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에 나온 책들의 '라인업'을 보고서 가장 먼저 구입을 결정한 책 두 권은 영화평론가 김영진의 <평론가 매혈기>(마음산책, 2007)와 미국의 저널리스트 로버트 카플란의 <지중해 오디세이>(민음사, 2007)다. 관련 리뷰를 찾다가 카플란과의 인터뷰 기사가 눈에 띄기에 옮겨놓는다(역시나 조선일보에서 크게 다루고 있다). '극우 보수파'란 비판도 많이 듣는 듯하지만 좌우야 어찌됐던 간에 탁상공론파들과는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점이 그의 강점이다. 얼마전에 나온 <제국의 최전선>(갈라파고스, 2007)을 손에 들어보기도 전에 또다른 신작이 나온 것이어서 뻘쭘하긴 한데, 마침 '그리스 읽기'를 관심테마로도 정해놓은 터여서 <지중해 오디세이>를 먼저 들여다볼 것도 같다. 원로 영문학자 이상옥 교수가 번역을 맡은 것도 특기할 만하다.   

  • 조선일보(07. 09. 22) "국가 경영의 도덕적 책무는 개인의 도덕성을 넘는다”

    로버트 카플란(Robert Kaplan·55)은 골방에서 글을 쓰고 있었다. 그를 만난 건 9·11 다음날 미국 메릴랜드 주도(州都) 애나폴리스의 해군사관학교 바로 앞 작은 집에서였다. 안온한 초가을 서정이 내려 앉은 집 바깥과 달리, TV·침대 말고 살림살이라곤 없는 집이 휑뎅그렁했다. 해사 방문 교수인 그는 해사 측이 마련해 준 이 집에 강의가 있는 매주 이틀만 머문다고 했다.



    ‘신보수주의자(neo-con)’로서 왕성한 저술 활동을 펼치고 있는 그는 분쟁지역 현장 취재를 바탕으로 국제문제에 대한 분석과 예측을 내놔 주목 받았고, 미국의 군사·외교 정책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궁금하다면 카플란을 읽으라”고 했고, “카플란에 매료된 조지 부시 대통령이 별장까지 그의 저서 ‘타타르로 가는 길’(Eastward to Tartary)을 가져가 읽었다”는 얘기가 있었다.

    ‘승자학’(Warrior Politics)은 뉴트 깅리치 미국 전 하원의장이 “9·11 이후 미국의 대응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려면 필독하라”고 권했다. ‘발칸의 유령들’(Balkan Ghosts)은 유고슬라비아 전쟁(1991~2000) 당시 빌 클린턴 대통령의 보스니아 군사 불개입 결정에 영향을 끼쳤다는 얘기가 백악관에서 흘러 나오고, 클린턴이 겨드랑이에 끼고 있는 게 목격되면서 판매에 불이 붙었다.

    한때 ‘극우 국수파’ ‘주전론자(主戰論者)’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던 그는 ‘월간 애틀랜틱(Atlantic Monthly)’ 편집장을 지냈고 현재도 해외통신원을 맡고 있으며 뉴욕 타임스, 월 스트리트 저널, 워싱턴 포스트, 포브스에도 칼럼을 써왔다.

    이번 주 번역 출간된 ‘지중해 오디세이’(Mediterranean Winter·민음사)에서 그는 “2류 대학(코네티컷 주립대 영문과) 나와 대도시 신문사에 지원했다 계속 낙방해 버몬트의 허름한 지방 신문사에 다니다 사표 내고 지중해 여행을 통해 미래를 설계했다”고 털어 놓았다. 이스라엘 주둔 미군에서 1년간 복무했고, 그 뒤 동유럽·중동과 특히 에티오피아·아프가니스탄·이란·이라크·우간다·수단·시에라리온 같은 분쟁 지역을 찾아 다녔다.



    ―스물 셋에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유럽행 편도 비행기만 끊어 훌쩍 떠날 당시 무슨 생각이었나? 그래서 쓴 ‘지중해 오디세이’는 어떤 책인가?

    그땐 젊었고 색다른 방랑을 원했다. 당시의 취재와 기록이 저널리스트로서 밑바탕이 됐다. 나로선 열 번째 책이고, 정치색을 띠지 않은, 드물게 사적(私的)인 순수 여행서다. 기억과 기록으로 썼는데, 점차 뇌리에서 잊혀져 가고 있어 기록해 놓길 잘 했다고 생각한다.”

    ―이스라엘에서의 군 복무 경험이 이후 삶에 많은 영향을 준 것 같다.

    병영 체험은 좋은 것이고, 그것이 나를 현실주의자로 이끌었다. 그곳에선 모두가 군 복무를 했고, 안보 상황이 무척 생생했다.”

    ―당신의 저서들에는 미래를 예측하는 대목이 많다. 누구를 또는 무엇을 단골 정보원 삼는가?

    “많이 읽고 많이 만난다. 미래를 예측하는 데 독서가 가장 쉬운 방법이다. 미래는 반복되지 않지만, 역사를 알수록 예측은 쉬워진다.”

    ―당신은 도발적인 글로 종종 세상을 달궜다. ‘미국 정치·경제적 지도자들은 기독교 윤리를 내팽개쳐라’ 같은 주장이 그렇다.

    개인적인 도덕성과 회사 또는 나라를 경영하는 데 필요한 도덕적 책무는 구분돼야 한다. 더 큰 선(善)을 생각해야 하고, 개인적 도덕성을 뛰어 넘어야 한다. 저술가로서의 배짱(guts)이란 것이 즐거운 건 아니지만, 무얼 쓰더라도 비판을 각오해야 한다. ‘내가 이걸 왜 쓰는가’를 상기해야 한다. 남을 의식하고 조종 받을 바에 뭐 하러 쓰는가? 익명의 블로거·네티즌 공세가 최악인 이 시대에도, 책은 여전히 영향력이 있고 정의를 위해 존재한다.”

  • ―당신을 가리켜 국익 우선론자라고도 한다. 군대의 보호 속에 종군 취재를 하도록 한 미 정부 취재 방침(embedding program)을 옹호하며 ‘기자이기 앞서 한 나라의 국민이어야 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기자이자 미국 시민이다. 기자는 중요한 존재(somebody)다. 보통의 저자라면 진실만 전하면 되지만, 기자라면 자신의 관점을 전하는 것이고 그것은 미국 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함께 보여준다는 의미다.”

    ―지난해 10월 ‘북한이 무너진 뒤(When North Korea Falls)’라는 칼럼을 월간 애틀랜틱에 게재해 화제를 일으켰다.

    칼럼 쓰기 앞서 한국사를 공부했고, 한국을 방문해 취재도 했다. 어딜 가든, 그에 앞서 그 지역 역사를 먼저 공부한다. ‘지중해 오디세이’ 때도 마찬가지로, 무작정 길을 나섰지만 그 전에 지중해 연안국 역사를 축적해 놓았다. 과거의 기록을 제대로 읽으면 현재의 풍광이 더 잘 보인다는 게 지론이다. 북한은 일반의 인식과 달리 이성적이다. 미사일 위협을 통해 긴장 상황을 만들고 미국과 1대1 협상을 하려는 건 고립된 북한 입장에서 매우 영리한 전략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졌던 한국인 인질 사태를 어떻게 보는가?

    “국제 협력에 있어 문제가 있었다고 본다. 인질 사태에 관해선 국제적 공조가 중요하다.”

    ―미국은 제국으로서 정점에 올라 내리막길이 불가피하고, 중국은 통일 한국(Greater Korea) 시대 아시아의 유력한 승자가 될 걸로 내다봤는데.

    “미 제국이 쇠락할 것은 확실하다. 다만 그 시기가 언제일지 알 수 없다. 제2차 대전 후 미 해군이 사실상 지배했던 태평양만 해도 한·중·일·호주 해군이 강화돼 다극화 체제가 굳어가고 있다. 통일 한국은 식민역사 때문에 일본과 긴장 상태가 유지될 것이고, 정서적으로 중국과 가까워질 것이다.”

    ―두터운 고정 독자를 가진 작가로서 인기 비결은?

    “나는 어떤 누구도 만족시키려 글을 쓰지 않고, 절충자(gap-filler)가 될 생각도 없다. 이라크에 국한하지 않고 다른 저자가 건드리지 않은 세계의 모든 현안을 쓰려고 한다.”



    ―앞으로 저술 계획은?

    “2년 전 낸 ‘제국의 최전선(Imperial Grunts: The American Military in the Ground)’ 속편을 막 마쳐 가제본이 나왔다. 이제 다른 주제로 쓸 계획이다.”

    ―스스로의 기록과 장서가 방대할 것 같다. 글을 쓰는 서재를 어떻게 관리하는가?

    “매사추세츠 스탁브리지 내 서재는 산과 숲을 앞에 둬 정경이 빼어나다. 크지는 않지만 책과 동양에서 갖고 온 카펫들로 가득한 아늑한 공간이다. 책은 수천 권 있는데, 그리스·터키·중앙아시아 식으로 지역별로 자료를 분류해 뒀다. 어떤 주제를 쓸까 궁리할 때 항상 지도를 먼저 본다.”

    ―글은 하루 중 언제 쓰는가?

    “아침형 인간(morning person)이다. 아침 5시에 일어나 뉴스나 이메일이 쇄도하기 전까지 집중해서 쓴다.”(박영석 기자)

    07. 0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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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딸기 2007-09-29 00:12   좋아요 0 | URL
    카플란의 새 책이 나왔다고 해서, 어쨌든 보기는 해야겠네, 하고 있었는데...
    저 인터뷰는, 카플란의 글에 대한 제 느낌이나 생각거리와는 너무나너무나 동떨어져 있군요.
    로쟈님은 카플란의 세계관을 어떻게 보시나요.

    로쟈 2007-09-29 00:25   좋아요 0 | URL
    김훈을 떠올리게 됩니다.^^ 강대국과 약소국의 차이가 있지만...
     

    그리스 읽기를 위한 몇 권의 책.


    18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정신의 발견 : 서구적 사유의 그리스적 기원
    브루노 스넬 지음, 김재홍 옮김 / 까치 / 2002년 3월
    20,000원 → 18,000원(10%할인) / 마일리지 1,000원(5% 적립)
    2007년 09월 22일에 저장
    구판절판
    헬라스 사상의 심층
    박종현 지음 / 서광사 / 2001년 11월
    20,000원 → 18,0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3%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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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인들의 신화와 사유
    장 피에르 베르낭 지음, 박희영 옮김 / 아카넷 / 2005년 8월
    28,000원 → 26,600원(5%할인) / 마일리지 1,400원(5% 적립)
    2007년 09월 22일에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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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 사유의 기원
    장 피에르 베르낭 지음, 김재홍 옮김 / 길(도서출판) / 2006년 3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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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일보의 '글로벌 책읽기' 코너에 <뉴로맨서>의 작가(이자 <코드명 J>의 원작자) 윌리엄 깁슨의 신작 소설이 소개돼 있기에 옮겨놓는다(찾아보니 지난 8월에 나온 최신작이다). '세계의 책'에 올려놓지만 조만간 번역돼 나오지 않을까 싶다.

    중앙일보(07. 09. 22) [글로벌책읽기] 테러 공포·미래 불안 … 미국은 `유령의 나라'

    미국은 현재 유령의 나라다. 사이버스페이스라는 말을 만들어낸 것으로 유명한 윌리엄 깁슨의 신작 소설에 의하면 그렇다. “미래는 이미 와 있다”고 선언한 그는 과학소설이야말로 문학이 가진 전복적 힘을 잃지 않고 있다고 믿는다. 그는 말한다. “나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현재를 그리려고 한다. 과학소설이 쓸모가 있다면 그것은 인류가 나아갈 미래의 방향을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탐사하는 것이다. 지구는 이미 외계 행성이다.”



    공상과학소설가인 저자가 공상적 미래가 아닌 2006년의 미국을 배경으로 쓴 이 소설은 미국이 처한 방향 상실과 정체성 혼란을 잘 형상화하고 있다. 중심적 인물 없이 세 겹의 스토리라인이 서로 뒤엉키고 결말조차 열려있어 줄거리를 요약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만 주요 등장인물을 중심으로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홀리스는 전직 인디 락 밴드의 가수였지만 현재는 창간되지도 않은 잡지 ‘노드’의 프리랜서 기자다. 그녀에게 오밤중에 떨어진 취재 목표는 새로이 등장한 ‘위치예술’이다. 하지만 나중에 드러나는 실제 취재 목표는 뱅쿠버에 도착하는 정체불명의 화물 콘테이너의 위치다. 취재를 명한 막후 인물은 광고 재벌 빅 엔드로서 현재의 미국을 움직이는 유령같은 권력을 상징한다. 비정규직 기자가 존재조차 불확실한 잡지를 위해 아리송한 대상의 취재에 나서는 것이다.

    두 번째 스토리 라인은 CIA 요원으로 간주되는 브라운과 그에게 인질로 사로잡힌 마약중독자 해커 밀그림이 만들어간다. 브라운은 마약과 위협으로 밀그림을 조종해 그가 가진 KGB의 암호화된 인터넷 기술로 쿠바와 러시아 커넥션을 감시하며 콘테이너를 추적한다.

    한편 러시아에서 첩자 훈련을 받고 현재 미국에서 암약중인 쿠바-중국 정보마피아의 일원인 티토는 스파이 세계의 현란한 기술적 판타지를 보여준다. 아프리카 토착 종교의 믿음을 간직하고 있지만 카톨릭을 가장하고 있는 그는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자유를 향한 인간의 탐구를 대변한다.

    이 세 가닥의 이야기를 얽어매는 것은 온갖 종류의 최첨단 과학 용어들과 장비들을 현란하게 운용하면서 벌이는 추격전이다. 거기다 로스엔젤레스·뉴욕·뱅쿠버를 왕복하는 공간 이동을 통해 미국 전체의 문화적 지도를 정치지리학적으로 그려낸다. 첨단 정보기술에 관한 세부 묘사는 과학기술의 진보가 세상을 바꾸는 힘임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하지만 깁슨이 이러한 힘의 세계와 의미심장하게 대비시키는 것은 ‘위치 예술’이다. 위치 예술이란 특정 장소에서 특정 안경을 써야만 작품이 보이는 예술을 말한다. 사이버스페이스가 공간과 시간의 차이를 무화시켰다고 해서 주체적 시점의 고유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깁슨은 지구적 시장단일화가 세계관의 모델로 제시하고 있는 사이버스페이스의 일원화에 반대해 지리적 고유성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 ‘매트릭스’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합친 듯한 이 소설은 현재의 미국 문명에 대한 준엄한 비판으로 읽힌다. 테러 공포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방향 감각을 상실한 미국인들은 현재 출구 없는 미로 속에 갇혀 있고 유령들만이 활개치고 있다는 것이다. 소설의 원제 ‘유령의 나라(Spook Country)’에서 Spook는 유령이란 뜻이지만 스파이를 의미하는 속어이기도 하다.(이영준/ 문학평론가)

    07. 0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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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람혼 2007-09-25 03:25   좋아요 0 | URL
    안 그래도 윌리엄 깁슨의 신작 소식을 접하고 이곳 로쟈 님의 서재에서 그에 관한 소식을 다시 접할 것이라 예상하고 있던 터입니다.^^ 기사 감사합니다. 풍성한 한가위 되시길~!

    로쟈 2007-09-25 10:10   좋아요 0 | URL
    제가 그 정도로 발이 빠른 건 아니고 우연히 소개기사를 읽었을 뿐입니다.^^; 람혼님도 편안한 연휴가 되시길...
     

    이번주 한겨레에 게재된 '로쟈의 인문학 서재'를 옮겨온다(http://h21.hani.co.kr/section-021162000/2007/09/021162000200709200678067.html). 이번이 세번째 연재인데, 매번 '초읽기'에 내몰려 쓰는 바람에 한두 가지씩 아쉬움을 갖게 되지만 그만하면 선방('선빵'이 아니라)이라고 자위하는 편이다. 이 글도 미처 주문했던 원서가 도착하기 전에 씌어진 것이다(책은 원고를 보내고 수시간 뒤에 받았다). 그런 식으로 글은 자신의 운명을 갖는다. 아무리 짧은 글이더라도.

    한겨레21(07. 09. 20) 부시 안에 빈라덴이 있다

    20세기가 10월 혁명과 함께 시작했다면 21세기는 9월 테러와 함께 막이 올랐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났다. 이 스펙터클 어드벤처 뺨치는 테러사건과 그에 뒤이은 반테러 전쟁 때문에 현생 인류가 평온하게 지내기는 이번 세기도 이미 글러먹은 듯하다. 6주기를 맞이하여 백악관은 이렇게 말했다. “테러와의 전쟁은 군사적인 대결을 능가하는 것으로, 21세기의 중대한 이념투쟁이다.” 그리고 영국의 국제전략문제연구소는 이렇게 보고했다. “국제 테러조직 알카에다를 완전 소탕하려면 앞으로도 수십 년이 필요하다.” 종합하면, 21세기의 이 중대한 ‘이념투쟁’은 우리의 생전에 끝나지 않을 것이다!

    과연 다른 길은 없는 것일까? 당장은 ‘그라운드 제로’에서 생각의 골을 더 깊게 파는 수밖에 없어 보인다. 영국의 문학평론가 테리 이글턴의 <성스러운 테러>(생각의나무 펴냄)가 보여주고 있는 것도 그 ‘깊게 파기’이다. 저자는 ‘서구 문명사에 스며 있는 테러의 계보학에 대한 고찰’로 우리를 초대한다.

    ‘테러리즘의 의미’를 묻기 위해서 그가 먼저 확인해두는 것은 테러리즘이란 말이 요즘의 용례보다 훨씬 복잡하면서도 넓은 의미를 가졌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때의 테러리즘은 인류의 기원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며 축복과 저주, 성과 속을 모두 의미할 만큼 오지랖이 넓다. 그에 따르면 “고대 문명에는 창조적인 테러와 파괴적인 테러, 생명을 부여하는 테러와 죽음을 불러오는 테러가 동시에 존재”했다. 이러한 테러의 양가성은 곧 신성(the sacred) 자체의 양가성이기도 하다.

    <성스러운 테러>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그 양가성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이글턴이 제시하고 있는,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바쿠스> 읽기다. 이 드라마는 ‘바쿠스’ 곧 디오니소스에 관한 이야기다. 이글턴이 ‘최초의 테러리스트 지도자 중 하나’로 지목하는 주신(酒神) 디오니소스는 알다시피 “포도주와 가무, 환희와 연극, 풍요와 과잉, 영감의 신”이지만 동시에 “탐욕적이고 폭력적이며 차이를 적대하는 획일성의 지지자”이다. 그의 이 양면적인 성격은 결코 분리되지 않는 성질의 것이다. 대저 이 디오니소스를 어찌할 것인가?

    <바쿠스>에 등장하는 테베(테바이)의 지도자 펜테우스는, 자기 어머니의 고향인 테베를 찾아와 여인들로 하여금 자신을 흥청망청 숭배하도록 한 디오니소스에게 적개심을 품고서 상식 밖의 폭력으로 대응한다. 그는 주신의 머리를 베고 쇠지레로 그의 성소를 부숴버리려고 했던 것이다. 심지어 무질서의 신 디오니소스가 화해를 제안했을 때조차도 이를 경멸하듯 거절하며 아예 신을 감옥에 가두어버린다. 화가 난 디오니소스가 지진을 일으켜 감옥을 나온 뒤에 무자비한 복수를 감행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에우리피데스의 극에서 이렇듯 서로 충돌하고 있는 디오니소스와 펜테우스 가운데 누가 테러리스트인지 판가름하기는 쉽지 않다. 펜테우스 또한 디오니소스와 똑같은 논리 및 감수성으로 전투에 나서면서 디오니소스 못지않은 광적 행태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우리는 <바쿠스>가 “분명 테러리즘과 부당한 정치적 대응 사이의 결정적 유사성을 강조하는 작품”이라는 이글턴의 평가에 공감하게 된다. 이 그리스 고전 비극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

    “에우리피데스의 위대한 극은 디오니소스를 신으로 인정하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그에게 정당한 대응을 하느냐의 문제를 전면에 부각시”킨다. 그 정당한 대응이란 바로 ‘경외심’(reverence)이다. 경외심이란 맹목적인 억압의 반대말이면서 디오니소스가 펜테우스의 타자가 아니라 펜테우스 안에 잠복한, 자아의 또 다른 중심이라는 걸 인정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즉, “내 안에 너 있다”라고 말하는 태도다. ‘테러 시대’의 예지는 먼 곳에 있지 않은 것이다.

    07. 09. 22.

     

     

     

     

    P.S. 칼럼에서 언급되고 있는 에우리피데스의 <바쿠스>는 두 가지 번역본으로 국내에 소개돼 있다. 하나는 희랍어 원전 번역 <에우리피데스 비극>(단국대출판부, 1999)의 '박코스의 여신도들'이고, 다른 하나는 영역본을 옮긴 <그리스 비극>(현암사, 2006)의 '바코스의 여신도들'이다. '바쿠스'는 물론 '디오니소스'를 가리키는 다른 이름이다. 거기에 덧붙여, 천병희의 <그리스 비극의 이해>(문예출판사, 2002), 김상봉의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한길사, 2003), 그리고 사이먼 골드힐의 <러브, 섹스 그리고 비극>(예경, 2006)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참고문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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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로그인 2007-09-22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부시 사진 미치겠다.

    흥미로운 내용이예요 로쟈님, 감사합니다 :)

    로쟈 2007-09-22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흥미로운 책입니다.^^
     

    지난주에 출간된 발리바르의 <대중들의 공포>(도서출판b, 2007)에 대한 한 서평을 옮겨놓는다. 책은 만만찮은 두께 때문에 얼른 읽어볼 엄두가 나지 않지만 부분적으로 몇 개 장 정도를 읽어보는 것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도 싶다. 그런 로드맵을 짜는 데 미리 참고해둘 만한 서평이다.

    경향신문(07. 09. 22) 폭력을 넘어서는 법 ‘시민인륜’

    아포리아(aporia)는 논리적 궁지를 뜻한다. ‘대중들의 공포’를 읽을 때 가장 많이 눈에 띄는 용어들 가운데 하나가 아포리아이다. 발리바르의 친구이자 스피노자 전문가인 마트롱은 언젠가 발리바르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은 매년 새로운 아포리아를 발견하려 한다. 스피노자의 대중들 개념에는 아포리아가 있다, 민주주의에는 아포리아가 있다, 이런 식으로. 그건 미친 짓이다.”

    이 에피소드는 역설적으로 발리바르의 철학하는 핵심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의 체계적인 통일성과 정합성을 전제하거나 새롭게 구축하려 하지 않고, 통일적인 체계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곳에서 아포리아를 찾아낸다.

    아포리아를 찾는 과정은 사유가 어디까지 근본적일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도정이다. 먼저 어떤 사유가 닦아놓은 논리의 길을 끝까지 따라가야 하고, 그 논리의 끝에서 마주하게 되는 막다른 골목의 정체를 확인해야 하며, 또한 이 막다른 골목에 도달하게 된 근본 전제와 가설을 복기해야 한다. 여기에 이를 때 비로소 아포리아 너머에 있는 새로운 사유의 길이 열릴 수 있다. ‘대중들의 공포’는 이 고통스럽고 지난한 근본적인 사유의 도정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탁월한 성과물이다.

    이 책의 문제 틀은 ‘대중들의 공포’라는 말 속에 녹아 있다. 발리바르가 고민하는 철학의 대상은 계급이 아니라 대중들이다. 이는 경제주의적 계급론에 대한 비판인 동시에 ‘대중들이 역사를 만든다’는 마르크스의 언급을 구체적으로 해명하려는 시도이다.

    또한 대중들은 과학적인 적합한 인식이 아니라 진리와 허구가 혼재되어 있는 이데올로기를 통해 현실의 갈등을 인식하고 실천한다는 점에서, 이런 문제 틀은 필연적으로 이데올로기에 대한 탐구를 함축한다. 여기서 ‘대중(mass)’이 아니라 ‘대중들(masses)’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하는데, 이는 대중들이 단일한 주체(단수)가 아니라 복합적인 양면성(복수)을 담지하기 때문이다.

    이런 대중들의 양면성을 표현하는 말이 ‘대중들의 공포’이다. 스피노자에서 유래하는 이 용어는 대중들이 느끼는, 그리고 불러일으키는 공포를 가리킨다. 이는 1차적으로는 민중의 능동성과 진보성을 신화화했던 과거 민중론이 지닌 한계와 유사하게 대중들의 일면적인 봉기성만을 특권화하는 논의에 대한 비판이다. 대중들은 능동적인 만큼 수동적이고, 진보적인 만큼 보수적인 양면성을 특징으로 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함의는 대중들의 역량이 갖는 잠재적 폭력성에 관한 것이다. 대중들의 힘은 때로 폭력과 구별하기 어려운 형태로 나타난다. 사회의 구조적 폭력에 공포에 느끼고 이를 제거하려는 대중들은 오히려 대항폭력을 통해 대중들에 대한 가공할 공포를 초래하여 사회의 변화가 아니라 붕괴로 나아갈 수도 있다.

    발리바르가 이런 양면적인 긴장을 전환하기 위해 고민하는 것이 반폭력 정치이다. 반폭력 정치에 대한 사고는 이 책의 가장 독창적인 대목이라고 할 수도 있는 시민인륜(civilite) 개념으로 정교해진다. 시민인륜은 ‘시민권’과 ‘사적이고 공적인 윤리’라는 이중적인 의미를 결합한 신조어이다. 이 개념은 대중들의 폭력이 동일성(identity)과 결부되어 있으며, 따라서 공동체(국가) 내부에서 증오와 잔혹으로 나아가는 동일성들간의 갈등을 해결하는 한에서 해방의 정치나 변혁의 정치가 가능해질 수 있다는 문제 의식을 담고 있다.

    물론 이상의 간략한 정리는 전체적인 문제 틀에 불과하며, 이 책에는 훨씬 풍부한 논의들이 담겨 있다. 그것은 근본적인 사유가 갖는 전복적인 힘을 예증한다. ‘대중들의 공포’는 구태의연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도전이고, 최근 주목 받고 있는 네그리, 푸코, 들뢰즈 등의 철학과 쟁점을 형성하면서 정치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려는 시도이며, 무엇보다 빈곤과 잔혹이 공존하는 오늘날의 정세를 돌파하려는 이론적 실천이다. 이 두툼한 책이 옮긴 이들(최원·서관모)의 오랜 정성과 노력으로 우리 앞에 당도했다.(김정한|서강정치철학연구회 회원)

    07. 0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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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Ee 2007-09-22 22:58   좋아요 0 | URL
    그 밥에 그 나물인 (것 같은) 김정한 씨가 서평을 써서인지 좋은 말만 해났네요.

    로쟈 2007-09-23 00:06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책을 미리 읽어본 독자가 많지는 않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