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권의 계간지'라고 제목을 붙이려다가 밋밋한 듯싶어서 좀 세게 고쳤다. 그래도 실상은 <문화과학>과 <실천문학> 가을호, 두 권의 계간지에 대한 리뷰기사다. 기자들은 기사거리가 없을 때 이런 기사를 쓰는지도 모르겠지만, 정보로서 유익하다.  

   

경향신문(11. 09. 06) 금융위기는 헤게모니 싸움서 비롯…자기통치의 ‘코뮌 공동체’가 해결책

‘혁명의 시기’라는 것이 따로 있을까. 세계체제론적 관점에서 보면 역사상 모든 혁명과 반혁명은 전 지구적 헤게모니(패권) 국가가 몰락하고 새로운 질서 정립을 위한 다툼이 시작될 때 벌어졌다. 세계가 영국이 주도하는 질서 체제로 전환할 때 프랑스혁명(1789)이 발생했다. 미국이 전 지구적 헤게모니 국가로 부상하던 시기에 러시아혁명(1917)이 일어났다.

그렇다면 2007년 시작된 금융위기로 미국 헤게모니의 몰락이 점쳐지는 지금은 어떨까. 계간 ‘문화/과학’ 가을호는 ‘혁명의 계보학’을 특집으로 다루며 현 상황도 비슷하다고 진단한다. ‘문화/과학’ 편집위원회는 총론에서 “금융위기는 주기적 경기침체의 수준이 아니라,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구조적 차원에서 변혁되는 지구적 헤게모니 이행의 문제와 연관돼 있다”고 말한다.

이탈리아 출신의 세계체제론자 조반니 아리기의 주장이 이해를 돕는다. 그는 19세기의 패권국은 영국, 20세기의 패권국은 미국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패권 국가의 부침을 보면 일반적인 구조가 보인다. 첫번째 단계에서는 헤게모니 국가로 금융자본이 집중되고 기축통화의 변화가 나타난다. 헤게모니 국가는 두번째 단계에서 세계 실물경제를 지배하며 이윤을 뽑아낸다. 세번째 단계에서는 실물경제가 침체되는 대신 금융부문이 폭발적으로 팽창한 후 급격히 쇠락한다. 자연스레 오늘날 미국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이 시대 가장 뼈아픈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것은 하층계급이다. 헤게모니를 빼앗길 위기에 처한 패권 국가는 이를 유지하기 위한 전략에 골몰하면서 착취를 강화하기 때문이다. 미국 중심의 국제통화기금(IMF)이 신자유주의를 전 세계에 강요한 것이 대표적이다. 더구나 미국이 재정위기를 겪으면서 긴축재정으로 선회한 이상 주요 경제국들 역시 따라갈 수밖에 없어 복지는 무너지고 사회적 양극화는 심화된다. 이미 이스라엘, 칠레, 영국 등에서 물가폭등과 긴축재정, 청년실업 등의 문제로 시위가 빈발하고 있다. 

 
1907년 러시아 노동자도서관. ‘니조프킨 도서관’은 노동자들이 자기 수입의 2%를 내고 자산을 정치적 대의명분에 따라 공유하는 ‘공동금고’를 운영했다.

변혁은 어디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 러시아혁명을 분석한 이득재 대구가톨릭대 교수와 라틴아메리카 혁명을 분석한 안태환 부산외대 HK연구교수의 논문을 살펴보면 공통점이 떠오른다. 그 핵심은 자기통치를 핵심으로 하는 ‘코뮌적 공동체’를 구성하자는 것이다.

이 교수는 “노조도, 혁명적인 당도 존재하지 않던 러시아에서 1905년의 혁명이 분출될 수 있었던 것은 노동자들의 코뮌 경험 덕택”이라고 말한다. 러시아에서는 이미 1860년대부터 각 지역 농장에 코뮌 공동체가 존재했다. 여기에 1905년 혁명 훨씬 이전부터 자기계몽의 열망을 품은 노동자들이 일요학교, 민중의 집, 협동조합을 설립해 활동하면서 주체적인 능력을 키웠다. 이 교수는 “1905년 혁명은 반세기 이상 준비돼온 것”이라고 말한다.

안태환 교수는 1999년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대통령이 집권한 ‘볼리바르 혁명’을 “좌파 지식을 가진 지식인, 정치 세력화된 노조, 기존의 사회주의 정당이 선도한 혁명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1989년 베네수엘라에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에 반대해 일어난 ‘카라카소’ 대시위 이후 이미 ‘주민평의회’ 등 공동체가 조직돼 있었다는 것이다. 현재 베네수엘라에는 5만여개의 마을 중 1만5000여곳에 주민평의회가 조직돼 있다. 이들은 차베스의 정책을 자유롭게 논쟁하고 비판하면서 직접 항의도 한다. 이러한 자기통치적 주민평의회와 조합운동이 20세기 현실사회주의가 지향하는 생산수단의 ‘전면적 국유화’보다는 ‘사회적 소유’를 점진적으로 늘려가는 방식의 혁명을 일궈냈다는 것이다. 결국 이들은 “혁명이 단순한 국가권력의 쟁취에 있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말하는 혁명은 세계를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상상하고 창안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황경상 기자)    

경향신문(11. 09. 05) 하버마스·푸코의 빈자리, 지 젝·가라타니가 채웠다

2000년대 한국사회에서 풍미한 사상가는 누구일까. 맨 앞줄에 슬라보예 지젝과 가라타니 고진이 자리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2000년대 이후 지젝의 저서는 23권, 가라타니의 저서는 12권이 번역됐다. 위르겐 하버마스와 미셸 푸코의 인기는 다소 떨어졌다. 하버마스와 푸코의 저서는 2000년대 이전에는 각각 16권, 11권이 번역됐으나 2000년대 이후에는 10권, 7권이 소개됐다. 이 밖에 자크 데리다의 저서는 2000년대 이전 7권, 2000년대 이후 8권으로 꾸준히 소개됐다. 조르조 아감벤과 알랭 바디우, 자크 랑시에르는 2008년 이후에만 7~8종의 번역서가 집중적으로 나와 한국 지식계에서 ‘떠오르는 스타’임이 증명됐다.

이 같은 현상은 천정환 성균관대 교수(국문학)가 계간 ‘실천문학’ 가을호에 기고한 ‘포스트-근대문학의 시대, 또는 연장전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소개됐다. 천 교수는 한국 지식계의 지형을 해외 사상가의 번역서 현황으로 살펴본 뒤 이 중 한국문학과 관련, 가장 의미 있는 지점으로 가라타니 고진의 저서 <근대문학의 종언>에 대한 다기한 반응을 살펴보았다. 

천 교수는 “한국 문학문화의 주체들이 ‘거부’를 포함해서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명제를 어떻게 수용했는가 하는데 2000년대 한국문학의 풍경 전반이 담겨 있다”고 전제했다. 그러면서 “당초 ‘종언’의 의미와 달리 문학활동이나 비평이 권력의 억압이나 자본의 침탈로부터 인간을 방어하는 데 바쳐지지 않고 ‘문학 자체’를 지키는 데 소용된 전도 현상은 ‘한국 근대문학의 죽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고 진단했다. 



<근대문학의 종언>은 2006년 번역, 출간된 후 사상서로는 특이하게 1만부가 판매됐다. 천 교수는 “1990년대 이후 탈정치화된 문학에 대한 분노가 이 책에 대한 관심으로 나타났다”고 해석했다. 아울러 이 책이 “추상적이고 거시적인 문학사 논의”였음에도 실제 논쟁은 거의 없었고, “문단시스템에 깊이 연루될수록 가라타니의 주장에 생래적 반감을 보인 반면, 현존 문학제도에 대해 비판적일수록 종언 테제의 유효성을 인정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설명했다. 

천 교수는 “종언이란 명제를 무시하거나 거부하는 문학판의 기득권자들, 오늘날 문단문학 재생산의 주체는 자본의 메커니즘에 철저히 종속돼 있거나 그 자체로 자본이 되어 있다”면서 “문학의 정치적 기능을 다른 방식으로 재구성하는 데 종언론이 쓰여야 함에도 과거로부터 유지돼온 문단권력을 유지하는 데 바쳐졌다”고 말했다.

한편 김정한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는 같은 계간지에 실린 ‘슬라보예 지젝, 사유의 반란’이란 글에서 한국사회에서 지젝 열풍의 원인을 소개했다. 김 교수는 “영화를 독특하게 분석하는 대중문화 비평가로 알려지기 시작한 지젝은 마르크스주의의 개조와 혁신이라는 알튀세르의 문제 설정을 계승했다”면서 “최근 한국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철학자인 발리바르, 라클라우, 바디우, 랑시에르 역시 알튀세르 학파의 일원이었다는 점에서 일관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지젝은 세계 자본주의의 근본적 변화의 전망이 불투명한 시대에 희망과 대안을 찾는 급진적인 흐름을 유지,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며 “2008년 촛불시위는 타인의 ‘믿음에 대한 믿음’(이데올로기)을 해체하라는 지젝의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지젝의 주장이 점점 더 한 탁월한 철학자의 ‘원맨쇼’로 비춰지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그의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가 어떻게 현실정치와 만날 수 있는가에 대한 실천적 차원의 고민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한윤정 기자) 

11. 09. 06.  

P.S. 혁명을 주제로 한 책을 몇권 더 골라봤다. 이중 <혁명의 현실성>의 원제는 <혁명의 리허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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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고르의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생각의나무, 2011)은 지지난주쯤 나온 책인데, 마땅한 소개기사가 뜨지 않았었다(그렇게 넘어가는 책들이 적지 않다). 다시 검색해보니 기사 하나가 뜨기에 스크랩해놓는다. 30년 전 책이지만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노동운동가 하종강 전 한울노동문제연구소 소장은 이렇게 평했다. "기존 노동운동 개념의 오류들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그의 분석은 현실사회에서 충분히 실현가능할 뿐 아니라 마르크스와 작별하지 않은 채 그를 뛰어넘고 싶은 활동가들에게도 충분히 귀감이 될 만하다."   

경향신문(11. 09. 03) 30년전 예견한 노동현실…프롤레타리아는 혁명 주체가 아니다

“한 세기 이상 동안, ‘프롤레타리아’ 사상은 자신의 비현실성을 은폐하는 데 성공했다. 현재 그 사상은 ‘프롤레타리아’ 자체만큼 시효가 지난 것이다.”

프랑스 신좌파의 주요 이론가인 앙드레 고르는 1980년에 쓴 책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에서 전통 마르크스주의가 해방의 주체로 제시한 프롤레타리아에 작별을 고한다. 프롤레타리아라는 계급이 이미 자본주의 가치관을 내면화한 ‘자본의 복제품’으로서 지배질서에 편입됐다고 보기 때문이다. 고르는 프롤레타리아의 대표자들이 ‘자본’에 의해 설치되어 있던 지배기구를 장악한다 해도, 그들은 자본의 지배와 유사한 것을 재생산할 것이고, 이어서 그들 스스로가 기능적 부르주아지(지배계급)가 되어 “계급의 이름으로 행하는 억압”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고르는 노동계급이 더 이상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없다며 대신 ‘신프롤레타리아’라고 불리는 비노동자들의 비계급을 혁명의 주체로 내세운다. 그가 말한 ‘비계급’은 자동화와 정보화에 의한 노동의 소멸과정에서 생산현장을 떠나게 된 사람들, 혹은 완전하거나 부분적으로 실업상태에 있는 임시직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이들은 노동계약과 노사 합의에 따라 안정된 지위를 보장받는 노동자들의 계급과 다르다. 고르는 “이런 전통적인 노동계급은 이제 특혜받는 소수층일 뿐”이라고 밝힌다. 그는 사회적·정치적 투쟁의 새로운 주제는 임금삭감 없는 노동시간 감소로 그 자체가 목적이고 보상인 자율적 활동을 최대한 확장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체성을 잃어버린 노동운동에 대한 비판이자 새로운 혁명의 주체와 과제를 제시한 이 책은 3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여전히 생명력을 발휘한다. 이 책의 부록으로 1978년에 쓴 ‘실업의 황금시대’라는 글에서 고르는 “자동화시대에는 경제가 성장하더라도 더 이상 고용창출이 생겨나지 않는다. 많은 경우, 경제성장으로 인해 심지어 고용이 감소한다”며 오늘날 ‘고용없는 성장’을 정확히 예견했다.

불치병에 걸린 아내를 20여년간 간호하다 생전에 함께 약속한 대로 파리 교외 시골마을의 작은 집에서 잠자듯 침대에 나란히 누워 삶을 자유의지로 마감한 앙드레 고르. 그는 사르트르가 ‘유럽에서 가장 날카로운 지성’이라고 평할 만큼 뛰어난 사상가였다. 그는 프랑스 68혁명에 큰 영향을 끼쳤고 일자리 나누기와 함께 재산이나 소득의 많고 적음, 노동 여부나 노동의사와 상관없이 개별적으로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균등하게 지급하는 기본소득의 필요성을 역설한 선구적인 노동이론가이기도 했다.(주영재기자) 

11. 09. 04.  

P.S. 앙드레 고르의 책은 <D에게 보낸 편지>, <에콜로지카>가 더 번역돼 있다. <경제적 이성 비판>도 소개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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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경 2011-09-04 23:36   좋아요 0 | URL
오래 기다리던 책이 나왔네요^^

로쟈 2011-09-05 08:23   좋아요 0 | URL
30년만입니다!^^

park6 2011-09-05 21:01   좋아요 0 | URL
아...앙드레 고르의 'd에게 보낸 편지'를 읽고 감동받은 기억이 나네요~ㅎㅎ

로쟈 2011-09-05 23:47   좋아요 0 | URL
닭살이었단 분들도 계시더군요.^^

허스키 2011-09-06 23:54   좋아요 0 | URL
'D에게 보낸 편지'는 아내가 직접 골라서 신혼여행에 가져가 함께 읽었던 책입니다. 불현듯 의자에 앉아 함께 햇빛 속에서 책을 읽으며 느끼던 그 바람이 그리워집니다.

로쟈 2011-09-07 17:10   좋아요 0 | URL
각별한 인연을 갖고 계시군요.^^
 

이미 공지한 내용이지만 이달에는 매주 금요일 저녁 19:00-21:00노원평생학습관에서 '가을, 러시아문학의 거장과 만나다'란 강좌를 진행한다. 어제가 첫시간이었고 푸슈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을 다루었다. 강의실을 가득 채울 만큼 많은 분들이 오셔서 주의깊게 들어주신 데 감사드린다. 강의의 교재로 다루는 작품 번역본에 대한 문의가 있어서 여기에도 목록을 올려놓도록 한다. 아래가 강의일정과 작품이다.    

1. 9월 2일_ 푸슈킨의 <예브게니 오네긴>  

2. 9월 9일_ 고골의 <코, 외투, 광인일기, 감찰관> 

 

3. 9월 16일_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  

4. 9월 23일_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5. 9월 30일_ 톨스토이의 <부활>  

 

11. 09. 03.  

 

P.S. 한편 9월 19일부터는 매주 월요일 저녁 19:00-21:00강서도서관에서 '러시아문학으로의 여정'이라는 타이틀의 강좌를 진행한다. 커리큘럼은 노원평생학습관 강좌와 동일하며 다만 마지막 6회에 체호프의 <귀여운 여인>(생각의나무)이 추가됐다. 단편 '귀여운 여인' 외 세 편의 희곡이 같이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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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03 16: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04 0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kimbechu 2011-09-04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원에서 선생님 강의를 듣는 청강생입니다. 지난 시간 재미있게 잘 들었습니다. 감사드려요. 부탁이 있어서요. '오네긴'이 운문소설이라, 번역을 하면 그 맛을 모르고 내용 중심으로만 읽게 된다 하셨잖아요. 저도 그래서 아쉬웠거든요. 그래서인데요, 선생님께서 다음 시간에 러시아어로 '오네긴'첫문장이나 가장 유명한 문장 하나만 러시아어로 직접 소리내어 읽어주시면 그 문장의 운율, 리듬 등만이라도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니, 다음 고골 시작하기 전에 살짝만 읽어주시면 안 될까요? 부탁드려요.

로쟈 2011-09-04 17:29   좋아요 0 | URL
ㅎ관심이 많으시네요.^^ 요즘은 오디오북으로도 다 들을수 있습니다. 처음 제사부터 1부는 http://rutube.ru/tracks/1970870.html?v=15b71df29ea8a7740c72b4bce546b9b3 에서 한번 들어보시길...

kimbechu 2011-09-04 23:23   좋아요 0 | URL
감솨. 근데 한참을 들어도 설명 없이는 이해불능이겠습니다요. 무슨 규칙같은 걸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라 너무 쉽게 착각했나봅니다.

로쟈 2011-09-05 08:23   좋아요 0 | URL
ㅎ러시아어 자체가 리드미컬해서 운문과 산문의 차이가 두드러지지 않을 수도 있지만, 밋밋한 한국어보단 훨씬 더 규칙적인 리듬감을 갖고 있습니다.^^

마일즈 2011-09-05 0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노원에서 강의들었는데요, 저는 세세한 내용보다 러시아문학을 접할 때 느끼는 낯설음에 관심이 많습니다. 실제로 주인공들의 말이나 러시아 독자들에게 향한 듯한 말들로 미루어 보면 자기들끼리 뭔가 감정의 교류를 하고 있는 거 같은데, 그런 교류가 이해가 안된달까요, 이해는 안가지만 그 정서가 꽤 흥미로와 보여서요. 저번 작품에 타치야나 꿈에 등장하는 곰이 하는 역할도 개인을 넘어 폭넓게 해석하면 그런 면이 좀 있지 않을까 싶구요...
예, 이것들은 강의 들으면서 든 생각들 적어본거 구요, 실제로 뵈니 사진보다 훨씬 좋아 보이시던데요. 고거 하나로도 즐거웠습니다 ㅎㅎ

로쟈 2011-09-05 08:21   좋아요 0 | URL
말씀하신 '교류'는 러시아문학의 일반적 특징이 아니라 푸슈킨의 문학의 특징입니다. 그리고 곰은 민속에도 많이 등장하는, 러시아인들에게 가장 친숙한 동물이기도 하지요.^^

2011-09-07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평생교육관에서 정기적인 강의는 없으신지요? 강의를 더 듣고픈데 강의중이신 대학이나 대학원에 입학하기는 좀 나이가 ,,,,, 해서요

로쟈 2011-09-07 17:11   좋아요 0 | URL
도서관 강의를 부정기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푸른역사아카데미에서도 강의를 하고 있는데, 그곳은 유료강좌입니다...

리테라텍 2011-09-09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에 강서도서관에서 선생님 강의를 들을 수 있어서 정말 기쁩니다! 벌써부터 마음이 두근두근 설렙니다 =)

로쟈 2011-09-10 10:38   좋아요 0 | URL
네, 저도 반갑습니다.^^
 

건축전문지 공간(526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매클래치의 <걸작의 공간>(마음산책, 2011)을 거리로 삼았다. 작가들의 집에 초대받은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그래서 조심스레 책장을 넘겨야 할 것 같은 인상을 주는 책이었다. 

    

공간(11년 9월호) 걸작의 공간

문학의 거장들은 어떤 집에서 살면서 글을 썼을까. ‘작가의 집’에 대한 관심은 물론 ‘집’보다는 ‘작가’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될 것이다. 그들의 사색과 일상, 그리고 무엇보다도 창작이 이루어진 공간에 대한 관심이다. 시인이자 예일대 영문학과 교수인 J. A. 매클래치의 <걸작의 공간>은 미국 문학사를 수놓은 대표적인 작가들의 집에 대한 ‘방문기’다. 원제는 ‘미국 작가들의 집(American Writers at Home)’이고, 번역본에는 ‘작가의 집에 대한 인간적인 기록’이란 부제가 붙었다. 화보집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풍부한 사진자료들이 이 기록에 실감을 부여한다.  

<작은 아씨들>의 저자 루이자 메이 올컷의 집 ‘오차드 하우스’에서 시작해 <풀잎>의 시인 월트 휘트먼의 ‘월트 휘트먼 하우스’까지 둘러보는 ‘미국 작가들의 집’ 방문기에서 저자가 특별히 방점을 찍는 건 ‘미국’이다. “미국은 항상 은둔자들이 스스로 새로운 길을 개척해나가는 고립된 사람들의 나라”였다는 생각에서다. 미국 작가는 작가이면서 동시에 미국인이기에 그런 운명에서 비껴나지 않는다. 그래서 저자 스스로는 “끊임없이 들썩이는 기복이 심한 나라, 미국에서 미국인들이 삶을 영위하고 무엇보다 일을 하는 장소로서 자기들의 집을 어디에, 무슨 이유로, 또 어떤 방식으로 지었는지 알려주는 책”이라고 말한다. 작가의 집은 미국적 삶과 창작이 서로를 비춰주는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저자가 안내하는 작가의 집은 21곳인데, 어떤 차례가 있는 건 아니다. 그의 걸음을 따라가는 독자도 마찬가지여서 평소에 관심을 갖고 있거나 좋아하는 작가의 집부터 먼저 둘러볼 수도 있고, 새러 오언 주잇(Sarah Orne Jewett)이나 플래너리 오코너(Flannery O'Connor)처럼 국내 독자들에겐 생소한 이들의 집을 아무런 ‘마음의 준비’ 없이 무작정 찾아가볼 수도 있다. 일단 발견하게 되는 것은 공통점이다. 책상이 놓여 있는 서재와 거실, 그리고 침실 등 예상할 수 있는 공간들이 방문객 독자를 맞이한다. 허먼 멜빌의 책상에 붙은 설명처럼 “어떤 작가의 집이든 중심에는 책상이 있다. 장식적이든 평범하든, 책상과 그것을 둘러싼 방은 그 자체로 하나의 풍경을 이루고, 아려한 아이디어나 마무리되지 못한 문단, 어른거리는 시의 연이 되고, 어쩌면 이미 출간된 책들을 가까이 둔 고요한 책장이 될 수도 있다.” 바로 이 책상들에서 <모비딕>과 <허클베리 핀의 모험>, <8월의 빛> 등이 쓰였다고 하면 한 번 더 눈길을 주게 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모두가 명작의 산실이란 점에선 공통적이긴 하지만 작가의 집은 저마다 개성을 갖고 있기도 하다. 물론 그 개성은 그 주인의 개성을 닮은 것이다. 한 곳에 안주하지 못하는 성격의 헤밍웨이는 종군기자로도 맹활약을 했던 만큼 전선의 참호도 창작의 공간으로 떠올리기 쉽지만 그의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같은 대표작은 플로리다의 키웨스트에서 쓰였다.  이 저택은 넓은 터에 스페인 식민지 양식으로 지어졌다. 헤밍웨이는 간결하고 건조한 스타일의 문장을 구사했지만 그의 집은 녹음이 무성하고 야자수가 우거졌다. 자주 여행을 다니면서 사고도 치고 폭음을 했지만 헤밍웨이는 ‘훈련된 작가’였고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에는 매일 아침 8시에 책상에 앉아서 오전 내내 글을 썼다. 그렇지만 결혼생활은 불안정해서 네 차례나 결혼하고 1954년 노벨상 수락연설에서 “글쓰기는, 기껏 잘해야 고독한 삶이다”라고 말한 작가가 헤밍웨이였다.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집으로는 코네티컷의 하트포드에 있는 마크 트웨인의 저택이 손꼽힌다. “나는 평범한 미국인이 아니다. 나는 유일무이한 미국인이다.”라고 말한 트웨인은 ‘증기선과 뻐꾸기시계 중간쯤의 모습’을 한 이 집을 가장 아꼈다. 3층에 있는 서재에는 당구대가 놓여 있어서 트웨인은 즐겨 게임을 하면서 아이디어와 플롯을 가다듬었다. 그는 아침을 거나하게 먹고 오전 11시경에 서재로 올라가서 저녁때까지 온종일 일하고 그렇게 쓴 작품을 가족들에게 읽어주었다. 하지만 그의 만년은 불행했다. 사업에 실패하고 재정적으로 파산한 상태에서 가장 아끼던 딸을 척수막염으로 잃은 그는 충격과 비탄에 빠졌고 하트포드의 집도 마침내는 처분했다. 트웨인은 “유머의 은밀한 근원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이라고 말했다.      

가장 슬픈 인생을 산 작가로는 허먼 멜빌도 뒤지지 않는다. 그가 산 집은 매사추세츠의 피츠필드에 있다. 자신이 ‘애로헤드(화살촉)’이라고 이름붙인 이 집에서 멜빌은 아침 8시에 일어나 헛간으로 가서 암소에게 호박 한두 개를 썰어주고 소가 고결하게 턱을 움직이며 먹는 것을 지켜본 다음에 작업실로 가서 일을 했다. 그는 거대한 그레이록산의 고래 같은 형태를 창문을 통해 바라보며 <모비딕>을 완성한다. 그의 나이 겨우 서른둘의 일이다. 하지만 그가 이 작품으로 벌어들인 수익은 고작 556.37달러였고, 이후에 결국 작가로서의 삶을 더 이상 유지하지 못해 일당 4달러의 세관원으로 근무한다. 그가 사망했을 때 <뉴욕타임스>의 부고란에는 “전에 작가였던 인물” ‘헨리 멜빌’이 죽었다고 짤막하게 언급됐다.

작가들의 집이 대개 시골에 있다는 점이 혹 눈에 띌지 모르겠다. 창작의 공간으로서 번잡한 도시보다는 조용한 시골을 선호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런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장 큰 이유는 대도시에 살았던 작가들의 집이 도시 재개발이나 새로운 집주인의 냉대로 사라졌다는 점이다. 일례로 <분노의 포도>의 작가 스타인벡의 집이라는 얘기를 듣고 새 주인은 ‘그래서요?’라고 말했다 한다. 책을 덮으며 한국 작가들의 경우는 어떨까 하는 궁금증이 생기는데, 마구잡이 개발로 우리가 잃어버린 공간 목록에 ‘걸작의 공간’도 포함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11.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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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영연방권 최고의 작품으로 꼽히는 살만 루슈디의 <한밤의 아이들>(문학동네, 2011)이 출간됐다. 그런 이유만으로도 '이주의 문학서'로 충분히 꼽을 만하다.   

  

한국일보(11. 09. 03) 환상·현실 넘나들며 풀어낸 인도 현대사

인도 현대사를 역동적으로 펼쳐내는 <한밤의 아이들>은 20세기 영연방권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히는 소설이다. 인도 출신의 살만 루슈디(64)가 1981년에 출간한 이 소설은 그 해 영연방에서 가장 권위있는 문학상인 부커상을 받았고, 1993년에는 부커상 제정 25년간 최고의 작품으로, 2008년에는 부커상 제정 40년간 최고의 작품으로 선정됐다. 역대 부커상 수상작 중에서 계속 최고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얘기다. 1989년 국내에 번역 출간됐으나 절판된 것을 이번에 다시 번역해 냈다. 



소설은 1947년 인도가 독립하는 하던 날인 8월 15일 0시 정각에 태어나서 신생 독립국 인도의 운명과 함께 하게 된 살림 시나이의 서른 해를 그린 작품. 신화와 역사, 환상과 현실을 넘나들 며 지극적 개인적 시각에서 인도 현대사를 풀어내는데, 이 작품만큼 현대 인도에 대해 폭 넓고 역동적인 서사를 들려주는 소설은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소설은 서른 살인 살림이 매일 밤 자서전을 쓰는 과정에서 '천일야화'의 세헤라자드처럼 연인인 파드마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으로 구성돼 있다. 인도가 독립하던 날 0시에서 1시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은 살림을 포함해 1,001명으로 '한밤의 아이들'로 불린다. 이들은 텔레파시, 보는 이의 눈을 멀게 하는 미모, 시간 여행을 하거나 성별을 마음대로 바꾸는 능력 등 신비로운 능력을 가졌는데 그들만의 의회를 조직해서 인도의 미래를 열기로 기획하지만 서로간의 갈등으로 계획은 무산된다. 이후 살림은 인도-파키스탄 전쟁으로 가족을 모두 잃고, 동-서 파키스탄 전쟁에 참전하며 인디라 간디가 선포한 비상사태 중에 강제로 정관수술을 받는 등 현대사의 굴곡을 겪게 된다. 이야기를 듣는 파드마는 독자를 대신해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의심을 나타내거나 역사적 사실을 점검하고 이야기가 진행되도록 독려하는 역할을 한다. 



루슈디는 다양한 인도 신화를 활용하고 기발한 언어 유희로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무거운 역사적 사건을 때로 코믹하고 재기발랄한 방식으로 해석한다. 예컨대 인도-파키스탄 전쟁의 숨은 의도는 살림과 '한밤의 아이들'의 능력을 지구표면에서 지워버리기 위한 것이었다는 식이다. 이런 식의 서술은 이후 인도에서 '루슈디의 아이들'이란 신진 작가군을 만들어내기도 했다.(송용창기자) 

11. 09. 03. 

 

P.S. 루슈디의 또다른 대표작 <악마의 시>(문학세계사)도 오랫동안 품절상태였다가 작년에 다시 나왔다. 이번 가을엔 루슈디를 독서목록에 올려놓아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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