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권의 책 제목을 이어붙인 것이고 특별한 내용은 없다. 연말에 존 스캑스의 <범죄소설>(서울대출판문화원, 2014)과 조 모란의 <학제적 학문연구>(서울대출판문화원, 2014), 두 권이 한꺼번에 나왔는데, 표지를 보면 시리즈 도서의 모양새이긴 하지만, 별다른 소개가 없다. 개인적으로는 예전에 나왔던 '비평용어 총서'의 업데이트 버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기억에 첫 권은 폴 코블리의 <내러티브>(서울대출판문화원, 2013)였던 것 같다. 찾아보니 시리즈의 모델은 루틀리지에서 나오는 '새 비평용어' 시리즈다.  

 

 

영국에서 나오는 책답게 책값이 너무 세서 구입을 보류하고 있는 시리즈이기도 한데, 번역서도 낮은 가격은 아니다. 아마도 학술서 범주의 책이라 독자가 한정돼 있다는 걸 고려한 듯. 하지만 이 정도 책이면 인문학, 특히 영문학 전공자들에게는 기본서에 해당하기 때문에(해당 분야의 가이드북인지라) 더 널리 읽힐 만하다. 학생들의 얇은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면 예전 정가가 1000원이던 '비평용어 시리즈'만큼은 아니더라도(얇은 책이긴 했다) 좀더 저렴하게 책값이 매겨지면 좋겠다. 그런 바램과 더불어 이런 책에 주목하는 독자도 있다는 점을 드러내고자 페이퍼를 적었다.

 

 

한편, 범죄소설을 주제로 한 책은 재작년에 한꺼번에 나와서 여러 번 언급한 적이 있는데, 말이 나온 김에 한번 더 적는다. 김용언의 <범죄소설>(강, 2012)과 줄리안 시먼스의 <블러디 머더>(을유문화사, 2012), 그리고 레너드 카수토의 <하드 보일드 센티멘털리티>(뮤진트리, 2011) 등이다.

 

 

내러티브 쪽으로는 한국외대와 연세대출판부에서 펴내는 학술총서에서 책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 한때 전망이 별로 없어 보이던 내러티브 연구, 곧 서사학 쪽에서, 영어권에서도 그렇고, 재활의 움직임이 느껴진다(물론 내러티브가 '스토리텔링'을 포함하게 되면 거품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부풀려져 있고). 그런 경향 가운데 하나가 내러티브 교육과 내러티브 클리닉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마이클 화이트의 책들이 국내에 소개돼 있다. <내러티브 실천>(학지사, 2014), <부부치료와 갈등해결을 위한 이야기치료>(학지사, 2012), <이야기치료의 지도>(학지사, 2010) 등.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는 나도 한권 읽어보려고 한다...

 

15. 01.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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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첫 '이주의 발견'은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알에이치코리아, 2015)다. 작가는 1922년생으로 1994년에 세상을 떠났고 원작은 1965년에 출간됐으니 사람으로 치면 이번에 만으로 쉰'이 됐다. 내막에 대한 소개가 이렇다.

 

내셔널 북 어워드(NBA) 수상작가 존 윌리엄스의 장편소설. 2013년 영국 최대의 체인 서점인 '워터스톤' 올해의 책으로 선정된 도서이다. 1965년 미국에서 발표된 후, 오랜 시간 동안 독자들에게 잊힌 <스토너>는 영국,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등 유럽 출판계와 평론가, 독자들의 열렬한 반응을 이끌어내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50년의 시차를 가볍게 뛰어넘어, 작가 존 윌리엄스가 세상을 떠난 지 20년 만에 비로소 제대로 된 세상의 평가를 받게 된 것이다.

그래서 뒤늦게 한국에도 소개된다는 얘기다. 제목이 무슨 뜻인가 했더니 주인공 이름이다. 윌리엄 스토너. 농부의 아들로 대학에 진학했다가 소위 셰익스피어에 '꽂혀서' 영문학 교수까지 된 인물이다. 소설가 줄리언 반스는 이렇게 평했다.

<스토너>는 좋은 작품이다. 주제가 탄탄하고 무게가 있으며, 읽고 난 뒤에도 마음속에 계속 남는다. 50년 만에 이 소설이 부활한 이유를 독자 여러분이 직접 찾아보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의 충고에 따르기 위해 일단 관심도서로 분류했다. 그리고 떠올리게 된 책이 로라 베이츠의 <감옥에서 만난 자유, 셰익스피어>(덴스토리, 2014)다. '독방에 갇힌 무기수와 영문학 교수의 10년간의 셰익스피어 수업'이 부제. 소설이 아니라 실화다.

 

이 책은 독방에 갇힌 한 무기수와 그에게 셰익스피어를 이야기해온 한 교수의 10년간의 실제 기록이다. 이제 겨우 30대에 들어선 래리는 10대에 살인죄로 기소되어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선고 받고 10년 가까이 독방에 홀로 갇혀 지내왔다. 학력이라고는 초등학교 5학년 중퇴가 전부인 그는, 저자인 로라 베이츠를 만날 때까지만 해도 셰익스피어가 누군지조차 모르는 상태였으며, 깊은 절망에 빠져 죽음의 환영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셰익스피어를 만나면서 그는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와 삶의 의미를 인식하고, '진정한 자유'를 깨닫는다. 그는 10여 년 만에 독방에서 풀려나고, 같은 처지의 재소자들을 위한 셰익스피어 프로그램 워크북을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프로그램은 AP, NPR, MSNBC, 디스커버리 채널 등 미국 국내외 유수 언론들의 주목을 받는다. 래리는 로라 베이츠 박사에게 고백한다. "셰익스피어는 제 삶을 구원했습니다"라고.

데이비드 실즈의 <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책세상, 2014)의 추가적인 사례라고 할까. 하긴 책의 원제 자체가 <셰익스피어가 내 인생을 구했다>로군. 아무튼 허구의 인물 스토너나 실제 인물 래리나, 셰익스피어와의 만남 때문에 인생이 바뀌었다는 공통점이 있어 같이 묶었다...

 

15. 01.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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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에 눈 뜨고 처음 읽은 글이 (문자 메시지와 메일을 제외하면) 중앙일보에 실린 소설가 김훈의 '새해 특별 기고'다(http://joongang.joins.com/article/265/16832265.html?ctg=). 제주에 있는 선배가 새해 안부와 함께 읽어보라는 문자를 보내와서 찾아 읽은 글이다. 세월호 사건과 그 이후를 다루고 있어서 <눈먼 자들의 국가>(문학동네, 2014)를 바로 떠올리게 했다. 유민이의 유품으로 돌아온, 물에 젖은 6만원 얘기는 유민 아빠 김영오의 <못난 아빠>(북앤리브로, 2014)에 나온다고. 여러 대목에서 작가의 통탄에 공감하게 되는데, 특별히 개인적으로는 '골든타임'에 대한 지적을 반복하고 싶다. 그래서 일부를 여기에 옮긴다.

 

2014년 4월 16일의 참사 이후로 사태를 바라보는 이 사회의 시각은 발작적인 분열을 일으키며 파탄되었다. 슬픔과 분노를 온전히 간직해서 미래를 지향하는 동력으로 가동시켜야 한다는 시각과 그 슬픔과 분노를 매우 퇴행적인 소모적인 것으로 여겨 혐오하는 시각이 교차했다. 거칠게 말하자면 4월, 5월까지는 전자의 시각이 우세했으나 6월 4일 지방선거에서 여당이 적지 않은 재미를 보고, 이어 7월 30일 재·보선에서 여당이 압승하자, 후자의 시각이 주류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슬픔과 분노에 오랫동안 매달려 있는 것은 경제 살리기에 해롭다는 것이 그 혐오감의 주된 논리였다. 세월호에서 놓친 골든타임이 경제회복의 골든타임으로 살아났고 거기에 이념의 날라리들이 들러붙기 시작했다. 사실 4·16참사 이후에 경기는 장기 침체에 빠졌고, 정부의 부양책은 힘을 쓰지 못했다. 모두들 슬프고 분하면 경기는 침체되는 것이니까. 슬픔과 분노가 경기침체의 원인이라는 말도 결국은 동어반복이다. 어찌 헌 옷을 벗듯이, 헌신짝을 벗어버리듯이 마음의 일을 벗어 던질 수 있을 것인가. 돈 많고 권세 높은 자들이 큰 죄를 저질러도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형량을 줄여서 선고하고, 형기 중에도 특별사면, 일반사면, 집행정지, 가석방, 병보석으로 풀어주는 무법천지를 나는 자유당 때부터 보아왔고 자유당은 지금도 특별사면 중이다. 죄형법정주의는 무너졌고 경제는 합리적이고 규범적인 토대를 상실했다.

 

재벌의 불법을 용인해야 경제가 살아나고, 정당한 슬픔과 분노를 벗어 던져야만 먹고살기 좋은 세상이 된다는 말은 시장의 논리도 아니고 분배의 정의도 아니다. 그것은 정치적인 속임수일 뿐이다. 법치주의가 살아 있어도 법이 밥을 먹여줄 리는 없고, 밥은 각자 알아서 벌어먹어야 하는 것인데, 법치주의를 포기해야만 밥을 벌어먹기가 수월해진다면 이 가엾은 중생들의 밥은 얼마나 굴욕적인 것인가.

"세월호에서 놓친 골든타임이 경제회복의 골든타임으로 살아났고"란 대목이다. 인명구조에서 쓰던 '골든타임'이 (다분히 의도적인) 용도전용 결과 경제회복이나 정치개혁 같은 말과 어울려 쓰이는 조어가 돼버렸다. 어느 사이엔가 관련 기사들에 자주 등장하는 '골든타임'이 그래서 내겐 가장 역겨운 시사용어가 되었다. '지금밖에 없는 이 기회를 놓치시겠습니까?'라고 미소를 지으며 겁박하는 게 '골드타임'론이다. 놓치면 후회할 거라는.('마지막 기회!'란 말은 홈쇼핑 전용어이기도 하군.)

 

<눈먼 자들의 국가>의 표제글에서 소설가 박민규가 잘 정의한 대로 세월호는 "선박이 침몰한 '사고'이자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이다". 밝혀져야 하는 것은 이 사건과 사고의 진상이다. 혹은 그 둘 사이의 관계다. 김훈의 표현으론 이렇다. "세월호가 침몰한 사건과 그 모든 배후의 문제를 다 합쳐서 세월호 제1사태라고 한다면, 제1사태 직후부터 이 나라의 통치구조 전체가 보여준 붕괴와 파행은 세월호 제2사태다. 이것은 또 다른 난파선이다. 제1사태와 제2사태는 양태는 다르지만 뿌리가 같아서 어느 것이 원인이고 어느 것이 결과인지 구분할 수 없는데, 과거의 제2사태가 오늘의 제1사태로 터져 나오고, 오늘의 제2사태가 미래의 제1사태를 예비하고 있다."

 

세월호특별법에 따른 위원회가 사고/사건의 진상과 책임을 어디까지 밝혀낼 수 있을지 미지수이지만, 나는 그 조사결과가 박근혜정부의 마지막 기회, 곧 골든타임이라고 생각한다. 김훈의 바램은 이렇다.

우리는 새로 생기는 위원회를 앞세워서, 세월호를 끝까지 끌고 가야 한다. 위원회가 동어반복으로 사태를 설명하지 말고 그 배후의 일상화된 모든 악과 비리, 무능과 무지,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의 공생관계를 밝히는 거대한 사실적 벽화를 그려주기 바란다. 그리고 유민이의 젖은 6만원의 꿈에 보답해주기 바란다. 나는 사실 안에 정의가 내포되어 있다고 믿는다.

왠지 결과가 눈에 다 보이는 듯하지만, 그들에게도, 눈먼 자들에게도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국민지지 회복의 '골든타임'이 어떤 것인지 그들도 여실히 경험해볼 수 있는 기회. 2015년이 그렇게 밝았다...

 

15. 01.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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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마지막 페이퍼 거리를 뭘로 하나 생각하다가, 러시아 영화 얘기로 시작한 하루였기에 모스크바예술극장을 제목에 단 시집 얘기로 마무리한다. 제33회 김수영문학상 수상시집으로 기혁의 <모스크바예술극장의 기립박수>(민음사, 2014)가 출간됐다. 재작년 수상시집이 황인찬의 <구관조 씻기기>(민음사, 2012)였고 작년엔 손미의 <양파 공동체>(민음사, 2013)였다. 간단한 소개는 이렇다.

 

2010년 「시인세계」 신인상을 받으며 시인으로 데뷔하고 201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을 통해 문학평론가로도 등단한 기혁은 이지적이면서도 감성적인 언어를 구현하는 시인으로 많은 주목을 받아 왔다. 그의 첫 시집이자 제33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이기도 한 <모스크바예술극장의 기립 박수>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이미지의 연쇄를 통해 이제껏 본 적 없는 기이하고 아름다운 시적 무대가 된다. 시인 기혁은 이러한 시적 무대의 연출자 겸 배우, 혹은 조명 기사 겸 관객이 되어 연극을 만들어 낸다.

표제시가 미리보기로는 제공되지 않아서 아쉬운데, 조재룡 교수가 붙인 해설의 제목 '어느 무정부주의자의 부조리극에 관하여'를 통해서 얼추 작품세계를 어림해본다. 덕분에 떠올리게 되는 작가는 러시아 부조리극의 대명사 다닐 하름스다(베젠스키와 함께 오베리우 그룹의 일원이었다).

 

 

하름스의 작품은 단편집 <집에서 한 남자가 나왔다>(청어미디어, 2004)가 10년 전에 출간되고 이후엔 소식이 없다(부조리극 <엘리자베타 밤>이 한 문예지에 번역된 게 내가 아는 전부다). 하긴 매일매일 부조리한 발언과 사건이 넘쳐나는 마당에 러시아 부조리문학에까지 관심을 둘 독자가 어디에 있으랴. 현실의 부조리가 문학의 부조리를 압도하는 세계에서 하루이틀, 한달, 두달, 그리고 마침내 한해를 보낸다는 건 얼마나 불행한 일인지...

 

14.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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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플에서 친구 신청한 분의 닉네임이 우리말로 읽으면 '자네트'이길래, 뜬금없이 생각난 시가 있다. 박상순의 '자네트가 아픈 날'.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세계사, 1996)에 실려 있는데, 찾아보니 절판된 지 오래 됐다. 다시 나오지 않은 게 유감이다. 재간을 독촉하는 의미로(사심으론 제목을 <자네트가 아픈 날>로 바꾸면 더 좋겠다) 1996년쯤에 쓰고 2009년에 블로그에 옮겨놓았던 글을 한번 더 재탕한다. 아니, 다시 찾으니 <자네트가 아픈 날>(문학세계사, 1996)이란 제목의 시집이 나왔었다! '현대시동인상 수상시집'이었다. 어차피 절판됐으니 다시 나오길 기대한다. 참고로 박상순의 시집 가운데 데뷔작 <6은 나무 7은 돌고래>(민음사, 1993)는 2009년에 다시 나왔다. 10년 전에 나온 <러브 아다지오>(민음사, 2004)가 세번째 시집이다.

 

자네트가 아픈 날 2

나는 항아리를 만든다. 미술대학에 다닌 솜씨로, 이제는 다 틀어져 버린 솜씨로, 틀어진 항아리를 만든다. 내가 주둥이를 최대한 작게 마감할 동안 그녀는 약을 먹는다.

나는 노래를 듣는다. 약에 취한 그녀의 노래, 음악대학을 다닌 솜씨로, 그녀는 내 항아리를 노래한다. 나는 항아리 속으로 들어간다. 항아리 속에 그녀의 이름을 새긴다.

그녀가 아픈 날, 나는 항아리를 만든다. 그녀의 이름을 새기고 그녀의 노래를 묻고 마침내 그녀를 묻고, 미술대학에 다닌 솜씨로 뚜껑을 밀봉한다. 

그녀가 아픈 날, 나는 가로수에 대해 공부한다. 그녀를 묻은 뒤에도 나는 가로수만 생각한다. 미술대학을 다닌 솜씨로, 노란 가로수, 불타는 가로수, 그 속에 물고기가 헤엄치는 가로수, 노래하는 가로수.

이제는 다 까먹어버린 솜씨로 내가 아는 모든 사람이 다, 담겨질 거대한 항아리를 만든다. 담겨질 사람은 없다. 나는 다시 가로수에 대해 공부한다. 거꾸로 서는 가로수, 날개 달린 가로수, 돌덩이를 삼킨 가로수, 항아리를 삼킨 가로수.

나를 긴 줄에 묶어 책꽂이 뒤로 끌고가는 가로수, 나를 잡아먹는 가로수, 온몸이 다 항아리처럼 불어난 나의 가로수.  

이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즉 즐기기 위해서는 ‘항아리’와 ‘가로수’란 두 이미지가 뜻하는 바를 알아야 한다. “그녀(자네트)가 아픈 날”, ⓐ“나는 항아리를 만든다”와 ⓑ“나는 가로수에 대해 공부한다”가 이 시의 줄거리이기 때문이다. ‘항아리’는 한 ‘세계’를 뜻한다. 이때의 세계는 자기만의 예술세계일 수도 있고 가정일 수도 있다. ‘그녀’와의 관계가 문제되고 있으니까 여기서는 가정이라고 해두자. 즉 이 ‘항아리’는 예술작품(Art Work)으로서의 항아리라기보다는 사회적 삶의 표준단위, 즉 가정(Family Life)으로서의 항아리이다.  

그럼 이제 1연을 보자. “미술대학을 다닌 솜씨”로 만들 수 있는 항아리는 FL이 아니라 AW이다. 굳이 “틀어져 버린” 솜씨가 아니어도 그런 솜씨로는 FL을 만들 수 없다(이 사회적 통념!). 그러는 ‘나’의 옆에서 “그녀는 약을 먹는다”(그녀는 약값이 필요할 것이다). 2연에서 “그녀는 내 항아리를 노래한다”. “음악대학을 다닌 솜씨”니까 FL에 대한 감각이 ‘나’보다 나을 리 없다. 약에 취해 있으니까 더더욱 그렇다. 이 항아리가 제대로 된 항아리, 즉 FL을 보장해줄 수 있는, FL로서의 항아리인가 아닌가를 제대로 분별해내지 못하는 것.  

“항아리 속에 그녀의 이름을 새기”는 ‘나’의 행위에서 드러나듯이 이 항아리는 AW로서의 항아리이다. 이건 생활의 터전, 즉 FL로서의 항아리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3연에서 결국 이 항아리가 “그녀의 노래를 묻고 마침내 그녀를 묻”는 옹관묘가 된 것은 당연하다. “내 항아리”는 예술의 세계이고 죽음의 세계인 것.  

그리고 이제 ‘가로수’. 가로수는 버드나무처럼 길가에 서 있는 나무이다. 그것은 중심에 있는 나무가 아니다. 그래서 ‘가로수’는 ‘주변적인 존재, 주변적인 삶’의 은유가 된다. “그녀가 아픈 날”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던,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나’는 바로 ‘가로수’ 같은 존재이다. 그래서 그는 4연에서 “가로수에 대해 공부한다”, “가로수만 생각한다”.  

그는 “미술대학을 다닌 솜씨”(!)로 그런 주변적인 자기세계에, 상상적인 세계에 안주한다. 그러다 보니 이제 ‘항아리’의 세계는 점점 멀어져 간다. 5연에서 “다 까먹어버린 솜씨”로 ‘항아리’를 만들어보려고 하지만 제대로 만들어질 리도 없고, 거기에 “담겨질 사람”도 없다. FL뿐만 아니라 AW로서의 항아리도 그는 이제 만들 수 없게 된 것이 아닐까? 그는 “다시 가로수에 대해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  

이 자폐적인 세계는 6연에서 “나를 잡아먹는 가로수”의 세계로 진술된다. 이 ‘가로수’는 이제 “온몸이 다 항아리처럼” 불어난 것이다. ‘가로수’가 ‘항아리’를 대신하는 것. 이 안쓰러움을 이 시는 은근하게 노래한다. 이게 내가 이 시를 재미있게 읽은 이유이다...

14.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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