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경제분야의 관심도서는 성장주의에 대한 비판을 담은 책들이다. 마인하르트 미겔의 <성장의 광기>(뜨인돌, 2011)와 클라이브 해밀턴의 <성장숭배>(바오, 2011). 미겔의 책은 <성장의 종말>(에코리브르, 2006)도 이미 출간돼 있다.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성장 패러다임에 대한 반성의 한 계기가 될 수 있을까.  

 

경향신문(11. 05. 21) 또 다른 ‘성장’의 조건   

경제현상을 바라보는 최근 시각은 ‘숫자’ 너머를 향한다. 숫자 너머에는 사람이 있고, 사람들의 움직임이 있다. 물론 여전히 숫자 이상을 보지 않으려는 매우 강력한 관성이 존재한다. 숫자는 사람들과 그들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위해 등장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사람들의 움직임을 때로 숫자가 은폐해 현실과 유리된 경제현상을 전달하기도 한다. 



경제성장률은 이러한 은폐의 대표격이다. 경제성장률은 해당 기간에 국내총생산(GDP)이 얼마나 늘어났는지를 보는 지표이다. 기존 GDP 측정 방식에 대한 반성이 있고 대안적인 측정방법을 제시하고는 있지만, GDP는 여전히 성장의 척도이다. 대안적인 측정방법을 모색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성장주의’를 받아들인다는 의미일 수 있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성장 자체를 거부할 의의, 그리고 의지와 능력이 있을까. <성장의 광기>(뜨인돌)의 저자 마인하르트 미겔과 <성장숭배>(바오) 저자 클라이브 해밀턴은 그렇다고 대답한다.

일단 숫자상으로 인류는 엄청나게 성장했다. 산업화가 경제성장을 이끌기 시작한 1800년경 이후 세계 GDP는 인구 1인당 약 11배로 늘었다. 그 사이 세계 인구가 9억명에서 69억명으로 7.7배로 커졌으니, 세계 GDP 총량은 200년 전과 비교해 거의 80배로 늘어난 셈이다. 숫자상으로 인류는 200년 전과 비교해 훨씬 더 행복해져 있어야 하고 삶도 풍요로워야 한다. 그러나 어느 정도 소득 수준에 도달하면 그 이후 인간의 행복도는 소득증가에 비례하지 않는다는 ‘이스털린 역설’이 입증했듯 적어도 산업사회에 속한 국민들의 삶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원인이 무엇이든 성장옹호론자들은 문제해결에 성장이 필요하다는 논리를 편다. 이들은 서구 사회의 삶에 대한 만족감과 효율성을 유지하는 데만 장기적으로 연 평균 1인당 최소 2% 성장이 필요하다고 진단한다. 지난 200년의 1인당 평균 성장률의 2배만큼 성장해야 한다는 뜻이다. 빈국과 부국 사이의 간격을 메우기 위해서, 서구사회가 매년 1인당 2% 성장하는 동안 세계 전체로는 4% 성장해야 한다고 세계은행은 주장한다. 이렇게 되면 현재 61조달러인 세계 GDP는 21세기 후반 약 2000조달러가 된다.

앞으로 이런 정도의 성장이 가능한지는 차치하고, 그렇다면 현재 시점에서 그동안의 성장 전략으로 사람들의 복지가 향상됐을까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결론적으로 <성장의 광기>에서 미겔은 “많은 가계의 구매력은 오래 전부터 정체 상태에 머물고 있으며 적지 않은 가계가 부채로 고통받고 있다. 성장과 물질적 복지의 증진은 적지 않은 시민들에게 아직도 빈말에 불과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물론 “사람들의 위와 옷장은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삶이 여전히 피폐하거나 혹은 더 피폐해졌다면 산업화 이후 성장을 기치로 내건 인류의 발전전략은 잘못된 것이라고 미겔은 역설한다. 나아가 성장옹호론자들이 제시하는 장밋빛 전망은 상식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간단하게 인구 측면에서만 봐도 급격한 노령화로 세금 낼 사람이 줄고 연금 받을 사람이 느는데 과거 같은 역동적인 성장이 가능할까. 더 본질적으로는 자연과의 적대관계를 축으로 한 기존 성장은 성장비용을 숫자 속에다 숨겨 놓은 지속가능하지 않은 성장이다. “오늘날 우리는 과거 세대가 계산하지 못하고 내버려둔 금액을 지불하고 있으며, 우리 후세들은 우리 대신에 또 지불하게 될 것이다. 지불하는 액수가 항상 동일하다면 그렇게 긴장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액수는 몇년 전부터 점점 가파르게 증가하여 머지않아 지불할 수 없을 정도의 액수가 될 전망이다.”

미국 서브프라임 사태 이전에 출간된 <성장숭배>도 같은 관점을 유지한다. 선진국 자본주의가 산업자본주의에서 소비자본주의로 변이하면서 폭주기관차가 됐다고 진단한다. 현대 사회를 ‘마케팅 사회(marketing society)’로 규정하는 저자는 진보주의자들도 이른바 전통적인 ‘빈곤모델’에 사로잡혀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는 데 성장주의자의 관점에 빠져든다고 비판한다.

그렇다고, 할 수 있는 성장을 포기하자는 논리는 아니다. 요는 어떤 성장을 어떻게 이루느냐이다. 답은 나와 있다. 지구와 우리 문명이 감당 가능한 수준으로 성장 혹은 수축하며, 물신을 숭배하는 대신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존중하는 사회적 자본을 축적하는 방향이다. 해답이 식상하다고? 모든 해답은 단순하지만 실천하기 어렵기 때문에 해답인 것이다. 성장을 사회설계나 정책의 전제조건으로 받아들이는 오랜 선입관을 깰 수 있다면 인간은 또 다른 ‘성장’을 가능케 할 수 있다.(안치용| 지속가능사회를위한경제연구소장) 

11. 05. 2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낮에 외출하면서 우편함에서 꺼내든 게 이번주 <한겨레21>인데, 출판면에서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다룬 그래픽 노블 <메즈 예게른>(미메시스, 2011) 리뷰기사를 읽었다. 생소한 단어인 '메즈 예게른'은 아르메니아어로 '대재앙'을 뜻한다고. 책은 귀가길에 서점에 들러 바로 구했다. 생각보다는 얇은 책이지만 참혹한 학살의 진실은 마음을 무겁게 한다. 낮에 읽은 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겨레21(11. 05. 23) “세상의 모든 죽음이 그곳에 있었다” 

“‘어떤 사람들’을 추방하는 목적은 미래를 위해서, 우리의 조국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그들은 어디에라도 살아 있다면 절대 선동적인 생각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수를 가능하면 줄여야 한다. 부모들이 어떤 고문을 당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고아들만 수용하고 보호하도록 하라. 다른 고아들은 추방 행렬과 함께 보내라.”

1915년 당시 터키의 내무부 장관이던 메흐메트 탈라트 파샤가 시장들에게 보낸 전보다. 이탈리아 작가 파울로 코시가 그린 그래픽 노블 <메즈 예게른>(미메시스 펴냄)은 ‘어떤 사람들’의 이야기다. 어떤 사람들은 아르메니아인을 뜻한다.  

20세기 최초의 대학살
탈라트가 전보에 글을 휘갈기는 그 순간에도 수천 명의 아르메니아 사람들은 생을 놓고 쓰러져갔다. 죽음의 방식은 여러 가지였다. 총칼에 찔리거나, 목을 매달리거나, 목적지도 없이 시리아나 메소포타미아 사막을 헤매는 추방 행렬에 합류하거나. 터키 군인들은 가족 앞에서 딸을 윤간하고 어린 아들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의 이를 뽑아 이마에 쑤셔 박았다. 작가의 말마따나 “지구상의 모든 죽음이, 온 역사를 통틀어 존재하는 모든 죽음이” 그곳에 있었다.

죽음의 공포가 극에 달한 아르메니아인들은 미쳐갔다. 어미는 어린 자식을 우물에 던져버렸고, 임신부는 노래하며 유프라테스강에 몸을 던쳤다. 허기와 두려움으로 정신을 잃은 이는 자신의 배설물을 먹기도 했다. <메즈 예게른>이 사진집이나 디테일한 묘사의 역사서가 아니란 점이 독자 처지에서는 다행이다. 건조한 내레이션과 흑백의 그림은 독자가 끔찍함의 수위를 조절할 수 있게 도왔다. 찬찬히 들여다보면 사진보다 선명하지만 눈을 질끈 감고 빠르게 다음 장으로 넘긴다면 잔인한 역사의 현장에서 황급히 벗어날 수 있었다.  

아르메니아인은 자신들의 슬픈 역사를 ‘메즈 예게른’이라 부른다. ‘대재앙’이라는 뜻이다. 역사적으로는 1915~16년 터키 당국이 아르메니아인을 학살한 사건을 말한다. 희생자는 15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20세기 최초의 대학살이었다.

징후가 있었다. 1895~97년 오스만제국의 술탄 압둘 하미드는 아르메니아인을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때 죽임을 당한 아르메니아인은 30만 명에 달한다. 배경은 이렇다.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제국의 영토에 거주하던 소수민족 아르메니아인은 기독교를 믿었다. 이들이 기독교를 믿기 시작한 것은 4세기 초로, 오스만제국 영토 안에서 아르메니아인과 무슬림은 십수 세기 동안 별다른 적개심 없이 어울려 지냈다. 그러나 19세기 말 제국들이 어깨를 겯고 서로의 욕망에 따라 손을 잡거나 충돌하기 시작하자 불똥이 엉뚱한 민족에게 튀었다. 1877년 러시아-투르크 전쟁으로 러시아가 아르메니아인의 거주 지역인 터키 북동부를 점령하게 되는데, 러시아가 그곳 사람들에게 권리 향상을 위한 개혁이라는 달콤한 사탕을 건넨다. 이를 계기로 아르메니아인 사이에서 민족운동이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한다. 무슬림과 충돌하는 일이 잦아졌고, 오스만 정부는 잔인한 대응을 한다. 이런 대응이 이어지다 폭발한 게 1차 학살이었다

1908년 청년투르크당에 쿠데타가 일어나고 정치인 3명이 독재적인 권력을 가진다. 이들은 1909년 술탄 하미드 2세를 폐위하고 1911년 비밀 회의를 열어 아르메니아인 절멸에 골몰한다. 계획은 3단계였다. 첫째 군대와 행정부 내 아르메니아인들을 추방할 것, 둘째 지역 저명 인사, 아르메니아 당의 당원, 군에 들어갈 수 있는 성인 남자를 추방하고 제거할 것, 셋째 남아 있는 시민들을 없앨 것. 남자는 보이는 대로 죽이고, 죽음의 공포가 눈에 서린 여자와 아이들은 사막으로 내몰았다. 이들은 허기와 피로, 폭력에 남은 생을 짓이기다 죽어갔다.

터키에서 메즈 예게른은 금기시되는 단어다. 터키 정부는 이 대재앙을 강제 이주에 따른 희생이었다고 주장한다. 2006년 <내 이름은 빨강>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터키의 소설가 오르한 파묵은 2005년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터키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이 살해당했다. 그러나 터키는 지금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그 사건에 대해 공개 언급이나 토론을 금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는 발끈했다. “파묵은 터키의 정체성과 터키 군대, 나아가 터키 전체를 적대시하는 근거 없는 주장을 퍼뜨렸다.” 터키 정부는 파묵을 기소했다. 터키에서 아르메니아인 학살의 역사는 흐르지 못한 채 고여 있다. 터키의 수도 앙카라에는 아직까지 메흐메트 탈라트 파샤의 이름이 붙은 대로가 있다. 그의 무덤은 이스탄불 ‘순교자의 언덕’에 있다.  

글보다 더 세게 이야기하는 흑백의 선
역사의 굵직굵직한 순간을 백 마디 말 대신 그림으로 대신 말하는 그래픽 노블들이 있었다. 이슬람혁명기를 다룬 <페르세폴리스>(마르잔 사트라피 지음), 보스니아 내전을 다룬 <안전지대 고라즈데>(조 사코 지음), <9/11 테러 리포트: 그래픽 어댑테이션>(시드 제이콥슨·어니 콜론 지음) 등이다.

<메즈 예게른>의 파울로 코시도 터키 정부가 끝내 지우려는 역사를 글과 그림으로 기록했다. 사실을 근거로 하되, 픽션을 가미했다. ‘피해자’라는 보통명사를 뒤집어쓴 아르메니아인들에게 문학적 숨결을 불어넣어 가상의 고유명사로 되살려놨다. 지은이는 이야기 자체로도 충분히 강렬하기 때문에 최대한 단순한 선으로 그림을 그렸다고 밝혔다. 때로 그림은 글보다 더 많은 말을 한다.(신소윤 기자)  

11. 05. 19. 

 

P.S. 아르메니아 대학살과 관련한 책이 더 있나 찾아봤는데, 엘리프 샤팍의 소설 <이스탄불의 사생아>(생각의나무, 2009) 정도만 눈에 띈다. 책소개의 일부는 이렇다. 

세계의 절반이 넘는 영토를 다스렸던 광대한 오스만 제국은 아시아 대륙의 서쪽 끝에서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뒤섞이는 신세계를 열었다. 여러 민족과 국가가 이슬람이라는 깃발 아래 뭉쳐지면서 다수와 소수의 관계는 아르메니아 민족의 대학살이라는 비틀어진 모습으로 드러난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만 제국은 터키에 살고 있던 아르메니아인들의 약 3분의 2를 학살했다고 한다. 정확한 추산은 어렵지만 백만 명 이상이 학살되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거나 망각하려는 평범한 아르메니아인들과 터키인들이다. 단순히 현대 터키 공화국의 오늘을 살펴보는 데 그치지 않고 내부의 모순과 위선을, 국가와 민족의 비틀린 상처를 두 가정의 두 여성이 살아가는 일상의 모습에서 용감하게 드러낸 작가의 역량이 대단한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진실을 대면하는 여러 가지 방법 중에서 작가가 택한 탄탄한 맥락의 스토리텔링은 이 소설이 가진 특별한 매력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이에자이트 2011-05-21 16:23   좋아요 0 | URL
엘리프 샤팍은 터키에 살고 있군요.파묵은 아직도 조국에 못오고 있는데...

아르메니아 계 미국인으로 윌리엄 서로얀이 생각납니다.그래도 아르메니아에 대해 한국인들이 조금이라도 안다면 서로얀의 소설을 통해서겠죠.

로쟈 2011-05-22 10:12   좋아요 0 | URL
사로얀이 아르메니아계였군요. 읽은 지가 너무 오래 돼 기억에 없는데, 요즘 독자들은 더 모를 듯싶은데요...
 
"무슨 책을 읽어야 할까요?"

대한출판문화협회에서 펴내는 소식지 <출판문화>(546호)에 실은 '이현우의 책읽는 세상' 꼭지를 옮겨놓는다. 격월로 연재하는데, 이달에 화제로 삼은 건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란 물음이고 <해럴드 블룸의 독서기술>(을유문화사, 2011)을 길잡이로 삼았다. 프롤로그('왜 읽는가?')와 1부의 1장까지 따라가본 게 됐다.     

출판문화(11년 5월호) 홀로 행하는 독서의 즐거움

“무슨 책을 읽어야 할까요?”란 질문에 대해 ‘책읽는 세상’에서 한 차례 다룬 바 있다. 그게 “어떤 자전거를 타야 할까요?”란 질문과 마찬가지이며, 자전거를 탈 줄 알고 타는 걸 즐길 줄 안다면 ‘아무거나’ 골라잡아 타면 되는 것과 같다고 했다. 어느 정도 독서력을 갖춘 다음이라면 아무 책이나 읽어도 된다는 것이다. 때문에 중요한 것은 독서목록이 아니라 독서력이라고. 그렇다면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란 질문은 어떤가. 이 또한 “자전거를 왜 타는가?” 혹은 “산에 왜 오르는가?”란 질문과 같은 성격의 것일까? 그래서 ‘거기에 있으니까’라고 둘러대는 것이 우문현답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책이 있으니까? 과연 그렇게 대답할 수 있을까?   

잠시 미국의 저명한 문학비평가 해럴드 블룸의 견해를 참조해보도록 한다. <해럴드 블룸의 독서기술>(을유문화사, 2011)에서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책을 잘 읽는 유일한 방법은 없지만 왜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는 있다.” 그 근본적인 이유란 책을 통해서 우리가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블룸은 이미 <지혜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루비박스, 2008)와 <세계문학의 천재들>(들녘, 2008)을 통해서도 ‘우리는 지혜를 갈망하기에 독서하고 사색한다’는 자신의 지론을 피력한 바 있으니 낯선 견해는 아니다.    

책에서 지혜를 얻는다는 주장이 상식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지만, 블룸의 견해에서 중요한 것은 모든 책이 지혜를 담고 있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따라서 ‘아무 책’이나 읽어서는 곤란하다. 적어도 블룸에 따르면 그렇다. 그래서 그가 권유하는 책은 소위 정전(正典)들이다. 국내에는 아직 번역되지 않았지만 <서구의 정전>과 <셰익스피어: 인간의 발명> 등을 펴낸 바 있는 블룸은 성서와 소크라테스에서 셰익스피어와 단테를 거쳐 헤밍웨이와 포크너에 이르는 정전 혹은 문학적 천재들의 작품을 읽음으로써 우리가 지혜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 결코 만만한 지혜는 아니다.  

지혜와 함께 블룸은 독서의 이유를 자아의 확장에서 찾는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자신을 튼튼하게 하고 자신의 진정한 관심사를 깨닫기 위해 책을 읽는다”는 것이 또한 그의 주장이다. 국내에서는 프랑스 철학자 데리다의 영향을 받은 예일학파의 일원으로 처음 알려졌지만, 악명 높은 ‘해체비평’의 일반적인 구호와는 달리 블룸에게 ‘작가’나 ‘자아’는 해체불가능하다. 오히려 ‘작가의 죽음’이나 ‘자아의 허구성’에 대한 주장이 우리가 독서를 통해서 몰아내야 할 유령이라고 그는 말한다. 각자가 갖고 있는 신념과 무관하게 우리는 “이데올로기 이상의 존재”라는 것이 그의 신념이다.  

때문에 블룸은 독서의 원칙 가운데 하나로 “독서를 통해 자신의 이웃이나 주위 사람을 개선하려고 시도하자 말라”고 권고한다. 그가 보기에 독서의 즐거움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며 이기적인 것이다. 책을 더 많이 읽는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삶이 직접적으로 향상되리라고 기대할 수 없다. 또 개인의 상상력이 성장하는 것과 타인에 대한 배려가 증가하는 것도 별개의 문제다. “홀로 행하는 독서의 즐거움”을 공익과 연관 짓는 모든 주장에 대해 그가 불편해하는 이유다. 독서는 순전히 개별적인 독자의 즐거움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이 즐거움이 없다면 독서는 와해될 것이며 자아 또한 해체되고 말 것이라는 게 블룸의 염려다.  

고전에 대한 깊이 있는 독서를 통해서 지혜를 발견하고 자아를 확장하는 일은 기본적으로 즐거운 경험이다. 블룸은 이 독서의 즐거움이 대학의 엄숙주의와 도덕주의 때문에 평가 절하돼왔다고 말한다. “대학에서는 독서를 즐거움의 미학이라는 깊은 의미에서 즐거운 일로 가르치는 일이 드물다.” 게다가 이 즐거움은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독서의 가장 강력한 동기는 이 쉽지 않은 즐거움, 곧 ‘어려운 즐거움(difficult pleasure)’ 혹은 ‘즐거운 어려움(pleasurable difficulty)’에 대한 갈망이다. 단순한 즐거움이 아닌 이 고차원의 즐거움이 독자가 얻을 수 있는 숭고함의 경험이다. 그렇다, 블룸이 권유하는 독서는 숭고한 독서이다. 요컨대 독서를 통해서 우리는 숭고함을 경험하며, 그것은 ‘사랑에 빠진다’고 할 때의 위태로운 초월의 경험을 제외하면 “우리가 세속에서 경험하는 유일한 초월의 경험”이다. 고전들에 대한 블룸의 비평은 이 특별한 경험으로의 초대장이다.  

<해럴드 블룸의 독서기술>은 단편소설과 시, 장편소설과 희곡 등의 작품들에 대해서 어떻게 읽을 것이며, 왜 읽는지에 대해 가르쳐주고자 하는 책이다. 독서란 무엇인지 일종의 시범을 보여준다고 할까. 단편소설부터 시작해서 그는 시, 장편소설, 그리고 희곡에 대한 읽기를 차례로 선보인다. 그의 독서 여정에 들어서면서 내가 독자로서 품은 기대는 두 가지였다. 한편으론 작품을 읽어내는 그의 솜씨, 곧 ‘독서기술’이 궁금했고, 다른 한편으론 그 독서기술이 전수될 수 있는 여건을 우리가 갖추고 있는지 궁금했다.   

개인적으론 대학 안팎에서 러시아문학을 강의하는 처지인지라 블룸의 단편소설 감상이 두 명의 러시아 작가에 대한 읽기로 시작하는 게 마음에 들었다. 그는 단편소설이란 장르의 여정을 투르게네프에서 체호프를 거쳐 헤밍웨이에 이르는 길로 파악한다. 그래서 가장 먼저 거론하는 것이 투르게네프의 단편집 <사냥꾼의 수기>(1852)다. 발표된 지 한 세기 반이 더 지났지만 여전히 놀라우리만치 신선하며 섬뜩하리만큼 아름답다는 평이다. 스물다섯 편의 단편 가운데 특정 작품을 고르는 게 어렵기는 하지만 블룸은 <베진 초원>과 <아름다운 땅에서 온 카시안> 두 편이 자신의 베스트라고 말한다.   

<베진 초원>은 일반적으로도 <가수들>과 함께 <사냥꾼의 수기>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꼽힌다. 어떤 내용인가. 화자인 사냥꾼(투르게네프)이 7월 아침에 들꿩 사냥을 나섰다가 길을 잃고 어느 초원에서 노숙하게 되는데,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은 다섯 명의 농부 소년들과 만난다. 일곱 살에서 열네 살까지의 소년들이 서로 주고받는 도깨비 얘기, 귀신 얘기 등을 그는 엿듣는다. 그중 파블루샤란 아이가 똑똑하고 호감이 가는 소년이다. 잠이 들었다가 동틀 무렵에 일어나니 파블루샤만 깨어나 사냥꾼을 바라본다. 화자는 집으로 향하며 초원의 아름다운 아침을 묘사한다. 그리고 말미에 슬픈 소식을 덧붙인다. <베진의 들판>이라고 옮겨진 우리말 번역에서 인용하면 이렇다. “슬픈 이야기지만 여기에 덧붙여 알려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파블루샤가 그 해에 죽은 것이다. 그는 물에 빠진 것이 아니라 말에서 떨어진 것이다. 참 훌륭한 아이였는데 아까운 일이다.”  

왜 <베진 초원>을 읽는가? 블룸은 스스로가 던진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한다. “적어도 우리의 현실을 더 잘 알기 위해, 운명에 대해 상처받기 쉬운 우리들을 더 잘 알기 위해서이다. 또한 그 과정에서 투르게네프의 솜씨와 이야기꾼으로서의 표면적인 무관심을 미학적으로 감상할 수 있는 법을 배우게 된다.” 이 소품에서 독자가 발견하는 아이러니는 운명의 아이러니다. 파블루샤처럼 가장 호감이 가는 아이도 갑작스런 사고로 세상을 떠나기도 하는 것이 운명이다. 이 운명은 초원의 풍경과 소년들과 사냥꾼과 마찬가지로 무구하다. 투르게네프는 아무런 도덕적 판단도 보태지 않고 베진 초원을 벗어난 어떠한 시점도 이야기에 개입시키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블룸은 투르게네프가 가장 셰익스피어적인 작가라고 말한다. 단순해 보이지만 그러한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최고의 재능을 필요로 하며, 그런 재능은 셰익스피어의 천재성과 흡사하다는 게 블룸의 견해다.  

작품집에서 <베진 초원>에 바로 이어서 나오는 <아름다운 땅에서 온 카시안>은 한 난쟁이 이야기다. 사냥꾼 투르게네프는 50세가량의 이 불가사의한 인물과의 짧은 만남을 들려준다. 돈강 유역의 ‘아름다운 땅’을 빼앗기고 떠도는 늙은 난쟁이 카시안은 나이팅게일을 잡아서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는 일을 한다. ‘벼룩’이란 별명을 가진 그는 자신이 읽고 쓸 줄 알며 몸과 마음의 병을 고치는 특별한 능력도 갖고 있다고 말한다. 가족이 없다고 하지만 숲에서 갑자기 등장한 소녀가 그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딸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온전한 정체는 그냥 수수께끼로 남으며 투르게네프 또한 “말로 설명하기 힘든” 것에 대해 더 말하지 않는다. 결국 카시안은 자기만의 세계에, 농노의 러시아가 아닌 러시아판 성서적 세계에 남게 된다. 블룸의 감상은 이렇다. “<아름다운 땅에서 온 카시안>을 읽으며 우리는 극소수를 제외한 다수의 사람들로부터, 그리고 투르게네프로부터도 단절된 타자의 모습을 보게 된다. 카시안의 이야기를 읽음으로써 우리가 얻는 보상은 잠시나마 대안 현실의 세계에 들어서도록 허락받았다는 점이다.”  

짧은 분량이긴 하지만, 블룸은 명불허전의 솜씨로 이 단편들의 미학적 성취와 지혜를 요약해낸다. 덕분에 오래전 학부시절에 읽은 작품들을 다시금 읽어보면서 새로운 감상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유감스러운 건 현재 <사냥꾼의 수기>의 완역본을 우리말로는 읽어볼 수 없다는 점이다. 예전에 을유문화사판 세계문학전집의 한권으로 출간된 바 있지만 지금은 절판된 상태다(<아름다운 땅에서 온 카시안>은 <끄라씨바야 메치의 까시얀>으로 번역됐다). 그마나 현재 유통 중인 몇 안 되는 번역본은 보통 원작의 1/3 가량만 수록하고 있는 발췌본이다. 미국의 노예해방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돼 있는 해리엇 비처 스토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 새롭게 번역․출간되고 있는 것과 달리, 훨씬 더 뛰어난 예술성을 갖추고 있으면서 러시아 농노해방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 투르게네프의 대표작은 우리에게 ‘부재하는’ 작품이다. 비단 투르게네프만이 아니다. <해럴드 블룸의 독서기술>을 읽어나가다 보면, 장편소설의 경우를 제외하면, 이런 빈곤한 상황은 계속 이어진다. 고로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란 질문에 “책이 있으니까”라고 답할 수 없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어려운 즐거움’이란 말을 다른 의미로 실감하게 된다.  

11. 05. 19. 

P.S. 본문에서 언급한 <베진의 들판>은 <귀족의 보금자리>(신원문화사)에 수록돼 있다. 이 책에는 <사냥일기>라는 제목으로 8편의 단편이 번역돼 있다. <사냥꾼의 수기> 완역 단행본이 현재로선 없는 셈이다. 한편, "독서의 가장 강력한 동기는 이 쉽지 않은 즐거움, 곧 ‘어려운 즐거움(difficult pleasure)’ 혹은 ‘즐거운 어려움(pleasurable difficulty)’에 대한 갈망이다."란 대목에서 대구로 적은 ‘어려운 즐거움’과 ‘즐거운 어려움'을 <해럴드 블룸의 독서일기>에서는 '쉽지 않은 즐거움'과 '즐거움을 주는 난제'라고 옮겼다. 나로선 대구 관계를 살려주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다...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4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이에자이트 2011-05-19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냥꾼의 수기>는 예전 정음사 세계문학전집 16번에 <부자> <첫사랑>과 함께 실려있었는데 요즘은 안 나오나요?

로쟈 2011-05-19 22:41   좋아요 0 | URL
절판된 지 이미 오래인데요.^^ 그리고 <부자>와 같이 실렸으면 완역본이 아닙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05-20 18:33   좋아요 0 | URL
사냥꾼의 수기에는 다섯개의 단편이 들어있네요.더 많은 편수로 되어 있나 보군요.

로쟈 2011-05-21 15:41   좋아요 0 | URL
25편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05-21 15:50   좋아요 0 | URL
다 읽고 싶어요.분량이 대단하군요.

미지 2011-05-20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투르게네프로부터도 단절된 타자의 모습"... 찡합니다...

로쟈 2011-05-21 15:36   좋아요 0 | URL
좋은 해석이에요...

雨香 2011-05-20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왜 읽나? 나이가 들면서 계속 드는 질문입니다.
학생때는 책을 통해 삶의 방향을 세우고 세상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아이 둘 아빠에 40이 얼마 안 남고, 회사에서의 위치를 고민해야 하는 시점에서의 책 읽기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가 몇 년 전부터 저를 괴롭혀온 문제입니다. 그래도 읽는다라는 자세로 임하기는 하는데 해럴드 블룸의 “궁극적으로 우리는 자신을 튼튼하게 하고 자신의 진정한 관심사를 깨닫기 위해 책을 읽는다”로 수정해야 겠습니다.

멀기만한 주제인 고전읽기... 블룸의 책이 가이드로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고전읽기 목록을 블룸의 책으로 잡아보겠습니다.

로쟈 2011-05-21 15:36   좋아요 0 | URL
좋은 가이드이긴 한데, 잘 읽히는 영어/번역은 아닙니다.^^;

페크pek0501 2011-05-20 1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악기를 즐겁게 연주하려면 악기로 연습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처음부터 흥미를 잃으면 악기와 멀어집니다. 마찬가지로 책을 즐겁게 읽으려면 책 읽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이때 흥미를 잃고 인내로써 읽으면 실패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되도록 재밌는 책을 선택하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무조건 명작만 골라 읽는 건 좋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지루한 명작도 많으니까요.

책이 재미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나중엔 다소 지루하거나 딱딱한 내용의 명작의 책도 즐겁게 읽게 되는 경지에 가게 됩니다. 명작이란 읽다보면 명작이라 할 만한 훌륭한 부분이 있기 마련이어서 그 새로운 발견을 하기 위해 즐거운 독서를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의 책부터 읽으라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가령 연애소설처럼 흥미로운 것부터 시작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국내의 대중 연애소설부터 읽다가 세계명작 연애소설로 옮겨 가다보면 다른 분야의 책에도 자연히 관심이 갈 듯합니다. 그냥 제 생각입니다.

로쟈 2011-05-21 15:38   좋아요 0 | URL
ㅎㅎ 연애소설이라면 재미없어 하는 독자들도 있는데요. 저처럼.^^;
 

점심을 먹고 외출하기 전 자투리 시간에 무얼 할까 잠시 생각하다가 '로쟈의 한줄'을 적기로 한다. <모비딕>의 한줄이다. 지난주 구입도서 가운데 가장 반가운 책의 하나는 멜빌의 <모비딕>(작가정신, 2011) 보급판이었는데, 아셰트클래식판으로 나온 <모비딕>(작가정신, 2010)은 일단 너무 두껍고, 너무 무거워서 휴대가 불편했다. 게다가 참고로 들어가 있는 삽화들이 본문과 유기적으로 잘 연결되는 것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참고용'이었기에 빠져도 독서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이번 보급판에선 삽화를 빼고 페이지당 행수를 두 줄 늘렸다(25행에서 27행으로). 그렇게 해서 전체 페이지수는 817쪽에서 718쪽으로 100쪽이 줄었다. 기분상 무게는 절반으로 줄어든 느낌이다. 같은 번역본을 보급판으로 다시 구한 이유인데, 책에 대한 집중도는 더 좋아질 듯해서 마음에 든다. <모비딕>의 세계문학전집판들이 경쟁 번역본으로 나오기 전까지는 '정본' 역할을 해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한 가지 '옥에 티'가 교정돼 있지 않기에 지적해놓는다. <모비딕>의 핵심장 중의 하나인 36장 '뒷갑판' 말미에서 에이해브 선장이 이번 항해의 목적이 흰고래 모비딕을 잡는 데 있다고 말하고 유일한 반대자인 일등항해사 스타벅까지 설득하는 장면으로 부하 선원을 압도하는 그의 카리스마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에이해브의 완력 앞에 일, 이, 삼등 항해사가 모두 움츠러드는 장면은 이렇게 기술된다.  

그 강력하고 긴박하고 신비스러운 선장의 태도 앞에서 세 항해사는 기가 꺾여 움츠러들었다. 스터브 플래스크는 눈길을 돌렸고, 정직한 스터브는 눈을 내리깔았다.(아셰트판, 249쪽; 보급판, 219쪽) 

이 대목의 오류는 누구라도 지적할 수 있다. 기가 꺾인 '세 항해사'에 대한 묘사인데, '스터브-플래스크-스터브'라고 해서 '스터브'만 두 번 호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의 '정직한 스터브'는 '정직한 스타벅'으로 고쳐져야 한다. 참고로, 원문은 이렇다(내가 참고한 건 펭귄판이다).   

The three mates quailed before his strong, sustained, and mystic aspect. Stubb and Flask looked sideways from him; the honest eye of Starbuck fell downright.

완성도 높은 번역이기에, 이 정도 흠도 교정이 되면 좋겠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바로 이어지는 37장 '해질녘'의 첫 문단에도 한 줄이 첨가되면 좋겠다.  

나는 하얗고 탁한 자국을 남긴다. 내가 항해하는 곳이며 어디에든 창백한 물, 그보다 더 창백한 얼굴, 질투심 많은 파도는 내가 남긴 자국을 삼키려고 옆으로 비스듬히 부풀어 오른다.(아셰트판, 251쪽, 보급판 221족) 

이 대목의 원문은 이렇다.  

I leave a white and turbid wake; pale waters, paler cheeks, where'er I sail. The envious billows sidelong swell to whelm my track; let them; but fisrt I pass

차이는 원문의 마지막 문장 'let them; but fisrt I pass'(뒤따라오라지, 하지만 내가 먼저다)가 번역문에는 누락됐다는 점. 몇 단어 안 되지만, 에이해브의 성격을 말해주는 부분이어서 나름대로 중요한 대목이라는 생각이다. 방대한 분량에 견주면 사소한 오류에 지나지 않지만, 더 정밀한, 더 좋은 번역본으로 나오는 게 모두에게 더 좋은 일이지 않겠는가... 

11. 05. 19.


댓글(7) 먼댓글(0) 좋아요(5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11-05-19 13:55   좋아요 0 | URL
"뒤따라오라지, 하지만 내가 먼저다."
짧지만 아주 멋진 번역인데요. 나중에 다른 번역자들은 이 문장을 어떻게 옮겼는지 각 번역본들을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롭겠는데요 ㅎㅎ^^

로쟈 2011-05-19 20:49   좋아요 0 | URL
다른 번역본은 확인해보지 못했고, 그냥 제 식으로의 번역입니다.^^;

비로그인 2011-05-19 18:08   좋아요 0 | URL
흑흑 저는 양장본을 싫어해서 못마땅해하며 샀는데 이런 식으로 보급판이 나와 뒤통수를 치다뇨ㅜㅜ

로쟈 2011-05-19 20:50   좋아요 0 | URL
알면서 얻어맞는 경우도 있습니다.^^;

마일즈 2011-05-19 21:29   좋아요 0 | URL
백경을 원서로 보려고 이해가 잘 안되면서 여러번 읽다 보니까 이 생각 저 생각이 많이 듭니다. 그 중에 하나가 시점이 이스마엘에서 인디언 피쿽으로 바뀌면 어떨까하는 겁니다. 포경선 선원과 선장에 대한 묘사도 많이 달라지겠지만 백경을 바라보는 관점도 매우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예전에 로빈슨 크루소를 다소 관점을 바꿔 프라이데이 입장을 넣은 방드르디라는 소설을 즐겁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혹시 그런 소설이 이미 나왔다면 알고 싶고요^^

로쟈 2011-05-19 22:44   좋아요 0 | URL
'되받아쓰기'를 말씀하시는군요. <모비딕>은 아직 못 들어봤습니다. 하지만 <모비딕> 자체가 상당히 도전적이긴 합니다. 그렇게 해석하는 경향도 있구요...

pyenjea 2011-06-13 09:42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작가정신 편집부입니다. 정성을 기울였는데도, 저희가 미흡한 부분이 있었네요. 말씀해주신 부분 역자와 상의해서 다음 쇄에서 수정하기로 했습니다. ^^ 로쟈 님께서 찾아주신 덕분에 책의 오점을 수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지금보다 더 잘 다듬어진 모비딕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국외에서 명성을 떨치는 한국 학자들의 얘기가 가끔씩 들려오는데, 인류학자 권헌익 교수가 케임브리지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교수로 임용됐다는 소식이다. 생소한 이름이지만, 언젠가 우석훈 소장이 입이 떡 벌어질 만큼 뛰어난 학자로 이미 손꼽은 바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시강강사 생활만 하다가 영국으로 건너가버렸다고. 한국 대학사회에 얼마나 대단한 교수들이 많이 포진해 있는지 말해주는 반증이다. 관련기사들을 스크랩해놓는다. 아직 한권도 번역되지 않은 권 교수의 책들이 소개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그래서 아직 '세계의 책'이다).   

한겨레(11. 05. 18) “내 학문 화두는 전쟁이 파괴한 삶의 회복” 

영국 최고의 칼리지로 알려진 케임브리지대학 트리니티 칼리지에 한국인 인류학자인 권헌익(49·사진) 런던정경대(LSE) 교수가 임용됐다. 케임브리지의 31개 칼리지 중에서도 단연 최고로 꼽히는 트리니티 칼리지에 한국인 교수가 임용된 것은 그가 처음이다.

권 교수는 10월 새 학기부터 트리니티 칼리지의 선임 연구 정교수로 일한다. 선임 연구 정교수는 정교수에 준하는 대우를 받으면서 연구나 강의를 자유롭게 선택해서 할 수 있는, 정교수 가운데서도 특별한 자리다. 영국에서 선임 연구 정교수는 보통 정년퇴임을 몇 년 앞둔 정교수들에게 주는 자리로 알려져 있다. 



권 교수는 17일 “모교에 돌아오게 돼 기쁘다”며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요청한 대로 앞으로 좋은 책을 써서 보답하겠다”고 말했다. 권 교수는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때 일어난 마을, 가족 등 공동체에 대한 학살행위를 연구한 저서 <학살 이후>, <베트남의 전쟁 유령들>로 인류학계의 권위있는 ‘기어츠상’(2007년)과 아시아학계의 ‘조지 카힌상’(2009년)을 받아 학계에 널리 알려졌다.

그는 6·25가 내전과 국제전의 두 가지 양상뿐 아니라, 민간인에 대한 전쟁이라는 성격도 띠고 있다고 봤다. 따라서 이제는 조국해방전쟁이냐, 침략전쟁이냐 하는 이념 구도에 집착하지 말고 남쪽과 북쪽의 민간인들, 참전했던 미국인과 중국인들에게 이 전쟁은 무엇이었냐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냉전의 시작을 알린 열전이었던 이 전쟁이 한반도뿐 아니라 20세기 후반 세계 역사에 어떤 영향을 줬는지도 그의 관심사다. 그는 “한국전쟁을 겪은 미국이 자본주의 진영을 강화할 목적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흑백분리차별) 정책까지 지지했다”고 설명했다.

우석훈 2.1연구소장은 지난해 11월18일 <한겨레> 칼럼에서 “장하준 다음의 질문은 권헌익의 질문이 됐으면 좋겠다”고 썼다. 이 이야기에 대해 그는 “우 선생을 알지만 그런 좋은 이야기를 해준 줄 몰랐다”면서도 “공동체의 삶이 회복될 수 있는지 여부가 내 공부의 주제이자 질문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또 다른 냉전>을 써낸 데 이어, 연말엔 <북한-냉전의 극장 국가>를 펴낼 예정이다.

서울대 철학과를 다니다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권 교수는 케임브리지대학 인류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뒤 영국 맨체스터대, 에든버러대 교수를 거쳐 2009년부터 런던정경대에서 교수로 일해왔다. 트리니티 칼리지는 1546년 영국의 양대 명문 칼리지인 옥스퍼드대 크라이스트처치 칼리지와 함께 헨리 8세에 의해 설립됐다. 노벨상 수상자 32명을 비롯해. 아이작 뉴턴, 프랜시스 베이컨, 바이런, 버트런드 러셀,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자와할랄 네루 등을 배출했다.(김규원 기자)   

한겨레(10. 11. 18) 장하준 사건의 교훈

내가 한국의 학자들이나 경제학자들을 다 만나본 것은 아니다. 어쨌든 내가 만난 한국 학자 중에서 “정말 이렇게 공부 잘하는 사람이 다 있나” 싶게 입 딱 벌어졌던 사람이 세 명 있다. 세상의 평가는 어떨지 모르지만, 그중에 제일은 권헌익 교수였고, 그다음이 장하준 교수와 이제 슬슬 은퇴를 준비하시는 서울대 경제학과의 이지순 교수였다.

물론 이지순 교수는 한국의 많은 경제학자들이 그렇듯이 아직은 그를 대표할 책이 없어서 일반인들은 잘 모른다. 그렇지만 한국의 경제학자들 중에서 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사람이,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지순 교수였던 셈이다. 어떻게 보면 <88만원 세대>를 시작으로 지금 진행중인 12권의 대장정 시리즈를 쓸 용기를 냈던 것이 이지순 교수식 발상의 전환 덕분이다. 마음속으로는 그를 진짜 은사라고 생각하고, 내가 발간한 책들을 전부 보내드리는 분이기도 하다. 그가 나에게 질문했다. “만약에 박정희가 산업화할 때, 유신 방식 대신 요즘 식으로 말하는 생태적 경제를 전개했다면 우리가 지금보다 못살았을까?” 언젠가 나는 그의 질문에 답을 하고 싶은데, 아직은 그럴 수준과 형편이 못 된다. 

장하준이 수년 전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하였다. 과연 모든 경제적 제도를 다 없애고 시장 하나만을 단일 기구로 숭배한다면 ‘경제 발전’이라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이 질문은 독일 역사학파인 리스트의 오래된 ‘사다리 걷어차기’의 질문이기도 하고, 스웨덴식 복지경제의 틀을 만들어낸 군나르 뮈르달의 질문이기도 하다. 대체적으로 한국의 주류 경제학계나 정치인들 혹은 재계의 경제인들은 “그딴 질문 필요 없다”고 지난 10년 동안 장하준을 영국 사람 취급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와 함께 아주 혼동스러우면서도 너저분한 시대를 보낸 지금, 장하준이 던진 질문 혹은 <정의란 무엇인가?>를 통해서 마이클 샌델이 던진 질문에 한국 국민들은 격렬하게 반응하였다. 2000년 김용옥이 <노자와 21세기>라는 인문서적으로 세웠던 모든 기록을 마이클 샌델이 올해 전부 갈아치웠는데, 그 기록을 이제 장하준이 모두 갈아치울 형국이다.

어쩌면 우리는 지난 10년, 먹고사느라고 너무 바빴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한국 혹은 한국 경제를 둘러싼 근본적인 질문을 못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소소한 몇 가지 정책 논쟁을 ‘의제 설정’이니 어쩌구 하면서 기술적 논의만 조금 했지, 정의, 도덕, 제도, 시장과 같은 근본에 해당하는 질문들을 빼먹고 간 것 같다. 정상적인 사회라면 이런 논의들이 대학과 계간지 같은 것을 통해서 일상화되고, 국민들도 ‘시민토론’ 등의 형태로 계속 토론을 하고, 이런 것들이 정치권을 통해서 대표되는 그런 상황으로 가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린 그렇게 안 했고, “돈이면 최고다”라는 경제근본주의의 시절을 보냈다. 학자라는 게, 원래 남는 시간이 많아서 남들 다 아는 것 같은 근본적인 얘기를 다시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점에서, 장하준은 좋은 학자이다.

지난 수년 동안 내가 본 가장 안타까운 사건은 권헌익 같은 좋은 학자가 한동안 시간강사를 하다가 런던의 정경대학(LSE) 교수로 가버린 일이다. 만약 그가 계속 한국에 있었다면, 많은 대학원생들이나 박사과정생에게 정말 좋은 스승이 되었을 것 같다. 그가 한 얘기는 더 간단하다. “고전으로 돌아가자.” 그 얘기를 한국은 못 알아들었고, 영국은 알아들었다.

장하준 다음의 질문은 권헌익의 질문이 되면 좋겠다. 정치권이 알아먹든 못 알아먹든, 장하준과 함께 한국 국민들은 이미 선진국 국민이 된 것, 그게 장하준 사건의 교훈 아닌가? 이런 국민과 독자들이 너무 자랑스럽다.(우석훈 2.1연구소 소장) 

11. 05. 18.  

P.S.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강의를 한다고 하니까 생각나는 학자는 어네스트 겔너(1925-1995)이다. 최근에 그의 전기를 구입한 때문인데, 이력을 다시 살펴보니 런던 정경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쳤고 케임브리지대학에선 사회인류학 교수를 역임했다. 말년엔 체코의 민족주의연구소 소장을 지낸 걸출한 학자다.   

겔너의 책으론 <민족과 민족주의>(한반도국제대학원대학교, 2009)가 번역돼 있다. 민족주의론의 고전에 속한다고. 존 홀의 전기 <어네스트 겔너>(2010)는 이미지가 뜨지 않는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고세운닥나무 2011-05-19 09:48   좋아요 0 | URL
우석훈 소장의 글을 보며 권헌익 교수가 누군가 했는데, 저 분이셨군요?

한국에선 제 대접을 못 받다가 타국에선 인정받는 모습을 보니 씁쓸하군요...

로쟈 2011-05-19 20:48   좋아요 0 | URL
덕분에 학자로선 더 큰 명성을 얻은지도 모르죠...

노이에자이트 2011-05-19 22:48   좋아요 0 | URL
90년대 초에 앤더슨<상상의 공동체>와 겔너 <민족과 민족주의>가 앞서거니 뒷서거니 번역된 게 기억납니다.민족주의론의 초창기 거장인 한스 콘도 체코 출신인데 그 지역이 워낙 강대국의 각축장이라서 민족주의 연구가들이 관심을 두는 대상이죠.

로쟈 2011-05-21 15:50   좋아요 0 | URL
네, 겔너의 책도 한번 나왔더군요. 한스 콘의 책도 예전에 몇 권 나왔었는데 지금은 자취가 없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05-19 22:53   좋아요 0 | URL
권헌익 씨가 한국전쟁 이후 냉전정책의 확장에 관심이 많으니 한국전쟁과 독일 재무장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을 것 같군요.우리나라에서는 이상하게도 독일이 전후에 과거사 반성을 진정으로 했다고 여기는 이들이 많은데 사실은 일본과 함께 냉전정책의 혜택을 제일 많이 입은 사람들이 독일 우익들이죠.공산주의와 싸우기 위해서라며 나치청산이 흐지부지 되어버리고....거기에 미국과 서방진영들이 지지하고...아파르헤이트를 가장 강력히 지지한 나라 중 하나가 옛 서독입니다.

로쟈 2011-05-21 15:51   좋아요 0 | URL
전쟁 연구서들은 제법 되지만, '전쟁 이후'에 관한 책이 새삼 드물다는 생각이 전 들었습니다...

雨香 2011-05-20 08:53   좋아요 0 | URL
한국사회의 부끄러운 속살이군요. 세계적인 학자가 시간강사가 되는.
로쟈님 블로그에서 석학 한분 또 알게 되는군요. 감사합니다.

로쟈 2011-05-21 15:51   좋아요 0 | URL
한국에서 인정받기가 더 어려운 듯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