이명박’으로 바꿔 읽으려 한다. 우리가 뽑은 대통령을 20세기 최악의 정치인과 비교하는 사태가 오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신형철_문학평론가)

08. 06. 15.

P.S. 스탈린주의자로서의 브레히트의 면모에 대해서는 <지젝이 만난 레닌>(교양인, 2008)의 2부 3장을 참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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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8-06-16 00:08   좋아요 0 | URL
안그래도 지젝이 읽은 브레히트를 재미있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도 아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로쟈 2008-06-17 00:27   좋아요 0 | URL
^^

마립간 2008-06-16 15:21   좋아요 0 | URL
나경원 대변인이 방송에서 '그럼 대통령을 바꾸시겠습니까?'라는 이야기한 것을 동영상으로 보았은데, 상대편에서 '그럼 국민을 바꾸시겠습니까?'라고 맞받아 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로쟈 2008-06-17 00:28   좋아요 0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연두부 2008-06-16 13:03   좋아요 0 | URL
재미있게 읽었습니다...책장 어딘가에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있을건데 함 다시 읽어봐야 겠네요..ㅎㅎ

로쟈 2008-06-17 00:28   좋아요 0 | URL
한때 많이 읽히던 시집이죠...

노이에자이트 2008-06-18 23:31   좋아요 0 | URL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제의 신조-불평은 얼마든지 말하라 그러나 나는 복종시키겠다
지금의 이명박 정부는 프리드리히를 부러워하지 않을까요.오...모름지기 지배자란 저래야 하는데...하면서...

로쟈 2008-06-19 00:01   좋아요 0 | URL
프리드리히의 신조는 칸트의 그것이기도 하잖아요. 비판하라, 하지만 복종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