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자 한겨레에서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마이클 샌델의 <왜 도덕인가?>를 거리로 삼았다. 개인적으론 <정의란 무엇인가>보다 더 흥미롭게 읽은 책인데, 샌델의 핵심적 주장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식 철학'이 어떤 것인지 깨닫게 된 것도 덤으로 얻은 소득이다.  

한겨레(10. 12. 18) 누구를 위한 정의인가를 따져라  

“문명세계에서 미국만큼 철학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나라는 없다.” <미국의 민주주의>의 저자 알렉시 드 토크빌이 1830년대에 미국을 방문하고 남긴 말이다. 특히 정치철학은 미국의 공헌이 아주 미미한 분야인데, 마이클 샌델은 <왜 도덕인가?>에서 그 이유를 미국 민주주의의 성공에서 찾는다. “종교전쟁, 쇠퇴하는 제국, 실패한 국가, 계급투쟁은 안정된 제도보다 더 풍부한 철학적 내용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열거한 사항은 모두 토머스 홉스, 존 로크, 장 자크 루소, 카를 마르크스, 존 스튜어트 밀 등 쟁쟁한 정치철학을 배출한 유럽대륙과 관련이 있다. 상대적으로 미국의 정치철학이 빈곤한 것은 유럽과 달리 ‘안정된 제도’를 운영해온 덕분이라는 지적이다. 



고개를 끄덕이게 되지만 일반화할 수는 없을 듯싶다. 똑같은 기준을 적용한다면 가장 앞선 정치철학을 가질 법한 나라는 한국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샌델의 이어지는 추정은 깨달음을 준다. 미국 철학사상의 대표적인 명언들은 어쩌면 철학자가 아니라 공직자들로부터 나왔을지도 모른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정치철학의 빈곤을 충분히 상쇄하는 다른 전통을 미국은 갖고 있다는 것이다. 샌델이 보기에 미국에 정치철학이라는 게 있다면, 그것은 차라리 토머스 제퍼슨이나 제임스 매디슨, 에이브러햄 링컨 같은 대통령, 그리고 알렉산더 해밀턴, 올리버 웬들 홈스, 루이스 브랜다이스 등의 법률가 내지 연방대법원판사 등의 입에서 나왔다. 예외라면 비정치인으로서 미국 정치사상을 대표하는 <정의론>의 저자 존 롤스 정도이다. 



기록적인 베스트셀러 <정의란 무엇인가>로 한국에서는 이름을 떨치게 됐지만, 정치철학자로서 샌델의 평판은 롤스의 자유주의 정치이론을 비판한 데뷔작 <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1982)에서 비롯됐다. 덕분에 그는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공동체주의’ 철학자로 자주 묶이곤 한다. 하지만 샌델은 공동체주의의 한계 또한 날카롭게 지적한다. 통상적인 의미에서 공동체주의가 정의의 원칙을 특정 공동체나 전통에서 찾는 걸 뜻한다면, 그는 자신이 공동체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대신에 도덕적 가치나 선을 정의원칙의 정당화 근거로 삼는 입장을 지지한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계승하는 목적론적 정의론자이다.

어떤 차이인가? 예컨대,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모여 사는 지역에서 신나치주의자들이 연설을 하거나 인종차별을 옹호하는 지역에서 민권운동가들이 가두행진과 연설을 할 경우 어떻게 대응하는가? 두 가지 사례 모두 지역 공동체의 일반적인 의사와는 반대되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셈인데, 자유주의자는 언론의 자유를 지지하는 입장에서 연설 내용에 대해서는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본다. 반면에 공동체주의자는 공동체의 지배적 가치에 따라 두 가지 시도에 모두 반대한다.

하지만 샌델은 대량학살과 혐오를 선동하는 신나치의 연설과 흑인의 민권을 얻어내려고 한 민권운동가의 연설은 그 ‘대의’에 따라 구별돼야 한다고 본다. 요컨대, 절차적 정당성만 옹호하거나 다수결주의만을 고집하는 것은 정의의 원칙으로 미흡하다. 물론 무엇이 대의인가를 놓고 의견이 갈라질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도덕적 논의를 회피함으로써가 아니라 대의에 대한 공공철학적 논쟁을 강화함으로써 해결되어야 한다. 

새해 예산안을 단독으로 강행처리한 뒤에 여당 원내대표는 그것이 ‘국가를 위한 정의’라고 말했다. ‘정의란 무엇인가’에 이어서 이제 ‘누구를 위한 정의인가’를 따져보자는 제안으로도 들린다. 

10. 12. 18.  

P.S. 참고로, <왜 도덕인가?>의 말미에 '가상인터뷰'라고 들어가 있는 꼭지는 '공동체주의의 한계'란 제목의 글을 옮긴 것으로 <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2판)의 서문이다. 샌델의 입장이 어떤 것인지를 잘 말해주는 글이다. 한편, 번역본에서는 샌델이 비판거리로 삼는 'procedural republic'을 '절차적 민주주의'라고 옮겼는데(191, 295, 296쪽), 그게 합의된 번역어인지는 모르겠다. '형식적 민주주의'와 비슷한 의미를 갖는 걸고 생각되긴 하지만, 국내 학술논문에서는 '절차적 공화국', 그리고 <공동체주의와 공공성>(철학과현실사, 2008)에서는 '절차적 공화정'이라고 옮겨졌다. 그리고 8장 '관행과 제도에 내제된 정치철학은 무엇인가'는 원제가 'The Procedural Republic and the Unencumbered Self'로 샌델의 정치철학적 입장을 잘 요약해주는 글이어서 요긴하다(원문은 인터넷에서 바로 다운받을 수 있다).   

'Unencumbered Self'는 '무연고적 자아'라고 옮기는데, 롤스의 자유주의 정치론에 대한 비판의 핵심은 <정의론>에서 그가 내세우는 원초적 입장이 '무연고적 자아'를 상정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공동체주의와 공공성>의 첫번째 강연인 '자유주의와 무연고적 자아'를 더 참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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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10-12-18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전 니체 이후에 '목적론'을 정치철학에 다시 도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놀랍습니다. 이렇게 되면 샌델의 이론은 '위장된 신학' 아닙니까? 전 샌델 책 읽으면서 그를 B급 철학자라고 분류하였습니다.

로쟈 2010-12-19 09:54   좋아요 0 | URL
글쎄요, <왜 도덕인가> 후반부는 꽤 설득력이 있는데요. 나름대로 반론을 올려주시면 읽어보겠습니다...

2010-12-18 17: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19 09: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18 2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19 09: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낭만인생 2010-12-18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국, 참 묘한 나라입니다.
그들이 얻는 혜택의 이유 중 하나는 아메리카라는 분단된 묘한 지역적 구조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불가피한 선택을 할 필요가 없는 그런 나라...

로쟈 2010-12-19 09:58   좋아요 0 | URL
'미국들'이란 말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두 얼굴을 가진 나라이기도 한 듯해요...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의 <사랑 예찬>(길, 2010)이 출간됐다. <존재와 사건>, <세계의 논리> 등의 주저는 아직 소개되지 않고 있지만, <철학을 위한 선언>(길, 2010), <사도 바울>(새물결, 2008) 등을 더하면 바디우 철학의 윤곽은 잡아볼 수 있겠다. 해서 리스트를 만들어놓는다. 참고로, 바디우의 사랑론을 라캉의 정신분석과 비교한 글로는 바디우 전공자인 서용순의 '철학과 정신분석'이 <라깡, 사유의 모험>(마티, 2010)에 수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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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사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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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미학
알랭 바디우 지음, 장태순 옮김 / 이학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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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11-01-03 20:19   좋아요 0 | URL
존재와 사건이 나왔네여...

근데 사랑예찬은 제가 읽으면 열불날 것 같은데여.
염장 of 염장...

로쟈 2011-01-04 19:57   좋아요 0 | URL
주문했는데, 일시품절로 뜨네요...
 

위키리크스의 외교문서 '폭로'에 대한  미 정부의 압박이 더욱 강화되고 있다. 설립자 어산지는 영국에서 성폭행 런던의 독방에 갇혀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더불어 그가 노벨평화상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는 소식도). 위키리크스라는 '국적없는 언론'의 힘을 거꾸로 보여주는 사례 같다. 주한 미대사관에서 작성한 외교문서들도 공개된 문서 리스트에 포함돼 있어서 향후 어떤 '폭발'이 가능할지 예단할 수 없다. 세계언론사의 한 획을 긋는 게 아닌가 싶다. 위키리스크의 활동을 지지하는 칼럼 두 편을 스크랩해놓는다.  

경향신문(10. 12. 11) [시론]위키리크스 사태와 언론의 자유 

지난 11월 말 폭로 전문 사이트 위키리크스(WikiLeaks)가 자국 외교관들을 통해 수집한 외국 정부와 국제기구, 그리고 국제 주요 인사들에 대한 비밀스러운 정보를 담은 미국 국무부의 외교전문 25만건을 폭로해 전 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위키리크스의 폭로로 인해 국가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은 미국은 연일 위키리크스에 대한 비난을 쏟아내면서 위키리크스 설립자인 줄리안 어산지(Julian Assange)를 1917년에 제정된 간첩법(Espionage Act)을 적용해 처벌할 것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인터넷 서버 제공업체 서비스 중단
그뿐만 아니라 그동안 위키리크스에 인터넷 서버를 제공해 왔던 아마존닷컴이 서버 제공을 중단하고, 스위스의 포스트 파이낸스 은행이 어산지의 은행계좌를 차단했다. 또 그동안 위키리크스와 아무 문제없이 거래를 해왔던 마스터 카드와 비자카드 그리고 온라인 결제업체인 페이팔(PayPal) 등이 위키리크스 지지자들의 기부금 결제를 중단하는 등 위키리크스에 대한 압력이 전방위로 이루어지고 있다. 위키리크스는 아직까지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이러한 압력의 배후에 미국 정부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위키리크스의 이번 외교 전문 폭로에 대해 미국 언론들은 위키리크스의 폭로를 공공의 이익을 위한 활동으로 지지하는 언론사와 국가 비밀 누설로 국가를 곤경에 빠뜨렸다고 비난하는 언론사로 양분해 팽팽히 맞서고 있다. 미국의 대표적인 보수언론인 폭스뉴스(Fox News)는 위키리크스의 폭로는 미국의 외교활동에 큰 상처를 입히고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위상을 떨어뜨려 미국의 역할을 약화시켰다며 맹비난했다. 반면 뉴욕타임스(New York Times)는 위키리크스의 외교 전문 폭로가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고 미국 정부의 외교 목표들과 성공·타협·좌절 등을 그 어떤 자료보다도 잘 보여주고 있어 이번 폭로는 국민의 알권리 충족을 위해 필요한 조치라며 위키리크스의 폭로를 지지하고 나섰다.

이처럼 위키리크스의 외교 전문 폭로에 대한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된 가운데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되는 사실이 한 가지 있다. 바로 국가 안보와 국제사회에서 국가 위상의 중요성을 내세워 정부 기관이 행하는 언론 자유에 대한 간접적인 위협 효과(Chilling Effect)다. 앞서 설명했듯이, 이번 외교 전문 폭로로 위키리크스는 그동안 인터넷 서버를 이용해 왔던 회사로부터 서비스 중단 통보를 받았고, 거래를 맺어왔던 은행과 기업들과도 관계를 청산해야만 했다. 이번에 위키리크스와 관계를 청산한 업체들은 공식적으로 미국 정부나 외부로부터 압력을 받은 적이 없다고 밝히고 있지만, 이를 액면 그대로 믿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들의 갑작스러운 관계 청산에는 어떤 형태로든 정부 기관의 압력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고, 이는 전형적인 권력기관의 언론에 대한 간접적인 위협효과 중 하나다.

언론에 대한 명백한 탄압행위
많은 언론사가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뉴스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고, 앞으로 언론매체의 인터넷 의존도가 점차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이번 위키리크스의 사태처럼 인터넷 서버를 제공하는 업체들이 외부 압력에 의해 서비스를 갑자기 중단할 경우 언론사가 큰 타격을 입는 것은 물론 인터넷상에서 언론의 자유는 심각한 위협을 받게 된다. 이는 언론의 자유에 대한 명백한 탄압 행위다.

지난 1971년 미국 연방 대법원은 내부 고발자 ‘대니얼 엘스버그(Daniel Elsberg)’의 제보를 바탕으로 베트남전 1급 비밀문서인 일명 ‘펜타곤 페이퍼(Pentagon Papers)’를 폭로한 뉴욕타임스의 보도에 대해 정부기관의 비리나 비행을 폭로한 행위는 공공의 이익에 부합한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위키리크스가 이번에 폭로한 내용도 미국 외교관들이 비정상적인 외교활동을 통해 수집한 비밀정보들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둘의 차이가 무엇인지 모르겠다.(최진봉 텍사스주립대 저널리즘스쿨 교수)    

한겨레(10. 12. 13) [김선주 칼럼] 국적없는 언론, 위키리크스 

미국의 시사주간 <타임>이 2010년 10대 뉴스의 두 번째로 꼽은 것은 위키리크스의 ‘거침없는 폭로’이다. 폭로라는 말이 주는 부정적인 느낌을 지우면 위키리크스는 꿈의 언론이다. 2007년 폭로전문 사이트로 세상에 얼굴을 드러낸 위키리크스는 2008년엔 이코노미스트가 주는 뉴미디어상을 받았고, 2009년엔 국제앰네스티로부터 미디어상을 수상했다. 위키리크스는 새로운 미디어임이 분명하고 국적 없는 세계언론이다. <뉴욕 타임스> <가디언> 등등 세계 유수의 언론은 위키리크스의 폭로 문건을 받아서 2차적으로 가공해 보도하고 있을 따름이다.

모든 저널리스트는 겉으로 드러난 것만이 아닌 진실을 정확하게 알고 거기에 의거해서 보도하고 비판하고 논평하고 싶은 꿈이 있다. 그러나 자신이 쓰는 기사가 어떤 단체가 필요에 따라 공개한 정보에 의해서만 쓰여지고 있는 것이나 아닐까라는 엄청난 의구심에 자주 휩싸인다. 돈과 권력과 기득권을 가진 집단이나 빅브러더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필요한 정보를 조금씩 흘리며, 그들은 저 높은 곳에 앉아서 기자들이 갑론을박하는 것을 보며 낄낄거리는 것이나 아닌지 항상 뒤꼭지와 발밑이 불안하고 써늘하다.

위키리크스가 아니면 교황이 추기경 시절 이슬람국가인 터키의 유럽연합 가입을 왜 반대하였는지, 미국의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이 무엇 때문에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생체정보가 필요했는지, 미국 군인들이 아파치 헬기에서 어떻게 바그다드의 행인을 조준사격하면서 낄낄거렸는지 우리는 영원히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위키리크스의 설립자인 줄리언 어산지는 지금 성폭행 혐의로 런던의 감옥에 갇혀 있다. ‘세계 외교가의 9·11 사태’를 가져온 미국의 극비 문서 25만건 공개 뒤 인터폴은 세계 188개국에 어산지를 수배했다. 그가 어떤 정치적인 목적을 갖고 특정한 집단을 파괴하려는 목표를 갖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세계의 빅브러더만 겨냥하고 있고 그 폭로가 어디로 향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구명을 위해 그가 어떤 권력과도 어떤 거래도 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고 또 그러리라 믿는다.

사르트르의 말을 빌리면 지식인이란 남의 일에 참견하는 사람이다. 정의와 자유, 선과 진실, 인류 보편의 가치가 유린당하면 남의 일이라도 자신의 일로 간주하고 간섭하고 투쟁하는 사람이다. 집단이기주의에 매몰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지식인의 소임이고 언론인 또한 이 범주에 속한다. 저널리즘의 역사는 정보나 사실을 감추는 특정 기관이나 단체와 싸워 정보를 찾아내 공개한 역사이고 그로 인해 역사는 올바른 방향으로 물꼬를 틀었다는 어산지의 주장은 옳다. 폭로만 하는 것은 무책임한 짓이라는 비판은 옳지 않다.

부당한 정보수집을 해 문서를 작성하도록 지시한 집단이 자국 국민이나 세계 여론을 향해 정당성과 필요성을 입증할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다만 어떤 국가가 미친 짓을 저질렀다고 해서 그 나라의 국민들을 배척하지 않을 세계인의 양식이 필요할 뿐이다.

‘국경없는 의사회’나 ‘국경없는 기자들’처럼 국경없는 언론이 필요해진 세상이다. 개인은 도덕적일 수 있지만 인류 역사상 국가는 결코 도덕적인 적이 없었다. 지금처럼 글로벌한 세상에서는 그래서 국적없는 언론이, 글로벌한 세계인의 양식, 혹은 집단지성의 도덕적인 힘이 개입해야만 한다. 무한경쟁의 세계시장경제체제 속에서는 글로벌한 기준이란 강자에게는 달콤하지만 약자에겐 횡액일 뿐이다. 어떤 나라든 어떤 빅브러더이든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짓을 했을 때 그것을 저지하지는 못했더라도 사후에 압박하고 세계 혹은 해당 국가의 여론에 의해 더 좋은, 더 겸손하고 더 이상적인 정부로 갈 수 있도록 압박은 해야 한다. 위키리크스가 해놓은 국적없는 언론의 폭로는 그래서 가치가 있고 옹호되어야 한다

10. 12. 13.  

P.S. 위키리크스라는 한 가지 '대안' 이전 언론의 현실은 어떤 것이었나? '미디어 카르텔'과 '거짓말'이 판치고, '여론조작'으로 국가가 앞장서서 국민을 속이는 현실이었다. 반전을 위한 '폭로'의 행진이 계속돼야 하는 이유다.   

최시중 방통위원장과 방통위 인사들의 행태에 대한 실명비퍈으로 눈길을 끄는 <미디어 카르텔>(마티, 2010)에 대한 리류기사는 http://news.nate.com/view/20101213n2269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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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10-12-13 15:16   좋아요 0 | URL
어샌지를 살해해야 한다던 새라 페일린이라는 cerebrum이 empty하신 nyun이 미국의 최고 스타덤에 있는 정치인이라지요? 그리고 그런 스타덤에 오른 큰 비결이 바로 그런 무뇌아적 발언들 덕분이고요...

로쟈 2010-12-14 16:05   좋아요 0 | URL
미국의 '힘'이죠...

노이에자이트 2010-12-16 17:32   좋아요 0 | URL
푸틴이 어샌지를 지지하는 발언을 했더군요.글쎄...푸틴이 언론자유를 논하다니 참 이상합니다.

로쟈 2010-12-16 23:42   좋아요 0 | URL
러시아식 민주주의를 비난하던 미국식 민주주의는 뭐가 다르냐는 거겠죠. 어샌지를 비판한다면 더 이상하지 않을까요?
 

어제 종로에 있는 서점에 들러 손에 든 책은 김삼웅의 <리영희 평전>(책보세, 2010)이다. 책은 발행일이 12월 10일자인 1쇄였는데, 어느새 3쇄에 들어간다고 한다(오늘이 11일인데!). 서거와 맞물려 다시금 선생의 삶과 역정이 주목받는 듯하다. 일부의 냉대와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단연 '이주의 책'이라고 해야겠기에 서평기사와 칼럼을 옮겨놓는다. 그리고 '사회적 독서'로 분류해놓는다.  

서울신문(10. 12. 11) 권력 앞 독야청청했던 리영희의 삶과 글  

기자로서 펜을 빼앗겼지만, 그럴수록 진실을 토하는 사자후는 더욱 커져갔던 참언론인이었고, 강단 바깥으로 내쳐짐으로써 비로소 만인의 스승이 될 수 있었던 이였다. 야만과 광기가 몰아치던 시대의 한 줄기 등불 역할을 했던 이였다. 불이면서 또한 얼음이었고, 엄혹한 시절 많은 이들의 전위면서 또한 후방이었던 이였다. 



무릇 평전이라는 것이 흔히 빠지는 오류가 ‘주례사식 찬사’다. 하지만 전 독립기념관장 김삼웅이 쓴 ‘리영희 평전’(책보세 펴냄)은 이러한 것들과 본질적으로 궤를 달리한다. 리영희라는 인물 자체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의 삶에서 흠결을 찾아내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엄혹한 시절이었기에, 오히려 조금만 타협했다면 남부럽지 않은 권력과 부를 누리는 삶도 가능했겠지만 그는 언론사와 대학에서 네 차례나 내쫓기는 삶을 회피하지 않았다. 또한 세계사적인 대변화의 시기, 외로운 섬처럼 고립된 한국사회의 미숙한 이성들에게 명징한 시대정신의 이정표를 제시했다. 펜을 앞세운 이성의 목소리는 물론 투쟁의 거리와 감옥도 그는 기꺼이 마주했다.

1989년 한국기자협회보에 남긴 그의 글은 당시에나 지금이나 후배 기자들의 얼굴을 새삼 홧홧거리게 만든다. ‘내게 신문지는 있어도 신문은 없었다. 신문지의 소식들은 하나같이 권력을 두둔하는 낡은 내용, 권력에 아부하는 구린내 나는 내용’이라면서 ‘그따위 신문종이를 만들어내는 신문인들이 감히 언론인을 참칭할 때 나는 그들을 언롱인(言弄人)이라는 호칭으로 경멸해 왔다.’고 호되게 질타한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도 마찬가지다. ‘모든 정부의 결정, 정책, 행동을 국가의 이름으로 대치해 놓고 그런 것에 대한 외부의 비판을 반박하는 것이 애국심이라고 직결해 버리는 사고방식이 과연 애국심이겠는가를 생각해 본다.’

1970년 리영희 명예교수가 언론계를 향해 토해낸 사자후는 40년이 지난 지금의 기자들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한반도에 전쟁의 기운이 감돌고, 초강대국과 굴욕적인 외교 협상을 맺어도, 진실 찾기는 애써 외면한 채 그저 정부의 발표 중심으로 판단하고 그것을 국익으로 생각하는 기자들이 넘쳐나는 세상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것이 리영희의 모습 전부는 아니다. 차가운 이성의 소유자인 듯싶은 이미지로 비쳐지지만 기자 시절 동료들과 놀러 가서 배갈을 잔뜩 마시고 보트를 타려다 물에 빠지거나 코트를 잃어버리고 돌아온 이야기며, 백범 김구의 암살범 안두희를 테러했던 생면부지의 의혈청년을 불러 저녁밥과 술을 사주며 의기를 칭찬했다는 일화 등은 그의 인간적 면모를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리영희의 정신을 일찌감치 몸으로 받아 실천한 후배 언론인이자 역사의 뒤안길에 묻힌 인물의 현재적 의미를 되살려내는 평전 작업에 매진해 오고 있는 김삼웅이기에 명쾌하고 엄정한 펜끝은 절로 리영희를 닮았다.

지난 8월 27일. 1시간 30분에 걸쳐 생애 마지막 인터뷰를 가진 것을 포함해 모두 150시간에 이르는 인터뷰를 진행했다. 또한 자서전 ‘역정’, ‘대화’ 등 그의 십수권에 이르는 저서를 모두 아울렀고, 그동안 리영희에 대해 각계각층에서 남긴 짧고 긴 글을 모두 모아 정리했다. 김삼웅은 리영희의 81세 생일이자 병세가 완연했던 지난 2일 서울 면목동 녹색병원을 찾아 책을 바쳤다.

김삼웅은 “평전을 쓰면서 솔직히 후회했다. 그의 청렬한 생애와 넓고 깊은 사유·지식의 세계를 가늠하는데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다.”고 밝혔다. 리영희에 대한 김삼웅의 존경심이 뚝뚝 묻어난다. 하지만 필체는 이성을 가뜩 갖춘 ‘리영희체’다.(박록삼기자)  

경향신문(10. 12. 11) [책동네 산책]리영희처럼 읽고 생각하기

리영희 선생이 돌아가셨다. ‘1970년대 젊은이들의 사상적 은사’ 또는 ‘의식화의 원흉’이 그에게 상투적으로 따라붙었던 수식어다. 정반대의 뉘앙스이지만 이런 수식어는 대체로 그가 쓰고 말한 것들에서 유래한다. 기자로서, 학자로서, 저술가로서 선생은 참 많은 글을 썼다. 그래서 우리는 선생이 남긴 글들만 생각하기 쉽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 글을 쓰기 위해 그가 누구보다 많은 것을 읽고, 궁리했다는 사실은 잊기 쉽다는 것이다. 



선생은 환갑을 몇 년 앞둔 88년 <역정>(창비)이라는 자전적 에세이집을 출간했는데 오래전 읽는 이 책에서 내가 아직도 또렷이 기억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모두 ‘읽기’에 대한 선생의 집념에 관한 것이다. 한국전쟁이 나던 시절 선생은 안동공립중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근무중이었다. 선생은 집에서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를 읽고 있다가 전쟁이 났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언제인가 징역을 살 때는 학창시절에 하다 만 프랑스어 공부도 할 겸 가족에게 <레 미제라블> 원서를 넣어달라고 해서 읽었다는 대목도 나온다.

내가 기자가 된 것은 그가 현직기자에서 물러난 지 30년 가까이 흐른 뒤이지만 ‘기자 리영희’가 남긴 전설은 여전히 언론계에 남아 있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통일원 자료실’ 얘기일 것이다. 지금도 완전히 자유로운 편은 아니지만 과거엔 기자 또는 학자라고 해도 북한 또는 공산권에서 나온 자료에 접근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어느 북한 관련 연구자가 통일원 자료실을 자주 이용했는데 자기가 열람하는 자료마다 ‘리영희’란 사람이 앞서 열람했다는 기록이 있기에 유심히 봤더니 거의 모든 자료의 열람카드에 리영희라는 이름이 써 있었다고 한다. <리영희 평전>(책보세)을 쓴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 관장은 자신이 그간 쓴 현대사 인물에 관한 10여권의 평전을 선생이 모두 꼼꼼히 읽고 잘못된 부분까지 지적한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이런 에피소드들은 글을 쓰거나 말하기에 앞서 ‘팩트(fact)’부터 챙기는 선생의 습성을 보여준다. 선생의 평론집 <스핑크스의 코>(까치)에는 ‘한국의 젊은 여성들은 바쁘다’란 제목의 칼럼이 실려 있다. 96년에 쓴 글인데 젊은 여성들이 소비주의에 휘둘리는 세태를 꼬집는 내용이다. 선생은 그 해 겨울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가죽부츠가 크게 유행한다는 얘기를 매스컴에서 들었다는 말로 글을 시작했다. 결혼식 참석차 명동에 나간 김에 가죽부츠의 인기가 실제로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기 위해 길 한쪽에 서서 지나가는 여성 20명의 구두를 살폈다고 했다. 그 결과 8명이 가죽장화를 신었더라면서 40%라는 수치를 도출한다. 이처럼 세태를 풍자하기 위한 글에서조차 선생은 근거를 제시하고 싶어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쳤기에 선생의 글들은 차분한 분석적 논조를 유지할 수 있었고, 웅변보다 더 큰 힘을 가질 수 있었다. 시사평론집은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오래됐다는 인상을 받기 쉬운데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두레), <스핑크스의 코>처럼 십수년 전 나온 선생의 평론집은 지금 읽어도 시의성이 느껴지는 글들이 많다. 우리가 선생에게서 ‘리영희처럼 쓰기’뿐 아니라 ‘리영희처럼 읽기’와 ‘리영희처럼 생각하기’도 배워야 하는 이유이다.(김재중 기자) 

10.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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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권당의 새해 예산안 날치기 처리로 정국이 경색돼 있는데, 좀더 거슬러 올라가면 (연평도 포격 때문에 묻힌 감이 있는) '민간인 사찰'이 뇌관이 아닌가 싶다. 두 가지 사안을 연결시켜서 짚고 있는 칼럼이 있어서 스크랩해놓는다. 대표적인 보수논객인 이상돈 교수의 시론이다. '비판적 보수주의자'를 자처하는 필자는 4대강 사업에 대해서도 지속적으로 반대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 열혈 보수주의자가 보기에도 '정권의 말로'는 이미 시작됐다... 

 

 경향신문(10. 12. 10) [시론]정권의 말로 예고하는 ‘민간인 사찰’ 

대통령의 친형 이상득 의원과 관련이 있는 국무총리실 내의 한 조직이 정권에 걸림돌이 될 만한 사람들을 은밀하게 사찰했다는 의혹이 점차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노무현 정부에 의해 임명된 공기업 임원 등 구 여권 인사뿐 아니라 한나라당의 비주류라고 할 수 있는 국회의원 여러 명도 사찰 대상이었음이 거의 확인되어 있고, 박근혜 전 대표도 사찰을 당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직계이지만 이상득 의원과 대립각을 세웠던 정두언 의원이 사찰을 당했다고 주장하고 나선 대목은 특히 곱씹어볼 만하다.

사찰 대상의 동향을 파악하는 수준이 아니라 휴대폰을 상시적으로 도청했다는 의혹마저 제기되어 있어 사찰의 배후가 간단치 않으며, 사찰의 규모 또한 알려진 것보다 더 광범했을 것이라는 의심이 든다. 사찰의 초점이 구 정권 인물에서 한나라당 의원으로 옮겨간 것으로 보이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한나라당 의원들도 사찰 대상이었다는 부분은 현 집권세력이 여당 의원들의 이탈을 무엇보다 경계하고 있을 것이라는 그간의 가정(假定)을 확인시켜 준다. 국회가 미디어법과 세종시 문제를 처리할 때 여당 내 반대 때문에 곤혹스러웠던 집권세력이 임기말의 ‘권력 누수’를 막기 위해 사찰이란 불법수단을 동원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4대강 사업 등과 관련해서 정권에 비판적이던 몇몇 한나라당 의원과 박근혜 전 대표가 사찰 대상이었다는 의혹은 그런 점에서 납득이 간다.

대통령의 큰형과 관련 조직 윤곽
엊그제 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여당 단독으로 예산안과 문제 법안들을 통과시킨 데서 보듯이, 집권세력은 대화와 타협이란 정치를 포기한 지 오래다. 간혹 쓴소리를 했던 한나라당 의원들도 꼼짝 못하고 이런 폭거에 동참한 것을 보니 사찰이 갖고 있는 ‘위협적 효과(chilling effect)’를 알 수 있다. 박연차와 연루되었다고 보도된 의원들이 기소되어 곤욕을 치른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의원들은 ‘보이지 않는 손’의 뜻을 알아서 새길 수밖에 없다.

국회의원도 사찰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검찰이 수사를 덮었다는 의혹이 일고 있다는 점에서 ‘민간인 사찰’은 닉슨 대통령을 사임으로 몰고 간 워터게이트보다 훨씬 심각하다. 워터게이트는 일과성 사건이었지만 ‘민간인 사찰’은 정권 초부터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정권 내 비선조직이 정권 반대세력과 여당 의원을 불법으로 사찰했다면 그 나라는 ‘독재국가’다. ‘독재정권’이 ‘국격’을 논하고 ‘G20’ 운운하고 있는 만화 같은 세상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

상황이 이렇지만 의석수가 부족한 야당은 탄핵은커녕 국정조사도 제대로 할 수 없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이런 수모를 당한 여당 의원들이 먼저 들고 일어나서 국정조사를 요구하고 검찰에 수사를 요청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이들은 돌부처처럼 얼어붙어 있으니, 측은한 생각이 들 뿐이다.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이러고도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승리를 하겠다는 집권세력과, 자신들은 비주류라서 현 정권의 실정(失政)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는 한나라당 내의 일부 세력이다. 이런 난정(亂政)을 하고도 훗날 무사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집권세력도 한심하고, 침묵으로 동조함으로써 침몰하고 있는 배에서 탈출할 수 있는 구명정을 차버린 비주류도 한심하다. 하도 한심해서 이들이 혹시 영구집권을 할 묘책이라도 갖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된다.

여당의원까지 포함, 독재의 상황
이제 공은 ‘국민’에게 넘어왔다. ‘민간인 사찰’은 물론 ‘4대강’, 종편 배정 등 이 정권이 벌이고 있는 일은 목적과 내용은 물론 방법과 절차에서도 올바른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국회는 마비되어 있고, 검찰이나 감사원 등에도 믿을 구석이 없으니 불법을 바로잡을 장치가 완전히 망가져 있는 형국이다. 내년에는 선거가 없어서 민의를 밝힐 기회조차 없는 것이 현실이지만, 민주주의를 이룩하고 또 그 열매를 향유했던 우리 국민이 이러한 독재상황을 감수하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1987년 6월혁명 때도 그러했고, 1960년 4월혁명 때도 그러했다. 그만큼 민심은 무서운 것이니, 집권세력은 그것을 알아야 한다.(이상돈 | 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10.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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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10 17: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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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10 17: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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