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제임스와 야스퍼스'란 제목을 달려다가 '심리학의 원리와 일반 정신병리학'으로 바꾸었다. 제임스의 <심리학의 원리>와 야스퍼스의 <일반정신병리학>에 관한 페이퍼라 범위를 좁힌 것이다. 그리고 이 페이퍼는 독자의 페이퍼가 아니라 수집가(컬렉터)의 페이퍼이다. 장서가의 기준이 내가 20대에 생각했던 대로 1만권 정도라면 어느새 나도 장서가의 대열에 들어서게 됐다(90년 가을에 복학할 때 나는 집에서 들고 온 책으로 4단 책장 두 칸도 채우지 못했었다). 하지만 장서가란 말보다 개인적으로 더 선호하는 것은 '책 수집가'이다. '장서'란 말이 정태적이라면 '수집'은 동태적이어서 그렇다. 방안에 있는 책도 못 찾는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책탐을 버리기는커녕 줄이지도 못하는 것이 책 수집가의 고질이다.

 

 

 

오늘은 그 대상이 윌리엄 제임스의 <심리학의 원리>(아카텟, 2005)이다. 책은 진작에 번역돼 나왔지만 사실 가격과 분량 때문에 엄두를 못 내던 터였고, 몇달 전에 다시 찾아봤을 때는 1권이 품절된 상태였다. 최근에 나온 심리학책을 읽던 중 다시 언급이 되길래 찾으니 세 권이 다 살아있다. 사실 책이 처음 나왔을 때 '최근에 나온 책들'을 소개하면서 나는 이렇게 적은 적이 있다.

윌리엄 제임스의 <심리학의 원리>(아카넷). 전 3권 2,500쪽이 넘는 그야말로 방대한 분량이다. 존 듀이, 찰스 샌더스 퍼스와 함께 미국 프래그머티즘의 세 거두로 꼽히는 윌리엄 제임스의 주저 중 하나인데(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하버드대학에 오래 봉직했는데, 1875년 미국대학 최초로 심리학 강의를 개설했다고 한다. '미국 심리학'의 아버지인 셈이다), 소개를 보니까 이건 그의 저술여정에서 첫번째 시기의 결과물이다.

 

"제임스의 저술 시기는 대략 세 단계로 구분된다. 첫번째는 스코틀랜드와 독일철학의 정신이해와 골상학의 관점에서 심리학을 연구했던 당시 미국의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실험에 기초한 심리현상연구를 통해 독자적으로 기능주의 심리학을 수립한 시기이다. 이때 <심리학원론>을 출판했다. 두번째는 종교나 철학에 관련된 주제들을 연구하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 제임스는 여러 곳으로부터 초빙을 받아 강의를 하였는데, 그 결과물은 책으로 출판되어 제임스에게 명성을 안겨다주기도 하였다. 이 무렵 에든버러대학으로부터 기포드 강연 초청을 받아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을 20개의 주제로 나누어 강연하였다. 세번째는 프래그머티즘, 진리론, 그리고 그의 인식론적인 급진적 경험론에 대한 강연을 통해 자기만의 독특한 사상을 확립한 시기이다. 대표적인 강연은 1908~1909년에 행한 옥스퍼드 대학의 히버트 강연이다. 이 시기의 대표적 저술로는 <프래그머티즘> <다원적 우주> <진리의 의미> 등이 있다." 

 

이 중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한길사, 2000)이 이미 소개돼 있다. 세번째 단계의 <프래그머티즘>은 비교적 얇은 책인데, 아직 소개되지 않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프래그머티즘의 길잡이>(철학과현실사)에 내용이 일부 발췌돼 있던가 정리돼 있었던 듯하다). 어쨌든, <심리학의 원리> 같은 고전의 번역/소개는 반가운 일이지만, 이걸 언제, 누가 읽어(줘)야 하는지는 의문이다(심리학 전공자들은 읽는가?) 멜빌의 <모비딕>보다 두꺼운 책이 그것도 소설이 아니라 철학책인 것이니까!

 

 

그때 아직 소개되지 않은 이유를 모르겠다고 한 <프래그머티즘>은 <실용주의>(아카넷, 2008)로 번역돼 나왔다. 그리고 제임스의 다른 글은 <프래그머티즘의 길잡이>(철학과현실사, 2001) 등에 일부 소개돼 있기도 하다. 요는 <심리학의 원리>와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 <실용주의> 등이 제임스의 대표작이라는 것. 이 중 가장 방대한 분량의 책이 <심리학의 원리>여서 과연 우리말로 번역될 수 있을지 궁금했다. 지난 2005년에도 이렇게 덧붙였다.   

하여간에 심리학 분야에서 내가 언제쯤 번역될지, 과연 번역이 가능은 한 건지 의문을 가졌던 두 권의 책 중 하나가 이번에 나왔다. 나머지 하나는 야스퍼스의 <일반정신병리학>(1913)이다. 1997년에 나온 리프린트 영역본의 분량이 922쪽에 이르니 이 책 역시 나름대로 방대하다. 러시아어로도 번역돼 있어서 가끔씩 모스크바의 대형서점에 가서 눈길만 주던 책이었다(2만원쯤 했던 듯싶다). 제임스와 야스퍼스는 모두 의대 출신 철학자들이다. 보통 철학자들은 신학이나 수학 전공자들이 많으며, 러셀에 의하면 그들이 철학의 두 계보이다. 거기에 다른 두 계보를 덧붙이자면 나는 문학과 의학을 꼽겠다. 이 네 가지 계보를 정리하는 건 물론 돈벼락을 맞은 이후에 주제를 모르는 상태에서나 가능한 일이겠지만... 

 

<심리학의 원리> 번역본 출간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는 한국어본 출간 당시 아직 일본어본이 나오지 않은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번역자와 관련한 사정은 이렇다.

이번 번역본은 첫째, 국내는 물론이고 번역 천국이라 할 수 있는 일본에서도 아직 선보이지 않고 있는 첫 완역본이며, 둘째, 그것이 한 심리학자의 근 20년에 걸친 노작의 산물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역자는 이인(里仁)이 호인 정양은(鄭良殷). 1923년생으로 서울대 심리학과에서 학사ㆍ석사ㆍ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중앙대ㆍ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를 역임하고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으로 있다가 2004년 2월 8일, 향년 81세로 타계했다. 그러니 이번 '심리학의 원리' 완역본은 그의 유작이다. 고전 번역이라면 모름지기 붙어 있어야 하는 '해제' 편이 이 완역본에 탈락된 이유는 고인이 미쳐 완성을 보지 못하고 타계했기 때문이라고 유저를 발간한 그의 제자들은 증언하고 있다.

 

고인에게서 심리학을 배우고 다른 제자 9명과 힘을 합쳐 이번 완역본을 낸 조긍호 서강대 교수에 의하면 정양은 박사는 1986년 4월에 이 심리학 고전 완역을 시작해 99년 말에는 초벌 번역을 마쳤으며, 그 뒤 교정과 윤문 작업을 하고, 2003년 이후에는 해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니 고인이 이 책 완역에 투신한 시간은 번역 시작을 기점으로 할 때 18년을 헤아리는 셈이다.(연합뉴스)

야스퍼스의 <일반정신병리학>이 출간된다면 아마도 이와 비슷한 고투담을 필요로 하지 않을까 싶지만, 여하튼 독서와는 별개로 책 수집가로서 내가 욕심을 내볼 수 있는 최대치가 제임스의 <심리학의 원리>나 야스퍼스의 <일반 정신병리학>이어서 이 두 권에 대한 이야기를 한번 더 적어보았다.

 

 

물론 아직 번역되지 않은 야스퍼스의 책이 출간되길 기대하는 마음은 따로 적지 않아도 될 것이다...

 

12. 10. 03.

 

 

 

P.S. 제임스의 <심리학의 원리>가 심리학의 원조 저작 가운데 하나이기에 심리학사 책이 나온 게 있나 찾아보니 C.James Goodwin의 <현대 심리학사>(시그마프레스, 2005)와 D. Brett King 외, <심리학사>(교육과학사, 2009)가 눈에 띈다. 모두 대학교재용 책일 텐데, 후자는 4판(2008)까지 나온 것으로 보아 많이 읽히는 책인 듯싶다. 국내 대학에서도 교재로 사용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현대 심리학사>는 한번 읽어보려고 한다. 굿윈의 책은 4판(2011)이 최신판이다. 같은 제목의 책으론 슐츠의 <심리학사>가 10판(2011)까지 나와 있다. 유감스럽게도 이 교재용 책들은 너무 비싸다는 게 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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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주문해놓고 배송을 기다리고 있는 책 가운데 '일본 근현대사 시리즈'가 있다. 지난달초에 1차분 3권이 먼저 나와서 구입했는데, 월말에도 2차분 3권이 출간됐다. 아마도 올해 안에 완간되는 듯싶다. 소개에 따르면, "<일본 근현대사 시리즈(전 10권)>는 2007년 이와나미서점에서 간행한 역사 시리즈로, 19세기 중반의 외국 함선 내항으로부터, 21세기의 현재까지, 대략 150년의 역사를 아우르고 있다." 전체 구성은 <1권 막말·유신>(이노우에 가쓰오), <2권 민권과 헌법>(마키하라 노리오), <3권 청일·러일전쟁>(하라다 게이이치), <4권 다이쇼 데모크라시>(나리타 류이치), <5권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으로>(가토 요코), <6권 아시아·태평양전쟁>(요시다 유타카), <7권 점령과 개혁>(아메미야 쇼이치), <8권 고도성장>(다케다 하루히토), <9권 포스트 전후 사회>(요시미 슌야)이며, 마지막 10권은 이와나미 신서 편집부에서 엮은 <일본 근현대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이다. 일본 근현대사 책이 몇 종 나와 있지만, 이와나미판이 그 중 가장 최신판이어서 기대가 된다. 아직 완간되지 않았지만(현재 6권 출간) 리스트로 묶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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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권과 헌법
마키하라 노리오 지음, 박지영 옮김 / 어문학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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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러일전쟁
하라다 게이이치 지음, 최석완 옮김 / 어문학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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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쇼 데모크라시
나리타 류이치 지음, 이규수 옮김 / 어문학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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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으로
가토 요코 지음, 김영숙 옮김 / 어문학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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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사이드의 <지식인의 표상>(마티, 2012)을 읽다가 문득 어제오늘 펼쳐본 책들의 공통점이 눈에 띄기에 적는다. 다름아니라 강연록이라는 점. 오르한 파묵의 <소설과 소설가>(민음사, 2012), 그리고 뇌신경과학자 마이클 가자니가의 <뇌로부터의 자유>(추수밭, 2012)가 모두 같은 성격의 책이다.

 

 

사이드의 책은 <권력의 지성인>(창, 1996/2011)이란 제목으로 나온 적이 있는데(번역이 좋지 않았다), 이번에 에드워드 사이드 선집의 하나로 새로 번역돼 나왔다. 원래의 제목을 찾은 이 책은 영국 BBC방송의 리스강좌를 단행본으로 펴낸 것이다. 사이드는 1993년에 이 강좌를 맡아 진행했었다.

 

 

<지식인의 표상>이 제대로 번역됨으로써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이학사, 2007)과 함께 대표적인 지식인론을 편하게 읽을 수 있게 됐다. 거기에 한권 더 얹자면 토니 주트의 <지식인의 책임>(오월의봄, 2012)도 유력한 후보다. 사이드는 존 캐리의 <지식인과 대중>(1993)이 강연 원고를 마친 이후에 읽은 흥미로운 저작이라고 평했지만 우리말로는 번역되지 않았다.  

 

 

 

파묵의 <소설과 소설가>는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소설론이라 흥미를 끄는 책인데, 하버드대학의 노턴 강좌에 초빙받아 강연한 원고를 모은 것이다. 원제는 '소박한 소설가와 성찰적 소설가'로 프리드리히 실러의 저명한 논문에서 제목을 따왔다. 국내에는 <소박문학과 감상문학>(인하대출판부, 1996)으로 번역돼 있는 논문이다.

 

 

 

파묵은 강좌를 준비하면서 두 권의 책을 참고했다고 하는데, 놀랍게도 너무 친숙한 책들이다. 포스터의 <소설의 이해>와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이어서 그렇다. 1952년생인 저자와는 세대 차이가 없는 거 아닌가 싶어 좀 신기했다. 쿤데라의 소설론을 읽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랄까(쿤데라는 1929년생이다).

 

 

가자니가의 <뇌로부터의 자유>는 저명한 기포드 강좌를 책으로 묶은 것이다. 프롤로그에서 저자가 밝히고 있지만 윌리엄 제임스, 닐스 보어,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 등이 이 강좌의 선배 강연자들이었다. 저자의 명망을 확인하게 해주는데, 세계적인 뇌과학자가 인간과 자유의 문제를 어떻게 보는지 경청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이 주제에 관한 책들이 여럿 나와 있어서 같이 비교해보며 읽을 수도 있겠다). 

 

'강연록'이란 형식 때문에(물론 책으로 낼 때 많이 보완되지만) 세 명의 저자를 같이 묶어 보았다. 주제로 묶는다면 '지식인-소설-뇌'가 될까. 어느 쪽을 고르든지 한동안 열독할 만한 책들이 나와 있어서 반갑다(나는 파묵의 소설도 이번에 잔뜩 구했다). 이 책들과 함께 10월은 시작된다...

 

12. 10.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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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1917-2012)이 타계했다는 소식이다. 향년 95세. "1917년 이집트에서 태어난 홉스봄은 케임브리지대학교 킹스칼리지에서 역사학을 전공했다. 일찍부터 마르크스주의에 관심을 가졌으며 자본주의 형성과정과 그에 따른 인간의 다양한 삶에 근거한 근대자본주의 사회의 역사 연구로 명성을 얻었다. 영국 런던대학교 버벡칼리지 학장을 지냈고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 ,'극단의 시대' 등의 저작을 남겼다. 2011년엔 마지막 저서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가'를 펴냈다." 그 마지막 저서를 몇달 전에 구했는데, 좌파 지식인으로서의 열정이 흠씬 묻어 있는 책이었다. 그의 자서전과 함께 시간을 내 읽어보고 싶다. 추모의 의미로 그의 책들을 리스트로 모아놓는다(홉스봄의 일대기에 대해서는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10121003000812&section=0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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홉스봄, 역사와 정치
그레고리 엘리어트 지음, 신기섭 옮김 / 그린비 / 2012년 5월
13,000원 → 11,700원(10%할인) / 마일리지 6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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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시대
에릭 홉스봄 지음, 정도영.차명수 옮김 / 한길사 / 1998년 9월
28,000원 → 26,600원(5%할인) / 마일리지 840원(3%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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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시대
에릭 홉스봄 지음, 정도영 옮김, 김동택 해제 / 한길사 / 1998년 9월
25,000원 → 23,750원(5%할인) / 마일리지 750원(3%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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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시대
에릭 홉스봄 지음, 김동택 옮김 / 한길사 / 1998년 10월
28,000원 → 26,600원(5%할인) / 마일리지 840원(3%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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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부터 프레시안의 제안에 따라 '3인 1책 전격수다'에 참여하게 됐다. 도서평론가 이권우 교수와 전직 영화잡지 기자이자 <범죄소설>(강, 2012)의 저자 김용언 씨가 수다의 나머지 멤버이다. 첫번째로 다룬 책은 도널드 서순의 <유럽 문화사>(뿌리와이파리, 2012)인데, 워낙 방대한 분량의 책이라 관심을 가진 분야만 발췌독할 수 있었다. 책 수다의 일부를 옮겨놓는다. 전문은 프레시안의 기사(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20928124912§ion=04)를 참고하시길.

 

 

 

 

 

프레시안(12. 09. 28) 싸이, 모차르트가 될 수 있을까? "문제는 돈이야!"

 

이권우 : 이번 좌담을 준비하면서 <유럽 문화사> 다섯 권을 읽기 위해 시간을 한참 두었는데, 한 달이 지나도 한 권밖에 못 읽게 되더라고요. 목적 의식을 갖고 읽어도 이 책을 읽기가 쉽지만은 않구나, 그렇다면 일반 독자들이 이 책을 읽을 땐 어떨까 싶었어요. 우리부터가 먼저 이 책의 독서법에 대해 얘기를 시작해보죠.

 

이현우 : 문화 사전 같다는 인상이 가장 큽니다. 사전을 누가 처음부터 마지막 쪽까지 다 읽겠어요. (웃음) 필요한 영역별로 그때그때 참조할 수 있는 사전으로 보는 게 좋을 듯합니다.

 

이권우 : <유럽 문화사>의 장점이자 단점이, 연도별로 나누고 그 안에서 또 주제별로 나누어 기술됐다는 거죠. 주제별로 크게 분류되어있다면 그 흐름을 따라 죽 읽으면서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두 가지 기능이 복합되어 있거든요. 게다가 다섯 권짜리 책이니 양도 만만치 않고요.

 

김용언 : 사전에 가깝지만, 일차적인 느낌은 서술 자체가 무척 평이하고 재미있게 쓰였다는 것입니다. 사실 200년의 문화사를 다룬다는 게 독자에게 많은 지식을 요구함에도 불구하고, 잘 모르는 사람이 무턱대고 책을 펼쳤더라도 그렇게까지 진입 장벽을 높진 않을 것 같아요. 문화의 각 분야 중 개인적 흥밋거리부터 천천히 읽어나가는 데 큰 무리는 없을 것 같고요. 그래서 도널드 서순이 집필할 때 주된 독자층을 어떤 사람으로 상정하고 썼을지 좀 궁금했습니다. 책의 많은 부분이 출판에 관련된 부분을 다루면서 19세기부터 20세기까지 독자층의 변화를 일별하는데, 정작 본인은 자신의 책이 어떤 독자들에게 읽혀지기를 기대했을까요? 우리 같은 사람일까요? (웃음)

 

이현우 : 서순이 서문에도 썼지만 좁은 의미에서의 문화에 집중했죠. 출판, 음악, 영화 등이요. 그나마 미술을 뺐기 때문에 분량이 줄어들었는데, 그 많은 분야에 세부적인 디테일과 정보를 꼼꼼하게 제공하잖아요. 그게 재미있는 면인 동시에 읽기 힘든 면이기도 하죠. 무엇보다 문화사 서술에 대한 저자의 관점이 흥미로웠어요. 중간 계급을 위한 문화의 생산과 소비가 19세기부터 시작됐는데 사실 정말 짧은 시간밖에 안 걸렸구나, 이게 우리의 전사(前事)구나 하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죠. 무척 유익한 독서 경험이었어요.

 

이권우 : 저자가 책 제목을 <유럽 문화사>로 지은 것도 유의미합니다. 예전 같으면 그냥 '세계 문화사'라고 썼을 수도 있어요. 근대의 창출점이 유럽이었기 때문에, 사실 '근대 세계 문화사'라고 해도 크게 저항을 받진 않았을 텐데요. 굳이 자신의 지역적 특색을 정확하게 드러냈다는 건 어쨌든 20세기 후반 서구 지식 사회의 자기반성이 담겨있다고도 볼 수 있겠죠. 유럽이라는 지역의 지난 200년을 탈식민주의적인 시선으로 보겠다는 의지가 있는 것 같아요.

 

이현우 : 동아시아 쪽에서 독서 시장이 본격적으로 형성되는 건 20세기가 넘어서부터죠. 유럽 쪽은 한 세기나 먼저 시작되었다는 시차가 존재합니다. 한국의 독서 시장에 관련해서는 천정환 교수가 쓴 <근대의 책 읽기>(푸른역사 펴냄)가 비슷한 콘셉트의 책입니다.

 

이권우 : <유럽 문화사>의 기본 테마가 서문에 잘 나옵니다. 정신사적 측면보다 사회사적 측면을 강하게 드러내지요. 15쪽에 보면 이런 말이 나와요. "지난 200년에 걸쳐 문화 소비가 엄청나게 증가한 셈이다. 바로 그 역사가 이 책의 주제를 이룬다." 이걸 놓치고 <유럽 문화사>를 읽으면 안 됩니다. 근대 문화가 결국 대량 소비 생산 체계를 구축한 근대 사회 체제와 일치하는 점이 있다는 걸 염두에 두면서 읽어야 하지요.

 

이현우 : 문화는 생산되고 소비되는 상품이라는 점을 계속 강조해요. 그런데 생산과 소비가 이루어지려면 시장이 있어야 하죠. 출판의 경우 책을 쓰는 저자가 있고 책을 만드는 출판업자가 있고 독자라는 삼박자가 갖춰져야 합니다. 그런 시장이 처음 형성되는 게 19세기부터인데, 그나마 규모까지 갖춰지는 건 19세기 중반부터지요. 그런 지점에 초점을 맞췄다는 점에서, 제목은 다소 평범하게 들릴 수 있는 <유럽 문화사>지만 개성을 갖고 있는 문화사라고 생각합니다.

 

김용언 : 한국 독자 같은 경우 사실 '유럽의 문화사'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이들의 역사를 왜 내가 읽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어요. 이 책은 문화 생산의 최종 목표를 균질화와 확산이라고 정리하잖아요. 전 세계가 거의 균질한 문화를 흡수하게 된 과정을 보여주는 책이고요. 그런 점에서 이 책의 내용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는 걸 강조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건 하나도 없어요. 빅토르 위고의 소설부터 모차르트의 오페라까지, 우리는 그들의 역사와 생산물을 이미 내 것처럼 잘 알고 있어요. 서순이 의도했을 독자층에 동아시아 지역의 독자까지 포함되었을지는 모르겠지만, 21세기의 아시아인이 읽었을 때 전부 이해가 가는 내용이라는 점에서 결국 문화사의 진화와 확산의 최종 단계에 우리가 이미 포함되어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권우 : <유럽 문화사>를 읽다보면 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가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일단 '사회사'를 강조하고 있잖아요. 하우저는 죄르지 루카치의 제자답게 계급성이나 사회의 역동성을 문화에 반영시켜 서술했죠. 도널드 서순의 경우 산업적 토대가 더 강조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근대 유럽 문화의 태동과 확산에 있어 부르주아의 역할이 컸다는 것도 강조하고요. 좀 더 정밀한 독서를 통한 비교가 필요하겠지만, 다른 측면이 분명 있어요.

 

이현우 : 독서 시장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부르주아뿐 아니라 그 주변의 좀 더 넓은 계층들이 필요해집니다. 프티 부르주아부터 글을 읽을 줄 아는 노동자 계층까지, 문자 해득력을 갖춘 새로운 독서 대중이 필요하죠. 게다가 고등 교육도 필요해요. 고등 교육을 통해 배출된 어떤 독자층, 정확하게 부르주아와 딱 일치하지는 않지만 문화의 생산과 소비가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계층이 형성되고 그들에 의해서 문화가 주도됩니다. 그들을 위한 문화인 동시에 그들이 향유하고 소비하는 문화가 어떻게 발전하고 정점에 올라갔는지의 과정은 정말 흥미로워요. 예를 들어 러시아만 해도 19세기 중반 문맹률이 95퍼센트 이상인데, 독자층이 얼마 안 됐거든요. 그런데 문학 산업은 19세기 후반에 정점을 찍게 되죠. 거기에 견주면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문화 시장, 출판 시장이 굉장히 큰데, 뭔가 배울게 있지 않은가 싶어요.

 

(...)

 

12. 0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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