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도 날짜를 맞추는지 10월이 되면서 기온이 쑥 내려갔다. 어제부턴 선풍기 바람도 이젠 춥게 느껴진다. '기운다'는 표현은 이럴 때도 쓸 수 있을 듯싶다. 어떤 기준으로도 '여름'은 갔다. '겨울'이 남았을 뿐이다. 유난히 추워질 거라는 '설'이 있지만 그보다는 밤이 점점 길어진다는 게 내가 체감하는 겨울이다(러시아만큼은 아니더라도). 10월마저 손에서 놓으면 겨울이 문턱이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 10월에 손에 들 만한 책들을 골라본다. 지난달부터 간행물윤리위원회의 좋은책 선정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게 돼 내가 고른 책도 포함돼 있다.    

 

1. 문학 

김미현 교수가 고른 책은 벤 라이더 하우의 <마이 코리안 델리>(정은문고, 2011)다. '백인 사위와 한국인 장모의 좌충우돌 편의점 운영기'가 부제. 그러고 보니 소설이 아니라 '외국에세이'로 분류되는 책이다. "저자인 벤 라이더 하우는 한국인 장모를 통해 한국 이민 사회의 그늘과 빛을 모두 경험한다. 생존과 성공을 위해 억척스럽게 일하면서도 비합리적이고 이기적인 속성을 동시에 지니는 장모 세대의 가치관과, 저자인 벤 라이더 하우의 합리적이지만 보수적이고 소극적인 청교도 백인 중산층 문화가 정면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란 소개를 읽으면 대충 그림이 그려진다.  

한국사회를 체험한 '외국인'의 에세이라고 하니까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의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노마드북스, 2011)도 생각난다. 엊그제 대학로 이음책방에 갔다가 손에 든 책이다. 눈에 띄기에 같이 계산한 책이 <1898, 문명의 전환>(이학사, 2011)이다. <남자의 탄생>과 <박정희 평전> 등의 저자 전인권의 6주기를 맞아 유고와 함께 그와 같이 공부했던 이들이 마무리한 글들을 묶었다. 부제는 '대한민국 시공간의 기원'. 문학 분야의 책은 아니지만 '한국과 한국인'이란 주제를 깊이 파고들어간 책으로 끼워넣는다.   

2. 역사 

김기덕 교수가 추천한 책은 <유홍준의 국보순례>(눌와, 2011). 군말이 필요없는 책이다. "이 책을 계기로 이제 국보와 보물도 역사학의 범주에서 다시 고찰하고 연구해야 하는 과제를 던져준 셈이다. 이래저래 유홍준 교수는 한국사의 지평을 넓혀주면서, 역사 연구자들에게 새로운 과제와 임무를 던져주고 있다."는 게 추천자의 촌평이다. '국보순례'니까 한국사이면서 미술사에 관한 책인데, 이런 경우에도 갈래는 모호하군. 내친 김에 한국미술사에 관한 신간들을 클릭해본다. <클릭, 한국미술사>(예경, 2011)와 <한국불교미술사>(미진사, 2011)가 올해 나온 책들이다. 작년에 1권이 나온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도 후속 권들이 계속 나오기를 기대해본다.  

   

3. 철학  

김형철 교수가 고른 책은 엔터니 플루의 <존재하는 신>(청림출판, 2011)이다. 사실 주제 자체는 전혀 흥미를 끌지 않는데, 저자가 영국에서는 무신론자고 꽤 유명한 인물이었나 보다. 그러다 '신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화제가 된 모양. "이 책의 저자 엔터니 플루는 소크라테스의 분석철학적 전통을 이어 받아 “증거가 이끄는 대로 따라 가서” 과거 합리적 무신론의 선봉장 역할을 하다 유신론 진영으로 투항한 철학자다."라고 설명한다. 신경과학자들이 <신은 뇌 속에 갇히지 않는다>(21세기북스, 2011)나 이어령의 <지성으로 영성으로>(열림원, 2011) 등이 비슷한 '커밍아웃' 형 책이다.     

물론 무신론의 보루는 플루가 비판하는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지만 무신론에 대한 입문서로는 줄리언 바지니의 <무신론이란 무엇인가>(동문선, 2007)이 좋을 듯싶다. 바지니는 인생의 의미를 다룬 <빅 퀘스천>(필로소픽, 2011)의 저자다. 지난달에 강의차 꼼꼼히 다시 읽었는데, 처음 읽을 때보다도 더 재미있었다.   

계절을 타는 이라면 낙엽의 계절인지라 삶의 의미에 대해서 한번쯤 물어봄직한데, <빅 퀘스천>과 같은 시리즈의 책으로 폴 새가드의 <뇌와 삶의 의미>(필로소픽, 2011), 그리고 가미야 미에코의 <삶의 보람에 대하여>(필로소픽, 2011)도 읽어봄직하다. 특히 일본의 영문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가미야 미에코는 버지니아 울프 연구와 푸코 번역으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빅 퀘스천>에서도 언급되는 존 코팅엄의 <삶의 의미>(동문선, 2005)은 바지니보다는 플루와 좀더 가까운 입장에서 삶의 의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자 한다. 

4. 정치/사회 

마인섭 교수가 고른 책은 이종은의 <평등, 자유, 권리>(책세상, 2011)다. <언어와 정치>(인간사랑, 2009), <정치와 윤리>(책세상, 2011) 등에 이어지는 책으로 저자는 독자적인 정치철학을 구축해나가고 있는 학자. 학술적인 성격의 책이긴 한데, 추천자는 그 의의를 이렇게 짚었다. "한국 민주주의가 자유의 평등화라는 정상적인 길을 밟아오지 못하였다는 저자의 관찰은 새롭기도 하고 제법 흥미로운 쟁점이기도 하다. 평등, 자유, 권리가 한국 사회에서 어떤 의미로 수용되고 있는가를 짚어본 시도는 아주 흥미롭다. 저자는 교육 평준화, 수능 등급제, 지역 할당제의 교육정책의 쟁점들에 나타난 평등의 문제를 자유주의의 입장에서 살펴보고 평등의 복잡한 개념과 달성 가능성을 논하였다."  

 

사실 10월은 서울시장 보선이 있는 정치의 달이기도 하므로 정치인들의 책과 정치평론 범주에 속하는 책들이 대거 쏟아져나오지 않을까 싶다. 그중에서도 단연 베스트셀러감은 김어준의 <닥치고 정치>(푸른숲, 2011)다. '나꼼수 세대'의 열광적인 지지와 <닥치고 정치>가 한국 정치지형에 지각변동을 가져올 수 있을지 주목된다. 한겨레의 인터뷰 연재를 모은 한홍구, 서해성의 <직설>(한겨레출판, 2011), 그리고 손석춘의 <새로운 바보를 기다리며>(21세기북스, 2011)도 '지금, 여기'에 관한 책들이다.   

5. 경제/경영 

박원암 교수가 고른 책은 프릭 버뮬렌의 <비즈니스의 거짓말>(프롬북스, 2011)이다. 사실 비즈니스는 관심사가 아니가 관련서를 읽을 일이 거의 없지만, 이 책은 흥미를 끈다. 추천자에 따르면 기존의 책들과는 다른 얘기를 하고 있어서다. "저자는 이 책이 어떻게 하면 비즈니스에서 성공하는지 알려 주는 시중의 책들과 다름을 강조한다. 저자는 철저한 연구와 입증된 자료에 근거하여 성공을 장담하는 법칙은 없음을 독자들에게 보이려 한다." 그러니 '성공'을 장담한다면, 다 '거짓말'이다. 범람하는 비즈니스 책들 가운데 군계일학으로 꼽아둘 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론 거짓말 유혹은 강력하다. 거짓말 같지 않기 때문이다. '충분한 시간과 정보는 사치다! 지금 필요한 것은 즉각적인 소통과 실행이다!'라고 선동하는 <실시간 혁명>(더숲, 2011)은 어떤가. '급변하는 소셜미디어와 스마트의 시대, 기업과 조직은 무엇을 준비하고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란 부제가 즉각적인 구입을 선동한다! '비즈니스 패러다임을 바꾸는 모바일 혁명'을 모토로 한 척 마틴의 <서드 스크린>(비즈니스북스, 2011)도 골라놓고 보니 강적이다. 그래도 기본은 '비즈니스의 거짓말'에 주의하라는 것.    

6. 과학  

김웅서 한국해양연구원 선임연구본부장이 추천한 책은 <조복성 곤충기>(뜨인돌, 2011)다. 우리에게도 이런 곤충기가 있었다는 걸 알게해주는 책인데, "이번에 발간된 <조복성 곤충기>는 1948년 을유문화사에서 『곤충기』라는 이름으로 선보였다가, 63년 후에 다시 세상에 태어났다. 그러나 단지 옷만 바꿔 입고 출연한 것은 아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설명에 나오는 곤충의 그림도 새로 곁들이고, 엮은이의 자료 발굴 노력으로 내용도 추가되고, 또 곤충 전문가들이 꼼꼼하게 감수하였다." <파브르 곤충기>를 읽었다면 <조복성 곤충기>도 읽어볼 일이다. 곁들여 휴 래플스의 <인섹토피디아>(21세기북스, 2011)는 어떤가. 말 그대로 '곤충 백과사전'. 개인적으로 어제 주문해놓고 오늘 배송을 기다리고 있는 책가운데 최고의 기대작이다. 이상교의 <곤충만세>(미세기, 2011)은 그림을 곁들인 동시집이다. 아빠가 <인섹토피다아>를 읽을 때 아이는 옆에서 <곤충만세>를 읽는 풍경을 잠시 떠올렸다.    

 

7. 예술    

이주은 교수가 고른 책은 정병모의 <무명화가들의 반란, 민화>(다할미디어, 2011). "저자는 민화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자유로움을 꼽는다. 그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는데, 하나는 관례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는 신분의 자유로움에서 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래의 문화가 역사의 전면에 부각되는 18세기라고 하는 시대적 자유로움에서 오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같은 저자의 책으로 <미술은 아름다운 생명체다>(다할미디어, 2001), <한국의 풍속화>(한길아트, 2000) 등도 눈에 띈다. 이미 10년 전 책들이군. 

 

개인적으론 최근에 아르코미술관의 '몹쓸 낭만주의'전 세미나 등에 참여하면서 한국 현대 작가들의 작업에 다시 관심을 두게 됐다. 그래서 관련서 몇권을 주문해놓은 상태인데, 이진숙의 <미술의 빅뱅>(민음사, 2010), 권근영의 <나는 예술가다>(세미콜론, 2011), 김정환의 <어떤 예술의 생애>(호미, 2011) 등이다. 더불어, 미술이론서와 미술사 관련서들도 이 참에 '업뎃'을 했다. 애서가들이 주기적으로 또 해야 하는 일이 이런 업뎃이다.   

 

8. 교양

교양분야의 책은 내가 골랐는데, 석영중 교수의 <뇌를 훔친 소설가>(예담, 2011)가 첫 책이 됐다. 간단한 소개는 이렇게 적었다. 

‘문학이 공감을 주는 과학적 이유’라는 부제가 얼핏 문학적 감동의 뇌과학적 원리를 떠올리게 하지만 초점은 문학과 뇌과학(신경과학)의 만남이고 접점이다. 어디서 만나는가. 인간에 대한 이해와 의미 있는 삶의 탐색이라는 지점에서 만난다. 책은 흉내, 몰입, 기억, 변화라는 네 가지 키워드를 통해서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과 함께 그러한 조건하에서 ‘의미 있는 생존’이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뇌과학과 문학, 어느 한 쪽만을 편독해 온 독자라면 보다 균형 잡힌 교양을 위해 길잡이로 삼을 만하다.

이 책을 읽다가 뇌과학서를 몇권 더 구입했는데, 노먼 도이지의 <기적을 부르는 뇌>(지호, 2008)과 닐 레비의 <신경윤리학이란 무엇인가>(바다출판사, 2011) 등이 그런 경우다.   

 

9. 실용 

손수호 논설위원이 추천한 책은 유경숙의 <유럽 축제 사전>(멘토르, 2011). ‘28개 국 101개의 유러피언 페스티벌 속으로 안내하는 책’, ‘열정과 전통, 파격이 살아 숨쉬는 유럽 축제의 모든 것을 담은 책’이란 문구가 책의 내용을 말해준다. 유럽 축제 가이드북. 한때 유럽축제문화에 대한 책들이 여럿 나온 적이 있었는데, 다시 찾으니 <유럽의 축제문화>(연세대출판부, 2003)과 박종호의 <유럽음악축제 순례기>(한길아트, 2005) 정도를 건지겠다. 하긴 수확의 계절은 축제의 계절이기도 했으니, 기분을 좀 내보는 것도 좋겠다. 정말로 유럽에까지 가야 하는 건가?..  

10. 중국의 지식인 

내 맘대로 고른 주제는 '중국의 지식인'이다. 최근에 나온 몇권의 책 때문인데, 올해 관심을 갖고 주섬주섬 책을 모아오던 아이템이어서 넙죽 구입했다. 국민대학교 중국인문사회연구소에서 펴낸 책 세 권이다.  

 

거기에 왕후의 책 세 권도 더 보탤 수 있겠다. 순서대로 하면, <새로운 아시아를 상상한다>(창비, 2003), <죽은 불 다시 살아나>(삼인, 2005), 그리고 <아시아는 세계다>(글항아리, 2011)이다.   

개인적으론 러시아 지성사에 대해서도 이만한 규모의 책들이 출간되면 좋겠는데, 그나마 최근에 나온 <러시아 문화사 강의>(그린비, 2011)가 기본서의 공백을 채워주는 책이고, 이사야 벌린의 <러시아 사상가>(생각의나무, 2008)과 올랜도 파이지스의 <나타샤 댄스>(이카루스미디어, 2005) 이후에 아직 특별한 '업뎃'은 이루어지지 않은 듯싶다. 20세기 지성사에 대해서라면 더더욱 백지 상태여서 아쉽다. 

11. 10. 01. 

   

P.S. '이달의 읽을 만한 고전'은 플라톤의 <국가>를 골라놓는다. 부분적으로야 읽곤 하지만, 완독한 적은 없는데, 이번에 나온 에릭 해블록의 <플라톤 서설>(글항아리, 2011)이 자극이 됐다. 다시 읽고 다시 생각해보면 좋겠다 싶다. 그래서 <국가>와 관련된 책을 또 모으고 있는데, 네틀쉽의 <플라톤의 국가론 강의>(교육과학사, 2010)도 그중 하나다. 1925년에 나온 책이니 정말 오래 전 책이고, 책의 토대가 된 강의는 한술 더 떠서 1887년과 1888년 초에 이루어졌다고 한다. 책은 국내 교육학 전공자들이 옮겼다.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확산되고 깊어진 건 역설적으로 현 정부의 '치적'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싶다. 내달에 있을 정치철학 강의도 준비할 겸 두 종의 <국가란 무엇인가>도 이달의 읽을 책 목록에 들어 있다. '토건국가 대한민국의 슬픈 자화상'을 그린 최병성의 <대한민국이 무너지고 있다>(오월의봄, 2011)는 또다른 방식으로 국가란 무엇인지 묻는 책이 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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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01 10: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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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01 19: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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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이징하와 호모 루덴스

한겨레에서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지면사정으로 두달인가 쉬다가 다시 시작하는데, 너무 오랜만인지 '로자의 번역서 읽기'라고 나갔다. 첫문장에도 오타가 있어서 교정해놓는다(아침에 부랴부랴 써서 보냈으니 오타가 없을 리 없다). 요한 하위징아의 <호모 루덴스>를 대상으로 삼았다. 현재 두 종의 번역본이 나와있는데, 한겨레 지면에는 까치판이 소개됐다. 두 번역본을 다 확인하며 썼지만 주로 인용한 건 나중에 나온 연암서가판이다.  

  

한겨레(11. 10. 01) 놀이와 ‘유치한 놀이’의 차이점

인간이 ‘생각하는 동물’로만 규정될 수 없으며 ‘놀이하는 동물’이기도 하다고 주장한 이는 네덜란드의 역사학자 요한 하위징아다. 알다시피 <호모 루덴스>란 저작이 낳은 명명이다. 저자는 놀이가 문화보다도 더 오래된 것이며 인간 사회의 중요한 원형적 행위에는 처음부터 놀이의 요소가 가미돼 있었다고 말한다. 종교와 정치는 물론 심지어 전쟁에서도 놀이적 요소를 식별해낸다. 그렇게 하위징아는 우리 자신을 놀이하는 인간으로 새롭게 바라보도록 제안한다.

그러한 제안과 더불어 <호모 루덴스>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현대 문명에 대한 유감이다. ‘현대 문명에서 발견되는 놀이 요소’라는 마지막 장은 놀이를 배척한 19세기 이후 오늘날의 문명이 예전 시대가 갖고 있던 놀이의 특성을 많이 상실했다는 진단과 염려로 채워져 있다. 판단의 척도는 진지함이다. 진지한 척과는 구별되는 진지함이야말로 놀이에서의 유희정신과는 대립되기 때문이다.

스포츠를 예로 들자면 19세기 후반부터 스포츠는 점점 더 진지한 색깔을 띠기 시작했다. 전문화되고 제도화되면서 순수한 놀이적 특징을 점점 잃게 됐다. 아마추어와는 달리 프로, 곧 전문선수의 정신은 더이상 순수한 놀이 정신이 될 수 없다는 게 하위징아의 생각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포츠를 현대 문명의 가장 뚜렷한 놀이라고 보는 일반적 시각에 그는 동의하지 않는다. 더이상 어른이 동심으로 다시 돌아가는 그런 게임이 아니라는 판단에서다. 체스와 카드놀이가 점점 진지해지는 경향에 반대하는 것은 당연하다. 놀이와 도박의 차이는 진지함의 유무에 있다.

사회생활, 특히 정치와 관련해서도 하위징아의 염려는 이어진다. 가장 큰 문제점은 놀이가 아닌 것이 놀이처럼 보이는 경향이다. 놀이인 척하는 거짓된 놀이를 그는 ‘유치한 놀이’(Puerilism)라고 부른다. ‘유치주의’라고 해도 좋겠다. 20세기 전반기에 만연한 유치함과 야만성의 결합을 지칭하는 말이다. <호모 루덴스>가 쓰인 1938년은 독일에서 히틀러의 나치가 득세하고 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던 시기였다. 전쟁을 정치의 연장이자 진지한 정치의 유일한 형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거꾸로 ‘놀이로서의 전쟁’이란 생각이야말로 유치하게 여겨졌을지 모른다. 국가들 간의 관계는 ‘진지한’ 관계라고 믿기 때문이다.

무엇이 진지한 관계인가. 하위징아는 정치를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것이라고 정의한 카를 슈미트의 사상을 표적으로 삼는다. 슈미트에게서 적은 내가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나의 앞길을 가로막는 자, 그래서 파괴돼야 마땅한 자이다. 그렇게 되면 적은 경쟁이나 경연에서의 라이벌과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오직 절멸 대상으로만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렇듯 정치적 공간에서는 적과 동지만 있을 뿐이라는 주장을 하위징아는 “야만적이고 병리적인 망상”이라고 비판한다. 그런 관점은 인류의 진지한 관심사가 평화가 아니라 전쟁일 때만 성립할 것이다. 하위징아가 보기에 슈미트 식의 ‘진지함’은 우리를 야만의 단계로 끌어내릴 뿐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현대의 전쟁은 놀이와의 연계를 모두 잃어버렸고 하위징아의 염려는 세계대전의 참화를 막지 못했다. ‘놀이하는 인간’에 대한 그의 기대가 헛된 것이었을까.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는 호모 루덴스인가 자문한다면, ‘놀이란 무엇인가’란 질문과 함께 ‘진지함이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 하위징아 자신이 그렇게 물었다. 우리가 유희적이길 멈추고 진지해지기 시작할 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야만에 더 가까워진다는 것이 <호모 루덴스>가 던지는 메시지이다. 

11. 10. 01. 

P.S. 기사에서 ‘유치한 놀이’(Puerilism)는 연암서가판의 번역이며 까치판은 '미숙성'이라고 옮겼다. '유치주의'란 번역어는 나의 제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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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01 00: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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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01 00: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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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01 01: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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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대표적 지식인으로 꼽히는 왕후이의 신작이 출간됐다. <아시아는 세계다>(글항아리, 2011). 왕후이의 책들을 이번에 나온 <20세기 중국의 지식인을 말하다>(길, 2011) 등과 같이 묶어서 리스트로 만들어놓는다. 기사는 <아시아는 세계다>에 관한 것이다.   

중국을 대표하는 정치사상가 중 한 사람인 왕후이가 지난 15년간 쓴 논문을 엮었다. 패권국가 미국을 위협하는 중국의 지식인으로서 자의식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티베트 문제를 보자. 티베트 정신과 철학에 주목하며 티베트 독립의 당위성에 힘을 싣는 서구 언론의 시각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민족국가를 주권 단위로 인정하는 시스템은 서양식 ‘제국주의적 승인 정치’를 아시아 지역으로 확장한 것에 불과하다고. 류큐(오키나와)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중국에 조공한 조공국이었음을 강조한다. 저자는 오리엔탈리즘을 통해 규정돼 온 아시아의 근대사를 재조명하기 위해 애쓰지만 독자는 서양 제국주의 논리를 들어낸 자리에 중화주의의 새로운 얼굴이 들어섰음을 깨닫고 놀란다.(국민일보)

8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아시아는 세계다
왕후이 지음, 송인재 옮김 / 글항아리 / 2011년 10월
25,000원 → 22,500원(10%할인) / 마일리지 1,250원(5% 적립)
2011년 09월 29일에 저장
절판
고뇌하는 중국- 현대 중국 지식인의 담론과 중국 현실, 중국학총서 1
왕후이 외 지음, 장영석.안치영 옮김 / 길(도서출판) / 2006년 1월
28,000원 → 25,200원(10%할인) / 마일리지 1,400원(5% 적립)
2011년 09월 29일에 저장
품절
새로운 아시아를 상상한다- 동아시아의 비판적 지성
왕 후이 지음, 이욱연 외 옮김, 이욱연 대담 / 창비 / 2003년 10월
12,000원 → 11,400원(5%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양탄자배송
밤 11시 잠들기전 배송
2011년 09월 29일에 저장

죽은 불 다시 살아나- 현대성에 저항하는 현대성
왕 후이 지음, 김택규 옮김 / 삼인 / 2005년 3월
29,000원 → 26,100원(10%할인) / 마일리지 1,45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1월 5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11년 09월 29일에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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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원고가 몰린 날이어서 아침에 부랴부랴 작성했는데, 엊그제 배송받은 제임스 팔레의 <유교적 경세론과 조선의 제도들>(산처럼, 2008)의 한 대목을 거리로 삼았다. 책은 사실 두어 달 전부터 장바구니에 넣어 두고 오래 벼르다가(두 권이라 고가이기도 하고) 구입한 것이기도 하다. 에드워드 와그너의 <조선왕조 사회의 성취와 귀속>(일조각, 2007)이 다음 차례로 벼르고 있는 책이다... 

 

경향신문(11. 09. 30) [문화와 세상]조선 과거제와 사회개혁 

서평을 자주 쓰고 있기에 서평가란 직함으로도 불리지만 일이 아닌 증상으로 분류하자면 나는 책중독자에 속한다. 대개 이들은 “돈이 생기는 대로 우선 책을 사고 그 다음에 옷을 사 입으리라”고 한 에라스무스의 충고를 따르는 자들이다. 주체하지 못할 만큼 책을 사들여서 집안 곳곳에 쌓아두고 손에 잡히는 대로 읽어보다가 다시 꽂아두길 반복하는 게 그들의 주요 일과다. 예전에는 책이라면 닥치는 대로 긁어모으는 귀족형 책중독자도 있었지만 재정을 고려해야 하는 ‘평민 책중독자’는 대개 특정 관심분야에 집중하는 경우가 많다. 혹은 몇 가지 주제의 책에 유독 탐을 낸다.

너무 읽을 게 많다는 이유로 젊은 시절에 일부러 제쳐놓았던 분야가 동양고전과 한국사 쪽이었는데, 인생 반고비를 넘기다 보니 더는 미루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오래 벼르다가 최근에 큰 마음을 먹고 구입한 것이 제임스 팔레의 <유교적 경세론과 조선의 제도들>이다. 원서가 1280쪽에 이르는 방대한 저작으로 국외 학자의 한국사 연구를 대표하는 업적 가운데 하나다. 벼슬길에 나가지 않은 유학자로 전라도 부안에 은거하며 <반계수록>을 저술한 유형원을 이 서양학자는 20년 넘게 탐구의 대상으로 삼았고, 그 결과로 나온 것이 ‘유형원과 조선 후기’란 부제의 이 책이다. <반계수록>은 1670년에 완성되지만 생전에는 주목받지 못하다가 저자 사후 영조 때인 1770년에야 간행된다.  



하지만 제임스 팔레는 <반계수록>을 독창적인 경세론과 제도개혁론을 펼친 대표작으로 간주하며 높이 평가한다. 그의 이러한 안목과 필생에 걸친 연구가 없었다면 유형원에 대한 지금의 평가는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팔레의 저작 때문에 <반계수록>도 읽어보겠다는 욕심을 갖게 된 책중독자에게는 말이다.

벼르던 책을 손에 넣게 되면 잠시 어루만지다가 필요할 때 읽기 위해 고이 책장에 꽂아두는 게 보통 책중독자들이 하는 일이지만 간혹 일부를 읽어보기도 한다. 한국사회의 신분제에 관심을 갖고 있어서 펼쳐본 대목에서 저자는 조선의 과거제를 이렇게 정리한다. “요컨대 국가는 거의 모든 범주의 양인이 과거를 치르고 관직에 등용될 수 있게 함으로써 조선 건국 이전이나 16세기 이후보다 신분을 상승할 수 있는 가능성을 좀더 확대시켰지만, 양반은 조상의 신분에 상관없이 양인들이 새로이 올라갈 수 있는 집단이 절대 아니었다.”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에서 사회개혁의 방향은 양반이 가진 세습적 특권을 약화시키고 좀더 개방적인 사회를 만드는 것이었다. 양반가문에 태어나는 것만으로도 사회적 지위와 부, 그리고 권력과 권위를 보장받았고, 엘리트 코스의 훌륭한 교육을 받아 과거에 급제하여 높은 관직에 오르면 그 특권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었다. 팔레의 스승인 에드워드 와그너의 연구에 따르면 문과 급제자를 배출한 750개 가문 중에서 36개 가문이 전체 합격자의 53퍼센트를 배출했다. 과거제는 양반이 아닌 양인에게도 출세의 기회를 부여한 제도였지만 실제 결과는 그렇듯 일부 가문에 편중되었다. 이유가 없지 않다. 양인도 얼마든지 과거에 응시할 수는 있었지만 양반가문과 같은 경제력이 없었기에 책을 구입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그들이 공부했던 지방의 서당이나 향교는 수준이 너무 떨어져서 사설 교육기관이나 가정교사에게 배우는 양반 자제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힘들었다. 능력 본위의 인재 선발제도였지만 결과적으로 과거제는 양반가문의 존속에 오히려 기여했다. 결국 조선의 사회개혁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것이 조선의 패망과 무관하지 않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

11. 0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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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사람 2011-09-29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임스 펠레의 (James B. Palais) Confucian Statecraft and Korean Institutions: Yu Hyongwon and the Late Choson Dynasty 의 번역이 나왔군요. 엄청난 가격과 두께에 놀라 구경만 했던 책인데... 미국에서는 아마 1000권도 안 팔렸을 듯 합니다. 도서관에만 깔릴만한 책이죠. 어쨌건 이런 책을 번역해내는 한국의 저력에 놀랍니다. 출판사가 손해를 보지 않았으면 합니다.

로쟈 2011-09-29 23:13   좋아요 0 | URL
나온 건 몇년 됐습니다. 제가 오래 벼르다 구입한 거구요. 읽을 여유를 내보려고 합니다...

미국사람 2011-10-01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랬군요. 어쨌건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그런데 책값이 너무 비싸네요. 상하권하면 10만원이 넘으니... 쩝. 하긴 아무나 읽을 책은 아니니 싸게 팔 수는 없을 것 같긴 합니다만....
 

그린비출판사 블로그에서 <애도와 우울증>(그린비, 2011) 저자 인터뷰 기사를 옮겨놓는다(http://greenbee.co.kr/blog/1536). 추석 연휴 전주에 동영상 인터뷰를 가졌는데, 내용이 정리돼 올라왔다. 책소개를 겸하고 있으므로 러시아문학에 관심 있는 분들은 참고하시길. 

  

1. 러시아 문학을 읽고 즐기는 입장에서 본다면, 푸슈킨과 레르몬토프의 매력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저는 레르몬토프에게 '고독의 시인'이라는 별칭을 붙였는데, 그는 뭔가 좀 순정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레르몬토프에게는 어떤 본질적인 고독, 외로움이 있다는 생각을 해요. 물론 사회적인 배경도 이유가 있겠지만 레르몬토프의 불행한 가족사에서 기인하는 부분도 있겠지요. 제가 강의시간에 간혹 우스갯소리로 레르몬토프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레르몬토프는 1814년에 태어나서 1841년에 죽는데, 러시아에서는 작가들의 100주년, 200주년에는 성대한 기념을 합니다. 그런데 레르몬토프 탄생 100주년인 1914년에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지요. 서거 100주년인 1941년에는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요. 저는 그래서 레르몬토프의 탄생 200주년인 2014년은 조금 주의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러시아에 또 무슨 변고가 있지 않을까.(웃음) 레르몬토프는 유언도 「나 홀로 길을 나선다」이런 제목의 시였죠. 이렇게 생전에 고독한 작가였고, 사후에도 고독한 작가에요.
 
푸슈킨은 굉장히 간명하고 간결합니다. 그래서 푸슈킨에게는 '간결성의 미학'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푸슈킨은 작품을 읽으면 읽을수록 복잡해요. 뭔가 많은 것을 말하고 숨겨놓은 작가이기 때문에 연구자들에게는 굉장히 매력이 있습니다. 연구거리가 많기 때문이죠. 그래서 연구서나 연구논문이 많이 나오는 편입니다. 그런데 국내 독자들이 번역으로 그의 작품을 읽을 때에는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에 비해 조금 심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푸슈킨은 주 장르가 시, 운문, 서정시 이런 종류였고, 드라마도 조금 있지만 독자들이 접근하기에는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직 국내독자들에게는 푸슈킨의 문학이 원래 가지고 있는 크기만큼 잘 전달되지 않는 것 같아요.  

2. 푸슈킨과 레르몬토프에 관심을 갖고 연구대상으로 삼게 된 계기가 있으신지요?

국내에는 덜 알려진 편이지만, 푸슈킨은 러시아문학에서 압도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러시아 문학 전공자들에게는 지명도가 떨어지는 편이 아닙니다. 레르몬토프 역시 낭만주의의 대표적인 시인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을 다루는 것은 특이한 편은 아니지요. 다만, 두 사람을 비교하는 것은 조금 드문 편입니다. 서구에서는 두 사람에 대한 비교 연구가 조금 있지만, 국내에서는 많지 않습니다. 제가 석사논문으로 두 시인이 쓴 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의 주인공 오네긴과 『우리 시대의 영웅』의 주인공 페초린을 비교하는 논문을 썼어요. 그래서 박사논문은 자연스럽게 그 연장선이 되었던 것도 있습니다. 했던 주제를 다시 하는 것이 편하기도 했고, 책 머리에도 썼지만 이 논문을 쓸 때 개인적인 특수한 사정도 있었죠. 이런 이유들 때문에 이 주제를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3. 책 제목이기도 한 '애도와 우울증'은 프로이트가 제시한 정신분석학 개념으로 알고 있습니다. '애도'와 '우울증'이 어떻게 다르고, 문학작품에서 어떤 차이를 불러오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프로이트 전집 번역본에는 '슬픔과 우울증'이라고 되어 있어요. 그런데 저는 '슬픔'이 너무 광범위하고 막연하기 때문에, '애도'라고 한정해서 이야기하는 게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보통 '애도'는 죽은 자에 대한 것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좀더 일반화시켜서 무언가를 상실했을 때의 정서적 반응을 애도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프로이트는 상실에 대한 두가지 태도가 있다고 보았는데, 그것이 애도적인 반응과 우울증적인 반응이에요. 애도적인 반응은 어떤 대상이 상실되었다는 현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현실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어떤 과정이 필요한데 그 과정이 '슬픔'인거죠.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눈물이 마르듯 슬픔도 영원하지는 않지요. 슬픔이 추슬러지는 과정을 '애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울증은 그런 현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부인하는 태도에요. 그리고 상실의 원인을 자기 자신한테 귀속시키지요. 이런 과정이 우울증으로 나타나는데, 이런 우울증에는 개인차가 있는지 아니면 케이스 각각에 해당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프로이트는 이러한 두 가지 타입이 있다고 얘기했지요.

낭만주의 시인들에게는 보통 어떤 이상, 현실 너머 세계에 대한 동경이 기본 정조입니다. 그래서 현실에 부재하는 '이상화되지 않은 현실'에 대한 정념이 중요하게 다뤄지지요. 때문에 낭만주의 시인들에게는 이러한 '상실'에 대처하는 두 가지 태도가 지배적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푸슈킨과 레르몬토프에게는 과연 어떻게 나타날까 이런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논문을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 대략 구도가 맞춰질 것 같다는 감은 조금 있었어요. 실제로 논문을 쓰는 과정은 작품 속에서 제 생각을 확인해가는 과정이었는데 의외로 잘 맞아떨어졌지요. 원래는 두 시인의 작품 전반에까지 애도적 반응과 우울증적 반응을 적용하려고 했는데 기한과 분량의 제약 때문에 나중을 기약하며 마무리를 했습니다. 그래서 기회가 된다면 두 시인의 작품 일반까지 확장해서 쓰고 싶다는 생각도 갖고 있습니다.  

4. 푸슈킨과 레르몬토프를 각각 애도적 유형과 우울증적 유형으로 분류하고 이들을 러시아 근대문학의 정념론적 기원으로 평가하셨는데, 두 시인이 어떻게 다른 '두 기원'이 될 수 있었는지 설명 부탁드립니다.

러시아에서는 푸슈킨과 레르몬토프를 모두 낭만주의 시대를 살았지만 리얼리스트가 되는 것으로 평가를 해요. (소비에트 문학비평의 영향으로) 낭만주의와 사실주의(리얼리즘)에는 우열관계가 있기 때문에 사실주의 이전 단계로서의 미숙한 단계를 낭만주의로 보는 것이죠. 낭만주의자가 성숙하면 다 리얼리스트가 되는 것으로 생각하죠. 두 작가의 작품에 그런 면이 없는 편이 아니기 때문에 리얼리스트가 되는 방향으로 이해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저는 레르몬토프가 대표하는 낭만주의 사조의 독자성을 조금 더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사실 푸슈킨은 문학정신적으로는 낭만주의를 넘어선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푸슈킨은 낭만주의 시대를 살았고, 당시에는 '리얼리즘'이라는 말이 러시아에 없었기 때문에 그는 '진정한 낭만주의'라는 말을 써요. 반면 레르몬토프는 자신의 낭만주의를 '진정한 낭만주의'라고 생각하죠. 레르몬토프가 푸슈킨의 낭만주의를 '성숙'이라고 포장되지만 '변절'이라고 생각하는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푸슈킨 식의 낭만주의와 레르몬토프 식의 낭만주의는 서로 다른 태도를 갖고 있습니다. 

레르몬토프의 주제인 '영원한 사랑'을 예로 들면, 푸슈킨은 영원한 사랑은 믿지 않아요. 푸슈킨은 사랑이 변하고 성숙해가는 것으로 생각하지요. 레르몬토프와 푸슈킨은 같은 낭만주의 시인으로 묶이지만, 각기 다른 태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부분을 비교해서 보여주는 것이 낭만주의에 대한 이해나 두 시인에 대한 이해와 평가에도 더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5. 러시아 문학 작품을 정신분석학으로 읽어 내는 시도가 많은지 궁금합니다.

낭만주의 3대 작가 중에 니콜라이 고골이 있는데, 고골은 일찍부터 정신분석적 접근대상이었어요. 그의 작품을 읽어보면 작가를 카우치(안락의자)에 좀 눕혀 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러시아에서는 그러한 정신분석학적 접근법 자체를 좀 싫어하는 편이에요. 정신분석학적 작가 심리학 등에 거부감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접근법으로는 연구를 잘 하지 않고, 권장하지도 않아요.

대신 영어권에서는 이러한 방식의 연구가 조금 있어요. 푸슈킨의 창작심리에 대한 연구가 약간 있고, (참고문헌에도 소개했지만) 몇 명의 연구자들은 정신분석학적 접근으로 러시아문학을 연구해보려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러시아에 있을 때, 정신분석학적으로 러시아 문학을 연구한 라페리에르(Rancour-Laferriere)라는 사람의 작품이 번역되어 출판된 적이 있습니다. 당시 러시아 신문에서 그 책에 대한 조롱기 어린 서평이 실린 것을 봤지요. "우리의 푸슈킨, 우리의 톨스토이가 정신병자란 말이야?" 이런 식의 반응이랄까요, 러시아에서는 이런 반응이 일반적인 것 같습니다.

6. 이 책에서 주목하고 있는 '텍스트의 무의식'은 무엇인가요?

책에서 '텍스트적 무의식'이나 '텍스트의 무의식'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국내에서 통용되는 표현 같지는 않아요. 저도 이론적인 뒷받침을 갖고 썼던 개념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작가적 무의식'이라는 말은 쓰지요. 그런데 저는 작가의 텍스트에서 작가가 의도하고 전달하려고 했던 것 이면에서 말해지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요. 작가의 무의식이 텍스트로 전이되었다고 할까요,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메시지 이면에 숨겨진 메시지나 코드가 있다는 것이죠. 이 숨겨진 코드(메시지)는 의도적으로 작가가 숨긴 것이라기보다는 작가조차도 속이는 것을 뜻합니다.

꿈의 경우를 예로 들면, 자신의 꿈이라고 자신이 다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 꿈을 해석해 줄 수 있는 타자가 필요한 것처럼, 저는 작품에서도 그러한 무의식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연구자가 밝힐 수 있다고 봅니다. 작가의 텍스트에 대해 작가가 어떤 억압된 무의식을 갖고 있는지 드러내는 것, 이러한 역할은 텍스트 읽기와는 조금 맥락이 다르기 때문에 '텍스트의 무의식 읽기'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7. 무의식으로 작품을 읽어 내는 작업을 또 하게 된다면, 시도해보고 싶은 작가가 있으신지요? 앞으로 선생님의 활동에 어떤 계획이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다 관심이 있어요. (웃음) 작가론이나 작품론, 특히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가비교론도 써보고 싶어요. 조지 스타이너(Geroge Steiner) 이후에는 그러한 시도가 별로 없는데, 이러한 부분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요즘은 『러시아 문학 강의』라는 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함께 읽는 독자들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저는 많은 독자들이 관심을 갖고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작업을 하고 싶어요. 러시아 문학의 유산이기는 하지만 우리에게는 세계문학의 유산이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러시아 문학을 같이 공유하고 음미하는 그런 공동체가 만들어지면 좋겠어요. 드라마 까페나 드라마 폐인까페 같은 것도 있잖아요. 그러한 까페들처럼 러시아 문학 공동체, 러시아 문학 애호가 공동체 같은 것도 가능할 텐데, 저는 그 공동체에 일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11. 0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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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27 07: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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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27 08: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디아 2011-09-27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고의 고전 번역을 찾아서'와 '영미 명작 좋은 번역을 찾아서' 같은 책들이 더 빨리 많이 나와주지 않은 것이 아쉬운 독자입니다. "많은 독자들이 러시아 문학에 관심을 갖고 흥미롭게 읽을 수 있"도록 로쟈님께서 러시아 명작 좋은 번역을 추천해주시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은데...공개적으로 하시면 곤란해지실까요? 그래도... 저와 같은 생각의 독자들이 많을 것 같아서 댓글을 남깁니다. 톨스토이와 도스토에프스키 작품 만이라도 골라주시면 (이미 해놓으셨는데 저만 못찾는 것이라면 이 무지를 용서하시고 깨우쳐주시면) 무척 감사하겠습니다.

로쟈 2011-09-28 08:09   좋아요 0 | URL
음, 그게 전문가가 다수 참여하거나 상당 규모의 사업단이 꾸려져 벌인 일입니다.^^; 그런데 러시아문학의 경우엔 사실 선택지가 별로 없기도 합니다. 유일 번역본이 다수라서요...

2011-09-27 18: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27 2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