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중앙선데이에 실은 '로쟈의 문학을 낳은 문학'을 옮겨놓는다. 보르헤스의 단편 '페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를 조명하는 글이다. 당연히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없었다면 쓰이지 못했을 작품. 그렇지만 보르헤스는 또 보르헤스식의 기상천외한 단편을 썼다. 문학 독자들에게는 널리 알려진 작품이지만, 생소한 독자들도 있을 듯하여 이 연재에서 다뤘다.

 

 

 

중앙선데이(14. 04. 20) 다시 쓰기는 베끼기인가 창조인가

 

보르헤스의 미학이 가장 압축적으로 제시된 작품은 『픽션들』에 수록된 단편소설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1939)다. 『돈키호테』의 저자는 세르반테스 아니냐고? 물론이다. 하지만 보르헤스는 또 다른 저자를 우리에게 소개한다. 그가 우리에게 안내하는 이야기의 미궁은 어떤 것인가. ‘메나르의 진정한 친구들’의 일원임을 자임하는 소설의 화자는 메나르가 남긴 작품들의 목록을 정리하면서 유작들 가운데 특별히 『돈키호테』를 자세히 언급한다.

화자가 ‘우리 시대에서 가장 의미 있는 작품’이라고 칭찬하고 있는 메나르의 『돈키호테』는 세르반테스가 쓴 『돈키호테』의 “1권 9장과 38장, 그리고 22장 일부”로 구성돼 있다. 세르반테스의 걸작에 대한 ‘다시 쓰기’를 시도한 것인가? 놀랍게도 메나르의 기획은 현대판 『돈키호테』를 쓰는 게 아니라(“그것은 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돈키호테』자체를 쓰는 것이었다.

가령 『돈키호테』 9장에서 세르반테스는 “역사는 ‘진실’의 어머니이자 시간의 적이며, 행위들의 창고이자 과거의 증인이며, 현재에 대한 표본이자 조언자이고, 미래에 대한 상담자다”라고 썼다. 보르헤스의 화자에 따르면 이것은 17세기 작가가 쓴, 역사에 대한 단순한 수사적 찬양에 불과하다. 이것을 메나르는 “역사는 ‘진실’의 어머니이자 시간의 적이며, 행위들의 창고이자 과거의 증인이며, 현재에 대한 표본이자 조언자이고, 미래에 대한 상담자다”라고 다시 쓴다. 똑같은 거 아니냐고? 맞다, 똑같다. 그런데 다르다.

텍스트 차원에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와 메나르의 『돈키호테』 사이에는 아무 차이도 없지만, 그것을 쓰는 행위에서는 두 작품 간에 차이를 빚어낸다. 문체를 예로 들자면, 자기 시대의 스페인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했던 세르반테스와 달리 20세기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메나르에게 17세기 스페인어 문장은 고어체인 데다 다소 부자연스럽기까지 하다. 결과적으로 동일한 텍스트라 하더라도 그 텍스트를 읽는 지평이 달라짐에 따라 작품에 대한 평가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메나르는 자신의 ‘자상한 선구자’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를 쓴 것은 ‘우연’이라고 생각한다. 세르반테스는 익숙한 언어와 타성적인 상상에 이끌려 약간 마구잡이로 그 불멸의 작품을 써 내려갔다는 것이다. 하지만 메나르 자신은 이 우발적인 작품을 문자 그대로 다시 쓰는 ‘신비로운 의무’를 수행했다. 그렇게 새롭게 쓰인 『돈키호테』에 대해 ‘명민하지 못한’ 독자들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글자 그대로 옮겨졌다’라고 우길 테지만, 화자의 생각은 다르다. “피에르 메나르의 작품은 세르반테스의 작품보다 거의 무한할 정도로 풍요롭다. 그를 비방하는 사람들은 더 ‘모호’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모호성은 풍요로움이다.”

 



이렇게 보르헤스는 피에르 메나르라는 가상의 인물을 『돈키호테』의 또 다른 저자로 창조해 낸다. 이것은 보르헤스의 창작 방법에 친숙한 독자라면 전형적인 ‘수작’임을 눈치챌 수 있다. 존재하지 않는 작가와 소설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논평하는 것이 보르헤스의 장기이니 말이다. “메나르는 (아마 자기도 모르게) 새로운 기법-계획적인 시대착오와 잘못된 원저자 설정-을 통해 꼼꼼하게 흔적을 남기는 기술인 독서를 풍요롭게 만들었다.” 저자는 마치 신처럼 작품의 모든 것을 주관하는 유일무이한 존재라고 간주돼 왔지만, 정작 작품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독서라면 저자는 한갓 기능으로 전락한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 없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구호는 그렇게 해서 탄생한다. 그리고 보르헤스는 그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로 평가된다.

그런데 ‘다시 쓰기’ 전략을 통해 저자와 텍스트의 관계를 유희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는 세르반테스야말로 원조가 아닐까?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를 자신이 직접 지은 것이 아니라 아라비아의 역사학자 베닝헬리가 쓴 글을 각색한 작품이라고 했다. “이 텍스트의 진실성 여부에 대해 굳이 문제를 삼자면 아마도 작가가 아라비아 사람이라는 게 문제일 것이다. 아라비아인들은 천성적으로 거짓말을 잘하기 때문이다. (…) 이 이야기에서 유익한 것이 빠져 있다면 주제의 문제가 아니라 알량한 작자에 의해 기술된 탓이라고 생각한다.” 베닝헬리는 물론 세르반테스가 창조한 가공의 인물이다. 화자에 따르면 베닝헬리의 ‘원작’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아라비아어 원문을 스페인어로 옮긴 무명의 번역자도 중간에 끼게 되기에 이 작품의 ‘저자’는 여럿이 된다.

보르헤스는 비록 세르반테스처럼 방대한 분량의 장편소설을 쓸 생각은 전혀 갖고 있지 않았지만 그의 문학적 유희 정신을 충실히 계승한 상속자다. 그는 유명한 자전적 산문의 제목을 ‘보르헤스와 나’라고 붙였는데, 세르반테스 역시 ‘세르반테스와 나’라는 글을 남겼다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겠다. 세르반테스야말로 작가로서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그런 가면을 쓰고서 연기할 줄 아는 작가였기 때문이다.

 

14. 0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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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숨만 나오는 뉴스들을 듣다가 스트레스 지수만 높아졌다. 독서에 집중하기도 어려워서 책상 정리를 한바탕 하고 페이퍼를 적는다. '이주의 저자'를 고른다. 국외 저자로만 골랐는데, 에릭 오르세나를 제외하면 단골로 다루게 되는 저자들이다.

 

 

먼저 스티븐 제이 굴드. '자연학 에세이' 시리즈의 3권이 출간됐다. <힘내라 브론토사우루스>(현암사, 2014). "이 책에 실린 에세이들은 굴드의 끝없는 지식욕의 다채로움을 보여준다. 그는 홈그라운드인 과학과 과학사의 경계를 넘어 철학, 신학, 종교, 야구, 미술, 소설, 광고, 영화, 학생들의 은어, 심지어 자신의 병까지 온갖 이야깃거리를 동원해 지적 곡예를 벌인다. 그가 인용한 마크 트웨인의 “내 부고는 대단히 과장된 것이다”(689쪽)라는 농담처럼 굴드의 희대의 낙천적 지식은 독자에게 독서의 묘미와 기쁨을 전한다."

 

 

 

<여덟 마리 새끼 돼지>부터 <플라밍고의 미소>, <힘내라 브론토사우루스>까지 꽤 보기 좋은 '컬렉션'이다. 몇 권 더 남은 굴드의 책이 마저 소개될지는 모르겠지만, 산뜻한 지적 포만감을 제공한다. 하던 대로 이번에도 원서를 주문해야겠다(한국어판의 표지가 더 낫군).  

 

 

 

그리고 두번째는 직함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헷갈리는 프랑스의 지성 에릭 오르세나. 소설과 논픽션을 오고 가는데, 이번에 나온 건 '인류가 만든 가장 위대한 발명품 종이의 탄생과 발전의 역사를 심도 있게 추적한 일생일대의 역작'으로 소개되는 <종이가 만든 길>(작은씨앗, 2014)이다. 소개는 이렇다.

 

에릭 오르세나의 종이 이야기. 종이를 맨 처음 발명한 '사람들'에서 시작해 오랜 세월 동안 중국대륙 안에 머물러 있던 종이가 어떻게 아랍을 거쳐 유럽대륙으로, 더 나아가 전 세계로 퍼져 나갈 수 있었는지 이야기한다. 그리고 AD 8세기에 아랍에 전파된 종이가 대체 어떤 이유에서 그보다 무려 500여 년이나 뒤쳐진 AD 13세기나 되어서야 비로소 유럽에 전해지게 되었는지 그 놀랄 만한 정치적.사회적 배경과 맥락을 놓치지 않고 명확히 짚고 넘어간다. 그 밖에도 인간의 영원한 적인 박테리아를 제거할 수 있는 바이러스를 종이 속에 영원히 고정시키는 기술, 전자출판에 관한 고찰, 종이를 위한 위생이나 온도와 관련된 최신 기술과 같은 특별하고도 유용한 지식을 담아 전수한다. 또한 마르셀 프루스트와 루이 파스퇴르 등의 세계적인 문학가 및 과학자에게 생명과도 같은 존재였던 그들의 '원고'를 둘러싼 재미있는 이야기들, 괴도 루팡이나 셜록 홈스 시리즈보다 더 흥미진진하고 드라마틱한 프랑스 '위조지폐 제조왕' 보자르스키의 이야기도 들려준다.

책이 아닌 종이의 역사를 더듬어간다고 할까. <물의 미래>나 <코튼로드>와 같은 계열의 책으로 읽을 수 있겠다(<코튼로드>는 절판됐다).

 

 

 

말이 나온 김에 오르세나의 소설들에 대해서도. 책들을 모아두기만 하고 아직 펼쳐보진 못했는데, 재작년에 나온 <오래오래>(열린책들, 2012)를 비롯해서 <문법은 아름다운 노래>(미디어2.0, 2006), <두 해 여름>(열린책들, 2004) 등이 소개돼 있다. <두 해 여름>은 번역과 번역가에 관한 소설로도 흥미를 끄는데, "한 번역가가 외딴 섬에서 나보코프가 만년에 쓴 소설 <에이다 또는 아더 Ada or Ardor>를 번역하면서 겪는 소소한 사건들을 그린 이 책은 작가가 젊은 시절 체험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리고 끝으로 감정사회학자 에바 일루즈. 첫번째 책 <낭만적 유토피아 소비하기>(이학사, 2014)에 연이어 최신간 <사랑은 왜 불안한가>(돌베개, 2014)도 번역돼 나왔다. '하드 코어 로맨스와 에로티시즘의 사회학'이 부제. 전작 "<사랑은 왜 아픈가>로 한 번쯤 사랑의 고통에 몸살을 앓아본 사람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은 저자는 이번에는 '사랑의 심리학'을 넘어서는 '사랑의 사회학' 연구를 이어나간다. 이번에 일루즈가 분석대상으로 삼은 분야는 ‘하드코어 로맨스’, 그중에서도 사도마조히즘이다." 

 

 

 

'하드코어 로맨스'라고 하면 뭔가 싶겠지만, 영국 등지에서 '주부를 위한 포르노'로 화제를 모았던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시리즈를 가리킨다(박스세트로 전6권이군). 일루즈는 이렇게 말한다. "‘그레이 시리즈’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오늘날 남성과 여성의 성관계를 특징짓는 숱한 난제가 무엇인지 명확히 드러냈으며, 주인공들의 사도마조히즘적 관계가 이 난제의 상징적 해결책인 동시에 극복 방법이기도 하다는 점을 제시했다는 것이, 내가 펼치는 주장의 골자다. 그러나 다시금 좀 더 정확히 물어보자. 소설이 그 시대의 신경줄을 건드리려면 과연 어떤 요구조건을 채워줘야 할까?" 책에 대한 서동진 교수의 추천사가 명쾌하다.

에바 일루즈가 다시 돌아왔다. 감정사회학의 달인답게 그녀는 E. L. 제임스의 메가 베스트셀러이자 19금 사도마조히즘 로맨스인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솜씨 좋게 요리한다. 사도마조히즘적인 관계 그리고 진정한 사랑. 두 항은 절대 양립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리고 우리는 자율성과 평등이라는 요구가 불러일으키는 현기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일루즈는 이 난관을 넘어설 해법으로 사도마조히즘적인 섹스가 자리잡는 과정을 추적한다. 후기 근대적인 세계에서의 사랑, 그것의 역설을 그녀보다 더 명쾌하게 풀이하는 이도 없을 것이다.

    

 

원서의 표지는 자세히 보지 않으면 점잖아 보이는데, 거울과 수갑이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시리즈의 독자나 감정사회학에 관심 있는 사회학도들은 필독해봐야겠다...

 

14. 0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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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출판문화진흥원에서 펴내는 월간 책&(426호)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로쟈의 주제별 도서 소개' 꼭지가 '인문학 서재'로 바뀌었고, 이달의 주제로는 '한국문화 바라보기'를 골랐다. 세 권의 관련서를 간단히 소개한다(덧붙이자면, 한국식 재난대응 문화를 다룬 책도 나옴직하다. 이렇게 주먹구구식인 것도 '문화'라면 말이다).

 

 

 

책&(14년 4월호) 한국인이 한국문화를 모른다?

 

한국인이 한국문화를 모른다? 물론 그렇게 등잔 밑이 어두운 이유는 여럿 있을 것이다. 친숙하기에 그냥 지나치거나 막연히 잘 안다고 생각하는 자신감이 주의를 소홀하게 만든다. 거기에다 습관적인 망각도 우리의 무지에 일조한다. <우리도 몰랐던 우리 문화>(인물과사상사, 2014)를 계기로 우리가 놓치거나 간과한 우리문화의 이모저모에 대해서 일러주는 몇 권의 책을 책장에서 빼내보았다. 


먼저, <우리도 몰랐던 우리 문화>는 ‘화장실의 역사’부터 ‘립스틱의 역사’까지 아홉 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얼핏 사소해 보이는 주제들이지만 우리 근‧현대 문화사 속의 일상을 들여다보게 해주는 매력이 있다. 일례로 화장실을 보자. 전통적인 뒷간 혹은 변소가 사회적 이슈로 등장한 건 1920년대였다고 한다. 일제가 조선의 화장실을 개혁 대상으로 꼽았기 때문이다. 위생을 명목으로 재래식 화장실을 개량하고 요강을 폐지해야 한다고 했다. 물론 단기간에 개량될 일은 아니었다.


해방 이후에도 서울역 공용변소의 분뇨와 악취 문제가 단골기사로 등장할 만큼 화장실 문제는 오랜 골칫거리였다. 그러다 1950년대 말 아파트가 등장하면서 화장실문화도 큰 전환점을 맞이한다. 수세식 화장실이 등장하면서부터다. 하지만 수세식 화장실은 아직 일반 대중이 넘겨다보기 어려운 호사였고 공중화장실 문화는 여전히 낙후돼 있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유치를 계기로 1980년대에 ‘화장실 혁명’이 일어난다. 정부의 지원과 압력 하에 전국의 재래식 화장실이 수세식으로 개량된다. 불과 한 세대 전의 일인데, 한국의 도시화와 공업화 과정에서 가장 괄목할 만한 진전이 도시 가정 내의 화장실 보급이라고 말해질 정도로 급속한 변화가 이 시기에 이루어진다.


‘한국 문화 교육 전문인’을 자처하는 정수현‧정경조의 <손맛으로 보는 한국인의 문화>(삼인, 2014)는 한국인의 의식주에 관련한 다양한 소재를 한국과 동서양 여러 나라의 문화와 비교하는 관점에서 기술한 책이다. “한국인의 생활상을 흥미롭게 전달해주는 이야기이자, 한국과 한국인이 정체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유익한 길잡이가 되기를 바란다”고 적었는데, 특히 한국 식생활에 대한 비교서술은 이러한 길잡이로서 맞춤하다. 가령 ‘김치 vs. 샐러드’나 국 vs. 수프’ 같은 대비는 우리 식생활 문화의 특징을 단번에 압축한다.


가령 국물을 영어로는 주로 ‘수프(soup)’라고 옮기지만 우리가 아는 대로 국과 수프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음식이다. 국(혹은 탕)은 그 자체가 주 메뉴이지만 수프는 메인 요리가 나오기 전에 제공되는 부수적 음식이다. 조선시대 이후 문헌에 나오는 음식 종류에 구이류가 123가지인데 비해 국류는 204가지나 될 정도로 한국 음식엔 국이 많다. 왜 이렇게 국을 많이 먹을까. 몇 가지 설이 있는데, 첫째는 주식인 밥이 빡빡하지 않게 잘 넘어가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고, 둘째는 가난한 하층민이 국으로 배를 채움으로써 적은 밥으로도 포만감을 얻기 위해서라는 것이며, 셋째는 온돌이 발달한 나라에서 온돌에서 남는 열을 이용하다 보니 국물 음식이 발달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국은 문화적으로 단순한 먹을거리 이상의 의미도 함축한다. 국은 밥, 반찬과 함께 먹는 음식이기에 ‘관계론적 음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 반면에 식전 에피타이저와 메인 요리, 식후 디저트를 각각 따로 먹는 서양음식은 ‘개체론적 음식’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국물 음식의 특징은 혼자 먹는 것이 아니라 여럿이 나눠먹는다는 데 있고, 이것은 집단의 동질성을 좀더 중요시하는 문화에 상응한다. 우리 식탁에서 국물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 현실이 많은 것을 의미하게 되는 이유다.


한국 근대 문학‧문화 연구자인 권창규의 <상품의 시대>(민음사, 2014)는 출세, 교양, 건강, 섹스, 애국 등 다섯 가지 키워드를 통해서 한국 소비사회의 기원을 들여다본 책이다. 처음으로 상품이 유입돼 소비문화가 형성되던 일제 식민지 시기를 그 기원으로 본다. 저자는 주로 신문이나 잡지 기사와 광고 전단지를 자료로 활용하면서 한국인이 소비자와 교양인으로 탄생하는 과정을 추적한다. 일례로, 처음 만난 이성 남녀가 서로의 취미를 물어보는 것도 한국식 문화라면 그 기원은 1920년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 1920년대 중반부터야 취미나 취향이라는 말이 많이 쓰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다양한 스포츠는 ‘취미 위생’에 속했고, 영화나 연극에 대한 취미는 ‘연예 취미’로 불렸으며, 문학에 대한 관심은 ‘문예 취미’로 일컬어졌다.


문화인 혹은 교양인이란 ‘취미가 있는 사람’과 동의어였기에 취미에 대한 질문은 수준에 대한 질문이기도 했다. “취미는 독서입니다”는 말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그리고 교양 있는 가정이라면 음악 감상을 권유받았기에 1930년대에 보급된 유성기나 1960년대 초의 전축은 중산층 가정의 지표였다. 1930년대 한 일본축음기의 광고 문구에는 축음기가 ‘가정 단란’과 ‘웃음꽃이 핀 가정’을 선물한다고 했다. 상품은 바뀌고 문구는 조금 달라졌지만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소비문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의 일상은 그렇게 만들어져왔다.

 

14. 0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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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하게는 <이방인> 번역 시비부터 중차대하게는 세월호 참사까지 뒤숭숭한 한 주였고 난감하고 난해한 한 주였다. 아직 진행중이긴 하나 어떻게 이런 일들이 벌어질 수 있는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내가 겨우 떠올릴 수 있는 말은 러시아 작가 고골의 작품세계를 가리키는 '고골레스크'다. 참으로 고골레스크한 나라에서 산다는 느낌이 든다(차이라면 우리에겐 '우리 시대의 고골'이 없다는 것). '이주의 책'은 그런 느낌에 짓눌리며 고른다.

 

 

타이틀북은 <밀양을 살다>(오월의봄, 2014)다. 밀양구술프로젝트팀이 밀양 송전탑 건설에 반대하는 주민 17명의 구술기록을 모은 것인데, '밀양이 전하는 열다섯 편의 아리랑'이 부제. 소개에 따르면, "왜 송전탑을 받아들일 수 없는지, 송전탑으로 인해 마을이 어떤 회복 불가능한 상처를 입었으며, 삶의 터전이 어떻게 짓밟히는지를 주민들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이야기했다. 돈과 힘을 앞세운 한전과 정부에 대한 분노, 돈 앞에서 쉽게 무너지는 이들을 향한 배신감, 거대한 공권력 앞에서 느낄 수밖에 없는 무력감을 토로했다.(...) 이 책은 밀양에서 살고 있는, 그리고 밀양에서 계속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에 대한 아주 편파적인 기록이다."

 

두번째 책은 CBS 정혜윤 피디의 르포르타주 에세이 <그의 슬픔과 기쁨>(후마니타스, 2014). "쌍용자동차 선도투 중 스물여섯 명의 구술을 바탕으로 집필되었다." 주로 독서 에세이를 펴내온 저자로선 새로운 시도라고 할 수 있는데, "‘책’을 매개로 하지 않은 최초의 본격적 시도이자, ‘르포르타주 에세이’라는 장르를 통해 인간의 문제에 천착하고 있는" 점이 눈길을 끈다. 쌍용차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독자뿐 아니라 졍혜윤 피디의 독자들에게도 의미 있는 책이 될 듯싶다.

 

 

세번째 책부터는 방향을 좀 틀어서 역사책을 고른다. 신명호의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역사의아침, 2014). '무엇이 조선과 일본의 운명을 결정했나'가 부제다. 제목과 부제가 내용을 짐작하게 해준다. "이 책은 을사조약이 체결된 1905년을 기점으로 하여, 고종과 메이지가 통치하던 무렵의 조일(한일) 관계와 동북아 역사를 심층적으로 분석한다. 이를 위해 저자는 현존하는 사료의 분석과 인용을 통해, 조선과 일본 두 나라 앞에 산적한 수많은 문제와 그들이 직면한 다양한 사건을 살펴본다. 동시에 고종과 메이지를 포함하여 두 나라의 정국을 주도한 인물들이 그러한 사건과 문제를 어떻게 인식했으며 또한 해결을 위해 어떤 노력을 경주했는지 등을 세밀히 관찰한다." 두달 전에 나온 책이지만 일본 학자 쓰키아시 다쓰히코의 <조선의 개화사상과 내셔널리즘>(열린책들, 2014)과 같이 읽어봐도 좋겠다.

 

 

네번째 책은 미국의 일본사학자 미리엄 실버버그의 <에로틱 그로테스크 넌센스>(현실문화, 2014). 사실 '그로테스크 넌센스'는 지금의 우리를 가리키는 키워드로도 손색이 없다(바로 '고골레스크'다!). 근대 일본의 대중문화에 대한 연구서.

간토 대지진과 진주만 공습 사이, 이념대립과 호전적 기운으로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일본의 대중들은 정말 현실을 외면한 채 퇴폐적 눈요기와 감각적 쾌락, 엽기적이고 말도 안 되는 우스꽝스러운 것만을 찾는 삶을 살았을까? 근대화의 물결과 국가 이데올로기, 팽창주의의 압력과 제국의 검열 아래서 대중문화는 어떻게 조응했을까? 캘리포니아 대학교 역사학 교수였으며 여성연구소 소장직을 맡기도 한 미리엄 실버버그의 책으로, 당대의 신문과 잡지, 영화와 공연을 통해 일본의 '모던 타임스'의 면면을 마주하고 당시의 대중문화가 퍼트린 욕망과 충동, 긴장과 에너지를 확인해 볼 수 있다.   

그야말로 타산지석이 될 만한 사례가 아닐까. 한국판 <에로틱 그로테스크 넌센스>도 충분히 쓰여질 만하다.  

 

 

끝으로 다섯번째 책은 개정판으로 나온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북한 현대사>(웅진지식하우스, 2014). 10년 전에 나온 초판보다 분량이 90쪽 가량 늘어났기에 '증보판'이기도 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건국과 주체사상 등 북한 현대사의 시작부터 고난의 행군, 개성공단 건립과 금강산 관광, 김정은 집권에 이르는 북한의 최신 동향까지를 알기 쉽게 정리했다. 300여 컷이 넘는 사진과 그림 자료, 흥미로운 읽을거리들은 북한의 어제와 오늘을 풍부하고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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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을 살다- 밀양이 전하는 열다섯 편의 아리랑
밀양구술프로젝트 지음 / 오월의봄 / 2014년 4월
16,000원 → 14,400원(10%할인) / 마일리지 8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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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4월 18일에 저장

그의 슬픔과 기쁨
정혜윤 지음 / 후마니타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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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주문하면 "내일 수령" 가능
2014년 04월 18일에 저장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무엇이 조선과 일본의 운명을 결정했나
신명호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4년 4월
20,000원 → 18,000원(10%할인) / 마일리지 1,000원(5% 적립)
2014년 04월 18일에 저장
품절
에로틱 그로테스크 넌센스- 근대 일본의 대중문화
미리엄 실버버그 지음, 강진석 외 옮김 / 현실문화 / 2014년 4월
30,000원 → 27,000원(10%할인) / 마일리지 1,50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내일 수령"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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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발견'을 적는다. 조너선 하이트의 <바른 마음>(웅진지식하우스, 2014). 부제가 '나의 옳음과 그들의 옳음은 왜 다른가'이다. 국내 처음 소개되는 저자라고 생각했지만 <도덕적 판단에 관한 사회적 직관주의 모델>(서현사, 2003)이란 얇은 책이 오래전에 나왔었고 예상과 다르게 아직 절판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거의 존재감이 없던 책이라 '이주의 발견'으로 꼽아도 무방해보인다. 어떤 책인가.  

 

뉴욕대학 스턴 경영대학원 교수이자 현재 영미권의 가장 ‘핫’한 사회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는 이 책 <바른 마음>을 통해 인간의 사고와 행동의 근원에 놓인 ‘바른 마음’을 발견한다. 그동안 윤리와 정의를 다룬 책들이 도덕적 딜레마의 상황에 “왜 그렇게 하면 안 되는가”에 초점을 맞췄다면 하이트는 직접 인간의 행동을 관찰하고 “우리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는가”에 대한 그 이유를 밝혔다. 그가 굳이 ‘바른 마음’이라는 개념을 제시한 것은, 이 도덕이라는 감정이 가지고 있는 권력으로서의 힘과 개인의 잠재력에 대한 측면을 새롭게 부각하기 위해서이다. 도덕은 사고와 판단의 영역이 아니라 감정과 신체적인 영역에서 더 중요하게 작용하며, 또한 집단적인 힘과 리더십의 문제, 개인의 행복이나 취향의 차원에서도 어떤 신념이나 이념보다 강력하다고 그는 역설한다.

윤리학자가 아닌 사회심리학자가 밝힌 '바른 마음'의 메커니즘이라고 하니 구미가 당긴다. 사회생물학 에드워드 윌슨도 추천사에서 "이 책은 사회심리학, 정치 분석, 도덕적 추론의 내용을 놀랍고도 독창적인 방식으로 종합해내면서, 관련 과학 분야의 최고 성과까지도 잘 반영했다. 거기 더하여, 사회를 존속시켜 나가는 데 필요한 품위와 도덕적 감정을 우리가 본래적으로 발휘할 수 있다는 증거도 함께 제시해주고 있다"고 평했다. 요즘 한 가지 추세이기도 한데, 이 책 역시 TED 강의 화제작에 속한다.

 

 

사회심리학 얘기가 나온 김에 한권 더. 엘리어트 애런슨의 사회심리학 교재 <인간, 사회적 동물>(탐구당, 2014)이 출간됐다. 1996년, 2002년에 이어서 세번째로 나온 것인데, 원서의 제목이 <사회적 동물>이고 무려 11판을 옮긴 것이다. 교재로서 상당히 많이 읽힌다는 걸 알 수 있다. 소개는 이렇다.

사회심리학의 이론들을 현실 사회 속의 예를 들며 설명한다. 따라서 전공자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쉽게 우리 사회의 사건들을 심리학적으로 해석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특히 미국 심리학회의 National Media Award는 심리학 연구 내용을 대중에게 알려주는 데 있어 큰 공헌을 한 저작에 수여하는 상으로서, 본상을 수상한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사회심리학의 연구 내용을 일반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아주 재밌게 쓴 책으로 유명하다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니까 생각나는 건 <보보스>의 저자 데이비드 브룩스의 <소셜 애니멀>(흐름출판, 2011)이다. "관계와 만남을 통해 성장하는 인간의 본성을 밝히며 경험과 학습, 가풍, 주변 사람과 문화, 제도의 중요성을 다룬다. 우리 인간이 어떻게 기능하고 또 어떻게 삶을 이끌어 나가는지 심리학, 사회과학, 신경과학 등 광범위한 학문을 넘나들면서 생생하게 포착해낸다."

 

14. 0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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