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고원의 10년

<비평고원 10>(도서출판b, 2010)이 출간된 김에 비평고원에서의 활동 초창기에 로쟈가 어떤 글을 올려놓았었나 궁금해서 찾아봤다("나는 네가 10년 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주로 댓글이 많았는데, 마침 '도스토예프스키를 싫어한 작가들'이란 테마로 주인장(쿤데라님)과 논쟁을 벌인 게 있어서 약간 정리해 옮겨놓는다. 댓글답지 않게 길게 쓴 대목도 있다. '마침'이라고 적은 건 안 그래도 도스토예프스키 강의 자료를 만들려던 참이기 때문이다. <비평고원 10>에는 '논쟁의 고원' 장도 포함돼 있는데, 어떤 논쟁들이 들어갔는지 모르겠지만 대개는 아래와 같은 분위기로 진행됐을 것 같다. 참고로  카페 주인장의 닉네임은 이후에 '소조'로 바뀌었다. 가라타니 고진 전담 번역자로 활동하고 있는 조영일 씨가 그의 본명이다. 그때는 비평가나 번역가로 데뷔하기 이전이었다. 물론 나도 '무명의 로쟈'였고(카페 '도스토예프스키'의 주인장이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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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데라가 싫어하는 작가. 도스토예프스키. 쿤데라의 작품 중에 <자크와 주인나리>라는 희곡이 있습니다. 이 작품이 탄생하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맨 처음 그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를 희곡으로 각색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답니다. 한데, 그는 <백치>를 다시 읽고 나서 진절이를 쳤답니다. 장황하고, 과장됨에 대해. 해서 쿤데라는 그 제안을 거절하고 평소 자신이 즐겨 읽었던 디드로의 소설을 희곡화 시킨 것이랍니다. 쿤데라와 도스토예프스키의 관계는 쿤데라가 하는 말 그대로 믿기엔 다소 무리가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전혀 안닮은 것 같으면서도 또 어떻게 보면 매우 닮았기 때문입니다. 섣불리 이 둘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하긴 어렵죠.(쿤데라님)

00. 11. 01.
쿤데라가 가장 싫어하는 작가가 도스토예프스키란 건 약간 어폐가 있거나 예의 과장(!)인 것 같습니다. <백치>의 장광설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다 하더라도, 제가 읽은 글에서 그는 <운명론자 자크>와 <악령>에 대해서 찬탄하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참고로 한 도스토예프스키 학자는 그의 소설들을 18세기의 철학적 콩트들과 연관지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볼테르나 디드로의 철학 소설들 말이지요. 좀 부피가 다르긴 하지만. 쿤데라의 문학론은 대개 <소설의 기술>(혹은 <소설미학>)과 <배반당한 유언>(<사유하는 존재의 아름다움>)을 참조할 수 있는 것 같은데 혹시 다른 자료가 있으시면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00. 11. 02. 
아마 <소설의 기술>에서였던 것 같습니다. 저도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쿤데라의 모든 책을 갖고 있었는데 이사를 하면서 여기저기 살림을 나누는 바람에 지금은 몇 권 되지 않습니다. 여유가 생기면 찾아보기로 하죠.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평가에 대해서. 나보코프가 도스토예프스키를 싫어한 건 아주 유명합니다. 3류 취급을 했죠. 하지만, 그가 높이 평가한 톨스토이보다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서 더 많은 이야기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적인 주제와 모티브들을 소설화하기도 했구요. 제가 찾아보니까, "나보코프와 톨스토이"를 다룬 논문은 한편도 없는데 반해서, "나보코프와 도스토예프스키"를 다룬 논문들은 드물지 않습니다. 영향 관계, 혹은 영향에의 불안 관계가 있는 것이죠. 콘래드에 대해서 제가 잘 모릅니다. 다만 그의 <밀정>(<비밀요원>)이 다루고 있는 소재가 <악령>의 그것과 닮았다는 것 정도.  

"쿤데라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차이점은 유머 대 숭고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바흐친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서 '유머'를 발견하기도 하지만, 분명한 것은 쿤데라의 유머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유머 사이엔 엄청난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쿤데라 작품엔 절대적인 가치(구원)이나 종착역이 존재하지 않고 웃음은 바로 그 작품 전체구조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세상 전체가 농담이 되는 것이죠. 도덕에 대한 조롱(디드로의 <운명론자 자크>처럼). 한데,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엔 웃어서는 안되는 종착역(구원/도덕)이 전제된 상태로 현실에 역투사되고 있습니다.그의 작품에서 유머는 진지함을 보충해주는데 그치고 있습니다. 쿤데라와 더불어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작가론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와 조셉 콘래드가 있습니다. 이들이 도스토예프스키를 싫어했던 이유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 지나치게 숭고화된 형태의 러시아정신이 나타나기 때문이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작품에서 자주 헝가리인을 부정적으로 그리고 있는데, 조셉 콘래드는 원래 헝가리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쿤데라는 러시아의 체코 침공을 몸소 겪은 사람이고 나보코프는 과격한 러시아 혁명을 피해 서구로 망명한 작가입니다. 따라서 이들이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 부정적인 것은 아마도 이 같은 사회적 경험과 연관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서 바로 이런 과장되고 숭고한척 위장하고 있는 러시아 정신을 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그런 평가가 낯선 것은 아니지만, 또 그런 만큼 관습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바흐친이 밝혀준 바대로,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와 사상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좀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걸 바흐친은 소설이란 장르 자체의 성질로 설명합니다.(그의 설명에 논리적 정합성이 좀 떨어지는 면은 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있어서 웃어서는 안되는 종착역이 있다는 건 그의 사상의 경우에 국한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아시다시피 <카라마조프의 형제들>도 미완성작이고, 거기엔 별개의 사상과 감정들이 극단의 스펙트럼까지 공존하며 이질적인 웃음과 비장함들을 빚어내고 있습니다.  

기독교 작가로 분류될 수도 있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의 작품에서 결코 기독교적 진리만을 강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만 그 문제를 좀더 복잡하게 보여주려고 했을 뿐이죠. <대심문관>의 논리와 조시마 장로의 설교만큼 이질적인 것도 드물겠지만, 작가가 어느 한쪽편에 치우져 있다고 보아지진 않습니다. 그 두 가지 논리, 두 가지 세계 모두 도스토예프스키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지, 거기에 어떤 서열이 부여되어 있는 건 아닙니다. 그렇게 읽는 건 도스토예프스키를 너무 편하게, 관습적으로 읽는 것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덧붙여. 쿤데라의 '웃음'과 가장 유사한 철학적 개념이 저는 로티의 '아이러니'라고 생각합니다. 쿤데라의 소설들이 철학에 접근할 때, 거꾸로 로티의 철학서들은 비철학으로 이탈해 나갑니다. 이들의 근접조우에 대한 글을 저는 구상중에 있습니다. 로티가 철학자가 아니기 때문에(현재 그는 인문학 교수죠.) 주요 철학자에서 빠질 수는 있겠지만, 제 생각에 그는 중요한 저자입니다. 쿤데라와도 궁합이 잘 맞을 수 있는(!)...   

1. 문학적인 면과 사상적인 면은 구분가능한가? 님은 제가 말한 쿤데라와 유머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유머의 차이점에 대해 그건 관습적인 평가이고 사상적인 면에서만 타당한 이야기이다라고 말습하셨습니다. 한데, 문학적인 면과 사상적인 면이 어떻게 구분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유머는 문학적이고 진지함은 사상적이란 말입니까? 만약 사상적인 면과 문학적인 면이 구분가능하다면, 쿤데라의 사상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2. 도스토예프스키의 영향 콘래드, 나보코프에 대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영향관계는 신중하게 생각해볼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예를 들어 나보코프는 푸시킨을 가장 높이 평가했는데, 푸시킨과 나보코보의 영향관계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도스토예프스키와 나보코프의 영향관계를 이야기하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푸시킨의 주장르는 시였으니까요. 그렇다고 이들 간의 영향관계가 없었다고는 말할 순 없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문제는 소재나 창작방법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3. 해석의 문제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속편은 알료샤가 신에 대해 회의하고 방랑하다 죽는 것으로 구상되었다고 말들합니다. 하지만, 쓰여지지 않은 작품까지 생각해서 쓰여진 작품을 판단하는 것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조시마 장로와 <대심관>은 너무나 극과 극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아주 상반된 세계가 훌륭하게 그려졌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종교적 설교집이 아니라 문학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지요. 하지만, 해석을 하는 입장에서 그 어느 한쪽에 중심을 둘 수 밖에 없지요. 이것은 곧 그 작품이 전체가 향하는 방향을 인식하는 것이기도 하죠. 예를 들어 토마스 만의 <마의 산> 같은 경우도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같이 아주 상반된 사상을 가진 인물이 등장하여 대결합니다. 나프타와 세템브리니가 바로 그들이죠. 한데, 이 작품에서 중심은 세템브리니에 가 있다는 것은 모두가 인정하죠. 그렇다고 종국적으로 나프타가 세템브리니에 통합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같이 이반의 사상과 조시마 장로의 사상에서 도스토예프스키가 손을 들고 있는 쪽은 조시마 장로쪽입니다. 물론, 이때 이반의 사상은 지양되어야 할 그 무엇이 아닙니다. 왜냐면 이반의 사상이 존재함으로 이 이야기가 소설일 수 있으니까요. 아니, 오히려 이반의 사상으로 인해 조시마 장로의 사상을 곱씹어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이죠.  

4. 쿤데라와 로티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에서 로티는 책 머리에 쿤데라의 글을 인용할 정도니 언뜻 보아도 이 둘 사이의 관계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데, 쿤데라가 철학으로 가는 방면, 로티는 비철학으로 간다는 말에는 약간의 언급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쿤데라와 관계가 있는 '철학'이란 오늘날 의미의 철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쿤데라가 말하는 철학에 해당되는 철학을 한 사람이란 제가 생각하기론 플라톤 외에는 없습니다. 개념에 대한 의존이 부재하던 시기의 철학 말입니다. 쿤데라가 말하는 '실존수학'이란 용어는 바로 이런 철학을 말하고 있죠. 이에 반해 로티는 기존 20세기 사상가들의 유행인 문학주의와 그리 멀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것이 미국식으로 약간 변주되어 있지만요.  

00. 11. 03.
쿤데라님과 논쟁 아닌 논쟁을 하게 되었는데,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유익한 논쟁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실, 저 또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은 이후 그의 모든 작품을 찾아 읽었던 팬이고, 도스토예프스키의 팬이기도 합니다. 한때 제가 써보고 싶었던 글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 나타난 유머'였는데, 쿤데라님이 그의 유머에 대해서 너무 폄하하고 그의 사상(바흐친을 빌면, 최종적인 말)에 대해서 너무 강조하고 계신 것 같아 반론을 제시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나보코프도 지적한 것이지만, <지하생활자의 수기> 같은 작품에서도 주인공이 벌이는 소극들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것이지요.  

문학적인 면과 사상적인 면은 구분가능한가? 문학작품에 나타난 사상이란 작품에서 유추하거나 추출해낼 수 있는 어떤 철학적, 사상적 관념들 혹은 입장을 말하는 것이겠죠. 정신과 육체의 고약한 이분법이 여기에도 작용하고 있는 것이지만, 흔히 도스토예프스키를 말할 때 심오한 사상을 가진 작가라느니 어떠니 하는 말을 하는데, 제가 말한 사상이란 건 그렇게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가 소설이 아닌 저널리즘적인 글이나 작가일기 등에서 표명하고 있는 정치관이나 세계관을 말하는 거죠. 그런 글들에서 엿보이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세계관은 지극히 국수적(러시아 민족주의)이고 광신도적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의 소설들에서 똑같은 걸 읽어낼 수 있느냐 하면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와 사상가 도스토예프스키를 구분지어 말한 것이죠.  

그런 식의 자기분열(?)이 설마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인지요? 아니면 당위적으로 그래서는 안된다고 보는 것인지요? 쿤데라는 어느 쪽이냐 하면, 그는 순전히 작가입니다. 소설의 가치와 위엄을 믿는 이야기꾼이죠. 다만 철학적 소설(소설로 하는 철학)의 전통에 서 있을 뿐. 그래서 그가 소설론에서 피력하고 있듯이 소설에 대한 관념, 사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다만 그때의 사상이란 건 소설이라는 육체 속에 녹아들어 있어야 하는 것이죠.  

"콘래드, 나보코프에 대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영향관계는 신중하게 생각해볼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예를 들어 나보코프는 푸시킨을 가장 높이 평가했는데, 푸시킨과 나보코프의 영향관계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도스토예프스키와 나보코프의 영향관계를 이야기하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푸시킨은 나보코프뿐만 아니라 모든 러시아 작가들이 경배하는 작가입니다(혁명기 미래파만 빼고). 러시아 문학의 아버지니까. 나보코프는 푸시킨의 운문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을 영어로 번역하고 그에 대한 '개인적인' 주석서를 낸 바 있습니다. 그의 러시아 문학과 러시아어에 대한 경의의 표현이죠. 푸시킨의 영향과 관련하여 나보코프의 마지막 영어 소설인 <재능>을 들기도 하지만, 제가 보기에 <롤리타>의 중층적인 서술기법 또한 <예브게니 오네긴>을 곧바로 떠올릴 수 있습니다.  

"문제는 소재나 창작방법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같은 소재나 테마를 다른 방식으로 비틀거나 패러디 하는 게 영향관계와 무관할 수 있을까요? 패러디는 패러디되는 것에 대한 희화화나 오마주 양방향에서 작용할 수 있습니다. 나보코프의 의도는 전자에 가까워 보이지만, 제 생각에 거기엔 모종의 경쟁의식도 끼어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대가가 아니라면 맞상대할 필요가 없는 거지요. 

"하지만, 해석을 하는 입장에서 그 어느 한쪽에 중심을 둘 수 밖에 없지요. 이것은 곧 그 작품이 전체가 향하는 방향을 인식하는 것이기도 하죠. 예를 들어 토마스 만의 <마의 산> 같은 경우도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같이 아주 상반된 사상을 가진 인물이 등장하여 대결합니다. 나프타와 세템브리니가 바로 그들이죠. 한데, 이 작품에서 중심은 세템브리니에 가 있다는 것은 모두가 인정하죠. 그렇다고 종국적으로 나프타가 세템브리니에 통합되는 것은 아닙니다."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다성성을 주장하는 바흐친을 따르자면, 반드시 어느 한쪽에 중심을 둘 필요는 없습니다.(물론 바흐친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는 않습니다.) 다만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소설이란 장르 자체가 작가의 일방적인 독백을 거부한다는 것이죠. 그런 독백을 드러낸 작품들 가운데 읽을 만한 작품은 몇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같이 이반의 사상과 조시마 장로의 사상에서 도스토예프스키가 손을 들고 있는 쪽은 조시마 장로쪽입니다." 물론 그것이 추정해 볼 수 있는 작가의 의도였을 수도 있지만, 그건 작품-텍스트 바깥의 얘기입니다. 의도의 오류를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이에 반해 로티는 기존 20세기 사상가들의 유행인 문학주의과 그리 멀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것이 미국식으로 약간 변주되어 있지만요."라는 건, 로티를 싫어하는 철학자들이 하는 얘기지만, 저로선 동의하기 힘듭니다. '문학주의'가 그렇게 비난받을 만한 것이라고 생각지 않지만(그런 의미에선 데리다도 문학주의자입니다), 로티는 대단히 엄격한 철학적 훈련을 받은 사람입니다. 소설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는 얘기죠. 제가 쿤데라와 도스토예프스키와 로티를 좋아하는 건 그들이 가진 친연성 때문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 친연성에 대해 쿤데라님은 동의하시지 않는 걸로 결론내릴 수 있을까요?...   

00. 11. 03. 
제가 자꾸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것 같아 이번을 마지막으로 하겠습니다. 쿤데라님의 말대로, 서로간의 취향, 혹은 관점의 차이가 있는 거라면, 저마다 각양각색인 것을 어쩔 수 없는 것이겠죠.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 유머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유머가 주가 아니라는 거죠. 다시말해, 라블레와 쿤데라의 친연성이 라블레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친연성보다 더 강하다는 말입니다. 상대적인 것이죠. 라블레와 쿤데라의 작품에선 '웃음'이 주된 거니까요."  

이때의 웃음은 좀 확장된 의미의 웃음이겠죠? 순전히 웃기기 위해 소설을 썼다고 주장하시는 건 아닐테니까. 쿤데라는 '좋은 기분'이란 말을 쓴 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좋은 기분, 혹은 유머를 불러 일으키는 것, 그것이 그의 문학의 미덕이죠. 하지만, 그 이상의 주장도 포함하고 있지 않을까요? 라블레적 웃음의 중세 카니발적 세계관과 연관되는 것처럼, 쿤데라의 웃음, 혹은 유머 또한 그가 지향하는 소설적 세계관과 연관되어 있고, 그러한 세계관을 그의 흔히 쓰는 말로, 그의 사상이라고 부르면 안되는 것인지?  

"다시 말해, 도스토예프스키와 쿤데라의 친연성은 도스토예프스키와 까뮈의 친연성보다 약하다는 것입니다." 이건 당연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저는 사상적인 면과 문학적인 면은 분리할 수 없다고 봅니다. 즉, 그의 사상적인 면이 그 같은 문학적 형식을 만들었다고 그 같은 형식으로만 그같은 사상을 나타낼 수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사상과 문학의 분리불가능은 원론적으로만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작가의 사상이 반드시 그의 문학작품 '안'에만 있는 건 아니죠. 소위 순수문학을 주장했던 우파 문인들의 경우, 문학작품은 어떠한 정치적 주의주장도 포함해서는 안된다는 하나의 '정치적 주장'이 작품 '안'에 들어가 있는 건 아닙니다. 그 작품의 정치적 순수성, 혹은 순수주의는 작품 '바깥'(맥락)과의 관계 속에서만 읽혀질 수 있습니다. 이런 뜻으로 쿤데라님이 말씀하신 거라면, 제가 오해한 것이구요.  

"구원에 대한 전제(불안하긴 하지만 확실히 존재하고 있는 세계), 그것이 도스토예프스키 특유의 장광설을 가능하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쿤데라님의 의견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소위 요즘의 연구자들도, 제가 아는 한,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전에도 말했듯이 쿤데라가 말하는 '철학'이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철학이나 사상이 아니죠. 문학과 철학이 아직 분화되지 전 철학, 다시말해 소설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철학을 이야기하는 것이죠. 쿤데라는 이런 표현방법의 하나로 블로흐가 먼저 시도하고 무질이 발전시킨 에세이라는 장르를 소설 속에 도입하기도 하고, 플라톤의 <향연>을 패러디하기도 합니다. 이때, 블로흐나 무질이 행했던 철학이나 사상과 플라톤 저작 속에 나타나는 철학은 오늘날 의미의 철학과는 분명 다르죠."  

사실, 이 부분은 제가 더 검토해 봐야 하는 부분입니다. '소설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철학'의 대표적인 예가 '향연'인가요? 고대 그리스의 메니푸스 풍자 같은 걸 예로 들 수 있을까요? 그것이 철학과 다르다는 것은 소위 (철학적) 개념에 저항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작가들 간의 영향 관계에 대해 논한다는 것이 자칫 무용할 수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예를 들어 조이스와 울프, 고골과 도스토예프스키는 서로 비교가능합니다. 한데, 마르케스와 보르헤스 같은 경우는 조금 망설여집니다. 물론 가능하지 않다는 말은 아닙니다. 어디까지 상대적인 문제이니까요. 즉, 윤대녕과 이광수는 서로 비교가능하지만, 그것만으론 뭔가 부족하다는 것이죠."  

물론 어디까지나 상대적입니다. 건수가 있어야 하는 거니까요. 그런데, 모든 비교문학적 가능성에 의문을 갖고 계신 건지? 문학과 음악, 미술 등과 비교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는 어불성설인가요?  

"따라서 모든 작품들과 비교 가능하죠. 예를들어 발자크와 쿤데라의 비교." 물론입니다. 그것이 읽을 만한 것을 산출하기만 한다면. "전 텍스트주의가 아닙니다. 텍스트 밖에 뭔가가 있다고 믿는 사람이죠. 해서 작가연구가 부정하는 것엔 찬성하지 않습니다. 물론, 작가 연구가 주가 되면 안되겠죠. 소설 텍스트 연구 80%, 소설 외 텍스트 및 작가 연구 20% 전 뭐 이 정도로 균형을 맞추죠."  

그 비율이 일률적인 것인지, 아니면 특별한 근거가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감이신가요? "이에 반해, 도스토예프스키는 전혀 그렇지 않거든요. 그는 자신의 대사회적 사상과 예술이 일치한다고 생각했죠. 전 일단 작가의 입장을 존중하는 편입니다." 물론 존중해야겠지만, 그때의 작가는 독자의 한 사람일 뿐입니다. "엄격한 훈련은 소설쓰기에도 존재합니다. 훈련없이 소설쓰기는 힘들죠. 한데, 소설쓰기 훈련과 철학 훈련의 차이점은 전자가 순전히 자신 혼자만의 힘으로 이루어지지만, 후자는 철학과하는 제도화되어 있는 교육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죠. 맞습니다. 데리다도 문학주의자죠. 제가 별루 좋아하지 않는. 순전히 저 개인적 취향입니다."  

문창과가 철학과만큼 많은 건 아니지만, 소설 쓰기 역시 공식/비공식적 교육의 장 혹은 제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전 쿤데라-카프카-하이데거 정도 되겠네요." 그렇다고, 제가 쿤데라-도스토예프스키-데리다인 것은 아닙니다. 저는 그들만 좋아하는 건 아니니까. 다만 하이데거를 좋아하시면서 대표적인 하이데거리언인 데리다를 싫어하는 건 잘 이해가 되지 않네요. 후기 하이데거라면, 쿤데라님의 표현대로 대표적인 문학주의자인데(그래서 소위 많은 철학자들이 후기 하이데거를 싫어했죠.)...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는 것도 대표적인 문학주의자의 주장 아닌가요? "앞으론 구체적으로 작품을 살펴보면서 이야기하면 좋겠네요. 우선 이번 달 작품으로 선정된 <농담>과 <카라마조프>를 중심으로....." 예, 저도 적극적으로 (다시) 읽고 싶습니다. 다만, 직장인인 관계로 충분한 시간을 내기가 어렵군요. 문학주의자도 생계 유지는 해야 하니까...  

로쟈님과의 논쟁에 있어 제가 약간 불리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저도 제 자신의 말에 수긍이 잘 가지 않거든요. 한데, 이것만은 확신하고 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위대한 작가다. 한데, 우리 나라에서 그는 너무 과대평가 받고 있다. 도스토예스키에 대한 과대 평가는 일본과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현상입니다. 국문학에선 그것 자체가 하나의 논문거리가 되죠. 김윤식의 글 중에 이에 대한 글들이 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와의 대결을 평생의 과업으로 삼은 사람들이 있죠. 예를 들어 조연현, 김동리, 서정주 같은 사람들. 일본에선 고바야시 히데오, 하니야 유타카 등등. 이 같은 현상을 설명하면서 흔히 하는 이야기가 <저개발의 모더니즘>이라고 하는 거죠. 

저는 도스토예프스키와 쿤데라의 관계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쿤데라는 도스토예프스키보다 라블레, 블로흐와 더 관련이 있다는 것이죠. 한데, 명백한 것은 한국사람들은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선 열심히 읽으려고 하지만, 라블레나 블로흐에 대해선 그런 작가가 있는지 어떤 작품을 썼는지도 잘 모른다는 것이죠. 그렇습니다. 전 균형, 균형을 말하고 싶었던 거예요. 지적 균형. 쿤데라와 도스토예프스키의 관계를 논하기 위해선 라블레, 블로흐에 대한 이해 또한 필요하다는 것이죠. 도스토예프스키보다 쿤데라에 무게중심을 둔다면요.

00. 11. 06. 
쿤데라님의 메일 잘 받아 보았습니다. 마감된(?) 논쟁의 작은 차이에 대해서, 약간의 보충을 하고자 합니다. 사실, 쿤데라 문학에 대한 애착은 남못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이 카페를 둘러보면서 긴장(!)하기도 했고 반갑기도 했죠. 아무려나 좋은 작가에 대한 관심과 애호가 확산되는 건 말 그대로 좋은 일이고, 그런 일에 저보다 힘써 주시는 데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쿤데라의 생각을 단편적으로 알 수 있는 대목(그리고 제가 기억에 의존했던 대목)은, <소설의 기술>(책세상), 94-95쪽입니다. 한 대담에서 쿤데라는 예의 자신의 소설론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그의 대전제는 "철학자가 생각하는 방식과 소설가가 생각하는 방식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겁니다. 그에 대해 질문자가 "그러나 <작가일기>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완전히 직설적이죠."라고 말하자, 쿤데라 왈:

"그러나 그의 생각의 위대함은 거기 있는 게 아니죠. 그가 위대한 사상가인 것은 다만 소설가로서의 그를 통해서입니다[사상가 도스토예프스키가 아닌: 옮긴이].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그가 그의 인물들을 통해 범상치 않을 정도로 풍부하고 새로운 지적 세계를 창조해낼 줄 안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인물들 속에 투영된 그의 생각을 찾아보는 것을 좋아하지요. 예를 들면 샤토프 같은 인물 말이예요.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는 온갖 주의를 다 기울였습니다... 그러니까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의 생각을 샤토프에게 투영시키고 있기는 해도 그 생각은 금방 상대적인 것이 됩니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있어서도, 일단 소설의 몸뚱아리에 들어오게 되면 성찰의 본질이 달라지게 된다는 규칙, 교조적인 생각이 가설적인 생각이 바뀌게 된다는 규칙이 적용되고 있는 것이죠. 철학자들이 소설을 쓰려고 할 때 놓치게 되는 게 바로 이거죠..."

쿤데라님과의 논쟁에서 제가 사상가 도스토예프스키(<작가일기>의 저자 혹은 문학텍스트 바깥의 저자)와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를 나눈 것은 그런 맥락에서입니다. 바흐친과 아주 유사하게, 쿤데라는 소설의 규칙을 이야기 합니다. 어떤 교조적인 생각도 소설의 옷을 입게 되면, 가설적인 것으로 바뀌게 된다는 것이죠. 바로 그것이 소설이란 장르의 힘이고,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힘이죠(그는 철학자가 아닌 겁니다!). 제가 기억하는 이 대목에서, 저는 "쿤데라가 가장 싫어하는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란 이미지를 떠올리기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논쟁을 촉발시킨 계기가 되었죠...  

10. 0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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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30 23: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01 0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인터넷 비평공간 '비평고원'

다음 카페 '비평고원'이 개설 10주년을 맞아 기념문집을 냈다. 출판사쪽 표현으론 씨북(Cbook)이다. "블로그북(Blook)의 경우 기본적으로 단일저자로 이루어진 출판물인 데 반해, Cbook(카페북, 커뮤니티북)은 엄청나게 많은 복수의 저자로 이루어진다"는 게 차이점이라고. 비평고원의 '원년 멤버'이자 '핵심 멤버'(카페에서는 '불멸회원'이라고 칭한다)로서 나도 그 '복수의 저자'로 참여하고 있으니 인연이 없지 않다. 출간을 기념하여 카페 정모도 이번 주말에는 예정돼 있다. 관심있으신 분들은 카페 공지를 참고해보시길. 제일 먼저 뜬 소개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한겨레의 더 자세한 기사는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428677.html 참조).   

  

경향신문(10. 07. 01) 인문학 고수들의 ‘담론 대결’ 책으로 묶었다  

인문학커뮤니티 ‘비평고원’이 인터넷카페(http://cafe.daum.net/9876) 개설 10년을 맞아 <비평고원 10>(도서출판 b)을 냈다. 그간 카페에 오른 2만여개의 게시글을 추리고 엮은 문집이다. 문학·예술·철학에서 축적한 담론이 원고지 1072쪽의 방대한 분량에 오롯이 담겼다.  

비평고원은 2000년 4월28일 ‘쿤데라와 고진의 고원’이란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수준 높은 비평 글이 입소문을 타면서 인문학 관심자들의 방문이 늘어났고, 비평 대상도 다양해졌다. 2004년 지금 이름으로 바꿨다. 6월 말 현재 회원 수는 1만394명, 개설 기간에 비하면 많지 않은 수인데도 대중지성의 근거지로 주목받았다. 회사원·대학(원)생·농부·자영업자 같은 학생·생활인들이 학력 같은 배경이 아니라 필명만 내걸고 비평을 올렸다. ‘주례사 비평’ ‘인사치레성 댓글’ 없이 날것의 글쓰기 대결을 벌였다. 몇몇 ‘고수’들은 번역서의 오류를 찾아 공개 비판했다. ‘번역 논쟁’은 비평고원의 내공을 제도권 지식 사회에 알린 사건이었다.

비평고원은 까다로운 운영 원칙을 고수한다. 학연·지연·유명세를 배제한다. “개인 친분 강화는 불필요한 인간 관계에 휘말리게 한다”며 오프라인 모임을 가능한 한 갖지 않고 있다. ‘책이라는 상품’을 소개하는 서평보다 ‘책이 다루는 문제’에 관한 비평 쓰기를 정체성으로 삼았다.

운영자 ‘소조’가 머리말에 쓴 말은 비평고원의 현재 의지, 미래 전망, 자부심을 잘 나타낸다. “고상하게 보이는 인문학계가 실은 학벌과 친분, 예의에 의해 작동되는 곳이라면, 가진 게 별로 없는 이들이 모인 비평고원은 너저분한 계급장, 훈장을 모두 떼고 오로지 사유의 진지함과 핵심에 육박하는 날카로움(집요함)만으로 유지되는 장소입니다. 한국 지성계가 환관들에 의해 유지되는 국가기구의 하나라면, 비평고원은 오로지 자신의 무공에 의지하여 ‘의(義)’를 행하는 강호 또는 무림입니다.”(김종목기자) 

10. 06. 30. 

P.S. 찾아보니 2000년 9월 16일에 내가 적은 카페 가입인사는 이렇다. 당시엔 카페명이 '쿤데라와 고진의 고원'이었고, 주인장의 닉네임이 '쿤데라'였다. 2000년이라, '로쟈'는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대학과 학원의 강사로 뛰던, 결혼 1년차 '백수'였더랬다. '알라디너'로서는 2개월차쯤?..

안녕하십니까? 운영자님의 강권에 못이겨 가입인사를 몇 자 적습니다. 저는 쿤데라의 팬이고 고진의 책도 절반은 읽어 보았으니까 이 카페의 회원이 될 만한 자격은 있는 듯하여 주저없이 가입했습니다. 그리고 제자 둘러본 카페들 중에서는 그 중 수준이 높은 듯하여(kundera님의 열성과 부지런함이 인상적입니다!) 반갑기도 하구요. 하지만 아직은 쿤데라'와 '고진'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갈피가 잡히지는 않습니다. 많은 지도편달 있으시길...  또 '고원'이라, 이건 들뢰즈의 용어를 가져온 듯한데, 하여간에 지적 열정이 넘치는 듯하여 보기에 좋습니다. 내용도 탄탄해 보이는데, 앞으로 더 발전해 나가겠죠? 저는 러시아문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현대철학에 관심이 많습니다. 데리다나 레비나스 같은 저자들을 좋아합니다. 관심에 비한다면 읽은 건 별로 없지만, 능력이 닿는 한도 내에서 저도 글을 올리기로 하지요. 아무튼 만나게 되서 거듭 반갑습니다. 그리고 감기들 조심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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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도스토예프스키를 싫어한 작가들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6-30 21:01 
    <비평고원 10>(도서출판b, 2010)이 출간된 김에 카페 비평고원에서의 활동 초창기에 로쟈가 어떤 글을 올려놓았었나 궁금해서 찾아봤다. 주로 댓글들이 많았는데, 마침 '도스토예프스키를 싫어한 작가들'이란 테마로 주인장(쿤데라님)과 논쟁을 벌인 게 있어서 옮겨놓는다. 댓글답지 않게 길게 쓴 대목도 있다. '마침'이라고 적은 건 안 그래도 도스토예프스키 강의 자료를 만들려던 참이기 때문이다. <비평고원 10&g
  2. 정보의 바다에 쌓아올린 인문학 성채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7-06 09:36 
    '비평고원'과 <비평고원>(도서출판b, 2010) 관련기사를 하나 더 옮겨놓는다. 지난 주중에 나도 기자의 전화인터뷰에 응한 기사다. 개인적으론 자체 평가와 의의, 한계 등을 짚는 기사를 나도 쓰기로 해서 참고가 된다.     한국일보(10. 07. 06) 정보의 바다에 쌓아올린 인문학 성채  2000년 4월 한 인터넷 사이트에 '쿤데라와고진의 고원'이라는 이름의 인문학 카페가 개설
 
 
비로그인 2010-06-30 20:13   좋아요 0 | URL
"한국 지성계가 환관들에 의해 유지되는 국가기구의 하나"라는 기사의 표현이 인상적이네요.
여기서 환관이라 함은 스스로 재생산구조를 갖추지 못했다는 걸 꼬집는 거겠죠? 다른 쪽으로 상상하면 안 되겠죠?

그나저나 강호의 고수들이 한자리에 모이는군요.
음, 갑자기 주먹이 불끈 쥐어지네요^^

로쟈 2010-06-30 21:40   좋아요 0 | URL
'강호'란 수사는 수명이 꽤 길어요.^^

Kitty 2010-06-30 22:16   좋아요 0 | URL
여기 운영자님이 한국 문학 비평한 조영일씨 맞죠?
가끔 가서 글 읽어보고는 하는데 책으로 나왔군요. 담아갑니다 ^^

로쟈 2010-07-01 00:01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이젠 비밀도 아니죠.^^
 

바깥 날씨만 보면 그날이 그날처럼 여겨지는데, 그래도 새로운 건 '새로 나온 책'들이다. 어제는 에드워드 윌슨이 공저한 <프로메테우스의 불>(아카넷, 2010)이 눈에 띄더니(오래전에 원서를 구해놓은 책이다) 오늘은 하비 맨스필드의 <남자다움에 관하여>(이후, 2010)가 '손맛'을 느끼게 한다. 하버드대학에서 정치사상을 강의하는 저자는 특히 마키아벨리 전문가로 그의 <마키아벨리의 덕목>(말글빛냄, 2009)이 우리에게 소개된 바 있다. 찾아보니 몇년 전에 <남자다움>에 대한 워싱턴타임스의 서평이 국내 일간지에 실렸다. 서평부터 읽어본다(국내 일간지 서평은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1007/h2010070221465284210.htm 참조).     

 

세계일보(06. 03. 23) [해외논단]남녀평등 사회에 대한 조언

프로이트는 결코 “남자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지”라고 물은 적이 없다. 그는 누구나 그에 대한 답을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성혁명이 일어나고 자유롭게 된 여성들이 직장과 가정에서 남자들과 경쟁하게 됨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졌다.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던 과거의 개념들은 더 이상 적용되지 않게 됐다.

하버드대학의 하비 맨스필드 교수는 오늘날 남성들이 남성 성의 위기를 맞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는 성역할의 혼란은 현대의 여성주의 때문에 더욱 악화되고 있지만 여기에는 더 복잡한 것이 숨어 있다고 말한다. 그는 현대의 삶은 남성의 에너지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고 있으며 활동력을 저해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최근 저서 ‘남성다움(Manliness)’에서 “남성다움은 전쟁을 선호하고 모험을 즐기며 영웅을 숭배한다. 그러나 이성적인 통제는 평화를 추구하고 모험을 기피하며 영웅보다는 역할모델을 선호하도록 만든다”고 말하고 있다. 여성들과의 관계에서 남성들의 타고난 단호함은 약화된다. 양성평등이 엄격한 정의가 된 현대의 삶에서 고정된 성관념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은 중요하다. 맨스필드는 그러나 타고난 것으로 여겨지는 고정적 성관념을 어느 정도 용인하더라도, 남성과 여성이 함께 사는 가정에 아무 해도 미치지 않는다고 말한다.

맨스필드는 여자들의 행복을 위해 남자가 집 안에서 아이를 돌보는 것이나 가사를 여자들과 똑같이 반씩 나눠 하도록 강요하는 행태를 조금 줄일 것을 권유하고 있다. 이것이 남자다운 일인가. 맨스필드는 여자들이 이 같은 자신의 주장에 귀 기울이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다. 그는 그러나 여자들이 이 같은 주장을 전적으로 무시하지만도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버지니아대학의 사회학자 스티븐 노크와 브래드퍼드 윌콕스는 여자들이 결혼 생활에서 가장 큰 행복을 느끼는 것은 남편이 자신과 감정적으로 동조할 때라고 말했다. 이들은 미 전역에 걸쳐 5000쌍이 넘는 부부를 인터뷰한 결과 아직도 대부분의 여성은 감정적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한 남자가 보다 많은 수입을 가져오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는 여성주의자이든 여성주의자가 아니든 마찬가지다. 게다가 전통적인 방식으로 가정을 이루고 가사와 자녀 양육을 책임지면서 생계를 남편의 벌이에 의존하는 여성들은 자신들이 남편으로부터 더 많은 사랑과 이해를 받는다고 말했다고 이들은 밝혔다.

이는 사람들이 직장에서보다는 가정에서 덜 정치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또 여성운동의 올바른 방향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남자나 여자 모두 남녀 간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직장 생활을 하는 남녀 간의 소득 격차에 대한 태도는 바뀌었다. 20년 전 월스트리트저널이 미국 직장여성들이 겪는 ‘유리 천장’(여성의 승진을 가로막는 보이지 않는 장벽) 문제를 처음 거론했을 때만 해도 문제의 초점은 여성들에게 불공평한 직장 내 태도였다. 지금도 ‘유리 천장’은 존재하지만, 요즘 여성들은 이를 편견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로 받아들이며 과거만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여성들은 가족이나 기타 자신이 소속된 사회와의 접촉을 제한할 위험이 있는 일은 남성이 맡아주기를 원하며, 그로 인해 남성들이 더 많은 봉급을 받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려 한다. 또 ‘유리 천장’을 느낄 필요가 없는 여성 창업도 크게 늘었다. 여성기업연구센터에 따르면 1997년부터 2004년 사이 전체 신규 기업 창업은 9% 증가하는 데 그친 반면 여성의 창업은 17%나 늘어났다.  

10. 06. 29.  

P.S. 같이 읽어봄직한 책은 <여자의 뇌, 여자의 발견>(리더스북, 2007)의 속편으로 나온 루안 브리젠딘의 <남자의 뇌, 남자의 발견>(리더스북, 2010)이다. 소개는 이렇게 돼 있다. 

베스트셀러 <여자의 뇌, 여자의 발견>에 이은 하버드대학교 신경정신과 루안 브리젠딘 박사의 후속작. 생생한 문장과 흥미진진한 일화를 통해 남자 뇌의 일생에 대한 복잡한 연구 결과를 매우 읽기 쉽고 재미있게 풀어냈다. 남자가 바람을 피우는 이유, 게이가 되는 비밀, 남자가 아빠가 되면 자상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 등에 대해서 궁금하다면 이에 대한 호기심을 해결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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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세알 2010-06-29 17:04   좋아요 0 | URL
'전쟁을 선호하고 모험을 즐기고 영웅을 숭배하는' 남성성을 왜 지켜야할까요? 좀 줄어들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로쟈 2010-06-29 17:08   좋아요 0 | URL
소위 보수적 남성관이죠. 축구에 대한 열광을 보면 남성성에 대한 숭배는 쉽게 줄어들 거 같지 않습니다...
 
주권 너머의 세계공동체

이번주 시사IN의 서평란 '7월의 책꽂이'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책꽂이'는 매달 첫 주에 나가는데, 내겐 격월로 차례가 오는 걸로 알지만 내부 사정으로 지난달에 연이어 '인문사회과학' 꼭지를 맡게 됐다. 몇 권의 후보작 가운데, 우카이 사토시의 <주권의 너머에서>(그린비, 2010)를 다루었는데, 같이 후보작에 들어 있던 발리바르의 <우리, 유럽의 시민들?>(후마니타스, 2010)도 조금 걸쳤다(물론 다 읽을 여유는 없었다). '주권 너머' 혹은 '트랜스내셔널'이란 주제에 관해서라면 최근에 나온 임지현 교수의 <세계사 편지>(휴머니스트, 2010)도 같이 참조할 수 있겠다. 아, 그렇게 되면 사카이 나오키도 있고, 니시카와 나가오도 있고...    

 

시사IN(10. 07. 03) 국가와 국민을 '해체'하다

“어느 나라 국민이냐?” 참여연대가 천안함 사건과 관련하여 정부와 다른 의견서를 유엔에 제출하자 정운찬 총리가 내뱉은 말이다. 매섭기로는 매카시즘의 언어 못지않다. “어느 나라 정부냐?”란 물음을 되돌려주면서 동시에 ‘국가란 무엇인가’를 다시금 질문하게 된다. 무엇이 국가이고 무엇이 주권인가. <주권의 너머에서>의 저자 우카이 사토시가 던지는 질문이기도하다. 

1964년 도쿄 올림픽 때 소학교 4학년이었던 그는 일본선수를 응원하면서 히노마루(일본국기)와 기미가요(일본국가)에 갈채를 보냈다. 그러나 5학년이 되자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 ‘소국민’에 대해 거리감을 갖게 된다. 자신이 부르던 노래와 흔들던 깃발에 불쾌감을 느끼며 ‘국민으로의 길’에서 일탈하기 시작했다. 천황제와, 식민지 지배, 침략전쟁, 그리고 내외의 전쟁 피해자에 대한 보상 거부 같은 일본의 현대사에 대한 인식이 깊어질수록 ‘나쁜 국가’에 대한 그의 직관은 확신이 됐다. ‘주권 너머’에 대한 이론적 모색과 성찰에 몰입하고 있는, 한 일본 지식인의 전력이다. 

세기 전환기의 대략 10년간 쓴 글들을 모은 이 책에서 우카이 사토시가 성찰 대상으로 삼고 있는 현실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의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침공, 대테러전쟁을 명분으로 내세운 미국의 패권주의와 일본의 우경화, 노숙자와 외국인 문제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우카이 사토시는 이런 것은 문제의 표면이고 그 바탕에 놓여 있는 것은 주권의 문제라고 본다. 그는 에티엔 발리바르의 ‘주권론 서설’에서 이론적 시사점을 얻어오는데, 마침 발리바르의 글은 최근에 나온 <우리, 유럽의 시민들?>(후마니타스)에 ‘주권 개념에 대한 서론’으로 소개됐기에 참조할 수 있다.  

발리바르는 칼 슈미트의 주권론을 재검토하면서, 슈미트에게 주권은 항상 국경 위에서 설립되고 국경의 부과로 실행된다고 지적한다. “주권자란 예외상태에 관해 결정하는 자”라는 슈미트의 주권이론과 “정치란 친구와 적을 구분하는 것”이란 그의 유명한 정의가 국경의 문제에서 조우한다고 말한다. “국경은 ‘정상적인’ 법질서에 대한 통제와 보증이 중지되는 대표적인 장소이자 ‘폭력의 합법적 독점’이 예방적인 대항 폭력의 형태를 띠는 장소다.”

과거 16세기부터 20세기 사이에 지역을 구획하거나 세계의 지도를 그리는 국경의 확정에서 유럽은 중심적 역할을 했다. 근대적 주권 국가는 그러한 영토화를 통해서 탄생했다. 문제는 “과거 수세기에 결쳐 형성되어 온 유럽의 정치문화와, 유럽연합의 구축이라는 현재의 과제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근본적인 괴리이다.” 전쟁과 내란을 통해 극히 폭력적으로 진행되었던 집단적 주체의 구축 과정, 곧 국민의 발명 과정을 다시금 반복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카이 사토시와 발리바르가 공통 화두로 ‘국민국가 패러다임’을 넘어설 수 있는 대안, 곧 주권에 대한 대안을 성찰하는 것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다.   

'주권의 너머'를 위해서는 '환대의 사유'가 필요하다
국민국가의 패권주의와 폭력에 대해 ‘저항의 논리’로 맞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우카이 사토시가 ‘주권의 너머’를 모색하기 위해 제안하는 것은 ‘환대의 사유’다. 노숙자(노상생활자)와 외국인에 대한 차별과 배척이 전 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시점에서 ‘주인’이 ‘손님’에게 행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하는 전환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물론 ‘사유’와 ‘촉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환대의 실천을 막는 ‘주권의 윤리’를 “실효성 있게 탈구축하는 과제”가 아직 저자의 몫으로 남아있다. “어느 나라 국민이냐?”는 물음을 ‘해체’하기 위해서라면 우리도 나눠가져야 할 몫이다. 

10. 06. 28. 

P.S. 마지막 문단의 '탈구축'은 데리다의 용어 '디컨스트럭션(deconstruction)'의 일어 번역이다. 우리가 보통은 '해체'라고 옮기는 단어다. 우카이 사토시는 데리다의 제자라고 하며 데리다의 <우정의 정치>, <맹인의 기억> 등을 일본어로 옮긴 바 있다. 그가 발리바르에게서 재인용하고 있는 건 칼 슈미트의 <대지의 노모스>에 나오는 내용인데, 국역본은 현재 절판된 상태다. 칼 슈미트의 주저들이 조만간 다시 나오는 것으로 아는데, 이 책도 재출간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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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종강은 이미 지지난주에 했지만 오늘에서야 성적처리를 마무리지었기에 실질적인 방학은 이번 주부터다. 하지만 또 곧장 외부 계절강의와 문화센터 강의가 당장 한 달 간 잡혀 있어서 방학 기분을 내는 건 호사스런 일이다. 저녁에 원고 하나를 보내고 나서야 일과가 저무는 듯싶지만 밤에는 또 중요한 '업무'에 돌입해야 한다. 막간에 들여다본 교수신문에서 대담집 <휴머니스트를 위하여>(사계절, 2010)에 대한 서평기사를 옮겨놓는다. 제목보다는 부제 '경계를 넘어선 세계 지성 27인과의 대화'가 책의 내용을 더 잘 말해준다. '27인과의 대화'이니만큼 분량도 본문만 557쪽이다. 한 꼭지씩 읽으면 한 달 읽을거리다(내가 제일 먼저 읽은 건 프랑스 철학자 미셸 세르 편이다. '아름다움, 아름다움만이 우리를 구해줄 겁니다'란 타이틀에 끌려서). 여름을 건강하게 나려면 먹는 것도 잘 먹고 책도 잘 챙겨읽어야 한다. 이럴 때 "책도 잘 먹어야 한다"고 해야겠군...   

  

교수신문(10. 06. 28) 경계를 넘어 시대와 세계 고민한 27명의 ‘다르고 같은’ 목소리  

대담집의 매력은 무엇일까. 활자로 축 늘어져 있는 텍스트의 무미건조함을 찾아볼 수 없는, 긴장감 있고, 뒤틀릴 수도 있으며, 때로는 반복되기조차 하지만, 생생한 현장감 있는 고민의 목소리에서 그 매력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버드대 국제문제연구소 과학분과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콘스탄틴 바를뢰벤이 8년에 걸쳐 ‘석학’ 27명을 만나 세계화·인권·생명공학을 공통주제로 대화를 나눈 책 『휴머니스트를 위하여』는 확실히 이런 지적 긴장감과 생생한 고민을 현장 중계하듯 보여주는 책이다. 원제는 ‘Le Livre des Savoirs: Conversation avec les Grands Esprits de Notre Temps’(Grasset & Fasquelle, 2007)로, 전문 번역가 강주헌 박사가 번역했다.

이 대담집의 탄생은 ‘문화를 초월한 시각적 총서’라는 프로젝트와 관계있다. 그것은 20세기를 대표하는 석학들을 찾아 세계 곳곳을 다니며 그들과 나눈 이야기를 방송과 책으로 만드는 방대한 프로젝트였다. 저자는 ‘대담은 창조적 과정이 포함되기 때문에 어려운 작업’이라고 토로한다. 그의 말을 그대로 빌면 “입말의 직관적 지혜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대담에는 학문적 경직성이 없다. 따라서 대담이 제대로 진행되면 위대한 예술가나 사상가가 내면에 감춘 비밀까지 드러낼 수 있다.” ‘내면의 비밀’이 드러날 때, 이를 달리 말하면 ‘사상의 깊이’의 드러남이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이를 위해 저자는 ‘20세기에 깊은 족적을 남긴 석학들’을 선정했다. 물론 ‘21세기에 미칠 영향’도 간과하지 않았다. “미술과 문학, 종교와 문화, 인류학과 자연과학, 음악 등의 분야에서 학문적 한계를 뛰어넘어 지식의 한계까지 이른 석학”을 대상으로 했다.

저자는 이들을 이렇게 표현한다. “에드문트 후설의 표현을 빌리면 그 시대의 ‘지적 상황’에서 제기된 근본적인 문제에 도전한 인물 (……) 20세기의 터전을 닦은 인물로, 현재와 미래의 도전에 대한 견해를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는 지성들이다. 27명의 대담자들은 문학(고디머, 푸엔테스, 소잉카, 오즈 등)과 음악(메뉴인), 건축(니마니어, 존슨), 과학(굴드, 프리고진 등), 철학(세르, 크리스테바), 정치(부로토스 갈리, 헌팅턴), 역사(슐레징거, 두웨이밍), 인류학(레비스트로스), 종교(파니카르, 푸파르), 매체·미디어 이론(드브레, 비릴리오)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전문가일 뿐만 아니라 분야의 경계를 넘어 시대와 세계에 대해 고민하고 발언한 지식인이자 사상가들이다. 이들은 대담에서 갈등과 충돌로 점철된 지난 세기와 자신의 생애를 반추하고, 세계화와 문명 간 단절이 심화되고 있는 우리시대를 성찰한다. 



물론 이 27명의 ‘석학’ 명단은 서구중심적이며, 대체로 인문주의자들이라는 점에서 관점에 따라서는 고개를 갸웃할 수 있다. 특히 철학에서 세르와 크리스테바, 정치에서 헌팅턴 등이 언급된 데는 눈이 둥그레질 수도 있다. 그러나 대담 진행 과정, 저자의 기획 의도 등을 고려한다면 이 ‘석학’ 명단 구성보다 이들 ‘석학’의 입을 통해 무엇을 끄집어내려 했는가를 중시할 필요가 있다.

27명의 대담자들은 서구와 비서구, 문명의 공존과 충돌, 과학기술의 가능성과 한계 등을 둘러싸고 서로 다른 견해를 보이지만, 그럼에도 전 세계적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열린 마음으로 타자와 대화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타자와 세계를 편견 없이 바라보고 대화할 것을 강조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옮긴이가 지적한 것처럼, 관점에 따라 같은 대상도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만큼 개념에 대한 정의를 공유하는 것은 대화의 전제조건이다. 옮긴이 강주헌 박사는 이 정의를 두고 ‘사물이나 현상에 접근하는 관점’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흥미로운 대목이다.(최익현 기자) 

10. 06.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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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 2010-06-28 21:27   좋아요 0 | URL
저기 27인에는 안 들어갔지만, 타르코프스키의 <노스탤지어> 초입에 나오는 '혼자 보는 이 아름다움이 무슨 소용 있는가'라는 대사가 세르의 '아름다움'과 대구를 이루는 것도 같네요...

로쟈 2010-06-28 22:00   좋아요 0 | URL
원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미가 세계를 구원하리라'를 떠올려주는 말이죠. 도스토예프스키나 타르코프스키나, 입니다.^^

sophie 2010-06-29 10:53   좋아요 0 | URL
개인적으로는 '심리적 공간의 파괴'라는 지적이 눈에 들어오네요. 앙드레 고르의 에콜로지카를 읽으면서 느낀건데 때로는 인터뷰 기사나 대담의 형식이 책 내용보다 더 많은 걸 알려줄 때가 있는 것 같아요. 그나저나 나오는 책마다 페이지 수가 어마어마해서 앞으로 300 페이지 이하로 제한하고 싶은 충동이 드네요. 아후~

로쟈 2010-06-29 17:10   좋아요 0 | URL
절반의 책이 제거되겠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