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에서 기획연재 중인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에서 이번 주에는 '대중지성'을 화두로 다루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물론 연구공간 '수유+너머'이지만 예기치않게도 나도 관여하고 있는 한 인터넷 카페가 그 '대중지성'의 사례로 거론되고 있다(물론 '로쟈'란 이름도 기사에서 언급되고 있다. 한국사회가 얼마나 좁은 동네인 것인지!).

올초에 '책의 오피니언 리더 인터넷 서평꾼'(http://blog.aladin.co.kr/mramor/1033363)이란 기사가 한겨레에 게재된 적이 있는데, 반년만에 '오피니언 리더' 혹은 '인터넷 서평꾼'에서 '대중지성'으로 '진화'한 셈인지? 같은 기사의 다른 꼭지로 '지식인이 사라진 시대의 지식투쟁'을 다루고 있는 고병권의 글은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06181826421&code=210000 참조.  

경향신문(07. 06. 19) 지식사회 새 경향, 대중지성

대중이 지식을 생산하는 주체로 떠오르고 있다. 지식인의 죽음이 어른거리는 풍경을 배경으로 나타난 새로운 현상, 즉 ‘대중지성’의 탄생이다. 연구공간 ‘수유+너머’가 지난해 5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새만금에 생명을, 대추리에 평화를 위한 대장정’에 들어가며 내놓은 선언문은 대중지성이 지향하는 바를 잘 나타낸다. “우리는 대중을 훈계하는 지식인, 대중에 연민을 갖는 지식인 모두를 거부한다. 우리는 지식인이 대중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지식인 스스로가 대중일 때뿐임을 안다.”



‘수유+너머’는 올 1월 ‘2007 대중지성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지식은 아카데미의 강단이 아니라 대중적 네트워크를 타고 소통되고 있다. 아카데미도, 지식인도 없지만, 가르치고, 배우고, 묻고, 읽고, 쓰는 일은 어느 때보다 활발하다”고 밝혔다. ‘대중지성 프로젝트’는 대학과 학술진흥재단이 규정한 분과에 얽매이지 않은 학자들이 ‘강좌’를 통해 대중들과 교감하며 네트워킹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연구 공동체인 ‘다중네트워크센터(http://waam.net)’도 지식인의 죽음을 선고했다. “과거 절대정신이자 보편적 주체로서 역할을 하던 지식인의 유형들은 모두 사망했으며, 다중이야말로 자신의 삶을 스스로 조직할 잠재력을 지닌 ‘새로운 지식인’이자 자유인으로 등장하고 있다.”

대중이 지식의 소비자이면서도 생산자가 되어 새로운 지식 체계를 만드는 ‘대중지성’은 인터넷에서 더 보편적이며 활발하다. 인터넷상의 대중지성들은 때로 자신이 대중지성에 속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아카데미의 수준에 버금가거나 으뜸가는 지식을 창출해낸다.

포털사이트 다음 카페 ‘비평고원(http://cafe.daum.net/9876)’. 인터넷 서평꾼들이 모인 카페다. 인터넷 책 세상의 오피니언 리더로 꼽힌다. ‘책에 관한 한 가장 수준 높은 담론이 진행되는 곳’이란 평가는 이 사이트의 존재를 아는 이들에게는 어색하지 않다. 자발적으로 아무런 대가 없이 올린 ‘텍스트’가 대중지성의 근간이다.

최근 출간된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공화국으로’(도서출판 b)에 대한 서평이 책 출간과 거의 동시에 올랐다. 비평 대상은 라캉, 들뢰즈의 서구 철학 서적, 김훈, 은희경, 이문열의 문학 작품 등 인문학 전반과 이창동의 밀양 등 영화를 망라하고 있다. 이곳의 ‘지성’들의 글쓰기 수준은 계간지 비평 수준 못지 않다. 갓 나온 번역서의 오류를 잡아낼 수 있을 정도로 전문적이다.

때로는 책 번역자가 이 카페를 찾아 논쟁을 벌인다. 회원들간에도 ‘주례사 댓글’은 없다. 각자의 글에 논쟁하고 토론하는 게 일상화되어 있다. 카페지기 조영일씨(서강대 국문과 박사과정 수료·ID 소조)는 “문학이나 지식에 관한 논의들이 특정 전문가들의 전유물이었다. 독자나 일반인들의 논의를 이끌어내는 장이 없었다”며 카페 개설 배경을 밝혔다.

비평고원에서 고정 코너를 갖고 있는 ‘불멸회원’들은 고수들이다. ‘로쟈’, ‘폭주기관차’, ‘쌍수대인’, ‘로카드’ ‘아이온’, ‘김남시’, ‘K’, ‘brick’ 등 8명이다. 조씨는 “불멸회원들은 박사 학위자, 비정규직 강사, 자영업자, 번역가, 취업준비생, 일반 회사원들”이라고 말했다.

자연과학쪽의 ‘대중지성’으로 꼽히는 곳은 생물학연구정보센터 사이트인 브릭(BRIC)이다. 황우석 박사 논문 조작 의혹을 처음 제기한 곳이다. 서울대 이병천 교수팀의 ‘늑대 복제’ 논문의 오류를 지적한 곳도 브릭이다. 기존 아카데미아가 애초 시도도 못할 검증을 해낸 것은 ID로만 알려진 익명의 연구자들이다.

익명의 유권자들이 무수한 정치·개혁 담론을 쏟아내며 ‘정치권력’의 향방에 영향을 미쳤던 2002년 대선 당시의 노사모 사이트도 ‘대중지성’의 한 전형으로 꼽힌다. 상근기자들이 아니라 시민기자들이 중심이었던 초기 오마이뉴스도 대중지성의 사례다.

포털 사이트 ‘네이버 지식iN’은 더 많은 익명의 대중들이 만들어내는 지식의 곳간, 인터넷 ‘대중지성’의 상징이다. 익명의 네티즌들이 수천만 건의 질문과 답변으로 지식을 쌓아 올린다. 이 ‘지식’은 인터넷상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체계화된 형태를 띠었다. 네이버 홍보팀 이경률 대리는 “인터넷이란 미디어를 통해 지식 공유의 시대를 열었다. 특정인 한 사람의 지식은 한계가 있지만 하나의 질문에 여러 사람이 답을 달면서 상승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이를 통해 ‘집단지성의 활성화’도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기존 지식인들이 독점했던 지식 체계를 인터넷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대중이 가져간 것(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이란 분석도 나온다.

그러면 대중지성은 과연 지혜로운가?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는 최근 나온 책 ‘여럿이 함께’에서 영국 유전학자 프란시스 골튼(1822~1911)이 시골 장터에서 겪은 일화를 소개했다. 시골 장터에서 열린 황소 몸무게 알아 맞히기 퀴즈에서 아무도 답을 맞히지 못했지만, 퀴즈에 참가한 사람들이 적어낸 몸무게를 합쳐서 나누어 보니 맞았다는 이야기다. 신교수는 “단 한사람도 맞히지 못했지만, 여러 사람의 판단이 모이니까 정확한 몸무게를 맞힐 수 있었다. 언론도 얼핏 보기에 어리석어 보이는 대중의 지혜를 모아내는 법을 배워야 한다. 대중은 잘 안다”고 말했다. ‘대중의 지혜’는 디지털 철학자로 알려진 피에르 레비 캐나다 오타와대 교수의 “개인으로 할 수 없는 일을 집단은 가능케 한다”는 ‘집단지성’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강준만 전북대 교수의 의견은 다르다. “대중의 지혜는 사실 하나마나 한 소리다. 확률적으로 대중은 늘 지혜롭게 돼 있기 때문이다. 대중은 그 자체의 힘(머리 수 파워) 때문에 대중의 선택은 정당화되고 지혜가 되게끔 돼 있다. 대중은 이미 ‘지혜’라는 답을 내장하고 있는 개념이다. 예컨대, 대중이 선거에서 아주 어리석은 선택을 했을망정 그걸 무슨 수로 꾸짖을 것이며 바로잡을 수 있겠는가.”

문화평론가 김헌식씨도 “대중지성이 기존에 나온 사실을 적시하고 수정하고 지혜를 모을 수는 있다. 하지만 오랜 시간 한가지 주제에 매달려 중요한 지식을 만들어내는 것은 결국 기존의 지식인이고 전통적 지식인”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또 대중지성에서 새로운 개념의 노동착취 형태가 나타나고 있다고 말한다.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피디아나 이를 저급하게 모방한 네이버 지식iN이나 오마이뉴스의 시민기자제는 선(善)의지를 가진 대중지성의 결과물로 채워진다. 그러나 참여자 또는 조직구성원이랄 수 있는 대중지성에 대해서는 배려가 없다. 대중지성이 생산한 양질의 결과물로 상당한 수익을 올린다. 새로운 노동착취의 시대가 온 것이고, 그 착취는 선의지, 자율성, 참여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조정환씨(다중네트워크센터 대표)도 “기업과 자본이 자기네의 이윤 축적을 위해서 사실상 다중지성을 착취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다. 네이버가 대표적이다. 또 국가와 기업이 서로 협력하면서 지적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헤게모니 집단으로 부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포스트 포드주의, 팀제, 자율책임제 등 노동자가 상상하고, 기획하고, 조직하는 시스템도 기업체가 대중지성을 이용하는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199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의 독주 체제, 국가·국적·국경을 초월한 거대 자본의 네트워크가 지배하는 체제를 ‘제국’이라고 규정한 조씨는 향후 지식사회의 과제를 대중지성과 제국의 대립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정치, 기업적으로 일어나는 제국적 흐름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은 지금 어디에도 없다. 대중지성이 최후의 보루고 여기에 승부가 걸려 있다”고 말했다. 대중이 네트워크적 권력인 ‘제국’에 속해 있으면서 그것에 대항하고,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잠재력이란 설명이다.

그 가능성은 이미 드러난 바 있다. 2002년 미군 장갑차에 치여 사망한 미선·효순이를 위해 온라인에서 촛불을 들기로 결의하고, 오프라인인 광화문으로 그 촛불을 들고 나온 수십만의 추모 인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를 위해 온·오프라인 운동을 벌인 사례가 그런 경우이다. 지식인의 무덤 위에 태어난 대중지성의 성격과 역할을 주목해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김종목·손제민·장관순기자)

07. 06. 19.

P.S. '대중지성'이란 말은 연초에도 한번 기사화된 적이 있다. '개중과 대중지성'이란 페이퍼(http://blog.aladin.co.kr/mramor/104829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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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7-06-19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중지성'이라는게 한편으로는 '범부'들 중에서 지적 관심이 높은 이들의 새로운 층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기본적으로 '대중과 지식인'이라는 것이 이분화되어 각기 다른 길을 걸어온 것이 원론적인 문제였겠으나 '대중지성'의 영토라는 곳 역시 어떤 특수화된 '대중'들의 영토로 보일 수도 도 있다는 점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대중사회에서는'지식'도 상품처럼 소비되는 것이니 '지식상품'의 소비를 통해서 '돈'을 대신하는 '자본'을 가지려는 것일 수도 있겠지요.(제가 가끔 스스로 그런 건 아닌지 생각해보곤 합니다.돈 벌 재주는 없고 돈 만 버는 놈들에게 지기는 싫고..)
'대중지성'이라는게 결국 '일반인의 지식인화'의 경향성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지식인의 대중화 경향성'이 있는 것인지 궁금하네요.물론 상호적이겠으나...대중지성 네트워크를 이끄는 이들이 '지식인의 대중화'를 말한다면 그 '대중'이 특권화된-최소한 교육,문화자본은 확보한-'일반인'을 '대중'으로 상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저도 '인문학'이 학교에 머무는 것에 반대하고 '회사원'들이 '인문사회학'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믿습니다.그런데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서 여쭈어봅니다.제가 아는 '대중'중에 여기 옮겨진 기사를 제대로 독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열에 아홉은 되어보입니다...

로쟈 2007-06-19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장이 인상적입니다.^^; '대중지성'이란 말이 유포되고 있지만(어떤 의미에서는 모순형용적인) 그 기반은 인터넷이란 새로운 소통공간(비평공간, 다중네트워크, 브릭 등), 그리고 재야 학술공동체(수유 등)이죠. 공통적인 건 대학 바깥에서 어떠한 제도적 지원 없이 자생적으로 지식/학술담론들을 생산/유포한다는 것이겠구요. '특수화된 대중', 곧 '특별한 대중'이라고 새로 분류할 건 없을 거 같습니다. 저부터도 그렇지만 대학에 한 다리 걸치고 있는 경우들도 많기 때문에. 그냥 "돈 안 받고 노동력 착취당하는" 새로운 부류의 학도들이 생겨난 거라고 생각합니다(예전 같으면 재야/초야에 묻혀 있을텐데, 인터넷으로 인하여 저처럼 '행세'하게 된 것이기도 하구요)...

전자인간 2007-06-19 15: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논의에서도 '나열'과 '체계' 사이의, '교양'과 '전문성' 사이의 구분은 어쩔수 없이 따라다니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수유+너머 같은 경우에도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한 교양과목 성격의 강좌가 있는 반면, 수십명의 소수 정예를 대상으로 한 스파르타식 '대중지성 프로젝트'와 각종 세미나가 있는 것을 보면, '저변으로서의 대중'과 '전위로서의 소수 지식인'의 구별은 (의도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분명 존재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생각할 때 도대체 '대중지성'이란 말이 얼마나 더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을까, 차라리 이런 경우에는 '재야지성'이란 말이 더 낫지 않을까 생각되기도 하더군요. 뭐, 그렇다고 수유+너머의 시도가 무의미하다거나 부정적이라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로쟈 2007-06-19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문에다 한참 덧글을 달았는데 시스템 불안으로 날아가버리네요(다시 쓸 여력은 없습니다. 요점은 말씀하신 대목의 연장선상에서 수유 등과 네이버iN은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대중지성'에 대한 비판들은 이를 혼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스템이 안정화돼 있지 않으면 '대중지성'이란 게 얼마나 무용지물인가를 입증해주는 듯합니다.--;

yoonta 2007-06-20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평고원같은 곳은 외관으로 봤을 때는 누구나 접근가능하다는 점에서는 대중적?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폐쇄적인 공간이더군요. 대학원세미나자리에서 만나서 하는 이야기들을 그냥 인터넷으로 옮겨왔을 뿐이지 소위 말하는 "대중지성"과는 전혀 상관없는 공간이죠. 장점이라면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를 훔쳐볼 수 있다는 정도?
반면 수유+너머의 기획에는 나름 의미가 있어 보입니다. 제도권밖에서 학문적 담론을 생산해 낼수있는 하나의 방법을 제시했다는 측면에서는 분명 긍정적인 측면이 있죠. 다만 그것을 "대중지성"이라는 식으로 뭔가 획기적인 새로운 (대중)운동방식을 고안한 것처럼 과대광고할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로쟈 2007-06-21 0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평고원이 폐쇄적이라고 하신 건 선입견 같습니다. 저도 다른 카페를 운영해봐서 아는데 등업에 제한이 없을 경우 광고 스팸들을 처리하는 데도 애를 먹습니다. 글쓰기에 자격제한을 두는 것은 그런 걸 걸러내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리고 워낙에 중구남방이어서 '세미나'라고 하기엔 뭐하지요. '수유'와 비교하셨는데, 순수한 온라인 모임과 오프라인 중심의 공동체는 차이가 있지요. 짐작과 다르실지 모르지만 수유에 관계하는 비평고원 회원도 여럿 됩니다...

yoonta 2007-06-21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순히 등업제한문제만을 이야기한 건 아닙니다. 문제는 그곳 성원들의 의사소통방식입니다. 소위 그곳의 불멸회원분들은 다들 로쟈님 같지는 않더군요. 제 느낌상 그곳은 그냥 그곳 불멸회원들의 놀이터일 뿐라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물론 제 선입견일수도 있습니다. ^^ 소위 "대중지성"이라는 표현은 비평고원같은 소수만을 위한 커뮤니티보다는 오히려 이곳 알라딘서재같은 곳이 더 어울린다고 봅니다.
 

지난 토요일이 '블룸스 데이'였다.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율리시스>의 배경이 되는 하루를 기리기 위한 더블린 시민(아일랜드 국민)들의 기념일이다. 이 날을 특별히 기억해서가 아니라 토요일자 신문들에 관련기사가 실렸기에 알게 됐다. 그리고 일단 알게 되면 또 그냥 지나치기도 어려운 법이다. 바쁘다는 핑계로 주말엔 지나쳤는데, 다시 눈에 띄기에 일단은 관련 이미지들을 찾아서 스크랩해놓는다. 언제 한번 더블린으로 여행을 가게 된다면 일정을 6월 중순으로 맞춰야겠다...

한겨레(07. 06. 16) 한국판 블룸스 데이 ‘구보의 길’ 꿈꾸며

6월 16일, 오늘은 ‘블룸스 데이’(Bloom’s Day)라는 이름으로 세계문학사에 뚜렷이 등재되어 있다(*아예 'BloomsDay'라고 붙여쓴다). 블룸스 데이란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율리시스>의 배경인 1904년 6월 16일을 기리는 날로, 소설 주인공인 레오폴드 블룸의 이름에서 따왔다.

소설 <율리시스> 이날 하루 동안 주인공인 레오폴드 블룸이 더블린 시내를 배회하는 내용을 축으로 그의 아내인 몰리 블룸, 예술가를 꿈꾸는 청년 스티븐 디덜러스 등 세 명의 중심 인물을 등장시킨 소설이다. 현대 영문학 최고의 작품으로 꼽히는 문제작이지만, 난해한 문체와 현란한 기법, 방대한 분량 때문에 일반인들이 읽기에는 어렵다는 평을 듣는다.

그럼에도 소설 주인공 이름을 딴 블룸스 데이는 더블린 시민과 아일랜드 국민은 물론 전 세계 문학 애호가들 사이에 대표적인 문학 축제로 자리잡았다. 해마다 6월 16일이 되면 소설 무대인 더블린에서는 레오폴드 블룸의 행적을 따라 걷거나 소설 <율리시스> 의미를 되새기는 다채로운 행사들이 마련된다. 축제는 대개 1주일 전부터 시작되는데, 올해의 경우 지난 9일부터 조이스와 <율리시스>를 소재로 한 영화 상영과 노래 공연, 전시회, 걷기 행사 등이 펼쳐졌거나 진행되고 있다.

블룸스 데이의 절정은 역시 당일인 16일. 이날 아침 더블린의 제임스 조이스 센터에서 ‘블룸스 데이 브렉퍼스트(아침)’를 먹는 것으로 시작된 축제는 지역 명사들과 조이스 마니아들이 참가하는 <율리시스> 낭독회와 연주회, 뮤지컬 등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블룸스 데이의 핵심은 아무래도 주인공 블룸의 발길을 따라 더블린 시내를 걷는 답사(walking tour)에 있다.

‘레오폴드 블룸의 발자국을 좇아서’라는 이름의 답사 프로그램은 이미(11, 13, 14일) 진행되었고, 16일 하루 동안에만도 ‘조이스와 영화’ ‘음악과 정치’ 등을 주제로 한 다양한 테마 답사가 예정되어 있다. 특히 올해는 조이스의 연작단편집 <더블린 사람들>이 출간된 지 100년이 되는 해여서 <더블린 사람들>의 무대를 밟는 답사 프로그램이 인기를 얻고 있다. 블룸스 데이의 마무리는 17일 정오 조이스 센터에서 있을 ‘<율리시스>의 기원들’이라는 강연이 장식할 참이다.

블룸스 데이의 성공을 보면서 생각한다. 우리 문학에서도 블룸스 데이와 같은 축제를 만들어낼 수는 없을까. 없지 않다. 한국판 ‘블룸의 길’에 해당하는 코스가 우리에게도 있다. 바로 ‘구보의 길’이다.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주인공 구보가 걸었던 1930년대 경성의 중심부 노선이다.

건축학자 조이담씨는 <구보씨와 더불어 경성을 가다>(2005)라는 책에서 소설 속 구보의 하루를 1934년 8월 1일로 특정하고, 청계천변 다옥정 7번지 집에서 출발해 종로네거리와 동대문, 남대문과 경성역, 광화문통 등을 거쳐 집으로 돌아오는 총연장 15.7㎞(전차 구간 5.7㎞ 포함)의 ‘구보 노선’을 정리해 놓은 바 있다. 복원된 청계천과 광화문, 시청 광장, 서울역, 남대문 등을 포괄하는 이 노선은 한국판 ‘블룸의 길’로서 손색이 없어 보인다. 지난달 29일과 이달 9일 <남한산성>의 작가 김훈씨가 독자들과 함께 답사한 남한산성 길 역시 문학·역사 기행 코스로 개발할 만하다. ‘구보의 길’이든 남한산성로든, 한국판 ‘블룸의 길’의 출현을 꿈꾸어 본다.(최재봉 기자)

중앙일보(07. 06. 16) 하루의 힘

'블룸스데이'를 아시나요?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는 매년 6월 16일을 '블룸스데이'라고 부르며 축제를 벌인다.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율리시즈'의 주인공 레오폴드 블룸의 이름을 딴 '블룸스데이'엔 블룸이 거닌 길을 따라 걷거나 그가 먹은 음식을 똑같이 먹는 이벤트를 펼친다. 그리고 더블린의 공영방송에선 아예 아침부터 30시간에 걸쳐 '율리시즈'를 낭독한다. 이방인의 눈으로 보면 참으로 별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율리시즈'가 1904년 6월 16일 오전 8시부터 그 다음날 오전 2시 반까지 하루가 채 안 되는 19시간여 동안 아일랜드의 더블린을 무대로 일어난 일들을 장장 800여 쪽에 25만여 단어로 담아낸 것임을 감지하는 순간 '블룸스데이'의 비밀 아닌 비밀이 풀리기 시작한다.

사실 말이 800여 쪽이지 그것은 영어 원본의 경우이고 '율리시즈'의 우리말 번역본은 해설을 포함해 1300여 쪽이 넘는다. 어마어마한 분량이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단 하루, 아니 19시간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의 일을 묘사한 것이라니! '율리시즈'를 보노라면 하루, 즉 24시간=1440분=86400초가 얼마나 대단하고 위대한 것들의 은밀한 압축이요, 함축인가 하는 것을 새삼 깨닫고 경탄하게 된다.

고등학교 1학년 시절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소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읽고 스탈린 시대 강제수용소에서의 단 하루의 일들로 한 권의 결코 만만치 않은 소설을 쓸 수도 있다는 사실에 감탄했던 기억이 있다. 결국 단 하루의 삶일지라도 그것은 한 권의 소설 이상을 탄생시킬 만큼 그 뭔가로 농축돼 있는 것이다.

더구나 '율리시즈'에 묘사된 그 하루가 누군가에게는 한평생의 숙제요, 존재할 이유이며 삶 그 자체가 되기도 했다는 사실 앞에선 묘한 전율마저 느끼게 된다. 김종건 전 고려대 교수는 서울대 대학원 시절 원어 강독 시간에 '율리시즈'를 만나 자신의 평생을 그것의 번역을 위해 바쳤다. 1968년 국내 최초로 '율리시즈'를 번역한 김 교수는 20년 후인 88년 다시 개정번역을 냈고, 또 한 해 모자란 20년 후인 올해 2007년에 세 번째 번역본을 내놓았다. 평생 고치고 또 고친 것이다.



어찌 보면 그는 자신의 평생을 소설 '율리시즈'에 묘사된 하루와 고스란히 맞바꾼 셈이다. 그 하루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의 일을 우리말로 옮기기 위해 각고의 노력으로 평생을 바친 것이다. 물론 노 교수의 학문적 투혼도 무서울 정도지만 25만 단어 이상의 사연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였다가 뿜어낼 수 있는 하루의 힘, 그 하루의 저력은 무섭다 못해 위대하지 않은가.

그래서 하루가 아까운 것이다. 퇴계 이황과 더불어 사단칠정 논쟁을 펼쳤던 것으로 유명한 고봉 기대승의 13대 후손인 기세훈 변호사의 고택 사랑채 당호는 다름 아닌 애일당(愛日堂)이다. 애일당이라…하루를 사랑하는 집? 아니다. 애일당 툇마루에 앉아 있노라면 시간 가는 것이 너무 아쉬울 만큼 좋다. 결국 애일당은 그 아름다운 풍광을 자아내는 하루가 그저 지나가는 것이 아깝고 아쉽다는 함의가 깃든 집 이름이 아닐까.

하지만 하루가 지나는 것을 아깝게만 생각하고 있을 일이 아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그 아까운 하루를 최고의 하루, 위대한 하루로 만드는 일이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미국 대통령의 부인 엘리너 루스벨트 여사가 생전에 이런 말을 했다. "어제는 역사, 내일은 미스터리, 오늘은 선물!" 그렇다, 어제는 역사이고 내일은 알 수 없지만 오늘은 분명히 선물이다. 그 선물인 오늘 하루를 최고의 날로 만드는 것! 그것이 오늘 나와 너, 그리고 우리가 할 일이다.(정진홍 논설위원)



07. 0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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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7-06-18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한겨레에서 봤는데 로쟈님 올리실줄 알고 기다렸습니다. 저 무겁고 두꺼운 <율리시스>가 책장 한 곳에 누워있군요.

로쟈 2007-06-18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스크랩 정도는 대신해줄 만한 비서를 구해야겠습니다.--;

eddie 2007-07-03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로쟈님^^
수유님 블로그에서 보고 왔습니다. 이 글 제 개인 블록에 퍼가도 될까 해서요. 아 그런데 돌아보니 참 재밌는 포스팅이 많네요. 멋져요^^

로쟈 2007-07-03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시군요. 가끔 놀러오시길.^^
 

이런저런 일들과 겹치게 됐지만 6월의 마지막 일정 중 하나는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창비, 2000)과 임상수의 <오래된 정원>(2007)에 대해 강의하는 것이다. 사실 '강의'라는 건 핑계이고 나 자신이 지난 20년을 잠시 돌이켜보기 위한 '뒷북'으로 지난 겨울에 기획해서 한 독서모임의 프로그램으로 제안한 거였다(나는 뒤늦게 5월의 사회적 독서 목록을 6월까지 연장하면서 <오래된 정원> 등을 추가했다. http://blog.aladin.co.kr/mramor/1108684). 

소설은 이번에야 읽게 됐는데, 지난 2000년에 처음 출간됐을 때 내가 받은 첫인상은 '정원'이란 말이 너무 튄다는 것이었다('뜰'이나 '밭'이나 '마당'에 비해서 얼마나 이국적인 말인지!). 작가의 후기를 읽고서야 의문이 풀렸는데 그는 이렇게 적었다. "1993년 귀국하자마자 구치소에 있을 무렵 운동시간에 나가 하염없이 시멘트 담벽 안의 비좁은 공간을 맴돌면서 문득 무릉도원 이야기와 샹그릴라 전설이며 하는 것들을 생각하던 중 '오래된 정원'이라는 제목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오래된 정원'은 '무릉도원'과 '샹그릴라'의 은유인 셈이고, 이국적 뉘앙스가 배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다.

영화의 관련 영상을 포함하여 몇 가지 강의자료들을 챙기다가 작가와 감독의 대담이 눈에 띄어 스크랩해놓는다(사실 눈에 띈 건 오래됐지만).말미에 주연배우로 이병헌이 언급되기도 하는 걸 보면 아직 영화의 캐스팅도 공식적으론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진 대담이다. '잃어버린 서사를 회복하자'라는 작가의 제안이 눈길을 끄는데, 사실 이 1인칭 소설을 읽어가면서 내가 느낀 건 작가가 지난 시대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적절한 연상인지는 모르겠지만, 소설을 읽으면서 일감으로 떠올린 작품은 신경숙의 <깊은 슬픔>이었다. 황석영은 왜 3인칭으로 쓰지 않았을까? '연애감정'을 다루기 때문에? 그게 그렇게 중요했던가?).

"잊어서는 안될 한 시대의 진실"(백낙청)이 "헌신적인 활동가들의 정서적 심층에 잠재된 연애감정의 음영을 절묘하게 포착한 작품"(염무웅)으로 귀결되는 것인지, 그렇게 봉합되고 봉인되는 것인지 의구심도 갖게 된다. '잃어버린 서사를 회복하자'는 구호는 작가의 독백적 구호가 아니었을까란 생각도 들면서. 영화 <오래된 정원>은 소설이 흘려버린 서사를 챙겨주고 있는지? 아직 남겨놓은 소설과 영화를 마저 읽고/보고 좀더 생각해봐야겠다(나는 강의준비를 미리 하지 않는다).  

씨네21(05. 07. 27) "잃어버린 서사를 회복하자는 선언이라도 하자”

황구라라는 말이 있다. <오래된 정원>의 원작자인 황석영 작가와 각색자이자 연출가인 임상수 감독과의 대화는 일대일의 공정한 대담이 되기 어려웠다. 오후 4시에 만나 다음날 새벽 3시까지 황석영 작가는 쉬지 않고 말했다. 본인 레퍼토리만 200가지라고 한다. 임상수 감독은 황석영 작가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3대 구라에 대해 얘기했다. “누군가 황 선생님한테 선생님이 망명 기간 동안 그리고 감옥을 다녀 오는 동안 새로운 구라들이 떴습니다, 했더니 황 선생이 이랬대요. ‘걔네들은 교육방송 수준이야. 내가 라디오지.’” 황석영 작가의 라디오는 쉬지 않고 연애, 감옥생활, 신자유주의, 노동의 이동, 비정규직, 한국 문학의 위기, 한국영화의 위기, <한겨레>의 발전 프로젝트 등 주제를 옮겨다니며 능청스럽고 활달하게 유쾌한 이야기를 쏟아냈다. <오래된 정원>은 군부독재 반대 운동으로 18년간 장기복역하고 출옥한 오현우가 그동안 만날 수 없었던 사랑하는 연인 한윤희의 자취를 찾아가는 이야기다. 사랑하지만 만날 수 없는 연인의 가슴 아픈 사연를 뼈대로 고난의 한국 현대사를 담아냈다.

황석영 | 내가 임상수 영화를 씹으려고 나왔는데. (웃음) <그때 그 사람들>이랑 <바람난 가족>을 봤는데, <바람난 가족>이 훨씬 좋더라고. 저 양반이 자기 특유의 화법이 있는데 조금씩 비약이 있더구먼. 앞으로 혼내서 조금만 다듬으면 좋겠어. (웃음) 저 사람이 참 고급이야. 우리는 딱 알겠더라고. 내용이 남반부의 천민자본주의 재생산이구나. 아주 재미있게 봤어. 일반 대중은 어렵지. 느닷없이 죽는 실향민이 김일성 장군 노래를 부른다던가. 일반 사람은 저 실향민이 미쳤나 싶은 거지. 그 사람은 여기 와서 삶이 성공한 사람도 아니고, 회한도 있을 거고. 옛날 사회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라 자기 회한인데, 남한 전체가 갖고 있는 회한이기도 하고. 누가 인권변호사를 저 따위로 그리냐 비난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게 스테레오타입이지 뭐. 인권변호사는 교접 안 하나. (웃음)

임상수 | 실향민 장면 같은 경우 황석영 선생의 <손님>을 언제 읽었는지 모르겠지만, 전에 읽었다면 제가 영향받은 것이고 뒤에 읽었다면 아, 선생님과 내가 비슷하구나 하는 걸 느꼈죠. 그리고 <오래된 정원>에서 윤희 아버지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실토하겠습니다.

황석영 | 그래도 내가 꼬마 때부터 영화 오래 봤잖수. 카메라 돌아다니는데 군더더기 없이 탁 넘어가는 게 의젓하더라고.

임상수 | 저는 황석영 선생의 의젓하다는 말씀이 최고의 찬사라고 알아듣고 있습니다.

황석영 | 임상수는 서사가 있는 홍상수야. 그게 근데 어려워. 임 감독의 대중적이지 않은 화법이 장사하는 데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 그런데 <바람난 가족>은 교접장면이 있어서 흥행이 됐겠지. (웃음) <그때 그 사람들>은 캐릭터가 분명하지를 않아. 감독이 좀 쫄은 거 같아. 뒤처리가 애매모호하고 두루뭉술하게 끝나더만. 김재규 캐릭터가 중요한데, 가령 서사도 서사 중심이 있을 텐데,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의 <Z>를 보면 이브 몽탕의 캐릭터를 중심으로 사람이 갖고 있는 생각을 줄거리로 쫓아서 반대쪽 견해라든가 폭력, 허위를 밝히는데 <그때 그 사람들>은 김재규의 캐릭터가 너무 애매모호하지 않았나 싶어. 난 그게 압력받아서 그런 거 같아. 이 영화가 정치권을 뒤집어놓고 시끄럽게 하지 않을까 걱정도 있었을 테고. 런던에 있었지만 영화 시사회를 한 뒤에 시끄런 잡음이 있었던 건 다 알죠. 영화 중간 부분까지는 잘 넘어가더라고. 세련된 스릴러를 보는 느낌인데. 근데 보니까 역시 권력 언저리엔 다 깡패새끼들이야.

임상수 | 핵심이 그거죠.

황석영 | 드라마 <제5공화국>도 보면 이게 웬 조폭영화인가 싶어.

임상수 | 그럼요. 군사독재를 보면 원조조폭이죠. 실제 조폭이 흉내내는 원형이 있는데 그게 3공화국 당시의 청와대죠.

황석영 | 지금 청와대는 안 먹혀.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을 위해 황지우가 싹싹 비는데도 모금을 안 해줘. 누가 높은 사람이 전화했대. 돈 좀 주라고. 그런데 더 돈을 안 주더래. 청와대까지 전화할 거 있습니까, 그러면서 더 안 주더래. 더 말 안 듣는 거지. 그런데다 (노무현 정권은) 권력이양까지 한다네. 저리 순진한지 몰라.

임상수 | 소설 좀 읽은 사람 치고 황석영의 소설을 안 읽은 사람은 없죠. 제가 황석영을 읽은 때는 <객지>가 처음 단행본으로 나왔을 때죠. <객지>를 읽으며 여자 서너명쯤 꼬신 거 같은데. 이거 좀 읽어봐 하고 말이죠.

황석영 | 그러면서 술마시고 토론해보자고 꼬시는 거겠지.

임상수 | 제가 술자리에서 황석영이 되는 거죠.

황석영 | 임 감독이 공부도 잘했지. 제일 다사다난할 때 학교 다녔을 거 아냐. <바람난 가족>을 보면서 그런 시선을 봤어. 옆다리니 남의 다리 긁는 거 같은데 그게 사실 우리의 자화상이거든. 차승재 대표가 원래 의리의 사나이거든. 어디 가서든 자기 사람 칭찬하는 데는 침이 마를 지경이야. 난 임상수가 누구인지 잘 몰랐는데, 영국에서 차승재 대표로부터 전화가 왔어. 임상수가 한다며 그랬더니 임상수가 힘이 있습니다, 실력이 있습니다 그래. 다른 누구에게 물어봤더니 임상수는 자기가 좋아하는 거만 합니다, 그래. 상반된 얘기가 있더라고. 임 감독 또래에서는 씹히는 거야. 한국에 와서 보니 소문이 그렇게 나 있더라고. 그래서 <그때 그 사람들>을 봤지. 그 이유를 알겠더라고. 부분부분 비약을 하는 자기만의 화술 때문에 잘 전달이 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싶었어. 난 보면 알겠는데. 우리도 그래. 문장 쓸 때 보면, 아 그리워서 미치겠다 발악해서 쓰지 않아. 그걸 이미지네이션으로 하거든. 비오는 텅 빈 플랫폼에 서 있는데 어떤 꼬마가 비닐우산 쓰고 저 구석에 서 있다라든가, 이렇게 바꿔서 표현하지. 요즘 젊은 작가들 문장을 보면 감수성이 있다고 그러는데, 옛날 일기장에 오늘의 명언 한 구절씩 들어가는 게 있다고. 보이스 비 앰비셔스. 뭐 문장이 그렇게 되어 있는 거야. 처먹여주지 않으면 모르나봐. 우리는 서로 ‘공중전’이 되는데 말이야.

임상수 | 공중전이라는 말은 선생님만이 쓰시는 어휘 가운데 하나죠? 소설 쓰시는 선생님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대중을 상대하는 작업인데, 우리 작가들의 영원한 딜레마란 그거죠. 선수끼리 통하는 대중과의 접점을 잃지 않으면서도 고도의 공중전을 벌여야 한다는 것.

 

황석영 | 한국영화는 관객이 조금 들었다고 자족하면 그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는 거야. 요즘 젊은, 이른바 뜬다는 배우들 봐. 영혼이 어디 있어. 걔네들 눈동자를 보라고. 관객도 좀 교육시켜야 한다고. 장사되는 영화 나오면 비슷한 게 10개가 한꺼번에 터져나오고. 한 영화에 1천만명씩 드는 거 보면 정신병이야.

임상수 | 저는 전후세대 전전세대라는 개념으로 한국의 상황을 얘기해보고 싶어요. 전전세대들은 한국전쟁 등을 겪으며 정신적 외상을 입었고 그걸 가슴속에 묻어두지 않으면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가령 김형욱의 자서전은 미국식으로 보면 당연한 거든요. 사실 고백해야지 상처를 잊을 수 있는데 전전세대는, ‘가슴속에 묻어두고 가는 거야 그게 사나이야’ 그런 태도가 있어요. <바람난 가족>에서 피를 아들에게 토하는 장면이 상징적인 게 <오래된 정원>과 <손님>에 나오는 문제의식과도 통해요. 영원히 그 외상을 가슴속에 담아두려니까 피가 썩을 수밖에 없는 거죠.

황석영 | <제5공화국> 보면서 이제야 광주에서 그런 일이 있다는 거 아는 사람들이 있어. 사람들이 드라마나 보고 마는 거지. 그게 한국 사람들의 교양의 척도야. <바람난 가족>은 특유의 고상한 은유가 있는데. 한국 천민자본주의의 자화상인 거지. 첫 장면 해골파는 게 무슨 소리인지 사람들은 모를 거야. 그렇게 형성된 거거든, 이 바닥이. 어느 구석을 가도 말야, 강남의 한 집안 얘기도 그렇고 말이야. 그 사람이 만주에서 밀정노릇하다 커서 양놈 밀정노릇하다가 중공군 포로심문관으로 컸거든. 각 지역의 사학설립자다, 토호다 하는 이들의 배경이 다 그래. 일제 때 순사를 해먹든 면장을 해먹든.

임상수 | 잔인하게 얘기하자면 한국 근대사의 역사가 비적질의 역사이고 그게 여기까지 온 거고.

황석영 | 정말 그래. 동학 이래 100년이 넘었어.

임상수 | 새 정권이 비적질은 안 한다고 그런 거 같은데.

황석영 | 그러니까 이빨이 다 빠진 거잖아.

임상수 | 그 기개는 훌륭한데 그 비적질의 역사를 단칼에 잘라낼 수가 있을지.

황석영 | 그래도 설거지는 해야 할 거 아냐. 그런데 저렇게 힘이 없어 어떻게 설거지를 하나 걱정스러워.

임상수 | 잘못되면 다시 비적질 역사로 회귀할 수 있는 거 아니냐 하시는 거죠.

황석영 | 그렇지. 난 제대로 영화화 기회를 만난 적이 없어. 팔자가 그래. <삼포 가는 길>도 이만희 감독이 말년에 간암이었고 그러니 영화할 정신이 아닌 거야. 다 못 만들고 죽었어. 나머진 제작자가 만든 거야. <오래된 정원>은 러브스토리로 당연히 가는 거지만 임 감독이 자기 방식대로 꾸려갈 거라는 생각이 들어. 이 소설의 주제는 시간이야. 개인의 삶과 역사는 시제가 원래 안 맞게 되어 있는 거야. 기대와 리얼리티는 다르게 전개되게 되어 있다고. 그게 우리의 운명이야. 돌이켜 다시 살 수 없는 거잖아. 중심은 일주일이야. 18년 만에 풀려난 오현우가 갈뫼(존재하지 않는 전라도의 산골마을. 오현우와 한윤희가 짧게 함께 살던 곳이다)로 갔다가 돌아오는 거. 그리고 갈뫼에 윤희가 남긴 편지에서 18년 동안 윤희의 또 다른 삶이 있는 거지. 둘은 연결이 안 돼 끝까지. 따로 간다고. 한 일본 평론가는 이 소설이 독자가 텍스트를 읽는 행위를 통해서 둘을 접촉시키고, 완성시킨다고 했지. 중심줄거리는 러브스토리지만 20세기를 돌아보는 거야.

임상수 | 선생님 소설 중 가장 좋아하는 단편이 <이웃사람>이에요. 선생님이 내면화된 폭력이 순간적으로 나오는 작품이라고 했는데 <바람난 가족>에서 애를 던지는 거, <눈물>에서 누군가가 성지루를 칼로 푹 찌르는 거, 그게 <이웃사람>한테 알게 모르게 영향받은 것이구나 싶어요. 전 황석영의 소설에 굶주려 있었으니까 <오래된 정원>을 나오자마자 봤죠. 왜 인간이 이렇게 숭고한 거냐, 이럴 수가 있나, 하고 조광희 변호사에게 전화했더니 세상에 너 같은 양아치만 있는 게 아니라 그런 숭고한 사람들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웃음) 처음부터 영화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황석영 | 오현우가 내 캐릭터는 아니에요. 내 친구들 모자이크 한 거야. 서준식을 좋아하는데, 지금 현재 우리 동시대 지식인에 그만큼 도덕적인 사람이 없어. 걔네 체험도 있을 거고. 주변 유학생 간첩단 사건이라든가. 김남주도 있고(그런 사람들이 소설 안에 녹아들어 있지).

임상수 | <그때 그 사람들>을 만들고 나서 보수신문에 융단폭격을 받아서, 이번에는 어머니 부탁도 있고 해서 적을 만들지 않는, 아름다운 러브스토리를 만들려고 합니다.

황석영 | 그럼. 인간의 얘기를 하면 돼. 난 임상수의 간접화법이 좋다고 생각해요. 카메라 워킹이 참 좋아요, 의젓하고. 모르는 쪽에서나 씹는 거야, 비약이 심하다 이거지.

임상수 | 다음 작품이 러브스토리라니까 칸에 온 외신기자들이 다 안 믿더라고요. 차승재 대표가 이 얘기를 하니까 그러대요. 웃기지마, <조선일보>랑 한나라당이랑 이 새끼 아직도 정신 못 차렸어 그럴 거라고.

황석영 | 정치적 격변 같은 거는 저 먼 곳에서 우레 울리듯 우르릉 배경으로 깔리게 하고 그 다음 그들의 회한과 아름다운 일상을 그리면 돼. 그렇게 만들면 눈물 빠질 거야.

임상수 | 80년대 운동했던 사람들이 이 책을 임상수가 영화화한다니까 다 읽은 거예요. 다 너무 울었다는 거야. 그러면서도 그들에겐 불편한 감정이 있어요. 왜 그런가 했더니, 한국인의 삶이라는 게 되돌아보지 못하고 계속 뛰어가는 성향이 있어요. 80년대가 소설로 다뤄지긴 했지만 <오래된 정원>이 비로소 집대성한 거죠. 왜 우리가 정리도 안 하고 뛰어온 건가, 정리했어야 할 일인데, 그런 점에서 <오래된 정원>이, 소설로 정리된 거지만 영화가 사람들이 더 많이 보니까, 영화라는 장르 통해서 분명하게 짚고 가야 하지 않겠나 그래서 이 영화하게 돼 영광이에요.

황석영 | 전부 다 회한으로, 저 가슴 밑에 꺼내고 싶지 않은 것들이니까.

임상수 | 선생님 작품 연보에서 드물지 않습니까, 러브스토리가.

황석영 | 내가 감옥에서 나와서 이제 드디어 자유의 공간이야. 옛날엔 복장도 서로 단속했어. 이 새끼 왜 이렇게 야하게 입어. 문인이 입는 옷과 자태가 따로 있어. 행복할 자유와 러브스토리 쓸 자유. 예전엔 사랑을 할 자유도 억압됐어.

임상수 | 망명생활 5년 하고, 감옥 5년이 선생님께 인간적인 그리움을… 선생님은 그리움보다는 더 강력한 사나이 같은 작품을 썼죠.

황석영 | 서정적 내면, 속살이 조금씩 들어 있어. 그게 강한 서사에 묻혀서 안 보이거든. 그게 처음으로 <오래된 정원>에서 속살이 드러나는 거야. 그러니 깜짝 놀란 거야.

임상수 | 강남에 사는 싱글 여성들에게 시나리오를 읽혔더니 얘기가 너무 올드하다, 왜 안 슬프냐, 왜 여자 한윤희가 팔자도 안 고치고 그렇게 사느냐고 하던데 이들을 모두 납득시키겠다는 게 제 원대한 꿈입니다.

황석영 | 납득보다는 구성이 중요해. 구성을 가지고 그 사람들 울릴 생각을 하면 돼.

임상수 | 원작에 충실하면 다 울게 돼요.

황석영 | 에피소드들 다 무시하고 새로운 버전으로 만들라고. 구도는 잡혔으니까. 사람의 얘기지, 뭐. 임상수로서도 새로운 전기가 될 영화야.

찻집에서 두 사람은 길고 긴 대화를 나눴다. 신자유주의, 제3세계 노동자의 서구 유입, 비정규직 노동자의 증가부터 제3공화국의 비화가 화제에 올랐다. 식당에서 ‘오십세주’를 반주로 곁들이면서 두 사람은 촬영감독, 차기작 등 구체적인 얘기로 들어갔다. 황석영 작가는 스스럼 없이 말을 놓으며 애정을 표했다.

황석영 | 세르게이 본다르추크의 <워털루>(1970)를 보라고. 그 사람이 워털루 싸움의 앞뒤 사흘로 나폴레옹의 정점과 몰락을 카메라로 어떻게 담아내나 보라고. 윌리엄 프레이커 감독의 <몬티 월쉬>(1970)를 또 봐. 그렇게 촬영감독이 중요한 거야. <오래된 정원> 촬영감독은 <바람난 가족> 때 같이 한 사람이랑 해.

임상수 | 김우형 촬영감독이 <그때 그 사람들>도 같이 했고 이번 작품도 김우형 촬영감독과 해요. 저는 양아치고 김우형이야말로 예술가죠.

황석영 | 그래 잘했다. 너 같은 양아치, 그러니까 아방가르드들은 예술가의 지도를 받아야 해.

임상수 | 제가 존경하는 작가로 이문구 작가가 있습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황석영 | 당신이 한국전쟁이 문학사에서 비어 있다고 했지만 이문구의 <관촌수필>이야말로 깊이와 연민이 있어. 내가 못하는 걸 이문구가 하고 이문구가 못하는 걸 내가 하지.

임상수 | 제가 <바람난 가족>의 서두에서 경찰이 유가족 대표의 멱살 잡는 장면을 가져온 게 어디냐 하면(“제가 민 게 아니고 대한민국 법이 민 겁니다”라고 경찰이 하니까 유가족 대표가 “이 멱살은 내가 잡은 게 아니라 대한민국이 잡았다”고 하는 부분) 바로 이문구 작가의 <우리 동네>였습니다. 아무도 모르더군요.

황석영 | 그래, 맞아.

임상수 | 훌륭한 작가의 에피소드를 훔쳐서 미안하기도 합니다만 엔딩 크레딧에 넣기도 그렇고.

황석영 | 그건 훔친 게 아니지. 영상언어로 다시 발견한 거지. 영화라는 게 고전이고 명작이고 한달이면 방구석에 틀어박혀서 모두 볼 수 있어. 하지만 소설은 수백년간 엄청나게 쌓아진 게 있지. 요즘 한국 문학의 위기니 하는데 그거 다 자가발전한 거야.

임상수 | 그렇죠. 평론가들과 신문들이 합작해서 만든 작가들은 수명을 다 했죠. 자기들이 불러온 위기죠.

황석영 | 그래, 그런 의미에서 우리 둘이 잃어버린 서사를 회복하고 담지하자는 선언이라도 하자. 사실 나 같으면 <바람난 가족> 그렇게 안 만들어. <대부>처럼 누아르로 만들지. 그게 천민자본주의 형성사 아냐.

임상수 | 선생님과 같이 하고 싶은 게 강남 형성사입니다. 변방이 어떻게 중심으로 바뀌는가. 천민자본주의는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사실, 선생님이 영화감독을 하셔야 되는데.

황석영 | 에이, 무슨. 내가 지금 태어나면 나도 영화감독 하지, 뭐 하러 읽지도 않는 소설 써. 그래 나도 하고 싶다. 내가 구술로 다 불러줄게. 내가 시놉시스도 다 써오고. 삼부작으로 만들자.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한잔 더를 외쳤다. 황석영 작가의 단골 술집에서 일산의 전망이 다 보였다. 통유리 바깥으로 비가 쉬지 않고 내렸다. 말솜씨 좋은 감독 가운데 손꼽히는 임상수 감독은 작가에 대한 애정 때문인지, 기가 밀려서인지 ‘라디오’를 다소곳이 듣기만 했다. 3차에 와서야 그는 술기운을 빌려 라디오와 공정한 대담을 하기 시작했다. 황석영 작가와 임상수 감독은 서로에 대한 애정을 확인하며 한국영화의 서사를 회복하자는 다짐을 하며 헤어졌다.

임상수 | 제 각색의 원칙은 이겁니다. 한윤희의 베를린 생활, 오현우의 감옥 생활을 뺀다. 그리고 윤희를 만나기 전까지의 오현우의 운동권 생활, 위장취업도 다 뺀다는 겁니다.

황석영 | 어, 그래 마음대로 해.

임상수 | 실제 배우 나이는 중요하지 않을 거 같아요. 20년 세월 뛰어넘는 연기이기는 하지만.

황석영 | 이병헌이 오현우를 하면 어떨까. <올인> 보니까 얘 눈이 촉촉한 게 있어.

한겨레(07. 01. 03) 서정시가 불가능한 시대의 연가(戀歌)

그런 시절이 있었다. 누워서 침 뱉거나 재갈 물고 침 흘리거나. 눈 질끈 감고 제 몸 불사르지 않는 한 누구나 그래야 했다. 그게 살아남은 자들의 ‘예의’였다. 정말이냐고. 1980년대, 한국이 그랬다. 그때는 ‘서정시를 쓰기 힘든’ 또 하나의 시대였다. “처녀들의 젖가슴은 예나 이제나 따스한데”, “왜 나는 자꾸 40대의 소작인 처가 허리를 꾸부리고 걸어가는 것만 이야기하는가”라는 물음조차 죄악이었다. 임상수 감독의 <오래된 정원>은 묻는다. 한 세대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죄의식 아니면 무용담으로 남아 있는 이분법의 80년대를 향해. 정말 사랑조차 그 시대엔 몹쓸 짓이었냐고.

황석영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오래된 정원>은 장기수였던 한 남자가 출소한 뒤 사랑했던 한 여자의 흔적을 되짚어가는 과정을 따른다. 군부독재에 반대하던 20대 사회주의자 현우(지진희)는 16년8개월 만에 세상을 활보할 자유를 얻는다. 그러나 어느새 하얗게 세어버린 머리카락처럼 그를 둘러싼 세상 또한 현기증이 날 정도로 변해 있다. 한때 목숨을 걸었던 동지들은 “인생은 길고 혁명은 짧다”고 탄식하며 주먹다짐을 하고, “누가 뭐래도 난 아들 편”이라던 어머니는 떵떵거리는 억대 복부인이 되어 늙은 아들에게 고기쌈을 내민다.

변해버린 세상, 변하지 않는 것이 무엇일까. 가슴에 품고 있던 단 한장의 증명사진을 들고 현우가 윤희(염정아)를 찾아 떠나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윤희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지만, 현우는 그녀와 나눴던 짧은 사랑의 파편들이 흩어져 있는 갈뫼로 향한다. 도피 생활 중에 자신을 “숨겨주고, 재워주고, 먹여주고, 몸도 줬던” 윤희를 떠올리는 동안 그는 자신이 수형 생활을 했던 16년8개월이 그녀에게 더한 포박의 세월이었음을 깨닫는다. 감옥에서의 시간을 인내하게 했던 것이 싸늘하게 식어버린 신념이 아니라 아직도 끓고 있는 사랑이었음을 또 감지한다.

그렇다고 임상수 감독이 지고지순한 사랑 예찬론을 펼치진 않는다. 대신 영화는 ‘오만’을 부려서라도 시대의 악몽을 제발 좀 떨치라고 말한다. 과거를 들먹이며 현재를 방기하지 말라고 나직하게 충고한다. 이러한 처방전은 감독의 전작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현우는 존재를 알지 못했던 자신의 딸을 만난다. 그리고 딸로부터 어떤 화해보다 ‘쿨’한 제안을 받는다. “이젠 헛게 다 보이네”라는 현우의 독백은 역사든, 사회든, 가족이든, 거대한 권위의 감염된 상처들은 개인만이 치유할 수 있다고 믿는 그만의 윤리처럼 보인다(덧붙여 김우형 촬영감독이 든 카메라 움직임을 눈여겨보시라).(이영진기자)

07. 0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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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벌의 언어 - 이재룡의 문학 이야기
이재룡 지음 / 현대문학 / 2007년 4월
품절


프랑스인, 영국인, 독일인이 각각 낙타에 대한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프랑스인은 대뜸 근처 동물원으로 달려갔다. 반 시간가량 낙타에게 빵을 던져주고, 우산으로 쿡쿡 찔러보기도 하고, 동물원의 수위에게 몇 마디 질문도 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저녁나절에 낙타에 대한 재치만점의 자극적 기사를 휘갈겨 신문사에 보냈다.-7쪽

영국인은 홍차를 챙긴 배낭과 편안한 야영도구를 짊어지고 사막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삼년간 체류하며 낙타에 대한 두툼한 보고서를 작성해서 학회에 제출했다. 체계도 없고 결론도 없는 무질서한 글이지만 자료적 가치가 풍부한 보고서였다.-7쪽

한쪽 기사는 경박하고 다른 보고서는 보편적 개념을 담지 못했다고 비웃으며 독일인은 몇 년 동안 도서관에 처박혀 '자아 개념에 입각한 낙타에 대한 개념들'이라는 세 권 분량의 저서를 완성했다. 도서관에서 쓴 그의 저서는 곧바로 다시 도서관 서고에 들어갔다. -7-8쪽

똑같은 과제를 받은 한국인은 어디로 갈까? 동물원, 사막, 도서관에 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눈앞의 컴퓨터에 검색어 '낙타'를 친 뒤 15분 만에 깨끗한 파일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다시 인터넷에 올라간 파일은 통신망을 타고 순식간에 퍼졌다. 입심에만 의존한 재치만점의 화려한 수사학, 체계는 없지만 고지식한 경험론, 낙타와는 무관한 관념론을 적당히 버무리고 사진, 만화, 소리까지 곁들인 동영상이 담긴 파일은 인터넷 최강국에서는 누구나 쉽게 만들어낼 수 있다.(...) 모든 언어를 관장하는 메타언어 '검색'은 우리에게 이제 익숙한 단어이다. 경험주의, 관념주의를 지난 세기의 사유방식이라 비웃는 검색주의가 우리의 이데올로기이다. -8쪽

그러나 조금만 기억을 더듬어보면 검색이란 단어는 별로 유쾌하지 않은 체험과 연관된다. 잠시 검문검색이 있겠습니다, 라는 말에 공연히 가슴 졸였던 시절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때 지구상에서 가장 잦은 검색을 당했던 민족이었다. 속된 말로 많이 맞아본 뒤에 제대로 때릴 줄 알게 된 것이다.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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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을뭐라하지 2007-06-17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흥미롭군요-

마늘빵 2007-06-17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나온 책이죠. 관심가던데.

기인 2007-06-18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대단한데요. :)

로쟈 2007-06-18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익한 산문집입니다.^^

곰탱이 2008-01-28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거의 블로깅하는 과정과 흡사합니다. 흥미롭네요 ㅎㅎ

미지 2010-06-12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재밌겟는데요, 저도 읽어봐야겠습니다.
 

서재일이란 게 주말과 휴일에 오히려 일이 더 많다. 많은 걸 보류하고 생략하더라도 몇 개의 페이퍼 거리는 꼭 남기 마련이다. 얼마전에 나온 'How To Read' 시리즈에 대한 가장 '도발적인' 리뷰를 옮겨오는 것도 그런 거리의 하나이다. 필자가 현직 편집장인지라 인문 시리즈에 대한 '감각'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리뷰이다. 

컬처뉴스(07. 06. 15) 역사상 가장 도발적인 사상과의 만남

다른 편집자들은 모르겠지만, 직접 책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내가 가장 해보고 싶은 작업 중 하나는 세계 유명 사상가들의 사유를 알려주는 입문서 시리즈를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런 시리즈가 나올 때마다 꼭 챙겨보곤 하는데, 특히 내가 주목해 보는 것은 ‘의심의 거장들’이라고 불리는 칼 맑스, 프리드리히 니체,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각각의 시리즈가 어떻게 다루고 있느냐이다(‘의심의 거장들’이라는 유명한 표현은 프랑스의 철학자 폴 리쾨르가 자신의 1965년 저서 『해석에 관하여: 프로이트에 관한 에세이』에서 처음 이들에게 붙여준 것이다).

내가  ‘의심의 거장들’을 다루고 있는 방식을 눈여겨보는 첫 번째 이유는 개인적인 이유다. 최소 열 명 이상을 다루고 있는 각 시리즈의 모든 책을 매번 다 읽을 수 없는 나로서는 몇 권만 집어들 수밖에 없는데 이왕 집어들 거면 맑스, 니체, 프로이트를 집어든다. 즉, 이 3인방은 이들과 관계된 책이라면 무엇이든 집어들만큼 내가 좋아하는 사상가들이다.

두 번째 이유는 제법 학문적인, 그러나 당연히 주관적이기도 한 이유인데, 나는 ‘의심의 거장들’이라는 데 그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는 이들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시리즈라면 다른 사상가를 다룬 수준도 뻔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이 ‘의심의 거장들’을 어떻게 다루고 있느냐는 내게 해당 시리즈의 수준을 가늠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인 셈이다.



“우리 시대 교양인을 위한 고품격 마스터클래스”라는 문구와 함께 첫선을 보인 “HOW TO READ”(웅진지식하우스) 시리즈를 보는 내 관심도 바로 여기에 맞춰져 있다. 내가 즐겨 사용하는 이 리트머스 시험지는 삼단, 즉 "누가 썼는가", "잘 썼는가", "쉽게 썼는가"라는 기준으로 이뤄져 있는데 각 단을 모두 빨간색으로 변색시키면 합격이다.

먼저 ‘“누가 썼는가”. 이 시리즈의 맑스, 니체, 프로이트 편은 각각 피터 오스본, 키스 안셀-피어슨, 조시 코언이 맡았다. 국내에 소개된 바 있는 인물은 안셀-피어슨이 유일하나, 이들은 모두 자기 분야에서 한몫을 단단히 하고 있는 젊은 연구자들이다(오스본은 1958년생, 안셀-피어슨은 1960년생, 코언은 1970년생).

특히 오스본은 이런 입문서의 필자로 먼저 소개되는 게 안타까울 정도인데 그의 주저 『시간의 정치학: 모더니티와 아방가르드』(1995)와 『문화이론에서의 철학』(2000)도 곧 소개되기를 바랄 뿐이다. 안셀-피어슨의 경우도 마찬가지. 그는 국내에 들뢰즈 연구(『싹트는 생명: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로 먼저 알려졌지만, 사실 영미권의 떠오르는 니체 번역자(대표적으로는 『도덕의 계보학』 등)이자 연구자이다. 그가 쓴 니체 연구서만 해도 『니체와 근대 독일철학』(1991), 『니체 대 루소: 니체의 도덕/정치사상 연구』(1991), 『새로운 니체의 운명』(1993), 『정치사상가로서의 니체 입문: 완벽한 니힐리스트』(1994) 등 네 권에 달한다.

가장 의외의 인물은 코언이다. 물론 영미권 대학 중 정신분석학을 정식 학과로 두고 있는 대학이 거의 없다는 실정을 감안해도, 코언은 영미 포스트모던 문학, 특히 레이먼드 카버와 폴 드 만 전공자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아우슈비츠라는 트라우마에 천착하는 ‘수용소 문학’을 연구 중이다(실제로 그의 최근작은 『아우슈비츠에 끼여들기: 예술, 종교, 철학』이다). 그러나 전공보다 부전공에 더 강한 인물이 꽤 있고(가령 『제국』으로 유명한 안토니오 네그리는 정치철학자이기 전에 법학자였다), 그가 꾸준히 연구성과를 발표하고 있다는 점은 사실이니 일단 이 시리즈의 필자 선택은 빨간색.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가장 중요한 건 두 번째 기준, 즉 “잘 썼는가”이다. 내 관심을 염두에 둔다면, 여기서 “잘 썼는가”라는 질문은 이들이 ‘의심의 거장들’에게 “그 명성에 걸맞은 대접을 해줬느냐”라는 질문과 같은 것이다. 각각 1883년, 1900년, 1939년에 죽은 맑스, 니체, 프로이트를 오늘날에도 여전히 ‘의심의 거장들’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일부 사람들은 그냥 버릇처럼 그렇게 부를 뿐이라고 해도, 이들의 의심이 여전히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시사해 주기 때문이다. 그도 아니라면 이들이 제기한 의심에 우리가 여전히 속시원한 답변을 못 내리고 있기 때문이거나. 그렇다면 이들에게 걸맞은 대접이란 이들의 의심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 의심의 유효성(그도 아니라면 함의)을 밝혀주는 것이리라.

그런데 도대체 이들을 한데 묶어 ‘거장’이라고 칭할 수 있게 한 그 의심은 무엇일까? 우리는 이 별명의 창안자인 리쾨르의 언급을 참조할 수 있을 것이다. 리쾨르가 보기에 이들은 자본주의가 됐든, 도덕이 됐든, 의식이 됐든 연구 대상의 겉모습을 꿰뚫고 들어가 “진정한 세계, 새로운 진리 영역의 지평을 밝혀냈다”. 또한 이들은 의심을, 비판을 위한 비판의 수단이 아니라, 새로운 “해석의 기술”로 만들어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회의의 대가들’이 아니라 ‘의심의 대가들’이라는 것이다.

리쾨르의 이런 언급을 염두에 두고 본다면 가장 돋보이는 것은 맑스 편이다. 오스본은 『자본』 제1권의 “상품의 물신적 성격과 그 비밀”(제1장 4절)을 첫 번째 발췌문으로 골랐는데, ‘상품 물신주의’에 대한 오해를 지적하며(오스본에 따르면, 맑스가 말한 상품 물신주의란 상품에 대한 욕망의 고착화가 아니라 생산의 사회적 관계, 노동과 가치의 이중적 성격 등을 은폐하는 환상을 지칭한다), 맑스가 상품처럼 단순해 보이는 것에서 어떻게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동학을 읽어내는지 설명하는 부분은 무릎을 탁 치게 만들 정도다. 요컨대 맑스는 ‘노동의 산물인 하나의 물리적 객체’라는 상품의 겉모습을 의심함으로써, 상품의 사회적 의미를 드러내는 그만의 해석체계, 즉 ‘정치경제학 비판’을 창안했다는 것이다.

물론 안셀-피어슨과 코언 역시 니체와 프로이트의 ‘의심’이 어떻게 “진정한 세계, 새로운 진리 영역의 지평”을 밝혀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더 말하면 스포일러가 난무하게 될 테고, 내게 허락된 지면도 줄어들고 있으니 이쯤에서 이만. 아무튼 그래서 두 번째 빨간색.

마지막으로 “쉽게 썼는가”. 사실 이 문제는 좀 복잡하다. HOW TO READ 같은 해외 시리즈의 경우, 번역의 문제(더 나아간다면 담당 편집자의 교정교열 능력이라는 문제까지)가 중첩되어 있기 때문이다. 번역의 경우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옮길 수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아무튼 먼저 각 책의 원문을 보건대 필자들은 자신들이 다루는 해당 사상가들의 저작 중 핵심적인 부분을 직접 읽는다는 이 시리즈의 취지를 잘 따른 듯하다. 그 ‘핵심적인 부분’이 그리 길지도 않고, 그 발췌 부분을 중심으로 각 사상가의 삶과 사유를 명쾌하게 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은 아무래도 이 시리즈의 책임편집자 사이먼 크리칠리(그 역시 1960년생으로서 촉망받는 연구자이다)의 공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편 번역의 경우도 별다른 문제없이 술술 읽힌다. 인터넷서점의 한 독자서평에 의하면 데리다 편의 번역은 좀 의아한 면이 있지만(*한 독자는 '로쟈'인 듯하다), 그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사상가들을 다룬 책들도 적절한 번역자를 만난 듯싶다. 특히 셰익스피어 편을 옮긴 이다희(그는 셰익스피어 전집을 번역 중이기도 하다), 히틀러 편을 옮긴 안인희(그는 히틀러 평전을 옮긴 바 있다)는 믿을 수 있는 번역자이다. 아무튼 그래서 또 빨간색.

정리하자면, 관심 있는 분들은 꼭 자신이 좋아하는 사상가를 골라 이 시리즈의 한 권을 찾아볼 것은 권유하는 게 내 결론이다. 이 시리즈의 또 다른 장점은 저렴한 가격(9,000원)에 고급 사양(표지나 본문 디자인이나 얄미울 만큼 깔끔하다)이라는 데 있다. 다만 아쉬운 건 이 시리즈 역시 국내 기획물이 아니라는 점. 언제쯤이면 우리는 우리 손으로 만든 이런 시리즈를 갖게 될 수 있을까?(이재원/ 그린비 편집장) 

07. 06. 17.

P.S. 이 시리즈에 대해서는 나도 진작에 언급을 해둔 터이고 몇 개의 페이퍼를 올리기도 했다. <마르크스>와 <니체>는 몇 장씩 훑어보았지만 저자가 가장 생소했던 <프로이트>는 아직 들춰보지 못했었는데, 필자의 '뒷조사' 덕분에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게 됐다(단, 한 가지 착오가 있는 듯한데, '폴 드만' 연구자는 조시 코언이 아니라 톰 코언이다). 한데, 이 리뷰를 굳이 '세계의 책'으로 분류해놓은 것은 '국내 기획물이 아니라는 점'을 고려해서가 아니라 아직 번역/소개되지 않은 책이 조만간 햇볕을 쐬었으면 하는 바람에서이다. 가장 첫손에 꼽을 만한 책은 필자도 언급하고 있는 피터 오스본의 <시간의 정치학>(1995)이고 사실 이건 최근에 내가 읽기 시작한 책이기도 하다(이미지가 뜨지 않아서 그냥 <마르크스>로 대체했다).

더불어 꼽자면 <프로이트>의 저자 조시 코언의 <아우슈비츠에 끼여들기: 예술, 종교, 철학>(2003). 아우슈비츠에 관한 아감벤과 바우만의 책들과 함께 읽어볼 만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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