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읽은 칼럼이 인상적이어서 관련기사를 찾아봤다. 그간에 모르고 있었는데(너무 천안함에만 빠져 있었나 보다), '위키리크스'라는 내부고발 전문 웹사이트에서 아프간 전쟁과 관련한 미국의 기밀문서를 공개하여 큰 파문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인데, 여러 모로 흥미를 끄는 사건이다(정신분석의 용어를 쓰자면 '상징계에 대한 실재의 습격'이라 할 만하다). 인터넷 시대에 개인과 국가권력 간의 쟁투가 어떻게 벌어질 수 있는지도 보여주는 사례 같다(당연한 관심은 우리에게도 이런 폭로가 가능할까란 것이다). 추가적인 폭로 자료도 엄청난 분량으로 쌓여 있다고 하는 만큼 귀추가 주목된다. 기사는 엊그제 칼럼에서 지난 4월의 칼럼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모두 조찬제 경향신문 국제부 차장의 기사다.        

경향신문(10. 07. 29) [마감 후…]‘위키리크스’라는 유령

하나의 유령이 미국을 배회하고 있다. ‘위키리크스’라는 유령이다. 이 유령이 들춰낸 치부들은 미국을 뒤흔들고,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악몽에 시달리게 하고 있다. 백악관과 국방부를 비롯한 미 행정부는 이 유령을 사냥하기 위해 혈안이다. 그러나 유령은 공중을 빙빙 돌며 먹이를 찾는 독수리처럼 끊임없이 오바마 행정부의 치부를 노리고 있다. 위키리크스는 이제 미국의 최대 위협 가운데 하나가 됐다.

위키리크스는 처음부터 유령처럼 다가왔다. 지난 4월5일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부수적 살인(collateral murder)’이라는 제목의 동영상은 세상을 전율시켰다. 2007년 7월 이라크 바그다드 상공의 미군 아파치 헬기에서 마치 사냥하듯 민간인들을 향해 기총소사를 퍼붓는 장면은, 희희낙락하며 환호하는 조종사의 몰인간적 행태와 겹치면서 분노를 자아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의 실체는 이로써 발가벗겨졌다. 하지만 이는 예고편에 불과했다. 그로부터 3개월 20일 뒤, 메가톤급 핵폭탄이 터졌다. 지난 25일 위키리크스가 ‘아프가니스탄 전쟁일지(war logs)’라는 이름으로 공개한 9만2000여건의 기밀문서다.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민간인 사망, 파키스탄 정보부와 탈레반의 유착, 탈레반 요인 암살을 위한 비밀 특수부대 운용 등 감춰진 아프간전의 실상이 이 기밀문서들을 통해 드러났다. 미 행정부는 “전쟁 중에 벌어진 일” “중요한 문서는 없다”는 식으로 의미를 애써 축소했다. 그러나 오바마는 아프간 전쟁 일지 공개 이틀 만인 27일 문서 누출이 “개인이나 작전의 잠재적 위험”이라고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위키리크스가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120만건의 비밀문건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간폭탄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내부비리 폭로가 목적이다 보니 위키리크스의 활동은 유령처럼 이뤄지고 있다. 사이버공간에서 활동하기에 쉽게 노출되지 않는다. 서버도 익명성이 법적으로 보장되는 나라에 두고 있다. 활동가들도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위키리크스에는 주인이 없다. 정부의 비리에 관심 있는 내부고발자나 반체제 인사, 언론인, 사회활동가 등 누구든 정보원이 될 수 있다. 정보제공자 신원보다 정보 내용을 중시한다. 대신 신원은 철저히 보호한다. 언제 어디서 어떤 방법으로 위키리크스가 공격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이보다 더 큰 두려움이 있을까.

역설적이게도 위키리크스라는 유령은 미국의 정보자유법(FOIA)의 부산물이다. 위키리크스의 기밀문서 폭로가 낳은 ‘국가기밀 대 언론자유’ 논란의 중심에 ‘정보자유’라는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역사는 행정부와 언론 간의 정보자유를 둘러싼 투쟁의 역사라 할 수 있다. 국가 안위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할 경우 미 행정부는 정보 비밀주의를 강화했다. 2001년 ‘9·11 테러’ 이후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취한 조치가 대표적 사례다. 위키리크스가 정보자유를 강조하는 이유는 창설자 줄리안 어산지가 지난 25일 독일 슈피겔과 한 인터뷰에서 확인된다. 그는 “양심이 있는 사람은 언제나 공권력의 남용을 폭로했다. 우리의 일은 이들을 보호하고 대중에게 알리고 역사 기록이 부인되지 않게 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인가, 라는 질문에는 “전쟁을 책임진 사람이 가장 위험하다”고 대답했다.

위키리크스는 개인의 힘은 미약하지만 하나하나 뭉치면 국가권력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정부 비리를 폭로하는 것이 정책을 바꾸고 세상을 조금이라도 변화시킬 수 있다면, 내부고발자든 언론인이든 활동가든 모두가 단결해야 한다.(조찬제 국제부 차장)  

경향신문(10. 07. 28) 위키리크스의 폭로 ‘오바마의 리스크’로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관련한 위키리크스의 기밀문서 폭로가 가져올 향후 파장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버락 오바마 미국 행정부는 연방법 위반을 언급하며 파문 차단에 나섰지만 향후 아프간전 수행에 차질이 빚어질 수 있는 데다 오는 11월 중간선거의 악재가 될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더욱이 위키리크스는 추가 기밀 폭로를 예고한 상황이어서 파장은 일파만파로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AP통신 등에 따르면 로버트 기브스 백악관 대변인은 26일 정례 브리핑에서 위키리크스 기밀문서 공개에 대해 “이는 연방법 위반으로, 현재 수사의 대상이 돼 있는 상태”라고 말했다. 기브스 대변인은 “기밀 공개는 충격적”이라면서 “아프간 주둔 미군을 위험에 빠뜨리고, 군의 기밀유지를 위태롭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문건의 내용들은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대 아프간 전략이 변경되기 이전에 일어난 일”이라며 이번 문서 공개가 오바마 행정부와 관련이 없음을 강조했다. 미 국방부도 기밀 누출자 색출에 나서는 한편 폭로된 기밀들이 가져올 잠재적 위험에 대한 분석작업에 돌입했다.

백악관의 파문 확산 차단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바마 행정부 내부는 좌절감에 휩싸였다. 뉴욕타임스는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 의회와 국민에게 나쁜 영향을 줄 것이 확실하다”는 한 관리의 말을 인용해 행정부 내부의 분위기를 전했다. 일각에서는 이번 폭로가 향후 아프간전에서 파키스탄의 협력을 얻어내는 지렛대가 될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익명을 요구한 관리는 “이제 모든 것이 공개됐다. 기밀 공개로 우리는 파키스탄에 도와달라고 말하기가 쉬워졌다”고 말했다.

현재 아프간전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과 의회의 태도를 감안하면 오바마 행정부에 미칠 파장은 심각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파키스탄에 쏟아부은 천문학적인 돈과 정보가 탈레반을 돕는 데 사용된 것이 밝혀진 이상 의회의 지지를 얻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뉴욕타임스는 27일로 예정된 미 하원의 아프간 전비 지원에 관한 법안 처리 결과가 주목된다면서 오는 연말까지 아프간 전략을 재검토해야 하는 오바마 행정부엔 부담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오바마가 의회를 설득하지 못할 경우 주둔군 축소라는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프간에 군을 파견한 다른 국가들이 이번 사태를 계기로 정보 공유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경우 그동안의 협력관계에 손상이 갈 수도 있다는 점도 배제할 수 없다. 전문가들은 이번 폭로를 계기로 아프간전은 ‘부시의 전쟁’에서 ‘오바마의 전쟁’이 됐다고 지적했다. 미 프린스턴대 역사학과 줄리안 젤리저 교수는 AFP통신에 “이번 공개는 부시의 문제를 오바마의 것으로 만들었다”면서 “오바마는 자신을 그것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없다”고 말했다.(조찬제기자) 

 

위클리경향(10. 07. 06) ‘위키리크스’ 미국 정부 눈엣가시   

미국 정부의 비리를 담은 기밀문서를 폭로해 온 내부고발 전문 민간 웹사이트 위키리크스(wikileaks.org)가 미국 정부의 눈엣가시가 되고 있다. 지난 4월 초 이라크 주둔 미군 아파치 헬기가 2007년 바그다드 상공에서 무차별 기총사격으로 로이터통신 기자 2명 등 민간인 10여 명이 사망하는 과정을 담은 동영상을 공개해 파문을 일으킨 위키리크스는 최근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저지른 민간인 학살을 담은 동영상을 공개할 것이라고 밝혀 ‘제2의 파문’을 예고했다. 이라크 동영상 공개 후 곤경에 빠진 미국 당국은 이 자료를 위키리크스에 제공한 사병을 체포해 조사 중이며, 심지어 위키리스크 설립자에 대한 체포령을 내리는 등 잠재적 파문 차단을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라크·아프간 동영상은 빙산의 일각
영국 일간 가디언과 월스트리트저널(WSJ) 등에 따르면 위키리크스 설립자인 줄리앤 어샌지는 6월 초순 지지자들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미군이 지난해 5월 아프간 가라니 마을에서 민간인을 공습하는 동영상을 곧 공개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사건은 아프간 침공 이후 미군에 의한 최악의 민간인 학살로 알려져 있다. 당시 아프간 정부는 미군 공습으로 어린이 92명을 포함해 민간인 140명이 숨졌다고 밝혔다. 아프간 정부의 발표를 믿지 못한 미군은 자체 조사를 벌였으나 실수가 있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로이터통신 기자 2명을 포함해 10여 명이 사망한 이라크 동영상이 보여 준 파장을 생각하면 140명이 숨진 ‘아프간 동영상’이 공개될 때 가져올 파장은 쉽게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아프간 민간인 학살 동영상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수도 있다. 이 동영상은 5월 26일 미군 당국에 체포된 이라크 주둔 미군 정보분석가 브래들리 매닝(22)이 위크리크스에 제공한 것으로 알려진 26만건의 민감한 기밀자료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2007년에 입대한 매닝은 업무상 비밀를 취급할 수 있었다. 이 덕분에 그는 근무하는 동안 이라크 동영상을 비롯한 외교 전문 등 엄청난 기밀자료들을 내려받았다. 그는 당국에 체포된 뒤 쿠웨이트에서 조사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가 체포된 과정은 어처구니가 없다. 자신의 무용담을 전 컴퓨터 해커인 애드리언 라모에게 이메일을 보내 자랑한 데서 비롯됐다. 매닝은 라모에게 “당신이 비밀 네트워크에 하루 14시간씩 8개월 이상 마음껏 접근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물었고, 라모는 이 사실을 미국 연방수사국(FBI)에 알린 것이다.

매닝의 문서가 공개될 경우 파괴력은 엄청날 것으로 보인다. 매닝이 라모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확인된다. 그는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을 비롯한 전 세계 외교관 수천명이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났을 때 비밀로 분류된 외교문서 전체가 일반에 공개된 사실을 알면 심장마비에 걸릴 것”이라고 썼다고 인터넷 매체 와이어드(wired.com)가 전했다. 이 때문에 미국 당국의 최대 관심사는 매닝이 위크리크스에 넘긴 자료의 내용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다. 미국 당국은 매닝 체포 직후 그의 컴퓨터 하드 드라이브를 압수하고 워싱턴에서 전문가들을 동원해 분석작업을 벌이고 있다. 어샌지는 매닝 체포 이후 그를 변호할 변호사 3명을 고용했지만 미국 당국은 면회조차 허용하지 않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체포설 때문에 피신 중인 설립자 
아이슬란드 의회 의원이자 반전운동가로 이라크 동영상 작업을 한 브리기타 욘스도티르는 6월 18일 미국 ABC방송 <월드뉴스>에 나와 “어샌지가 미국 정부로부터 체포 위협을 느껴 피신 중”이라고 밝혔다. 그는 그러나 “우리는 매일 그와 접촉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욘스도티르는 아이슬란드 의회가 전날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국가안보와 관련한 내부고발자에게 ‘국제 피란처’를 제공하는 법안을 발의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사흘 뒤인 6월 21일 가디언은 유럽의회가 주최한 정보의 자유에 관한 세미나에 참석차 벨기에 수도 브뤼셀을 찾은 어샌지를 만나 인터뷰했다. 미군이 매닝을 체포한 뒤 모습을 감췄다가 약 한 달 만에 나타난 것이다. 그가 피신한 이유는 내부고발자나 변호사들이 매닝 체포 후 그에게 닥칠 위험을 감안해 극도로 조심할 것을 당부했기 때문이다. 어샌지는 인터뷰에서 “우리는 지지와 보호가 필요하다”면서 “그러나 항상 방심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어샌지가 자신의 활동 때문에 신변의 위험을 느낀 것은 올해 초부터였다. WSJ에 따르면 그는 올해 초 자신들을 미군과 미국의 정보전 노력에 대한 잠재적으로 묘사한 미국육군정보전센터의 2008년 비밀보고서를 위키리크스 사이트를 통해 폭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육군정보전센터는 “비밀로 분류된 국방부 문서가 인가 없이 유출되면서 외국 정보기관이나 해외 테러조직 등에게 미군을 상대로 소송을 제공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면서 위키리크스에 대한 경계심을 드러냈다. 이 와중에 이라크 동영상을 폭로하면서 그는 피신할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됐다. 실제로 미국 웹 매체인 데일리비스트는 매닝의 체포 사실이 알려진 뒤 사흘이 지난 6월 10일 “미국 국방부 조사관들이 어샌지가 공개될 경우 미국의 국익을 크게 해칠 국무부의 비밀문서들을 공개할까 봐 두려워해 그의 행방을 수소문하고 있다”고 전했다.

위키리크스의 기밀문서 폭로는 한편으로 국가안보와 국민의 알 권리에 관한 논란을 가열시키고 있다. 국가안보를 우려하는 측은 과거 내부고발자가 기자에게 정보를 주던 것과 달리 인터넷 등의 발달 덕분에 누구든 사이버 공간에 익명으로 직접 올릴 수 있어 국가 기밀이 쉽게 유출될 수 있다는 이유를 든다. 뉴욕타임스는 이와 관련해 6월 12일 오바마 행정부가 정부 기밀을 언론에 유출하는 공무원에 대한 처벌을 대폭 강화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또 출범 17개월째인 오바마 행정부가 정부 기밀을 유출한 관리를 처벌한 건수가 전임 부시 행정부보다 많다고 지적했다. 반면에 국민의 알 권리가 중요하다는 측은 처벌 강화가 전쟁범죄로 재판을 받지 않으려는 방편에 불과하다면서 내부고발자야말로 진정한 국민적 영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위키리크스?
설립자 줄리앤 어샌지는 호주 출신의 컴퓨터 해커였다. 그는 정부나 기업, 각종 기관의 부패를 내부고발자들이 일반인에게 알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2006년 위키리크스를 만들었다.
그는 6월 1일 위키리크스 사이트에 실은 인터뷰에서 “사회의 모든 정보와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특정 정부와 정당, 정치지도자 가운데 누구를 지지할지와 관련이 있다”면서 “시민들이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데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사이트의 존재 이유”라고 밝혔다. 위크리크스의 운영 철칙은 내부고발자의 신원 확인보다 자료의 신뢰성에 우선순위를 두는 것이다. 실제 운영자는 5명이지만 수백명의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을 받고 있다. 소송이 제기될 경우 변호사의 도움도 받는다. 서버는 익명성이 법으로 보장된 스웨덴에 두고 있다.

경향신문(10. 04. 15) [마감 후…]전쟁,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

2007년 7월12일 낮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 외곽의 거리. 열 명 남짓한 남자들이 골목 한 쪽에서 어슬렁거린다. 머리 위엔 미군 아파치 헬기 두 대가 이들의 동태를 감시하고 있다. 조종사들의 목소리가 다급해진다. 군중 5~6명이 AK47 소총과 로켓추진수류탄(RPG) 등을 갖고 있다며 발포명령을 내릴 것을 상부에 요구한다. 이윽고 상부 지시를 받은 헬기는 이들에게 총탄을 퍼붓는다. 일부는 쓰러지고 일부는 몸을 피한다. 피하는 이들에겐 다시 총탄이 쏟아진다. 공중을 선회하던 헬기는 부상자 한 명을 발견하고 다시 발포 준비를 한다. 순간 승합차 한 대가 그를 싣기 위해 다가간다. 차 안에 어린이 두 명이 있었음에도 헬기는 이들에게 사격을 퍼붓는다. 아이 두 명은 겨우 목숨을 건진다. 이날 헬기 공격으로 10여명이 사망했다. 그 가운데는 로이터통신 소속 이라크인 2명이 포함돼 있었다.

미 정부와 기업의 불법행위를 고발하는 사이트 위키리크스(wikileaks.org)가 지난 5일 ‘부수적 살인(Collateral Murder)’이라는 제목으로 공개한 비디오 내용이다. 이 비디오는 약 3년 전 이라크에서 발생한 민간인 사망 사건을 다룬다. 당시 뉴욕타임스는 미군 발표에 의존해 미군이 기습공격을 받고 공격해 무장세력 9명과 민간인 2명(로이터 고용인 2명)이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이 비디오를 보면 미군 발표가 거짓임이 드러난다. 몇 사람은 무장한 것처럼 보이지만 긴장은 전혀 없다. 미군과의 교전은 더더욱 없다. 왜 미군이 그동안 비디오를 공개하라는 로이터의 요청을 거부했는지 알 만하다. 위키리크스는 이 비디오를 미군내 내부고발자들로부터 입수했다. ‘부수적 살인’이라는 제목은 민간인 사망자를 ‘부수적 피해’로 표현하는 미군의 주장에 빗댄 말이다.

가공할 만한 것은 조종사들의 교신 내용에서 볼 수 있는 태도다. 이들은 자신들의 공격으로 죽은 사람들을 보고 고소해하고 환호한다. 승합차 속 아이들이 다친 데 대해 미안해하기는커녕 오히려 어른들을 나무란다. “전쟁터에 애들을 데리고 오는 게 잘못이지.” 조종사들에겐 인간에 대한 존엄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다. 전쟁은 이들에게 인간을 사냥하는 게임일 뿐이다. 이 비디오는 과거 어두운 기억을 떠올린다. 2004년 아부그라이브 수용소 수감자 인권유린 사건이다. 포로들을 발가벗겨 바닥에 쓰러뜨리거나 알몸인 포로 머리에 두건을 씌운 채 문이나 침대에 손을 묶는 등 갖은 추행을 저지르면서도 즐거워하는 미군들. 미군은 이런 악몽 때문에 비디오를 감췄던 것일까.

이 비디오는 공개 9일 만에 유튜브 클릭 수만 약 600만회에 이를 만큼 파장이 크다. 하지만 미국은 사과는커녕 곧 잊혀질 것이라고 말한다. 지난 11일 미 ABC방송 <디스 위크>에 출연한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은 “비디오 공개로 미국 이미지가 훼손되지 않았나”라는 질문에 “전쟁 중에 벌어진 일”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미국에)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오랫동안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미군의 행위는 전쟁범죄라는 주장까지 제기되고 있는 마당이다. ‘전쟁 중 환자는 아군이든 적군이든 돌봐야 한다’는 제네바협정을 어겼다는 것이다. 미군과 미 정치인들은 안다. 전쟁터에서 미군의 추행과 민간인 희생이 많으면 많을수록 반전여론만 높아진다는 것을. 그럼에도 감춘다. “정치언어는 거짓말을 참말로, 살인도 훌륭한 일로 만들고, 허공의 바람조차 고체처럼 단단하게 보이게 고안된 것이다”라는, 위키리크스가 첫머리에 인용한 조지 오웰의 말이 그 답이다.(조찬제 국제부 차장)   

10. 07. 31.


댓글(0) 먼댓글(1)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1. 위키리크스와 폭로의 시대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8-06 23:05 
    점심과 저녁, 두 차례 소나기가 내렸어도 무더운 건 여전한 날씨다. 이러다가 갑자기 기온이 떨어지면 섭섭한 마음이 들지도 모른겠다. '정'이 들어서 말이다. 날씨는 그렇고, 요즘 가장 흥미로운 외신 기사는 내부고발 웹사이트 위키리크스에 관한 것이다. 미국 정부와 한바탕 법적 분쟁을 치를지도 모르겠다. 관련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7월26일 위키리크스 설립자 어샌지가 위키리크스가 제공한 정보로 기사를

도박장에 가보질 않아서 '잭팟'의 느낌이 어떤 건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이번주 신간들을 보며 '이건 잭팟이야!'라고 혼자 중얼거렸다(분기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다). 최근 신간 제목을 빌려 조금 점잖게 말하면 '버스트'. 뭔가 터졌다는 것. 하루키의 <1Q84> 얘기가 아니다(물론 그건 하루키의 '잭팟'이다). 이번주 언론 리뷰에서는 다뤄지지 않을 듯싶은데, 일단 리처드 세넷의 <장인>(21세기북스, 2010)이 번역돼 나왔다(그러고 보면 나 혼자 느끼는 '손맛'일 수도 있겠다).  

 

작년에 <뉴캐피털리즘>(위즈덤하우스, 2009)이 나왔을 때부터 눈여겨본 타이틀인데, 예기찮게도 번역본이 빨리 나왔다. 전작들에서 그가 강조하던 '장인정신'이란 게 어떤 것인지 세계적 석학의 솜씨로 확실하게 보여줄 듯싶다. 맛보기 소개는 이렇다.  

저자는 장인의 모습을 단지 목공이 하는 육체적인 기능으로만 인식하는 것은 아주 편협한 생각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 책에서 상고시대의 그리스 도공, 로마제국의 이름 없는 벽돌공, 거대한 성당을 지어 올렸던 중세 석공, 르네상스 예술가를 비롯해 근대의 노동자, 리눅스 프로그래머, 건축가, 의사 등 현대의 전문 직종에 이르기까지, 시공을 넘나드는 광범위한 장인 분석을 통해 장인의 정체성과 가치를 재정립하고, 장인의 신(新)패러다임을 제시한다. 결국 저자의 목표는 별다른 보상 없이도 일 자체에서 깊은 보람을 느끼고 세심하고 까다롭게 일하는 인간, 즉 우리 안에 잊힌 장인의 원초적 정체성을 복원하는 일이다.

 

아, 그리고 사르트르의 <사르트르의 상상계>(기파랑, 2010). 번역서 제목이 그렇게 돼 있으니 사르트르를 두 번 반복할 수밖에 없다. 그러고 보니 이 책과 짝이 되는 <상상력>도 <사르트르의 상상력>(기파랑, 2008)으로 나왔었다. <변증법적 이성비판>(나남, 2009)이 완역된 마당이어서 더 바랄 게 없다 싶었는데, 그의 상상력 연구를 집대성한 책까지 번역돼 나오니 감지덕지다. 일단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질베르 뒤랑의 <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들>(문학동네, 2007)을 읽을 수 있겠다는 것. 전에 책을 좀 읽다가 사르트르의 상상력론과 대결하는 대목에서, 공정하게 읽자면 사르트르의 책을 먼저 봐야겠다는 이유로 미뤄두었는데, 마침내 때가 온 셈이다(빨리 다른 핑계를 찾아야겠다).  

 

혹 상상력이란 주제에 더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뒤랑의 제자이자 '전도사'이기도 한 진형준 교수의 <상상력혁명>(살림, 2010)과 <싫증주의 시대의 힘 상상력>(살림,2009)를 참조해도 좋겠다. 아무래도 번역서보다는 읽기가 편하니까. 역시나 뒤랑의 제자인 서정기 교수의 평론집 <신화와 상상력>(살림, 2010)도 소위 '신화비평'의 현재를 보여준다.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문예학자 페터 지마의 신간 <모던/포스트모던>(문학과지성사, 2010). 책은 어제 신촌 홍익문고에서 사들었는데(다른 책들은 들어오질 않았었다), 지마의 책은 하도 오랜만이어서 '감회'까지 느껴진다. 번역은 그간에 지마를 거의 전담해서 번역해온 김태환 교수. 나는 가장 먼저 소개됐던 <문학 텍스트의 사회학을 위하여>(문학과지성사, 1987)를 비롯하여 지마의 책을 거의 대부분 읽은 듯싶다(오래전 읽이지만 그의 방한 강연도 들었다). <문예미학>(을유문화사, 1993) 같은 책은 대학원의 필독 세미나 교재이기도 했다.   

그런데, <데리다와 예일학파>(문학동네, 2001) 이후 거의 10년 만에야 번역서가 나온 셈이니 격세지감이 있다. 한때 서점을 '주름잡던' 그의 책들도 상당수가 절판되거나 품절된 상태이고. <모던/포스트모던>은 그런 가운데 나온 것인데, 원저는 1997년에 초판이 나오고 2001년에 2판이 나왔다. '생명력'이 있는 이론서라고 봐야겠다. '포스트모더니즘 논의 총결산'이 비록 요즘 유행과 맞는 건 아니지만 시류를 거슬러서 일독해봄직하다.   

그밖에도 네그리의 <예술과 다중>(갈무리, 2010), 캘리니코스의 <무너지는 환상>(책갈피, 2010), 데이비드 하비의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공간들>(문화과학사, 2010) 등 쟁쟁한 명망가의 책들이 이번주 신간이고 모두 보관함에 들어가 있다.  

 

체 게바라 평전의 결정판이라는 <체 게바라, 혁명적 인간>(플래닛, 2010)도 이번주에 나온 책이고(무려 1176쪽 분량이다), 이미 화제가 되고 있는 <김대중 평전>(시대의창, 2010)도 이번주 신간이다, 라고 적고 보니 오류다. <김대중 자서전>(삼인, 2008)과 혼동했다. <평전>과 <자서전>이 동시에 나오는 바람에 같은 책으로 착각했다(<자서전>을 고른다면서 <평전>을 클릭했다).  

하여간에 이 정도면 '잭팟'이라고 할 만하지 않을까. 물론 '옆에서' 그런 게 터졌다는 얘기일 뿐이고, 그게 그냥 구경거리가 아니라 '나의 횡재'가 되기 위해서는 약간의 투자가 좀 필요하다. 대다수 직장인들의 휴가가 시작된다는 내주에 한두 권 정도 챙겨두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사르트르나 지마 같은 경우야 아무래도 전공자들 손에서나 대접받을 터이지만, 나머지 책들은 충분히 유혹적이다. 다년간의 경험에서 하는 말이지만, 이런 일이 흔치 않다... 

10. 07. 30.


댓글(13) 먼댓글(1) 좋아요(4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생각하는 손과 장인 예찬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8-04 14:04 
    리처드 세넷의 <장인>(21세기북스, 2010) 출간 소식의 반가움은 이미 지난주에 포스팅한 바 있는데, 언론리뷰는 이번주에 실리게 되는 듯하다. 가장 빨리 올라온 소개기사를 옮겨놓는다. 나는 번역본보다 원서를 미리 구했는데, 내주쯤에는 조금이라도 읽을 수 있을 듯하다. 기사를 보니 저자의 3부작 중 하나라고 하는데, 나머지 책들도 기대된다.   연합뉴스(10. 08. 04) '생각하는 손' 장인정신을 찾아서 
 
 
미지 2010-07-31 0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알라딘 시스템에 대해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글 올리면 조회수가 급감하나요? 제가 좀 놀라운 걸 겪어서요...

로쟈 2010-07-31 08:29   좋아요 0 | URL
그 정도로 '정서적인' 시스템이라곤 생각지 않습니다. 조회수가 갑자기 늘어나는 경우는 있어도 갑자기 주는 경우는 좀 드물고요. 어떤 착오인지는 모르겠지만요...

2010-07-31 1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31 1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른바다 2010-07-31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화제가 되고 있는 책은 <김대중 평전>(시대의 창)이 아니라 삼인에서 나온 <김대중 자서전>이 아닐까요?^^ 물론 김삼웅 선생이 집필한 <김대중 평전>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고 고 김대중 대통령의 육성이 담긴 <김대중 자서전>에 새로운 정보가 더 많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김대중에 대한 2권의 책이 동시에 출간되어 혼돈을 일으키는 듯 싶습니다.^^ <장인>이라는 책에 눈이 가는군요. 사르트르의 <상상계>는 두께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이 마음에 듭니다.^^

로쟈 2010-07-31 19:01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제가 잘못 클릭했어요.^^; 그래도 표지는 <평전>이 더 낫네요. <상상계>는 저도 주문을 넣었는데, 저렴한 거야 고마운 일이죠.^^

푸른바다 2010-08-02 15:22   좋아요 0 | URL
사르트르의 상상계와 라캉의 상상계를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라캉은 사르트르보다 오히려 한 살이 많은데 실존주의 뒤에 유행한 구조주의의 대표주자로 알려지는 바람에 사르트르보다 후세대인 걸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더군요. 사르트르와 동시대인 라캉은 알튀세르, 레비스트로스, 푸코보다는 우리나라 기준으로 하면 까마득한 선배인 셈인데 말입니다.^^ 라캉은 실존주의-구조주의-후기구조주의 전 시대에 걸쳐 유행을 누리는 드문 사상가인 것 같습니다. 라캉은 다른 구조주의자들에 비해 사르트르에 대해 비교적 긍정적이었던 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로쟈 2010-08-03 10:07   좋아요 0 | URL
라캉이 1901년생이니까 네 살 더 많습니다. 저는 요즘 라캉-지젝의 주체와 사르트르(실존주의)의 주체 사이의 연관성에 대해서 관심이 생겼어요. 마땅한 책이 없나 찾아봐야겠습니다...

푸른바다 2010-08-03 13:14   좋아요 0 | URL
저도 비슷한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주체를 넘어서 있는 구조가 인간의 훨씬 많은 부분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단 1%에 불과하더라도 '주체의 결단'이라는 부분을 포기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 3종의 번역본과 영역본, <변증법적 이성비판> 번역본, 라캉 <에크리>와 <세미나> 번역본들과 영역본들을 갖추어 놓고 조금씩 읽어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워낙 방대한 분량이라 언제 다 읽을 수 있을까 싶지만 우공이산이라고 언젠가는 끝나겠지 하는 믿음으로 천천히 나아가볼까 합니다.^^


로쟈 2010-08-03 13:34   좋아요 0 | URL
사르트르와 라캉을 주제로 한 연구서가 몇 권 있는데, 모두 불어본이네요.^^;

푸른바다 2010-08-03 15:12   좋아요 1 | URL
고등학교 때 불어를 제 2외국어로 꽤 열심히 공부했었는데 그를 살리지 못한게 좀 후회스럽군요.^^ 불어의 기억이 좀 남아있었던 대학시절 교보 문고에서 발췌본이긴 하지만 <에크리> 불어본을 구매한 적이 있어요. 이게 어디로 사라졌는지 궁금합니다. 누가 관심을 가질 책도 아니었는데요.^^

개인적으론 독서모임 같은 것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로쟈 2010-08-03 23:12   좋아요 0 | URL
저도 학부 졸업하기에 불어2 듣다가 흥미를 잃었는데(한 학기 동안 바둑, 장기만 뒀지요.^^;) 약간은 후회가 됩니다...

종이달 2022-05-05 0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내일자 한겨레에 실리는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지난 월요일에 쓴 원고인데,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번역에서 궁금하게 생각했던 점 한 가지를 글감으로 삼았다.   

한겨레(10. 07. 31) '서사적 바람둥이’가 낯설어진 이유 

“영원한 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에 빠뜨렸다.” 이미 눈치챈 독자들이 있겠지만, 체코 출신의 망명작가 밀란 쿤데라의 대표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서두다. 쿤데라는 1981년에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지만 ‘프랑스 작가’라고 부르는 건 여전히 어색하다. ‘세르반테스의 절하된 유산’(소설)의 특별한 예찬자인 그에게 특정 국적은 별로 의미가 없을 것이니 차라리 그의 조국은 ‘소설’이라고 해야 할까. ‘중부유럽의 작가’를 자임하는 쿤데라는 체코어판과 프랑스어판을 동시에 ‘정본’으로 인정한 드문 작가이기도 하다. 때문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도 정본이 둘이다. 독어 중역본으로 처음 출간된 한국어본도 체코어본, 프랑스어본 번역 등이 추가되어 그간에 네댓 종 이상이 나왔다. 현재는 프랑스어본 번역만이 통용되고 있어서 아쉬운데, 다양한 번역본을 음미하면서 읽을 수 없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것은 어떤 의미인가?

일단 복수의 번역본은 번역의 차이와 변화 양상에 주목하게 해준다. 한두 가지 예를 들면, 먼저 주인공들의 이름이 바뀌어왔다. 체코어본 번역에서 ‘토마스’와 ‘테레자’라고 표기된 주인공의 이름이 독어본 번역과 프랑스어본 번역에서는 ‘토마스’와 ‘테레사’가 됐고, 프랑스어본 번역 개정판에서는 ‘토마시’와 ‘테레자’가 됐다. ‘테레사’가 ‘테레자’가 된 것은 교정사례라고 할 수 있지만, ‘토마스’가 ‘토마시’로 바뀐 것은 근거를 찾기 어렵다. 독일작가 ‘토마스 만’이 덩달아 ‘토마시 만’으로 바뀐 걸 보면 유머를 의도한 건가 싶기도 하다.  

그리고 ‘바람둥이의 유형’도 달라졌다. 쿤데라는 두 가지 범주로 나누는데, 한쪽은 ‘서정적’ 유형으로 모든 여자에게서 자신의 이상을 찾으려고 애쓰고, 다른 한쪽은 ‘서사적’ 유형으로 수집가적인 열정을 갖고서 여성적 세계의 무한한 다양성을 추구한다. 전자는 항상 이상 찾기에 실패함으로써 동정을 사기도 하지만, 후자는 항상 만족한다는 이유로 비난을 산다. 작품에서 토마스는 후자에 속한다. 이 두 유형이 독어본과 체코어본 번역에선 ‘서정적 바람둥이’와 ‘서사적 바람둥이’ 정도로 번역됐지만, 프랑스어본 번역에서는 ‘낭만적 호색한’과 ‘바람둥이형 호색한’으로 옮겨졌다.  


어째서 이런 차이가 빚어졌는지 궁금할 법한데, 쿤데라의 <소설의 기술>을 참고하면 ‘내막’을 짐작해볼 수 있다. 자기 소설의 ‘열쇠어’ 중 하나로 ‘서정성’을 풀이하면서 그는 ‘서정적인 것’과 ‘서사적인 것’은 미학의 영역을 넘어서 “자신과 세계와 타인에 대한 인간의 두 가지 태도”를 표상한다고 말한다. 문제는 이런 생각이 프랑스인들에게는 아주 낯설다는 점이다. 그는 타협책으로 프랑스어판에서 ‘서정적 바람둥이’를 ‘낭만적 한량’으로, ‘서사적 바람둥이’를 ‘자유주의적 한량’으로 바꾸는 것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좋은 해결 방법이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조금 서글펐다”고 그는 덧붙였다. 요컨대 체코어본이나 독어본, 영어본과는 달리 유독 프랑스어본에서는 ‘서정적 바람둥이’와 ‘서사적 바람둥이’라는 유형학이 허용되지 않은 것이다. 그에 따라 프랑스어본을 정본으로 삼은 한국어본은 쿤데라의 ‘서글픔’까지도 옮기게 되었다. 더불어 서정적인 것과 서사적인 것이란 이분법은 우리에게도 낯선 것이 되고 말았다.  

10. 07. 30.  

P.S.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최초 번역본은 송동준 교수의 독어본 번역이다.(이 번역본에서는 '서정적 난봉꾼'과 '서사적 난봉꾼'이라고 옮겼다). 김규진 교수의 체코어본 번역은 중앙일보사간 소련동구문학전집판(<존재의 견딜 수 없는 가벼움>)과 한국외대출판부판(<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두 종이 출간됐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4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홍차 2010-07-31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마시와 테레자로 쓴 까닭은 체코어 이름이 Tomáš와 Tereza이기 때문입니다.
독어본은 독어 철자에 없는 하체크 š를 뺀 Tomas와 독어화한 Teresa라서 번역본은 토마스와 테레자가 된 것이고 불어본은 역시 하체크를 뺀 Tomas와 그냥 체코어 이름 Tereza인데 번역본은 둘 다 한국 식 세례명에도 있고 좀 더 익숙한 이름인 토마스와 테레사로 썼다고 보면 됩니다.
체코어 원문을 보니 Thomas Mann으로 돼 있던데 토마시 만은 토마스를 토마시로 일률적으로 바꾸다 생긴 오류로 보입니다.

로쟈 2010-07-31 18:48   좋아요 0 | URL
기왕에 나온 체코어 번역본도 '토마스'라고 표기해주고 있으므로 '토마시'는 불필요한 혼란을 안겨준다고 생각해요. 그냥 생색용 흉내내기 정도(정작 교정되어야 할 오류들은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충실성'이 바람둥이 번역에는 적용되지 않았으므로 일관성이 없는 거지요. 그리고 '토마시 만'이야 물론 한번에 바꿔쓰기 하면서 생긴 오류일 텐데, 교정을 보지 않았다는 걸 꼬집고 싶었어요...

홍차 2010-07-31 18:32   좋아요 0 | URL
체코어 번역본도 토마스로 적었다니 좀 의외긴 한데 아마 맨 처음 번역한 책의 표기에 맞추지 않았나 싶군요.
근데 좀 더 자세히 쓰셨다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게 기고문 내용만으로는 그냥 왜 이름을 바꿨는지 모르겠다는 뜻으로 읽히거든요.
물론 번역에서 정작 더 중요한 문제를 지나친 일이 좀 아쉽긴 합니다.

로쟈 2010-07-31 19:06   좋아요 0 | URL
자세히 쓸 수 있는 분량은 아니고요. 고유명사 표기에서 원음 흉내는 보통 '알리바이'여서 제가 못마땅해 하는 편입니다. '테레사'의 경우에도 저는 그렇게 통용되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보는데, 체코어본도 '테레자'라고 했으므로 통일해줘도 되겠다 싶어요. 한데, '토마시'는 뭥미 수준인 거죠. 고유명사 표기는 원음을 고려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헷갈리지 않는 것과 일관성을 유지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덧붙여 š(sh)를 '시'로 표기하는 것도 임의적인 규칙이지요. 예전엔 '슈'나 '쉬'로 표기했으니까요...
 
'고전, 영화로 읽다' 강좌

엊저녁에 한겨레교육문화센터에서 진행한 5주간의 '도스토예프스키 깊이 읽기' 강좌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읽기'로 마무리됐다. 수강생 몇 분과 간단하게 뒷풀이자리를 가졌는데, 차후 강의 일정을 물어오시는 분들이 계셔서 9월 강의 일정이긴 하지만 미리 올려놓는다. 지난봄 '고전, 영화로 읽다' 강좌의 속편 격인데, 도서관에서 또 한번 영화로 고전을 만나는 기회를 갖게 됐다. 

  

지난번에 다룬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와 형평을 맞추기 위해 이번에 고른 건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다. 강좌는 무료로 진행되기에 도서관 근처에 사시는 분이라면 주말에 영화감상 나들이를 나오셔도 좋겠다. 이미 7월 일정은 이번 주말만 빼고는 진행이 됐고, 9월에 네 차례가 강좌가 더 남아 있다. 참고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대한 강의는 9월 11일(토)에 예정돼 있으면 신청은 노원평생학습관 홈페이지에서 받는다고 한다. 전체 일정은 다음과 같다.   

영화제작소눈의 '상영+강좌'프로그램인 <고전, 영화로 읽다>가 도서관을 찾아갑니다. 서울문화재단의  '책, 예술과 만나다' 중 하나로 선정되어 4개의 도서관에서 8번의 강좌를 이어나가게 됐습니다. 다소 심심한 도서관의 주말 상영회를 좀 더 뜨거운 시간으로 만들어 볼 생각입니다. 하나의 책과 하나의 영화가 어떻게 서로를 흉내내고, 싸우며 때로 벗어나는지를 되도록 담백하게 듣고, 말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찾아와주세요. 혹은 찾아가주세요. 때로 도서관이 극장이 되기도 합니다. 아니면 극장에서 책을 발견해도 좋습니다. 수많은 진부한 책과 영화속에서 길을 잃은 당신이라면, 더욱 찾아와주길, 찾아가 주길 바랍니다.(수강신청은 각 도서관 홈페이지에서..)

정독도서관

1강(7월 10일) - 거울 앞에 선 소설과 영화 : 그 증감의 게임
코맥 매키시『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5 / 코엔 형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2007
강사 : 김영남 (영화감독), <내 청춘에게 고함>, <보트> 등 연출 

2강(7월 17일 ) - 동시대성의 내연과 외연                  
가와바타 야스나리 『산소리』,1954 / 나루세 미키오 감독 <산의 소리>,1954
강사 : 이연호(영화평론가), 전 KINO 편집장, 영상원 강사,『전설의 낙인』등

 
고덕평생학습관

3강 (7월 24일) - 인형의 집 : 집나간 노라만 문제인가? 
헨릭 입센『인형의 집』, 1879년 / 패트릭 갈랜드 감독 <인형의 집>, 1973년
강사 : 장정일(소설가), 시집『햄버거에 대한 명상』,희곡『고르비 전당포』,소설『보트하우스』등

4강 (7월 31일) - 크로넨버그, 죽음과 욕망의 생리학
오노레 드 발자크『나귀 가죽』, 1831년 /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 <비디오드롬>, 1983년
사 : 이창익(종교학자),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 한신대 강사,『종교와 스포츠』등

노원평생학습관 

5강 (9월 4일) - 오뒷세이아, 세계와 인간을 탐구한 서사시
호메로스『오뒷세이아』, 기원전 7세기 / 마리오 카메리니 감독 <율리시스>, 1954
강사 : 강대진(고전문헌학자), 정암학당 연구원,『고전은 서사시다』,『잔혹한 책 읽기』,『신화와 영화』등 



6강 (9월 11일) - 도스토예프스키와 인간의 구원
도스토예프스키『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1880 / 피터 젤렌카 감독 <카라마조비>, 2008

강사 : 이현우(인문학자), 서울대 노어노문학과 박사, 한림대학교 연구교수,『로쟈의 인문학 서재』등

거마도서정보센터 

7강(9월 18일) - (미정)
베른하르트 슐링크『더 리더』, 1995 / 스티븐 달드리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2008
강사 : 김진영(철학자), 아카데미 상임위원.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아도르노와 벤야민 미학을 전공. 

8강(9월 25일) - (미정) 

10. 07. 30.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0-07-30 0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30 08: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30 09: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30 19: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헌내 2010-07-30 15:51   좋아요 0 | URL
요즈음, 한국학술정보원에서 해외 학술지를 무료로 복사해주고 있더군요....
(www.riss.kr)

그나저나 역시 지원해주는 인문사회과학 해외 학술지는 400건 밖에 안 됩니다. (인문학만이 아닌 인문+사회과학입니다 - 인문학 학술지는 100건도 안되는 것 같던데...)


P.S. 건방지게 지젝을 프로필 사진으로 씁니다 ㅋ

로쟈 2010-07-30 19:34   좋아요 0 | URL
지젝 덕분에 왠지 가족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네요.^^

재준 2010-07-30 17:39   좋아요 0 | URL
앗! 어제 뒷풀이 감사했습니다. 스스로 드러내지 않음을 성장과 미덕으로 여겨온 저를 돌아본 시간이기도 했거든요^^. 노원에 꼭 시간내서 찾아뵙겠습니다. 건강하세요.

로쟈 2010-07-30 19:35   좋아요 0 | URL
네, 노원에서도 뵈면 구면이겠습니다.^^

lifeisart 2010-07-31 11:04   좋아요 0 | URL
저 노원에서 뵐께용^^ 넘 멋진 강좌 기대됩니당~

로쟈 2010-07-31 14:52   좋아요 0 | URL
영화+강의여서 4시간 정도 잡으셔야 합니다.^^
 

이탈리아의 저명하면서도 문제적인 영화감독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의 소설 <폭력적인 삶>(민음사, 2010)이 다시 번역돼 나왔다. 나는 예전에 나온 세계사판을 갖고 있는데, 어디에 보관해두고 있는지도 모르던 차여서 반가운 일이다(아직 읽지 않은 것이다). 영화쪽에서는 '파졸리니'라고 부르고 알라딘에서도 '파졸리니'로 잡혀 있는데, 실제 발음은 '파솔리니'인 모양이다. 내게 '파졸리니'란 이름이 친숙한 건 영화부터 접했기 때문. 아주 오래전에 그의 영화 <살로, 소돔 120일>이나 <오이디푸스왕> <캔터베리 이야기> 등을 본 기억이 있다. 베를톨루치의 스승으로도 잘 알려져 있지만 '폭력적인 죽음'으로도 사후에 유명세를 치렀다. 몇년 전에 전기가 두 종 번역됐었는데, 이 참에 모아서 읽어봐도 좋겠다. 영화도 그간에 많이 출시됐다. 덧붙여, 어제로써 즐찾이 2900명이 됐는데, 그것도 기념하여 리스트를 만들어놓는다(즐찾 3000은 아마 올해안에 달성될 듯싶은데, 내심으론 알라딘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 생각한다). 아래는 사드의 소설을 파시즘 치하로 번안한 영화 <살로, 소돔 120일>의 한 장면.


12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폭력적인 삶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지음, 이승수 옮김 / 민음사 / 2010년 7월
16,000원 → 14,400원(10%할인) / 마일리지 80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1월 2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10년 07월 29일에 저장

A Violent Life (Paperback)
Pasolini, Pier Paolo / Carcanet Pr / 2007년 8월
46,760원 → 38,340원(18%할인) / 마일리지 1,92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1월 12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10년 07월 29일에 저장

폭력적인 삶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지음, 박명욱 옮김 / 세계사 / 1995년 2월
9,900원 → 8,910원(10%할인) / 마일리지 490원(5% 적립)
2010년 07월 29일에 저장
품절

평전 파솔리니- 죽음과 삶의 몽타주
엔초 시칠리아노 지음, 김정미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5년 5월
27,500원 → 24,750원(10%할인) / 마일리지 1,370원(5% 적립)
2010년 07월 29일에 저장
품절


12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