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교수신문에 실린 '번역단상'을 스크랩해놓는다. <번역투의 유혹>(이학사, 2010)의 저자 오경순 박사가 '번역투'에 대한 문제의식을 간추리고 있다. 흔하게 쓰는 말이긴 한데, '번역투'가 실제로 무엇이며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어떻게 피해갈 수 있는지 등에 대해서 생각해보게끔 한다.

  

교수신문(10. 09. 06) 韓·日語의 편견에 기댄 직역이 ‘일어투’ 과잉 낳았다

번역학은 1983년에야 비로소 하나의 독립된 신생학문으로 정립됐다. 21세기 들어 번역학 연구는 전통적인 주제에서 벗어나 언어학, 사회학, 인류학, 민속학 등 학제간 연구의 관점에서 다양한 분야의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현대 지식사회에서 번역을 문화의 힘으로 보는 인식의 확산 때문이다. 

일상 대화에서 자주 사용해 어법을 크게 벗어나지 않지만 글로 표현할 때 어색하고 의미가 쉽게 전달되지 않는 문장들이 있다. 번역투란 우리말에 남아있는 부자연스러운 외국어의 흔적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어떤 글에서 원문이 아닌 번역문이란 흔적이 일정하게 반복해서 나타나는 경우, 그러한 특성을 바로 번역투라고 한다.

번역학, 1983년 신생학문으로 독립
예를 들어 ‘만나다’, ‘모이다’라고 해야 할 것을 ‘만남을 가지다’, ‘모임을 가지다’라고 번역하는 경우는 영어의 ‘have+명사’를 직역한 번역투이다. ‘즐거운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는 ‘Have a good time.’을 직역한 번역투이며,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나 ‘즐겁게 보내시기 바랍니다’가 자연스런 번역이다. 

또한 아래 예와 같이 번역한 우리말을 보면 원문인 일본어가 그대로 훤히 들여다보이는 듯한 직역투 표현 역시 대표적인 번역투라 할 수 있다.

「獨島/竹島硏究における 第三の視覺」
‘독도(다케시마)연구에 있어서 제 3의 시각’
?‘독도(다케시마)연구의 제 3의 시각’

일본식 후치사 ‘~における’를 우리말로 그대로 옮긴 ‘~에 있어서’는 글의 가독성을 떨어뜨리는 군더더기 표현일 뿐만 아니라 대부분 없어도 의미 전달에 아무런 지장이 없다. ‘~에 있어서’, ‘~함에 있어서’는 ‘~에’, ‘~데’, ‘~에서’, ‘~에게’, ‘~의’, ‘~이’, ‘~할 적에/때’, ‘~의 경우는’ 등의 표현이 자연스러운 우리말 번역이다. 일한 번역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보고 듣고 읽는 많은 말과 글 속에서도 일본식 용어나 구문, 일본식 造語, 일본식 한자어를 그대로 직역해놓은 듯한 번역투 표현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간절기 패션으로 잘 나가는 상품이에요.”(<한국일보> 2006. 10. 12)

간절기란 일본식 표현을 오역한 것이다. 일본어에는 환절기에 해당하는 한 단어로 된 용어가 없다. 대신 ‘절기의 사이’라고 표현한다. 일본어로 표기하면 ‘節氣の間’이다. ‘間(あいだ)’는 공간과 시간의 간격을 나타내는 용어다. 또는 ‘季節のわり目’라고도 한다. 일본어를 번역하면서 무분별하게 오역한 결과이다.

구체적인 번역투 극복 방법 없어 
한국어와 일본어는 언어 구조상 유사한 점이 많지만 차이점도 많다. 흔히 한·일 양 언어가 유사하단 선입관 때문에 번역 과정에서 양 언어의 문법 구조와 어법, 화용적 특징, 관용어법 등을 고려하지 않은 일대일 대응의 직역 방법이 자칫 번역 오류 및 품질이 좋지 않은 번역투로 이어지기 쉽다.

번역투는 번역자가 원문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거나 우리말 구사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번역어는 일차적으로는 원문의 언어 내적·외적 의미에 부합하는 정확한 어감 및 의미 전달을 목표로 해야 하며, 이차적으로는 우리말 체계에 적합해 부자연스럽거나 생경하거나 번역투가 되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우리말 번역을 위해서는 우리말 표현 능력이 전제돼야 함은 물론, 번역자는 번역투의 문제를 사전에 충분히 인식하고 이를 가급적 줄여나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현실의 문제를 고려할 때 번역과 번역투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와 교육이 절실히 필요하지만, 번역 현장에서 활용할 수 있는 번역학 논문이나 번역 연구서, 번역 지침서 등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지금까지 나온 일어일문학계의 일한 번역 관련 논문들을 살펴보면 원문과 번역문을 대조 분석해 오역 사례를 지적하고 오역을 유형별로 분류·정리해 번역의 중요성을 제시한 논문이 대부분이며, 번역투와 관련된 연구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번역투와 일본어투에 관한 기존의 일부 연구는 국어 전공자들이 국어 순화 및 국어 문체의 관점에서 접근한 것으로, 문제점을 제시한 성과는 있으나 구체적인 번역투 극복 방안을 제시하지 못한 한계점을 지니고 있다. 특히 일본어 전공자의 번역투 및 가독성 연구가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는 현 상황에서 일본어 전공자의 번역투 문제 인식과 극복 방안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더욱이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세계는 다문화·다언어 사회인 지구촌 사회로 급속히 변모하며 국가 간의 관계 및 교류가 한층 긴밀하고 다양하며 광범위해졌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번역의 중요성이 재인식되고 번역 교육의 필요성이 새삼 강조되는 것은 시대에 부응하는 당연한 결과이다.(오경순 고려대 일본학연구센터) 

10. 09. 10.    

P.S. 저자의 전공분야에 따른 것이지만, 주로 일본어 번역투에 대한 사례를 많이 들고 있는데, 언어적 영향관계에서 불가피한 부분과 불필요한 부분을 어떻게 가려낼 수 있을지 고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기사에 번역학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대중적이진 않지만 이 분야의 책들(주로 학술서)도 꾸준히 나오고 있다. 최근엔 <번역학 발전사>(이화여대출판부, 2010)도 번역돼 나왔고, 중국 학자의 <신번역학 논고>(한국문화사, 2010)도 눈길을 끈다. 도서출판 동인에서는 '번역학총서'를 출간하고 있는데, 번역투 문제와 관련해서는 <번역과 정체성>(동인, 2010)도 참고해볼 만하다. 번역/통역과 문화적 헤게모니의 관계를 짚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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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0 19: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12 08: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yoonta 2010-09-11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번역투를 문제삼는 배경에 자리잡는 일종의 민족주의가 좀 꺼림찍하게 느껴집니다. 이와관련해서는 일종의 '실용주의'가 더 좋지 않을까요? 원산지가 어디든지간에 한국어로 전용되었을때 한국어의 표현자체를 풍부하게 해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쪽이라서요. "~에 있어서"도 마찬가집니다. "~의"라고 표현할때의 느낌과 "~에 있어서"를 사용할때의 느낌은 서로 다를 수있습니다. 이런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는 오히려 "~에 있어서"라는 표현이 수입되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효과 아닌가요?

로쟈 2010-09-12 08:45   좋아요 0 | URL
기본적으론 그런데, 그 뉘앙스 차이에는 '오렌지'와 '어린지'의 차이도 포함되죠. 효과와 역효과를 식별할 필요가 있을 듯해요...

알비스 2010-09-12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투 뿐 만 아니라 일어 단어도 우리말에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저도 이번에 알았는데, ‘출산’이라는 단어가 일본어라고 합니다. 우리말은 ‘생산’이라고 합니다. 문제는 언론이나 방송에서 심지어 우리들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계속 쓰고 있으니 후자가 오히려 어색하게 들립니다. (간혹, 사극에서 후자의 단어를 쓰긴 합니다만) 이 단어 이외에 다른 말도 우리말로 굳어져 오랜 시간 동안 사용이 돼서 다시 되돌리기가 힘들어 보입니다. 언어라는 것이 시간이 가면서 바뀌기 하지만 그 바뀐, 또 바뀌고 있는 이유가 영 찜찜하죠.

로쟈 2010-09-12 08:48   좋아요 0 | URL
일본에서 건너오거나 경우한 말을 다 배제하는 건 불필요할 뿐더러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좀 의식하고 가려쓰고 하는 게 필요하다고 보는 쪽이에요. 영어식 구문도 우리말에 이미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하다못해 인칭대명사만 해도 그렇고, 구두법만 해도 그렇죠. 그렇더라도 '나쁜 번역투'를 가려내고 삼가하는 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 10회

진도가 안 나가는 원고를 오래 붙들고 있다 보니 포스팅이 늦었다. 오늘 아침에 원고를 보낸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10회를 발췌해놓는다. 아직 '실재계 사막'을 못 벗어나고 있으며, 미카엘 하네케의 영화 <피아니스트> 얘기를 약간 다루고 있다.  

(...)

이제 지난 회에서 다룬 ‘가상과 실재의 변증법’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들어보자. 9.11 사건이 “현실이 우리의 이미지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미지가 우리의 현실로 들어와서 우리의 현실을 산산조각 낸 것”이라고 말하는 대목까지 인용했는데, 이에 대한 설명을 보충하기로 한다. 물론 지젝의 설명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가상(semblance)과 실재의 변증법이 일상적 삶의 가상화(virtualization)와는 다른 문맥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하루가 다르게 일상적 삶이 가상화되고 우리가 갈수록 인공적으로 구성된 세계에 살게 되었다는 경험은 “실재로 복귀하고” 어떤 “실재적인 현실”에 굳건히 뿌리를 다시 내리고자 하는 참을 수 없는 충동을 낳는 것이지만, 가상과 실재의 변증법은 이런 초보적인 사실로 모두 환원되거나 설명될 수 없다. 다시 돌아오는 실재는 어떤 (다른) 가상의 지위에 있다. 정확히 말해서 실재는 바로 실재적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외상적이고 과도한 성격을 지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실재를 우리의 현실 안으로 통합해낼 수 없고, 그래서 그 실재를 어떤 악몽의 출현으로 경험할 수밖에 없다.(<탈이데올로기>, 21-22쪽; <실재계 사막>, 52쪽)

일상적 삶이 가상화되고 있어서 더욱 확고한 ‘실재적 현실’에 뿌리 내리고자 하는 충동을 갖게 된다는 점은 ‘자해자들’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는 ‘초보적인 사실’이고 지젝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돌아오는 실재’, 다시 ‘귀환하는 실재’는 좀 다른 가상의 지위를 갖는다는 것이다. ‘실재’란 그 정의상 외상적이면서 과잉적이기에 우리는 그것을 ‘현실’로 통합할 수 없다. 즉 현실이란 틀에 다 담을 수가 없다. 그것은 넘쳐난다. 때문에 실재는 언제나 악몽 같은 것으로 경험될 수밖에 없다. 9.11 때 무너진 쌍둥이빌딩의 이미지가 바로 그렇다. 그것은 ‘이미지’이자 ‘가상’이고 어떤 ‘효과’였지만, 동시에 ‘사물 자체(the thing itself)’였다.

만약 실재가 가상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고 악몽으로서만 경험된다면, 거기서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은 무엇인가? “허구를 현실로 오인하지 말라”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주장을 정확하게 뒤집어서, “현실을 허구로 오인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현실의 어떤 부분이 환상을 통해 ‘기능 변화’를 겪는지 식별하고, 그래서 그것이 현실의 일부임에도 불구하고 허구적인 양태로 지각되고 있음을 제대로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실재적인 현실(real reality)’ 속에서 허구의 부분을 알아내는 것이 현실(로 나타나는 것)이 허구의 가면임을 폭로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고 지젝은 덧붙인다. 라캉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동물들은 가짜를 진짜로 속일 수 있지만, 유일하게도 인간은 진짜를 가짜로 속일 수 있다고. 그러니 중요한 것은 그 진짜 속에서 가짜를 가려내는 것이다. 실재적 현실 속에서 허구를 식별해낸다는 것은 그런 의미다. 그런 관점에서 지젝은 면도칼(면도날) 자해자들의 사례도 다시 해석해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만일 실재의 참된 대립 항이 현실이라면, 면도칼로 스스로 자해할 때 이들이 실제로 도망치고 벗어나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비현실성에 빠져 있다는 느낌이나 일상적 삶의 인공적 가상성이 주는 느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실재 자체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것이고, 이 실재는 우리가 현실에 내린 닻이나 뿌리를 상실하는 순간 출몰하기 시작하는 통제 불가능한 환각의 형태를 띠면서 터져 나오는 것이다.(<탈이데올로기>, 23쪽; <실재계 사막>, 53쪽)

요컨대, 신체 자해자들이 회피하고자 하는 것은 비현실성이 아니라 오히려 실재라는 것이다. ‘현실’에 내린 닻을 잃어버리자마자 우리에게 출몰하기 시작하는 이 실재의 환각에 대해서는 헤겔이 말하는 ‘세계의 밤’에서 기원적 이미지를 찾을 수 있을 듯싶다. 지젝이 자주 인용하는 대목이기도 한데, 참고삼아 인용한다(이 대목에 대한 설명은 토니 마이어스의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를 참고할 수 있다).  

"인간은 이런 밤, 즉 모든 것을 단순한 상태로 포함하고 있는 이 텅 빈 무이다. 무수히 많은 표상들, 이미지들이 풍부하게 있지만, 이들 중 어느 것도 곧장 인간에게 속해 있지 않다. 이런 밤, 여기 실존하는 자연의 내부, 순수 자기(self)는 환영적 표상들 속에서 주변이 온통 밤이며, 그때 이쪽에선 피 흘리는 머리가, 저쪽에선 또 다른 흰 유령이 갑자기 튀어나왔다가 또 그렇게 사라진다. 무시무시해지는 한밤이 깊어가도록 인간의 눈을 바라볼 때, 우리는 이 밤을 목격한다.”(<까다로운 주체>에서 재인용)

여기서 좋은 사례가 돼주는 것은 미카엘 하네케의 영화 <피아니스트>(2001)이다. 노벨상 수상작가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소설 <피아노 치는 여자>(문학동네)를 원작으로 한 영화로 젊은 피아니스트와 연상의 여자 선생님 사이에 벌어진 ‘정열적이지만 도착증적인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자벨 위페르가 문제의 선생님 역을 맡아 뛰어난 연기를 선보였고, 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원래는 19세기말 빈에서 상류가정의 성적으로 억압된 여성이 자신의 피아노 선생과 열정적인 사랑에 빠진다는 상투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것인데, 이것이 한 세기 뒤에는 남녀의 성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오늘날의 관용적․방임적 시대에는 이런 이야기 자체도 도착적으로 비틀리게 된다는 점이다.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이 성적으로 구애를 해오자 ‘억압돼 있던’ 피아노 선생은 그녀의 요구조건을 상세하게 적은 편지를 그에게 보냄으로써 자신을 폭력적일 만큼 격렬하게 내보인다. 편지의 내용은 자신을 묶는 법, 항문을 강제로 핥게 하기, 그리고 따귀를 때리고 매질하기 등등, 기본적으론 피학증적 성관계의 시나리오를 담은 것이다. 그녀의 이 가장 내밀한 환상 자체는 너무 외설적이고 외상적이어서 입에 담을 수 없기에 글로 쓰였다. 이러한 환상의 직접적 노출은 남자에게 그녀의 지위를 ‘매혹적인 사랑의 대상’에서 ‘혐오스런 실체’로 변환시키지만, 그는 처음엔 거부감을 느낀 그 시나리오에 몰입한다. 그녀의 뺨을 때려서 코피가 나게 하고 난폭하게 걷어찬다. 그러고 나서는?

그녀가 환상의 실현으로부터 움츠러들면서 쓰러져갈 때, 그는 그녀에 대한 승리를 확인하기 위해 그녀에게 행위로의 이행과 구애를 한다.(55-56쪽)

(...) 

여하튼 그녀의 환상을 거쳐서 그는 직접적인 성행위(삽입)로 넘어갔지만, 그녀에게 환상에 의해 지탱되지 않는 성행위 자체 아주 혐오스런 경험일 뿐이었다. 그리고 이 혐오스러움은 그녀를 다시금 냉담하게 만들고 자살로 내몬다. 무엇이 문제인가? 그녀의 환상의 노출을 진정한 성적인 행위에 대한 방어형성으로 해석하고 그 행위를 즐기러 갈 수 없게 만든 그녀의 무능함의 표현으로 해석하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해석이라고 지젝은 말한다. “그와 반대로 노출된 환상은 그녀 존재의 핵심을 형성하는데, 그것은 ‘그녀 안에 있는 그녀 자신보다 더 많은 것’이다. 실제로 환상 속에 구체화된 위협에 대한 방어형성이 되는 것은 바로 그런 성적인 행위이다.”  

‘그녀 안에 있는 그녀 자신보다 더 많은 것’은 ‘in her more than herself’의 번역이다. 이전에 한번 다룬 대로, 그녀 안에 있는 ‘사물’ 혹은 ‘괴물’이라고 해석해도 좋겠다. 우리에게 이질적이고 낯설지만 우리 안에서 있으면서 우리 존재의 핵심에 더 가까운 어떤 것을 가리킨다. ‘환상’이 형태로 삐져나오긴 했지만, 그것이 핵심이고 실재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실재의 위협에 비하면 실제 성행위란 그에 대한 방어 형성물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이 <피아니스트>에서 얻을 수 있는 메시지다. 현실을 허구(환상, 가상)로 오인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10. 09.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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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10-09-09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미카엘 하네케의 영화에 대해선 <피아니스트>에서 약간의 호감을 갖게 되었고, <하얀 리본>에서 결정적 지지를 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그것이 담고 있[다고 생각되]는 사상적/역사적 주제에서가 아니라 순전히 그 미학적 형식미의 측면에서요. 어쩌면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에서 영화 <하얀 리본>을 다뤄도 상당히 문제적일 것 같다는 생각이 살짝 들었습니다.^^

로쟈 2010-09-10 07:14   좋아요 0 | URL
<하얀리본>은 예고편만 봤어요. 영화를 통 못보고 있어서요.--; 저보다도 먼저 한번 다뤄주시죠.^^
 

'지젝 읽기' 연재 원고를 쓰다가 새로운 글이 없나 검색해봤는데, 중앙대 대학원신문에 한보희 연세대 강사가 쓴 글이 올라와 있다(사실 내가 다리를 놓은 글이기도 하다). 오랜만에(?) 지젝 관련 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중앙대 대학원신문(10. 09. 01) 진리의 심연을 떠안는 주체의 정치  

슬라보예 지젝의 첫 영문 저서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은 1989년에 출간되었다. 1989년은 대단히 상징적인 해이다. 그 해 봄 중국 공산당은 천안문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던 시위대―인민들!―를 탱크로 깔아뭉갰고 가을에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으며,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이 도미노처럼 잇달아 붕괴하더니 마침내 소련의 해체로 끝장을 보고 말았다. 오늘날 1989년은 ‘사회주의의 공식적 사망년도’로 통용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가 현실 사회주의와 운명을 같이하게 되리라는 게 모두에게 분명해 보였던 바로 그 무렵, 놀랍게도 지젝은 마르크스주의의 부활을 준비하는 책을 내놓으며 두더지처럼, 만장일치의 합의를 무너트릴 땅굴을 파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이 놀라운 데뷔작 이후 상재된 일군의 초기 저작들은 지젝을 단박에 서구 인문학계의 스타로 만들어주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지젝이 이때부터 구가해온 성공 가도에는 아주 기이한 면이 있다. 그것은 지난 20년 간 소위 대세라고 여겨지던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 최종적 승리, “역사의 종언”, 그리고 신자유주의와 냉소적 회의주의 등등의 주류적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며 성취된 것이니 말이다.

지젝의 책이 국내에 처음으로 번역된 1995년, 이 싱싱하고 매력적인 이론가가 방금 우리가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린 ‘변증법적 유물론’의 혁신적 계승자란 생각은 당시 누구도 (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지금도 지젝을 대하는 태도는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지만 중요한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지젝의 ‘레닌론’은 그 시금석이다.  



마르크스와 레닌의 ‘2인 3각’
1989년 이래로 좌파와 우파가 공유한 불문율 중 하나는 ‘마르크스는 괜찮아. 그러나 레닌은 안 돼!’였다. 지젝이 이 불문율에 제기하는 반론은 우선 이런 것이다. “레닌에 관해 말하지 않으려면 마르크스에 대해서도 입을 다물어라!” 어째서? 레닌이라는 이름은 마르크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코뮤니즘이라는 잠재력의 현동화(actualization)를 표상한다. 그는 마르크스의 교양적 독자가 아니라 실천적 마르크스주의자, ‘살아있는 마르크스주의’였다. 실천(praxis)이라는 끈에 의해, 마르크스와 레닌은 ‘2인 3각’ 달리기에서처럼 하나가 된다.  

그러나 ‘하나가 된다’는 말에는 언제나 주의가 필요하다. 경기를 해본 사람은 누구나 알겠지만 ‘2인 3각’은 둘이 하나가 되는 조화의 경험과는 사뭇 거리가 멀다. 기본적인 느낌은 ‘마음대로 되지 않음’과 ‘뒤뚱거림’이다. ‘살아있는 마르크스주의’란 표현에서 강조되어야 할 것도 바로 그 대목이다. 살아있음의 구체적 체험들―예컨대 사랑―이 대개 그러하듯, 그것은 이질적인 타자와의 마찰, 부조화, 마치 장애물을 안고 뛰는 듯한 불편함을 선사한다. 물론 2인 3각의 묘미는 바로 그런 상호 타자성을 견디고 넘어설 때, 나의 다리도 너의 다리도 아닌 저 ‘세 번째의 다리’가 마치 내 다리인 것처럼, 보다 정확히 말해 내가 그 ‘타자의 다리’에 붙은 신체인 것처럼 움직일 때의 향락(juissance)이다.

마르크스와 레닌이라는 2인 3각에서 세 번째 다리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코뮤니즘’이다. 이 세 번째 다리―음탕한 농담에서 언제나 남근(phallus)을 가리키는―가 포퓰리즘적 지도자의 형상을 띠거나 파시즘적인 ‘우리’로 변질될 위험이 있다는 점을 외면할 필요는 없다. 아니, 외면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러한 위험을 과감히 가로질러가야 한다. 레닌의 위대함은 그가 (나중에 스탈린주의라 불리게 될) 그런 위험과 끝까지 투쟁하며 혁명적 실천을 거듭했다는 점에 있지, 애초 그런 위험을 멀리한 신중함에 있는 것이 아니다.    



‘레닌을 반복하자’는 지젝의 말
지젝이 강조하는 레닌은 1914년의 재난으로부터 1917년의 혁명에 이르기까지의 ‘불가해한 레닌’이다. 1914년 제2인터내셔널이 1차 대전을 용인하기로 결정했을 때, 이제까지의 사회주의 이념은 깡그리 무너져버렸다. 당시 레닌은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엉뚱하게도 스위스 베른의 도서관에 처박혀 헤겔의 <논리학>을 정독했다. 지젝은 레닌이 헤겔 <논리학> 독해에서 통찰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큰 타자(Autre)는 없다’는 라캉의 명제와 연결시킨다. 그는 레닌이 그 큰 타자의 ‘빈자리’에서 허무가 아니라 주체의 자유를 실현할 장(場)을 발견하는, 혹은 바로 그 간극(빈자리)을 주체적으로 떠안는 '실재(the Real)의 행위'를 보여주었다고 말한다.

지젝이 거듭 강조하는 것은 레닌의 바로 이 행위, 혁명에 대한 어떠한 전제나 보장도 사라진 큰 타자의 공백을 주체적으로 떠안는 몸짓(gesture)이다. 그것은 무조건적 의지주의가 아니며 레닌이 책에서 읽은 것을 현실에 과감하게 적용했다는 뜻도 물론 아니다. 마르크스라는 미완의 텍스트가 레닌이라는 ‘사라지는 매개자’를 통해 미완결의 현실이라는 텍스트와 조우한 이 사건의 변증법적 핵심은 사랑에 관한 라캉의 통찰―사랑은 두 개의 결핍이 만나 발생시키는 잉여이다―의 정치적 버전이라 할 만하다. 또한 그것은 주체와 객체가 자신의 간극을 열어 서로에게로 침투하는 사건이다. ‘역사의 종말’이라고 일컬어지는 후기 자본주의적 봉쇄와 교착상태 속에서 우리가 지금도 그런 주체와 객체의 동시적 ‘열림’을 경험할 수 있을까. 지젝은 이 물음을 화두삼아 1989년 이래로 자본주의적, 자유민주주의적 상징계로 꽉 닫혀버린 우리시대에 꾸준히 ‘구멍’을 내왔고, 독자들은 그가 뚫는 구멍들을 해방의 가능성을 향한 ‘열림’으로 체험해왔다. 이것이 지젝의 기묘한 ‘반시대적’ 성공의 이유가 아닐까.

포퓰리즘을 넘어서
오늘날 파시즘의 유사 버전으로 도처에서 자라나고 있는 좌파적, 우파적 포퓰리즘들은 사람들이 자유민주주의라는 정치형식으로 봉합할 수 없는 자본주의적 간극의 실재를 감지하기 시작했다는 표지이다. 비록 그것이 인기에 영합하는 정치지도자와 대중들의 무분별한 요구가 직접적으로 결합하는 형태로 나타기는 하지만 그래도 거기에는 치안이나 행정서비스로 환원되지 않는 본래적 ‘정치’가 여전히 가능하다는 긍정적 표식이 들어있다. 이런 맥락에서 지젝은 포퓰리즘을 돌출적인 악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이 구성되는 하나의 방식으로 이해하는 라클라우에 동의한다.  

하지만 포퓰리즘은 주체(대중)가 자신의 수치와 대면해야 할 사회적 적대의 심연을 사이비 적대―이른바 좌빨과 촛불좀비에서부터, 열폭하는 찌질이와 쥐박이에 이르는 온갖 혐오의 형상들―를 통해 회피하고 기성의 욕망체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요구만을 계속하는 ‘증상’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비판받아야 할 무책임과 비진리, 그리고 비주체의 정치이다. 포퓰리즘의 문제는 그것이 인민의 열망과 불만을 정치적 비전으로 발언하지 못하고 번역하지 못한 (정치 엘리트만이 아니라) 인민 자신의 무능력에 대한 기념비라는 데 있다. 라클라우의 포퓰리즘 이론에 대한 지젝의 비판은 결국 이 주체의 간극과 그것을 떠안는 ‘행위’의 문제로 집약된다. 포퓰리즘 정치에서 대중은 여전히 지도자와 구분되는 객체(대상)의 자리에 머문다. 거기에는 (상상적, 상징적) 자기를 부정할 때 비로소 생성되는 ‘실재의 주체’로서의 대중 자신이 결여돼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포퓰리즘에 대한 라클라우의 담론에도 이 ‘실체이자 주체’로 도약하는 대중의 ‘행위’, 한마디로 ‘레닌적 제스처’가 결여돼 있다.

포퓰리즘을 넘어서는 레닌적 ‘진리의 정치학’은 진리를 소유한 자―그는 언제나 물화된 진리의 소유물이 될 수밖에 없다―의 독단적 통치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안의 타자를 향한 우리 자신의 물음(問)이 열리는 구멍(口)에 뛰어들어 자신을 새로운 역사적 형세(constellation)를 여는 문(門)으로 변화시키는, 실체이자 주체인 진리가 되어가는, 우리 삶의 과정 자체이다. 지젝은 이를 “생성 중인 레닌”이라 불렀다. 우리가 지젝의 텍스트와 ‘2인 3각’ 달리기를 해야 할 운동장도 그 주체적 생성의 시공간으로서의 ‘삶-정치’이다.(한보희/ 연세대 강사)  

10. 09.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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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예고한 대로 '로쟈의 책읽기 2000-2010'이란 부제를 단 <책을 읽을 자유>(현암사, 2010)가 이번주에 출간된다. 인쇄소에서 금요일에 나오는 걸로 아는데, 일반 서점에는 내주쯤 풀릴 듯싶다. 알라딘에도 예약주문을 하면 14일에 받을 수 있는 걸로 뜬다. 단독 저서로는 <로쟈의 인문학 서재>(산책자, 2009)에 이어서 두번째 책이지만, 공저와 공역서까지 포함하면 몇 권 더 되길래 겸사겸사 리스트를 만들어놓는다. 지난 10년간 로쟈가 살아온 '흔적'이라고 해도 좋겠다. 세월이 지나면 다 바래게 되겠지만, 그래도 연이어 책들이 나오는 향후 몇년간은 더 진해질 것이다. 그간에 격려해주신 분들과 보람을 나누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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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을 자유- 로쟈의 책읽기 2000-2010
이현우(로쟈) 지음 / 현암사 / 2010년 9월
18,000원 → 16,200원(10%할인) / 마일리지 90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내일 수령" 가능
2010년 09월 08일에 저장

로쟈의 인문학 서재- 곁다리 인문학자 로쟈의 저공비행
이현우 지음 / 산책자 / 2009년 5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2010년 09월 08일에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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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고원 10- CRITICAL PLATEAUX
비평고원 지음 / 비(도서출판b)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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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 재장전- 진리의 정치를 향하여
알랭 바디우 외 지음, 이현우 외 옮김 / 마티 / 2010년 1월
22,000원 → 19,800원(10%할인) / 마일리지 1,1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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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9-08 19:11   좋아요 0 | URL
땡스투는 누구에게 하고 사야하죠?ㅋㅋㅋ
아는 분께서 리뷰를 써주시면 꼭 추천 누르고 구입해야겠슴돠^^

로쟈 2010-09-08 19:2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마기님이 리뷰를 일착으로 써주시죠.^^

비로그인 2010-09-09 09:27   좋아요 0 | URL
ㅎㅎ후와님이나 파란여우님께서 증말 믓지게 써주실텐데요~
솔직히 그 두 분의 리뷰도 이 책 만큼이나 기다려집니다.^^

로쟈 2010-09-10 07:19   좋아요 0 | URL
파란여우님이야 원래 그랬지만 후와님도 어느새 팬들이 많아졌네요.^^

2010-09-08 19: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08 19: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08 2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08 20: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Becatfull 2010-09-08 20:49   좋아요 0 | URL
이르면 일요일 와우북 행사에 가서도 책을 만날 수 있는 건가요? ^^;

로쟈 2010-09-08 20:49   좋아요 0 | URL
네, 와우북 행사때는 아마 현장판매를 할 거 같습니다...

2010-09-09 03: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09 09: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쉽싸리 2010-09-09 08:29   좋아요 0 | URL
두툼하니, 좋네요.

로쟈 2010-09-09 09:06   좋아요 0 | URL
600쪽이 마지노선이었습니다.^^

람혼 2010-09-09 22:43   좋아요 0 | URL
두 번째 책의 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잘 챙겨서 꼼꼼히 읽어보겠습니다.^^

로쟈 2010-09-10 07:18   좋아요 0 | URL
감사. 통독할 책은 아니고 서재를 즐겨찾는 분들에겐 '기념품' 정도일 거예요. 람혼님도 곧 나오지 않나요?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루체오페르 2010-09-09 23:18   좋아요 0 | URL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로쟈 2010-09-10 07:1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2010-09-11 0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11 07: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0-09-11 18:45   좋아요 0 | URL
<로쟈의 인문학 서재> 로 이 블로그를 알게 되었는데, 두번째 저서 <책을 읽을 자유> 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로쟈 2010-09-13 08:5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우상규 2010-09-13 09:44   좋아요 0 | URL
두번째 저서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로쟈님의 팬 중 한 사람으로서,
책이 많이 팔려서, 책사시느라고 쓴 금액을 훌~쩍 넘어갔으면 하네요^^

jeounju 2010-09-15 14:15   좋아요 0 | URL
축하드립니다~~~ 로쟈님의 블로그 늘 애독하고 있습니다. 알라딘에서 지금 주문. ㅎㅎㅎ 기다려지네요. 책, 정말 좋죠? 읽는 속도가 욕망을 따라가지 못해 늘 책상 위에 쌓여 있지만
왜 이렇게 책만 보면 행복한지... 로쟈님 책 만날 생각하니 아, 마구마구 행복해 집니다~~~

산그늘 2010-10-01 10:04   좋아요 0 | URL
득템했습니다. 펼쳐보니 니시카와 나가오의 책도 보이더군요.반가운 마음에...^^ 건필하십시오.

로쟈 2010-10-21 08:2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은도끼 2010-10-20 16:29   좋아요 0 | URL
어찌 어찌 하다 '로쟈의 인문학 서재'를 알게되어 읽고, 가끔 기웃거리다 두번째 책'책을 읽을 자유'를 읽었습니다(저한테는 분야도 생소하고 어려운 부분이 많아 그냥 숨 한번 들이마시면서 통과된 부분이 많습니다^^) 읽어보고 싶은 욕망과 어차피 사고 못읽으리라는 현실에 매번 고민입니다.......'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을 구매 클릭해서 왔는데 과연 펴 보고 진도가 나갈련지........^^ 건강하세요~~^^

로쟈 2010-10-21 08:23   좋아요 0 | URL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겁게 읽으시길 바래요.^^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 9회

제목에서 이미 눈치챈 분들이 많을 텐데,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9회를 발췌해놓는다. 연재를 시작한 지 한 달이 됐지만, 아직 <실재계 사막으로의 환대>의 첫 장도 다 읽지 못했다. 예상보다 진도가 더딘 편인데, 초반에 개념 설명이 좀 들어가서 그런 걸로 봐주셔야겠다. 그렇다고 이후엔 진도가 더 빨라질지 아직은 장담할 수 없다. 아무튼 다음주까지는 1장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실재계의 사막>은 총 5개의 장으로 돼 있다. 

  

다시 반복해보자. “소위 근본주의자의 테러라는 것도 실재계에 대한 열정의 표현이 아닐까?”(<실재계의 사막>, 35쪽)라는 것이 지젝의 물음이다.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는 많은 사례들을 동원하여 따져본다. 지젝의 주된 방식이지만 안팎을 뒤집어가면서.  

 

영화 <바더 마인호프>(2008)를 통해서 우리가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던 풍경이지만 지젝은 먼저 1970년대 초 독일의 적군파(Red Army Faction) 테러의 배경에 주목한다. 신좌파 학생운동이 붕괴된 뒤 곁가지로 빠져나온 것이 적군파였는데, 그들은 학생운동 실패의 교훈을 이렇게 짚었다. (1)대중들이 비정치적 소비주의에 너무 깊이 침윤돼 있다. (2)통상적인 정치교육과 의식화로는 그들을 각성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 (3)따라서 그들을 이데올로기적 무감각과 최면 상태에서 흔들어 깨우려면 더 폭력적인 개입이 필요하다(슈퍼마켓 폭파 같은). 이와 동일한 논리가 오늘날의 근본주의적 테러에도 그대로 적용되지 않을까? 이 역시도 일상적 이데올로기의 세계에 푹 빠져 있는 서방 시민들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 아닐까? 

여기서 지젝이 주목하는 것은 이러한 ‘실재에 대한 열정’이 갖고 있는 근본적인 역설이다. 그러한 열정은 그 정반대적인 ‘연극적 스펙터클’에서 절정에 도달한다는 점에서 역설적인데, 바로 그런 맥락에서 ‘실재에 대한 열정’은 ‘가상(semblance)에 대한 열정’이기도 하다(<실재계의 사막>에서는 ‘모사에 대한 열정’으로 옮겨졌다). 실재=가상? 그래서 역설이다. 지젝은 이렇게 정리한다.

만일 실재계에 대한 열정이 극적인 실재계 효과의 순수한 외관으로 끝난다면, 그와는 정반대로 외관에 대한 ‘포스트모던’의 열정은 실재계에 대한 열정으로의 맹렬한 회귀로 끝나게 된다.(<실재계의 사막>, 37쪽)

(...)

여하튼 우리 주변에서도 면도날이나 담뱃불로 자해하는 경우를 아주 드물지는 않게 볼 수 있다. 그건 어떤 의도에서인가? ‘현실 자체’를 주장하기 위해서, 단언하기 위해서다. 거꾸로 말하면, 뭔가 사는 것 같지 않고, 현실이란 실감이 나지 않아서다. 자해는 그런 가운데 자아를 신체적 현실 안에 확고하게 근거지우기 위한 시도이다. “면도칼 자해자들에 대한 표준적인 보고에 따르면, 스스로 자해한 상처에서 붉고 따듯한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보고나면 느낌이 다시 살아나고 현실에 확고히 뿌리내린 기분이라는 것이다.”(<탈이데올로기>, 19쪽) 물론 이러한 자해행위는 병리적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어떤 정상성을 회복하고, 완전한 정신병적 붕괴를 피하기 위한 병리적 시도이다 즉 자해자는 정신병자가 아니라, 정신병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안간힘을 다하는 자이다.  

그런데, 이러한 자해 현상과 상관적인 것이 바로 우리 주변 환경의 ‘가상화(virtualization)’이다. 실체가 제거됨으로써 현실이 점점 더 가상현실화 되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다. 예컨대, 카페인 없는 커피, 지방을 뺀 크림, 알코올 없는 맥주 등등. 섹스 없는 섹스로서 가상섹스(혹은 사이버섹스)도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고, 전쟁 없는 전쟁, 곧 아군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는 전쟁에 대한 콜린 파월의 독트린도 추가할 수 있다(<실재계의 사막>에서 ‘아무런 인관관계도 없는 전쟁’은 ‘아무런 아군 사상자도 없는 전쟁(warfare with no casualties)’의 오역이다). 거기에 정치를 행정으로 대체한 ‘정치 없는 정치’와 타자성이 제거된 타자 경험으로서 관용적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까지 ‘가상화’는 전면적이다. 여기서 ‘타자성이 제거된 타자의 경험(experience of the Other deprived of its Otherness)’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두 가지 번역본이 모두 잘못 옮기고 있어서 잠시 짚고 넘어간다. 원문과 그에 대한 두 번역이다.   

"the idealized Other who dances fascinating dances and has an ecologically sound holistic approach to reality, while practices like wife beating remain out of sight."

“매혹적인 춤을 추고 현실에 대해 생태학적으로 건전한 심신상관학설의 접근방법을 보이면서도 안 보이는 곳에서는 아내 구타를 일삼고... 그러한 이상화된 대타”(<실재계의 사막>, 38쪽)

“그 타자는 매혹적인 춤을 추고 생태학적으로 건전하고 유기체적인 접근법을 통해 현실에 접근하지만 남편을 구타하는 아내 등과 같은 모습에는 눈감고 있는 이상화된 타자다.”(<탈이데올로기>, 20쪽)

인용문 전체는 ‘타자성(Otherness)’이란 말 뒤에 괄호로 묶여서 등장한다. 그 타자성이란 어떤 타자성인가? ‘매혹적인 춤’을 춘다고 할 때 먼저 떠올리게 되는 건 서남아시아나 동남아의 춤이다. 뭔가 이국적인 춤. 동아시아의 춤이어도 무방하겠다. 그리고 ‘holistic approach’을 ‘심신상관학설의 접근방법’이나 ‘유기체적인 접근법’이라고 옮긴 건 좀 한정적이다. 전체론적 접근, 전일론적 접근을 뜻하는데, 분리적 접근과 반대되는 의미다. 몸과 마음을 분리시켜 사고하지 않으며, 부분과 전체를 분리시켜 사고하지 않는다는 것도 포함하지만. 간단한 예를 들자면 수지침 같은 것이다. 손바닥에 전신의 부위에 해당하는 대응점이 있어서 여기에 자극을 주어 질병을 치료한다는 원리다. 발 마사지도 마찬가지다. 손이나 발은 몸의 일부이지만 전체를 반영한다는 것이 ‘전일론적 접근’이다. 서양의 기계론적, 분리론적 접근과는 다르기에 낯설고 ‘타자적’이다. 이 정도 타자성에 대해서는 관용적인 태도를 보이는 게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다.  

하지만 그 타자성에도 불편하고 께름칙한 게 있다. ‘아내 구타’ 같은 관습이다. ‘practices like wife beating remain out of sight’는 ‘아내 구타 같은 관습’은 ‘이상화된 타자’를 구성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 관습은 배제된다. “안 보이는 곳에서는 아내 구타를 일삼고... 그러한 이상화된 대타”는 “안 보이는 곳에서는 아내 구타를 일삼는 이상화된 타자”라는 식으로 이해되는데, ‘아내 구타’와 ‘이상화된 타자’는 서로 충돌한다. “남편을 구타하는 아내 등과 같은 모습에는 눈감고 있는 이상화된 타자다”라는 번역도 ‘wife beating’이 어떻게 ‘남편을 구타하는 아내’로 둔갑하는지 의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습에 ‘눈감는’ 주체는 ‘이상화된 타자’가 아니라 ‘우리(서양인)’이다.  

‘아내 구타’는 빼놓고 매혹적인 춤과 전일론적 현실관 같은 타자성만을 수용하는 것, 그것이 ‘타자성 없는 타자’의 경험이다. 거기엔 카페인 없는 커피나 알코올 없는 맥주처럼, 우리식으론 ‘앙꼬 없는 찐빵’처럼 뭔가 실체가 빠져 있다. 그렇듯 뭔가 빠진 현실을 일반화한 것이 ‘가상현실’이다. “그것은 실체를 잃어버린 현실 그 자체를 제공하고 있는데, 다시 말해 실재계의 견고하고 저항적인 핵심을 잃어버린 것이다.”

 

(...) 

10. 09.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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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야 2010-09-09 0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계속 눈팅만 하다가 이렇게 처음으로 댓글 올려봅니다. 그동안 로쟈님 블로그 통해서 좋은 책들 많이 알게 되어서 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나저나 wife-beating이 남편을 구타하는 아내로 번역되다니 정말 아연실색이네요..

Spidersens 2010-09-09 07:45   좋아요 0 | URL
>> 그나저나 wife-beating이 남편을 구타하는 아내로 번역되다니 정말 아연실색이네요..

그렇게 놀라실 일은 아닙니다. 원문에서는 "-" 없이 "wife beating"으로 되어있는데요. 급히 지나가면서 보면 동명사 "beating"이 앞의 "wife"를 수식하는 현재분사처럼 보이고, 일반적으로 현재분사를 옮길 때 쓰는 "~하는"을 쓰다 보니 "(누군가를) 구타하는 아내"로 생각하게 되고, 생략된 구타의 대상을 당연히 남편이겠거니 하고 짐작하고 "남편을 구타하는 아내"라고 옮겼을 겁니다.
또다른 예로 등장한 "casualties"의 경우도 빨리 지나가면서 보면 "causality"로 보일 수 있죠. 그러니 "인과관계"로 잘못 옮겼을 테고...
문제는 이런 실수를 했다는 것이 아니라, 옮기고 나서 다른 사람의 책을 보듯 검토를 했어야 하는데, 역자가 그걸 하지 않은 듯 하다는 겁니다.

로쟈 2010-09-09 09:04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실수는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것인데, 문제는 걸러내는 사람이나 시스템이 없다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