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서 한권을 '이주의 발견'으로 적는다. 아비에저 터커의 <이럴 때 소크라테스라면>(원더박스, 2014). 원제는 '모두를 위한 플라톤(Plato for everyone)'이다. '플라톤'이 '소크라테스'로 탈바꿈한 건 플라톤의 대화편 대부분에서 저자의 대역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소크라테스이기 때문이다. 번역본의 부제는 '지금 우리에게 정의, 쿨함, 선악, 양심, 죽음이란 무엇인가'.

 

저자 아비에저 터커는, 플라톤 대화편 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한 다섯 작품 <크리톤><메논><에우티프론><변론><파이돈>이 우리 시대와 호흡할 수 있는 한 가지 길을 이 책에서 선보였다. 1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소크라테스와 상대방이 나누는 대화를 단편 소설 형식으로 써내려간 이 책에서, 저자는 플라톤 대화편의 내용 전개를 고집스럽게 따라가며 플라톤 철학의 맥락을 놓치지 않고 있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지라 저자도 생소한데, 프로필에 따르면 "매릴랜드 대학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컬럼비아 대학에서 박사 후 과정으로 정치학을 연구했다. 세계 여러 나라의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했으며, 현재는 하버드 대학의 데이비스 센터에서 연구원으로 있다." 그리고 저서로는 <과거에 대한 우리의 지식: 역사편찬학의 철학><체코 반골들의 철학과 정치학: 파토치카부터 하벨까지><역사와 역사편찬학의 철학 안내서>(편저) 등이 있다. 체코의 반체제 철학자와 지식인들에 대한 책이 흥미를 끈다.

 

 

용도를 찾자면 <이럴 때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대화편들을 읽을 때 같이 읽어볼 만한 '사이드북'이다. 나로선 <메논>과 <에우티프론>을 제외하고 나머지 대화편들에 대해서는 강의를 진행해본 적이 있어서 흥미를 가질 만한데, 일반적인 독자도 그럴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최소한 <변론>(<소크라테스의 변론>을 말한다)이나 <파이돈> 정도는 읽어본 독자라야 하지 않을까.

 

 

책은 원더박스에서 나왔는데, 작년초에 첫 책을 낸 신생 출판사다. 검색해보니 2년간 8권의 책을 펴냈다. 그 가운데 <원더박스>와 <아이아스 딜레마> 같은 책이 포함돼 있다. 흥미를 끄는 책들이지만, 독자들이 많이 찾을 성싶진 않다(모두를 위한 책임에도!). 이런 종류의 책을 찾아내는 안목도 놀랍지만(<이럴 때 소크라테스> 같은 경우는 국내에 소장하고 있는 도서관이 한 곳도 없다) 그걸 출판까지 뚝심있게 밀어붙이는 저력도 높이 살 만하다. 아마도 3년차가 되는 내년이 고비일 듯한데, 잘 버텨내면 좋겠다. 지속가능한 독서를 위해서는 출판 또한 지속가능해야 하니까...

 

14. 1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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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노 시게키의 <서양 정치사상사 산책>(교유서가, 2014)에서 본문보다 먼저 펴본 곳은 '독서안내'다. 서양 정치사상에 대한 개관(산책)을 읽은 뒤에 "서양 정치사를 좀더 폭넓고 깊이 있게 공부해보려 할 경우에는 어떤 책들을 읽으면 좋을까?"란 질문에 대한 자문자답.

 

 

전체적인 개관으로 저자가 '강추'하는 책은 사사키 다케시의 <민주주의라는 이상한 시스템>(2007)이다. 절판된 책이긴 한데, <교양으로 읽어야 할 절대지식>(이다미디어, 2004)의 편자가 사사키 다케시다. 1942년생으로 도쿄대학교 총장까지 역임한 인물인데, 프로필에 따르면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플라톤과 정치><현대 미국의 보수주의> 등의 저작을 갖고 있다. 1967년생인 우노 시게키가 도쿄대 법학정치학연구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걸 고려하면 얼추 사제지간이 아닌가 싶다. 우노 시게키는 현재 도쿄대 사회과학연구소 교수로 재직중이다(대학교수와 연구소교수가 분리돼 있는 건가?). 아무튼 도쿄대에서 줄곧 서양 정치사상을 강의해온 인물들이라면 기꺼이 소개됨직하다.

 

 

이러한 입문서를 제쳐놓으면 좀 묵직한 저작들이 나온다. 저자가 가장 강력하게 추천하는 저자는 J. G. A. 포칵(존 그레빌 에이가드 포칵)과 퀸틴 스키너. 스키너에 대해서는 언젠가 한번 언급한 적이 있는데, 주저는 <근대 정치사상의 토대1>(한길사, 2004)와 <근대 정치사상의 토대2>(한국문화사, 2012)다(학술명저번역 총서로 나온 번역본은 중간에 전담 출판사가 바뀌어서 이상한 모양새가 돼버렸다). 거기에 덧붙여 <자유주의 이전의 자유>(푸른역사, 2007)를 추천하는데, 현재는 절판된 상태다.

 

 

그리고 또 가장 기본적인 텍스트로 추천되는 책이 포칵의  <마키아벨리언 모멘트>(나남, 2011)이다. 이미 학계에서는 정평이 나 있는 책이어서 군말이 필요하진 않다. 한국어판의 소개는 이렇다.

J.G.A. 포칵(존스홉킨스대 명예교수)에게 세계적 명성을 안겨주며 공화주의 논쟁이 새롭게 타오르게 했던 명저 <마키아벨리언 모멘트: 피렌체 정치사상과 대서양의 공화주의 전통>이 초판 출간(1975) 이후 35년 만에 국내에서 처음으로 완역되어 발행된다. 마키아벨리즘을 전공한 부산대 사학과 곽차섭 교수가 수년 동안 번역작업에 매진한 결과로, 이 책을 둘러싼 지난 수십 년간의 논쟁에 대해 포칵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2003년 판의 저자 후기가 포함되어 있다.

스키너의 책들은 다 구입해놓았지만 포칵의 책은 보류하고 있었는데, 문학과 정치(유토피아 사상)를 다루는 강의도 내년에 계획하고 있어서 겸사겸사 읽어보려고 한다. 이번 겨울이 좋을까.

 

스키너와 포칵의 책은 '프롤로그'와 관련한 추천도서이고 각 장마다 추가되는 책들이 더 있다. 당장은 서양 정치사상사를 바라보는 전체적인 시각과 이론에 대해 관심이 있는지라 <마키아벨리언 모멘트>와 <근대 정치사상의 토대>, 두 권만 언급해둔다. 이 책들을 읽기 전에 물론 <서양 정치사상사 산책>을 일독해두는 게 필요하겠다. 웨이트트레이닝으로 넘어가기 전의 가벼운 워밍업이라고 할까... 

 

14. 1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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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저자'를 고른다. 물리학자이자 과학사상가 내지 생명사상가라고 해야 할 장회익 선생의 책 두 권이 개정판으로 한꺼번에 나왔기에 머리에서 언급한다. <공부 이야기>(현암사, 2014)와 <삶과 온생명>(현암사, 2014)가 그것으로 먼저 나온 <과학과 메타과학>(현암사, 2012)까지 포함해 '3부작'을 이룬다. <공부 이야기>에 대한 소개는 이렇다.

 

장회익 선생의 베스트셀러인 <공부도둑>의 개정신판인 <공부 이야기>가 새 모습으로 출간되었다. 끝없이 앎을 추구하며, 평생 앎과 숨바꼭질하며 살아온 생애의 자취를 더듬으며 선생은 자신을 때로는 공부꾼 때로는 앎을 훔쳐내는 학문도둑이라고 말한다. 그저 앎을 즐기고 앎과 함께 뛰노는 것이 좋았던 어린 시절, 청소년 시절, 대학 시절, 유학 시절에 이어 장년을 지나 노년의 지금까지 여일한 ‘공부하는 삶’이 담백하고 아름답다.

다른 두 권보다 앞세운 것은 공부 입문이면서 장회익 입문도 겸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특히나 수능을 치른 예비 대학생들이, 더구나 자연과학 계열 진학을 희망하는 학생이라면 필독해봄직하다.

 

 

말이 나온 김에, 예비 대학생이 읽어봄직한 또 다른 책은 역사학자 박상익 교수의 <나의 서양사 편력1,2>(푸른역사, 2014)이다.

<번역은 반역인가>, <밀턴 평전> 등의 저서와 <호메로스에서 돈키호테까지>, <뉴턴에서 조지 오웰까지>, <러셀의 시선으로 세계사를 즐기다>,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등 다수의 저서와 번역서를 통해 서양사를 우리 현실과의 관련 속에서 이해하는 데 힘써온 저자 박상익의 <나의 서양사 편력>. '나를 깨우는' 서양사의 장면들에 주목한다. 고대, 중세, 근대, 현대의 시대순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에서 저자는 우리의 현실을 비춰주는 거울이 될 만한 서양사의 94개 장면들을 모았다. 여기에 저자가 오랜 기간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연구한 주제인 존 밀턴에 관한 5편의 글을 한데 모아 별도로 편성했다.

영국의 탁월한 시인이자 혁명가였던 밀턴에 대한 글이 5편 포함된 것은 저자가 <밀턴 평전>(푸른역사, 2008)을 펴낸 사실을 떠올려준다.

 

 

그리고 작가 조정래 선생의 산문집도 출간됐다. <조정래의 시선>(해냄, 2014). 소설이 아닌 다른 형식의 글은 생각보다 드문 편인데, 수년 전에 나온 '작가생활 40년에 대한 자전에세이' <황홀한 글감옥>(시사IN북, 2009)과 산문집 <누가 홀로 선 나무>(문학동네, 2002) 정도가 있을 뿐이다. 소설 밖 육성과 만날 수 있는 드문 기회.

<조정래의 시선>은 '문학과 우리 역사 그리고 사회적인 긴급한 문제에 한해' 발언한다는 원칙을 문학인생 45년간 지켜온 작가가 인터뷰와 강연, 신문 칼럼 등에 공개한 의견을 엄선하고 미처 전달되지 않은 내용을 보충하여 정리한 산문집이다. 사회구성원이자 치열한 문학인, 그리고 후회 없는 생을 살아온 한 사람으로서 소설에서 직접 말하지 않은 문학론, 인생관, 민족의식, 사회 인식을 담은 이 책은 '인생이란 자기 스스로를 말로 삼아 끝없이 채찍질을 가하며 달리는 노정이고, 두 개의 돌덩이를 바꿔 놓아가며 건너는 징검다리'라고 정의한 작가의 '매 순간 진정을 다 바친 내 인생의 결정들'이다.

연말이라 그런지 세 저자의 책들이 모두 한 생애, 내지 한 시대를 축약하고 있다. 연말의 독서거리로는 맞춤하다 싶다. 막 성년을 앞둔 젊은 세대 독자들의 손길이 많이 닿았으면 싶다...

 

14. 1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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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에 잠시 들여다본 책은 개정 번역판으로 나온 <안티 오이디푸스>(민음사, 2014)다. 예판시 주문을 했고 며칠전에야 펭귄판 영역본과 함께 배송받았다(영어판을 따로 갖고 있지만 바로 찾을 수가 없어서 펭귄판도 같이 주문했다). 이전 번역판과는 달리 미셸 푸코의 영어판 서문 '비-파시스트적 삶의 입문서'가 서문격으로 번역돼 있어서 일단은 다행스러웠다(물론 이 서문을 읽다가 책을 덮는 독자들도 많이 있으리라). 그리고 예의 아주 유명한 서두를 읽다가 오래 전에 쓴 페이퍼가 생각났다. 2005년 7월에 쓴 '말하는 입과 먹는 입'이다(즐찾 300이 넘은 걸 기념하여 쓴 페이퍼인데, 그 후 거의10년이 지났고 현재는 5660명이다. 한 세월이 지나간 듯한 느낌이다). 새 번역본이 20년만에 나온 김에, 거의 10년 전 페이퍼도 다시 읽어보는 의미에서 옮겨놓는다. <안티 오이티푸스>의 첫 대목에서 '그것'에 대한 해석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번에 나온 김재인판의 번역은 이렇다.

 

그것(Ça)은 도처에서 기능한다. 때론 멈춤 없이, 때론 단속적으로. 그것은 숨 쉬고, 열 내고, 먹는다. 그것은 똥 싸고 씹한다. 이드(le ça)라고 불러버린 것은 얼마나 큰 오류더냐? 도처에서 그것은 기계들인데, 이 말은 결코 은유가 아니다. 그 나름의 짝짓기들, 그 나름의 연결들을 지닌, 기계들의 기계들.  

다음 단락부터는 2005년의 글이며, 빌미로 삼은 김항의 글은 <말하는 입과 먹는 입>(새물결, 2009)에 수록돼 있다. 한편 새 <안티 오이디푸스>의 판권면에 책의 1판 1쇄가 1997년 4월 25일에 나왔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1994년에 나온 만큼 3년이 누락되었다. 1994년에 첫 번역본이 나왔다는 사실은 '옮긴이의 말'에서도 언급되고 있는데 이런 착오가 발생한다는 건 놀랍다. 편집자가 너무 무신경했다...

 

브리핑 거리들은 정말로 널려 있지만, 책상에서 제일 먼저 손에 잡힌 건, 혹은 가장 만만하게 눈에 띈 건 김항의 "말하는 입과 먹는 입"(<세계의문학>, 2005년 여름호)이다(사실은 데리다의 "이론을 좇아서"란 글을 염두에 두었지만 아직 다 읽지 않았다). 필자는 동경대학교 박사과정에 있는데, 히로마쓰 와타루의 <근대초극론>(민음사)를 우리말로 옮긴바 있고, 나는 <세계의 문학>지에서 그의 글을 두번째로 읽게 되었다. 국가와 폭력이란 주제를 다루고 있는 이 글은 생각보다 견적이 많이 나온다. 제대로 검토하기 위해서 참조해야 할 저자들이 여럿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룰 수 있는 건 그냥 글의 서두뿐이다. 이 서두는 <안티 오이디푸스>의 서두이기도 하다. 

"그것(Ça)은 작동하고 있다. 때로는 흐르며, 때로는 멈추면서, 도처에서 그것은 작동하고 있다. 그것은 호흡을 하고, 그것은 열을 내고, 그것은 먹는다. 그것은 똥을 싸고, 그것은 섹스를 한다. 그럼에도 '한데 싸잡아 그것(le ça)'이라 불렀으니 얼마나 잘못된 일인가. 도처에서 이것은 여러 기계들이다. 게다가 결코 은유가 아니다. 이것들은 서로 연결하고, 접속하여 기계의 기계가 되는 것이다."

이 문단에 대한 필자의 해설: "여기서 '그것(Ça)'은 입이다. 호흡하고, 열을 내뿜고, 먹는 입. 항문과 연관되고 성기를 빠는 입. 이렇게 다른 기계와 연결된 기계인 입을 '그것(le ça=Es)'이라 부른 일, 즉 정신분석학에서 무의식에 해당하는 '그것'이라 싸잡아 부른 것은 잘못이었다. 입을 대표하는 입 일반은 없기 때문이며, 입은 항상 무언가에 연결된 기계이기 때문이다. 정신분석가만이 입을 그것(Es)이라 부르며 안심한다."(강조는 나의 것)

 

이 대목을 읽고 내가 제일 먼저 떠올린 것은 몇 년 전의 '논쟁(?)'이다. <문학과 사회> 2002년 여름호에 이종영의 "파시스트 들뢰즈와 가타리가 반(反)파시즘을 말하다"란 글이 실렸고(이 글의 풀-버전은 <내면성의 형식들>(2002)에 '들뢰즈와 가타리의 파시즘과 반(反)파시즘'이란 보론으로 들어가 있다), 이어서 이를 반박하는 김재인의 글 "파시즘과 비인간주의 사이에서 외면당하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가을호에 게재됐다. 이 논쟁의 핵심(즉, 들뢰즈/가타리가 파시스트냐 아니냐)은 여기서의 관심사가 아닌데, 다만 흥미로웠던 건 인용한 대목에서 '르 싸'의 해석을 놓고 벌어진 논쟁이었다.

 

자신이 엉터리 번역본인 국역본 <앙띠 오이디푸스>를 참조하고 있다고(그러니까 <안티 오이디푸스>를 제대로 읽지 않았으며 당연히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고) 비난하는 김재인에 대해서 이종영은 독자들/친구들에게 이렇게 호소했었다: "김재인 씨는 <앙띠 오이디푸스> 한글판의 번역이 엉망이고 ‘위서’에 가깝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김재인 씨가 사례로 제시한 내용은 저를 어리둥절하게 합니다. 김재인 씨는 <앙띠 오이디푸스> 한글판에서 잘못된 번역의 대표적 사례로 <앙띠 오이디푸스>의 첫 문단을 듭니다. 즉 한글판에서 ‘이드’(Id, das Es)로 옮겨놓은 첫 문단의 ‘싸’(ça)가 ‘이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앙띠 오이디푸스> 첫 문단의 ‘싸’(ça)는 명백히 ‘이드’입니다. 왜냐하면 들뢰즈와 가타리가 그렇게 말하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숨쉬고 뜨거워지고... 똥누고 성교를 하는’ ‘그것’에 대해 말한 후, ‘그것’을 정관사를 붙여 ‘르 싸’(le ça)라고 한 것은 잘못이었다고 합니다. 이때 그들은 정관사 ‘르’를 강조합니다... 김재인 씨는 이 첫 문단의 ‘그것’이 ‘입’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똥누는 것은 토악질을 하는 것이고 성교는 하는 것은 키스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도대체 이러한 자의적 해석을 하는 사람이 과연 <앙띠 오이디푸스>를 최명관 씨보다 더 잘 번역할 수 있을지 의문이 갑니다."

 

이에 대해서 김재인은 이렇게 반박한바 있다: "내 주장을 반복하면 이렇다. 들뢰즈-가타리가 ‘르’를 떼어야 한다고 했을 때 이는 ‘의도적인 혼동’을 염두에 두고서 그렇게 한 것이다. 즉 프로이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또는 프로이트를 혼동시키기 위해. 왜냐하면 그들이 보기에 프로이트는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단수 정관사를 쓴 것은 더더욱 잘못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복수 부정관사를 써서 ‘des ça’라고 했어야 옳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양체요 리좀이다. 그래서 첫 문단의 그것이 ‘입’을 가리킨다는 점은 명백하다. 나는 모든 ‘그것’이, ‘그것’ 일반이 입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입은 그것의 한 사례라는 것을 말하고자 했을 뿐이다. 첫 문단의 서술을 잘 읽어보면 이 점은 명백하다(절대로 자의적 해석이 아니다). 이런 해석을 제시한 것은 내가 처음이다."(강조는 나의 것)

 

그리고 이제 김항이 두번째인 듯하다(하지만, 이 '독특한 해석'의 반복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나로선 이 서두에서의 '그것(Ça)'이 어떻게 '입'으로 해석될 수 있는지 자못 궁금하고 신기하지만 두 사람이나 이런 '독특한' 해석(처음 김재인이 그러한 견해를 제시했을 때, 그것은 그 자신의 말대로 '유일무이한' 해석이었다. 전세계를 통틀어서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김항만 빼놓고)을 제안/지지할 때는 정색하게 된다. 정말로 '입'이 열을 내면서, 먹으면서, 똥을 싸고 섹스를 하는가? 아마도 김재인/김항은 토악질=똥으로 오랄섹스=섹스라는 비유적 등식화를 여기서 추가적으로 요구하게 될 듯하다(정신분석학이 모든 게 '그것=입'의 문제라고 주장하며 오랄섹스에 대해 근심하는 학문인가? 정신분석가만이 입을 그것(Es)으로 부르며 안심한다? 나는 어떤 정신분석가들인지 궁금하다). 하지만, 들뢰즈/가타리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은유/비유를 혐오한다(이것들은 은유가 아니다!). 고로 똥은 똥이고 섹스는 섹스다.

 

김항의 인용/번역문에서 바로 제시돼 있듯이, "도처에서 이것(Ça)은 여러 기계들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목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지만, 유방이나 입은 이 기계들 가운데 하나이다. 상식적으로 읽을 때, 들뢰즈/가타리는 이 (욕망하는)기계들을 통칭해서 그것(독어로 Es/ 불어로 le Ça/ 영어로 Id)이라고 정신분석학이 명명한 것에 반대하는 것이다. 그것은 기계들의 복수성을 일반화하고 단수화하는 것이기 때문에(반복하지만, '기계들'은 결코 은유가 아니다. 더불어 그것은 '입'이라는 단일한 기계가 아니라, '기계들'이다). 물론 이어지는 대목에서 보듯이, 식욕상실자의 입은 '먹는 기계', '항문기계' '말하는 기계' '숨쉬는 기계' 어느 것(=기능)이 될지 불확정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입이 '기계들'의 대용어나 통칭어가 될 수는 없다.

 

김재인은 "나는 모든 ‘그것’이, ‘그것’ 일반이 입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입은 그것의 한 사례라는 것을 말하고자 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맞는 얘기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맨처음 '그것'은 입이 아니다. 김항은 "정신분석학에서 무의식에 해당하는 '그것'이라 싸잡아 부른 것은 잘못이었다"라고 말했다. 맞는 얘기다. 하지만, 내가 아는 정신분석학에서 입을 무의식(=그것)이라 부르지 않는다. 나는 두 유능한 연구자의 입에서 왜 이런 '독특한' 주장이 반복되는 것인지 다시금 궁금하고 신기하다...

 

여기까지가 2005년에 쓴 것이다. 문득 생각이 나서 역자의 견해가 그간에 변함이 없는지 알고 싶었지만 책에는 따로 역자의 주석이 붙어 있지 않다. 분량을 감당하기 어려워서 '가이드북' 형식의 책을 따로 펴낼 예정이라 한다. 그래서 좀더 기다려봐야겠지만, 여전히 같은 견해라면, 나로선 또 계속 궁금하고 신기할 듯하다(프로이트가 '그것'을 '이드'라고 부름으로써 '욕망 기계들'을 부당하게 축소했다는 게 내가 이해하는 들뢰즈의 입장이다). '옮긴이의 말'에서 역자가 적은 소회는 이렇다.

이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여러 강의도 진행했고 논문들도 썼지만, 옮긴이 자신도 내용을 충분히 숙지했는지는 여전히 자신이 없다. 다만 외국에서 간행된 저술들과 논문들 그리고 국제 학술대회에서 접한 강연과 대화를 통해, 아직 <안티 오이디푸스>는 현 시점에서 세계적으로 충분히 이해된 책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확인은 특별한 자신감으로 다가왔으며, 번역 작업을 이쯤에서 마쳐도 되리라는 결심을 굳히게 했다. 언제까지 혼자서만 읽는 텍스트로 놔둘 수는 없으며, 한국어를 읽을 수 있는 모든 이가 공유해야 할 시점이 되었다는 느낌이 든 것이다.

요컨대 역자의 관점에서 보자면, 한국어판 <안티 오이디푸스>는 '자신 없음'과 '특별한 자신감' 사이에 놓여 있다. 독자의 관점에서는 어떨까? 그에 상응하여, 한국어로 읽을 수 있을지 여전히 자신이 없지만, 이번에는 분명 읽을 수 있으리라는 특별한 자신감도 든다. 내년쯤에는 결과를 알 수 있으리라...

 

14. 1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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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독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교양철학서 범주의 책들은 꾸준히, 적잖게 출간된다. 누군가는 찾고, 누군가는 읽는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나도 그 '누군가'의 한 명에 속할 텐데, 맘만 먹으면 매주 페이퍼 거리로 다룰 만한 책도 여럿 된다. 최근에 나온 책 가운데서는 리처드 테일러의 <무엇이 탁월한 삶인가>(마디, 2014)와 제니퍼 마이클 헥트의 <살아야 할 이유>(열린책들, 2014)도 그런 경우다.

 

 

<무엇이 탁월한 삶인가>는 미국의 원로 철학자로 2003년에 세상을 떠난 저자 리처드 테일러에 대한 관심과 '탁월함'이란 주제에 이끌려 손에 들게 됐는데, 국내엔 오래 전에 소개된 <형이상학>(서광사, 2006; 종로서적, 1990) 외에 <결혼하면 사랑일까>(부키, 2012)가 아주 오랜만에 추가됐고 <무엇이 탁월한 삶인가>가 세번째 책이다. '탁월함'을 주제로 삼는다지만 원제는 <자부심 되찾기: 우리 시대의 잃어버린 미덕>이다. '자부심'이 주제인 셈.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미국의 대표적인 형이상학자의 전복적 인생 지침. 행복에 이르는 탁월함을 명쾌하게 밝힌다. 자부심, 선(good)의 원래 의미는 유대-기독교 이래 현대사회에서 사라졌다. 모든 사람이 자부심을 가질 수 있고 타인에 대한 자비가 곧 선이라는 주장 등인데, 이로써 삶의 의미는 퇴색되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이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갖고 있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정당한 사랑’만이 우리 삶의 목적이며 그 근거는 탁월함이다. 부와 명예의 과시는 자부심을 주지 못하며 관습과 종교에 맞춰 살며 안주하는 것은 ‘자발적 노예’의 삶이다.

자부심이 결여된 삶은 부유하든 가난하든 노예의 삶에 불과하다는 문제의식에 공감한다면 연말 '머스트리드' 목록에 올려놓을 만하다(리처드 테일러가 국내에서 그렇게 인지도 있는 철학자는 아니라서 책의 출간 사실이 흥미롭다. 이 책을 소장하고 있는 대학도서관이 한 곳도 없다! 그래도 미주나 찾아보기가 다 빠진 건 유감스럽다).

 

 

<의심의 역사>(이마고, 2011)라는 베스트셀러의 저자 제니퍼 마이클 헥트의 책도 국내엔 세 권이 소개돼 있다. <행복이란 무엇인가>(공존, 2012)에 뒤이어 <살아야 할 이유>까지 나왔기 때문인데, 부제는 '자존의 철학'이고 원제는 <스테이(Stay)>다. '자살의 역사와 그에 반대하는 철학'이라는 원서의 부제가 책의 메시지를 좀더 분명하게 전달해준다. 일종의 '反자살론'이란 점에서 카뮈의 <시지프 신화>를 떠올려주는 책(물론 카뮈의 책보다는 훨씬 수월하게 읽힌다).

 

시인이자 역사학자인 제니퍼 마이클 헥트의 자존의 철학. 오래된 동료 시인 두 명의 자살을 목도하며 저자는 오늘날 우리가 삶과 죽음을, 특히 자기 살해에 의한 죽음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자살은 인류 역사에서 어떻게 다뤄져 왔는가? 자살을 논하는 철학자들의 시선은 어느 곳을 향하고 있는가? 현재의 우리는 자살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저자는 이러한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 역사학과 철학의 학문적 경계를 넘나들며 개인적, 학문적 역량을 이 책에 집약시킨다.

제니퍼 헥트는 1965년생으로 여러 대학을 거쳐 컬럼비아대학에서 과학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현재는 뉴욕의 뉴스쿨대학교와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시와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한다. 아무튼 진지하게 자살을 생각해본 독자라면 (손해보는 셈치고) 일독해 볼만하다. "<살아야 할 이유>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확실하고 강력한 책이다"(샌프란시스코 북리뷰)도 참고해서...

 

14. 1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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