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강의가 끝나고 집에 돌아와 보니 어제오늘 주문한 책들이 와 있는데(사실 휴일을 빼곤 거의 매일 책들이 온다. 거의 매일 주문한다는 뜻이다!) 그중 하나는 기획회의(313호)다. '철학자 강신주' 특집에서 총론을 맡아 쓴 바 있다. 그걸 옮겨놓는다. 페이퍼 제목의 '적정인문학'이란 말은 '적정기술'에 빗대 만든 신조어다. 글의 제목과 소제목은 편집자가 붙인 것이다.

 

 

기획회의(12. 02. 05) 인문학은 '사랑'이다

 

‘강신주와 인문저자’가 이번 특집에서 내게 맡겨진 꼭지다. 인문서의 동향에 조금만 밝은 독자라면 지난해 국내 인문저자로서 강신주의 두드러진 활약을 놓치지 않을 수 없다. 관계자에게서 들으니 <철학이 필요한 시간>은 인문분야 신간으로서 최대 베스트셀러였다(물론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그뿐인가. <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의 후속작으로 <철학적 시읽기의 괴로움>도 출간했고, ‘제작백가의 귀환’ 시리즈의 첫 두 권 <철학의 시대>와 <관중과 공자>도 숨 가쁘게 펴냈다. 아니 숨이 가쁜 건 옆에서 지켜보는 독자의 몫이고, 그의 걸음은 더 빨라질 기세다. 유행하는 말로 ‘폭풍집필’ 모드에 접어든 것처럼 보인다.

 

 


‘강신주와 인문저자’란 제목은 바로 그런 상황을 시각으로 재현하고 있는 듯싶다. 강신주가 앞서가고 다른 인문저자들이 뒤따라가는 현재의 상황 말이다(강신주 VS 인문저자들). 바야흐로 강신주가 대세다. 그는 편집자들이 가장 주목하는 인문저자이면서 ‘우리시대 대표 인문학자’이다. 그의 비결은 무엇이고,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우리? 인문저자와 인문독자, 인문편집자를 두루 묶어서 일단은 ‘우리’라고 해보자.   

 

 

 

그의 순정한 인문학

개인적인 기억을 더듬어보니 강신주와의 첫 만남은 <노자: 국가의 발견과 제국의 형이상학>부터였다. 2004년에 나온 책이지만 나는 몇 년 뒤에 읽었다. 일단 노자를 ‘제국의 형이상학자’로 읽는 그의 시각이 흥미로웠다. 과문한 탓에 나도 노자하면, 장자와 묶어서 ‘무위자연의 철학자’ 정도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 1학년 때 <장자>를 읽고서 크게 감흥을 얻었던 터라 장자를 전공한 저자에게서 모종의 친밀감을 느끼기도 했다. 통념과 다르게 그는 단호하게 ‘노자와 장자’ 아니라 ‘노자 VS 장자’라고 주장했는데, 상당히 파격적이고 신선하게 여겨졌다. 그래서 <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장자의 철학>도 구하고 ‘지식인 마을’ 시리즈의 <장자 & 노자>도 연이어 읽었다. 그의 <장자>는 <노자>와 마찬가지로 태학사의 ‘중국철학 해석과 비판’ 시리즈의 하나로 나온 것인데, 강신주는 그 시리즈의 공동 편집위원이었다. 그는 아직 학계 안에 있었다. 그래서 연세대학교 철학과에서 장자로 박사학위를 받은 ‘동양철학자’라는 게 나의 머릿속 그의 분류 항목이었다.

 

 


하지만 그는 동양철학 전공자라고만 한정하기에는 좀 특이했다. 서양철학, 특히 프랑스 현대철학자들에 대한 참조가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도가철학회에서 엮은 <노자에서 데리다까지> 같은 책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대놓고 장자와 들뢰즈를 왕복하는 동양철학자는 적어도 내 기억엔 없었다. 그래서 특이하다 싶었고, 동양철학이란 말이 은연중에 풍기는 ‘엄숙주의’와는 잘 맞지 않아 보였다. 그는 활달했고 거리낌이 없었다. 그런 인상을 더 강하게 각인시켜준 책이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이었다. 그는 장자와 함께 모든 차이를 횡단하고자 했고 그것은 ‘즐거운 모험’이라 부를 만한 것이었다. 범속한 범주들의 칸막이는 더 이상 장애가 될 수 없었다. 대학 아카데미즘의 속박에서도 벗어났다. 그는 ‘동양철학자’가 아니라 그냥 ‘철학자’이고자 했다. 그냥 ‘인문학자’이고자 했다. 그리고 대학 강의실 바깥의 더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자 했다. 왜인가? 인문학은 ‘사랑’이라고 생각해서다

 

강신주는 <장자 읽기의 즐거움: 망각과 자유>의 머리말에서 이렇게 적었다. “장자는 우리에게 인문학의 정신이 인간에 대한 사랑에 있다는 점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인문학은 인간의 즐거운 삶을 긍정하고 옹호하려는 정신에서만 가능한 것이지요. 그렇기에 인문학의 위기란 결국 인간의 자유와 행복의 위기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이렇듯 인문학의 위기를 ‘인간의 자유와 행복의 위기’로 인식하는 태도는 그것을 인문학자들의 위기로 간주하는 태도와는 사뭇 다르다. 그에겐 인문학자들의 생계보다도 ‘인간의 사랑과 연대’를 회복하는 일이 더 절박하고 중요한 문제로 간주된다. 물론 그런 대의를 입에 달고 다니는 인문학자들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강신주는 실제로 그걸 믿는다. 그리고 실천한다. “나는 장자의 정신을 모든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었습니다”란 바람은 거기에서 나온다. ‘순정한 인문학’이란 게 있다면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인문학의 정신이 인간에 대한 사랑에 있다는 말은 특별하지 않을 수 있다. 더구나 인간이란 말이 추상적인 만큼 그런 주장 자체도 추상적인 구호에 그칠 수 있다. “여러분, 사랑해요!”란 말은 연예인들의 상투어가 아닌가. ‘인간에 대한 사랑’이란 말도 상투어의 혐의에서 아주 벗어나는 건 아니다. 순정한 인문학자라면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가야 한다. 더 구체적인 것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강신주가 발견한 것은 인간의 ‘상처받기 쉬움’이다. 대학 바깥의 대중강연 활동을 통해서 인문학자의 자리와 역할을 새롭게 찾아간 그는 무엇이 사람들을 인문학으로 이끄는지 성찰한다. 삶에 대한 고민과 상처다. <상처받지 않을 권리>의 지킴이를 자임하고 <철학이 필요한 시간>을 통해서 인문학 카운슬러로 나선 것은 그런 이들에 대한 고려 때문일 것이다. 그는 감성적 소통을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자기가 말하고 싶은 것보다,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얘기가 무엇인지를 먼저 고려한다. 우리가 상대를 눈앞에 두고 대화를 나눌 때, 우선적으로 살펴야 하는 것이 상대방의 표정이고 마음상태인 것은 자명하지 않은가. 가급적 상대방과 눈높이를 맞춰야 함은 물론이다. 그게 대화니까. 강신주에게 철학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말 건넴’이며 대화의 기술이다. 


<철학의 필요한 시간>에서 그는 처음 어떻게 말을 건넸던가. “지금까지 저는 수많은 유리병편지를 받았습니다. 발신자는 스피노자, 장자, 나가르주나, 원효 등과 같은 철학자였습니다. 매번 편지를 받아 펼쳐볼 때마다 저의 고독과 외로움은 경감되었을 뿐만 아니라 저는 인간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철학을 통해서, 많은 철학자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외로움을 견뎌왔다는 것이 그의 경험담이다. 그는 그렇게 전달받은 행운을 ‘유리병’에 담아 이젠 다른 사람에게도 전달하고 싶어 한다. “가끔 저의 책들이 서점 서가에 꽂혀 있는 것을 부끄러운 마음으로 보곤 합니다. 과연 어떤 사람이 저의 유리병편지를 꺼내 읽어볼까요?” 이런 것이 말하자면 그의 순정한 인문학이 갖는 감성코드다. 

 

여기까지 적고 보니 강신주를 ‘소통의 인문학자’라고 불러도 좋겠다. 아니, 이건 뒷북이다. ‘장자철학에서의 소통의 논리’가 그의 박사학위논문이었으니까. 그러고 보면, 그의 순정한 인문학적 태도나 감성코드는 어떤 전환이나 각성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오래된 기원을 갖고 있다. 아예, 장자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장자>에서 그가 가장 자주 인용하는 대목을 보자. “도(道)는 걸어 다녔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고, 사물은 그렇게 불렀기 때문에 그렇게 구분된 것이다.” 이 대목을 설명하기 위해 강신주는 등산 애호가답게 등산로를 예로 든다. 깊은 산중에 난 구불구불한 산길이 애초에 길이었을 리 만무하다. 그 길은 무수한 사람들이 걸어 다녔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렇듯 장자에게서 ‘도’는 ‘관계의 흔적’이자 ‘소통의 결과’이다. 그렇다면 어떤 관계 이전에, 소통 이전에 도라는 건 없다. 강신주가 관계를 만들면서 소통하기 위해 애쓰는 것은 그가 장자를 통해서 얻은 깨달음의 실천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요컨대 인문학적 지행합일(知行合一)의 한 사례가 강신주 인문학이다.  
 

 

 

고민을 덜어주고 상처를 치유해주는

장자에 관한 책들에 이어 <상처받지 않을 권리>에서부터 ‘제자백가의 귀환’ 시리즈로 이어지는 그의 빠르고 너른 행보에 대해서는 이번 특집에서 따로 다뤄질 것이기에 나로선 특별히 <철학, 삶을 만나다>에 주목하고 싶다. 2006년에 나왔으니 그의 초기작이면서 강신주란 이름을 조금씩 유포시킨 책이다. 나는 입소문만 듣고 있다가 몇 년 뒤에나 구입을 하고 이후에도 그냥 책장에 꽂아두기만 했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철학과 삶의 ‘만남’을 주선한다는 책들, 빳빳한 철학을 좀 부드럽게 다림질해준다는 책들이 한때 유행하기도 해서 ‘그렇고 그런 책’ 가운데 하나로 치부했었다.


한데 다시 펴본 이 책에 강신주의 ‘오래된 미래’가 고스란히 담겨 있어 놀랐다. 강의 시간에 학생들과의 소통과정에서 겪은 당혹스런 경험을 이야기한 다음에 그는 이런 교훈을 얻었다고 고백한다. “그것은 제 이야기가 농담이 되느냐 진담이 되느냐는 저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서 최종적으로 결정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물론 장자의 “길은 걸어 다녔기 때문에 만들어진다(道行之而成)”를 다시 반복해서 진술한 것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만남’이란 화두이고, ‘타자와의 만남’이란 심급이다. 그런 관점을 조금 연장해서 말하자면, 인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인문학자들이 아무리 정의를 내려 봐야 그것은 반쪽짜리에 불과하다. 적어도 대중과 소통하기 위한 인문학이라면, 대중과의 만남 이전에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한번 찍힌 발자국일 따름이지 아직 길이 될 수 없다. 사건이 될 수 없다. 그것이 길이 되기 위해서는 사람들을 인도할 수 있어야 한다. 그 길을 함께 걸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현재 이런 논리를 가장 명료하게 인식하고 있는, 아니 체득하고 있는 인문저자가 강신주이다. 이미 <철학, 삶을 만나다>에서부터 그는 두 가지 만남을 꿈꾸고 기획했다. 하나는 철학과 삶의 만남이고, 다른 하나는 독자들(‘여러분’)과의 만남이다. 거기에 더 보태자면, 그의 철학 또한 만남들의 주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단 ‘동서양 철학이 모든 것’이란 부제 아래 동서양의 수많은 철학자들을 불러다 맞세운 <철학 VS 철학>만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상처받지 않을 권리>와 <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 <철학적 시읽기의 괴로움>까지 그의 책 대부분이 만남의 형식으로 구성돼 있다.


이 만남들은 물론 주선자의 속 깊은 계산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각각을 따로따로 대면했을 때 보지 못한 부분들을 드러내준다. 그래서 독자로 하여금 더 편안하게 합석하여 이들이 대화와 논쟁, 혹은 밀어에 귀 기울이게 해준다. 그래도 만남의 자리가 어색하다 싶으면, 주선자가 아예 노골적으로 나서기도 한다. “시인이나 철학자들은 모든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이 느끼고 생각한 것을 이야기한 겁니다. 이제 느낌이 오시나요?”(<철학적 시읽기의 괴로움>) “이제 느낌이 오시나요?” 같은 물음을 친근하면서도 자연스레 던질 수 있는 인문저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나로선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와 <철학카페에서 시읽기>의 저자 김용규 정도를 떠올릴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은 동서양 철학 전공자로서 인문학 대중화에 가장 앞장서고 있는 저자들이다.

 

 


‘적정기술’이란 말이 있다. 원래는 에른스트 슈마허가 <작은 것이 아름답다>(1965)라는 책에서 ‘중간기술’이란 개념으로 처음 소개했다고 하는데, 첨단기술과 토속기술 사이를 가리킨다. 슈마허는 서구에서 필요한 기술과 달리 빈곤국의 자원에 필요에 적합하게 소규모이면서도 간단하고 돈이 적게 드는 기술을 중간기술이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인간이 중심이 되는 경제적인 기술이란 뜻으로 확장됐다. 이 중간기술, 혹은 대안기술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더 널리 쓰이게 된 게 적정기술이다. “적정기술은 기술이 아닌 인간의 진보에 가치를 두는 과학기술을 총칭한다.”(김정태‧홍성욱, <적정기술이란 무엇인가>).


이 중간기술이나 적정기술이란 개념을 인문학에도 적용해볼 수 있지 않을까. 중간인문학 혹은 적정인문학. 그간에 ‘인문학 대중화’나 ‘대중인문학’이란 말이 ‘본격인문학’이나 ‘고급인문학’에 견주어 부당하게 폄하되거나 오해된 경우가 많았다. ‘대중 VS 엘리트’라는 대립적 구도의 산물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인문학, 우리의 고민을 덜어주고 상처를 치유해줄 수 있는 인문학을 ‘중간인문학’ 혹은 ‘적정인문학’이라고 부르게 되면 좀더 상생적인 구도를 만들어볼 수 있을 듯싶다. 우리에겐 ‘첨단인문학’뿐만 아니라 ‘적정인문학’도 필요하다고 말이다. 강신주 인문학은 그 적정인문학의 유력한 사례다. 인문학을 위한 인문학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인문학으로서 적정인문학이 더 다양해지고 더 풍성해지길 기대한다.

 

12. 0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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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나온 가장 반가운 책은 재출간된 페르낭 브로델의 <지중해의 기억>(한길사, 2012)과 서인범 교수의 <명대의 운하길을 걷다>(한길사, 2012)이다. 브로델의 책은 품절됐다가 다시 나온 것이라, 서인범 교수의 책은 한창 명대사에 꽂혀 있는 터라 생각할 것도 없이 주문을 넣었다. 그렇게 주저없이 구입한 책에는 새로 번역된 <일반언어학 강의>(지만지, 2012)와 <초현실주의 선언>(미메시스, 2012)도 있다.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이 두 권에 대해서만 컬렉터의 소감을 간단히 적는다.

 

 

먼저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강의>는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이번에 처음 번역된 게 아니다. 역자 김현권 교수가 해설에서 적시한 대로 오원교본(형설출판사, 1973)과 최승언본(민음사, 1990)이 나와 있는 상태다. 오원교본은 도서관에서만 볼 수 있지만 최승언본은 아직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번역본이다. 개인적으론 번역용어 등에서 아쉬움을 갖고 있던 터라 이번에 대안이 될 만한 번역본이 나온 게 반갑다. 역자는 이미 발췌본 <일반언어학 강의>(지만지, 2009)를 펴내면서 완역본 출간을 예고한지라 나름 기다리고 있던 차였다. 아쉬운 것은 불어본의 편집자 마우로의 주해는 빠져 있다는 점. 이에 대해서는 역자 스스로도 이렇게 양해를 구하고 있다.

아쉬운 점은 마우로(T. de Mauro)의 주해를 덧붙이지 못했다는 점이다. 본문의 분량만큼이나 많고, 다양한 원어 인용문의 번역에 시간이 다소 걸리기 때문이다.(543쪽)

그 주해를 빼고도 번역본은 본문만 477쪽이니까(해설까지 포함하면 545쪽) 주해를 포함하면 800쪽이 넘어간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쉽게 엄두를 내진 못하겠지만 언젠가는 그 주해까지 포함한 '완벽한' <일반언어학 강의>를 구경할 수 있으면 좋겠다(편하게 구할 수 있는 영역본에도 주해는 빠져 있다).

 

 

 

<일반언어학 강의>와 같이 참고할 수 있는 책으론 <일반언어학 노트>(인간사랑, 2007)도 있다. 더불어 소쉬르의 생애와 그의 언어학에 대해선 김방한 선생의 <소쉬르>(민음사, 1998/2010)가 있다. 영어권의 입문서로는 조너선 컬러의 <소쉬르>(시공사, 1998)가 소개됐었다. 분량 대비로는 가장 요긴한 책이다.

 

 

불문학자 황현산 교수가 옮긴 앙드레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선언>도 예전에 <다다/쉬르레알리슴 선언>(문학과지성사, 1996)에 포함돼 일부가 번역된 바 있다. 이번에 나온 번역본에는 <초현실주의 제2선언>과 <초현실주의 제3선언 여부에 붙이는 전언>, 그리고 관련자료까지 모두 번역된 데다가 자세한 해설까지 첨부돼 있어서 더없이 유익한 초현실주의 자료집이 됐다. 시에서건 미술에서건 초현실주의를 이해하고자 할 때 제일 먼저 참고할 만한 책이 나온 것이라고 보면 되겠다.

 

 

초현실주의 관련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 책은 할 포스터의 <욕망, 죽음 그리고 아름다움>(아트북스, 2005)인데, 포스터는 초현실주의론의 두 가지 유형으로 앙드레 브르통과 발터 벤야민을 든다. 벤야민의 <초현실주의>도 번역돼 있기에 브르통의 <초현실주의>와 같이 읽어봐도 좋겠다. 초현실주의운동의 맥락에 대해선 <전후 유럽문학의 변화와 실험>(웅진지식하우스, 2011)도 참고할 수 있다...

 

12. 0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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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보문고의 소식지 <사람과 책>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문장도 하나 교정해서). '내 삶을 바꾸는 고전읽기'가 기획특집인데 그 중 고전읽기 붐에 대해 짚어달라는 청탁을 받고 쓴 것이다. 어떤 방향으로 써야 할지 생각해보다가 이지성의 <리딩으로 리드하라>(문학동네, 2010)를 실마리로 삼았다. 최근 황광우와 공저로 낸 <고전혁명>(생각정원, 2012)과 황광우의 <철학하라>(생각정원, 2012)도 '고전읽기 붐'과 연관된 책으로 볼 수 있겠다.

 

 

 

사람과 책(12년 2월호) 고전읽기 붐, 그 현상과 본질

 

얼마 전 ‘고전읽기의 즐거움’이란 글을 청탁받고 쓴 적이 있다. 청소년들을 위한 이러저런 조언을 담은 책이었는데, ‘고전읽기의 즐거움’은 인문학을 소개하는 파트의 한 꼭지였다. ‘고전을 읽어보시오’ 같은 고리타분한 충고는 늘어놓기 멋쩍어서 ‘고전읽기의 즐거움’이란 말부터 의심하라며 서두를 열었다. 그게 의당 즐거운 것이라면 ‘고전읽기는 즐겁다’고 따로 설득할 필요도 없을 거라는 게 이유였다.

 

 

 

사실이 그렇다. 고전읽기를 즐기는 성향을 타고난 자도 없진 않겠지만 다수일 리 있겠는가.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즐기기보다는 개그콘서트에 포복절도하는 게 더 흔한 일이다. 분명 고전은 고상한 책이긴 하지만, 동시에 고리타분한 책이다. 그게 통념이다. 읽었다고 과시하기엔 좋지만, 또 남들 다 읽었다고 할 때 혼자 안 읽었으면 좀 창피한 느낌이 들게도 하지만, 막상 읽으려고 하면 머리에 쥐가 나는 책! 한데, 그런 고전읽기 붐이 일고 있다고 한다. 어찌된 일인가?


고전의 가치와 의의에 대해서 충분히 숙지하는 것과 실제로 읽는 건 별개의 문제다. 건강을 위해선 꾸준히 운동을 해야 한다는 게 상식이지만 실제로 실천하는 건 별개인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듯 인식과 실천 사이에는 유구한 간극이 있다. 그 사이는 저절로 메워지지 않는다. 어떤 강제력이 필요하다. 누군가 옆에서 꼬드기지 않는다면 책을 손에 들기 어렵다. 누군가 등 떠밀지 않고서는 러닝머신에 올라서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짚이는 책이 있다. 이지성의 <리딩으로 리드하라>(문학동네, 2010). 김난도의 <아프니까 청춘이다>(쌤앤파커스, 2010)와 김어준의 <닥치고 정치>(푸른숲, 2011)가 대세였던 지난해, 그만큼 주목받지는 않았지만 입소문을 타고 베스트셀러가 된 책이다.


굳이 부추김이 없어도 자발적으로 책을 찾아 읽는 편이라 읽어볼 필요를 못 느끼다가 고전읽기 붐의 ‘원인’이 궁금해서 펼쳐보았다. 사실 ‘세상을 지배하는 0.1퍼센트의 인문고전 독서법’이 부제라고 하면 나름 솔깃하지 않은가. 저자가 말하는 고전은 인문고전인데, 우리가 ‘고전’이라고 일컫는 책의 태반이 문학, 철학, 역사 분야의 고전이므로 ‘고전=인문고전’이란 등식도 억지는 아니다.

 

저자는 단도직입적으로 책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말한다. ‘고전(古典)’과 ‘비고전(非古典)’, 즉 ‘고전’과 ‘고전이 아닌 책’이다. 그리고 무엇이 고전인가에 대한 정의도 간명하다. “천재들의 저작”이다. 말 뜻대로 하자면 고전이란 오래된 책, 오랫동안 살아남은 책을 가리키는데, 천재들의 저작이 아니고서야 “짧게는 100-200년 이상, 길게는 1,000-2,000년 이상”을 살아남을 수 있었겠느냐는 게 저자의 판단이다.


고전이 천재들의 저작이므로 고전을 읽는 일은 천재들과 대화를 나누는 일이다. 좀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천재들의 ‘개인지도’를 받는 일이다. ‘천재’라는 말이 막연하다면 ‘노벨상 수상자’라고 해도 좋겠다. 저자의 제안은 이런 것이다. “생각해보자. 만일 앞으로 10년 동안 노벨상 수상자들에게 매일 두 시간 이상 개인지도를 받는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불문가지다. 독자인 우리도 그들 수준에 근접하게 된다. 하물며 노벨상 수상자라고 해봐야 불멸의 인문고전을 남긴 진정한 천재들에 비하면 ‘머리가 조금 좋은 사람들’에 불과하다면, 이 천재들의 개인지도에 비견할 만한 일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좋다, 천재들의 책이라는 고전을 읽고 우리도 천재를 닮도록 하자. 천재적인 사고를 해보도록 하자. 그 자체로 신나는 일일 것도 같다. 한데, 저자는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그가 보기에 고전읽기는 단순히 ‘즐거움’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아니 즐거움과는 거리가 멀다. 저자의 체험적 고백에 따르면, 그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책이 인문고전이다. “재미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잘난 서양철학 고전들 같은 경우는 “너무 어려워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판독 불가능일 때가 대부분”이다. 그래도 읽어야 하는가? 그렇다. 우리의 두뇌를 조금이라도 변화시켜주는 책은 인문고전밖에 없고, 그렇게 뇌가 변화할 때만 우리는 생존할 수 있다는 게 저자의 절박한 이유다. 아예 생존을 위해서 억지로 인문고전을 읽는다는 고백까지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이쯤 되면 ‘고전읽기의 즐거움’이 아니라 ‘고전읽기의 절박함’이다. 


그렇다고 치기어린 절박함은 아니다. 다소 거칠더라도 나름대로 근거가 있다. 먼저, 정치적인 근거. “인류 역사를 보면 항상 두 개의 계급이 존재했다. 지배하는 계급과 지배받는 계급.” 이 두 계급의 차이는 무엇인가? 저자는 그것이 인문독서의 유무라고 말한다. 가령 조선의 지배계급인 선비들에겐 인문고전 독서, 곧 글공부가 주업이었다. 하지만 그 인문고전 독서가 피지배계급에겐 금지됐다. 책은 아무나 읽는 것이 아니었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책을 읽지 않는 마당쇠가 책을 읽는 선비를 지배한 적이 단 하루라도 있었던가.”


행여 똑같이 책을 읽는다고 해도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은 읽는 책의 종류가 달라야 했다. 근대국가로 발전해나가는 데 직업군인과 공장노동자가 필요하기에 학교교육을 도입한 프로이센(독일)에선 군대에서의 명령과 공장에서의 작업지시를 수행할 수 있는 만큼의 지식을 가르쳤다. 국민이 너무 똑똑해지는 건 불필요했고 또 바라지도 않았기에 인문고전 교육은 빼놓았다. 단지 일방적인 주입식 교육만 이루어졌다.

 

이러한 독일식 교육 교육제도를 그대로 수입하여 우리에게 이식한 것이 일제의 식민지 교육이었다. 기본적으로 식민지 교육은 지배계급이 아닌 피지배계급을 위한 교육, 직업군인과 공장노동자를 생산하기 위한 교육이다. 저자는 우리의 학교교육과정에서 인문고전 읽기가 배제된 것이 그러한 식민지 교육의 부정적 유산이 아닌가라고 의심한다. 그래서 촉구한다. 깨달아야 하다고. “이제는 진실을 깨달아야 한다. 당신이 학교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배우고 두뇌와 삶에 어떤 변화도 없었던 근본적인 이유를 알아야 한다.” 그 이유는 물론 인문고전을 안 읽었기 때문이다.

 

 


이어서 경제적인 근거.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전 세계 부의 90퍼센트 이상은 세계 인구의 약 0.1퍼센트가 소유했다.” 예전에 그 0.1퍼센트는 왕과 귀족이었지만 지금은 월스트리트의 투자자와 세계적인 기업가 들이다. 이 부자들의 특징은 무엇인가? 한 시대를 풍미한 투자가들의 삶을 조사해본 결과 저자가 얻은 결론은 다른 데 있지 않다. 이들이 독서광이면서 최고 수준의 인문고전 독서가라는 점이다. 가령 자신만의 투자 철학을 갖기 위해선 뇌 속에 ‘철학하는 세포’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세포는 오직 철학고전 독서를 통해서만 얻어진다. 가까이에서 사례를 찾자면 이병철의 ‘인재경영’과 정주영의 ‘의지경영’도 그 출처는 인문고전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그래서 빈민을 위한 인문학과정을 설립한 얼 쇼리스의 <희망의 인문학>(이매진, 2006)의 핵심을 이렇게 끄집어낸다. “여러분은 이제껏 속아왔어요. 부자들은 인문학을 배웁니다.”


<리딩으로 리드하라>에서 ‘고전읽기의 즐거움’ 차원을 넘어서는 뭔가가 작동하고 있다면 그것은 ‘고전읽기의 절박함’이다. 이런 절박함이 혹 고전읽기 붐에도 일조하고 있는 건 아닐지. 저자는 젊은이들이 “지금부터라도 인문고전 읽기에 목숨을 걸기를 원한다.” 너무 과장된 소망인가. 하지만 동의하는 바도 없지 않다. 먼저 인문고전 독서는 우리의 두뇌를 변화시킨다는 점. 우리가 똑똑해서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으면서 똑똑해진다는 건 나의 지론이기도 하다. 물론 아무 책이나 읽는 것이 아니라 좋은 책을 읽는다는 조건이 붙긴 하지만. 고전이란 애당초 전범이 될 만한 좋은 책을 뜻하기에 고전읽기가 우리의 두뇌활동을 자극하고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지혜를 열어준다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인문고전 읽기가 ‘자본주의 시스템의 승자가 되는 법’이라고까지 저자는 강조하지만, 그보다 동감하는 건 “인문고전 독서교육의 진정한 목표는 자주적이고, 행복하고, 능동적인 인간을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보다 나은 교육목표를 상정할 수 있을까. 인문고전 독서를 통해 ‘행복한 천재’도 되고, 개인과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혹은 나라의 운명을 바꿔놓을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건 각자가 자주적이고 행복하고 능동적인 인간이 된 다음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즐거움만도, 절박함만도 아니다. 우리에겐 ‘고전읽기의 절박한 즐거움’이 필요하다. 고전읽기 붐이 그런 즐거움과 함께하면 좋겠다.

 

12. 0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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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저 형태로 올해 처음 낸 책은 <대한민국 청소년에게2>(바이북스, 2012)이다. 16명의 저자가 참여해 '개념 청소년'들에 대한 조언을 담았다. 내가 제안받은 건 '고전 읽기의 즐거움'이란 글이었고, 제목도 그렇게 나갔다. <책을 읽을 자유>의 일부 내용을 보완해서 청소년용으로 만든 글이다. 서두만 옮겨놓는다.

 

 

 

모든 일에는 배후가 있다는 음모론적 세계관에 동의한다면 ‘고전 읽기의 즐거움’도 순수하게만 받아들일 수 없다. 최소한 그게 그토록 즐거운 것이라면, 그래서 ‘순수한 즐거움’이라면 널리 광고할 일도 없으며 이런 자리에서 내가 길게 떠들어댈 이유도 없을 것이다. 제군들은 일단 그걸 의심해야 한다. 이미 경험적으로 체득한 바도 있겠지만 어른들의 말은 다 의심해야 한다. 속칭 ‘꼰대’들의 말이라는 것. 물론 이 ‘의심하라!’는 주문조차도 어른들의 말일 수 있다. 하지만 그나마 유일하게 건질 수 있는 ‘꼰대적’ 격언이다. 모든 의심을 가능하게 하는 의심의 토대가 ‘의심하라’라는 명령이니까. 그거 하나는 믿어도 된다.


그럼 의심이 왜 중요한가. 그렇게 의심할 때 제군들은 자기 자신이 되기 때문이다. “도대체 세상에 믿을 건더기가 없어!”라고 푸념할 때, 제군은 자신의 존재감을 온전히 드러내게 된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이렇게 의심하고 푸념하는 ‘나’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 그게 사실은 가장 놀라운 일이고 경이로운 일이며 기적적인 일이다. 데카르트라는 철학자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한 걸 기억하는가? 그때 ‘생각한다’라고 두루뭉술하게 표현된 게 실상은 그의 의심이고 회의였다. 우리는 뭔가에 대해서 의심할 때 비로소 ‘주체’로서 존재한다. 말이 어려운가? ‘나답게’ 존재한다고 이해하면 된다. 우리가 남의 눈치를 보거나 신세 지지 않고, ‘나답게’ 당당하게 존재하는 건 내가 바라보는 모든 것, 내게 들리는 모든 말들을 의심할 때이다. 그런 걸 ‘괄호 안에 넣기’라고도 말한다. 곧바로 받아들이지 않고, 곧이곧대로 믿지 않고 보류해놓는 것이다. 그렇게 미덥잖다는 표정으로 세상의 모든 일을 보류해놓는 주체, 그게 ‘나’이다. 왜? 나니까. 다른 이유는 없다. ‘너’가 아니기 때문에. ‘그’가 아니기 때문에. 바로 ‘나’이기 때문에.


‘고전 읽기의 즐거움’도 마찬가지다. ‘고전’이란 건 ‘팩트’로 어느 정도 지정할 수 있다. ‘읽기’도 마찬가지다. 물론 ‘읽기’와 ‘읽는 척하기’를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같은 까다로운 질문도 가능하지만, 여기선 편하게 생각하기로 하자. 문제는 ‘즐거움’이다. 즐거움 혹은 쾌락이란 건 상당히 주관적이니까. 누군가의 즐거움이 모든 사람의 즐거움이 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사람은 다 제각각이고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즐거움이 다 상대적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사람들이 생각하고 살아가는 꼴을 보면 또 비슷비슷한 부분도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이란 서로 비슷비슷하면서도 제각각인 것인가? 얼추 그렇게 말해볼 수 있겠다. 즐거움 또한 그렇게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 우리가 저마다 타고난 성향에 따라 제각각의 즐거움을 누리지만, 또 어떤 즐거움은 끼리끼리 공유하기도 한다. 맘이 맞고 죽이 맞는 관계는 그래서 만들어진다. 고전 읽기의 즐거움에 대해서 몇 마디 말해볼 수 있다면 이런 근거에서다.(...)

 

12. 0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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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오전이라 하던 대로 '이주의 책'을 꼽으려고 하니 방향이 여러 갈래다. 조금 응집성 있는 리스트를 만들기 위해 이번엔 국내서에 한정해서 다섯 권을 고르기로 했다. 주로 사회적 이슈를 다룬 책들인데, 남태현의 <영어계급사회>(오월의봄, 2012)를 머리에 올려놓는다. 미국 대학의 정치학과 교수로 있는 저자가 대한민국의 영어 광풍 현상을 비판적으로 들여다본 책이다(인터뷰기사는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5815602&cp=em 참조). "정부가 아무리 영어를 강조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영어를 잘할 수는 없습니다. 어찌 보면 한국사회의 ‘영어어천가’ ‘미국어천가’는 참으로 뛰어난 사기입니다. 다 잘할 수도 없고, 다 잘할 필요도 없는 영어에 미쳐 있는 것 자체가 참으로 기막힌 사기입니다.”라는 게 저자의 문제의식이다. 예능프로 <무한도전>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들을 묶은 <웃기는 레볼루션>(텍스트, 2012)도 이번주 관심도서다. <무한도전>을 포털기사로만 읽는 편이기에 제일 먼저 꼽진 않았다. 이재화 변호사의 <분노하라, 정치검찰>(이학사, 2012)은 예판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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