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아침에 뒤적거리고 있는 책은 이번주에 나온 제임스 스콧의 <국가처럼 보기>(에코리브르, 2010)와 니얼 퍼거슨의 <증오의 세기>(민음사, 2010) 등이지만, 리뷰기사로는 바디우의 <사랑 예찬>(길, 2010)을 읽는다. 아무래도 성탄절에 더 어울리는 것은 '증오'가 아니라 '사랑'이니까. 게다가 아주 드물게 올라온 기사다.   

한국일보(10. 12. 25) 사랑, 우연한 만남을 운명으로 만드는 힘 

프랑스 68혁명 세대의 지성들이 대개 보편적 진리의 해체로 나아갔다면, 알랭 바디우는 빈사 직전에 몰린 그 진리의 복원을 꾀하고 있는 현대 프랑스의 대표적 지성이다. 최근 국내에서도 그의 책들이 속속 번역되고 있는데, <사랑 예찬>은 사랑을 진리 생산의 한 절차로 보는 그의 철학적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바디우가 2008년 사랑을 주제로 연극기획자와 나눈 대담을 묶은 책이다. 

 

바디우 철학의 전모를 모르더라도 책은 사랑에 대한 여러 성찰로 가득차 있어, 지금 사랑을 시작했거나 사랑에 흠뻑 빠져있는 연인들이라면 곱씹어 읽어볼 만하다. 바디우가 우선 비판하고 있는 것은 사랑을 종의 번식을 위한 위장술, 욕망의 미사여구 정도로 보는 냉소적 시각이다. 하지만 바디우에게 사랑 없는 섹스는 자위행위와 다름없다. 그는 "사랑을 포기하고 더 이상 사랑을 믿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재앙"이라며 "사랑을 포기하면 삶이 완전히 무미건조해진다는 사실을 언급해야한다"고 말한다.

그에게 사랑은 일회적인 인스턴트식 욕망이 아니라 "미지의 무엇을 지속시키고 하자는 욕망"이다. 그러니까 "공간과 세계와 시간이 사랑에 부과한 장애물들을 지속적으로, 매몰차게 극복해가는" '진정한 사랑'이 그의 관심 대상이다. 보잘것없는 우연한 만남을 운명처럼 느끼게 하는 사랑의 힘에 주목하면서 그가 끄집어내는 사랑의 가치는 지속성, 약속, 충실성 등이다. "사랑은 순간에 일어난 우연에서 시작되어, 당신이 영원을 제안하게끔 만드는 보기 드문 경험 가운데 하나다."(59쪽) 이런 사랑 예찬이 낭만적 환상이라고 느낀다면 책을 덮으면 그만. 하지만 사랑 속에서 영원성의 도약을 느껴본 이라면 난해한 그의 글을 읽는 수고가 그리 아깝지 않다.

책은 사랑에 대한 그의 철학적 사유로 본격적으로 이어지는데, 사랑은 둘에 관한 진리, 달리 말하면 '있는 그대로의 차이'라는 진리를 구축하는 경험이라고 그는 말한다. 이는 둘의 관점에서 행하는 세계에 대한 탐색이기도 하다.

 

'진리가 없다'는 탈근대 사상가들의 상대성과 허무주의를 극복하고자 하는 바디우는 그렇다고 폭력성과 배타성의 원천으로 지목된, 도그마로서의 진리를 추구하는 것도 아니다. 바디우가 복원하고자 하는 진리는 '복수의 진리들'이며 그것은 우연한 사건들 속에서 출현한다는 것이 바로 그의 '사건의 철학'이다. 바디우에게 그 진리가 출현하는 사건 중 하나가 남녀의 우연한 만남인 것이다.(송용창기자) 

10. 12. 25.  

P.S. 참고로, 바디우와의 재작년 인터뷰 기사를 옮겨놓는다. 인터뷰는 프랑스철학 전공인 김상환 교수가 맡았다.  

중앙일보(08. 01. 16) “진리는 혁명적 … 기존 지식체계 깨며 생겨”  

서양 철학사에서 현대 프랑스 철학이 차지하는 위상은 독특하다.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속칭되는 각종 해체주의의 진원지다. 탈근대 해체주의 철학은 신·이성·본질(실체)을 중심으로 사유해온 서양 철학 2500년 역사를 뒤흔들었다. 그같은 해체는 급기야 철학의 존립 근거까지 위협했고, 철학의 역할과 목적을 다시 세우는 반성적 사고로 이어졌다. 푸코·데리다·들뢰즈 등 해체철학자들에 이어 새로운 거장으로 평가받는 알랭 바디우(Alain Badiou·71) 파리고등사범학교(ENS) 교수가 서 있는 자리다. 바디우는 탈근대 철학의 ‘차이의 사상’과 상대주의를 배격하고 다시 고전적인 형태의 철학 체계를 수립하려 한다. 진리가 하나 뿐이라고 강변하는 서양 전통의 ‘동일성 철학’으로 바디우가 회귀하는 것은 아니다. 



e-메일 대담=김상환 서울대 교수

바디우 역시 해체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진리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며 대신 ‘복수(複數)의 진리’를 세우는 새로운 사유의 실험을 전개하고 있다. 바디우는 외국인 노동자의 처우 개선을 위해 직접 피켓을 들고 시위에 나서는, 행동하는 철학자로도 유명하다. 탈근대적 ‘차이의 철학’과는 다른 관점에서 각종 소수자들을 배려하는 철학을 그는 지향한다. 이는 프랑스 좌파 철학의 현주소이기도 하다. 프랑스 철학을 전공한 김상환 서울대 교수가 인터뷰 안하기로 ‘악명’높은 바디우 교수와 수차례에 걸쳐 이메일 대화를 나눴다.
 
김상환(이하 김)=한국 사회도 외국인이 급증하면서 다인종 사회로 변해가고 있다. 민족주의가 강하게 지배했던 한국 사회에 새로운 윤리관을 수립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한국의 많은 지식인들은 탈근대 철학자들의 ‘차이의 철학’이나 ‘차이의 정치학’에서 문화적 다양성을 끌어안는 새로운 윤리학을 탐색하고 있다. 그런데 바디우 교수는 탈근대 철학자들을 소피스트라고 비판하고 있다.

알랭 바디우(이하 바디우)=일상적인 삶이나 정치적인 삶에서 겪게 되는 어려움은 다른 사람들이 나와 다르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나와 남을 봄에 있어서 ‘차이’보다는 ‘같음’을 이해하는 것이 진정 어렵고 중요한 일이다. 가장 핵심적인 정치적 문제는 차이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류 전체의 근본적인 일체성, 즉 모든 인간의 평등이라는 문제가 핵심적이다. 나는 모든 사람들의 문화적 권리를 지지한다. 문화적 차이들이 다양한 물결을 이루지만 그 안에는 인류의 근본적인 일체성이 함축돼 있다는 나의 신념 때문이다.

김=진리에 대한 당신의 접근은 독특하다. 하나의 진리가 아닌‘복수의 진리’를 이야기한다. 



바디우=진리는 혁명적이고 기존의 지식체계를 교란하면서 일어난다. 나는 진리가 생겨나는 4가지 절차가 있다고 본다. 정치·과학·예술·사랑이 그것이다. 중요한 것은 네가지 절차가 언제나 공존한다는 점이다. 기존의 철학은 이 점을 무시하고 진리를 과학이나 정치 혹은 예술과 같은 한가지 절차로 환원시켜 봉합했다. 가령 마르크스주의는 진리를 정치에, 영미 분석철학은 과학에, 하이데거의 추종자들은 예술에 봉합했다.

김=당신의 철학을 흔히 ‘사건의 철학’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디우=사건은 미증유의 진리가 생산되는 절차다. 철학의 과제는 스스로 진리를 생산하는 데 있지 않다. 현재의 언어를 벗어나면서 출현한 진리에 개입해 사후적으로 명명하는 일이 철학의 과제다. 사건의 1차적 의미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사건의 철학’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김=한국은 대통령 선거가 막 끝나서 보다 성숙하고 선진화된 사회로 나아가길 희망하는 분위기가 짙다. 그런데 당신은 대의 민주주의나 정당 정치에 회의적인 발언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바디우=선거는 정치적인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한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어떤 합의에 기초한 제도이다. 사회가 대충 어떠한 형태를 띠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 경쟁 그룹들 사이의 의견일치가 없다면, 상대편이 권좌에 오르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선거가 제대로 기능하고 있다면, 이는 딱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선거에 참여하는 어떠한 세력도 실질적으로는 과격하고 혁명적인 변화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상환=선거가 어떤 합의 위에 서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바디우=자본주의라는 합의 위에 놓여있다는 의미다. 소위 민주주의적인 나라치고 자본주의가 지배하지 않는 나라, 시장경제가 군림하지 않는 나라, 대기업 CEO가 선거에서 뽑힌 정치인보다 더 큰 권력을 쥐지 않은 나라, 그런 나라를 본 적이 있는가. 선거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있다. 인간 해방은 자본주의적인 경쟁체제에서는 결코 기대할 수 없다.

김=그럼 인간 해방을 추구하는 길은 어디에 있나.

바디우=첫 번째 관문은 국가의 선거 형식 바깥에서 움직일 수 있는 대중적 조직을 만드는 데 있다. 핵심 과제는 서로 다른 출신의 사람들을 묶는 일이다. 가령 지식인·청년·직장인 그리고 사회 밑바닥에 있는 노동자 사이에 어떤 행동 단위나 조직 단위를 구성해야 한다.

김= 사도 바울을 주제로 한 당신의 작품이 세계적으로 널리 읽히고 있는데, 종교 갈등에 대한 생각을 듣고 싶다.

바디우=오늘날 일어나는 수많은 갈등이 종교나 문명 간 충돌이라 보지 않는다. 내가 볼 때 신은 죽었고, 종교는 무력해졌다. 우리는 더 이상 중세시대에 살고 있지 않는 것이다. 진정한 갈등은 이슬람과 기독교 사이에서가 아니라, 미국과 서방을 중심으로 하는 고삐 풀린 자본주의와 가난하고 헐벗은 인민 대중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런 충돌은 때로 종교적 성향의 집단들에 의해 조정되기도 한다. 하지만 전 세계에 걸쳐 자본주의에 의해 창조된 여러 가지의 거대한 불평등이 없다면, 이 집단들은 아무런 힘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김=당신의 철학에 따른 정치적 주체는 투사의 형태를 취해야 할 것 같은데, 종교적 근본주의자나 테러리스트와 어떻게 다른가.

바디우=테러리스트는 전혀 인간 해방의 보편적 비전을 수호하지 않는다. 테러리스트는 종교적 경전에 의해 확립된 폐쇄적인 정체성의 옹호자다. 과거의 열성적인 파시스트 신봉자도 마찬가지다. 내가 말하는 충실과 참여의 정치학은 이런 종류의 폐쇄성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김=요즘 한국 학계는 인문학의 위기를 실감하고 있다.

바디우=내가 볼 때, 인문과학에서 ‘과학’이라 불릴 자격이 있는 것은 마르크스 전통에서 정의하는 역사, 프로이트가 창시한 정신분석, 소쉬르 이래의 언어학 등 세 가지 정도다. 그 밖의 것들은 보통 ‘고전 연구’라 불리는데, 예술에 관계하는 학술적인 형식에 해당한다. 고전 연구를 중심으로 한 인문학은 자본주의에 의해 위협 받고 있다. 수익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예술에 대한 실천적 관계를 조직한다는 점에서 인문학은 대단히 중요하다. 다시 말하지만, 내 철학에서 예술은 과학·정치·사랑과 더불어 보편적 진리의 본질적 유형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다. 인문학의 가치를 옹호해야 하는 근거도 거기에 있다. 대학이 자본주의의 요구만을 따라가선 안된다. 대학이 몰두하고 헌신해야 하는 것은 오로지 진리 자체이고 여기에는 어떠한 제약이나 구속이 있어서는 안된다.(정리=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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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0-12-25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예찬> 무척 즐겁습니다.^^; 바디우를 처음 접하기에는 <철학을 위한 선언>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다만...기혼자는 좀 피하는 것이...--;;; '사랑은 만남이라는 우연성을 보편성으로 전환하는 진리'라고 하더군요. 한마디로 제 진리는 제 배우자에 의해 결정된다는 소리인데, 다수의(복수의) 진리에 상당한 욕심이 있는 기혼자라면 흠....(혜량하소서. 썰렁한 소리 늘어놓고 갑니다...^^;)

로쟈 2010-12-25 20:37   좋아요 0 | URL
진리를 생산하는 방식들은 다 좀 '과격'하죠.^^

워킹슬로울리 2010-12-25 2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가 들수록 점점 사랑에 대해 냉소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여자들을 만날 때 마다, 결국 시시하게 끝나버릴 인연이겠지 라는 생각 부터
들기 시작하더군요.
곰곰히 이유를 생각해보니, 결국 인간이 사랑을 하게 되는 계기는, 외면 아니겠습니까?
얼굴, 집안, 학벌이라는 조건이 일치하면, 사람은 그 사람에게 마음을 주죠,
그때부터 사랑이 시작됩니다. 집안,학벌,돈을 보지 않는 순수한 사랑도 있지 않느냐?
라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엔 얼굴은 다 보는것 같습니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인가요?ㅎㅎ
얼굴이라는 외면적 가치가 끼어든 사랑은 순수할수 없다. 라는 생각이 머리속에
남아서, 결국 순수한 사랑은 없다 라는 사랑의 냉소주의에 빠져들었습니다.

아무튼 로쟈님, 메리크리스마스

로쟈 2010-12-25 20:36   좋아요 0 | URL
외면의 가치를 무시하는 건 오만 아닐까요? 중요한 건 그것 이상을 사랑하게 되는 것일 텐데, 순서는 관계 없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외면이든 내면이든...

워킹슬로울리 2010-12-26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전적으로 옳은 말씀이에요
워낙 외적 가치가 팽배하다 못해 폭발해버릴것 같은 사회에 살고있는 느낌입니다.

어제, 타마르 반 데 도프의 영화 블라인드(2007) 을 봤는데요,
저에게 사랑에 대한 엄청난 의미를 던지고 갔습니다.
연말 바쁘지 않으시다면 보기를 추천해드릴게요!

로쟈 2010-12-27 12:10   좋아요 0 | URL
네, 눈길을 끄는 영화네요. 알려주셔서 감사.^^
 

크리스마스 이브이자 아이의 방학 날이지만, 크리스마스와 방학 모두 내겐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지 않아서 그냥 '원고의 날'로 삼고 있다. 그렇다고 편하게 원고만 쓰는 날은 아니고 아이가 감기에 걸린 탓에 '봉사의 날'도 겸하고 있다. 가끔씩 들여다보는 뉴스기사들 가운데, 계간 <진보평론>(겨울호)의 '노동, 노동해방 다시 보기'를 소개하는 기사가 있기에 스크랩해놓는다. 전부터 갖고 있던 생각을 구체화하는 데 도움이 될 듯싶어서다. 요지는 진정한 노동해방을 위해서라면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겨레(10. 12. 24)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 진짜 노동해방이다 

쌍용자동차의 대량해고, 현대·기아차 및 지엠(GM)대우차의 비정규직 투쟁, 현대차 노사의 ‘주간연속 2교대제’ 시행 논란 등 최근 자동차 업계에서 나타났던 주요 노동현안들은, 현재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변화와 이에 따라 노동이 처하게 된 객관적 조건을 압축적으로 담고 있다. 그 함의는 각각 구조적인 대량실업, 노동의 양극화, 실질 소득의 감소 등이다. 이렇게 변화한 조건들 속에서 노동운동은 여전히 ‘노동해방’을 말할 수 있을까? 



계간지 <진보평론> 겨울호는 ‘노동, 노동해방 다시 보기’라는 제목의 특집을 통해 이에 대한 문제제기를 던졌다. 편집위원인 이성백(사진) 서울시립대 교수는 ‘노동해방 이념의 재구성’이라는 글에서 “노동해방은 자본으로부터의 해방일 뿐 아니라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라며 노동해방 이념을 재구성하기 위한 시도를 펼쳤다.

그의 문제제기는 ‘노동은 신성하다’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시작한다. 노동 신성성은 서구 시민사회에서 “노동을 강제하기 위한 동원의 이데올로기”로 주로 쓰여 왔다. 카를 마르크스도 “노동은 본질적으로 자기실현 활동이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본질적인 규정에서 소외돼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다”고 말해, 마르크스주의자들 역시 노동 신성성을 강조해왔다.

그러나 이 교수는 “자유의 왕국은 실제로는 필요와 외적 합목적성에 의해 결정되는 노동이 끝나는 곳에서 비로소 시작한다.(…) 노동시간의 단축이 기본조건이다”라는 <자본론>의 구절 속에서 마르크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끌어낸다. 그는 마르크스의 노동 개념을 생존 유지를 위한 ‘노동’과 인간의 전인적 자기실현을 위한 ‘생활향유활동’으로 나눠서 풀이하고, “노동 신성성의 이데올로기를 떨쳐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노동 신성성은 왜 부정되어야 하는가? 20세기 후반 자본주의의 축적체제가 크게 변했기 때문이다. 제레미 리프킨이 <노동의 종말>에서 지적했듯, 급속한 정보화는 인간의 노동력을 점차 필요로 하지 않으므로 구조적 대량실업이 발생하는 시대를 만들어냈다. 여기에 신자유주의의 노동 유연화는 노동형태를 바꿔 다양한 패턴의 착취 구조를 만든다. 그 속에서 노동자들의 실질 소득은 갈수록 감소한다. 이에 따라 발생하는 현상이 대량실업, 비정규직, 사회적 빈곤 등이다. 



이 교수는 “사회적 총노동시간의 축소가 다수의 노동자들을 일자리로부터 몰아내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곧 일자리에 목맬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을 정규직 또는 취업의 문 앞에 줄세우는 신자유주의적 해결방식이 문제라는 것이다. 여기서 작동하고 있는 것이 바로 “게으른 자는 먹지도 말라”는 노동 신성성의 이데올로기다. 이 교수는 “21세기 코뮌주의의 이상적 목표는 사적 소유가 철폐된 가운데 적은 시간 일하고 남는 시간은 생명향유활동에 쓰는 것”이라며 ‘노동시간 단축’이 노동운동의 핵심 과제라고 주장한다. 곧 노동해방의 이념이 자본으로부터의 해방뿐 아니라 노동으로부터의 해방까지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소득을 노동으로부터 분리해 모두에게 보장하자는 ‘기본소득론’과도 연결된다. 



박영균 편집위원 역시 ‘노동의 신화와 노동의 종말, 그리고 문화혁명’에서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말한다. 그는 오늘날 모든 사람들이 물리적-비물리적 네트워크를 통해 공장이 아니더라도 사회적 생산력에 참여하고 있는데, 자본은 자신의 교환체계에 들어온 부문만 노동으로서 가치를 매기고 있는 모순을 짚었다. 때문에 그는 “노동운동이 임금협상이나 노동조건 개선 투쟁에 멈춰선 안 된다”며 “노동으로부터 해방을 통해 자본과 임노동의 계열화 속에서 배제되는 다수의 잉여인구들을 반자본의 저항적 주체로 형성하는 정치적 전략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특히 자본주의적 욕망에서 벗어나기 위한 ‘문화혁명’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는 일자리에서 밀려난 빈곤층, 각종 비정규부문 노동자를 노동운동의 주체로 세우려는 시도로 풀이된다.

강연자 편집실장은 ‘주40시간 법정노동시간 단축 투쟁과 노동운동의 과제’를 통해 노동시간 단축의 실질적인 문제들을 짚었다. 그는 주40시간제 도입에도 불구하고 노동시간 유연화의 전통적 형태인 초과근로가 높은 범위로 허용된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더 받기 위해 더 일하는’ 방식의 임금구조가 만들어져, 결국 실노동시간도 줄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유연화에 따른 노동자 내부의 격차만 확대됐다는 것이다. 그는 “초과근로에 의거한 임금에서 벗어나, 법정노동시간만큼 일해 생활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며 “민주노총 표준생계비를 상회하는 노동자들의 초과근로 수당을 포기하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규직 중심의 전통적인 노동운동 현장에서도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고민의 중심에 놓아야 한다는 주장인 셈이다.(최원형 기자) 

10. 1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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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12-24 15:10   좋아요 0 | URL
저런 방학 첫날 감기에 걸렸군요ㅠㅠ 크리스마스를 즐겁게 보낼 만반의 계획을 다 짜놨을 텐데... 그래도 아빠가 보살펴주니 아주 특별한 크리스마스 이브가 되겠네요. 금방 툭툭 털고 일어나서 신나는 방학을 보낼 수 있기를...
그나저나 갑자기 산타클로스가 돼서 원고 쓰시는 로쟈님이 떠오릅니다 ㅋㅋ
추위에 감기 조심하시구요^^

로쟈 2010-12-24 18:35   좋아요 0 | URL
'자상한 아빠'로 오해받겠습니다. 주로 재우고 있으니 보살핀 건 없구요.^^; 주사까지 맞고 와서 다행히 열은 떨어졌습니다. 원고는 내나 쓸 '준비'만 하고 있고요.^^; 그래도 메리 크리스마스하시길! 아주 추운 크리스마스가 될 거라지만요...

자꾸때리다 2010-12-24 22:36   좋아요 0 | URL
예수님은 솔로였는데 왜 커플들이 크리스마스에 염장을 지르는 건가요? 아흑.

로쟈 2010-12-25 11:08   좋아요 0 | URL
예수님은 궁시렁거리지 않았죠...

2010-12-24 23: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25 1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맘때면 여러 곳에서 '올해의 책'을 꼽는 행사가 벌어지는데, 내게도 몇 권을 골라달라는 청탁이 들어와 잠시 생각해봤다. 개인적으로야 <책을 읽을 자유>(현암사, 2010)가 '올해의 책'이지만(더 정확하게는 '올해 낸 책'이다) 그건 개인 사정이고, 좋은 책들은 너무 많은지라 내가 서평이나 칼럼에서 다룬 책으로만 범위를 한정했다. 그러니까 이 리스트도 순전히 '개인적인' 것이다. 기준은 나를 놀라게 하거나, 즐겁게 하거나, 뭔가 깨닫게 해준 책. 그런 기준으로 다섯 권만 골라보았다. 이런 리스트를 한 10년쯤 꼽으면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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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은 현재 진행 중인 세계 금융위기를 통해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유토피아적 핵심을 분석하고, 한편으론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새로운 형태의 공산주의적 실천이 어떻게 가능한지 탐색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20세기 좌파정치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어야만 한다. 베케트의 말을 인용하며 지젝이 강조하는 교훈은 "다시 시도하라. 또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이다. 영국의 역사가 에릭 홉스봄은 이렇게 물었다. "사회주의는 실패했고 자본주의는 파산 상태다. 다음에 올 것은 무엇인가?" 지젝의 대답은 공산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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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조부 2010-12-23 01:39   좋아요 0 | URL

쌤의 책을 읽기 시작했어요. 서문을 읽고 신형철씨의 발문으로 바로 넘어갔는데

그 분이 저같은 사람에게 즐거운 시간 되세요 해서 깜놀했어요~ ㅎㅎㅎ

기대됩니다. 쌤 책 덕분에 연말을 풍성한 시간을 보낼수 있겠네요 고맙습니다 ^^ ㅋ

로쟈 2010-12-23 06:49   좋아요 0 | URL
재밌게 읽어주시면 제가 감사한 걸요.^^

구보 2010-12-23 11:28   좋아요 0 | URL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란 책이 예상외로 유쾌했습니다.계몽,진보에 대해 오히려 졸가리를 잡아 정리해준 책이라고 할까요.

로쟈 2010-12-24 09:05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재밌게 읽었습니다...

자꾸때리다 2010-12-23 15:37   좋아요 0 | URL
그레이의 입장은 정치란 그저 임시방편의 해결책이지 절대로 거대한 계획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입장은 지젝하고 정면 배치되는 것 아닌가요? 저도 저 5권 중에 읽은 책은 지젝과 그레이 뿐....

로쟈 2010-12-24 09:04   좋아요 0 | URL
입장이 '좋은 책'의 기준은 아닙니다. 자극을 주고 생각하게끔 하는 책이 제 기준입니다...
 

외부 강의가 끝나고 모처럼 일찍 귀가했지만 엘리베이터가 점검중이라고 하여(엘리베이터도 놀란 것인가?) 15층까지 걸어올라왔다(젠장, 14층까지 걸어올라오니 다시 작동했다!). 책소포와 함께 들고 온 이번주 교수신문에서 기사들을 훑어보다가 '딸깍발이' 칼럼이 눈에 띄어 옮겨놓는다. 진태원 편집기획위원이 학문후속세대의 사기를 꺾는 한국 학계의 문제적 풍토에 대해서 짚어주고 있다. 새삼스러울 건 없지만, '철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순진한 인문학도는 참고해볼 만하다. 개인적으론 나도 학생들에게 대학원 진학을 권하지 않은 지 오래된 듯싶다...   

교수신문(10. 12, 20) 철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K군에게  

안녕하세요, K군. 날이 무척 추워졌습니다. 서울의 아침 기온이 영하 10도 아래로 떨어졌다죠? 어수선한 국내외 정국에 매서운 바람까지 몰아치니 마음이 한층 더 스산해지는 느낌입니다.

얼마 전 메일을 통해 앞으로 대학원에 진학해서 철학을 공부하고 싶다고, 조언을 부탁한다고 말씀하셨죠? 제 강의 시간에 K군이 했던 발표나 기말 보고서의 우수함을 생각하면 두말없이 적극 진학을 권장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지금까지 여러 학생들을 가르치고 접해왔지만, K군처럼 우수한 사고력과 글쓰기 능력을 겸비한 학생은 좀처럼 만나기 어려웠습니다. 깊고 넓은 학문의 세계에서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고 뜻을 펼치기 바랍니다.

이렇게 권하고 싶은 것이 제 본래의 마음이겠지만, 실제로 제가 해줄 수 있는 조언은 웬만하면 다른 길을 택해보라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권하는 것은 과연 한국에서 학문을 하는 것, 특히 인문학을 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심각하게 회의를 품게 됐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K군처럼 홀어머니에 가정형편이 넉넉지 않아서 국내에서 석ㆍ박사과정을 마쳐야 한다면, 또 서울대 학부 출신도 아니라면, 평생 밥벌이도 제대로 하기 힘든 학문을 하기 위해 과연 십 수 년의 고된 수련과정을 거칠 필요가 있을까 걱정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지금 K군의 머릿속은 다음과 같은 생각으로 가득차 있을 것 같습니다. 외국에서 공부하든 국내에서 공부하든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될까?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해서 무언가 새로운 관점을 세우고 그것을 바탕으로 우리 사회가 직면한 문제들을 인문학적으로 해명하는 데 나름대로 기여할 수 있으면 되지. 그리고 학자의 삶이란 게 풍족한 삶일 수는 없으니까 그냥 굶주리지 않을 정도로 생계만 꾸릴 수 있다면, 다소 가난하더라도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면서 사는 게 더 보람 있고 행복한 삶이 아닐까. 

만약 이런 생각을 품고 있다면, 그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고 또 위험한 생각입니다. 우선 국내 학계에서는 외국에서 공부했느냐 국내에서 공부했느냐가 큰 문제가 된다는 점입니다.

서울대 학부 출신도 아니면서 국내에서 공부하겠다는 것은 이미 졸업 후에 정규직 취직을 포기하겠다는 말과 다를 바 없습니다. 하지만 다른 분야의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학계의 비정규직의 삶이란 고달프기 짝이 없습니다. 여러 명의 비정규직 교수의 가슴 아픈 자살이 그것을 단적으로 말해줍니다. 저는 혹시 제가 학문의 길을 권한 누군가가 훗날 이런 참담한 삶의 끝자락에 서게 되지 않을까 정말 두렵습니다.

어찌어찌해서 다행히 취직이 된다 하더라도 한국에서 인문학하기란 그리 보람 있는 일이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한국 학계는 한국 사회의 다른 어떤 분야 못지않게 신자유주의적 체제로 철저히 재편되고 있는 중입니다. 학계의 신자유주의는 크게 두 가지 구호로 집약됩니다. 단기 수익성을 높여라, 글로벌 경쟁력을 갖춰라.

다른 학계에 비해 현저히 뒤처지긴 하지만 인문학계도 나름대로 이 두 개의 지상명령을 충족시키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비정규직 교원이거나 아직 정년보장을 받지 못한 교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1년에 많게는 10여 편에서부터 적게는 3~4편에 이르는 등재지 논문 쓰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수익성의 학문적 기준이 1년에 몇 백 퍼센트의 업적을 남겼느냐로 표시되기 때문에 질적 우수성, 독창성이나 깊이 같은 기준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인문학하기란 논문 작성 기계의 삶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 대신 질적인 평가는 외국 학계에 위임됩니다. 곧 어떤 학자의 질적 우수성은 일차로 그가 외국(=미국)의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로 측정되고, 그 다음에는 그가 외국의 저명학술지에 논문을 실었느냐로 평가됩니다. 따라서 우수 학자의 일차 요건은 유학 경험, 영어로 글 쓰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국내 대학 출신이든 외국 대학 출신이든, 또 동양어권이나 유럽어권 유학생이든 영미권 유학생이든 가리지 않고 관철되는 철의 법칙입니다.

K군, 그러니 영미권의 유명 대학원에 진학할 만한 경제적 능력이 되지 않는다면, 간곡히 권하거니와 학문의 세계에 발을 디디지 말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럴 만한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될 수 있으면 인문학, 특히 철학은 하지 말기 바랍니다. 그 아까운 재능과 인생을 낭비하지 말기 바랍니다.(진태원 편집기획위원/ 고려대 서양철학) 

10. 1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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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괴즐 2010-12-22 16:08   좋아요 0 | URL
먹먹해지는 글이네요. 시스템을 바꿀 수는 없는 것일까요? 어쩌면 인문학도의 대가 끊겨버리면 그때쯤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저도 공부를 계속해야 할지, 이쯤하고 다시 취업준비를 해야할지 고민이 됩니다. 인문학을 공부하던 선배들이 결국 좌절하고 취업전선 앞에서 전혀 새로운 무기들의 선택을 강요당하는 것을 보면서, 저도 어찌해야 할지 갈등이 됩니다.

로쟈 2010-12-23 08:35   좋아요 0 | URL
직업으로서의 인문학 공부는 다시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마립간 2010-12-22 16:38   좋아요 0 | URL
장한나는 철학과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로쟈 2010-12-23 08:34   좋아요 0 | URL
한국이 아니니까요.

mirror 2010-12-22 18:22   좋아요 0 | URL
1. 유학출신 우대의 문제는 한국학계가 근절해야할 문제점입니다. 자신들이 가르친 제자 대신에 생전 보지도 듣지도 못한 신출나기 외국박사를 채용하는 것은 자기배반입니다. 스스로 자신의 무능을 인정하는 꼴이죠. 세계 어떤 나라가 자국의 학자를 외국에 의탁해서 양성하나요? 영미학계의 칸트 헤겔 연구자를 독일에 의탁해서 양성하지 않습니다. 자국 고유의 전통을 가진, 칸트 헤겔 연구가 있죠.
2. 영어강의자 우대 현상은 학문을 망하게 하려고 작정한 조치이지요. 동양철학조차 영어잘하는 사람 뽑으니까요.
그러나 진태원은 외국어 논문 쓰기에 대해서 과장을 하고 있군요. 철학과에서 외국어 저널에 논문 쓰는 경우 극히 드뭅니다. 왜냐하면, 영어로 논문 쓰기가 어렵기 때문이 아니라, 영어 저널에 실릴만한 수준의 논문을 쓸 능력이 없기 때문이죠. 한국어로 뛰어난 논문만 쓸 수 있따면, 영어로는 돈주고 번역시키면 됩니다. 번역료 그다지 비싸지도 않거든요. 자신의 무능력을 외국어로 가리려 해서는 안되죠.
3. 영어권 철학과 대학원에 자기돈 내고 가는 경우 별로 없습니다. 1년에 학비만 4만불 생활비까지 거의 6천만원 이상 부담하고, 비정규직 시간강사가 미래인 철학박사 할 사람이 한국에 몇 사람이나 되겠어요? 간다면 장학금 받고 가죠. 미국 대학원에서는 장학금 받을 기회가 비교적 많습니다. 장학금을 받으려면, 영어를 잘하고, 또 학부 학점이 아주 좋아야 합니다. 고려대학교에서 공부 열심히 한 학생이 미국대학에서 장학금 받기가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4. 시간강사가 어려운 것은 한국만이 아닙니다. 독일도 한국만큼 잔인한 시간강사 제도 갖고 있죠. 다만 그들 복지제도가 한국보다 좋아서 고통이 덜합니다. 이탈리아는 교수가 많은 대신 시간강사 제도가 아예 없기 때문에, 수많은 박사들이 생계를 유지할 수단 자체가 없습니다. 총리와의 토론에서 어떤 여자 인문계 박사가 이런 고충을 얘기하자, 총리께서 자신과 사귀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답변을 하셔서, 사람들을 경악시킨 바 있죠.
5. 인문계열 박사 학위 받아서, 잘 먹고 잘 살 생각은 버리고, 글을 읽는 재미에 만족해야죠. 막스 베버가 직어으로서의 학문에서, 이 한줄이 너의 해석을 천년동안 기다려왔다, 라는 마음가짐이 없다면, 학문 하지 말라고 했지요.

2010-12-22 18: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23 06: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22 18: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23 06: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자꾸때리다 2010-12-22 18:47   좋아요 0 | URL
저도 졸업하면 뭐 해야 하나 고민이 되는데요. 임상의사가 되고 싶은 맘은 조금도 없는데 인문학관련 대학원을 갈까 했는데 그게 한국 사회에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이 듭니다. 이른바 순수 인문학도 그러하고 의료윤리니 하는 학문들도 그닥 의미가 없다고 생각이 됩니다. 물론 밥 벌어 먹기도 힘들 것 같고. 그럼 로스쿨을 갈까 생각도 했는데 로스쿨 나오면 결국 임상의사들처럼 다른 돈버는 기계들 사이에서 똑같이 기계로 전락하는 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고요. 근데 진태원 교수님 말처럼 '서울대 편중'이라는 건 서울대를 제외한 나머지 예컨데 의대나 카이스트나 경찰대(적어도 수능성적으로는 서울대 부럽지 않은) 나온 사람도 인문학하면 소외되기 십상이라는 건가요?

자꾸때리다 2010-12-22 18:46   좋아요 0 | URL
근데 대학이 신자유주의 체제로 재편된다고 해도 그리 오래갈 것 같지는 않아보이네요. 저도 역사에 대해서 낙관주의자는 아니지만 적어도 이 신자유주의 체제가 영원무궁 존속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체제는 아니라고 2008년에 입증되었는데 말이죠. 적어도 지금 유학가서 돌어올 때 즈음이면 어떠한 형태로든지 (좋아지든 나빠지든) 변화가 있을 것 같아요.

mirror 2010-12-22 19:18   좋아요 0 | URL
1. 한국대학이 이토록 엉망인 이유는 신자유주의와 별로 관련이 없습니다. 다른 나라도 다 신자유주의체제인데, 다른 나라 대학들이 한국대학같지는 않거든요. 신자유주의의 본산인 미국의 대학은 인문학을 가장 강조합니다. 한국사회의 천박함과 내적인 이유로 발행하는 문제점을 신자유주의로 환원하는 버릇은 한국 지식인들의 지적 나태함과 정치적 당파성만을 나타낼 뿐입니다.
2. 인생의 진리는 없죠. 책 몇권 더 읽은 사람이 더 현명한 것도 아닙니다. 다만, 개인적 경험을 말씀드리자면, 자신의 직업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한국사회에서의 의미'를 기준으로 두는 것은 스스로 정직하지 않은 태도일 수 있습니다. 결국은 하고 싶은 공부도 하고 돈도 잘 버는 것을 원하는데, 그런 것을 모두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어느 사회에나 많지 않습니다. 그런 욕심으로는 나중에 후회할 가능서잉 더 많습니다. 저는 평생 시간강사 생활을 각오하지 않는 후배에게 학문의 길을 권하지는 않습니다.
3. 서울대 학부를 진태원이 강조한 이유는 한국 대학의 다수를 서울대 출신들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으로 연고대 출신들이 약간 해먹고요. 따라서 다른 대학의 학부출신들은 능력과 비례하는 취직기회를 적게 가질 가능성이 더 많습니다. 카이스트와 경찰대학은 인문사회계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죠. 또 한국의 인문사회계는 특히 계량화되지 않은 학문들은 아직 능력을 확고하게 평가할 자세, 능력, 제도를 갖추고 있지 못합니다.

자꾸때리다 2010-12-22 19:18   좋아요 0 | URL
저는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요. 미국이 아직 인문학이 가사 상태라고 부를 수 있는 상태까지는 아닌 이유가 서구권에 깊게 뿌리 박혀 있는 인문학 전통을 몇 십년의 신자유주의 체제가 완전히 뽑아버리지는 못한 것 같고 한국은 그 전통이 아직 깊게 뿌리내리지 못한 시기에 신자유주의 광풍에 휩쓸린 것으로 보입니다. 예전에도 한국 대학에 사회과학 바람이 분 적이 있잖아요.

mirror 2010-12-22 19:45   좋아요 0 | URL
대한민국은 역사상 한번도 인문사회과학을 제대로 한 적이 없습니다. 80년대 사회과학요? 그건 학문적 발전으로 이어지지 못한 잠시의 유행이었죠. 막스주의에 대한 대단한 책이 한국말로 쓰여졌나요? 한국 인문학계는 나쁜 상태에서 더 나빠졌을 뿐입니다.
현재로서는 미국의 인문학이 그 놈의 신자유주의에게 학살당하고 있다는 증거가 별로 없는 것 같은데요? 여전히 쓸데도 없는 기호논리학을 교양강좌로 수십개씩 개설하는 것이 미국 대학들입니다.
아무튼, 평생 시간강사할 각오가 없으시다면, 이쪽 길로 오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게 안전합니다.

sommer 2010-12-23 04:25   좋아요 0 | URL
'안다고 가정된 주체'에게 보낸 편지였을 텐데, 그 편지는 아직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은 거 같네요. 그 편지에 대한 응답이 '계몽적 제스처'를 여전히 취하고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말이지요.
더 중요한 문제는 그 주체의 자리를 더 이상 아무도 떠맡지 않으려 한다는 사실이 아닌가 싶어요. 예를 들어, 유학이 더 이상 계몽의 차원이 아니라, 더 나은 사회보장(권)을 찾아 떠나는 것으로 변모하고 있다는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는 듯 해요.

로쟈 2010-12-23 06:48   좋아요 0 | URL
사르트르식으로 말하면, 이미 발신자 자신이 예상했던 답변일 듯해요...

토탈리콜 2010-12-23 10:28   좋아요 0 | URL
세상은 누구도 안정을 보장하지 않는것 아닐까요? 우리가 mb를 선택한 순간.. 아니 그시대정신이 이미 그런걸 각오 또는 용인한거슨 아닌지........ 씁 쓸합니다

로쟈 2010-12-23 10:32   좋아요 0 | URL
일반화하기엔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간극이 커보입니다. 대학 비정규직 강사 문제나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파업사태에서도 확인되듯이...

2010-12-24 00: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24 0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24 0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24 08: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park6 2010-12-25 14:21   좋아요 0 | URL
제가 철학과로 진학하겠다고 했을 때 국어 선생님이 해주신 조언과 비슷하네요.

그분은 제게 아마추어리즘을 설명해주시며 타과로 진학하라고 말하셨어요.

어쨌든 참 씁슬한 글이네요.


로쟈 2010-12-25 20:39   좋아요 0 | URL
굳이 전공이 아니더라도 공부할 수 있는 길은 있으니까요. '직업' 철학자가 되는 건 또 다른 길이고요...

2010-12-25 14: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오늘자 경향신문에 실은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어제 연평도 포격 훈련 때문에 '전쟁'에 관한 책들을 좀 뒤적이다가 '구조적 폭력' 문제로 방향을 틀어서 쓴 것이다. 참고로, 로스키와 피카소의 일화는 지젝의 근간 <폭력>(난장이, 2011)에서 가져온 것이다. 지젝은 폭력을 '주관적' '객관적' '구조적' 폭력으로 구분하는데, '구조적 폭력'이란 말은 'systemic violence'을 옮긴 것이다. '체계적 폭력'이라고 옮기면 '체계의 폭력'이란 의미가 살아나지 않아서 '구조적 폭력'이라고 옮겼다. 구조적 폭력이란 어떤 사회체제(구조)가 유지되기 위해 가해지는 체제(구조) 자체의 폭력, 기초적 폭력을 말한다. 말하자면 게임에서 일어나는 폭력(반칙)이 아니라, 강요되는 게임의 룰 자체의 폭력성을 가리킨다.    

경향신문(10. 12. 21) [문화와 세상]‘구조적 폭력’에 둔감한 한국사회

러시아혁명에 뒤이은 내전이 종식된 후 1922년 소비에트 정부는 주요 반공주의 지식인들을 강제로 추방했다. 철학자와 신학자, 경제학자, 역사학자들이 ‘철학 기선’이란 배를 타고 독일로 쫓겨났다. 그들 가운데는 저명한 철학자 니콜라이 로스키도 포함돼 있었다. 강제 추방되기 전까지 그는 유모와 하인들을 거느린 유복한 부르주아 집안에서 안락한 삶을 향유하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그는 매우 친절한 사람이었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려고도 애썼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가해진 폭력에 대해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생각해서다. 무엇이 문제였다는 말인가. 

하지만 어떠한 ‘주관적’ 폭력도 행사하지 않았을지라도 로스키가 부당한 폭력의 희생자인 것은 아니다. 직접적인 물리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을 구분하면서 철학자 지젝은 로스키가 누리던 안락한 생활이 가능하기 위해 ‘구조적’ 폭력이 지속되어야만 했던 현실에 대해 그가 놀랍도록 무지했다고 꼬집는다. 따뜻한 거실에서 친구들과 함께 문학과 예술에 관해 고상한 담소를 나누기 위해서는 제정러시아라는 억압적 체제가 공고하게 유지돼야 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모든 폭력에 반대한다는 비폭력주의만으론 부족하다. 사회체제의 기초적 차원에 놓인 구조적 폭력을 간과하거나 문제삼지 않는다면 그것은 허울 좋은 구호에 그치고 말 것이다.

무엇이 한국 사회의 구조적 폭력인가. 승자독식의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소리 없는’ 구조적 폭력의 원천이다. 현대자동차 울산 1공장에서는 7300여명의 노동자가 일하고 있는데, 이 중 23%인 1700여명이 사내하청업체 비정규직원이라고 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같은 컨베이어 벨트에서 함께 일하지만, 비정규직의 급여는 정규직의 50~70%에 불과하다. 이러한 차별적 임금에 더하여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해고에 대한 상시적인 불안에 시달려야만 한다. 이런 것이 대다수 비정규직 노동자의 현실이고, 한국 사회에 만연한 구조적 폭력의 실상이다. 그 정도는 상식 아니냐고? 물론이다.

하지만 그것을 ‘상식’으로 용인하는 우리의 시선 자체가 대단히 문제적이며 폭력적이라는 자각이 필요하다. “억울하면 정규직이 되면 될 거 아니냐?”는 시선이야말로 구조적 폭력의 방관자이자 대행자이기 때문이다. 그런 태도는 얼마 전 화제가 된 재벌회장 사촌의 ‘맷값 폭행’에 대해 “억울하면 재벌 사촌이 되면 될 거 아니냐?”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맷값 폭행’에 대해서는 들끓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해선 상대적으로 냉담한 게 우리의 여론이다. 주관적 폭력에는 발끈하지만 구조적 폭력에 대해서는 아직도 둔감하기 때문일까. 이런 둔감함의 표지는 술자리 건배사에서도 읽힌다. ‘이명박을 대통령으로’의 약칭이기도 했다는 ‘이대로’는 현재의 불평등한 사회적 구조가 지속되기를 바라는 기득권자들의 구호다. 군사정권 때부터 내려왔다는 ‘위하여’란 구호는 일종의 ‘충성구호’라고 하지만, 뭔가 ‘대의’를 잃어버린 것처럼 여겨진다. 무엇을 ‘위하여’란 말인가. 다수의 희생과 착취에 근거한 사회체제가 ‘이대로’ 지속될 리는 없다. 그렇다고 막연한 ‘위하여’로 사회가 변화할 것 같지도 않다. 우리에겐 ‘이대로’와 ‘위하여’를 넘어서려는 의지와 결단이 필요하다.  

피카소의 사례가 교훈이 될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 장교가 파리에 있는 피카소의 화실을 찾았다. 나치의 무차별 학살을 고발한 ‘게르니카’를 보고 이 장교는 “당신이 그랬소?”라고 물었다. 피카소는 이렇게 말했다. “아니요, 바로 당신이 그랬소!” 

10. 12. 21.  

P.S. 니콜라이 로스키의 일화는 레슬리 챔벌레인의 <레닌의 사적인 전쟁>(2007)에서 지젝이 인용한 것이다. 피카소 얘기가 나온 김에 검색해봤지만, 허다한 예술가 평전 가운데 피카소 평전은 눈에 띄지 않는다. '결정판'이라고 할 만한 평전이 없진 않을 듯싶은데, 가장 유명한 현대 화가의 평전이 소개되지 않는 것도 좀 기이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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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rror 2010-12-21 0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의 구조적 폭력의 예가 부적절한 듯 합니다. 한국의 구조적 폭력의 예이니까, 다른 나라에는 없고 한국사회에만 특유한 사례가 제시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비정규직은 한국에만 있는 구조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독일에도 비정규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금융위기 당시 다이믈러(메르세데스 벤츠)사는 수천에 이르는 비정규직을 먼저 해고했습니다. 경제위기시 역시 비정규직이 총알받이이기는 마찬가지죠. 비정규직이 한국사회에만 있다고 하는 것은 사실과 다릅니다.
물론 벤츠에서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차이가 없습니다. 아주 바람직한데, 문제는 그들에게 연공서열에 의한 임극차이도 없다는 것입니다. 연공서열에 의한 임금격차는 유럽이나 미국에는 없는 현상입니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은 벌써 연공서열제도에 의해서 한국의 기업에서는 적용되지 않는 것이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격차는 연공서열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요?
한국사회의 비정규직은 해결하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현실문제를 분석하고 판단하셔야 의미있는 발언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국사회의 절대적인 비율의 비정규직은 20인 이하의 중소 기업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현대자동차와 같은 대기업의 비정규직 숫자는 한국사회 전체의 비정규직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매우 작습니다. 그리고 이들 중소기업은 돈을 더 줄 능력이 없죠. 무슨 결단만으로 이 문제가 해결될지 의문이네요.

로쟈 2010-12-21 08:39   좋아요 1 | URL
비정규직 한국사회의 문제라고만 적진 않았습니다. 자본주의 내지는 승자독식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라고 했고요. 한국적 특수성이라면 비정규직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국제노동기구 보고대로 실질임금은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다는 것(선진 27개국중 최고 하락속도라는군요), 그래서 '워킹푸어'가 점차 고착되고 있다는 것 등이겠죠. 결단은 이런 체제를 바꿔야겠다는 '다수'의 결단입니다...

mirror 2010-12-21 08:53   좋아요 0 | URL
실질임금의 하락은 요3년간 일 겁니다. 그 이전 정부에서는 도시근로자 상위 80프로의 실질임금이 지속적으로 증가했고, 하위 20프로도 줄지는 않고 제자리였습니다. 실질소득의 감소는 지금 정부의 문제일 뿐, 한국사회의 구조적 문제라는 증거는 없습니다. 실질임금의 하락은 급격한 물가의 상승, 불경기등의 영향도 많이 받는데, 이런 문제는 정부가 잘했다면 회피할 수 있었던 것들입니다. 환율, 금리 등이 실제로 많은 영향을 미치거든요. 현정부에서 환율이 얼마나 올랐으며, 금리가 어떤 상태였는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내년의 한국은행 인플레이션 가이드라인이 4프로가 넘는데, 이건 정말 황당무계한 수준이죠. 한국사회의 구조적 문제와 정권의 특성을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mirror 2010-12-21 09:05   좋아요 0 | URL
자본주의 전반의 문제이고, 이에 대한 결단을 촉구한 것이라면, 그 대안이 무엇인지 알 수 없군요. 그 프로그램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말씀하셔야 타인들의 동의를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자유주의이 원죄론에 전 동의하지 않습니다.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본질인 세계화와 이에 따른 경쟁의 격화가 오늘날 많은 문제점의 원인이 아닐지. 그리고 이 세계화는 우리가 회피하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북한식으로 우리끼리 굶어죽자가 아니라면.

로쟈 2010-12-21 09:20   좋아요 1 | URL
생각건대, 아마 비정규직도 아니실 테고, 20/80의 80도 아니실 테니 현 체제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실 이유가 없을 것 같습니다...

mirror 2010-12-21 17:10   좋아요 0 | URL
소득분포에서 전 로자님 밑에 있습니다. 그리고 독해력좀 기르시기 바랍니다.

빵가게재습격 2010-12-21 22:30   좋아요 0 | URL
흠, 현 정부의 잘못과 구조적 문제를 혼동하지 말라. 이 글은 혼동하고 있다. 그러므로 설득력이 없다.는 이야기신가요. 그런데 이런 질문을 던져보고 싶군요. 경제에 있어 '구조'와 '현상'이 그리 명백하게 구분됩니까? 또 '현 정부의 실책'과 '구조적 문제'를 혼동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이게 그리 분명합니까? 만약 현 정부의 실책이 '구조적'이고 전 정부가 유난히 '잘 꾸려간' 케이스라면, 어떻게 반박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구조적 폭력에 무심하다. 좀 다른 걸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라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대안'까지 명백하게 제시해야 한다면 마르크스나 레닌, 케인즈와 히틀러가 아니고는 입도 뻥긋 못하겠군요.

로쟈 2010-12-21 08:54   좋아요 1 | URL
워킹푸어 문제는 용어 자체에서 알 수 있지만 미국과 일본 등지에서 먼저 나온 것입니다. 그렇담 최소한 장하준 교수의 말대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가 문제죠. '지금 정부'의 문제로 더 악화되는 문제가 있다면 그 또한 바뀌어야 되겠고요. 제 방점은 '한국사회'가 아니라 '구조적 문제(폭력)'에 놓여 있습니다. 제가 문제삼은 한국사회는 그런 문제에 대해 '둔감'하단 것이구요...

2010-12-21 1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21 1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21 13: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0-12-21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2010-12-21 15: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igarion 2010-12-21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조적인 폭력에 둔감한 한국사회에서 피카소의 사례가 도대체 어떤 점에서 교훈이 된다는 겁니까? 나치의 무차별적인 학살이 한국사회의 구조적 폭력과 동일선 상에서 비유 가능한 현상이라고 생각하시는지? 피카소가 게르니카를 그린 덕분에 나치가 패망했다고 생각하시는지? 그렇다면, 우리도 용산참사 현장이나 4대강 개발로 황폐하게 변해버린 풍경들을 그려대면 '구조적 문제(폭력)'가 해결된다고 생각하시는 건지?

2010-12-21 20: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marxbook 2010-12-22 12: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mirror/ 한국의 임금소득자(일반 노동자)의 삶의 질이 어떻게 변해 왔는지 가장 잘 보여 주는 지표는 노동소득분배율(=피용자보수/GDP)입니다. OECD 자료를 보면 아실 수 있지만 한국의 노동소득분배율은 1996년까지 꾸준히 성장하다가 1997년 IMF 사태 이후 급감해 대체로 하락 추세입니다. IMF 이후로 기업들이 구조조정과 임금 압박, 노동조건 후퇴를 강요했기 때문인데 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으로 이어지는 정권의 변화는 이 전반적 추세에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mirror 2010-12-22 17:00   좋아요 0 | URL
노동소득분배율이 노동자들의 삶의 질이 나빠졌다는 증거가 되지는 못합니다. 다만 분배 구조가 악화되었다는 증거가 될 뿐이죠. 분배 구조의 악화, 즉 상위 자본계층이 더 많은 비율의 소득을 가져갔다고 해서, 반드시 하위 노동계층의 실질 소득이 감소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해 못하신다면 더 설명드리겠습니다.
양극화 담론도 한국에서만 지나치게 부풀려져 있습니다. 양극화란 말을 한국 지식인처럼 자주 사용하는 나라도 없습니다. 양극화되었으나, 하위계층의 실질소득이 증가했다면, 그것이 부정적이기만 할까요? 양극화가 감소하는 것이 더 바람직지만, 하위계층의 실질소득이 증가하는 것만으로도, 긍정적입니다.
양극화란 노무현 정부 당시 좌우가 정부를 공격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허구적 개념일 뿐이죠. 중산층의 실질 소득이 증가하는데도 불구하고, 한국 사람 특유의 시기심을 자극하는 정치적 구호 아니었나요?

marxbook 2010-12-23 11:20   좋아요 0 | URL
노동소득분배율은 양극화 정도를 나타내고 삶의 질을 나타내는 지표로는 실질소득이 더 유용하다는 지적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양극화 담론이 지나치게 부풀려졌다거나 실질소득이 어쨌든 증가했으니 괜찮다는 얘기는 좀 이해가 안 갑니다. 심각한 경제 위기가 닥치거나(IMF 직후와 2008년 직후의 한국) 정부가 급격한 구조조정을 단행한 경우(1980~2000년 미국과 NAFTA 발효 직후 멕시코)가 아니라면, 웬만한 산업국가에서 실질소득은 대체로 상승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사실 삶의 질을 따질 때는 실질소득 상승률을 더 많이 참고하죠. 노무현 정부 때도 실질임금 상승률은 꽤 저조했습니다).
노무현 정부 당시 벌어진 양극화가 "허구적 개념"이라거나 "한국 사람 특유의 시기심을 자극하는 정치적 구호"였다는 얘기에는 어리둥절할 따름입니다. 심지어 노무현 대통령 자신도 회고록에서 자신의 최고 실책이 양극화와 노동시장 유연화였다고 인정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현 정부를 아주 싫어하지만 전 정부의 한계와 잘못도 직시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길을 찾기 어렵다는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