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한겨레에 들어가보니 어제 한겨레의 '책과지성'에서 읽은 도정일 교수의 칼럼이 메인 화면에 떠 있다(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87954.html). 시사해주는 바가 많은 칼럼이기에 보다 눈에 띄는 자리로 옮겨놓는 건 당연해보인다. 아침 뉴스를 보니 강남에 고액 영어유치원들이 성황이라고 한다. 1년 원비만 해도 1,000만원이 훌쩍 넘어가 대학 등록금을 무색하게 만든다고 한다(우리사회의 조기영어교육 열풍에 관한 재작년 기사는 http://h21.hani.co.kr/section-021003000/2005/04/021003000200504120555032.html). 또 어제 읽은 바로는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전시회조차도 입시를 위한 학습장으로 변신했다고 한다. 지극히 '현실적인', 한편으론 지극히 '한국적인' 현실들이 여러 모로 입맛을 쓰게 만든다. 도정일 교수의 칼럼은 지미 카터 전대통령의 봉사활동이 실상은 그 어머니 릴리언 카터의 봉사활동과 가치관 교육에 힘입은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우리가 갖고 있는 교육의 목표는 무엇인지를 질문하고 있다. 물론 기사에 붙어 있는 '흑인을 인간대우한 지미엄마 vs 조기유학에 눈먼 한국엄마'라는 도식화 역시 지극히 '한국적인' 단순화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굳이 비교해야 한다면 지미 엄마와 조지(부시) 엄마를 비교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럼은 일독의 가치가 있다.

한겨레(07. 02. 02) [도정일칼럼] 카터의 어머니부터 만나보라

지미 카터가 제39대 미국 대통령이 되어 백악관으로 들어간 것은 지금부터 꼭 30년 전인 1977년 1월20일이다. 그날, 대통령의 취임 첫날을 취재하기 위해 많은 기자들이 백악관으로 몰려든다. 조지아 주 지사를 지냈다고는 하지만 중앙 정가에서는 거의 무명이나 다름없었던 인물이 지미 카터다. 기자들로선 그 ‘시골뜨기’ 무명인사가 대통령이 되었으니 그의 입에서 어떤 취임 소감이 나올지 궁금했을 것이다(*그때 회자되던 말이 '땅콩장수 출신 대통령 되다'였다. 가정형편이 어렸웠었나?). 그 기자들에게 카터는 “내 어머니부터 만나보라”며 곁에 있던 79살의 어머니 릴리언 카터 여사를 소개한다. 한 기자가 물으나마나 싶은 질문 하나를 내놓는다. “아드님이 자랑스러우시죠?” 그러자 형형한 눈빛의 릴리언 카터는 전혀 뜻밖의 방향에서 날아온 화살 같은 되받아치기 질문을 던진다. “어느 아들 말이야?”

물론 이건 릴리언 카터가 남긴 유명한 유머의 하나다. 카터 여사에게는 장남 지미 말고도 차남 빌리가 있었지만 빌리 카터는 세상의 잣대로 따져 ‘성공’했다고 말할만한 사람도, 형 지미에 견줄만한 이력을 가졌던 사람도 아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릴리언 카터가 백악관 기자들에게 던진 유머는 인상적인 데가 있다. 대통령이 된 아들이건 자주 엎어지는 아들이건 간에 자기가 키운 아이들은 똑 같은 무게를 가진다는 메시지가 그 유머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릴리언 카터는 고령이 되어서도 사람들이 ‘미스 릴리언’이라 불렀을 정도로 활기 넘치고 공동체를 위한 봉사활동과 인권에 대한 헌신이 남달랐던 여성이다. 그녀는 미국 평화봉사단 역사상 가장 나이 많은 단원이었다는 기록을 갖고 있다. 68살 때 평화봉사단에 지원하고 인도까지 가서 나병환자들을 돌본 사람, 거의 평생 남부 흑인들과 빈민을 삶을 살핀 간호사, 그가 ‘미스 릴리언’이다.

인종차별이 자심했던 20세기 초반의 남부 조지아에서는 흑인이 간혹 백인의 집을 방문할 때는 반드시 ‘뒷문’으로 드나들어야 했는데 어머니 릴리언은 흑인들의 그 뒷문 출입을 금지하고 당당히 ‘앞문’으로 출입하게 했다. 당시 조지아 시골에서 흑인을 인간으로, 친구로, 이웃으로 대접한 최초의 백인 집안이 ‘릴리언 네’였다고 한다.

느닷없이 웬 카터 집안 얘기? 나는 지금 카터 집안의 영광을 얘기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지미 카터가 ‘나를 키운 가치들’이라 말하는 ‘어머니 릴리언의 가치관’을, 그리고 그것이 요즘 한국의 젊은 엄마들이 아이들에게 주입하고 있는 가치들과 얼마나 다른 것인가를 말하고 싶다. 평화, 자유, 민주주의, 인권, 환경 품질, 사람들의 고통 줄이기, 선의의 나눔, 사랑, 봉사, 법치 같은 것이 카터가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기본적인 가치의 목록을 이룬다.

Jimmy Carter

2002년 노벨평화상 수상 연설에서 카터는 이런 가치의 실현이 ‘사회의 목표’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시대변화에 맞추어야 하지만 변하지 않는 원칙들도 지킬 줄 알아야”하며 원칙적이고 기본적인 가치들을 지켜내는 일이 다른 모든 일에 앞서 “사회의 최우선 과제가 되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미국이건 한국이건 간에 이런 기본가치들의 소중함을 가르치는 것이 교육의 과제이고 목표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는 아이들에게 무슨 가치를 가르치고 있고 무엇을 교육의 목표로 삼고 있는가?

아이들을 ‘잘 교육시키기 위해’ 캐나다로 조기 유학을 보낸 어떤 한국 어머니가 최근에 겪은 ‘개종사건’ 비슷한 것이 하나 있다. 아이들을 일찌감치 외국에 내보내는 한국인 가정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한국의 살인적인 교육풍토에서 아이들을 해방시키고 싶어, 또 하나는 더 강한 학습경쟁력을 길러주어 외국의 소위 ‘일류’ 대학에 진학시키고 싶어하는 사람들이다. 숫자로 따지면 앞의 경우는 극소수이고 대부분이 후자, 곧 경쟁력 선점주의자들이다. 이 선점파들이 하는 일은 밖에 나가서도 서울 못지않은 학원 과외를 시키면서 아이들을 ‘선수학습’의 열탕지옥에 집어넣는 일이다.

캐나다 뱅쿠버의 꽤 이름난 사립학교에 아이들을 입학시킨 문제의 어머니도 후자의 경우다. 그녀는 고교 1년생인 아들이 화학을 좋아하니까 화학 과목을 더 열심히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해달라고 ‘당부’하기 위해 아들이 다니는 학교로 찾아간다. 그런데 담임선생은 뜻밖의 제안을 내놓는다. 과목 공부는 학교에서 하는 대로 하면 된다, 당신 아들에게 필요한 것은 특정 과목에 대한 집중이 아니라 넓은 안목과 소양을 기르는 일이다, 그러니 ‘아트’ 쪽으로 관심을 돌리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교사가 제안한 것이다. 그 교사는 한국이나 대만 부모들이 대체로 그런 식의 학과목 공부만을 강조하는데 그건 우리 학교의 교육철학이 아니다, 이왕 우리 학교로 아이를 보냈으면 이 학교의 교육방침을 따라달라는 말도 들려준다. “미술 교육을요? 우리 아이에게?” “그렇습니다. 길게 보면 미술 교육 같은 것은 아드님의 인생에 강한 힘이 되어줄 수 있습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당부하러 갔다가 되레 당부를 듣고 돌아온 어머니는 며칠 고민하다가 그 학교의 ‘교육철학’에 아이를 맡기기로 작정한다. 경쟁력 선점주의자가 ‘교육’이라는 것에 눈뜬 것이다.

그 어머니가 듣고 온 것은 그런 얘기만이 아니다. 몇 년 전 동남 아시아 해일 재난이 발생했을 때 그 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지진 해일’이 어떤 것인지 연구조사하게 하고 고학년생들을 현지로 보내 “희생자들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찾아내어 에세이를 쓰게 했다는 얘기도 그녀를 개종시킨 계기의 하나다. “우리는 아이들이 스스로 연구하고 체험과 봉사경험에서 나온 에세이를 쓰게 했다가 나중 아이들이 원하는 대학으로 보내어 선발자료로 쓰게 합니다.”

선수학습 같은 것으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의 수명은 얇고 짧다. 학습된 영재는 영재도 천재도 아니다. 미국의 유수 대학들은 아시아계 학생들 중에 이런 종류의 학습천재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그래서 아시아계 학생들에 대한 입학허가를 대폭 줄이고 있다. 소위 영재교육을 받았다는 한국 아이들이 하바드에 들어갔다가 1년 쯤 간신히 넘기고는 줄줄이 중퇴하거나 나둥글어지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기본과 바탕이 허약해서 따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교육 파국을 손질해야 할 때다.(도정일/경희대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07. 02. 03.

P.S. 기본적인 가치들을 무시하면서(말로는 존중하면서) '학습천재들'을 양산해내는 게 교육의 목표일 수도 있다(되는 것도 안되는 것도 없는 게 한국사회다). 그것이 교육의 파국으로 귀결된다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건강에 유익하다면 누가 담배를 피우겠는가?). 그게 또 다른 사회/문명에는 타산지석의 사례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니 전혀 무의미한 것도 아닐 터이다. 다만, 가까운/먼 미래에 파국을 맞더라도 우리가 '가지 않은 길'도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아두는 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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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규원 시인의 부음을 들었다. 상당히 오래전부터 시인의 투병 소식은 전해져왔지만 그럼에도 죽음은 갑작스럽다. 관련기사를 옮겨놓는다. 그리고 시인의 마지막 시집에서 시 한편을 옮겨놓는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경향신문(07. 01. 03) ‘날 이미지의 詩’ 오규원 시인 별세

‘날(生) 이미지의 시’를 추구해온 시인 오규원씨(전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가 2일 오후 5시10분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66세. 폐기종으로 강원 영월, 경기 양평 등지에서 요양생활을 하던 고인은 최근 병세가 갑자기 악화돼 입원했다.

1941년 경남 삼랑진에서 태어난 고인은 동아대 법학과를 졸업했으며 68년 ‘현대문학’에 시 ‘몇 개의 현상’이 추천 완료돼 등단했다. 첫 시집 ‘분명한 사건’(1971)부터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1987),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2005)에 이르기까지 10여권의 시집을 출간했다. 고인은 인식과 관념을 언어로 구상화한 초기시, 자본주의의 허위성·상업성을 비판하는 해체시를 거쳐 90년대 초반부터 시인의 직관에 닿는 사물의 이미지를 그대로 옮긴 ‘날 이미지의 시’를 주창해 시단에 새 바람을 일으켰다.

‘날 이미지’란 사물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순수한 존재의 이미지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수법. 김수영 문학과지성사 주간은 “‘날 이미지’라는 개념은 철학적인 깊은 고민을 거쳐 나왔다”면서 “치열한 시적 방법론을 통해 자신만의 투명한 언어를 보여준 시인”이라고 평가했다. 시론에도 관심이 많아 ‘현실과 극기’ ‘언어와 삶’ 등의 시론집을 내기도 했다.

83년부터 2002년까지 20년간 서울예대에 재직했던 고인은 세심하고 자상한 스승으로도 많은 존경을 받았다. 신경숙 장석남 하성란 강영숙 천운영 강영숙 박형준 등 제자 문인 46명이 그와의 추억과 인연을 회고한 ‘문학을 꿈꾸는 시절’(2002)을 회갑 기념문집으로 냈다. 시인 장석남씨는 “선생님은 엄하면서도 제자들의 성격을 파악해 거기에 맞게 지도해 주셨다”며 “한참 연락이 없다가도 당신이 먼저 전화로 안부를 묻는 등 자상한 스승이었다”고 회고했다.

고인은 현대문학상·이산문학상 등을 받았으며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문학 부문(2003) 수상자로도 선정됐다. 유족으로는 방송작가인 부인 김옥영씨와 2남1녀가 있다.(한윤정기자)

어제 내린 눈이 어제에 있지 않고

오늘 위에 쌓여 있습니다

눈은 그래도 여전히 희고 부드럽고

개나리 울타리 근처에서 찍히는

새의 발자국에는 깊이가 생기고 있습니다

어제의 새들은 그러나 발자국만

오늘 위에 있고 몸은

어제 위의 눈에서 거닐고 있습니다

작은 돌들은 아직도 여기에

있었다거나 있다거나 하지 않고

나무들은 모두 눈을 뚫고 서서

잎 하나 없는 가지를 가지의 허공과

허공의 가지 사이에 집어넣고 있습니다

-시집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문학과지성사)에서

07. 02. 03.

 

 

 

 

P.S. 시인의 삶은 이제 그의 시들이 대신하게 됐다. 시인이 남겨놓은 시의 가지를 '가지의 허공과 허공의 가지 사이에' 집어넣는 일은 우리의 몫이고. 해서, 그의 시집 대부분을 갖고 있어서 따로 사두지 않았던 <시전집>도 구해놓아야겠다. <오규원 깊이 읽기>는 어디에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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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수요일에는 한국일보를 우선적으로 사본다. 가장 큰 이유는 고종석의 연재칼럼 '말들의 풍경'을 읽기 위해서이다. 물론 기사들이야 온라인에도 게재되지만 나는 가급적 '신문지'를 읽는다. 어쩌다 '인터넷 서평꾼'으로 불리게도 됐지만 내가 좋아하는 건 화면이 아니라 종이이다(무엇보다도 종이책의 부피, 볼륨감을 나는 사랑한다). 지난 수요일에도 이 연재의 48번째 꼭지 '이름의 생태학'을 읽었는데, 고종석의 글답지 않게 오타/오류 두 가지가 눈에 띄었다. 바쁜 일들로 며칠을 흘려보내다가 마침 다시 생각난 김에 교정해둔다. 문제가 되는 대목의 전후 문단들을 같이 인용하겠다. 칼럼의 전문은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701/h2007013018505185150.htm 참조.

한국사람의 성명이 이렇게 세 음절로 일반화한 것은 중국의 영향을 받아서다. 중국사람들도 성 한 음절(글자)에 이름 두 음절인 것이 상례다. 또 흔히 이름 두 음절 가운데 한 음절로 항렬을 드러내 왔다. 그래서, 이름으로 선호하는 글자가 서로 조금씩 다르고 두 나라에 고유한 성들이 있긴 하지만, 성명이 한자로 표기되면 당사자가 중국사람인지 한국사람인지 판단하기 어려울 때가 적지 않다. 1970년대 이후 일부 한국인들은 자식의 이름을 (한자로 표기할 수 없는) 고유어로 지으며 언어민족주의를 실천했다. 그리고 이런 고유어 이름(소위 ‘한글 이름’)의 등장과 함께 한국어 성명의 음절수 제약이 부분적으로 무너지고 있다.

그 기다란 이름 탓에 언론에도 오르내린 박차고나온놈이샘이나씨나 황금독수리온세상을놀라게하다씨는 매우 예외적인 경우이겠으나, 그렇게 별나지 않더라도 고유어 이름이 두 음절 제약에서 풀려나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젊은 국문학자 권보드레씨도 그런 경우다. 그러나 고유어로 이름을 지을 때도, 한국인들은 ‘성명 석 자’의 관습을 따라 두 음절 이름을 짓는 일이 많다. 예컨대 (역시 본명인지는 모르겠으나) 연기인 한고은씨나 한예슬씨가 그렇고, 문학평론가 정끝별씨가 그렇다. 그것은 자식의 이름을 너무 이질적으로 만들지 않으려는 부모의 배려와 관련 있을 게다. 주류 한자어 이름으로부터 떨려나려는 고유어 이름의 원심력을 두 음절이라는 관례의 구심력이 맞버텨주는 것이다.

 

 

 

 

인용에서 젊은 국문학자 '권보드레씨'라고 했는데, '권보드씨'가 맞다. 이름과 관련한 오타이니 아무리 사소하다고 할지라도 본인에게는 실례이겠다. <한국 근대소설의 기원>(소명출판, 2000), <연애의 시대>(현실문화연구, 2003) 등의 단독 저작을 갖고 있는 저자의 이름을 잘못 표기한 건 얼른 이해하기 어렵다. 필자의 착오가 확신과 결합된 경우가 아닌가 싶은데, 고유명사를 다룰 때에는 '고중석' 위원도 좀 주의하셔야겠다.

현대 유럽인들의 성명은 이름(퍼스트 네임)과 성(라스트 네임) 둘로 이뤄진 경우가 많다. 가운데이름(미들네임)이 있어도 일상적으론 잘 드러내지 않는다. 가운데이름이 들어간 성명은 얼마쯤 귀족적으로, 다시 말해 젠체하는 듯 들리기 때문이다. 현대 이전에는 그런 가운데이름들이 둘 이상 나열되기도 했다. 독일관념론을 완성한 철학자 헤겔의 정식 이름은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이고, ‘질풍노도’(슈투름 운트 드랑)를 이끈 시인 실러의 정식 이름은 요한 흐리스토프 프리드리히 폰 실러다.

이름 뒤에 아버지 성과 어머니 성을 나란히 붙이는 일이 흔한 스페인어권에서는 성명이 세 부분으로(스페인어권에선 이름이 둘인 경우가 적지 않으므로 그 경우엔 네 부분으로) 이뤄지기도 한다. 1982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콜롬비아 소설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가르시아는 아버지 성이고 마르케스는 어머니 성이다. 기혼 여성은 어머니 성을 넣을 자리에 전치사 ‘데’(de)를 앞세운 남편 성을 넣는 것이 일반적이다. 아버지 이름을 변형한 부칭(父稱)을 이름과 성 사이에 넣는 러시아어권 사람들의 성명도 세 부분으로 이뤄졌다 할 수 있다. 러시아어를 쓰는 사람들은 알렉세이 콘스탄티노비치 톨스토이라는 성명만 들으면 이 사람 아버지의 이름이 콘스탄티노프라는 것을 저절로 알게 된다.

두번째는 러시아인 이름에 관한 것이다. 필자는 '콘스탄티노비치'라는 러시아어 부칭이 저절로 알려주는 바가 그 아버지의 이름이 '콘스탄티노프'라는 사실이라고 적었지만 오류이다. 그 부칭이 알려주는 이름은 '콘스탄틴'이기 때문이다. 그 콘스탄틴 톨스토이의 아들 알렉세이(알료샤) 콘스탄티노비치 톨스토이(1817-1875)는 우리가 다 아는 거장 레프 톨스토이 가문의 시인이자 작가로 톨스토이보다는 11살이 더 많다. 대표작은 역사드라마 3부작.

레프 톨스토이만큼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잘 알려진, 또다른 러시아 작가의 이름 또한 톨스토이 백작 가문에 속하는(몰락한 지계의 톨스토이이다), 알렉세이 톨스토이인데, 그의 풀네임은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1883-1945)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이름이 '니콜라이'이다. 이름과 성만 가지고는 두 '알렉세이 톨스토이'를 구별할 수 없으며 이런 경우엔 부칭까지 확인해야 되는 것(흔히 러시아인들은 이름과 부칭만을 부른다).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의 대표작으론 <고뇌속을 가다>(기민사, 1986)와 역사소설 <표트르 대제>(아래는 문고본 사진) 등이 있다...

07. 02.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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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 2007-02-03 01:18   좋아요 0 | URL
'고유명사를 다룰 때에는 '고중석' 위원도 좀 주의하셔야겠다.'
재미 있네요 일부러 틀리신거죠? 로져님

로쟈 2007-02-03 10:34   좋아요 0 | URL
주의깊게 읽으시는군요.^^

딸기 2007-02-03 12:20   좋아요 0 | URL
코끼리님의 댓글이 더 재밌어요 ㅋㅋ

저 집안은 글을 잘 쓰는 집안인가보군요 ^^

딸기 2007-02-03 12:22   좋아요 0 | URL
알렉시스 톨스토이의 '이비쿠스'라는 책을 갖고 있는데,
그 사람도 저 집안인지 궁금해지네요.

로쟈 2007-02-03 13:05   좋아요 0 | URL
'알렉시스 톨스토이'가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입니다. '알렉세이'를 불어로 읽어준 거 같은데요...

나비80 2007-02-03 18:37   좋아요 0 | URL
좀 지난 이야기지만 '마르시아스 심'씨는 결국 '심상대'로 다시 돌아왔지요.
갑자기 이름 이야기가 나와서 생각났습니다.^^
재밌게 읽었습니다.

로쟈 2007-02-03 20:49   좋아요 0 | URL
본인은 그게 정말로 가능한 이름이라고 궁금했었죠. 싱거운 심상대 같으니...
 

나름대로는 신간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편이지만 (인터넷)서점이 아닌 언론리뷰를 통해서 '새로 나온 책'을 접할 때가 있다. 츨판사에서 책을 서점에 깔기 전에 보통은 언론사에 먼저 돌리는 것이 상례라서 그런 듯하다. 다른 나라들에서도 그런 게 일반적인 관행인지는 잘 모르겠다. 여하튼 그런 경우 책의 실물은 (아직) 없고 그 존재에 대한 리뷰(풍문)만이 떠도는 셈이어서 말 그대로 유령적인 책, 유령으로서의 책을 접하는 기분이 든다. 한겨레의 이번주 북리뷰를 미리 읽어보다가 발견한 <자크 데리다의 유령들>(앨피, 2007)도 바로 그런 책이다.

한겨레(07. 02. 02) 하나뿐인 진리란 없다

2004년 타계한 자크 데리다는 1930년 알제리에서 유대계 후손으로 태어나 프랑스에서 프랑스어로 활동한 철학자다. 이 문장에서 엿볼 수 있듯이 그는 명료하게 규정하기 어려운 사람이다. 하나의 뿌리, 하나의 정체성으로 수렴할 수 없는 모호하고 복합적이고 이질적인 것들이 이미 그 안에 들어 있다. 확정적이고 고정된 자기동일성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 데리다가 자신의 존재에서 확인하고 70권에 이르는 저작에서 무수히 되풀이한 주제였다. 정체성을 규정하는 단 하나의 근거, 단 하나의 중심, 단 하나의 원천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그는 ‘해체’ ‘차연’ ‘흔적’ ‘산포’ 같은 수많은 용어로 설명하려 했다.

니컬러스 로일(영국 서섹스대학 영문학 교수)이 쓴 <자크 데리다의 유령들>은 데리다라는 철학자가 만들어낸 유령들, 다시 말해 데리다의 서명이 들어간 용어들을 그의 사상 속에서 설명하는 책이다. 유령이란 붙잡기 어려운 것이고 난데없이 출몰하는 섬뜩한 어떤 것이다. 정체성이 불분명한 것이 유령이다. 데리다는 의도적으로 유령을 불러내 세상을 어지럽히려 한다. 단단한 지반 위에 튼튼하게 지어올린 건축물이라고 여겼던 모든 사상, 세계관, 형이상학, 나아가 세계 그 자체가 사실은 그리 단단한 것도 튼튼한 것도 아님을 보여주려 한다. 이를테면, 1967년 그가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 <목소리와 현상> <글쓰기와 차이>라는 세 권의 저서를 거의 동시에 폭탄처럼 세상에 내던졌을 때 이 유령들이 한꺼번에 튀어나왔다. 지식세계는 이제 어떻게든 이 유령들과 맞서 싸우지 않으면 안 되게 됐다. 로일의 이 책 또한 그런 싸움의 하나다.

데리다의 유령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해체’(de-construction)라는 유령일 것이다. 데리다의 다른 용어들처럼 이 말도 그가 새로 만들어낸 말이다. 해체란 구조(construction)를 분해(de-)하는 것인데, 이것은 단순히 건물을 부수는 것과는 다른 뜻이다. 하나의 구조로 이해되는 언어적 구성물, 곧 텍스트를 면밀히 살펴 그 내부의 자기모순, 자기배반을 드러냄으로써 그 구조물이 스스로 무너질 수밖에 없도록 하는 것이 해체의 전략이다. 어떤 구조물도, 어떤 텍스트도 내적 모순이 없는 것이 없고 따라서 해체를 피해갈 수 없다. 애초에 자기 완결적 구조란 것이 없기 때문이다. 구조가 없다면 그 구조를 구조로 만들어주고 지탱해주는 중심도 없을 것이다. 지은이는 데리다에게 핵심 관념이 하나 있다면 ‘어떤 중심도 없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중심이 없으므로 주체 중심주의나 이성 중심주의 같은 모든 형태의 중심주의도 토대 없이세워진 것일 수밖에 없다.

데리다의 명제 중에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라는 명제만큼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도 없다. 이 명제는 텍스트 바깥에서 텍스트를 설명해주는 사상적 구조물을 찾아선 안 된다는 의미를 품고 있다. 바꿔 말하면, 텍스트는 자기 완결적이지 않고 언제나 열려 있으며 하나로 규정할 수 없다. 데리다는 자신의 명제가 불러일으킨 오해를 풀어보려고 뒷날 그 ‘텍스트 명제’를 ‘컨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명제로 바꿨다. 지은이는 그 명제를 더 줄여 ‘컨텍스트밖에 아무것도 없다’라고 표현한다. 모든 텍스트는 자기 완결적이지 않고 열려 있으므로 컨텍스트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 이 새 명제에 담겨 있다. 그러나 데리다에게는 그 컨텍스트조차 불안정하고 불완전한 것이다. “어떤 의미도 컨텍스트 바깥에서는 결정될 수 없지만, 어떤 컨텍스트도 (그 의미를) 충족시킬 수 없다.” 모든 규정은 다만 잠정적이고 보완적인 것일 뿐 영원하고도 완전한 규정은 없는 것이다. 데리다는 삶이, 세상이, 역사가 그렇다고 말한다. 단 하나의 고정된 중심에 들어앉아 오직 하나뿐인 진리를 호령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진리도 없고 그런 중심도 없다고 데리다는 말한다.(고명섭 기자)

07. 02. 02.

P.S. 알다시피 루틀리지의 '크리티컬 씽커즈' 중의 하나인 이 책은 이미 진작부터 '근간'이 예고돼 있엇고, 나름대로 기다리고 있던 책이다. 지난 2004년 10월 데리다가 세상을 떠났을 때 나는 모스크바에 있었고, 그 사망소식에 접하여 내가 가장 먼저 완독한 책이 바로 니컬러스 로일의 <자크 데리다>(2003)였기 때문이다. 여러 차례 언급한 이 시리즈의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데리다에 관한 가장 쉬운 입문서가 될 책이 출간되어 반갑다. 나로선 '잉여적인' 책이지만(그런 점에서도 유령적이군!) 모스크바의 가을 어느 날들을 보존하고 있는 책이기도 해서 '기념적인' 책이기도 하다. 다음주면 아마 손에 집어들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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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기계 2007-02-02 01:54   좋아요 0 | URL
개인적으로 고대하던 책이 나와 정말 기쁩니다.^^ 데리다 만세!! 그런데 요즘 유령 같은 책들이 출몰해서 좀 당황(?)스럽네요. 보그의 <들뢰즈와 시네마>는 서점에서 보고 깜짝 놀라고(이상하게 알라딘엔 없군요), 짐멜 선집(3권)도 뜻밖에 출간되고...지젝의 신간과 함께 2월은 축복의 달입니다. 만세!! (넘 야단인가요? ^^)

로쟈 2007-02-02 01:55   좋아요 0 | URL
로널드 보그의 <들뢰즈와 시네마>가 나왔군요. 원서는 진작부터 갖고 있는 책인데, 역시나 번역서가 훨씬 더 비싸네요.^^; 한데, 알라딘에는 책을 아직 안 풀었나 보군요. 흠...

읽는기계 2007-02-02 02:08   좋아요 0 | URL
실시간 댓글이군요 ^^ 보그의 책은 좀 이상한 것이 출간일이 작년 성탄절인데, 알라딘이나 예스24 등에는 도통 찾을 수가 없네요 -.-; 믄 일이 있는지...쩝. 데리다는 실물이 떴네요^^

로쟈 2007-02-02 02:09   좋아요 0 | URL
둘다 교보에 있더군요. 알라딘의 '속보성'이 예전같지 않나 봅니다. 그러저나 이젠 자야겠네요.^^

2007-02-02 02: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바 2007-02-02 09:47   좋아요 0 | URL
이번에 앨피에서 <트랜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도 함께 나왔더군요.^^ 어제 서점에 들렀는데 두권이 나란히 놓여 있더군요...

사량 2007-02-02 20:11   좋아요 0 | URL
제가 생각하는 "데리다에 관한 가장 쉬운 입문서"는 김형효 교수의 [데리다의 해체철학](민음사, 1993)]입니다. 데리다의 원문을 많이 인용하면서도 이를 쉽게 풀이하는데다, 데리다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관련 배경지식(후설, 소쉬르, 하이데거, 레비나스 등)를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어, 데리다의 초기 저작들([회화 속의 진리]까지)을 개관하는 데는 최고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쩌면 한국사람이 한국어로 썼기에 가능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로쟈 2007-02-02 22:12   좋아요 0 | URL
에바님/ 귀가길에 두 권 모두 사들고 왔습니다. <제임슨>도 복사해둔 듯한데, 어디에 있는지는 신만이 아시겠죠.^^;
사량님/ 예, 아주 오래전에 읽은 책이라, 저도 다시 읽으면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데리다의 책들과 강의에 본격적으로 접하기 이전에 읽은 책이라서요. 다시 들춰볼까 했더니 아마도 박스에 들어가 있는 듯하네요.^^;

기인 2007-02-06 03:34   좋아요 0 | URL
모스크바.. 그 추위.. 체험해보고 싶은 것이기는 합니다.
생각해보면, 왜 모스크바 여행은 안 땡기나 몰라요. 사회주의 본국인데, 꽁꽁 얼어있다는 생각때문인지, '소련'의 이미지는 역시 여행과는 거리가 먼 것인지.. 춘원 이외에 러시아 여행기(?)를 읽어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잘 모르겠네요 ^^;
 

이 주에 나온 역사서들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건 <탐史>(푸른역사, 2007)이다. 공식 출간일자는 2월 9일로 돼 있지만 책은 그보다 조금 일찍 나온 듯하다. 제목인 '탐史'는 '역사를 탐하다' 내지는 '역사를 탐구하다'란 뜻으로 지은 듯한데, 유치찬란이다.

제목으로 책을 골랐다면 전혀 주의를 두지 않았을 터인데, 역사가들의 고백과 대담이라는 게 눈길을 끈다. 원저를 보니 'The New History: Confessions and Conversations'(2002)로 멀쩡한 제목이 붙어 있는데, 왜 '새로운 역사학'이란 제목을 붙이지 않았을까? 요즘 다소 남용되는 듯한 '새로운 역사학'이 너무 식상해서? 그렇다고 '탐史'라 붙일 것까지야...

그런 불만을 제쳐놓으면 책은 딱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현대 역사학의 거장 9인의 고백과 대화'란 스타일 말이다. 분량도 600쪽이 넘으니 흡족하다, 라고 적었다가 원서의 쪽수를 확인해보니 고작 256쪽이다. 아무리 불가피하다고는 해도 607쪽으로 두 배가 훨씬 넘게 불어날 수밖에 없었을까? 독서의 편의성을 '너무' 고려한 것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니 별로 흡족하지 않다.

여하튼 소개에 따르면, "20세기 후반의 이른바 '새로운 역사학'을 선도한 역사가 9인과의 인터뷰를 통해 역사학계의 흐름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책"이다. 거기에 "그들의 출신, 유년 시절, 역사학을 하게 된 동기, 지적 영향을 준 책 등 배경적 측면에서부터 저작의 의도, 내용상의 의문과 모순, 다른 문화에 대한 반응, 학문의 기본 방향 등 학문 전반을 보는 관점과 태도에 이르기까지 모두 담았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프랑스 역사학자들의 문집 <나는 왜 역사가가 되었나>(에코리브르, 2001)와 겹쳐 읽는 것도 흥미롭겠다.

 

 

 

 

'새로운 역사학' 혹은 '신역사학'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정의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짐작으론 미시사, 지성사, 문화사, 탈신민주의 등을 트렌드로 하는 포스트모던 역사학을 가리키는 게 아닌가 싶다. 이때 '포스트모던'의 상대가 되는 것은 E. H. 카로 대표되는 '모던' 역사학이다. 말하자면, '굿바이. E. H. 카'가 이들의 구호인 듯싶다. 그리고 그런 관점의 역사라면 국내에서도 적잖은 연구논저들이 출간돼 있다. <탐史>의 역자가 엮은 <미시사란 무엇인가>(푸른역사, 2000)를 필두로 하여 <'역사란 무엇인가'를 넘어서>(푸른역사, 2000), <포스트모더니즘과 역사학>(푸른역사, 2002),  <포스트모던 시대의 역사란 무엇인가>(휴머니스트, 2006) 등이 그 예들이다. <탐史>에서 다루어지는 역사학자들의 작업 역시 이러한 맥락 속에서 자리매김될 수 있는 게 아닌가 한다. 그럼, 그 9인의 역사학자들은 누구누구인가? 알라딘의 소개를 번역/소개된 책들과 함께 나열해본다.

1 잭 구디(Jack Goody): 전세계적으로 영향력있는 일류학자로, 영국 켐브리지대학교 세인트존스대학의 펠로이다. 저서로는 <아프리카의 기술 전통 및 국가>, <야성의 순치>,  <생산과 재생산>, <유럽의 가족과 결혼 발달> 등이 있으며 편저로 <정통사회의 교육>이 있다.

 

 

 

 

2 에이사 브릭스(Asa Briggs): 영국의 역사학자로 빅토리아 시대 전문가이다. 국내에는 아직 소개돼 있지 않다.

3 내털리 제이먼 데이비스(Natalie Zemon Davis): 1959년 미시건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6세기 프랑스사를 연구하는 역사가이며, 사회사, 문화사, 여성사 및 인류학적 역사학을 주도하여 널리 알려진 학자이다. 2004년 현재 프린스대학교 역사학 석좌교수(Henry Charles Lea Professor of History)로 재직하고 있다. 지은책으로 <마르탱 게르의 귀향>,<근대 초기 프랑스의 사회와 문화 (Society and Culture in Early Modern France)>, <변두리의 여성들, 17세기 세 명의 삶(Women On the Margins, Three Seventeenth Century Lives) 등이 있다. 


 

 

 

 

4 케이쓰 토머스(Keith Thomas): 역시나 국내에 소개돼 있지 않은 듯한 영국의 역사가. 대표작은 <종교와 마술의 몰락>(1970/1991)인 듯하다.  

5 다니엘 로슈(Daniel Roche): 프랑스의 역사가. 국내엔 <지방의 계몽주의>가 번역돼 있다.

 

 

 

 

6 피터 버크(Peter Burke): 1937년 런던 태생으로 옥스퍼드대학을 졸업했다. 2006년 현재 케임브리지대학 이매뉴얼 칼리지 교수(문화사)로 재직중이다. 주로 역사를 어떻게 이야기할지를 둘러싼 방법론적인 접근과, 르네상스에서 프랑스혁명에 이르는 근대 초기 지식인들의 문화적 동향을 면밀히 파악한 저작들을 집필해 왔다. 지은 책에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와 사회>, <역사학과 사회이론>등이 있다.


 

 

 

 

7 로버트 단턴(Robert Darnton): 1939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다. 필립스 아카데미와 하버드 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뉴욕 타임스' 기자를 역임한 뒤, 1965년부터 하버드 대학교에서 교수생활을 시작했다. 1968년부터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유럽사 교수로 재직 중이며 지은 책으로 <고양이 대학살>, <책과 혁명>, <앙시앵 레짐 시대의 문학적 지하세계>, <조지 워싱턴의 틀니> 등이 있다.


 

 

 

 

8 카를로 긴즈부르그(Carlo Ginzburg): 1939년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태어났다. 1961년 피사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1970년부터 1976년까지 볼로냐 대학교 조교수를 했다. 1976년부터 1978년까지는 레체대학교에서, 1978년에서 1988년까지는 볼로냐 대학교에서 정교수로 근대사를 가르쳤다. 1988년부터 미국 UCLA에서 이탈리아 르네상스 연구의 프랭클린 D. 머피 석좌교수로 있다. 2002년부터는 UCLA에서 연구년을 받아 이탈리아 시에나 대학교와 3년 계약을 맺고 근대문화사를 가르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치즈와 구더기>, <니코메디즘>, <신화.상징.실마리>, <밤의 이야기>, <재판관과 역사가>, <어떤 섬도 섬이 아니다> 등이 있다.


 

 

 

 

9 퀜틴 스키너(Quentin Skinner): 1940년 영국 랭가셔의 올덤에서 태어났다.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했다. 1965년부터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정치학과와 역사학과에 재직하고 있으며, 크리스티스 컬리지의 특별 연구원으로 있다. 지은 책으로는 울프슨 문예상을 수상한 <근대 정치 사상의 토대(The Foundations of Modern Political Thought)>, <의미와 컨텍스트>, <철학, 정치 그리고 사회> 등이 있다.

 

 

 

 

저명한 행동주의 심리학자 B. F. 스키너와 성이 같은 퀜틴(켄틴) 스키너는 국내에 <현대사상의 대이동: 거대이론에의 복귀>(강원대출판부, 1989)의 편자로 처음 소개됐다. 이후 강정인 교수 편역의 <마키아벨리>(문학과지성사, 1993)에서도 이 정치사상사학자의 이름을 볼 수 있었다. <마키아벨리>(시공사, 2001)는 그의 저작이며 주저인 <근대 정치사상의 토대1>(한길사, 2004)도 부분적으로 번역됐다. 논문 모음집인 <의미와 콘텍스트>(아르케, 1999)는 그의 정치철학과 정치사상 연구에 대한 평가와 쟁론을 담고 있다(*거기에 보태어 <퀜틴 스키너의 자유주의 이전의 자유주의>(푸른역사, 2007)이 새로 출간됐다).

07. 02. 01 -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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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오 2007-02-01 22:32   좋아요 0 | URL
오호호. 진행중이지만.. 저 두번째 칸 세 권 책 전부 있고, 읽었어요. 뿌듯뿌듯... ^^;(로쟈님 서재에서 이런 일 처음이라 자랑중.. ㅋㅋㅋ) 근데 역사학 관련 시간 소식도 늘 이 서재에서 들으니 좋기도 하고, 좀 거시기하기도 하고.. ^^ 첫번째 책도 관심이 가네요...

로쟈 2007-02-01 23:51   좋아요 0 | URL
그러고 보니 클리오님의 전공이 역사시군요.^^ 내용은 더 채워넣다가 날려버리는 바람에 좀 지지부진하고 있습니다. 새로 나온 책은 관심도서이지만 제목이 제 취향이 아닌데다가 분량이 좀 부폴려진 게 불만스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