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프레시안 북리뷰 코너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 서평이라기보다는 독서의 제안 같은 것으로 모리스 고들리에의 <증여의 수수께끼>(문학동네, 2011)를 다루고 있다. 이렇게저렇게 미뤄지다 보니 뒷북성 리뷰가 됐다. 아니 그럼에도 너무 이른 서평이 됐다! 모스의 <증여론>(한길사, 2002)와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그린비, 2009)와 같이 다루려다 보니 견적이 너무 늘어났기 때문이다. 여러 사정상 맛보기에 해당하는 내용만 적었다...

 

 

 

프레시안(12. 02. 10) 자본주의 무너뜨릴 궁극의 무기? '선물'!

 

몇 번 마감을 연기한 서평을 쓴다. 마치 공부가 미진한 학생이 시험지를 받아든 기분이다. 문제는 '좋아하는 과목'이라는 점. 벌써 두 달쯤 전에 모리스 고들리에의 <증여의 수수께끼>(오창현 옮김, 문학동네 펴냄) 서평을 제안 받고 나는 기꺼이 응했다. 다른 선택지도 있었지만 마침 읽어보려던 책이었기 때문에 고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한데 처음 몇십 쪽을 읽다가 만만찮은 책이란 걸 감지하고 부랴부랴 영역본까지 주문했다. 저자가 '증여의 수수께끼'와 정면승부를 벌이려는 각오였기에 옆에서 '구경하는' 처지에서도 나름 각오는 필요해보였다.

 

돌이켜보니 그런 긴장감을 느끼게 한 책으론 질베르 뒤랑의 <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들>(문학동네 펴냄)도 있었다. 사르트르의 상상력 론과 정면 대결을 펼치려는 것으로 보인 서두에서부터 대충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란 걸 감지했다. 이 역시 영역본을 구해놓고 정좌하며 읽을 채비를 했지만 정작 독서는 다른 일들에 파묻혀 아직도 미결 과제로 남아 있다. 700쪽이 넘는 분량도 좋은 핑계거리가 돼주었고. 하지만 <증여의 수수께끼>는 비록 350쪽에 이를지라도 그 절반도 안 되는 분량이다. '선택 과목'이라고 골라놓고 미적대다가 '낙제'를 받는다면 어찌 체면을 구기는 일이 아니겠는가. 요령껏 답안지를 작성하는 수밖에.

 

일단 '증여'란 말과 함께 떠올리게 되는 <증여론>(한길사 펴냄)의 저자 마르셀 모스와의 관계부터 언급해야겠다. 뒤랑이 사르트르와 대결한다면 고들리에의 상대는 마르셀 모스다. 저자 소개에서부터 고들리에는 "마르셀 모스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를 잇는 프랑스 인류학계의 거장"이라고 돼 있다. 모스를 태두로 하는 프랑스 인류학의 적통이란 얘기다. 실제로 전체 4부로 이루어진 책에서 절반 이상의 분량이 1부 '모스의 유산'에 할애된 것만 보아도 모스가 가진 비중을 알 수 있다. 고들리에가 서문에서 적은 고백대로라면 모스의 <증여론>은 그의 인생 진로를 바꿔놓은 책이기도 하다.

 

"나는 1957년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모스 연구 입문>과 함께 모스의 <증여론>을 처음 읽었다. 그때까지 나는 여전히 철학도였으며 인류학으로 전공을 바꾸지 않은 상태였다. (…) 1957년에 쓴 나의 노트에는 이 두 글을 읽고서 열정에 사로잡혔던 기록이 담겨 있다." (18~19쪽)

 

결국 고들리에는 <증여론>을 읽은 뒤에 인류학자가 되었고, 멜라네시아로 현지조사를 떠난다. 그리고 거기서 이 패기만만한 인류학자는 자신의 스승들을 재평가하게 될 단서들을 얻는다. "나는 그곳에서 증여의 비서구적 형태를 보았고, 이로부터 증여의 문제를 다시 제기하고 이와 관련된 문제에 대한 모스와 레비스트로스의 유산을 재평가하게 되었다." (21쪽) 
 
즉, 고들리에는 모스와 레비스트로의 주장 가운데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렸는가를 판별하고자 한다. <증여의 수수께끼>가 탄생하게 된 배경인데, 그런 사정을 고려하면 저자가 이 책을 쓰면서 염두에 둔 독자는 일반 독자가 아니다. 죽은 모스와 레비스트로스 그리고 동료 인류학자들이 그의 대화와 논쟁 상대자이다. 증여란 주제로 놓고 자신이 모스와 레비스트로스의 유산을 어떻게 갱신하고 또 넘어서고 있는지를 입증하고자 하는 책이니까 말이다. 인류학자 고들리에의 출사표이자 자기 존재 선언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증여론>을 둘러싼 이론적 모험을 한갓 인류학 동네 이야기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학자들의 논쟁 이상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어서이다. 사실 이 대목에서 고들리에의 책보다 더 유익한 참조가 되는 것은 영국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가치 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그린비 펴냄)이다. <증여의 수수께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스의 <증여론>과 함께 꼭 같이 읽을 필요가 있는 책이다.

 

우리에겐 먼저 소개됐지만 <가치 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2001년)은 <증여의 수수께끼>(1996년)보다 나중에 나온 책이다. 당연히 그레이버는 고들리에를 참고하면서 몇 가지 점에서 다른 의견을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번역본의 찾아보기에는 고들리에가 한번 언급되는 걸로 나와 있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자주 등장한다.

 

가장 중요한 대목은 <증여론>과 사회주의 이론과의 관계를 다룬 부분이다. 이 점은 그레이버가 특별히 강조하는 바인데, "오늘날 모스가 한평생 대단히 헌신적인 사회주의자였음을 의식하는 인류학자들은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인다"(338쪽)는 게 그의 문제의식이다. 특히나 영미에서 그렇다고 하는데, 고들리에는 <증여의 수수께끼>에서 이렇게 적었다.

 

"모스는 양도 불가능한 재화라는 관념을 분석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것은 아마도 그의 눈에 혼란스러워 보였던 논쟁, 집단적 소유권과 개인적 소유권을 둘러싸고 19세기 말부터 펼쳐졌고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이 다시 불붙여 놓은 논쟁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모스가 평생 철저한 반 볼셰비키주의자로 살았다는 점을 잊지 말자."(77쪽)

 

하지만 모스가 <증여론>을 쓰고 있던 1923년과 1924년 전후는 그가 가장 활발하게 정치적 활동을 펼치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는 협동조합과 노동조합 운동의 지지자로서 밑으로부터의 변혁을 추구했기에 폭력을 통한 사회주의 성취 기획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그레이버에 따르면 "그는 소비에트 체제가 작동하지 않을 수 없었던 어려운 전시 상황을 인정하는 한편, 그들이 휘두른 폭력이나 민주적 제도, 또 무엇보다 법치에 대한 그들의 경멸을 강하게 비판했다."(339쪽)

 

즉, 러시아 혁명에 대해서는 열정적으로 지지했지만 볼셰비키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갖고 있었던 것이 모스의 입장이다. 때문에 그레이버는 모스에 대한 고들리에의 평가가 좀 부정확하다고 본다. 그가 각주에서 지적하고 있는 내용이지만 모스와 고들리에를 이해할 때 필요한 부분이라 생각돼 옮겨 보면 이렇다.

 

"모리스 고들리에는 모스를 '철저한 반 볼셰비키주의자'이자 사회민주주의자로 평가한다. 그러나 이는 고들리에가 1997년에 재출간된 모스의 정치적 저술들을 참조하지 못했기 때문에 내려진 평가라고 생각된다. 1997년 재출간된 모스의 정치적 저술들에서 우리는 그가 러시아 혁명에 대해 대단히 양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으며 사실상 그의 정치적 비전이 많은 점에서 그의 멘토였던 조레스보다 프루동 같은 아나키스트에 더 가까웠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339쪽)

 

물론 우리에게 소개된 모스의 저작은 <증여론>밖에 없기 때문에, 모스의 작업이 갖는 정치적 의의를 제대로 음미하기엔 한계가 있다. 심지어는 마르크스주의 인류학자로 분류되는 고들리에조차도 모스의 정치적 견해에 대해서 오해한 부분이 있다는 지적이니까 '모스의 유산'을 재평가하는 일이 쉽지 않은 과제라는 걸 알 수 있다(고들리에는 모스를 사회주의자 내지 사회민주주의자로 보는 반면에 아나키스트 인류학자를 자임하는 그레이버는 모스에게서 아나키스트의 모습을 더 많이 본다).

 

그래도 무엇이 '모스의 유산'(고들리에의 표현)인지, 왜 '다시 모스에게로'(그레이버의 표현)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인지 이해하기 위해 간단히 줄거리만 챙겨놓자면, 모스는 화폐를 매개로 한 자본주의 교환 경제와는 다른 체계의 원리를 찾아내고자 했다. 고들리에를 재인용하자면 모스의 기본적인 생각은 이랬다.

 

"아주 최근에 인간을 경제적 동물로 만들어낸 것은 바로 우리 서구 사회이다. (…) 인간은 매우 오랫동안 이와는 다른 무엇이었다. 인간은 매우 오랫동안 계산기 같은 복잡한 기계가 아니었다." (102쪽)

 

'경제적 동물'로서의 인간, 곧 호모이코노미쿠스란 '계산기 같은 기계'와 다를 바 없다. 하지만 훨씬 오랜 기간 동안 인간은 부를 분배하는 다른 원리를 갖고 있었다. 그것이 '증여'를 매개로 한 '총체적 호혜 관계'다. 이 호혜적 관계에서 의무는 무제한적인 성격을 갖는다. 시장에서 물건을 사면서 그에 대해 값을 치르면 거래가 종료되는, 그래서 얼굴을 두 번 볼 필요가 없는 관계와는 다르다.

 

그레이버가 드는 사례를 참고하면, 가령 새 카누가 필요한 멜라네시아의 남성은 여동생의 남편과 그의 가족들에게 부탁한다. 상대에게 아내를 제공한 것이니까 상대편은 사실상 그에게 모든 것을 빚지고 있으므로 특정한 상환 의무에 따라 보답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이든 제공해야 할 무제한적 의무를 갖는다. 모스에 따르면 이것이 '공산주의'다. "누군가 바로 그것에 대해 답례를 하거나 값을 치르지 않고도 자신이 필요한 것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사회"다. 이것은 국가가 모든 것을 소유하는 방식의 공산주의와는 다른 '개인주의적 공산주의'다. 그 다른 사회의 가능성에 대한 탐구라는 점에서 모스의 <증여론>과 고들리에의 <증여의 수수께끼> 그리고 그레이버의 <가치 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은 서로 만난다.

 

우리가 새로운 가치 이론과 새로운 사회 구성의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면 증여라는 문제는 인류학자들만의 관심사가 될 수 없다. 그러니 다소 학술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하더라도 마르크스를 읽을 정도의 관심과 성의가 있다면 모스와 그의 후계자들의 작업에도 주의를 돌려보면 좋겠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금 고들리에의 <증여의 수수께끼>로 돌아간다. 이제 비로소 본론에 들어가야 할 테지만, 시험시간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린다. 그래도 성의는 보였으니 '낙제'는 면할 수 있지 않을까. 네? '재시'라고요?

 

12. 02. 11.

 

 

 

P.S. 마르셀 모스의 책도 그렇고, 그에 관한 책도 그렇고 아주 드물게 소개돼 있는데(물론 모리스 고들리에의 책도 <증여의 수수께끼>만 나와 있다), 브뤼노 카르센티의 <마르셀 모스, 총체적인 사회적 사실>(동문선, 2009)가 프랑스에서 나온 입문서격의 책이다. 간단한 서평을 쓴 적이 있지만 변광배 교수의 <나눔은 어떻게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가>(프로네시스, 2011)도 모스의 <증여론>에 대해서 한 장을 할애하고 있다(<기부론>이라고 옮겼다). 일본의 신화학자 나카자와 신이치의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동아시아, 2004)도 증여의 문제를 독창적으로 정리한 책이다. "사랑과 경제를 하나로 융합하는 새로운 증여의 철학"을 제시한다.

 

 

특기할 만한 것은 이번주에 나온 <2012 베스텐트 한국판>(사월의책, 2012)이다. <베스텐트>는 독일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공식저널이라고 하는데, 올해부터 매년 한국어판이 나오는 듯하다(책을 받아보니 연 2회 출간이다). 한국판 특집도 따로 있지만 이번판 쟁점주제가 선물(증여)론이다. 간단한 소개를 옮기자면,

"이번 <베스텐트 2012>는 마르셀 모스, 레비스트로스, 데리다 등 수많은 사상가들이 주목했던 ‘선물’이라는 주제를 쟁점으로 잡았다. 부자들의 기부 열풍, 자원봉사와 재능 기부 등에서 나타나는 사람들의 이타적 행동, 인터넷에서 정보를 자발적으로 공유하는 수많은 네티즌들. 왜 이처럼 사람들은 아무런 경제적 이익을 기대하지 않고서 자신이 가진 것을 타인에게 ‘선물’하는 것일까? 선물이 사람들을 연결하고 결속하며 상호 존중과 상호 인정의 공동체를 형성한다는 마르셀 에나프의 독창적 주장과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악셀 호네트의 비판적 고찰 사이에서 뜨거운 논쟁이 펼쳐진다."

그 논쟁이 궁금해서 책은 바로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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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달 책&(403호)에 실은 '로쟈의 주제별 도서소개'를 옮겨놓는다. 주제는 '식량전쟁'으로 골랐다. 새삼 알게 된 거지만, 영어 단어 'food'는 '식량' '식품' '음식'으로 모두 번역될 수 있다. 먹거리에 대해서만큼은 우리가 더 예민하다고 하면 과장일까. 지면에 나간 글은 오탈자가 걸러지지 않아 교정해서 옮겨놓는다. 

 

 

 

책&(12년 2월호) 식량전쟁

 

“세계의 식량위기는 21세기의 정치 문제이자 해결해야 할 근본적인 도전이다.” 독일의 저널리스트 빌프리트 봄머트가 <식량은 왜! 사라지는가>(알마, 2011)에서 내리는 결론이다. 하지만 이 결론은 식량문제를 다룬 대부분의 책에서 서론으로 옮겨놓아도 무방하다. 사람은 모두 먹어야 생존할 수 있기에 누구도 식량과 식품 문제에서 예외일 수 없다. 그런데 그 식량문제가 위기에 처해 있다. 인구, 기아, 기후, 그리고 바이오연료 등이 복잡하게 얽힌 세계 식량문제는 어떻게 생겨났으며 해결책은 무엇인가.

 

 


‘배부른 제국과 굶주리는 세계’로 양분된 오늘의 현실을 들여다보는 리즈 파텔의 <식량전쟁>(영림카디널, 2008)을 출발점으로 삼아보자. 세계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 작물 수확량은 늘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 인구 열 명 가운데 한명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 지금의 문제적 현실이다. 역사상 처음으로 과체중 인구(10억 명)가 기아에 허덕이는 인구(8억 명)를 앞질렀지만 절대 빈곤층은 줄지 않고 있다. 비만과 기아는 동일한 문제의 양면일까. “모든 나라마다 비만과 기아, 가난과 부의 편중이라는 대조적인 문제를 안고 있으며 이는 날이 갈수록 점점 심화되고 있다.”


이러한 모순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 식품산업의 구조이다. 커피를 예로 들자면 커피 재배업자와 소비자는 넘쳐나지만 연결고리에 해당하는 가공업자는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즉 모래시계 구조이다. 다수의 생산자가 도시 소비자에게 직접 공급하지 않고 소수의 식품 가공업체에 팔아넘기기에 작물의 산지 가격이 떨어지더라도 이익을 보는 건 소비자가 아니라 ‘중개상’이다. 가령 멕시코의 주식은 옥수수 가루로 만드는 토르티아라는 빵인데, 옥수수 가력이 하락한다고 해서 토르티아 가격도 덩달아 떨어지진 않는다. 가격 폭락으로 옥수수 농가는 망해가도 토르티아 값은 오히려 더 올라가는 기현상이 벌어진다. 토르티아시장의 가공업체가 김사(GIMSA)와 민사(MINSA)라는 다국적 기업 두 곳밖에 없기 때문이다. 멕시코정부는 이들 독점업체에 보조금까지 지급하면서 사태를 더 악화시켰다. 그런 상황에서 맺어진 북미자유무역협정은 멕시코의 농업경제를 파탄직전까지 몰고 가 오히려 미국 측에서 자유무역의 부정적 여파를 우려할 정도였다. 멕시코의 경우는 세계 식량시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보여주는 표준적인 사례라 할 만하다.


물론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식량전쟁>에는 지난 2003년 세계무역기구 장관급 회담이 개최된 칸쿤에서 “세계무역기구가 농민을 죽인다!”라고 외치며 자살한 농민운동가 이경해 씨의 사례도 나온다. 한농련(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 회장이었던 이 씨는 유망한 한우 사육농이었지만 한국정부가 호주와 쇠고기 수출 협정을 체결하면서 직격탄을 맞았다. 값싼 호주산 쇠고기 수입에 대비해 정부가 권장한 것은 대출을 받아서라도 소 사육마리 수를 늘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쇠고기 값 하락은 지속됐다. 정부의 조언을 따랐던 그는 결국 대출금을 갚지 못해 파산하는 신세가 됐고 절망 끝에 죽음으로 항의를 표시했던 것이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전 세계 농민 수만 명이 “우리는 모두 이경해다!”를 외쳤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농민들의 현실은 과연 달라졌을까. 

 

 


미국 저널리스트 폴 로버츠의 <식량의 종말>(민음사, 2010)은 위기와 좌절이 농민들만의 것이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전 세계적 식량 공급망과 현대 식품 시스템을 통해서 도시 소비자들은 곡물, 고기, 과일, 채소 등을 어느 때보나 더 많이, 그리고 더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직도 한쪽에서는 ‘식품 불안정 상태’에 놓여 있고, 기아를 모면한 나머지 인류는 현대식 식단이 낳은 부정적인 결과로서 비만과 심장병과 당뇨와 싸우고 있다. 게다가 대형 가축 사육시설과 집약적 농업은 점차 자연 시스템의 생산능력을 떨어뜨리고 있다. 이처럼 상황은 더 나빠져 가고 있는데, 21세기 중반이면 거의 100억에 달할 인구를 과연 먹여 살릴 수 있을까? ‘새로운 수확’을 기대할 수 있을까?


다시 <식량은 왜! 사라지는가>로 돌아오면 저자의 대답은 부정적이다. 물론 대책은 강구하고 있다. 2008년에 불어 닥친 식량위기 이후 국제연합의 반기문 사무총장은 식량문제를 중요한 현안으로 간주해 식량농업기구와 세계은행, 국제농업개발기금과 세계식량계획, 세계무역기구 등에 분산돼 있는 전문 인력을 한데 모아 ‘세계식량안보위기대책 하이레벨 태스크포스’까지 꾸렸다. 하지만 전망이 밝지 않다. 한 국가 내에서도 이해관계가 조정되지 않는 문제를 국제연합이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건 무망한 일이라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가장 단순하게 말하면, 기아에 시달리는 8억 6200만 명의 식량과 생존권 확보에 필요한 비용이 300억 달러라고 한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무기 구입에 2000억 달러를 지출하고 1000억 달러어치 식량을 버릴지언정 국제사회가 300억 달러를 마련하는 일은 어렵다. 안타깝게도 “시간은 우리에게 불리하게 흐르고 있다.”

 

12. 02. 10.

 

 

P.S. 식량문제 관련서를 몇권 더 들자면 교과서적인 책으로 패트릭 웨스트호프의 <식량의 경제학>(지식의날개, 2011), <식량전쟁>과 비슷한 문제의식을 담은 월든 벨로의 <그 많던 쌀과 옥수수는 모두 어디로 갔는가>(더숲, 2010), 그리고 최근에 나온 톰 스탠디지의 <식량의 세계사>(웅진지식하우스, 2012) 등을 꼽을 수 있다. '식량전쟁'은 우리가 여전히 가장 기본적인 문제와 대면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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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주간경향(962호)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 백낙청 선생의 <2013년체제 만들기>(창비, 2013)을 읽고 요지를 간추린 것이다. 2013년체제의 핵심이 분단체제 극복이란 점에서 <분단체제 변혁의 공부길>(창비, 1994)와 <흔들리는 분단체제>(창비, 1998),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창비, 2009)를 잇는 책이면서 현 정세에 대한 긴급한 제언이기도 하다(표지의 이미지로는 '기원'에 가깝다).

 

 

 

주간경향(12. 02. 14) 시민 참여와 남북연합 건설 ‘포용정책 2.0’

 

총선과 대선 일정을 앞두고 있는 올해는 모두의 예상대로 한국 사회에 중요한 전환점이 될 전망이다. MB정권 4년을 보낸 국민의 선택이 과연 무엇일지 기대와 바람이 클 수밖에 없다. 문학평론가이자 시민사회 원로로서 백낙청 선생은 <2013년체제 만들기>에서 그 기대의 최대치를 ‘2013년체제’란 말에 담았다. 낡은 체제를 청산하고 한반도에서 새로운 체제가 시작되어야 한다는 바람의 표현이다. 지난 1987년 6월항쟁의 결과로 성취한 한국 사회의 전환을 ‘87년체제’라고 부른 것에 견주면 ‘2012년체제’란 말이 더 타당할 듯싶은데, 어째서 ‘2013년체제’인가? 거기엔 한국 현대사를 바라보는 저자의 시각이 반영돼 있다.

 

저자의 지론에 따르면 한국 사회는 ‘분단체제론’을 떠나서는 이해할 수 없다. 남과 북의 기득권세력은 현재의 분단상황을 이용해 이득을 챙기고 대다수 남쪽의 국민과 북쪽의 인민은 그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사회구조가 ‘분단체제’다. 분단체제론의 지향점은 당연히 분단체제의 극복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87년체제의 성취는 미흡하다. 군사독재를 무너뜨리고 민주주의를 진전시켰지만 남한사회에 한정된 변화였다. 물론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되고 2000년에는 6·15 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되면서 남북관계가 부분적으로 개선됐다. 하지만 87년체제는 한반도의 온전한 평화체제 구축으로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분단체제, 곧 ‘53년체제’를 근본적으로 허물지는 못한 것이다. 그렇듯 53년체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후천성 분단인식 결핍증후군’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민주화나 민주주의는 근본적인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고, 이명박 정부의 역주행 또한 말기 국면에 도달한 87년체제의 문제점이 극단적으로 표출된 결과라는 게 저자의 시각이다. 따라서 과제는 53년체제의 혁파이고 분단체제의 획기적인 개선이다.

 

분단체제 극복이 새로운 체제 성립의 관건이기에 2012년 총선과 대선 결과가 곧바로 새로운 체제의 수립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총선에서의 승리와 대선에서의 정권교체가 남한사회 민주세력의 당면한 과제이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2013년체제 설계에 다양한 항목들이 포함될 수 있지만 핵심은 한반도 평화체제의 구축이다. 저자가 2013년체제의 최우선적 과제가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일이라고 보는 것은 그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대북정책에서의 변화다. 백낙청은 6·15 공동선언을 ‘포용정책 1.0’이라고 할 때, 이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포용정책 2.0’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 2.0버전의 핵심은 분단체제 극복을 위한 시민 참여의 획기적인 강화와 남북연합 건설이다. 남북연합의 경우 이미 2000년에 남북 정상이 중간과정의 국가연합 형태를 거쳐서 통일로 간다는 점에 합의했다. 현실적으론 EU보다 낮은 단계의 느슨한 연합제를 구상할 수밖에 없지만 일단 연합제가 이루어지면 통일은 역전 불가능한 과정으로 접어들 수 있으리라는 것이 저자의 기대다. 그리고 그러한 점진적 통일과정에 들어서게 되면 일반시민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 민간기업을 포함한 넓은 의미의 시민사회가 남북화해와 교류에 직접 나서서 남북의 평화적이고 시민참여적인 재통합에 걸맞은 준비를 해나갈 수 있게 되며, 이를 위해서 시민참여형 통일과정을 수용하는 국정운영체제가 마련돼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제안이다.

 

2013년체제론의 개요가 그러하다면, 왜 ‘2012년체제’는 성립하기 어려운지 알 수 있다. 당장 이명박 정부 임기 안에는 남북관계의 획기적 개선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천안함사건 이후 2010년 5월 24일 이명박 대통령은 남북교류를 전면중단한다고 선포했고, 이 조치는 아직 철회되지 않았다. 북이 정말로 천안함을 공격했다면 5·24조치는 나름대로 정당성을 갖는다. 하지만 충분한 근거 없이, 혹은 근거를 조작해가면서 그런 조치를 취했다면 국민적 심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저자는 천안함사건의 진실규명이 2013년체제의 핵심에 자리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2013년체제 만들기’는 ‘우리 시대의 진실’을 규명하는 일이기도 하다.

 

12. 02. 09.

 

 

 

P.S. 어제 컴퓨터를 교체한 이후 처음 올리는 페이퍼이다. 모니터를 두 대를 놓고 쓰게 돼 뭔가 편리하긴 한데, 그래도 적응해야 할 구석이 많다! <2013년체제 만들기>와 함께 읽은 건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장의 <2013년 이후>(백산서당, 2012)이다. 앞부분을 읽었는데, 386세대의 자기비판과 '성찰적 열정' 혹은 '열정적 성찰'(분명 '차분한 성찰'은 아니다)의 최대치를 보여주지 않나 싶다. 미적지근한 관망적 성찰이나 두루뭉술한 이론에 염증을 느끼는 독자라면 일독해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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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비출판사의 학술심포지엄이 이달 22일-23일 양일간 정독도서관에서 개최된다(http://greenbee.co.kr/blog/1672). 2010년 '알튀세르 효과'에 이어서 2012년의 주제는 '푸코 이후의 정치와 철학'이다. '저항하는 자유의 철학자, 푸코를 다시 읽는다'가 부제. 관심있는 분들은 참고하시길.

 

 

12. 02. 08.

 

 

 

P.S. 학술 심포지엄 소식을 '오래된 새책' 카테고리에 올리는 건 디디에 에리봉의 평전 <미셸 푸코>(시각과언어, 1995)가 이번에 재출간되기 때문이다. <미셸 푸코, 1926-1984>(그린비, 2012). 저자는 학술 저널리스트로서 여러 (철)학자들의 평전을 쓰고 있는데, <미쎌 푸코> 또한 다양한 자료와 인터뷰에 근거하고 있는 읽을 만한 평전이다. 덧붙여 적자면, <구조주의의 역사>의 저자 프랑수아 도스의 평전 <들뢰즈와 가타리>도 조만간 번역본이 나올 예정이다. 작년에 영역본을 구해놓고 기다리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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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에서 '위기의 시대, 지성과의 대화'라는 기획하에 매주 수요일 해외 지성과의 인터뷰를 연재한다. 첫번째 대화자가 지젝이어서 링크해놓는다(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1202/h2012020721083086330.htm). 현재 진행중인 한겨레교육문화센터의 지젝 강의에 요긴한 자료로 쓸 참이다. 덧붙여 박스기사로 나간 지젝 소개는 나도 한마디 거들었기에 옮겨놓는다.

한국일보와 출판사 자음과모음이 공동기획한 '위기의 시대, 지성과의 대화' 는 세계적 석학들에게 최근 전세계적인 정치, 사회,경제 위기에 관해 묻고 그들의 혜안을 듣는 인터뷰 시리즈다. 지젝을 비롯해 자크 랑시에르(프랑스ㆍ철학), 가라타니 고진(일본ㆍ문학), 지그문트 바우만(독일ㆍ사회학), 악셀호네트(독일ㆍ철학), 크리스토프 멘케(독일ㆍ철학) 등 해외 지성들의 인터뷰를 매주 수요일 연재한다. <편집자주>

 

■ 슬라보예 지젝 (Slavoj Zizek)은 누구
영화·SF소설 등 대중문화를 철학의 대상으로… '지젝거리다' 조어도

2000년대 한국 사회를 풍미한 사상가 맨 앞줄에 슬로베니아 출신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이 있다. 천정환 성균관대 국문과 교수가 지난해 <실천문학> 가을호에 기고한 '포스트 근대문학의 시대, 또는 연장선에 대하여'에 따르면, 2000년 이후 국내에 출간된 지젝의 저서는 23권으로, 가라타니 고진(12권), 위르겐 하버마스(10권), 미셸 푸코(7권)를 압도한다.

1949년 옛 유고연방에서 태어난 지젝은 1972년 류블랴나대에서 철학 박사학위, 85년 파리8대학에서 정신분석학으로 두 번째 박사학위를 받았다. 89년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을 통해 이름을 알린 뒤 세계 철학ㆍ사상계에 파장을 일으켜 온 그는 '동유럽의 기적'으로 불리기도 한다.

'마돈나가 싱글 앨범 발표하는 것보다 더 정기적으로 책을 발표'(이현우 <로쟈의 인문학 서재>)해 이미 50여권을 출간한 그는 영화, SF소설 등 다양한 대중문화를 철학의 대상으로 끌어들인다. 이현우 한림대 연구교수는 "국내에서는 지젝의 저서가 특히 비평계에서 많이 읽힌다. '지젝거리다'는 조어가 있을 정도로 담론장에서 많이 회자된다"고 말했다. 지젝 연구자인 민승기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인문학계에서 지젝의 사유에 관심을 갖는 것은 가장 대중적인 대상에서 철학의 정수를 뽑아내고, 일상에서 철학적 사유를 하기 때문"이라고 평했다.

지젝의 이론ㆍ사상적 토대는 라캉의 정신분석학과 헤겔의 관념철학, 마르크스의 이론이다. 지젝이 해석한 헤겔은 정반합의 변증법적 과정을 거쳐 하나의 닫힌 체계를 완성하는 것의 정반대 편에 있다. 정(正)도 반(反)도 아닌, 하지만 동시에 정이면서 반인 합(合)을 지향하는 변증법이다(지젝에 따르면 영화 '에일리언' 속 에일리언이 사람도 괴물도 아니면서 동시에 사람과 괴물인 것처럼). 그는 새롭게 해석한 헤걸의 변증법을 일상에서 작동하는 이데올로기를 부정하고 깨부수는 비판의 도구로 활용한다. 지젝의 라캉도 이렇게 해석된 라캉이다. 자기동일적 주체란 존재하지 않으며 주체란 언제나 분열된 주체, 분열된 채로 자기정체성을 구성해나가는 주체다.

민승기 교수는 "지젝은 문제의 해법을 제시하기보다 지금 상황을 뒤흔들 수 있는 문제를 제기하고 문제를 생산해내는 절차를 만들고자 한다. 현실적인 문제에 개입하면서 손쉬운 해결책이 주는 이데올로기적의 함정을 지적하고 '왜 이게 문제가 되는가?'를 끊임없이 질문하는 학자"라고 말했다.

 

12. 02. 07.

 

P.S. 인터뷰 말미에서 지젝이 한국의 독자들에게 건네는 말은 이런 것이다.

 

-한국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은?

"사유를 시작하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 단순한 호기심에 그치지 말고, 전 생애에 대해 고민을 해야 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을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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