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의 '3인 1책 수다'를 발췌해놓는다(전문은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31011140448§ion=03). 매달 진행해온 '수다'의 마지막 차례였는데, 지그문트 바우만의 책 <유행의 시대>(오월의봄,2013)와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동녘, 2013), 두 권을 거리로 삼았다. 바우만에 대한 소개는 이렇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2002년 <자유>(문성원 옮김, 이후 펴냄)가 처음 출간된 이래 꾸준히 주요 저작들이 국내에 소개되고 있는 사회학자다. 그는 1925년 유대인으로 태어나 제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직접 체험한 뒤 홀로코스트, 마르크스주의, 현대성 등의 주제에 천착하며 깊이 있는 사유를 발전시켰다. 야만의 시대인 20세기를 관통한 뒤 예측 불가능한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이 현자의 통찰력은, 인간을 규정하는 조건들이 얼마나 무시무시하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지속적으로 일깨운다. 

 

 

프레시안(13. 10. 11) 가난은 '차이'일 뿐? 문제는 '지식'이야, 바보야!

 

(...)

 

이현우 : 바우만은 포스트모더니티나 포스트모던이라는 시대 규정 용어 대신, 자신이 만든 '유동하는 근대(리퀴드 모더니티)'라는 신조어를 사용합니다. 이 시리즈의 책을 많이 펴냈고, 국내에도 <액체근대>(이일수 옮김, 강 펴냄), <유동하는 공포>(함규진 옮김, 산책자 펴냄), <리퀴드 러브>(조형준·권태우 옮김, 새물결 펴냄) 등 다수가 소개됐어요. 포스트모던이라 통칭되는 시대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낸 사회학적인 공로가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티'라는 단어가 한국어 상으로는 '모더니티 이후' 정도의 의미 말고는 말해주는 게 별로 없는데, '리퀴드 모더니티'는 이미지로 강력하게 다가오는 지점이 있잖아요. 우리가 어떤 시대를 사는지에 대한 그림이나 조감도를 갖고자 할 때, 유력하게 참고할 만한 사회학적 통찰 아닌가 싶습니다.

 

 

지그문트 바우만 말고 국내에 이만큼 지속적으로 소개된 사회학자들이 거의 생각나질 않아요. 개인적인 독서 경험으로는 리처드 세넷 정도입니다. <뉴캐피털리즘>(유병선 옮김, 위즈덤하우스 펴냄), <불평등 사회의 인간 존중>(유강은 옮김, 문예출판사 펴냄), <장인>(김홍식 옮김, 21세기북스 펴냄), <투게더>(김병화 옮김, 현암사 펴냄) 등이 출간됐죠. 바우만과 세넷이 새로운 자본주의의 비슷한 시기를 각자의 입장에서 얘기하는 건데, 이 두 사람이 자주 소개되고 읽힌다는 건 그만큼 잘 읽히게끔 쓴다는 뜻일 것이고, 저자의 문제의식이 우리에게 어필하는 부분이 있다는 거겠죠.

이권우 : 포스트모던에 대한 기존 해설들이 체제의 연장이나 성숙을 강조했다면, 바우만은 '거대한 전환'이라는 강한 이미지를 부드럽게 이야기하는 쪽인 듯합니다. 그래서 '유동하는 근대'가 좋은 개념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시대를 특징짓는 개념어를 찾으려 하지만 쉽지 않은 문제잖아요. 바우만의 '유동하는 근대'는 신자유주의의 단말마적 비명이 체제 종결에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사회를 고민해봐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자연스럽게 유도합니다.

우리에겐 다른 낙수 효과가 필요하다

이권우 : 그나저나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는 제목이 참 좋습니다.(웃음)

김용언 : 부제도 강력해요.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나에게 던지는 질문'.

 

이현우 : 이 책 서두에도 실린 성경 구절에서 따온 부제죠.

"가진 사람은 더 받아 넉넉하게 되겠지만 못 가진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태복음 13장 12절)

사실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에 나오는 불평등의 현실은 누구나 다 아는 상식 같지만, 통계로 다시 확인했을 때 여전히 놀랍습니다. 1대 99도 미화된 겁니다. 0.1대 99.9의 사회라고 봐야 하죠. 바우만도 초반에 통계를 인용하고 있지만, 세계 최고 부자 1000명의 부를 합하면 가난한 25억 명의 재산을 전부 합친 것의 두 배에 달합니다. 인류 역사상 이런 시대가 없었어요. 통상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 하늘 아래 새로운 것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새로운 시대, 새로운 불평등의 단계에 도달했다는 겁니다. 거기에 대한 자각이 우리에게 부족하지 않은가 싶어요.

저는 개인적으로, 통계상의 조작까진 아니더라도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표현 중에, 상위 20퍼센트와 하위 20퍼센트 등의 문구를 떠올렸습니다. 그 문구 속에서 상위 20퍼센트 내의 차이가 지워지는 게 아닌가 싶어요. 내부에서도 엄청난 빈부의 격차가 존재하니까요. 아주 극소수의 과두 재벌과 일반적인 부유층과의 낙차마저도 상당히 커요.

이권우 : 이번에 정부가 증세개편안을 처음 내놨을 때 난리가 났죠. 연봉 5000만 원부터 증세하려 했던가요?

이현우 : 처음엔 3450만 원부터였어요. 그 정도 소득을 중산층으로 분류하려는 것 같은데 실질적으로는 생계유지에 가까운 층이죠.

김용언 : 방금 말씀하신 상위 20퍼센트 내의 낙차 때문에 생기는 기이한 분위기도 존재합니다. 우리가 보기엔 충분히 많이 번다고 느끼는 사람들조차 <조선일보> 등의 매체를 통해 "먹고 살기 힘들다", "교육비 빼고 나면 남는 게 없다" 등의 발언을 서슴지 않아요. 그 발언을 읽는 '중산층', 즉 3450만 원의 연봉을 받는 이들이 느끼는 박탈감이 예전과는 비할 수 없이 커지는 것 같습니다.

예전엔 집 한 채 있으면 나는 중산층이라고 믿었고. 한국에선 부동산을 통한 인생역전이 가능했기 때문에 언젠가 '위쪽 세계'로 진입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게 다 사라졌어요. 상위 20퍼센트 사람들도 먹고 살기 힘들다고 불평하는 마당에, 자신이 결코 '중산층'이 아니며 99.9퍼센트 저 아래쪽에 속해 있다는 것을, 그 현실과 꿈의 괴리를 이제야 조금씩 알아가는 것 같습니다.

이권우 :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22쪽에 흥미로운 문장이 나옵니다. 바우만이 <설국열차>를 본 걸까요?(웃음) "오늘날 사회적 불평등은 역사상 최초로 영구기관이 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이 시대가 얼마나 강고하게 불평등의 구조를 체제화했는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현우 : 바우만의 첫 번째 문제의식은 유례없는 불평등, 부의 편차이며, 두 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가 어떻게 유지되고 있는가입니다. 바우만은 '거짓 믿음'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유포 때문에 가능하다고 보지요. 우리도 많이 속아 넘어간 이데올로기인데, MB정부 때의 '낙수 효과' 주장이 틀렸다는 걸 지난 5년 동안 배웠잖아요. 기업의 이윤이 늘어나고 부유층의 소득이 늘어나면 자연스럽게 중산층과 서민에게까지 그 효과가 재분배될 것이라 주장했지만, 그 같은 경제학적 이론이나 예측이 통하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게 분명합니다.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49쪽에 보면, 바우만은 "아무런 증거가 없이도 '명백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암묵적 전제들' 네 가지를 제시합니다. 첫 번째는 '경제성장'이 어떤 문제든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이죠. 지금 박근혜 정부도 마찬가지로, 키워드만 창조경제로 바꾼 채 '성장이 우리를 구원하리라'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김용언 : '착한 성장'이라는 말도 나오더군요.(웃음)

이권우 : 암묵적 전제 두 번째가 '영구적으로 늘어나는 소비'입니다. 즉 '소비가 우리를 행복하게 하리라'죠.

이현우 : 세 번째는 "인간들 간의 불평등은 자연적인 것이다", 네 번째가 "경쟁은 사회 질서의 재생산과 사회 정의의 필요충분조건이다"입니다.


 

(...)

 

이현우 : 개인적으로 이 정도 수준의 책은 고등학생들도 읽고 토론하는 단계까지 가야 뭔가 변화의 계기가 마련될 것 강습니다.

이권우 : 결국 낙수 효과가 없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낙수'시킬 수 있을까, 그걸 고민해야겠네요.

이현우 : 비판적인 인식의 낙수 효과, 성장신화의 낙수 효과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의 낙수 효과가 필요하지요.

이권우 : 이런 상황에서 대안적 세력이 시민적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건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명백한 자료, 낙수 효과의 허위에 대한 통계 자료를 보여주어도 시민들을 설득하지 못한다는 건, 우리의 광범위한 대안적 세력들이 게으르거나 설득력이 부족하거나 둘 중 하나겠죠.

이현우 : 부족한 부분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적들의 관리가 뛰어나요. <유행의 시대> 65쪽에 보면 그와 연결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과 다투면 부자들이 신이 나서 손을 비벼댈 이유는 수도 없이 많다." 이 문장 바로 위쪽, 리처드 로티의 <미국 만들기>(임옥희 옮김, 동문선 펴냄)에서 바우만이 인용한 부분을 볼까요.

"프롤레타리아의 정신을 다른 데로 돌리는 게 목표이다. 미국인의 하위 75퍼센트와 전 세계 인구의 하위 95퍼센트가 민족적, 종교적 적개심, 성적인 관습에 관한 논쟁으로 정신을 못 차리게 하는 것이다. 가끔 일어나는 짧은 유혈 전쟁을 포함하여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의사사건(pseudo-events)으로 프롤레타리아의 주의를 자신들의 절망에서 다른 곳으로 돌릴 수만 있다면, 엄청나게 부유한 사람들은 별로 두려울 일이 없을 것이다."

빈부의 차이, 제도 불평등에 대한 인식에 대한 관심으로 옆으로 돌리는 것. 한국 사회의 경우 지역주의가 바로 그런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한국의 과거 기득권층의 최대 발명품이 지역주의라고 봐요. 여전히 여론 시장을 장악해요. 상징적인 게 지역주의 아이콘이었던 분이 지금 대통령 비서실장을 하고 계시잖아요. '우리가 남이가'주의가 여전히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게 우리사회의 불편한 진실 같습니다. 이 역시 가난한 사람들끼리 다투도록 만드는 조작의 일종이죠.

이권우 : 지역주의에 명백하게 덧붙일 다른 요소는 남북간 적대적 공존이지요.

이현우 : 강준만 교수의 표현을 빌려오자면 '내부식민지'가 그런 식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다문화주의'의 아름다운 허상

이권우 :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에서 '소비가 우리를 행복하게 하리라'라는 맹목적인 믿음의 문제점을 지적했던 바우만이, <유행의 시대>에서도 비슷한 관점을 취하는지 살펴볼까요.

이현우 : <유행의 시대> 41쪽에 비슷한 문제의식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아우르는 오늘날의 문화는 사람들이 셔츠를 갈아입거나 양말을 갈아 신는 것만큼이나 자주, 빨리, 능숙하게 자신의 정체성(또는 최소한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모습)을 바꾸는 능력을 습득하도록 요구한다."

당신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다, 무언가를 소비한다면. 이런 식의 소비주의가 말하자면 유동하는 자기 정체성이며, 경제적 논리와 완벽하게 부합하게 됩니다.

이권우 : 경제성장을 촉진하려면 소비가 당연히 이뤄져야 합니다. 둘은 쌍생아 격인데요.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75쪽을 인용하겠습니다.

"행복 추구는 곧 쇼핑이라는 것, 행복은 상점 진열대에서 찾아야 하고 상품 진열대에서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 오늘날 이것은 자명한 공리이다."

그리고 바로 옆 페이지 74쪽을 보면, "그러한 믿음들은 현재의 소비자와 장차 소비자가 될 사람들에게 제공되는 화려한 상품들(행복한 삶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되는 보상들)의 향연에 매일 초대받지만 결국은 매일 같이 배제되고 참석을 거부당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분노와 원한이 생겨나고 쌓이는 것을 막지는 못 한다."

그런데 이 자체의 흐름을 왜 거부하지 못할까요. 자신들이 배제되고 거부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쌓이는 분노와 원한이 왜 지금의 체제를 붕괴시키는 데 기여하지 못할까요.

(...)

 

13. 10. 1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올해 노벨문학상은 캐나다의 여성 작가 앨리스 먼로에게 돌아갔다. 영국의 도박사이트 '래드브록스'에 따르면, 무라카미 하루키가 가장 유력한 후보였고 북미 여성작가들이 그 뒤를 이었는데(조이스 캐롤 오츠가 먼로와 함께 유력한 후보였다), 예측을 벗어나지 않은 결과다. 단편 작가로 '캐나다의 체호프'로 불린다는 게 눈에 띈다. 개인적으론 얼마전에 또 다른 캐나다의 여성 작가 매거릿 애트우드와 함께 앨리스 먼로에 대해 알게 됐는데, 국내에도 애트우드의 책이 훨씬 많이 소개됐지만 이젠 지명도가 바뀔 듯하다. '앨리스 먼러와 마거릿 애트우드'로. 두 여성작가의 번역된 작품을 한데 모아놓는다.

 

올해 110번째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캐나다 작가 앨리스 먼로(82)는 섬세한 관찰력으로 삶의 복잡한 순간과 여성의 섬세한 내면을 포착해 단편이라는 압축된 형식에 담았다. 1968년 첫 단편집 <행복한 그림자의 춤>을 낸 이후 지난해 <디어 라이프>를 발표하기까지 44년간 13권의 단편집을 내놓았다. 장편소설은 <소녀와 여성의 삶>(1971)이 유일하다. ‘캐나다의 체호프’라고 불리는 이유다. 캐나다 작가로는 처음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그는 같은 캐나다 여성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와 함께 영미권 여성 작가 중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꼽혀왔다. 평생 단편을 써온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것도 매우 이례적이다.(경향신문)

19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디어 라이프 (무선)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2월
16,000원 → 14,400원(10%할인) / 마일리지 800원(5% 적립)
양탄자배송
내일 아침 7시 출근전 배송
2013년 10월 24일에 저장

행복한 그림자의 춤
앨리스 먼로 지음, 곽명단 옮김 / 뿔(웅진) / 2010년 5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2013년 10월 10일에 저장
구판절판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앨리스 먼로 지음, 서정은 옮김 / 뿔(웅진) / 2007년 5월
11,000원 → 9,900원(10%할인) / 마일리지 550원(5% 적립)
2013년 10월 10일에 저장
구판절판
떠남
앨리스 먼로 지음, 김명주 옮김 / 따뜻한손 / 2006년 1월
9,500원 → 8,550원(10%할인) / 마일리지 470원(5% 적립)
2013년 10월 10일에 저장
절판


19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이주의 발견'으로 고른 책은 곽은경, 백창화의 <누가 그들의 편에 설 것인가>(남해의봄날, 2013)이다. 국제연대활동가 곽은경의 삶을 다룬 책으로 부제는 '로렌스 곽,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고, '행동하는 멘토' 시리즈의 첫 권으로 나왔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추천사를 빌리면 "곽은경은 대한민국이 배출한 가장 걸출한 국제 활동가이다. 곽은경처럼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활동을 보여준 활동가는 미처 없었다." 그럼에도 놀라운 건 이 활동가의 족적에 관한 뉴스기사가 하나도 없었다는 것. 그래서 말 그대로 책의 발견이자 사람의 발견이다. 어떤 인물이고 어떤 책인가.

 

 

국제사회에서 저명한 이름, 국제연대활동가 곽은경. NGO를 떠올리면 긴급 구호활동 혹은 아프리카의 굶주린 아이들을 돌보는 연예인의 봉사활동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이 전부인 우리에게, 그는 냉엄한 국제사회의 높은 문턱과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잔혹한 세상의 비극을 가감 없이 전달한다. 영어 불어 어느 것 하나 완벽한 의사소통이 불가능했던 그가 스물다섯에 한국을 떠나 전 세계 55개국 대표들의 투표로 국제 NGO 팍스 로마나 세계 사무총장으로 일하기까지 그 치열한 평화의 기록이 지구촌 아픈 역사와 함께 펼쳐진다.

이 책은 한 사람의 25년 삶을 복기하면서 가장 약한 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생존과 인권, 평화를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그들을 돕는 헌신적인 NGO 활동가들의 생생한 사투를 담아낸다. 생리 때면 마을 밖으로 쫓겨나 동굴에 사는 인도의 달리트 여성들, 총성이 끊이지 않는 격변의 현장 남아공. 전 세계 어둠이 드리운 곳을 찾아 목소리 없는 이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일해 온 그들의 삶은 우리가 외면한 지구촌 슬픈 역사의 기록이다.

이 기록은 백창화 작가와의 공저인데, 출간 과정이 특이하다. "2년 반 동안 파리와 제네바, 인터라켄을 오가며 담아낸 곽은경의 삶 속에는 또 다른 화자가 등장하는데 청년 시절 같은 꿈을 꾸었으나 한국에서 평범한 삶을 걷게 된 오랜 벗, 백창화 작가다."

 

 

 

저자(주인공)의 삶과 활동도 놀랍지만, 그걸 남해의 한 작은 출판사가(이제까지 다섯 권의 책을 낸 남해의봄날은 통영에 있다) 기획해서 책으로 펴낸 것도 놀랍다. 장기불황이라는 출판계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생존법을 제시해주는 듯싶다. 이 또한 발견 거리다...   

 

13. 10. 1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다리던 책 두 권이 다시 나왔다. 가라타니 고진의 <트랜스크리틱>(도서출판b, 2013)과 아마티아 센의 <자유로서의 발전>(갈라파고스, 2013). '오래된 새책'으로 묶어서 반가움을 표한다.

 

 

<세계사의 구조>(도서출판b, 2012)와 함께 '사상가' 고진을 대표하는 책으로서 <트랜스크리틱>은 한길사판(2005)으로 나왔다가 절판됐던 책이다. 이번에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의 하나로 재출간됐는데(이 선집도 현재로선 두어 권 정도를 더 남겨놓고 있다), 저자의 수정을 반영하고 있어서 아주 동일한 책은 아니다. 설명은 이렇다.

세계가 주목하는 가라타니 고진의 주저 정본판. <트랜스크리틱>은 2005년에 이미 우리말로 옮겨져 가라타니의 주저로서 많은 이들에 의해 읽혀져 왔다. 그런데 그것은 2001년판을 원본으로 하되 영어판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수정된 내용들을 일정 부분 반영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독자들은 지금 이 <트랜스크리틱>에서 2005년 번역판과의 상당히 커다란 차이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비평가로서가 아닌 사상가로서의 가라타니 고진이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독창적인 이론적 체계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니는 저술이지만, 그 영향작용사와 관련해서도 이 책은 처음 출간되자마자 세계적인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사실 '세계가 주목하는' 사상가인지는 의문이지만(영어로 번역된 고진의 책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 아직 <세계사의 구조>도 번역되지 않았다) 나는 그게 고진에 대한 과소평가라고 본다(지젝은 이러한 과소평가에서 예외이다. <트랜스크리틱>에 대한 본격적인 서평을 '시차적 관점'이란 제목으로 쓴 바 있기에. <시차적 관점>의 원래 발상은 고진의 것이다. 고진이 칸트에게 쓴 말을 지젝은 라캉에게 적용한다). '고진과 함께'라는 건 따라서 (적어도 서구의 독자가 가질 수 없는) 우리의 유리한 조건이다. 고진이 말하는 트랜스크리틱이란 무엇인가.

내가 트랜스크리틱이라고 부르는 것은 윤리성과 정치경제학 영역 사이에서의, 즉 칸트적 비판과 맑스적 비판 사이에서의 코드 변환(transcoding), 요컨대 칸트로부터 맑스를 읽고 맑스로부터 칸트를 읽는 시도이다. 내가 이루고자 한 것은 칸트와 맑스에게 공통된 ‘비판(비평)’의 의미를 되찾는 일이다.

예전판이 나왔을 때 여러 번 페이퍼를 써둔 적이 있기에 따로 군말을 덧붙이진 않는다. 다만 여전히 <트랜스크리틱>은 칸트와 맑스를 읽는 가장 강력한 시각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자유로서의 발전>은 인도 출신의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아마티아 센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다. 예전에 세종연구원판(2001)으로 나왔다가 절판된 책. 제목은 센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을 압축하고 있다.  

아시아 최초로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경제학의 ‘마더 테레사’, 아마티아 센. 그가 평생에 걸쳐 추구한 웅대한 문제의식의 결정판으로서, 민주주의와 자유의 확장이야말로 진정한 발전의 목표임을 실증적으로 밝혀내고 있다. 센의 문제의식은 역량의 회복을 통해 대다수 사람들의 삶의 질이 향상되는 균형잡힌 성장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특히 센의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발전관은 개발독재에 신음했던 우리에게도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역량'이란 말은 센경제작(센코노믹스)의 핵심 개념인데, 'capability'의 번역이다. '삶의 질'에 관한 공동연구를 마사 누스바움과 진행하면서 제시한 걸로 안다. 최근 번역된 <시적 정의>(궁리, 2013)에서 누스바움도 이 공동연구의 경험에 대해 언급한다. "1986년부터 1993년까지 경제학자 아마르티아 센과 함께 헬싱키에 있는 유엔대학 부설 세계경제개발연구소의 '개발도상국의 삶의 질 평가에 대한 프로젝트' 공동기획자로서" 참여한 경험이다. 두 사람의 공유한 생각은 " 삶의 질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환원적이면서 인간 복잡성에 대한 이해를 결여하고 있는 듯 보이는 표준화된 경제적 패러다임에 대한 비판"(<시적 정의>, 16쪽)으로 모아진다. 개인적으로 '삶의 역량'이나 '자유로서의 발전'이란 개념은 '성장이냐 분배냐'란 이분법에 여전히 갇혀 있는 우리의 사고 지평을 벗어나게 해줄 걸로 기대한다. 공론장의 키워드들이 조만간 대체되길 바란다...

 

13. 10. 0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번주 시사IN(317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마사 누스바움의 <시적 정의>(궁리, 2013)를 '오래 두고 읽는 책'으로 골랐다. 오래전에 구한 원서를 방치해두고 있었는데, 조만간 먼지를 털어봐야겠다. <시적 정의>는 국내에 먼저 소개된 <공부를 넘어 교육으로>(궁리, 2011)과 같이 읽어봐도 좋겠다. '누스바움 스타일'이 어떤 것인지 감을 잡게 해준다.

 

 

 

시사IN(13. 10. 12) 공무원이 문학을 읽어야 하는 이유

 

얼마 전 지방도시에 내려가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러시아문학 고전에 대한 강의를 했다. 통상 그런 연수 프로그램에는 독서의 효용이나 방법에 대한 강의가 포함되곤 하지만, 러시아문학에 대한 강의 요청은 의외였다. <죄와 벌>이나 <안나 카레니나>를 진지하게 읽는 공무원이라고 하면 좀 특이하게 생각하는 게 우리 사회의 통념 아닐까.

 

 

그런 강의의 서두에 인용했더라면 좋았을 책이 마사 누스바움의 <시적 정의>(궁리)다. ‘문학적 상상력과 공적인 삶’이 부제니까 더할 나위 없다. 미국의 저명한 고전학자이자 법철학자인 저자는 ‘공적인 시’가 필요하다는 월트 휘트먼의 말에 공감하며 우리의 공적 삶에 문학적 상상력이 개입할 필요성을 역설한다. 옹호의 근거는 간명하다. 직역하면, “그것이 우리와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는 타인의 좋음에 관심을 갖도록 요청하는 윤리적 태도의 필수적인 요소”라고 보기 때문이다. 거꾸로 그러한 상상력을 함양하지 않는다면 사회정의로 이어지는 필수적인 가교를 잃게 될 거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시카고대학의 로스쿨에서 ‘법과 문학’을 강의한 경험에 토대를 둔 이 책에서 누스바움은 주로 디킨스의 소설 <어려운 시절>을 사례로 활용한다. 흥미롭게도 이 소설에 등장하는 교장선생님 그래드그라인드는 교육자이자 경제학자로서 계산만을 중요시하고 감정과 상상력 따위는 쓸모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보기에 문학은 인간의 복잡한 삶을 ‘도표 형식’으로 나타내려고 애쓰는 정치경제학의 적이다. ‘쓸데없는' 이야기책은 사람들은 공상에 빠뜨리고 비합리적 행동으로 내몰 수 있다. 좁은 의미의 경제적 합리성이란 관점에서 볼 때 문학과 문학적 상상력은 무용하고 위험하다.


하지만 그래드그라인드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누스바움은 이야기책이 공적 합리성 교육에 필수적이라고 본다. 공적 영역이란 무엇인가. 재판관이 판결이 내리고 입법자가 법을 제정하며 행정부에서는 다양한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하는 공간이다. 소설에서는 특이한 인물로 비치는 그래드그라인드식의 공리주의적 관점과 경제적 비용편익 분석이 이 공적 영역에서는 오히려 표준화돼 있다. 국책사업 대부분이 점수화된 사업타당성 조사를 통해 결정되는 게 우리의 현실 아닌가. 문학이 이런 영역에서 과연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핵심은 그래그라인드식 시각이 제대로 보지 못하는 걸 보게 해준다는 데 있다. 공리주의적 계산과 경제학적 사유는 인간 존재의 개별성과 내면적 깊이, 그리고 희망, 사랑, 두려움 따위를 보지 못한다. 의미 있는 삶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다. 반면에 문학, 특히 소설은 하나의 이야기를 통해 독자로 하여금 등장인물과 관계를 맺게 하고, 그들의 계획과 희망, 공포를 공유하면서 삶의 복잡한 일들을 풀고자 하는 그들의 노력에 동참하게끔 한다. 그래그그라인드의 관점에서 볼 때 소설이 ‘형편없는 경제학’이라면, 소설의 관점에서 볼 때 그래드그라인드식의 경제학은 ‘형편없는 소설’이다.


소설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내가 속한 사회적 계급의 구성원만이 아닌 다른 동등한 인간 존재를 인식할 수 있게 해주며, 노동자들도 복잡한 사랑의 감정과 소망 그리고 풍부한 내적 세계를 가진 사려 깊은 존재들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놓치는 과학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정교하다 하더라도 대단히 미흡하며 부적절한 과학일 수밖에 없다. 숫자와 도표로 채워진 보고서만 읽고 판단하는 대신에 소설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 소설을 읽는 공무원들을 응원한다.

 

13. 10. 09.

 

P.S.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공무원뿐만 아니라 학생들도 소설을 읽어야 한다. 되도록 '저명한 작가의 문학작품'이면 더 좋겠다. 최근 뉴스기사에 따르면 문학 독서는 타인에 대한 공감과 이해력을 높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데이트나 입사 면접에 가기 전에 뭘 하는 게 좋을까. 체호프나 도스토옙스키 같은 작가의 문학작품을 읽는 것이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과학저널 <사이언스> 최신호에는 어떤 글을 읽는 것이 공감과 사회적 지각 능력, 감성지능을 발달시키는 데 좋은지에 대한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실렸다. 미국 뉴욕 뉴스쿨의 심리학자들인 에마누엘레 카스타노 박사와 데이비드 키드 연구원은 18~75살의 독자들을 세 그룹으로 나눠 각각 저명한 작가의 문학작품, 베스트셀러에 오른 대중소설, 그리고 진지한 논픽션의 일부를 읽게 했다. 그러고 나서 다른 사람의 얼굴 표정을 담은 사진을 보고 이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감정을 표출하고 있는지 등을 구별해내는 5개 테스트를 받도록 했다. 실험 결과 문학작품을 읽은 그룹의 점수가 다른 두 그룹에 견줘 압도적으로 높았다. 대중소설을 읽게 한 그룹은 아무것도 읽지 않은 사람들과 비슷한 점수를 기록했다. 대중소설은 주로 사람들의 이기심이나 욕망을 다루는데다 작가가 흥미로움을 더하려고 작품의 전개 과정을 특정 방향으로 통제하고 있어 독자들을 수동적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기 때문으로 분석됐다. 반면에 등장인물의 삶에 대해 섬세하고 길게 탐구하는 문학작품을 읽은 독자들은 해당 인물의 처지에 서서 생각하게 돼 타인에 대한 공감과 이해력이 높아진다고 연구진은 설명했다.(한겨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