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에 강의를 다녀오면서 한 주의 강의가 마무리됐다. 주말엔 밀린 원고가 잔뜩이지만 한숨 돌리면서 '이주의 저자'를 고른다. 문학이론서와 비평가론, 그리고 시인 평전이다.

 

 

먼저, 이탈리아 출신의 비교문학자이자 영문학자 프랑코 모레티의 책이 오랜만에 나왔다. <공포의 변증법>(새물결, 2014). 부제로 붙은 '경이로움의 징후들'이 원제다. 한때 모레티의 주저들을 긁어모을 때 구했던 책으로 기억에는 모레티의 첫 저작이다. 형식주의와 진화론을 접목하고자 하는 그의 시도가 흥미로웠는데, 번역서가 나온 김에 완독해봐야겠다(물론 책이사가 끝나야지 가능한 일이다). 어떤 발상의 책인가.

셰익스피어의 비극과 <사랑의 학교>, 셜록 홈스와 <율리시즈>, <프랑켄슈타인>과 <황무지>. 세계문학사의 기적들로 불리며 대문문화에서 가장 널리 회자되지만 난해하고 이해 불가능한 ‘명작’으로 낙인찍힌 작품들이다. 모레티는 이 ‘세계문학의 기적들’인 실은 좀 더 넓은 문화적-정치적 현실의 징표임을 흥미진진하게 밝혀낸다. 예를 들어 프랑켄슈타인과 드라큘라를 통해 19세기의 ‘공포의 계보학’을 분석하면서 이 두 괴물이 19세기의 영국 자본주의의 동향과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밝혀내는 모레티의 노련한 솜씨는 발군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 단지 흉측한 괴물에 그치는 반면 드라큘라가 잔혹함과는 거리가 먼 금욕주의적 흡혈귀인 것은 당시 영국 자본주의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드라큘라는 독점 자본과 금융 자본주의에의 적응에 실패한 영국의 자유주의 자본주의의 자기변호론으로 읽어야 한다는 모레티의 선구안은 대중문학이 ‘대중적으로’, 특히 정치적으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에 대해 날카로운 혜안을 제공해준다.

모레티의 다른 책들도 읽거나 다시 읽어볼 만한데, 이번에 보니 <근대의 서사시>(새물결, 2001)은 품절 상태다. 절판이 아니라면 다시 나오길 기대한다.

 

 

더불어 더 소개되면 좋겠다 싶은 모레티의 책들. <부르주아><멀리서 읽기><유럽소설 지도 1800-1900> 등. 나는 모레티가 가장 흥미로운 시각을 제공하는 동시대 문학사회학자라고 생각한다.

 

 

발터 벤야민 선집(전15권)을 번역중인 독문학자 최성만 교수도 벤야민의 생애와 사상을 갈무리한 책을 펴냈다. <발터 벤야민 기억의 정치학>(길, 2014). 현재 벤야민 선집은 여덟 권이 나와 있기에 절반은 넘어선 셈인데, <기억의 정치학>은 그 중간보고서적인 의미도 갖겠다. "발터 벤야민 선집을 총괄 기획하고 국내 벤야민 연구의 최고 전공자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최성만 교수가 벤야민 사상 전반을 전기적 방식이 아닌 저작의 사유 흐름에 초점을 맞춰 서술한 국내 첫 연구 결실이다."

 

 

동시대 '백석파' 시인으로는 맨앞에 설 만한 안도현 시인의 <백석 평전>(다산책방, 2014)이 출간됐다. 시인이 쓴 시인 평전으로는 고은의 <이상 평전>과 최하림의 <김수영 평전> 등이 떠오르는 데 그 계보를 이을 만하다. 백석 평전이 아주 없지는 않지만 기대를 갖는 이유.

당대의 많은 시인들을 매료시켰으며, 해방 이후 후대의 시인들에게도 절대적이고 폭넓은 영향을 끼친 백석의 생애를 담은 <백석 평전>. 스무 살 무렵부터 백석을 짝사랑하고, 백석의 시가 "내가 깃들일 거의 완전한 둥지"였으며 어떻게든 "백석을 베끼고 싶었다"고 고백하는 안도현 시인은 "그동안 백석에게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기 위해", "그를 직접 만나는 방식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백석의 생애를 복원했다.

안도현 시인의 시집 <외롭고 높고 쓸쓸한>(문학동네, 2004)이 백석의 시 '흰 바람벽이 있어'에서 따온 거라는 사실은 한국시 독자라면 상식에 속한다. 평전을 통해서 두 시인의 내밀한 관계도 들여다볼 수 있겠다. 더불어, <백석의 맛>(프로네시스, 2009)의 저자 소래섭 교수의 백석 시 안내서 <백석, 외롭고 높고 쓸쓸한>(우리학교, 2014)도 이번에 출간됐다. 청소년용이긴 하지만, 백석에 과문한 독자라면 이 책부터 손에 들어도 괜찮겠다...

 

14. 06.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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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 관련서가 계속 나오고 있는데(원래 그랬던 것인지도) 미국의 중국학자 토머스 메츠거의 <곤경의 탈피>(민음사, 2014)도 그 가운데 하나다. '주희.왕양명부터 탕쥔이.펑유란까지 신유학과 중국의 정치 문화'가 부제이고 1977년에 나온 책. 상당히 오래 전 책인 셈인데, 현재적 의의까지는 모르겠지만 학문사적 의의는 있는 책으로 보인다.

 

존 페어뱅크의 1세대 제자로 중국 사상과 역사를 깊이 있게 연구했으며 중국어에도 능통했던 메츠거는 이전까지 서구 동양학계를 지배하고 있던 막스 베버의 부정적 견해에 정면으로 맞선다. 주희.왕양명 등의 송대 이후 신유학 저작들을 파고들어, 중국의 역사를 관통하며 중국 근대화를 이끈 추동력이 중국 문화에 내재된 신유학적 도덕의식에 있었음을 밝힌다.

존 페어뱅크는 미국 하버드대학의 교수로 중국사학계의 태두였던 인물이다. 많은 제자들을 길러낸 걸로도 유명한데 토머스 메츠거 역시 그의 문하라는 얘기다. '신유학적 도덕의식'과 '중국 근대화'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는 의문이 없지 않지만 여하튼 어떤 근거에서 그런 주장을 펼치는지는 궁금하다.

 

 

한편 역자인 나성 교수는 서양 중국학계의 고전적인 저작들을 우리말로 옮겼는데, 벤저민 슈워츠의 <중국 고대사상의 세계>(살림, 2004)와 앵거스 찰스 그레이엄의 <도의 논쟁자들>(새물결, 2003)이 대표적이다. '중국 고대 철학논쟁'을 다룬 <도의 논쟁자들>은 절판된 상태. 영국 런던 대학 교수였던 그레이엄의 책으론 그의 박사학위 논문이기도 한 <정명도와 정이천의 철학>(심산, 2011)이 번역돼 있다. 이렇게 소개된다.

<정명도와 정이천의 철학>(원제: Two Chinese Philosophers)은 20세기에 서양의 중국학 연구를 주도하고 중국철학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영국의 런던 대학 교수 앵거스 찰스 그레이엄(1919~1991)의 박사 학위 논문을 기반으로 한 첫 번째 저작이다. 그레이엄은 여타 서양의 동양학 연구자와 달리 중국 사상을 ‘철학’으로 다룬 거의 유일한 학자이다. 그의 연구는 서양과 ‘다른’ 중국적 사유에서 철학적 전망을 발견하는 데 집중되어 있다. <정명도와 정이천의 철학>은 이러한 철학적 전망을 반영하고 있으며 비록 분량은 적지만 넓은 시야와 풍부한 통찰력을 내포하고 있어 송대 신유학 사상에 대한 가장 정교하고도 명쾌한 입문서라고 할 수 있다.

 

14. 0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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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 '독서인'에 실은 '독서카페'를 옮겨놓는다. 한 권에 책을 소재로 한 독서 에세이 연재인데, 이달에 다룬 건 요시미 순야의 <대학이란 무엇인가>(글항아리, 2014)이다. 대학의 역사를 새로운 시각에서 조명하고 있어서(저자는 대학을 하나의 미디어로 본다) 유익하게 읽은 책이다. 이광주 교수의 <대학의 역사>(살림, 2008)와 비교해봐도 저자의 독창성이 두드러진다.

 

 

 

독서인(14년 6월호) 대학이란 무엇인가

 

한국사회를 가리키는 많은 별칭 가운데 하나는 ‘대졸자 주류 사회’다. 이미 2000년대 중반부터 대학진학자 수가 고교 졸업생 수의 80%가 넘어섰고, 이 수치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90년대 초반 40%에도 이르지 못했던 것과 비교하면 괄목할 만하다. 하지만 이렇듯 유례없는 ‘고학력 사회’가 결코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저성장기조의 장기화와 산업구조 변화로 대졸 취업난 역시 해결의 기미가 없는 상황에서 대학 등록금만 꾸준히 인상돼 학생과 학부모의 부담이 늘어났고 ‘반값 등록금’이 정치적 이슈로 부각됐다. 반면에 오늘의 대학이 과연 학생들의 요구와 사회적 수요에 걸맞은 양질의 교육을 제공하고 있는지에 대한 회의는 깊어졌고 대학 무용론까지 터져 나왔다.

 

대학 교육의 위기 상황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지난 2010년에는 고려대 경영학과에 재학 중이던 김예슬 학생이 자발적 자퇴 선언을 하기도 했다. 김진석 인하대 철학과 교수의 표현을 빌면, ‘저질 대졸자 주류 사회’의 풍경이다. 김 교수는 대학 교육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창조적이지도 않고 상상력도 고갈시키는 비싼 대학교육”은 필요 없다고 일갈한다.

 

질문은 언제나 위기의식의 반영이다. 지금 대학의 의미와 역할을 우리가 다시 묻는다면 그 질문의 배후에는 대학이 처한 현재의 위기가 놓여 있다. 시야를 확장하면 이 위기는 비단 한국 사회만의 것이 아니다. 일본 도쿄대 교수 요시미 순야의 <대학이란 무엇인가>(글항아리)에 따르면 일본의 대학 역시 ‘대학이란 무엇인가’를 근원에서 다시 질문해야 할 만큼 위기적 상황에 직면해 있다.

 

위기의 진단과 처방이 그간에 없었던 건 아니지만, 요시미 교수의 입론이 눈길을 끄는 것은 ‘대학’이라는 개념 자체를 다시 정의할 필요가 있다는 그의 문제의식 때문이다. 대학을 다시 정의하기 위해서 저자는 먼저 대학은 무엇이었던가를 회고한다. 당연한 일이지만 대학이 처음부터 오늘날과 같은 형태와 기능을 가졌던 건 아니다. 대학의 역사에 대한 회고는 대학의 현재를 더 잘 이해하고 그 미래를 조감하는 데 유익한 시사점을 제공해줄지 모른다.

 

요시미 교수에 따르면 대학의 역사는 단선적인 발전사가 아니다. 적어도 “두 번의 탄생과 한 번의 죽음”을 겪었기에 그러한데, 오늘의 위기 상황과 관련하여 주목하게 되는 것은 ‘대학의 죽음’이다. 많이 알려진 대로 대학은 12세기 중세 유럽에서 탄생했다. ‘도시의 자유’를 기반으로 탄생한 중세의 대학은 교황권력과 황제권력의 대립을 적절히 이용하면서 전 유럽으로 증식해갔다. 15세기가 중세 대학의 전성기였다면, 16세기 인쇄술의 발달과 함께 도래한 근대로의 이행기에 대학은 사회적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서 거의 죽음을 맞는다.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가.

 

15세기 중반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으로 서구 문명은 필사문화에서 활자문화로 이행한다. 인쇄혁명은 종교개혁과 근대과학의 탄생을 가능하게 했고, 새로운 출판문화를 새로운 지식의 담당자, 즉 저자를 출현시켰다. 중세의 지식인들은 교회와 대학이라고 하는 두 가지 ‘미디어’를 통해서 ‘신의 말씀’과 ‘이성의 언어’의 매개자 역할을 해왔지만, 출판이라는 새로운 미디어의 도전에 제대로 응전하지 못했다. 즉 중세 대학은 “출판 유통을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미디어 상황과 그 속에서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기 위한 민감한 대응”을 결여했다. 이러한 대응력을 갖췄던 이들은 대학의 지식인이 아니라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자들과 계몽기의 백과전서파 같은 새로운 지식인과 예술가들이었다. 반대로 대학은 근대적 지식의 주체가 아니었다. 이는 데카르트, 파스칼, 로크,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등과 같은 근대의 지적 거인들은 모두 대학교수직과는 무관한 삶을 살았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렇게 오랜 기간 가사(假死) 상태에 놓여 있던 대학은 19세기 민족주의의 대두와 함께 다시금 ‘제2의 탄생’을 맞는다. 직접적인 계기는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에 맞선 프로이센군의 패배였다. 정치적, 군사적으로 프랑스의 압력 하에 놓인 독일은 새로운 근대 대학의 설립을 통해서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다. 빌헬름 훔볼트의 대학개혁안에 따라 베를린대학이 탄생한 것은 그런 배경에서다. 독일의 대학이 표본적으로 보여주듯 근대 대학은 국민국가, 더 나아가서는 제국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다시금 종합적인 고등교육 및 연구기관으로 화려하게 부활한다.

 

문제는 이러한 근대 대학의 모델이 국민국가가 점차 쇠퇴해가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게다가 디지털화와 인터넷의 보급으로 마치 16세기처럼 지식의 창출과 유통에서 새로운 혁명이 진행되고 있는 현재 상황은 대학에 또 다른 도전이다. 근대 국민국가와 같이 성장해온 근대 대학이 당장 종언을 고하지는 않겠지만 분명 새로운 변화의 입구에 서 있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미디어와 지식의 새로운 관계에 대응하는 변화를 수반하지 않는다면 대학의 기능 부전은 만성화될 가능성이 높다. 더불어 대학의 변신 혹은 혁신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대졸자 주류 사회’의 장래 또한 낙관하기 어려워 보인다.

14. 0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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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반의 책을 옮겨놓고 나머지 책은 쌓아놓는 바람에 낯익은 서재도 낯설게 느껴진다. 열 권도 안 되는 책만이 꽂혀 있는 책장도 나로선 좀처럼 보기 드문 광경이다. 임시방편으로 컴퓨터를 다시 연결해서 페이퍼를 적는다. 당분간은 밤마다 유사 난민 생활을 해야 할 듯싶다. 일단, 이번달 책&(428호)에 실은 '키워드로 읽는 인문학 서재'를 옮겨놓는다. 거짓말에 관한 책 몇 권이 눈에 띄기에 고른 주제가 '거짓말'이었다. 거짓말의 심리학을 다룬 책 두 권 얘기다. 한 권 더 다뤘다면 <거짓말을 간파하는 기술>(21세기북스, 2013)도 후보였다.

 

 

책&(14년 6월호) 크고 작은 거짓말 속에서 사는 우리

 

거짓말을 하는 것은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는 건 우리의 통념이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많은 거짓말 속에서 살아간다. 여기서 거짓말은 남에게 큰 손해를 끼치는 사기 같은 범죄는 제외하고 하는 말이다. 우리는 정직을 높이 평가하지만 언제 어디서건 본심을 말하는 게 최상의 방책인 것은 아니다. 가령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이 만나자고 할 때 선약이 있다는 핑계를 대는 대신에 ‘나는 당신이 싫고 그래서 만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언제나 옳은 행동일까. 적당한 거짓말이 사회생활에서는 불가피할뿐더러 때로는 필수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 관점에서 거짓말의 의의와 심리를 탐색한 책 두 권을 묶어서 이달에는 읽어보기로 하자.  


일본의 심리학자 사이토 이사무의 <사람은 왜 거짓말을 할까?>(스카이)는 제목 그대로 사람들은 왜 거짓말을 하는 걸까란 질문을 던지고 이에 답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서 집단생활을 하면서도 개인의 자존심도 만족시키고자 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 두 가지 욕구를 동시에 만족시키려는 전략이 거짓말이다. 보통 커뮤니케이션은 정보의 올바른 전달을 목적으로 한다. 그럼에도 그런 정확성과는 거리가 먼 거짓말이 자주 사용되는 것은 다른 목적을 갖고 있어서이다. 바로 양호한 인간관계를 유지한다는 목적이다. 저자는 이러한 목적을 갖고서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이는 다양한 거짓말의 사례를 살펴보고 그 심층심리를 분석한다. 심층심리라고는 하지만 거짓말의 여러 양상과 숨은 의도에 따른 유형들을 제시하는 쪽에 가깝다.


그런 유형학보다 흥미로운 건 남자와 여자의 거짓말이 어떻게 다른가에 대한 설명인데, 저자는 거짓말의 성차가 진화심리학적 근거를 갖는 것으로 본다. 그에 따르면, 남자는 눈앞의 이익을 위해 임기응변으로 거짓말을 하는 경향이 있고, 여자는 상대의 기분이나 관계를 고려해서 거짓말을 하는 경향이 있다. 즉 남성은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기 위한 전략으로 거짓말을 활용하는 반면에 여성은 상대의 입장을 우선시하고 배려하기 위한 거짓말을 주로 많이 한다. 거짓말에 대한 대처법에서도 남성과 여성은 차이를 보이는데, 상대방이 거짓말을 했을 때 남성은 상대를 비난하고 상황을 자신한테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 애쓴다. 관계 회복이 아니라 권력과 정의의 회복에 주안점을 둔다. 반면에 여성은 상대와의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데 초점을 맞추면서 상대가 왜 그런 거짓말을 했는지 이해하려고 한다. 관계 유지를 중시하는 여성의 입장에서 보면 권력이나 정의는 부차적이다. 가령 남성이 여성에게 하는 가장 대표적인 거짓말은 “전화할게” “사랑해” “너뿐이야”라고 하는데, 이런 거짓말의 진의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자주 속아 넘어가는 것은 여성이 어리석어서가 아니라 그 말을 믿고 싶기 때문에 믿는 척하는 것이라는 게 저자의 지적이다.  


독일의 긍정심리학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 우테 에어하르트가 남편과 함께 쓴 <거짓말의 힘>(청림출판)도 거짓말에 대한 편견을 재고하게끔 한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간명하다. 거짓말은 최고의 지적능력이며, 삶의 일부이고 소통의 필수 요소라는 것이다.

 

통계에 따르면 우리는 하루에 다섯 번에서 이백 번까지 ‘작은 핑계’를 이용한다. 사소한 거짓말은 거의 일상적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니겠다. 저자는 이 거짓말을 긍정적인 자기기만이라는 관점에서 해명한다. 예컨대, 이런 가정을 해보자. 친한 친구로부터 사기를 당했다, 앞으로 살 날이 겨우 한 달밖에 안 남았다, 부모가 사실은 친부모가 아니다 등등. 이런 사례들의 공통점은 진실의 인지가 엄청난 정신적 부담과 고통을 안겨다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흔히 사실을 직시하기보다는 회피하거나 변명하고자 한다. 그것은 고통을 최소화하려는 본능적인 성향의 결과다. 다르게 말하면, “모든 진실이 항상 소화 가능한 건 아니다. 우리는 모든 진실을 알고자 하는 건 아니다.”


여기서 진실보다 우선적인 가치로 등장하는 것이 행복이다. 이 행복을 위해서는 자신을 속이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할 수 있으면 행복하다는 것이다. 너무 거창하게 생각할 것도 없다. 저자는 매일 일기장에 좋은 일을 적으면 삶의 만족도가 올라간다는 사실을 예시한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마음의 방향을 조종할 수 있다.

 

가령 다이어트를 해야 할 때 음식을 의도적으로 박하게 평가하는 것도 자신을 속이는 한 가지 방식이다.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할 때에도 긍정적 자기암시를 활용할 수 있는데, 쓰레기 수거 아르바이트를 하는 대학생이 무거운 쓰레기통 운반을 매우 좋은 운동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일례다. 이러한 낙관 편향적 태도를 저자는 ‘성숙한 방어’라고 부른다. “비현실적이거나 비도덕적이지 않으면서 자신을 속이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물론 낙관편향과는 반대적인 태도도 가질 수 있다. 비관적인 사람도 실수를 발견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그것이 행복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거짓말이 없다면 삶은 너무 암울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14. 06.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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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발견'으로 웬덴 월러치와 콜린 알렌의 <왜 로봇의 도덕인가>(메디치미디어, 2014)를 고른다. 아침에 읽은 뉴스 기사 때문인데, '튜링 테스트'를 통과한 최초의 '생각하는 인공지능'이 탄생했다는 소식. 그 의미를 짚어주는 기사의 내용은 이렇다.

 

영국 레딩대가 7일(현지시간) '튜링 테스트 통과의 첫 사례'라고 선언한 '유진'은 미리 내용을 제한하지 않고 '일반적인 대화'를 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전산학과 인공지능의 역사에 큰 이정표가 우뚝 선 셈이다. 이번 '튜링 테스트 첫 통과' 판단 기준은 튜링이 1950년 철학 학술지 '마인드'에 실은 논문에서 예로 제시했던 정도의 수준이었다. 튜링은 당시 '5분간 심문을 해서 컴퓨터를 인간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30%를 넘는다'는 정도의 '검증 수준'을 예로 들었으며, 대화 내용에 대한 별도 제한은 두지 않았다. 다만, 이는 '진짜로 생각하는 능력을 지닌 컴퓨터'를 만들었다는 주장과는 다르다. '유진' 개발자들조차 그렇게 주장하지는 않는다. 문장을 생성할 수 있는 능력, 사람의 입력에 적절히 반응할 수 있는 알고리즘과데이터베이스를 갖춘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기계가 생각한다'는 것과 똑같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유진 개발자들 역시 이 프로그램이 '우크라이나에 사는 13세 소년'을 가정하고 만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프로그램의 첫 버전이 2001년에 나왔음을 감안하면, 이 정도로 다듬는데만 13년이 걸린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첫 튜링 테스트 통과'는 이정표로서의 의미는 매우 크지만, 이것으로 인공지능을 만들겠다는 목표가 달성된 것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이 분야에 그간 상당한 발전이 있었으며, 앞으로도 연구할 거리가 엄청나게 많이 남았음을 보여 주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국제신문)

아무튼 '생각하는 인공지능'의 시대로 진입하게 됐다는 점은 특기할 만한데, <왜 로봇의 도덕인가>의 문제의식이 현실화된다는 의미도 있겠다. 부제대로 '스스로 판단하는 인공지능 시대에 필요한 컴퓨터 윤리의 모든 것'이 SF적 현실이 아닌 실제 현실로 다가오는 것이다. 책의 난이도는 가늠할 수 없지만, 소개는 구미를 당긴다.

로봇 윤리라는 신흥 분야에 관한 최초의 입문서이자 로봇의 도덕에 관한 포괄적인 안내서다. 예일 대학교의 ‘생명윤리를 위한 학제간 센터’의 윤리학자와 인디애나 대학교의 인지과학 교수가 공저한 이 책은, 공상과학 소설의 통속적 화두에서부터 왜 로봇의 도덕에 관한 연구가 지금 필요하며 그것에 관련된 기술적 사안은 무엇인지를 상세하게 설명한다.  

 

그러고 보니 로봇 윤리를 다룬 책은 지난 해에도 나왔었다. 라파엘 카푸로 등이 쓴 <로봇윤리>(어문학사, 2013)가 그것이다. 찾아보니 '로봇윤리'가 윤리학에서 최근 부상하고 있는 '핫한' 분야인 듯싶다. 이런 변화를 보면 인생이 짧지만은 않다는 생각도 든다. 로봇과 윤리적인 문제를 토론하게 될 날도 아주 멀지는 않은 듯하니 말이다...

 

14. 06.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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