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선거 출구조사 결과가 나오고 있는데, 역시나 접전지역은 경합이라고 뜬다. 결과는 더 두고볼 일이지만 서울에서만큼은 좋은 결과가 예견되는 듯싶어 다행스럽다(나는 경기도민이지만). 저녁을 먹기 전 막간에 '이달의 읽을 만한 책'을 골라놓는다. 지난 몇달에 비하면 부지런을 떠는 게 되겠지만 6월에 접어든 지도 며칠 됐다.

 

 

1. 문학예술 

 

정이현 작가가 추천한 책은 <그 길 끝에 다시>(바람, 2014)다. "함정임, 한창훈, 이기호, 손홍규, 백영옥, 김미월, 윤고은 등 21세기 대한민국 문단을 이끌고 있는 대표 작가들이 대한민국 도시를 배경으로 쓴 단편소설 7편을 모은 소설집".

 

내가 고른 예술분야의 책은 이일수의 <옛 그림에도 사람이 살고 있네>(시공아트, 2014)다. <즐겁게 미친 큐레이터>(생각의나무, 2013)의 저자가 쓴 것으로 '조선시대의 문화·예술은 정말 고리타분할까?'란 질문을 던지고, 그렇지 않다는 점을 실증한다. 조선시대 그림에 대한 입문서 격의 책으로 유용하다.

 

 

 

여름은 한국 독자들에게 소설 읽기의 계절이기도 한 만큼 몇 권의 국내소설을 더 얹는 게 무리는 아니겠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창비, 2014), 박형서의 <끄라비>(문학과지성사, 2014), 엄창석의 <빨간 염소들의 거리>(민음사, 2014) 등이 지난 계절에 나온 주목할 만한 소설들이다.

 

 

 

외국소설도 보태자면 줄리언 반스의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다산책방, 2014),  다시 번역돼 나온 노먼 매클린의 <흐르는 강물처럼>(연암서가, 2014), 그리고 로맹 가리의 <밤은 고요하리라>(마음산책, 2014) 등 눈길을 끄는 책들이 적잖다(반스의 책은 죽은 아내를 추억하는 회고록이다). 취향대로 읽어보면 되겠다.

 

 

 

흠, 장르소설 독자들을 위해서도 뭔가 골라두어야 할 것 같다. 가이드북의 하나로 국내 필자들이 쓴 <탐정사전>(프로파간다, 2014)이 나와서이기도 한데(장르소설을 잘 안 읽는 편이어서 이런 책은 욕심이 난다), '앨러리 퀸 컬렉션'의 두 권도 같이 보탠다. 앨러리 퀸도 '역사상 중요한 탐정' 목록에 포함돼 있다.

 

 

 

2. 인문학

 

인문학 분야의 추천도서는 이경수의 <숙종, 강화를 품다>(역사공간, 2014)와 곽철환의 <불교의 모든 것>(행성B잎새, 2014)이다. 불교 길라잡이로는 같은 저자의 <이것이 불교의 핵심이다>(불광출판사, 2014)도 나란히 나왔는데, 둘다 불교 입문서이자 사전으로 참고할 수 있겠다. 

 

 

개인적으로는 트랜스내셔널 인문학 총서로 나온 책들을 이달에 훑어보려고 한다. 흥미로운 주제의 학술대회 발표문을 모은 책들이다.

 

 

 

3. 사회과학 

 

사회과학 분야의 추천도서로는 찰스 몽고메리의 <우리는 도시에서 행복한가>(미디어윌, 2014)와 중국 CCTV다큐 제작팀의 <기업의 시대>(다산북스, 2014)가 올라왔다. 전자는 도시를 주제로 한 책으로 벤자민 <뜨는 도시 지는 국가>(21세기북스, 2014)와 같이 읽어봐도 좋겠다.

 

 

 

경제분야의 책을 좀 보강하면, <경제학 콘서트>의 저자 팀 하포드의 신작 <당신이 경제학자라면>(웅진지식하우스, 2014), 미국의 두 젊은 경제학자가 쓴 <무엇이 행동하게 하는가>(김영사, 2014), 그리고 '전 세계 100억 인류가 만들어낼 위협과 가능성'을 다룬 대니 돌링의 <100억 명>(알키, 2014) 등이 흥미를 끄는 책들이다. 이런 정도는 똑똑한 고등학생들도 읽어볼 만하다. 

 

 

4. 자연과학

 

자연과학 쪽에서는 정부희의 <곤충의 빨간 옷>(상상의숲, 2014)이 추천도서다. <곤충의 밥상>(상상의숲, 2010)부터 시작된 '정부희 곤충기'의 다섯번째 책. 몇 권까지 갈지는 모르겠지만 완간된다면 한국판 파브르 곤충기를 갖게 되지 않을까 싶을 만큼 평들이 좋다. 아, 파브르 곤충기는 10권짜리로 완역돼 있다.

 

 

관찰 대상으로 곤충과 맞먹을 만한 게 별들이 아닐까 싶은데, 과학 내지 천문학 관련서도 몇 권 더 얹는다. 이준호의 <과학이 빛나는 밤에>(추수밭, 2014)는 '천체물리학부터 최신 뇌 과학까지, 우주의 역사부터 과학의 역사까지' 다룬 통합형 과학 입문서. 저자는 과학분야의 인기 팟캐스트 '과학이 빛나는 밤에' 지기라고 한다. 청소년들에게도 권장해볼 만하다. '한국을 대표하는 천문학자 이석영 교수의 인생과 우주 이야기' <초신성의 후예>(사이언스북스, 2014), 국립과천과학관 지기 이강환의 <우주의 끝을 찾아서>(현암사, 2014)도 밤하늘에 대한 상상력을 한껏 키워줄 만한 책들이다. 

 

 

5. 실용일반

 

실용일반의 추천서로 올라온 건 한복희의 동화 가이드북 <독이 되는 동화책 약이 되는 동화책>(을유문화사, 2014)이다. 이젠 동화책을 읽힐 아이가 없어서 글쓰기 관련서를 실용서로 더 고르면 상반기 베스트셀러인 강원국의 <대통령의 글쓰기>(메디치미디어, 2014), 그리고 요즘 '핫'한 <고종석의 문장>(알마, 2014)을 읽어봐도 좋겠다. 남들이 어떤 책을 읽는 것인가 염탐도 할 겸. 글쓰기는 절필했다지만 고종석의 '한국어 글쓰기 강좌'는 성황리에 이어질 것 같은 예감이다.

 

 

 

0. 영화

 

내 맘대로 고르는 주제는 오랜만에 영화로 잡았다. 관련서가 몇 권 눈에 띄기 때문인데, 주성철 '씨네21' 기자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알아야 할 70가지>(소울메이트, 2014)는 일반적인 가이드북이 될 만하고 김호영의 <영화이미지학>(문학동네, 2014)은 영화학의 현단계를 가늠하게 해줄 듯싶다. 덧붙여, 증보판으로 다시 나온 김서영의 <영화로 읽는 정신분석>(은행나무, 2014)은 이론과 비평의 실제에 대한 한 사례로 참고할 만하다.  

 

14. 06. 04.

 

 

 

P.S. '이달의 읽을 만한 고전'으로는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을 고른다. 19세기 영국의 대표 작가의 대표작. "빅토리아 여왕 시대, 영국의 중산계급에 널리 퍼졌던 사회적 욕망을 충실히 반영한 작품이다. 가난에서 벗어나, 일정한 수입이 있으며 적당한 교육을 받은 교양 있는 사람, 즉 신사가 되려는 주인공 핍의 정신적 사회적 성장을 그린다."

 

 

여러 차례 영화화된 작품이기도 한데, 이번 기회에 BBC에서 만든 3부작 버전으로 감상해볼 참이다. 번역본은 민음사판 외에도 최근에 나온 열린책들판을 참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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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시사IN(351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최근에 번역돼 나온 프리모 레비의 마지막 책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돌베개, 2014)를 읽고 적은 것이다.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의 마지막 저작이라는 점에서 충분히 예상할 수 있듯이 마음을 적잖이 무겁게 만드는 책이다. 그럼에도 시선을 돌릴 수 없는 건 그러한 역사가 다시는 반복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경각심 때문이다. 레비의 바람도 그런 것이었다고 믿는다.

 

 

시사IN(14. 06. 07) '생존자' 레비 당신의 유서

 

우리에겐 따로 연상되는 바가 있어서 제목부터 마음을 무겁게 하는 책이 출간됐다. 프리모 레비의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이다.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레비가 1987년 자살하기 한 해 전에 발표한 것이니 그가 남긴 유서라고 해도 무방하다. 1947년 <이것이 인간인가>를 발표한 이래 나치 절멸수용소에서의 경험을 낱낱이 해부하고 성찰해온 그의 증언을 압축하고 있다.

 

애초에 레비는 첫 책의 제목을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라고 붙이려고 했다. 하지만 <이것이 인간인가>의 편집자의 제안에 따라 제목이 바뀌었고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는 한 장의 제목으로만 들어갔다(<이것이 인간인가>에서 ‘익사한 자와 구조된 자’라고 옮겨진 장이다). 레비와 인터뷰한 한 비평가의 표현을 빌면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라는 최초의 제목은 표지 위로 올라오기까지 39년을 기다리게 되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리도 고통스러운 경험의 증언을 40년 동안이나 하게끔 만들었을까. “우리는 우리의 개인적 경험을 넘어 집단적‧근본적으로 중요하고 예기치 못한 사건의 증인”이라는 자각이다. ‘우리’는 물론 나치 수용소의 생존자를 가리킨다. 인류사에서 강제수용소나 대량학살은 적잖이 존재했지만 “나치 수용소의 체계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유일무이한 것”이라는 판단이 거기에는 깔려 있다. 도저히 일어날 수 없고 일어나서도 안 되는 일이 자행됐기에 생존자들의 증언은 믿기지 않을 위험이 있다.

 

심지어 SS(나치 친위대)의 군인들은 이 점을 미리 예견하기까지 했다. 그들은 포로들을 향해 “이 전쟁이 어떤 식으로 끝나든지 간에, 너희와의 전쟁은 우리가 이긴 거야. 너희 중 아무도 살아남아 증언하지 못할 테니까. 혹시 누군가 살아 나간다 하더라도 세상이 그를 믿어주지 않을 걸.”이라고 말하며 즐거워했다고 한다. 레비의 증언은 이러한 냉소에 대한 저항이다. 이와 같은 사건이 또다시 일어날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지속적인 경고이기도 하다. “산발적이고 사적인 일화들에서, 또는 국가가 저지르는 불법의 형태로” 우리 주변에 널려 있는 온갖 폭력들이 그에겐 불길한 전조로 여겨진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 책을 쓴 동기 중에 하나가 아우슈비츠에 대한 극단적인 단순화라고 밝혔다. <이것이 인간인가>를 읽은 독자들이 문제를 박해자(괴물)와 희생자(무구한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진 걸로 생각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수용소의 신입 수감자들에게 먼저 가해졌던 것은 같은 동료라고 생각한 다른 수감자들의 폭력이었다. 수용소에는 0.5리터의 죽을 더 받기 위해, 혹은 얼마간의 생존을 더 보장받기 위해서 포로이면서 하위 관리자로 부역한 포로들이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것이 아우슈비츠의 특수부대(존더코만도스)였다. ‘화장터의 까마귀’라 불린 그들은 대부분 유대인이었고 가스실 희생자들의 뒤처리를 담당했다. 유대인을 가스실로 집어넣고 시체를 빼내는 일도 유대인이 떠맡았던 것이다. 레비가 보기에 특수부대의 조직은 나치의 가장 악마적인 범죄였다. 그것은 자신들의 악행을 희생자들에게 떠넘긴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희생자들은 가스실로 가기 전에 인간적 존엄성은 물론 영혼마저도 파괴됐다.


저항도 없지는 않았다. 작업을 거부한 특수부대원 전체가 독가스에 살해당하기도 했고, 반란을 일으켜 화장터를 폭파하고 SS와 교전을 벌이다 죽임을 당한 사례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러한 저항 대신에 학살과정에 협조한 ‘비참한 학살 실행자들’을 쉽게 단죄할 수 없다고 레비는 말한다. 자살은 동물의 행위가 아니라 인간의 행위이지만, 수용소에서의 삶은 인간 이하의 동물적 삶이었기 때문이다. 레비의 경우도 그렇지만 자살은 생존자로서 인간적 삶을 되찾은 이후에나 가능했다.

 

14. 06.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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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호 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의 칼럼 '한기호의 책통'을 읽다가 <고전은 나의 힘>(창비, 2014) 시리즈를 알게 됐다. 더 이어지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사회, 역사, 철학 읽기, 세 권으로 돼 있다.

 

마침 청소년이 읽어야 할 인문고전 81편의 정수를 모아 사회, 역사, 철학 분야의 세 권으로 구성된 '고전은 나의 힘' 시리즈(창비)가 출간됐다. 고전은 요약본이나 해설서를 읽어서는 원문의 의미를 제대로 맛볼 수 없다. 이 시리즈는 세부 주제를 잘 나눈 다음 그에 적절한 책을 제대로 골라서 소개하고 있었다. 책마다의 핵심을 잘 포착해서 발췌한 글들은 문장을 잘 다음어서인지 쉽게 읽혔다. 각 장에 담긴 글들은 서로의 연결고리가 확실해 고전에 담긴 지혜와 통찰을 이해하기가 좋았다. 한 권 한 권이 수준 높은 교양서인 이 책들은 고전이 어렵고 딱딱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한기호)

성인을 위한 고전 읽기 강의는 많이 하고 있지만(거의 매일!) '청소년을 위한 고전'이라고 하면 뭔가 암담한 느낌부터 든다. 나만의 느낌은 아닐 것이다. 고전 회의론 이전에 독서 회의론까지 드는 게 현실이어서다. 간혹 예외적인 사례들을 접해 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대세적 회의론'이 꺾일 성싶지 않다. 

 

중학교 때부터 헤세나 카뮈 같은 작가들, 스탕달과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작가들을 으레 읽어야 하는 걸로 생각하고 실제로 읽었던 경험에 비추어 요즘 청소년들의 고전에 대한 '해맑은' 무관심은 놀라울 정도다. 하긴 내 세대라 하더라도 모두가 나 같은 고전 독자는 아니었으니 무리한 대조일 수는 있다. 그렇더라도 '고전의 힘'이라는 게 있다면, 그것이 여전히 이 시대에도 유효하다면, 무지와 무관심은 정당화되기 어렵다. 여기까지 합의가 가능하다면, 문제는 어떻게 읽힐 것이냐다. <고전은 나의 힘>이 그 타개책의 하나를 보여줄지 모른다는 기대를 갖는다.

 

 

한편 만화로 보면 쉬울까 싶어서 눈길이 가는 책들도 있는데, <철학이 된 엉뚱한 생각들>(원더박스, 2014)이나 <과학이 된 무모한 도전들>(원더박스, 2014) 같은 시리즈가 그런 경우다. 두 권만 나오고 아직 더 이어지지는 않고 있다. 분량도 얇고 만화로 돼 있긴 하지만, 서양철학사를 개관하고 있기에 내용까지 얄팍한 건 아니다. 오히려 아무리 만화로 설명한다고 해도 '실재' 같은 개념들을 아이들을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 염려될 정도다(심지어 내게도 생소한 철학자들까지 등장한다!).

 

나의 지론은 '길은 여러 가지다'이다. 어떤 경로, 어떤 루트를 통해서건 고전의 매력과 사유의 힘에 도달할 수만 있다면 사다리는 무엇이건 좋다. 부디 고전이 너의 힘이 되기를!..

 

14. 06.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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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중앙선데이에 실은 '로쟈의 문학을 낳은 문학'을 옮겨놓는다. 세계문학사에서의 비중상 아무래도 셰익스피어가 자주 등장할 수밖에 없는데, 이번에는 <맥베스>와 푸슈킨의 <보리스 고두노프>를 비교대상으로 삼았다. 바이런과 함께 젊은 푸슈킨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작가가 셰익스피어였다. 참고로, <보리스 고두노프>는 무소르그스키의 오페라로도 유명한 작품이다.

 

  

 

중앙선데이(14. 06. 01) “권력을 쟁취했지만 내 마음엔 행복이 없구나”

 

셰익스피어의 비극 가운데 가장 짧으면서도 강렬한 작품 『맥베스』는 무엇에 관한 비극일까? 무모한 권력 찬탈자의 비극? 글래미스의 영주였던 맥베스가 마녀들의 예언에 이끌려 덩컨 왕을 시해하고 스코틀랜드의 왕좌에 오른다. 순탄치는 않았다. 맥베스 부인에 따르면 그는 “위대해지고 싶고 야심도 없지는 않지만 그에 따른 사악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운명에 따라 왕이 될 거라면 그렇게 되겠거니 하고 생각하는 게 맥베스의 태도였다. 하지만 일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맥베스가 왕이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 손에 피를 묻혀야 했다. 부인의 매서운 독려가 없었다면 그는 자신의 권력욕을 성취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정작 본격적인 비극은 맥베스가 왕이 된 이후에 시작된다. 애초에 마녀들은 맥베스가 왕이 될 거라고 예언하면서 그와 동행했던 뱅코에게는 아들이 왕이 될 거라고 말했다. 새로운 왕가를 여는 인물은 맥베스가 아니라 뱅코가 될 것이라는 얘기다. 권력을 자신의 후대에게 물려줄 수 없다면, 그 권력은 허망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고작 뱅코의 후손들을 위해 덩컨 왕을 죽인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삶은 안전하지 못하다면 헛것”이라는 맥베스의 대사는 그런 고민을 압축한다.

맥베스는 자객을 보내 뱅코와 그의 아들을 죽이려고 하지만 뱅코만 살해하는 데 성공하고 그 아들은 놓친다. 맥베스의 불안은 극대화되어 연회장에서 뱅코의 유령이 등장하는 환영을 본다. 점점 무기력해져 가는 맥베스는 급기야 자신의 존재감마저 상실하고 만다. “꺼져라, 짧은 촛불! 인생이란 그림자를 걷는 것, 배우처럼 무대에서 한동안 활개치고 안달하다 사라져 버리는 것”이라는 맥베스의 독백은 인간의 보편적 숙명을 뜻하기에 앞서 권력의 의미를 상실한 권력자의 토로로 읽힌다. 그럼에도 작품에서 맥베스의 아들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좀 특이한 설정이다.

 



반면에 푸시킨이 셰익스피어의 사극과 비극을 탐독하고 쓴 희곡 『보리스 고두노프』에서는 권력 승계라는 주제가 좀 더 분명히 드러난다. 고두노프는 표도르 1세 치세 때 누이동생인 황후를 등에 업고 권력의 실세로 행세하다가 표도르가 죽자 귀족들의 추대로 황위에 오른다. 자객을 보내 어린 황태자 디미트리를 미리 제거한 뒤였기에 그의 즉위는 찬탈의 의미도 갖는다.

 

 

황제가 된다면 권력에 대한 욕망은 모두 충족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최고 권력을 쟁취하여 태평세월을 통치한 지 이미 여섯 해째. 그러나 내 마음엔 행복이 없구나. 이건 마치 어린 시절부터 사랑에 빠져 사랑의 즐거움을 그렇게도 열망해 오다가, 순간의 소유로 마음의 갈증을 해소하면 차가워져 지루해하고 괴로워하는 것과 같겠지?” 고두노프의 경우에도 아들 페오도르가 황위를 안전하게 물려받는 것이 가장 중요한 관심사다. 러시아제국의 지도를 그리고 있는 아들의 모습에 대견해하면서 “언젠가, 혹 아마도 가까운 장래에 네가 지금 이 종이 위에 훌륭하게 그려 놓은 모든 땅들이 모두 너의 손 아래 들어오리라”라고 말하는 모습은 아버지이자 권력자인 고두노프의 모습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고두노프의 희망은 실현되지 않는다. 그의 재위 기간에 연이은 기근으로 농민들의 반란이 잦아지고 급기야는 죽은 황태자 디미트리를 참칭하는 가짜 디미트리가 나타나 폴란드 군대를 이끌고 모스크바로 진격해 온다. 불리한 전세 속에서 고두노프는 건강이 악화돼 쓰러지지만, 힘을 다해 어린 아들에게 상세한 유언을 남긴다. “내 아들, 너는 내게 영혼의 구원보다도 더 소중하게 느껴지니… 어쩔 수 없도다!”라는 생각에서다. “오, 사랑하는 아들아, 거짓 아첨에 속지 말며 스스로 눈멀지 마라. 혼란한 시기에 네가 제국을 물려받을 것이니.”

귀족과 장군들에게 아들 페오도르에 대한 충성을 맹세 받고 고두노프는 숨을 거두지만, 그 맹세는 거짓이 되고 만다. 참칭자의 군대가 모스크바에 들이닥치자 귀족들은 반란에 가세해 고두노프의 아내와 아들을 살해하고 공식적으로는 그들이 자살했다고 공표한다. 현장을 지켜보던 백성들이 경악 속에 침묵하자 “황제 디미트리 이바노비치 만세!”를 독려하는 걸로 작품은 마무리된다.

권력 찬탈자의 비극이라는 점에서는 『맥베스』와 맥락을 같이하지만, 『보리스 고두노프』에서 권력자의 비극은 동시에 백성의 비극이기도 하다. 1825년에 완성한 희곡은 백성들이 “황제 디미트리 이바노비치 만세!”를 따라 하는 걸로 끝나는 ‘희극’이었지만, 1831년 출간본은 “백성들, 침묵을 지키고 있다”라는 지문으로 끝나는 ‘비극’으로 바뀐다. 어느 판본에서든 보리스 고두노프의 비극은 변함이 없기에, 『보리스 고두노프』의 장르는 백성들의 반응에 따라 달라진다. 권력 승계의 실패가 권력자의 비극이라면, 백성의 비극은 권력의 기만적인 교체 과정을 침묵 속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데 있다. 셰익스피어는 귀족들의 권력 암투만을 다룬 데 반해, 푸시킨은 권력투쟁을 바라보는 민중의 시각을 중요하게 부각시킨 것이다.

 

14. 06.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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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로는 여름을 몇 시간 남겨놓고 있지만 사실상의 여름 날씨가 이어지고 있는데(물론 한여름의 폭염까지는 아니더라도), '여름맞이' 페이퍼로 미학책 몇 권에 대해 적는다. 이사를 얼마 남겨놓고 있지 않아서 실제 구입은 좀 늦춰질 수 있지만 필수 소장 아이템으로 이미 '눈도장'을 찍어놓은 책들이다.

 

 

먼저 폴란드의 저명한 미학자 타타르키비츠(1886-1980)의 미학사 3부작 가운데 '근대미학'을 다룬 마지막 권 <타타르키비츠 미학사3>(미술문화, 2014)이 출간됨으로써 드디어 완결됐다. 고대미학과 중세미학을 다룬 1, 2권은 지난 2005년과 2006년에 나왔으니 거의 잊고 있던 참이었다. 어떤 책인가(아래는 폴란드어판 원저). 

 

15-17세기 미학의 역사를 다룬 타타르키비츠 미학사 3부작의 완결편이다. 타타르키비츠는 고대·중세·근대라는 세 시기의 미학을 아우르면서 미와 예술에 대해 시대를 넘나드는 귀중한 글을 쓴 것뿐만 아니라, 각 시대의 원전들에서 발췌한 인용문으로써 그것을 예증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는 각 용어의 정착과 변형과정을 살피며 역사 속에서 미학이 어떻게 성립되어왔는지를 밝히고 있다. 그의 글은 역사 속에서 다양한 의미로 변천해온 여러 개념을 보다 명확하게 정리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미학의 역사를 통시적으로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 이 책은 총 9부로 구성되어 15세기부터 17세기까지 유럽 미학의 유의미한 사건과 주요인물, 특징을 서술한다.

방대한 분량의 <타타르키비츠 미학사>를 완역한 역자의 노고에 감사를 표하고 싶다.

 

 

타타르키비츠의 대표작은 <미학의 기본개념사>(미술문화, 1999)인데, <여섯 가지 개념의 역사>(이론과실천, 1990)으로 처음 번역됐던 책이고 원제 또한 그렇다. 찾아보니 <미학의 기본개념사>는 1970년대에, <미학사>는 1960년대에 나온 책이다. 미학 관련서로는 고전급에 해당하겠다. 이론적인 저작으로 이 정도 소개된 저자는 <미학>과 <미학사>가 소개된 루카치 정도이지 않을까.

 

미학 관련서로는 제럴르 레빈슨이 엮은 <미학의 모든 것1>(북코리아, 2013)도 기대를 갖게 하는 시리즈다. 원저는 <옥스포드 미학 핸드북>이다. (눈에 띄는 표지의) 원저가 848족의 방대한 분량이어서 몇 권으로 나뉘어 번역되는 듯싶은데, 1권은 '미학의 기초: 철학적 미학'을 다룬다. 한두 권 더 나올 것 같은데, 조만간 완간되기를 기대한다...

 

14. 0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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