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가 사고를 결정한다는 사피어-워프 가설(언어상대성 가설)로 유명한 미국의 언어학자 벤자민 리 워프의 선집 <언어, 사고, 그리고 실재>(나남, 2010)가 궁금해서 어제 서점을 찾기도 했지만, 지난주는 눈에 띄는 새책이 많지 않은 주였다. 그런 가운데에서 한권 꼽으라면 가장 묵직한 <엥겔스 평전>(글항아리, 2010)이 서가를 장식할 만하다. 자세한 소개기사가 있기에 옮겨놓는다. 알라딘이 먹통이 되지 않았다면 어제 옮겨놓았을 기사다(상품 이미지 넣기는 아직도 안되는군).   


◇엥겔스(뒷줄 왼쪽)가 1864년 마르크스(〃 오른쪽), 마르크스의 딸들과 함께 찍은 사진.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딸들로부터 ‘둘째 아빠’라고 불릴 정도였으며 그들을 40여년간 보살폈다     

세계일보(10. 11. 20) “마르크스의 예언 가시화 시작됐다” 

공산주의 이론을 완성한 마르크스(1818∼1883)와 엥겔스(1820∼1895·사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공산주의가 종언을 고한 지 20여년 만에 이들의 명성이 되살아나고 있다. 캄보디아의 ‘킬링필드’와 시베리아 강제수용소를 초래한 무시무시한 존재에서, 최근에는 현대 자본주의를 예리하게 분석한 이론가로 변신 중이다. 이미 1998년 ‘공산당 선언’ 출간 150주년을 맞아 뉴욕타임스는 ‘마르크스의 주가가 150년 만에 다시 치솟았다’는 제목의 기사를 실은 바 있다. 당시 뉴욕타임스는 “공산당 선언은 지칠 줄 모르고 부를 창조하는 자본주의의 힘을 먼저 인식했고, 자본주의가 세계를 정복할 것이라고 예언했으며, 여러 나라의 경제와 문화가 세계화라고 하는 불가피한 과정 속에서 엄청난 고통을 겪게될 것이라고 경고했다”고 평했다.

영국의 대표적 소장 역사학자인 트리스트럼 헌트(퀸 메리칼리지대 역사학부 교수)는 ‘엥겔스 평전’을 통해 “지금도 이런 분석은 유효하며 재해석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뉴욕타임스의 예언대로 서방의 정부와 기업, 은행들은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자유시장 만능주의(신자유주의)라는 태풍을 만났다. 멕시코와 아시아는 경제위기를 겪고 있고, 중국과 인도는 급속한 산업화를 이루었으며, 러시아와 아르헨티나에서는 중산층이 대거 몰락했고, 대량 이주가 일어나고 있다. 저자는 “2007∼09년 전 세계는 자본주의 위기를 겪으며 마르크스의 ‘불길한 예언’은 가시화하기 시작했다”고 밝힌다.

2008년 가을 주가가 곤두박질치고 은행 국유화가 진행됐다. 그 와중에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자본론’(2008년 독일에서는 베스트셀러)을 읽고 있는 사진이 일간지에 나오자 영국 일간 더 타임스는 “그(마르크스)가 돌아왔다”고 외쳤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도 마르크스를 가리켜 “놀라운 분석력을 가진 존재”라고 극찬했다.

지난 80년간 지구의 3분의 2에 달하는 땅에서 유혈과 파괴를 초래한 마르크스가, 오히려 파괴적인 자본주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은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부르주아지는 종교적인 외경심, 기사도의 열정, 속물적인 감상주의도 몽땅 이기적인 계산이라는 얼음물 속에 처박았다”고 했다. 자본주의가 각국의 언어와 전통 국가체제마저 변질시키는 과정을 밝혀낸 최초의 인물은 마르크스였다. 세계화(globalization)라는 말이 미국화(Americanization)의 대명사가 되기 훨씬 이전에 벌써 마르크스는 세계화의 모순을 짚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런데 동업자 프리드리히 엥겔스에 대한 평가는 마르크스에 대한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단지 그가 부르주아지 출신이었기 때문인가. 동유럽이 몰락한 1989년 사회주의의 아픈 기억을 잊고 싶어하는 분위기와 맞물려 그는 대중의 기억에서 완전히 멀어졌다. 심지어 마르크스를 윤리적 휴머니스트로, 엥겔스를 기계론적 과학주의자로 양분해 엥겔스는 옛 소련과 중국, 동남아 공산국가들이 저지른 만행의 원조로 지탄받기도 했다. 


◇극심한 빈부차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사진으로, 영국 빅토리아시대(1837∼1901) 면방직공장에서 일하는 소년의 모습이다. 전 세계 노동자들이 이 사진을 보고 분개했다.

저자는 엥겔스에 관심을 갖는 이유에 대해 “그가 아니었으면 공산주의가 태동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프로이센의 부유한 상인의 아들 엥겔스는 마르크스를 돕기 위해 맨체스터 면방직 공장을 40여년간 운영하는 등 그를 성심성의껏 도왔다. 그뿐만이 아니다. 미국 남부 플랜테이션에서부터 영국 지배하의 인도까지 세계 무역의 흐름을 두루 접하면서 경험한 국제 자본주의 구조와 모순은 마르크스 자본론의 토대가 되었다. 그는 빈민가 체험을 하고 무장 봉기에 나섰으며, 식민지 해방 문제를 정확히 제시했다. 그는 또 마르크스의 천재성을 살리고, 공산주의라는 대의를 위해 개인적인 야망까지도 버렸다고 저자는 풀이한다. 사회주의자들이 걸핏하면 떠들던 ‘개인희생’은 이렇듯 엥겔스가 시초였다는 것이다. 

엥겔스는 마르크스와 함께 자본주의 비판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현대와 진보, 종교와 이데올로기, 식민주의, 세계적인 재정 위기, 도시 이론, 페미니즘, 다윈주의, 생명윤리의 문제에 대해서도 마르크스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공했다고 저자는 평가한다.

영국의 역사학자 토니 저트는 “본래의 공산주의가 변질됐으며, 레닌주의라는 독소로 인해 일탈했다”고 규정했다. 저자는 ‘못된 공산주의’가 물러간 지금이야말로 다시 한번 그들의 저작을 되돌아볼 좋은 기회라고 제안한다. 경제위기가 반복되면서 대기업과 거대 은행, 거대 자본가 등에 부가 집중하고, 빈부차가 극심해지며 서민과 노동자가 불행해지는 신자유주의 물결 속으로 빠져드는 지금, 이 책은 신자유주의 종말이 어떻게 귀결될 것인지를 시사하고 있다. 우주와 인간과 역사를 근본부터 잘못 인식해 허물어진 마르크스의 광풍이 다시 휘몰아친다면 역사의 향방은 어떻게 될까.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유명 사상가의 단순한 평전이 아니다.(정승욱 선임기자) 

10.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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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자 한겨레에 실린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지면에 코너 타이틀이 나가지 않았다). 20세기 러시아문학을 강의하다 보니 연거푸 러시아 작가들의 작품을 다루게 됐는데, 이번엔 불가코프의 <거장과 마르가리타>이다. 네 종류의 번역본이 나와 있지만(문예출판사판은 박스보관도서다), 반응은 그렇게 뜨거운 것 같진 않다. 그래도 20세기 러시아문학의 고전인 건 변함이 없다. 그의 원고는 불타지 않는다... 

한겨레(10. 11. 20) 거장의 원고는 불타지 않았다

괴테의 비극 <파우스트>에는 두 여인과의 사랑 이야기가 나온다. 각각 ‘그레트헨 비극’과 ‘헬레나 비극’이라 불리는 이야기다. 죽은 이후에 자신의 영혼을 넘기기로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을 맺은 늙은 학자 파우스트는 마녀가 만들어준 물약을 마시고 매력적인 젊은이로 변신한다. 약 기운에 도취된 그에게는 모든 여자가 여인들의 이상형 헬레나로 보인다. 그가 거리에서 처음 만난 아가씨 마르가레테(그레트헨)에게 “아, 정말로 저 처녀는 아름답구나! 나 이제까지 저런 애를 본 적이 없구나”라고 경탄하는 이유다. 마르가레테도 파우스트에겐 헬레나의 미모를 가진 처녀로 보이는 것이다. 실상도 그럴까? 



파우스트가 “아름다운 아가씨”라고 부르며 집에 바래다주겠다고 수작을 걸 때, 마르가레테는 “저는 아가씨도 아니고, 아름답지도 않아요”라고 답한다. 여기서 ‘아가씨’는 귀족계급의 처녀를 가리키는 ‘프로일라인’의 번역인데, 대개 ‘아가씨’로만 번역돼 있어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우리말에서 ‘아가씨’는 보통 ‘아줌마’의 상대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일어 ‘프로일라인’은 시민계급의 처녀를 가리키는 ‘융프라우’의 상대어다. 마르가레테의 대답은 자신이 ‘프로일라인’이 아니라 ‘융프라우’라는 것이고, 그런 의미를 살려서 ‘프로일라인’을 ‘양반집 아가씨’라고 옮긴 경우도 있다. 그렇게 정직하게 답한 걸 고려하면 “아름답지도 않아요”라는 마르가레테의 말을 겸손으로만 간주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최소한 그녀는 평범한 처녀이지 않았을까. 



하지만 20세기 러시아문학의 거장 미하일 불가코프의 장편소설 <거장과 마르가리타>에서 여주인공 마르가리타는 특별한 아름다움을 뽐낸다. ‘파우스트와 마르가레테’ 이야기를 ‘거장과 마르가리타’ 이야기로 다시 쓴 이 작품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모스크바의 박물관에서 일하던 ‘거장’은 어느 날 거리에서 꽃을 들고 있는 한 여인을 본다. 그는 그녀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눈빛에 실린 고독에 이끌리고 두 사람은 곧장 사랑에 빠진다. 어떤 사랑이었나? “사랑은 골목길에서 갑자기 살인자가 튀어나오듯이 우리 앞에 나타나 우리 두 사람에게 달려들었습니다. 번개처럼, 단도처럼!”

거장은 예수와 본디오 빌라도에 관한 소설을 쓰고 마르가리타는 소설에 흠뻑 빠져들어 그를 ‘거장’이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발표도 하기 전에 문학계에서 부당한 비난과 혹평의 대상이 된다. 스탈린 시기에 탄압받은 작가 불가코프의 문학적 분신이기도 한 거장은 실의에 빠져 자신의 원고를 소각한 뒤에 제 발로 정신병원을 찾아간다. 그런 참에 볼란드(악마)와 그의 일당은 흑마술로 모스크바를 한바탕 혼란으로 몰아넣으며 소비에트 시민들의 탐욕과 속물 근성을 폭로한다. 그리고 마르가리타는 볼란드가 연 사탄의 무도회에서 안주인 역할을 하고 그 대가로 거장과 재회한다. 볼란드의 마법은 거장이 소각한 원고까지도 되살려놓는다. “원고는 불타지 않는다!”는 그의 말은 생전에 이 마지막 작품을 출간할 수 없었던 불가코프의 문학적 신념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뒷얘기가 궁금하신가? 빛의 세계에는 합당하지 못하기에 거장에게 내려진 처분은 세 번역본에 따르면 ‘평온’(문학과지성사)과 ‘안식’(열린책들), 그리고 ‘평안’(민음사)이다. 마르가리타와 함께 영원한 안식을 얻는 거장의 모습은 이 작품의 교정을 보면서 세상을 떠난 불가코프의 마지막 희원을 구현하고 있다. 

10. 11. 20. 

 

P.S. 반갑게도 러시아에서 TV시리즈로 제작된 <거장과 마르가리타>가 국내에도 출시됐다. 50분짜리로 10부작이니 대략 500분 분량인데, 유튜브에서는 영어자막본으로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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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 2010-11-20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우스트...번역본이 참 여러가지가 나와있는데 그 중 어떤 판본이 좋을까요? 우선은 열린책들에서 나온 것을 갖고 있기는 합니다.

로쟈 2010-11-20 15:38   좋아요 0 | URL
열린책들판이 가장 경제적이긴 합니다. 궁금한 대목 몇 개를 비교해보시고 추가로 구입하셔도 좋겠구요. 저도 대여섯 종 갖고 있는 듯합니다...

2010-11-20 15: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21 1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겨레교육문화센터 분당센터에서 내주 24일(수) 저녁(19:30-21:30)에 이벤트 특강을 갖는다(http://www.hanedu21.co.kr/jsp/huser2/educulture/educulture_view.jsp?category=academyGate3&tolclass=0001&searchword=&subj=B90824&gryear=2010&subjseq=0001&p_selmenu=01). 강의주제는 '로쟈 이현우 특강: 2010년이 가기 전, 이 책은 꼭 읽어라'라고 돼 있는데, 애초엔 읽을 만한 책 4권을 골라서 풀어주면 좋겠다는 제안을 받고 '이 책을 꼭 읽어라'보다는 '이 문제는 생각해보자'란 취지로 몇 권의 책을 추천했다(그러니까 선정기준은 '올해의 책'이 아니다). 국민이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 고전이란 무엇인가, 교양이란 무엇인가 등이 다루고자 하는 주제다.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참고하시길. 네 가지 주제를 다루는 데 참고할 책은 아래와 같다.  

1. 국민을 그만두는 방법/니시카와 나가오 지음/역사비평사  

 

2. 정의란 무엇인가?/마이클 센델 지음/김영사 

 

3.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도스토예프스키 지음/민음사  

 

4. 교양이란 무엇인가?/동경대교양학부 지음/지식의 날개   

 

10.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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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내 2010-11-14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당에서 하는건가요?

로쟈 2010-11-14 18:18   좋아요 0 | URL
네, 분당센터는 분당에 있습니다.^^

헌내 2010-11-14 18:39   좋아요 0 | URL
엉엉.... 너무 멀군요..T_T

노원 평생학습관에 한 번 강의 오세요~ (저번에도 한 번 오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너무 늦게 알았습니다..)

2010-11-14 21: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14 21: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제 '칼 슈미트'를 검색하다가 발견하고 입수한 책은 독일의 저널리스트 헤닝 리터의 <씽커스>(21세기북스, 2010)이다. 두 달쯤 전에 나온 책에 뒤늦게 손이 간 셈인데, 독어책에 '씽커스'란 제목을 붙인 것이 눈에 들지 않았던 듯싶다. '20세기를 창조한 12명의 지식 정복자들'이란 부제가 책의 실상에는 더 가깝다. 12명의 면면도 눈길을 끌었지만(그 중 2명은 '초면'이다), 저자가 독일의 유력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의 인문학 부서 책임자였다는 점이 흥미를 끌었다. 글의 대부분이 그 지면에 실렸던 것이다.  

파이낸셜뉴스(10. 09. 15) 20세기 사상가 12인..그들은 ‘정복자’였다

요즈음 인문학이 위기다. 많은 사람이 인문학이 죽었다고까지 말한다. 철학, 문학, 예술, 역사 등을 포괄하는 인문학은 경제학, 심리학 등과 같은 소위 실용학문에 밀려 설 자리를 잃은 지 오래다. 오랜 세월 인문학에 매달려 궁핍한 삶을 이어오다가 끝내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 어느 대학 시간강사의 죽음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인문학이 얼마나 척박한 환경에 놓여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다 보니 인문학은 현실과 갈등하면서 고뇌하는 인간의 삶을 성찰하는 본연의 임무를 잊고 대중들에게 보다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는 미명하에 값싼 화장으로 스스로를 치장하고 대중들의 지적 허영심을 충족시키려는 탈선까지 벌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인문학의 죽음을 더욱 앞당길 뿐이다.

독일의 대표적 일간지인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의 인문학 담당자인 헤닝 리터가 저술한 ‘씽커스 THINKERS’는 19세기에서 20세기에 걸친 격변의 시대를 살았던, 유럽을 대표하는 지성 12인의 삶과 그들의 작품을 통해 인문학의 매력과 그것이 우리의 삶과 사회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소개하고 있다. 

무의식의 대륙을 정복한 지그문트 프로이트, ‘변신’의 실존을 살았던 프란츠 카프카, 언어 성찰을 통해 철학을 혁신하려했던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오늘날 인문학의 보고로 인정받고 있는 도서관을 세우고 새로운 문화사를 정립한 아비 바부르크, 문예비평부터 문명비평에 이르기까지 총체적 지성의 아우라를 뿜어낸 발터 벤야민, 히틀러가 일으킨 재앙의 역사를 냉정한 어조로 묘사한 나치의 법학자 카를 슈미트, 민주적 스노비즘의 종착역을 통해 속물’의 역사를 예견한 알렉상드르 코제브, ‘프랑스와 결혼한’ 앙드레 말로, 영국과 소련의 이중간첩이자 영국의 가장 권위 있는 미술사학자였던 앤서니 블런트, 30년에 걸쳐 ‘군중과 권력’을 집필하고 원시시대를 기준으로 현재를 평가하고자 했던 엘리아스 카네티, 누구도 뛰어넘을 수 없는 담론의 대가이자 영국 지식인의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았던 이사야 벌린. ‘슬픈 열대’를 통해 사라져 가는 문화들에 대한 경외심을 불러일으킨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지성의 정상에 오르기까지 사고의 탐색을 추구하고 사유의 도발을 감행한 이들 12인을 통해 저자는 근대철학에서 미술사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지식의 제국을 조망하고 있다. 

20세기는 산업혁명으로부터 비롯된 사회, 문화, 정치,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의 변혁이 바야흐로 정점에 도달한 시기였다. 이들은 사색의 공간이 사라지고 기계가 인간을 대체하는 냉혹한 시기에도 성찰하는 자세를 잃지 않고 다양한 분야를 넘나드는 ‘종합적 지식인’의 전통을 이어갔다. 자신을 한니발과 동일시하며 스스로를 학자라기보다는 정복자라고 느꼈던 프로이트는 무의식이라는 거대한 대륙을 발견하고 꿈을 철학적으로 고찰하여 현대 심리학의 기초를 다졌다. 미술사학자였던 앙드레 말로는 정치가로 변신하여 문화부 장관을 지내기도 하고, 또 시대에 대한 고찰을 통해 사상가로서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런 이유로 저자는 이들을 ‘정복자들’이라 칭하고 있다.

이 책은 이들 지식인들의 생애와 업적을 읽기 쉽게 요약해 소개하는 형식이 아니라 이들의 작품이나 지인들과 왕래한 서신 등을 통해 이들의 내면을 꿰뚫고 때로는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어 일반 독자들이 읽기에는 다소 흥미가 떨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인문학의 죽음은 곧 시대의 정신이 죽어가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했다. 인문학에 대한 우리 모두의 관심이 인문학을 살리고 시대를 살릴 수 있음을 상기하자.(최종옥 북코스모스 대표) 

10.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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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4 16: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14 17: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정의를 바라보는 세 가지 관점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전문가 서평'을 옮겨놓는다. 필자는 정치철학 전공자인 서울대의 유홍림 교수다. 전공 학자의 서평을 애타게 찾던 분들의 갈증이 좀 해갈되지 않을까 한다.

대학신문(10. 11. 07) '공동선의 정치'는 정의로운가?  

우리는 얼마나 정의로운 사회에 살고 있는가? 정의의 기준에 대한 합의는 가능한가? 정의에 대한 관심과 열망은 공동체적 삶의 역사를 이끌어온 원동력이다. 정의의 문제는 왜 중요한가? 정의 관념은 정치와 법질서의 토대로서 정치행위에 의미를 부여하고 법과 정책을 정당화하는 정치적 삶의 상징적 기초다. 따라서 정의에 대한 공통된 이해에 의해 사회통합이 가능해지며, 기대와 상황에 부합하는 정의 관념의 수립에 의해 정치적 안정이 확보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듯이 정의에 대한 생각의 차이는 불안정과 내란의 원인이 된다. 정치 위기는 공동체를 지탱하는 정의 관념의 와해와 깊은 관계를 갖는다. 따라서 정의가 사라질수록 정의에 대한 관심과 요구는 높아질 수밖에 없다.

정의는 복합적인 관념, 다양한 가치들의 분배와 직결
정의를 주제로 한 정치철학 수업을 담은 『정의란 무엇인가』는 정치철학의 실천성에 대한 샌델 교수의 관심을 보여준다. 소크라테스를 연상시키는 질의토론식 수업, 철학적 문제를 제기하는 현실 속의 다양한 논쟁사례들에 대한 논리적 분석은 토론과 논쟁의 활성화를 통한 ‘철인-시민(philosopher-citizen)’의 형성을 목적으로 한다. 샌델 교수는 자유주의, 공리주의, 공화주의 등을 공공철학의 관점에서 다룬다. 공공철학은 철학적 논의를 사회 운영의 원리와 결합시키려는 노력이며, 다양한 가치들의 분배와 직결되는 정의 관념은 공공철학의 핵심 주제다.

정의는 복합적인 관념이다. 자유, 평등, 행복, 목적, 미덕 등과 연관될 수밖에 없는 정의 관념은 공적 토론의 중심에 위치한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정의를 이해하는 세 가지 방식에 대한 구분으로부터 출발한다. 행복, 자유, 미덕 각각을 기준으로 정의의 문제에 접근하는 사상체계들로서 공리주의, 자유지상주의, 칸트의 도덕철학, 롤스의 평등주의적 자유주의,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 등이 차례로 소개된다. 지루할 수도 있는 철학적 설명은 흥미로운 사례들에 대한 논리적 분석들이 짜임새 있게 얽혀 있다. 이 책의 두드러진 매력이다.

샌델은 공리주의·자유주의 아닌 ‘공동선의 정치’ 주장
샌델 교수의 정의에 대한 다각도의 분석과 논의는 “정의와 공동선”을 결합하는 “공동선의 정치” 구상으로 귀결된다. 그는 공리주의와 자유주의 정의 담론의 한계를 적시한다. 공리주의는 정의를 원칙이 아닌 계산의 문제로 환원시킬 뿐만 아니라, 가치를 획일화하고 가치들의 질적 차이를 무시한다는 것이다. 또 그는 자유에 기초한 정의 이론들은 개인의 자율적 선택과 권리를 절대화하면서, 목적의 도덕적 가치, 삶의 의미와 중요성을 중립의 명분아래 정치 영역에서 배제한다고 비판한다. 샌델 교수는 이러한 “회피의 정치”를 넘어 “공동선의 정치”를 추구한다. 비판이 고조될수록 공동선의 정치 구상은 강한 호소력을 발휘한다. 시민의 윤리적 역량을 중심축으로 삼는 공동선의 정치는 물질적 이해와 개인의 권리 담론에 경도된 현대 정치의 천박함과 공허함을 비판하면서 도덕적 열망의 정치를 지향한다. 시민의식, 희생, 봉사, 시장의 도덕적 한계에 대한 인식, 불평등의 해소를 통한 연대 구축, 도덕에 기초하는 정치 등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결론에 따르면 철학과 정치의 화려한 재결합을 보는 듯하다.

현대 정치에 대한 불만과 함께 공화주의 또는 공동체주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은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 정치적 소외와 무력감, 시민윤리의 빈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참여의 활성화와 시민덕성의 함양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샌델 교수의 정치 구상은 오랜 역사를 갖는 공화주의 전통을 계승한다. 공화주의가 지향하는 공화국은 정의와 공동선을 기반으로 주권자인 시민들이 만든 정치공동체로서 시민덕성, 즉 시민의 윤리적 자질과 역량에 기초한다.

 

정치가 도덕 문제 해결의 장 되면 사회통합의 위기 이어질 수도
공화주의 전통의 현대화를 추구하는 “공동선의 정치”는 샌델 교수가 그의 다른 저서 『민주주의의 불만』에서 인정하듯이 “성공의 보장이 없는 위험한 정치”일 수 있다. 정의와 공동선을 결합시켜 도덕 담론을 정치에 끌어들이는 경우 의견 갈등은 증폭될 것이다. 물론 가치와 그 의미를 둘러싼 공적 논쟁이 결국 정의로운 사회 형성에 기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공적 영역에서의 도덕 논쟁이 낳을 결과에 대한 지나친 낙관은 위험하다. 정치영역이 도덕 문제 해결의 장이 되어 시민의 가치관 형성에 개입하게 된다면, 정치-도덕 논쟁이 사회통합의 위기로 비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시민들이 참여하는 토론이 어느 정도 합의를 지향한다면, 이성적 합의를 위한 조건과 절차가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즉 샌델 교수가 비판하는 중립성과 대표성의 절차, 추상화된 정의 원리가 다시 필요하게 될 것이다. 요컨대 정의에 대한 상이한 이해 방식들은 순환적으로 연계된다. 따라서 다른 방식들의 한계를 비판하면서 어느 한 방식의 정당성을 주장하기보다는 서로 다른 방식들이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연관되는가를 파악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정의에 대한 샌델 교수의 ‘선택적 접근’과 대비될 수 있는 ‘정치적 접근’ 방식은 긍정과 부정을 동시에 포괄하는 다초점적이고 맥락적이며 전체를 둘러보는 관점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정치세계는 자유, 평등, 복지, 유대, 개인성, 집단정체성, 민주적 정당성, 시민윤리, 리더십 등 다양하고 때로는 상충하는 열망과 가치들을 내포한다. 문제는 이러한 가치들의 완전한 조화와 실현을 보장하는 하나의 해결책은 없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바람직한 정치는 상충하는 가치와 요구들 간의 적절한 ‘균형’을 추구하는 것이다. 정의 담론은 이러한 ‘균형의 정치’에 필요한 사고력과 판단력을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돼야 한다.

한가지 정의 담론을 선택하기보다 영역별 고유의 자율성·협력 보장해야
샌델 교수의 열망과는 달리 현대 다원사회에서의 정의 관념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자유와 평등, 정치와 경제,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분배와 인정 등의 제도와 관심들이 분화하고 교류하는 양상은 복잡하다. 자유민주주의사회에서 각각의 영역은 고유한 정의 관념과 원칙을 자율적으로 형성해간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치의 역할은 영역별 자율성을 보장하면서 상호협력을 위한 통합을 유지해가는 것이다. 정치에서의 정의는 부분적 요소들 간의 ‘조화’의 문제이다. 샌델 교수의 정의 담론에는 부분적인 ‘영역별 정의’와 전체포괄적인 ‘정치적 정의’의 구분이 불분명하다. 어떤 시공간의 맥락에서 어떤 정의 원칙이 타당한지 알기 위해서는 『정의란 무엇인가』식의 기준 선택에 대한 논쟁을 넘어서야 하지 않을까?  (유홍림 교수_정치외교학부) 

10. 11. 14. 

P.S. 서평은 발표지면과 분량의 제약을 많이 받는다.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서평을 나는 한 대학원신문으로부터도 청탁받은 적이 있는데, 일정 때문에 응하지 못했다. 그런 지면에서라면 나는 '경영계'에 쓴 것과는 다른 서평을 썼을 것이다. 더불어, "‘하버드대 20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란 문구와 함께 소개된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김영사)가 인문서로는 8년 만에 종합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기도 하면서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 되고 있다." 같은 서두도 불필요했을 것이다. '사보'류의 책에 책소개 중심의 서평을 썼다고, 마치 무자격자의 월권행위인 것처럼 간주하는 것이 온당한지 나로선 의문이다. 과연 두 종류의 서평은 상호배제적인 것인지?  

더불어, 공동선의 정치에 대한 '깊이 있는' 비판을 담고 있는 전문가 서평에 대해서도 정치세계와 정치의 역할에 대한 필자의 정의(전제)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현실적으로 바람직한 정치는 상충하는 가치와 요구들 간의 적절한 ‘균형’을 추구하는 것"이란 필자의 주장이 공허해보인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정의에 대한 세 가지 다른 관점과 요구 사이의 '적절한 균형'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민주사회에서 도덕적 가치의 개입이 중요하다는 주장(샌델)과 불필요하다는 주장이 대립한다면, '조화'와 '균형'은 어디에서 찾아질 수 있을까? 역시나 '적절한' 개입에서 찾아지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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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4 16: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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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4 16: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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