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이면 겨울의 문턱이지만 따뜻한 날씨 때문에 지난 며칠간은 '11월'답지 않았다. '이달의 읽을 만한 책'을 며칠 늦게 올려놓는 핑계로 대본다. 음, 그래도 계절은 만추여서 베란다 창밖으로 보이는 공원의 단풍은 절정이 지난 모습이다. 여전히 붉게 달아오른 모습이 남아 있긴 하지만. 겨울의 문턱에서는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목록만이라도 챙겨보도록 한다(이 일도 벌써 5년째 하고 있군!).  

1. 문학 

김미현 교수가 고른 문학서는 김경욱의 '열한 번째 단행본' <신에게는 손자가 없다>(창비, 2011)이다. "현재 한국 문단에서 최고의 소설가라는 평가가 과장이 아님을 소설 그 자체로서 증명해 보이고 있다."고 높이 평가했다. 나는 <위험한 독서>(문학동네, 2008)도 챙겨읽지 않았었는데, 이 참에 '업뎃'을 좀 해놓아야겠다(가능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지난달에 구입한 <소설가로 산다는 것>(문학사상사, 2011)도 이달에 같이 읽으면 좋겠다. 우리시대 대표적 작가들이 '소설을 쓴다는 것'에 대한 소회를 적어놓은 책이다.    

2. 역사 

김기덕 교수가 고른 역사서는 주디스 브라운의 <수녀원 스캔들>(푸른역사, 2011). "17세기 초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작은 도시, 그 곳에 위치한 소규모의 신설 수녀원 그리고 그 속에 은둔해 살아가던 어느 수녀의 이야기"로 "저자 주디스 브라운은 베네데타 수녀의 환영 주장과 동성애에 대해 조사한 심문기록을 바탕으로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한 레즈비언 수녀의 삶'이라는 영화 같고 소설 같은 흥미로운 역사서를 썼다. 이 책은 파편적으로 남아 있는 과거의 기록이 역사의 내러티브로 변화하는 과정을 잘 보여주는 전형적인 미시사적 작품"이라는 평이다. 17세기초 수녀원에서 벌어진 이야기라고 하지만, 수녀원이란 말 때문에 자연스레 '중세의 가을'을 떠올리게 되는데, 개인적으론 지난달에 영역본도 구한 터라 하위징아(호이징가)의 <중세의 가을>(문학과지성사)도 다시 손에 들고 싶다. 이택광 교수의 그림책 읽기 <중세의 가을에서 거닐다>(아트북스, 2008)도 같이 참고해가면서...  

3. 철학 

김형철 교수가 추천한 철학서는 니컬러스 펀의 <철학>(세종서적, 2011)이다. 부제가 책의 내용에는 더 근접한데 '가장 오래된 질문들에 대한 가장 최근의 대답들'을 다룬다. 저"자는 이 해묵은 질문들, 이제 더 이상 물어봐야 답이 나올 것 같지도 않은 질문들을 다시 현대 최고의 철학자들에게 직접 인터뷰를 통해서 물어 본다."는 컨셉. 현재 영어권에서 활동하고 있는 '최고의 철학자들'의 육성을 들을 수 있는 게 장점이다. 저자는 <니콜라스의 유쾌한 철학카페>(해냄, 2005)의 저자. 영어권 철학의 현재에 대해서는 최근에 나온 정해창 교수의 <현대 영미철학의 문제들>(청계, 2011)을 참고해봐도 좋겠다. 물론 인터뷰를 담은 책은 아니다.    

조금 대중적인 철학서로는 최근 프랑스 저자들의 책이 나란히 나왔는데, 프레데릭 르누아르의 <젊은 날, 아픔을 철학하다>(창해, 2011)와 카트린 메리앙의 <철학자에게 사랑을 묻다>(한얼미디어, 2011). 앤드루 커노한의 <종교의 바깥에서 의미를 찾다>(필로소픽, 2011)까지 '소프트'한 철학서들을 몇 권 챙겨봐도 좋겠다. 무거운 책들은 따로 읽을 시간이 다가오니까. 춥고 긴 겨울 말이다.   

4. 정치/사회 

마인섭 교수가 고른 책은 김성기의 <사회적 기업의 이슈와 쟁점>(아르케, 2011)이다. "자본주의의 주역은 기업이며 만약 자본주의가 진화한다면 그 변화의 중심도 기업일 것이다. 사회적 기업은 이윤을 넘어 ‘빈곤과 실업, 사회적 배제, 지역 공동체의 해체, 돌봄, 교육, 문화’ 등의 사회적 가치들을 추구하는 새로운 형태의 기업이다. 이 책은 사회적 기업에 대한 대학가의 기본서일 뿐 아니라 일반 독자들의 시사 교양 도서로도 적절하다."는 것이 추천의 이유다. '사회적 기업'은 예전에도 한번 다뤄진 적이 있는데, 올해 나온 책으론 무하마드 유누스의 <사회적 기업 만들기>(물푸레, 2011), 정인철의 <빅 소사이어티>(이학사, 2011)이 더 눈에 띈다.   

5. 경제/경영 

박원암 교수가 추천한 책은 배리 아이켄그린의 <달러 제국의 몰락>(북하이브, 2011)이다. "급속히 약화된 미국의 경제적 지위와 달러의 운명을 다룬 책"으로 "저자는 세계를 지배하는 경제력 없이는 세계를 지배하는 통화가 될 수 없고, 그런 점에서 달러는 경제력에 비해 ‘과도한 특권’을 누리고 있다고 주장한다"고. 달러화의 운명과 몰락을 다룬 책은 많이 나와 있지만 엘렌 호지슨 브라운의 <달러>(이른아침, 2009)가 기본서인 듯하다. 달러제국의 몰락을 부추기는 월스트리의 탐욕에 대한 고발서로 <모든 악마가 여기에 있다>(자음과모음, 2011)도 덧붙여 읽어봄직하다.  

6. 과학 

김웅서 한국해양연구원 선임연구본부장이 고른 과학책은 이정임의 <인류사를 바꾼 100대 과학사건>(학민사, 2011)이다. "과학책 중에는 한 주제를 깊이 파고들어 쓴 책이 있는가 하면, 여러 가지 단편적인 과학 지식을 나열한 책도 있다. 이 책은 후자에 속한다. 한 주제에 대한 깊은 지식을 얻을 수는 없지만, 읽고 나면 과학 만물박사가 된 포만감을 느낀다." 는 평이다. 그런 의미에선 과학서라기보다는 교양서로 분류됨직하다. 교양서 범주에 속하는 과학서로는 러셀의  <과학의 미래>(열린책들, 2011)과 제이콥 브로노우스키의 <과학과 인간의 미래>(김영사, 2011)이 최근 나란히 나왔다. '100대 사건'을 음미해보면서 같이 읽어봐도 좋겠다. 

7. 예술 

이주은 교수가 고른 예술서는 심정민의 <춤을 빛낸 아름다운 남성 무용가들>(북쇼컴퍼니, 2011)이다. "여성이 중심이 되고 남성이 주변부를 맴도는 무용의 영역에서도 뛰어난 실력과 자기만의 표현력으로 무용의 역사를 빛낸 남성 무용수들이 있었다. 우리는 <목신의 오후>에서 160cm의 작은 키에 몸에 비해 지나치게 굵은 다리를 지닌 바슬라프 니진스키와, 예술적 표현의 진정한 자유를 찾아 옛 소련에서 서방으로 목숨을 건 탈출을 한 미하일 바리쉬니코프를 기억한다."고 소개하는데, 거명된 무용수들이 모두 러시아 발레리노여서 마음에 와 닿는다(책의 표지 또한 니진스키다). 하지만 러시아 발레에 대한 본격적인 소개서도 눈에 띄지 않는 건 유감이다(오래전에 나온 가벼운 책들이 두어 권 있을 뿐이다).  

   

예술쪽에는 두 권의 사진집을 덧붙이고 싶다. 내셔널지오그래픽의 <위대한 여정>(에디터, 2011)은 야생동물의 장대한 여정을 담은 책이고, <퓰리처상 사진>(현암사, 2011)은 제목 그대로 퓰리처상 사진부문 수장작들을 모은 '70여년간의 연대기'이다. 자연과 역사가 사진 속에서 어떻게 포착됐는지 '관람'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8. 교양  

내가 고른 교양서는 <한국학의 즐거움>(휴머니스트, 2011)이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을 각 분야의 전문가 22명에게 던지고 그 대답을 모아놓은 <한국학의 즐거움>은 막상 즐거움의 성찬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스물두 가지 몽타주’라고 할 만큼 시선도 다양하고 초점도 제각각이다. 하지만 한국학의 즐거움을 어디서 발견할 수 있고 어떻게 마련할 수 있을지에 대한 윤곽을 제시한다."고 추천의 이유를 밝혔다. 주영하 교수의 '한국의 음식' 편은 흥미로운 글 가운데 하나인데 '음식인문학' 쪽 책들도 교양서로 손에 들어봄직하다. 무엇을 먹는지가 그 사람을 말해주는 것처럼 한국음식은 한국인이 어떤 사람들인지 말해준다는 게 전제다.  

9. 실용 

손수호 논설위원이 고른 실용서는 최수연의 <소 - 땅과 사람을 이어주던 생명>(그물코, 2011)다. 저자는 "자연을 사랑하는 글을 쓰고, 그 사랑을 사진에 담는 일로 밥을 먹는 사람"이라고. <논 - 밥 한 그릇의 시원>(마고북스, 2008)이 전작이고, <거친 밥 한 그릇이면 족하지 않은가>(이가서, 2009)에도 사진을 실었다. "책은 사람과 소의 관계망을 키워드로 삼았다. 달구지, 쇠죽, 우시장, 뿔, 부리망, 외양간…. 사진을 위주로 하다 보니 판형을 키웠다. 그렇다고 글을 소홀하게 여기지 않았다. 양이 적다고 가벼운 것은 아닌 것이다. 무엇보다 사진을 설명한 캡션에 그렇게 많은 정보를 담을 수 있는 설명력이 놀랍다."는 평이다.   

10. 러시아의 역사 

내 맘대로 고르는 주제는 '러시아의 역사'다. 랴자노프스키(랴자놉스키)의 <러시아의 역사> 개정판(제8판)이 번역돼 나온 기념이다. 고대로부터 포스트소비에트 시기까지를 포괄하고 있는 러시아사로서는 아주 드문 경우인데 표지도 맘에 든다. 더불어 올해는 소련 해체 20주년이 되는 해이다. 때맞춰 나온 책이 토니 클리프의 <소련은 과연 사회주의였는가?>(첵갈피, 2011). 오래전에 나온 <소련 국가자본주의>(책갈피, 1993)의 개정판으로 보인다(실제로 개정판인지는 책을 받아봐야 알겠다). 아무려나 러시아사를 한번 더 통독해보는 게 나의 '겨울 준비'다... 

11. 11. 05. 

 

P.S. '이달의 읽을 만한 고전'은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이다. 독일의 평론가 라니츠키는 평하기를 "나는 토마스 만의 <마의 산>과 괴테의 <친화력>보다 더 나은 독일어 장편소설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을유세계문학전집의 첫권으로 나왔을 때부터 벼르고는 있었는데, 올해가 가기 전에 완독할 기회를 갖게 됐다. '마의 산' 등정과 함께 2011년은 작별을 고하게 되겠군. 한해 한해가 그렇듯이 책과 함께 저물어가는 것이 독서가의 운명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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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umun 2011-11-05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죄송하지만 저번에 중동 이슬람? 관련해서 역사와 그 시점으로 본 세계사 그런 류의 도서 목록 올려주셨던 것 같은데 찾을수가 없네요. 혹시 검색어라도 좀 알려주실 수 있을신가요?

로쟈 2011-11-05 16:26   좋아요 0 | URL
http://blog.aladin.co.kr/trackback/mramor/5018471 말씀인 듯한데요. '이슬람'을 태그로 검색하셔도 됩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11-05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목차를 보니 토니 클리프 책은 예전 <소련국가자본주의>와 동일하군요.부록은 신판에서 두 개 더 추가했네요.

로쟈 2011-11-05 16:27   좋아요 0 | URL
<소련국가자본주의>도 갖고 있긴 한데, 혹시 몰라서 새책도 주문했습니다.^^

2011-11-06 00: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06 00: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09 2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06 2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07 07: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1-11-07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마의 산. 독일스러움 그 자체라고 누군가 말했었는데, 그 길이와 중압감 때문에 기피해왔던 책이네요. 저도 올 해는 [마의 산]과 함께 저물어가볼까요? ㅎㅎ
추천 페이퍼 좋네요. 잘 보고 갑니다, 로쟈님 :)

로쟈 2011-11-09 07:45   좋아요 0 | URL
네 악명(?)도 높은 책이죠.^^;
 

'이주의 미술책'은 손철주 학고재 주간과 이주은 성신여대 교수가 같이 쓴 <다, 그림이다>(이봄, 2011)이다. 리뷰기사들이 올라온 걸 보고 어젯밤에 주문했으니 오후에는 받아볼 수 있겠다. 그중 하나를 옮겨놓는다.  

서울신문(11. 11. 05) 서양화 보는 여자 동양화 읽는 남자 通했다

요즘 화제인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 ‘천일의 약속’에서 불륜의 사랑이 불붙는 곳은 남녀 주인공이 우연히 마주친 미술관이었다. ‘다, 그림이다’(손철주·이주은 지음, 이봄 펴냄)의 저자 이주은 성신여대 미술교육과 교수는 “그림을 보면 나를 충족시키는 느낌이 든다. 그런 사람들이 팁을 얻으면 훨씬 재미있게 그림을 감상할 수 있다.”며 미술 관련 서적의 꾸준한 인기 요인을 설명했다. ‘다, 그림이다’는 동양 미술에 대한 대중적인 글쓰기를 해오고 있는 출판사 학고재의 주간 손철주씨와 서양미술사를 전공한 이 교수가 나눈 편지다.

 

●물과 기름 같은 동서양 미술 접점 찾아내

우리나라에서는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가 안휘준 서울대 명예교수의 ‘한국미술사’보다 훨씬 많이 팔렸다. 게다가 일본인과 한국인들은 인상파 그림만 좋아한다는 선입견도 있다. ‘다, 그림이다’는 이런 편견에 맞서 물과 기름 같았던 서양 미술과 동양 미술을 솜씨 좋게 한데 녹여냈다.

그 소개는 작가 김훈이 맡았다. 김훈은 ‘다, 그림이다’의 서문에서 경주 황룡사 벽에 ‘노송도’를 그렸더니 새들이 날아들어 부딪쳐 죽었다는 신라의 화가 솔거를 언급한다. 그리고 “화폭 안과 밖에서 이야기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고 끝맺는다. 그 끝없는 이야기를 손 주간은 “움켜쥘 수 없는 것을 움켜쥐려는 화가의 속내를 우리 옛 그림에서 살펴보려 한다.”며 옛 시로 풀어낸다. ‘세상과 그림, 어느 것이 옳은가 /봄볕 내려오니 피지 않는 꽃이 없구려’.

이 교수는 “낮에 스치듯 바라본 그림이 간혹 의지와 상관없이 심연을 흔들어 놓을 때가 있다. 그럴 땐 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것 중 하나가 동요를 일으키며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게 만들곤 한다.”며 그림이 인간에게서 얼마나 많은 상상력과 이야기를 끌어내는지 일러준다.  

●명화보다 인생의 키워드 담은 그림 찾아 주고받아

책에 실린 그림들은 익히 알려진 명화보다는 이야기를 담은 그림들이 많다. 저자들은 미술사에 많이 언급되는 걸작보다는 뻔히 아는 인생의 키워드와 자잘한 이야기를 간직한 그림을 골랐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책에 소개되는 첫 번째 그림은 2009년 타계한 미국 화가 앤드루 와이어스의 ‘결혼’(큰 그림)이다. 제목은 ‘결혼’이지만 턱까지 이불을 당겨 덮은 노 부부는 마치 시체 같다. 그림을 소개하는 이 교수는 “와이어스도 어느 날 아침 이웃집에 들렀다가 노 부부가 창백한 모습으로 잠들어 있는 것을 보고 그 인상이 강하게 남아서 그림을 그렸다.”고 설명한다. 



결혼’에 대한 손 주간의 화답은 18세기 조선의 선비화가 능호관 이인상의 ‘와운’(작은 그림)이다. 손 주간이 ‘결혼’과 ‘와운’에서 공통으로 읽어내는 것은 ‘비장한 아름다움’이다. ‘와운’은 조선시대 옛 그림치고는 무척 낯설다. 부글부글 끓는 먹장구름을 화폭 전체에 담았다. 화가 이인상이 한쪽에 쓴 글(‘시를 쓰고 싶었지만 술에 취한 뒤 글씨를 쓰니 구름이 덩어리진 듯합니다. 바로 이 그림과 같으니 웃음거리외다.’)로 보아 ‘와운’은 술 마시고 그린 ‘취필’(醉筆)이다.

저자는 이인상의 삶이 심장에서 피를 토하듯 눈물졌다고 설명한다.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모두 잃는, 세상 어디에 비길 수 없는 비극인 참척을 겪었고 아내마저 먼저 보냈다. 하지만 “슬픔을 노골화하지 않고 눌러 담는 심정이 애처롭도록 아름답고, 그 애처로운 아름다움의 에두른 표현이 곧 비장미”란 손 주간의 해설이 붙는다.  

●동서양 미술 소통… 인류의 공통성 찾아내

지난달 말에 끝난 간송미술관의 가을 전시에서는 4년 만에 세상 구경을 나온 신윤복의 ‘미인도’를 보려고 주말이면 두 시간 넘게 기다릴 정도로 인파가 몰렸다. 손 주간은 혜원 신윤복을 흉내 낸 작자 미상의 미인도를 소개한다. 혜원의 미인이 변비나 치질에 시달리는 안색이라면 일본 도쿄 국립박물관에 소장된 미인도는 남자 마음을 녹일 듯한, 배시시 웃는 입술이 압권이다. 조선 미인의 수작에 이 교수는 어깨에 날개를 달고 화살로 심장을 찌르려는 아기 천사를 그린 아돌프 윌리엄 부게로(프랑스 신고전주의 화가)의 ‘에로스를 막는 소녀’로 답한다. 동서양 그림의 소통을 시도한 책은 예술로 삶이 얼마나 풍요로워지는지 느껴 보라며 손짓한다. 미술관에서 불륜만 생기는 것은 아니다.(윤창수기자) 

11. 11. 05.  

P.S. 손철주 주간의 책에 대해선 예전에 <옛 그림 보면 옛 생각난다>(현암사, 2011)를 계기로 한번 포스팅한 적이 있는데, 이후에 책이 더 출간됐다. <그림 보는 만큼 보인다>(오픈하우스, 2011)와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오픈하우스, 2011). 생각의나무판의 개정판인 듯하다.   

 

이주은 교수의 미술책도 여럿 나와 있는데, <그림에, 마음을 놓다>(앨리스, 2008)와 <당신도, 그림처럼>(앨리스, 2009)이 대표작인 듯싶다. 나는 번역서인 <1960년대 이후의 현대미술>(시공사, 2007)을 <다, 미술이다>와 함께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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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증기 2011-11-06 0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겨보는 독자입니다^^ 이인상의 자녀들이 요절하기는 했지만 이인상 생전에 죽은 경우는 없을텐데 의아하네요. 학위논문을 쓰느라 족보를 검토했는데 제가 놓친 것인지.. 한번 확인해봐야겠습니다. 점검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로쟈 2011-11-07 08:08   좋아요 0 | URL
네 확인하면 알려주시길...

수증기 2011-11-08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족보를 보니 아들 넷이 모두 이인상 사후에 별세한 걸로 되어 있네요. 딸 하나는 생몰년이 기재되어 있지 않아서 확실치 않지만 딸이 죽었다는 언급도 문집에 전혀 없고요.. 생전에 자식 넷을 먼저 보냈다면 더없이 참담한 일인데, 왜 이런 참담한 일을 만들어서(!) 언급한 것인지 모르겠네요. 사소한 오류이지만 올려주시는 글 감사히 보는 터에 덧글 남깁니다.

로쟈 2011-11-09 07:50   좋아요 0 | URL
저자가 착각했나 보군요. 이 댓글을 보면 좋겠습니다...

2011-11-14 15: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15 08: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번주 매경이코노미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 알리 라탄시의 <인종주의는 본성인가>(한겨레출판, 2011)을 읽고 내용을 간추려보았다. 제목에 답하자면, 인종주의는 인간의 본성과 무관하다. 인종주의와 관련하여 나온 책 몇 권을 같이 읽어봐도 좋겠다.  

매경이코노미(11. 11. 09) '인종', 차별을 정당화하는 수단일 뿐

‘중요하지만 대개 생각하기를 꺼려하는 주제’라고 하면 당신은 무엇이 떠오르는가? 알리 라탄시의 <인종주의는 본성인가>라는 저서에서 ‘인종주의’라고 답한다. 꺼려하는 이유야 물론 분명하다. 인종주의에 드리워진 어두운 현실과 야만적 역사 때문이다. 책의 부제는 ‘인종, 인종주의, 인종주의자에 대한 오랜 역사’라고 붙어 있지만, 사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인종주의가 가진 오래지 않은 역사, 오히려 ‘짧은’ 역사다.  

인종 구분만큼 오래되었을 듯싶지만 정작 ‘인종주의’란 말이 만들어진 것은 1930년대다. 독일 나치의 ‘유대인 청소’ 프로젝트에 상응하는 표현으로 도입된 것이 인종주의다. 그렇다면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인종주의란 ‘인종주의의 전사(前史)’ 혹은 ‘인종주의 이전의 인종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인종이란 말이 비록 인종주의보다는 더 오랜 역사를 갖고 있지만, 그렇다고 아주 오래전부터 쓰인 말은 아니다. 영어의 경우 ‘인종(race)’이 현재와 같은 의미를 갖고 등장하는 건 16세기 중반부터라 한다. 16세기는 지리상 발견의 시대이고 제국주의적 팽창과 식민지화가 본격화되는 시대였다. 유럽 식민주의자들에게 신대륙 발견은 동시에 원주민과의 조우를 의미했다. 그들은 원주민에게도 인간의 지위를 부여해야 하는지를 두고 논쟁을 벌였다. 이성을 갖고 있는 똑같은 인간이라면 기독교도로 개종시켜야 했고, 그렇지 않다면 노예로 삼는 것이 정당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17세기 노예무역이 활성화되면서 아프리카인을 인간보다 모자란 존재로 보는 시각이 널리 퍼졌다. 그런 편견이 없었다면 아프리카의 흑인 2,000만 명을 악명 높은 노예 수송선에 싣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서양을 건너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18세기의 계몽철학자 칸트와 흄조차도 “어떤 사람이 피부색이 새카맣다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19세기에 대두한 과학적 인종주의는 흑인종과 황인종이 열등하다는 걸 입증하려 애썼고, 여성과 하등 인종들이 백인 남성보다 추론 능력이 떨어진다고 간주했다. 그리고 이런 차이를 빌미로 시민권을 제한하고 정치적 차별을 정당화했다.  

제국주의적 인종주의가 사회적 다윈주의와 결합하면서 나타난 것이 188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미국과 유럽을 휩쓴 우생학이다. 다윈의 사촌인 프랜시스 골턴을 비롯한 우생학자들은 인류발전을 위해 ‘부적격자’의 출생은 낮추고 ‘적격자’의 수는 늘리기 위한 정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나온 최악의 인종주의가 나치의 ‘유대인 청소’와 ‘최종해법’이다. “벼룩이 집에 살고 있다고 해서 가축이 되지 않는 것처럼, 유대인들이 우리들 틈에 끼어 살고 있다 해도 그들이 우리에 속한다는 증거가 되지 않는다”고 한 괴벨스의 발언이 나치의 인종주의를 잘 대변해준다.  

물론 나치의 유대인 청소 프로젝트가 ‘과도한’ 것이긴 했지만 반(反)유대주의 역사는 뿌리 깊은 것 아니냐는 반론도 가능하다. 그러나 ‘반유대주의’란 용어조차도 사실은 1870년대 후반에야 등장했다. 독일의 선동가 빌헬름 마르가 반유대연맹이란 단체를 만들고 유대인에 반대하는 운동을 펼치면서 쓰기 시작한 게 기원이다.  

그러니 우리가 막연하게 생각하는 것보다 인종주의의 역사는 아주 짧다. 더불어 나치의 인종주의 과학이 시도한 인종주의의 정당화는 아무런 과학적 근거가 없다. 유전학에 따르면 인류가 서로 다른 유전자풀(gene pool)을 갖고 있는 인구 집단들로 구분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게 유전자풀의 패턴이 다르고 표현형질에서 차이가 난다고 해서 ‘분리된 인종’이란 개념이 성립되는 것은 아니라는 게 오늘날 인종에 관한 과학적 견해다.  

즉 인종이란 것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한 적도 없다. 따라서 인종의 차이를 전제로 인종 간 차별을 정당화하려는 모든 인종주의는 근거 없는 허울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지구상의 많은 분쟁이 인종화된 형태를 띠고 있다는 게 또한 현실이다. 우리는 ‘탈인종적인 미래’로 넘어갈 수 있을까. 일단은 인종주의에 대한 바로보기가 필요할 듯싶다.  

11. 11. 02. 

P.S. 인종주의에 대해 그다지 읽은 바가 없어서 서평감으로 고른 책이지만 생각만큼의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인종주의 자체가 몹시도 혼란스러운 개념이서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역자 또한 "책의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미 모호함과 혼란스러움은 인종주의에 대해 뭔가 '명료한 규정'을 원하는 독자들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라고 '옮긴이의 말'에 적었다. "얼핏 보기에도 인종적-계급적-성적-지리적 개념이 혼재해 있는 다층적인 구조"를 갖고 있는 게 인종주의다. "이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인종/인종주의를 짧게 소개하는 것이다 보니, 책이 그리 친절하지는 않다."(295쪽) 좀 아쉬운 부분이다.  

   

번역과 관련해서도 한 대목은 교정하고 싶다. 아무리 무난하고 깔끔한 번역이라도 언제나 옥에 티는 감추고 있는 법이니 그걸 고쳐나가는 일이 역자나 편집자만의 몫은 아니다. 독자의 권리이자 의무이기도 하다. 결론 '탈인종적인 미래를 생각한다'의 한 대목이다.  

탈민족적, 탈부족적, 탈인종적인 세계시민으로서의 생각 틀과 정체성, 그리고 이전보다 더 과거 회귀적인 프로젝트가 계속해서 21세기에도 작동하고 있다.(283쪽)  

원문은 "A long struggle between attempts to create post-ethnic, post-national, post-racial, cosmopolitan frameworks and identities and more backward-looking projects is going to be a continuing feature of life in the 21thcentury."(170쪽)이다. 역자가 '오랜 투쟁(long struggle)'이란 표현을 옮기지 않아서 메시지가 좀 약화됐다는 느낌이다.  

다시 옮기면, "탈민족적, 탈부족적, 탈인종적인 세계시민이라는 인식틀과 정체성을 만들어내려는 시도와 이전보다 더 퇴행적인 인종주의적 프로젝트 사이의 오랜 투쟁이 21세기에도 계속 우리의 삶을 특징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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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ssbinder 2011-11-10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블로그에서 소개되는 번역된 한 권의 책에 관한 글을 읽을 때면 '두 권의 책을 비교해가며 읽고 있을'로쟈님의 모습을 떠올리곤 해요. 그런 성실함을 본받고자 합니다^^

로쟈 2011-11-24 11:42   좋아요 0 | URL
^^
 

네이버의 '오늘의책'이 어떻게 선정되는지 모르겠지만 10월의 마지막날 '오늘의책'에 <책을 읽을 자유>(현암사, 2010)가 올라왔기에(http://book.naver.com/bookdb/today_book.nhn?bid=6365013) 기념으로 스크랩해놓는다(기억엔 <로쟈의 인문학 서재>도 언젠가 선정된 바 있다). 글쓴이는 드보르작님이다. 덧붙이자면, <책을 읽을 자유>가 올해의 우수교양도서 410종 가운데 하나로 선정됐다고 오늘 발표됐다. 

 

오늘의책(11. 10. 31) 인터넷 서평꾼의 십년간 책읽기의 기록

필요하다. 책을 읽을 자유. 생계 때문일까. 이 땅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아르바이트와 공부를 병행하다 보면 언제나 책 읽을 시간이 반 토막이 난다.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다. 이럴 때 포기하지 않는 사람, 책 읽기를 직업으로 한다는 인터넷 서평 꾼 로쟈를 만나보자. 그에게 책은 밥이다. 맛이 있든 없든 먹어야 사는. 이 책은 지난 십 년간 책 읽기의 기록이다. 스타킹보다 책에 대한 페티쉬가 있다면 이 책을 읽어보길 바란다. 혹자는 이런 종류의 책을 인문학 이유식, 떠먹여 주기 식이라고 꼬집는다. 하지만 닥치는 대로 먹자, 이유식을 먹고 크면 언젠가 갈비도 뜯을 수 있게 되지 않겠는가. 이 안에는 무려 150여 권이 넘는 책들이 등장한다.  

행복이란 무엇인 가에서부터 민주주의에 대한 질문까지 저자의 관심은 광범위하다. 먼저 현대 사회에 대한 접근으로 시작할까. 보드리야르는 [소비의 사회]에서 소비사회란 상품의 사용가치보다 과시하기 위한 가치를 중시하는 사회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과시적 소비 행위를 통해서 자신이 남들보다 더 대단한 존재이며 그러므로 더 행복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받고 싶어 한다. 이 ‘행복의 신화’는 ‘행복’을 계량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칼 폴라니는 [거대한 전환]에서 현대 사회가 모든 것을 상품화할 수 있다는 '불가능한 믿음'을 가져왔다고 진단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행복한 자’와 ‘불행한 자’, 그리고 ‘낙오자’와 ‘성공한 자’밖에 없는 거대한 ‘수용소’(조르조 아감벤, [호모사케르])에서 살고 있다. 이 사회는 그 둘이 함께 사는 것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사회를 고민하지 않는 사회라고 할까. 경제학의 전제는 사회가 개인으로 구성돼 있고, 그들은 최소한의 희생과 노력을 통해 최대의 만족을 얻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사회’는 개인에게 무의미하거나 걸림돌이 되고 만다. 개인은 사회를 떠나 살 수 없다. 사회 또한 개인을 돌보아야 한다. 그러나 그 둘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거나 실현된 사회는 없다. 억압적 사회는 하나의 목소리만을 허용할 것이다. 그런 사회라면 정치는 필요 없을 것이다. 상탈무페([정치적인 것의 귀환], [민주주의의 역설])에 따르면 민주주의의 진정한 위협은 적대가 아니라 합리성과 중립성을 가장한 ‘합의’이다. 민주주의를 특징짓는 것은 제비뽑기, 즉 통치할 자격의 부재(랑시에르,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이다.  

아감벤([목적 없는 수단])의 진단에 따르면 정치권력은 항상 벌거벗은 생명을 분리하고 추출해내는 데 기초하고 있다. 얼마 전 서울역에 노숙자들을 쫓아낸다는 뉴스가 보도된 적 있었다. 아감벤이라면 이러한 현실 정치에 저항하기 위해 목적으로부터 해방된 삶 즉, ‘목적 없는 수단’으로서의 삶을 주장했을 것이다.  

이런 삶을 단순히 비정상적인 삶이라고 단죄할 수 있을까. '정상'과 '비정상', '미'와 '추'는 어떻게 나누어 지는가. 움베르트 에코([추의 역사], [미의 역사])에 따르면 모든 아름다움은 서로가 엇비슷하지만 추함은 제각각이어서 더 풍부하고 무궁무진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오똑한 코는 하나지만 뭉툭한 코, 넙적 코, 매부리코, 비뚤어진 코, 술주정뱅이의 코 등 한결 다채롭지 않은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발상의 전환(전복)이다. 어쩌면 예술이 필요한 것일 수도. 우리에겐 뒤샹('샘')도 필요하고 마그리트('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도 필요하다.  

이 밖에도 예술, 문학, 한국 역사 등을 망라해 지은이의 비판적 안목을 두루 살펴볼 수 있는 책이다. 지면상의 제약이 있어 아쉽다. 여러모로 유용한 책이다. 어려운 책을 알기 쉽게 풀이해 놓아 대학생부터 누구나 읽을 수 있을 듯하다.  

11.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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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1 00: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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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2 14: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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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1 00: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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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2 15: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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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1 16: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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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2 14: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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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1 18: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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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2 14: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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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2 16: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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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2 17: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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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구입한 게 두 주쯤 된 듯싶은데 리뷰기사가 좀 뒤늦게 떴다. 김우창 교수의 칼럼집 <성찰>(한길사, 2011) 얘기다. 수년간 경향신문에 기고했던 칼럼들을 모은 것인데, 예전에 나왔던 <시대의 흐름에 서서>(생각의나무, 2005)도 합본돼 있다. 개인적으론 <정치와 삶의 세계>(삼인, 2000)까지 같이 읽어보려고 한다. 그의 칼럼에서 '성찰' 혹은 성찰적 태도의 최대치를 읽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우리는 '성찰'과는 다른 자리에 설 수도 있다...

경향신문(11. 10. 29) 인문학적 사유로 조망한 한국 사회와 세계 문명

전문 칼럼니스트가 대접받는 시대다. 신문에 정치칼럼, 경제칼럼, 환경칼럼, 문화칼럼이 등장한 지는 오래다. 총선 때가 되면 정치 칼럼니스트가 정세를 분석하고 전망을 제시하며, 자유무역협정(FTA)이 현안으로 불거질 때에는 경제전문가가 언론에 단골로 등장한다. 



‘칼럼니스트’ 김우창 이화여대 석좌교수(74·사진)는 이러한 흐름에 역행한다. 그는 전문 칼럼니스트가 아니다. 언론인도 아니다. 그러나 그만큼 사회 현실을 깊고 넓게 읽어내며 미래를 전망하는 칼럼니스트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는 2003년 겨울부터 2009년 겨울까지 경향신문에 칼럼을 연재했으며 1년여의 휴식을 가진 뒤 지난 4월부터 다시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김우창은 전문가 시대에 찾아보기 힘든 통합형 지식인이다. 영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인 그는 사계(斯界)의 석학이다. 그러나 그의 학문적 관심은 아카데미와 전공 분야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일간지 칼럼을 통해 학문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인문학적 사유로 한국 사회와 세계 문명을 조망한다. 

최근 미국 뉴욕에서 일어난 대중집회 ‘월가를 점령하라’를 지켜본 뒤 쓴 칼럼 ‘위기의 자본주의’(경향신문 10월17일자)를 보자. 그는 반월가 시위를 오늘날 세계 체제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드러내는 ‘가장 증후적인 사건’으로 규정하며 자본주의 위기의 향방을 조심스레 진단하고 있다. 이 글에는 1920년대 초 아일랜드의 정치적 혼란을 괴수(怪獸)의 이미지로 그려내며 파시즘의 도래를 예언한 아일랜드 시인 예이츠가 인용되고 현 자본주의를 ‘익명의 체제’로 규정하며 50개의 머리를 가진 뱀과 비슷하다고 말한 미국 언론인의 분석과 전망을 소개하고 있다. 칼럼 주제는 금융자본의 위기이지만 그 속에는 정치, 경제, 문학, 철학이 들어있다. 이러한 종합적인 사유와 성찰을 바탕으로 그는 ‘유토피아와 종말론적 타도(打倒)’ 사이에서 반월가 시위를 바라보는 다중의 시각에 동의하지 않고 ‘살 만한 사회를 만드는 세부 공학’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김우창의 신간 <성찰: 시대의 흐름에 서서>(한길사)는 그가 2003년부터 9년간 경향신문에 써온 칼럼 156편을 모은 책이다. 저자의 말대로 “칼럼이란 단명할 수밖에 없는 글”이 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그의 칼럼은 다르다. 신문에 쓰여졌지만 그의 글은 사건과 이슈에 즉물적으로 대응하는 촌평(寸評)이 아니다. 그는 기자 이상으로 사실(fact)을 존중한다. 그의 글에는 발생한 사실이 정확히 제시되고 그것을 보도하고 분석한 세계 유수의 언론매체가 인용된다. 그는 매일 아침 인터넷으로 뉴욕타임스, 르몽드, 슈피겔과 같은 세계적인 신문·잡지를 스크린한다고 한다. 이 과정을 통해 그가 다루는 사건은 전지구적인 문맥을 획득한다.

김우창의 또 하나의 장점은 평정심이다. 그의 글은 쿨하다. 테러리즘, 환경파괴, 분배 불평등을 다루면서도 흥분하지 않는다. 70대 중반이라는 나이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사태를 길고 섬세하게 그려내는’ 이성적 성찰의 힘이고, ‘사고와 행동의 많은 가능성을 생각하는’ 포용적 사고의 성취이기도 하다.

김우창은 ‘군자불기’의 지식인이다. 그의 글은 하나의 그릇에 매이지 않고(不器), 어디에도 구속받지 않는다(不羈). 그는 원고지 18장의 길지 않은 칼럼에서 ‘학문의 소요유’를 즐긴다. 김우창이 꿈꾸는 세계는 “세계 속에서 진정한 것으로 느낄 수 있는 작은 삶에 충실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우리의 주택문화와 부동산정책을 다룬 ‘집짓기와 동네짓기’(313쪽)라는 글이 그 사례다. 그는 여기에서 철학자 하이데거의 ‘유기적 공간’과 ‘국민을 편안하게 한다’(安百姓)는 동아시아 정치의 요체를 설파한 뒤 ‘급조된 거대계획’이 아닌 ‘오래된 작은’ 동네를 예찬한다.

김우창 칼럼의 주제는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세계화, 금융위기, 날치기 정치문화, 기업의 사회적 책임, 학문 자율성, 환경생태 문제 등 세계와 우리 사회의 문제를 포괄한다. 북핵, 4대강 사업, 촛불집회, 금융위기, 다문화가정도 있다. 세계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 한국 사회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내가 누구인지를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시사받을 게 적지 않을 것이다.(조운찬 선임기자) 

11. 10. 30. 

P.S. 기사에서 언급된 칼럼 '위기의 자본주의'도 옮겨놓는다.    

경향신문(11. 10. 18) [김우창칼럼]위기의 자본주의

세계 곳곳에 시위와 저항의 사건들이 연속되고 있다. 이것은 작은 일들의 연쇄이지만 오늘의 세계 체제의 근본에 있는 문제점을 드러내는 일들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시점에서 가장 증후적인 사건은 미국 뉴욕의 복판에서 일고 있는 “월가를 점령하라”는 대중 집회이다. 이것은 규모가 큰 것은 아니지만 워싱턴을 비롯하여 미국의 여러 도시에 같은 성격의 항의 시위를 촉발하고 있다. 또 런던에서는 증권시장을 점령하라는 시위가 계획되고 있다고 하는데, 세계의 다른 도시에도 시위가 확산되어 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앞, 8월 초에는 런던과 영국의 여러 다른 도시에서 시위와 난동이 있었다. 이러한 일들보다 더 큰 사건은 튀니지, 이집트에서 정권이 무너진 일이었고, 아랍에서의 시위와 갈등과 권력 투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적어도 서방진영의 관점에서 더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 세계의 주축의 하나인 유럽에서 국가 부채 위기가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문제는 해결에 가까이 갈 듯하면서도 해결되지 않고, 또 해결의 방안 자체가 경제 위축과 실업 위기로 이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하여 참으로 유럽 경제가 종전의 번영을 회복할 것인지는 확언할 수 없다. 

1920년대 초에 아일랜드의 시인 W B 예이츠는 ‘제이의 강림(降臨)’이라는 시에서 당시의 아일랜드의 정치적 혼란을 정체를 분명히 파악할 수 없는 괴수(怪獸)의 이미지로 상징한 일이 있다. (그는 후에 이 괴수를 파시즘의 대두에 관계되는 것으로 말하였다.) 모든 것이 중심을 잃고 혼란과 피의 물결이 밀려드는데, 성난 새들이 퍼덕거리며 날아오르는 사막에서 사자의 머리에 사람의 몸을 한 괴수가 어슬렁어슬렁 베들레헴을 향하여 간다--예이츠는 그의 예감을 이런 식으로 표현했다. 이 사막의 괴수는 새로운 시대를 주도할 수호신을 말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어떤 종류의 미래를 준비하는 귀신인지는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오늘날 일고 있는 여러 사태들은 이와 비슷하게 새로운 역사적 전기의 도래에 대한 조짐인 듯하면서도 그 정체가 무엇인지는 불투명하다. 연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여러 사태들은 자본주의의 기초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세계의 미래를 위하여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치 않은 것이다.

객관적이든 아니든 미래에 대한 일정한 전망이 없이는 현재를 하나로 파악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던 공산주의는 그 위광을 잃어버린 이후 미래를 예감케 하는 힘으로 생각되지 아니한다. 지금의 여러 증후가 자본주의의 종말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진단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현상을 대체할 미래가 어떤 것인지는 말하지 못한다. 최근 BBC와의 인터뷰에서,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인도 출신의 영국귀족원 의원 메그나드 데사이 경은, 지금의 위기의 주 원인--서방 자본주의 위기의 원인은 자본주의가 아시아로, 즉, 중국, 인도, 인도네시아, 한국, 일본으로 옮겨 가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철학 교수이면서 정치 운동가인 코넬 웨스트는 지금 일고 있는 ‘아랍의 봄’에 대조하여 지금 월가 점령 운동과 같은 사건은 ‘미국의 가을’을 준비하는 일이라는 의견을 내어 놓았다. 그것은 그의 다른 설명을 들어보면, 자본주의가 지금의 형태로 지속할 수는 없다는 뜻을 말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가을이 오면 어떤 형태의 변화가 오는 것인지를 예측할 수 있게 하는 말은 아니다.

미래에 대한 전체적인 전망이야 어찌되었든, 풀릴 듯하다가도 풀리지 않고 되풀이되는 자본주의의 위기의 향방은 심히 점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전문가에게도 그러하고 일반 사람의 느낌으로도 그러하다. 다만 일반인들이 절감하는 것은 실업과 빈곤과 소득 감소와 불안한 삶의 현실이다. 월가 점령 운동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표현하는 것도 이러한 불안의 현실에서 터져 나오는 울분이지만, 시위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의 하나는 그들이 무엇을 하자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간 금융업의 탐욕에 대하여 여러 글을 발표한 미국의 독립 언론인 매트 태이비는 최근의 글에서 이들이 내놓아야 할 몇 개의 요구 사항을 제시하고 있다. 월가 점령 운동에 깊은 공감을 표하면서도 그 요구가 무엇인지가 분명치 않기 때문에 운동이 시들해질 가능성이 큰 것으로 생각하면서 이러한 항목들을 제시한 것이다.

그의 논설은 우선 미국에서 물가 상승으로 배고픈 사람이 수천만 명에 이르게 되고, 수백만 명이 집값을 내지 못하여 집을 잃었는데도 그 책임이 어디에 있는가를 분명히 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 원인들을 한 군데로 몰아서 생각하기가 어렵고 그에 대한 책임자를 잡아내어 밝힐 수도 없다. 책임을 져야할 체제가 복잡하고 분산되어 있어서 원인과 책임의 소재를 잡아내지 못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체제 뒤에 숨어 있고 체제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지만, 거기에서 딱 이것이 문제라고 꼬집어내 말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의 비유로는 이 익명의 체제는 50개의 머리를 가진 뱀과 비슷하다.

그러나 정치계, 경제계, 금융계에서의 내부자 거래, 등 뒤에서 이루어지는 정경유착의 담합, 규제 제도의 내파(內破) 등이 여기에 관계되어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리하여 태이비는 시위 군중이 요구하여야 할 사항 다섯 가지를 내놓는다. 첫째, 보험과 투자 금융과 상업 금융을 하나로 뭉치는 통합 금융 체제를 깨트려야 한다. 둘째는 주식 거래, 파생 금융상품 거래에 각각 0.1%와 0.01%의 세금을 부과하고 급속도의 전자 거래에 제한을 가하여야 한다. 그의 생각으로는 이 세금만으로도 파산 직전의 금융 기관 구제에 사용한 국고 지출금과 국가부채를 쉽게 갚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건전한 기업 투자가 늘어 날 것이고, 고용 증대가 가능해질 것이다. 셋째, 공적 자금을 받은 회사가 사적인 이익을 위해서 로비하는 것을 불법화하고 일반적으로 그들이 대통령 선거와 같은 일에 영향을 행사하지 못하게 한다. 넷째, 헤지펀드에 세금 혜택을 주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은행 임원들에게 그때그때의 업적에 맞추어 보수를 지급하는 것은, 은행은 망해도 본인은 흥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일이기 때문에 구태여 보상을 한다면, 이삼 년 후에나 회수할 수 있는 스톡옵션을 준다. (사실은 더 적극적으로 보수 상한제가 필요할 것이다.)

사회적 위기를 극복하는데에 고쳐져야 할 항목으로 이 정도가 충분한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이러한 목록이 그럴싸한 느낌을 주는 것은 그것이 입법 조치만으로도 시정될 수 있는 사항들이라는 것이다. 대체 전망이 불투명하게 되어 있는 것이 오늘날의 상황이라고 한다면, 많은 세부적 수정 노력은 사태를 조금 더 나은 것이 되게 하는 데에 도움을 줄 것이다. 거대 권력에 의한 유토피아의 실현이 실패로 끝난 것을 많이 보게 된 것이 20세기 여러 사회의 경험이라고 한다면, 보다 살 만한 사회를 만드는 데에는 세부 공학의 방법밖에 없다는 주장은 맞는 말로 들린다.

태이비의 시정 항목들은 말할 것도 없이 미국의 사회 위기에 대한 진단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 사회의 문제가 미국 또는 유럽 또는 아랍 여러 나라의 문제와 같은 것일 수는 없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경제의 표면적인 지수로 보아 체제가 미국이나 유럽 여러 나라와 같은 차원의 전면적 위기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라고 할는지 모른다. 성격이 다른 종류의 부정 사건이라고 할, 부산저축은행의 문제를 제외하고는 미국이나 유럽에 일어난 바와 같은 금융 위기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부정과 부패는 우리의 일상적 관습이 되어 있고 또 실업자나 빈곤 또는 복지의 문제 또 그 의외의 여러 원인이 합쳐져서 불안과 불행의 느낌이 세계적으로 높은 사회가 한국이다. 이것은 사회 체제 전체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관련된 여러 원인들의 발견과 시정책을 강구함으로써 조금은 나아질 수 있는 현실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대체로 유토피아와 종말론적 타도(打倒) 사이에 움직이는 것이 우리의 정치적 관심의 형태이다. (적어도 정치 논쟁의 측면에서는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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