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이 며칠 남지 않았다. '이주의 책'도 정치비평/칼럼 분야의 책 위주로 고른다. 타이틀이 될 만한 책은 눈에 띄지 않아서 제목은 '한국사회를 생각한다'라고 두루뭉술하게 붙였다. 박노자, 강준만의 신작과 함께, 안병진, 하승우, 김진호 등의 책이다. 이 외에 김광기의 <정신차려 대한민국>(알에이치코리아, 2012)과 이택광의 <한국문화의 음란한 판타지>(자음과모음, 2012, 개정판)도 같이 묶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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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하라- 박노자, 처음으로 말 걸다
박노자.지승호 지음 / 꾸리에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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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매춘, 한국을 벗기다- 국가와 권력은 어떻게 성을 거래해왔는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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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 전환기 시민정치를 생각하며
안병진 지음 / 당대 / 2012년 4월
14,000원 → 12,600원(10%할인) / 마일리지 7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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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에 反하다
하승우 지음 / 낮은산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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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주문하면 "1월 5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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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도서이지만 일부러 독서를 미뤄놓는 책들이 있는데 이언 와트의 <소설의 발생>(강, 2009)과 린 헌트의 <인권의 발명>(돌베개, 2009) 같은 책이 그렇다. 이유는 비슷하다. 저자들이 중요한 전거로 삼고 있는 작품들이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는 거. 어떤 작품들인가.

 

 

 

'디포우, 리처드슨, 필딩 연구'란 부제를 갖고 있는 <소설의 발생>에서는 디포우의 <로빈슨 크루소>, <몰 플랜더즈>, 그리고 리처드슨의 <파멜라>와 <클래리사>, 필딩의 <톰 존스>가 주된 분석 소재다. <톰 존스>(삼우반, 2007)와 <파멜라>(문학과지성사, 2008)가 번역된 이후에도 <몰 플랜더즈>, 더 결정적으로는 <클래리사>가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는 게 핑계가 됐다.

 

하지만 이번주에 예기치 않게도 <클래리사>가 <클러리사 할로>(지만지, 2012)란 제목으로, 무려 8권짜리 책으로 번역돼 나왔다(책값만 20만원이 넘어간다. 소설 한 작품에!). 일단은 2권까지만 구입했는데, 비록 <몰 플랜더즈>는 아직 소식이 없지만 나머지 작품들은 완비가 된 상황이니 '시간 부족' 말고는 더이상은 핑계가 안 통하게 됐다. <소설의 발생>을 어디에 두었는지 하는 수 없이 주말에 찾아볼 예정(오래전에 구입한 원서도 갖고 있긴 하다).

 

 

 

다시 정리하면, <소설의 발생>을 읽기 위해서 미리 읽거나 같이 읽어야 할 책으로 먼저 디포우의 <로빈슨 크루소>가 있다. 세계문학판 번역본들이 나와서 이 책은 독서여건이 아주 좋다.

 

 

 

그리고 필딩의 <톰 존스>와 리처드슨의 <파멜라>. 분량이 만만찮지만 소설사뿐 아니라 18세기 문화사에 관심이 있다면 책장에 구비해놓을 만하다.

 

 

 

거기에 <클러리사 할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맞먹을 만한 분량이다(책값은 능가한다!). 영어본으로도 보통은 축약본이 나와 있을 정도. <인권의 발명>을 읽기 위해선 <클러리사 할로>에다가 루소의 <신엘로이즈>(한길사, 2008)를 더 얹으면 된다. '소설'이 아니라 '고전 명저'로 번역돼 고급양장본이고 가격도 세다(이런 건 문고판 영역본들이 부럽다).

 

 

 

흠, 찾아놓고 보니 <소설의 발생>과 <인권의 탄생>을 읽는 건만 해도 몇십 만원 비용에 몇 개월짜리 프로젝트다. 이런 건 '독서'라기보다는 말 그대로 '전투'다...

 

12. 04.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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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일정 때문에 어제 오후 홍대앞 PC방에서 쓴 글이다. 아침에는 주진우의 <주기자>(푸른숲, 2012)를 읽다가 가방엔 <가장 뛰어난 중년의 뇌>(해나무, 2011)를 넣어 갔었는데, 칼럼은 '책 읽는 뇌' 이야기에서 멈췄다. '중년의 뇌'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기회를 마련해볼 참이다.

 

 

 

경향신문(12. 04. 06) [문화와 세상]독서력을 갖춘 사회

 

책을 몇권 내면서 가끔 강연회에서 독자들을 만난다. ‘책에 대한 책’으로 분류되는 책들이다 보니 화제는 주로 독서다. 무슨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가 청중의 주된 관심사다. 그런 물음에 답하다 보니 애용하게 된 레퍼토리 중 하나는 ‘책 읽는 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독서목록을 만드는 것보다 먼저 할 일이 독서력을 갖추는 것이란 점은 자명하다.

 

무엇이 책 읽는 뇌인가. 기본전제는 인간은 책을 읽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문자의 발명이 불과 5000년 전의 일이고 책이란 물건이 등장한 건 그보다 나중이니 독서능력이란 게 우리 뇌에 특별한 능력으로 자리 잡을 순 없었다. 그럼에도 문자를 해독하고 책을 읽을 수 있게 된 건 우리 뇌의 다른 기능들이 부수적인 역량을 발휘한 결과다. 그런 기능 간 협조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난독증인데, 책 읽는 뇌가 우리의 본질적 능력이 아니라 ‘부업’의 결과라면 난독증이 큰 흠은 아니다. 진정 놀라운 것은 오히려 문자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이다. 부모라면 자녀들이 한글을 깨칠 때 느꼈던 경이감을 기억할 것이다. 물론 우리 자신도 그런 경이감을 부모에게 안겼을 것이니 알고 보면 다들 ‘천재’였다. 비록 일반화되긴 했지만 문자를 읽어낸다는 것, 소위 ‘문해력’은 자연스러운 능력이 아니라 천재적인 능력이다.

문제는 문해력이 곧 ‘독서력’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책을 읽는 능력은 글자를 읽거나 글을 읽는 능력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능력이다. 그리고 이 독서력은 자연스레 체득되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인 노력의 결과로 얻어진다. 대단한 노력은 아니다. 일주일에 한두 권씩 2년 정도의 단기간에 꾸준히 읽으면 된다. 그렇게 ‘10000페이지 독서’나 ‘150권 독서’를 통해서 독서력이 길러진다. 어지간한 책을 읽고 소화할 수 있는 힘이 독서력이다. 만약 어지간한 책을 읽어내는 게 힘겹다면 독서력이 아직 부족한 단계라고 말할 수 있다. 책 읽는 ‘근육’이 아직 형성되지 않은 것이다.

글을 읽는 단계에서 책을 읽는 단계로 넘어가려면 좀 더 단련된 뇌 근육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렇게 단련된 뇌 근육은 독서의 지평뿐 아니라 세계의 질감 또한 변화시킨다. 이 변화는 개인적 차원에 한정되지 않는다. 문맹을 벗어난 사회가 문해력을 갖춘 사회라면 진정한 문명사회는 독서력을 갖춘 사회라고 말할 수 있을 테니까.

일제시기 한국인의 70%가 문맹이었다고 한다. 오늘날 문맹률에 있어서만큼 세계 최저 수준이니 우리의 초급 문해력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다시 강조하자면 문해력과 독서력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문해력은 초등교육의 과제일 수는 있을지언정 고등교육의 목표일 수는 없다. 독서력은 초등학교 교과서가 아니라 대학교재를 읽을 수 있는 진전된 문해력이다. 세계 최저수준의 문맹률에도 불구하고 한국 대학생들의 문해력이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 문제는 독서량이고 독서력이다. 한 달에 한권 정도를 읽는 평균 독서량을 갖고서 우리 사회가 ‘독서력을 갖춘 사회’라고 말할 수는 없다.

흔히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은 그들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는다고 한다. 그 수준을 말해주는 척도 가운데 하나가 바로 독서력이다. 민간인 불법사찰이나 일삼는, 그러면서도 무엇이 부끄러운 일인지 모르는 수준 낮은 정부를 우리가 갖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의 미흡한 독서력과 무관하지 않다면 독서는 정치적 차원에서도 진지한 숙고의 대상이 될 만하다. 국민 다수가 정치와 역사와 철학에 대한 기본교양을 갖추고 말들의 홍수 속에서 무엇이 거짓말이고 꼼수인지 판별해낼 수 있다면 그런 국민을 상대해야 하는 정부의 수준도 한층 높아질 것이다. 아무리 거짓말이라 해도 최소한 좀 더 성의 있는 거짓말을 하지 않을까.

 

12. 04.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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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 읽기 리스트는 작년에도 만들어놓은 적이 있는데, 아렌트 선집의 하나로 <이해의 에세이 1930-1954>(텍스트, 2012)가 출간됐기에 한번 더 만들어놓는다(오늘의 발견이어서 바로 주문했다). 정치철학에 대한 강의 때문에 안그래도 아렌트의 <정치의 약속>(푸른숲, 2007)을 다시 펴보려던 참이었다. 이 역시 아렌트 사후에 나온 선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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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의 에세이 1930~1954- 한나 아렌트 텍스트 선집
한나 아렌트 지음, 홍원표 외 옮김 / 텍스트 / 2012년 2월
20,000원 → 18,000원(10%할인) / 마일리지 1,0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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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국의 위기- 정치에서의 거짓말.시민불복종.폭력론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 / 한길사 / 2011년 10월
25,000원 → 22,500원(10%할인) / 마일리지 1,2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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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약속
한나 아렌트 지음, 제롬 콘 편집, 김선욱 옮김 / 푸른숲 / 2007년 10월
18,000원 → 16,200원(10%할인) / 마일리지 9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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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미래 사이- 정치사상에 관한 여덟 가지 철학연습
한나 아렌트 지음, 서유경 옮김 / 푸른숲 / 2005년 11월
24,000원 → 21,600원(10%할인) / 마일리지 1,2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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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주간경향(970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홍기빈의 <살림/살이 경제학을 위하여>(지식의날개, 2012)가 서평거리다. '위하여'른 뗀 본격적인 <살림/살이 경제학>을 고대해 본다.

 

 

 

주간경향(12. 04. 10) 돈벌이 아닌 삶을 위한 경제학

 

“이 책은 지금까지 약 300년간 존재해 온 경제학을 근본적으로 대체할 새로운 경제학을 찾고자 하는, 나의 보잘 것 없지만 오래된 고민의 한 결과물이다.” <살림/살이 경제학을 위하여>의 서두이면서 저자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의 문제의식을 집약하고 있는 문장이다. 그렇다고 책이 ‘오래된 고민’의 첫 보고서는 아니다. 이미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책세상, 2001)을 통해서 그는 ‘경제학의 근본적 재구성’에 대한 필요성을 주장하고 기존의 경제학이 ‘가지 않은 길’의 그림을 제시했었다. <살림/살이 경제학을 위하여>는 저자의 고민이 그간에 얼마나 더 깊어졌는가를 보여주는 중간 보고서라고 할 수 있을까.


소위 주류경제학이라고 불리면서 ‘약 300년간 존재해온 경제학’을 저자는 ‘돈벌이 경제학’이라고 부른다. ‘경제학’이란 말을 독점하고는 있지만 결코 유일무이한 경제학이 아니다. 오히려 상대적으로 짧은 역사를 갖고 있을 따름이다. 돈벌이 경제학에서 보는 경제란 무엇인가. “인간이 살아가면서 부닥치게 되는 여러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거둘 수 있도록 알뜰하게 선택하는 행위”를 뜻한다. 너무도 친숙한 정의인가. 반면에 저자가 정의하는' 살림/살이 경제'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느끼게 되는 정신적·물질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유형·무형의 수단을 조달하는 행위”를 말한다. 어떤 차이인가. 어쩌면 별로 차이가 느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우리에게 돈벌이와 살림/살이가 서로 중첩돼 있어서다. 그것이 바로 저자가 문제적이라고 보는 대목이다. 이러한 중첩은 자본주의 사회의 ‘상품화’가 전면화되면서 빚어진 특수한 현상이기 때문이다.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사정은 달라진다. 그리스어 어원을 따지자면 영어 단어 ‘이코노미(economy)’는 가정을 뜻하는 ‘오이코스’와 질서나 법률을 뜻하는 ‘노모스’가 합쳐진 말이다. 말하자면 ‘집안 살림’이 경제인 것이니 오늘날의 학문분류에 따르면 ‘가정관리학’이 바로 경제학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정의 살림/살이를 위한 경제행위로서 ‘오이코노미아’와 재물을 획득하기 위한 기술인 ‘크레마티스티케’를 명확하게 구별했다. 이 둘은 목적과 수단의 관계다. 곧 재물 획득 기술은 살림/살이라는 목적의 수단일 뿐이며 그것이 역전돼서는 안 된다. 이것이 유럽은 물론 이슬람에서 16세기까지 지배했던 관점이다


살림/살이라는 목적과 재물 획득이라는 수단의 관계가 역전되는 것은 대략 16세기부터이다. ‘좋은 삶’ 대신에 화폐와 연관된 ‘돈벌이’가 부의 표준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저자는 “서양 문명 및 인류의 경제 사상사에서 진정으로 중대한 단절이 벌어졌다고 한다면 이는 고대 및 중세 경제 사상의 살림/살이 경제학 패러다임과 고전파 경제학 이후에 생겨난 돈벌이 경제학 패러다임 사이에서의 단절”이라고 주장한다. 애덤 스미스 이래의 현대 경제학은 돈벌이 경제학의 체제를 무한히 확장하여 오직 돈벌이와 관련된 현상만을 ‘경제적인 것’으로 보이게끔 만들었다. 돈벌이 경제학이 가져온 폐색(閉塞)이자 맹목이다.

 

 


하지만 돈벌이 경제학이 살림/살이 경제학을 완전히 제거한 것은 아니다. 저자는 돈벌이 경제학의 지배를 거스르는 살림/살이 경제학의 면면한 흐름 또한 짚어낸다. 초기 사회주의자들에서 베블런, 폴라니 등으로 이어지는 계보다. 저자는 베블런의 <자본의 본성에 관하여>나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 같은 저작을 직접 번역·소개함으로써 이러한 흐름을 가시화한 바 있다. 그 연장선상에서 <살림/살이 경제학을 위하여>는 우리가 또 한 번의 ‘거대한 전환’, 이번에는 돈벌이 경제학에서 살림/살이 경제학으로의 전환을 필요로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무엇이 살림/살이 경제학인가? 핵심은 ‘인간 존재의 전면적 발전’이다. 잠재적 능력을 개발하지 못한다면 부란 고작 좀 비싸게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을 뜻할 따름이다. 인생의 목적은 돈벌이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 이웃의 삶을 더 풍부하게 만드는 것이란 주장에 반대할 수 있을까. 우리는 돈벌이에만 내몰리기엔 좀 ‘비싼’ 존재다.


12. 04.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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