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주간경향(952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한국서양사학회 편, <몸으로 역사를 읽다>(푸른역사, 2011)를 거리고 삼았다. 이달엔 건강검진도 받았던 터라 '몸'이란 주제에 더 눈길이 갔는지도 모르겠다. 

   

주간경향(11. 11. 29) 훈육과 정치도구로서의 몸

몸이란 주제는 얼마 전부터 인문학에서 각광받는 주제이다. 서양사 쪽도 예외가 아니어서 ‘몸과 생명정치로 본 서양사’란 부제를 달고 있는 <몸으로 역사를 읽다>(푸른역사)는 한국서양사학회에서 개최한 ‘서양에서 몸과 생명의 정치’란 학술대회 발표문을 단행본으로 재편집한 책이다. 시기적으론 고대에서부터 현대까지 성과 낙태, 동성애, 성과학, 수용소와 사형제 등 몸과 관련한 다양한 주제에 대한 국내 학자들의 연구 성과 10편을 묶었다. 학술논문집의 모양새이긴 하지만, 몸과 생명, 그리고 권력이 서로 엮어지는 서양사의 여러 문제적 장면들을 흥미진진하게 따라가볼 수 있다.   

‘몸의 역사’에서 바로 미셸 푸코란 이름이 떠올린다면 인문학의 동향과 지형에 눈이 밝은 독자다. 서양에서 몸이 생물학적 차원을 넘어 정치, 경제, 문화적 맥락에서 훈육과 생명정치의 초점이 되어왔다는 사실을 <감시와 처벌>, <성의 역사> 시리즈 등을 통해 가장 강렬하게 제시한 철학자가 푸코이기 때문이다. ‘몸으로 역사를 읽다’란 기획이 ‘미셸 푸코와 몸의 역사’란 논문으로 시작하는 것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문제는 푸코의 기획의 미완으로 머문 데 있다. 일련의 작업을 통해 푸코는 몸을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장 속에서 다시 바라보도록 했지만 자신의 관점을 적극적으로 이론화하거나 체계화하지는 않았다. 그가 펼쳐놓은 새로운 이론적 공간에서 푸코식 몸의 담론을 변형하고 해체하고 더 발전시키는 일은 ‘푸코 이후의 푸코’들에게 남겨진 몫이 됐다. 두어 사례를 들어본다.  

‘중세 말 육체와 성에 대한 교회의 이념과 규율 메커니즘’이란 논문은 중세 기독교의 성윤리가 가져온 변화를 푸코적 시각에서 재구성한다. 서양에서 육체를 죄와 연관시키는 것은 기독교와 함께 등장한 새로운 현상인데, 이러한 엄격한 성윤리를 체계화하여 성철학의 토대를 마련한 사람이 성 아우구스티누스이다. 그는 인간의 원죄를 음욕의 결과인 성기의 죄, 곧 성기의 반란 탓으로 돌리고 인간의 의지와 관계없이 움직이는 성기의 원칙을 ‘리비도’라고 불렀다. 푸코는 이 ‘성기 반란설’과 ‘리비도론’이 서양의 고전고대와 기독교 시대를 가르는 핵심으로 본다. 그에 따르면 기독교 사회에서 성윤리의 주요 문제는 타인과의 관계, 즉 ‘삽입 모델’로부터 자신과의 관계가 문제되는 ‘발기 모델’로 바뀌었다. 이것은 성적 주체성의 핵심이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신과의 관계’로 전환됐다는 뜻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거의 무시됐던 수음이 성생활의 주요 문제로 등장한 것은 이런 배경에서다. 미망인 형수와의 결혼을 의무화한 유대사회에서 오난의 죄는 정액을 형수가 아닌 바닥에 사정하여 형의 대를 단절케 한 죄였지만 기독교에서는 수음이 그러한 죄로 간주됐다. 그래서 자신의 성을 말하는 것은 자기에 대한 지식이자 ‘주체의 자기 이해 형태’가 됐다. 중세 기독교 세계의 고해성사에서 고백의 주체는 ‘자기와의 관계’와 씨름하면서 자신의 성적 욕망을 인지하고 관리해야 하는 임무를 떠맡았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의 테크놀로지’는 이승뿐 아니라 저승으로까지 연장됐다. 몸이 사회적‧문화적 배경조건에 따라 어떻게 달리 규정돼왔는지 보여주는 한 사례다.   

‘나치 집단수용소와 생명정치’란 논문은 생명정치란 푸코의 개념과 문제의식을 더 확장하여 정치사상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만든 조르조 아감벤의 논의를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저작과 함께 검토한다. <호모 사케르> 시리즈로 명성을 얻고 있는 이탈리아의 철학자 아감벤은 “오늘날 서양의 생명정치적 패러다임은 국가공동체가 아니라 수용소”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수용소는 영토와 질서(국가), 출생(민족)이란 세 요소로 규정되는 근대 민족국가 체제가 자신이 처한 항구적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요구하게 된 장치이다. 아감벤은 나치의 집단수용소를 그런 장치의 전범으로 제시한다. 나치의 생명권력은 수감자들에게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언어적 소통능력을 박탈하고 그들을 단순한 생존상태, 곧 ‘벌거벗은 생명’으로 만들어냈다. 이러한 수용소는 보스니아의 오마르스카 강간수용소에서 미국의 관타나모 수용소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그렇게 ‘몸으로 읽는 역사’는 지금 현재의 역사이기도 하다는 걸 <몸으로 역사를 읽다>는 말해준다.  

11.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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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원 2011-11-23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유용하게 쓰일 것 같아 스크랩해 갑니다. 감사드려요~

로쟈 2011-11-23 22:27   좋아요 0 | URL
^^

2011-11-23 1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23 2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스피 2011-11-24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코의 성의 역사는 오래전에 나온것 같은데 저 위의 책은 재간인가 보네요^^

로쟈 2011-11-24 22:12   좋아요 0 | URL
네, 표지만 바뀐 듯해요...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 꼽은 올해 출판계의 키워드는 '위로와 공감'이라 한다. 상반기 최대 베스트셀러 <아프니까 청춘이다>(쌤앤파커스, 2010)가 대표하는 것이 바로 '위로와 공감'이며, '안철수 열풍'도 이러한 맥락에 놓인다고 분석한다. 개인적으론 상반기에 처음 개시돼 하반기를 강타한 '나꼼수 열풍'도 고려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약간 수정하자면 올해의 키워드는 '위로와 꼼수'가 아닐까. 베스트셀러 <닥치고 정치>(푸른숲, 2011)의 임팩트를 고려하더라도 그게 더 공정할 듯싶다.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의 인터뷰기사를 옮겨놓는다. 한미FTA 정국과 관련해서도 '정답'을 말해놓았다...

한겨레(11. 11. 21) 김어준 “우린 종자가 달라…MB정권이 접해보지 못한 잡놈이다”

“대중이 안철수에 열광하는 건 안철수가 자신의 가치를, 말이 아니라 그동안의 삶과 선택으로 입증했기 때문이다. 주장이 아니라 물증을 목격한 것이다.”

팟캐스트 방송 <나는 꼼수다>(이하 나꼼수) 열풍의 주역인 김어준(42) <딴지일보> 총수는 21일 <한겨레>와 한 단독 인터뷰에서 각종 여론조사 결과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와의 양자대결에서 승리하는 것으로 나타난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 돌풍의 배경을 이렇게 풀이했다. 



그는 지난 5월 전문 인터뷰어인 지승호씨와 나눈 대담을 묶어 출판한 <닥치고 정치>(10월5일 출간)에서도 안 원장에 대해 “만약 안철수 정도 되는 인물이 정치 전면에 나서겠다고 선언만 하면 기존 정치권으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거대한 회오리가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한 바 있다.

나꼼수 열풍 이후 쇄도하는 언론의 인터뷰 요청을 모두 거절한 그는 이번 인터뷰에서 처음으로 안철수·나꼼수 열풍 배경과 보수언론의 역공, 노무현 전 대통령과 진보정치에 대한 생각을소상히 밝혔다.

보수언론이 나꼼수를 괴담의 진원지라고 지목하고 있고 경찰이 수사까지 나서고 있는 데 대해서는 “보수는 자신의 신체를 보호하느라 발달한 원시감정인 혐오감을, 상대에 대한 윤리적 단죄의 근거로 삼아버린다”고 풀이하고 “한마디로 쫄았다고 할 수 있다”고 독설을 퍼부었다.

그러면서 “그런 방식으론 우릴 잡을 수 없다. 우린 여태 그들이 상대해왔던 사람들과 종자가 다르다. 잡놈들이다. 우리가 스스로 어디까지 각오가 되어 있는지 짐작도 못할 것이다. 그 모든 시도가 우릴 더욱 강하게 만들 뿐이다”고 말했다.

그는 나꼼수 출범 초기에 이미 “기존의 메시지 유통 구조를 깨는 새로운 진보의 유통프레임으로 나꼼수를 구상했다. 대박난다”고 성공을 점친 데 대해서도 “이럴 줄 알았다. 가카(이명박 대통령) 덕이다”라며 특유의 어법으로 받아넘겼다.

또 나꼼수가 대중들에게 “쫄지 말라”고 선동한다는 시각에 대해서도 “나는 꼼수다’는 특정 주장이 아니라 어떤 주장도 가능하다는 태도 자체를 선동하는 게 근본 목적”이라고 되받았다. 이런 도저한 자신감은 나꼼수 팀 멤버를 “잡놈”이라고 표현한 본인의 기질에서 비롯되겠지만, 나꼼수에 대한 대중들의 열광적인 지지도와도 무관하지 않는 듯하다.

전문 리서치 기관인 마크로밀코리아가 11월 1~2일 조사한 결과를 보면, 전체 서울시민 29.7%가 나꼼수를 청취했다. 나꼼수 열기는 오프라인에서도 이어져 지난 19일 대전에서 열린 나꼼수팀의 무료 공개콘서트는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2만여명(나꼼수 쪽 집계, 경찰 추산은 5천명)이 운집했으며, 공연 뒤 관객들이 자발적으로 낸 입장료가 1억원 가량 모였다. 심지어 박근혜 한나라당 지지모임인 박근혜를 사모하는 모임(박사모)쪽은 나꼼수를 패러디한 ‘너는 꼼수다’라는 인터넷 방송을 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의 정치 대담집 <닥치고 정치>는 지난달 5월 출간 이후 한달 보름만에 26만권 판매됐다고 <푸른숲> 출판사가 밝혔다. 현재도 하루 5천~7천권씩 나가며 애플 설립자 스티브잡스의 전기 <스티브잡스>와 판매순위 1~2위를 다투고 있다. 지난달 3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서울시장 야권단일후보 선출을 위한 국민참여 경선에 김어준이 등장하자 갑자기 “김어준”을 연호하던 객석의 반응은 이미 ‘김어준 현상’을 예고했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정작 본인은 대중들의 관심에 대해 “귀찮다”라며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그와의 인터뷰는 폭주하는 나꼼수 콘서트와 각종 강연 때문에 서면으로 이뤄졌으며, 일부 전화로 보충했다.(김도형 선임기자) 



■ 나꼼수 열풍 

- ‘나꼼수’ 열풍 이후 김 총수에 대중들의 관심은 여느 아이돌 스타 못지 않게 뜨겁다. 한 스포츠신문이 ‘인정옥 작가와 열애’를 보도하기도 하고, 지난 10월3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야권 서울시장 후보선출을 위한 국민참여 경선 행사장에서는 ‘김어준’을 연호하기도 했다. 본인은 이런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홍대선 딴지일보 부국장은 한 주간지 기고문에서 본인은 “귀찮아”라고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고 했는데...파트너인 인정옥 작가의 반응은, 혹시 주의사항은 없었는가?

“함께 귀찮아한다.”

- 나꼼수 열풍이 10·26 서울시장 보선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느냐고 보느냐? 각종 조사를 보면 상당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나타나는데.

“결국 두 가지 정도의 역할을 했다고 본다. 첫째, 내가 화났다는 사실과 나만 화가 난 게 아니란 사실, 그리고 그 사실의 광범위한 공유 정도를 각자 인지하도록 보조한 것. 둘째, 그래서 결국 서울시장 보선을 나의 선거로 만드는 과정을 보조한 것.”

- 나꼼수는 광고없이 제작되고 있다. 제작비는 어떻게 마련하나? 앞으로도 광고없는 나꼼수는 계속되는가? 그 이유는?…

“티셔츠 판매와 토크 콘서트 수익 그리고 서적 판매 수익의 일부. 상업광고는 받지 않는다. 광고의 영향을 받고 싶지도 않고 그 광고주를 걱정하고 싶지도 않다. 필요한 시점까지 스스로 버틸 것이며 역할이 끝나면 사라질 것이다.”

- 조동중 보수신문들이 최근 나꼼수를 괴담의 진원지로 규정하고 포문을 열어 공격을 개시하기 시작했다. 왜 그런다고 생각하나.

“첫째, 법적 태클의 사전 분위기 조성용. 둘째, 보수층의 청취자군 유입 차단. 키워드를 괴담으로 택한 건 정신과적 차원에서도 매우 전형적인 보수의 반응이다. 보수는 자신의 신체를 보호하느라 발달한 원시 감정인 혐오감을, 상대에 대한 윤리적 단죄의 근거로 삼아 버린다. 공포의 대상을 무섭다고 하지 않고 나쁘다고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쫄았다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가카의 팔들은 멤버 4인을 도덕적 파렴치한으로 만들고 싶은 유혹을 느낄 거라 예상한다. 그러나 그런 방식으론 우릴 잡을 수 없다. 우린 여태 그들이 상대해 왔던 사람들과 종자가 다르다. 잡놈들이다. 우리가 스스로 어디까지 각오가 되어 있는지 짐작도 못할 것이다. 그 모든 시도는 우릴 더욱 강하게 만들 뿐이다.”


- 나꼼수를 듣다보면 기존 저널리즘에서 제대로 다루지 못한 권력에 대한 감시와 비판기능을 한다는 측면에서 대중들의 공감대를 자아내는 측면도 있지만, 풍자와 유머, 조롱이 지나쳐서 도를 넘어선다는 비판도 있다. 나꼼수를 새로운 유형의 ‘정치 예능프로그램’쯤으로 생각한다면 이런 비판을 가볍게 넘겨버릴 수도 있지만 매회 600만 다운로드가 넘는 막강한 영향력을 생각하고 일종의 저널리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본다면 이에 따른 책임도 큰 것이 아닌가?

“이런 방송을 이런 환경에서 이런 방식으로 지속하는 것만으로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제 몫의 책임은 하고 있다. 그로 인한 리스크 역시 누가 대신 져주지 않는다. 각자 자기 몫이나 잘 하자.”

- 개인적으론 특히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 사건과 관련해서 진보언론의 보도태도를 “비겁하다”고 비판하면서 이것은 권력의 꼼수이니까 “쫄지마라”고 대중들에게 선동했다는 느낌도 든다

“모든 메시지는 본질적으로 선동이다. 일기조차 자기 선동이다. 하지만 그 선동의 성공 여부는 데시벨이 아니라 맥락이 결정한다. 그러므로 선동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 맥락이 왜 수용 됐는가를 따지는 것이 옳다. 그리고 선동에 관해서라면, ‘나는 꼼수다’는 특정 주장이 아니라 어떤 주장도 가능하다는 태도 자체를 선동하는 게 근본 목적이다.”

- 인터뷰 대담집 <닥치고 정치>를 보면 지승호씨와 인터뷰 시점(5월)에서 “대박난다”고 큰소리를 쳤다. 기존의 메시지 유통 구조를 깨는, 새로운 진보의 유통 프레임으로서 ‘나꼼수’을 구상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그런 구상과 예측은 보기 좋게 들어맞은 것 같다. 아닌가? 본인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프레임이 구축된 것인가?

“이리 될 줄 알았다. 가카 덕이다. 생각보다는 빨랐다. 절반 정도 왔다.”

- 나는 꼼수다라는 이름은 어떻게 짓게 되었나

“가카의 세계관을 표현할 단어로 그 이상 적확한 단어가 없어서.”

- 나꼼수의 작명은 <나는 가수다>의 패러디 측면이 있다. 그리고 김 총수가 대중들과 밀접하게 친해진 데는 ‘나가수’와 관련한 발언을 라디오 방송 중에 하고 이를 각종 인터넷 매체들이 받아서 쓰면서부터가 아닌가 한다. 대중들과의 만남의 접점을 미리 의식한 것인가?

“그러고자 했다.”  



■ 안철수와 문재인

- <닥치고 정치>를 보면 안철수 현상도 이미 예측했더라. “만약 안철수 정도 되는 인물이 정치전면에 나서겠다고 선언만 하면 기존 정치권으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거대한 회오리가 일어날 거야”라고. 김 총수의 예측은 정확하게 현실이 되고 있다. 지난 5월에 이미 이런 예측을 할 수 있었던 근거가 무엇이었나?

“난 무당도, 예언가도 아니다. 그러니까 예측을 한 게 아니라 그저 당대의 결핍을 읽었을 뿐이다. 그 결핍의 크기가 그로 인한 현상의 크기를 결정한 것이다.”

- <닥치고 정치>에서는 당신이 왜 문재인인가를 입이 닳도록 이야기했다. 그러나 대중들은 현재 안철수를 이야기한다. 대중들이 왜 안철수를 이야기한다고 생각하는가? 문재인이 야권대선 후보로 나서야 한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는가?

“대중이 안철수에 열광하는 건 안철수가 자신의 가치를, 말이 아니라 그동안의 삶과 선택으로 입증했기 때문이다. 주장이 아니라 물증을 목격한 것이다. 개인적으론 문재인이 적합하다 생각한다. 그러나 문재인과 안철수에 관해 내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문재인과 안철수는 개인적인 득실 따위와 무관하게, 아무런 조건 없이 서로 지지하거나 연대하는 것이 가능한, 매우 예외적인 사람들이라는 점밖에 없다.”

- 안철수가 정치인으로 변신하면 박근혜 대항마로는 최적의 상대로 보는 견해가 있는 반면, 거품이 일시에 꺼질 것으로 보는 견해도 만만찮다.

“거품이라 보는 이들은 둘 중 하나다. 거품이길 바라거나, 거품일까 두렵거나. 그런 견해가 만만찮은지 아닌지 관심 없다.”

■ 진보정치 관련

- <닥치고 정치>를 보면 진보정치의 한계는 대중적 감수성이 부족한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 지적에 상당부분 동의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반엠비(MB) 전선 구축이라는 당위에 매몰되어 진보정당에 대한 기대치가 낮다는 인상을 받았다. 특히 노회찬 전 진보신당 대표가 지난해 서울시장 선거에서 후보사퇴 안한 데 대해서 상당히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는 등 진보신당에 대한 평가는 인색하다. 그런 관점에서 당신은 진보주의자인지 묻고 싶다

“노회찬 후보는 완주할 당연한 권리가 있었다. 그 권리 자체를 탓한 게 아니다. 그 완주로 인한 정치적 득실의 셈법이, 충분히 정치적이지 못했다는 걸 지적한 거다. 진보정당에 대한 평가는 인색한 게 아니라 냉정한 거다. 가장 잔인하게 평가했던 정당은 오히려 국민참여당이다. 그리고 진보정당에 대한 평가와 나의 정치적 정체성 간엔 아무 상관관계도 없다.”

- 황우석 사태나 축구에 대한 태도 등을 보면 당신은 과도한 민족주의자가 아니냐는 의심도 있다. 특히 ‘황빠’라는 시각에 대한 당신의 의견은.

“우린 단일 민족이 아니라고 초등학교 때부터 교과서로 가르쳐야 한다고, 오랜 전부터 주장해왔다. 황우석의 국익도 전혀 관심사가 아니다. 날 민족주의라는 프레임으로 해석하는 비장한 입장을 접할 때마다 솔직히 귀엽다. 황우석에 대한 입장은 <닥치고 정치>에서 밝힌 바, 그대로다.”

(그는 <닥치고 정치>에서 “황 박사 사건은 인간이 저지른 과오를 악마적 의도라고 단정하는 진영논리로, 저지른 잘못에 합당한 징벌을 상회하는 결과적 폭력이었다고 여긴다”라고 황 박사 비판이 가혹했다는 입장을 거듭 밝혔다. “그래서 그저 생래적 보수성을 타고 났을 뿐인 불완전한 인간 하나를 사회적 걸레로 용도 폐기하는 진보의 잔인한 비인간성을 목격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이야기를 하는 순간 또 하나의 책이 만들어져야 하니까, 그건 그냥 내가 욕을 먹고 갈게(웃음) 다만, 국익 드립(웃음), 난 황우석이 말한 국익에 전혀 관심없어. 이해시키기 힘들다. 참. 끝.(웃음))


- 노빠로 불리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한-미 FTA를 개시한 것도 노무현 전 대통이었고, 그 시절 신자유주의 정책과 집값 폭동으로 양극화의 고통이 가중됐는데

“난 자연인 노무현의 팬이다. 그만한 남자, 못 봤다. 여전히 슬프고 그립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는 집권 초기 신자유주의가 무엇이고 그것이 어떤 양상의 양극화를 야기할 것이며 어떤 속도로 진행될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실은 대다수가 그랬다. 그 심각성을 인지한 집권 중반 이후엔, 정책수단도 국정장악력도 이미 제한적이었다.”

“노무현의 FTA는 신자유주의를 불가항력의 세계적 트랜드로 인정하고 그에 적극 대처하고자 했던 의지의 산물이다. 선의만으로 양해될 수 없는, 결과로 책임지는 정치의 영역에선 비판받을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더구나 신자유주의적 통상국가를 지향한다는 점에선, 이명박의 FTA와 그 세부 조항의 본질은 같다.”

“다른 점은 두 가지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를 통해 이미 명백하게 확인된 신자유주의의 폐해와 그로 인한 세계사적 성찰.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조항의 FTA를 추진하고자 하는 의도 그 자체. 다른 환경은, 너무나도 당연히, 다른 정책 결단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ISD(투자자-국가소송제도)를 싸워 지켜야 할 가치라고까지 말한다. 이익이 곧 가치인 그들에겐 당연하다. 문제는 그 이익의 대상이 1%라는 점. 그들의 의도는 그렇게 사사롭기만 하다.”  



■ 김어준의 정체성

- <한겨레> ESC 칼럼이나 한겨레출판에서 나온 인터뷰 특강을 묶은 <내가 걸은 만큼 내 인생이다>를 보면 김 총수는 누구보다 연애심리를 잘 아는 ‘연애박사’ 같은 느낌이다. 한편으론 ‘마초 대왕’이라는 별명도 가능할 것 같다. 어느 쪽이 마음에 드는가.

“그런 평가에 대해 신나지도 억울하지도 않다. 나 자신에 대해 시큰둥하다. 난 내가 중요하지 않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할 뿐이다.”

- 김 총수는 다른 사람은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자신만의 언어와 화법으로 대중들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데 남다른 재능이 있는 것 같다. 타고 난 것인가, 후천적 노력의 산물인가?

“운이다.”

- 자신을 본인 스스로 한마디로 규정하면 어떤 말이 적당할까? 홍대선씨는 ‘돌도끼를 든 데카르트’라고 표현했는데….

“그냥 타고난 결대로 살아야 한다고 믿는, 불완전한 한 남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 현재의 김 총수를 있게 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이나 책, 사건 등이 있다면?

“그런 건 없다. 그저 살아오며 해왔던 선택들이 하나하나 누적되어 지금의 내가 됐다.”

- 한국의 청춘들은 힘든 삶은 살고 있다.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청춘만 힘들지 않다.”

- 김 총수는 그동안 촌철살인의 논평을 통해 청춘들에게 정치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본다. 특히 10·26 재보선 과정에서 나꼼수를 통해 보여준 역할은 지대했다. 그런데 한편으론 그전까지 좀 떨어져서 정치논평가 평론가 역할을 했다면, 이번엔 정치판의 플레이어에 가깝지 않았나 하는 평가도 있다. 언론인으로서 김 총수의 얼굴이 정치인으로 바뀌고 있는 장면은 아닐까 관측하는 사람도 있다. 혹시 기회가 있다면 정치를 직접 해볼 생각은 없는가.

“전혀 없다.”  

11.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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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케 2011-11-22 09:08   좋아요 0 | URL
"청춘만 힘들지 않다.”(sic!)

로쟈 2011-11-24 09:14   좋아요 0 | URL
쫄지않는 게 시크한 시대에요.^^
 

신자유주의의 붕괴와 자본주의의 파국적 재앙을 진단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책이 출간됐다. 데이비드 맥낼리의 <글로벌 슬럼프>(그린비, 2011). 지젝의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자음과모음, 2011)나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창비, 2010)와 같이 읽어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책세상에서 새로 나오고 있는 GPE(지구정치경제) 시리즈의 첫 두 권도 맥락을 같이하는 책들이다. 홍기빈의 <비그포르스, 복지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책세상, 2011)와 장석준의 <신자유주의의 탄생>(책세상, 2011)이 그 두 권이다.

  

경향신문(11. 11. 19) 신자유주의 붕괴, 자본과 타협보다는 저항을

“우리의 가난은 그들의 풍요로움의 원천이고, 우리의 고통은 그들에겐 이득이다.” 셰익스피어의 <코리올라누스>에 등장하는 대사다. 신자유주의 30년의 팡파르가 끝난 지금, 99%의 사람들이 처한 현실은 400년 전의 연극 대사와 극적으로 맞아 떨어진다. 이 책의 저자인 데이비드 맥낼리(58)에 따르자면, 2008~2009년의 위기를 촉발한 악성 은행 채무는 “주권국가의 채무로 형태가 바뀌어” 사람들의 목줄을 죄고 있다. 많은 국가들이 채무의 증가를 막고자 “긴축시대를 선포”했다. “연금, 교육예산, 사회복지, 공공 부문의 임금과 일자리를 대폭 삭감”하면서 버티기 작전에 돌입한 것이다. 물론 그 압박은 99%의 몫이다. “세계적 은행들이 받은 구제금융 비용을 노동대중과 가난한 사람들이 대신 지불”하고 있다는 얘기다. 저자는 이 책을 쓰던 2010년에 벌어진 몇몇 사례를 거론한다. “라트비아는 교사의 3분의 1을 해고했고, 아일랜드는 공무원 연금을 22% 축소했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90만 빈곤아동의 건강보험을 하루아침에 없애버렸다.”

이 모든 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본주의 지켜내기”다. 자본주의 엘리트들의 부와 권력을 어떻게든 보호하려는 것이다. 물론 “정부 개입을 배제한 자유시장 이데올로기”를 기치로 삼았던 신자유주의자들은 “정부로부터 역사상 가장 많은 구제금융을 받으면서 당혹감으로 위세가 약간 꺾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래서 그들은 “정부 지출의 대폭적 삭감”이라는 “가혹한 필연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논리를 바꿨다. “이데올로기의 정당화 방식”을 변경함으로써 “위풍당당하게 경기후퇴를 견뎌내려는 것”이다. 여기에도 물론 음흉한 속내가 숨었다. 저자는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부의 지출을 줄이는 것은 부자들에게 매우 이롭다”면서 “지출삭감은 가난한 이들로부터 부자에게로 엄청난 부를 이전하는 장치”라고 강조한다. 그리하여 99%의 비참한 삶을 담보로 “통계상 회복”이 겉으로나마 이뤄진다. 그것은 당연히 “대대적 해고와 임금 삭감, 사회 서비스의 대폭 축소를 통해 노동대중이 대가를 치른 결과”다. 

캐나다 토론토의 요크대학에서 정치학을 가르치는 저자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경제가 걸어온 길을 책의 두번째 장에서 잠시 일람한다. 그는 1948년부터 1973년까지를 “유럽·일본·북미 등 세계를 지배하는 경제주체들의 경기가 급상승하면서, 서구 자본주의가 황금기를 구가했던 시기”라고 말한다. 그러나 “생산량을 3배로 키운 서구 자본주의”는 1970년대 초에 이르러 “이윤율 하락과 과잉축적이라는, 친숙한 패턴에 따른 호황의 둔화”와 필연적으로 직면했다. 이어진 “위기의 10년”을 거치며 “자본주의를 지켜내려는” 새로운 돌파구로 등장한 것이 신자유주의라는 얘기다.

저자는 그것을 “자본에 의한 노동의 패배, 새로운 불평등의 도래”라고 규정한다. 각국 정부는 “노동 유연화”를 부추기면서 “고용주들이 노동자들과 노조를 공격하는 것을 지원하고 격려”했다. 대량 해고와 공공부문 일자리 축소, 비정규직 확대 등으로 고용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것은 신자유주의가 구사하는 음흉한 전략이라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아닌 게 아니라 영국 대처 정부의 수석 경제자문이었던 앨런 버드는 “실업 상승은 노동계급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는 매우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고용 불안정은 “규율과 처벌에 의한 통제를 강화”할 수 있는 좋은 여건이기 때문이다. 이런 기조에 따라 1980년대 초 북미와 유럽 각국에서 일어났던 노동자 파업은 차례로 분쇄됐다. “칠레, 페루, 볼리비아, 에콰도르 등 남미 국가들의 노조 조직률도 어처구니없이 하락”했다.

지난 30년간 신자유주의가 열성적으로 추진했던 “자본주의의 지리적 재편”은 자유무역협정(FTA)으로 요약된다. 약자의 입장에 선 국가의 노동자들이 더 열악한 삶으로 내몰렸음은 물론이다. 저자는 “신자유주의의 실험장이었던 칠레”의 국민소득에서 노동자 소득이 차지하는 몫이 “1970년대에는 47%였지만 1989년에는 19%로 급락했다”고 예시한다. “유사한 사태는 에콰도르, 페루, 아르헨티나, 멕시코에서도 발생”했다. 캐나다·미국과의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으로 혜택을 봤다는 멕시코에서는 “NAFTA가 체결된 지 15년 만에 인구의 80%가 빈곤 상태에 빠졌고, 상위 0.3%의 사람들이 전체 부의 50%를 차지”했다.

세계경제를 파국으로 몰고간 주범이 금융 부문이라는 것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저자는 “1973년 미국 경제에서 금융 수익은 전체 이윤의 16%였지만, 2007년에는 무려 41%를 차지했다”면서 “급증하는 부채의 부담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핵심적 특징”이라고 말한다. “백인과 유색인종 간 차별과 분리에 근거한 종전까지의 대출관행으로는 이윤 창출에 한계가 있음”을 깨달은 은행들은 “보다 약탈적인 편입 방식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빈곤층 유색인종들은 과거에 받지 못했던 금융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됐지만, 그 대가로 터무니없는 조건들을 감수”해야 했다. “피부색을 가리지 않고 거의 모든 노동자들이 금융 수탈의 새로운 차원을 경험하는 와중에, 유색인종 노동자들은 더욱 강탈적인 착취”의 나락으로 떨어졌다는 얘기다. 저자는 신자유주의의 중요한 특성으로 “노동자 계급의 점진적인 소득 감소”를 꼽으면서 “인종차별을 받는 노동자 집단이 가장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고 잘라 말한다. 

  

신자유주의의 전 지구적 확산에서 국제통화기금(IMF)의 역할은 막강했다. IMF 관리들이 구조조정 대상국의 재무장관에게 들이미는 전형적 조항들은 “혹독한 신자유주의 정책들을 포함”한다. 예컨대 “공공 부문을 민영화할 것, 사회복지 서비스를 대폭 줄일 것, 수천명의 교사·간호사·사회복지사를 해고할 것, 생필품에 대한 정부 지원을 철폐할 것, 금융 부문을 해외시장에 개방할 것, 최저임금을 인하하고 연금을 축소하며 노동조합을 약화시킬 것” 등이 그것이다. 1980년대부터 90년대까지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겪은 나라들은 “100여개 국”이다. 그 결과는 이미 확연하게 드러났다.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지고 고용은 더 불안해졌다. 다국적 기업들은 공공 자산을 더 싼값에 구매할 수 있게 됐고, 해외 은행들이 금융을 통제하게 됐다. 지역과 세계 엘리트들은 그 나라 바깥으로 재산을 손쉽게 이동시킬 수 있게 됐으며, 경제성장은 하향 곡선을 그렸다. 교육과 보건 의료 수준은 급격히 추락했고 유아사망률은 증가했다.”

저자는 신자유주의로 인한 작금의 파탄이 “단순한 주기적 불황이나 체제의 일시적 일탈이 아니다”라고 진단한다. 그가 말하는 “글로벌 슬럼프”는 “만성화한 전 지구적 경기침체”를 뜻한다. 그것은 ‘더블딥’과도 다르다. “(서로 연관된) 다차원적인 위기들이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부동산 거품이 꺼졌다가 국가 부채 위기가 터지고, 사회복지가 후퇴하고 실업률이 솟구치는 등 여러 종류 위기들이 장기간에 걸쳐 터져 나오는 것”이다. 결국 한계에 봉착한 자본주의가 중환자실에서 보여주는 위태로운 증세들인 셈이다. 그런 상황에서 저자가 앞으로의 변화와 관련해 주시하는 것은 “소위 서발턴(subaltern)이라 불리는 하위계급의 움직임”이다. “실업자, 비정규직, 여성, 이주민, 소수자, 사회적 약자들이 어떻게 대응하는가”에 따라 세상이 어떻게 변화할지가 결정될 것이라는 얘기다.

논리적으로 보자면 우리 앞에는 세가지 길이 있다. “(하위계급이)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고 위기에 처한 체제를 구하는 데 협조”한다면 “신-신자유주의가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자본에 의해 잠식되지 않은 공유지와 틈새시장, 사유화할 수 있는 공공 부문 등 “착취의 소재는 아직도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하위 주체들이 파시즘적 자본주의에 포섭된다면 “앞으로도 50~100년간 착취 구조가 건재할 것”이라고 내다본다. 또 다른 하나의 길은 “좀더 인간적인 자본주의”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유지하되, 국가가 공공서비스를 시민들에게 직접 제공하는 사회복지국가 모델”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그런 모델은 이제 불가능하다고 단언한다. “국가는 부채더미에 오르고 사적 자본이 막강해진” 현재의 상황에서 “공공 부문은 계속 축소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이 먼저인가 이윤이 먼저인가 하는 근원적인 문제” 앞에서 “둘 다 추구하겠다는 절충은 모순”일 뿐이며 “이분법 속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라는 얘기다.

저자가 결론적으로 제시하는 ‘길’은 책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할애한 6장 ‘거대한 저항의 물결’에서 드러난다. 그는 신자유주의적 착취에 반기를 든 전 세계의 대항운동에 주목한다. 볼리비아의 코차밤바 주, 카리브해의 프랑스령 마르티니크 섬, 멕시코 오아하카 주에서 일어났던 대중봉기를 차례로 소개한다. 그리스의 급진좌파연맹(SYRIZA)과 프랑스의 반자본주의 신당(NPA), 남미의 신좌파 운동, 점점 급진화 경향을 보이는 미국 각지의 노동운동도 상세히 거론한다. 그 모든 대항운동의 공통점은 “노동자 대중의 직접적 이해에 기반을 둔, 급진적이고 조직화된 운동”이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는 “국가가 통제하는 사회주의가 아니라 민중과 노동자의 공동체가 통제하는 새로운 형식의 사회주의를 고민할 때”라고 강조한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저자는 ‘민주주의에 기반한 사회주의’를 강조했던 로자 룩셈부르크의 계승자다.

그는 바야흐로 세계 곳곳에서 터져나오기 시작하는 대항운동들을 “급진적 참여 민주주의”로 명명하면서 “새로운 진보 좌파 운동은 과거의 방식을 답습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좌파의 역사는 항상 새로운 좌파의 역사였다”는 것이다. 결국, 자본과의 절충이나 타협을 거부하고 “민중과 노동자의 직접 참여를 통해 정치와 경제를 재구성하는 새로운 사회주의”를 상상하라는 것이 저자의 주문이다. 책의 말미에는 번역자들이 캐나다에 있는 저자의 집에서 나눈 대담을 수록했다.(문학수 선임기자) 

11.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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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21 15: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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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21 2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상맡에 있는 책의 하나는 김유동 교수의 <충적세 문명>(길, 2011)이다. 독문학, 특히 아도르노 사상을 전공한 저자의 학술적 에세이로 부제는 '1만년 인간문화의 비교문화구조학적 성찰'. 같은 독문학자인 임홍배 교수는 추천사에서 "김유동 교수의 <충적세 문명>은 한국 근대학문의 역사에서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역작이자 대작이다.(...) 인류 문명사 1만 년을 종횡으로 가로지르는 이 지적 모험은 요컨대 소유와 지배의 전일적 체제가 '악마의 맷돌'처럼 작동하는 자본의 시대를 과연 어떻게 견디고 넘어설 것인가 하는 치열한 문제의식으로 일관하고 있다"고 평했다. 인문학자의 거시적 문명론이 놀랍기도 하면서 다소 생경한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전체는 비진리'라고 말한 아도르노 연구자가 '전체를 위한 사유'를 제안한 것도 이채롭다. 전체를 읽어봐야 의문점을 풀 수 있을까?.. 일부 오타는 원문 그대로이다.

    

교수신문(11. 11. 14) 문명의 잔해 위에서‘전체를 위한 사유’를 가동하다  

은둔형 학자 김유동 경상대 교수(56세·독어독문학과)가 문제작을 들고 돌아왔다. 『충적세 문명-1만 년 인간문화의 비교문화구조학적 성찰』(길, 2011.10)이 그가 새롭게 내놓은 책이다. 아도르노 전문가로 통하는 그의 新作제목이 독특하기만 하다. 그래서일까, 임홍배 서울대 교수(독어독문학과)는 이 책을 가리켜“문명사를 백과전서적으로 재구성하는 데 머물지 않고, 근대 이래 섣부른 발전사관의 미망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신선한 충격을 선사한다”라고 평가한다.

십수 년 동안 지리산 자락에서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해온 김유동 교수가『반야심경』,『 도덕경』에서부터『백년의 고독』에 이르기까지 동서고금의 지적 자산을 섭렵해서 일궈낸 이 책의 핵심은 무엇일까. ‘소유와 지배’의 문명을 넘어‘조화와 균형’의 문명으로 나가기 위한 사유의 모험으로 압축할 수 있다. “‘소유와 지배’에 기초한 人爲의 문명은 그‘타자’인 자연 또는‘원시문화’와의 대비 속에서 그 의미와 무의미(덧없음)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기본 단초에서 논의를 전개해‘전체’에 대한 하나의‘그림’을 만들어보려는 시도다. A.N.화이트헤드의‘관념의 모험’과 같은 사유의 모험과 실험, 사유의 놀이가 이 책 전체를 이끌고 있다.  

충적세, 즉 신생대 제4기의 마지막 시기인 약 1만 년 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인류 문명사의 광활한 공간을 그가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던 데는 그의 병약한 신체 조건이 한몫한다. 그는 사실 이 책을 들고 세상에 나오는 것을 두려워했다. 책을 출간함으로써 “노출기피적인 은둔적인 생활이‘노출’될 때 어떻게 하나라는 두려움”도 컸다. 그는 痛風을 심하게 앓고 있다.

눈도 잘 보이지 않는다. 몸을 활발하게 움직여서 어떤 대안과 비전을 모색하는 일보다 모더니티에 의해 추동된 서구 현대문명의 위기를 읽어내고, 이를 사유의 지평에서 곰삭혀보는 일이 수월한 것도 이 때문이다. ‘충적세문명’이란 말의 이면에는, 그래서 無와 같은 深淵의 바람소리가 휭휭 지나간다. 그에게 사유의 모험, 사유의 놀이는 과잉된 관념의 세계가 아니라, 자기 정체성을 직시하고, 거듭 자신을 만날 수 있는 세계다.

그가 지식인의 책무를 변혁에서 찾기보다는‘사유의 재가동’에서 찾는 것도 일리 있는 접근이다. 그러나‘1만 년의 인간문화’를 대상으로 한다는 것은, 얼핏 보기에도 풍차를 향해 달려드는‘라만차의 騎士’처럼 무모하게 비쳐질 수 있다. 그가 방법론으로 제시하고 있는‘비교문화구조학’도 정교한 개념의 세례를 거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징후 읽기’라는 예술작품 읽기 방식의 주관적 접근도 모호함을 증폭시킬 수 있다. 김유동 교수를 書面으로 만났다.

△ 문명의 위기로 진행된 인류 역사 1만 년을 조망하기 위해‘비교문화구조학’적 성찰을 제안했는데, 이것은 문학-예술 연구로부터 발상을 얻은,‘ 비평(에세이)’에 가깝지 않습니까?

"네,‘ 비평(에세이)’의 영역에 가깝다는 지적은 맞습니다. 서론에서 언급했듯 에세이로서의 문학비평을 문화비평으로 확장시킨 것입니다. ‘비교문화구조학’의 정밀한 개념화가 가능한 것인지는 의문입니다. 정밀한 학문(exakt Wissenschaft)을 지향하는 것은 과학의 굊想일지 모르지만 불확실한 삶과 현실에 다가가려는 에세이의 방법은 규정과 판단보다는 뉘앙스가 많고 어설플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 비교문화구조학이라는 용어를 새롭게 만들었는지는‘방법’의 문제를 다룬 서론 전체가 이 질문에 대한 저의 변명이 되겠지만, 간단히 요약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문화’라는 것이 우리가 숨 쉬는 공기 같은 ‘전체’를 지시하는 용어지만 너무나 남용되면서 닳아빠진 동전처럼 액면가가 마모돼 새로운 용어를 만들 필요를 느꼈고 그래서 문화구조라는 용어가 나왔다면, 문화구조에 대한 연구는 내재적 방법으로 구조의 틀을 드러내보려는 시도지만, 문화구조의 의미는 다른 문화구조와의 비교 속에서 얻어진다는 생각에서 비교문화구조학이라는 용어를 만든 것입니다.”

△ 모더니티가 추동한 현대문명의 위기를 ‘징후적 읽기’로써 진단하겠다는 구상입니다. 어쩌면 이런 접근 자체가 ‘현대문명의 위기’로부터의 결과론적 해석은 아닌지, 그래서 마땅한 다른 대안을 제시하지 않아도 그렇게 비난 받지 않아도 되는, 관념의 과잉은 아닌지 조심스럽게 생각해봅니다. ‘징후 읽기’가 그렇게 새로운 독법도 아니고요.

“정교한 개념화를 거부하는, 아니면 못하는 이유는, 학문이라는 것이 ‘개념’을 통해 대상을 파악하는 행위지만 파악한다는 것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생각과 함께, 파악한다는 것 자체를 음미해보면 포섭하고 장악하는 것은 언어를 통해 대상을 소유하고 지배하는 행위로 문명의 常겤로 설정한‘소유와 지배’를 되풀이하고 강화하는 것이라는‘반성’이 기본 전제로 깔려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현대문명의 위기’로부터의 결과론적 해석이 아니냐는 지적은 적절한 지적이라고 인정합니다. 현대문명에 대한 비관적 전망이 모든 학문의 전제로 깔려있는‘진보’와‘서구중심주의’를 반성하면서‘타락의 역사’를 말하는 동서양의 고전과 종교사상을 새로운 척도로 부활하게 만들었겠지요. 『충적세 문명』이 만든 것은 암울한 그림으로‘구원적 비평’에 기대어 지난 세월과 삶을 어루만지는 작업인데요, 그런 고통을 만든 요소들이 객관적으로 극복된 실질적 희망이 보이거나, ‘이론’이 다른 전망을 제시한다면 전혀 다른 별자리를 만들어 밝고 긍정적인 그림을 만들 수 있겠죠.

‘징후 읽기’가 그렇게 새로운 독법이 아니라는 지적에도 동의합니다. 사실 나는‘논리’라는 것은 별것 아니고, 경험하고 인식한다는 것 또는 보고 느낀 것을 음미하고 분별하는 행위는, 단순한 知覺작용에 머물지 않는다면 누구에게나‘전체’나‘삶’,‘ 현실’을 이해하기 위한‘징후읽기’라고 생각해요.‘ 징후 읽기’를 부각시킨 것은 이런 맥락보다는,‘ 전체’,‘ 신’,‘ 진리’,‘법’등은 알 수 없다는 것, 인간의 인식행위라는 것은‘부분’을‘전체’의 징후로 해석함으로써‘전체의 그림’을 잠정적으로 만들어 보는 놀이라는 맥락입니다.”

△ 선생님의‘전체에 대한 인식’욕망은 어딘가 헤겔적인 냄새가 납니다. 학자의 고유한 학문전통에서 비롯되는 것이겠지만, 어쩌면 아도르노 전공자로서 독일적 정신의 흔적이겠죠. 이번 책에서 아도르노에게 많은 부분 의존한 것은 그의 사상이 현재적 의미를 지닌다는 판단인가요?

“근대 문화구조의 후발주자로 세 차례 대전의 중심이며 희생자인‘독일사의 비극’은 독일 지성들에게‘전체’를 볼 수 있는 시각을 제공했습니다. 독문학도이지만 독일 철학을 공부하고 논문을 쓴 제게 독일의 변증법적 이론은 당연히 배여있을 테지요. 독일정신을 공부하면서 아도르노, 하버마스, 심지어는 프랑스 포스트구조주의, 프레드릭 제임슨 등을 연구했지만, 2차 대전 중 미국이라는 망명지에서 파국의 구세계를 지켜보는 아도르노의 치열한 글쓰기나 그 뒤에 행한 세상에 대한 진단은, 파국에 이르렀던 20세기 전반기 유럽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위험사회자 전 세계적 보편성을 얻은 상태에서는 지금 다시 설득력을 얻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도르노의 현재성은 전후의 황금시대보다 오늘날에 더 절실한 현재성을 갖는다고 봅니다.”

△ 앞으로의 연구, 저술 계획이 궁금합니다.

“미래는 모르죠.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은 세상뿐 아니라 저 자신의 실존에서 나온 것입니다. 지금 현재의 삶속에서 어떤 침전물이 생기고 어떤 욕구가 일어날지 두고 봐야겠네요. 20년 전에 쓴『아도르노와 현대사상』에서는 19세기의 낙관주의적 문화 구조에서 나온 마르크스의 ‘실천이론’이 20세기 전반 ‘파국’의 과정 속에서 어떻게 아도르노의 ‘패배주의적 이성’으로 바뀌었는가가 기본적인 단초였는데, 책 출간 후의 세상을 살면서는‘문화산업’부분(지금 세상에서는 이것이 가장 절실한 문제인데)이 너무 빈약해, 이걸 보충할 책은 내야 할텐데라는 책무는 느낍니다만, 열려있는 미래는 한치 앞을 알 수 없지요.” 



김유동 교수는 서울대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베를린자유대와 프레드릭제임슨의 초청으로 미국 듀크대에서 연구하기도 했다. 『아도르노 사상』(문예출판사, 1993), 『아도르노와 현대사상』(문학과지성사, 1997) 등을 저술했으며, 프레드릭 제임슨의 『후기마르 크스주의』(한길사, 2000),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계몽의 변증법』(문학과지성사, 2001), 아도르노의 문제작『미니마 모랄리아』(길, 2005) 등을 번역했다. 이번 신작에서 전체를 사유하려는 독일 정신의 흔적, 특히 아도르노의 그림자가 보이는 것은 이러한 지적 편력과도 관련 있다.(최익현 기자)  

11.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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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이 계속 쌓이다 보니 주기적으로 정리를 해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실천방안 중 하나가 '로쟈의 컬렉션'을 정기적으로 써두는 것인데, 가능하면 한 주에 한번씩은 '점검'을 해볼 참이다. 점검이란 게 그주에 혹은 2-3일간 입수한 책들과 안면을 터두는 일이다. 써야 할 원고가 산더미이긴 하지만 원고-기계도 아닌 이상 잠시 바람 쐬는 기분으로 몇자 적는다.   

그래봐야 몇 걸음 못간다는 생각이 드는데, 제일 먼저 꼽을 책이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부채 그 첫 5,000년>(부글북스, 2011)이다. 노파심에 덧붙이자면 '부채'란 제목에 끌린 게 아니다. 부채(대출)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부채'란 말에 눈이 커지진 않는다. 신간검색을 하다가 무심결에 저자를 클릭해보니 이런, 데이비드 글레이버, 아는 저자다!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그린비, 2009)에 대해 서평을 쓴 적이 있으니 어찌 모르는 저자랴(그레이버는 자칭 '아나키스트 인류학자'다). 다시 보니 <부채>의 부제가 '인류학자가 다시 쓴 경제의 역사'다. 전작만큼 두툼한 책인데, 사실 아침에 책을 발견하고 바로 주문해 오후에 받았다(알라딘은 당일배송이 아니어서 교보에 주문했다. 어쩔 수 없게도). 일정과 분량 때문에 빨리 읽진 못하겠지만 재미있다면 이 또한 서평거리가 되지 않을까 싶다.   

<부채>에서 넘어가기 전에 곁가지로 덧붙이자면, 책을 펴낸 부글북스란 출판사가 흥미롭다. 대충 훑어보니 이제까지 내가 산 책이 세 권쯤 되는데, 모두 역자가 정명진 씨다. 바로 부글북스의 대표다. 중알일보 기자출신으로 출판기획자와 전문번역가로 활동한다고 나와 있는데, 자신의 출판사에서 내는 책 대부분을 직접 번역하고 있어서 이채롭다(이건 <정의의 역사>가 나왔을 때 이미 눈치를 챈 사실이지만). 이 정도면 출판계에서 드문 '원맨쇼'가 아닐까. 아니 '1인출판'의 말 그대로 최대치? 아무려나 눈 밝게도 <부채>같은 책을 찾아서 직접 옮기고 펴내준 데 감사의 뜻을 표하고 싶다. 독자로서는 말이다.   

 

<부채>와 같이 배송받은 책은 칸트의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아카넷, 2011)다. 백종현 교수의 칸트 번역이 3대 비판서에 이어 '종교비판'에까지 이르렀다. 당장 눈에 보이진 않지만(다 어디에 둔 것일까?) 3대 비판서를 구입해놓은 김에 컬렉션 차원에서 마저 구입했다. 예전 번역본으로 이대출판부판을 갖고 있었는데, 1984년에 나온 것이니 이미 한 세대 전이다. 새 번역본을 '재정의 한계 안에서' 구입해 책장에 꽂아둘 만하다.    

어제부터 당일주문으로 받아보려고 애썼던 책은 대리언 리더의 <우리는 왜 우울할까>(동녘사이언스, 2011)이다. 개인적으론 반가운 일이지만 대리언 리더의 책이 계속 소개되고 있는데, 공저인 <우리는 왜 아플까>(동녘사이언스, 2011) 외에도 <여자에겐 보내지 않은 편지가 있다>(문학동네, 2010), <모나리자 훔치기>(새물결, 2010) 등이 그의 책이다(<모나리자 훔치기>는 저자가 '다리안 리더'로 표기돼 같이 검색되지 않는다).  

 

우울증에 관한 책으론 엘리자베스 워첼의 <프로작 네이션>(민음인, 2011)도 장바구니에 들어가 있는 신간이다. 내주에나 주문하게 되지 않을까 싶은데, 정신의학에 관심이 생겨서 어제는 <정신의학의 역사>(바다출판사, 2009)를 구입했다. 관련서들이 많지만 크리스토퍼 레인<만들어진 우울증>(한겨레출판, 2010)도 같이 읽어볼까 한다. 소장도서이긴 하지만 이 역시 어디에 있는지는 신만이 아실 듯싶다.   

오늘 배송받은 또 다른 책은 서경식의 <나의 서양음악 순례>(창비, 2011)이다. 추천사를 청탁받고 쓴 인연 때문에 편집자가 보내준 것인데 나는 이렇게 적었다.  

우리는 왜 음악에 빠지는가. 불가해한 여성과 같은 존재가 음악이라고 서경식은 말한다. 신분이 다른 연인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오페라 주인공처럼 그는 음악에 매혹되어 빨려들어간다. <나의 서양음악 순례>는 순례라기보다는 치열한 연애의 기록이다. 그 기록 또한 불가해한 마력을 품고 있어서 놀랍다. 음악에 대한 사랑은 치명적인 사랑인가보다!

내가 저자의 책으로 처음 읽은 게 <나의 서양미술 순례>(창비, 1992)였기 때문에(어즈버 20년 전이다!) <나의 서양음악 순례>에 추천사까지 쓰게 된 건 개인적으로 영광스럽다. 클래식 음악에 친숙하지 않은 독자라도 저자의 순례는 편안하면서도 흥미진진하게 따라가볼 수 있다. 나부터도 그랬는데, 그래서 '불가해한 마력'을 품고 있다고 적었다.  

음 그리고 또 둘러보니 건축 관련 책들이 있다. 폴 골드버거의 <건축은 왜 중요한가>(미메시스, 2011)는 건축 입문서가 되지 않을까 싶어 구입했다. 건축은 개인적으론 별로 관심을 두지 않은 분야라서 주섬주섬 사놓은 책들이 없진 않지만 열독해본 기억이 없다. <행복의 건축> 저자이기도 한 알랭 드 보통은 추천사에서 이렇게 적었다. "예술을 소개하는 수많은 책들이 있지만 건축의 세계를 알려주는 책은 드물다. 이 책은 그중 최고의 책이다." 국내서로는 김성홍 교수의 <길모퉁이 건축>(현암사, 2011)이 눈길을 끈다. 표지만 보고 고르는 건 아니지만 표지가 가장 마음에 드는 책 가운데 하나다.

우연찮게도 이야기가 부채에서 시작해서 건축으로 끝났다. 사실 한국인의 부채(대출) 대부분은 집(건축) 때문에 짊어진 것이니(나도 예외가 아니고) 어쩌면 필연인지도 모른다. 하다못해 널찍한 서재 공간이 있어서 방바닥에 책을 쌓아두지 않아도 된다면 이런 페이퍼는 쓰지 않을지도 모른다. 책들에 대한 대접이 소홀한 듯싶어서 인사치레로 적은 페이퍼이기도 하기에... 

11. 11. 19.  

P.S. 페이퍼를 쓴 다음에 배송받은 책은 미셀 옹프레의 <사회적 행복주의>(인간사랑, 2011)다. 옹프레의 '반철학사' 5권으로(전체 6권이다), 3권 <바로크의 자유사상가들>(인간사랑, 2011)과 4권 <계몽주의 시대의 급진철학자들>(인간사랑, 2010)에 이어지는 책이다. 앞으로 세 권 더 남은 셈. <사회적 행복주의>는 공리주의자들과 공상적 사회주의자들, 그리고 러시아의 아나키스트 바쿠닌까지를 다루고 있어서 특히나 관심을 끈다. 아마도 이 시리즈에서는 가장 먼저 읽게 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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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demian 2011-11-20 11:09   좋아요 0 | URL
뭔가 좋은 계획이라는 생각이 듭니다..제가 제대로 이해한지는 모르겠지만 로쟈의 책 중 로쟈의 책이라는 생각이..암튼 좋은 책들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로쟈 2011-11-20 23:18   좋아요 0 | URL
소개라기보다는 개인적인 '책정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