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읽은 경향신문의 기사 가운데 최근에 이슈가 되었던 '토플 대란'을 주제로한 두 소설가의 대담을 옮겨온다. 문단에서 '영어의 달인'으로 한 손가락에 꼽을 만한 이 두 사람은 안정효, 복거일 제씨이다. 대담을 일독해본바, 나는 따로 의견을 제시할 필요가 없을 만큼 안정효의 입장에 동의하는 편이다.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문학과지성사, 1998)를 통해서 한때 '영어 공용어론'의 불을 지폈던 복거일의 입장이 어떤 것인지도 살펴볼 수 있으므로 일독해보시길 권한다.

경향신문(07. 04. 25) ‘토플 대란’으로 본 영어 열풍

글로벌 시대에 영어는 필수라지만 한국의 영어 열풍은 광적인 수준이다. 영아에게 영어 비디오를 틀어주고 조금 자라면 영어 유치원에 보내며 중·고생과 대학생들은 영어 관련 인증시험에 골몰한다. 직장인들은 이어폰을 귀에 꽂고 출퇴근한다. 이게 다 영어 잘하면 출세하고 잘 못하면 뒤처진다는 인식 때문이다. 최근의 ‘토플대란’도 여기에 배경을 두고 있다. 영어공용화 주창론자인 소설가 복거일씨와 ‘영어 잘하는 소설가’이면서도 한국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소설가 안정효씨의 토론을 통해 우리 사회의 영어열풍 문제를 짚어봤다. 두 사람은 23일 경향신문에서 만났다.

안정효=토플이 각종 입시에 반영된다는 것을 이번에 신문을 보고 알았습니다. 사실 내가 학교 다닐 때는 그런 게 없었습니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 점수를 필요로 하는 건지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이 시험은 이른바 영어 실력 측정 기준일 뿐이잖습니까(*나는 한번도 토플 시험을 본 적이 없어서 현재의 '열풍'에 대해 실감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한다).

복거일=토플은 영어 측정시험으로서 전세계적으로 가장 편리한 시험입니다. 공신력도 있고 접근도 쉽고 보편성도 확보됐습니다. 수요가 많은 것은 당연합니다. 그 과정에서 해프닝이 우연히 일어난 것일 뿐입니다. 확실한 것은 우리나라에 영어 실력 측정 수요가 많다는 건데, 사회 본질적인 데에 이유가 있습니다. 경제의 해외의존도가 높다보니 지식인 근로자들이 영어를 잘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기업에서는 영어 실력이 좋은 사람을 뽑고 싶어 하는 거고 기업이 원하니 자연스레 대학, 고등학교도 원합니다. 막연히 반미 감정 같은 민족주의적인 감정에서 이번 사태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단견일 뿐입니다.



안정효=영어라는 언어에 대한 반발이 과연 민족주의적인 시각에서 시작된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민족주의라기보다는 영어가 우리 사회에서 너무나 과잉이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고 있다고 봅니다. 외국과 무역하는 데 필요하다는 것은 인정을 하는 바이지만 사회활동에서 필요한 수요보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영어를 해야 되는 사회입니다. 국력의 낭비입니다.



복거일=평균적으로 얘기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저는 영어를 모두 배워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영어는 세계의 표준언어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정보들에 접근하려면 영어가 필요합니다. 정보 중 중요한 것은 모두 영어로 저장돼 있습니다. 사실 영어로 존재하지 않는 정보는 실제 존재하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영어가 안 되면 접근할 수 있는 정보가 제약됩니다. 기업체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영어를 못하면 당장 판단을 못 내리게 됩니다. 접근이 어려워지면 중요한 일로부터 스스로 배제되는 겁니다. 영어 못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사회적인 차별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어는 필수입니다.

안정효=모든 정보가 영어로 돼 있다는 것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영어, 중국어, 스페인어 등으로 된 정보는 각처에 존재합니다. 다만 이른바 세계 공통어라는 영어로 돼 있는 정보가 많다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영어를 그렇게 많이 배우고 가르치느냐. 사람들에게 ‘영어가 실생활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아니라고 합니다. 하지만 ‘당신 자식에게 영어를 가르칠 거냐’고 물어보면 거의 다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이런 풍조가 문제입니다. 회사에서 영어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은 분야도 참 많습니다. 무역, 장사, 농사 종사자까지 왜 초등학교 때부터 영어를 배워야 합니까.



복거일=이왕 영어를 배우기로 결정했으면 하루라도 빨리 배우는 것이 효율적이기 때문입니다. 조기교육에는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근거가 있습니다. 태어난 지 한 달이 지나면 모국어에서 쓰이지 않는 음소들을 구별하는 능력이 사라집니다. 뒤늦게 이런 능력을 가르치는 것보다는 아주 어릴 때부터 영어 노래, 테이프를 들려줘서 조기교육하면 엄청나게 비용을 절감할 수 있습니다. 영어를 왜 배우느냐고 의문을 갖고, 민족혼을 지켜야 한다는 식으로 교육을 가로막으면 사회에 도움이 안 됩니다.

안정효=아이들 영어교육은 정말 문제입니다. 결국 발음과 회화만 중시하는 교육입니다. 영어교육이 상업화돼 영어는 이제 산업입니다. 상업적으로 상품화해서 파는 사람들이 가르치는 영어교육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조기교육도 반대입니다. 모국어 언어체계가 확실히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무조건 받아들이는 영어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언젠가 ‘캐주얼한 관계’가 한국말로 뭔 줄 아느냐는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내용은 알면서도 십중팔구 우리말로 전하지는 못합니다. 우리말 감각이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이해에도 한계가 생깁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단어가 연결이 안 되는 겁니다. 그 제한된 체계를 위해서 사람들이 그렇게 큰 노력을 해야 하는지 부정적입니다. 모국어 체계를 확실히 세운 다음에 영어를 배우는 것이 오히려 효과적입니다.

복거일=당사자들이 합리적으로 판단해서 영어를 배우기로 했으면 이를 지지하는 효과적인 제도를 만들어주는 것이 자유주의 원칙입니다. 개개인의 형편에 맞춰서 노력하면 되는 것입니다. 개인이 원하는데 허리가 휘든 안 휘든 다른 사람들이 걱정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문제는 덜 힘들게 할 수 있도록 사회적인 방도를 찾아야 한다는 겁니다. 언론에서는 ‘영어광풍’이라고 하는데 그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개인들이 합리적 판단을 하는 것에 어떻게 ‘미칠 광’자를 씁니까.

안정효=사람들이 과연 개인적으로 독창적인 판단을 하는 걸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남들이 어떻게 하는지 눈치를 보다가 힘겹게 쫓아가는 겁니다. 중간 집단은 대개 남들이 어떻게 하느냐를 모델로 삼아 따라가는 특성이 있습니다. 바람에 휩쓸리는 것이고 그래서 ‘바람 풍’자를 쓰는 겁니다. 영어가 그렇게 필요하지 않은 사람들도 자꾸 겁이 나니까 하게 되는 겁니다. 사회구조적인 우리 열등감이 영어열풍으로 표출된 것 같습니다. 세계와 경쟁을 하다보니 열등감이 생기고 그걸 극복하기 위해서, 안 되는 것을 표현하려고 하는 겁니다.



복거일=우리나라 기업환경이 나쁘다고 평가받는 이유는 영어가 결정적입니다. 지금은 모든 사람에게 영어가 필요합니다. 인도 후추 농사꾼들은 직접 시카고 현물 가격을 인터넷으로 읽고 거래하고 가격을 매깁니다. 우리 농민도 그걸 알아야 합니다. 그게 자유무역협정(FTA) 체제에서 살아남는 길입니다. 예술가도 영어가 필요합니다. 명성황후와 난타의 차이점이 뭔지 아십니까. 명성황후는 우리말이었고 난타는 언어가 없었습니다. 언어가 장애가 된다는 겁니다. 안선생님은 영어로도 글을 쓰니 어느 정도 명성이 있지만 나에 대해서는 해외에서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안정효=나는 평생 영어로 먹고 살았지만 아직도 정관사 활용법을 잘 모르겠습니다. 영어는 그렇게 쉽지가 않습니다. 영어는 매체일 뿐이라 영어를 잘 안다고 모든 것이 되지도 않습니다. 인도에서 후추 장사하는 사람이 영어만 잘해서는 안 됩니다. 후추생산법 같은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매체에 바치는 시간과 공이 너무 큽니다. 우리 얘기를 영어로 쓰자는 것은 알리자는 취지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를 알아야 합니다. 안 되는 분야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안 되는 것까지 하려고 하는 것이 낭비입니다. 모든 사람이 소 한두 마리 키우는데 미국 우시장 동향을 보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복거일=물론 영어만 잘한다고 해서 모두 다 잘하진 않습니다만 영어를 잘하면 조금 더 잘할 수 있다는 겁니다. 필리핀도 영어를 못했으면 그나마 국가통합이 없었을 것이고, 외국에 나가서 벌어들이는 돈이 전체의 13%입니다. 영어가 없었으면 그런 소득을 창출하는 기회가 많이 줄어들었을 겁니다. 인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안정효=영어는 배우기 어렵습니다. 인도는 식민지여서 영어를 잘하고 필리핀도 식민지였습니다. 그런데 필리핀 같은 경우는 자기 나라 이름도 없습니다. 국민 전체가 영어를 잘한다고 해서 대단한 국가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시대에 따라 필요한 만큼의 영어실력자들은 언제나 있어 왔습니다.

복거일=내 주장은 모국어와 영어를 같이 가르치면 된다는 겁니다. 영어공용화론은 영어만 쓰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한국어와 똑같이 법적으로 지위를 가지고 쓰자는 겁니다. 한 세대를 두고 준비해야 됩니다. 도로의 표지판이나 공문서 같은 것을 국영문 병용하자는 걸로 시작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세계시민으로서도 최소한의 도리입니다. 그게 영어공용화의 첫걸음입니다. 또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저절로 영어를 친근하게 느낍니다.

안정효=영어공용화는 논쟁거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필요한 곳에서는 저절로 그렇게 돼 가고 있습니다. 유명 관광지에서는 이미 표지판에 국영문 병기를 하고 있고 서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어만 중시하는 상황에서 한국어 훼손 문제도 생각해야 합니다. 벌써 영어 같은 외래어가 한국어에 침투해 있습니다. 한국어가 100년 안에 없어진다는 사람들도 있는데 아닙니다. 서양 언어와 우리 언어는 구조부터가 다릅니다. 외국과의 경쟁과 같은 현실적인 필요성이 영어공용화를 지지하기도 하지만 실제 우리끼리 소통하는 데 있어서 한국어가 너무나 크고 견고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복거일=영어는 오히려 문화의 다양성에 기여하기도 합니다. 언어는 문화의 기초가 됩니다. 요즘 어느 측면에서는 문화가 동질화되어가고 있습니다(*이건 무슨 논리인가?). 미국에서 솔이나 재즈가 나오면 그날로 전세계로 퍼집니다. 그렇다고 문화 다양성이 줄어드는 것은 아닙니다. 문화도 시장이기 때문에 오히려 시장이 넓어진 겁니다. 다양성이 확산돼 문화의 발전에도 기여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시너지 효과가 나는 겁니다.

안정효=언어도 문화의 일부입니다. 별개로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영어를 배워서 문화가 망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고방식이 망가지기 때문에 문화가 망가지는 겁니다. 영미권의 사고방식이 침투하면 문화도 망가집니다. 나 같은 경우 영어로 소설까지 썼지만 한국 문화를 지켜내고 있습니다. 사고방식을 어떻게 갖느냐에 달려 있습니다.(정리|김다슬기자)

07. 04. 26.

P.S. 아래는 '토플 대란'과 관련한 칼럼이다.

한국일보(07. 04. 24) [지평선] '토플 대란'이 우습다

언론과 인터넷에서 '토플 대란'이라고 난리다. 유례없이 신속히 10일만에 정부가 나서고 고교 교장들이 뭉쳤다. 범국가적으로 '토플 불매운동'의 조짐이 보이자 미국 본사(ETS) 수석부사장이 황망히 내한해 서비스 개선(?)을 약속했다.

이번 혼란의 본질은 잘 알다시피 우리의 잘못된 영어교육의 단면으로, 초중등 학생들의 과수요 때문이다. 유행 상품의 수요ㆍ공급 부작용일 뿐이다. 학생의 '결식 대란'이나 '알바 대란'에는 그렇게도 무심하던 대한민국이 '토플 대란'으로 국제적 망신을 샀으니, 웃기는 나라가 돼버렸다.

주연은 단연 학생과 학부모들이다. 연간 10만여 명의 응시자 중 30~40%가 미국대학 입학과 무관한 초중등생이며, 이들의 목적은 외고 입시 때문이라 한다. 서울 지역 7개 외고에서 영어특기 형태로 선발하는 인원은 200명 이내며, 토플은 대부분 외고에서 토익 텝스와 함께 선택 사항이다. 굳이 ETS 토플로 점수를 따겠다면 밤을 새우든, 광클을 하든 스스로 감수해야 할 부담이다. ETS가 '한국을 우습게 여겨' 성의를 보이지 않는다는 주장은 이기적인 핑계에 불과하다. 응시료만 매년 100억원 넘게 내는 한국은 ETS의 제일 소중한 고객이다.

정부도 웃기는 데 동참하고 있다. 1964년 토플시험이 시작된 후 미국 유학생이 10만 명에 이를 때까지 한번도 문제를 검토하지 않다가, 수요 과잉이 일자 '외고에서 토플을 없애라'고 수요 차단을 종용했다. 일본이 1963년부터(STEP TEST), 중국은 1987년부터(CET) 국가시험을 개발해 연간 수백만 명의 수요를 해결하고 있다. 이번 문제를 외고 합격자 몇 백 명으로 해결하려 드니 교육부의 현실감이 우습지 않을 수 없다. 덩달아 공정위가 ETS의 부당거래를 조사한다는 것도 그렇다. 굳이 말한다면 '부당 수요' 정도가 아니겠는가.

외고 교장들이 2009학년도부터 입시에서 토플을 뺄 테니 초중등생들은 앞으로 시험에 응하지 말라고 유인하는 것도 코미디다. 고교등급제 논쟁의 원인이 될 정도로 괜찮은 학교의 교장들이 이러한 결정을 했다니 우습지 않을 수 없다. 심하게 비꼬면 미국 ETS회사의 컴퓨터가 다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수년간 유지해온 자신의 입시 전형제도를 변경하겠다는 게 아닌가. 학생들이 다시 토익과 텝스 등으로 몰려 그 인터넷이 다운되고 그 고사장이 터져나가면 또 어찌할 것인가. 대증처방에만 급급하지 말고 차분히 대책을 궁리하자.(정병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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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YLA 2007-04-26 02:14   좋아요 0 | URL
이번 대란으로 많은 대학생들의 인생계획(?)이 달라진건 확실합니다. 저는 일단 교환학생이 반년 미뤄졌고...제 친구는 교환학생 반년 미뤄지는게 싫다며 (그럼 귀국하고 바로 취업준비거든요 ㅠㅠ) 북경대 1년 어학연수 떠나기로 했지요 허허

근데 궁금한게. 어릴때 영어를 배우면 영어도 잘하면서 한국어도 잘하는게 가능한가요? 제 주변을 보면..어릴 때 외국다녀온 애들은 영어는 정말 잘하는데 한국말 감각이 떨어지고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지만 글쓰기를 하면 확연히 드러나요) 한국 글솜씨가 뛰어난 애들은 영어실력에 한계가 있던데..어릴때 뛰어난 교육을 받으면 둘 다 잘할 수 있을까요? 어떤 나라에서는 국민들이 3개국어 4개국어 당연하게 하곤 하잖아요. 그런거랑 한개의 언어만 구사하는 거랑 질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해요.

이네파벨 2007-04-26 09:42   좋아요 0 | URL
영어공용화, 대학의 영어 강의 문제 등등...흥미롭고 어렵고곤혹스러운 주제....
계속 환기시켜 주셔서...좋습니다.
저도 무척 흥미 느끼는 주제거든요.
로쟈님 생각도 궁금하고...암튼 글이 마무리 되길 기다려 봅니다.

jouissance 2007-04-26 09:49   좋아요 0 | URL
복선생! 그래도 유보적이었는데 이제는 자꾸 저어하게 되는군요. 딱하다는 생각뿐입니다..

로쟈 2007-04-27 00:05   좋아요 0 | URL
LAYLA님/ 이중언어 전문가에게 문의하실 내용 같은데(^^;) 제 생각엔 개인차가 있는 것 같고요, 평범한 아이들이라면 너무 이른 외국어 학습은 오히려 역효과가 나는 경우가 많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네파벨님/ 제 생각은 별다른 게 없고 서두에 적은 대로입니다...
jouissance님/ 저는 공용어론자들의 주장에 일리는 있다고 생각하지만, '민족주의적' 포지션을 내세울 때는 어리둥절합니다. 사실 제일 좋은 건 그냥 '미국'으로 (단체로!) 이민가는 거 아닐까요? '국제어 시대'에 굳이 한국어 배우랴, 영어 배우랴, 이중으로 고생할 필요가 없이...

나비80 2007-04-27 02:25   좋아요 0 | URL
이 날치 '경향'에 볼거리가 많더군요. ^^

싸이런스 2007-04-27 07:12   좋아요 0 | URL
푸하하 또라이 복거일의 일방향 의사소통 방식도 골때렸는데, 정병진 논설위원님은 누군지 모르겠지만 고단수 해학을 구사하시네요!

싸이런스 2007-04-27 07:14   좋아요 0 | URL
하하 로쟈님 댓글도 만만치 않군요! 그냥 단체로 가버렷! 덕분이 한참 웃었어요!

도톰 2007-04-27 08:35   좋아요 0 | URL
‘캐주얼한 관계’ 는 짧게 말해 '흔한 관계' 정도로 말할 수 있을까요?

심술 2007-04-27 21:59   좋아요 0 | URL
kaosmapak님, 저도 '캐주얼한 관계'를 우리말로 바꾸면 뭘까 생각해 봤는데 바로 머리에 떠오르는 건 없다가 10초쯤 지나니까 '심각하지 않은 관계'가 떠오르더군요. 그런데 맘에 들지는 않네요. '흔한 관계'가 '심각하지 않은 관계'보다 나은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아주 맘에 쏙 들지는 않는군요. 다른 분들은 어떻게 번역하시련지요?

로쟈 2007-04-27 22:33   좋아요 0 | URL
'캐주얼한 복장'이 간편하고 편한 복장이란 뜻이니까, '편한 관계'나 '부담없는 관계' 정도로 옮겨질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도톰 2007-04-28 21:30   좋아요 0 | URL
casual 의 용례를 볼 때, 곧잘 부정적으로 쓰이곤 하는 뉘앙스를 감안하다 보니 쉽게 옮겨 말하기 힘들었나 봅니다. 마치 kitch처럼요.
 

막간에 지젝의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도서출판b, 2007)에 대한 리뷰를 하나 옮겨온다. 본격적인 리뷰가 드물던 차에 반가운 글이면서 동시에 책에 대한 독해를 다시금 부추기는 글이다. 5월에는 나도 시간을 낼 수 있으면 좋겠다.  

컬쳐뉴스(07. 04. 24) 지젝과 지저거리며 함께 머물기

현대사상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피해갈 수 없는 이름이 있다. 프로이트와 라캉을 뒤이어 정신분석학의 힘을 가장 야심차게 (재)확장해놓은 슬라보예 지젝(1949~  )이 바로 그 이름이다(*지젝을 경유하지 않고 사유하는 일이 가능은 하겠지만 재미는 없을 듯하다). 따라서 그의 이력을 구구절절 늘어놓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젝을 읽기 위해서는 피해야 할 선입견이 있다는 점은 지적하고 넘어가야 된다. 그의 글은 이해하기 쉽다는 선입견이 바로 그것이다(*물론 지젝은 쉽다. 헤겔 혹은 라캉과 비교해보라! 다만 그가 혹은 우리가 기대한 만큼 '대중적'이지 않을 따름이다).

아마도 이 선입견은 “대중문화로 철학을 더럽히는 철학자”라는 강단 철학자들의 비아냥거림에서 엿볼 수 있듯이, 지젝이 자신의 논의를 설명하기 위해 대중문화의 예(특히 할리우드 영화, 심지어는 <타이타닉> 같은 블록버스트까지!)를 많이 들기 때문에 생겼을 것이다. 물론 맞는 말이긴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다른 현대사상가들에 ‘비해’, 즉 ‘상대적으로’ 그러한 뿐이다.

이 점은 “칸트, 헤겔, 그리고 이데올로기 비판”이라는 부제가 달린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도서출판b, 2007)를 읽을 때에도 똑같이 해당된다. 이 책에서도 지젝은 <토탈 리콜>, <엔젤 하트>, <블레이드 러너>, <더티 해리> 같은 할리우드 영화 얘기를 곳곳에서 하지만, 그보다 백배는 더 많은 지면을 칸트와 헤겔에 대한 철학적 논의에 할애하고 있다. 따라서 한정된 지면에 이 책의 내용을 장황하게 늘어놓을 수는 없고, 이 책의 결론부에 해당하는 6장 「당신의 민족을 당신 자신처럼 즐겨라!」를 중심으로 몇 마디 하고자 한다.

6장의 핵심 테마는 “어떤 주어진 공동체를 묶는 요소는 상징적 동일화의 지점으로 환원될 수 없다. 그 구성원들을 한데 연결하는 끈은 언제나 어떤 사물을 향한, 체화된 향유를 향한 공유된 관계를 함축한다”이다. 이 테마는 이 책의 부제에도 포함된 지젝의 ‘이데올로기 비판’을 압축해 놓고 있으며, “기존의 지배질서에서 벗어나 새로운 주체가 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모든 비판이론의 궁극적 테마와도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지젝은 통상적인 이데올로기론, 즉 “이데올로기는 거짓 의식”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이론은 철저히 ‘재현적’이라고 비판한다. 즉, 통상적인 이데올로기론은 어떤 사회적 내용(가령 현실의 지배구조)을 왜곡하여 잘못 재현한 것이 곧 이데올로기라고 본다는 것이다. 일단 이렇게 이데올로기가 정의되면, 우리가 기존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어떤 사회적 내용을 왜곡하지 않고 제대로 재현하는 것이 된다(한때 우리는 이 과정을 ‘의식화’로, 그 결과물을 ‘대항-이데올로기’라고 불렀다).

그러나 지젝에 따르면 “어떤 정치적 견지는 그 객관적 내용과 관련해서 아주 정확한(‘참된’) 것이면서도 철저하게 이데올로기적일 수 있다. 그리고 그 역도 참이다”라고 말한다. 따라서 재현의 문제틀로서는 이데올로기의 힘을 이해할 수도,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도 없다. “어떤 주어진 공동체를 묶는 요소는 상징적 동일화(곧 이데올로기)의 지점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지젝의 말은 이를 뜻한다.

그렇다면 어떤 주어진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한데 연결하는 요소는 무엇일까? 지젝은 ‘체화된 향유’로서의 ‘어떤 사물’이 바로 그런 요소라고 말한다. 여기서 그는 이데올로기의 작동원리를 의식의 차원에서 무의식의 차원으로 끌고 내려가 설명하는데, 이때 그가 기대는 것이 라캉의 정신분석학이다(아니, 오히려 지젝 식으로 해석된 라캉의 정신분석학이라고 해야 정확할 듯하다).

라캉에 따르면 ‘향유’(juissance/enjoyment)란 쾌락(plaisir/pleasure)이 아니다. 향유와 쾌락을 동의어로 쓰곤 했던 프로이트와 달리(가령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 라캉은 욕구(besoin/need)와 요구(demande/demand)를 구분하며 각각의 개념에 쾌락과 향유를 대입한다. 가령 어머니의 젖을 빠는 아기의 경우 배고픔이라는 생체적 욕구가 충족되면 더 이상 ‘식욕의 빨기’(succion)가 아니라 ‘쾌감의 빨기’(suçotement)를 한다. 이렇듯 욕구가 충족된 이후에도 추구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향유는 쾌락의 초과, 위반, 잉여이다. 또한 과도한 쾌락은 불쾌(고통)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쾌락 이상을 추구하는 향유는 도착적이기도 하다.

쾌감의 빨기는 아기가 어머니와 일체감을 느끼곤 하는 행위이기도 한데 이 행위는 곧 중단된다. 즉 젓 떼기를 하는 것이다. 아기는 잃어버린 일체감을 회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쾌감의 빨기’를 반복하려고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허락되지 않고, 이제 어머니의 젖꼭지는 “기다려 보지만 항상 결핍된 것”, 즉 충족되지 않은 욕망의 대상이 된다. 라캉은 이를 ‘대상 a’(objet petit a/object little-a)라고 부르는데, 이것이 바로 지젝이 말하는 바의 ‘사물’(La Chose/the Thing)이다.

따라서 “어떤 사물을 향한, 체화된 향유를 향한 공유된 관계”가 어떤 주어진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한데 연결한다는 지젝의 말은 “잃어버린 대상을 찾으려고 하는 반복의 고통 속에서 느끼는 쾌락”(즉 향유)이 공동체의 결속을 유지시켜 준다는 말인데, 그에 따라 지젝에게서는 이데올로기의 위상 자체도 변한다. 즉 지젝이 말하는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어떤 사회적 내용을 왜곡하여 잘못 재현한” 담론구성체가 아니라 우리가 왜 그 고통스럽기 그지없는 끊임없는 반복을 통해서도 ‘사물’(대상 a)을 얻지 못하는가를 설명해 주는 상상적 답변이다. 그래서 지젝의 이데올로기는 환상(fantasy)의 구성물에 가깝다.

지젝은 프로이트와 라캉을 경유한 이런 정신분석학의 설명틀을 확장해 정신분석학을 정치학으로 탈바꿈시킨다. 가령 한 사회는 그만의 ‘대상 a’(사물)를 갖고 있다. 그것은 민주주의일수도, 민족일수도, 계급일수도 있다. 우리는 민주주의의 종주국이라고 자부하는 나라들, 요컨대 영국이나 미국에서 민주주의의 핵심이라고 불리는 보통선거권이 인정받은 것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와서라는 사실을 너무나 자주 잊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민족이나 계급의 경계가 생각보다 그리 뚜렷하지 않다는 사실을 너무나 자주 잊고 있다. 즉 민주주의, 민족, 계급은 아직 우리가 결코 완벽하게 소유한 적이 없는 ‘대상 a’(사물)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지난 20세기 동안 결코 완벽히 소유한 적 없는 민주주의, 민족, 계급의 이름으로 대규모 전쟁(내전이든 국제전이든)을 해오지 않았는가? 지젝이 “향유의 도둑질”의 역설, 즉 우리의 사물이 타자에게 접근불가능한 어떤 것으로 간주(왜냐하면 우리의 사물은 타자가 갖고 있지 않는 것이기에 우리와 타자를 구분해 주는 것이므로)되는 동시에, 타자에 의해 위협당하는 어떤 것으로 간주된다(우리도 갖고 있지 않은 사물을 타자가 위협한다)는 역설을 통해 비판하고자 하는 바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와 같은 지젝의 이데올로기 비판을 염두에 둔다면, 의식화나 대항-이데올로기의 창출을 통해 기존의 지배질서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지젝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선택지는 두 가지이다. ‘대상 a’(사물)라는 것이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혹은 절대 충족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폭로하거나, 향유가 충족되지 않고 있는 이유를 설명해 주는 상상적인 환상(판타지)을 찢어발기거나. 파시즘의 반유대주의에 맞서 건국의 아버지 모세가 이집트인임을, 즉 유대인의 기원이 잡종이라는 것을 입증하려 했던 프로이트의 시도(「인간 모세와 유일신교」)가 전자의 경우라면, 지젝의 작업이 바로 후자의 경우일 것이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우리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것은 “예외된 한 사람”(homme moins un)이 되는 것일 게다. 라캉은 프로이트가 거세 신화를 설명한 「토템과 터부」를 다시 읽으면서, 거세 위협에 복종한 아들들로 구성된 집단이 어떤 의미를 가지려면 논리적으로 복종하지 않은 아들이 ‘적어도 한 사람’(au moins un)은 있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라캉은 발음상의 유사성에 착안해 “이 적어도 한 사람”을 “예외된 한 사람”(오모엥젱)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 오모엥젱들이 연대할 때 기존의 지배질서는 비로소 사라질 것이다.

그런데 이 오모엥젱들을 묶어줄 요소는 과연 무엇일까? 지젝은 아직 이 질문에 답을 해주진 않고 있으나 여하튼 계속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다(지젝의 최근 작업은 혁명가들을 다시 읽는 ‘혁명’ 시리즈, 그리고 “모든 이데올로기가 의심의 눈초리를 받고 있는 포스트모던한 오늘날, 동시대의 이론이 저지르고 있는 오류와 대결하며 기발한 해결책을 제안한다”고 예고된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이다). 우리가 아직 지젝과 지저거리며 함께 머물러 있어야 할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이재원_그린비 편집장)

07. 04. 26.

P.S. 지젝의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는 올해 나올 예정인 책이며 국역본도 근간 예정인 것으로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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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7-04-26 0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지젝 책 완독한 것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밖에 없지만, 구입해 놓은 책은 거진 10권이 다 되는 것 같습니다 -_-;;;; 이 글을 보니 다시 들춰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yoonta 2007-04-26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의 주요 논점을 비교적 잘 정리해주는 글인 듯 하네요. 이재원이라는 분 글 가끔 이곳 로쟈님 서재에서 보게 되는데 리뷰를 군더더기없이 잘 써주시는 듯 합니다..^^ 위 글에서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지젝의 이야기가 가진 단점이랄지 한계도 좀 지적해주었으면 하는 점이 있긴 하네요.

로쟈 2007-04-26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인님/ 돈보다 모자라는 게 시간이죠.^^;
yoonta님/ '단점'은 직접 지적해주시면 저도 경청하겠습니다. 최근에 지젝에 대한 비평/비판과 지젝의 답변을 담은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책은 몇 주 전에 구해놓았는데 읽을 시간이 정말 없네요.--;

yoonta 2007-04-26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그것을 할수있다면 진작 했겠죠..^^; 아직은 그의 텍스트를 읽고 이해하기에도 벅찹니다. 제가 기억하는 지젝에 대한 비판 한 구절을 인용해 보면..

"그는 실재계를 단지 '부재하는 효과'로서만 정의한다. 그 결과 심지어 '신'이란 개념조차 실재계의 예로 사용되는데, 이렇게 되면 상징계와 실재계의 구분조차 모호해지는 난점이 있으며, 결코 라캉적인 실재계라고 하기는 어려워 보인다."(이진경, 철학의 외부 42p) 정도 입니다. 아시다시피 지젝의 실재계 논의는 자크 알랭 밀레의 실재계 해석에 많이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이진경이 주장하는 지젝의 실재계는 어쩌면 라캉의 실재계라기보다는 자그 알랭 밀레의 실재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네요.

로쟈 2007-04-26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전 얘기 같은데요. 이진경의 라캉 비판과 마찬가지로 일면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세미나 이후의 라캉이나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이후의 지젝에 대해서 참조하기 이전의 것이 아닐까 싶네요...

에바 2007-04-27 1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이 몇 주 전에 구해놓으셨다는 책은 어떤 건가요?

로쟈 2007-04-27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환상을 가로지르기(Traversing the fantasy : critical responses to Slavoj Žižek)(2005)란 책입니다...


에바 2007-04-27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답변 감사합니다.^^ 거기다 이미지까지...검색해보니 학교 도서관에도 있는 걸로 나오네요. 내일 한번 구경이나 해 봐야겠습니다.^^
 

세계체제론으로 유명한 미국의 '실천적 사회과학자 '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신간이 출간됐다. <지식의 불확실성>(창비, 2007). '새로운 지식 패러다임을 찾아서'가 부제이며 월러스틴의 새로운 사회과학 방법론 모색작업을 압축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책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이 한권으로 <우리가 아는 세계의 종언>(창비, 2001), <사회과학의 개방>(당대, 1996), <사회과학으로부터의 탈피>(창비, 1994) 등을 모두 '카바'할 수 있겠다. 생각해보니 이 나머지 책들을 소장하고 있지 않은 듯하여(나는 월러스틴의 책을 서너 권밖에 갖고 있지 않다) 뭔가 '다이제스트' 역할을 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신간을 손에 들었다.

 

 

 

 

아직 리뷰들이 올라와 있지 않은데, 소개에 따르면 "'세계체제' 분석으로 널리 알려진 사회과학자 이매뉴얼 월러스타인의 지식패러다임의 비판적 전망서"로서 "그의 전 저서들- <사회과학으로부터의 탈피>, <사회과학의 개방> 에서도 비판하듯이, 이매뉴얼월러스틴은 19세기식 학문의 시효가 만료되었음을 재차확인하고, 새로운 지식패러다임을 모색하고 있다. 크게 2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19세기 학문의 체계에 대한 비판적인 분석과, 새로운 지식 패러다임에 대한 모색이 내용의 큰 부분을 이룬다."

특이한 것은 <혼돈으로부터의 질서>의 저자 일리야 프리고진에게 이 책을 헌정하고 있는 점. "과학자이자 인문학자이자 학자였던 일리야 프리고진(1917-2003)을 기억하며"라고 월러스틴은 서두에 적었는데, "지은이에 의하면 일리야 프리고진의 '복잡성'으로 대표되는 '복잡성 과학'과 기존의 담론에서 소외되었던 소수자들의 목소리에 주목하기 시작한 '문화연구' 는 19세기식 지식패러다임의 종말을 알리는 사건이며, 이 종말 이후에 보다 총체적인 방법론을 모색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가 지향, 제시하는 총체적인 방법론은 배타적인 이분법 대신, 양쪽을 감싸안으면서 새로운 비전을 줄 수 있는 '역사적 사회과학' 이다."

말하자면 이 '역사적 사회과학'이 불확실성의 시대의 새로운 지식 패러다임일 터이다(제목은 프리고진의 <확실성의 종말>(사이언스북스, 1997)을 바로 떠올리게 한다). 월러스틴이 프리고진으로부터 힌트를 얻어온 개념은 '배제되지 않은 중도(unexcluded middle)'인데, 그것은 달리 '결정주의적 혼돈' 혹은 '혼돈적 결정주의'를 가리키며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방법론을 통합하는 사회과학적 방법론을 지시하는 듯하다. 역자가 인용하는 바에 따르면, 그러한 방법론을 통해서 월러스틴이 모색하고자 하는 길은 "새로움을 전혀 허용하지 않는 결정주의적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와, 모든 것이 부조리하고 원인이 없고 불가해한, 주사위놀이를 하는 신이 다스리는 세계, 즉 소외로 이끄는 이 두 개념 사이에 난 좁은 길"이다.

'중도'는 요즘 정치권에서도 화두가 되고 있는 노선인데 월러스틴의 통합적 방법론으로서 그것이 얼마만큼 생산적이며 또 어떤 구체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건지는 (아직 책을 읽기 전이라) 가늠하기 어렵다. 다만, 월러스틴이 낸 '좁은 길'을 따라가는 여정의 길잡이가 매우 상세한 해제(옮긴이의 말)를 붙이고 있는 믿을 만한 역자인지라 적어도 '번역의 불확실성'으로 고생하지는 않을 거라는 점은 기대해볼 만하다. 뒷표지에 실린 한 추천사에 따르면, "월러스틴의 책은 항상 읽기 쉽고, 상당히 설득력이 있으며, 심오하다."니까 가벼운 복장으로 따라나서기만 하면 되겠다.   

07. 04. 25-26.

P.S. 보다 자세한 내용은  내일자 한겨레의 리뷰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05562.html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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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 경향신문의 연재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첫회를 옮겨놓았었는데 그 두번째 이야기가 연달아 게재되었다. 따로 옮겨놓을 생각을 못하고 있었는데, S님이 상기시켜주는 바람에 부랴부랴 퍼놓고 며칠 뜸들이다가 몇 자 적는다. '지금, 그들은 어디에 서 있나'가 기사의 타이틀이지만 잠시 유행하던 제목을 본떠서 '그 많던 지식인들은 어디로 갔을까?'라고 새로 제목을 붙여서. 사실 유사 타이틀을 단 책이 나오긴 했었다. 프랭크 퓨레디의 <그 많던 지식인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청어람미디어, 2005)가 그 책이다.

 

나는 생각난 김에 어제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했고, 또 덩달아 생각난 김에 파스칼 오리 등의 <지식인의 탄생>(당대, 2005)의 몇 대목도 복사했다. 죽음은 언제나 탄생의 장면에 대한 회고를 불가피하게 불러일으키기 때문인데, <지식인의 탄생>은 사실 지식인의 그 쇠잔해져 가는 운명을 끄트머리에서 다루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과연 '지식인이란 무엇인가?'  한 책에서는 "정치적 인간의 상황에 처한 창조자 또는 매개자로서의 문화인, 이데올로기 생산자 또는 소비자"로 다소 번잡하게 정의내리고 있지만, 사르트르의 정의가 훨씬 간편하고 유용하다. 그건, "지식인이란 자기와 상관도 없는 일에 참견하는 사람"을 가리키는데, 더 간단히 말하자면 '남의 일에 참견하는 사람'이 바로 지식인이다.

고종석은 그 사르트르의 말을 이렇게 풀었다. "지식인은 자신과 관계없는 일에 참견하는 사람이다. 그 말을 바꾸면 지식인은 세상의 모든 일이 자신과 관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일 수도 있겠다. 사르트르는 더 나아가 지식인은 자신의 지적 영역에서 쌓은 명성을 "남용"-사르트르에게 이 "남용"이라는 말은 당연히 긍정적 의미로 사용된다-하여 기존의 사회와 정치권력을 비판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바로 이 "남용"이야말로 지식인의 본질적 부분이고, 어떤 체제, 어떤 시대에도 지식인이 처할 수밖에 없는 불편함을 설명해주는 개념이다."(<코드 훔치기>)

경향신문의 연재에서 지식인이란 말은 좀더 두루뭉술하게 사용되는 듯하다. 가방끈 긴 이들 가운데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공개적으로 내세우면서 행세하는 이들을 가리키는 말로 쓰는 게 아닌가란 인상이다. 그러니까 거기엔 (러시아식 계보의) 인텔리겐치아와 (영미식 계보의) 인텔렉츄얼이 혼합돼 있는 듯싶은데(다양한 분포는 그래서 나오는 것 아닐까?), 그건 좀 비생산적이다. '지식인이 처할 수밖에 없는 불편함'을 거론되고 있는 인사들이 얼마나 자각하고 있는 것인지 의문스럽기도 하고. 해서 '지식인 생태학'에 관한 참고자료로서나 의미가 있는 게 아닌가 싶다(지식인의 죽음과 지식인 지도가 양립가능한가?).   

경향신문(07. 04. 25)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1-2. 지금, 그들은 어디에 서 있나

지식인 사회가 분명한 ‘민주 대 반민주’ 전선으로 양분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지식인 사회는 ‘사상해방’이라고 할 만큼 다양하게 분화됐다. 반공주의자는 냉전적 사회인식이 힘을 잃어가면서 세가 줄었다(*'반민주적 지식인'이 가능한 포지션인가?). 특히 2000년 6·15공동선언 등 남북한 화해무드가 지식사회 내에 큰 영향을 끼쳤다. 우파 지식인들도 반공주의를 배격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민족주의자의 경우 위세는 여전하지만, 인권·시민사회· 탈민족주의자의 부상도 두드러지고 있다. 너도 나도 자유주의를 자처할 만큼 자유주의자가 증가하고 있다. 노동, 성, 환경 등 다양한 주제가 등장하면서 지식인의 분포도는 더욱 복잡해지고 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급격히 부상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동아시아론’ 등 대안 담론의 도전을 받고 있다. 좌파 지식인들의 우파 전향 및 ‘중도선언’이라는 새 경향도 나타났다. 80년대 중반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을 포기한 좌파 경제학자 안병직(뉴라이트재단 이사장·서울대 명예교수)을 비롯해 90년대 소련 등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김영환(시대정신 편집위원), 신지호(자유주의연대 대표) 등 ‘주체사상파 운동권’들이 전향했다. 최근 홍윤기(동국대 교수), 황석영(소설가) 등은 ‘급진적인 좌파나 경직된 우파가 아닌 통합적 대안으로서의 중도’를 천명했다.

경향신문은 최근 이들의 사상 궤적을 토대로 ‘2007년 한국사회 지식인 지도’를 작성했다. 정치·경제·사회 이념의 좌우 성향(가로축), 민족주의 성향 여부(세로축)로 한 2차원 공간에 주요 지식인을 배열했다(*표 자체는 옮겨오지 못했다). 두 축의 교차점에서 멀수록 이념적 특성을 뚜렷이 보여준다. 강정구(동국대 교수)와 강만길(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장·고려대 명예교수)은 좌파 성향에 차이가 있지만 민족주의적 특성이 강하다. 강정구는 좌파 민족주의자, 홍세화(한겨레신문 기획위원)는 좌파 탈민족주의자, 복거일(문화미래포럼 대표·소설가)은 우파 탈민족주의자를 각각 대표한다.

김호기(연세대 교수)는 “우리의 지식인 이념 분포 양상은 서구 사회와 다르다. 서구적 틀로는 좌파가 탈민족주의, 우파가 민족주의 중심으로 분포하지만 우리는 좌파민족주의 지식인들이 많다”며 “이는 김구 등 우파 민족주의 그룹이 몰락하고 나서 수십년간 반공체제가 공고해진 탓”이라고 말했다.

#민족주의자
좌우 이념 성향에 따라 북한체제의 포용 및 통일 방식의 개방성에서 차이가 드러난다. 좌파 민족주의자는 ‘분단 국가의 일부’로서 남한이 가진 정체성의 한계를 강조한다. 70년대 ‘분단시대의 역사인식’ 등을 써 통일지향의 필요성과 민족문제에 대한 자각을 일깨운 강만길, 남북한 모두의 내부 모순을 해소하기 위한 통일(분단체제론)을 주장한 백낙청(‘창작과 비평’ 편집인·서울대 명예교수) 등이 진보적 민족주의자다. 급진적 좌파 민족주의 지식인들은 ‘북한도 우리의 일부’란 시각에서 반외세 자주 통일을 지향한다. ‘민중에 의한 통일’을 주장하는 백기완(통일문제연구소장), 강정구, 송두율(독일 뮌스터대 교수)이 있다. 우파 쪽의 대표적 인사로 신용하(독도학회장·이화여대 석좌교수), 서길수(고구려연구회 이사장·서경대 교수) 등이 있다. 남한 체제 우위의 통일을 추구하거나, 통일보다는 대외 영토·역사 문제에 천착한다. 중도적 민족주의자로는 ‘전통 문화·정신’을 강조하는 김지하(시인·한국예술종합학교 석좌교수)를 들 수 있다. 북한을 타도 대상으로 보는 통일지향 세력으로서 극우 민족주의 성향을 보이는 인사로는 97년 월남한 ‘주체사상의 대부’ 황장엽(북한민주화위원회 위원장)을 들 수 있다.



#좌파·진보주의자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적 결함을 비판한다. 마르크스주의, 진보적 시민사회론, 근대비판주의 등으로 분화해 있다. 마르크스주의 지식인들은 사회 구성과 발전의 주체로서 노동자 계급을 강조한다. 특히 불평등 문제를 주시한다. 민주노동당 진보정치연구소 위원으로 활동 중인 장상환(경상대 교수)은 현실 참여를 통한 사회 개선을 추구한다. 오세철(연세대 명예교수)은 좌파 학자들 위주로 ‘부르주아 체제에 포섭되지 않는 대안학교’인 진보적 사회과학대학원의 설립을 추진중이다. 손호철(서강대 교수)은 계급·민중적 시각의 사회평론에 적극적이다.

포스트 마르크스주의 지식인 그룹으로는 문화주의, 트로츠키주의, 자율주의자가 있다. 문화주의 지식인들은 마르크스주의의 ‘경제결정론’을 비판하는 한편 자본주의 체제 내 문화가 계급 및 불평등 구조를 재생산한다고 본다. 강내희(중앙대 교수)가 대표적이다. 그는 시민단체 ‘문화연대’를 통해 음악 저작권 강화 반대, 18세 선거권 낮추기 운동, 외국인 노동자 문화축제 등을 펼치고 있다. 트로츠키주의자 정성진(경상대 교수)은 국가 단위의 자본주의 극복이 아닌 세계 수준의 혁명을 추구한다. ‘노동계급의 국제연대’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이같은 노선에는 국제사회주의 단체 ‘다함께’가 있다. 자율주의자 조정환(갈무리출판 대표)은 스탈린식의 일당(전위당) 독재를 거부하고 노동자 자율에 의한 혁명과 발전을 추구한다.

진보적 시민사회론자들은 마르크스주의와 달리 사회변화의 주체를 ‘억압 당하는 노동계급’이 아닌 ‘시민’으로 본다. “민중이 자신의 다양한 이익을 체제에 반영할 수 있어야 한다”는 최장집(고려대 교수)의 민주주의 담론이 이와 연계된다.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소장 김상조(한성대 교수), 참여연대 운영위원 조국(서울대 교수) 등이 이 범주에 들어간다.

근대비판주의 지식인의 스펙트럼은 넓다. 페미니즘, 생태주의, 탈근대론 등 체제 비판 이론이 다양하게 분포해 있다. 국가주의, 개발론, 민족주의 등 근대적·권위주의적 담론을 거부한다. 페미니즘은 가부장적 사회체제가 가지는 폭압적 구조를 반대한다. 여성운동의 대가 이효재(이화여대 명예교수)로 시작된 페미니즘은 ‘여성의 신체’(조한혜정 연세대 교수)에서 ‘여성노동자’(조순경 이화여대 교수)까지 논의의 폭을 넓혔다.

생태주의는 ‘대안적’ 삶·사회를 꿈꾸는 급진적 개발반대론이다. ‘지속가능한 발전’(환경주의)을 넘어 ‘인간의 탐욕’이란 문제 의식에 기초해 “생태 문제를 최우선시하고 생태가치를 생활의 전반에 구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종철(녹색평론 대표), 장회익(녹색대학 석좌교수)이 있다. 탈근대론자들은 ‘민족주의 비판’(임지현 한양대 교수), ‘냉전적 국가론 비판’(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 ‘소수자 소외 비판’(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 등을 통해 가부장적 획일주의, 순혈주의를 비판한다.

#우파·보수주의자
기본적으로 사회주의 반대, 자본주의 지향을 유지한다. 반공주의, 반공주의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연한 뉴라이트, 시장자유주의 등이 분포하지만 각각 명백히 구분되지 않은 채 혼재된 양상이다. 반공주의 지식인들은 ‘정통 보수’를 자칭하며 ‘대한민국의 법통’을 강조한다.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서 대한민국은 ‘반국가단체’인 북한에 대항해야 한다는 논리를 토대로 한·미동맹과 보안법을 최우선시한다. 조갑제(전 월간조선 대표)가 이 그룹의 대표적 지식인이다. ‘산업화 세력’에 대한 ‘민주화 세력’의 폄훼 시도를 적극 방어하는 이들은 “뉴라이트는 위장 전향한 빨갱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뉴라이트는 신지호 및 홍진표, 최홍재(각각 자유주의연대 사무총장, 조직위원장) 등 ‘전향 386’들이 주도하는 ‘신우파’ 그룹이다. 자유주의, 북한인권 중시, 대외개방 및 시장주도 경제, 기간산업 민영화 등을 주장한다. 최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찬성에서 드러나듯 “자폐적 민족주의를 극복하고 애국적 세계주의를 지향”한다. 대외 개방을 중시하는 탈민족주의자들이다.

“전통적 반공주의자들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약화됐고 사회 담론도 생산하지 못하고 있다”는 신지호의 지적처럼 뉴라이트 그룹은 최근 보수진영의 사회 이슈를 선점하고 있다. “자유시장경제의 창달을 통한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를 추구하는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 박세일(서울대 교수), “자본주의의 참담한 모순만 다룬, 잘못된 역사쓰기는 바로 세워져야 한다”는 교과서포럼 공동대표 박효종(서울대 교수)이 같은 노선이다. 시장자유주의는 영어공용화론을 주장하는 복거일, 자유시장 경제 지상론을 펴는 민경국(강원대 교수), 좌승희(경기개발연구원장) 등이 있다. 경제·통상 이슈에 집중하며, 정부의 시장개입은 최소한이어야 한다는 ‘작은 정부론’을 주창한다.

#자유주의자
국내 자유주의 개념은 포괄적이며 모호하다. 사회복지를 내세우는 사회적 자유주의(social liberalism)와 시장자유주의(libertarianism) 모두 자유주의로 해석된다. 최장집과 신지호 등 좌우파 지식인들이 모두 자유주의자를 자처한다. 상대적으로 이념 성향이 강하지 않은 지식인 그룹을 자유주의로 분류된다. 좌파와 우파를 넘나드는 총체적 시각으로 현상을 비판한다. 사회주의나 군부 독재 하에서의 ‘동원체제’ 등 억압적 권위를 거부한다. 윤평중(한신대 교수)은 자유주의자를 “열려 있으면서도 혼자 있을 수 있는 사람, 연대하면서도 패거리 만들지 않는 사람”이라며 “사회의 여러 이념들 간의 괴리를 메울 수 있는 지식인”이라고 정의했다. 최근 ‘중도’를 선언한 홍윤기(동국대 교수)가 자유주의자 가운데 상대적 좌파, 유럽적 우파로 통하는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출신의 이근식(서울시립대 교수)이 상대적 우파로 분류된다.(장관순·손제민기자)

경향신문(07. 04. 25)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87년 이후 지식인상의 변화

오랫동안 한국 사회의 주류적인 지식인상은 저항적 지식인이었다. 사르트르가 역설한 “지식인은 우리 시대의 모든 갈등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다. 지식인은 억압당하는 자의 편에 설 수밖에 없다”는 명제는 40대 이상의 사람들에게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한완상의 ‘민중과 지식인’은 80년대 대학 신입생의 필독도서였고, 그들을 새로운 현실로 인도하는 안내서였다(*나도 대학 1학년때 읽은 기억이 있다). 스스로를 지식인으로 자각하는 것이 사회와 현실로 나아가는 초대장이었던 셈이다.



-탈근대화, 천대받는 ‘진실’-
문익환 목사는 생전에 강연회에서 종종 지식인과 민중의 관계를 칼날과 칼등의 관계로 비유하곤 했는데, 민주화 투쟁과정에서 지식인들은 비유 그대로 ‘민중의 칼날’이었다. 당시의 현실에서 지식인은 근대적 합리성과 서구식 민주주의에 대해 가장 많이 교육받은 존재였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담지자로 기능했다. 민주주의, 자유, 인권과 같은 추상적 개념은 이들에 의해 만질 수 있고 도달할 수 있는 현실적 실재로 감지됐다. 민중의 계몽가이자 선구자로서 지식인은 사회의 각 영역에 큰 자취를 남겼다.

시대의 선생으로 불린 함석헌과 리영희의 저작들, 장준하(*사진)의 선구적 활동, 백낙청과 김현이 주도한 비평의식의 고도화, 박현채의 민족경제론, 탈춤과 같은 민중 문화의 재발견 등은 그러한 현상의 몇몇 예에 불과하다. 70, 80년대에 걸쳐 지식인은 민주화 투쟁뿐 아니라 한국 사회의 지적 수준을 끌어올린 교사였으며, 특정한 의미에서 ‘민족’과 ‘문화’의 창안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이런 일들은 추억 속의 에피소드가 되었다. 굳이 푸코나 리오타르 같은 프랑스 사상가들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오늘날 지식인의 사회적 위상이 현저하게 추락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은 다양하게 설명돼야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도래와 같은 세계사적 전환이 바탕을 이루며 거기에 한국 사회의 역사적 변천이 조응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 밑바닥에 탈근대적 현실이 있다.

근대 극복을 목표로 출발한 탈근대주의는 근대가 창출한 각종 제도, 가치, 개념, 역사의 허위성을 폭로하는 데 일조했다. 우리가 지금까지 당연시했던 많은 것들이 사실은 근대에 이르러 ‘만들어진 전통’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현실과 진실의 관계가 흔들렸다. 과거에는 현실을 깊게 파고들면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이 존재했다. 하지만 오늘날처럼 ‘진실’이라는 단어가 천대받은 적이 있었던가? 총체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현실을 총체적으로 재현·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탈근대주의가 가르친 진실이다. 리오타르는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가치를 여전히 설파하는 지식인이란 무지이거나 권력의지의 산물일 뿐이라고. ‘지식인의 종언’은 무엇보다 지식인 자신에 의해 천명됐다.

여기에 사회주의의 붕괴로 대표되는 이념의 붕괴는 한국 지식인상의 변화에서 기억할만한 사건이다. 박노해나 조정환, 이진경처럼 이 무렵 새로 등장한 지식인들은 마르크스주의로 무장한 채 선배 세대인 4·19세대, 유신세대와 자신들을 날카롭게 구분했다. 하지만 민주화가 시작되고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하면서 이러한 구분법의 의미도 모호해졌다. 이념의 붕괴는 역설적으로 사상의 해방을 몰고 왔다. 분수처럼 사상이 흩어졌으니, 사람들은 저마다 급진좌파에서 뉴라이트로, 헤겔에서 들뢰즈로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섰다. 오늘날 한국 지식인 사회는 사상의 백가쟁명 시대를 새롭게 관통하고 있다. 그런 만큼 사상의 대변인으로서, 혹은 안내자로서 지식인의 사회적 입지는 현저하게 약화됐다.

아마도 지식인을 날것의 현실로 끌어내린 직접적인 계기는 외환위기일 것이다. 자살이 속출하고 노숙자로 넘쳐나는 거리가 매일 매스컴에 보도되면서, 모든 것이 물질적 가치를 중심으로 재편됐다. 이를 상징하는 것이 ‘신지식인’이다. 현재까지 3316명이 선정된 것으로 알려진 신지식인은 외환위기 속에서 경제적 가치창출이라는 일반적 목표에 국민을 동원하려는 상징조작이었다. 신지식인은 한편으로는 기존 지식인의 권위에 기대면서도 수량화, 물질화, 공유화라는 측면을 강조함으로써 지식인의 ‘유용성’에 강력한 의문부호를 새겨놓았다(*사실 '기회주의'는 지식인의 근본조건이다. 지식인의 '결단'은 기회주의적 조건에서 파생되는 것이기에).



-IMF뒤 평등에서 양극화로-
외환위기의 극복이 신자유주의의 적극적인 수용으로 귀결되면서 이러한 경향은 강화되었다. 신지식인은 이제 하나의 해프닝이 되고 말았지만, ‘인문학의 위기’는 필연이었다.
자본의 거칠 것 없는 자유와 제국으로의 수렴을 특징으로 하는 신자유주의는 담론의 중추를 민주주의로부터 돈으로, 평등과 인권으로부터 양극화와 개방으로 옮겨놓았다. 황우석이 찬양되던 시절, 각종 뉴스는 앞으로 벌어들일 로열티를 계산하느라 바빴다. 그곳에 돈으로 환산될 수 없는 지식인, 아니 환산되어서는 안 되는 지식인이 설 자리는 없다. 또한 황우석 사태는 지식인의 보루였던 도덕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함으로써 마지막 옷고름을 풀어헤쳤다. 연이어 고위공직자나 총장 등의 표절사건이 불거지면서 ‘지식인의 종언’은 엉뚱한 방식으로 현실화됐다. 이것을 ‘관행’이라 하던데, 그렇다면 그러한 관행으로 지탱돼 온 과거 지식인의 존재방식을 누가 존경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 한국의 지식인은 혼돈의 와중에 서 있다. 그의 자산인 ‘지식’은 인터넷이 대신하며, 그의 도구인 ‘글쓰기’는 댓글보다 읽히지 않는다. 그의 언어인 보편성은 의심의 대상이며 그가 가리키는 방향은 신뢰성을 썩 잃었다. 시대의 양심이란 칭호는 역사책에나 둥지를 틀었다. 지식정보화사회에서 지식의 가치는 무한대로 상승했지만 지식인의 가치는 역사상 유례없이 추락했다. 교양과 지적 유희를 제공하고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지식의 효용성은 거듭 강조되지만, 이를 종합하고 비판할 지식인의 필요성을 적극 긍정하는 목소리는 턱없이 부족하다.

사실 민주화라는 지상과제와 총체성을 강조하는 거대담론의 존재는 사상과 이론의 성찰을 억압해왔다. 이로부터 해방된 지식인들은 낡은 갑옷을 벗어던지고 근본을 파고들었다. 근대성, 젠더, 민족주의, 기억, 일상권력 등이 비판목록에 오르면서 전선(戰線)은 갈라졌고 심화됐다. 문제는 ‘부분’에 대한 비판이 ‘전체’로서 존재하는 권력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하는가이다. 오늘날 사회 곳곳에서 발견되는 지식인의 기능화 양상은 지식인 자신이 부분성에 매달려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최근에 지식인과 관계된 논의가 여전히 하나로 존재하는 ‘국가’로 수렴되는 양상을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 황우석 사태가 애국주의의 광풍을 등에 업고 등장·확산됐던 상황, 현재 진보진영이나 보수진영 모두 ‘선진(화)’ 담론을 둘러싸고 경쟁적으로 국가정책 마련에 부심하는 경향, ‘인문학의 위기’론이 국가의 지원 요구로 귀결되는 풍경, 학술진흥재단이라는 국가기관이 학문의 기반을 좌우하는 현실 등은 지식인의 국가종속성 내지는 국가지향성을 강하게 예시한다.

이런 상황은 지식인과 국가의 관계를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권력의 민주성 문제만이 초점일 수 없다. 많은 논의들이 국가로 수렴될 때 그로 인해 가려지는 부분들이 상당하며 그런 부분들이 오히려 지식인의 질문과 대답을 기다리는 곳일 수 있다. 따라서 질문은 지식인들이 ‘민주화 이후’의 국가에 대해 얼마나 지혜롭게 대응하고 있는가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권력은 민주화되었을지언정 지식인의 국가론이 지혜로워졌다는 증거는 많지 않다. 국가와 지식인의 관계 설정은 현재진행형의 문제다.

그간 일어난 지식인상의 변화 중 ‘독립적 지식인’의 확산은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강준만, 박노자, 고미숙, 이정우 등으로 대표되는 이들은 탈근대적 사유에 기반을 두면서 탈권위주의, 다원화 그리고 ‘대중’과의 직접소통을 지향한다. 여러 방면에서 과거 지식인의 존재방식과 다른 차원을 선보이는 이들의 활동은 향후 지식인상의 갱신이라는 측면에서 하나의 시금석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들과 다른 궤도에 속하지만 공병호나 이덕일처럼 직접 대중을 상대로 한 자유저술가의 확산도 현 단계 지식인상의 또 다른 변모 양상을 보여준다.

-새로 떠오르는 ‘대중지성’-
최근에 ‘대중지성’ 개념이 본격적으로 제기된 것도 지식인의 몰락과 대중의 등장이라는 현상과 연관이 깊다. ‘연구공간 수유+너머’와 자율주의에 기반한 ‘다중네트워크’가 주도적으로 제창하고 있는 이 개념은 지식인의 위계적, 엘리트적 사유로부터 벗어나 대중을 근원에 두는 새로운 지식 창출·향유 방식을 겨냥한다. ‘대중지성’은 계몽주의적 지식인의 역할이 한계에 봉착하고, 인터넷의 발달에 따라 대중이 지식의 소비자이자 창조자로 부상하면서 전통적인 의미의 지식(인)과 변별되는 개념으로 떠오르고 있다(*지식의 창출과 향유가 지식인의 일이었던가?).

한국 사회의 물질적, 구조적 변화를 빠트리고 지식인상의 변화를 말할 수 없다. 서울대 입학생 중 상류층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아가는 현실을 덮어둔 채, 소득격차가 학력격차로 이어지고 학력격차가 신분고착으로 이어지는 구조를 말하지 않고, 여전히 미국박사가 최고고 학연과 인맥이 우선시되는 문제를 괄호치고 지식인상을 논한다는 것은 난센스가 아닌가. 하지만 그러하기에 더더욱 ‘지식인’은 되새겨져야 할 화두이다. 과거에도 지식인은 학력과 신분으로서 규정되지 않았다. 지식인이란 본시 실천적 개념이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존재’가 아니라 ‘행위’이다. 허위에 저항하고, 현실을 인간화하며, 가야할 길을 묻는 한 그는 언제나 지식인인 것이다(*현실을 인간화하며, 가야할 길을 묻는' 같은 문구는 상투형이다).(박헌호/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연구교수)

07. 04. 25-27.

P.S. 지식인은 '존재'가 아니라 '행위'이다란 말은 절반만 옳다. 자본가/노동자는 '존재'가 아니라 '행위'이다, 라는 주장과 견주어서 그렇다. 지식인은 중간자적, 어중간한 존재이기에 '존재'만으로 자신을 입증할 수 없다. 거기엔 필연적으로 '행위'가 개입되어야 한다. '비판적 지식인'이라고 할 때 '비판적'이란 어사가 가리키는 게 바로 그 행위일 것이다. 따라서 '지식인'이란 말은 언제나 '비판적 지식인'을 가리키며 스스로의 존재를 담보로 내걸었기에 언제나 '위기에 처한 지식인'을 지시한다. '지식인'은 레떼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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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7-04-25 17:48   좋아요 0 | URL
^^ 윤건차 교수의 책에다 구 맑시스트들과 YS,DJ에 적극 참여했던 멤버들을 좀 가려내고 정리한 듯 합니다..ㅍㅍㅍ 스스로 좌파가 아닐까 고민하시는 분들께 도움이 되겠네요.(나 보다 왼쪽이면 좌파..주변 친구들보다 진보적이면 좌파)...^^ 저 좀 분석해주세요.전 좌파 민족주의자 1컵, 문화주의자 1컵,트로츠키주의자 1컵, 진보적 시민운동 1컵,근대비판론 1컵,생태주의 1컵,사회적 자유주의 1컵 ... 으로 섞여있는데...일단 '뉴라이트'는 아닌 것 같긴해요..정답을 찾자 끙끙..

정답은 '폭탄주'....아님 ..'맹물' ^^ (..2번이네)

...제가 어떤 님 페이퍼에 남긴 글이 생각나네요.스스로 '좌파' 라고 의심하셔서(제가 보기엔 별로 '좌파'같지 않던데.)'좌파'가 무얼까요? 라고 말이죠...
저는 평생 '폭탄주'나 '맹물'로 살 듯 합니다.ㅜㅜ 에잇.

로쟈 2007-04-27 20:13   좋아요 0 | URL
저로선 지식인의 죽음을 진단하면서 지식인 지도를 작성하는 일이 코믹하게 여겨집니다. 포스트모던한 현상이거나...
 

낚시질 하고 있을 때는 아닌데 낮에 잠깐 둘러본 '새로 나온 책들' 가운데 눈길을 끄는 책이 있어서 눈도장을 찍어둔다. 데이비드 리빙스턴 스미스의 <거짓말쟁이는 행복하다>(부글북스, 2007). 저자의 이름이 생소한데, 당연 처음 소개되는 책이다.  

사실 제목만으로는 감을 잡을 수 없는 책이고, 잠시 소개를 읽어보아야 한다. "진화생물학과 인지과학, 진화심리학을 바탕으로 인간의 기만과 자기기만을 다시 조명하고 있는 책. 총 8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은이는 우리 인간에게도 무의식중에 타인의 마음을 읽고, 타인을 속이고, 타인을 조종하고, 자신마저 속이기 위해 특별히 진화된 '마키아벨리 모듈' 같은 것이 있다고 주장한다.지은이는 인간 존재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터무니없을 만큼 조금 알고 있고, 타인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많이 알고 있다고 지적한 뒤에, 우리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그리고 우리 자신의 이기적인 편견들을 견제하기 위해 자신 스스로의 모습부터 찬찬히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다른 건 건너뛰어도 무방하다. "진화생물학과 인지과학, 진화심리학을 바탕으로 인간의 기만과 자기기만을 다시 조명하고 있는 책"이란 설명으로 충분하다. 보관함으로 들어가기엔 말이다(어제 무리를 했기 때문에 당분간은 신간을 구매할 수 없다). 분량도 300쪽이 좀 넘으니까 아주 얄팍한 책은 아니다(물론 기대만큼 두꺼운 책도 아니지만). 원서는 256쪽. 원서의 이미지를 찾아보니 시커먼 책이 뜬다. 번역서의 표지와 사뭇 달라서 잠시 놀랐다. '우리는 왜 거짓말을 하는가(Why we lie)>(2004).

The Most Dangerous Animal: Human Nature and the Origins of War

저자는 "뉴잉글랜드 대학에서 철학과 심리학을 강의하고 있으며, 뉴잉글랜드 대학의 인지과학 및 진화심리학 연구소를 창설해 소장을 맡고 있다"는데, 올해 나온 그의 신간은 <가장 위험한 동물: 인간의 본성과 전쟁의 기원(The Most Dangerous Animal)>(2007)이다. 이 또한 번역되어도 좋을 만한, 흥미를 끄는 책이다.

  

거짓말쟁이 얘기가 나온 김에 떠올린 책은 스티븐 쿼츠 등이 쓴 <거짓말쟁이, 연인 그리고 영웅>(소소, 2005)이다. 부제가 ''우리는 누구인가'에 대한 뇌과학의 대답'이니까 스미스의 책과는 초점이 약간 다르다. 그리고 저자들은 진화생물학자가 아니라 신경생물학자들이다.

소개에 따르면, "뇌영상 기술, 컴퓨터 모델링, 유전학의 최신 발견들을 자료로 삼아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인간성의 본질에 대한 대답을 시도하는 '문화생물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이끌고 있는 지은이들의 책"으로 "'인간의 본성은 유전자가 정하는가 환경이 정하는가' 또는 '인간은 왜 더불어 살고, 사랑하고, 죽이는가' 등 인간성의 오래된 질문들에 대해 과학적 대답을 찾아본다." 덧붙이는 바에 따르면, "지은이들은 본래 신경생물학 분야의 전문가들이다. 신경회로의 발생 과정에 대해서는 '선천주의' 대 '건설주의' 논쟁이 뜨거운데, 두 저자는 건설주의의 대표적 인물들. 이들은 유전적 토대 위에 문화나 학습의 역할로 빚어지는 후천적 요소들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쪽"이라고.

범상한 제목이었다면 그냥 지나칠 수 있었을 텐데, 내겐 '거짓말쟁이, 연인 그리고 영웅'이란 문구가 마음에 들었다. 구내서점에 갔다가 (고가라서 집어들지는 못하고) 가끔 손만 대보는 책이다. 여하튼 이런 책들을 당장 서가에 꽂아두지 못해서 나는 잠시 불행하다...

07. 04. 24. 

P.S. 거짓말에 관한 책으로 오래전에 재미있게 읽은 소설은 파트릭 코뱅의 <새빨간 거짓말, 셋>(세종서적, 1994)이다. "프랑스 작가 파트릭 코뱅의 14번째 소설. 따뜻한 마음을 지녔지만 지식인다운 허풍과 거짓말을 밥먹듯 내뱉고 다니는 철학교수 앙트완느 베르티에의 '거짓말 이야기'를 통해 거짓말 투성이인 현대사회의 우스운 모습을 보여준다"는 책인데, 마음 편하게 미소를 머금으면서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관심있으신 분들은 구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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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런스 2007-04-25 06:13   좋아요 0 | URL
오호, 흥미로운 책이네요.. 소개 감사해요. 퍼갈께요...(맨날 그냥 퍼가면서, 오늘따라 척하기는..^^)

마늘빵 2007-04-25 09:19   좋아요 0 | URL
제목 참 끌리는군요! ^^

Joule 2007-04-25 13:38   좋아요 0 | URL
모두 먹음직스러운 책이네요.

비로그인 2007-04-28 08:57   좋아요 0 | URL
기만과 자기기만이란 주제는 의식(그리고 무의식)과 관련하여 흥미를 끄는 주제지요. '이기적 유전자'의 초판(1976) 권두사에서 밥(로버트 L. 트라이버스)이 했던 말에도 일찌감치 예시된 바 있었죠.
안 그래도 거짓말에 대한 책들을 좀 모으고 있었는데, 이 책의 주제가 바로 요즘의 제 주제네요.

로쟈 2007-04-28 12:27   좋아요 0 | URL
어제 한겨레의 기사를 보니까 이 책은 '나쁜 책'으로 분류되더군요(거짓말은 본성이자 전략이므로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거짓말'에 대한 연구(?) 결과를 기대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