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스 고들리에의 <증여의 수수께끼>(문학동네, 2011)를 읽고 있는 탓에 눈길이 간 지난주 신간은 변광배 교수의 <나눔은 어떻게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가>(프로네시스, 2011)이다. 어제 당일배송으로 주문한 책이 아직 안 와서 실물은 보지 못했지만, 소개기사는 스크랩해놓는다. <이타주의자가 지배한다>(웅진지식하우스, 2011)와 묶어서 다룬 기사다.

 

 

 

경향신문(11. 12. 17) 기부는 순수한 것일까, 나누면 왜 행복해질까

 

‘기부’의 사전적 뜻을 보면 ‘자선사업이나 공공사업을 돕기 위하여 돈이나 물건 따위를 대가 없이 내놓음’이다. 그런데 <나눔은 어떻게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가>의 저자가 보기에 기부행위는 사전의 정의보다 복잡하다. “ ‘기부자’와 ‘기부 수혜자’ 사이에 일어나는 기묘한 심리적 줄다리기, 가령 우월감과 열등감, 권리와 의무, 지배와 굴종, 승리와 패배 등의 요소들이 폭넓게 작용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기부는 순수한 것일까. 공직선거법은 선거구의 기관·단체나 시설에 기부하는 것을 제한한다. 표와 ‘교환’ 때문이 아니더라도 명예나 평판, 자기만족이나 행복을 위한 기부는 바람직할까. 4명의 철학자는 기부의 순수성과 본질에 관해 탐구했다.

 



저자는 마르셀 모스, 조르주 바타유, 장 폴 사르트르가 전개한 기부 이론을 비교·분석한다. 모스는 <증여론>으로 주로 번역된 <기부론>에서 모든 기부는 경제적 교환의 일종이며 따라서 모든 기부는 순수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모스가 근거로 내세운 것은 북아메리카 인디언 사회의 ‘포틀래치’ 의식이다. 출생과 사망, 성년식 때 벌어진 포틀래치는 성대한 축하연과 함께 모피나 사냥배 등을 선물하는 관습이다. 선물을 받은 자는 같은 가치나 상회하는 가치의 답례를 해야 했다. 모스는 주거나 받고 답례해야 하는 ‘의무’의 이유를 정령숭배에서 찾았다. 인디언들은 ‘소중한 것’에 기부자의 ‘하우(hau, 일종의 영)’, 즉 마음이 깃들어 있다고 본 것이다. 바타유는 <저주받은 몫>에서 상대방의 답례를 전제하고, 권력과 우월한 지위 등을 생산하는 수단으로써의 포틀래치를 거부했다. 하지만 바타유는 ‘순수한 기부행위’의 가능성을 추구했다.

자크 데리다가 말한 기부행위의 전제는 더 까다롭다. 데리다는 “기부행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기부자와 기부 수혜자는 무의식의 차원에서도 기부행위를 인지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기부행위로 인지하는 순간, 기부행위는 경제 개념과 연결되면서 교환행위로 변질되고 말기 때문이다. 저자는 “데리다의 결론은 기부란 ‘순수 기부행위’와 ‘경제적 교환’이라는 두 개념의 모순적인 ‘병존’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바람직한 기부’의 대안을 사르트르에게서 찾았다. 사르트르는 애초 ‘주는 행위’를 타자와의 관계에서 그를 ‘홀려’ ‘굴복시키는 행위’로 규정했다. 포틀래치는 ‘타인에 대한 속박’인 것이다. 하지만 사르트르는 이후 기부를 도덕정립의 핵심 개념으로 바꾸었다. 기부행위에 포함된 독성을 완화시키는 작업인데, 바로 기부자의 이름을 빼는 일이었다. 저자는 “사르트르의 ‘익명 기부’는 경제적 교환으로써의 기부행위와 순수한 기부행위 사이의 대립을 극복하는 대안이었다”고 말한다.

아름다운 익명 기부’에만 의존할 일일까. 모스는 <기부론>에서 사회 도덕성을 높이기 위해 재산이 많은 사람들의 재산 일부를 추렴, 일종의 공제조합을 만들어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나누어주는 제도를 제시했다. 뉴기니 섬 트로브리안드 군도의 ‘쿨라’ 의식도 소개했다. 선물을 받은 사람이 제3자에게 다시 선물을 주는 것이다. 섬 전체를 도는 선물의 대연쇄는 협력관계를 강화하고, 공동체 의식을 증진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이타주의자가 지배한다>에 나오는 캐나다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던의 실험은 ‘쿨라’와 비슷하다. 모르는 여자가 초인종을 누르고 안부를 물었을 때 집주인이 답하면 50유로가 들어있는 봉투를 주는 실험이었다. 집집마다 내건 조건이 달랐다. 한 집은 자기를 위해 돈을 쓰고, 어떤 집은 다른 사람에게 써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이튿날 조사하니, 남에게 돈을 쓴 사람의 기분이 더 좋았다고 한다. 책의 핵심 주장은 “단기적으로 볼 때 이기주의자가 훨씬 잘사는 것 같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타인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이타주의자가 훨씬 앞서간다는 것”이다. 이를 보여주기 위해 뇌과학 등 여러 실험 결과를 제시한다. 예컨대, 이타적 행동은 초콜릿을 먹거나 섹스 할 때 활성화되는 바로 뇌회로들을 활성화시킨다고 한다.

 



이타적 행위도 결국 교환행위나 이기심을 위한 행위 아닌가. 지하철 선로에 빠진 승객을 위해 자기 몸을 던지는 행위를 결과나 이익을 고려한 경제적 행위로 볼 수 있을까. 2차 세계대전 중에도 수만명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유대인을 지켜냈다. 아무런 보상을 바라지 않고 신장이나 골수를 기증하는 이들도 늘고 있다. 2005년 인도네시아 쓰나미 때 독일의 모금액만 6억7000만유로였다.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네트워크다. 온라인 에서 낯모르는 사람을 도와주는 일은 흔하다. 저자는 “사냥한 들소의 고기나 지식의 열매를 마음대로 사용하도록 허락하는 공동체는 큰 비용을 들여 울타리를 두르는 공동체보다 모든 관점에서 뛰어나다”며 “미래의 무중력 경제에선 나눔정신과 이타심이 주목받을 것”이라고 말했다.(김종목 기자)

 

11.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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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역사분야의 관심도서는 조선사를 다룬 두 권의 책이다. 계승범의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역사의아침, 2011)와 김인호의 <조선의 9급 관원들>(너머북스, 2011). 함께 다룬 기사가 있어서 옮겨놓는다. 청와대가 디도스 금전거래를 은폐하도록 경찰에 압력을 행사했다는 기사를 읽으면 이명박정부 또한 무슨 힘으로 지탱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한국일보(11. 12. 17) "부패한 조선 사대부" 하급관리들이 왕조 지탱했다

 

성리학을 기반으로 500년간 강력한 통치 체제를 유지했던 조선왕조에 대해서는 다양한 역사적 평가가 뒤따른다. 하나의 왕조를 500년간 지속할 수 있었던 단단한 사회 시스템과 인적 구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가 하면 근대화의 초석을 다져야 할 시기에 실기(失機)를 했다는 점에서는 거센 비판도 있다. 하지만 유교 이데올로기로 무장해 조선왕조를 500년 동안 독점적으로 장악한 선비 계층에 대한 평가는 놀랍게도 후한 편이다.

역사학자인 저자는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를 통해 그 동안 한쪽으로 치우쳐 있던 기존의 선비에 대한 평가를 뛰어넘어 균형 잡힌 이해를 시도한다. 저자는 선비를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유교적 지식과 윤리로 무장하고 지배층을 형성한 최고 엘리트 집단, 곧 사대부"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이렇게 유교적 가치와 덕목으로 무장하고 경제력과 지식뿐 아니라 정치권력까지 독점한 선비들이 지배한 조선의 현실을 직시한다. 일부 특권층을 제외한 백성들은 조선왕조 내내 가난하고 피폐했으며 왜란과 호란으로 국가의 존망이 흔들린 적도 적지 않았다. 저자는 "선비들은 조선이 당면한 문제들과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며 "위정척사를 내세운 선비조차 조선인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중화의 문명을 간직한 조선을 지키고자 했다"고 지적한다.

특히 안빈낙도의 청빈한 삶으로 그려지는 선비의 모습에 대해 저자는 정면으로 반박한다. 조선이라는 역사적 공간에서 선비란 존재는 대부분 토지와 노비를 소유해 특정 직업에 종사하지 않으면서도 먹고 사는 데 문제가 없는 재산가들이었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 선비들이 노비와 전토를 소유한 재력가였기 때문에 조선에서 500년이란 긴 세월 동안 독점적 지배권을 누릴 수 있었다는 점을 들었다.

 



그렇다면 병약한 왕권과 부패한 사대부가 지배하고 있었던 조선왕조가 500년이란 긴 세월을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한국역사고전연구소에 재직 중인 김인호 연구원이 '조선의 9급 관원들, 하찮으나 존엄한'을 통해 답한다. 저자는 관청과 궁궐에서 일했던 하급관원과 목자(말 기르는 관원), 조졸(조운선을 운행하는 관원), 염간(소금 굽는 관원), 오작인, 망나니 등 양반과 백성 사이에서 천시당하기도 했지만 조선왕조의 가장자리에서 나랏일을 담당했던 사람들을 새롭게 조명한다. 역사서에 거창하게 이름이 남겨지지 않은 존재들이지만 조선왕조를 지탱하는 실핏줄이나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전문직 중 하나인 산원은 자신의 지식과 기술을 이용해 땅의 면적과 수확량을 측정하고 정부 물품을 관리하는 실무자였다. 착호갑사는 백성들에게 큰 피해를 입히는 호랑이를 잡는 전문 사냥꾼이자 직업 군인이었다. 호랑이 머리는 기우제에 사용됐고 가죽은 공물이자 돈벌이이기도 했다. 면포 30필이던 가죽 가격은 15세기에 80필로 뛰었고, 16세기 중엽에는 400필까지 치솟았다. 오작인은 시체를 검시하는 일을 했던 사람이다. 두 번의 검시는 필수이고 의심이 생기면 네 번까지 했다고 한다. 망나니는 사형을 집행하는 사람으로 '회자수' 즉, 사람을 끊는 기술자로 불렸다. 단칼에 목숨을 끊는 조건으로 사형수 가족에게 돈을 요구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게 가장 천시받았던 망나니들의 힘이었다.

저자는 "하찮은 존재로 인식되는 이들은 권력의 틈바구니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기도 했지만 권력의 끝자락에서 때로는 수탈에 앞장서거나 부정을 저지르기도 했다"며 "지금의 말로 표현하면 일종의 비정규직 공무원인 이들은 사대부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나라 가장자리의 살림을 책임지며 조선왕조를 지탱했다"고 설명했다.(정민정기자)

 

11. 12. 18.

 

 

P.S. 조선 선비들에 관한 책으로는 이성무의 <선비평전>(글항아리, 2011), 백두현의 <조선시대 선비의 삶>(역락, 2011), 백승종의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푸른역사, 2011) 등이 올해 나온 책이다.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은 올해 한국출판문화상 학술부문 수상작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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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이니만큼 한해를 정리하는 기사들이 나오고 있다. 한국일보에서 올해 출판문화상 수상작 발표기사들을 읽다가 문학결산 좌담기사도 생각이 나 옮겨놓는다. 안 그래도 딱히 떠오르는 이미지가 없었는데, '무경향의 경향'이 올 문학계의 특징이었다고 한다.

 

 

한국일보(11. 12. 12) 고립된 채 길 잃은 문학… 지속가능성 있나 고민해야"

 

올 한해 한국문학 베스트셀러의 두 톱은 신경숙씨의 <엄마를 부탁해>와 공지영씨의 <도가니>였다. <엄마를 부탁해>는 미국시장 진출에 힘입어 올해만 40만부 가까이 판매돼 상반기를 주름잡았고 <도가니>는 지난 9월 영화 개봉으로 사회적 신드롬까지 낳으며 40만부 이상 나가 하반기를 석권했다. 하지만 두 작품은 각각 2008년과 2009년 출간된 책으로 엄밀히 말해 올해의 성과로 보기는 어렵다.

2, 3년 전부터 일기 시작한 장편소설 활성화로 올해도 많은 장편소설이 쏟아져 나오긴 했으나 속내를 들여다보면 '문학의 위기'는 오히려 깊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대다수 작품들이 1쇄 판매도 넘지 못한 채 사장되고 1만부만 넘겨도 '대박' 소리를 듣는 처지다. 그나마 김애란씨의 첫 장편 <두근두근 내 인생>과 정유정씨의 <7년의 밤>이 20만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려 선전하고, 황석영 김훈 최인호 최인석 등의 작가들이 잇따라 신작을 내며 활력을 불어 넣은 것이 성과라면 성과다.

중견 평론가 김영찬씨와 신진 평론가 강동호씨가 올 한해 문학계의 흐름을 두고 대담을 벌였다. 이들은 "2010년대 문학은 미학적 쇄신을 보이지 못하고 현실과의 긴장을 잃으면서 길을 잃은 모습"이라며 "'포스트 IMF 시대'가 끝나며 사회적 환경이 급변하고 있는데, 시대를 읽으려는 작가들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무경향이 경향, 미학적 쇄신 안 보여"
▦강동호= 올 한해 문학의 경향에서 별다른 키워드가 잡히지 않는다는 게 특색이라면 특색이다. 2000년대 문학이라면 1990년대 문학의 반작용으로서 탈내면, 무중력, 환상이라는 키워드가 있었던 데에 반해, 2010년대 들어서는 그런 반작용 자체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어떤 유행이나 흐름이 한 곳으로 모이지 않는다. 이를 긍정 혹은 부정적으로 판단하기에 앞서 지금 작가들이 직면해 있는 문학사적 환경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김영찬= 정말 무경향이 경향이랄까, 집단적 흐름 자체가 보이지 않는다. 2000년대 문학은 '포스트 IMF 시대의 문학'이었다. 외환위기 이후 본격화한 시장자본주의의 전면화 속에서 발생한 한국 사회의 집단적 무의식이 그 배경이다. 현실을 변화 가능한 것으로 생각할 수 없는, 즉 현실을 운명적인 것으로 보는 무의식 속에서 나오는 우울과 체념이 근저에 깔려 있었다. 그러면서도 2000년대 문학은 세계의 압력을 견디는 방법론으로서 나름의 미학적 쇄신을 이루어왔다. 그런데 지금은 2000년대 문학이 제 사명을 다한 상황에서, 진전된 모습이나 의미있는 미학적 쇄신이 잘 보이지 않는다. 원인을 생각하면 이전까지 존재해 왔던 현실과의 긴장 자체를 어느 순간 놓아 버리지 않았나 하는 판단이다.

▦강= 문학사적 맥락에서 이전 세대와 긴장을 빚거나, 아니면 당대성을 띠면서 현실에 맞서는 과정에서 긴장이 나올 텐데 지금은 둘 다 회의적이다. 장르문학과 접속하는 경향 역시 한국문학의 영역을 확장하고 본격문학의 엄숙함을 타개하기 위한 시도로서 산뜻하고 신선한 면이 있지만, 생각보다 주제의식이 깊지는 않다. 재기 발랄하긴 하지만, 아직은 소재적인 수준에서 멈추는 것이 아닌가 우려도 된다.

▦김= 장르적 기법을 활용한 모범적 사례가 박민규 작가다. 장르적 기법을 활용할 경우 필연적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다른 작가들에게도 그런 게 있는지 의문이다. 기법적 실험이 중요하지만, 그게 왜 지금 이뤄져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이 좀더 성숙해져야 한다고 본다.

"장편소설 활성화했지만 세계 인식 빈약"
▦강= 문학이 전반적으로 침체돼 있지만 장편소설은 예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쏟아지고 있다. 2, 3년 전부터 인터넷서점이나 인터넷 카페, 웹진, 문예지 등이 장편을 연재하면서 장편소설 붐을 조성하고 있는데, 늘어난 양만큼 독자들이 즐거운 체험을 했는지 회의적이다. 사실 장편은 독자를 확 묶어주는 공통의 이야기 체험인데, 지금은 영화나 드라마가 담당하고 있다. 지금 소설이란 장르가 근대문학이 했던 그런 역할을 다시 할 수 있을까.

▦김= 한국 문학이 단편 중심으로 굴러온 것은 단편을 주로 싣는 문예지 시스템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문단 제도가 문학의 가능성을 옥죄어온 면이 있는데, 독자로부터 고립되고 문단 안에서만 통용되는 문학에서 벗어나기 위해 장편에 대한 요구가 커지고 있다. 독자와 소통하기 적합한 장르가 장편이다. 특히 지금은 '포스트 IMF 시대'가 끝나면서 대중의 현실감각이 크게 변하고 있는데 '공감'과 '연대'가 키워드로 떠오르고 있다. 장편을 원하는 시대적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작가들이 이런 요구를 절실히 느껴 작품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장편을 써야 한다는 요구에 단순히 끌려가는 형국이다. 그러다 보니 길을 잃은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강= 개인적 경험에 비춰 보면, '포스트 IMF 시대'에 등단한 젊은 작가들은 시대에 대한 인식 자체가 별로 없는 것 같다. 장편은 단순히 이야기가 길어지는 게 아니라, 세계에 대한 구조를 완성해야 하는 장르다. 그래야 인물이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 소설은 이런 점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이건 작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세대적 체험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나만 해도 학창시절을 보내면서 어떤 세계와 싸워야하는지 잘 잡히지 않았다. 당면하고 대결해야 할 세계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제시된 바 없기에, 장편적 세계관을 구성하기가 어려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장편소설 응모작 중 상당수가 루저나 백수들의 즉물적이고 자족적인 이야기들인 것도 그런 징후로 받아들일 수 있다.

 



"어떤 역할 할지 본격적으로 고민해야"
▦김= 올해 베스트셀러를 살펴보면, 독자들과 시대적으로 공감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엄마를 부탁해> <도가니> <두근두근 내 인생> 은 독자들이 처한 상황을 환기시키면서 감정적 연대를 불러일으킨다. <엄마를 부탁해>는 '엄마'를 통해 무한 경쟁에서 살아 남기 위해 돌보지 못했던 것에 대한 죄의식을 건드린다. <도가니>도 교육계 사법계 등 부패한 현실 권력을 고발하며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두근두근 내 인생>은 조로증 아이를 통해서 미래가 막힌 젊은 세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지금 사람들이 겪고 있는 불안과 위기감, 죄의식 등 시대적 정서와 함께 호흡하며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독자들이 위로를 얻은 것도 이 대목에서다.

 

 

중견 작가들의 선전도 봐야 하는데 최인석의 <연애, 하는 날>은 정통적 소설 문법을 가지고도 독자들과 교감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또 하나의 성과는 정유정의 <7년의 밤>이다. 범죄 서스펜스 장르물인데, 무엇보다 재미있고 디테일이 살아있다. 특히 우리나라에선 장르소설이 마니아층만 즐기는 상황에서 대중 독자를 많이 확보, 이 시장의 가능성을 열어줬다는 점에서 뜻 깊다. 스티븐 킹 같은 수준 높은 장르작가의 작품을 '중간 소설'이라 부르는데, 중간 소설층이 두텁게 형성돼야 본격문학도 발전한다. 축구에서 미드필드가 승패를 좌우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재미있는 것은 기존 본격문학 작가들이 <7년의 밤>을 철저히 무시한다는 점이다.

▦강= <7년의 밤>은 우리 문단의 분열증적인 상태를 직면하게 해주는 타자다. 이를 중간 영역에 새로운 문학적 양식들이 포진할 수 있는 하나의 시발점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김= 대다수 작품들은 5,000부 판매도 힘든 상황이다. 독자와의 괴리가 커지고 있는 반면 스타 시스템은 심화하고 있다. 고립을 자초하고 문단 제도에 안주했던 문학이 지속 가능한 것인지 심각하게 물어 봐야 하는 시점이 아닐까. 이 가운데서도 '앵그리 영 제너레이션이'라 할 수 있는 작가들, 예컨대 김사과 김이설 안보윤 최진영 같은 이들의 소설은 추상적인 세계에 갇힌 한국소설을 현실로 끌어내리려는 시도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연수 권여선 박민규 김애란 등의 이후 작업도 눈 여겨 봐야 한다. 한국소설의 싸움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강= 다소 비관적으로 돌아봤지만 한국문학이 정체돼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이 미적 쇄신이나 실험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간과돼 왔던 세계에 대한 사유를 밀도 있게 개진할 수 있는 기회일 수 있다. 최근 주목 받는 김성중 박솔뫼 정용준 등의 작품에서 그런 희망의 기미를 확인할 수 있다.

11. 1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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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북리뷰를 훑어보다가 지난달에 미처 챙기지 못한 기사를 뒤늦게 옮겨놓는다. 한국의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를 다룬 두 권의 책을 다룬 기사다. 자본주의 비판서와 마르크스주의 설명서가 이주의 책들인 걸 고려하면 요즘의 한 트렌드가 보인다. 지주형의 <한국 신자유주의의 기원과 형성>(책세상, 2011)과 문지영의 <지배와 저항 - 한국 자유주의의 두 얼굴>(후마니타스, 2011)도 그런 배경하에서 같이 읽어봄직하다.

 

한겨레(11. 11. 30) 한국판 신자유주의·자유주의의 두 얼굴

 

‘자유주의’가 새삼스럽게 화두다. 역사교과서를 두고서는 ‘자유주의’가 앞에 붙은 자유민주주의가 민주주의와 어떻게 다른지 따져봐야 하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두고서는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흘러오고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 특히 ‘서구로부터 이식된 것’이라는 피상적인 인식을 넘어, 그것이 우리 사회에 어떻게 자리잡았는지 적극적으로 풀이해내는 것이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 때마침 신자유주의와 자유주의라는 개념의 ‘한국적 맥락’을 파헤친 책이 각각 나왔다.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의 자문위원을 맡고 있는 지주형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교수가 최근 써낸 <한국 신자유주의의 기원과 형성>(책세상 펴냄)은 신자유주의가 우리 사회에 정착한 과정을 총체적으로 추적해 정리한 책이다.

기본적으로 신자유주의는 ‘달러-월스트리트’ 체제와 국제통화기금(IMF)과 같은 지배 블록 등으로 뒷받침되며, ‘금융화’를 그 핵심으로 삼는다고 알려져 있다. 지은이는 이런 밑그림에다 ‘위기 관리의 과두적 지배’라는 한국적 맥락을 연결시켰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이미 1970년대 말 신자유주의 정책을 시도했던 엘리트 관료들이 있었고, 이들이 1990년대 말 외환위기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자신들의 정책을 펼치게 됐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한국의 지배적인 자본축적 전략이었던 ‘개발국가’ 모델이 그 생명력을 다해가는 과정에서, 소수의 관료가 주축이 되어 ‘신자유주의적 전환’을 이끌었다는 것이다.

1979년 ‘경제안정화 시책’ 등에서 볼 수 있듯, 당시 강경식 경제기획부 기획차관보, 김재익 경제기획원 기획국장, 김기환 경제기획원 장관 보좌역 등은 물가안정 및 시장개발을 중심에 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추구했다. 당시 여러가지 이유로 좌절된 그들의 신자유주의 정책은 민주화 뒤 ‘전문 관료’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서서히 부활했고, 1997년 외환위기를 맞아 주도권을 쥐게 됐다고 한다. 강경식씨는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으로 복귀했고, 김기환씨는 대외경제협력담당 특별대사로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에 핵심적 구실을 했다. 그리고 이들이 만들어낸 신자유주의적 전환은 오늘날 ‘한-미 자유무역협정’에까지 이르고 있다.

지은이는 “한국 경제의 모습을 현재와 같이 만들고,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양극화를 심화하고 경제의 안정적 성장을 방해하는 각종 자유무역협정과 동북아 금융허브 정책을 추진한 것은 바로 이들 소수 권위체의 폐쇄적이고 독단적인 결정과 행위”라고 비판한다.

곧 개발국가의 한계를 넘어서는 대목에서 관료-재벌-초국적 자본으로 이뤄진 ‘과두 권력’이 신자유주의라는 카드만을 내밀고 관철시켰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경제적 의사결정에 있어서의 독과점 폐지와 민주주의의 확대”라고 강조한다. 현재 거리에서 벌어지고 있는 한-미 자유무역협정 비준 반대 집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로 봐야 한다는 관점이다.

 



문지영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원이 쓴 <지배와 저항-한국 자유주의의 두 얼굴>(후마니타스 펴냄)은 자유주의의 한국적 맥락을 밝힌 책이다. 지은이는 그동안 자유주의를 ‘부르주아 계급 이념’ 정도로만 치부했던 경향을 비판하며, 한국 자유주의에는 ‘지배와 저항’ 양면적 성격이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지배층의 공식적인 지배 이념이기도 했지만, 이에 대항하는 ‘저항적 자유주의’로 발전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개화기 때부터 근대국가 수립 등을 목표로 투쟁했던 지식인들의 주체적인 노력들 속에서 한국 자유주의의 흐름을 꿰어본 지은이는 “자유와 권리에 대한 사유가 개인보다는 민족·민중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국가를 중시하고 안보의 가치에 민감한 것 등 서구 자유주의와 구분되는 한국적 자유주의의 특징이 있다”고 정리했다. 이 때문에 한국에서는 ‘정치적 자유주의’와 함께 복지·분배 정의를 요구하는 ‘경제적 민주주의’가 나란히 설 수 있었다는 분석이다.

이런 분석에 따르면, 정치적 자유주의를 극단적으로 배제하고 경제적 자유주의만을 추구하는 신자유주의는 한국적 자유주의의 흐름과 성과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거부하는, ‘맞지 않는 이념’이 된다. “단순한 경제적 자유주의나 서구적 개인주의는 한국에서 자유주의의 강화가 아니라 변질 내지는 퇴보”라는 것이다. 따라서 지은이는 저항적 자유주의를 반공주의에 기댄 지배 이념으로서의 자유주의로부터 분리시키고, 앞으로 더욱 발전시켜가야 한다고 주장했다.(최원형 기자)

 

11. 12. 16.

 

P.S. 신자유주의에 대해선 <한국 신자유주의의 기원과 형성>과 같은 글로벌정치경제(GPE) 시리즈로 나온 장석준의 <신자유주의의 탄생>(책세상, 2011)도 읽을 거리다. 데이비드 하비의 <신자유주의>(한울, 2010)은 신자유주의의 간략한 역사를 다루며, <신자유주의 이후의 한국경제>(시대의창, 2009)는 '절망으로 가는 한국경제'에 대한 진단과 전망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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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달 책&(401호)에 실은 `로쟈의 주제별 도서소개`를 옮겨놓는다. `세계 인구` 문제를 주제로 다뤘다. 2011년 세계인구가 70억을 톨파한 해로도 기억되기에 마지막 달력을 넘기며 이 `유례없는 시대`의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해봄직하다.

 

 

 

책&(11년 12월호) 지구는 늙어 가는가?

 

2011년도 ‘마지막 잎새’ 같은 달력 한 장만을 남겨놓고 있다. 2011년이 갖는 여러 가지 의의가 있겠지만 인구학자들에겐 단연 세계인구 70억을 돌파한 해로 기억됨직하다. 하지만 ‘70억’이 비단 인구학자들에게만 의미가 있는 수치는 아닐 것이다. 200년 전인 1800년에서 지금까지 세계인구가 약 10억에서 70억으로 늘어났다고 하면 ‘세계인구’ 문제에도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다. 이 문제의 발단과 성격, 그리고 전망에 대해 알아둔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한 이해도 한 뼘쯤 늘어날 것이다.


이탈리아의 인구학자 마시모 리비-바치의 <세계인구의 역사>(해남)는 ‘간략한 역사’다. 하지만 전문학자의 책답게 인구문제에 대한 이론적‧통계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가령 “오늘날의 인구는 어째서 60억 명이 된 것일까? 왜 1,000억이나 1억 명이 되지 않았는가?”라는 게 그가 묻는 질문 가운데 하나다. 이유는 인구증가 경로의 방향이 다양한 원동력과 장애물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생물학자들은 생존과 번식을 위한 두 가지 전략을 구분하는데, 곤충과 어류 및 작은 포유류는 불안정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다산(多産) 전략을 취한다. “생명은 복권과 같은 것이고 따라서 복권을 많이 사는 게 의미가 있다”는 게 이러한 전략의 모토다. 반면에 중간 크기 이상의 포유류나 몇몇 조류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환경 속에서 서식한다. 생존경쟁을 향한 압력 때문에 새끼를 기르는 데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해야 하고, 이런 투자는 새끼의 수가 적을 때 가능하다. 즉 생존가능성이 높을 경우에는 출산에 승부를 거는 것이 아니라 보호와 양육에 초점을 맞춘다. 인간이란 생물종의 기본전략도 마찬가지다. 원론적으로 인구의 잠재적 증가는 한 여성당 출산의 수, 그리고 출산시의 기대수명이라는 두 가지 변수에 의해 결정된다.


‘라루스 세계지식사전’ 시리즈의 하나로 나온 카트린 롤레의 <세계의 인구>(현실문화)는 좀더 쉽게 세계인구 문제의 전체적인 윤곽을 잡아준다. 저자에 따르면 인류가 지구에 출현한 이후로 인구가 갑자기 증가한 시기는 이전에도 몇 차례 있었다. 따라서 위생관념의 발달만으로는 급속한 인구증가를 해명할 수 없다. 또한 인구가 급속도로 증가한 과도기가 지나면 한동안 안정기를 맞게 된다는 사실도 인구사는 말해준다. 하지만 그 안정기에 도달할 때까지 세계인구는 100억-110억에 이를 것이라는 게 학자들의 전망이다. ‘인구혁명’이란 말까지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무엇이 인구 변천을 가져오는가. 인구의 이동은 아니다. 지구인이 다른 행성으로 이주해가지 않는 이상 세계인구의 변화는 출생률과 사망률에 달려 있다. 특히 중요한 요인은 사망률이다. 18세기 인구의 평균수명은 25세였고 오늘날은 67세이다. 18세기에는 25세 이전에 모두 죽었다는 말인가? 그렇지는 않다. 당시에는 영아사망률이 높아서 인구의 절반 이상이 20세가 되기 전에 사망했다. 영유아 사망률이 본격적으로 감소한 것은 예방접종을 실시하면서부터인데, 200년 전에는 1세 이하의 여아 다섯 명 가운데 하나 꼴로 목숨을 잃었지만 지금은 1,000명에 3명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듯 영아 생존율이 낮아지면서, 그리고 피임법이 발달하면서 선진국에서는 출산에 대한 인식도 변화하게 됐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가난한 후진국, 특히 아프리카 사하라사막 이남에서 출생률이 높은 것은 에이즈의 확산으로 영아사망률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우리는 체감하기 어렵지만 에이즈는 세계인구 전망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큰 변수 가운데 하나다.


20세기 들어서 세계인구 변화와 관련하여 가장 두드러진 추세는 도시화와 고령화이다. 현재 세계인구의 절반가량이 도시에 거주하고 있으며 2050년에는 10명 중 7명이 도시에 살게 될 전망이고, 인구증가율이 높은 지역 또한 모두 도시권이 될 것이다. 급속하게 진행중인 고령화는 도시화 이상으로 세계의 모습을 바꿔놓고 있는데 ‘고령화, 쇼크인가 축복인가’란 부제를 달고 있는 테드 피시먼의 <회색쇼크>(반비)는 이 문제에 대한 종합보고서이다. 세계 각지의 고령화 현장에 대한 르포와 인터뷰를 전하면서 고령화와 관련한 여러 가지 지식과 정보를 간추려준다. 그에 따르면 고령화는 도시화와 무관하지 않다. 현대화된 도시가 인간의 수명을 늘린 한 요인이기 때문이다. 농촌에서는 누릴 수 없는 서비스를 도시에서는 가난한 사람도 누릴 수 있다는 게 이유다.

 

장수의 요건에 관한 지적이 흥미로운데, 그것은 20세기 이후에 태어나는 것과 가능하다면 부유한 선진국에서 태어나는 것, 두 가지다. “이것에 필적할 만한 다른 요인은 전혀 없다”고 저자는 단언한다. 20세기 중반부터 비약적으로 발전한 현대의학이 인간의 기대수명을 늘리는 데 공헌했고 선진국은 포괄적인 공중보건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서이다. 덧붙여 과거에 비해 훨씬 많은 의학정보를 접할 수 있게끔 했기 때문에 문자해독율의 상승은 가장 중요한 생명연장 요인 중 하나다. 경제발전 수준과 공중보건 인프라만큼 중요한 요인이 교육이기 때문에 낙후된 지역에 대한 교육지원이 필요하다는 저자의 주장은 음미해볼 만하다.

 

11.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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