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자 한국일보에 실리는 좌담기사를 옮겨놓는다. 마이클 센댈의 화제작 <정의란 무엇인가>(김영사, 2010)가 지금 한국사회에서 왜 읽히나를 화두로 삼아 장동진 연세대 정외과 교수와 대담을 나누었다. 오늘 오전의 일인데(연장전까지 간 월드컵 결승전 여파로 하루 종일 피곤하다), 대담이라곤 하지만 기자의 질문에 응답한 내용이 대담기사로 재구성됐다. 듣자 하니 초판 5만부를 찍은 책은 현재 11만부 가량이 판매됐고, 이런 추세라면 30-40만부는 무난하리라는 전망이었다. 현 시점에선 '문화적 사건'과 '사회적 현상' 사이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한국일보(10. 07. 13) "한국, 형식적 민주화 이후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마이클 샌델(57) 하버드대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김영사 발행)가 오프라인서점 교보문고와 온라인서점 예스24, 알라딘 등의 7월 첫주 종합 베스트셀러 집계에서 모두 1위에 올라 화제를 뿌리고 있다. 교보문고의 경우 인문서가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 것은 2002년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1> 이후 8년, 철학서로는 2000년 <노자와 21세기2> 이후 10년 만의 일이다. 출판계는 '문화적 사건'으로 여기는 분위기다.

출판사 측은 "독자층의 70%가량이 20~30대이며, 여성 독자들도 40%대로 상승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 젊은이들은 왜 '정의'를 묻고 있는가. 정의론 분야 전문가인 장동진(57)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와 '로쟈'라는 필명으로 잘 알려진 인터넷 서평가 이현우(42ㆍ서울대 노어노문학과 강사)씨의 대담을 마련했다. 



▦이현우= 저도 이 책이 나오자마자 구입해서 블로그에 소개했습니다. 이 책이 많이 팔렸으면 좋겠다고 바랬는데, 제가 걱정할 게 전혀 아니었어요.(웃음)

그동안 공동체주의 정치철학자들의 책이 국내에 소개됐고 이론가들이 여러 번 방한하기도 했고 강연집도 나와 있어요. 근데 이런 책들은 다 관심을 받지 못했어요. 그러니까 이 열풍이 마이클 샌델이란 저자나 정치철학 자체에 대한 관심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거죠. 그럼 뭐냐. 우선 타이틀이 주는 효과인데, 천안함 사건, 4대강 논란, 지방선거 국면에서 현 정부의 실정이 도마에 오르면서 <정의란 무엇인가>란 제목의 문제 제기가 시의적절했어요. 2008년 촛불 정국 때도 <죽음의 밥상>이란 책이 1만부 정도 나갔다고 합니다. 이 책도 수만 부 정도는 나가겠구나 예상은 했는데, 그것을 뛰어넘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러면 뭘까. 진지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무엇보다 잘 읽힌다는 점입니다. 하버드 효과 얘기들을 하지만, 하버드 최고 인기 강의라 해도 읽기 어려우면 이런 반응이 나오지 않겠죠. 책에서 다루고 있는 벤담이니 칸트, 롤스는 사실 쉽게 접하기도 어렵거니와 이해하기도 어려운데, 그런 철학자들 얘기를 하는데도 귀에 쏙쏙 들어온다는 거죠. 심지어 재미있기까지 하고. 독자들 스스로도 놀라워하는 거 같아요. 폼으로 읽는게 아니라는 겁니다. 인문서로 크게 화제가 된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도 많이 팔렸지만 실제로 다 읽은 독자는 많은 거 같지 않아요. 근데 이 책은 독자들이 별점을 네댓 개 주면서 정말 좋은 책이라고 서평을 남겨요. 그만큼 읽고 공감했다는 뜻이죠.

▦장동진= 또 다른 원인으로는 지금의 우리 정치 현실을 들 수 있을 겁니다. 현 정당정치에 국민들이 많은 회의를 느끼고 '이들이 과연 우리를 위해서 일하고 있는가', '파당적 이익을 대변하는데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불신이 팽배한 상황에서 '정의'란 말이 우리사회의 어떤 결핍과 갈증을 채우는 역할을 한 것 같습니다. 우리 사회가 어떤 근본 원칙 하에서 움직이고 작동해야 하는가, 서양에선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 그런 관심을 촉발시킨 것이죠.

특히 청년실업으로 고통받고 있는 20대가 이 책에 주목한 것을 보면 이들이 우리 사회의 비전에 대해서 뭔가 암울하다, 부당하다고 무의식적으로 인식해왔던 것 같아요. 그동안 우리사회가 민주화운동으로 제도적 민주주의가 정착됐지만, 20대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공평한 기회가 보장되지 않는다고 느끼고 있는 거죠. 한편으로 그들이 이 사회에서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혼란스런 상황에 처해있기도 하고요. 공평한 기회를 박탈당했다는 불만과 이런 사회를 바꾸고 싶다는 마음이 얽혀서 정의에 대한 관심으로 표출된 게 아닌가 싶어요.

▦이= 현 정부가 민주적 절차에 의해서 세워진 정통성과 합법성을 가진 정부인데도, 촛불 때도 그랬지만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내세우는 게 어쩌면 모순적인데요. 문제는 우리사회의 제도적 절차적 형식적 민주주의가 수십년 간의 노력을 통해 성취된 것이긴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다'라는 문제의식이 커졌다는 것입니다. 민주주의의 내실이 필요하다는 거죠. 민주주의는 분명히 하고 있는데, 그 결과가 부패나 빈부격차의 확대 등으로 나오니까요. 그 때문에 이 책이 던지는 정의라는 기표가 화두처럼 젊은이들에게 와 닿았다고 봅니다.

▦장=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정의 담론 자체가 거의 없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사실 과거에는 정의라는 게 독재정권 타도하고 민주주의 확립하는 거였죠. 그게 명백했기 때문에 따로 정의라는 담론이 필요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2000년대 들어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문제가 사회 곳곳에서 대두되면서 학자들 간에 이론적인 면에서 논의가 오갔습니다.

이 책을 계기로 정의 담론이 일반 담론으로 확대된다면 우리사회의 근본적인 원칙에 대해 새롭게 반성하고 성찰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정의는 공동체의 근본적인 운영 원칙입니다. 자유주의적 이념, 시장적 원리, 민주주의 원리 등의 큰 근간이 어떻게 조합돼야 하느냐는 점인데, 이 원리가 구체화되면 헌법이 되고 더욱 세분화하면 법과 정책이 되겠죠. 이 근본 원칙이 잘못되면 어떤 사람은 유리하고 어떤 사람은 불리하게 되는, 사회구조적 불평등을 양산하게 되는 겁니다. 정의 담론의 확산으로 우리 사회가 근본적으로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를 새삼 인식하고,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가를 논의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샌델이 책 결론부에서 강조하는 공동체주의나 공동선의 정치가 한국적 정서와 맞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1970~80년대에 자유주의가 주입됐지만, 우리에게는 아직도 가족애나 애국심 등이 더 친숙한 가치이죠. 그런 점도 이 책을 쉽게 받아들이게 하는 요인인 것 같아요.

▦장= 이 책이 개인의 자유나 권리보다 공동체주의적 성향이 강한 한국적 정서와 맞아떨어진 부분입니다. 샌델은 또 사회적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해 시장의 자유에 대해 구조적 제한을 둬야 한다는 입장인데, 이런 점은 국내 진보 진영의 생각과도 부합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샌델은 중도좌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장에 개입하기 위해서는 결국 국가의 능력을 인정해야 하고, 이럴 경우 '확대된 국가'의 위험성이 있습니다.

샌델은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협력해서 공공선에 참여할 수 있고 정치적 영역에서도 도덕적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보는데, 중립적 자유주의자가 보기엔 이게 낭만적 생각이라는 거예요. 도덕적 판단을 개입시키면 매우 복잡해집니다. 샌델이 말하는 '덕성 정치'가 우리 사회에 많은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은 맞지만, 그것이 실현될 경우 '강한 국가'라는 또 다른 문제를 낳을 수도 있어요. 그의 주장은 아직 이론적으로 완성이 안됐다고 생각해요. 책의 뒷부분이 앞부분과 달리 명쾌하지 않은 것도 이런 점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 책을 통해 정의 담론이 확산되는 것은 매우 긍정적입니다. 공정하고 정당한 제도 여하에 따라 우리 삶의 조건은 달라집니다. 정의가 이제 막 사회적 담론이 되기 시작하는 단계인데, 선진국으로 가기 위해선 반드시 거쳐야 하는 문제입니다

  

■저자 마이클 샌델은

미국 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델(57ㆍ사진)은 공동체주의 이론의 대가다. 브랜다이스대 졸업 후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27세 때인 1980년 하버드대 최연소 교수가 됐고, 자유주의 이론의 대가인 존 롤스의 정의론을 비판하며 '공동체주의'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1982)를 발표하면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하버드대 학부생을 대상으로 한 그의 강의 '정의'는 2007년 가을 학기 수강생이 하버드대 사상 최대인 1,115명을 기록하는 등 20여년 간 1만 4,000명 이상이 수강했다. 이 강의는 하버드대와 보스턴 공영방송(WGBH)이 2007년 편당 50분의 TV시리즈 12편으로 제작해 방송했는데, 온라인(www.justiceharvard.org)으로 강의를 보면서 토론에 참여할 수도 있다.

10. 07. 12.  

P.S. 기사 말미에 나온 대로, 장동진 교수는 샌델의 '덕성 정치' 혹은 공동체주의 정치철학이 아직 미완성이며 해결해야 할 과제들을 많이 남겨놓고 있다고 주장한다. 존 롤스 전공자다운 식견으로 보였다. 실제로 장 교수는 <정의론> 이후 롤스의 대표작인 <정치적 자유주의>와 <만민법>을 우리말로 옮겼으며 자유주의 정치철학에 대한 해설서 <현대자유주의 정치철학의 이해>(동명사, 2001)의 저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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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onanoc의 생각
    from conanoc's me2DAY 2010-07-13 22:14 
    왜 읽히나 철학서적이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게 10년만이라는.
  2.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공동체주의적 접근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8-20 08:45 
    <정의란 무엇인가>로 적어도 한국과 일본에서는 붐을 일으키고 있는, 마이클 샌델 교수의 방한 기자간담회 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어제 이사중에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서평을 청탁받아서 겸사겸사 챙겨놓는 것이기도 하다. 일정상 외부 청탁원고는 사양하고 있지만 이미 읽은 책인데다가 언론 인터뷰 등에 응한 바도 있어서 나대로의 감상을 정리해두려고 한다. 여건상 9월초에나 쓰게 되겠지만. 기사 중에 '글로벌 교
 
 
2010-07-13 00: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13 08: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콩세알 2010-07-13 06:32   좋아요 0 | URL
약간은 회색눈으로 이 현상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래도 궁금해져서 소개해 주신 사이트에 가서 첫강의를 들었습니다. 오디오 강의는 물론이고 비디오 강의도 컴퓨터 앞에 앉아서 10분 이상 듣기가 힘들었는데 파트1을 한번도 자리를 뜨지 않고 다 봤습니다. (고맙게도 자막도 깔아주더군요. ^^ ) 상당히 흡인력이 있는 강의더군요. 엄청나게 많은 학생들이 강의를 듣는 것도 인상적이었구요. 책이 재밌을 것 같다는 실감이 옵니다. 사이트 소개 감사합니다.

로쟈 2010-07-13 08:11   좋아요 0 | URL
20대 대학생이나 직장 여성까지 손에 든다는군요. 신드롬의 경계쯤에 와 있는 거 같습니다...

mirror 2010-07-13 07:36   좋아요 0 | URL
절차적 형식적 민주주의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깨닫게 되었다고 하셨군요? 지금 한국 사회의 문제가 형식적 민주주의가 잘 지켜지고 있는 상태에서 발생하는 문제라는 거죠? 홉스 이래의 자유주의적 정치철학에 기반한 자유민주주의의 정치체제가 시민들의 자유를 억압해도 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나요? 언론이 정권과 결탁해서 왜곡을 밥먹듯이 하는 것이 절차적 민주주의가 잘 되는 나라에서 발생하는 일들입니까? 현정부는 민주주의적인 절차를 통해서 집권했으나, 통치방식은 민주적이지 않습니다. 형식적 절차적 민주주의에 어긋나는 방식으로 통치하고 있는 것이죠. 이것은 자유주의와 공통체주의의 논쟁 이전의 문제들입니다.

로쟈 2010-07-13 08:17   좋아요 0 | URL
"민주주의적인 절차를 통해서 집권했으나, 통치방식은 민주적이지 않습니다"가 공통적인 전제입니다. 저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란 말을 살짝 비틀었을 뿐입니다. 형식적 민주화 이후에 정치는 더이상 문제될 게 없다는 인식이 벽에 부닥친 것이라고 봅니다. 현 집권세력을 '반민주 세력'으로 몰아붙일 수도 있지만 크게 어필할 거 같지 않습니다. '불의한 세력'이라고 하면 사정이 좀 다르죠. 더구나 '정의'는 오랫동안 5공(민주정의당)의 전유물이고 그 유산이었습니다(선점효과죠). 이젠 되찾아야 할 프레임이라고 생각합니다...

2010-07-13 09: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13 09: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13 12: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13 12: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콩세알 2010-07-13 11:21   좋아요 0 | URL
리바이어던을 얼마전에 읽고 있었는데 홉스는 정치체제가 자유를 억압해도 된다고는 안했지만 목숨을 지키려면 알아서 내어놓으라고 하는 것 같더라구요. 그리고 자유란 주권자가 법률이나 명령의 방식으로 간섭하지 않는 부분에서만 허용된다고 하구요. 그런데 이런 홉스가 로크로 로크가 밀로 그리고 자민당(lib-dem)으로 신자유주의로 간다고 하는데 영 헷갈려요.

로쟈 2010-07-13 19:18   좋아요 0 | URL
서양정치사상사 종류를 참고하셔야 하나 봅니다...

kumun 2010-07-13 13:37   좋아요 0 | URL
저는 이 현상에 윤리 인강에서 가장 유명인사인 '이현'씨의 강의가 기여한 바가 크다고 생각하는데요. 우리나라가 얼마나 썩은 사회인지를 말하시면서 정의를 말하면 바보가 되는 사회라고 하셨죠. 우리나라가 얼마나 썩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면서...
또한 자신은 노무현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노무현 정부가 역사상 가장 깨끗한 정부였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고 하셨죠. 이 부분만 편집이 돼서 인터넷 유머사이트 등에서 많이 화제가 됐었죠.
또한 몇년 동안 우리나라에서 윤리과목을 선택하는 많은 수의 학생들이 그 선생님의 강의를 들었을 것을 생각하면 무시못할 영향력이 아닌가 싶습니다....

로쟈 2010-07-13 19:14   좋아요 0 | URL
새로운 해석이네요.^^ 젊은 네티즌에겐 어필했을 것도 같습니다...
 

이번주 한겨레21에 실은 '문화면' 기사를 옮겨놓는다. '출판면'은 그만두었지만 '문화면' 청탁까진 거절할 수 없었는데, 더구나 인문학 커뮤니티 '비평고원'에 관한 것이었다. '내부자'이기도 하기에 안과 밖에서 보는 비평고원에 대해 적어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그래봐야 시간에 쫓기며 작성한 거라 주문내용이 다 들어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여하튼 '불멸회원 로쟈가 회고하는 인문학 커뮤니티 비평고원 성장사'이자 '10주년 카페북 출간을 계기로 돌아본 어제와 오늘'이 글의 컨셉이다.    

한겨레21(10. 07. 19) 인문학 강호를 뒤흔든 비평의 강호

시작은 미미했다. 2000년 봄, 지방대학의 국문학과를 졸업한 한 청년이 대학원 진학을 위해 서울로 ‘유학’왔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서울살이에 외로움을 느끼다 마침 등장한 인터넷 세계에 빠져들었고, 별다른 생각 없이 ‘쿤데라와 고진의 고원’이라는 인터넷 카페를 만들었다. 전자메일이 상용화된 지 1년 남짓이었고 ‘카페’라는 이름의 온라인 커뮤니티가 붐을 타기 시작하던 때였다. 그가 좋아하던 작가가 밀란 쿤데라여서 운영자 닉네임은 ‘쿤데라’로 정했다. 관심을 갖던 일본의 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의 책들이 두세 권 출간되어 그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의 <천 개의 고원>은 아직 번역되지 않았지만 인문학 동네의 ‘전설’로 떠돌고 있었다. 일종의 팬카페였던 ‘쿤데라와 고진의 고원’은 이들을 조합한 이름이었다.   

그들이 미약한 시작 '쿤데라와 고진의 고원'
쿤데라 소설의 애독자이자 고진의 <탐구>를 흥미롭게 읽은 터라 나는 우연히 발견한 이 카페에 호감을 느끼고 가입하여 댓글을 남기기 시작했다.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대학과 학원의 강사생활을 하면서 ‘로쟈’란 필명으로 인터넷 세상을 어슬렁거리던 때였다. ‘도스토예프스키’란 팬카페를 나름대로 운영 중이었지만 더 열심히 글을 올린 곳은 ‘쿤데라와 고진의 고원’이었다. 그건 소위 대화의 ‘상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령 “쿤데라 작품엔 절대적인 가치(구원)이나 종착역이 존재하지 않고 웃음은 바로 그 작품 전체구조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세상 전체가 농담이 되는 것이죠. 한데, 도스토옙스키 작품엔 웃어서는 안 되는 ‘종착역’(구원)이 전제된 상태로 현실에 역투사되고 있습니다. 그의 작품에서 유머는 진지함을 보충해주는데 그치고 있습니다.”라고 주인장이 주장하면, 나는 “도스토옙스키에게 웃어서는 안되는 종착역이 있다는 건 그의 사상의 경우에 국한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아시다시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도 미완성작이고, 거기엔 별개의 사상과 감정들이 극단의 스펙트럼까지 공존하며 이질적인 웃음과 비장함을 빚어내고 있습니다”라고 반박하는 식이었다.  

아주 무겁지는 않더라도 제법 ‘진지한’ 대화가 자주 오고 갔고, 카페엔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인문학 전공자뿐만 아니라 대학생과 직장인이 가세했고, 관심사도 더욱 넓어졌다. 거기에 보조를 맞춰 2004년 말에는 카페명이 ‘비평고원’으로 개명됐다. ‘쿤데라와 고진’이라는 특수성이 ‘비평’이라는 보편성으로 전화된 사례라고 할 만하다. 닉네임을 ‘소조’로 바꾼 운영자 조영일씨의 표현을 빌면, 비평고원은 곧 인터넷 공간의 ‘강호’가 됐다. 카페 개설 10주년을 기념해 출간된 책 <비평고원 10>(도서출판b 펴냄)의 서문에서 그는 이렇게 적었다.  

“무협소설에 비유하자면, 한국 지성계가 환관들에 의해 유지되는 국가기구의 하나(교육장치)라면, 비평고원은 오로지 자신의 무공에 의지하여 ‘의(義)’를 행하는 강호(또는 무림)라 하겠다.”   

그들의 강력한 무기, 고진과 지젝
얼마간 과장된 것이긴 하지만, 이 재치 있는 비유에는 지난 10년간 온라인 인문학의 대표적 커뮤니티로 성장한 비평고원에 대한 자부심이 담겨 있다. 2007년부터는 언론의 본격적인 주목까지 받게 된 비평공간(*비평고원)은 이미 “저마다 무림의 고수를 자처하며 갈고 닦은 내공으로 일합을 겨루는 공간”(한겨레), “고수들이 학벌이나 나이 등에 구애받지 않고 오로지 필력으로만 자웅을 겨루는 공간”(경향신문) 등의 평판을 얻은 터다. 조영일씨는 한걸음 더 나아가 비평고원의 존재의의를 한국사회의 “관료지성에 대한 일반지성(또는 대중지성)의 강력한 비판”이라고까지 규정했다. 크라운판 1072쪽에 달하는 이 묵직한 책의 무게가 그 비판의 무게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 ‘관료지성’에 대한 비판의 ‘무기’로 비평가 가라타니 고진과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자주 참조된 것도 비평고원의 특징이라 할 만하다.  

 

사실 조영일 씨는 가라타니 고진 선집을 기획한 ‘전담 번역자’이기도 하며, ‘로카드’란 닉네임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성민씨 역시 지젝과 그의 친구들인 ‘슬로베니아 라캉학파’의 책 다수를 한국어로 옮겼다. ‘로쟈’ 또한 이들에 대한 글을 온라인에 많이 올린 사람 중 하나다. 한국 지식사회에서 고진과 지젝, 두 사람이 누리고 있는 평판의 상당 부분은 비평고원에 빚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카페출석부’까지 포함하여 전체 11부로 구성된 <비평고원10>은 그러한 비평고원 10년의 궤적을 담고 있다. 조영일씨는 이 책을 ‘비평고원 베스트앨범’이라기보다는 ‘비평고원 매뉴얼’로 생각해주기를 당부했는데, 이 유례없는 ‘카페북’ 혹은 ‘커뮤니티북’에서 차별적인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은 ‘논쟁의 고원’ 장이다. 3편씩 대논쟁과 소논쟁이 선별됐는데, ‘카페 소통 논쟁’ ‘레비나스 논쟁’ ‘번역 논쟁’ 등이 대논쟁의 주제다. 책은 온라인 논쟁의 특성을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서 많은 분량의 댓글까지도 그대로 옮겨놓았다. 편집자에 따르면, 이 논쟁적인 글들은 “탁월한 학술적 논쟁 혹은 고도의 공동 사유의 결과물이 아니다. 오히려 인터넷이 노정하는 취약성을 드러내고,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균형점을 찾으려는 지속적 ‘불균형 상태’를 보여주는 글들”이다. 그러한 ‘불균형 상태’야말로 제도권의 ‘관료지성’이 드러내놓기 꺼려하고 기피하는 부분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거꾸로 이 독특한 ‘학술공간’이 예외적인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비결일지도 모른다.  



비평고원이 10년 동안 지속될 수 있던 원동력으로 조영일씨는 ‘오프라인적 요소의 배제’를 꼽았다. 다른 온라인 지식 공동체들이 오프라인화를 추진하면서 흐지부지해진 사례와 견줘 그렇다는 것이다. 카페의 정기모임은 1년에 고작 한두 차례 정도이니 비평고원의 핵심 회원(‘불멸회원’)들조차 서로의 ‘안부’를 잘 알지 못한다. 지난 7월3일 저녁 서울 신촌의 한 음식점에서 열린 카페 정기모임은 그런 의미에서 드문 자리였다. 물론 <비평고원 10> 출간을 기념하면서 10주년을 자축하는 자리였다. 회원 30여 명이 모인 이 자리에서는 10년 후 <비평고원 20>을 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덕담으로 나왔다. 그게 현실이 된다면 아마도 온라인 커뮤니티의 또 다른 ‘기록’이 될 것이다. 

하지만 장밋빛 전망만이 있는 건 아니다. 카페의 회원 수는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현재 1만 명이 넘었지만 일일 방문자 수는 정체 양상을 보인다.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회원 수도 기대만큼 늘지 않고, 이 때문에 ‘전성기’가 지난 것이 아닌가란 인상마저 준다. 말하자면 재충전과 재도약이 필요한 시점이다. <비평고원 10>이 그 계기가 될 수 있을까.   

그들의 창대한 미래, '비평고원들'
비평고원의 회원이든 아니든 “비평고원이 한국지성계(또는 한국인문학)를 변화시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조영일 씨의 말에는 대부분 공감할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비평고원과 같은 인터넷커뮤니티가 10개 정도 된다면? 그리고 그것들이 10년, 20년 계속된다면?”이란 그의 질문이다. 이 질문이 여전히 우리를 들뜨게 한다면, 비평고원은 대표적 온라인 지식 공동체로서 앞으로도 꾸준히 자기 몫을 갖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비평고원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비평고원들’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것이다.  

10. 0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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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13 09: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13 09: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도서관에 반납해야 할 책들을 챙기다 보니 카자 실버만의 <월드 스펙테이터>(예경, 2010) 원서도 눈에 띈다. 지난 4월에 '이달의 읽을 만한 책'으로 올려놓으면서 서평도서 후보로 고려했다가 제쳐놓는 바람에 아직 읽지 못한 책이다. 부제는 '하이데거와 라캉의 시각철학'.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이긴 한데, 방학이 끝나기 전에 시간을 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주 드문 소개기사 하나를 스크랩해놓는다.    

 

주간한국(10. 04. 13) 바라보기를 통한 세계의 인식 

책의 제목인 '월드 스펙테이터(World Spectators)'는 본래 저자인 카자 실버만의 말이 아니다. 이 말은, 한나 아렌트에서 나왔다. 아렌트는 공간적으로 제한받지 않고 외부세계로 적극적으로 나아가는 시각의 주체, 그리고 사회에서 책임, 의무, 권리를 지닌 주체를 철학적으로 담아내기 위해 '월드 스펙테이터' 즉, '세계관찰자'란 말을 지어냈다.

저자인 카자 실버만은 이 말을 전복시켜 자신의 사유를 풀어낸다. 이 전복이 블록버스터 급이다. 그녀는 '외양'과 '존재'를 엄격하게 구분했던 서구 형이상학의 전통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녀는 말한다. "바라보아야 존재할 수 있다"고. 이 책의 핵심은 바라보기를 통한 세계의 인식이다. 참고로 그녀 실버만은 국내에서 정신분석학 틀을 이용해 사진과 영화를 분석하는 이론가로 알려져 있다. 저자의 이야기는 우리가 매일 만나는 대중문화, 사진과 영화를 새롭게 이해하는 하나의 툴이 될 수 있을 터다.

우선 저자는 소크라테스의 저 유명한 알레고리, '동굴의 우화'를 전복시킨다. 평생을 컴컴한 동굴에서 살아온 죄수가 어느 날 갑자기 환한 바깥세상을 경험하고 다시 동굴에 들어온다는 옛날 옛적 그리스 이야기를, 그리고 죄수는 이제 바깥 세계에 대해 말해야 한다는, 그 고통이 크더라고 세계의 존재를 말하는 것이 철학자의 사명이라는 전통적 해석을 저자는 '동굴 속 개별 죄수'에 집중함으로써 비틀어 버린다.

실버만은 동굴 속 죄수 각자는 주어진 세계에 던져진 존재로 모든 것이 제한적이고 부자유스럽지만, 적어도 자신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선택권을 가진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사물이 눈에 보일 때만 실제적으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녀는 말한다. "결국 세계가 나타나 존재하게 될지, 아니면 비(非)존재의 어둠으로 흐려져 사라질지를 결정하는 것은 오로지 우리 자신 뿐"(15페이지)이라고.

보기, 즉 시지각은 말하기, 언어에 앞서는 것이다. 그녀의 다음 전복 대상은 성경이다. 흔히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성경의 창조 이야기는 언어측면이 강조되지만, 실버만은 동물과 새가 아담 앞에 먼저 보이고, 그런 다음에야 아담이 존재의 이름을 말할 수 있음을 알려준다.

주체는 개별자이지만, 또한 그가 속한 세계와 분리되어 있는 단독자가 아니다. 본다는 것은 언제나 주체와 대상, 타자, 세계와의 관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실버만 식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타인에게 비춰질 때만, 존재한다. 나의 존재는 타자의 존재와 맞닿아 있는 것이다.

결국 저자는 진공상태의 단독자보다 현실 세계를 사는 집합체 속 개별 주체를 강조한다. 개별적이면서도 사회 안에 집합적으로 살아가는 세계관찰자, 월드 스펙테이터는 동굴 안을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에 놓이더라도 언어 이전의 영역에서 언어가 나타낼 수 없는 존재의 근본 조건을 볼 수 있는 시각적 역량을 지닌다.

이 책의 부재는 하이데거와 라캉의 시각철학이다. 그러니까 그녀, 실버만의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이데거와 라캉의 철학을 사유의 바닥에 깔고 시작해야 한다는 것, 하이데거와 라캉은 다시 플라톤과 프로이트의 사유에 기대고 있는바, 책을 읽어내기 위해 정신분석, 철학, 시각문화, 미술사 그리고 문학과 영화학의 다리를 건너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여행을 마칠 때쯤 동굴에 대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책임 있는 죄수, 현상을 비틀어 볼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날 수 있을 터다.(이윤주기자) 

10. 07. 12.   

P.S. 실버만의 책 가운데 관심을 끄는 타이틀은 몇 개 더 있다(원래는 <기호학의 주체>란 초기 저작으로 알게 된 이론가였다). 그나저나 말 그대로 '월드 스펙테이터'들이 주시하는 2010년 남아공 월드컵 결승전이 몇 시간 남지 않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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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12 04: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12 2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12 2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12 22: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12 22: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번주에 구입한 책의 하나는 에드워드 올비의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민음사, 2010)다. 제목이야 워낙에 널리 알려진 작품인데, 작가 올비는 "유진 오닐, 테네시 윌리엄스, 아서 밀러를 잇는 현대 미국의 대표 극작가"라고. 그런 명망의 출처를 이번에 확인해볼 수 있겠다. '신형철의 문학사용법'이 마침 이 작품을 다루고 있어서 스크랩해놓는다(아, 책은 이 칼럼을 읽고 구입한 듯하다).

한겨레21(10. 07. 09) 누가 환상 없는 실재를 두려워하랴?

김수영의 시 ‘전화 이야기’(1966)에 이런 구절이 있다. “여보세요. 앨비의 아메리칸드림예요. 절망예요./ 8월 달에 실어주세요. 절망에서 나왔어요./ …살롱 드라마이지요. 반도호텔이나 조선호텔에서/ 공연을 하게 돼요. 절망의 여운이에요./ …앨비예요, 앨비예요. 에이 엘 삐 이 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저 유명한 ‘푸른 하늘을’이나 ‘풀’ 같은 근엄한 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김수영의 ‘발랄한’ 면모가 잘 드러나 있는 시다. 이 시에서 김수영은 ‘앨비’라는 극작가의 살롱드라마 <아메리칸드림>의 번역 원고를 게재할 의향이 없느냐며 잡지사 담당자와 어딘가 서글픈 협상을 벌인다. 근데 앨비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아무 설명이 없다.  

정확한 발음은 앨비가 아니라 올비다. 에드워드 올비(Edward Albee). 김수영이 언급한 <아메리칸드림>(1960)보다는, 누구나 제목 정도는 들어봤음직한,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1962)라는 작품으로 더 유명한 극작가다. 1959년에 <동물원 이야기>로 데뷔했고 팔순이 넘은 지금도 여전히 활동 중이다. 미국문학사에서는 베케트나 이오네스코의 부조리극을 계승해 미국화한 대표적인 작가로 대접받고 있고, 현대인의 실존적 조건에 대한 가차 없고 무정한 관찰이 그의 주특기로 간주된다. <현대세계희곡선집>(동화출판사 펴냄, 1970)에 오화섭의 번역으로 수록된 적이 있는 이 작품이 이번에 다시 출간됐다(강유나 옮김, 민음사 펴냄).

저 유명한 제목 얘기를 안 할 수 없겠다. <파리 리뷰>(39호)의 인터뷰에 따르면, 이 문장은 어느 술집 거울에 씌어 있는 누군가의 낙서였다. 디즈니 만화영화 <아기돼지 삼형제>에 흘러나오는 노래 <누가 크고 나쁜 늑대를 두려워하랴?>를 패러디한 문장이다. 아기 돼지 삼형제가 집을 지어놓고 이제 늑대 따윈 두렵지 않다며 신나게 저 노래를 부를 때 늑대가 나타난다. 여기서 ‘big bad wolf’ 대신 ‘Virginia Wolf’를 집어넣은 것. 노래의 원래 맥락과 작가 버지니아 울프의 이미지가 혼합된 것일까. 저 문장이 작가의 머릿속에서는 “누가 허위의 환상이 없는 실재의 삶을 두려워하랴?”라는 물음으로 변주되었고 이 작품이 탄생했다.

바로 저 물음이 이 작품의 테마다. 환상과 실재의 대립이 그것. 우리의 삶은 스스로 의식 못하는 환상들의 부축을 받아 걸어간다. 특히 작은 환상들의 역할이 크다. ‘대한민국 언론은 진실을 보도한다’ 혹은 ‘대한민국은 지금도 여전히 민주공화국이다’와 같은 믿음이 환상이라는 것을 우리는 쉽게 인식하고 인정하지만, ‘나는 괜찮은 사람이고 사람들은 나를 좋아한다’ 혹은 ‘우리 부부는 행복하고 아이들을 엄마·아빠를 존경한다’와 같은 믿음들이 환상일 수 있다는 것은 잘 모르고 인정도 못한다. 만약 그 환상-목발을 빼앗기면 우리는 실재-삶을 견뎌낼 수 있을까. 이 작품은 한 부부의 정신적 난투극을 집요하게 따라가면서 그 환상의 스크린을 칼로 찢고 뼈를 발라낸다.

뼈 운운은 필자의 과장이 아니다. “뼈에 도달해도 아직도 다 간 게 아니지. 뼈 안에 여전히 뭔가 들어 있거든… 골수… 그게 우리가 목표로 하는 거야.”(172쪽) 연구서들에 따르면 이 희곡에서 가장 유명한 대사 중 하나다. 1막이 피부를 벗겨낸다면 2막은 뼈를 발라내고 있고 가장 결정적인 3막에 이르면 이 작품은 60년대 미국 중산층 가정의 환상의 골수까지를 쑤신다. 1963년에 초연되어 대성공을 거두고 당연하게도 그해 퓰리처상 희곡 부문 수상작으로 지명되었으나 퓰리처 위원회는 시상을 거부했다. “미국적 삶의 건전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게 이유였다. 작가로서는 더 영광스러운 일이었겠다.   

‘누가 두려워하랴?’라는 물음은 두렵지 않다는 뜻의 수사의문문이지만 이 작품의 마지막 대사는 이렇다. “내가… 조지… 내가… 두려워.”(193쪽) 가장 치명적인 환상이 폭로되고 정신적으로 침몰한 여주인공 마사가 내뱉는 탄식이다. 환상 없는 삶이 그토록 고통스럽다. 그러나 이 파국의 절정에서 도리어 기이한 희망의 조짐이 느껴진다는 것은 의외다. 달콤한 환상의 땅에서 자라는 건 허망일 뿐, 진정한 희망은 끔찍한 실재의 땅에서 싹틀 수 있다는 취지일까. 이 묘한 여운을 공연으로 느끼고 싶지만 지금 당장은 볼 수 없어 아쉽다. 일단은 동명의 영화(마이크 니컬스 감독, 1966)를 먼저 봐두려고 한다.(신형철 문학평론가)  

10. 07. 10. 

 

P.S. 이번에 안 것이지만 올비의 희곡은 몇 편 더 번역돼 있다. 2003년에 한꺼번에 세 권이 나왔는데, 짐작엔 역자의 개인적인 관심에서 비롯된 듯싶다. 이번에 대표작이 소개된 김에 좀더 조명을 받을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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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동 2010-07-12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가 뼈속에 골수를 두려워 하랴, 나의 환상이여, 그 골수를 나는 어그적 어그적 씹어 넘겨보자 그러면 내 머릿속에 여전이 유령처럼 나의 환상은 살아 있다', '올프'는 누구의 환상이었을까요.

로쟈 2010-07-12 20:47   좋아요 0 | URL
읽어봐야 알겠습니다.^^;

雨香 2010-07-14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매리스트에 올려놓은 책입니다.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와 관련해 아주 재미있는 기억이 있습니다. 약 6년의 직장생활을 관두고 잠시 미국에서 놈팽이질 할 때, 이 연극을 봤습니다. 연극의 재미에 폭 빠져있다가 문든 '어! 내가 영어를 듣고 있네'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부터 리스닝 테스트 시간이 되어 버렸고, 이후 연극에 몰입을 못했었습니다. 연극의 묘미를 관객과의 호흡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경험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귀국하고는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DVD를 구입했습니다만 잘 안보게 되더라구요.
'허위의 환상' 현재의 대한민국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물론 저도 이 '허위의 환상'을 누리고 살고 있습니다만,...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12년 간의 독서 내역을 개인별 포트폴리오로 관리해 대입 전형에 반영하는 ‘독서교육 종합 지원 시스템’이 2학기부터 시행된다고 한다. 처음 듣는 얘긴데, 하도 시끌벅적한 뉴스가 많다 보니 주목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독서의 중요성은 강조해마지 않지만, 입시와 연계되어 '관리대상'이 되는 독서라면 정나미 떨어진다. 필시 이런 정책을 입안하고 시행하려는 '관료'들의 독서량이 턱없이 부족한 게 아닌가 의심스럽다. 독서는 주변에서 적당히 자극하고 격려하는 '넛지' 정도로 충분하다. 아이들은 '책 읽는 기계'가 아니며 더구나 '책을 읽어야 하는 노예'도 아니다. 책을 읽을 자유는 책을 읽고 아무말도 하지 않을 자유도 포함한다. 모든 개개인의 독서 이력을 점검하고 평가한다? "독서가 제일 괴로웠어요"란 비명이 나오지 말란 법이 없다. 이 무슨 퇴행적 전체주의란 말인가. 조만간 <1984>를 다시 읽어봐야겠다... 

     

한국일보(10. 06. 30) [편집국에서/6월 30일] 아이들의 괴로운 독서

"아니, 이상의 '날개'를 중학교 1학년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 김유정의 '봄봄'은 또 어떻구요. 뭐, 읽을 수는 있겠지만, 글쎄. 이광수의 '무정'도 그래요. 그 나이 아이들에게 썩 맞는 작품 같지 않은데."

초등학교 6학년 아들을 둔 주부에게 며칠 전 들은 이야기다. 아들이 글쓰기 지도를 받는 사교육 강사가 중학교 올라가기 전에 이 책들을 읽어둬야 한다고 했단다. 중학생이 되면 영어 수학 공부에 치여서 책 읽을 틈이 없으니 독서도 선행학습을 해야 한다면서. 이웃 주부들에게 물어보니, 그 책들이 그 동네 중학교 필독서이고 초등 5,6학년 때 미리 읽는다고 하더란다. 잠시 고민하다가 사온 책들을 보더니 글쓰기 강사가 놀라더란다. "아니, 왜 이렇게 두꺼운 책을 사셨어요? 다들 축약본으로 보는데. 많이 팔아요. 못 보셨어요? "

요즘 아이들의 독서 풍경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다. 아이가 소화하기 힘든 책을 골라 읽으라는 어른들도 이상하지만, 문학작품을 원전으로 읽는 것은 비효율적이고, 축약본으로 보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 되어 버렸다.

독서는 뭐니뭐니 해도 즐거워야 한다는 원론은 잊어버리는 게 좋겠다. 입시용 스펙 쌓기가 되어 버린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독서논술 사교육이 번창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독서는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길러준다고 하지만, 요즘 아이들의 책 읽기는 단순한 지식 늘리기에 쏠려 괴로움이 되어버렸다. 부모의 욕심과 학교의 '이상한' 독서 지도가 아이들을 못 살게 군다. 이 주부의 아들이 4학년 때 교내 독서퀴즈 때 푼 문제를 보자. 화산활동을 재미있게 설명한 책이 대상이었는데, 퀴즈 문항이 이랬다. "다음 중 휴화산이 아닌 것을 고르시오." 퀴즈를 맞히려면 책을 통째로 외워야 했다.

더 기가 막힌 사례도 있다. 중학교 아이들에게 김동인의 소설 '감자'를 읽게 한 다음 "복녀는 얼마에 팔려갔습니까?"라고 묻는다. 한 지방 교육청이 시행 중인 독서활동 평가 항목이다. 너무 간단해서 어처구니가 없는 독서 평가다.

문제는 이런 현상이 특수한 예가 아니며, 앞으로 더 심해질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교육과학기술부는 15일 올 2학기부터 학생들의 독서 이력을 일일이 기록ㆍ관리하는 시스템을 도입해 2011년 대입 때부터 전형에 반영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방침에 따라 각 시ㆍ도 교육청은 '독서교육종합지원 시스템'(www.reading.go.kr)을 구축해 운영한다. 학생이 책을 읽고 독후 활동 기록을 입력하면, 교사가 이를 평가해 인증하는 온라인 관리 프로그램이다. 초중고 12년 간의 독서 이력이 통합 관리되는 것이다. 대입 입학사정관은 이 시스템에 접속해 학생의 독서 이력을 점검ㆍ평가하게 된다.

교육과학기술부는 이 제도가 창의ㆍ인성 교육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입시와 연계되어 일일이 기록하고 관리하고 평가받는 독서가 과연 즐거울 수 있을까. '읽고 싶은 책'보다 '읽어야 할 책'만 늘려 아이들을 괴롭히는 또다른 스트레스가 되지는 않을까. 아닌 게 아니라 벌써부터 학원과 독서지도 사교육 업체는 이 제도에 맞춘 필독서를 선정해 지도하는 신규 사업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이제 더 큰 부담을 안고 책을 읽게 되었다. 아이들이 불쌍하다.(오미환 문화부 차장 )  

한국일보(10. 07. 10) [책갈피] '책꽂이의 자유' 마저 위협하는 세상 

사상의 자유는 헌법이 보장한 권리다. 설령 ‘빨갱이’라 해도. 원칙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툭하면 나오는 색깔론은 분명 불합리한 잣대이지만 효과적인 공격 수단이다.

색깔론이 다시 튀어나왔다. 국무총리실의 민간인 불법사찰을 보도한 MBC ‘PD수첩’ 중 피해자 김종익씨의 집 책꽂이에 꽂혀 있던 책이 문제가 됐다. 방송에서 제목을 모자이크 처리한 이 책들은 <혁명의 연구> <김일성과 민주항쟁> <조선노동당 연구> <사회주의 개혁과 한반도> 등이다. 한나라당 대변인은 이 책들로 보아 “김씨는 특정 사상에 빠진 편향적 사고의 소유자”라고 주장했다. 참 단순하고 편리한 판단이다. 그 명쾌함이 감탄스럽기는 하지만, 그런 단세포적 발상이야말로 편향적 사고일 것이다. 국방부가 군대 내 금서목록을 발표해서 비난과 조롱을 산 일을 그새 잊어버린 모양이다.

독서는 극히 사적인 활동이다. 무슨 책을 읽느냐는 한마디로 ‘내 맘’이다. 국가나 권력이 이러쿵저러쿵 간섭하거나 문제 삼을 일이 아니다. 개인의 독서 내역을 그를 위협하는 무기로 삼는 것은 더더욱 부당한 폭력이다.

어쨌거나 이제부터는 책도 조심해서 읽는 게 좋겠다. 내가 읽은 책이 어느 날 나를 겨누는 칼로 돌아올지도 모르니. 이런 조심성은 어릴 때부터 몸에 익히는 게 좋겠다.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12년 간의 독서 내역을 개인별 포트폴리오로 관리해 대입 전형에 반영하는 ‘독서교육 종합 지원 시스템’이 2학기부터 전국에서 시행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적인 독서 활동을 일일이 보고하고 평가 받으라는 것은 정신적인 지문 날인 강요와 다름 없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오미환기자) 

10. 07.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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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 2010-07-09 23:25   좋아요 0 | URL
아... 정말 보통 일이 아닙니다.. 초등학교 2학년인 우리 아이도 벌써 독후감 숙제 땜에 스트레스 받고 있습니다... 사실은 아이보다 제가 딜레마에 빠져 있습니다... 숙제 안 하는 아이를 방치하는 어른이 되더라도 아이를 놀게 할 것인가, 숙제는 해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할 것인가 사이에서 말입니다... 우리가 클 때는 실컷 놀다놀다 스스로 책을 집어들었던 것 같은데요..--

로쟈 2010-07-10 10:18   좋아요 0 | URL
앞으론 스스로 책을 집어던질 거 같습니다...

조아 2010-07-09 23:57   좋아요 0 | URL
간간이 다니는 서점에서 입구에 "교과서 수록소설 미리 읽기"라고 크게 걸어 놓고 있더군요. 뭐 저러면 장사는 되겠다 싶었죠.. 저런 정책 이전에 학교에서 책 읽으면 빼앗아 가는 문제부터 지적해야 할듯 싶은데 말이죠.

로쟈 2010-07-10 10:18   좋아요 0 | URL
그냥 학교수업이 독서중심이 되도록 하면 되지요...

빵가게재습격 2010-07-10 00:49   좋아요 0 | URL
조건만 몇 가지 붙인다면, 저는 이 정책에 찬성합니다... 정책 입안자들과 학교 선생님들 그리고 사교육 담당자들까지(입시 사정관도 포함해야겠네요) 똑같은 책을 읽고 함께 똑같은 시험, 혹은 글쓰기까지 제출하게 한다면요. 가령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에 나오는 등장인물은 누구인가? 구체적인 이름을 모두 쓰시오. <전쟁과 평화>에 나오는 전쟁은 언제부터 언제까지 일어난 전쟁인가? 연도로 표기하시오. 김훈의 <자전거 여행>에 나오는 비유는 총 몇개인가? 정확한 갯수를 제시하시오.' 운운. 그리고 '교육과학기술부' 산하 '독서기술부'를 두어 학교선생님, 사교육 담당자들, 입시사정관, 정책입안자의 집안을 불시에 침입, 검색할 수 있는 권한을 주어 불시에 습격하게 하는 겁니다. 새벽 두시에 침투, 집안을 모조리 뒤져 불온한 책이 없는지 확인한다면, 오! 진정 찬성합니다. 꼭 하자고 건의하고 싶어욧!

로쟈 2010-07-10 10:17   좋아요 0 | URL
책이 아예 없는 게 아닐까요? 지침서만 잔뜩 꽂혀 있을 듯한데요...

Sati 2010-07-10 01:26   좋아요 0 | URL
"공공장소나 텔레스크린이 미치는 범위 안에서 혼자 공상에 잠긴다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다. 아주 사소한 것으로도 정체가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얼굴에 나타나는 경련, 무의식적으로 짓는 불안한 표정, 혼자 중얼거리는 습관 등 조금이라도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것은 없어야 한다. 무언가를 감추려는 행위로 간주되어 위험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든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 (가령 승전 소식이 보도될 때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지으면) 그것만으로도 처벌 대상이 된다. 심지어 이에 대한 신어까지 있는데, '표정죄'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1984> (민음사, 89쪽)

로쟈 2010-07-10 10:17   좋아요 0 | URL
책꽂이 관리에 이어서 조만간 표정관리도 해야겠네요...

2010-07-10 06: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10 1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루체오페르 2010-07-10 09:53   좋아요 0 | URL
독서가 관리 대상이 된다니...으음...
이거야말로 유희가 아니라 노동이 되는 지름길이군요. 후...

그런데 지금의 현실을 보면 이렇게 강제적(?)으로도 시스템에서 책을 보게 하는것도 필요하것도 같고...역시 정답은 없는걸까요^^;

로쟈 2010-07-10 12:56   좋아요 0 | URL
기대되는 효과보다 부작용이 더 클 거 같습니다. 실효성도 의문이구요. 의무 복무도 아니고 의무 독서라니요...

kumun 2010-07-10 13:14   좋아요 0 | URL
미국에선 학교에서 단계별로 책을 나눠서 아이들이 차근차근 올라갈 수 있게 독서지도에 중점을 두더라구요

로쟈 2010-07-10 13:25   좋아요 0 | URL
미국만도 못한 셈이네요...

자꾸때리다 2010-07-10 19:14   좋아요 0 | URL
주제하고는 상관이 없는 것 같지만 저는 중고등학교 윤리 교과서 없애버리고 대신에 플라톤의 파이돈과 같은 대화편을 읽으면서 토론하는 수업을 했으면 좋겠어요.

로쟈 2010-07-10 23:04   좋아요 0 | URL
주제와 상관이 있는데요.^^

네모선장 2010-07-13 10:22   좋아요 0 | URL
저는 고등학교 전문계 교사 입니다. 이제서야 기사를 봤는데요.
실제로 강압적으로 저런걸 하고 있고 더 웃기는 것은 '독서교육종합지원 시스템'을 창의적 체험활동이란 것과 연동되게 해놨는데 얼마전에는 교육청 담당 장학사가 직접 학교로 방문하여 이용실적을 물어보고 갔습니다. 저희야 전문계고라 학생들이 워낙에 책을 안읽거나 연애소설과 판타지 소설만 주로 읽어서 오히려 긍정적인 측면이 있지만서도 교육당국은 저 시스템을 이용하여 자꾸만 분량과 권수로 학교평가랑 연계한다는 거죠.
또한 학교 도서관에 대출권수는 자동으로 교육청에 집계되어서 대출 많이 했으면 우수학생 우수학급 우수학교라며 칭찬하고 있는게 요즘의 교육 현실이네요.

로쟈 2010-07-13 10:38   좋아요 0 | URL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고나 있나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