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관심저자 중 한 사람은 20세기 러시아문학의 대표작가 안드레이 플라토노프(1899-1951)이다. 1899년생 작가로는 나보코프와 함께 러시아문학을 양분하는 게 아닐까 싶은 정도의 거장이다(20세기 러시아 작가들 가운데 가장 '철학적인' 작가다). 러시아에서도 1980년대에 뒤늦게 '재발견'되어 '아! 플라토노프'란 경탄과 경외감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처음엔 따라가기가 조금 어려울 수 있지만, 잘 음미하면서 읽으면 그런 경탄에 동조할 수 있게 된다. 나부터도 그런 경우다. 국내에 중단편이 여럿 소개돼 있으며, 주저인 <체벤구르>는 번역중인 것으로 안다. 엊그제 영역본들도 손에 넣은 김에 플라토노프 읽기 리스트를 만들어놓는다. 참고로 소개된 작품 중에 <코틀로반>(문학동네)과 <구덩이>(민음사)는 같은 작품의 번역본이며(하지만 대본이 달라서 번역본도 약간의 차이가 있다), <무도회가 끝난 뒤>(창비)에는 단편 <암소>가 수록돼 있다. 대표 단편들은 <귀향 외>(책세상)에 포함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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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틀로반 (무선)
안드레이 플라토노프 지음, 김철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11,500원 → 10,350원(10%할인) / 마일리지 57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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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틀로반 (양장)
안드레이 플라토노프 지음, 김철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10,000원 → 9,000원(10%할인) / 마일리지 5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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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oundation Pit (Paperback)
Andrey Platonov / New York Review of Books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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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덩이
안드레이 플라토노프 지음, 정보라 옮김 / 민음사 / 2007년 8월
9,000원 → 8,100원(10%할인) / 마일리지 4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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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18 15: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19 1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반딧불이 2010-10-18 23:08   좋아요 0 | URL
저는 겨우 책세상의 '귀향' 한권을 읽었을 뿐인데 플라토노프의 작품이 이렇게 많군요.

로쟈 2010-10-19 10:31   좋아요 0 | URL
많은 건 아니고, 몇 권 되는 거지요.^^

호모사케르 2010-10-19 10:08   좋아요 0 | URL
본문중에 "'아! 플라노토프'란 경탄과 경외감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아! 플라노토프'가 무슨 뜻이예요? 플라톤을 의미하는 건지요..러시아인들은 서양철학을 대단치 않게 생각한다고 하셔서.. 아님 철자가 바뀐건지..

인문 숲의 20세기 러사아 문학 기획은 아주 뛰어나신건 같아요. 19세기 러시아 문학은 위대한 고전기로 보이고 20세기는 열렬한 낭만주의로 다가와요.. 지난겨울처럼 이 가을에도 러시아는 저를 흥분시키고 있습니다.

로쟈 2010-10-19 10:30   좋아요 0 | URL
오타지요.^^; 아, 강의를 듣고 계시나요?

비로그인 2010-10-19 20:15   좋아요 0 | URL
저는 학생은 아니고요... 어디선가 읽은 것인데, 러시아인들은 프랑스인보고 "랴구샤드니끼(개구리먹는놈들)"이라고 한다는데요! 문학작품에서는 러시아귀족들이 프랑스 문화를 은근히 흠모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대단치않게 생각하는 면도 있나봐요? ^^

로쟈 2010-10-20 00:22   좋아요 0 | URL
19세기 초반까지 그랬던 것 같습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에 좀 달라진 것 같구요...

호모사케르 2010-10-19 10:37   좋아요 0 | URL
네~ 강의 듣고 있어요^^.. 아이디가 바뀌어서 몰라 보시는 군요. 히히^-^

로쟈 2010-10-20 00:22   좋아요 0 | URL
아, 호모 사케르 강의 듣는군요.^^

2010-10-19 12: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20 0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nana35 2010-10-19 13:21   좋아요 0 | URL
어제 구덩이(민음사판) 읽기를 끝냈는데요. 어려웠습니다...

지금은 쓰지 않는 한자어나 오래된 말로 번역된 낱말들이 꽤 많아서
몰입하는 데 방해가 되더라구요.

번역된 문장만 놓고 봐도 해석이 쉽지 않겠다 싶었는데 로쟈님은 어떠셨는지요?

로쟈 2010-10-20 00:24   좋아요 0 | URL
문학동네판이 가독성은 훨씬 좋습니다. 번역자들이 애를 먹는 작가이긴 해요...
 

자작시 한편을 올려놓는다. 여느 시들과 마찬가지로 오래 전에 쓴 것이다. 이미 올려놓은 줄 알았더니 그럴 계기가 없었던 모양이다. 생각난 김에 미루나무 길을 걸어도 좋겠다 싶은 날이다... 

 

미루나무 등걸에 주전자를 올려놓고
 
미루나무 등걸에 주전자를 올려놓고 물을 데운다
미루나무 언덕에 망가진 자전거를 끌고 가는 늙은 우편배달부의 모습이 보인다 물이 끓는다 너무 늦는 것은 아닐까 너무 자주

얼음장에 갇혀 하얗게 질린 나뭇잎들이
봄물에 떠밀려 오곤 했다 언제였던가

미루나무 등걸에 주전자를 올려놓고 물을 데운다
미루나무 언덕에 넘어질 듯 내려앉은 노을이 읽히지 않는 傳記처럼 걸려 있다 아무도 읽을 수 없는 생애가 있으리라 너는 말했다
우리 사는 날들이 전부가 아니야 정말 아니었으면

미루나무 등걸에 기대어 하루를 보낸다
오늘도 부치지 않은 편지가 마지막 한 잎처럼 구겨진다

미루나무 등걸에 주전자를 올려놓고 물을 데운다
습관은 가벼운 탄식처럼 아늑하다 이젠
미루나무 등걸 어디에도 손수건을 내걸 만한 자리는 없다 물이 끓는다
사랑했으리라 그대는 삶을 사랑했으리라 낮은 呪文처럼 물이 끓는다

미루나무 등걸에 주전자를 올려놓고 나는 잠이 든다

미루나무 꼭대기에 헤적이는 마음처럼 한 자락 구름이 걸려 있다 
미루나무 꼭대기에 쭈그러진 입김처럼 어둠을 껴안고 있다    

 

10. 10.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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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17 17: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18 0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17 18: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18 0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0-10-17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에는 원고와 강의의 쓰나미라고 하셨는데, 자작시도 올려주시고,,, 시에 나온 푸르른 나무(미루나무에요?)와 바탕화면의 낙엽사이에서,,, 시를 음미 합니다.

로쟈 2010-10-18 00:03   좋아요 0 | URL
아무것도 안 올리기가 뻘쭘해서요.^^;

2010-10-18 1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18 00: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호모사케르 2010-10-18 0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릴케를 떠올리게 하는 아련한 미루나무 시군요..
미루나무에서 그네를 탔던 어린 시절이 떠올라.. 미루나무에 관한 산문을 지어볼까 싶게 만드는 강력하고 아름다운 시 입니다.

로쟈 2010-10-18 09:04   좋아요 0 | URL
미루나무에 관한 산문도 읽고 싶네요.^^

비로그인 2010-10-18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모사케르님께서 릴케가 떠오른다고 하셨는데, 제가 마침 릴케의 말을 읽고 있었습니다. 옮기고 싶네요. 릴케의 말을 빌어 '시를 쓰는 분들' 또한 칭송하고 싶어요. // "일찍 시를 쓰면 별로 이루지 못한다.(이 말에 완전긍정은 아니지만) 시인은 벌이 꿀을 모으듯 한 평생 의미를 모으고 모으다가 끝에 가서 어쩌면 열 행쯤 되는 좋은 시를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시란 사람들이 생각하듯 감정이 아니기 때문이다(감정이라면 젊을 때도 충분히 가지고 있다). 시는 체험이다. 한 행의 시를 위해 시인은 많은 도시, 사람, 물건들을 보아야 한다.....[하지만] 체험의 추억을 가지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추억이 많으면 그것들을 잊을 수 있어야 한다. 추억이 되살아 올 것을 기다리는 큰 인내가 있어야 한다.] 추억이 내 안에서 피가 되고, 시선과 몸짓이 되고, 나 자신과 구별되지 않을 만큼 이름 없는 것이 되어야, 그때어야 비로소, 아주 가끔 시 첫 행의 첫 단어가 그 가운데서 떠오를 수 있다." // ..... 알토란 같은 한 주 되세요!

로쟈 2010-10-18 17:13   좋아요 0 | URL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인가요? '가을날' 때문인지는 몰라도 왠지 릴케는 가을과 잘 어울리는 듯해요...

미지 2010-10-19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했으리라 그대는 삶을 사랑했으리라 낮은 주문처럼 물이 끓는다"

지워질 수 없는 어떤 감각의 낙인 같은 것이 느껴지는 강렬한 구절이군요

로쟈 2010-10-19 10:31   좋아요 0 | URL
가끔 저도 써놓고 맘에 든다 싶은 시들이 있습니다.^^;
 

인터뷰와 강의, 연재원고, 행사 등이 두 주간의 주요 일정이었는데, 그래도 페이퍼를 쓸 시간이 없었는데, 달력을 보니 내주부터는 원고와 강연의 쓰나미다. 지체되고 있는 일들을 생각하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따로 '서재지기'를 두어야 하지 않나란 생각마저 든다. 그런 와중에도 주말 북리뷰를 읽고 몇권을 메모지에 적어놓는다. 오늘 외출하는 김에 서점에 들르면 아마 손에 넣게 될 것이다. 그 중 하나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모두스 비벤디>(후마니타스, 2010). 어디서 들으니, 바우만 수용은 국가나 지역마다 좀 차이가 나는데, 아르헨티나에서는 열광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고. 바우만의 책을 꼬박꼬박 챙길 때면 나도 아르헨티나인이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풀란드와 아르헨티나라... 고명섭기자의 리뷰기사를 옮겨놓는다. 이번 책은 분량이 짧아서 내주에 쓸 서평감으로도고려중이다.    

한겨레(10. 10. 16) 잉여인간이여, 사냥꾼에 맞서 싸워라

폴란드 출신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85·사진)은 ‘유동성’(액체성)이라는 개념의 소유권자다. 그는 이 유체역학적 용어를 자신의 서명이 들어간 개념으로 주조해 현대 사회 현상을 설명하는 데 적용했다. 우리 시대 세계의 질서와 제도가 고체성을 잃어버리고 끊임없이 유동한다는 것이 그의 근본 통찰이다. <모두스 비벤디-유동하는 세계의 지옥과 유토피아>는 그 ‘유동성’ 개념으로 우리 시대를 진단한 2006년 저작이다. 



바우만이 국내에 알려진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그의 주저 가운데 하나인 <지구화, 야누스의 두 얼굴>이 번역된 것이 2003년이었다. 2008년 이후에 그의 저작들이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했는데, 먼저 <쓰레기가 되는 삶들>이 나오고, 2009년 <유동하는 공포>와 <유동하는 근대>(한국어판 <액체 근대>)가 번역·출간됐다. 이제 막 우리 학문세계 안으로 진입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런 사정은 바우만의 본거지인 유럽에서도 그리 다르지 않다. 



1925년에 폴란드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난 바우만은 사회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1954년부터 바르샤바대학에서 가르쳤다. 그의 폴란드 생활은 1968년으로 끝이 났다. 이 무렵에 폴란드 공산정권이 벌인 반유대주의 캠페인으로 대학에서 쫓겨나고 국적을 박탈당했다. 조국의 버림을 받고 정치적 망명자가 된 바우만은 1971년 영국에 정착해 리즈대학 교수가 됐다. 바우만이 학자로서 명성을 얻는 계기가 된 것은 1989년, 예순네 살 때 펴낸 <모더니티와 홀로코스트>였다. 이 책에서 그는 홀로코스트라는 야만이 근대성(모더니티)의 산물임을 입증했다. 그 뒤 바우만은 ‘유동성’이라는 개념으로 현대세계를 분석하고 비판하는 저술 작업에 노년의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2000년 <유동하는 근대>를 펴낸 뒤, 2003년부터 <유동하는 사랑> <유동하는 삶> <유동하는 공포> <유동하는 시대>를 잇달아 출간했다. 이번에 우리말로 나온 <모두스 비벤디>는 이 마지막 저작 <유동하는 시대>의 번역판이며, 제목은 이탈리아어판에서 따왔다.

바우만은 근대를 ‘견고한 근대’와 ‘유동하는 근대’로 나누고 견고성(고체성)에 유동성(액체성)을 대비시킨다. 유동성이 바우만의 독창적 개념인 것은 분명하지만, 원천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바우만은 <유동하는 근대>에서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언급한다. 마르크스는 1848년에 쓴 그 기념비적 팸플릿에서 부르주아 세계를 끝없는 유동성의 세계로 묘사한다. “부르주아 시대는 생산의 끊임없는 변혁, 모든 사회적 상황의 부단한 동요, 영원한 불안과 격동을 통해 다른 모든 시대와 구별된다. 견고하고 낡은 모든 관계들은 … 녹아버리고, 새롭게 형성된 것들도 모두 자리를 잡기도 전에 낡은 것이 되어 버린다.” 바우만은 마르크스 시대에 벌써 이렇게 간파된 근대 세계가 최근에 이르러 진정한 유동성의 시대로 전환됐다고 본다. 그가 보기에 이런 전환은 1970년대 10년 사이에 이루어졌다. 그 시대는, 요즘 유행하는 용어로 말하자면, ‘신자유주의’가 지배적인 것이 된 시대다.

<모두스 비벤디>는 이 유동성의 시대가 만들어낸 악몽과도 같은 현실을 묘사하고 비판한다. 이 책의 요지는 라틴어 제목 ‘모두스 비벤디’(생활양식)보다는 부제 ‘유동하는 세계의 지옥과 유토피아’에서 더 빨리 포착할 수 있다. 유동성이 지배하는 우리 시대는 지구적 차원의 지배 엘리트들에게는 ‘유토피아’일지 모르지만 나머지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불안과 공포가 일상이 된 ‘지옥’의 시대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주자·난민이 돼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하고 잉여인간으로 떠도는 시대다. 삶이 처치 곤란한 ‘쓰레기’가 된다. 바우만은 이런 시대의 특성을 ‘열린 사회’의 역설로 설명한다. 카를 포퍼가 전체주의적인 ‘닫힌 사회’에 맞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사회로 제시했던 ‘열린 사회’는 오늘날 “운명의 횡포에 무방비로 노출된 사회”로 귀착하고 말았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지구 전체를 휩쓸면서 빈곤과 불안과 범죄와 테러도 지구 전체로 퍼졌다. 그리하여 ‘열린 사회’는 두려움으로 오그라든, 공포에 휘둘리는 사회가 됐다.

바우만은 이 책에서 ‘사냥터지기’ ‘정원사’ ‘사냥꾼’이라는 비유를 들어 시대의 근본 특징을 묘사하기도 한다. 전근대 사회는 자연환경을 사냥터로, 인간 자신을 그 사냥터를 지키는 존재로 생각한 사회였다. ‘자연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인간의 사명인 시대였다. 반면에 근대는 ‘정원사’의 시대다. 세계는 일종의 정원이며, 사람들은 자신이 디자인한 모습으로 정원을 꾸민다. 바우만은 정원사의 시대를 ‘유토피아의 꿈’을 실현하려고 노력하던 시대라고 말한다. 그 시대가 끝나고 말았다. 지금은 사냥터야 어찌 되든 짐승만 많이 잡으면 된다는 사냥꾼의 시대다. 사람들은 사냥꾼이 되느냐, 사냥감이 되느냐 하는 가혹한 이분법의 처지에 놓였다. 사냥꾼에겐 유토피아지만 사냥감에겐 지옥이다. 바우만은 결론에서 지옥을 거부하고 저항하라고 말한다. “(이 지옥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온갖 종류의 압력에 맞서 용감하게 싸워야만 한다.”(고명섭기자) 

10. 10.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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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16 11: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17 16: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두 주 전쯤 교보에서 실물을 보고 흥미를 느끼긴 했지만 구입을 미뤄둔 책이 조너선 스턴의 <청취의 과거>(현실문화, 2010)란 책이다. '청각적 근대성의 기원들'이 그 부제. 그런 제목과 부제만으로는 어떤 책인지 가늠하기 어려운데, 마침 유용한 서평기사가 눈에 띄기에 스크랩해놓는다.  

 

교수신문(10. 10. 11) 근대적 감각 개념의 중심은 ‘청각’ … 자의적 번역 아쉽다  

청각과 듣기에 관련한 좋은 책이 없는 국내 현실에서 『청취의 과거: 청각적 근대성의 기원들』(현실문화, 원제 : Cultural Origins of Sound Reproduction)이 번역돼 나온 것은 국내 독자의 갈증을 해소할 길이 열렸다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이다. 몇 년 전에 과학사 연구자들에 잘 알려진 MIT의 디브너 연구소에서 열린 음향학 워크숍에서 12명의 학자를 초청한 적이 있었다. 필자도 동양에서 유일하게 초청받았는데 거기에서 저자인 조너선 스턴을 만났다. 이 책은 필자가 관심을 갖고 있는 19세기 음향학사와 관련해 정독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 만남은 내게 특별했지만 저자와 많은 대화를 할 시간이 없어 아쉬웠다. 저자는 음향 기술의 문화사적 측면을 폭넓게 연구해온 중견 학자이다.

이 책은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미국에서 음향 재생 기술(전화기, 축음기, 라디오 등)이 어떠한 사회문화적 함의를 갖는지를 집중적으로 논의한다. 저자는 음향 재생 기술의 탄생과 사회적 수용의 과정에서 사회문화적 요소의 기여를 치밀하게 밝혀내고 청취 테크닉이 어떻게 구성되고 음향 기술의 변용에 영향을 미쳤는가를 천착한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저자는 시각이 지배하고 있는 근대적인 감각 개념에 이의를 제기한다.
 
1장에서 저자는 전화기의 발명자인 벨이 만들었고 거기에서 전화기 발명의 단초를 얻었다는 포노토그래프에 논의를 집중한다. 인간의 귀를 부착해 소리에 따라 고막이 진동하는 양상을 기록하게 만들었던 포노토그래프는 고막형 장치가 왜 이후 전화기와 축음기의 기초를 이루게 됐는지를 보여준다. 사람의 목소리를 흉내 내는 자동기계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왜 사람의 귀를 흉내 낸 장치가 이후 음향 재생 기계를 주도하게 됐는지를 생리학과 음향학의 발전 맥락에서 추적하면서 저자는 이러한 새로운 기계가 출현해 사람의 듣는 방식이 바뀌게 됐다는 기술결정론적 해석을 비판하고 사회문화적 토대가 구축된 가운데 이러한 발명품이 도출됐음을 주장한다. 다만 그러한 사회문화적 및 학문적 토대가 우선적으로 갖춰진 유럽에서 왜 이런 음향 기술이 먼저 출현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이 아쉽다.

2장과 3장에서는 근대적인 청취 테크닉이 의학적, 기술적 맥락에서 어떻게 형성됐는지를 논의한다. 18세기에 프랑스의 의사 라에네크가 청진기를 발명하고 사람 몸 안의 소리를 들어서 병을 진단하는 기술을 발전시킨 과정으로부터 지식을 형성하는 청각적 실행이 어떻게 구체화됐는지를 살핀다. 또한 당초에 電信은 띠에 점과 선을 인쇄하는 시각적인 방식을 채택한 반면에 그것을 대체하게 된 음향 전신은 수신기에서 발생하는 소리를 듣는 방식을 택함으로써 시각을 대신하게 된 청각이 보다 근대적인 기술이었음을 주목한다. 저자는 이후 본격적인 음향 재생 기술이 음향의 청취를 어떻게 ‘혼자서 함께’ 듣는 방식으로 바꾸어나갔는지 추적한다. 이러한 서술에서 초기 음향 재생 기술의 역사를 잘 모르는 독자들은 논의를 따라가는 데 어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영어권 맥락에서는 이러한 기술사 서적이 많아 일부러 중복된 논의를 피한 것이겠지만 우리나라의 맥락에서는 역주를 달아서 보완했으면 좋았을 부분이다.

4장의 논의는 기술의 변형 가능성에 초점이 맞춰지는데 음향 기술이 미디어로 변모하는 제도적· 사회적 과정을 살핀다. 기술적 측면에서 보면 오늘날 휴대전화는 무선통신이라는 점에서 전화라기보다는 라디오에 더 가까운데 우리가 그것을 전화로 부르는 이유는 상호 연관된 제도, 기술, 인간, 실행의 전체 집합 속에서 “필연적 관계가 없는 서로 다른 것들이 결합해 새로운 실체를 구성”하는 ‘절합(articulation)’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라디오는 오늘날 방송 매체이나 1920년대 이전에는 일대일 무선통신용이었고, 전화기는 오늘날 일대일 접속망이나 20세기 초에는 전화 방송이 인기를 끌었었고, 레코딩은 당초에 업무용으로 상업화됐으나 오락용으로 변모했다. 기술이 어떤 용도로 쓰일지는 사회적 맥락이 결정해 온 것이다.

5장에서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레코딩의 음향적 충실도라는 개념이 단순히 기술적 우수성을 뜻하지 않고 사회적 맥락에서 형성된 특수한 개념임을 보여준다. 당시 광고를 통해 원본과 재생된 소리가 똑같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음질이 떨어지는 재생음에 만족하도록 청취라는 실행을 훈련했음을 보여준다. 이 부분에서 저자는 광고에 대한 수사적 담론 해석을 도모하나 실제로 이 당시 음향 기기들이 광고와 달리 음질이 얼마나 떨어졌는가에 대한 실증적 자료를 제시하지 못한 점이 아쉽다. 현재 남아 있는 당시의 녹음 자료들은 녹음 매체나 재생 설비가 노화됐기 때문에 당시 재생 음질을 정확히 알 수 없는데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에 대한 고려가 빠져 있다.

6장은 죽은 사람의 음성을 보존하는 차원에서 레코딩이 그 가치를 크게 인정받은 것이 19세기 말에 널리 퍼져 있었던 죽음의 문화 때문이라고 본다. 저자는 강신술의 유행, 새로운 시체 방부 기술, 죽은 주인의 음성을 축음기로 듣는 개의 그림 등의 사례를 통해 축음기를 후기 빅토리아 시대의 죽음 문화의 산물로 본다. 죽음의 문화라는 문화적 맥락을 기술의 발전에 연결시키는 점에서 저자의 혜안이 남다르게 느껴지지만 레코딩 기술의 소비자들이 실제로 죽음의 문화 때문에 소비자가 됐다는 직접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이 문제이다.

몇 가지 약점에도 불구하고 폭넓은 식견을 바탕으로 청취의 역사를 잘 서술해준 이 책을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 권하고 싶다. 다만 번역본에서 여러 문장이 의역을 넘어 오역되는 사례가 많아서 아쉬움이 있다. ‘hearing’과 ‘listening’을 각각 ‘청각’과 ‘청취’로 번역한 데에서 생기는 오독은 그나마 역자의 고심이 느껴지는 부분이나 가령, 11쪽에서 원문의 “Through techniques of listening, people harnessed, modified, and shaped their powers of auditory perception in the service of rationality.”를 “이렇게 재구성된 청각적 지각 능력은 청취의 테크닉을 통해 합리성의 수단으로 발돋움했다”로 번역하고 그 다음 문장인 “In the modern age, sound and hearing were reconceptualized, objected, imitated, transformed, reproduced, commodified, mass-produced, and industrialized.”는 누락시킨 것은 무성의하게 느껴진다. 이런 사례가 도처에 널리 있으니 역자가 ‘번안’한 조너선 스턴을 한국 독자들이 만나게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구자현 영산대·과학사) 

10. 10. 14.  

P.S. '청각적 근대성의 기원들'이라고 하니까 떠오로는 책은 프리드리히 키틀러의 <축음기, 영화, 타자기>(1986)이다. 한 학술발표에서 내용이 흥미롭게 언급되는 걸 듣고 구해놓긴 했는데, 아직 읽을 짬은 못내고 있다. 최근작인 <시각 미디어>도 구해놓고 싶다.   

 

한편, 영화와 소리란 주제와 관련해서는 미셸 시옹의 책들이 독보적이다. 언젠가 구해놓고 읽어본다고 하면서 계속 연기되고 있는데, 정말로 언젠가는 이 주제에 대해서도 공부를 좀 해보고 싶다. 그래 봐야, 한 편의 글 정도를 쓰고 싶다는 바람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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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0-10-14 23:02   좋아요 0 | URL
'청각적 근대성'이란 제목을 보고는 '노동의 시작/끝을 알리는 종소리'나 '군대의 구호' 같은 것 떠올리고 들어왔었는데, 예상대로 다른 내용이네요.^^ 슬쩍 들렀습니다. 잘 지내시죠?^^

로쟈 2010-10-15 08:23   좋아요 0 | URL
네, 그럭저럭. 별로 즐거운 일은 없구요.^^;
 

북한의 3대 권력세습에 관한 논란이 이어지고 있는데, 개인적으론 나도 칼럼에서 다뤄야 할지 아직 정하진 못했지만(아직 두 주의 여유가 있다) 몇몇 기사와 칼럼을 주목해서 읽어보았다. 그 중 인터넷 논객 한윤형의 칼럼을 한겨레 훅(hook)에서 옮겨놓는다(http://hook.hani.co.kr/blog/archives/13785). '코미디'가 아닌 '상식'을 담고 있어서다.     

한겨레 훅(10. 10. 12) 황장엽과 리콴유, 어떤 반민주주의자들의 판타지 

공교롭게도 황장엽은 노동당 창건 65주년 되는 날에 세상을 떠났다. 적국으로 망명 온 (전향도 하지 않은) ‘주체사상의 창시자’의 죽음은 한반도 이북에 있는 권력집단의 정체를 의심하게 만든다. 조선노동당은 황장엽과 함께 욕실에서 사망했고, 저 텔레비전 화면 속의 열병식의 주최자는 그저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회의하게 되는 것이다. 러시아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온 황장엽은 주체사상의 체계화에 기여를 했지만, 조선노동당이 ‘맑스-레닌’을 벗어던지고 ‘김일성의 당’임을 선포하게 되는 시대 변화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어찌됐건 황장엽의 망명은 북한 체제가 그들이 말하는 ‘우리식 공산주의’에서도 이탈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황장엽 전 조선노동당 비서의 장례는 ‘통일사회장’으로 치러지고 있고, 정부는 그를 대한민국을 위해 몸바쳐 싸운 이들이 묻혀 있는 대전 현충원에 안장하고 싶어 한다. 남한 망명 후 여생을 암살의 위협 속에서 살아온 그에게 인간적 정리가 있을 수는 있겠으나, 이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황장엽이 대한민국을 위해 무엇을 공헌했는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황장엽은 수십 년의 생애를 대한민국을 절멸하려는 욕망을 가진 저 북쪽 ‘공화국’의 ‘리론가’로써 호의호식하며 살았다. 그가 망명 후 북 권력집단의 추악한 실체를 폭로한 ‘공로’는 있겠으나, 그렇다고 자신의 과거를 반성한 것은 아니다. 반성하기는커녕 자신이 만든 주체사상은 문제가 없는 아름다운 사상이었는데, 김일성이 이것을 개인적인 우상숭배에 활용하면서 북한이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는 식의 주장을 해왔다. 안기부는 황장엽이 망명한 직후 ‘황장엽의 주체사상’에 대해 설명하는 해설서까지 내주었다.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 



황장엽에 대한 한국의 자칭 ‘보수 우파’들의 반응은 그들의 머릿속에 ‘자유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한다. 그들은 곧잘 자신들을 ‘자유민주주의자’라고 칭하지만, 이때 그들이 말하는 것은 이념으로서의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북한 체제를 부정한다는 차원에서의 ‘자유민주주의’다. 그들은 대체로 ‘밥 먹이는 독재자’를 찬양의 대상으로 삼고, ‘밥 굶기는 독재자’를 경멸하려 든다. 이것이 그들이 박정희/전두환과 김일성/김정일을 변별하는 방식인 것이다. 따라서 황장엽이 북쪽에서 가지고 내려온 ‘주체사상’이 지도층에 대한 인민의 희생을 강요하는 전체주의적 이념이란 것은 이들에게 큰 문제는 아니다. 이들에게 문제는 김정일이 밥을 굶기고 있다는 것이고, 밥을 굶기지 않으려면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수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인민들이 사유재산을 늘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동하면서 북한 김정일 체제를 규탄하는 정부의 입장에 무비판적으로 동조하는 “자본주의와 결합한 주체사상 이념의 정권”이 한국 사회의 ‘보수 우파’들의 바라는 사회상이라 볼 수 있겠다.

그런데 이들에게 반대하는 소위 민주화 세력, 김대중과 노무현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바라는 사회는 어느 정도에 와 있는가? 황장엽이 사망하던 날의 열병식과 함께 공식화된 북한 체제의 ‘3대 세습’ 문제는 이미 그 이전부터 남한 ‘진보 세력’의 화두가 되어 있었다. 북한 체제에 대한 내정간섭이 부당하다는 민주노동당의 논평에 대한 경향신문 사설의 비판이 있었고, 이에 맞서 이정희 민주노동당 대표가 ‘국가보안법의 논리’로 사태를 재단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몇몇 지식인들이 갑론을박했지만 그중 가장 놀라운 것은 프레시안에 실린 역사학자 김기협씨의 글이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한국 현실에 맞는 ‘진보’를 추구했다고 주장하면서, 한편으로는 ‘노무현이 보수면 뭐 어떠냐?’라는 앞뒤가 안 맞는 질문으로 참여정부를 비판하는 ‘좌파’들을 질타했던 이 노무현 지지자는, 싱가포르 리콴유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세습은 절대악이 아니기 때문에 북한의 권력세습 문제를 우리 잣대로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한다.

김기협의 주장은 좌파나 진보주의자들은 물론, 김대중·노무현 지지자들의 일반적인 정서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발언에 경악을 금치 못한 것으로 안다. 하지만 김기협의 발언은 ‘인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킨 리콴유의 권력세습’으로 ‘인민을 굶기는 김정일의 권력세습’을 옹호할 수는 없다는 기본적인 오류 이상의 큰 의미를 지닌다. 이를테면 소위 ‘민주화 세력’이 한국 보수 우파들이 독재자를 변별하는 방식과 다른 방식의 잣대를 가지고 있는지가 의문시 되는 것이다. 대체로 리콴유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이들은 박정희 역시 긍정적으로 평가해왔다. 박정희의 ‘위인전’을 완성한 월간조선 전 편집장 조갑제씨 같은 경우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리콴유와 박정희는 ‘지도자’를 좋아하는 아시아인들이 흔히 내세우는 ‘위대한 지도자’들이다. 우익들이 박정희/전두환과 김일성/김정일을 변별하는 방식이 ‘밥’이라면, 김기협에겐 무엇이 있는가?

차라리 김기협이 아예 박정희까지 긍정해 버린다면 그의 발언을 ‘소신있는 것’으로 치부할 수 있다. 박정희의 경제성장의 공로를 인정하되 그의 방식이 경제성장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사회에선 통용될 수는 없고 이제 우리에겐 제대로 된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런데 김기협은 <뉴라이트 비판>에서 이승만과 박정희를 긍정 평가하는 뉴라이트 역사학자들을 매섭게 쏘아붙인 사람이다. 뉴라이트를 비판한다고 박정희를 전면 부정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나는 김기협의 저술에서 박정희의 경제성장의 공로를 인정하는 구절을 찾지는 못하였다. 더구나 다른 것도 아니고 리콴유의 ‘세습’을 옹호하는 것은 박정희의 경제성장의 공로를 옹호하는 것보다도 훨씬 독재자에게 친화적이다. 언론자유를 부정하고 도시의 청결함에 과잉집착하는 그의 통치행위는 전두환의 3S정책보다도 더 이전에, 장발족과 미니스커트를 단속하던 박정희 시대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싱가포르는 “발전된 자본주의와 결합한 박정희식 ‘한국적 민주주의’의 체제”라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적어도 한국 사회는 3S 시대를 넘어 문화산업 정책을 펼쳐낸 지난 ‘잃어버린 10년’ 동안 싱가포르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자생적인 대중문화를 보유한 국가가 되었다. 어떤 진보주의자들은 이 대중문화의 자본친화성에 눈살을 찌푸릴지도 모르겠지만, 이 대중문화가 김기협이 그렇게 신봉하는 ‘삶의 질’을 높여주는 있다는 점도 사실이다. 김대중은 1990년대 후반 ‘아시아적 특수성’을 주장한 리콴유에 맞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동반발전’이 가능하다고 주장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더랬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어느 노무현 지지자의 리콴유 찬양은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세력이 어떠한 지반 위에 서 있는지도 모를만큼 몰역사적인 거다.

이 두 개의 반민주주의적 판타지의 실상을 들춰보니 현기증마저 느껴진다. 주체사상과 한국적 민주주의의 대립, 한반도의 1970년대를 남북으로 가르던 그 대립이 한반도 남부를 동과 서로 가르며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웃긴 것은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이들이 ‘주사파’들을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해야 한다고 믿는 그 집단인 것이고, ‘한국적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이들이 ‘독재자의 딸’에 이를 벅벅가는 그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앞서 지적했듯 김기협의 논리는 김대중·노무현 지지자들의 일반적인 논리가 아니고, 김대중·노무현을 지지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서적으로라도 박정희를, 리콴유를, 그리고 박근혜를 싫어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안심할 일이 아니다. 김기협이 가지고 있는 1970년대의 환상은 우리가 말했던 ‘민주화’가 민주주의 이론을 제대로 체현한 것이 아니라, 독재자들의 ‘무능함’을 민주화 세력이 대체할 수 있다는 차원의 논리였다는 사실을 폭로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정희와 리콴유를 규탄할 때라도, 김대중과 노무현을 예찬할 때 우리는 은연 중에 그런 관점을 가지고 그들을 과거의 독재자들과 비교한다. 그리고 두 민주화 세력의 지도자들이 독재자들보다 ‘유능’했던 점은 역시 ‘시장자유’를 더 제대로 인정했다는 점에 있는 바, 우리의 민주화는 곧바로 ‘신자유주의’를 향해 돌진하게 되는 것이다. 김기협의 ‘오버’는 그가 속한 집단의 일반적인 정서를 대변하지 못하지만, 어째서 민주화 세력의 지지자들이 ‘신자유주의 개혁’을 앞장서서 추진하고 지지하게 되었는지를 드러내는 외설적인 대상이다. 그리하여, 2002년에 노무현을 지지했던 이들은 2007년엔 이명박을 지지하게 되었던 것이고, 오늘날엔 다시금 한국 사회의 모든 문제를 이명박에게 떠넘기고 있는 것이다.(한윤형)  

10.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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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12 14: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13 08: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13 15: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자꾸때리다 2010-10-12 17:15   좋아요 0 | URL
도대체 무슨 당을 찍어야 하는지 모르겠네요. 한나라당은 일단 열외로 하고, 민주당은 권력욕에 눈이 먼 철새 신자유주의자가 대표랍시고 뽑혔고(도대체 그에게 한나라당 시절과 사상적 변화가 생겼다는 건지 노무현 비석에 무릎을 꿇더군요...당적 바꾼거?) 민노당은 김정은에게 충성할 기세.jpg이고 진보신당은 존재감도 없는데 자기들끼리도 갈피 못잡고 있고. 얼마 전에는 진중권이 김규항하고 싸우다 삐쳐서 탈당했더군요. 이건 뭐 "멍하니 그냥 가만히 보다보면은 이거는 뭔가 아니다 싶어"요...

로쟈 2010-10-13 08:10   좋아요 0 | URL
민노당이 그 정도로 '호의적'인 줄은 몰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