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자 중앙일보에 실린 '삶의 향기' 칼럼을 옮겨놓는다. 얼마 전에 다녀온 프라하 여행의 소감을 일부 적었다. 카프카의 프라하에 대해선 클라우스 바겐바하(바겐바흐)의 <카프카>(한길사, 2005)와 <카프카의 프라하>(열린책들, 2004)가 요긴한 참고가 된다. <카프카의 프라하>는 절판돼 아쉽다.

 

 

 

중앙일보(14. 08. 26) 카프카를 찾아서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 다녀왔다. 직항 편을 타지 않고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공항을 경유했는데, 루프트한자의 보잉 747 여객기가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착륙할 때는 은근히 비틀스의 노래 ‘노르웨이의 숲’이라도 흘러나오지 않을까 기대했다. 세계 최대의 허브 공항 가운데 하나라지만 내가 아는 프랑크푸르트 공항은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 서두에 등장하는 공항에 국한되기 때문이다. 중년의 주인공 와타나베는 착륙 즈음에 ‘노르웨이의 숲’이 흘러나오자 옛 시절이 떠올라 격한 감정에 빠져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스튜어디스가 안부를 묻자 괜찮다고 대답하는 게 소설의 서두다. 한때는 비틀스의 노래가 흘러나오기도 했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경험한 루프트한자 비행기에서는 “곧 착륙할 테니 좌석벨트를 단단히 매라”는 방송만 나왔다. 그리고 프라하행으로 환승하기까지 두 시간 남짓의 시간을 공항에서 보내야 했다. 러시아를 제외한 첫 유럽 여행이 그렇게 시작됐다.

특별히 프라하를 선택한 건 ‘카프카의 도시’여서다. 카프카의 동시대를 살았던 프라하의 시민들 가운데 누구도 그가 이 도시의 대표적 인물이 될 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거의 평생을 프라하에서 살았고 이 도시로부터의 탈출을 꿈꿨지만 그는 프라하를 빠져나갈 수 없다고 적었다. ‘베를린은 프라하의 해독제’라고도 말했지만 그의 베를린 체류는 말년의 수개월로 그쳤다. 그는 빈 근교의 결핵요양원에서 숨졌고 프라하의 유대인 묘지에 묻혔다. 생전에는 무명에 가까운 한 작가의 죽음이었지만, 사후에 그는 20세기 대표 작가의 한 사람이 되었다. 나 같은 이방의 독자도 그의 흔적을 찾아 프라하를 방문하게 만든 작가.

한밤중에 도착한 프라하 공항은 생각보다도 더 작았고, 안내판에 한글도 포함돼 있어서 놀라웠다. 짐을 찾아서는 거의 아무런 수속 없이 게이트를 빠져나와 로비로 들어서니까 미리 인터넷으로 예약한 택시기사가 푯말을 들고 서 있었다. 숙소까지 가면서 어둠에 잠긴 프라하에 대한 인상을 몇 마디 해보려고 했지만 기사는 영어에 서툴다면서 거의 입을 다물었다. 우리 가족이 어디서 왔느냐고도 물어보지 않았지만, 생각해보면 그럴 필요가 없기도 했다. 예약손님이었으니까 이미 어디에서 오는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서로 침묵할 수밖에 없었지만 숙소에 도착하는 데 문제가 되는 건 아니었다. 기사는 프라하 시내 지도와 함께 안내책자를 친절하게 건네주고 떠났다. 호텔 로비에서 수속을 마친 뒤 객실에 여장을 풀자 비로소 프라하에 안착한 느낌이었다. 낯설지만 생각만큼 낯설지는 않은 데서 느껴지는 특이한 편안함.

 

이 편안함에 그로테스크한 느낌까지 얹어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아침에 커다란 객실 창의 커튼을 걷어내자 바로 눈앞에 사진으로만 보던 프라하성과 블타바강의 장관이 한눈에 들어옴과 동시에 아이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아이는 멀리 프라하성을 본 게 아니라 창문 밖에 여기저기 매달려 있는 거미들을 본 거였다. 카프카적인 세계를 가리키는 ‘카프카에스크’란 말은 이런 풍경에도 들어맞지 않을까 싶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의 풍광과 창문의 거미들이 빚어내는 부조화.

 



이 그로테스크한 느낌은 카프카를 찾아서 프라하에 왔지만 어쩌면 결코 카프카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예감으로 이어졌다. 카프카의 『성』에서 측량기사 K가 전갈을 받고 성에 도착하지만 중심부에는 끝내 도달하지 못하는 것처럼. 카프카의 문학은 그러한 실패의 반복적인 기록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카프카의 흔적에 대한 순례도 그러한 실패의 반복으로서만 의미를 가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라하를 상징하는 다리 카를교를 건너서 프라하성을 둘러보고 그의 작업실이 있던 황금 소로의 계단 길을 내려와 버스 정류장마다 안내판이 붙어있던 카프카박물관에 들러 그의 유고와 유품들을 눈으로 보면서도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던 것은 그런 실패를 예감해서였을까. 프라하를 떠날 수 없었다는 작가의 말을 되새기자면, 거꾸로 나는 프라하에 들어가기도 전에 프라하를 떠나야 했다. 프라하를 떠나는 것만 내겐 허용됐다.

 

14. 08.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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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고전'으로 에른스트 윙거의 <강철 폭풍 속에서>(뿌리와이파리, 2014)를 고른다. <대리석 절벽 위에서>(문학과지성사, 2013)가 작년말에 나왔을 때 적은 페이퍼에서 <강철 폭풍>(1920)을 먼저 읽고 싶다고 했는데, 바로 그 책이다.

 

 

책에 대해선 아직 소개글이 올라와 있지 않다. 대신 앙드레 지드의 평에 따르면, "“이 책은 의문의 여지 없이 전쟁에 관한 최고의 책이다. 정직하고 참되고 믿음직하다.” 논란이 된 작가의 이력과 정치 성향에 대해서도 이전에 설명을 다시 참고할 수밖에 없다.

하이델베르크에서 중산층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7세에 김나지움 학생의 신분으로 프랑스 외인부대에 입대했다가 아버지의 반대로 6주 만에 집으로 돌아왔으나, 곧이어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에 종군하여 철십자 훈장과 푸르르메리트 훈장을 받았다. 독일의 패전 뒤에도 군에 머물며 전쟁의 경험을 담은 <강철 폭풍><내적 체험으로서의 전투>를 발표해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제대한 뒤에는 하노버 대학 · 라이프치히 대학 · 나폴리 대학에서 동물학과 철학을 수학했다. 그는 일생 동안 곤충에 심취했고 약 3만 마리의 곤충을 수집했는데, 곤충 가운데 여러 종에 그의 이름이 붙여지기도 했다.

 



윙거는 언제나 정치적 논쟁의 중심에 서 있었는데, 그의 작품은 전쟁을 미학적으로 정당화하기도 하고 나치즘에 접근하는 등 보수 혁명자로서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나치당원이었던 적도 없고 나치 체제 인사나 반체제 인사를 가리지 않고 교류했다. 또한 그의 대표작 <대리석 절벽 위에서>는 나치의 정치를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작품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러한 다중적인 정치적 성향으로 인해 윙거의 작품들은 전쟁 말기에는 나치에 의해, 종전 직후에는 영국 점령군에 의해 잠시 판매가 금지되었다.

1차 세계대전 발발 100주년을 맞아 이렇다할 책이 나오지 않는다 싶었는데, <강철 폭풍 속에서>는 책 가뭄을 얼마간 해갈시켜줄 수 있을 듯싶다. 펭귄판의 영어본도 바로 주문해야겠다...

 

14. 08. 25.

 

 

P.S. 한편, '폭풍'이란 말은 '1차 세계대전'에 대한 흔한 비유인 것 같기도 하다. 플로리안 일리스의 <1913년 세기의 여름>(문학동네, 2013)의 영어판 부제는 '폭풍 바로 전 해'이기 때문. 1차 대전 발발까지의 과정을 다룬 책으로 화제작은 크리스토퍼 클라크의 <몽유병자들>(2014)이다. 부제는 '유럽은 어떻게 1914년 전쟁으로 치닫게 되었나'이다. 번역이 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소개됨직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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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책'을 골라놓는다. 타이틀북은 인디고 서원에서 엮은 <새로운 세대의 탄생>(궁리, 2014)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기억의 의무'라는 부제가 책의 내용을 말해준다. "올해로 10주년을 맞은 ‘청소년을 위한 인문학 서점 인디고 서원’에서 세월호 참사 이후 청소년과 청년들의 분노와 정의의 목소리, 그리고 박명림, 한홍구 등 각계 학자들의 참회와 재건의 목소리를 담으려 애쓴 책"이다. 세월호 특별법이 국회에서 아직 통과되지 않은 상황이라 무참한 상황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두번째 책은 50년 전 이야기를 다룬 브루스 왓슨의 <프리덤 서머, 1964>(삼천리, 2014)다. 부제는 '자유와 정의, 민권운동의 이정표'. 1964년의 여름을 가리키는 말이 '프리덤 서머'인데, 하워드 진이 "내가 프리덤 서머에 관해 읽은 책 가운데 최고의 기록"이라며 격찬한 책이다. 어떤 여름이었나.

1964년 여름, 그야말로 모든 것을 걸고, 목숨까지 걸고 수많은 백인 청년학생들이 미시시피로 가는 버스 앞에 섰다. 같은 시각 또 한 무리의 미국 젊은이들은 수렁에 빠진 베트남전쟁에 참전하고 있었다. 미국 전역에서 자원한 700명이 넘는 대학생은 인종분리와 백인우월주의, KKK의 본거지인 남부로 가기 위해 모였다. 이상주의와 용기, 희망을 품은 젊은이들은 극도의 공포와 좌절감 속에서 “우리 승리하리라”를 부르며 향하는 버스에 오른다. 계절학기와 아르바이트를 잠시 미루고 여름 한 철 활동하기 위해 온 이 학생들은 그 뜨거운 ‘프리덤 서머’에 온몸을 바친다.

미국 민권운동사의 한 장을 읽어볼 수 있겠다.

 

 

세번째 책은 중국 얘기다. 칭화대 교수이자 신좌파 지식인 왕후이의 <탈정치 시대의 정치>(돌베개, 2014). 소련처럼 붕괴하지 않고 중국 사회주의가 살아남은 이유를 제시하고 있어서 눈길을 끈다. '중국의 길'이 지닌 특수성과 보편성에 대한 중국 대표 지성의 생각은 무엇인지 살펴봄직하다.

 

네번째 책은 박의경의 <여성의 정치사상>(책세상, 2014)이다. '울스턴크래프트와 밀'이 부제. "여성정치사상의 근대적 토대를 마련한 장본인이 18세기의 여권 운동가이자 페미니즘의 선구자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남녀평등을 주장하고 실천한 19세기의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이다. 이 책은 이 두 인물의 사상을 중점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여성의 존재를 소외시킨 근대정치사상의 부족함을 채우고 여성정치사상의 발전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알려진 대로 <여권의 옹호>(<여성의 권리 옹호>)의 저자이자 메리 셸리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프랑켄슈타인>의 저자 말이다. 밀은 <여성의 예속>(<여성의 종속>)의 저자이니까 이 두 권의 책에 대한 배경 설명으로도 읽을 수 있겠다.

 

 

끝으로 다섯번째 책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서 엮은 <르몽드 인문학>(휴먼큐브, 2014). '세계의 석학들이 말하는 지구 공존의 법칙'이 부제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이 기획, 출간하는 <르몽드 인문학>은 세계 석학 30명의 글 40편을 묶어서 펴내게 되었다. 이를 통해 급변하는 글로벌 정세와 위기의 한국 사회를 진단하고자 한다. 총 5개의 장, 1부 탐욕이 빚어낸 비극/ 2부 야누스적 자본의 두 얼굴/ 3부 거세된 지식인의 불온성/ 4부 지식인이여, 왜 두려워하나/ 5부 상상을 넘어 행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월호 침몰 사건을 특집으로 다룬 <말과 활>(5호)와 같이 읽어봐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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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세대의 탄생- 세월호 참사에 대한 기억의 의무
인디고 서원 엮음 / 궁리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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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덤 서머, 1964- 자유와 정의, 민권운동의 이정표
브루스 왓슨 지음, 이수영 옮김 / 삼천리 / 2014년 8월
25,000원 → 22,500원(10%할인) / 마일리지 1,2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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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정치 시대의 정치
왕후이 지음, 성근제 외 옮김 / 돌베개 / 2014년 8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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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정치사상- 울스턴크래프트와 밀
박의경 지음 / 책세상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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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중앙선데이에 실은 '로쟈의 문학을 낳은 문학'을 옮겨놓는다. 연재의 마지막 회로 도스토예프스키의 <분신>과 나보코프의 <절망>을 다뤘다.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나보코프의 평가는 <나보코프의 러시아문학 강의>(을유문화사, 2012)에서 읽어볼 수 있다.

 

 

 

중앙선데이(14. 08. 24) 철석같이 믿었던 ‘분신’에게 배척 당하는 ‘진짜’

 

『롤리타』를 쓴 나보코프는 망명 작가였지만 러시아 문학의 적통임을 자임했다. 그래서 자신의 모든 영어 소설을 러시아어로 직접 옮기는 노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반대로 나보코프가 러시아어로 쓴 소설을 처음 영어로 옮긴 소설은 베를린 시절에 쓴 『절망』이다. 그런데 이 번역본은 판매도 부진한 데다가 재고는 전쟁 중 독일군의 폭격으로 유실돼 희귀본이 되었다. 『롤리타』의 성공으로 막대한 인세 수입이 생기자 미국 생활을 접고 스위스로 이주한 나보코프는 『절망』을 다시 손봐서 영문 개정판을 낸다.

두 번역본, 즉 ‘젊은 나보코프’와 ‘늙은 나보코프’ 사이에는 30년의 시차가 있다. 『절망』을 아예 다시 썼다는 늙은 나보코프는 개정판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그는 젊은 날의 서투른 신예 작가에게 짜증이 나서 얼굴을 찌푸릴 뿐이다.” 젊은 날의 자신에게조차 짜증을 낼 정도로 엄격한 예술관의 소유자가 바로 나보코프였다.

흥미로운 건 그의 여러 작품들에서 이러한 주제, 곧 작가를 참칭하는 얼치기들이 등장하고 이들이 진정한 작가(나보코프)로부터 응징당하는 이야기가 다뤄진다는 점이다. 젊은 나보코프가 러시아어로 쓴 『절망』에서 주인공 게르만은 자화자찬으로 서두를 뗀다. “나는 뛰어난 역량을 갖춘 작가다. 더없이 우아하고 생생하게 표현해 내는 능력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서른 중반의 게르만은 베를린에 온 지 10년째인 초콜릿 사업가. 가정부를 거느리고 아내와 함께 좋은 아파트에 살면서 주말이면 카페에 가는 중산층이다. 사업차 프라하에 갔다가 교외 풀밭에 누워 자고 있던 펠릭스와 우연히 마주치고는 펠릭스가 자신과 똑 닮았다고 생각한다. 펠릭스가 부인함에도 그의 믿음은 철석같다. “내가 본 그는 나의 분신, 즉 육체적으로 나와 동일한 존재였다.”

완벽한 분신의 발견은 게르만을 완전 범죄에 대한 구상으로 이끈다. 파산 직전에서 탈출구가 필요했던 게르만은 펠릭스를 자신으로 위장해 살해하고, 보험금을 타낸 아내와 재결합해 새 인생을 시작하려고 계획을 꾸민다. 그리고 이 범행 과정을 한 편의 소설로 쓰고자 한다. 완전범죄는 곧 그에게 완벽한 예술 작품에 대한 인증과도 같다.

하지만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던 그의 계획은 치명적인 실수 때문에 얼크러진다. 펠릭스를 자신의 분신으로 생각한 것 자체가 완전한 착각이었다는 게 밝혀진다. 그렇게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게르만은 곧 살인범으로 지목돼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된다. 완전범죄가 실패한 것처럼, 완벽한 예술 작품을 목표로 했던 그의 소설은 막판에 가서 ‘가장 저급한 문학 형식’인 일기로 전락한다. 결국 게르만은 자신의 실패작에 ‘절망’이란 제목을 붙일 수밖에 없다. ‘뛰어난 역량을 갖춘 작가’라는 자기 선언과는 정반대로 말이다.

게르만의 실패 원인은 무엇일까? 작중 인물로 게르만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하는 화가 아르달리온은 게르만을 ‘음울한 도스토옙스키적 성향’을 지닌 인물이라고 일컫는데, 이것은 작가 나보코프의 의중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나보코프에게 도스토옙스키는 터무니없이 과대평가된 작가이며 너절한 감상주의와 쓸데없는 장광설만 늘어놓는 이류 작가의 대명사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그렇게 인색한 평가를 내놓은 나보코프조차 예외적으로 높이 평가한 작품이 있었으니, 바로 『분신』(1846)이다. 데뷔작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열광적인 환영에 고무된 젊은 도스토옙스키가 야심작으로 내놓았지만 혹평에 시달린 작품이었다. 예기치 않은 반응에 낙심하지만 그는 작품에 대한 애착 때문에 20년 후 개정판을 발표한다. 『분신』 역시 하급관리 골랴드킨이 자신과 꼭 닮은 분신과 만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골랴드킨은 자신의 은인 올수피 이바노비치의 딸 클라라의 생일파티에 찾아가지만 초대받지 않은 손님으로 문전박대 당한다. 자신도 남들 못잖은 인간이라는 자부심으로 뒷문을 통해 들어가 보지만, 결국 무참한 모멸감만 확인한 채 길거리에 내던져진다. “골랴드킨 씨는 지금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그렇게 절망하고 있는 골랴드킨에게 그의 분신이 나타난다. 외모는 물론 이름까지 똑같은 ‘젊은 골랴드킨’으로 ‘늙은 골랴드킨’과는 누가 진짜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다. 처음엔 우호적인 관계였지만 ‘가짜’는 차츰 ‘진짜’를 무시하고 배척한다. 결국 피해망상증에 사로잡힌 골랴드킨이 정신병원에 이송된다.

분신이 등장한다는 점만 제외한다면 『절망』과 『분신』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하지만 나보코프가 『분신』을 일컬어 “도스토옙스키의 최고작이자 완벽한 예술 작품”이라고 평한 사실은 『절망』을 읽을 때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비록 주인공 게르만은 완벽한 소설을 쓰는 데 실패하지만, 그 실패를 조롱하면서 작가 나보코프는 ‘완벽한 예술 작품’에 도달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사뭇 달라 보이는 외양임에도 『분신』과 『절망』은 서로를 꼭 닮은 ‘분신’이다.

 

14. 08. 24.

 

 

P.S. 최근에 도스토예프스키의 <분신>을 번안한 영화가 새로 만들어졌다. 리처드 아이오아디(Richard Ayoade) 감독의 <더블>(2013). 블랙코미디로 분류되는 영국 영화다. 몇몇 장면들을 보건대, 비교적 잘 만들어진 영화다. 나보코프의 <절망>을 원작으로 한 영화로는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절망>(1978)으로 파스빈더가 자신의 '베스트10'에 꼽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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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에 강의를 다녀오느라 주말 포스팅이 늦어졌다. '이주의 저자'부터 고른다. 담주가 마지막 여름 휴가기간 일테니 이번주에 나오거나 다음주에 나올 책 가운데는 편집자들이 마지막으로 밀어낸 책들이 많겠다(그들에게 안식을!).

 

 

먼저,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의 저자 김용규의 신간이 오랜만에 나왔다. <생각의 시대>(살림, 2014). 아, 아주 오랜만은 아니다.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휴머니스트, 2013)이 작년에 나왔었으니까. 그보다 내가 염두에 둔 건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휴머니스트, 2010)이다. 워낙 방대한 분량의 대작인지라 그 사이에 나온 책들은 소품처럼 여겨진다. 그리고 이제 다시 묵직한 책으로 돌아왔다.

 

 

'생각의 시대'란 언제를 말하는가? "기원전 8세기부터 기원전 5세기 사이, 그리스에서는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인류 문명을 탄생시킨 ‘생각의 도구들’이 하나둘씩 만들어졌던 것"이란 소개에서 읽을 수 있다. 야스퍼스가 <역사의 기원과 목표>에서 '축의 시대'혹은 '차축 시대'(B.C.900-200)라고 명명한 시대와 대략 일치하는 걸로 보인다. 축의 시대는 카렌 암스트롱의 <거대한 전환>이란 책이 <축의 시대>(교양인, 2010)라는 제목으로 소개되면서 우리의 입에도 익은 말이 됐다('축의 시대'를 표제로 한 책으로는 KCRP종교간대화위원회에서 엮은 <축의 시대와 종교간 대화>(모시는사람들, 2014)가 더 나와 있다). <생각의 시대>는 김용규 버전의 <축의 시대>인 셈. 저자 특유의 진지한 사유와 날랜 문체가 또 어떤 장관을 만들어냈을지 궁금하다.

 

 

두번째 저자는 강준만. 강준만 교수의 신간이 나왔다는 건 출판계에서 더 이상 뉴스가 아니다. 거꾸로 몇달 간 책이 안 나온다면 그게 뉴스다. 올여름에만 해도 단독 저서만 세 권을 펴냈다. <우리는 왜 이렇게 사는 걸까?>(인물과사상사, 2014)에서 <미국은 드라마다>(인물과사상사, 2014)를 거쳐서 <싸가지 없는 진보>(인물과사상사, 2014)까지.

 

<싸가지 없는 진보>의 부제는 '진보의 최후 집권 전략'인데, 아직 책소개도 뜨지 않아서 구체적으로 어떤 전략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인물과 사상> 5월호에 실린 글 '왜 '싸가지 없는 진보'는 진보에 해가 되는가'를 통해 어림 짐작해볼 수는 있겠다(단행본은 그 글의 주장의 확장한 걸로 보인다). 인터넷에서 원문을 읽어볼 수 있는데, 한 대목은 이렇다.

민주당과 민주당 지지자들이 새누리당과 그 지지자들을 어리석고, 탐욕스럽고, 더 나아가 사악하다고까지 생각하는 한 민주당은 필패(必敗)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흥미롭고도 놀라운 사실은 민주당을 지지하는 논객들과 언론인들의 대부분이 그런 시각으로 새누리당과 그 지지자들을 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상대가 분노하게끔 조롱하면서도 그걸 풍자나 정당한 비판이라고 주장하는 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게 바로 싸가지의 문제요 도덕의 문제라는 걸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강준만 교수가 주로 참고한 건 인지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의 <도덕의 정치>인데(<도덕, 정치를 말하다>와 같은 책이다) 미국 민주당에 대한 레이코프의 충고를 현 민주당(새정치연합) 진영에 대한 충고로 번안하고 있다.

 

 

한데, 정치적 보수/진보라는 문제틀을 도덕적 보수/진보로 바꿔치기하고 이용해먹은 것은 미국 공화당의 선거전략가들이었다. 가령 동성애에 반대하면 '도덕적 보수'로 분류될 텐데, 이들을 '정치적 보수'로 유인해서 '닥치고 보수'로 만들어낸 것이다. 그 과정에 대해선 미국의 가장 가난한 주에 속하는, 그리고 한때 진보적 주에 속했던 캔사스 주가 보수의 중심이 된 배경을 추적해낸 토마스 프랭크의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갈라파고스, 2012)를 참고할 수 있다(원제가 '캔자스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도덕의 정치'론이 제대로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실제 정치 현실에서 도덕의 정치가 어떻게 이용되고 있는지에 대한 분석도 같이 다뤄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에게 한국판 조지 레이코프만큼이나 필요한 건 한국판 토마스 프랭크다. 

 

 

세번째는 젊은 동양철학자 임건순. 패기만만하게 '제자백가 아카이브'를 시작하면서 첫 권으로 <제자백가, 공동체를 말하다>(서해문집, 2014)를 펴냈다. <묵자, 공자를 딛고 일어선 천민사상가>(시대의창, 2013)에 이어서 두번째 저작. 한데 두번째라는 건 분야를 동양철학에 한정할 때의 말이고, 야구 기자라는 특이한 경력을 갖고 있는 저자는 한국의 야구감독들을 다룬 <야구오패>(오블라제, 2012)와 '우리가 몰랐던 류현진 이야기' <생각이 많으면 진다>(브레인스토어, 2013)를 출간하기도 했다. 거의 존재감이 없는 책들인 걸로 보아 본업인 동양철학으로 방향을 튼 것은 현명한 결정으로 보인다(류현진 경기의 시청자들이 류현진 책의 독자와는 무관한 것). 저자는 머리말에서 이렇게 적었다.

정말 재미있고 역동적으로 전개된 춘추전국시대의 사상사를 이야기하고 싶었고, 공동체가 공유하는 지적 자산을 만들어보고자 하는 신심이 있었기에 이렇게 또다시 제자백가 사상을 가지고 독자들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가 가진 제자백가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이 책은 재미있고 쉽습니다. 우선 재미있을 수밖에 없는 게, 제자백가 사상과 제자백가 사상사 자체가 원래 재미있습니다.

 

제자백가 얘기가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제자백가를 두루 다룬 책들이 근래에 몇 권 출간됐다. 신동준의 <고전으로 분석한 춘추전국의 제자백가>(인간사랑, 2014)는 1594쪽의 분량이 말해주듯 '제자백가의 모든 것'으로 담으려고 한 책. 사전으로 읽어도 무방하겠다. 채한수의 <천천히 걸으며 제자백가를 만나다>(김영사, 2013)는 역시나 664쪽의 두툼한 분량이지만 제자백가의 핵심 저작들을 쉽게 풀어주는 책이다. 젊은 중국사 연구자 공원국의 <춘추전국 이야기> 시리즈도 제자백가를 건너뛸 수 없는 건 당연한데, 6권 '생각 대 생각 : 제자백가, 2500년을 뛰어넘는 위대한 논쟁'에서 다뤘다. 그러고 보니 첫 두 권이 나오고 소식이 뜸한 강신주의 '제자백가의 귀환' 시리즈도 더 나올 때가 됐다...

 

14. 08.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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