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줌 경기가 바닥이라는 뉴스는 더 이상 뉴스가 아니다. '9월 위기설'이 진정되는 듯하지만 세계경제 자체가 침체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하는 걸 보면 한국경제가 나아질 거라고 기대하기도 어렵다(미국발 금융위기에 대해서는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america/310241.html 참조). 오늘자 뉴스만 하더라도 "전세계 경기의 급속한 위축으로 한국 경제의 유일한 버팀목인 수출이 둔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미국과 유럽, 일본 등 선진국 경제는 이미 침체 단계에 진입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유로지역의 2분기 경제성장률은 전기대비 마이너스를 기록했고 일본은 같은 분기에 -0.6%의 성장률을 기록하면서 경기후퇴 국면에 집입했다."고 전한다(설상가상으로 우리에겐 7%를 꿈꾸는 이명박정부가 있다!). 상황이 그러한지라 보통 경제서에 눈길이 가는 일은 드물지만 최근에 나온 책 두 권에 관한 기사는 아무래도 챙겨두어야 할 듯싶다. "빈곤을 준비하라"는 메시지가 허튼 소리로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따로 준비할 것도 없긴 하지만). 

한겨레(08. 09. 13) 한국 경제, 분배로 갈까 성장으로 갈까

‘9월 위기설’의 실체는 이 두 책의 가운데 어디쯤 있을 것이다. <빈곤의 카운트다운>은 “빈곤을 준비하라”고 말한다. 성장과 번영에 대한 기대를 접으라는 이야기다. <거짓말 경제학>은 “비관론을 퍼뜨리지 말라”고 말한다. 여전히 성장의 가능성에 주목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앞의 책은 “분배 중심의 경제정책”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하고, 뒤의 책은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성장”이 한국 경제의 갈 길이라고 한다.

나란히 출간된 두 책은 다르면서도 닮았다. 지은이가 모두 ‘재야’ 경제학자다. <빈곤의 카운트다운>을 쓴 김재인은 기업·은행 근무를 거친 경제분석컨설팅업체 대표다. <거짓말 경제학>을 쓴 최용식은 21세기경제학연구소장을 맡고 있는 경제칼럼니스트다. 기성 경제학자에 대한 비판을 벼리면서 세계 경제의 미래를 암담하게 보고 있다는 점에서 둘은 닮았다. 이명박 정부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는 진단에서도 일치한다.

그러나 두 지은이가 서 있는 인식지평은 다르다. <빈곤의 카운트다운>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앞세운다. “신자유주의가 추구하는 자본주의는 배타적·이기적·소비적·전투적이다. 이제 신자유주의 시스템은 한계에 봉착했다.” <거짓말 경제학>은 정확히 반대편에서 이야기한다. “신자유주의를 배척하는 것은 국가경제를 쇠락으로 이끌고 국민들을 경제난에 시달리게 하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빈곤의 카운트다운>은 암울한 예측을 도발적으로 내놓는다. “대한민국의 풍요는 끝났다. 지구의 풍요 또한 끝났다. 종말을 맞이하지 않으려면 빈곤을 준비하라. 빈곤이 싫다면 종말을 맞이하라.” 최근의 경기하락은 세계경제의 순환에 따른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구조적이며 영속적인 것이라는 게 지은이의 분석이다.

신자유주의는 무역을 통해 서로 ‘윈-윈’할 수 있다는 리카도의 ‘비교우위론’과 결별한다. “한 국가가 50% 성장 혜택을 본다면 다른 국가는 반드시 50% 손실을 보게 된다.” 신자유주의 시대는 ‘제로섬’의 시대다. <빈곤 경제학>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은 그저 신자유주의 비판이 아니다. 지은이는 식량과 화석연료를 포함한 자원의 고갈에 주목한다.

“지구상의 자원이 고갈되면서 이제 모든 경제활동은 국가적 차원으로 전환했다. 이런 상황에서 신자유주의 자유무역은 공염불에 불과하다. 신자유주의는 극단적 신보호주의로 전환됐다.” 지구 차원의 경제성장은 한계에 도달했고, 미국 경제 역시 붕괴 직전에 있다. “이제 지구상의 어떤 나라도 바라는 만큼 경제적 풍요를 누리기 어려워졌다. 우리 경제라고 이런 흐름에서 동떨어져 7%에 이르는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면 이야말로 무지의 소치다.”

<거짓말 경제학> 역시 ‘성장 신화’를 절대적으로 신뢰하지는 않는다. 지은이가 보기에 1950년대 후반 이후 한국 경제는 “성장 지상주의를 내세우면 위기가 오고, 경제 안정주의를 내세우면 상황이 개선되는” 일의 연속이었다. 특히 이명박 정부의 패착은 “세계경제가 어려운 가운데 환율 인상 정책 등으로 무리하게 경기를 부양”한 데 있다. “이명박 정권은 김영삼 정권이 외환위기를 일으켰던 길을 비슷하게 걷고 있다. 현재의 경제정책을 유지한다면 파국적 상황을 피하기 어렵다.”

그러나 <거짓말 경제학>의 비판은 ‘반신자유주의’를 향한다. “기업 이익이 사상 최대를 기록해도 투자가 부진한 이유는 한국 경제의 분위기가 극도로 비관적이기 때문”이며 그 선봉에는 민영화·개방화 등을 비판하는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나 우석훈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원이 있다. 책 제목이 지목하는 ‘거짓말 경제학’의 주역이다. “신자유주의 정책노선을 배척하고도 경제가 번영한 나라가 이 세상에 단 하나라도 있는가”라고 묻는 지은이는 “신자유주의 배척이 오히려 강자승리와 승자독식을 부른다”고 분석한다. 일자리를 잃어도 가난한 자가 먼저 잃고, 사업이 망해도 영세업체부터 망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성장의 콘텐츠가 없는 진보”는 여전히 무책임하고 무능하다. 지은이는 좌파 경제학자 출신인 카르도주 전 브라질 대통령과 노동당 출신의 룰라 현 브라질 대통령이 개방화·민영화 노선을 채택해 성장을 일군 브라질의 사례를 여러 차례 거론했다. <거짓말 경제학>은 신자유주의를 수용하는 진보 노선을 제시하는 셈이다.

<빈곤의 카운트다운>은 분배 중심의 경제정책으로 빈곤 시대를 대비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거짓말 경제학>은 성장 잠재력을 키우는 경제정책으로 선진국 진입의 마지막 기회를 잡아야 한다고 말한다. 어느 쪽이건 파국을 면하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라고 두 책은 입을 모은다. 형편이 이런데 도대체 뭘 하고 있느냐고, 이명박 정부에 묻는다.(안수찬 기자)

“내수시장 안정이 최우선”…대기업 투자 주문도
신자유주의, 민영화, 시장 개방 등에 대한 두 책의 입장은 날카롭게 대치한다. 시각이 전혀 다르다. 그러나 공통된 점이 없지 않다. 우선 내수 시장 안정이 최우선 정책이라고 제시한다. <빈곤의 카운트다운>은 고용시장 안정과 분배 정책을 통해 “소비의 주체가 되어야 할 소비자들을 안정화”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지적했다. <거짓말 경제학>은 “물가 안정이 최우선”이라고 거듭 강조한다.

대기업 투자 활성화 문제에 대한 주목도 닮았다. <빈곤의 카운트다운>은 이명박 정부의 민영화 우선 정책이 대기업 투자 활성화를 틀어막고 있다고 분석했다. “대기업들은 막대한 투자 여력을 설비 투자가 아니라 앞으로 시장에 쏟아져 나올 공기업 인수에 쏟아부으려 한다”는 것이다. <거짓말 경제학>은 민영화의 적극 추진을 주문하면서도 “(한국의 기업들이) 미국처럼 영업이익을 금융이익을 통해 보상받으려 하거나 일본처럼 해외 부동산과 기업 인수에 매달린다면 미국의 악전고투와 일본이 빠진 미궁이 우리 몫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내수 시장 안정화의 정부 정책과 재투자를 위한 대기업의 행보가 맞아떨어져야 한다는 이야기다.(안수찬 기자)

경향신문(08. 09. 06) 한국경제 ‘빈곤의 시대’ 대비하라

‘9월 위기설’이 증폭되면서 금융시장이 흔들리고 실물경제마저 휘청이고 있다. 정부는 위기설이 과장된 것이라며 진화에 나섰지만 시장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하다. 정말 대한민국에 위기가 닥친 것일까. 정부와 언론, 그리고 많은 경제전문가들은 “한국경제가 어려움에 처해 있지만 펀더멘털이 튼튼하고 저력이 있기 때문에 극복할 수 있다. 세계 경제도 미국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가 진정되면 1~2년 후에는 성장세로 돌아설 것이다”라고 이야기한다. ‘단기비관, 장기낙관’이라는 전망은 수백년을 지속되어온 경제전문가들의 화법이다. 경제는 보통 회복과 침체의 사이클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은 한국경제가 앞으로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이에 대비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경제학의 원리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경제학이란 ‘유한한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기 위한 학문’이다. 저자는 자원이 ‘정말로’ 유한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를테면 경제학자들은 이르면 30년 내에 고갈될 석유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사용하느냐를 논의하고 있다는 말이다.

최근의 유가상승이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다. 1999년에 배럴당 20달러에 불과했던 원유가격은 2006년엔 60달러, 2007년엔 80달러, 올해엔 130달러를 넘어섰다. 원유는 2010년 즈음부터 기하급수적으로 고갈될 것이란 게 상당수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석유는 자동차를 굴리는 데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비료를 만들고 플라스틱을 제작하고 컴퓨터를 켜는 데도 이용된다. 현재와 같은 소비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선 원유가격은 계속 오를 수밖에 없고 이는 살인적인 물가상승을 동반한다.

달러화 가치의 하락도 위기의 징후다. 미국은 달러화를 세계 경제의 기축통화로 만듦으로써 엄청난 부를 누렸다. 세계 각국이 달러화 보유에 힘쓰는 상황에서 미국은 그저 달러를 찍어내고 다른 나라의 물건을 사오면 됐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 미국정부의 누적적자 규모는 9조달러에 이르렀다. 달러를 너무 많이 찍어낸 것이다. 달러화를 찍어낼 수 없게 되자 미국경제가 위축됐고 이는 미국에 소비재를 공급해온 중국이나 한국경제에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해결책이 보이지 않고 있다. 미국의 제조업은 이미 붕괴상태이며 실업률도 높기 때문에 내수경제를 살릴 방법이 마땅치 않다.

문제는 한국경제가 어느 나라보다 미국과 자원에 대한 의존도가 심하다는 점이다. 에너지 자급률은 3%대에 불과하며 경제는 물론 정치·문화·사회적으로도 절대적으로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 한국경제를 살리기 위해선 수출 의존도를 줄이고 내수 경제를 살려야 하며 자원 수급의 다변화를 꾀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국민 절반이 한 달 117만5000원(2007년 기준)으로 살아가는 비정규직 노동자이며 신자유주의의 확산으로 서비스분야에서의 비정규직은 더욱 더 늘어날 전망이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경제는 더욱 악화됐다. 이미 거품이 낀 부동산을 통해 내수 경기를 진작하려 하고 환율을 상승시켜 내수보다 수출중심의 경제를 지향했다. 국민이 통합해 위기를 헤쳐나가도 부족한 마당에 종교간, 계층간 갈등을 유발하고 민영화를 통해 신자유주의를 심화시켜 사회안전망을 파괴하고 있다.

역설적이지만 한국에 마지막 남은 희망은 북한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북한은 산업화가 덜 이뤄져 매장된 각종 천연자원이 남한의 수십배에 이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북한과의 관계마저 악화되고 말았다. 중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이 북한을 원조하면서 각종 자원의 발굴권을 가져가는 동안 말이다.

그래서 저자는 솔직히 조언한다. 빈곤을 준비하라고. 자동차의 크기를 키워서도 안 되고 넓은 집을 탐해서도 안 되고 배가 터지도록 먹고 난 뒤 러닝머신 위에서 운동하는 삶은 중단되어야 한다. 그동안의 불황은 경기사이클에 의한 일시적 빈곤이었다면 앞으로의 빈곤은 상시적인, 절대적 빈곤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너무 우울한 전망이기에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러나 장밋빛 전망보다는 훨씬 진실에 가까워 보여서 더욱 암담해진다.(김준일기자)

08. 09. 15.

 

 

 

 

P.S. 기사를 읽으며 떠올린 건 월러스틴의 자본주의 득실표(대차대조표)이다. 그라면 문제는 '대한민국 경제'가 아니라 '자본주의 문명' 자체라고 진단할 것이다. <자본주의 문명>에서 그는 자본주의가 누구에게 득이 되었는가를 묻는다. 그리고 이렇게 답한다. "전체 가운데의 비율로 보아 특권계층의 규모가 역사적 자본주의하에서 상당히 커졌음은 분명하다.(...) 그들은 물질적으로 확실히 더 잘살게 되었으며, 건강이나 삶의 여러 기회들이나 소수 지배집단에 의한 자의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측면에서도 더 나아졌다. 이들이 정신적으로 더 나아졌는가 하는 데에는 다분히 의문의 여지가 있겠으나, 아마도 더 나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146쪽) 하지만, 이 특권계층이 세계인구의 다수는 아니다.

"그러나 스펙트럼의 다른 한쪽 끝에 위치한 사람들, 다시 말해 특권의 수혜자말고 세계인구의 50-85%에 해당하는 이들의 경우, 그들이 아는 세계는 이전에 그들과 같은 처지에 있던 사람들이 알았던 세계보다도 확실히 더 나빠졌다. 기술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물질적으로 더 빈곤해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불평등한 체제가 어떻게 유지될 수 있었을까?

"자본주의 문명의 세계는 양극화된 그리고 양극화해나가는 세계다. 그런데도 그것이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이제까지 이 체제를 유지시켜주었던 것은 개혁이 증가되고 결국엔 격차가 메워지리라는 희망이었다.(...) 자본주의 문명은 비단 성공적인 문명이었던 것만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사람들을 현혹하는 문명이었다. 그것은 심지어 희생자들과 반대자들까지도 매혹시켜온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 현혹/매혹의 약발이 다하고 있는 셈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끄트머리에 있는 선택지는 ('빈곤의 종말'이 아니라) '빈곤이냐 종말이냐'다. 월러스틴의 결론은 이런 것이다. "모든 역사적 체제들이 예외없이 제한된 수명을 누리며 끝내는 뒤를 이을 다른 체제에 길을 터주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의 세계체제 또한 영속적일 수는 없을 것이라고 일단 생각해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생전에 '역사적 자본주의'의 종말/파국과 함께 '자본주의 이후'를 보게 될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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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9-17 17:01   좋아요 0 | URL
역시 신자유주의 비판은 비교우위론 비판을 기본으로 하는군요.공병호도 장하준을 비판하더군요.역시 두 개의 경제학은 화합할 수가 없군요.저도 어제 맨큐어 올슨<국가의 흥망성쇠>를 헌책방에서 구했는데 시장주의를 택하는 것이 국부에 좋다는 책이죠.마지막 장에 스태그플레이션에 대한 대책도 있고 해서 구입했어요.이미 소장하고 있는 셔먼<스태그플레이션>이 급진경제학 쪽 시각이라서 시장주의자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해서 올슨 것을 샀지요.
이번 리먼 브라더스 파산을 봐도 역시 세계경제는 금융자본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로쟈 2008-09-17 17:37   좋아요 0 | URL
듣자하니 그 금융자본이 결국엔 사고를 치는 모양입니다...
 

최근 프랑스 작가 마르탱 뒤가르의 소설 <티보가의 사람들>(민음사, 2000/2008)이 완역됐다. 이미 지난 2000년에 완역된 줄 알았더니 '별권'이 하나 남아있었고, 이번에 나온 것이다. 이 대하장편소설에 '일생'을 바친 정지영 교수의 노작인데, 관련 인터뷰가 있어서 스크랩해놓는다.  

동아일보(08. 09. 11) 정지영 교수 “오역은 죄… 준비 안된 번역 경계해야”

소설 하나를 번역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면 고개부터 갸우뚱거릴 사람이 많다. 하지만 정지영(71·사진) 서울대 불문과 명예교수는 스스로 그 길에 뛰어들었다. 정 교수는 1984년부터 프랑스 작가 로제 마르탱 뒤가르의 소설 ‘티보가의 사람들’(민음사)의 번역에 나서 최근 ‘별권·회상’ 편으로 완역을 마쳤다. 이 소설은 1922년부터 1940년까지 18년여간 발표된 작품으로 번역본은 6권으로 완간됐다. 24년간 원고지 2만 장이 넘는 대역사를 마친 노학자는 어떤 소회를 가슴에 담았을까. 10일 오전 카랑한 목소리로 너털웃음을 던지는 정 교수의 말을 들어봤다.(정양환 기자) 



○ “학자로서 조금이나마 학문에 기여해 뿌듯”

―오랜 작업을 끝내 기분이 남다를 듯합니다.

“시원합니다. 이제야 내 할 바를 다한 것 같아요. 불문학자로 살아온 인생, 조금이나마 학문에 기여를 했다는 생각도 듭니다. 허허.”

―‘티보가의 사람들’을 번역하게 된 연유가 궁금한데요.

“1963년인가, 대학원에 있을 때였죠. 은사이신 이휘영 선생께서 이 소설 가운데 ‘회색 노트’ 편 번역을 우리에게 맡겼습니다. 변변한 불한사전도 없던 시절이라 포기했죠. 이후 마음에만 담아뒀는데 1984년 청계연구소라는 출판사를 하던 동서가 권유를 합디다. 일본에선 위대한 소설이라며 많이 읽는데 왜 국내엔 번역본이 없냐고요. 안 그래도 기억이 생생한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지요.”



―소설을 간단히 소개해주신다면….

한 편의 대하소설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노년까지 인간이 겪고 생각하는 보편적인 것들이 담겼습니다. 알베르 카뮈는 이 소설의 작가를 ‘영원한 현대인’이라고 불렀죠. 20세기는 물론이고 21세기에 읽어도 문제가 없습니다. 소설을 끝낸 작가에게 다음 작품은 뭐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말했답니다. ‘여기에 모든 게 있으니 더 쓸 것이 없다’고.”

○ 번역 도중 3년 걸려 불한사전 펴내기도

―번역하는 데 어려운 점도 많았겠습니다.

“힘들 게 뭐가 있겠소, 얼마나 즐거운 일인데. ‘티보 가의 사람들’은 재밌는 소설입니다. 읽다 보면 끌려들어가요. 언어학적으로도 흥미롭죠. 프랑스 사전들도 단어 용례를 쓸 때 이 소설의 문구를 많이 가져다 쓸 정도지요.”

―불한사전을 내신 적도 있는데요.

“번역을 하다 보니 아쉬운 점이 많았어요. 다음 세대는 좀 더 편하게 프랑스어를 배웠으면 하는 바람이었습니다. 1995년부터 졸업생 20명과 3년 동안 작업해 ‘프라임 불한사전’을 펴냈습니다. 언어학자들은 사전 편찬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정확한 해석을 도와주는 사전이야말로 문화와 문화를 이어주는 가교입니다.”

―우문인지 모르겠지만 번역이란 무엇입니까.

번역은 글 쓰는 것과 똑같습니다. 오랜 기간 공부해 실력을 쌓아야 합니다. 요즘 젊은 번역가들이 속성으로 번역물을 내놓는 것은 스스로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급한 오역은 원작가는 물론이고 독자에게도 죄를 짓는 거니까요. 인생도 마찬가지 아니오. 제대로 된 준비 없이는 일을 그르칠 뿐입니다.”

―평생의 작업을 마쳤으니 이제 뭘 하십니까.

“할 일 많습니다. 사전도 다시 손봐야 하고 공부할 것도 많고요. 건강에 문제없으니 계속 일해야죠. 몸이 허락하는데 아무것도 안 하는 건 죄악이지요.”

08. 09.15.

P.S. 관련기사를 검색하다 보니 작가 김영하씨가 <퀴즈쇼>(문학동네, 2007)를 낼 무렵에 한 인터뷰도 눈에 띈다. "그에게 대하소설을 쓸 생각이 없냐고 묻자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언젠가는 프랑스의 작가 R. 마르탱 뒤가르의 대하소설인 '티보가의 사람들'과 같은 작품을 꼭 한번 써보고 싶다"고 답했다."라는 기사다. 그의 마지막 소설이겠다.

내가 읽은 <티보가의 사람들>은 기사에서도 언급된 이휘영 교수 번역의 <회색노트>(문예출판사)가 전부다. 알려져 있다시피 <티보가의 사람들> 8부작 중 제1부에 해당하며, 유독 국내에서는 여러 종의 번역본이 출간되었던 작품이다. 고등학교 때 읽어서 주인공의 학창시절을 다루었다는 것 말고 지금은 기억에 남아있는 바가 거의 없지만. 완역본을 소장해둘 만한 여건이 되면 한번 다시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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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09-15 0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개인적으로 불어라는 '미지의 언어'를 조금이나마 곁눈질 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던 것도 돌이켜보면 다 저 프라임 불한 사전 덕분인데, 이는 <티보가의 사람들> 완역 출간이 '남 얘기' 같지 않게 너무나 반갑게 느껴지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도 이 완역 소식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축하받아 마땅한 일이라는 생각이 드네요(저도 5권까지가 완간인 줄 알았습니다^^;). 정지영 선생의 노고와 열정에 큰 박수를 보냅니다.

로쟈 2008-09-15 09:55   좋아요 0 | URL
제가 배울 때만 해도 민중서림판 불한사전이었는데, 세대 교체가 된 모양이군요.^^;

람혼 2008-09-15 23:17   좋아요 0 | URL
그러고 보니까 민중서림 사전의 편저자는 이휘영 선생이었고 프라임 사전의 편저자는 정지영 선생이었다는 흥미로운 사실에 생각이 미치면서, <티보가의 사람들>의 번역과 불한 사전의 편집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묘한 '연결 관계'를 감지하게 됩니다. 여담이지만, 로쟈님과 제가 딱 민중서림 사전과 프라임 사전 사이만큼의 세대차이(?)가 나는 것 같습니다.^^;

로쟈 2008-09-15 23:37   좋아요 0 | URL
네, 민중서림판이 아직 현역이어서 다행입니다.^^

paviana 2008-09-15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경이 시원스레 바뀌었네요.
고등학교때 저도 <회색노트>읽고 친구랑 교환일기 쓰던 기억이 나네요. 저도 아마 이휘영 교수번역의 책을 읽은거같은데 어째 저 표지를 보니 전혀 읽어보고 싶은 맘이 안드네요.아이들 보는 축약판 기분이에요.
언제 기회가 된다면 전권읽기에 도전해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요.

로쟈 2008-09-15 18:42   좋아요 0 | URL
좋은 완역본이 있다면 더더욱 그렇죠.^^

딸기 2008-09-21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회색노트... 저도 그거 하나 보고 땡 쳤는데...
친구와의 회색노트 추억도 새록새록~

로쟈 2008-09-21 12:11   좋아요 0 | URL
여학교에선 유행이었나 보더군요...
 

얼마전부터 새로 완역되기 시작한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민음사, 2008)의 번역관련 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6780). '번역을 말한다'라고 분류돼 있는데, 연재물인지는 잘 모르겠다. 직접 이 완역본 시리즈에 참여한 번역자 송은주 씨의 번역체험담이어서 눈길을 끈다. '번역과 번역가'로 분류해놓는다. 

교수신문(08. 09. 08) 사료의 도서관, 유려한 문체의 정원에서 넋을 잃다

1776년부터 1788년까지 12년에 걸쳐 전 여섯 권으로 간행된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는 깊이 있는 통찰력, 방대한 분량에 담긴 상세한 기술, 해박한 역사적 고증 등으로 무수히 많은 로마사 책들 중에서도 대표적 작품으로 손꼽힌다. 유려한 명문으로 영문학사에서도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에 국내에 번역 소개된 『로마제국 쇠망사』는 일부를 간추린 발췌 번역본이나, 완역이라 해도 일어판의 중역본 정도가 고작이었다.

발췌 번역본은 여섯 권이나 되는 전체 분량을 한 권으로 줄인 것이어서 원작의 방대한 세계를 접하기에는 부족하고, 중역본은 일어판을 바탕으로 옮기다 보니 생소한 일본식 한자어가 여과없이 들어가고 지나치게 고어투로 서술됐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고전을 수용하고 연구하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원전의 충실한 번역이 우선돼야 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와 같이 이미 오래 전에 고전의 반열에 오른 주요 저작이 제대로 번역된 적이 없다는 것은 전공자들에게나, 역사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에게나 크게 아쉬운 일이다.

그런 점에서 『로마제국 쇠망사』의 번역 작업은 힘들지만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작업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번 번역판은 가장 뛰어난 편집판으로 인정받고 있는 J. B. 버리 판을 토대로 했으며, 전체 8300개 각주 가운데 버리가 편집한 각주 4700여개 중 본문 내용과 관계없는 350개만 삭제하고 나머지는 그대로 살린 국내 최초의 완역판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로마제국 쇠망사』는 서기 2세기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부터 동로마 제국의 멸망에 이르기까지 약 1400년 간의 역사를 다루었다. 기번은 이 장대한 역사를 다루면서 입수할 수 있는 모든 자료를 철저히 조사하고 연구한다는 자세를 취했다. 그가 수집하고 연구한 엄청난 양의 역사적 사료는 그의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을 보여주는 유려한 문체로 한데 어우러져 방대한 大河劇을 이루었다. 기번의 최고의 미덕은 무엇보다도 실증적이고 균형잡힌 시각으로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면서도 엄청난 분량의 로마사를 다양한 인간군상들이 빚어내는 흥망성쇠의 장으로 박진감 있게 그려냈다는 점일 것이다.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역사 속에서 행하는 행동과 결단, 운명의 변전은 웬만한 문학작품을 능가하는 재미를 준다.



유려한 문장에 실린 생동감 넘치는 인물과 사건 묘사는 역사서는 딱딱하고 지루하다는 편견을 털어내며 이 작품이 어떻게 오랜 세월이 지나서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생명력을 지니게 됐는지를 보여준다. 기번은 성실한 역사가로서의 자세를 견지하면서도 엄청난 사료에 눌리지 않고 이를 자유자재로 요리해내는 탁월한 솜씨를 발휘했다. 덕분에 역사 전공이 아니라 영문학을 전공한 역자로서도 번역 작업을 하면서 로마사의 일부가 됐던 수많은 인물들의 삶 속으로 흠뻑 빠져들 수 있었다.

이에 더해 『로마제국 쇠망사』의 가치를 높이는 것은 이슬람교와 기독교를 균형 잡힌 시각으로 대하는 그의 역사가로서의 공평무사한 안목이다. 간혹 인종이나 민족에 대한 편견이나 그릇된 정보에서 나온 대목이 눈에 띄기도 하지만, 그가 18세기 인물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놀랄 만한 중립적 시각을 유지하고 있다. 이 또한 『로마제국 쇠망사』가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어 독자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덕목일 것이다.

로마의 멸망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많지만, 기번은 기독교의 성장으로 인한 사회심리학적 요인을 가장 큰 요인으로 들고 있다. 무려 14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지속된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제국이니, 아마도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로서는 로마제국이 언젠가 멸망하리라는 것은 세상의 종말이 온다는 것만큼이나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기나긴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천년이 넘는 긴 세월도 지나간 과거의 일부일 뿐이다. 자기가 살아가는 시대 안에서는 그 시대를 전체적으로 조망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그러나 과거의 역사를 읽는 것은 과거에 비추어 현재를 보는 통찰력을 제공한다.  

기번의 로마사를 자세히 읽어나가며 몰입하는 즐거움과는 별개로, 번역 작업에는 상당한 노력이 요구됐다. 기번의 작품은 수많은 역사적 자료를 치밀하게 엮어서 쌓은 거대한 산맥과도 같아서 접근을 쉽사리 허락하지 않았다. 기번의 역사 서술은 읽는 이가 이미 어느 정도의 기본적인 역사와 서양 문화에 관한 소양을 지니고 있음을 전제로 하고, 그 위에 자신이 섭렵한 방대한 자료를 거침없이 풀어나가는 식이다. 따라서 기번이 요구하는 만큼의 기본 지식이 부족한 역자로서는 이를 따라가기 위해 많은 공을 들여야 했다.

또한 기번은 해박한 역사적 지식뿐 아니라 그리스어, 라틴어, 히브리어 등 각종 언어에도 능통하여 원사료를 읽어낼 수 있었으며, 이를 본문과 각주에도 무수히 인용했다. 툭하면 여기저기서 등장하는 이러한 특수 언어들의 인용문 또한 본문을 이해하는 데 장애로 작용했다. 특히 역자들을 괴롭혔던 것이 본문에 육박하는 방대한 양의 각주였다.

기번의 ‘잡담’이라고도 불리는 총 8300여 개(버리 판 4700개)의 각주는 본문 내용과 관련돼 본문의 이해를 돕는 것도 있지만, 본문과 별 관계없이 엉뚱하게 자신의 지인들 이야기를 늘어놓는다든가 말 그대로 잡담도 상당수였다. 따라서 편집 과정에서 일부 각주는 생략됐다. 또한 영문학사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는 기번의 명문장도 번역하는 데 많은 애로가 따랐다. 한 문장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만연체로 서술된 부분이 많아서, 어떻게 하면 기번 특유의 유려한 문체를 최대한 살리면서도 되도록 읽기 편하고 자연스러운 우리말로 옮길 것인가의 문제를 번역하는 내내 고민해야 했다.

『로마제국 쇠망사』는 방대한 역사서이면서 동시에 위대한 문학작품이므로, 가장 이상적인 경우를 말한다면 역사를 전공해 풍부한 전문 지식을 갖추었으면서 동시에 기번의 까다로운 문체를 정확하면서도 매끄럽게 옮길 수 있는 영어 실력과 문학적 소양을 구비한 역자가 번역을 맡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기번의 작품을 완벽히 소화할 수 있는 모든 자질을 두루 갖춘 역자가 번역을 맡는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다 보니 역사 전공자도 아닌 영문학 전공의 역자들이 번역을 맡게 됐다. 기번의 저작을 국내 최초로 완역한다는 자부심과 사명감을 가지고 몇 년간에 걸친 고된 작업에 매진했으나, 끝나고 보니 새삼 부족함을 아쉽게 느낄 수밖에 없다.

비전공자로서 번역을 하면서 무엇보다도 아쉬운 점은 로마의 여러 관직명이나 제도명 등의 명기에 완벽을 기하기 어려웠다는 것이었다. ‘고전은 매 시대마다 그 시대의 언어로 새롭게 번역되어야 한다’고들 말한다. 『로마제국 쇠망사』의 국내 최초 완역으로 이제 이 책을 국내 소개하는 데 본격적인 첫발을 떼었다고 생각한다.

송은주 번역가
이화여대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이성과 감성』, 『순수의 시대』 등을 번역했다.

08. 0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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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9-17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친 김에 기번 자서전 번역도 해주었으면 좋겠어요.명저라고 하더군요.쇠망사는 로마사 전공자보단 영문학하는 사람이 번역하는 게 더 나을까요? 번역하면서 공부를 엄청나게 했을 것 같군요.

로쟈 2008-09-17 17:39   좋아요 0 | URL
짐작엔 협업이 최선이었을 것 같습니다...

shimy 2011-02-11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읽다가 너무 화가 나서 웹서핑 중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로마제국 쇠망사 4권을 읽고 있는데 해도해도 너무하군요. 발번역이라는 말이 있던데 4권에 딱 어울립니다. 그래도1~3권까지는 괜찮았는데 갑자기 번역의 질이 확 떨어지더군요. 로마제국 법체계 설명하는 부분에선 번역기 돌려 번역한 수준이고 p469에선 '성 세례 요하네스 교회'라는 단어를 보곤 열이 확 올라오네요. 세례 요하네스라니요. 이게 어느나라 말입니까. 영어도 아니고 독일어도 아니고 한국말도 아니네요. 아마 콘스탄티노플에 있던 '성 세례 요한교회'를 말한 것이겠죠. 역사 전공자인지는 제쳐두고 기본적인 역사 소양도 없는 것 같습니다. 성모 마리아를 동정녀도 아닌 성처녀라고 해놓질 않나...
 

연휴의 일정을 소화하고 집에 돌아오니 이 시간이다. 아니 '소화'에는 시간이 좀더 필요하겠다. 책과 복사물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 책상에는 신문지도 몇 장 얹어져 있는데, 스크랩을 해둔다고 미뤄놓은 것들이다. 일단 하나만 옮겨놓는다. 이달초 방한했던 홀거 하이데 교수와의 인터뷰 기사이다(굳이 분류하자면 전공은 경영학인 모양이다). 한국의 '집단 트라우마'에 대해서 지적하고 있다. 한국 자본주의와 노동자 운동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연구해온 학자라는 점이 이채롭다. 덧붙여, 신자유주의 세계화 속에서의 자유를 목줄에 이끌려 산책 나온 강아지에 '적확하게' 비유한 것이 눈길을 끈다(언제 써먹어야겠다!).

경향신문(08. 09. 09) “지구화는 트라우마의 심화과정”

‘지구화’는 자유로운 삶의 확대 과정인가, 트라우마(상처)의 심화 과정인가. 이 물음에 홀거 하이데 독일 브레멘대 명예교수(69·사진)는 ‘지구화’는 자유라는 허상 속에서 심화되는 트라우마라고 답한다. 이화여대 탈경계 인문학연구단의 ‘지구화와 문화적 경계들: 탈경계 문화변동 현상의 비판적 재검토’ 국제학술대회(9월 4~5일)를 위해 방한한 하이데 교수는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은 자본과 시장이라는 외부 힘에 대한 자발적 복종을 통해 트라우마를 내면화하며 살고 있다”고 말했다.

“예전에 회사 대표가 걱정하던 것들을 이제는 종업원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우리 회사, 우리 나라의 경제가 망하면 내가 끝장난다는 그런 위기감을 개인이 걱정하고 있어요. 그 위기란 그저 돈벌이의 위기일 뿐, 진정 사람 사는 것의 위기와 다를 수 있는데도, 사회는 끊임없이 협력을 요구합니다.”

한국사회의 중장년층에 만연한 일중독 현상이나 과로사는 ‘지구화의 경쟁논리가 하나의 집단적 트라우마로 각각의 개인에 내장되며 벌어지는 병리현상’이라는 것이다. 하이데 교수는 공원에 산책 나온 강아지를 예로 들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속에서 자유는 길이가 늘었다 줄었다 하는 목줄에 이끌려 산책 나온 강아지의 자유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강아지의 모습이 자유로워 보이죠. 그런데 결국 그것은 주인(자본)의 손아귀 아래에서의 자유일 뿐입니다.” 이 자유는 “폭력적 과정을 겪은 이후 상처 받은 이들의 자유”이고,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처벌하고, 정신병동에 가두거나 사형으로 완전히 격리시키는 등 근대 자본주의 정착 과정에서 이뤄졌던 폭력적 과정 후에 만들어진 자유”다.

하이데 교수는 상대적으로 한국사회의 집단적 트라우마가 심하다고 했다. “일제식민지와 미군정, 한국전쟁, 군부독재 등을 압축적으로 겪으면서 매우 폭력적인 과정으로 형성됐기 때문입니다. 상당히 민주화됐다고 하는 현 시점에도 국가보안법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 법에 의해 일부 사람들을 가두는 것이 집단 트라우마가 강한 사회임을 증명합니다.”

그는 또 한국사회의 집단 트라우마가 대물림된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하다고 했다. “어른들이 직장과 사회 생활에서 받은 압력과 트라우마가 집집마다 아이들에게 전가됩니다. 부모 자격으로 자식에게 성적 올리기만 강요하고, 아이들의 진정한 내면적 욕구에 대해서는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아이가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것이 부모에게 또 다른 트라우마가 되는 식으로 트라우마의 악순환이 이뤄집니다.”

이러한 악순환에 대한 돌파구는 근원 모를 두려움, 공포를 인정하고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다. 그는 “주위 사람들과 아픔을 나눌 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 효도, 예의 때문에 아무 말도 못꺼내는 것이 아니라 부모에게 맞을 각오로 아이가 자신의 욕구를 말하는 순간 해결 가능성이 생깁니다.”

하이데 교수는 촛불집회가 단적인 예라고 했다. 무엇보다 비폭력성에 주목했다. “내 스스로 진정 강하다고 생각하면 주먹을 보이지 않고 얌전하게 말로 합니다. 대중은 내면의 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비폭력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또 촛불집회의 자발성도 꼽았다. “힘은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고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중앙 통제가 아닌 각자 자기를 조직화하고 분권화하는 개별 행동에서 나옵니다. 각자 스스로 움직이니 정권 차원에서도 어떻게 대응할지 당황할 수밖에 없었죠. 일이 벌어질 땐 있지도 않은 ‘배후’ 얘기를 하다가 뒤늦게 검거 선풍을 일으킵니다. 오세철 교수 체포건처럼 뒤늦게 엉뚱한 곳에 화풀이하고, 자다가 뒷북치는 행태를 보입니다. 대중의 자기조직화, 자발성이 갖는 강한 힘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하이데 교수는 강한 집단 트라우마 후에 민중이 자기 삶에 대한 책임성을 갖는 자세가 생겼는데, 그것이 촛불집회를 통해 잘 드러났다고 진단했다. 그렇기에 “한국사회에서 아직 희망을 얘기할 수 있다”고 했다.

하이데 교수는
1987년 7월 노동자 대투쟁 때 한국에 처음 온 뒤 한국 자본주의와 노동자 운동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연구해왔다. 저서 ‘노동사회에서 벗어나기’가 국내에 소개돼 있으며, 강수돌 고려대 교수가 그의 제자다. 이날 인터뷰도 강 교수의 독일어 통역으로 이뤄졌다.(손제민기자)

08. 09. 14.

 

 

 

 

P.S. 기사 덕분에 강수돌 교수의 책들을 검색해봤다. <경영과 노동>(한울, 1997/2002), <노동의 희망>(이후, 2001), <일중독에서 벗어나기>(메이데이, 2007), <경쟁은 어떻게 내면화되는가>(생각의나무, 2008) 등의 리스트가 어떻게 서로 연결되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찾아보니 <신자유주의 IMF 그리고 국제연대>(문화과학사, 1998)에도 '세계시장, 신자유주의 , 그리고 살아있는 연대' 란 제목으로 하이데 교수가 쓴 글이 포함돼 있다. <당대비평>(2003년 여름호)에는 '노동중독에서 탈출하기: 노동조합은 노동중독 사회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란 글이 실려 있다. 몇 차례 방한하기도 하여 한국과는 인연이 깊은 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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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14 21: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9-14 22: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연휴 직후에 배송될 책들 가운데는 최근 출간된 '問 라이브러리'(생각의나무) 시리즈 두 권이 포함돼 있다. 200쪽 미만의 두께에 시집 수준의 책값을 매긴 새로운 시도인데('포켓북'이나 '팸플릿'이란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주머니가 가벼운 젊은 독자들에게 어떤 반응을 얻을지 궁금하다(인문서적이 잃어버린 독자들을 되찾을 수 있을까?). 개인적으론 (대담집이 아닌) 도정일 교수의 책을 오랜만에 접하게 되어 반갑다. 당분간은 지하철에서 오며가며 읽을 책 걱정은 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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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와 정의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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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마음은 언제나 2009-11-11 14:39   좋아요 0 | URL
일단, 젊은독자가 아니군요.ㅎㅎㅎ
중장년이라 해야 하나요.
정의와 정의의 조건란 책 한권을 몇개월전에 구입했습니다.
그런데, 읽기 정말 어렵군요.
아직은 수양과 교양이 부족한것 같습니다. 로쟈님은 어떤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