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그렇겠지만 마무리짓지 못한 일들 때문에(그러니까 마무리지으려는 일들 때문에) 연말이 정신없이 지나가고 있는데, 어느덧 마지막 날이다. 며칠 전에 받은 이번주 시사IN에는 별책부록이 딸려왔는데, 시사인IN과 알라딘이 공동으로 선정한 '올해의 책' 특집이다. 인문/역사쪽 추천위원을 맡고 있어서 추천한 책은 물론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김영사, 2010)다. 사회적 파장까지 불러온 화제작이라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기에. 나로선 <시크릿>이 있던 자리에 <정의란 무엇인가>가 놓여 있다는 것과 시민의 역량을 강화하는 데 기여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 책이 갖는 '의의'라고 생각한다. 그런 걸 짧게 몇 마디 적었다. 생각해보니 마감에 맞추느라 신촌의 한 PC방에서 급하게 쓴 글이다.   

시사IN(172호) [2010 행복한 책꽂이] 정의를 이해하는 세 가지 방식

'하버드대 20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란 소개 문구를 내걸긴 했지만, 이만한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키리라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2010년 최고의 베스트셀러이자 인문철학서로는 기록적으로 60만 부 이상이 판매된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김영사)가 ‘올해의 책’으로 꼽히는 이유다. 최근 몇 년간 교보문고의 종합베스트셀러 1위도서가 <마시멜로 이야기>(2006), <시크릿>(2007-2008), <엄마를 부탁해>(2009) 등이었던 걸 고려하면 결코 가볍지 않은 인문서에 대한 독자들의 호응은 이례적이다. 덕분에 ‘정의’는 올해의 화두가 되었다.  

가령 새해 예산안을 ‘날치기’로 강행처리하고서 여당 원내대표가 “대다수 국민들이 예산처리를 바랐고 이것이 국가를 위한 정의”라고 말한 것도 <정의란 무엇인가>가 유발한 ‘정의 담론’의 효과 아닌가. 비록 ‘국가를 위한 정의’와 ‘권력을 위한 불의’를 혼동한 감은 있지만 그의 발언에서 ‘정의’를 명분으로 내세워야 한다는 ‘사회적 압력’은 읽을 수 있다. 아무리 정의와 무관한 일을 벌이더라도 명분은 ‘정의’여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형성된다면 절반은 성공이라 할 만하다. 그 나머지 절반은 이름과 실제가 부합하도록 정의에 이름값을 돌려주는 것일 터이다.  

일찍이 파스칼은 “사람들은 정당한 것을 강한 것으로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강한 것을 정당한 것으로 만들었다.”고 꼬집었다. 그가 보기에 ‘힘없는 정의’는 무기력하며 ‘정의 없는 힘’은 전제적이다. 따라서 정의와 힘을 결합해야만 한다. 정당한 것, 곧 정의가 강해지지 않으면 강한 것이 정당함을 참칭한다. 정의는 어떻게 강해질 수 있는가. 정의로운 사회를 희원하는 사람들의 역량을 강화하는 일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정의를 다룬 뛰어난 철학서를 소개하고, 철학적 문제를 제기하는 오늘날의 법적․정치적 논쟁을 다루는 수업”으로 요긴하다. 정치철학과 도덕철학의 주요 문제를 어떻게 사고하고 또 논쟁할 수 있는지 시범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저자는 정의론의 전체 구도를 ‘정의를 이해하는 세 가지 방식’으로 이해한다. 각각은 행복 극대화, 자유 존중, 그리고 미덕 추구가 정의의 핵심이라고 본다.  

공리주의자들에게 옳은 행위란 공리를 극대화하는 행위이다. 도덕적 판단에 계산가능성을 도입함으로써 공리주의는 도덕철학보다는 도덕과학을 자임한다. 하지만 이 경우에 모든 가치를 비용․편익 분석으로 환원할 수 있는가란 의문과 함께 개인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문제점이 제기된다. 한편 자유주의 정의론을 대표하는 칸트에게서 도덕은 정언명령에 따른 자유로운 행동만을 가리킨다. 이 경우엔 무엇이 선이고 좋은 삶인지 판단하려고 하지 않기에 ‘중립을 지키는 국가’와 ‘자유로운 선택권을 지닌 자아’를 지지한다. 

하지만 샌델이 보기에 선택의 자유만 확보하는 것으로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 수 없다. 좋은 삶의 의미를 함께 고민하는 노력이 거기에 덧붙여져야 하며, 그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목적론적 정의론의 요체다. 그런 관점에서 저자는 도덕을 회피하는 정치보다 도덕에 개입하는 정치를 옹호하며 바람직하다고 본다. 물론 이런 결론보다 중요한 것은 정의란 무엇인가를 탐색하는 질문의 여정이며 <정의란 무엇인가>는 그 길잡이로서 제격이다.  

10. 12. 31.  

P.S. 개인적으로 ‘정의’ 못지않게 중요한, 2010년의 키워드는 ‘그들’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적대를 무화하는 ‘우리’라는 이데올로기적 수사에 견주어 자본주의적 적대를 분명하게 직시하도록 하는 ‘그들’이란 기표의 파괴력은 과소평가할 수 없다. 우리의 ‘주적’은 ‘북한’이 아니라 ‘그들’이라는 사실을 이보다 더 선명하게 드러내준 책이 있던가? 바로 그런 ‘계몽적인’ 이유에서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부키, 2010) 또한 ‘올해의 책’에 값한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와 함께 <정의란 무엇인가>, 이 두 권의 인문사회과학서가 합심하여, 혹은 ‘하버드’와 ‘케임브리지’가 합작하여 우리에게 말해주는 진실은 무엇인가? ‘그들이 말하지 않는 정의!’ 그게 내겐 2010년을 정리해주는 문구로 보인다. 

한편 장하준이 ‘더 나은 자본주의’를 말한다면, 슬라보예 지젝은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창비, 2010)에서 그러한 자본주의가 결국엔 ‘사회주의’(혹은 자유주의적 공산주의)로 귀결된다고 보고, 그것을 공산주의와 대비시킨다.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는 아직 대중화되지 않은, 그래서 도래하지 않은 ‘올해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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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괴즐 2010-12-31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권의 책은 저도 의미심장하게 잘봤습니다. 지젝의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는 아직 못읽어봤는데 챙겨봐야겠네요. 장정일 씨가 <정의...>의 비판적 서평 '<정의란 무엇인가>에 반대한다.'를 프레시안에 썼는데 개인적으로는 꽤나 탄복했습니다. 김용철 변호사도 <굿바이 삼성>의 한 챕터에서 <정의...>를 다소 비판적인 맥락에서 지적했었지요. 안 읽어보셨으면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로쟈 2011-01-01 09:31   좋아요 0 | URL
네, 서평은 읽어봤습니다. 한데 저에겐 대중이 <시크릿>에 목매달던 시절이 더 '처참'했어요...

헌내 2010-12-31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사인과 알라딘이 선정한 2010년 관심저자에 선정되셨더군요...^^
그리고 2010년 알라딘 서재의 달인까지...ㅋ
축하드릴 일이 많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로쟈 2011-01-01 09:32   좋아요 0 | URL
서재의 달인은 '꾸준'하면 누구라도 할 수 있습니다.^^

jade 2010-12-31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의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는 지젝의 명성에 비해 내용이 너무 실망스러워 번역의 문제인지 아니면 지젝의 술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인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로쟈 2011-01-01 09:35   좋아요 0 | URL
저는 실망해본 적이 없어서요.^^ 언제나 자극을 주고 분발하게 합니다...

목동 2010-12-31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돌이켜 보면 아쉽고도 두려웠던 2010년이었습니다. 그 자리에 '그들'이 있고 두려워 했던 '우리'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들'이 될까 두려워 할때 내속에 '적'은 그대로였습니다. '로쟈의 저공비행'은 혼미해진 저를 창공을 향해 날게 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로쟈 2011-01-01 09:37   좋아요 0 | URL
'최악'의 시절은 가는 듯싶은데, 아직 '발악'이 남은 것 같아 조심스럽긴 합니다...

자꾸때리다 2010-12-31 2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쁜 사마리아인들>을 장하준 교수 싸인을 받아서 갖고 있는데
이제 <23가지>도 싸인받아서 한 권 갖게 됐습니다.ㅋㅋㅋ
근데 과연 장하준 교수 이론이 얼마나 영속성이 있을지는 의문...
케인즈가 과연 부활하는데 성공할지...

로쟈 2011-01-01 09:38   좋아요 0 | URL
그걸 염려할 필요는 없을 거 같은데요.^^

Daniel 2011-01-01 0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 작년 한 해 감사했습니다.
올 한해도 많이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로쟈 2011-01-01 09:3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2011-01-01 05: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01 09: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park6 2011-01-04 0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정의란 무엇인가'를 사놓고 아직 보지 않았어요.

대신 오늘 ebs에서 샌델의 강의를 보았습니다.

제가 기대했던 강의는 아니더군요.

해서 시큰둥하게 보다가, 한 장면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어요.

샌델 교수가 학생에게 배중율(principle of middle)을 주장하더군요.

장면을 묘사하자면 다음과 같아요.

한 학생이 '나는 다수의 생명을 위해 소수의 생명을 희생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라는 식으로 말을 하면서 '하지만 벤담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샌델교수는 '당신의 주장은 벤담이 틀렸다는 주장이다'라는 식으로 말하더군요.

샌델은 형식논리의 3대공리를 전제하고 논증을 전개하는 걸까요?


로쟈 2011-01-04 19:55   좋아요 0 | URL
네, 동영상 강의를 보진 않았지만, 기본적으론 그런 것 같네요. 사실 학생의 말은 벤담의 주장과는 배치되고요...
 
세계문학전집 번역의 의의와 문제점

다수의 세계문학전집이 백가쟁명에 접어든 시점에 걸맞게 세계문학론을 전체적으로 조감한 책이 출간됐다. 창비담론총서의 네번째 책으로 나온 <세계문학론>(창비, 2010)이 그것이다. 부제는 '지구화시대 문학의 쟁점들'. 개인적으론 <창작과비평>(2007년 겨울호)에 실었던 글도 재수록돼 반갑다. 소개기사를 옮겨놓는다. 참고로, <안과 밖>(2010년 하반기)도 세계문학론을 특집으로 다루고 있다.  

경향신문(10. 12. 28) '민족문학 속 보편성’ 세계문학을 논하다 

1970~90년대 ‘민족문학론’ ‘리얼리즘론’ ‘분단체제론’ 등 한국 사회의 담론 지형에 큰 영향을 미친 이론들을 생산해온 창비가 창비담론총서의 새 단행본으로 <세계문학론:지구화시대 문학의 쟁점들>을 펴냈다. 지난해 출간된 <이중과제론> <87년 체제론> <신자유주의 대안론>에 이은 네 번째 총서다.  

세계문학전집 출간이 붐을 이루고 베스트셀러 목록에 무라카미 하루키, 파울로 코엘료, 베르나르 베르베르 같은 외국 작가의 작품들이 줄지어 이름을 올리고 있는 현재 시점에서 창비의 ‘세계문학’에 대한 성찰은 시의적절해 보인다. 문학평론가 백낙청·유희석, 브라질의 문학이론가 호베르트 슈바르스의 글 등 모두 13편이 실렸다.

책에서 논하는 세계문학은 세계문학전집류가 취해온 서구 중심의 주요 고전을 모아 놓는 방식과도, ‘해리 포터’ 시리즈 같은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된 대중문학과도 거리를 둔다. <세계문학론>이 근거로 삼는 개념은 19세기 초 괴테가 주창한 ‘세계문학’(Weltliteratur)이다. 괴테는 민족문학의 편향성과 편협성을 경계하며 개별 국가의 민족문학 속에서 보편적인 인간성을 추구한 문학을 ‘세계문학’으로 일컬었다.

그렇다면 한국문학에 민족문학으로서의 특수성과 함께 보편성을 가질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 백낙청은 과거 민족문학론운동에서 돌파구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한반도의 분단체제 극복이라는 과제와 세계체제 재편을 연결지으며, 그런 의미에서 분단체제와 대결하는 민족문학이 세계문학의 진전에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다고 한다. 유희석씨는 이 논의를 한걸음 더 발전시킨다. 그는 “세계체제의 반주변부와 주변부가 하나의 체제로 작동하는 한반도라는 모호하고도 중층적인 현실 자체가 획일화·기계화되는 삶에 저항할 의지가 있는 작가들에게 상상력을 발휘할 최적의 공간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밖에도 문학평론가 정홍수는 우리 민족문학이 서구문학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상상력과 가치를 지닌 문학으로 자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씨는 그런 가능성을 가진 작품으로 황석영의 <바리데기>를 들어 논의를 전개하고, 한기욱은 코맥 매카시의 <로드>와 주노 디아스의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을 예로 들어 미국 내의 소수자 문학이 가져온 의미를 짚어본다. 또한 윤지관 전 한국문학번역원장, ‘로쟈’로 불리는 서평가 이현우씨 등이 현장에서 경험한 문제의식을 풀어낸다.(이영경 기자) 

10.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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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10-12-29 0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말연시 잘 보내세요. 한해를 마무리하기 전에 로쟈님 글이 실린 책이 또 나왔나 보네요. 제목도 그럴싸해 보이니 한번 사볼게요^^

로쟈 2010-12-30 07:54   좋아요 0 | URL
네, 감사.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백야

'라캉'으로 검색을 하니 제일 먼저 뜨는 기사가 이번주에 개봉하는 영화 <카페 느와르>에 대한 소개평이다. 안 그래도 뒤늦은 개봉 소식을 접하고 한번 보고 싶던 차였다(지난주에 언론시사회가 있었고, 오늘은 VIP시사회가 열렸다고 한다). 이 참에 스크랩해놓는다.      

무비스트(10. 12. 27) 영화를 통해 완성된 책의 리얼리즘

영화평론가 정성일이 감독으로 데뷔를 했다? 아마도 많은 평론가들이 가장 하고 싶어 하는 일이 영화를 만드는 일일 테지만, 동시에 가장 부담스러운 일도 영화를 만드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과거 프랑소와 트뤼포 감독은 이런 얘기를 했다. 영화를 사랑하는 첫 번째 방법은 같은 영화를 두 번 보는 것이며, 두 번째 방법은 영화를 평하는 것이며, 세 번째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라고. 아마도 평론가 정성일은 그런 이유로 감독이 되었고, <카페 느와르>를 만들었을 것이다.

중학교 음악교사인 영수(신하균)는 같은 학교 선생인 미연(김혜나)과 연인이다. 하지만 학부모인 또 다른 미연(문정희)과 첫눈에 반해 사랑을 시작한다. 둘의 불륜이 계속되던 어느 날, 영수는 학부모 미연으로부터 이별을 통보받는다. 이별을 받아들일 수 없는 영수는 학부모 미연의 남편을 죽이려고도 하지만 결국 미연을 놓아준다. 실의에 빠져 청계천을 걷던 영수는 우연힌 선화(정유미)를 구해주고 선화의 사랑 이야기를 듣는다. 하지만 선화로부터 자신을 사랑하지 말라는 당부를 받는다. 선화와 선화의 옛 사랑을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하게 된 영수는 선물을 배달하는 퀵 서비스 여인 은하(요조-신수진)로부터 자신에게 배달된 선물을 전해 받는다.

<카페 느와르>의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연인이 있는 남자가 불륜을 저지르고, 그로 인해 두 사람을 모두 잃고 외로워한다는 내용이다. 이렇게 정리를 하면 영화는 TV 통속극처럼 간단해 진다. 하지만 <카페 느와르>는 3시간 18분에 이르는 긴 러닝타임을 지니고 있다. 짐작했겠지만 영화는 단순히 내용을 전달하는 데에만 급급하지 않는다. 자신의 소원을 들어줄 한 명의 여자를 찾아 헤매는 영수를 중심으로 익숙하지만 낯선, 서울이라는 공간을 끊임없이 돌아다닌다. 또한 대사는 구어체가 아닌 문어체로 이루어져 있고, 지나간 사랑 이야기는 엄청나게 긴 대사량으로 처리되기도 한다. 분명 <카페 느와르>는 지금까지 우리가 봐 온 영화들과는 스타일이나 의미 전달 방법에서 다른 길을 택했다. 굉장히 낯설지만 그렇기 때문에 흥미롭다.  



우선 이 영화가 선택한 가장 핵심적인 정체성은 책이다. 영화의 중심 이야기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백야’와 관련을 맺고 있는데, 인물들이 주고받는 대사들이 모두 이 책들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게다가 대화법 역시 책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문어체로 이루어져 있다. 정성일 감독은 ‘책의 리얼리즘’이라는 말로 이들의 ‘사실성’에 대해 얘기했는데, 영화를 보는 내내 영화가 완벽히 책의 모습을 하고 있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 영화의 접근법에는 약간의 의문도 있다. 과연 책을 읽지 않은 이들에게 이들의 행위는 어떻게 ‘읽힐’ 것인가? 마치 영화를 볼 수 있는 자격 조건을 제시한 듯한 뉘앙스도 배제할 수 없다.

이 외에도 <카페 느와르>는 다양한 영화들의 인용으로도 관심이 간다. 아예 대놓고 장면과 대사를 따온 <극장전>부터 <괴물> <올드보이> <살인의 추억> <행복> 등의 우리 영화가 여러 방식으로 인용된다. 또한 브레히트, 체호프, 라캉 등은 물론 고다르, 오즈 야스지로 등의 고전 영화감독들의 스타일도 묻어난다. 저 장면은 어느 영화의 어떤 장면! 이라고 똑 부러지게 밝히지 못한다 하더라도 영화를 즐겨온 이들에게 <카페 느와르>의 장면 장면들은 남다른 재미를 준다. 게다가 그 장면들이 서울이라는 지독하게 낯익은 공간에서 느껴지는 특별함이라는 점에서 생각할 바를 준다.

정성일 감독은 영화의 길이에 대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인용하며 “죽음을 늦추는 시간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백야’를 가져왔고, 덕분에 베르테르는 죽음을 조금 더 연기했다. 영화가 6시간, 8시간이었다면 그 죽음은 조금 더 연기됐을 거다. 하지만 사랑과 죽음이라는 근본적인 설정은, 설정 그 자체로는 한계가 보이기도 한다. 하여 정성일 감독은 이러한 태생적인 설정을 현실에 대입하기도 한다. 우리 시대가 우리에게 가져온 죽은 시간들, 변화된 모습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됐던 목숨을 연명하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에서 현실은 또 다른 ‘극사실주의’를 드러낸다. 책의 리얼리즘은 영화를 관통하며 삶의 리얼리즘으로 변모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 감독으로서의 정성일이 얼마나 드러났을까 하는 의구심도 든다. 영화에 드러나 많은 가치와 의도가 선배 영화인들, 고전 감독들이 만들어놓은 토대에서 그들을 인용하거나 거부하거나 비웃기도 한다. 영화를 향한 순수한 예술적 접근이 한 영화광으로 하여금 영화를 만들게 했고, 그것이 <카페 느와르>라는 결과물을 낳았다면, 정성일은 감독으로서 자신의 모습을 아직 드러내지 않은 셈이다. 그의 말대로 두 번째 영화가 만들어졌을 때, 감독 정성일을 만나게 되지 않을까 싶다.(김도형기자)  

10. 12. 27.   

P.S. 지난주에 읽은 감독 인터뷰기사도 옮겨놓는다. '세계문학전집'을 차례로 영화화하고 싶으며 다음 영화로 <마담 보바리>를 지목한 것이 인상적이다(의외로 '소박한' 야심 아닌가?). 전집이라! 그는 몇 편까지 찍어볼 생각인지 궁금하다...

 

경향신문(10. 12. 23) “수많은 예술 도둑질한 영화, 이제 문학과 우정 나눠야죠”

한국에서 누구보다 많이 영화를 사랑하고 보고 글을 쓴 평론가 정성일. 그가 지천명에 접어들어 내놓은 장편 데뷔작 <카페 느와르>는 놀랍게도 책을 위한 헌사다. 이 영화는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야>를 원작으로 한다. 영화 도입부엔 ‘세계소년소녀 교양문학전집’이라는 부제가 나오고, 등장 인물들은 해외문학 번역서에서 뽑아낸 듯한 문어체 대사를 읊는다.

정성일 감독은 “책의 문자들이 배우들의 육신을 통과해서 어떻게 피와 살을 얻고 말하여지는지, 어떤 방식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는지 보고 듣고 싶어졌다”고 했다. 그는 “책을 찍고 싶었다”며 이 영화가 ‘책의 리얼리즘’을 구현한다고 말했다.

“영화는 종합예술입니다. 그 이유는 영화가 오랫동안 수많은 예술들을 도둑질했기 때문이지요. 이제 도둑질한 재산을 두고 우정을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카페 느와르>는 문학에 대한 영화의 우정입니다.” 

 

<카페 느와르>는 초등학교 음악 교사인 영수(신하균)의 이야기다. 그는 같은 학교 교사 미연(김혜나)과 연인이지만, 같은 이름의 학부모 미연(문정희)과 불륜에 빠진다. 결국 학부모 미연은 이별을 선언하고, 괴로워하던 영수는 우연히 선화(정유미)를 만나 호감을 느낀다. 전반부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후반부는 <백야>에 기초했다. 상영시간은 3시간18분이다.

그가 오랫동안 영화를 보고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부딪힌 가장 큰 문제는 “(영화의) 이야기를 믿을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 그는 올해 흥행한 몇 편의 영화를 예로 들며 “그 얘기가 말이 되느냐”고 되물었다. 결국 믿을 만한 얘기가 어디있는지 고민한 끝에 100년 이상 버티면서 읽히고 또 읽힌 이야기는 믿을 만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렇다면 왜 하필 괴테와 도스토예프스키인가. 그는 길게 설명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처음 읽은 건 12살 때였습니다. 아무도 제게 그 책이 권총 자살로 끝난다는 사실을 얘기해주지 않았습니다. 어린 나이에 너무 충격이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폭력영화를 본 독자에겐 놀랍지 않겠지만, 제가 그 책을 읽은 건 60년대였다는 사실을 환기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서 무수한 죽음을 보았습니다. 80~90년대를 거치면서 한국 사회에선 죽어도 너무 많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살아남았고요. 저는 어떤 사람을 ‘열사’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저항감이 있습니다. 죽음을 기려서는 안됩니다. ‘죽으면 안돼’라고 외치는 것이 우리가 해야할 일입니다.”

그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영화로 옮기기로 결심했지만 베르테르의 죽음만은 막고 싶었다. 괴테를 어떻게 막을 것인가. 도스토예프스키라면 막지는 못할망정 연기시킬 수는 있지 않을까. 영화가 늘어난 것은 그 때문이다. 베르테르의 자살을 최대한 미루고 싶었다.

 

<카페 느와르>에는 책만 나오는 건 아니다. <극장전>, <괴물>, <올드보이> 등 동시대 한국영화, <빨간 풍선>, <주말> 등 해외 고전영화가 인용된다. 정 감독은 최근 자신이 낸 책 제목이기도 한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라고 그 이유를 들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요. <올드보이>의 최민식이 망치로 내려치다가 너무 힘들어 한강에 놀러나와요. 그러면 <괴물>의 송강호가 있는 매점에 오는 거예요. 아이 잃은 <밀양>의 전도연과 아이를 지키려는 <마더>의 김혜자가 나란히 앉는 거예요. 모든 영화들이 모여서 만드는 하나의 세상을 비유하고 싶었습니다. 이 영화에서 출구를 열고 나가면 다른 영화의 입구가 있는 식으로 신(scene)을 생각하면 어떻겠느냐는 말이죠.”

영화엔 동시대 한국 사회를 직접적으로 환기시키는 장치들이 많다. 영화의 프롤로그에서 한 소녀는 미국의 대표적인 햄버거 가게에 앉아 “하나님 아버지 부디 저를 보살펴 주세요”라고 말한 뒤 햄버거를 먹는다. 정 감독은 이를 두고 자살을 시도하는 장면이라고 말했다. 햄버거 안에 든 미국산 쇠고기, 이를 통한 광우병을 은유한 것이다.

“이 장면을 보고 ‘햄버거를 먹고 죽는다는 게 말이 되어요?’라고 묻는 거예요. 전 당황했어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촛불시위에 나왔는데, 그때 나왔던 한국 사람들조차 다 잊은 것인가. 2년 지났는데 잊었다면 5년 뒤엔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쓸쓸하고 스산해졌어요.”

평론가로서 엄청난 영화를 보고 숱한 영화 촬영장을 누볐지만, 장편 연출자로서 나선 건 처음이다. 그는 영화를 찍으면서 “영화의 성질에 대해서, 영화가 어떤 방식으로 세계를 긍정하고 세계는 어떤 방식으로 영화를 부정하는가를 배웠다”고 말했다. 아울러 100% 동시녹음으로 영화를 찍으면서 서울이 이토록 소음과 공사가 많은 곳인지 처음 알았다고도 했다. 사전에 장소를 섭외한 뒤 막상 촬영하러 가면 10곳 중 4곳은 공사중이었다. 이것이 세계가 영화에 주는 부정성이다. 영화는 그 부정성을 도리없이 받아들여야 했다. 

그는 언론시사회 내내 극장 뒤편에 선 채 영화를 봤다. 그는 “느껴보고 싶었다. 객석에 앉은 사람들이 내가 만든 영화, 내가 생각한 이야기, 만들어낸 인물을 어떻게 느끼는지. 그 즉각적인 한숨소리와 웃음소리, 호의와 저항감, 휴대폰의 불빛까지. 그걸 객석에 앉아 느낄 수는 없었다. 극장 안의 풍향계가 되고 싶었다”고 말했다.

<카페 느와르>에 대해 스스로 평을 하면 어떨까. 그는 “별점을 매기면 다섯 개, 20자평을 쓴다면 ‘휘몰아치는 감동, 이토록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영화가 있을까’라고 쓸 것”이라며 “지구상 모든 감독들이 그렇듯 자기 영화에 대해선 눈이 먼다”고 말했다.

“자기 영화는 무조건 긍정해야죠. 그건 스태프와 배우에 대한 예의입니다. 자기가 의미있는 작업을 했다는 태도가 없으면 누가 그 영화를 사랑해주겠습니까.”

그는 기회가 된다면 세계문학전집을 차례로 영화화하고 싶다고 했다. 다음에 찍어보고 싶은 작품은 <보바리 부인>이다. <카페 느와르>는 30일 개봉한다.(백승찬기자)  

감독의 말  

영화와 인생 중에서 무엇이 더 중요합니까? 프랑소와 트뤼포가 대답했습니다. 당연히 영화가 더 중요하지요.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그런 다음 마음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나는 결국 사라질 것이고 영화는 여기 남을 것입니다.  

영화를 만들 결심을 하면서 작은 계획을 하나 세웠습니다. 그건 ‘세계소년소녀 교양문학전집’이라는 이름 아래 연작을 만드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꺼내든 책은 내가 14살 때 처음 읽은 요한 볼프강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었습니다. 이 책은 괴테가 25살이 되던 해 1774년에 썼습니다. 이 영화의 첫 번째 제목은 그 책에서 가져온 <슬픔(Die Leiden )>이었습니다. 그 책을 처음 읽었을 때 아무도 내게 그 책이 그렇게 끝난다는 이야기를 해 준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무 방어도 하지 못한 채 그 책의 마지막 대목에서 베르테르가 자기 머리에 권총 자살을 하는 대목을 읽었습니다. 구식 권총은 아마도 단번에 베르테르의 생명을 빼앗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대목은 이렇게 쓰여져 있습니다.  

“.....의사가 도착했을 때 불쌍한 베르테르는 이미 회복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방바닥에 쓰러진 채 맥은 아직도 뛰고 있었으나, 그의 손발은 모두 마비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오른쪽 눈 위에서 머리를 관통하여 쏘아서 뇌수가 밖으로 터져 나와 있었습니다. 별 효과가 없는 줄 알면서도 팔의 정맥을 째고 방혈을 시켰습니다. 피가 흘러 나왔습니다. 숨은 간신히나마 아직 쉬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아팠을까요, 젊은 베르테르는. 나는 이 책을 읽은 다음 나이를 먹으면서 많은 죽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의 운명이 다하는 것은 슬프기는 하지만 놀라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자기 스스로 자기의 숨을 거두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나는 1980년대를 살아남았고 그런 다음에도 한참을 더 살고 있습니다. 간절하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제발 그러면 안 됩니다. 그러니 그저 거기서 멈춰 주세요. 나의 힘으로 괴테의 소설 속의 죽음을 멈출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곁에 한 편의 소설을 더 가져다 놓기로 하였습니다. 오로지 그걸 미루기 위해서입니다. 그때 내가 서가에서 뽑아든 건 표드르 미하일로비치 도스또예프스끼가 그의 나이 27살인 1848년에 쓴 <백야 혹은 감상적 소설, 어느 몽상가의 회상 중에서>입니다.  

그 해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고,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을 썼습니다. 나는 할 수 있는 한 그 죽음을 미루고 싶었습니다. 그저 나흘 밤이라도 좋으니 그걸 미루고 싶었습니다. 거인 괴테가 베르테르의 관자놀이에 총을 쏘았을 때 그 죽음을 감히 내 힘으로는 미룰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도스또예프스끼라면, 네 그렇습니다, 도스또예프스끼라면 그렇게 잠시라도 미룰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그 죽음을 미루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영화의 상영시간이 긴 것도 오로지 내 마음 속의 간절한 호소의 일부입니다. 차라리 나는 그것을 영화가 내게 요구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나는 영화가(*영화를?) 끝내지 않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죽음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1944년에 쓴 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입니다.  

2010년 11월 오늘 첫 눈이 올지도 모른다는 뉴스를 들으면서 정성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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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28 0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28 08: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자꾸때리다 2010-12-28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제 눈엔 정유미 누나 밖에 안 보여요. 사랑해요 유미 눈화 ㅜㅜ ♥

로쟈 2010-12-30 07:56   좋아요 0 | URL
정유미론을 하나 쓰시죠.^^

푸른바다 2010-12-28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성일씨의 특성을 볼때 왠지 의식/지식 과잉의 헐리우드 키드 같은 영화가 아닐까 하는 선입견이 드네요.^^ 물론 선입견이길 바라고 저도 기회가 되면 영화를 보고 싶습니다.^^

로쟈 2010-12-30 07:55   좋아요 0 | URL
인터뷰들이 나오고 있는데, 역시나 열정적인 달변입니다.^^

귀족온달 2011-02-05 0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랫동안 정성일씨의 영화평을 읽어왔는데요, 찬찬히 읽다보면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준다고 봅니다. 뛰어난 작곡가가 절창이 아니듯 뛰어난 영화평론가가 좋은 영화감독이 될 수는 없겠죠. 영화는 어떻게 이미지화 하는가가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성실의 덕목만으로는 안되는 감각과 재능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정성일씨 영화를 보면서 느낀건 힘을 빼야 한다는 거였습니다. 노래를 부를때도 목에 힘을 주지않는단계를 가야 제대로 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너무 많은 생각은 영화를 만들때 좋은 덕목은 아닌듯 합니다. 예전에 이문열씨가 그런말을 하더군요. 소설의 구조와 상징과 모든 이론적인 걸 생각하고 있으면 한편도 쓸수가 없다고요...영화창작도 역시 비슷하지 않을까요...

로쟈 2011-02-06 12:11   좋아요 0 | URL
네, 영화는 저도 실망스러웠습니다. 기대를 너무 많인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아는 게 병'일 수도 있겠단 생각도 들었어요. 혹은 그가 '현실'을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모르는 게 아닌가도 싶었어요. '세계명작'이란 외피를 고집하는 것도 미심쩍은 부분입니다. 그는 자신의 시나리오를 쓸 자신이 없는 건가 싶어서요...

예브 2011-03-12 0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스키대로를 떠올리며 읽었던 백야를 청계천에서 다시 눈으로 보는 재미도 있던걸요..^^
 

자크 데리다의 출세작이자 대표작 <그라마톨로지>(민음사, 2010)의 개정 번역판이 출간됐다. 첫 번역판을 출간한 김성도 교수의 개역본이다. 원래 가볍지 않은 책이지만 상당한 분량의 역주가 추가되어 분량이 무려 967쪽에 이른다. 일단 '편하게' 들고 다니면서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닌 것(내가 갖고 있는 영어본이나 러시아어본은 그래도 가방에 넣고 다닐 수는 있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다시 나온 것인 만큼 한국어본으로서 제몫을 해주길 기대한다. 참고로, 푸코의 <말과 사물>, 들뢰즈의 <안티 오이디푸스> 등도 재번역되고 있으니 내년쯤엔 출간되지 않을까 싶다. 바야흐로 프랑스의 '스타' 철학자들이 귀환을 준비하고 있는 중이다. '그라마톨로지'를 검색해보던 중 오래전 기사가 눈에 띄기에 스크랩해놓는다.

  

한국일보(03. 10. 11)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

「그라마톨로지」라는 낱말이 1960년대 처음 등장했을 때는 「문자학」을 가리켰다. 문자의 유형·계통·역사를 다루는 실증적 학문으로서 말이다. 프랑스 철학자 데리다(69)는 이 단어를 문자의 철학적 목적론적 성찰이라는 뜻으로 달리 사용하고 있다. 

1967년 출판된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Gramatology)」는 데리다 사상의 좌표점을 설정하는 대작이다. 96년 국내 번역본이 나왔다. 고려대 언어학과 김성도 교수가 옮긴 이 책은 6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과 난해한 글쓰기가 마치 독자의 지성과 인내력을 시험하는 것 같다. 소쉬르·레비스트로스·루소·하이데거 등 기존 문학이나 철학에서는 한 줄로 꿰기 힘든 이질적인 텍스트들을 종횡무진으로 읽어내는 데리다의 솜씨를 따라잡기란 무척 벅찬 일이다.   

「그라마톨로지」는 한마디로 서구 형이상학 전통에 대한 비판이다. 데리다는 플라톤 이후 기존 형이상학이 지금 여기 있는 것을 1차적인 것으로 보는 이른바 「현전(現前)의 형이상학」이라고 비판한다. 현전(프레장스·presence)의 형이상학은 인종 중심주의· 소리 중심주의·로고스 중심주의이다. 이 전통에 따라 목소리는 영혼과 본질적·직접적 근접성을 지닌 것으로 여겨진 반면 문자언어는 존재의 반영 또는 그림자로 멸시됐다는 것이다. 궁극적인 무엇이 따로 있다는 믿음, 그것에서 출발하는 현전의 형이상학은 결국 모든 가치의 서열 체계를 매기려는 욕망이며 따라서 억압의 구조라고 데리다는 폭로한다.  

여기서 데리다의 사상을 집약하는 「해체」의 개념이 등장한다. 해체의 궁극적 겨냥점은 「울타리 엿보기」이다. 형이상학은 닫혀진 원이 아니며 울타리너머에는 끊임없이 운동하는 복수의 진리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데리다에 따르면 해체는 파괴가 아니라 기존 사유 체계의 한계를 교정하는 것이다.  

 

프랑스 저술가 장 뤼크 샬뤼모는 『데리다는 자기 자신의 문화를 재검토하고 있는 유럽인의 한 전형이고 전통적 제가치의 소멸을 분명하게 밝힌 증인』이라고 말한다. 데리다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철학자로 꼽힌다. 해체는 유행어가 됐다.  

자크 데리다 1930년 알제리에서 태어났다. 파리의 고등사범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65년 이후 이 학교에서 철학사를 가르쳤으며 70년대 중반부터 예일·존스홉킨스 등 미국 주요 대학에서 교환교수로 활동 중이다. 주요 저서로 「목소리와 현상」「에크리튀르와 차이」「철학의 여백」「회화에서의 진리」등이 있다.(오미환기자) 

10. 12. 26. 

 

P.S. <그라마톨로지>는 이번이 세번째 출간이다. 첫 번역본은 <그라마톨로지>(민음사, 1996)로 14년 전에 나왔고,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동문선, 2004)가 두 번째 번역판이었다(이번 전면 개정판 서문에는 "2002년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출판"됐다고 적혀 있는데, 착오로 보인다). 가야트리 스피박의 영역본은 '전설적인' 번역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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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바다 2010-12-26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개역본이 나왔군요. 전 김웅권의 번역본과 스피박의 영역본을 갖고 있습니다만 아직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TGIF(twitter, google, iphone, facebook)의 시대에 데리다의 의미는 작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개역본도 장만해서 함께 숙독해 봐야 할텐데 언제 시간이 날런지...

로쟈 2010-12-27 10:53   좋아요 0 | URL
소위 '서플먼트'가 풍부한 책이긴 합니다. 들고 다니기가 불편해서 탈인데, 방학때 저도 읽어보려고 합니다...

헌내 2010-12-26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피박이 그라마톨로지 영역도 했군요....

로쟈 2010-12-27 10:53   좋아요 0 | URL
원래는 번역자로 더 유명했어요...

자꾸때리다 2010-12-27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성도 교수의 첫번째 번역은 곳곳에 오역이 산재해있다는 혹평을 받았는데 이번에는 절치부심하셨는지 궁금하네요. 별로 믿음이 안 가서...

로쟈 2010-12-27 10:55   좋아요 0 | URL
서문에 보면 상당한 자부심이 피력돼 있습니다. 사실 소쉬르에 대해선 권위자인 만큼 동문서 번역보다 더 나을 수는 있습니다. 베테랑 편집자와 작업했다면 좋은 결과가 나왔을 수도 있고요...

paul 2010-12-27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자 해제와 역주로 인해서 볼륨이 늘어났네요...역시나 들고다니기에는 다소 부담스러운 두께네요^^ 그래도 올해 마지막 가장 반가운 뉴스였습니다. 명작들이 그러하듯 이 책도 많은 생각의 갈피들을 생산시켜주는 것 같습니다. 바늘에 실을 꿰듯이 읽어가고 있는데, 장인(데리다)의 숨결을 느끼기에는 역시 부족한 감이 없진 않지만, 데리다의 텍스트는 가능한한 데리다적으로 읽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죠...제가 보기엔 자부심이라기 보다는 번역을 놓고 절치부심한 흔적이 곳곳에 눈에 띄더군요.

로쟈 2010-12-27 23:38   좋아요 0 | URL
네, 절치부심도 맞는 말 같습니다. 노심초사한 노작이라고 할까요.^^

청루 2011-01-21 0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말과 사물은 어떤 분이 번역하시는지 아시는지요?

로쟈 2011-01-22 00:35   좋아요 0 | URL
얼핏 <광기의 역사> 역자가 하는 걸로 들었는데, 확실치는 않습니다...
 

소설가 박인성? 기사를 읽고서야 처음 알게 된 작가인데, 최근 연작소설 <이채영은 잘있다!>(삼우반, 2010)를 펴내기 불과 며칠 전에 교통사고로 아깝게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네 권의 소설집만을 남겨놓게 됐는데, 비단 안타까운 죽음 때문이 아니라 서울이란 도시의 풍경을 그려낸 작품세계 때문에 관심을 갖게 된다('동(洞)자류' 소설이라 부른다고). 관련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서울신문(10. 12. 25) 그저 ‘무명’으로 소설집 4권을 남겨둔채 가다 

그는 그렇게 떠나갔다. 자욱한 안개 저편으로 사라졌다. 마지막 소설을 탈고한 뒤 새벽 햇살과 다툼하던 물방울 입자들을 톡톡 터뜨리며 소설처럼, 시처럼 사라져 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개 갸우뚱하며 그저 무명 소설가라고 일컬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이 시대 문체 미학을 간직한 소중한 작가’라고 조심스럽지만 분명한 상찬을 내렸다.  



소설가 박인성이다. 최근 출간된 연작소설 ‘이채영은 잘있다’(삼우반 펴냄)가 나오기 며칠 전인 지난 6일 새벽 교통사고로 숨졌다. 평단도, 작단도, 어느 누구도 주목하지 않은 죽음이었다. 1956년 9월 태어났으니 54년을 ‘자연인 박대성’으로 살았고, 1977년 21세 젊은 나이에 ‘월간문학’ 신인상에 당선돼 등단했으니 33년을 ‘소설가 박인성’으로 살았다. ‘호텔 티베트’, ‘사랑은 안개보다 깊다’ 등 네 권의 소설집만을 남긴 과작(寡作)의 작가였다. 1986년 첫 소설집 ‘파장금엔 안개’는 김윤식 서울대 교수로부터 ‘무진기행에서 김승옥의 안개를 더욱 밀도있게 형상화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77년 월간 문학신인상으로 등단
유고작이 된 ‘이채영’은 서울 곳곳을 무대로 한 연작소설이다. 가회동이 나오고 상수동, 신사동, 신설동, 홍은동, 흑석동이 잇따라 배경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그 공간 속에서 다양한 인물 군상들이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2010년 한국 사회의 정치인, 기업인, 법조인, 종교인, 술집 주인, 건달, 화가, 문인 등 수많은 인물들을 아울러 풍자하고 은유하며 경쾌한 이야기로 이끌어간다. 그동안 단편소설과 단편에 걸맞은 문장만을 고집하며 삶의 비의(秘意)를 찾아 헤매왔던 박인성으로서는 파격적인 변신을 꾀한 셈이다.

정치·기업·법조인 등 풍자
특히 표제작 ‘이채영…흑석동’을 비롯해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신설동’ 등에서는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견이나 하듯 자신 삶의 자전적 내용을 담았다. 전북 김제에서 서울로 올라와 신설동 천변에서 지내던, 지독하게 가난했던 유년의 기억부터 문청으로 살아왔던 날들, 등단 이후 광고 카피라이터와 작가의 삶을 겸했던 시절까지를 그리 길지 않은 단편 속에 분명한 기록으로 남겼다.

문학평론가인 정현기 세종대 교수는 “월북작가 박태원의 ‘천변풍경’이 그려낸 1930년대 도시 서울의 낭낭한 풍경이 2010년대 박인성에 이르면 더욱 구체적인 꼴을 띠고 이 도시가 어떻게 바뀌어가는지를 읽게 한다.”고 언급했다.

소설을 펴낸 삼우반의 김용범 편집주간은 “장편소설에 대한 꿈을 키우면서 ‘이채영’의 속편 격인 또 다른 서울 연작소설도 준비하고 있었는데 안타깝기만 하다.”고 애석해 했다.

●‘천변풍경’ 더욱 구체화한 듯
못다받은 애도는 더 이상 이승의 몫이 아니다. 또 다른 세상에서 문학에 파묻혀 마음껏 소설 쓰기를 바랄 뿐이다. 또한 이승의 것보다 훨씬 유쾌하고 즐거운, 또 다른 삶을 누리기를 바랄 뿐이다.(박록삼기자) 

10. 1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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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12-25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말에 안타까운 소식을 연이어 듣게 되네요...
물만두님도 그렇고...
과문한 탓에 두 분 다 평소 글로 접하지 못했는데
해가 가기 전에 마음도 가라앉힐 겸 다문다문 읽어봐야겠네요...
게으르기 그지없는 제겐 로쟈님 서재가 세상과 통하는 창이 되는군요.
부끄럽지만... 이왕 빚진 김에 계속 빚지고 살겠습니다^^

로쟈 2010-12-25 20:40   좋아요 0 | URL
저도 손가락품이나 좀 파는 정도인 걸요. '로쟈-은행'이란 표현도 있던데, 가진 것 없이 대출해줄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반딧불이 2010-12-25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고나니까 보이는 것이 세상에는 허다하군요. 기억해두어야겠습니다.

올 한해도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새해에도 또 염치없이 도움 받겠습니다.
맑고 향기로운 새해 맞으시기 빕니다.

로쟈 2010-12-25 20:42   좋아요 0 | URL
별말씀을요. 반딧불이님도 새해엔 건강과 행운이 함께하시길...

영초 2010-12-27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가 너무 아쉽습니다. 열심히 소설 쓰는 몇 안되는 소설가중의 하나였는데...물론 작품 수준도 굉장히 높고..

로쟈 2010-12-27 23:39   좋아요 0 | URL
아, 독자가 없진 않았네요!

雨香 2010-12-29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가 박인성! 혹시나 했는데 (20년전에) 제가 가지고 있던 '파장금엔 안개'의 그 저자였네요. 허망하게 가시다니 안타깝네요.

로쟈 2010-12-30 07:54   좋아요 0 | URL
숨은 독자들이 없지 않았네요...

포스트잇 2010-12-30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인성작가,광고 카피라이터라서 그런지 제목들이 다들 한 필~하네요.때이른 사고가 안타깝고요...,늦게나마 읽어보려합니다.모르고 지나쳤을 책과 작가를 소개받을 수 있어서 더 없이 다행입니다.올 한해도 이러한 다행을 베풀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