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서비스사를 바꾸는 바람에 오전에 잠시 새 연결망 설치작업이 있었고 또 그 바람에 약간의 책정리를 하다가 리처드 레인의 <보드리야르, 소비하기>(앨피, 2008)의 원서를 발견했다. 잠시 읽어보게 됐는데, 독일 극작가 페터 바이스에 대해 흥미를 갖게 되어 몇 자 적어놓는다. 보드리야르는 바이스의 주요 작품들을 불어로 옮긴 번역자이기도 하다.  

 

 

 

 

책의 '왜 보드리야르인가?'란 서론은 "장 보드리야르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주제로 글을 쓴 작가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일 뿐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 그 자체를 구체적으로 실천한 사람이다."(15쪽)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구체적으로 실천한'은 'embody'를 옮긴 것인데, 말 그대로 포스트모더니즘을 구현한, 포스트모더니즘 자체인 이론가가 보드리야르라는 것. 그런 맥락에서 이 책은 같은 시리즈로 나온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포스트모더니즘을 구하라>(앨피, 2008), <트랜스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앨피, 2007)과 함께 나란히 읽어봄 직하다.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의 도래와 함께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삼총사'이기 때문이다(제임슨의 명성은 물론 상당 부분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비판/반대로부터 얻어진 것이다. 여담이지만, 그의 주저 중 하나인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자본주의의 문화논리>가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것은 '한국 포스트모더니즘 유행'에 있어서 최대의 미스터리 중 하나다). 

그런 보드리야르(1929-2007)의 경력은 장 폴 사르트르가 주관한 잡지 <현대>에 주로 글을 발표함으로써 시작된다. "사르트르는 대체로 독창적인 마르크스주의 해석 때문에 모든 세대의 프랑스 사상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는데, 보드리야르는 이러한 관심사를 공유하면서 그에 더하여 개인적으로 독일의 사회학과 문학에 흥미를 느꼈다."(19쪽) 여기서 '모든 세대'는 'a whole generation'을 옮긴 것이다. 그냥 '한 세대 전체'란 뜻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독창적인 마르크스주의 해석'은 짐작에 <변증법적 이성비판> 같은 책을 염두에 둔 멘트로 보인다. 국내엔 이 책의 서론만이 <방법의 탐구>(현대미학사, 1995)로 번역돼 있다. 보드리야르는 그러한 독일 철학에 보태서 독일 사회학과 문학에도 깊은 조예를 갖고 있었다는 것.

"그는 더 전문적인 분야를 일컫는 '문학'이나 '철학' 같은 용어보다 '문화'라는 말을 선호했는데, 왜냐하면 프랑스의 주류를 이루는 지적 사고의 한계 지점에 서 있는 이론가로 자신을 자리 매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보드리야르는 (그의 주요 지적 라이벌인 미셸 푸코처럼) 전통적이고 체계적이며 철학적인 훈련을 받기보다는 좀더 우회적인 길을 걸었다.(19-20쪽)

'프랑스의 주류를 이루는 지적 사고의 한계 지점'은 'margins of mainstream French intellectual thought'의 번역이다. 그러니까 다 똑같이 유명한 프랑스 이론가/사상가로 알고 있지만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아서 푸코처럼 주류(메인스트림) 정통파도 있고 보드리야르 같은 비주류 주변부파도 있는 것이다. '지적 라이벌인 미셸 푸코'라고 하니까 생각나는 건 보드리야르의 <푸코 잊기>(1977; 영역본은1987)이다. 푸코의 생전에 나온 책이다! 책이라곤 하지만 분량은 팜플릿 수준인데, '푸코를 잊어버리기'란 제목으로 <세계의 문학>(1989년 가을호)에 번역됐었다(무슨 소리를 적어놓았는지 다 잊어먹었지만).

여하튼 "제도의 경계에 서 있는 이러한 보드리야르의 위치는 주류적 사고의 경계 지점에서 유희하는 그의 후기 출판물들과 유사한 맥락에 서 있다." 그런 비주류성 혹은 가장자리성과 잘 호응하는 것이 독일 극작가들에 대한 관심이다. 특히 페터 바이스와 베르톨트 브레히트.

"1960년대에 보드리야르는 특히 극작가 피테르 바이스(1916-1982)와 베르톨트 브레히트(1898-1956)을 번역하는 데 힘을 쏟았다. 보드리야르는 그 영향력이 과소평가되어 온 바이스의 주요작품 네 편을 번역햇다. <소실점>(1964), <마라/사드>(1965), <토론>(1966), <베트남 해방전쟁의 발생과 전쟁에 대한 담론>(1968). 불안정한 시점의 형식을 취하여 날카로운 정치적 진술들을 담고 있는 이 텍스트들은 보드리야르가 글쓰기에 접근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전조로 간주될 수 있다."(20쪽)

Photo: Peter Weiss, 1960er Jahre

'페테르 바이스'는 '페터 바이스(Peter Weiss)'라고 읽어주는 게 낫겠다(물론 '피터 웨이스'라고 영어식으로 읽은 책들도 있긴 하다). 독문학자들이 그렇게 읽고 또 국내에도 그렇게 소개됐다. "그 영향력이 과소평가되어 온"이라고 했는데, 내가 보기엔 바이스가 보드리야르에게 끼친 영향을 말한다(The influence of Weiss is usually played down). 그것이 보통 간과됐다는 것. 하지만 주요작을 네 편이나 번역한 이상 모종의 영향관계나 친연성을 고려해볼 수 있겠다.



 

 

  

<마라/사드>는 널리 알려진 작품이지만 다른 세 작품은 좀 생소한데, 찾아보니 <토론>이라고 옮겨진 작품은 <수사(Die Ermittlung)>, 영어본으로는 <조사(The Investigations)>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찾아보니 우리말로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한국문화사, 2003)로 번역돼 있다. 제목대로 아우슈비츠의 학살을 다룬 '기록극'이라 한다. 11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는데, 각장의 제목은 아래와 같다.

1 승강장의 노래
2 수용소의 노래
3 그네의 노래
4 생존가능성의 노래
5 릴리 토플러의 종말에 관한 노래
6 하급친위대원 슈타르크의 노래
7 검은 벽의 노래
8 페놀의 노래
9 방공호 구역의 노래
10 치클론 B가스의 노래
11 화장로의 노래

페터 바이스는 유대계였던 탓에 나치 독일을 떠나 오랜 망명생활을 한 것으로 돼 있는데 이 작품은 그러한 전기적 내력을 새삼 상기시켜준다. 그렇다면 대표작 <마라/사드>는 어떤 내용인가? "<마라/사드>는 프랑스 혁명의 지도자 장 폴 마라(1743-1793)의 암살사건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구성된 희곡이다. 그러나 바이스는 이 모든 것을 복잡하게 비튼다. 그의 희곡은 한때 샤랑통 시설(Asylum of Charenton)'에 수용된 마르키 드 사드(1740-1814)가 그곳에서 상연한, 마라의 암살 사건을 다룬 연극에 관한 것이다. 이처럼 <마라/사드>는 역사적 현실에 기반한 희곡이면서 동시에 역사를 혼란스럽게 만든다."(20-21쪽)

'샤랑통 시설'은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샤랑통 정신병원'으로 사드가 감금되었던 곳이다. 그리고 <마라/사드>는 <사드 후작의 연출로 샤랑통 정신병원의 재소자들이 공연한 장 폴 마라에 대한 박해와 암살사건(The Persecution and Assassination of Marat as Performed by the Inmates of the Asylum of Charenton Under the Direction of the Marquis de Sade)>이라는 긴 원제를 가진 작품으로 "정신병원을 배경으로 사드가 연출가로 분하여 환자들과 함께 마라의 암살 사건을 극중극으로 재현한다" 때문에 "<마라/사드>는 역사적 현실에 기반한 희곡이면서 동시에 역사를 혼란스럽게 만든다(Marat/Sade becomes a play located in the historical real, but also one that dislocates history.). 

그리고 바로 그런 점이 보드리야르의 포스트모던적 글쓰기와 상통한다는 것. "바이스의 <마라/사드>를 통해 우리는 하나의 연극 작품이 생산되고 상연된 시대를 바이스가 어떻게 바라보는지 깨닫는 동시에, 전형적인 마르크스주의적 방식과는 상이한 방식으로 정치를 사고하는 새롭고도 흥미로운 형식을 얻게 된다. 마찬가지로 보드리야르 역시 흔히 수행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분석과는 다른 방식을 보여준다. 이처럼 '그로테스크한 폭력과 성적 과잉'을 보여주는 희곡을 번역한 보드리야르의 작업을, 프랑스 사상가 조르주 바타유에 대한 그의 관심과 연결지어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21쪽)

이 대목은 원문과의 대조를 필요로 한다. "With Weiss' Marat/Sade, we have a new and interesting form for the explorarion of political ideas, one which strays far from the typical Marxism that informed Weiss' thinking at the time of the play's development and production. Similarly, Baudrillard was exploring different ways of performing Marxist anaylses, and we can tie in his work translating this play of 'grotesque violence and sexual excess' with his interest in the French thinker Georges Bataille(1897-1962)."(4쪽)

내가 읽은 바를 나대로 옮기면 "페터 바이스의 <마라/사드>를 통해서 우리는 정치 사상을 탐구하는 새롭고도 흥미로운 형식과 접하게 된다. 이 형식은 이 희곡이 씌어지고 공연되던 시기 바이스의 사고를 틀 지웠던 전형적인 마르크스주의로부터 한참 벗어난다. 마찬가지로 보드리야르는 마르크스주의 분석을 수행/상연하는 다른 방식들을 탐구했다. 그리고 우리는 이 '그로테스크한 폭력과 성적 과잉'의 희곡을 번역한 그의 작업을 프랑스 사상가 조르주 바타이유에 대한 그의 관심과 연관지어볼 수 있다."

 

 

 

 

그렇게 해서 보드리야르는 바타이유(바타유)와 접속된다.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사이에 조르주 바타유는 스스로 '이종적 문제(heterogenous matter)'라고 부른 '과잉', 요컨대 쓰레기, 배설물, 폭음과 폭식 등 불법적이고 불합리한 것에 기반한 글쓰기 이론을 구축했다. 그는 철학의 거장들이 흔히 자신들의 철학은 그러한 세속적 문제를 초월하려는 시도의 일부분이라고 주장하면서 무시하는 영역에 초점을 맞추었던 것이다."(21쪽)

바타이유의 이러한 '이질적인' 철학은 당대의 주류 사상가들로부터 거부되었으나 1960년대 이후로 '재발견'된다. 그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바타유와 그의 저서에 담긴 새로운 관심사를 이해하는 것은 현대의 프랑스 사상가들이 헤겔과 마르크스라는 제약에 맞서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바타유를 참조함으로써 보드리야르를 포함한 사상가들 전체를 반反 헤겔 혹은 반反 마르크스라는 서사 내에 한 묶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22쪽)

참고로 원문은 이렇게 돼 있다: "To understand Bataille, and the new interest in his work, is to understand the way in which modern French thinkers reacted to the constraints of Hegel and Marx; in other words, we can situate a whole host of thinkers that include Baudrillard in one stretch of narrative."(4쪽)   

역시나 나대로 다시 옮기면, "바타이유를 이해하는 것은, 그리고 그의 작업에 대한 새로운 관심은 현대 프랑스 사상가들이 헤겔과 마르크스의 구속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는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보드리야르를 포함한 다수의 사상가들을 하나의 내러티브 선상에 위치시킬 수 있다."

지난번에도 언급한 것이지만(http://blog.aladin.co.kr/mramor/1965343) 리처드 레인은 줄리언 페파니스의 책 <이질성과 포스트모던(Heterology and the Postmodern: Bataille, Baudrillard, and Lyotard)>을 높이 평가하는데(<이질성의 철학 그리고 바타이유, 보드리야르, 리오타르>(시각과언어, 2000)로 소개돼 있다), 인용한 대목은 이 점을 다시 상기시켜준다. 아니, 서론에 나오는 것이니까 미리 암시해준다고 해야겠다. 그리하여 다시 읽게 되는 보드리야르는 페터 바이스와 바타이유 사이의 보드리야르이다...

08. 03. 29.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8-03-30 01: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3-30 0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3-30 0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3-30 01: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람혼 2008-03-30 0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타이유 이야기가 나와서 개인적으로 그냥 지나칠 수가 없군요.^^
반가운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언제나처럼.

로쟈 2008-03-30 10:13   좋아요 0 | URL
람혼님에게는 기별도 안 갈 내용인데요.^^

노이에자이트 2008-04-07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터 바이스의 희곡 중 베트남 토론회라는 작품이 있는데 보들리야르가 번역했다는 토론이 혹시 이 작품은 아닌지요...심문이라는 희곡은 따로 있는데요...(중앙일보사 오늘의 세계문학
13번 페터 바이스 관련 흑백화보 설명에서)

로쟈 2008-04-07 00:30   좋아요 0 | URL
<베트남 해방전쟁의 발생과 전쟁에 대한 담론>라고 따로 거명돼 있어서요. 한데 번역된 건가요? 저는 중앙일보 책이 박스에 들어가 있어서.--;

노이에자이트 2008-04-07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뇨.중앙일보 것은 부모와의 이별 번역본이고요.화보에는 바이스의 희곡이 연극무대에 올려진 것을 소개하고 있어요.한번 확인해보세요.박스에 너무 깊이 넣으셨나요...

로쟈 2008-04-07 01:15   좋아요 0 | URL
게다가 창고에 가 있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4-07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갈수록 태산이네요..
 

이번주 신간 중에 '사회적 독서'에 가장 적합한 책은 아마도 <평등해야 건강하다>(후마니타스, 2008)일 것이다. 영국의 '사회역학자' 리처드 윌킨슨의 저작이고 제목과 '불평등은 어떻게 사회를 병들게 하는가'란 부제에 내용이 이미 요약돼 있다(특별히 상식에 반하지 않는다). 나머지 400쪽 가까운 분량은 이 주장에 대한 근거들이겠다. 당장에 읽을 시간을 없기에(시간의 배분 또한 불평등하다!) 리뷰들이라도 챙겨둔다.

경향신문(08. 03. 29) '사회적 열등감’이 病 부른다

한 사회에서 건강 수준은 일반적으로 사회 계층이 높을수록 좋아진다고 한다. 바꿔 말하면 가난할수록 건강이 나빠진다고 하겠다. 한 연구에 따르면 미국에서 부유한 지역의 백인과 가난한 지역의 흑인 사이에는 기대 수명이 16년이나 차이가 났다. 그렇다면 다음의 사례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다는 미국의 평균 기대수명은 세계 25위에 불과하며, 국내총생산(GDP)이 그 절반인 그리스보다 낮다. 미국 흑인 남성은 코스타리카 남성보다 실질소득이 4배나 높지만 수명은 9년이나 짧다. 뉴욕의 할렘처럼 미국의 극빈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사망률이 세계 최빈국인 방글라데시에 사는 사람들보다 높다. 문제는 절대적 소득수준이 아니라 상대적 소득격차, 즉 ‘불평등’인 셈이다.

원제가 ‘(불평등의 효과)인 책이 파고들고 있는 부분도 바로 이 지점이다. ‘건강’이 물질적 환경뿐만 아니라 “그것이 갖는 사회적 의미와 우리가 이를 경험하게 되는 과정, 그리고 이런 환경 속에서 우리가 자신을 인식하는 방식들”에 밀접하게 반응하는 지표라는 것이다. 건강불평등과 건강 상태를 결정하는 사회적 요인들을 연구하는 사회역학 분야의 선구자인 저자(영국 노팅엄대 교수)는 ‘불평등’이라는 사회적 환경이 개인의 건강은 물론 사회적 관계를 어떻게 좀먹는지를 지난 30여년간의 연구 성과를 집대성해 보여준다.



건강불평등은 단순히 빈곤층만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가 불평등하다면 그 속에 사는 누구나 건강한 삶을 온전히 누릴 수 없다. 책은 사회적 불평등이 개인에게 스트레스를 일으키고, 이 스트레스가 다시 건강을 악화시키는 과정을 다양한 연구 성과를 통해 설득력있게 제시한다. 불평등한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잃을까 전전긍긍하게 되고, 타인과 비교하거나 경쟁하는 과정에서 심리적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다.

만성적인 스트레스는 심혈관계나 면역 체계를 포함한 우리 몸의 생리적 체계에 악영향을 주고 수많은 질병에 취약하게 만든다. 또 담배, 술 등 기분전환용 약물이나 전문의약품에 의존하게 하고 우울증, 불안, 불행, 혐오감, 소외감, 불안정, 통제력의 상실과 같은 증상을 일으킨다.

책에는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심리사회적 요인 세 가지가 제시된다. 우선 낮은 사회적 지위. 이는 물질적 생활수준만이 아니라 멸시당한다는 느낌, 열등한 위치에 놓여있다는 느낌, 자신의 일에 결정권을 갖지 못한다는 느낌처럼 사회적 지위가 낮아서 생기는 모든 사회적 감정을 포함한다. 두 번째 요인은 친구나 신뢰하는 사람이 없고, 참여하는 공동체가 없는 등 빈약한 사회적 관계다. 사회적 연결망이 좁은 사람은 넓은 사람보다 감기에 걸리는 경우가 4배 이상 높다는 결과도 있다. 마지막 요인은 어린 시절 애착관계의 결핍이나 불안정이다. 저자는 이 세 가지 요인들이 모두 ‘사회적 불안’에 뿌리를 두고 있고, 그 근저에는 타인에게 어떻게 보일지 걱정하는 태도가 깔려 있다고 본다. “사회적 불안, 수치심, 우울, 폭력이라는 감정들은 모두 사회적 비교에서 생긴다”라는 것이다. 때문에 “인간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이라고 지적한다.

불평등이 미치는 영향이 건강에만 국한되는 건 아니다. 불평등한 사회일수록 강력 범죄 발생률과 10대 임신 비율이 높고, 타인에 대한 신뢰도가 낮고 공동체 생활에 참여하지 않는다. 여성이나 인종적·종교적 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차별도 심하다. 사회적 지위가 낮아서 수치심을 느끼고 자기 존중감이 심하게 손상된 사람들은 자신이 사회적 약자보다 더 우월하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자존감을 되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책은 사회적 관계를 맺을 때 인간이 구사하는 방식을 ‘지배의 전략’과 ‘친화의 전략’으로 나누고 불평등한 사회일수록 전자를 강화시킨다는 데 주목한다. 그러나 저자는 인류가 희소자원을 둘러싼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홉스적 투쟁의 ‘가능성’ 속에 살아왔지만 ‘협력적 전략’도 개발해왔음을 진화론적 탐구를 통해 보여준다. 인간의 뇌가 커진 이유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며, 영장류들의 ‘털 고르기’처럼 인간은 사회적 유대관계를 형성하는 방법으로 ‘말하기’ 전략을 사용해왔다. 또 영장류 가운데 인간만이 눈동자에 흰자위가 있다는 사실은 서로에게 시선을 노출해 서로 이해받고 협력하는 전략을 선택했음을 보여주는 예다.

저자는 건강 불평등을 해결하는 가장 빠르고 적극적인 방식은 전체 사회의 불평등을 완화시키는 것이며, 이를 위해선 무엇보다 정치적 의지가 필요함을 강조한다. 특히 장기적으로는 사회에 구조적인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고 덧붙인다. 종업원 지주제나 협동조합처럼 좀더 민주적이고 평등한 방식을 우리가 일하는 조직에 이뤄내는 것이다.

책은 소비 수준이 전체적으로 높아진다고 해서 상대적 박탈감과 관련된 문제들이 줄어드는 것은 아님을 보여준다. 전체 인구의 상당수가 여전히 사회경제적으로 ‘열등하게 취급’된다면 건강 불평등, 약물 남용, 폭력과 같은 사회 문제들은 계속된다는 얘기다. 때문에 사회적 분열, 편견, 배제와 대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경제 성장만을 추구하는 것은 행복에 대한 근거 없는 허상을 붙잡는 것과 같으며 엄청난 환경비용까지 지불해야 할 것.”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는 우리 사회에도 시사점을 던져주는 대목이다.(김진우기자)

한국일보(08. 03.29) 불평등의 毒에 사회가 병든다

최근 보수언론을 중심으로 평등주의에 대한 공세가 강화되고 있다. 이들은 경쟁력 격차에 따라 발생하는 불평등은 합리적인 것이라면서 평등주의야 말로 선진화의 걸림돌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런 주장이 지배하는 사회가 과연 건강한 사회일까?

영국 노팅엄대의 사회역학 교수인 리처드 윌킨스는 평등과 건강에 대한 심도깊은 고찰을 통해 이 같은 주장의 허점을 파헤친다. 여기서 말하는 건강은 구성원 개개인의 수명이 길다는 생물학적 건강은 물론이고 구성원간 신뢰가 있는지, 공동체에 대한 자발적 참여는 활발한지, 살인 등 강력범죄의 비율은 높은지, 인종이나 지역차별 같은 적대감은 심한지 등 사회적 건강성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저자는 경제적으로 평등한 사회와 불평등한 사회를 정밀하게 관찰하면서 건강을 정의하는 이러한 요소들이 한 묶음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저자는 우선 물질적으로 부유할수록 오래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통념은 절반의 진실에 불과하다고 갈파한다. 책에 따르면 일정수준의 부를 축적한 사회는 경제적 수준이 향상되더라도 더 이상 기대수명이 높아지지 않는다. 가령 1998년 1인당 국내총생산(GDP)과 평균기대수명을 조사한 결과 부유하지만 비교적 사회적으로 불평등이 심한 나라인 미국은 스웨덴, 일본 같은 부국들은 물론 GDP수준이 절반에 해당하는 그리스보다도 기대수명이 낮았다.

사회적 건강성도 마찬가지. 미국 50개주들의 주민에게 “기회가 된다면 타인들은 당신을 이용할 것이라고 생각하느냐”라는 물음을 던지자, 경제적으로 가장 평등한 주의 주민들은 10~15%만이 ‘그렇다’고 대답한 반면, 불평등한 주에서는 35~40%를 육박했다. 살인율의 경우 주 사이의 불평등 정도에 따라 10배 가량 차이가 났다.

책은 여러 가지 사례를 통해 물질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경우 발생할 갖가지 사회적 실패를 우려한다. 불평등한 사회는 사회적 지위를 둘러싼 경쟁을 부추켜 사람들로 하여금 사회적 지위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과도한 소비에 집착하도록 압박할 것이며 이는 ‘경제성장-자원고갈-환경오염’이라는 악순환을 낳는다는 것이다. 또한 가난한 이들의 경우 소득격차가 커질수록 직장, 집, 자가용 등 사회적 지위를 상징하는 재화를 획득할 가능성이 낮아지고, 다른 계층의 사람들이 자신을 열등하게 취급하다고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폭력적 성향을 강화할 것이라고 예견한다.

저자는 “만약 우리가 현대사회의 문제들을 진심으로 해결하기를 원한다면 이제 더는 불평등이 우리 사회를 좀먹고 있다고 말로만 떠들고 어물쩍 넘어가서는 안될 것”이라며 “불평등이 인간에게 미치는 파장을 더욱 철두철미하게 분석하려는 태도가 무엇보다 절실하다”고 말했다.(이왕구기자)

08. 03. 29.

 

 

 

 

P.S. 저자의 다른 책으론 <건강 불평등, 사회는 어떻게 죽이는가?>(당대, 2004)가 출간돼 있다(저자가 왜 '윌킨스'라고 표기돼 있는지 모르겠다). 원제는 '불건강한 사회(Unhealthy Societies)'이다. 관련서로는 사회역학 분야에서 윌킬슨과 쌍벽을 이룬다는 마이클 마멋의 <사회적 지위가 건강과 수명을 결정한다>(에코리브르, 2006), 그리고 한국사회의 건강불평등에 대한 보고서로 이창곤의 <추척, 한국 건강불평등>(밈, 2007) 등이 있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털세곰 2008-03-29 11:45   좋아요 0 | URL
멕시코에서는 비만을 개인의 식생활 습관의 문제로 국한시킬 것이 아니라, 물 대신 값싼 탄산음료를 마실 수 밖에 없는 열악한 수도사정 그리고 치안의 불안으로 인한 극도의 제한적 생활로 인한 운동부족 등 이른바 "사회적" 요인이 더 강하게 작용하는 문제로 인식해야 한다는 새로운 주장이 나오고 있다고 하더군요. 근데 멕시코의 비만인구 비율이 장난이 아니라고 합니다. 세계적인 뚱땡이 국가 미국도 찜쪄먹는다고 하더군요. 근데 로쟈님은 이 토요일날 최소 아침 8시 전에 기상해서 작업모드로 들어가시나요??? 이 페이퍼 작성시간이 불과 am 8:45 ???

로쟈 2008-03-29 12:09   좋아요 0 | URL
네, '사회적 비만'이라고 해야겠죠(사회적 영양실조가 있듯이). 오늘은 아이가 학교에 가는 토요일이라 일없이(?) 저도 일찍 일어나야 했고, 일어난 김에 리뷰기사들을 좀 읽다가 옮겨놓은 것뿐입니다.^^;

2008-03-29 19: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3-29 2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스위스 2008-03-29 20:59   좋아요 0 | URL
답변 감사합니다.

2008-03-29 2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Jade 2008-03-29 20:39   좋아요 0 | URL
이 책 보관함에 담아두었었는데, 건강불평등 저자였군요. '구조적 책임'이 좀 더 두드러졌음 좋겠는데, '건강불평등'은 애매한 대안을 제시해서 좀 그랬어요. 불평등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대안들이 좀 더 잘 제시된 책은 없을까요? ^^;;

로쟈 2008-03-29 21:46   좋아요 0 | URL
대안 제시에 앞어서 문제의식의 공유가 우선되어야 할 듯싶습니다. 특히 정책입안자들이 필독해야겠다 싶고요...

에링 2008-03-30 22:26   좋아요 0 | URL
그리스 GDP가 미국 GDP의 절반이나 될리가요...

로쟈 2008-03-30 22:32   좋아요 0 | URL
1인당 GDP입니다. 최근 수치로는 2/3쯤 되는 거 같은데요...
 

일본인 학자 하타노 세츠코의 <'무정'을 읽는다>(소명출판, 2008)가 번역돼 나왔다(연세근대한국학총서로 나온 것인데 한꺼번에 흥미로운 타이틀들이 여럿 출간됐다). 저자는 2005년에 나온 일역본 <무정>의 역자이기도 하다. 작년에 <무정>(1917)의 발표 90주년이 되는 해였고, 나는 한 독서강좌에서 강의를 맡기도 했다(관련 자료들을 그때 주섬주섬 읽었다). 개인적인 관심은 '근대문학'과 '국민문학'의 성립에 관한 것이고 푸슈킨과 러시아문학에 대한 관심의 연장선상에서 소세키와 루쉰, 그리고 이광수에 대해서도 눈길을 주게 된다(5년쯤 후에는 이 주제에 관한 책을 써보고 싶다). <무정> 읽기 목록은 그런 맥락에서 만들어둔다...


12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무정을 읽는다- 무정의 빛과 그림자, L-026
하타노 세츠코 지음, 최주한 옮김 / 소명출판 / 2008년 2월
25,000원 → 22,500원(10%할인) / 마일리지 1,250원(5% 적립)
양탄자배송
밤 11시 잠들기전 배송
2008년 03월 28일에 저장

바로잡은 무정
김철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9월
30,000원 → 27,000원(10%할인) / 마일리지 1,500원(5% 적립)
2008년 03월 28일에 저장
품절
무정- 이광수 장편소설
이광수 지음, 김철 책임편집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11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양탄자배송
밤 11시 잠들기전 배송
2008년 03월 28일에 저장

이광수와 그의 시대 1
김윤식 지음 / 솔출판사 / 1999년 4월
30,000원 → 27,000원(10%할인) / 마일리지 1,500원(5% 적립)
2008년 03월 28일에 저장
품절


12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오늘이 러시아 작가 막심 고리키(1868-1936)의 생일이라고 한다. 그래서 한국일보의 '오늘의 책'이 <어머니>를 다루고 있다. 못본 체할 수도 없어서 옮겨놓는다.  

한국일보(08. 03. 28) [오늘의 책 <3월28일>] 어머니

1868년 3월 28일 러시아의 작가 막심 고리키가 태어났다. 1936년 68세로 몰. “그는 러시아 고전 문학과 소비에트 문학을 잇는 ‘살아 있는 다리’다.” 선배 작가인 톨스토이의 말이다. “과거에는 많은 노동자들이 무의식적으로, 자연발생적으로 혁명운동에 관여해 왔다면, 지금에 와서 그들은 <어머니>를 읽고 있다.”

고리키의 친구이자 동지였던 레닌이 그와의 대화 중에 한 말이다. 그들의 말대로 고리키는 위대한 19세기 러시아 문학 최후의 작가이자 20세기 소비에트 문학 최초의 작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창시자로 불린다.

 

 

 

 

<어머니>(1907)는 그 전환점을 만든 작품이다. “…진리는 죽지 않을 것이다. 천벌을 받을 어리석은 놈들, 진리가 네놈들 머리 위에 떨어질 날이 있을 게다.” 노동운동을 하다 법정에 선 아들이 당당하게 혁명의 당위성을 역설한 말을 유인물로 만들어 길거리에 뿌리다 붙잡힌, <어머니>의 주인공 파벨의 어머니가 소설 마지막에서 절규하는 모습은 감동적이다. <어머니>는 세계문학사상 최초로 자신을 역사 발전의 주체로 인식한 노동자계급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그들은 더 이상 무기력한 연민의 대상, 수동적 인간형이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들을 곁에서 지켜보며 스스로도 변혁을 꿈꾸는 존재로 거듭나는 어머니의 의식 변화, 모성애가 인류애로 발전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림으로써 <어머니>는 살아있는 문학이 됐다. 이 소설이 전세계 노동자계급과 지식인들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쳐온 이유다. 세상이 변해 문학으로 읽히고 있지만, 한국에서 이 소설은 한때 ‘이적 표현물’이었다.

고리키는 정규 교육은 받지 못하고 독학으로 글을 쓴, 온갖 밑바닥 삶을 전전하며 자살을 기도했던 자신의 운명을 혁명이라는 이상과 결합시켜 문학으로 빚어낸 작가다. 그의 본명은 알렉세이 막시모비치 페쉬코프. 고리키라는 필명은 ‘견디기 어려운’ 혹은 ‘비참한’이라는 뜻의 형용사, 막심 고리키는 ‘최대로 고통받는 인간’이라는 뜻이 된다.(하종오기자)

08. 03. 28.

 

 

 

 

P.S. 고리키의 전기로는 니나 구르핀켈의 <고리키>(한길사, 1998), 앙리 트루아야의 <소설 고리키>(공동체, 1994) 등이 소개됐었지만 현재는 모두 절판된 상태이다. <어린시절>, <세상속으로>, <나의 대학> 같은 자전 3부작도 시중에서는 구할 수 없다. 고리키 연구서로는 이강은 교수의 <혁명의 문학 문학의 혁명 막심 고리끼>(경북대학교출판부, 2004)가 거의 유일하다. 관련서들이 더 소개되면 좋겠다(한편, 푸도프킨의 영화 <어머니>(1926)의 마지막 장면은 http://youtube.com/watch?v=KI3jZtruxvA 참조)...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닉네임을뭐라하지 2008-03-28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네이버 메인에 뜬 게 이 때문이군요.

로쟈 2008-03-28 23:04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담비에서 중앙대대학원신문의 새연재 '구양봉의 橫書竪說(횡서수설)'을 옮겨온다(http://www.dambee.net/news/read.php?section=S1N5&rsec=&idxno=9324). 자주 언급한 랑시에르의 <감성의 분할>(도서출판b, 2008)에 대한 리뷰이다. 이전에 옮겨놓은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에 맞서라'(http://blog.aladin.co.kr/mramor/1972805) 등과 겹쳐 읽으면 유익하겠다.

중앙대대학원신문(247호) 미학은 어떻게 정치와 조우하는가?

<감성의 분할: 미학과 정치>(2000)는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2005)에 이어 두 번째로 국내에 소개되는 자크 랑시에르의 책이다. 비록 원문이 74쪽 밖에 안 되는 소품이지만 <감성의 분할>은 <불화: 정치와 철학>(1995)과 더불어 독창적인 사상가로서의 랑시에르가 지닌 진면목을 보여주는 데 부족함이 없는 책이다. 다행히도 국역본 <감성의 분할>은 국역본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의 증오스러운 번역에 비한다면 훨씬 읽을 만하다. 물론 과도한 직역 탓에 쉽게 읽히지는 않지만, 그건 문체에 대한 ‘감성’의 차이일 수도 있으니 일단 넘어가자.

그러나 이 책의 제목이자 주요 개념인 ‘Le partage du sensible’를 ‘감성의 분할’이라고 옮긴 건 조금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것 같다. 옮긴이의 해명(미주 1번)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 때문에, ‘(le) sensible’은 ‘감성’이 아니라 ‘감각적인 것’으로 옮겨지는 게 좋을 듯하기 때문이다. 랑시에르가 말하는 '(le) sensible'은 그리스어 'to aisthêton', 즉 감각하는 행위가 아니라 그 행위의 대상을 지칭한다. 이에 반해 감성은 흔히 “자극이나 자극의 변화를 느끼는 성질”을 뜻하기 때문에(가령 “저 사람은 감성이 예민해”라는 표현을 떠올려 보라) 원래의 뉘앙스가 거의 살아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런 뉘앙스를 살려야 하는 이유는 이 개념이 랑시에르의 정치(la politique) 대 치안(la police) 개념과 밀접한 관련을 맺기 때문이다. 랑시에르에게 우리가 말하는 정치는 ‘치안’에 가깝다. 랑시에르가 말하는 치안이란 곤봉을 든 경찰력으로 상징되는 어떤 구체적인 억압의 구조이기 이전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들리는 것과 들리지 않는 것,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즉, 감각적인 것)을 나누고 할당하고 분배하는 상징적 구성원리이다.

그래서 랑시에르가 말하는 ‘정치’는 치안이 특정한 분할선에 의거해 감각적인 것을 배분하고 나눠놓은 질서를 다시 나누고 할당하고 분배하려는 행위이다. 이와 관련해 ‘(le) partage’의 역어로 ‘분할’을 선택한 것은 틀린 건 아니더라도 불충분하다. 나라면 ‘나눔’이라는 역어를 선택할 텐데, 왜냐하면 그래야만 랑시에르의 원래 개념이 함축하고 있는 ‘몫’과 ‘공유’의 의미를 느슨하게라도 포괄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랑시에르는 <정치에 대한 열 가지 테제>(1998)에서 ‘(le) partage’를 법(nomos)의 어원인 그리스어 ‘nemein’과 관련지어 설명한 바 있다. ‘nemein’은 무엇보다 ‘토지’의 분할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그 안에서 삶을 영위해갈 토지의 구획을 확정해 주는 행위이기 때문에 “모든 공동체, 모든 제국의 역사의 시초”(칼 슈미트, <대지의 노모스>)이며, 그렇기 때문에 법의 어원이 된 것이다.

이런 토지의 분할은 무작위로 이뤄지지 않는다. 그것은 신화적 사유(혹은 지배 이데올로기) 속에서 응당 그 토지를 소유할 자격이 있는 민족, 계급, 사람들의 등급에 따라 차별적으로 할당된다. 특정 토지를 어떤 누군가가 소유하게 되는 것은 그의 자격에 따라 그에게 주어진 ‘몫’인 셈이다. 가령 야훼가 유대민족에게 선사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다른 민족에게는 허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동일한 자격과 몫을 가진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자들에 대항해 서로의 자격과 몫을 ‘공유’한다. 적어도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렇기 때문에 분할은 ‘배제’의 근거인 동시에 ‘참여’의 근거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토지 분할의 논리가 정치적 장으로 옮겨가면 그것은 특정 지위를 할당하는 논리가 된다. 가령 어떤 누군가가 지배자의 지위를 자신의 몫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은 그가 그럴 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어서이다. 플라톤은 일찍이 이런 자격(연장자, 강자, 현자 등이 타인을 지배할 자격이 있다)을 세분화한 바 있는데, 랑시에르는 이를 정치의 ‘아르케’(근본원리)라고 부른다. 따라서 랑시에르의 정치는 이런 아르케를 뒤흔들고, 더 나아가서는 아르케 자체의 해체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랑시에르에게 있어서 미학과 정치는 이렇게 조우한다. ‘자기 몫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각자의 몫을 주장할 때, 즉 기존의 ‘감각적인 것의 나눔’을 뒤흔들어 더 많은 몫을 더 많이 공유하려고 할 때 비로소 정치가 시작되는 것이다. 따라서 랑시에르에게 “정치의 미학화”나 “미학의 정치화” 같은 말은 동어반복이다. 왜냐하면 정치·치안이 ‘감각적인 것의 나눔’을 둘러싸고 형성되는 것인 이상, 그것 자체가 이미 미학이기 때문이다.

단, 이때의 미학은 통상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미학이 아니라 그 어원에 충실한 미학이다. 즉, ‘감각적인 것’ 혹은 ‘감각될 수 있는 것’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to aisthêton'에 바탕을 둔 그 미학(‘감각학’으로서의 미학) 말이다. 이렇듯 랑시에르가 포착한 상동성으로 인해 가능해진 미학과 정치의 조우를 음미하는 것은 이제 우리의 몫으로 남겨졌다.

08. 03. 2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