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말 한국번역비평학회가 주최한 '세계문학전집 번역의 의의와 전망' 심포지엄에 토론자로 참여했었다. 심포 내용을 소개하는 기사가 올라왔기에 스크랩해놓는다.   

경향신문(10. 12. 20) "세계문학전집 붐 속 새로움·번역 윤리 부족” 

국내 출판계에 세계문학전집 출간 붐이 일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번역비평학회가 ‘세계문학전집 번역의 의의와 전망’이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을 열었다. 학회는 18일 숙명여자대학교 백주년기념관에서 윤지관 전 한국문학번역원장, 세계문학전집시장을 선두하고 있는 민음사 장은수 대표, 을유문화사 세계문학전집 편집위원 신광현씨 등을 초청해 심포지엄을 진행했다.

윤 전 원장은 ‘세계문학 번역과 근대성’이라는 기조 강연을 통해, 근대에 생겨난 세계문학이라는 이념이 탈근대시대인 21세기에 부활하는 현상에 대해 진단하면서 ‘21세기의 세계문학’을 새롭게 정의했다. 그는 “국민·민족국가의 경계를 뛰어넘는 문학, 혹은 하나로 단일화된 세계시장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유통되는 작품을 세계문학이라고 한다면, 그런 유형의 세계문학은 이 지구화의 시대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의 등장으로 실현됐다”고 설명하면서 “<해리포터> 시리즈를 위시해 댄 브라운, 파울로 코엘료, 스티븐 킹,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탈민족적’ 작가들은 지구화된 시대의 세계출판시장을 장악하는 새로운 유형의 지구적 문학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하지만 윤 전 원장은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세계화의 합당한 문학적 성과물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문학에 밀어닥친 위기, 문학 자체의 위기를 말해준다”면서 “문학의 상품화가 세계문학의 근거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지구화라는 대세 속에서도 ‘민족’ 혹은 ‘민족문학’이라는 요소는 여전히 현실성을 갖고 있다”면서 “자본주의가 각 지역에서 발현시키는 모순의 현장을 포착하고, 그 현실을 토대로 이룩해나가는 문학적 성취를 세계적으로 공유하는 활동이야말로 세계문학”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자기복제식 세계문학 번역 현황에 대한 날선 비판도 나왔다. 문학평론가 조재룡씨는 1950년대 후반부터 90년대까지 출간된 세계문학전집 번역본들을 비교하면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번역본들”이라고 꼬집었다. 조씨는 앙드레 말로의 <인간의 조건> 판본들에 대해 “제1세대 번역가의 번역을 이후 판본들이 거의 베끼고 있다”고 지적했다. 59년 김붕구 번역으로 출간된 동아출판사 세계문학전집과 조홍식 번역으로 출간된 정음사 세계문학전집의 <인간의 조건>을 이후 을지출판사, 동서문화사, 지성문화사 등에서 “거의 옮겨 적다시피하고 하고 있는 현실”을 구체적 구절까지 사례로 들어가며 비판했다. 조씨는 또 발췌 번역에 대해서도 “사유의 살결들을 잘라버리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2000년대 우후죽순처럼 기획되고 있는 세계문학전집 번역은 엄청난 분량, 참여한 출판사 수의 넉넉함에서가 아니라 번역의 윤리를 되새기면서 독자에게 떳떳한 번역을 선보일 때 의미가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번역가 이세욱씨는 ‘새로운 번역’이 유행처럼 번지는 행태에 대해 경계의 목소리를 냈다. 이씨는 “이전 번역의 오류를 바로잡았다고 주장하는 새 번역을 읽다가 이전에 아무도 범하지 않았던 새로운 오류를 봤다”며 “새로운 세대의 감수성에 영합하기 위해 옛것과의 단절을 기도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비판했다.(이영경기자)   

한국일보(10. 12. 20) 세계문학전집 '다양성 함정'에 빠졌나

민음사, 을유문화사, 열린책들, 문학과지성사, 문학동네, 창비, 푸른숲, 시공사, 책세상, 펭귄클래식코리아 등 여러 출판사들이 세계문학전집을 동시다발로 내고 있는 요즘은 정음사, 을유문화사, 신구문화사 등의 세계문학전집이 시장에서 호황을 누렸던 1960~70년대에 비견할 만하다. 이른바 ‘제2의 세계문학전집 붐’으로 불리는 이런 현상에는 문학 고전의 독자 저변을 넓혔다는 긍정적 평가 한편으로, 구미 편중의 작품 목록, 같은 작품의 중복 번역, 수요를 넘어선 전집 난립 등 부정적 지적도 나오고 있다.

한국번역비평학회(회장 전성기 고려대 교수)가 지난 18일 숙명여대에서 개최한 심포지엄 ‘세계문학 전집의 번역의 의의와 전망’은 국내 세계문학전집 출간의 의미와 문제점을 다각도로 짚은 자리였다. 윤지관 덕성여대 교수의 기조강연에 이어 제1부에서는 장은수 민음사 대표와 을유문화사 전집 편집위원인 신광현 서울대 교수, 제2부에서는 번역가 이세욱씨와 문학평론가 조영일씨, 조재룡 고려대 교수가 각각 발제했다.

특히 2부에서는 현행 세계문학전집 출간 양상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다. 조영일씨는 “세계문학전집이 화제가 되고 출판사들이 앞다퉈 전집을 내기 시작한 것은 2005년 초로, 전년도 말에 민음사가 전집 100권 묶음을 홈쇼핑에서 판매해 성공을 거둔 무렵”이라며 “현재의 세계문학전집 붐은 출판사들의 기획력보다는 유통구조의 변화에 의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조씨는 “전집은 마땅히 편집위원들이 서로 합의한 원칙과 철학에 따라 작품 목록부터 확정, 공개하고 그에 따라 출간해야 하는 폐쇄적 출판물”이라며 “지금의 세계문학전집은 한국문학이 지닌 비평적 역량의 총집결이라기보다는, 편집위원을 맡은 언어권별 대학교수들의 분업과 출판사의 상업주의로 인해 작품 목록이 중구난방”이라고 혹평했다.

이세욱씨는 전집들이 같은 작품을 출간하면서 발생하는 재번역을 문제 삼았다. 이씨는 “출판사들이 물량과 구색을 갖추기 위해 재번역에 번역자들을 총동원하고 있다”면서 “재번역된 작품을 보면 번역자의 새로운 해석을 찾아볼 수 없는, 재번역과 개칠(改漆ㆍ덧칠)을 혼동하는 번역이 눈에 띈다”고 일갈했다. 그는 “널리 읽히던 번역이 신역(新譯)에 정본의 자리를 내주는 것이 세계 번역사에서 흔한 일이기는 해도, 우리의 ‘번역 갈아치우기’는 속도와 규모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라며 “‘새로운 세대의 감수성에 호소하는 번역’을 명분으로 앞선 세대의 번역을 싸잡아 매도하는 것은 낭비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토론자로 나선 프랑스어권 번역가 정혜용씨도 “문학 번역 평가 프로젝트에 참여해 시대별 번역작을 살펴본 결과 선배 세대의 번역에는 언어 오류는 많아도 그걸 상쇄할 만한 문체의 힘이 느껴지는데 근래의 번역들은 문장이 밋밋하고 맛이 없다”며 “이는 (번역자보다는) 편집자의 역할이 더 커진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재룡 교수는 현재의 세계문학전집 붐의 시초라 할 수 있는 민음사 전집이 발행된 1998년 이전 국내 세계문학전집들의 ‘베끼기 번역’을 구체적 사례를 들어 지적하면서 “지금의 세계문학전집 번역은 시장 논리에 충실하면서 얻어낸 독자들의 환대가 아니라, 독자에게 기존 번역본과 확연히 차별된 결과물을 보여주려는 윤리적 자세를 통해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이훈성기자) 

10. 1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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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구화시대 문학의 쟁점들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12-28 23:30 
    다수의 세계문학전집이 백가쟁명에 접어든 시점에 걸맞게 세계문학론을 전체적으로 조감한 책이 출간됐다. 창비담론총서의 네번째 책으로 나온 <세계문학론>(창비, 2010)이 그것이다. 부제는 '지구화시대 문학의 쟁점들'. 개인적으론 <창작과비평>(2007년 겨울호)에 실었던 글도 재수록돼 반갑다. 소개기사를 옮겨놓는다. 참고로, <안과 밖>(2010년 하반기)도 세계문학론을 특집으로 다루고 있다. &
  2. The Ultimate Reader’s Edition
    from tran/ SLATE 2011-03-10 10:22 
    출판사와 독자 모두를 위한 고전 문학 기획안 | 로쟈 선생의 이 글을 읽고 알게 됐는데, 현재 10여개 이상의 출판사에서 세계문학전집을 내놓고 있다고 한다. 이미 번역본이 나와있는 책들은 새로이 번역되어 나오는 모양인데, 여기에 문제가 좀 있는 것 같다. 다음은 이세욱 선생이 한 말이다. 출판사들이 물량과 구색을 갖추기 위해 재번역에 번역자들을 총동원하고 있다… 재번역된 작품을 보면 번역자의 새로운 해석을 찾아볼 수 없는, 재번역과 개칠...
 
 
cyrus 2010-12-23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부터 안 읽어봤던 세계문학전집들을 읽고 있는데, 그동안 무척 궁금했었던
번역의 의미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해갈되었네요. 하필 어제 읽은
세계문학전집에 대해서 언급한 장정일 씨의 독서일기에서는
전공자가 아닌 문외한 번역가들이 세계문학전집 역자에 버젓이 등장하는 것을
비판했는데, 로쟈님의 글을 비추어보면 양을 늘리기 위한 출판사의 상업주의 전략 때문에
재번역을 하는 과정에서 작품 전공에 문외한 번역가들이 동원될 수 있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로쟈 2010-12-24 13:45   좋아요 0 | URL
조영일 씨 발표문은 다음카페 비평고원에서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계문학론에 대해서는 창비담론총서로 최근에 나온 <세계문학론>도 참고하실 수 있습니다...
 

강준만 교수의 '한국생활사' 시리즈의 첫 권으로 <영혼이라도 팔아 취직하고 싶다>(개마고원, 2010)가 출간됐다. 월간 <인물과 사상>에 연재될 때 언젠가 책으로 묶일 줄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 시리즈가 40여권이나 기획돼 있는 줄은 몰랐다. 거의 '메가 프로젝트'다. <한국 현대사 산책>과 함께 '한국인의 모든 것'을 까발려놓겠다는 야심찬 시도가 아닌가 싶다. 까발려놓는다? 정치란 ‘그 주체들이 고급 일자리를 얻기 위한 투쟁일 뿐’이라는 그의 '냉소적 현실주의'가 이 시리즈의 밑바탕에 깔린 듯싶기 때문이다. 이념을 걷어내고 '사실'에 집중하겠다는 의지는 그의 방대한 자료섭렵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내친 김에 동시대 한국인의 초상을 그린 몇 권의 책을 리스트로 묶으며 제목은 '이것이 한국사회다'라고 붙여놓는다...

서울신문(10. 12. 18) 승자독식 대한민국 실업탈출 아직 멀었다 

‘영혼이라도 팔아 취직하고 싶다’(강준만 지음, 개마고원 펴냄)는 한동안 한국 사회문제 전반에 대한 비판적 글쓰기로 유명했던 강준만 전북대 신방과 교수의 ‘한국 생활사’ 작업이다. 강 교수의 ‘한국 생활사’는 전화, 커피, 축구, 입시, 어머니 등 일상을 주제별로 나눈 통시적 저술 작업으로 이번 주제는 제목 그대로 실업이다. ‘한국 생활사’는 전 18권인 강 교수의 ‘한국 현대사 산책’이나 전 17권인 ‘미국사 산책’보다 더 많은 40여권의 책을 예정하고 있다.

‘영혼이라도’는 해방정국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 실업의 역사와 슬픈 구직 수난사를 살펴 실업 문제 해결이 단순히 ‘방법’이 아니라 ‘철학’과 ‘자세’에 있음을 제시한다. 왜 구직에 철학이 등장할까. 우리나라는 ‘1등만 기억하는’, 한 번 나락으로 떨어지면 끝장이라는 식의 승자독식 문화가 강고하다는 게 저자의 진단이다. 이런 문화에서 정규직-비정규직 문제나 기업형 슈퍼마켓, 이마트 피자, 롯데마트 치킨 논란에서 보듯 누군가 제아무리 ‘기막힌 방법’을 마련해도 이해당사자 모두를 만족하게 하는 해결책은 내놓기 어렵다.

따라서 저자는 실업 문제를 넓고 깊게 보기를 권한다. 실업 문제는 그 어떤 이념도 뛰어넘는 한국 사회의 근본적인 운영과 작동방식의 문제란 것이다. 기존의 좌우 이념의 틀을 벗어나 승자독식 문화의 의식과 관행을 바꾸고 공존공생의 자세를 찾지 않으면 영원히 실업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일본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 1945년 8월 15일 이후 해방정국에서 우익 청년·학생 단체가 엄청나게 많이 생겨났다. 이는 당시의 대규모 실업과 심각한 경제난 때문이란 게 강 교수의 설명이다. 청년단의 폭력 행사는 배고픔을 해결하려는 방편이었다는 것이다.

1960년대 폭발적으로 늘어난 대학생과 30%가 넘는 실업률은 4·19 혁명을 촉발시킨 요인이었다. 5·16 쿠데타 역시 주동자들의 실업 문제가 큰 원인이었다. 강 교수는 정치란 ‘그 주체들이 고급 일자리를 얻기 위한 투쟁일 뿐’이라고 단언한다. 아무리 정교한 법과 제도라도 공기업과 정부 산하단체의 보은성 ‘낙하산 인사’를 차단하기 어렵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결국 실업을 경제적 문제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원수와도 같이 살자’는 자세를 갖춰야 “영혼이라도 팔아 취직하고 싶다!”는 절규를 해소하는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책의 결론이다.(윤창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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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이라도 팔아 취직하고 싶다- 한국 실업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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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출 권하는 사회- 신용 불량자 문제를 통해서 본 신용의 상품화와 사회적 재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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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워킹푸어- 무엇이 우리를 일할수록 가난하게 만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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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10-12-19 23:16   좋아요 0 | URL
현재 대학생들이 사회적, 실존적 의식이 없는게 취직 문제에 매달리기 때문이라는데 이상하게 왜 취직 걱정할 일 없는 의대생들도 아무런 의식이 없는거죠?

로쟈 2010-12-19 23:30   좋아요 0 | URL
원래 인간은 포만해도 사고하지 않으니까요...

자꾸때리다 2010-12-20 11:20   좋아요 0 | URL
저희 세대는 아마도 몰락으로 운명지어진 세대 같습니다. 저희 세대가 4,50대가 되면 참 끔찍할 듯 하네요.
 

오랜만에 지젝과 관련한 칼럼들이 눈에 띄기에 스크랩해놓는다. '지젝'이란 이름이 칼럼에 등장하는 빈도수가 친숙도의 척도가 될 수 있을 듯하다. 공역자로 참여한 지젝의 <폭력>(난장이, 2011)이 내달에 출간되는데, 그의 문제의식이 더 많이 공유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한겨레(10. 09. 13) [홍세화칼럼] ‘배제된 자’들을 위한 정치

지난 9월3일 취임 인사차 민주노총을 방문하여 환대를 받은 박재완 고용노동부 장관은 “위원장이 고용노동부를 ‘우리 부’라고 해 너무 감사하다. 우리도 민주노총을 ‘우리 민주노총’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고 화답했다. 한국 사회에서 조합원들이나 현장 활동가들 위에 군림하는 시민사회단체나 조직의 지도층이 공권력 앞에서 주눅들거나 황송해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지만, 한국노총과 자리바꿈을 한 듯한 민주노총 위원장의 이번 행보는 슬라보이 지제크가 말한 “‘배제된 자’에 적대적인 ‘포함된 자’”에서 ‘포함된 자’의 그것에 가까워 보인다.

행정자치부를 행정안전부로 바꾼 것처럼 노동부를 고용노동부로 바꾼 것도 이명박 정권의 지향을 오롯이 드러낸다. 가령 이주노동자들에게 한국은 노동허가제가 아닌 고용허가제를 시행하고 있는데 노동의 주체는 노동자이지만 고용의 주체는 고용주라는 점에서 노동허가제와 고용허가제는 전혀 상반된 노동관에 기초하고 있다. 그동안 실질에 있어서는 ‘노동통제부’에 가까웠다고 하더라도 이름만큼은 그래도 노동부였던 것을 고용노동부라고 바꾼 것인데, 민주노총 지도부가 ‘비정규직 철폐’라는 구호에 맞게 실제로 ‘배제된 자’들과 연대하여 싸운다면 고용노동부를 ‘우리 부’라고 일컬을 수는 없는 일이다.

배제된 자들 중에는 오늘도 농성 투쟁을 벌이고 있는 기륭전자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현대기아자동차 본사 앞에서 두 달째 노숙 투쟁을 벌이는 동희오토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있다. 충남 서산에 있는 이 공장의 생산직 노동자 900여명은 모두 기아자동차 ‘모닝’을 생산하지만 기아자동차 노동자가 아닌, 17개 외주하청업체에 소속된 유령과 같은 존재들이다. 아이엠에프 환란 직후인 1998년, 정치권과 자본의 전방위 압력을 받은 현대자동차 노조가 가장 약한 고리인 식당 여성노동자들을 비정규직화하는 데 합의했던 과정과 그에 따른 투쟁을 형상화한 게 <밥·꽃·양>인데, 일단 물꼬가 터진 뒤 ‘전 생산노동자의 비정규직화’라는, 사용자에게 억만금의 이윤을 챙기게 해주는 ‘멋진 신세계’가 펼쳐지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사실 ‘포함된 자’와 ‘배제된 자’의 개념은 지제크에게서 빌려올 필요 없이 쌍용자동차 사태를 돌이켜보면 더 분명하게 다가온다. 배제된 자들의 위험으로부터 체제를 지키는 게 공권력의 역할임을, 또한 ‘포함된 자’가 자칫 ‘배제된 자’들과 연대하여 싸우면 그 또한 ‘배제된 자’가 되어야 함을 쌍용자동차 사태는 가르쳐주었다. 복종하여 포함될 것이냐, 싸우다 배제될 것이냐의 선택 앞에서 노동계가 그간 보인 대응은 전자 우세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고용노동부는 지난 7월22일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에 대해 대법원이 내린 ‘불법파견, 정규직 지위 확인’ 판결의 현장파급효과를 최소화하려고 애쓰는 한편 타임오프제를 빌미로 사용자들에게 단체협약을 바꾸도록 압박하고 있다. 대법 판결 이후 현장에서 그나마 되살아나고 있는 연대 동력을 무력화하면서 지금까지처럼 노동을 순치시키려는 것이다. 그런데 워낙 포함된 자들 사이의 싸움에만 눈길을 주는 게 관성이 된 탓인가, <한겨레>를 포함하여 진보매체에서조차 의미 있는 변곡점이 될 수 있는 대법 판결 이후 현장의 움직임을 기사화하는 데 인색하다.

여야 정치권 사이의 싸움이 아무리 요란해도 결국 이건희의 품 안에 포함된 자들 사이의 싸움이며, 민주당이 4대강 사업을 반대한다지만 새만금을 밀어붙였던 정체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기에 더욱 오늘 통합을 주장하는 진보 정치인들은 무엇을 위해 누구와 통합할 것인지 분명히 밝혀야 마땅하다. 조직되지 않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고 그래서 표로 계산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들 편에 서지 않는다면 진보는 거추장스런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홍세화 기획위원)    

한겨레(10. 12. 18) [세상 읽기] 지제크식 이웃사랑

네 이웃을 사랑하라! 예수님 말씀이다. 원수를 사랑하라! 이 역시 예수님 말씀이다. 말은 쉬운데, 행동은 참 어렵다. 혹자는 원수까진 몰라도 이웃은 이미 사랑하고 있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일손이 부족하면 가서 도와주고, 명절이면 음식을 나눠먹고, 상을 당하면 함께 울어준다고…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이웃의 경계는 어디까지인가? 누가 한번 선을 그어보라. 그 경계 안에 몇 명이나 있는가? 그러면 나머지 사람들은 사랑하지 말잔 얘긴가? 박애주의자인 예수님이 그런 명령을 했을 까닭이 없지 않은가?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이 보편적인 윤리적 명령이 되려면 이웃의 특정한 경계를 가정해서는 안 된다. 각기 다른 이웃사랑이 충돌해서 원수로 만날 수도 있을 테니까. 그러면 어쩌라고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윤리를 정치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철학자 슬라보이 지제크의 견해를 참조해 보자. 지제크는 윤리의 관건을 ‘이웃사랑’이라고 단언한다. 그에게 이웃은 근처에 사는 존재가 아니다. 이웃은 이해관계로 얽힌 경쟁하는 존재들이다. 주차공간을 다투는 상가 주민, 승진을 겨루는 입사동기, 임금문제로 실랑이를 벌이는 노사가 모두 이웃이다. 가장 직설적인 삶의 현실이 존재하는 곳에서 관계 맺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이웃인 것이다. 그래서 이웃은 원수가 되기 쉽기 때문에 이웃사랑이 윤리의 핵심이라는 거다. 결국 ‘이웃사랑’은 가장 적나라한 삶의 진실이 드러나는 생산의 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얘기다.

이런 식의 ‘이웃사랑’은 쉽지 않다. 대개는 거꾸로 간다. 최철원 사건을 떠올려보자. 그는 1인 시위를 하는 노동자를 맷값을 주고 야구방망이로 구타했다. 그런 그가 모교에는 15억원을 기부했다. 이웃은 원수로, 남은 이웃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 사례는 극단적이지만 유사한 행태는 흔하다. 임금을 대폭 삭감해 얻은 이윤으로 교회의 불우이웃돕기에 기부한 경우를 가정해 보자. 임금삭감의 이득은 다수의 이웃에게 고통을 주지만 가치중립적인 ‘경제적 행위’로 치부되면서 윤리적 비판을 피해갈 수 있다. 반면 이렇게 남은 이득의 일부를 기부하면 선행으로 칭송받으며 단번에 윤리적 영예를 가질 수 있다. 계산에 밝은 인간이라면 어찌 이 방법이 가진 효율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겠는가.

지제크는 이런 행태, 다수의 이웃을 괴롭혀 남에게 조금 집어주고 윤리적 행위의 영예는 자신이 갖는 것을 ‘물신주의적 부인’으로 규정한다. 진정한 이웃의 고통은 부인하고 희생과 헌신의 제스처만을 윤리의 특권적 형식으로 물신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예수님이 ‘이웃을 사랑하라’란 명령에 ‘원수를 사랑하라’고 친절하게 각주까지 붙인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진정한 이웃은 원수의 모습을 하기 쉬우니 남을 끌어들여 이웃을 외면하는 잔머리를 경계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다시 말해 희생과 헌신의 제스처를 받아주는 무력한 존재만 이웃으로 경계 짓지 말고 상처받은 얼굴로 노려보는 진정한 이웃의 요구에 정직하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연말이면 어김없이 불우이웃돕기 구호가 등장한다. 소녀가장이나 독거노인 같은 무력한 존재들이 그 대상이다. 이런 식의 ‘이웃사랑’은 불우한 이웃을 돕는 이벤트로 이웃을 불우하게 만드는 일상을 가린다.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죽어나간 노동자들에 대해 세계 일류기업이 보여주는 일관된 외면을 보라. 북한의 포사격으로 시민들이 불안에 떠는 사이 이웃의 권리를 분배하는 예산안을 당파의 권리로 날치기 통과시킨 집권세력은 또 어떠한가. 이해관계로 뭉친 패거리만 이웃으로 경계 짓고 진정한 이웃의 고통을 양식으로 삼는 것이 그들의 ‘이웃사랑’인가. 불우해지기 전에 이웃을 돕는 것, 이웃의 정당한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왜 그리 어려운가? (남재일 경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10. 12. 19.  

P.S. 두 칼럼에서 '슬라보예 지젝'이 '슬라보이 지제크'로 표기됐다. 현행 외국어표기법에 따른 것으로 보이는데, '슬라보이'에는 동의할 수 있지만('Slavoj'가 '슬라보예'로 소개된 것은 우연한 착오 때문이었을 것이다. 발음은 '슬라보이'니까. 최근의 어느 기사는 '슬라보즈'라고 독창적으로 읽었지만), '지젝'을 '지제크'로 읽는 건 소모적으로 보인다. '지젝'은 이미 통용 표기이기 때문이다(하긴 '벤야민'은 '베냐민'으로 고집하는 것도 여전하니 '지제크'만은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지제크'가 무슨 비스킷 이름처럼 들리는 게 나뿐일까?). 나의 지론은 적어도 외국어 고유명사 표기는 일관적인 표기원칙을 따르기 곤란하며 관행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지젝의 <폭력>의 핵심 요지에 대해서는 동영상 시리즈를 참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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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존재감’의 민주주의를 꿈꾼다

어제 '뒷북성'으로 발견한 책은 왕사오광의 <민주사강>(에버리치홀딩스, 2010)이다. 서구식 민주주의, 특히 미국식 민주주의를 비판한 책으로 경제대국 중국의 '자신감'을 표현하는 책으로 소개됐는데, 사실 저자의 민주주의 비판은 '상식'으로 수용될 필요가 있다(가라타니 고진이나 지젝의 민주주의 비판도 맥락을 같이한다). 민주주의를 사라지게 만드는 현재의 민주주의( ‘자유’ 민주주의, ‘간접’ 민주주의, ‘헌정’ 민주주의, ‘대의’ 민주주의, ‘선거’ 민주주의, ‘다원’ 민주주의)를 갱신하고 재발명하기 위해서라도 사고를 '무장'할 필요가 있다. 관련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서울신문(10. 09. 25) 서구식 민주주의가 진정 옳은 길인가 

중국, 중국인의 눈으로 중국식 민주주의의 방향성을 고민한 책이다. “서구식 민주주의가 인민을 위한 정치 체제에서 진정 옳은 길인가”라고 묻는다. 중국은 이제 서양식 민주주의의 무비판적인 수용을 거부하고, 중국식 민주주의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홍콩 중원(中文)대 교수, 중국 칭화(淸華)대 공공관리학원 교수인 저자는 중국은 경제 성장에 따른 자신감을 갖고 미국 민주주의를 비판해야 한다고 말한다. 1990년부터 2000년까지 미국 예일대 정치학과 교수를 지내기도 한 그는 이 책에서 민주주의의 기원과 변화, 현대 민주주의의 발생과 운영 등을 살펴보고, 서구 민주주의가 ‘전가의 보도’는 아니다라고 단언한다. 말하자면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갖게 된 중국은 이제 서양식 제도가 아닌 새로운 정치체제를 갖춰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저자는 서양식 민주주의가 반드시 높은 수준의 사회적 공정성과 행복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예컨대 로버트 레인 예일대 명예교수의 저서 ‘시장 민주주의 제도에서의 행복의 유실’에 따르면 1972∼94년 스스로 ‘대단히 행복하다’고 느끼는 미국인의 수는 계속 줄어드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또 민주주의가 반드시 경제성장을 촉진하는 것도 아니다고 말한다. 민주주의의 근간 중 하나인 투표 제도에 대해서도 비판한다.

저자는 “서양에서 수입해온 민주주의 모델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최후에 맞이하게 될 결과는 기껏해야 남원북철(南轅北轍·마음과 행위가 모순되는 상황을 비유한 말)의 꼴”이라면서 “중국은 사회주의 제도 기초 위에다 민주주의를 건설하려고 하는데 그것은 노동인민의 이익을 출발점으로 하는 민주주의여야 하며 폭넓게 참여하는 민주주의여야 한다”고 설명한다.(정승욱 기자) 

 

서울신문(10. 09. 29) 대통령, 차라리 로또로 뽑는게 어때? 

정당에 대한 불신 증가, 투표율 저하 등은 오늘날 민주주의의 위기 징후로 꼽히는 것들이다. 어떤 탈출구가 있을까. 여기 대담한 제안이 있다. 민주주의(Democracy) 대신 ‘대표표본주의’(Demarchy), ‘주사위주의’(Klerostocracy) 혹은 ‘로또주의’(Lottocracy)는 어떨까. 대표자를 뽑는 선거 따윈 집어치우고 국민들 가운데 임의로 선정한 대표표본에게 통치권을 위임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주사위나 로또로 통치자를 뽑아보자는 것이다. 평소 하는 행태로 봐서는 그다지 나를 대표해주는 것 같지도 않은 후보나 정당을 고르느라 골머리 썩일 필요도 없고, 후보자 시절을 까맣게 잊은 당선자들의 행태를 보고 열 받을 일도 없으니 말이다.

막가자는 얘기인가. 그렇지 않다. 책 ‘민주사강’(김갑수 옮김, 에버리치홀딩스 펴냄)을 통해 왕사오광 홍콩 중문대 교수가 진지하게 내놓은 제안이다. 왕 교수는 미국 코넬대에서 정치학 석·박사 학위를 받고, 예일대 정치학과에서 10년간 교수 생활을 한 정치학자다. 눈여겨볼 대목은 그가 책 전반에 걸쳐 미국식 민주주의에 비판적인 로버트 달 예일대 교수의 주장을 수차례 인용한다는 점이다. 중국 학자의 ‘중국 옹호+미국 때리기’ 측면이 엿보이기는 하지만 민주주의 근본개념을 파고 드는 급진적 문제 제기만큼은 관심을 기울일 만하다.

먼저, 왜 선거 대신 추첨인가. 왕 교수는 아테네 민주정은 계급제 때문에 불완전했고, 현대 민주주의는 보통선거권 덕분에 좀 더 완전해졌다는 상식을 뒤엎는다. 민주주의는 민중(Demos)의 직접 지배(Cracy)를 뜻한다. 여기서는 ‘지배하는 자가 지배 받는다.’는 동일성 원칙이 가장 중요하다.

누구나 선거에 나올 수는 있지만 현실적으로 어렵다. 근사한 학위가 있거나, 줄 잘 대서 공천 잘 따내거나, 돈이 많거나, TV에 얼굴을 자주 디밀었던 사람이 아닌 이상 출마 자체도 어려울뿐더러 당선은 더 어렵다. 그러나 추첨을 하면 못난 사람, 조금 덜 배운 사람 등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기회가 돌아간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추첨으로 선출직 공직자를 뽑는 아테네 민주정이 더 민주적이다. 비록 노예와 여성을 제외했다고는 하지만, 현대 민주주의의 선거제도 역시 이미 돈과 명성 등의 기준으로 수많은 예비후보자들을 탈락시킨 상태에서 치러지기 때문이다. 그럴 바에야 참가자들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는 추첨제가 낫다는 주장이다.

한발 더 나아가 왕 교수는 ‘추첨은 민주정에, 선거는 귀족정에 더 잘 어울린다는 사실을 계몽사상가들은 다 알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런 논의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왕 교수는 그 원인을 민주정의 공포에서 찾는다. 당시 지식인들의 가장 큰 두려움은 머릿수가 많은 노동자·농민층이 의회를 장악해 혁명적 법안을 통과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들의 정치참여 욕구를 적당히 받아들이면서 순치하기 위해 만든 제도가 바로 오늘날 현대인이 소중히 여기는 ‘자유’ 민주주의, ‘간접’ 민주주의, ‘헌정’ 민주주의, ‘대의’ 민주주의, ‘선거’ 민주주의, ‘다원’ 민주주의라는 게 왕 교수의 진단이다.

예컨대 미국은 영국 왕이 싫어 독립전쟁을 치렀으면서도 ‘의회에 맞설 수 있되 세습하지는 않는 왕’을 대통령이란 이름으로 만들었고, 귀족도 없으면서 각 주(州) 간 균형이라는 명분으로 상원을 만들고, 헌정주의란 이름 아래 입법부가 만든 법률을 위헌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사법부에 부여했다. 한마디로 하원의 입법권을 무력화하기 위한 안전장치다.

따라서 왕 교수는 현대 민주주의를 ‘거세된’ 민주주의, ‘순한 양으로 길들여진’ 민주주의라 부른다. 왕 교수의 결론은 중국이 민주주의를 하려면 미국식 민주주의 말고 좀 더 노동자·농민의 이익에 걸맞은 방식의 민주주의를 찾아야 한다는 데 도달한다.

문제는 ‘방식’이다. 대표표본주의, 주사위주의, 로또주의가 정말 가능할까. 반사적으로 현실성이니 전문성이니 하는 반론이 튀어 나온다. 왕 교수는 반문한다. 사람의 목숨을 다루기에 가장 엄밀해야 한다는 법원의 재판에서도 이미 이런 요소들이 배심제라는 이름으로 도입됐거나, 도입되고 있지 않으냐고. 시민의 상식, 그게 바로 민주주의 기반 아니더냐고.(조태성기자)  

10.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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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서 분야에서 올해의 저자라면 마이클 샌델이 되겠지만, 시야를 좀 좁히면 올해는 테리 이클턴의 해도 된다. 실제로 방한하기도 했지만 '이글턴의 귀환'이라고 할 만큼 그의 책이 여러 권 출간됐기 때문이다. 대미를 장식한 것이 <이론 이후>(길, 2010)다. 번역 소식은 진즉에 알고 있었고, 원서도 오래 전에 구해놓은 터라 출간되자 마자 손에 넣었다. 사실 그의 히트작인 <문학이론입문>을 '즐독'하던 시절이 20년쯤 전이어서 이글턴은 내게 '청춘의 독서'를 상기시켜주는 저자다. 내년 강의준비도 할 겸 다시금 '즐독'에 빠져봐야겠다(원서를 어디에 두었나 찾아봐야겠다). 리뷰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겨레(10. 12. 18) 포스트모더니즘에 종언을 고함 

<이론 이후>는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문화이론가 테리 이글턴(1943~·사진)의 2003년 저작이다. 2003년이면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뒤 이라크를 초토화하던 시점이다. 이글턴은 “미국 정부를 장악한 극단주의자들과 반(半)광신적인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날뛰고 있는데도, 이런 반인륜적 광기를 제어하지 못하고 진보운동이 주저앉은 이유 가운데 하나를 ‘이론의 무기력’에서 찾는다. 단적으로 말하면, “이 시대의 통설”인 ‘포스트모더니즘’이 문제다. 아무런 전망도 저항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불임의 이념이 포스트모더니즘이다. 이글턴은 바로 그 포스트모더니즘이 종언을 고했다고 선언한다. 이 책은 이 포스트모더니즘이 어떤 경로로 서구 좌파의 대세를 장악했는지, 또 어떤 이유로 이 이념이 무기력 속에서 파산할 수밖에 없는지를 이글턴 특유의 생기 넘치는 언어로 이야기한다. 



이 책의 제목에서 말하는 ‘이론’이란 ‘문화이론’을 가리킨다. 문화이론은 1960년대의 격동 속에서 태어났다.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 베트남전쟁 반대운동의 흐름을 타고 격렬해진 서구 학생운동이 문화이론의 산파 구실을 했다. 당시 학생운동은 자본주의 지배체제에 복무하는 인문학을 격하게 거부했는데, 그 과정에서 인문학이 전면적인 자기성찰을 감행했고, 그 결과로 태어난 것이 문화이론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론’이란 것은 바로 인문학의 비판적 자기 성찰이다.” 문화이론의 황금기는 1965년부터 1980년 사이 15년이었다고 이글턴은 말한다. 이 문화이론의 황금기를 수놓은 사람들로 이글턴은 “자크 라캉,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루이 알튀세르, 롤랑 바르트, 미셸 푸코”를 거명하고 또 “레이먼드 윌리엄스, 뤼스 이리가레, 피에르 부르디외, 줄리아 크리스테바, 자크 데리다, 엘렌 식수, 위르겐 하버마스, 프레드릭 제임슨, 에드워드 사이드”를 불러 세운다. 거의 전부가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를 이끈 프랑스 출신 좌파 이론가들이다.

이 빛나는 별들을 쏘아올렸던 ‘문화이론’은 1980년대에 들어와 소비주의가 만연하고 신자유주의가 득세하면서 몰락해 버렸다. 그 이론의 폐허 위에 깃발을 꽂은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이글턴은 말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1960년대의 대항문화가 낳은 이론들 속에서 자라났으나 결국에는 그 이론들의 건강한 비판성을 잃어버린 껍데기 이념이다. 이글턴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자로 구체적인 인물을 특정하지는 않지만, 프랑스 철학자 프랑수아 리오타르, 장 보드리야르, 미국 철학자 리처드 로티, 그리고 몇몇 급진 페미니즘 이론가들을 넌지시 지목한다.

이글턴이 보기에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지적 흐름은 “총체성, 보편적 가치, 거대한 역사적 담론, 인간 실존의 튼튼한 기반, 객관적 지식의 가능성”을 거부한다. 또 “진리·통일성·진보에 회의적이다.” 요컨대, 영원한 보편적 진리도, 보편적으로 타당한 가치도, 인간 실존의 굳건한 토대도 없다고 보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다. 모든 것이 가변적이고 부분적이고 상대적이어서, 거기서 진리나 보편을 찾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글턴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런 주장들이 모두 틀렸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이글턴이 예로 드는 것이 규범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규범적인 것’을 ‘억압적인 것’과 동일시한다. “규범은 억압적이다.” 정말 그런가. 어떤 규범은 억압적일 수 있지만 규범 자체가 억압적이라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규범이 없다면 유아살해범을 처벌할 수도 없고 홀로코스트를 규탄할 수도 없다. “규범이 늘 우리를 구속한다고 믿는 것 자체가 어리석기 짝이 없는 낭만적 망상일 뿐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가장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이 ‘진리는 도그마다’라는 명제일 것이다. 이글턴은 이 명제야말로 우리의 행동을 옭아매는 가짜 명제라고 단언한다. 진리를 옹호하는 것은 교조주의도 아니고 광신주의도 아니다. “인종차별주의는 악이다”라는 명제는 인종차별주의의 희생자들에게만 진리인 것이 아니다. 판단과 행동의 근거로서 진리는 존재한다. 그런 진리를 옹호할 수 없다면 여성이 억압받고 있다든가 기업의 탐욕이 지구 생태계를 망치고 있다는 주장을 할 수도 없다.

이글턴은 말한다. “초국적 기업들이 지구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펴져나가는 동안 지식인들은 보편성이란 일종의 환상이라고 목청 높여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가 2003년의 전 지구를 뒤덮은 네오콘 광기였다. 이런 광기에 정면으로 맞서지 못하고 끝없이 자기 회의와 자기 부정에만 골몰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끝에 다다른 듯하다.” 이글턴은 “이론 없이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숙고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결코 ‘이론 이후’에 존재할 수 없다”며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이론적 파산’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문화이론이 자본주의의 저 야심만만한 전 지구적 역사와 싸워나가야 한다면 자기만의 책임있는 원천을 지니고 있어야만 할 것이다.” 그는 다시 힘주어 말한다. “문화이론은 과감해질 필요가 있다. 저 숨 막힐 듯한 통설에서 벗어나 새로운 주제들을 탐구하라.” (고명섭 기자) 

10 12 19.  

P.S. 올해 더 나온 이글턴의 단행본 저작들이다. 그리고 앞으로 더 나오면 좋겠다 싶은 책 세 권은 아래와 같다. <악에 대하여>, <삶의 의미>, <타인을 만나는 어려움> 등이다. 처음 두 권은 비교적 얇은 책이고 '윤리학 연구'란 부제가 붙은 세번째 책은 야심작이다. <문학이론입문>의 개정판으로 <문학이론입문>(3판)도 번역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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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제 2011-01-01 21:30   좋아요 0 | URL
로쟈님은 아래 세 권을 읽어보셨나요?

로쟈 2011-01-02 11:14   좋아요 0 | URL
<악에 대하여>는 아직 구하지도 못했습니다. 읽어보려는 책이고, 번역본이 나온면 좋겠다는 뜻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