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토요판의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이번에 다룬 건 <시경>이다. 번역서와 관련서를 관심을 갖고 모으고 있는데 분량이 분량인지라 천천히 읽을 작정이다. 관련서 가운데는 정약용의 <역주 시경강의>(사암, 2008)도 있다. 5권짜리인데, 두껍고 비싼 책이다. 결정적으론 2권만 품절된 상태다(그래서 보류중이다). 수집가에겐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책이니 아쉽다... 

 

 

 

한겨레(12. 02. 18) 시경이 고답적이란 건 편견이었네

 

올해의 독서목표 중 하나는 <시경>을 읽는 것이다. 중문학은 아닐지언정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했고 적잖은 시집을 읽었지만 <시경>은 한번도 읽어볼 생각을 못했다. 돌이켜 보면 좀 기이한 노릇인데, 아마도 ‘경’(經)이란 말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 아닌가 싶다. ‘삼경’으로 묶이는 <서경>과 <역경> 또한 손에 들지 않았던 걸 보아도 그렇다. ‘사서삼경’이란 말이 풍기는 고답적 엄숙주의나 권위주의를 대학 새내기 시절엔 좋아하지 않았다.

<시경>이 그렇게 뻣뻣한 책이 아니라 ‘노래모음집’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좀 뒤늦게 알았다. <시경>에 대한 인상이 조금 누그러졌지만 그래도 ‘중국시라면 <당시>만 하겠는가’란 생각으로 버텼다. 신영복의 <강의>에서도 ‘동양고전의 입문’이라 할 만큼 중요한 것이 <시경>이라고 소개됐지만 ‘고전이라면 <논어>에 비하겠는가’라고 이유를 댔다. 그러던 차에 뜻밖에도 <시경>에 대한 관심이 샘솟은 것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읽으면서다. 서양 최고(最古)의 서사시를 읽은 참에 세계 최고(最古)의 시도 읽어봐야겠다는 의욕을 갖게 돼서다. 중국 주나라 초기인 기원전 12세기 말부터 춘추시대 중엽인 기원 6세기까지 약 600년간의 노래를 300여편 모은 책이니 생각하면 경이로운 ‘문화유산’이다. 우리에겐 가장 오래된 서정시로 전하는 유리왕의 ‘황조가’가 기원전 17년에 지어진 것과 비교해보아도 그렇다.

그렇다고 오래된 시라는 의의만 갖는 건 아니다. 가령 <시경>의 첫 시 ‘관저’(關雎)에 나오는 ‘요조숙녀’란 말은 아직도 친숙하지 않은가. ‘관저’는 시의 첫 구절 ‘관관저구’(關關雎鳩)의 준말로 ‘저구’는 ‘징경이’ 혹은 ‘물수리’를 가리키고, ‘관관’은 그 암수가 서로를 부르는 소리, 곧 의성어이다. 실제로 물수리의 울음소리가 어떤지 모르기에 번역본마다 ‘구욱구욱’ ‘끼룩기룩’ ‘까옥가옥’ 등으로 옮겼다. 그렇게 서로 ‘짝을 찾는 물수리’에 자신의 처지를 견준 것이 이 시의 기본 발상법이다. 5연으로 이루어진 이 시에서 요조숙녀란 말은 네 번이나 등장하며, “요조숙녀(窈窕淑女) 군자호구(君子好逑)”가 첫 용례다. 여러 번역본에서 이 구절은 “아리따운 고운 아가씨는 군자의 좋은 배필일세”(김학주), “그윽하고 아리따운 요조숙녀는 일편단심 기다리는 이 몸의 배필”(이기동) “아리따운 아가씨는 사나이의 좋은 배필”(기세춘·신영복), “하늘하늘 그윽한 저 새악시 멋진 사내의 좋은 배필”(김용옥) 등으로 옮겨졌다. ‘군자’란 말이 쓰이긴 했지만 공자 이전에는 그냥 ‘사내’를 뜻했다고 한다. 군자를 주나라 문왕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식의 전통적인 해석은 후대 유학자들이 왜곡한 것이라는 게 학자들의 평가다. 원래는 그냥 배필을 찾는 사내의 애틋한 마음을 노래한 시였다는 것이다.

시의 갈래로 보자면 ‘관저’는 <시경>의 많은 시와 마찬가지로 서정시이자 연애시이다. 하지만 미혼의 남자가 여자를 연모하는 모습을 그린 시로는 이채로운데, 이런 사랑의 표현이 뒷시대에는 계승되지 않았다고 한다.

미혼남녀의 사랑을 읊은 시는 줄어든 반면에 부부의 정을 노래한 시는 계속 이어졌는데, 이 역시 유학이 관학으로 자리잡은 것과 무관하지 않다. 장징의 <사랑의 중국문명사>에 따르면, ‘연애’라는 단어 자체가 송나라 때 처음 등장한다. 하지만 이때도 연애는 남녀간의 사랑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관심과 배려를 뜻하는 말이었다. 현대 중국어에서 남녀간의 사랑을 뜻하는 ‘롄아이’(戀愛)는 일본에서 역수입된 단어라고 하니 ‘요조숙녀’에 대한 그리움은 가장 오래된 그리움이면서 현대적인 그리움이기도 하다.

 

12. 02. 17.

 

 

 

P.S. 김용옥의 '관저' 번역과 풀이는 <논어한글역주2>(통나무, 2008)에 나온다. 장징의 책은 <사랑의 중국문명사>(이학사, 2004) 외 <근대 중국과 연애의 발견>(소나무, 2007)이 더 번역돼 있다.

 

 

그밖에 고형렬 시인이 쓴 <아주 오래된 시와 사랑 이야기>(보림, 2005)는 청소년을 위한 시경 풀이이고, 유병례의 <톡톡 시경 본색>(문, 2011)은 대학생을 위한 책인 듯싶은데 평이한 수준이다. 한흥섭의 <공자, 불륜을 노래하다>(사문난적, 2011)도 '물수리' 편부터 시작해 <시경>에서 49편을 골라 풀이하고 있다. 제목은 자극적이지만 이 책 역시 내용은 평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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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목요일에 있었던 상상마당의 '어쿠스틱 인문학 행사' 정리기사가 올라왔기에 거두절미하고 옮겨놓는다(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20217125705). 많은 분량의 내용을 기사로 정리하느라 애쓴 프레시안 안은별 기자에게 감사를 표한다. 기사의 서두와 대담 뒤에 가진 질의응답은 프레시안 기사를 직접 참고하시길.

 

 

 

 

프레시안(12. 02. 17) "지금 필요한 건 '빨간 약', 그리고 공산주의!"

 

(...)

로쟈, '로자 룩셈부르크' 아닙니다!

지난 9일 저녁, <프레시안>과 KT&G 상상마당이 함께 하는 인문학 저자 대담 행사 '어쿠스틱 인문학' 다섯 번째 시간은 지젝, 그리고 로쟈와의 만남으로 이뤄졌다. 출판사 자음과모음 신사옥(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소재)에서 열린 이날 행사엔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자음과모음 펴냄)을 쓴 이현우 한림대학교 연구교수가 초대되어, 사회자인 도서평론가 이권우와 함께 두 시간 동안 지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앞서 말한 '로쟈'는 이현우의 인터넷 블로그 필명, 그를 본명보다 더 유명하게 만든 '서평꾼'으로서의 이름이다. 그가 운영하는 '로쟈의 저공비행'은 하루 1000명 정도의 사람이 꾸준히 방문하는 인기 블로그로, 많은 이들의 책 선택 길잡이가 되어 주고 있다. 로쟈라는 필명은 그가 2000년 번역 중이던 <죄와 벌>의 등장인물 '로지온 로마노비치 라스콜리니코프'에서 따왔다. 많은 이들의 생각관 달리 '로자 룩셈부르크'의 '로자'가 아니라고.

 

10년 이상 지켜 온 필명에서도 드러나듯 그의 전공도, 학문적 관심도 러시아 문학을 향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비인기학과이지만, 그에겐 역사 속 대문호들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전공 공부를 하다가 박사학위 논문을 내는 예상된 루트를 밟을 생각이었으나, "5만 원을 상금으로 주는 우수 리뷰"에 도전하며 시작한 '부업'이 지금의 그를 있게 했다고. <로쟈의 인문학 서재>(산책자 펴냄), <책을 읽을 자유>(현암사 펴냄) 등 그의 서평을 묶어낸 책들은 서점에서도 큰 사랑을 받는다.

 

그의 저술 활동의 한 축은, 푸슈킨과 레르몬토프의 서정시를 분석하는 <애도와 우울증>(그린비 펴냄)처럼 전공과 관련돼 있다. 그리고 그 나머지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지젝 알리기'다. 그는 <폭력이란 무엇인가>(난장이 펴냄), <레닌 재장전>(마티 펴냄),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자음과모음 펴냄) 등 지젝의 (공)저서들을 공동 번역했으며, 이번엔 본격적인 지젝 입문서를 직접 써냈다. 그것이 이날 행사의 주인공인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이다.

 

 

 

라캉 세미나에서 대선 후보까지, 지젝의 발자취

서평꾼 로쟈의 탄생만큼, 지젝과의 만남도 우연했다고 이현우는 말한다. 1949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슬로베니아에서 태어난 그가 한국에 소개된 것은 앞서 말한 대로 1995년, 영화 비평서인 <삐딱하게 보기>(김소연 옮김, 시각과언어 펴냄)를 통해서다. 이현우에 따르면 당시는 "주변의 영화 하던 사람들이 모두 이 책을 권해주던" 시기였고, 지젝은 '문화 이론의 엘비스', 'MTV 철학자'란 별명으로 유행을 타기 시작했다. 하지만 로쟈와 지젝의 만남은 2000년이 되어서야 이루어졌다. 그는 국내 번역본들의 "성치 않은 번역" 덕분에 원서를 대조하며 꼼꼼히 읽으면서 그의 애독자가 됐다고 회고한다. "깊이 영향을 받은 저자들에겐 일종의 부채 의식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이현우는 이날의 행사도,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출간도 바로 그 빚 갚기의 일환이라고 표현한다. 지젝은 그에게 어떤 영향을 준 걸까? 먼저 이현우는 그의 약력을 소개한다.

 

지젝의 발자취는 철학적으론 헤겔에서 라캉, 다루는 분야로는 정치, 종교에서 오페라나 대중문화, 지리적으로는 동구권에서 영미권, 경력으론 여러 대학에서 '대선 후보'에까지 걸쳐져 있다. 1949년생인 그는 1975년 류블라냐 대학에서 하이데거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1981년에 프랑스로 건너간다. 거기서 라캉의 사위이자 프랑스 정신분석학의 좌장인 자크 알랭 밀레르를 만났고, 30명 한정의 인텐시브 코스(전문가 세미나)를 통해 라캉 이론을 통해 정신분석을 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다. 1985년, 그는 파리에서 그의 두 번째 박사 학위를 받는다.

 

슬로베니아로 돌아온 그는 활발한 저술 활동을 전개한다. 특히 헤겔, 라캉 철학을 통해 본 대중문화 분석으로 명성을 얻는다. 잘 알려진 대선 출마는 1990년의 일이었다. 4명의 대통령이 집단 지도하는 체제인 슬로베니아의 대선에서 그는 5위로 낙선했고, 그랬기에 이후 학문과 저술의 세계로 더 깊이, 넓게 들어올 수 있게 된다. 1989년에는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으로 영어권에 '데뷔'한다.

 

지젝을 바꾼 사건?

지젝을 영어권에 소개한 사람은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서문을 쓰기도 한 에르네스토 라클라우(Ernesto Laclau)다. 하지만 몇 년 후 그 사이가 틀어져 현재로선 논적 관계에 놓여 있는데, 그 이유는 지젝의 달라진 정치적 입장에서 찾을 수 있다고 이현우는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급진 민주주의 계열에 속하는 라클라우와 마찬가지로, 지젝 역시 과거엔 "민주주의는 모든 가능한 체제들 중에서 최악이지만, 문제는 그 어떤 것도 그보다 낫진 않다는 것"이라는 처칠의 주장을 반복했다. 그러나 '어떤 사건' 이후 그는 코뮤니스트(공산주의자)로 선회, "민주주의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순수 정치에서 정치경제학으로"라는 이행의 궤적을 그린다. 라클라우가 소개한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은 지젝이 자유 민주주의 체제에 대해 긍정적인 비전을 갖고 있었던 때 쓰인 책인데, 이후 그 내용은 지젝의 자아비판 대상이 된다.

 

그 전기가 된 사건은 우리가 '9.11'이라 부르는, 미국의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이 공격을 받은 사건이다. 9.11 사건과 그 이후의 세계는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의 주제인 동시에, 이 책이 분석 대상으로 삼는 지젝의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의 주제이기도 하다. 실제 현실임과 동시에 '영화 속 한 장면'이었던 압도적 광경 이후, 누구나 '우린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일까' 자문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진짜 현실'에서 눈을 뜬 그(영화 <매트릭스>의) 주인공 네오)의 눈에 들어오는 건 불에 타 잔해만이 남아 있는 황량한 풍경, 다름 아닌 세계 전쟁 이후 폐허가 된 시카고의 모습이다. 저항군 지도자 모피어스는 그에게 아이러니한 인사를 건넨다.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9월 11일 뉴욕에서 일어난 사건도 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29쪽)

 

사건은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한 1989년으로부터 약 10년 후인 2001년 발생했다. 지젝은 이 사건을 통해 "10년 간 세계를 지배한 서구식 자유주의 유토피아의 종말을 봤다." '자본주의 제국' 미국의 심장을 공격한 이 사건이야말로 자본주의가 더는 지속할 수 없음을 웅변적으로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몰락한 이후 자본주의 사회 내부로부터 정의된 사건의 틀은 '문명의 충돌' 혹은 '근본주의 대 자유주의'였다. 멀리 사는 우리들도 9.11 이후 이어진 미국의 대(對) 아프가니스탄·이라크 전쟁을 '테러와의 전쟁'으로 부르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러나 지젝의 표현에 따르면 이 요란법석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거짓말"이다. 그에 따르면 최강국의 전투기들이 총동원되어 폭격하는 곳이 "이미 아무것도 파괴할 만한 것이 없는 폐허인 아프가니스탄"이라는 사실은, 이 '테러와의 전쟁'의 요점이 "9.11이라는 외상적 사건 이후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행동화'"임을 말해준다.

 

지젝은 9.11의 충격에 대해 "오늘날 디지털화된 제1세계와 '실재의 사막'인 제3세계 사이를 분리하는 경계를 배경으로 삼아야만 설명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우리가 격리된 '인공적 세계'에 살고 있다는 자각인데, 이것은 누군가가 우리를 항상 위협하고 있다는 관념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전망에서 '테러리스트'들은 구체적인 사회적 네트워크로부터 튀어 나와 '추상화'되고 "그들은 진정한 '이슬람 정신'을 배반한 것"이라는 방식으로 환기된다는 게 지젝의 설명이다.

 

그 자리에 등장하는 것은? "이슬람을 이해하고자 코란의 영역본을 불티나게 사 대는" '미국식 자유 민주주의적 관용의 태도'다. 이현우는 "얼핏 긍정적인 변화로도 간주될 수 있는 이러한 태도·추세의 함정은 여전히 이데올로기적 신비화에 머물고 있다는 점"이라면서 "바로 그렇기 때문에 9.11 공격을 낳은 정치적 정세와 역학을 포착하는 데 실패한다"고 지적한다.

 

 

 

MB 때문? 시스템 때문!

자본주의가 그 근본부터 생명을 다 했다는 경고는 '9.11'로부터 10년도 지나지 않은 2008년 미국 발 금융 위기를 통해 한층 가시화됐다. 지젝은 9.11과 세계 금융위기 두 사건을, 유명한 경구를 차용해 <처음에는 비극으로 나중에는 희극으로>(창비 펴냄)라 각각 비유하며 진단한 바 있다. 그의 진단과 전망은 지난해 그가 월가에서 외친 유명한 연설 문구에 집약돼 있다. "기억하라! 문제는 부패나 탐욕이 아니다. 문제는 시스템이다." 이현우는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자본주의적 폭력은 객관적 폭력, 구조적 폭력입니다. (폭력의 주체로) 누구를 특정할 수 없다는 것이 특징이지요. 가령 기업 이윤을 극대화하는 과정에서 대규모 구조조정이 발생해 직장을 잃는다든지, 20대가 아무리 노력해도 살 곳을 마련하기 힘들다든지 하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수난을 생각해 봅시다. 자본주의적 시스템이 작동할 때 불가피하게 나오는 폭력들이죠. 이것들은 어떤 나쁜 최고경영자(CEO) 한 명의 잘못이 아니며, 흔히 규탄하는 대로 'MB 때문'도 아닙니다. 지젝은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지젝은 과거에 갖고 있던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우호적 입장을 버리는데, 그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개념을 통해서 보면 좀 더 명확히 알 수 있다. 직역하면 '성스러운 인간', '신의 보호로부터 배제된 인간'을 말하지만 '난민'에 더욱 가깝다. 지젝의 표현에 따르면 "인간으로서는 살아있으나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는 간주되지 않는 자"를 말한다.

 

이현우에 따르면 이들은 "신의 보호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살해해도 범죄가 성립되지 않"으며, "시민권을 보장받지 못하므로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불법 체류자'나 '중국 경찰에 붙잡힌 탈북자들'처럼 특정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아감벤은 근대 사회에서 '국민', '시민'이라 불리는 인민 전체가 실은 난민이나 다름없으며, '난민 수용소'처럼 누군가를 특정해 난민이라 여기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모두 난민이라는 사실을 감추는 미끼'라고 강조한다.

지젝은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에서 관타나모 수용소에 수감된 아프가니스탄 포로들과 탈레반의 테러리스트들은 물론, 르완다나 보스니아의 "인도주의적 원조를 받는 쪽에 해당하는 사람들"도 오늘날의 '호모 사케르'라고 지적했다. '인간의 얼굴을 한 인도적 지원'이 '비인간적 포로 대응'과 동일함을 강조한 것이다. 즉, "호모 사케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현우는 아감벤의 입장이 염세적이란 이유로 영어권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고 덧붙였지만, 이내 되묻는다. "우리를 '주인'이라며 총선 시즌마다 큰절을 올리는 정치인들 눈에, 그 외의 시간에 비친 우리는 어떠한가?" 그는 "표를 행사하기 직전에만 주권자 대접을 받고, 그 외의 시간에 하는 요구들은 묵살되는 지금, 여기의 경우를 떠올려보라"며, 우리에게도 '호모 사케르'라는 자각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나치가 공산당원을, 유대인을, 노동조합원을, 가톨릭교도를 숙청하는 동안 침묵했고, 차례가 내게로 왔을 때 나서줄 이가 아무도 남지 않았다는 시(마르틴 니묄러의 '다음은 우리다')의 내용과 마찬가집니다. '나는 저렇게 안 될 거다'라고 생각하는 그 범주 안에 결국 우리 자신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자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리 해고도 "사장 잘 만나면 괜찮아"로 넘길 문제가 아니라, 지금 잘리는 사람이 언젠가의 '나'란 생각, 이것이 시스템 자체의 문제라는 생각을 하자는 겁니다."

 

공산주의, 새로이 발명하라

이현우는 "지젝은 계몽주의자"라 말한다. 그 계몽주의자가 타파하려고 하는 현존 질서는 앞서 암시한대로 자본주의 그리고 자유 민주주의다. 그것이 무너지면, 그 자리에 무엇이 와야 하는가? 지젝이 대안으로 염두에 둔 체제는 공산주의다. 지젝은 '레닌을 반복하라'는 코뮤니즘의 주문을 외친다. 그러나 여기서의 반복이 '레닌이 한 대로의 반복'이 아니라 '레닌이 실패한 자리에서 다시 시도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이현우는 강조한다.

 

"지젝의 대안 속에 있는 공산주의란 새롭게 발명되어야 할 공산주의입니다. 정해진 공산주의란 없지요. 소련의 공산주의도 인류 사회에서 처음 시도되어 본 실험이었습니다. 마르크스는 사회주의 혁명이 도래할 것이라고 예언했지만, 그 다음에 어떻게 될 거라고는 적어놓지 않았어요. 러시아도 혁명 이후 4년 동안 내전을 치렀습니다. 구소련의 공산주의 체제는 70년 동안 이어져 오다 '실패'했지만, 거기에서 다 버릴 게 아니라 그 실패에서 다시 시도하라는 게 지젝의 주문입니다."

 
이권우가 "지젝의 공산주의에 대한 전망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달라"고 묻자, 이현우는 "공산주의는 새로 발명되어야 할 어떤 것"이라며 "자본주의와 완벽히 대치될지 아닐지는 미지수라고 본다"고 답했다. 다만 "코뮤니즘의 어원대로 '공동적인 것'을 확장시켜 삶의 중심으로 가져오자는 것이 기본적인 생각"이라며, 낮은 차원에서 특혜 교육 반대론자, 의료나 철도 민영화 반대론자 등 각각의 사안에서 재산과 가치의 '공유'를 옹호하는 이들도 이 비전에 포함된다고 말했다.

 

'공산주의'하면 곧바로 부정적 이미지를 상기시키는 남한 사회에서 더 깊이 들어봐야 할 이야기다. 이현우는 "치료도 교육도, 돈을 더 낼수록 더 좋은 곳에서 받을 수 있는 사회에 동의하는가?"라며 "이견이 떠오른다면 그게 코뮤니스트적 입장이라 본다"고 말했다. 물론 이 질문에 많은 이들은 자동 입력된 것처럼 '돈을 쓰는 건 번 사람의 자유'라는 답을 내놓는다. 그러나 이현우는 "가진 자가 더 많이 가지게끔 되어 있는 것이 자본주의의 본성"임을 지적, 그 전제 자체를 문제시하면서 "그때 말하는 '자유'가 무엇인지 주류 이데올로기 바깥에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지젝, '조금만' 읽으세요

이상에서 살펴본 지젝의 분석틀과 주장에 대해 이현우는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말한다. 학계를 넘어 선풍적 인기를 끈 학자이니만큼 지식인들 사이에선 '맹목적으로 따라가기보다 비판적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지만, 이현우는 그런 입장에 동의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는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려면 그가 생각해 내지 못한 것을 생각해야 하는데, 내가 그럴 만큼 똑똑하지 않다"면서, "아직 완전히 밀착해서 더욱 잘 이해하고자 하는 단계에 있다"고 말했다.

 

그야말로 '지젝 전도사'를 자처하지만 그의 모든 책을 추천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철학자로서의 지젝' 책은, 철학도가 아닌 이상 무리해 관심 가지지 않아도 좋다고 강조했다. 그는 국내에 소개된 지젝의 저서를 다소 무거운 철학서와 영화 비평서, 그리고 시사·정치 관련서 등 세 계열로 구분할 수 있다며 그 가운데 시사 책들을 추천한다고 말했다. 이 책들이 바로 '이대로는 안 된다!'란 절박함을 가진 이들의 필독서다. 이현우는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있게 하는 책, 그리고 누구나 감동 받진 않겠지만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은 책들"이라며 "뽀빠이에게 시금치 같은 존재"라 비유했다.

 

이어서 이권우는 그것이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프롤로그에서 제기한 지젝과의 '피상적인 만남'이 아니냐며, 왜 그러한 만남을 권유하는지 물었다. 그는 "사람들에겐 알면 알수록 서로를 경멸하고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살짝' 알수록 더 낫다"며 전문가 담론에 회의적 입장이라 밝혔다.

 

여기서 그가 꺼낸 개념은 '적정 기술(Appropriate Technology)'에 빗댄 표현인 '적정 인문학'이다. 그는 어느 정도까지 공유되는 교양으로서의 앎을 중요하게 본다. 바다에 비유하면 연안에서 심해까지 물 깊이는 다르지만, 그 울퉁불퉁한 높낮이에도 불구하고 '모든 바다'가 공유하는 부분이 있고 바로 그 공유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더 알고 싶다면 그 순간 더 깊은 바다로 들어가면 된다. 여기서 연안과 심해의 관계는 '대중 대 고급(학문)'이 아니라, 상호 배타적이지 않은 '적정 대 첨단' 관계라면서 그는 덧붙인다.

 

"소련은 인류 최초로 우주선을 쏘아 올렸지만, 교실에서 쓸 칠판지우개는 못 만들었습니다. 첨단 기술과 그렇지 않은 기술에 갭이 있는 것이죠. 이런 점이 현실 사회주의의 한계를 보여주는 한편, 마찬가지의 일이 자본주의 체제의 학문 면에서도 벌어집니다. (대학이) 교수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아무도 읽지 않는다는 사실'을 본인들마저 아는 최고 수준의 논문입니다. '적정 대 첨단' 관계 속 '첨단' 학문에서 성과가 있다면, 그걸 필요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만큼 바꿔서 전해주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피상적 만남'은 그런 식의 인문학을 말합니다."

 

앞으로의 저술 계획을 묻자 그는 여전히 지젝을 더 알리는 데 힘쓰고 싶다고 답했다. 그는 "읽으면 즐거워지지만 반드시 읽지 않아도 되는 철학자들도 있지만, 지젝은 안 읽으면 불편해지는 쪽에 해당한다"고 강조한다. 또한 서양 철학에 대한 자양분이 없어도 즉각적으로 큰 인상을 줄 수 있는 학자라며 "지젝이야말로 '적정 인문학'이라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이현우는 마지막으로 "한발 뒤로 물러나서 이 상황을 주시하면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생각하기 시작해야 한다"는 지젝의 최신 메시지를 전했다. 그가 '어쿠스틱 인문학'이 있기 며칠 전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 독자들에게 한 말이다. 이현우는 "지금이야말로 '실재의 사막'을 직시할 때이며 그것을 직시하기 위해 용기를 갖출 필요가 있다. 즉 생각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2. 0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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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배송받은 책의 하나는 리처드 윌킨슨과 케이트 피킷의 <평등이 답이다>(이후, 2012)이다. '왜 평등한 사회는 늘 바람직한가?'가 부제. 저자 리처드 윌킨슨은 건강의 사회결정에 고나한 연구로 유명한데, 국내엔 이미 <건강 불평등>(이음, 2011)과 <평등해야 건강하다>(후마니타스, 2008)이 소개돼 있다. 평등을 주제로 한 책들이 늘어난 듯싶어서 리스트로 모아놓는다.

 


10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평등이 답이다- 왜 평등한 사회는 늘 바람직한가?
리처드 윌킨슨 & 케이트 피킷 지음, 전재웅 옮김 / 이후 / 2012년 2월
21,000원 → 18,900원(10%할인) / 마일리지 1,050원(5% 적립)
2012년 02월 16일에 저장
품절
평등해야 건강하다- 불평등은 어떻게 사회를 병들게 하는가
리처드 윌킨슨 지음, 김홍수영 옮김 / 후마니타스 / 2008년 3월
17,000원 → 15,300원(10%할인) / 마일리지 850원(5% 적립)
양탄자배송
밤 11시 잠들기전 배송
2012년 02월 16일에 저장

추적, 한국 건강불평등- 사회의제화를 위한 국민보고서
이창곤 지음 / 밈 / 2007년 9월
12,500원 → 11,250원(10%할인) / 마일리지 620원(5% 적립)
양탄자배송
밤 11시 잠들기전 배송
2012년 02월 16일에 저장

건강 불평등- 무엇이 인간을 병들게 하는가?
리처드 윌킨슨 지음, 손한경 옮김 / 이음 / 2011년 12월
8,800원 → 7,920원(10%할인) / 마일리지 440원(5% 적립)
2012년 02월 16일에 저장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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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낮에 몇가지 아이템을 두고 고심하다가 영화 <공룡시대> 이야기를 단서로 삼아서 자유주의적 문화주의에 대해 적었다. 아이가 내일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러간다는 말에 엊그제 한겨레문화센터의 지젝 강의에서 언급한 내용이 떠올라서다. 지젝의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자음과모음, 2011)에 <공룡시대>의 이데올로기적 내용에 대한 비판이 들어 있다.  

 

 

 

경향신문(12. 02. 17) [문화와 세상]수상한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

 

종업식을 하고 봄방학에 들어간 초등학생 딸아이의 첫 일정이 3D 애니메이션 <점박이: 한반도의 공룡>을 보러가는 거라고 한다. 토종 애니메이션으로 흥행에도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이 영화는 교육성과 오락성을 동시에 만족시킨 작품이라니 무얼 더 바라겠는가.

 



물론 어떤 교육성인지 따지고 들면 문제는 조금 복잡해질 수도 있다. 이젠 옛날 영화라고 해야겠지만 스필버그 감독이 기획한 <공룡시대>(1988) 같은 경우가 그렇다. 어미를 잃은 새끼 공룡이 험난한 세상을 헤쳐나가는 여정을 담은 애니메이션이다. 한데 이 영화를 두고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패권주의적인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 이데올로기’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평했다. 좀 거창한가? 패권주의적이란 말은 알다시피 지배적이란 뜻이니 제쳐놓으면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란 무엇인가? 우리 모두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자는 주의다. 그게 뭐가 나쁘다는 말일까?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가 반대하는 것은 힘과 덩치로 세상을 지배하려는 태도다. <공룡시대>에서는 덩치 크고 못된 공룡들이 부르는 노래에 이런 가사가 들어 있다. “덩치가 크면 모두 밀어버릴 수 있지. 덩치가 크면 세상 살기가 편해.” 덩치가 크고 힘이 세기 때문에 규칙을 어겨도 되고, 작고 무력한 동물들을 맘대로 짓밟을 수도 있다는 게 큰 공룡들의 생각이다. 미국 사회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우선 떠올리게 되는 건 유사 공룡사회로서 한국사회다. 갖은 권력 남용과 부정 의혹 등에도 불구하고 법망을 피해가는 권력자들과 자잘한 사업에까지 영역을 확장해가면서 덩치만 불려가는 재벌기업들의 행보는 우리가 아직 ‘선사시대의 땅’에 살고 있는 건 아닌가란 생각마저 들게 한다. <공룡시대>의 원제는 바로 ‘선사시대의 땅’(The land before time)이다.

 

 

물론 <공룡시대>의 메시지는 패권주의를 옹호하는 게 아니다. 큰 공룡들에게 시달리는 작은 공룡들은 큰 공룡들의 노래에 이렇게 답한다. “세상을 이루려면 모든 종류가 다 필요해. 키 작은 놈, 키 큰 놈, 덩치 큰 놈, 덩치 작은 놈.” 한마디로 관용적 포용주의다. 우리가 함께 사는 세상을 위해서, 그리고 좀 더 재미있는 삶을 위해서는 똑똑한 놈도 필요하고 멍청한 놈도 필요하고 하여간 모든 종류가 다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태도가 소위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다. 서로 다르지만 그런 차이 속에서도 협력이 가능하다는 믿음이다.

문제는 이런 믿음이 사회적 적대관계를 배제하거나 은폐한다는 데 있다. 그래서 ‘이데올로기’다. 이 이데올로기는 ‘수직적 적대’를 ‘수평적 차이’로 대체한다. 수직적 적대란 사람 위에 사람 있고, 사람 밑에 사람이 있는 현실을 가리킨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있고 이 관계가 고착적일 때, 그것을 수직적 적대관계라고 부른다.

<공룡시대>에서 선량한 공룡들은 그런 적대를 수평적으로 공존할 수 있는 차이 정도로 순화시킨다. 하지만 과연 잡아먹는 공룡과 잡아먹히는 공룡 간의 차이가 점이 있는 공룡과 없는 공룡 간의 차이 정도로 치환될 수 있는 것일까. 고문 경찰과 고문 피해자가 다양성을 예찬하며 서로 사이좋게 합창할 수 있는 것일까. 그래도 되는 것일까.

우리 ‘선량한’ 공룡들의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는 그런 점에서 미심쩍다. 패권주의에 맞서는 듯싶지만, 사회적 불평등을 다양성이란 이름으로 포용하고 계속 보존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 포용적 태도에 앞서야 하는 것은 ‘못된 종류들’에 대한 불관용이다. 상생의 전제조건은 “좋은 게 좋은 거지”가 아니라 과오와 기만에 대한 냉정한 심판과 척결이다. ‘한반도의 공룡시대’가 어떤 결말을 맺을지 궁금하다.

12. 0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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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낮에 건네받은 책은 장동석의 <살아있는 도서관>(현암사, 2012)이다. '천천히 오래도록 책과 공부를 탐한 한국의 지성 23인, 그 앎과 삶의 여정'이 다소 긴 부제이고, 저자가 <기독교사상>에 연재한 인터뷰 코너 '이 사람의 서가 그리고 삶'을 단행본으로 다듬어서 펴낸 책이다. 기억엔 그 코너의 거의 마지막 인터뷰이가 나였다. 그래서 '23인'의 말석에 자리하게 됐는데, 저자는 인터뷰의 제목을 "신은 인간에게 책을 읽을 자유를 주셨다"로 잡았다. <책을 읽을 자유>(현암사, 2010)에서 가져온 것으로 인터뷰도 그 책의 출간을 계기로 이루어졌었다. 기념삼아 책의 일부를 발췌해놓는다(인터뷰 내용을 저자가 재구성한 것이다).  

 

 

(...)

 

『형이상학 입문』이 던져준 숙제

이현우 교수는 스스로를 “문학전체주의자, 문학우월주의자, 문학극대주의자”라고 소개했다. 문학을 하는 사람은 세상사 돌아가는 모든 일을 다 알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능력이 닿는 한 모든 학문과 지식을 흡수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인문학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문학 역시 인간에 대한 문제를 진지하게 탐구해야 한다. 결국 문학은 다양한 영역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겸손한 문학주의’를 이현우 교수는 경계한다. 문학이 사회적 책임과는 무관한, 아울러 우리 생활과도 거리를 둔다면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이는 “러시아 문학이 대체로 그런 편인데, 그래서인지 도스토예프스키 등의 작품에서 자주 나타나는 영혼 구원에 대한 진지한 탐구에 마음이 간다”고 말했다. 그래서 “문학 전공자인데도 책은 다양하게 읽으시네요?”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어떤 때는 정색을 하고 “문학이 전부인데 무슨 소리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이현우 교수는 1994년 즈음에 하이데거의 『형이상학 입문』을 자극적으로 읽었다. 투박하게 이야기하면 “왜 사람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있는가”라는 질문 하나로 한 권의 책을 구성할 수 있다는 사실에도 놀랐지만, “인간이 그런 질문을 던지는 존재구나”라는 인식에 크게 고무되었다. 이것은 인간만이 묻는 고유한 질문으로, 인간은 특권적 물음을 갖는 존재다. “하지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없는 듯하다”며 이 교수는 미소 지었다. 단지 답을 찾지 못해 시름시름 앓거나, 질문 자체에 고양되는 삶을 살 뿐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 존재의 물음이 언어와 관계있다는 사실에 이현우 교수는 놀랐다. 여기서 언어는 그리스 기원의 언어로 인도유럽어족만이 갖는 ‘존재동사삼인칭단수형’에 관한 질문인데 우리말은 가지고 있지 않은 특성이다. 그래서 우리 철학에서 존재의 질문, 존재의 사유는 언어의 구속성과 제약성이 따르게 마련이다. 이 교수는 “형이상학적 질문이 언어에 의해 제약을 받는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면서도 “하이데거 철학에서 언어 구속성 문제에 국내에선 사유가 부족한 듯해 아쉽다”고 했다.

 

사실 존재의 문제와 언어와의 관계성에 천착하는 책은 국내에 드물다. 하이데거 전공자들도 “하이데거가 얼마나 대단한가”라는 이야기만 할 뿐이며, 보편적 하이데거만을 이야기한다. 하이데거 철학의 힘과 깊이는 인정하지만 언어 문제가 극복 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물음과 해답을 찾으려는 노력은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사유의 기반이 되는 중요한 물음임에도 간과되고 있는 현실이 이현우 교수로서는 아쉽다.

 

 

 

책이 인간보다 위대하다

러시아 문학 전공자로서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의 비중은 그이에게 남다르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과 『가난한 사람들』은 지금도 기회 있는 대로 사람들에게 읽어볼 것을 권하는 목록 가운데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처녀작이면서 당시 최대 비평가였던 벨린스키로부터 극찬을 받아 작가의 이름을 널리 알린 계기가 된 작품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다른 수식어가 필요 없는 작품. 이현우 교수는 한 인터넷 서점의 추천도서 코너에 이 작품을 소개하면서 “세상 모든 고민을 다 끌어안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소설”이라고 소개했다. 이어지는 추천사가 재미나다. 

책을 가방에 넣는 순간, 당신은 그 고민들과 동행하는 것이 되고, 책을 펼쳐드는 순간 그 고민에 머리를 맞대는 것이 된다. 고민하지 않으려는 인간이라면 제일 먼저 내다버려야 할 책.

고민하는 인간, 다시 말하면 진정한 삶의 방향성을 묻는 사람이라면 한 번은 꼭 읽어야 할 책이 바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다. 『책을 읽을 자유』에서는 이 대목을 이렇게 확장시키고 있다. 음미할수록 고개가 주억거려지는 문장이 아닐 수 없다.  

신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책을 읽을 자유였다. 그리고 분명 책은 인간이 만든 것이지만, 나는 가끔 책이 인간보다 위대해 보인다. 

(...)

 

12. 02. 15.

 

 

 

P.S. 하이데거의 <형이상학 입문>(문예출판사, 1994)은 현재 절판된 상태다. 다른 장소에 보관해오던 책인데, 오늘 몇몇 책들을 챙기러 갔다가 눈에 띄기에 가져다 지금 책상 위에 놓았다. 감회가 없지 않다. 하이데거 전집 제40권에 해당하는 책으로 최근에 나온 책으론 <근본개념들>(길, 2012)과 성격이 비슷하다. 이 책은 전집 제51권을 옮긴 것이다. 흠, 갑자기 <존재와 시간>을 완독하고 싶어지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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