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배송받은 책 가운데 하나는 미셸-롤프 트루요의 <과거 침묵시키기>(그린비, 2012)다. 저자는 아이티 출신의 인류학자로 현재는 시카고대학의 명예교수로 재직중이고 카리브지역과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을 중심으로 한 미국사회가 주요 연구관심사라 한다. '권력과 역사의 생산'이란 부제의 이번 책은 그의 역사론 내지는 역사철학을 담고 있다.

 

 

한겨레(12. 01. 07) 역사는 왜 보들레르의 연인 잔 뒤발을 지웠나

 

잔 뒤발은 <악의 꽃>의 시인 보들레르에겐 상상력의 원천이었다. 그녀는 아이티 출신의 무용수로 시인과 폭풍과 같은 사랑을 나눴고, 시인은 그녀를 “블랙 비너스”, “여인 중의 여인”이라 불렀다. 하지만 14년 전 에마뉘엘 리숑의 전기물이 나오기까지 누구도 그녀가 보들레르 시학에 미친 결정적인 영향력을 이야기하길 꺼렸다. 흑인 피가 섞인 여인에겐 연기자보다는 창녀의 이미지가 제격이었다. 흑인성은 이국적 풍물로 넘쳐나는 파리에서 결코 ‘선한 야만’의 지위도 얻지 못했다. 당연히 그녀는 전기작가들에게 점잖게 무시당했다.

그랬다. 프랑스혁명의 인권선언은 “모든 인간이 자유롭게 태어났다”고 적었지만, 여성이나 흑인은 아직은 ‘인간’이 아니었다. 그래서 여성의 시민권을 외쳤던 올랭프 드 구주는 단두대에서 목숨을 잃었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국사범이 아니라 잡범으로 처단되었다. 혁명은 철저하게 “형제들의 계약”이었다. 잔 뒤발과 올랭프 드 구주는 뒤늦게 망각과 침묵을 깨고 재해석되고 있다. 마리 앙투아네트도 어처구니없는 죄명에서 해방되었다. 역사 기술자들은 늘 권력자들로부터 특정한 의제만 서술할 것을 강요당한다. 권력자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진실은 침잠한다.

시카고대학 인류학 교수인 미셸롤프 트루요가 쓴 <과거 침묵시키기: 권력과 역사의 생산>(1995)은 역사기술이 얼마나 권력 지향적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역사철학서이다. 이 책은 두개의 아이티 사건, 그리고 콜럼버스 영웅 만들기에 얽힌 불편한 진실을 예화로 서사와 서사 만들기 과정을 분석한다. 일어났던 과거는 결코 그대로 기록되지 않는다. 역사로 기록되려면 적어도 네 차례의 침묵 만들기 과정을 통과해야만 한다.

첫째, 사실생산(소스 만들기)의 순간. 모든 것이 기록되거나 기억되지 않는다. 둘째, 사실 취합의 순간(아카이브 만들기)에도 침묵과 선택이 이뤄진다. 셋째, 사실추출의 순간(서사 만들기)에도 내레이터의 가치관에 따른 취사선택이 이뤄진다. 넷째, 역사 만들기. 모든 서사가 표준적인 역사적 서사로 수용되지 않는다. 이 가운데 극히 일부만 ‘역사’란 이름으로 독자에게 전달된다.

이러한 ‘침묵’의 과정을 트루요는 세개의 사례로 살펴본다. 첫째는 상수시 궁전 이야기이다. 상수시 궁전은 아이티 독립운동 지도자로 나중에 앙리 1세가 된 앙리 크리스토프가 지었다. 독일의 포츠담에도 프리드리히 대제가 묻혀 있는 상수시 궁전이 있다. 미국인 의사 출신 조너선 브라운은 크리스토프가 죽은 지 10년 뒤 이렇게 썼다. “크리스토프 왕은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매혹되었고, 상수시 궁전의 이름을 포츠담 궁전에서 따왔다.” 이 진술은 후대 영미권 작가들이 두고두고 인용할 원자료가 된다.

하지만 상수시는 아이티 독립혁명 당시 비타협적인 무장투쟁을 이끌었던 대령의 이름이기도 했다. 상수시는 루베르튀르, 데살린, 크리스토프, 페티옹과 같은 흑인 크레올 장군들이 무장혁명을 이끌 때 부하로 가담했고, 이들이 1802년에 프랑스군에 투항했을 때, 무기를 내리지 않고 게릴라 전투를 벌여 프랑스군과 크레올 장군들을 곤경에 빠뜨렸다. 앙리 크리스토프는 과거에 자신의 부하였던 그를 매복해서 살해했다. 조너선 브라운이 상수시 궁전을 포츠담의 상수시와 연결지으면서, 그럴듯한 서사가 완성되었고, 비타협적 무장투쟁의 상수시 대령은 역사에서 지워졌다.

둘째 사례는 아이티 노예들의 독립혁명에 대한 프랑스의 반응이었다. 흑인들의 반란이 백인 프랑스를 무찌르고 독립을 쟁취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프랑스인들은 황열병이나, 백인들 내부의 갈등 또는 통제에서 벗어난 물라토들이 봉기를 일으킨 것으로 이해하려고 했다. 당대 프랑스인들의 인종주의 인식 틀이 얼마나 사실을 왜곡해서 받아들였는지 트루요는 잘 보여준다.

셋째 사례는 이미 잘 알려진 콜럼버스 영웅 만들기이다. 1492년 콜럼버스의 바하마 섬에 대한 ‘침입’ 스토리가 미국의 팽창 과정에서 얼마나 과대포장 되었는지, 소위 ‘발견’ 400돌 기념식을 예를 들어 설명한다.

 


트루요의 주장은 <글로벌 변환: 인류학과 북대서양>(2003)과 겹쳐 읽으면, 좀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근대화나 세계화와 관련된 북대서양의 지배적 서사들도 세계사에 대한 거대한 침묵을 강요한다. 따라서 발전, 진보, 민주주의, 국민국가의 개념들도 모두 비서구 지역의 역사적 경험 속에서 재해석되어야 한다. 그는 서구중심의 서사 해체를 통해 복수로만 존재하는 근대성을 드러내고자 한다. 엔리케 두셀의 <1492: 타자의 은닉>이 탈서구주의 역사철학의 일단을 보여주었다면, 트루요의 이 책은 좀더 내밀하게 역사 생산과정이 갖는 권력 현상에 주목한다. 역사물에 탐닉하는 독자들은 반드시 읽어야 하는 예방접종과 같은 책이다.(이성형 서울대 라틴아메리카연구소 HK 교수)

 

12. 01. 08.

 

 

 

P.S. 아이티혁명에 관한 책으론 시 엘 아르 제임스의 <블랙 자코뱅>(필맥, 2007)이 있다. 아이티혁명과 역사철학에 대해서는 수잔 벅-모스의 <헤겔, 아이티, 보편사>가 번역돼 나온다고 들었다. 올해의 기대작 가운데 하나다. 탈식민주의 역사철학이란 점에서 라나자트 구하의 <역사 없는 사람들>(삼천리, 2011)과 같이 읽어봄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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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 독자라면 다 아는 소식일 텐데, 연초부터 헤밍웨이의 작품이 쏟아지고 있다. 작년까지만 해도 왜 다시 나오지 않을까 의아해 하던 작가다. 최근에야 알게 된 거지만, 1961년에 세상을 떠난 헤밍웨이의 저작권 유효기간이 지난해로 만료됐다. 출판사들마다 2012년을 특별히 기다려온 까닭이다. 민음사의 세계문학을 필두로 여러 곳에서 다수의 번역본을 출간할 예정이라고. 미리 나온 몇권을 묶어서 리스트로 만들어놓는다. 가장 먼저 읽을 작품을 고르라면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27세의 헤밍웨이가 완성한 첫번째 장편소설이자 '가장 뛰어난 작품'이란 평도 자주 듣는 대표작이다.

 

Ernest Hemingway in Milan 1918

 

서울경제(12. 01. 07) 헤밍웨이의 대표작 문학전집으로 펴내

 

좋은 일이란 오래가는 법이 없구나, 하고 그는 생각했다. 차라리 이게 한낱 꿈이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이 고기는 잡은 적도 없고, 지금 이 순간 침대에 신문지를 깔고 혼자 누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 게 아니야." 그가 말했다.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 ('노인과 바다' 중에서)

지난 195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며 20세기 최고의 작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어니스트 헤밍웨이(1899~1961)의 저작권 보호 기간이 사후 50년인 지난해 말로 만료됨에 따라 헤밍웨이 작품 출간이 잇따르고 있다. 그 동안 '노인과 바다'를 비롯한 헤밍웨이 작품 번역본이 수십 종 나와 있으나 상당수는 저작권법이 엄격하지 않던 시절에 출간됐거나 정식 저작권 계약을 거치지 않은 '해적판'이다.

민음사가 헤밍웨이의 대표작 '노인과 바다'을 비롯해 '무기여 잘 있거라',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를 세계문학전집으로 펴냈다. 미국 현대 문학의 개척자로 불리는 헤밍웨이는 제1차 세계대전 후 삶의 좌표를 잃어버린 '길 잃은 세대'를 대표하는 작가다. 그러나 저작권 계약이 어려워 그동안 국내에서는 제대로 소개되지 못했다.

 

Ernest Hemingway Photo


헤밍웨이의 생애 마지막 소설로 작가 고유의 소설 수법과 실존 철학이 응축된 '노인과 바다', 작가 스스로가 "내가 쓴 로미오와 줄리엣"이라고 밝힌 연애소설이자 깊은 존재론적 성찰을 담은 '무기여 잘 있거라', 세계대전 후 삶의 방향을 상실한 사람들을 그린 첫 장편소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등이 이번에 1차로 출간됐다.

영문학자이자 번역가인 김욱동 한국외대 영어통번역학과 교수가 3년간 준비한 이번 작품은 '하드보일드 스타일'이라 불리는 간결한 표현 속에 다양한 의미를 숨겨둔 헤밍웨이의 문장 하나하나를 여러 각도로 고민해 어감을 최대한 살리면서도 한국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번역한 것이 특징이다. 민음사 측은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와 단편집 한 권도 추가로 내놓아 세계문학전집의 골격을 갖춰갈 계획이다.

다른 국내 출판사들도 헤밍웨이 작품 출간에 경쟁적으로 뛰어들고 있다. 문학동네도 1~2월께 '노인과 바다'(이인규 옮김)를 먼저 선보이고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와 '무기여 잘 있거라'도 추가로 출간할 계획이다. 열린책들도 '무기여 잘 있거라'(이종인 옮김)와 '노인과 바다'를 각각 2월과 3월 중에 출간한다. 헤밍웨이의 대표작을 위주로 먼저 소개한 후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단편 등 다른 작품도 잇따라 출간될 예정이어서 국내 독자들의 선택폭이 한층 넓어지게 됐다.(정민정기자)


7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2년 1월
11,500원 → 10,350원(10%할인) / 마일리지 57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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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은 다시 뜬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2년 1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1월 6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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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여 잘 있어라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2년 1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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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2년 1월
8,000원 → 7,200원(10%할인) / 마일리지 4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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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주문한 책 가운데 하나는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 소장의 <2013년 이후>(백산서당, 2012)이다. 이전에 그의 칼럼을 몇 차례 옮겨온 바 있어서 관심은 갖고 있었지만 책을 읽은 적은 없다. 인터뷰기사에서 "한국 진보가 2,000만 취약계층의 희망이 되어 집권을 넘보려면 그 고용노동 비전은 '정리해고ㆍ비정규직 없는 세상'이 아니라 '정리해고가 있어도 비정규직이어도 그런 대로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눈길이 가서 '아주 후진' 책 모양새에도 불구하고 읽어보기로 했다(정책자료집이나 쓰일 법한 표지다. '사회디자인'과 '책디자인'은 무관한 것인가). '문제는 일자리와 공평이다'가 저자의 핵심주장이다.

 

 

한국일보(12. 01. 07) "진보가 2000만 취약계층 희망되려면 비정규직이어도 살만한 세상 만들어야"

 

'좌충우돌'이라는 말이 어울릴 거 같다. 5년여 전 공공정책컨설팅 회사로 출범했다가 사단법인으로 바뀌어 사회정책 싱크탱크가 된 사회디자인연구소의 김대호(49) 소장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는 신간 <2013년 이후>(백산서당 발행)에서 올해 총선, 대선이 위기에 처한 한국사회를 구할 전기라며 보수는 물론 진보를 향해 마치 기관총 속사라도 하듯 비판을 쏟아 붓는다.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으로 감옥살이까지 했던 그는 전형적인 '운동권 386세대'다. 1990년대 중반 '공생공영'을 기치로 내걸고 대우그룹이 '386세대'를 대거 입사시켰을 때 서울 구로공단에서 벌이던 노동상담 활동을 접고 대우 행을 택했지만, 시대정신의 세례를 받은 그의 영혼까지 다락에 올려놓지는 못했다. 거칠게 말해 '한국사회 개조론'을 담은 책을 이미 서너 권 냈다. 보수에 대한 쓴소리 못지않게 지난해만도 '희망버스' 비판 등으로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한국의 진보와 보수는 '실체조차 의심스러운 마녀에게 책임을 뒤집어 씌우고 마녀사냥을 획책하고 있'으며 그 '마녀의 이름은 보수에게는 좌파정권과 친북좌파이고, 진보에게는 신자유주의와 한미 FTA'라고 말하는 그에게서 새 책 이야기를 6일 들었다.

 



-보수가, 진보가 뭐가 문제인가.

"보수와 진보, 그리고 관료집단에 의해 한국사회의 '공공'이 뒤틀려 있다는 게 문제다. 공공은 '정의' '원칙' '상식'과 동의어인데, 이런 것들이 뒤틀려 있다. 한국 사회의 모순은 진보가 말하듯 시장 논리 과잉에 의해 발생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제대로 된 시장 원리가 통하지 않아서 잘못된 곳이 대단히 많다. 보수든 진보든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 원리를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 산업생태계가 대단히 피폐해 있다. 한국의 IT계를 두고 안철수가 '삼성ㆍLG동물원'이라고 한 것처럼 대기업 아니면 살아남기 힘든 시장 구조, 고용ㆍ임금체계가 노동의 양과 질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수익성과 조직력에 비례하는 것이 문제다. 스웨덴은 볼보자동차 직원과 하청업체의 처우 수준이 비슷하다. 우리 진보에 이런 개념이 있는가. 한국의 진보는 양극화를 더욱 심화한다. 보수의 그늘 못지않게 진보의 그늘도 크다."

-진보가 집권하면 문제가 해결 될까.

"진보의 한국 사회 진단의 핵심은 신자유주의의 과도한 수용이라는 한심한 것이다. 시장 원리를 시장을 통해 물건을 사고 파는 사람들이 짓이기는 게 한국 사회다. 공정한 경쟁을 이야기하면서 그것을 뒤집어 엎는다. 이런 상태로 진보가 집권하면 1년도 안 돼 '박살'이 날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위기 상황이다. 보수도 진보도 혁신 경쟁을 해야 하고 환골탈태 해야 한다. 진보는 특히 반대만을 비전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그는 책에서 한국 사회의 물질적 재생산구조의 핵심을 '고단한 산업구조'와 '양반ㆍ상놈으로 나누어진 고용구조'라며 이것이 '양극화ㆍ민생불안, 절망과 불신 등을 확대재생산하는 핵심구조'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정리해고ㆍ비정규직 없는 세상'이라는 비전을 타도해야 할 '지적 앙시앵 레짐'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한국 진보가 2,000만 취약계층의 희망이 되어 집권을 넘보려면 그 고용노동 비전은 '정리해고ㆍ비정규직 없는 세상'이 아니라 '정리해고가 있어도 비정규직이어도 그런 대로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복지 논쟁이 뜨겁다.

"보편ㆍ선별주의라는 이슈가 한심할 따름이다. 복지 정책은 (복지의)두께, 대상, 프로그램의 우선 순위 등 3가지 차원이 있다. 보편ㆍ선별 논쟁은 대상의 문제이다. 복지 확대를 주장하는 거의 대다수가 10년 안에 국민총생산(GDP)의 20%를 복지에 지출하자고 한다. 이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이다. 하지만 한국은 연금을 안 부은 노인들과 기타 사각지대도 적지 않다. 여기서 뭉텅이로 예산이 떨어져 나가고 나면 보편주의를 하더라도 OECD 평균보다 적은 돈으로 복지시스템을 돌려야 한다. 고용률이나 임금근로자 비율이 낮고 자영업자가 많은 현재의 한국 사회에서는 그러면 (복지의)두께가 얇아질 수밖에 없다. 두께, 대상, 프로그램 우선순위의 문제를 종합해서 어떤 것은 보편주의, 어떤 것은 두꺼운 선별주의 하는 식으로 다양하게 조정해야 한다."

-'2013 체제'는 무엇인가.

"민주화의 열망이 녹아 형성된 '87 체제'라는 지금까지 가치의 총체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남북관계에도 근본적인 변화가 있어야겠지만 중요한 것은 강하고 유능한 정치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헌법과 선거법 개정이 필요하다. 5년 대통령 단임제, 소선거구제는 독재 방지를 위해 정치를 무능하게 만들어 놓은 모양새다. 그래서 연임이 가능하도록 헌법을 바꾸고, 국회의원을 500명으로 늘려 정치가 관료 집단을 끌어나가야 한다." (김범수기자)

 

12. 01.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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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책들'이란 카테고리를 만들어놓고 곧 후회했다. 아니 난감했다. 가끔씩 실종된다면 모르겠지만, 이건 부지기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 책도 절판이군', '이 책도 사라졌네', '이것도 곧 절판되겠구만', 속으로 중얼거린다. 가끔씩 쓸 거리가 생기는 게 아니라 매일같이 '청원'에 시달려야 한다는 건 유쾌한 일이 아니다. 게다가 온갖 변명거리를 찾아서(숙달된 일인지라 어렵진 않지만) 왜 당장은 페이퍼를 쓸 수 없는지 해명해야 한다. 대개는 두 종류다. '알잖아, 내가 그럴 기분이 아니거든.', '잊었어? 그럴 처지가 아니란 걸?'

 

 

 

그러다 딱 걸렸다 싶은 책이 조르주 페렉의 <인생사용법>(책세상, 2000)이다. 오늘 아침에 보니 페렉의 신작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문학동네, 2012)이 출간됐고(당일배송이 아니어서 일단 장바구니에 넣어두었다) 어제 펼친 책 찰스 파스테르나크(생화학자로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조카다)의 <호모 쿠아에렌스>(길, 2005)의 서문에서 이런 구절을 읽었기 때문이다.

별개의 과정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복잡하게 상호 작용하고, 전체 유기체가 그 많은 환경이나 마주치는 동종, 이종 생물과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 또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흥미로운 소설 <삶, 사용자의 매뉴얼(Life, A User's Manual)>(1988)에서 조르주 페렉은 지나치게 환원주의적인 과학의 맹점을 꼬집는 일종의 은유로 조각 그림 맞추기를 언급하고 있다. 퍼즐 한 조각을 아무리 살펴본들 전체 형태에 대한 실마리를 얻지는 못한다. 부분의 역할은 오로지 전체 형체를 알고 난 후에만 인식될 수 있다.

여기서 필시 <삶, 사용자의 매뉴얼>이라고 옮겨진 책(영역된 책)이 <인생사용법>일 터이다. 찾아보니 표지가 멋지다. 2009년에 나온 2판이다.

 

 

그래서 <인생사용법>을 영역본과 같이 읽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급하게 들었다. 사실 <인생사용법>은 소장도서이긴 하지만 읽지 않은 책이어서(두께를 생각하면 이상한 일도 아니다) 아는 체하기도 멋쩍다. 그 멋쩍음을 해소할 좋은 기회이지 싶지만, 문제는 책을 어디에 두었는지 모른다는 것. '사용'을 좀 해보려고 하니 '인생'이 보이지 않는 격이라고 할까. 알라딘에선 '품절'로 뜨는 이 책이 다시 출간될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애서가들에게 '머스트해브 아이템'이란 사실만은 적시해둔다(읽는 건 나중 문제다).

 

 

조르주 페렉이란 이름을 떠올린 계기는 며칠 전에도 있었다. 최윤의 새 장편소설 <오릭맨스티>(자음과모음, 2011) 때문이다. 제목만 봐서는 번역소설과 분간이 안 되는데, 문장도 그렇다. 작가의 이름을 지우고 책장을 펼친 독자라면 '파리 바케트'풍의 문장들을 만나게 된다.

계산이 맞지 않아 골치를 썩였던 하루의 근무, 퇴근 시간 버스 안의 격투를 치르며 겨우 유지되는 육체의 균형, 이름없는 이 카페까지 걸어오는 동안의 굽 높은 구두의 시련...(12쪽)

작가가 불문학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되는데, 특별히 머릿속에서 호명되는 작가가 페렉이다. 그건 <사물들>(세계사, 1996)이 남긴 인상 때문인데, 읽은 지가 하도 오래 됐으니 주관적으로 각색되었을 수도 있다. 다른 프랑스 작가들을 더 많이 읽었다면 단서도 늘어났겠지만, 페렉만 읽었으니 페렉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뭔가 친근하다는 느낌만은 지울 수 없다. 확인해보려면 새로 번역돼 나온 <사물들>(펭귄클래식코리아, 2011)을 손에 드는 수밖에. 이 <사물들>의 영어판 표지는 이렇다. (펭귄클래식코리아, 2011)과 짝이다.

 

 

페렉의 작품은 그밖에 <임금 인상을 요청하기 위해 과장에게 접근하는 기술과 방법>(열린책들, 2010)이 더 소개돼 있다. 그의 많은 작품이 '실험적인' 것처럼 이 역시 그렇다. 제목에서부터 도발적이다.

 

 

사라진 책 한 권을 빌미로 조르주 페렉을 일람한 기분이 든다. 정리해보자. 당장 손에 든다면 <사물들>, 그리고 좀 티를 내고자 한다면 <인생사용법>이라는 것. 나는 잠시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에 들어가볼 참이다...

 

12. 01. 07.

 

 

 

P.S. 사실 <인생사용법>을 떠올린 계기는 하나 더 있다. 엊그제 데리다의 마지막 인터뷰 <최종적으로 사는 법을 배우기>를 구해서이다. 책을 받아보니 '마지막 인터뷰' 시리즈의 하나인데, 커트 보네커트와 로베르토 볼라뇨의 인터뷰도 나와 있다. 언젠가 '마지막 시간들'이 우리에게도 도래할 것이다. 우리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아는가? 우리가 알아야 할 인생사용법이 따로 있는가?..  

 

 

 

P.S.2. <인생 사용법>(문학동네, 2012)이 '인문서가에 꽂힌 작가들' 시리즈의 하나로 재출간됐다. <잠자는 남자>(문학동네, 2013)도 연이어 나왔다. 페렉의 서가도 자못 채워진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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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의 이론적 쟁점과 번역비평의 실제를 두루 다룬 책이 출간됐다. 정혜용의 <번역 논쟁>(열린책들, 2012). 국내에서는 드문 번역학 전공자의 저작이라 더욱 눈길이 간다. 소개기사를 옮겨놓는다.

 

 

ㅌㅇㄹ

경향신문(12. 01. 07) “번역은 원작을 주체적으로 읽고 모국어로 새로 쓰는 작업”

 

‘원문에 없는 말을 조작·날조했다. 번역을 각색 정도로 착각한 듯하다.’ 몇 년 전 유명 번역가에게 쏟아진 비판이다. 한국의 번역 비평 담론 중 98%가 부정적 평가를 담고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그 비평의 81%는 가독성과 충실성이 기준이라고 한다. 가독성은 의미가 통한다면 원문을 희생하더라도 우리말로 잘 옮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역론에 가깝고, 충실성은 원문을 글자 그대로 옮겨야 한다는 직역론에 가깝다. 최근에 벌어진 스티브 잡스 전기의 오역 논란도 이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번역논쟁>(열린책들)을 내놓은 정혜용 박사(45·사진)는 이런 이분법적 논의를 거부한다. 그는 “직역이나 의역이 따로 있다기보다 최상의 번역이 존재할 뿐”이라고 말했다. 번역은 원어를 그에 상응하는 다른 언어로 맞바꾸는 작업이 아니라 번역가가 자신을 둘러싼 사회문화적 환경 속에서 “주체적으로 텍스트를 읽어내 모국어로 새로 쓰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번역의 대상이 단어나 자구 하나하나가 아니라 ‘텍스트 전체’라는 것은 정 박사가 말하는 핵심이다. “번역자들은 작품 전체를 번역합니다. 미시적인 부분만 평가하면 받아들이기 어렵죠.”

전문번역가인 정 박사는 불문학 전공자로 프랑스에서 번역학 박사를 취득한 흔치 않은 이력을 갖고 있다. 번역의 실천·이론 양면을 경험한 셈이다. 독특한 경험의 소유자인 그는 ‘객관성’이라는 이름으로 일률적 기준에서 번역을 평가하는 학계의 정량적 방식이나 ‘원서를 읽는 게 낫다’는 식의 인상평가를 모두 비판한다.

 


문학작품, 그중에서도 속담이나 언어유희의 번역을 보면 정 박사의 논의가 두드러진다. 그는 언어유희의 극한을 만날 수 있는 프랑스 작가 레몽 크노의 <지하철 소녀 쟈지>를 번역한 경험을 예로 든다. 이 작품에는 등장인물이 ‘입다’라는 동사를 쓰다가 프랑스어의 복잡한 어미변화 때문에 헤매는 장면이 나온다. 정 박사는 원문과는 차이가 있지만 언어유희의 효과를 살리기 위해 ‘착복-착의-착수-착란’으로 이를 바꿔 번역한다.

속담 번역도 비슷하다. ‘곰은 잡지도 않고 가죽 먼저 팔 수는 없지’라는 프랑스 속담을 어떻게 옮길 것인가. 의역의 입장에서는 우리 속담인 ‘김칫국부터 마신다’로 옮기면 이해가 쉽다. 그러나 그 순간 20세기 초의 프랑스 산골이라는 배경은 사라지고 만다. “지나친 의역 또한 강대국의 자국 문화중심주의 산물이죠. 낯섦 그 자체를 즐기는 것도 외국문학을 읽는 이유인데요.”

 

 


두 사례는 직역이니 의역이니 하는 평가가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정 박사는 번역을 “원작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재창조해내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특히 문학번역은 하나의 ‘작품’이라는 생각이다. “문학 작품을 보고 왜 이렇게 썼어 하는 식으로 비평하지 않잖아요. 원작에 대한 이해와 분석을 확실하게 한 뒤 문학성에 대해 서로의 의견을 교환해야죠.” 정 박사는 “작가와 원작은 경외감을 가지고 대하면서 번역가에게는 인신공격도 서슴지 않는 풍토”가 문제라고 말한다. 책에 소개된 프랑스 학자 앙투안 베르만의 번역 논의는 이렇다. “번역 작품을 온전한 문학 작품으로 인정하여 그 번역 시스템을, 번역가의 글쓰기 방식을, 그의 번역관을, 번역 기획을 물으며, 번역 주체가 서 있는 번역 지평을 묻는다.” 정 박사가 ‘골방에 틀어박힌’ 번역가들의 연대를 꿈꾸는 번역·출판기획네트워크 ‘사이에’의 위원으로 활동하는 것도 그 실천의 일환이다.(황경상 기자)

 

12. 01. 07.

 

 

 

P.S. 번역이론과 비평을 다룬 책들은 간간이 출간되고 있는데, <번역 논쟁>의 책갈피에는 열린책들에서 나온 몇권의 번역 이론서가 소개돼 있다. 움베르토 에코의 <번역한다는 것>,로렌스 베누티의 <번역의 윤리>, 쓰지 유미의 <번역과 번역가들> 등이다. 번역의 '존재'에 관심을 가진 독자라면 같이 참고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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