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출간된 스튜어트 휴즈의 서구 지성사 3부작에 관한 리뷰를 어제 옮겨놓았는데('20세기 서구 지성사의 밑그림') 오늘 학교에 나오다가 잠깐 서점에 들러 3권 <지식인들의 망명>(개마고원, 2007)을 손에 들었다. 1, 2권과는 달리 소장하고 있는 책이 아닌데다가(사실 3권은 기억에도 없던 책이다. 내가 대학에 들어올 무렵엔 이미 절판된 상태가 아니었나 싶다) 3부작 중 개인적으론 가장 흥미를 갖는 시대이기 때문이다(아무래도 가까운 시대에 흥미를 갖게 된다). 게다가 '개역판 역자 후기'를 읽어보니 번역도 다시 손질했고 책의 만듦새도 좋은 편이다.

 

 

 

 

나귀님의 페이퍼에서 봤을 때는 초판이 <지성의 대이동>이었는데, 역자후기를 보니까 <파시즘과 지식인>으로 돼 있다. 같은 출판사에서 두번 책을 낸 것인가 해서 도서관 소장도서를 검색해보니 <지성의 대이동>(한울, 1983)과 <파시즘과 지식인: 지성의 대이동, 1930-1965년의 서구사회사상>(한울, 1992)이라고 뜬다. 그러니까 처음 나온 <지성의 대이동>이 '대단히 신통치 않은' 성적으로 일찍 절판된 이후 거의 10년만에 다시 나오면서 한번 '제목 갈이'를 했던 것. 해서, 출판사를 달리하여 이번에 새로 나온 개정판의 제목 <지식인들의 망명>은 세번째 타이틀이 되겠다.  

어제 읽은 경향신문의 리뷰에서도 최근에 나온 <다른 곳을 사유하자>(푸른숲, 2007)와 같이 읽어볼 것을 권유했는데, <지식인들의 망명>의 목차를 보니 아주 잘 맞아떨어진다는 생각이 든다(이럴 땐 성찬을 앞에 두고 물수건으로 손을 닦는 기분이다). 하지만 책을 통독할 여유는 없기에 서문만 읽어보려다가 저자가 감사를 표하는 이름들에서 또 '걸려들었다'. 또 몇 자 수다를 늘어놓게 된 이유이다(나의 타협안은 경쟁후보였던 '파슨스 vs 밀스'란 페이퍼를 다음으로 연기하는 것이다). 휴즈의 서문을 읽다가 얼핏 떠오른 그 동네의 풍경을 잠시 들여다본다.

<지식인들의 망명>은 <의식과 사회>(1958)과 <막다른 길>(1968)의 후속편으로 1977년에 출간됐는데(10년 터울로 한권씩 낸 셈이군), 서문에서 휴즈는 자신에게 도움을 준 몇 사람의 이름을 들고 있다. "나의 집필 마지막 해에는, 만약 그들이 나의 원고를 읽었더라면 상당히 중요한 지적들을 많이 해주었을 세 명의 인물을 죽음이 앗아가버리고 말았다."(6쪽) 음, 그러니까 '도움을 준' 이들이 아니라 '도움을 줄 뻔했던' 이들이 되겠다. 그 이름들은 리히트하임(1912-1973), 뢰벤슈타인(1891-1973), 그리고 잉게 베르너 노이만 마르쿠제(1913-1972)이다.

 

 

 

 

"그 중 리히트하임은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나의 지식을 여러 각도에서 풍요롭게 해준 인물이었으며," 게오르그 리히트하임은 루카치 전문가이기도 한데, 그의 책으로 <루카치>(시공사, 2001) 등 여러 권이 국내에 소개된 바 있다. "베버 서클의 마지막 중요인물이었던 뢰벤슈타인은 당시 앰허스트 대학 4학년이던 나를 처음으로 독일 사회사상계로 안내해준 사람이었다." 이 뢰벤슈타인의 책으론 <현대헌법론>(교문사, 1975), <비교헌법론>(교육과학사, 1991)이 번역돼 있다. 법학자 칼 뢰벤슈타인이 동명이인이 아니라면.

"또한 이 연구의 중요 등장인물들 중의 한 사람(프란츠 노이만)의 미망인이자 또 다른 한 사람(허버트 마르쿠제)의 부인이기도 한 잉게 베르너 노이만 마르쿠제는 내가 그녀의 신념의 생명력을 충분히 표현하는 데에 그녀와 나의 우정이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1937년에 찍은 한 사진을 보니 세 커플이 등장하는데, 왼쪽부터 프란츠/잉게 노이만, 골드/레오 뢰벤탈(리오 로웬달), 허버트/소피 마르쿠제 부부이다. 잉게 노이만(왼쪽에서 두번째)이 미망인이 되고 나서 허버트 마르쿠제(오른쪽에서 두번째) 재혼했던 모양이다. 

찾아보니, 프란츠 노이만(1900-1954)은 레오 뢰벤탈(1900-1993), 허버트 마르쿠제(1898-1979)와 함께 망명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일원으로서 역시나 파시즘 분석으로 잘 알려진 정치학자인데 1954년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단행본 저작은 국내에 소개된 적이 없는 듯하며 <정치이론과 이데올로기 입문>(돌베개, 1984)이 공저로 나와 있다. 그리고 프란츠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던 잉게 노이만은 1956년에 마르쿠제와 재혼했다(그녀 또한 <유럽의 전쟁범죄> 등의 저작을 갖고 있다). 참고로, 뢰벤탈(로웬달)의 책으론 <문학과 인간의 이미지>(종로서적, 1983)과 <문학과 인간상>(이화여대출판부, 1984)이 출간됐었다(같은 책의 두 번역서이다).

 

 

 

 

이어지는 휴즈의 감사. "나의 감사하는 마음은 우선, 계속되는 원고를 세심하면서도 항상 유머를 잃지 않고 타이핑해준 도로시 스킬리 양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며, 두번째로는 박사학위 과정 때 나에게 배운 두 학생 제이와 로빈슨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다." 사실 이 대목 때문에 페이퍼 아이템을 잡은 것인데, 여기서 두 학생 제이와 로빈슨은 각가가 마틴 제이와 폴 로빈슨을 가리킨다. "나는 그들의 책 <변증법적 상상력>과 <프로이트 좌파>를 4장과 5장의 각주에서 상당히 많이 활용했다."

인문학 서지에 밝은 이라면 이 두 권의 책이 국내에 번역/소개되었다는 걸 단박에 알 수 있을 것이다. 전자는 <변증법적 상상력: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역사와 이론, 1923-1950>(돌베개, 1979)로 나온 책이고 저자의 박사학위논문이기도 하다(제이의 책으론 <아도르노>가 출간돼 있고, <시각의 헤게모니>에도 그의 논문이 실려 있다). 공역자 중 한 사람인 황재우는 시인 황지우의 본명이었다. 그리고 <프로이트 좌파>는 <프로이트 급진주의>(종로서적, 1981)라고 번역된 책으로, 빌헴름 라이히, 게자 로하임, 허버트 마르쿠제에 대한 유익한 입문서이다.

언젠가 소개한 적이 있는데, 마틴 제이의 '20세기 프랑스 사상에서 시선의 절하'란 부제를 갖고 있는 <내려뜬 눈(Downcast Eyes)>(1993)이 프랑크푸르트학파를 다룬 학위논문에 이어서 스승의 작업을 떠올리게 하는 지성사 탐구의 역작이다. 분량이 만만찮지만 마틴 제이의 책들도 재출간/번역되면 좋겠다...

07. 06. 09.

P.S. <지식인들의 망명> 책날개에 실린 저자 소개는 '1961년 뉴욕 출생.'으로 시작한다. 바로 옆에는 붉은 글씨로 'H. Stuart Hughes, 1916-1999'라고 써놓고 말이다. 번듯한 표지에 이런 '깔끔한' 오타라니!..

한편, 오늘자 한겨레에는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공화국으로>(도서출판b, 2007)와 함께 이 3부작에 대해서도 비중 있는 리뷰가 실렸는데(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14691.html), 어인 일인지 저자를 '스튜어트 휴스'라고 표기했다. 물론 'Hughes'를 '휴스'라고 읽는 건 자유이지만 모든 번역본과 다른 언론리뷰들에서 '휴즈'라고 읽는 걸 굳이 독불장군처럼 '휴스'라고 읽는 배짱은 무엇인지?(존경해주어야 할까?) '베냐민'의 경우도 그러하고, 이게 한겨레의 고집인지 고기자의 고집인지 모르겠지만(*한겨레 교열부의 고집이라 한다), 그리고 가라타니 고진에게 갖다붙인 '삐딱이는 나의 힘!'도 나쁘진 않지만, 보기 흉한 건 어쩔 수 없다(이 리뷰는 '스튜어트 휴즈'로는 검색되지 않는다). '에세이'를 굳이 '에쎄이'라고 적는 창비식 표기를 떠올리게도 하는데, 그런 게 '진보'라면 그건 '당신들의 진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쁜 일로 학교에 나왔는데 또 눈에 밟히는 기사들이 있어서 어쩌지 못하고 옮겨놓는다. 그 중 하나는 한국일보의 '100℃ 인터뷰'로 기억에 공지영, 이문열에 이어서 소설가 김훈 편이다. 김훈에 관해서라면 이미 여러 차례 인터뷰들을 옮겨놓았지만 이번에도 소설쓰기와 관련하여 새로운 내용들이 포함돼 있기에 자료로서의 가치가 있다. 내가 아는/그리는 그의 모습과 크게 다른 대목은 없지만 가령 <칼의 노래>를 쓰면서 이가 8개나 빠졌다는 이야기 등은 과문한 것인지 몰라도 처음 접한다. 사실 내가 좋아하는 건 소설쓰기의 결과보다도 그런 '과정'이다. 그가 <남한산성>을 쓰기 위해서 눈발로 뒤덮인 산성을 헤매고 다녔다는 얘기들을 나는 '존중'한다. 결과야 기대 이상일 수도 있고, 이하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빠지고 눈길을 헤매며 다닌 일들은 '소설'이 아닌 '삶' 자체이다. 그는 드물게도 그 삶을 (매번 패한다손 치더라도) 자신의 문장으로 버틴다는 점에서 존경에 값한다. 스트레이트로 말하자면, "그는 밤새 혼자 글을 쓰고 있었다."

한국일보(07. 06. 08) [100℃ 인터뷰] 소설가 김훈

고독한 무사의 진중일기 <칼의 노래>(2001)로 자신의 문장을 알린 소설가 김훈(59). 그가 이번에는 병자호란을 감당한 다양한 인간군상을 묘파한 <남한산성>을 통해 삶의 영원성을 물었다. <칼의 노래>가 100만부, <남한산성>이 출간 한달 만에 10만부 이상 팔리는 등 전성기를 구가하는 김훈을 한국일보 문화팀 기자들이 만났다. 극단적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허무주의자, 보수주의자, 남근주의자라는 지적을 받아온 김훈은 그가 오랫동안 몸담은 한국일보 후배 기자들에게 높임말과 반말을 적당히 섞어가며 세상과 문학에 대한 솔직한 마음을 드러냈다.

_<남한산성>에는 인조도, 심지어 병자호란을 일으킨 청의 칸도 정당성 있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왜 그들의 잘잘못을 따지지 않았습니까.

"서날쇠, 정명수, 뱃사공 같은 민초의 삶에는 가치를 부여했습니다. 그들은 이데올로기화한 애국심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어요. 대장장이 서날쇠가 임금, 사대부가 남한산성에 들어오자 자신도 살아야겠다며 나가달라고 요구하는데 정당한 삶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통역관으로 청나라 군대를 따라온 정명수는 세습 노비의 자식인데 그에게 조국이 있겠습니까. 그가 여자를 노략질하고 깔깔거린 것도 비난할 수 없어요."

_인조 등 병자호란을 초래한 집권세력의 잘못을 제대로 추궁하지 않았는데요.

"47일간 고립무원 상태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성안에는 별의별 사람이 다 있었지. 싸우자는 자, 투항하자는 자, 오늘은 싸우자 했다가 내일은 투항하자는 자, 오늘은 투항하자고 했다가 내일은 싸우자는 자,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자, 살아야 겠다고 개구멍으로 성을 빠져나가는 자, 살자고 성 안으로 들어오는 자. 나는 그들에게 개별적 정당성을 부여하려고 했어요. 누구의 잘못을 따지는 것이 이 소설의 포인트는 아니니까."

_<남한산성>을 역사소설이라고 생각합니까.

"역사 그 자체가 아니라 역사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지. 나는 세계의 맨 밑바닥은 악과 폭력이며 그것이 전쟁을 통해 발현된다고 생각합니다. <칼의 노래>나 <남한산성> 같은 소설은, 역사적 전쟁을 소재로 삼은 것이지요. 나는 이 세계가 악과 폭력의 바탕 위에 세워졌다고 보고 있어요."

_세상을 그렇게 보다니, 너무 비극적인 생각 아닙니까.

"그것이 세계의 본디 모습이지요. 인류사의 거듭된 약육강식. 그것이 바로 악과 폭력이 세계의 바탕이란 증거 아닐까. 약육강식을 해결하지 못하는 한 인간은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없어. 내가 소설에 그린 세계도 그런 것이지."

_그럴수록 그 악과 폭력을 극복, 개선해야 하지 않을까요.

"인류 역사가 진화한 것은 사실이지만 세계의 바탕 자체가 변한 것은 아니에요. 프랑스혁명, 볼셰비키혁명, 동학혁명은 약육강식의 질서를 부수기 위한 것이지만 모두 실패했어. 어찌 보면 인류사는 실패한 혁명의 역사라고 할 수 있어. 혁명이 소용없다는 게 아니라 지나고 보니까 세상을 개선하는데 별 도움이 안됐다는 뜻이야. 개선하려는 시도는 고귀하지만 많은 고통과 시간을 감내해야 합니다. 세상을 부수는 것이 혁명가의 몫이라면 나는 생활인이므로 죽지말고 살아 남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현세적 가치를 중시하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이고. 구원, 초월, 내세를 말하는 작가를 나는 좋아할 수 없어요."

_'현세적'이라는 단어가 달리 해석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현세적이라는 말을 영어로 표현하면 'worldly' 즉 현실적, 세속적이라는 뜻입니다. 나는 일본의 메이지유신처럼 세속적, 현실적인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가가 도덕이냐 이익이냐의 딜레마에 빠졌을 때, 역시 이익을 추구해야 하겠지요. 이익을 포기하는 국가는 상상할 수 없어. 악과 폭력의 기반 위에 인간다운 가치나 아름다움을 건설하는 것이 미래의 과업이 될 텐데, 나는 그것이 좌파에 의해 실현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아요. 물적 토대가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지. 남한산성에서 투항한 것도 물적토대가 없었기 때문이거든."

_김훈 소설의 허무주의는 결국 소설 너머 철학의 문제인 것 같네요.

"내 소설에는 악과 폭력도 나오지만, 세계와 처절히 싸우는 사람들도 등장하는데 왜 그것을 허무주의라고 하는지 모르겠어. 소설에 세상의 허무한 모습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온몸을 던져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우는 영웅도 함께 그렸는데 그들은 허무의 반대편에 있는 존재들이거든."

_허무주의라는 지적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뜻인가요.

"허무라는 것은 주의가 될 수 없어요. 나는 혁명을 믿지 않고 진화, 전환을 믿는데 병자호란 이후 그 극적인 사례를 발견했습니다. 효종 때 조선은 병자호란의 수모를 갚고 치욕을 씻겠다며 군사력을 모아 청을 정벌하려 했는데 그것은 노론의 정치 기반 강화에 기여한 허구였어요. 대신 조선의 최고 엘리트들은 북벌에서 북학으로 전환했습니다. 나는 그것이 조선의 위대한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전환이 없었다면 우리는 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중국이 혁명 없이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전환한 것도 역시 역사의 위대한 순간이지요."

_평론가들의 지적은 경청하는 편입니까.

"그들은 틀린 말 하지 않아. 그런데 그것이 내게는 아무 도움이 안돼. 나는 나의 과오 조차 필연성이 있다고 생각해. 내게는 소설을 통해 보편적 진리를 말하고 싶은 허영심도, 도덕적 인격을 완성하겠다는 생각도 없습니다."

_그래서 허무주의자란 지적이 나오는 것 같은데요.

"아니 그럼 당신들은 도덕적 목표를 갖고 있나. 소설가는 그냥 소설 쓰고 안 쓸 때는 시시껄렁하게 살면 되는 거야. 도덕적 인격이 무슨 소용 있겠어."

_<남한산성> 끝낸 뒤 어찌 지냅니까.

"쉬고 있습니다. 나는 책을 내면 살짝 들춰보다가 후딱 덮어버립니다.이렇게 쓰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만 드니까. 책이 꿈에 보일까 무서워. 아예 만지지도 않아."

_이제 어떤 소설 씁니까.

"당대의 일을 쓰려고 그럽니다. 이승만 시대부터 내가 살아온 이 시대의 이야기."

_어떤 내용인데요.

"우리 사회가 앞으로 나가다가 자꾸 같은 자리에서 자빠지는데 그 문제 다루고 싶어요. 노사 문제라든지, 사교육 문제라든지. 사교육 문제는 박정희가 과외 하는 사람 감옥에 보내고도 해결하지 못했어요."

_우리 교육의 근본적 문제가 뭐라고 봅니까.

"평준화는 진짜 웃기는 수작 아닌가. 똑같은 사람 만들자는 것인데 그것이 국가의 정책 목표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 서울대만 해도 세계 100위 권 밖의 대학인데 예산을 들여 일류 대학으로 만드는 것이 국가 목표가 돼야지 거꾸로 해서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모르겠어."

_평준화를 폐지한다고 해서 교육 문제가 해결되겠습니까.

"일류 대학 만들어야지. 평준화는 최소한의 정책이어야지 마지막 목표가 돼서는 안돼. 아이들이 고생을 하겠지만 청소년기에 경험하는 경쟁도 훌륭한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_불평등의 원인이 타인이나 환경에 있을 때는 어떻게 합니까.

"그럼 그럴 때 세상을 부수어야 하나. 그러나 세상은 부숴지지 않아."

_새로 쓰는 작품의 배경이 현대라면 불평등 문제를 다루지 않고는 리얼리티를 살릴 수 없을 텐데…

"불평등보다 부자유 문제에 더 관심이 많아. 근대의 평등은 결국 법 앞의 평등이기 때문에 재벌 회장도 폭력을 행사했다면 처벌을 받아야 하고 그런 점에서 나는 법치주의 신봉자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정말 무법천지라고 할 수 밖에 없어요. 시위대가 폴리스라인을 침범하고 경찰차를 불지르고. 그런데도 처벌하지 않고. 이것이 관용이고 민주주의인가…광화문 다니는 사람은 다들 자기 밥 벌어 먹으러 바삐 움직이는데 그 거리 막아 놓고 시위하면 그들의 생업이 마비되는 것 아닙니까. 그래 놓고 자기 주장하고 경찰은 방치하고. 그래서 무법천지가 되는 것이겠지."

_법치주의의 동요 외에 통탄할 만한 일은 또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역시 양극화의 문제지. 경제 뿐 아니라 교육, 의료, 이념 등 광범위한 양극화. 노무현 대통령이 가장 잘한 것을 나는 한미FTA 체결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FTA 체결하고 나니까 많은 언론이 이념적 일관성을 상실했다고 공격하던데 나는 그런 언론 정신병자라고 생각해요. 이념의 일관성이 대체 무슨 소용 있나. 밥 먹여주는 것도, 미래를 열어주는 것도 아닌데. FTA로 농민이 희생되는 것이 답답하고 가슴 아프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미래를 관리하는 태도가 아니지. 열강이 세계의 악을 대표한다 해도 그들과 싸울 수는 없는 것 아닌가."

_문장이 너무 미문이라 삶의 비루함을 적은 글에서도 그런 분위기가 나지 않다고 한 평론가가 지적했는데.

"<칼의 노래>를 수사적 장치를 전혀 동원하지 않고 주어와 동사, 문장의 뼈다귀만 갖고 썼어요. 그랬는데도 수사적이라고 하더군. 나는 스트레이트 문체로 글을 쓰려고 사력을 다하는데 그것 보고 수사적이라고 하니 나보고 어쩌라는 말인지."

_그런데 왜 세간에서 그런 반응이 나올까요.

"스트레이트 문장이 오히려 탐미적으로 보였던 모양이에요. 나는 스트레이트 문장이 제일 좋아.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보면 멋진 스트레이트 문장이 나옵니다. 전령이 와서 진주성이 함락되고 5만 명이 전사했다고 보고하자 이순신은 그날 일기에 이렇게 적었지. '나는 밤새 혼자 앉아 있었다'. 정말 '죽이는' 스트레이트 문장을 쓴 것이지. 만 마디 주절거리는 것보다 훨씬 낫잖아."

_습작기의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칼의 노래>가 습작이라면 습작인데 그것 쓰면서 정말 힘들었어. 난방이 안 되는 후배의 작업실 지하에 책상 하나 놓고 썼는데 어찌나 고생했는지 이가 쑥 빠졌어. 아무 통증 없이 바람이 새 나가듯 하나하나 빠져 침 뱉듯 쓰레기통에 버리면서 썼어. 소설 다 쓰고 나니까 8개가 빠졌더라고. 턱이 내려앉아 사람 몰골이 안될 것 같아 동인문학상 상금으로 임플란트 8개 하고 남은 돈으로 빚을 약간 갚고 술 먹었지."

_가족에게 미안한 생각은 없습니까.

"제 처는 남편이 하는 일에 감히 가타부타하지 않습니다. 좋은 덕성, 훌륭한 전통이지요. (인터뷰에 참가한 여기자를 향해) 그걸 배워."

_그렇게 말하면 반페미니즘 입니다.

"나를 남근주의자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여자가 여근주의 하면 페미니즘이고, 남자가 남근주의 하면 잔혹하게 매도되잖아. 나는 여자를 존중하지, 결코 학대하는 사람이 아니야. 여자를 보호하고 어려운 일 시키지 않는 것이 가부장적 덕성이지. 여자를 학대하는 남자는 가부장이 아니라 건달이야. 가부장적 제도 안에서 딸이나 이모들이 참 행복하게 살았어."

_여성이 남성에 비해 열등하다고 생각하는지요.

"수천 년 동안 하등하게 대접받았고 교육과 세상에 대한 경험, 전쟁을 치를 수 있는 능력, 수렵 기술 같은 것이 남자 위주로 전수돼 왔으니까 여성의 지위가 유전적으로 저열하게 평가됐지. 인류의 거대한 비극 중 하나입니다."

_여성 독자로부터 항의받은 적 있지요?

"단편 <화장>을 쓰면서 젊은 여자의 아름다움을 묘사했는데 그러다 보니 기능이나 역할은 없고 인격도 잘 드러나지 않았어. 그 글을 읽은 여성 독자가 왜 여성을 그 따위로 그리냐고 항의하더군. 그렇다고 그 때문에 내가 마초인 것은 아니잖아."

_아니오. 마초라고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마초가 아니야. 남들이 마초라고 그러는데 그냥 내버려둡니다. 해명하거나 항의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Let it be."

_<언니의 폐경> 같은 소설을 보면 여성 심리를 매우 잘 그린 것 같은데요.

"그 소설에는 생리대, 헤어스타일, 패션, 화장품 등 여자에게 필요한 온갖 자질구레한 것이 다 나와. <알루아> <코스탄폴리탄> 같은 여성 잡지 보면 신제품 설명 자세하게 나오는데 빨간 줄 치면서 몇 달 동안 밤새 읽었어. 마누라가 한심하다고 했지만 내겐 매우 소중한 정보였어요. TV 홈쇼핑의 란제리광고를 메모하면서 본 적도 있어. 예컨데 브래지어를 보면 컵이 있고 와이어가 있는데 컵에서 중요한 것은 위의 봉긋한 데가 들뜨면 안되고 조금이라도 뜨면 팔 수 없다는 것이지. 그걸 메모하면서 소설은 나 같은 선비가 할 짓이 아니구나 싶었지."

_글을 쓰기 위해 책을 읽고 자료를 모으고 메모를 합니까.

"나는 계통 없이 책을 읽습니다. 남들이 보면 왜 읽나 하는 책들도 읽어요. <화장>을 쓸 때는 해부학 책도 읽었지. 거기에 여자의 신체를 부위별로 해부한 사진이 있었어. 교보문고 기술서적 코너에 가서 용접공, 정비공, 연판, 배관, 항공기 조정, 선박 조정, 항해술, 비행술 같은 책도 보는데 아주 좋은 자료들이지. 요즘은 항해술 책을 보는데 반 정도 이해할까."

_항해술 책은 작품을 쓰기 위해 읽습니까.

"응. 거친 파도가 칠 때 인간이 그걸 어떻게 뚫고 나가야 하는지를 써놓았어. 사나운 밤바다를 헤쳐나가는 한 사나이의 근육이 떠오른다고. 그러니까 내게 항해술 책은 문학책보다 더 문학적인 것이지. 죽을 때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그런 것도 문학이지만 그런 건 미성년자들이 하는 것이고.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이게 뭐야. (웃음) 어떻게 인간이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랄 수 있나. 좀 부끄러움도 있고 그런 것이지."

_벌써 여러 권 히트를 쳤는데 인세 수입이 꽤 되지요?

"돈을 많이 벌지는 못했어요. 하지만 돈을 매우 좋아해. 돈을 경멸하는 사람을 나는 경멸해. 돈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으니까 그 돈은 매우 중요한 것이지. 글을 써서 수입이 생기면 다음 소설을 쓸 때까지 살 수 있어요. 내가 잘 나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교육 받은 사람을 많이 만들어냈기 때문에 그걸 바탕으로 내 책이 팔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금도 많이 내고 있습니다. 그것이 독자를 길러내 준 사회에 대한 보답이지요."

_우리나라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런데 운하, 그건 안했으면 좋겠더라. 그 분이 대통령이 되더라도 그것만은 안 했으면 좋겠어. 그 분은 왜 항상 토목공사를 얘기할까. 통일을 어떻게 하겠다 이런 얘기는 안하고. 나는 먼지 나는 거 싫어. 물은 다 제 길이 있는 건데. 지금 많은 건축토목학자, 지리학자, 수리학자들이 입다물고 언론도 운하 얘기만 쓰고 있어. 얼마 전 부산에서 어린 아이가 굶어죽었는데, 먹을 것이 넘쳐 나는 이 시대에 이런 일이 왜 생겨난 것인지. 신문에서 운하 이야기 그만 쓰고 이런 것을 써야지."

_소설 쓰는 것 말고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까.

"여자 구두만 전문적으로 고치는 수선공이 되고 싶어요. 그 구두, 꽃 같기도 하고 나비 같기도 하고. 너무 예쁠 것 같아.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 구두 낡으면 버리고 새것 사니까. 우리나라에서는 힘들 것 같아."

07. 06. 09.

P.S. 윤동주의 '서시'에 대한 평가에는 나도 공감한다. 그 시 자체가 모자란다거나 하는 건 아니다. 세상엔 순수한 만큼 유치한 시인도 한두 명은 있기 마련이고 그마저 없느니보다는 낫다. 한데, (미성년자도 아닌) 어떤 정치인이 자신이 가장 애송하는 시가 '윤동주의 서시'다 이러면, 좀 곤란하다는 것이다(정치를 애송이들이 하는 게 아니라면).

"어떻게 인간이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랄 수 있나. 좀 부끄러움도 있고 그런 것이지." 나는 그런 태도를 김훈식의 '허무주의'라고 부른다. 그건 "성안에는 별의별 사람이 다 있었지.(...) 나는 그들에게 개별적 정당성을 부여하려고 했어요."라고 말할 때 그 기저에 놓이는 태도를 지칭한다(일차적으로 그것은 '말에 대한' 허무주의이다). "소설가는 그냥 소설 쓰고 안 쓸 때는 시시껄렁하게 살면 되는 거야. 도덕적 인격이 무슨 소용 있겠어."라는 반문은 그러한 태도에서 나온다. 하지만 이런 지적이 그에게 도움이 될리는 만무하다(다만 나를 위한 것이다). 김훈을 위한 것이라면 오늘 아침에 한겨레에서 본 아래의 사진 같은 게 좋겠다.

사진의 타이틀은 '울먹이는 소년'으로 돼 있고, "한 아프가니스탄 소년이 깨진 달걀 앞에 쭈그리고 앉아 고개를 숙인 채 흐느끼고 있다. 달걀을 파는 이 소년은 “넘어지는 바람에 갖고 있던 달걀이 모두 깨졌다”며 “어머니가 나를 죽일 것”이라고 울먹였다. 유엔아동기금 조사를 보면, 아프간 수도 카불에선 5만~6만명의 소년들이 거리를 헤매고 있다.(5월20일 촬영. 카불/AFP 연합)"란 설명이 붙어 있었다.

이 소년과 그의 가족에게 이 달걀들이 얼마나 큰 값어치를 갖고 있을지는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이건 먹는, 먹을 달걀이 아니라 파는, 팔아야 하는 달걀이다). '어머니가 나를 죽일 것'이란 그의 울먹임이 공연한 엄살은 아닐 터. 그래서 슬프다. 넘어진 것도 슬프고(나도 잘 넘어졌었다) 달걀이 모두 깨진 것도 슬프다. 어떠한 위로의 말도 보태줄 수 없기에 또한 슬프다.

사진을 오래 쳐다볼 수 없어 바로 다음 지면으로 넘기고 신문지는 전철에 두고 내렸는데, 이 소년의 이미지와 함께 내게 바로 떠오른 장면은 소년 김훈이 새벽에 해장국 심부름을 다녀오다가 넘어져 엎지르는 바람에 통곡하던 모습이다(예전에 그의 문체를 말하면서 언급한 적이 있다). 그때의 '절망'이 이 '울먹이는 소년'의 그것과 닮지 않았을까?(이 '울먹이는 소년' 또한 글을 깨친다면 나중에 소설가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생각의 끄트머리에서 우연찮게도 이런 문장을 읽는다.

"얼마 전 부산에서 어린 아이가 굶어죽었는데, 먹을 것이 넘쳐 나는 이 시대에 이런 일이 왜 생겨난 것인지. 신문에서 운하 이야기 그만 쓰고 이런 것을 써야지."

다른 것들은 크게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끼사스 2007-06-09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칼의 노래> 쓰며 이가 빠졌다는 얘기는 전에도 여러 번 했습니다. 해장국 사건이 어쩐지 김훈씨의 '밥벌이론'의 원형적 기억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

로쟈 2007-06-09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제가 과문한 건 <칼의 노래>가 한창 베스트셀러가 될 때 제가 국내에 없었던 탓인 듯합니다. '원형적 기억'이란 얘기를 섣불리 할 수는 없겠지만 김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에피소드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수유 2007-06-10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져갑니다.

마노아 2007-06-10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사만큼이나 덧붙인 글들이 인상적입니다.
 

이번 주 나온 가장 눈에 띄는 신간은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공화국으로>(도서출판b, 2007)이다. 출간 소식은 이미 이달초부터 접했고 '물건'이 나오기만을 고대하던 참이었다. <근대문학의 종언>(도서출판b, 2006)에 이어서 근 1년만에 가라타니의 책이 출간된 것인데, 출판사에서는 연이어 그의 책들은 낼 모양이다(표지에서 큼지막한 '1'자가 뜻하는 바이다). 이번 타이틀이 '세계공화국'인데, 그의 비평은 막바로 '비평의 세계화' 시대를 떠올리게 한다. 국내 비평집들이 초판을 소화하기도 어려운 시절에 유독 그의 비평집들만이 독자들로부터 환대와 환영을 받아온 탓이다. '비평'에 대한 우리의 의식이 그간에 불철저했던 것이 아닌가 돌이켜보게 된다. 개인적으로 책은 내일 역자에게 받기로 했는데, 그 전에 리뷰 먼저 읽어둔다. 마침 오늘자 한겨레의 '책과 생각'의 1면을 다 책임지고 있군...  

한겨레(07. 06. 09) 국경을 지워라, 느린 혁명으로 

가라타니 고진(66)은 일본 지성계를 대표하는 비평가다. 1970년대까지 정치사상가 마루야마 마사오(1914~1996)가 누렸던 지위를 1980년대 이후 가라타니가 대체했다고 봐도 무리가 없다. 마루야마가 ‘사상계의 천황’이었다면, 가라타니는 그 천황의 자리를 뒤엎은 전복자다. 그는 무리를 거느리지 않은 단독자다. 그는 자객처럼 지배적 사상의 내부로 깊숙이 들어가 심장을 겨냥한다. 그의 무기는 전방위로 뻗친 지식과 불온한 비판성이다. 문학에서부터 철학·경제학·역사학·언어학, 심지어 건축학과 인류학에 이르기까지 종횡으로 가로지르는 르네상스적 지식의 힘으로 그는 현실이라는 괴물의 딱딱한 외피를 뚫고 탄환처럼 그 속살을 관통한다. 그의 최근 작업은 그 괴물이 고꾸라지고 난 뒤에 열리는 시야를 보여준다. 그의 2006년 저작 <세계공화국으로>에서 그 시야를 확인할 수 있다.

“이제까지 철학은 세계를 해석하기만 했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1845년 카를 마르크스가 쓴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는 <세계공화국으로>를 쓴 가라타니의 경우에 정확히 대응한다. 이제까지 그의 작업이 불온성을 내장한 해석이자 비판이었다면, <세계공화국으로>는 명백히 ‘변혁’을 지향한다. 따라서 이 책은 마르크스가 ‘테제’를 쓰고 3년 뒤 작심하고 집필한 <공산당 선언>과 동일한 성격을 지녔다. 말하자면 이 책은 팸플릿이고 선언문이며 새 세계를 향한 이행 전략론이다. 팸플릿 성격이 강한 만큼 이 책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그의 다른 책들이 무수한 전문용어의 숲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길을 잃기 십상이었지만, 이 책은 그런 점은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지은이는 고등학생을 포함한 일반인이 읽어주기를 바란다고 밝히고 있다.

<공산당 선언>에서 마르크스가 당대의 여러 사회주의 조류와 대결했듯이, 가라타니도 이 선언문에서 기존 이념과 비판적으로 대결하고 있다. 요약하자면, 그의 대결 지점은 마르크스와 이마누엘 칸트다. 기존의 변혁 운동이 왜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하는 논거로 마르크스가 동원된다면, 칸트는 마르크스를 넘어 세계 변혁의 방향과 전략을 보여주는 사례로 제시된다. 칸트의 한계를 마르크스가 뛰어넘었다는 전통적 견해를 거의 정반대로 뒤엎은 꼴이다.

가라타니가 보기에 마르크스 이론의 치명적 약점은 ‘국가론’이 결여돼 있다는 점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생산체제 분석에서는 탁월한 성취를 보여주었지만, ‘국가’에 관한 한 시종일관 프루동주의의 한계 안에 갇혀 있었다.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국가 없는 세상을 꿈꾼 근대 아나키즘의 시발점이다. 프루동은 자본주의 착취 체제를 뒤엎고 ‘자유로운 사람들의 연합’ 곧 생산자 협동조합 체제를 만들면 국가가 소멸할 것이라고 보았다. 국가는 자본주의 체제를 보장하는 외부적 장치일 뿐이므로 자본주의가 무너진다면 국가라는 껍데기가 한순간에 날아가 버릴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마르크스는 프루동의 생각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프롤레타리아가 연합해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무너뜨리면 국가는 사라진다고 믿었다. 두 사람 사이에 차이가 있었다면, 마르크스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일시적 국가기구를 상정했다는 점뿐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독재론은 혁명의 구체적 상황에서는 국가기구를 일시적으로 틀어쥐는 것이 필요하다는 인식이었지, 국가의 자연스런 소멸을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가라타니는 프루동-마르크스가 국가 안에서 국가를 생각했기 때문에 잘못된 결론에 이르렀다고 단언한다. 그가 보기에, 국가란 다른 국가에 대항해서 존립한다. 국가를 내부의 힘으로 해체한다고 해도, 다른 국가들이 먹어치워 더 큰 국가를 만드는 것으로 끝나고 만다. 다른 국가들이 있는 한 국가는 해체되지도 소멸하지도 않는다. 프루동의 아나키즘은 순진한 사상이다. 그렇다면, 세계동시혁명으로 일거에 모든 국가를 철거해 버리면 되지 않는가.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가 <제국>에서 그런 가능성을 내비쳤는데, 가라타니는 단호하게 이 책의 주장을 부정한다. <제국>은 1990년 이후 세계가 아메리카를 중심으로 하여 하나의 제국이 됐다고 말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수많은 국민국가들의 갈등과 경합 체제다. 다중의 반란이 제국의 그물을 찢어낼 것이라는 전망도 가라타니가 보기엔 환상이다. 다중의 반란은 세계혁명을 일으키기는커녕, 개별 국민국가만 더욱 강화시키고 말 것이 틀림없다. 네그리와 하트의 <제국>은 프루동-마르크스를 그대로 이어받은 ‘국가론 없는 아나키즘’이다.

그렇다면 변혁의 전망은 없는 것인가. 여기서 가라타니는 칸트의 ‘영구평화론’에 주목한다. 개별 국민국가들의 팽창 욕구를 억누를 수 있는 외부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국민국가 내부에서 그것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그것대로 계속해야 하지만, 인류적 차원의 집합적 힘으로 국민국가의 준동을 억누르고 궁극적으로 그 국가를 소멸시켜야만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총체적으로 넘어설 수 있다. 칸트는 그런 외적 장치로서 ‘세계공화국’이란 이념을 내놓았다. 현재의 국제연합(유엔)이 장래의 세계공화국 모태라 할 수 있다. 그 실천의 첫발은 국민국가들의 군사 주권을 국제연합으로 넘기는 것이다.

가라타니가 보기에, 세계공화국은 먼 미래에야 이루어질 수 있다. 따라서 그것은 변혁이라기보다는 점진적 이행에 가깝다. 그러나 이 점진성이야말로 진정한 변혁의 경로다. 인류를 이끌어주는 이념 또는 이상 아래서 오늘의 현실과 싸우는 것, 가라타니가 그의 선언문에서 밝히는 전략이다.(고명섭 기자)

삐딱이는 나의 힘!
가라타니, 주류에 끊임없이 저항…‘퇴물 공산주의’ 부활 나서

가라타니 고진은 문학에서 이력을 시작한 사람이다. 1969년 일본 근대문학의 아버지 나쓰메 소세키에 관한 글로 비평계에 입문한 뒤 1972년 첫 비평집 <불안에 떠는 인간>을 출간했다. 문학비평가로서 그의 이력은 최근까지도 이어져 2005년 <근대문학의 종언>을 펴내기도 했다. 그러나 문학비평가라는 규정은 가라타니라는 지식인을 구성하는 정체성의 극히 작은 부분일 뿐이다. 그의 삶을 일관하는 것은 ‘주류에 대한 저항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970년대 일본 지식계에 프랑스 탈구조주의 운동을 소개하고 퍼뜨린 사람이었다. 뭉뚱그려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할 수 있는 사상 흐름을 앞장서서 받아들인 것인데, 그것은 근대주의적 억압 질서에 대한 지적 저항의 한 방식이었다. 1970년대 중반 미국 컬럼비아 대학 교수 시절에 쓴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은 그 저항의 학문적 결과라고 할 만하다. 이 책에서 그는 미셸 푸코의 고고학 방법을 원용해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을 파고들어갔다. 근대적 국민국가가 형성되고 난 뒤 국민문학이 성립됐을 거라는 상식적 믿음을 깨뜨리고, 제도로서 형성 중이던 근대문학이 국민이라는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데 핵심 요소로 작용했음을 입증했다. 국민이라는 관념이 성립한 것이 최근의 일임을 문학 연구로 보여준 것이다.

1978년 출간한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도 시대 흐름을 삐딱하게 보는 그의 반골 정신이 밴 작품이다. 그 시절 일본 지식계에서 ‘마르크스’ 하면 퇴물 취급을 받았는데, 이 책에서 그는 마르크스를 혁신적으로 재해석함으로써 하나의 ‘가능성’을 찾아내려 했다. 1980년대까지 프랑스 철학의 영향 아래 ‘해체주의’를 실천하던 그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사회주의권이 붕괴하면서 비평적 태도에 깊숙한 변화를 겪었다.

해체주의란 사실상 스탈린주의적 사회주의의 영향력에 맞서 그 이념의 억압성을 고발하는 것인데, 그 사회주의가 파산해버린 것이다. 일본 안에서도 사회당과 공산당이 몰락하고 좌파가 궤멸했다. 현실사회주의체제가 무너지고 난 뒤에도 계속되는 해체주의란 사실상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이바지가 될 뿐이라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가라타니는 모두들 ‘공산주의는 끝났다’며 돌아선 지점에서 다시 ‘코뮤니즘’을 되살리는 작업에 나섰다. “현실을 비판적으로 해명하는 것이 아닌 현실을 변화시키는 이론”이 필요함을 절감한 것이다. 10년 가까운 작업 끝에 내놓은 <트랜스크리틱>이 그의 새로운 관점을 담은 책이다. <트랜스크리틱> 서문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려는 과정에서 칸트를 만났다. 내가 하려고 한 것은 마르크스를 칸트적 ‘비판’에서 다시 생각해보는 일이었다.” “타자를 단지 수단으로만 취급하는 자본주의 경제에서 칸트가 말하는 ‘자유의 왕국’이나 ‘목적의 왕국’이 코뮤니즘을 의미하는 것은 분명하다. 반대로 코뮤니즘은 그런 도덕적 계기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트랜스크리틱>의 후속 작업으로 그가 하고 있는 것이 <트랜스크리틱 2> 저술인데, 이 저술을 대중적 문체로 풀어내 미리 보여준 것이 이번에 출간된 <세계공화국으로>다. <트랜스크리틱>에서 그는 자신이 “정치적으로 보면 오히려 아나키스트 쪽”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그 아나키즘을 비판한 <세계공화국으로>는 일종의 자기비판인 셈이다. 그 자기비판으로써 가라타니는 새로운 세계전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고명섭 기자)

07. 06. 09.


댓글(4)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드팀전 2007-06-09 21:59   좋아요 0 | URL
'지은이는 고등학생을 포함한 일반인이 읽어주기를 바란다고 밝히고 있다...'
...그럼 나네 ..^^ 그래줘야겠지요?.^^;; 일단 보관함으로 골인.

로쟈 2007-06-09 23:12   좋아요 0 | URL
'장바구니'로 가야 주문을 하실 수 있는 건데요.^^

자꾸때리다 2007-06-10 22:58   좋아요 0 | URL
[칸트의 영구평화론을 가지고 뭔가 굉장히 현실적인 대안인 척하는 사람들, 게다가 특히 (자칭-타칭) 좌파, 내지는 맑스주의자라는 사람들을 보면 '아 이제는 이 사람 정말로 할 얘기가 다 떨어졌구나'라는 생각만 든다. 철학을 핑계로 자유주의 정치사상의 가장 형식적인 논의를 끌어와서 논지를 전개하는게 얼마나 실효성이 있을까하는 회의와 함께. ] 양창렬 씨의 클럽에 가니 어느 분이 이런 리플을 달으셨더군요. 로쟈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네요.

로쟈 2007-06-10 23:25   좋아요 0 | URL
고진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나온 발언 같네요. 그렇게 말하자면 세칭 '고전들'이란 게, 그리고 '읽기' 혹은 '비평'이라는 게 아무런 실효성이 없는 것이지요...
 
왕가위와 레르몬토프

러시아 시인 레르몬토프의 시에 곡을 붙인 '나 홀로 길을 나선다'를 그냥 흥얼거리다가 문득 예전 모스크바 통신에서 '레르몬토프의 고독'이란 페이퍼만 유독 정리해놓지 않은 걸 알게 됐다(이것도 그의 고독에 대한 배려였을까?). 바쁠 때일수록 이렇게 딴짓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의 고독에 대해서 다시 정리해놓는다(모스크바통신에서는 푸슈킨 시와의 비교도 다루었었는데 그건 생략하도록 한다). 참고로, 시 '나 홀로 길을 나선다'에 대해서는 링크해놓은 '왕가위와 레르몬토프'를 참조하실 수 있다. 러시아 가수 올렉 포구진이 부르는 노래는 http://www.youtube.com/watch?v=DcNMQIT-FCo 에서 들어보실 수 있고(예전에 국내 드라마에서는 여자가수가 부른 버전이 주제가로 쓰였었다).

 

지난번 통신문에서 레르몬토프의 마지막 <나 홀로 길을 나선다>에 대해서 몇 마디 언급했는데, 나는 이 50번째 통신문에서도 그에 대해서 얘기하려고 한다. 유리 미하일로비치 레르몬토프(1814-1841)에 대해서 말이다. 푸슈킨에게서는 기념비란 테마가 시인 자신에게서조차 주제화되며, 그의 예언에 부응이라도 하듯이 탄생 100주년(1899), 사망 100주년(1937), 탄생 200주년(1999) 등이 매번 성대하게 치러진 반면에, 고독의 시인 레르몬토프는 그의 문학적 유언(<나 홀로 길을 나선다>)에 걸맞게 언제나 혼자였다(*이 시마저도 종종 푸슈킨의 시로 오해받는다고 한다!)

시인의 탄생 100주년이 되던 1914년에는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사망 100주년이 되던 1941년엔 2차 세계대전 중이었다(2차대전은 1939년에 발발하지만, 소련은 불가침조약을 체결했던 독일의 공격을 받고 나서야 뒤늦게 비로소 참전한다). 해서, 러시아문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시인/작가이자 러시아 낭만주의의 가장 대표적인 시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국 러시아에서 한번도 제대로 기념되지 못했다(그의 지명도에 비추어보면, 거의 미스터리한 일이다). 그리고 올해(*2004년)는 그의 탄생 190주년이 되는 해였지만, 역시나 그와 관련된 행사들은 (내가 아는 한) 치러지지 않았다(체홉 사망 100주년에 묻혀서). 그저 문학신문의 기념 기사 한 자락 정도.

하다못해 2주전 일요일에는 그의 탄생 190주년을 기념하여 대표작인 <우리시대의 영웅>(1964) 등이 문화채널에서 영화로 방송됐지만, 그날 따라 나는 저녁 늦게야 TV프로그램을 확인했다(그의 탄생일은 1814 10 3일이다. 2일 밤인데, 보통 3일로 기록한다. 이게 구력일 것이기 때문에, 지난 17일이 신력에 따른 생일이었을 것이다. 결투로 인한 사망은 1841 7 15. 황제 니콜라이 1세는 그의 죽음에 대해서 개죽음이로군!이라고 간단히 언급했다. 한편 최초의 레르몬토프 전기는 파벨 비스코바트이의 것이며 1891년에 나왔다. 이 책은 올해 재출간됐다). 나는 레르몬토프를 전공했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닌데, 그렇게 무심하게 지나쳐버린 일이 한동안 내 마음을 갉아먹었다.

 

사실 그에 대한 본의 아닌 홀대는 나만의 것이 아니다. 나의 조국 한국에서는 레르몬토프를 거의 읽을 수가 없다. 지난 1999년에 전집이 간행된 푸슈킨과 다르게 그나마 우리말로 번역/출간된 레르몬토프의 시집과 소설 <우리시대의 영웅>(한길사, 조선대출판부)은 진작에 품절되었다(<우리시대의 영웅>은 영어 중역본도 나와 있었지만 역시 품절. 참고로 영역본 <우리시대의 영웅>은 나보코프가 그의 아들과 함께 옮긴 것이다). 그의 드라마 <가면무도회> <러시아희곡1>(열린책들)에 들어가 있지만, 이 책 또한 품절인 걸로 안다(그의 <가면무도회>는 지금도 모스크바의 무대에 올려지고 있으며 이번 시즌에 포킨이 연출한 고골의 <외투>와 함께 내가 가장 보고 싶어하는 레퍼토리이다).

 

해서, 아마도 당장에 서점에서 구할 수 있는 레르몬토프는 내가 아는 한 없을 듯하다(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건대출판부에서 나온 작가론 <레르몬토프>를 소략한 대로 참조할 수 있다). 요컨대, 그는 우리말로 쉽게는 읽을 수 없는 시인/작가인 셈이다(참고로, 레르몬토프의 러시아어 전집은 2권짜리에서 10권짜리까지 다양하며, 보통 가장 많이 인용되는 것은 4권짜리 전집이다(*이미지는 단행본 <우리시대의 영웅>).

 

 

한편, 푸슈킨과 마찬가지로 그는 장교시절에 포르노그라피적인 시들도 썼는데, 그런 시들만을 따로 묶은 <성인을 위한 레르몬토프>도 올해 출간됐다. <성인을 위한 푸슈킨>과 함께. 두 책 모두 이 시리즈의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도색화보들이 잔뜩 들어가 있어서, 한국에서라면 도색잡지로 분류돼 판금될 만한 책들이다).

 

해서, 생전에나 사후에나 고독한 그의 운명과는 비록 다소 걸맞지 않아 보일지라도, 약소하지만 이 50회 통신문은 (무심코 지나친 그의 생일을 기념하여 뒤늦게) 그에게 바치고자 한다(이런 걸 뒷북이라고 한다. 하지만, 마음의 부담을 덜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뒷북이라도 치는 것이다). 이건 며칠 전에 작정한 것인데, 좀 전에 혼자 저녁을 먹으면서 오늘 해치우기로 했다. 그렇다고 새로 무슨 글을 쓰는 건 아니고(그럴 형편이 안되므로), 이전에 쓴 글을 약간 편집하는 정도이다(휴식시간 동안 그 일이 끝나기를 바란다).

 

글은 주로 레르몬토프의 연애시에 대한 것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푸슈킨과의 대비 속에서 레르몬토프를 이해하기 때문에, 푸슈킨의 연애시에 대해서도 언급될 것이다(*이번엔 생략한다). 사실 레르몬토프가 시인으로서 자신의 이름을 알리게 되는 것은 1837년 푸슈킨을 죽음을 권력층의 음모로 비판한 시 <시인의 죽음>을 발표하면서이다. 푸슈킨의 죽음에 부친 시이면서도 정작 푸슈킨이란 이름은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 그 시는 이렇게 시작된다.

 

 

시인이 죽었다! - 명예의 노예 -

헛소문과 비방으로 쓰러졌다,

가슴에 복수의 열망과 총알을 박은 채,

당당한 머리를 숙이고 쓰러졌다!

시인의 영혼은 사소한 모욕의

불명예를 참지 못하고,

그는 세상의 소문에 대항하여 일어섰다

혼자서, 예전처럼... 그리고 살해당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는 이 일로 유배당하며, 그에 대한 황제의 미움은 거기에서부터 비롯되었다. 그는 이후에 불과 4년을 더 살았을 뿐이다.

 

레르몬토프 전공자들이 흔히 하는 얘기지만, (레르몬토프와 마찬가지로) 27살에 죽었다면 역시나 총각으로 죽었을 시인 푸슈킨(1799-1837)의 문학적 명성이 레르몬토프를 크게 앞지르진 못했을 것이며, 고골(1809-1852) <검찰관>(1836) 공연의 스캔들로 아마 상심해서 죽었을 것인바 아주 재미있고 재능 있는 괴짜 정도로 기억됐을 것이고, 톨스토이(1828-1910)는 자전 3부작이나 끄적거리다가 문학사의 여백으로 사라져버렸을 것이며, 도스토예프스키(1821-1881) 또한 페트라셰프스키 사건(1849)으로 말미암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버렸을 것인바 고골의 아류 작가 정도로 기억됐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런 것도 다 팔자인 걸 어떡하랴   

 

04. 10. 26/ 07. 06. 08.


댓글(2) 먼댓글(2)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1. 이별에 대처하는 두 가지 방법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3-21 23:50 
    고교 독서평설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이별에 대처하는 두 가지 방법'은 부제이고, 제목은 '푸시킨 VS. 레르몬토프'이다. 러시아 두 낭만주의 시인의 사랑시(실연시)를 애도적 유형과 우울증적 유형으로 비교한 글이다. 개인적으론 '푸슈킨'이란 표기를 선호하지만 지면에는 외국어 표기안에 따라 '푸시킨'으로 표기됐다.     고교 독서평설(09년 3월호) 푸시킨 VS.
  2. 레르몬토프와 페초린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1-19 00:39 
    아트앤스터디에서 러시아문학 강의에서 어제(라고는 하지만 몇 시간 전이다) 레르몬토프의 <우리시대의 영웅>(민음사, 2009)을 다루었다. 책이 절판되어서 한동안 다루지 못하다가 작년 가을에 새 번역판이 나온 덕분에 강의 커리에 포함시키고 있고, 어제는 두 번째 강의였다(아무래도 푸슈킨보다는 입에 덜 익었다).    사실 레르몬토프(1814-1841)는 내가 20대 시절에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
 
 
Joule 2007-06-09 0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저기 위에 턱에 손 괴고 얼짱 각도로 나온 사진이 레르몬토프인가요?... 흠, 음...그러니까...이건...뭐랄까...다음에 만나면 손 각도가 틀렸다고 전해주세요. (후다닥)

로쟈 2007-06-09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지는 못했지만 영화 <우리시대의 영웅>의 주인공 페초린 같습니다. 자전적인 부분도 있지만 레르몬토프는 아니죠...
 

얼마전 지성사가인 스튜어트 휴즈(1916-1999)의 '서구 지성사 3부작'이 출간됐다. 오래전에 나온 국역본들이 때깔을 달리해서 재출간된 것이라 '오래된 새책'으로 분류할 수 있겠다. 나도 3부작 중의 두 권(1,2권)은 갖고 있었지만 지금은 어느 박스에 들어가 있는지 알길이 없다. 예전에 나온 책의 모양새가 궁금한 독자라면 나귀님의 페이퍼(http://www.aladin.co.kr/blog/mylibrary/wmypaper.aspx?PaperId=1255649)를 참조해볼 수 있겠다. 새번역도 아닌 다음에야 다시 사두기도 뭐한 책이어서 자세한 리뷰만 챙겨두도록 한다.

경향신문(07. 06. 09) 20C 들추면 ‘지식인의 위기’ 답이 있다

사법시험이나 행정고등고시 등에서 특정 기수에 인재가 몰리는 현상은 심심찮게 발견된다. 이런 현상은 어떤 조직에서나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이 회사든 학교든 마찬가지다. 역사적으로 봐도 그런 경우가 흔하다. 대표적으로 공자, 노자, 석가, 소크라테스 같은 성인이나 위대한 사상가들이 한결같이 기원전 500년 전후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활약했던 사례를 들 수 있다.

서유럽에서 1890년대 이후 40여년간은 20세기 인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상가와 지성인들의 역할이 두드러진 시기로 꼽힌다. 흔히 좁은 의미의 ‘세기말’로 통칭되는 19세기 말과 1차 세계대전을 거친 20세기 초를 관통하는 때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막스 베버, 베네데토 크로체, 에밀 뒤르켐, 앙리 베르그송, 카를 융, 오스왈트 슈펭글러 등 독보적인 이론을 세운 지식인들이 출현한 그 시기다.

유럽 지성사 연구의 권위자 스튜어트 휴즈가 이 시대를 각별하게 주목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저자는 전후 유럽사 분야에서 가장 빛나는 업적을 낳은 연구자로 평가된다. 스스로 국적은 미국인이지만 지적 교양은 주로 유럽적이라고 스스럼없이 털어놓는다. 그의 역저 ‘서구 지성사’ 3부작은 이 대변혁기와 2차 세계대전을 거친 또다른 격동기의 서유럽 사상사를 인물과 형성과정 중심으로 접근한 현대 고전이다. 이런 점이 통상적인 사상사와 차별화된다.

이미 40여년전에 첫 출간되기 시작했던 이 책들은 오늘날까지 이를 능가하는 저술이 없을 정도라는 호평을 받는다. 이처럼 오래 전에 첫 선을 보였던 책의 번역본 ‘서구지성사’ 읽기가 이 시대에 요긴한 이유가 있다. 한국 사회에서 ‘지식인의 위기’가 어느 때보다 심각하게 운위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987년 6·10항쟁 이후 지금처럼 ‘지식인의 몰락’이라고까지 표현될 만큼 지식인 담론이 우울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이 3부작은 전체적으로 중요한 시기의 지성상을 통해 그 시대상을 정립하려는 목표를 설정했다. 개개인의 전기적(傳記的) 요소를 중시하는 한편 그 시대 지성인들의 동선(動線)에 역점을 두고 재구성한 점이 특기할 만하지만, 그렇다고 일련의 지적 전기는 결코 아니다. 그런 점에선 단순한 사상사가 아니라 ‘개념화된 사회사’라고 봐도 좋을 듯하다. 통상적인 사상사가 다 익어서 수확한 과일을 분류하는 작업이라고 한다면 이 책들은 과일나무에 과일 하나하나가 열리는 과정을 자세히 소묘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겠다.

개별 인물에 대한 평가는 매우 엄정한 잣대를 들이댄다. 이를테면 지적 거장들 가운데 프랑크푸르트 학파 이론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해 온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어떤 모습으로 계승되고 있는지 공정하게 기술하고 있다. 문장은 시종 품격이 있으면서도 글맛이 느껴진다. 짧은 예를 하나 들면 이렇다. “모든 종합자들 중에서 아도르노는 가장 눈부신 성과를 올렸지만, 그는 그런 멋진 고공비행을 하면서도 헤겔주의라는 귀찮은 모래주머니를 영원히 끌고 다녔다.”



1권 ‘의식과 사회’(황문수 옮김·2만5000원)는 3부작의 중심축을 이룬다. 휴즈는 1890~1930년까지 40년간의 지성적 상황을 실증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대결 구도로 삼는다. 여기에다 무의식의 등장과 주관주의에 비중을 두고 시대를 정리한다. 이에 따라 중심 인물로 프로이트, 베버, 크로체를 세우고 있다. 그 주변에 뒤르켐, 베르그송, 융, 슈펭글러, 안토니오 그람시, 앙드레 지드, 토머스 만, 마르셀 프루스트, 헤르만 헤세 등 수많은 지성들을 배치한다. 무엇보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소문난 프로이트의 지적 세계를 이 책만큼 명쾌하게 해부한 것은 찾기 힘들다는 평판을 얻을 만큼 권위를 인정받는다. 저자는 1930~60년의 지적 세대를 두 개의 집단으로 나눈다. 첫번째는 프랑스 사람으로 한정했다. 두번째는 유럽과 이탈리아를 떠나 미국이나 영국에 정착한 반(反)파시스트 망명자들로 구성됐다.

2권 ‘막다른 길’(김병익 옮김·2만원)은 앞의 프랑스 지성인들을 다뤘고, 3권 ‘지식인들의 망명’(김창희 옮김·2만원)은 두번째로 분류되는 인물들을 엮은 것이다. 휴즈는 프랑스 사상사에서 1930~60년대의 한 세대를 ‘절망의 시대’로 상정한다. 그렇지만 ‘막다른 상황’을 타개하는 마지막 희망을 알베르 카뮈, 테야르 드 샤르댕,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에서 찾아낸다. 3권에서는 히틀러의 나치 정권과 무솔리니의 파시즘이라는 시련에 직면한 지식인들의 고뇌를 현실감 있게 엮어냈다. 3부작을 순서대로 읽을 필요는 없을 것같다. 각기 독립된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심층적인 지성사를 공부하고 싶은 독자들은 이 시대의 일반적인 사상사를 곁들여 읽으면 한층 정교한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주에 함께 나온 니콜 라피에르의 ‘다른 곳을 사유하자’(이세진 옮김·1만4000원·푸른숲)도 더불어 읽을 만하다(*엊그제 소개한 책이다). 이 책은 ‘서구 지성사’ 시리즈 3권 ‘지식인들의 망명’과 비교된다. 20세기 초 망명한 지식인들로부터 학제간 연구에 열중하고 있는 지금의 학자들에 이르기까지 비판적 지식인들의 삶과 사유를 다루었다는 점이 흡사하다. 이 책은 통행, 이주, 이동, 이산, 혼합, 전환, 소통을 이야기한다. 들머리에 인용한 “세계가 그토록 광대한 것은 우리 모두가 그 안에서 흩어지기 위함이니”라는 괴테의 말이 이 책의 분위기를 한마디로 상징하는 듯하다.(김학순 선임기자)

07. 06. 08.

Dominick LaCapra

P.S. '지성사'라고 하니까 떠오르는 이름은 도미닉 라카프라(1939- ) 미 코넬대 교수이다. 그의 <지성사를 다시 생각하기(Rethinking Intellectual History)>(1983), <역사, 정치 그리고 소설(History, Politics, and the Novel)> 등을 소장하고 있어서겠다(최근작들이 아니어서인지 마땅한 책이미지가 뜨지 않는다). 언제 번역서들이 나오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