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강의 때문에 신촌에 나갔다가 홍익문고에 들렀는데, 메모를 해두지 않아서 미처 구하지 못한 책이 있다. 하영식의 <얼음의 땅 뜨거운 기억>(레디앙, 2010)이다. 제목에서 연상되는지 모르겠지만, 저자의 시베리아 기행기다. 무려 일곱 차례나 시베리아를 찾았다고 한다. 나도 언젠가는 한번 가보고 싶지만, 현재로선 독서 경험만으로도 더위를 얼마간 덜어보고 싶다(오늘은 태풍이 지나간다고 하니 좀 시원하려나?). 인터뷰기사를 옮겨놓는다.    

  

국민일보(10. 08. 27) “시베리아 7차례 여행하며 찾아낸 키워드는 자유”… ‘얼음의 땅 뜨거운 기억’ 펴낸 하영식씨 

시베리아로 추방됐던 러시아 정치범들은 종종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예르마크! 왜 시베리아를 정복해서 우리를 이렇게 힘들게 하느냐.” 예르마크는 16세기 시베리아 왕국을 정복한 해적 출신 러시아 장군이다. 시베리아 정복 직후 시작된 죄수들에 대한 유형 제도는 20세기 소비에트 혁명이 성공할 때까지 잔존했다.

‘남미 인권 기행’의 저자 하영식(45·사진)이 이번에는 시베리아 이야기 ‘얼음의 땅 뜨거운 기억’(레디앙)을 펴냈다. 겨울이면 영하 50도까지 떨어지는 시베리아의 ‘뜨거운 역사’를 기행문 형식으로 담아냈다.

“러시아를 여행하며 학자들을 굉장히 많이 만났어요. 하지만 시베리아나 데카브리스트(러시아 최초로 근대적 혁명을 꾀한 자유주의자들)의 역사가 별로 알려진 게 없어 역사기행 형식으로 쉽게 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인들에게는 추위와 도스토예프스키 정도밖에 떠올려지는 게 없는 곳이지만, 러시아인에게 시베리아는 혹한의 압제에 맞선 투쟁가들의 삶이 가득한 역사의 현장 그 자체다.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 파스테르나크가 펴낸 불멸의 문학도 시베리아라는 척박한 땅 없이는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저자가 시베리아를 7차례 여행하며 찾아낸 키워드는 ‘자유’. 특히 19세기 러시아의 급진적 엘리트였던 데카브리스트들이 시베리아에 남긴 유산에 관한 서술이 눈길을 붙잡는다. 데카브리스트들의 주체는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 당시 러시아군의 젊은 장교들이다. 이들은 프랑스군을 격퇴하고 파리까지 추격하는 과정에서 혁명을 거친 근대 유럽을 보았고 자유를 알았다. 그때껏 농노가 전 국민의 90% 정도를 차지하는 러시아 사회만 보던 이들에게는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엄청난 충격이었다. 대개가 귀족 출신으로서 가만히만 있으면 기득권을 움켜쥐고 살아갈 수 있었던 이들은 1825년 ‘위로부터의 혁명’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차르 니콜라이 1세는 이들 중 다섯 명을 처형하고 121명을 시베리아로 추방했다. 저자는 “기득권을 포기하고 자유를 위해 헌신했던 데카브리스트들은 물신주의로 가득한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희생’의 가치를 전해준다”고 말했다.

실패한 혁명 이후 100년간 절대군주의 압제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던 러시아의 역사를 따라가노라면 책상에 책을 펴놓고 앉아 ‘만약’을 읊조리는 바보가 될 수밖에 없다. 데카브리스트 혁명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죄책감 속에서 평생을 살았던 푸쉬킨과 미국으로 망명을 오라는 솔제니친의 제의를 평생 거부했던 파스테르나크 이야기도 가슴을 울린다. 가벼운 기행문으로 시작했다가 역사의 뒤편 깊숙한 곳까지 들춰내는가 하면, 어느덧 풍경에 대한 감상을 비치는 저자의 자유로운 서술은 독서의 즐거움을 배가시킨다.

박노해 시인으로부터 ‘지구 시대의 슬픈 여행자’라는 말을 듣기도 한 하영식의 다음 목적지는 티벳이나 아프리카가 될 예정이다. 그는 “가보지 않은 곳이 거의 없다”며 “티벳에 갈 계획을 세워는 놨는데,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책 말미에는 레흐 바웬사 전 폴란드 대통령의 인터뷰도 실려 있다.(양진영 기자) 

10. 09. 02. 

 

P.S. 시베리아에 관한 책들이 간간이 출간되는데, 가장 최근에 나온 것으로는 리처드 와이릭의 <너의 시베리아>(마음산책, 2010)가 있다. 미국의 작가이자 변호사인 저자가 딸아이를 입양하기 위해 시베리아에까지 갔던 경험을 담고 있다. 일종의 여행기. 감수자로 내 이름이 올라가 있기도 하다. 그리고 콜린 더브런의 <순수와 구원의 대지 시베리아>(까치글방, 2010). 얼마 전에 소개한 책인데, 후배에게 부탁한 원서도 마침내 구한 김에(아직 입수까지 한 건 아니지만) 읽어볼 기회가 생길 것 같다. 더브런의 책은 제임스 포사이스의 <시베리아 원주민의 역사>(솔출판사, 2009)와 함께 리처드 와이릭이 참고한 책이기도 하다. 시베리아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독자라면 필히 챙겨둘 만한 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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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2 08: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02 08: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02 09: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 여자를 집으로 데려가면 어떨까?"

문학동네 블로그에 연재하는 로쟈의 스페큘럼을 옮겨놓는다. 캐서린 맨스필드의 <차 한 잔> 읽기의 계속인데, 한 차례 더 다뤄야 마무리가 된다. 이후에 예정으로는 버지니아 울프의 단편 읽기로 넘어갈 계획이다. 전문은 http://cafe.naver.com/mhdn/17666 에서 읽어보실 수 있다.  

우리의 이야기는 젊고 부유한 귀부인 로즈머리가 길에서 차 한 잔 값을 구걸하는 한 여인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오는 대목에서 멈췄었다. 그들은 이제 2층에 있다. 로즈머리는 최대한 ‘손님’이 불편하지 않게 배려하면서 벽난로 앞 안락의자에 않도록 권한다. 여자는 아무 대답 없이 두 손을 허리에 대고 입을 약간 벌린 채 앉아 있다. 밀어다 앉힌 자세 그대로다. 어딘가 좀 모자라게도 보인다. 로즈마리는 머리카락이 젖었으므로 모자와 코트를 벗도록 권유한다. 그러고는 코트를 벗는 일을 도와주려고 하는데, 상대방이 좀 ‘비협조적’이다. 개인적으론 아주 마음에 드는 이 장면에 대한 묘사를 읽어본다.  

“여자가 일어섰다. 그러나 그녀는 한손으로 의자를 붙잡고서 로즈머리가 끌어당기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무척 힘이 드는 일이었다. 그녀는 조금도 거들려고 하지 않는 것이었다. 여자는 마치 어린 아이처럼 비틀거렸고, 로즈머리의 머릿속에는, 남의 도움을 받고 싶다면 자신도 약간은, 아주 약간만이라도 거기에 반응을 보여야지 안 그랬다가는 정말 난감해진다는 생각이 오고갔다. 그런데 이제 이 코트를 어떻게 한다? 그녀는 그것을 방바닥에 놓고 또 모자도 그렇게 했다.”

“그녀는 조금도 거들려고 하지 않는 것이었다.”는 “The other scarcely helped her at all.”을 옮긴 것이다. ‘여자(the girl)’라고 줄곧 지칭되다가 이 대목에선 ‘그쪽(the other)’이라고 일컬어지는데, 말 그대로 ‘타자(the other)’와 로즈머리가 접촉하는 장면으로 읽어도 좋겠다. 어째서 타자인가? 로즈머리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행동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어떤 생각인가? 그녀가 코트를 벗겨주면서 혼자 되뇌는 생각이다. ‘남의 도움을 받고 싶다면 자신도 약간은, 아주 약간만이라도 거기에 반응을 보여야지 안 그랬다가는 정말 난감해진다’는 것. ‘이제야 당신을 붙들었군요(I've got you).’라고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집에까지 데려왔지만 이 장면에서 ‘손님’의 반응은 그녀의 계산과 기대 밖이다.

물론 바로 이어지는 장면에서 가냘프고 이상한 목소리로 “대단히 죄송하지만, 사모님, 저는 지금 쓰러질 것만 같아요. 뭘 좀 먹지 않으면 쓰러지겠어요, 사모님.”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로즈머리의 ‘여자’는 약간이라도 반응할 여력도 없는 것이라고 봐야겠다. 하지만 그런 객관적 정황과 무관하게 이 장면에서 로즈머리가 한순간 ‘타자’ 혹은 ‘사물’과 조우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자신을 도와주려고 하는 데도 아무런 기척도 내보이지 않는 ‘타자’ 앞에서 난감함을 느낀 경험을 로즈머리가 과연 또 갖고 있을까? 아마도 없지 않을까. 왜냐하면 로즈머리의 세계란 타자가 전적으로 부재하는 세계였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떠올리게 되는 건 프로이트의 ‘네벤멘쉬(Nebenmensch)’란 말이다. ‘이웃집 사람’ 혹은 ‘옆집 사람’과 같은 의미이지만 일상적으로 사용하지는 않는 독일어라고 한다. 프로이트는 <과학적 심리학을 위한 기획>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각을 제공하는 대상이 주체를 닮았다고 가정해보자. 대상은 바로 동류 인류(네벤멘쉬)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대상은 주체에게 유일한 도움을 주는 힘일 뿐 아니라, 최초의 만족을 주는 대상인 동시에 더 나아가서는 주체의 최초의 적대적인 대상이었다는 사실이 이론적 관심도 해명해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한 사람이 인식하는 방법을 배운다는 사실은 동료 인간과 관련된다.(케네스 레이너드 외, <이웃>(도서출판b, 2010), 51쪽에서 재인용)

케네스 레이너드의 정리에 따르면, “네벤멘쉬는 주체와 그 최초의 모성적 대상 사이에 서있는 ‘인접한 사람’으로서의 이웃이며, 주체의 현실을 표상 가능한 인식의 세계와 프로이트가 ‘사물’이라 부르는 ‘동화할 수 없는’ 요소로 분할하는 섬뜩한 지각의 복합체이다.” 즉 이웃은 주체가 경험하는 현실을 ‘표상 가능한 인식의 세계’와 ‘동화할 수 없는 사물의 세계’로 분할한다. ‘표상 가능한 인식의 세계’라는 건 주체가 경험하는 것과 닮은꼴의 세계이다. ‘나’와 좀 다르지만 비슷비슷하구나, 쟤는 저렇게 밥을 먹는구나, 저렇게 하품을 하는구나, 저럴 땐 저런 표정을 짓는구나, 등등을 ‘나’는 ‘이웃’에게서, ‘이웃 아이’에게서 보고 배운다. 따라하기도 하고 공유하기도 한다. 이것을 프로이트는 “인간은 동료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인식하기를 배운다”라고 표현한다. 반면에 그가 사물(das Ding; Thing)이라고 부르는 것은 “전적으로 낯선 타자 안에 있는 어떤 것과의 마주침”이다. 라캉에 따르면, 그것은 자기와 타자의 구성물을 넘어서는 이질성의 침입이다.  



<차 한 잔>에서 로즈머리는 거리에서 마주친 낯선 여인을 ‘포획’하여 자신의 집으로 데려왔다. 그녀의 ‘자선적’ 행위에는 나르시시즘적 동기가 지배적이었다는 것은 이미 확인한 대로다. 하지만 “여자가 일어섰다. 그러나 그녀는 한손으로 의자를 붙잡고서 로즈머리가 끌어당기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무척 힘이 드는 일이었다. 그녀는 조금도 거들려고 하지 않는 것이었다.”라는 대목에서만큼은 그녀의 손님은 로즈머리에게 ‘사물’이다. 낯설고 이질적이고 동화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내가 ‘사물로서의 타자’와의 조우라고 부르고 싶은 이유다. 하지만 이 조우, 혹은 마주침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로즈머리가 미처 고려하지 못한 것은 손님의 상태였다. 곧 쓰러질 정도로 허기진 상태라는 것을 잠시 잊은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저런, 내가 미처 생각을 못 했네!”라고 말하며 하녀에게 빨리 차와 브랜디를 가져오라고 주문하다. 하지만 거의 울상이 되어 소리친다.

“아니에요, 브랜디는 필요 없어요. 저는 브랜디는 안 마셔요. 전 차 한 잔이면 돼요, 사모님.” 그러고서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것은 놀랍고 황홀한 순간이었다.

이 ‘놀랍고 황홀한 순간’은 이 작품의 유사-클라이맥스다. 왜 놀랍고 황홀한가? 로즈머리가 기획했던 시나리오의 가장 완벽한 구현이기 때문이다. 불쌍하고 가련한 한 여인의 눈물과 그것을 다독여주는 따뜻하고 고귀한 품성의 로즈머리! 이 장면에서 로즈머리의 연기를 보자. 그녀는 우선 여자가 앉은 의자 옆에 무릎을 꿇는다. 그리고는 더없이 자상한 태도로 손님을 위로한다.

“울지 말아요, 가엾기도 해라.” 그녀는 말했다. “울지 말아요.” 그러고 나서 여자에게 레이스가 달린 자기 손수건을 꺼내 주었다. 그녀는 실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감동되었다. 그녀는 가냘픈 새와 같은 그 어깨에 자기를 팔을 감았다.

번역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울지 말아요, 가엾기도 해라.”는 로즈머리의 말은 “Don't cry, poor little thing”을 옮긴 것이다. 여기서 ‘가엾은 것(poor little thing)’을 ‘사물(the Thing)’이 순치된 걸로 볼 수 있을까? 로즈머리에게는 이제 아무것도 낯설지 않고 두렵지 않다. 그녀는 ‘가냘픈 새’와 같은 ‘이웃’을 온전히 포획했고 감싸 안았다. 숨을 헐떡이면서 더 이상은 못 살겠다고 울먹이는 여인을 다독이며 자신이 돌봐주겠다고까지 말한다. 로즈머리에 읽은 소설이나 영화에 나올 법한 감동적인 장면이다. 로즈머리 자신이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나를 만나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되지 않아요? 같이 차를 들면서  뭐든지 죄다 이야기해봐요. 그러면 내가 어떻게든 해볼 테니까. 약속할게요. 정말 이젠 울음을 그쳐요. 기진맥진하게 될 테니까. 자, 부탁이에요!”

(...)

10. 08.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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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하지만 저 여잔 너무 놀랄 정도로 예쁘잖아"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9-06 11:44 
    문학동네 블로그에 연재하는 '로쟈의 스페큘럼'을 옮겨놓는다. 맨스필드의 단편 <차 한 잔>을 계속 다루고 있는데, 이번에도 마무리가 되지 않았다. 다음에 한 차례 더 '읽기'를 덧붙일 계획이다. 전문은 http://cafe.naver.com/mhdn/17837  에서 읽으실 수 있다. 참고로, 이 작품의 번역본은 범우사판과 시사영어사판 대역본 두 종을 참고했는데, 대화 장면의 번역은 나대로 다시 옮겼다. 동서문화사판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 7회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7호를 발췌해 놓는다. 어젯밤에 시작을 했지만 대부분은 오늘 아침에 쓴 것이다. 외출에서 돌아와 저녁에서나 연재된 글을 읽었다. 지난주에 나온 <좌파들의 반항>(들녘, 2010)이란 책에 지젝에 대한 언급이 있어서 주말에 읽어봤는데, 그 내용이 서두를 차지하고 있다.   

 

로버트 미지크의 <좌파들의 반항>(들녘, 2010)을 보면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나온다. 2005년에 독일에서 출가된 책인데, 슬라보예 지젝을 소위 ‘래디컬 시크(Radical Chic)’라고 보는 부정적인 견해를 소개하고 있다. 독일 일간지 <차이트(Zeit)>의 문화부 편집장이자 중도파 지식인 외르크 라우가 막 출간된 지젝의 <혁명이 다가온다 - 레닌에 대한 13가지 연구>(2002)에 자극을 받아 그를 가리켜 ‘선량한 테러’를 꿈꾸는 위험한 인물이며 ‘겉멋만 부리는 영웅(Radical Chic)’이 되려 한다고 비난했다는 것이다.

‘겉멋만 부리는 영웅’이란 표현은 ‘시크’하지 못한 번역인데, 아마도 그냥 음역하는 게 나을 듯싶다. 이 말의 저작권자는 뉴욕의 저널리스트 톰 울프다. 그가 1960년대 후반 미국 상류사회의 좌파 자유주의자가 블랙 팬더당(흑인 과격파) 기금 모집 파티를 열었을 때 그걸 비꼬는 의미로 처음 쓴 표현이라 한다. “한가한 부르주아지들과 아무런 의무감도 없이 반항이라는 몸짓으로 스릴을 즐기며 의미를 찾으려고 애쓰는 중산층 젊은이에 대한 조롱”을 담고 있다고. ‘반항의 이미지’를 과시하고 소비할 따름인데, 가장 비근한 예는 체 게바라의 얼굴이 인쇄된 티셔츠 같은 것이다.   



지젝의 얼굴이 새겨진 티셔츠는 눈에 띄지 않는 걸로 보아 아직 ‘래디컬 시크’는 못 되는 듯싶지만(래디컬 시크가 되려 한다?), 좌파 상업주의 혹은 ‘유행 좌파’에 대해 미심쩍은 시선은 온당하다. 그들의 제스처가 기껏해야 공허한 반항에 불과한 것 아니냐고 생각하는 것도 충분히 일리가 있다. 하지만 미지크는 이 문제를 라우보다 좀더 복잡하게 생각한다.

“체 게바라의 얼굴이 인쇄된 T-셔츠를 입었다고 놀림감이 되는 젊은이들이 만일 바리케이드를 치고 방화를 한다면 좋게 받아들여질까? 무엇이 과연 공허하지 않은 몸짓일까? 그 몸짓은 대체 언제쯤 완벽하게 공허해질 수 있을까? 애석하게도 이 문제에 관해서는 <차이트>와 <뉴욕 타임스>처럼 세계적인 유력지의 문화부에 근무하는 전문가들조차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유명인사들이 반항의 몸짓을 보이고 반항아들이 유명인사가 된다는 사실에 그저 놀랄 뿐이다.”(13-14쪽)

그러니까 지젝과 같은 ‘과격한 급진주의자’가 유명인사가 되는 것도 한갓 유행에 불과하며 알고 보면 그 또한 자본주의 상품화에서 포섭된다는 비판은 절반만 옳다. 네 책이 많이 팔렸으니 너도 자본주의의 수혜자가아 아니냐는 비판이다. 대개 그런 비판은 근엄한 온건좌파에게서 나온다. “적지 않은 주류가 그를 허풍을 심하게 떨면서 공허한 제스처 속으로 빠지고 마는 래디컬 시크와 학문적으로 잘난 체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혐오감을 주는 인물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99쪽) 독일 지식사회에서 지젝에 대한 숭배 못지않게 반감도 크다는 걸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미지크의 판단은 양가적이며 유보적인 것처럼 보인다. 다소 길지만, “그들은 지젝을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해 하시는 분들을 위해(이건 대타자의 시각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세 가지 단락을 인용해본다.

“지젝은 잘 나가는 급진좌파들 가운에서 놀라울 정도로 ‘이성적’이며, 테제의 소실점으로 빠져들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지 균형과 중도를 유지하는 사람으로 꼽힌다.”
“지젝이 세계화된 이론의 상류계층의 진귀한 현상 중의 하나라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냉소가이며 광적이며 정치적으로 오류를 지닌 그는 한편으로 위대한 도덕주의자이기도 하다.”
“지젝은 진지한 사고의 물꼬를 터주기 위해 진지하지 않은 질문을 던진다.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총명한 그가 종종 어릿광대짓을 하는 까닭은 사람들이 배를 잡고 웃지 않으려는 순간을 역으로 이용해서 원하는 바를 이끌어내는 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전부는 아니지만 동의할 수 있는 구석이 많다. 특히 마지막 인용이 그러한데, 지젝의 ‘어릿광대짓’이 전술적이라는 것이다. 영어권에서는 ‘MTV 철학자’로 불린 그가 독일에서는 ‘래디컬 시크’로 비꼼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지젝은 그것을 ‘의도와 다르다’며 피해가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그러한 상황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이용하려 한다. 한 연극의 대사를 빌자면,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자본주의를 몰아낼 수 없다”고 말한다. “자본주의의 바깥은 없다!”는 말로 정리할 수 있겠다. “반항의 제스처만 가지고는 우리에게서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할 것이다.”란 엄포도 들린다. 체계(시스템)는 물론 막강하다. “시민들의 권리는 편협한 논리에 따른 생산시스템, 말하자면 경제체계에 편입된다는 이유 때문에 점점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라는 점도 맞다. 하지만 아킬레스건이 없는 건 아니다. “어떠한 시스템이든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으려면 제반 조건들이 주체의 결정권을 장악해서는 안된다.”는 점이 그것이다. 지젝이 노리는 바도 바로 그 점이다. 주체가 문제라는 것. 

(...)
 
잠시 우회하였는데, 다시금 방향을 <실재계의 사막>으로 틀어본다. 1장의 제목은 ‘실재계에 대한 열정, 모사에 대한 열정’이라고 붙어 있는데, 이 대목은 2003년 방한 강연을 담은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이데올로기>(철학과현실사, 2005)의 제1강연과 동일하지는 않지만 많은 부분이 겹친다. 그래서 같이 참조하면 도움이 된다. 이미 실재(계)에 대한 예비적 설명은 앞에서 다루었기 때문에 ‘실재계에 대한 열정’ 혹은 ‘실재의 열망’이 어떤 의미인가는 대충 짐작하실 수 있을 터이다.  

 

그래도 지젝은 실재에 대한 열정이 어떤 것인가를 설명하기 위해 브레히트보터 에른스트 융어, 오시마 나기사 등의 많은 사례를 동원하고 있는데, 오시마 나기사는 <감각의 제국>의 감독으로서 오시마를 가리킨다. 두 연인의 성애 관계가 서로를 고문할 정도로 과격해지다가 결국 죽음에까지 이르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컬트영화’였다. 이런 것이 말하자면 ‘실재에 대한 열정’이다. 그 궁극의 형상으로 지젝은 여성의 성기를 보여주는 포르노영화의 장면도 예시한다.

“가령 여자 성기의 안쪽을 들여다보는 장면, 게다가 진입 중의 남자 성기의 머리에 설치된 소형 카메라의 눈으로 들여다보는 장면을 생각해보라. 하지만 이런 극단적인 지점에서는 어떤 전회가 일어난다. 욕망의 대상이 너무 가까이 다가오게 되면, 성적 매혹은 구토로 전환된다. 고기 덩어리의 실재 앞에서 구토하게 되는 것이다.”(<탈이데올로기>, 16쪽)

다른 대목의 번역은 <탈이데올로기>가 <실재계 사막>보다 수월하지만 이 대목만은 그렇지 않은데, 소형 카메라를 ‘남자 성기의 머리’에 설치했다고 옮겼기 때문이다(그런 설정이 엽기적이다). 그것은 실제 성기가 아니라 ‘모조 음경(dildo)’을 가리킨다. 과연 여성적인 것의 핵심에 무엇이 있을까란 호기심에 그 ‘욕망의 대상’에 가까이 근접하지만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살의 실재계(the Real of the bare flesh)’일 뿐이다(‘고기 덩어리’도 좀 과도한 번역이다). 요는 9.11 테러, 곧 “근본주의적 테러라는 것도 실재계에 대한 열정의 표현이 아닐까?”라는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는 다음 회에서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10. 08.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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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0-08-31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의 책이 그린비에서 나오던데...하여간 엄청 비싸다는..--;;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지젝 입장에서는 책을 거의 무료로 해서 팔아야 쫌 어필할거 같은데..ㅋㅋ 제발 책값좀 인하하고 뭐라 좀 말했음 좋겠습니다..ㅎㅎ 비싸서 사서 볼 염두가 안난다는..ㅎㅎ

로쟈 2010-08-31 22:04   좋아요 0 | URL
지젝의 영어책은 그리 비싸지 않습니다. 번역본은 수요가 한정돼 있어서 그렇겠지요. 인문서 독자가 소설 독자만큼만 돼도 책값이 1/3은 떨어질 텐데요...

chihyun7 2010-09-02 02:20   좋아요 0 | URL
지젝은 원서가 한국어 번역본보다 더 싼 경우가 많더라고요^^ 그러니까 지젝이 책으로 돈을 챙기려는 의도는 없다고 봐야한다는...

비로그인 2010-09-01 0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들이 생각하는 지젝' 중 마지막 인용이 마음에 드네요.
지젝의 강연 동영상을 본 적이 있는데 땀을 뻘뻘 흘리며 끊임없이
얼굴을 만지고 쓸어내면서 말을 쏟아내는 모습을 보고
저러다 '자연발화'되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에너지를 얻고 고양되는 느낌이었달까요.
건강하게 오래 활동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로쟈 2010-09-01 23:48   좋아요 0 | URL
틱 증세라고 합니다. 여하튼 열정만큼은 존경스럽죠.^^

chihyun7 2010-09-02 02:23   좋아요 0 | URL
지젝이 방한했을 때, 친구가 간사로 일했었는데, 지젝이 당이 딸린다고 해서 구경하러간 저보고 얼른 초콜렛 사오라고 부탁한 적이 있죠. 여러모로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증상이 많은 사람인듯합니다.

로쟈 2010-09-02 08:44   좋아요 0 | URL
네, 그때 당뇨가 있다고 했었는데, 좀 나아졌는지 모르겠네요...
 

내일자 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원래 4주 간격이던 것이 3주가 된 것은 필진 한 분의 개인사정 때문이었다. 다음 연재는 다시 4주 간격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여하튼 급하게 돌아온 차례였지만 나름대로 '선방'하고 넘어간다. 오늘 낮에 쓴 칼럼의 주제는 지난주에 서평을 쓰느라 읽은 마이클 샌델의 <생명의 윤리를 말하다>(동녘, 2010)에서 암시를 얻은 것이다. 처음엔 '공정한 사회'론과 관련지어 두 문단쯤 쓰다가 마무리가 안될 것 같아 방향을 틀었다. 글도 자기의 운을 갖는다... 

   

경향신문(10. 08. 31) [문화와 세상] 부모 뜻대로 안 되는 좋은 사회  

가을의 문턱이다. 아직 무더위가 가시지 않았지만 수능을 두어달 앞둔 수험생이나 학부모의 마음이 바빠질 때다. 공연한 남 걱정인가 싶지만, 자녀 교육과 부모의 책임에 대한 고민만큼은 부모에게 면제되지 않는다. 게다가 초등학교 1학년생부터 ‘예비 수험생’으로 내몰고 있는 대한민국 교육의 강박적 현실을 고려하면 남 걱정이 아니다. 하지만 그 걱정과 부담을 좀 덜어놓자는 생각을 갖게 됐다. ‘아빠의 무관심’을 정당화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나름대로 근거가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로 열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하버드 대학 마이클 샌델 교수는 또 다른 책 <생명의 윤리를 말하다>에서 우리의 삶을 ‘선물’로 인식해야 한다는 주장을 강하게 펼친다. 생명공학 기술의 발달에 따라 인간이 생명의 디자이너가 돼도 좋다고 주장하는 자유주의적 우생학에 반대하여 그가 옹호하는 것은 생명을 선물로 보는 윤리다. 생명의 디자이너가 된다는 것은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자녀를 부모의 의지의 산물로 만든다는 뜻이다. 그렇게 만들 수 있다는 얘기는 한편으론 부모를 자녀에게 책임을 다하는 ‘능력 있는’ 부모와 그렇지 못한 부모로 양분한다. 자녀의 성별뿐만 아니라 지적인 소질이나 운동능력 같은 유전형질도 부모가 정한다. 아예 부모가 적극적으로 나서 외모까지도 손봐주는 시대다. 원래는 치료의 목적으로 개발됐지만 생명공학은 이러한 부모의 의도와 ‘과잉 양육’을 현실화시켜 준다.

가령, 리탈린이란 약은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장애’로 진단받은 아이들을 위한 치료제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정상적인 아이들도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 이 약을 처방받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한다. 18세 이하 미국 청소년의 5~6%가 리탈린이나 다른 자극제를 처방받고, 친구의 약을 사거나 빌려서 먹고 SAT(미국의 대학입학 자격시험)나 대학 시험을 치르는 학생들도 있다고 한다. 주의력 결핍 치료제가 주의력 강화제로 탈바꿈한 것이다. 물론 ‘치료’와 ‘강화’ 사이의 경계가 흐릿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구분 자체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샌델 교수의 입장이다. 자녀를 강화하려는 부모는 역설적이지만 자녀에 대한 ‘무조건적 사랑’이라는 규범에서 벗어난다. 자녀의 존재를 그 자체로 긍정하는 ‘받아들이는 사랑’과 자녀의 복지를 추구하는 ‘변화시키는 사랑’, 이 두 가지 사랑이 부모에게 있다고 하면, 자녀가 완벽해지길 바라면서 모든 면에서 탁월한 성취를 이루도록 요구하는 것은 ‘변화시키는 사랑’ 쪽으로만 치우친 것이다.

여기서 충돌하는 것은 ‘자식은 부모 뜻대로 안 돼’라는 통념과 ‘자식은 부모 하기 나름’이라는 믿음이다. 문제는 유전공학까지 동원하여 모든 것이 ‘부모 하기 나름’으로 간주되는 순간 아이의 재능과 능력은 모두 부모의 책임으로 귀결된다는 점이다. 유전적 자기 개량에 익숙해짐에 따라 운명과 행운의 몫은 줄어들고 자신과 자녀의 운명에 대한 책임은 증폭된다. 그에 따라 우리보다 못한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과의 연대의식은 감소한다. 삶이 ‘주어진 선물’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든지 조작하고 정복할 수 있는 대상이라고 보는 관점의 음울한 미래상이다. 반면에 삶이란 선물이며 각자의 재능은 유전적 제비뽑기의 결과일 뿐이라는 인식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든다. 자녀의 성공이 부모의 노력 덕분만이 아니라 행운의 결과이기도 하다는 깨달음은 ‘똑같은 부모’의 처지를 돌아보게 하고 서로 연대감을 갖도록 해줄 것이다. 더불어 성공에 뒤따르는 사회적 혜택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게끔 유도할 것이다. 부모 뜻대로 안 되는 사회가 더 좋은 사회다. 

10. 08. 30. 

P.S. <생명의 윤리를 말하다>의 내용은 샌델 교수의 강연으로도 참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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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자유주의 우생학 비판과 선물로서의 삶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9-10 23:10 
    격주간 <기획회의>(279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개인적인 사정에 따라 청탁원고를 사절하고 있어서 정간물에 쓰는 서평은 한달에 한번 쓰는 <기획회의>와 격월로 쓰는 <공간> 원고가 전부다(한데 마감은 내주에 또 같이 몰려 있다). 내년에는 예약해놓은 곳이 있어서 더 추가되겠지만, 이런 추세면 <책을 읽을 자유>(현암사, 2010) 다음 서평집은 3-4년 뒤에나 묶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빵가게재습격 2010-08-31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음...결국 모범생들이 문제군요. 혹은 부모님을 뜻을 받들어 모범생으로 사는 학생들이 문제군요. 결국 학생들이 <생명의 윤리를 말하다>를 읽는 가장 훌륭한 독법은 어떻게 '반항'하고 '타락'할 수 있는가를 숙고하는 것! 돌멩이 맞기 전에 도망갑니다...^^;;;;

로쟈 2010-08-31 19:15   좋아요 1 | URL
흠, 부모들 얘기만 적었는데, 두 수를 앞서 가시네요.^^

2010-08-31 0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31 19: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로 2010-08-31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제 추천 마법사에 계속 올라와도 관심 없었는데 님의 이 페이퍼 보고서 사려고 결심했어요!! 아,,,그런데 책 주문 자제해야 하는데,,ㅠㅠ

로쟈 2010-08-31 19:12   좋아요 0 | URL
얇아서 독서 부담은 없는 책입니다.^^;

2010-08-31 14: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31 19: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lo초우ve 2010-09-02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흐~~~ 로쟈님덕분에 ㅋ
정의란 무엇인가, 생명의 윤리, 이것이 인간인가
월요일날 알라딘서점에서 구입했답니다 ^^
부지런히 읽어보구요..
계속 소개해주시는 책, 읽어보고싶은책, 재미있을듯한책,ㅋ
몽땅 몽땅 보관함에 저장했답니당 ^^
아참~!
태풍이 지나갔는데 별일 없으시죠?
제가 있는 거제도에는 새벽부터 오후까지
천둥번개를 동반한 무서운 바람이 지나갔어요 ^^
하지만, 이상무.. ^^

로쟈 2010-09-03 00:25   좋아요 0 | URL
네, 큰일은 없었습니다. 그래도 생각보단 짧게 지나가더군요...
 

낼모레면 9월이고 개강이다. 대학강의는 이번 학기에 줄었지만, 그래도 마음은 부담과 분주함이 교차한다(기대나 반가움은 옛말이다). 그래봐야 손과 머리로 할 수 있는 일은 얼마 되지 않음에도. 어제 우편물 때문에 옛집에 들렀다가 이번주 교수신문에서 '어느 연구교수의 안타까운 죽음'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 하이데거 번역자와 연구자로 내게도 이름이 익숙한 신상희 박사가 얼마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한눈 팔지 않고 번역/연구에만 매진한 성실한 학자에 대한 사회적 보상이 겨우 이 정도인가 다시 한번 탄식하게 된다. 더불어 지난주에 읽은 김상봉 교수의 칼럼을 떠올렸다. 대학강사에게도 총장선출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았다. 무리한 주장인가? 그것이 무리한 주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통념이 바뀌지 않는 한, 대학사회에 미래는 없다는 쪽에 내기를 걸겠다...     

 

경향신문(10. 08. 25) [김상봉칼럼] 대학강사에게 총장선출권을 

나는 해직교수였다. 그때가 이른바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가 닥쳤던 바로 다음 해 봄이었는데, 나라 경제가 온통 위기 상황이었을 때 직장을 잃었으니 가진 것 없는 살림에 염려가 없을 수 없었다. 그 무렵 도서출판 한길사에 자주 드나들었는데, 김언호 사장이 차라리 잘되었다는 듯이 한마디 했다. “김 선생, 책 열 권만 쓰면 먹고 사는 거야 걱정 안 해도 되잖아.” 책 써서 먹고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 말이 몹시 고마워 그 후 나는 7년 동안 혼자 이름으로만 다섯 권의 철학책을 썼다. 당시 처음 시작해서 열심히 활동했던 ‘학벌없는사회’ 일이 없었더라면 아마 두세 권은 더 썼을 것이다.  



그러다가 나는 5년 전 전남대로부터 부름을 받아 다시 교수가 되었다. 이제 원 없이 연구하고 책을 쓸 수 있겠다 생각했는데, 웬걸 지나고 보니 5년 동안 혼자 이름으로 쓴 책이 두 권밖에 되지 않는다. 처음 한두 해는 다시 학교로 돌아와 환경이 바뀌고 할 일도 많아졌으니 그럴 만하다고 위로했으나 이즈음에 와서는 다시 해직이라도 당해야 온전히 학자의 삶을 살 수 있으려나 하는 자괴감까지 든다. 적어도 내 경우만 두고 보자면 교수 시절보다 강사 시절의 내가 훨씬 더 훌륭한 학자였다. 모든 교수가 강사보다 열등한 학자라고 일반화시켜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강사라고 해서 교수들보다 열등한 학자라고 일률적으로 규정할 수 없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방학중 홀로강의 막는 것은 모욕
아무리 교수채용과정을 공정하게 운영한다 하더라도 누가 교수가 되고 누가 강사로 남느냐는 많은 경우 실력보다 운이 좌우한다. 어차피 사람을 한 가지 잣대로 줄 세우는 것이 가능한 일이 아닌 데다가, 강사의 전공분야와 학과가 필요로 하는 전공분야가 일치하지 않아서 기회를 얻지 못하는 경우도 많고, 그러다 보면 나이가 맞지 않아 유능한 학자임에도 불구하고 내내 강사로 지낼 수밖에 없는 경우도 많다. 하물며 한국 대학에 만연한 학벌 및 성차별과 연고에 따른 교수채용의 불공정성을 고려한다면 교수가 강사보다 학문적으로 더 훌륭해서 그 자리에 있게 되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많은 교수들이 자기가 남들보다 훌륭해서 교수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오해 때문에 대학이 강사들을 제도적으로 차별하는 경우가 생기는데, 예를 들면 내가 일하는 대학에서는 강사들이 방학 중에 계절학기 강의를 맡지 못하게 되어 있지만, 교수가 같이 강의를 한다면 강사도 계절학기 강의를 할 수 있다. 누가 이런 제도를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강사들이 홀로 강의를 할 수 없을 만큼 열등하다고 믿지 않는다면 이런 모욕적인 제도를 만들 생각은 못했을 것이다.

한 사회가 잘난 체하는 소수가 아니라 성실한 대중의 열정을 통해 유지되듯, 미래에 대한 아무런 보장도 없이 학문의 길을 걷는 수많은 학자들과 학문후속세대들이야말로 대학과 학문의 참된 토대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심으로 학문의 미래를 염려한다면, 바로 그들을 존중하고 그들의 삶을 안정시켜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해묵은 강사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물으면 많은 사람들이 가장 먼저 예산 문제를 생각하고 자포자기하는 마음이 된다. 하지만 다른 문제도 그렇지만 이 문제를 돈 문제로 환원시키는 한 우리는 결코 해결책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사실 돈이 아니라 돈을 쓰는 사람의 마음이 문제이다. 대학에 아무리 많은 돈이 넘쳐난다 하더라도 대학 총장들이 지금처럼 사람보다 건물과 시설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한 강사들의 운명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 마음이 바뀌겠는가? 오직 한 가지밖에 없다. 강사들에게 총장선출권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총장 선거가 두세 번만 지나면 우리가 염려하지 않아도 강사들의 처우는 저절로 개선될 것이다.

처우개선, 돈보다 마음의 문제
많은 대학에서 학내 구성원들이 총장을 선출할 때 교수나 직원 그리고 학생대표까지 투표에 참여하는데 대학교육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강사들이 배제된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불합리한 일이다. 강사들에게 총장선출권을 주기 위해 특별히 예산이 들 일도 없으니 돈 때문에 안된다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도리어 강사들이 총장선출에 참여하게 되면 총장직선의 부작용도 완화될 것이니 일석이조가 아닌가? 더 늦기 전에 권위를 내려놓고 상생의 지혜를 찾을 때다.(김상봉| 전남대교수·철학)  

교수신문(10. 08. 23) 비좁은 학문현실 좌절하다 별이 된 철학자 

“모두가 잠든 깊은 밤, 홀로 몇 시간이고 앉아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곤 했어요.”
밤하늘을 응시하던 한 철학 연구자의 어깨 위에 내려앉은 것은 밤하늘의 별빛만이 아니었다. 아내는 남편의 깊은 사색 저편에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의 무게가 오랫동안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국내 대표적인 하이데거 연구자인 신상희 건국대 연구교수(철학)가 만 50세의 이른 나이로 지난 달 4일 안타깝게 생을 마감했다. 1992년 하이데거 수제자인 폰 헤르만 독일 프라이부르크대 교수 밑에서 박사 학위를 마친 신 교수는 귀국 이후에도 하이데거 연구에 몰두해 왔다. 『하이데거의 언어사상』(1998), 『시간과 존재의 빛』(2000), 『하이데거와 신』(2007)등의 저서와 『동일성과 차이』(2000), 『사유의 사태로』(문동규 공역, 2008), 『숲길』(2008) 등 하이데거 번역서를 발간해 하이데거 연구에 가장 정통한 학자로 손꼽혀 왔다.

신 교수의 실질적 은사이자 국내 하이데거 연구의 전문가인  이기상 한국외대 교수(철학)는 “하이데거 저작이 제대로 번역돼 있지 않던 시절 신 교수의 번역은 국내 하이데거 전공자들의 입문서 였다”고 그의 작업을 평가했다. 그러나 학계에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지 못했던 것은 학자로서 신 교수에게 닥친 가장 큰 불행이었다. 1993년 이후 시간강사를 전전하며 수차례 대학의 전임교수 채용에 지원했지만 번번이 고배를 마셔야 했다. 최종 면접의 문턱에서 좌절하기도 수차례였다.

“한번은 단독으로 최종면접에 오른 적이 있어요. 혼자였기 때문에 기대가 컸지만 학교는 결국 아무도 임용하지 않았죠.”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거듭 임용이 좌절됐어도 신 교수는 좀처럼 희망을 끈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꾸준히 강의를 해왔던 한국외대의 강의가 2007년 이후 끊기며 그나마 있던 시간강사 자리도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모교인 건국대 명저번역 사업에 학술연구교수로 참여하며 학교와의 끈을 겨우 이어갈 수 있었다.  



신 교수는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기 2주 전인 지난 6월 말, 함께 하이데거 번역 작업을 진행하던 문동규 순천대 연구교수(철학)를 찾아갔다. 문 교수와 술잔을 기울이며 나누던 대화 역시 더 이상 미래를 가늠하기 어려운 학자로서의 불투명한 삶이었다. 문 교수는 “더 이상 전임교수가 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죠. 더 이상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한숨에 그저 힘을 잃지 말자는 위로밖에 할 말이 없었습니다.”

학계에 대한 신 교수의 회의는 이미 오래전부터 감지되던 것이었다. 오랫동안 신 교수와 번역 작업을 함께 해 온 한 출판편집자는 “지난 3월 학계를 떠나려고 하니까 책을 빨리 냈으면 한다는 문자 메시지를 받은 적이 있다”며 당시의 기억을 더듬었다.

신 교수의 안타까운 죽음에 철학계의 한숨이 깊다. 그를 좌절시킨 ‘철학자의 고단한 삶’은 비단 한 학자의 비극에만 그치지 않는다. 대학에 전임교원으로 자리 잡지 못한 다수의 철학 연구자들은 여전히 최저 생계비조차 보장받지 못한 채 학자로서 앞이 보이지 않는 삶을 감내하고 있다.

특히 1990년 중·후반 학부제가 도입된 이후 철학과의 폐과 현상은 가속화됐다. 2009년 기준 최근 10년 간 8개 대학에서 철학과가 폐과됐으며, 전국 177개 4년제 대학 가운데 철학과가 남아있는 대학은 55곳에 불과하다. 이기상 교수는 “학자로서 최소한의 생활, 연구 여건도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이 학문 하는 사람들의 자존심을 꺾는다”고 지적한다. 이 같은 모순이 비단 철학만의 현실이 아닌 이상 우리 학계의 ‘학문적 타살’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하이데거는 ‘나의 철학은 신을 기다리는 것’이라고 고백한 바 있다. 평생 외골수로 하이데거만을 파고들었던 신 교수. 발 딛었던 현실의 각박함에서 벗어나 신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간 지금 그는 평화로운 사색에 잠겨있을까. 이제 내년 나남과 도서출판 길에서 출간을 앞두고 있는 하이데거의 『사유의 경험으로부터』, 『언어로의 도상에서』, 『회상』 등 세 권의 유작 번역서를 통해서만 그를 느낄 수 있게 됐다.(우주영 기자) 

10. 08.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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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30 16: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30 17: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람혼 2010-08-30 17:23   좋아요 0 | URL
저도 얼마 전 신상희 선생님의 안타까운 부고를 듣고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한 명의 훌륭한 하이데거 학자뿐만 아니라 또한 한 명의 성실하고 탁월한 철학 연구자를 너무 빨리 잃은 것 같아 기분이 착잡했습니다.

2010-08-30 17: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30 18: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30 21: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른바다 2010-08-30 17:58   좋아요 0 | URL
참 안타까운 소식입니다. 저도 그분의 하이데거 번역본들을 몇권 소장하고 있고 그 성실하고 생산적인 결과물들로 보아 당연히 정식 자리를 갖고 계신 줄알았습니다... 성실한 연구자를 이렇게 한 사회가 방치했다는 데 대해 깊은 분노를 느낍니다.

로쟈 2010-08-30 21:19   좋아요 0 | URL
'공정한 사회'를 뇌까릴 자격들이 못 되는 것이죠...

2010-08-31 14: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자꾸때리다 2010-08-30 18:06   좋아요 0 | URL
하이데거 수제자에게 공부하고 돌아온 탁월한 학자 분이 이렇게 안타깝게 가시니...씁쓸한 마음이 들고 또 한편으로는 철학으로 밥벌이 하지 않을 제 자신에 대한 알량한 위안도 드는 사건이네요.

로쟈 2010-08-30 21:20   좋아요 0 | URL
문제는 그렇듯 양면적입니다. 하지만 성실한 연구자와 학문후속세대를 사장시키는 '학문공동체'라면 진작에 공동체도 뭐도 아닌 것이죠...

오감독 2010-08-30 23:35   좋아요 0 | URL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그렇게 보내서는 안될 분인데... 이런 저런 글들, 저서들로만 만나지만 그래도 여러 선배 선생님들께, 그렇게 단단히 서 있어주어서 고맙다고, 감사하다고, 이렇게 감사드리며 공부하는 어린 연구자들이 많습니다. 당신들의 닳아버린 구두 뒷굽에서 우리는 삶의 비루함이 아니라 당신들의 긍지를 읽습니다... 신상희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2010-08-31 01: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여울목 2010-09-01 11:03   좋아요 0 | URL
신상희선생님의 뛰어난 번역이 있었기에, 저는 몇년의 세월을 아낄수 있었습니다. 학문의 열정만으로 살아오신 분이 학문외의 문제로 얼마나 고심하셨을까 생각하니, 슬픔을 넘어 선생님 같은 분에게 변변한 대우를 하지 않은 조직사회에 심한 분노를 느낌니다... 제가 할수 있는 일이라곤 선생님의 삶과 맞바꾼 선생님의 저서를, 감사를 드리며 읽는 일뿐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