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의 고전'으로 아프리카문학 대표작들을 고른다. 벤 오크리의 <굶주린 길>(문학과지성사, 2014)이 출간되어서인데, 1959년생인 벤 오크리는 나이지리아 중부 민나 출생이고 나이지리아 정부 장학생으로 영국의 대학에서 공부한 후 BBC에서 프리랜서로 일한 경력을 갖고 있다. 대표작이 1991년에 발표하여 부커상을 수상한 <굶주린 길>이다. 어떤 작품인가.

 

벤 오크리는 독립을 전후로 한 격동기의 나이지리아에서 태어났다. 치누아 아체베, 윌레 소앙카와 같은 아프리카 문학 1세대 작가들이 아프리카의 식민지 현실과 독립에의 열망을 문학에 담아냈다면 벤 오크리는 독립 이후 아프리카의 현실에 주목한다. 어린 시절 겪은 비아프라 내전과 이어지는 숱한 종족 갈등과 쿠데타는 벤 오크리에게 정신적 상흔으로 남았으며, 그는 이 어두운 역사를 수많은 작품에 담아냈다. 소설 <굶주린 길>도 그 연장선에 있다. 리얼리즘의 한계를 느낀 벤 오크리는 현실과 초현실을 오가는 혼령 아이를 설정해, 혼란의 시기에 자신이 직접 본 살아 숨 쉬는 일반인들의 역사, 그 역사를 온몸에 새긴 인물들을 묘사하며, 마치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오고 가는 혼령 아이처럼 끊임없이 변화하는 모국 나이지리아를 그려냈다.

 

동시대 아프리카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라는 점에서는 1세대 작가로 올해도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됐던 응구기 와 시응오도 같이 떠올릴 만하다. 펭귄판 <울지마라, 아이야>(1964)에 벤 오크리가 서문을 붙이고 있어서 연관짓게 된 것인데, 1938년생인 응구기의 대표작은 1967년작인 <한 톨의 밀알>(들녘, 2014)이다(번역본은 여러 번 재출간됐다). 어떤 작품인가.

월레 소잉카, 치누아 아체베, 나딘 고디머, 존 쿳시 등과 더불어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작가로 손꼽히는 응구기 와 시옹오. 응구기가 세계적인 작가로 발돋움한 작품으로, 작가의 작품세계가 전환기를 맞이했음을 알려주는 소설이다. 이 소설은 형식, 내용, 문체 등 모든 면에서 그의 최고작으로 손꼽힌다. 외부 세력에 의한 공동체의 붕괴가 가져다준 비극과, 그 공동체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지난한 과정에서 사람들의 심리와 행위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면서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 때문에 로렌스의 서정성과 콘라드의 비극성을 잘 조화시켜 놓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요컨대, 아프리카문학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다면, 이 두 작가의 대표작을 꺼내놓을 수 있겠다. 제목도 비슷하게 연상되기에 기억도 쉽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프리카문학의 강의에서 다룬다면 필수 커리 두 편은 정해진 셈이다...

 

14. 12. 2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알라딘의 캘린더는 오늘 12월 20일을 '박근혜, 18대 대통령 당선 확정'으로 기억한다. 그렇군, 2년전에 그런 일이 있었고, 2014년은 그 당선의 '버라이어티한' 결과를 총체적으로 보여준 한 해였다(세월호 사건부터 통진당 해산 선고 판결까지. 그리고 그 사이에 정윤회 문건 파문). 임기는 3년 더 남았지만, 더 보여줄 게 있을까 미리 염려된다. 2014년의 정치적 의미는 권력이 무엇을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지, 무엇을 동원할 수 있고 어떤 거짓말로 둘러대는지, 그래서 어디까지 망가질 수 있는지를 다 보여주었다는 데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게 위안이라면 위안이다. 비록 게임에서 진다 하더라도 패를 다 보여준 상대는 '더티할' 수는 있을지언정 더이상 두려운 대상이 아니기에. 희망은 없지만, 두려움도 없어진 연말에 고르는 '이주의 책'이다.

 

 

타이틀북은 박노자의 <비굴의 시대>(한겨레출판, 2014)로 골랐다. 제목보다는 '침몰하는 대한민국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란 부제에 이끌려서다. "우리 시대 가장 급진적이고 예외적인 지식인으로 평가받는 박노자의 고민과 번뇌를 담고 있다.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의 1부에서는 박근혜 정권의 후진성,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사고와 비정규직 문제를 비롯한 노동자 문제 등 한국 사회 전반에 대해 다루었다. 2부에서는 바깥으로 눈을 돌려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정치/사회적 문제를 살펴본다. 3부에서는 지식인의 한계와 자본의 노예로 전락한 학계에 대해 비판한다. 4부에서는 우리 시대 사회주의와 좌파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다루었다." 우리가 동시대에 무엇을 보고 듣고 겪고 있는 건지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겠다.

 

두번째 책은 류동민의 <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코난북스, 2014). "서울이라는 우리 삶의 운영 체제, 그 정치경제학에 관한 책.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 <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에서 정치경제학과 일상,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솜씨 있게 엮었던 충남대 경제학과 류동민 교수가 이를 담았다." 서울을 대한민국의 축소판으로 읽으면, '대한민국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의 예시로도 읽을 수 있겠다.

 

 

세번째 책은 필립 K. 하워드의 <노스페이스의 지퍼는 왜 길어졌을까?>(인물과사상사, 2014). '일상을 위협하는 법 만능주의가 부제다. 소개에 따르면, "저자 필립 K. 하워드는 앨 고어가 추진한 미국의 정부 혁신 정책의 자문을 하는 등, 미국 내 규제 완화를 위해 목소리를 높여온 지식인이다. 그는 <노스페이스의 지퍼는 왜 길어졌을까?>를 통해 오늘날 미국 사회의 규제가 그들의 건국이념인 ‘자유와 책임’이라는 가치를 파괴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국책 사업 같은 대규모 프로젝트부터 개인의 판단이 필요한 일상적 행위에 이르는 다양한 사례를 들어, 규제가 불러일으킨 폐해를 진단한다." 원제는 <상식의 죽음>.  

 

 

네번째 책은 '우리시대 명강의' 시리즈로 나온 박홍규 교수의 <자유란 무엇인가>(문학동네, 2104). "이 책은 여러 질문을 던진다. '자유'는 진정 우익의 이데올로기를 대변하는 것인가? 자유의 기원은 무엇이며, 정의는 무엇인가? 인류의 역사 속에서, 자유란 무엇이었는가? 서양의 철학자들은 '자유'를 어떻게 보았는가? 왜 자유는 불의에서 벗어나려는 숭고한 정신에서 이기적 소유와 사유의 욕망으로 타락했는가? 자유의 기나긴 역사와 우리 사회의 문제를 짚으며 자유의 진정한 의미를 묻고자 했기에 <자유란 무엇인가>는 ‘자유’의 사상사를 되짚는 철학서인 동시에, 양극화된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논하는 사회학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

 

끝으로 다섯번째 책은 조계완의 <오래된 질문 새로운 답변>(앨피, 2014)이다. '경제학 거인들의 거의 모든 경제이야기'가 부제. "경제 전문 기자이자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는 연구자인 저자는, 오랜 시간 국내외 사회과학 및 인문학 고전 속에 담긴 지적 거인들의 학문적 성취들을 성실하게 탐색하고 채집하여, 그것들이 기획·생산·소비되는 구조와 회로를 830페이지의 방대한 분량 안에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제시하고 있다."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오래된 물음에 답하는 데 필요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책이겠다. 저자는 '지식의 채석장'에 비유하고 있지만 홀가분하게 새해를 맞이하기 위한 '지식의 사우나'로서도 의미가 있겠다...

 

14. 12. 20.


5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비굴의 시대- 침몰하는 대한민국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14년 12월
17,000원 → 15,300원(10%할인) / 마일리지 85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1월 20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14년 12월 20일에 저장

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그리고 삶은 어떻게 소진되는가
류동민 지음 / 코난북스 / 2014년 12월
14,000원 → 12,600원(10%할인) / 마일리지 700원(5% 적립)
2014년 12월 20일에 저장
절판

노스페이스의 지퍼는 왜 길어졌을까?- 일상을 위협하는 법 만능주의
필립 K 하워드 지음, 김영지 옮김 / 인물과사상사 / 2014년 12월
13,500원 → 12,150원(10%할인) / 마일리지 67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1월 20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14년 12월 20일에 저장

자유란 무엇인가- 공존을 위한 ‘상관 자유’를 찾아서
박홍규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2월
20,000원 → 19,000원(5%할인) / 마일리지 600원(3% 적립)
양탄자배송
밤 11시 잠들기전 배송
2014년 12월 20일에 저장



5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장제스(1887-1975)와 이토 히로부미(1841-1909)의 생몰연대를 확인해보니 장제스가 스물두 살 때 이토가 안중근 의사에게 피격당하므로 직접적인 인연은 있을리 없다. 같이 묶은 건 두 인물에 대한 평전이 최근에 출간됐기 때문이다. 조너선 펜비의 <장제스 평전>(민음사, 2014)과 이토 유키오의 <이토 히로부미>(도서출판선인, 2014). 각각 중일 양국의 한 시대를 쥐고 흔들었던 거물들이라 동아시아 근대사를 이해하는 데도 꽤 유익한 자료가 되겠다.

 

 

장제스에 관한 단행본은 생각보다 적다. 레이 황의 <장제스 일기를 읽다>(푸른역사, 2009)와 정두음의 <장제스와 국민당 엘리티스트>(도서출판선인, 2013)가 눈에 띄는 정도인데, 영어권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아 보인다. <장제스 평전>이 2003년에 나온 책인데, 저자가 "이 책은 거의 30년 만에 나온 최초의 전격적인 장제스 평전"이라고 서두에 적고 있기 때문이다.

황제가 지배하는 청나라가 무너지고 현대 중국이 탄생하기까지, 격랑의 중국 근대사 한복판에 장제스가 있었다. 신해혁명 이후 안으로는 군벌이 할거하고 밖으로는 제국주의 열강이 침략하는 가운데 장제스는 중국을 강대하고 안정된 국가로 세우려는 이상과 실천 역량까지 지닌 유일한 지도자였다. 저명한 동아시아 전문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조너선 펜비는 장제스의 일기에서부터 세계 각지의 연구, 당대의 언론 보도, 인터뷰와 현장 조사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자료를 망라하여 장제스가 중국을 잃어버린 패배자라는 일반적인 평가를 철저히 재검토하고, 사실적이면서 역동적인 필치로 그의 초상을 그려 낸다.  

레이 황의 책과 나란히 읽으면 장제스와 그의 시대에 대한 꽤 상세한 그림을 그려볼 수 있을 듯싶다.

 

 

장제스와 달리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책은 평전을 비롯해서 적잖게 출간돼 있다. 새롭게 추가된 내용이 있는지가 포인트. 실제는 확인해봐야 알 수 있겠다.

이토 히로부미만큼 한국과 일본에서 서로 다른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근대 일본의 정치가는 없다. 한국과 일본, 일본의 식민지 연구자와 정치외교사 연구자 사이에서조차 이토를 둘러싼 견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져 있다. 그 원인은 한국의 일본 연구자와 일본의 식민지 연구자는 이토가 한국(조선)에 관여하지 않았던 시기의 이토에 관한 사료를 거의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이토 자신과 이토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정치가, 가족들의 편지, 일기, 서류 등 1차 사료를 중시하고, 또한 그들의 회상록과 당시 신문, 잡지 보도 등도 두루 살펴, 한국통치 시기도 포함하여 이토의 실상을 탐색하고자 한다.

 

이토 히로부미 관련서로는 근대일본의 국가 형성과정에서 이토의 역할을 다룬 <근대일본의 국가체제 확립과정>(혜안, 2008), 그리고 한국과의 관계를 다룬 책으로 <한국과 이토 히로부미>(도서출판선인, 2009), <이토 히로부미의 한국병합 구상과 조선사회>(열린책들, 2012) 등을 더 참고할 수 있다.

 

 

말이 나온 김에 안중근 의사 평전도 한번 더 언급한다. 어린이용을 제외하면 황재문의 <안중근 평전>(한겨레출판, 2011), 김삼웅의 <안중근 평전>(시대의창, 2014)이 표준적이고, 박도의 <영웅 안중근>(눈빛, 2010)은 "안중근 순국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출판한 책으로, 1909년 10월 21일 우덕순 동지와 함께 이토 히로부미를 제거할 계획으로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10월 26일 거사에 성공하고 1910년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기까지 150여 일에 걸친 안중근의 마지막 여정을 현지답사하고 기록, 정리하였다." 이수광의 <안중근 불멸의 기억>(추수밭, 2009)과 원재훈의 <안중근, 하얼빈의 11일>(사계절, 2010)도 안 의사에 행적에 대한 답사에 근거해 쓰인 책이다...

 

14. 12. 2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난 수요일에 방송대에서 개최된 학술대회의 발표문을 옮겨놓는다. '번역을 묻고 답하다'란 전체 주제에서 내게 할당된 건 '세계문학과 번역의 문제'였는데, 세부적인 문제를 다루기 전에 아예 '세계문학은 번역문학'이라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총론적인 문제제기를 담았다. 다만 시간에 쫒겨 전날밤에야 원고를 시작할 수 있었으니(그래서 자료집에는 빠지고 별지로 나갔다) 더 살이 붙은 글은 다음을 기약해야겠다. 따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세계문학론과 관련해서는 <세계문학의 가장자리에서>(현암사, 2014)와 <세계문학론>(창비, 2010)을 참고할 수 있다. 본문에서 주로 참조한 책은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의 <나는 어떻게 번역가가 되었는가?>(씨앗을뿌리는사람, 2004)이다. 현재는 절판돼 아쉬운 책이다.

 

 

 

세계문학에도 공용어가 있는가

 

개념에 대한 간단한 정의에서부터 시작해보자. 먼저, 세계문학이란 무엇인가? 이 문제적 용어/개념에 대해서는 다양한 정의가 가능한데,  가장 기본적으로는 두 가지 구분법이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1)세계문학=세계의 문학, (2)세계문학≠세계의 문학. ‘세계의 문학’으로서 세계문학이란 단순하게 말하면 세계 전체의 문학이다. 각 국민문학의 총합으로서의 세계문학을 떠올려보면 되겠다. 현실적으로 그러한 총합이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그 이미지조차 상상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현재 전 세계 인구가 73억이라고 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 모든 사람들을 한데 모을 수는 없겠지만 ‘73억 인구’라는 표상은 가능하다. 그 73억 가운데 1인으로서 우리는 ‘세계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우리가 세계시민이라고 할 때는 그 73억 인구 전체를 가리키지 않는다. 이 경우에도 세계시민으로서 세계인이라고 하면, 그것은 세계인구 전체를 가리키는 세계인과는 구별되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니까 세계인의 경우에도 ‘세계인=세계인구’ ‘세계인≠세계인구’를 구분해볼 수 있고, 세계시민은 후자와 연관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세계시민으로서 세계인’을 따로 설정해볼 수 있는 것이다.

 

세계어 개념은 어떤가. 이 또한 세계의 언어, 세계의 모든 언어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쓰일 수 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론 세계적으로 널리 통용되는 공용어를 지칭할 수 있다. 사용인구수로 보자면, 영어와 중국어, 스페인어 같은 언어를 떠올릴 수 있겠다. ‘공용어’의 사전적 의미는 (1)한 나라 안에서 공식적으로 쓰는 언어, (2)국제회의나 기구에서 공식적으로 쓰는 언어, 두 가지다. 여기서는 두 번째 의미로 사용한다면, 공용어로서 세계어란 국제회의나 국제적인 스포츠대회에서 사용되는 공식 언어를 뜻하게 된다. 영어와 프랑스어가 대표적이다. 중요한 것은 세계의 언어 전체를 가리키는 개념이 아닌 세계어는 몇몇 언어에 한정된다는 것이다. ‘세계문학에도 공용어가 있는가’란 질문은 바로 이런 맥락의 세계어(공용어)로 쓰이거나 번역된 문학만이 세계문학인가라는 물음이기도 하다.

 

이 물음은 아주 단순한 사실에서 제기된다. 세계음악이나 세계미술과는 달리, 세계문학은 언어라는 필수적 매개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언어는 소통의 수단이면서 동시에 소통을 가로막는 장벽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언어는 에스페란토 같은 인공어가 아니라 자연어이다(현재 200만명 정도의 사람이 에스페란토로 대화를 할 수 있다고 하며 2000-3000명가량은 에스페란토가 모어라고 한다. 하지만 에스페란토의 가장 큰 한계는 자체의 고유한 문학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 아닐까. 에스페란토로 된 번역문학이 아닌 에스페란토로 쓰인 <돈키호테>와 <파우스트>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 말이다). 자연어 간에 가로놓인 장벽은 과거 동서독을 갈랐던 베를린 장벽만큼 현실적이다. 현실에 존재하는 모든 문학작품은 일차적으로 이러한 자연어로 쓰였다. 그런데, 거기에 덧붙여서 그 특정한 자연어가 문학적 세계어로 통용되는 언어라면 그 위상이 달라진다. 한국어로 쓰인 작품과 영어나 불어로 쓰인 작품이 등가적인 위상을 갖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배타적인 우위성을 갖는 것이 유럽어(영어를 포함하여 유럽 각국의 언어)라는 점은 따로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세계문학의 한 가지 표준으로서 노벨문학상만 하더라도 20세기 전반기에(1901년부터 2차 세계대전이 종전되는 1945년까지를 기준으로 하면) 유럽 외 지역 수상자는 타고르(1913, 인도)와 가브리엘라 미스트랄(1945, 칠레), 두 명의 시인뿐이었다. 지역적으로는 아시아와 남미의 최초 수상자가 되지만, ‘수상언어’로 보면 그러한 지역성의 의미는 반감된다. 타고르는 벵골어로 시를 쓰면서 동시에 그 자신이 영어로 번역했고, 외교관이었던 미스트랄은 스페인어로 시를 썼다. 언어로는 영어와 스페인어 시인이었으니 ‘유럽어’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은 것이다. 유럽에서 언어적 변방에 해당하는 것은 러시아와 동유럽 정도이다(이 경우에도 주요 작품들이 다른 유럽어로 번역‧소개되었으며, 같은 유럽어 사이의 언어적 장벽은 상대적으로 높지 않다).

 

 

언어적 관점에서 보자면 최초의 가장 인상적인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1968년에 수상자로 선정된 일본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다. 무엇보다도 유럽의 언어들과는 아주 이질적인 일본어로 쓰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일본 작가에게 상이 수여될 수 있었을까. 아주 당연한 일이지만 ‘번역’되었기 때문이다. 가와바타의 작품들이 세계문학으로 읽히는 건 일본어 원작 그대로가 아니라 번역으로서다. 이러한 사실을 극명하게 확인시켜주는 것이 번역자인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의 회고이다(<나는 어떻게 번역가가 되었는가?>).

 

 

다니자키 준이치로와 함께 가와바타 야스나리를 일본의 대표적 작가로 본 그는 두 작가의 작품을 다수 영어로 번역했고, 서구에 전후 일본문학이 소개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가와바타는 1961년부터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명되는데, 이때 심사에 사용된 스웨덴어판 <설국>의 번역도 사이덴스티커의 영역본에서 중역된 것이다). 심지어 그는 시상식장에도 가와바타와 동행하며 수상연설문을 번역하고 일부 대독하기까지 했다(일어 인용만 가와바타가 낭독했다). 가와바타는 그런 공로를 높이 사서 번역본 인세의 절반이 사이덴스티커에게 돌아가도록 했다. 사실상의 ‘수상작’은 그의 일어작품들이 아니라 영어 번역본들일 것이기에(사이덴스티커는 자신의 번역 작업에서 <설국>을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데, 그것은 제일 잘 돼서가 아니라 제일 재밌었기 때문이라고 술회한다.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가장 어려웠기 때문이기도 한데, 그것은 달리 말하면 그만큼 역자에게 재량권을 허용한 것이기도 하다), 온당한 처사라고도 여겨진다. 사이덴스티커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적었다. “가와바타는 이 상의 절반은 나의 것이라고 언론에 말했다. 더할 나위 없이 친절한 말이기는 하지만, 나의 번역이 없었더라면 수상 후보자조차 될 수 없었다는 것은 십중팔구 사실이리라.”

 

가와바타의 사례가 시범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세계문학의 언어적 존재방식이다. 두 가지가 가능하다. 세계문학의 주류 언어로서 유럽어라는 패권적 세계어로 쓰인 것과 그밖의 자연어로 쓰였지만 그러한 세계어로 번역된 것. 이 또한 아주 단순하게도 누가 어떤 언어로 읽느냐는 문제에서 비롯한다. 다시 한 번 사이덴스티커를 인용하면, “노벨문학상은 다른 노벨상과는 달리 스웨덴 아카데미에서 심사, 선정하는데, 이곳은 소수의 스웨덴 저명문인들로 선출, 구성된 종신 기관이다.” 이 ‘소수의 스웨덴 저명문인’들의 모국어는 물론 스웨덴어일 것이며 주변의 북유럽어에도 친숙할 것이다. 더불어 영어와 불어, 독어 등이 모국어에 가까운 제2외국어일 것이며, 기타 러시아어를 비롯한 다른 유럽어들이 선택어에 해당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이들이 중국어나 일본어로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하물며 한국어로?). 


현재 세계경제의 중심은 13억 인구의 중국이지만 중국어가 세계문학의 중심언어가 되는 일은 아직 기대하기 어렵다. 그것은 중국 패권시대가 도래하고 중국어가 외교와 비즈니스의 주요 언어가 된 이후에도 더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다. 비교하자면 세계문학에서는 핀란드어나 노르웨이어, 덴마크어보다도 그 비중이 작은 게 중국어이다. 중국 작가 모옌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2012년에 가서야 이루어진 것은 중국의 개방과 경제적 부상 이후로 한 세대 정도가 소요된 이후이며 다수의 작품이 좋은 번역자에 의해 번역된 것이 결정적이었다. 언어의 관점에서 보면 ‘문학의 그리니치 자오선’은 실재한다. 그것이 스톡홀름과 파리 사이에 그어지지 않을까. 

 

 

이러한 맥락에서 세계문학을 다시 정의한다면 그것은 세계어 내지 세계문학 공용어로 쓰이거나 옮겨진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번역이란 조건을 문제 삼자면 이 정의는 상대적이다. 어떤 작품은 번역되지 않고도, 또 어떤 작품은 번역되어야만 세계문학이 되는 것일까. 세계문학의 조건은 차등적인 것일까. 사실 ‘세계문학(Weltliteratur)’이라는 문제적 용어의 저작권자인 괴테가 이 말을 처음 발설한 맥락에서 보자면, 번역은 부차적인 계기가 아니라 필수적인 계기다. 1827년 에커만과의 대화에서 “민족문학이라는 것은 오늘날 별다른 의미가 없고, 이제 세계문학의 시대가 오고 있으므로, 모두들 이 시대를 촉진시키도록 노력해야 해.”라고 말한 것은 번역된 중국 소설을 읽은 감흥이 계기였다(“요즘 자네와 만나지 못한 이후로 여러 가지 책을 많이 읽었네. 특히 중국 소설 한 권은 아직 다 읽지는 못했지만 매우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 보이네.”).

 

이것을 일반화하자면 번역은 세계문학의 필수 조건이다. 번역이 없다면, 국민문학이거나 지역문학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노벨문학상 역시 초기에는 지역문학상의 성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심지어 톨스토이조차도 수상자에서 빠진!). 다르게 말하면, 세계문학은 오직 번역을 통해서, 번역문학으로서만 존재한다. 세계어도 국민국가 안에서 소통될 경우에는 일개 자연어에 불과하다. 그것은 다른 언어를 모국어로 한 외국인과의 소통에 이용될 때 비로소 세계어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세계문학의 또 다른 자오선은 세계문학전집이 유례없이 출간되고 있는 한반도를 지나지 않을까. 최소한 우리는, 한국어는 그 자오선의 유력한 후보이지 않을까. 이것은 거꾸로 줄 세우기와 비슷한 효과이다. 한국어는 세계문학과 세계어의 변방에 속하지만, 번역을 세계문학의 핵심 조건으로 인정한다면 거꾸로 앞장 서는 위치에 있을 수 있다. 우리에겐 거의 대부분의 세계문학이 번역으로 존재하는 번역문학이기 때문이다(심지어 우리에겐 한국고전들도 번역문학이다).

 

세계문학의 공간은 어디에 있는가? 어떤 언어적 평면에 놓여 있는가? 모국어로 쓰인 문학을 읽는 것은 세계문학을 읽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세계문학의 공간은 바로 번역문학의 공간이다. 외국어로 읽거나 번역된 작품으로 읽는 것이 세계문학의 독서다. 그 경우 세계문학의 공간은 사이덴스티커가 <설국>을 번역하면서 느낀 애로와 재미의 공간이다. 이 애로와 재미는 고스란히 우리의 것이기도 하다. 세계문학과 번역의 문제는 바로 이러한 사실은 승인한 자리에서 다시 생각되어야 할 것이다.

 

14. 12. 1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첫 세 권이 출간되고 뜸하던 게오르그 짐멜 선집의 넷째 권이 출간됐다. <개인법칙>(길, 2014). 더불어 '게오르그 짐멜의 모더니티 단편 단편들' 시리즈가 새로 시작되는 듯한데, 그 첫 권으로 <돈이란 무엇인가>(길, 2014)가 같이 나왔다. 사실 짐멜의 책은 <돈의 철학>(길, 2013)과 꽤  오래 전에 나온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새물결, 2005)를 제외하면 이 시리즈들이 거의 전부다. 겸사겸사 묶어서 리스트로 만들어놓는다. <돈이란 무엇인가>는 <돈의 철학> 입문서로도 읽어볼 수 있겠다...

 


9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돈이란 무엇인가
게오르그 짐멜 지음, 김덕영 옮김 / 길(도서출판) / 2014년 12월
20,000원 → 18,000원(10%할인) / 마일리지 1,000원(5% 적립)
2014년 12월 18일에 저장
품절
돈의 철학
게오르그 짐멜 지음, 김덕영 옮김 / 길(도서출판) / 2013년 10월
55,000원 → 49,500원(10%할인) / 마일리지 2,750원(5% 적립)
2014년 12월 18일에 저장
품절
개인법칙- 새로운 윤리학 원리를 찾아서
게오르그 짐멜 지음, 김덕영 옮김 / 길(도서출판) / 2014년 12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양탄자배송
밤 11시 잠들기전 배송
2014년 12월 18일에 저장

예술가들이 주조한 근대와 현대- 미켈란젤로.렘브란트.로댕
게오르그 짐멜 지음, 김덕영 옮김 / 길(도서출판) / 2007년 1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2014년 12월 18일에 저장
품절


9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