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바쁘다는 이유로 페이퍼 거리들을 묵혀두었더니 어떤 것부터 다루어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다. 밀린 일들이 줄어든 건 아니지만 '서재일'도 나름 일인지라 자꾸 신경을 쓰게 되는데, 여건이 되는 대로 하나둘씩 올려놓도록 한다(인문학과 정치철학에 관련된 몇 가지 아이템을 페이퍼로 적어놓으려고 하지만 조만간 시간을 낼 수 있을지는 장담하지 못하겠다). 그 중 하나는 부르디외의 하이데거론에 대한 것이다. 이 하이데거론의 원제는 <하이데거의 정치적 존재론>이지만 <나는 철학자다>(이매진, 2005)라는 다소 엉뚱한 제목으로 소개되었고, 제목을 바꿔단 보람도 없이 거의 묻혀버린 책이다.

  

 

 

 

책을 손에 든 건 개인적인 필요 때문에 부르디외의 몇몇 책들, 가령 <실천이성>(동문선, 2005), <사회학의 문제들>(동문선, 2004), <파스칼적 명상>(동문선, 2001)을 들추게 되면서 덩달아 눈길이 갔기 때문인데(모두 영역본과 같이 읽는다), 최근에는 이 책에 대한 '촌평'을 비판하는 글도 접한 터라 예전에 무얼 어떻게 읽고 촌평을 단 것인지 확인해보려는 뜻도 있다. '하이데거와 함께 철학을!'(http://blog.aladin.co.kr/mramor/1039607)이란 페이퍼에서 나는 이렇게 적었다.

(...) 그리고 부르디외의 하이데거 비판서 <나는 철학자다>(이매진, 2005)도 (원제인) '하이데거의 정치적 존재론' 비판으로 읽어봄 직하다. 한데, 번역서는 읽기에 좀 팍팍하다. 

이 페이퍼 자체는 하이데거의 <철학입문>(까치글방, 2006)이 출간된 걸 계기로 그의 책들과 같이 읽어볼 만한 책들을 꼽아본 것이었고 '최근에 나온 책들'에 대한 소개와 마찬가지로 책에 대한 정보와 간단한 인상 정도를 나열하고 있다. 그런 '인상'이나 '판단'의 근거를 자세하게 밝혀놓지 않은 점이 불만스럽다는 의견도 가능은 하겠지만 전공자들도 하지 않는 유형의 '책소개'를 내가 이런 자리에서 떠안아야 하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spec님의 비판은 이렇다(강조는 내가 해놓았다).  

"관심의 대상이 될 만하다", "매혹적"이다, "하이데거에 대한 상식을 뒤흔들어 놓는다" "차근차근 따라가도 팍팍하거나 멀미나지 않는다" 등등, 느낌들이 이어지지만 이런 느낌을 주게 한 이유, 즉 느낌을 뒷받침하는 알맹이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어 심히 유감입니다. '의견'도 아닌, 그야말로 '인상'인 셈이지요. 더구나 이런 식의 느낌 전달은 독자들에게 훨씬 직접적으로 다가가는 만큼 더 위험하고 심지어 폭력이 될 때도 있습니다.

가령, 부르디외의 <나는 철학자다>에 대한 촌평은 이런 제 생각을 뒷받침해주는군요. 이 "번역서는 읽기에 좀 팍팍하다"! 다행히 제가 이 책만은 불어판과 번역서를 다 읽어보았기 때문에, 과연 불어판을 조금이라도 보시고 하시는 말씀인지 정당하게 여쭐 수 있을 것 같군요. 일단 번역서만 보자면, 제가 보기엔 반대로 가독성이 상당히 높았고 더구나 지금까지 나온 부르디외 번역 중 가장 자연스러운 번역이었습니다. 물론 그래도 여전히 '팍팍하다'라고 '느낄' 수 있겠죠. 그러나 이걸 불어판과 대조해 보십시오. 첫 페이지부터 엄청난 만연체의 글이 시작되며, 이건 그냥 '팍팍한' 정도가 아닙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부르디외의 이 글을 높이 평가하죠. '정신에 대하여'를 쓴 데리다와 더불어 최고의 하이데거론이라고.

그러므로 로쟈님이 말씀하신 '팍팍함'의 정체가 더욱 궁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제 생각에 '팍팍함'은 어떤 책을 평가하는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만일 이게 단지 번역에 해당되는 평가라면, 이 평가는 전혀 정당하지 않습니다. 확신컨데, 이 번역은 오히려 '유려합니다'! (다만 "하이데거의 정치적 존재론"이라는 좋은 제목 놔두고, "나는 철학자다"라는 이상한 한글 제목을 단 것만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아마도 이는 출판부수를 늘리려는 출판사의 농간일 것 같은데, 대중성이라는 미명하에 결국 좋은 책을 사장시키는 작태라 생각됩니다).

먼저, 책소개를 하면서 별다른 근거 없이 주관적인 느낌, 인상들만을 나열하는 것은 "독자들에게 훨씬 직접적으로 다가가는 만큼 더 위험하고 심지어 폭력이 될 때도 있"다는 것. <철학입문>의 경우 ""하이데거가 1928~29년 겨울 학기에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강의한 내용을 수록한 강의록"으로서 지난 1996년 하이데거의 전집 제27권으로 출간되었다는 이 책은 충분히 관심의 대상이 될 만하다(아직 영역본은 나오지 않은 듯하다). '하이데거의 모든 책'이기도 하지만, 게다가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철학 입문' 아닌가?"라고 나는 적었다.

거기서 '관심의 대상이 될 만하다'는 판단의 근거(?)로 내가 제시한 건 첫째, '하이데거의 모든 책'이라는 것, 즉 그의 모든 책이 관심의 대상이 될 만하기에 <철학 입문> 또한 예외가 아니라는 것과 둘째, 게다가 '철학 입문서'라는 것, 그렇기에 하이데거 입문서도 겸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 이 두 가지이다. 이런 근거가 '알맹이'가 아니어서 유감스러울지는 모르겠지만, 과연 '더 위험하고 심지어 폭력'적이기까지 한 것인지? 기껏해야 하이데거의 책이 나왔다는 정보와 함께 읽어볼 만하겠다는 기대를 표시한 게 왜 위험하며 폭력적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독자에게 훨씬 직접적으로 다가가"기 때문에? '하이데거에 대한 상식을 뒤흔들어놓는다'는 어떤가? 

라캉주의자가 되기 이전에 하이데거 전공자였던 지젝의 <까다로운 주체>(도서출판b, 2005). 책의 1장은 '칸트 독자로서의 마르틴 하이데거'를 다루고 있는데, 주로 <존재와 시간>에서의 곤궁을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한길사, 2001)에서 어떻게 극복/회피하려고 했는가를 다루고 있다. 하이데거에 대한 '상식'을 상당 부분 뒤흔들어놓는다.

풀어서 얘기하면 (1)지젝의 하이데거론은 <까다로운 주체>에서 읽을 수 있다. (2)거기서 지젝은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의 곤궁을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를 통해서 어떻게 극복/회피하려고 했는가를 다루고 있다. (3)이는 하이데거에 대한 '상식'을 상당 부분 뒤흔들어놓는다, 정도가 되겠다. 내가 덧붙여 설명하지 않은 것은 '하이데거에 대한 상식'일 텐데, <존재와 시간>이 하이데거의 대표작이면서 철학사의 한 걸작이라는 것 정도가 내가 염두에 둔 것이다(보통은 완벽한 작품을 걸작이라고 일컫는 거 아닌가?). 그런데, 지젝이 말하는 건 '<존재와 시간>의 곤궁'이기에 그러한 상식을 뒤흔든다고 적은 것이고. 물론 더 자세하게 적을 수도 있겠지만,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건 아닐 테다. 하지만 이만큼만 적으면 과연 위험하고도 폭력적인 촌평이 되는 것인지?

이제 부르디외로 돌아와서, "한데, 번역서는 읽기에 좀 팍팍하다."고 나는 적었다. 물론 오해의 소지를 줄이기 위해서 왜 팍팍한지를 적었으면 좋았겠다(이건 나중에 역자도 시간이 좀 지나서 내게 요구했던 사항이었지만 따로 시간을 내질 못했다. 그땐 책도 못 찾았었고). '팍팍하다'는 표현은 '진도가 더디 나간다' 혹은 '읽기가 힘들다'는 뜻으로 적었던 듯한데, spec님의 의견으로는 이 번역서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못된다. 왜냐하면 번역본은 부르디외 번역서들 가운데 가장 자연스러우면서 유려한 번역이기 때문에. 게다가 "이걸 불어판과 대조해 보십시오. 첫 페이지부터 엄청난 만연체의 글이 시작되며, 이건 그냥 '팍팍한' 정도가 아닙니다."(번역본은 어떻게 하여 이 '팍팍한' 책을 유려하게 옮긴 것일까?) 

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부르디외의 이 글을 높이 평가하죠."라고 spec님은 적었다. 요컨대, 부르디외의 하이데거론은 무진장 팍팍한 책이지만 그럼에도 데리다의 <정신에 대하여>와 함께 최고의 하이데거론이라는 것. 여기엔 '팍팍하다'는 평가가, 즉 읽기 힘들다는 느낌이 책 자체의 가치와는 별개의 문제라는 판단이 전제돼 있다. spec님이 읽기에 부르디외의 불어본 하이데거론은 국역본보다 훨씬 더 팍팍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최고의 하이데거론이다, 라는 것이니까. 같은 맥락에서 말하자면 '팍팍하다'는 평 자체는 번역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이나 폄하가 아니다. 좋은 책이지만 읽기는 힘들다는 평가도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불어본을 직접 대조해보지 않았기에 나로선 불어본에 비해서 더 팍팍하다거나 덜 팍팍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고, 단지 "번역서는 읽기에 좀 팍팍하다"고 적었다. 이 또한 위험하며 폭력적일까? 불어본이 어떤 편제로 돼 있는지 모르겠지만, 국역본은 매 페이지마다 각주가 달려 있어서(어떤 경우엔 페이지의 3/4이 각주로 돼 있다) 책이라기보다는 '학술논문'이란 인상을 '팍팍' 준다. 거기에 부르디외가 독어로 인용한 단어들은 모두 우리말 번역 옆에 독어가 병기돼 있고, 불어와 한자어의 병기도 빈번하게 나온다. 어떤 텍스트가 잘 읽히느냐 마느냐는 상대적일 수밖에 없지만 이런 체제의 텍스트를 자연스럽고 유려하게 읽을 수 있다면 상대적으로 나보다 뛰어난 독해력을 갖고 계신 것. 어떤 이에게 수월하게 읽힌다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수월하게 읽히는 건 아니다. 초반부의 한 대목만 다시 읽어본다.    

"장의 효과, 철학적 소우주의 특수한 강제가 철학적 담론 생산에 미치는 효과는 역설적으로 절대적 자율성이라는 가상에 객관적 토대를 마련해준다. 이 가상은 철학 - 즉 철학이라는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장 - 의 보수혁명가인 하이데거의 저작을 좀바르트나 슈판 같은 경제학자들의 저작이나, 슈펭글러나 융거 같은 문필가들의 저작과 비교하는 일을 선험적으로 금지하거나 거부하는 데 활용될 수 있다 -- 흔히들 하이데거를 이 자들과 매우 가까이 놓고 언급하려 들곤 했겠지만, 이것은 오직 '다른 모든 조건이 같다면'이라는 식의 추론이 불가능하지 않은 한에서이다."(12쪽, 강조는 원문)

보통은 이런 대목을 만나면 내용이 머릿속에 정확하게 그려지지 않기 때문에 나는 영어본도 같이 참조한다(이 책은 러시아어로도 번역돼 있지만 아쉽게도 나는 구입해두지 않았다). 이 대목은 이렇게 영역돼 있다: "Paradoxically, the 'field' effect, that is the effect operated on the production of philosophical discourse by the specific constraints of the philosophical microcosm, is just what gives an objective basis to the illusion of absolute autonomy. This effect can be invoked to prohibit or reject a priori any comparison of the work of Heidegger, a conservative revolutionary in philosophy (that is, in the relatively autonomous field of philosophy), with the works of economists like Sombart and Spann or political essayists like Spengler or Junger, who would appear to be temptingly similar to Heidegger, if this were not precisely the kind of case where it is impossible to argue in terms of 'other things being equal'."(강조는 나의 것)  

'장(champ, field)'이란 건 부르디외 고유의 용어다. 상대적 자율성을 갖고 있는 영역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철학 또한 하나의 '장'이다. 때문에 장의 효과, 장으로서의 효과를 갖는다. 그 효과란 철학은 외부(사회)로부터 자율적이라는 환상, 곧 '절대적 자율성'이란 환상에 객관적 토대를 부여해주는 것이다. 그런 내용을 나대로 옮기면, "'장'의 효과, 즉 철학이란 소우주의 특수한 제약들이 철학 담론의 생산에 미치는 효과는 역설적으로, 철학이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영역이라는 환상에 객관적인 토대를 마련해준다."

이어지는 문장의 주어를 국역본은 '이 가상'으로 봤는데, 영역본에 따르면 '이 효과(this effect)'이다(의미상 큰 차이가 벌어지는 건 아니지만). 두번째 문장을 옮기면, "이 효과는 철학, 곧 철학이라는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장에서 '보수혁명가'인 하이데거의 저작들을 좀바르트나 슈판 같은 경제학자들의 저작들과 비교하거나, 다른 조건들이 같다는 조건하에 슈펭글러나 윙어(융거)와 같은 정치 에세이스트들이 하이데거와 유사하다고 말하는 걸 선험적으로 금지하거나 거부하게끔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보통 우리는 철학자의 저작을 경제학자나 에세이스트의 저작과 동급에 놓고 비교하는 걸 금지하거나 거부하는데, 그럴 경우에 철학이란 장이 갖는 '자율성'이 침해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부르디외가 보기에 이건 '환상'이다. 이러한 판단에서 부르디외는 자신의 하이데거 읽기의 방법론을 '이중의 거부' 위에 구축한다(부르디외 사회학의 기본적인 방법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적절한 분석은 이중의 거부 위에 구축된다. 그것은 우선 텍스트를 그것이 생산된 가장 일반적인 상황으로 곧바로 환원해버리려는 시도를 거부한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철학적 텍스트가 절대적 자율성을 지니고 있다는 주장, 또 이 주장과 상관적으로 모든 외적인 참조를 거부하려는 방식 역시 거부한다."(12-13쪽)

"Any adequate analysis must accommodate a dual refusal, rejecting not only any claim of the philosophical text to absolute autonomy, with its concomitant rejection of all external reference, but also any direct reduction of the text to the most general conditions of its production." 

영역본으로 미루어 보아 원문은 한 문장으로 돼 있을 텐데, 역자는 두 문장으로 나누었다. 그건 독자의 가독성은 어느 정도는 고려했다는 의미다. 결과적으로 덜 팍팍하게 읽힌다. 그런 고려를 조금 더 밀고나가면 이렇게 옮길 수도 있을 것이다(영역본의 중역인 만큼 다소간의 편차는 있을 것이다).

"모든 적합한 분석은 이중의 거부를 잘 조화시켜야만 한다. 즉 철학 텍스트를 그 생산의 일반적인 조건들로 막바로 환원시키는 시도를 거부해야 할 뿐만 아니라 철학 텍스트가 절대적 자율성을 갖기 때문에 그 외부와는 전혀 무관하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거부해야 한다." 

이러한 전제하에 부르디외가 제안하는 독해 방법은 이렇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모호성에 따라 규정되는 글, 말하자면 두 정신적 공간에 대응하는 두 사회적 공간에 준거하여 규정되는 글에 대해서는, 철학적 독해와 정치적 독해라는 대립적 구도를 포기하고 이중적 독해, 곧 정치적이면서도 철학적인 독해를 해야만 한다."(13쪽, 강조 원문)

이러한 '이중적 독해'를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가? "나치와 가깝다는 이유로 하이데거 철학을 비난하는 비방자든, 나치참여와 하이데거 철학을 분리시키는 찬양자든 다음과 같은 점을 무시한다는 점에서는 서로 일치한다. 곧 하이데거의 철학이란 철학적 생산장이 강요하는 특수한 검열 때문에, 하이데거를 나치즘에 밀착하게 했던 정치적 윤리적 원리들을 철학적으로 승화시킨 것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는 점 말이다."(14-15쪽, 강조 원문)

여기에 부르디외 하이데거론의 요체가 정리돼 있다. 나치와의 연루를 이유로 그를 거부하는 하이데거 반대자들이나 그의 나치 동조와 철학을 분리키시는 하이데거 옹호자들이 모두 놓치고 있는 점을 자신이 이 책에서 입증해 보이겠다는 것. 그것은 "철학이란 철학적 생산장이 강요하는 특수한 검열 때문에, 하이데거를 나치즘에 밀착하게 했던 정치적 윤리적 원리들을 철학적으로 승화시킨 것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는 점"이다. '불과할 수도 있었다'? 영역은 이렇다: "Heidegger's philosophy might be only a sublimated philosophical version, imposed by the forms of censorship specific to the field of philosophical production, of the political or ethical principles which determined the philosopher's support for Nazism."

부르디외의 입장을 정리하면 이렇다. (1)하이데거의 정치적 혹은 윤리적 원칙은 그를 나치즘에 대한 지지로 이끌었다. 즉, 그의 나치 연루는 우연적인 것이 아니다. (2)하지만 그러한 입장을 철학 담론으로 전개할 수는 없었다. 철학 장의 검열 때문에(프로이트가 말하는 '꿈의 작업'과 마찬가지다. 여기서는 부르디외가 직접 프로이트의 용어를 쓰고 있기도 하고). (3)이러한 곤궁의 타개책으로 하이데거는 자신의 정치적 윤리적 원칙들을 철학적으로 '승화'시켰다. 그렇게 해서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정치적 존재론'으로 재해명된다. 그것이 부르디외가 의도하는 바이다. 다 따라 읽지는 못하더라도 이 정도는 '상식'으로 챙겨둘 만하다...

08. 04. 20.








P.S. 하이데거와 나치즘에 대한 상세한 분석/해명은 박찬국 교수의 연구서를 더불어 참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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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나무 2008-04-21 09:14   좋아요 0 | URL
쏟아져 나오는 책들을 최대한 읽겠다는 읽고 싶다는 읽어야 한다는 욕구나 희망 부담감 따위 전혀 없이 가끔은 심장이 가렵도록 읽고 싶은 책들을 봅니다.이를테면 에밀 시오랑처럼 말입니다. 몇 권의 책을 함께 주문했는데 이번에도 모두 흡족하진 못할지도 모릅니다. 사실 제겐 로쟈님의 페이퍼 이상이 아닌 책들도 많습니다. 저는 가끔 로쟈님의 페이퍼를 옮겨적으며 봅니다. 치매 예방에 좋은 훈련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뀐 그림이 썩 좋네요. 그런데 사진이 아니라 그림인가요? 언제나 그림이 아주 잠깐 비치고 페이퍼로 덮여서 볼 수 없는데 바탕그림을 보는 방법은 없나요? 몹시 헝클어진 새둥우리 같은 남자의 뒷통수를 좀 오래 보고 싶어서요.ㅎㅎ

로쟈 2008-04-21 10:10   좋아요 0 | URL
독일 풍경화가 카스파 프리드리히의 가장 유명한 그림입니다. 국내에 화집도 나와있고요.^^ 수즈달 풍경사진이 가을 것이어서 교체한 것인데, 사이즈들이 다들 안 맞아서 결국 이 그림으로 가게 됐습니다...
 

지난주에 삼성 특검 결과가 발표되었다. 조세포탈 등의 혐의에 대해서만 불구속 기소한다는 것이며 예상대로(?) 상식에 미치지 못하는 내용이다(아직 종결되지 않았지만 이 사건의 전말은 한국학을 공부하는 이들에게는 한국사회를 이해하는 데 아주 요긴한 자료가 될 듯하다. 그게 이 사건의 의의가 될까?). 이에 대한 법원의 판결을 남겨두게 됐는데, 애초에 이 비리사건을 폭로한 김용철 변호사의 인터뷰기사와 재판부에 대한 소개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08. 04. 19) "거짓말이었다면 나를 구속하라”

“나를 구속하라.” 말로는 누구나 삼성과 이건희 회장을 단죄할 수 있다. 조준웅(67) 삼성 특별검사도 지금으로부터 121일 전 특검에 임명되자 “검찰 등 수사기관이 어떤 특정인이나 특정 단체에 면죄부를 주기 위해 수사하는 것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고 말했다. 지난 17일 특검팀이 내놓은 150여쪽에 이르는 수사결과 발표자료는 “차명주식은 이건희 회장 개인 것이 분명하다”고 거듭 밝혔다. 그러나 같은 발표자료에 등장하는 김용철(50) 변호사는 “신빙성이 의심되고, 모순에 차고, 수시로 변하는” 남자였다. 김 변호사가 ‘나를 처벌하라’고 나선 이유다.

18일 아침 김 변호사를 서울의 한 호텔에서 만났다.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새벽 3시까지 변호인들과 반박자료를 준비했다고 한다. 특수부 검사 출신인 그는 “수사 결과를 발표하며 참고인 진술을 저렇게 조목조목 물어뜯는 것은 처음 봤다”고 말했다. “비자금과 로비 의혹을 대충 덮을 것은 예상했지만 나를 물어뜯을지는 정말 몰랐다”는 것이다.

특검팀은 정·관계 로비 의혹 수사 결과 발표문의 상당 부분을 ‘김 변호사의 진술이 얼마나 신빙성이 없는지’를 설명하는 데 할애했다. 심지어 삼성 본관에서 돈을 주고받는 정황을 설명하기 위해 김 변호사가 특검팀에 그려준 사무실 약도조차 ‘로비는 없었다’는 결론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됐다. 그는 “사람 말을 비틀어서 저렇게도 만들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김 변호사는 특검팀의 로비 의혹 수사 태도에 넌더리를 쳤다. “압권은 특검팀에서 자체적으로 만든 ‘명단’입니다. 제가 삼성 법무팀장으로 있을 당시의 검찰 주요 보직자 명단을 내밀며 ‘확인’을 해 달라고 하더군요. 이들이 나중에 검찰총장이나 장관이 될 때 로비 의혹이 불거지면 ‘특검 수사에서 해명됐다’며 도와줘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죠. 환장하겠더군요.” 그는 확인해주지 않았다. 대신 마무리 조사를 받으며 “‘면죄부 조사면 더이상 진술 안 하겠다’는 내 말을 반드시 조서에 남겨 달라”고 요구했다.

그는 특검팀에 출석해 20여 차례 조사받았다. “내 말이 앞뒤가 안 맞는다고 추궁당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그런데 왜 수사 끝나고 나를 씹는지 모르겠네요.” 정작 수사 시작부터 종료까지 수시로 말을 바꾼 것은 삼성 쪽이었다. “<행복한 눈물>을 보세요. 애초 삼성 쪽은 홍라희씨가 샀다고 했다가 곧바로 아랫사람 착각이었다고 말을 바꿔요. 그런데 특검팀은 그걸 인정해주거든요.”

“수사 끝난 뒤 왜 나를 깎아내리는지 모르겠어”

그는 특검팀이 “(김용철과 삼성 가운데) 누가 수사 대상인지 전혀 모르는 거 같다”고 했다. 수시로 바뀌는 삼성 쪽 해명은 별다른 확인도 없이 그때마다 인정했던 특검팀을 삼성은 어떻게 생각할까. “이런 특검팀을 얼마나 비웃을까요. 아마 고마워하지는 않을 겁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줄 필요는 없을 텐데’ 하면서.”

김 변호사는 이번 수사를 수술에 빗댔다. “의사가 수술 끝나고 뱃속에 가위 넣고 꿰매도 환자들은 몰라요. 우리도 특검팀이 뭘 수사했는지 모르잖아요?” 덜 도려낸 암세포는 나중에 온몸으로 퍼진다. “국가기관·언론·지식인을 모두 장악하고 있다는 삼성의 위력이 드러난 결과죠. 이 위력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악성종양입니다.” 그래서 이번 사건의 가장 큰 성과는 역설적이게도 삼성의 힘을 다시 한번 확인한 데 있다고 김 변호사는 여기고 있다. “그 힘의 실체를 저 역시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수사 결과가 저를 공격하지 않습니까?”

그는 특검팀 안에서 ‘빅딜’도 아닌 ‘그레이트 딜’이라는 말을 몇 번 들었다고 했다. “특검팀이 수사를 풀어갈 복안이 있다고 하길래 뭔가 했습니다. 이제 보니 불구속 기소를 하는 대신 돈의 원천을 덮어주고 수사를 검찰에 넘기지 않기로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로비 당사자들에게서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당한 김 변호사는 자신에게도 ‘거래’가 들어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특검팀에서 ‘로비 의혹이 의심은 가지만 증거가 없다’는 식으로 결론을 내주겠다고 했습니다. 고소당한 게 문제되지 않도록 해주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검찰에서 원하는 것이냐’고 물었더니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특검, 삼성인지 김용철인지 수사대상 헷갈려”

그는 “삼성이 수십년 동안 감춰 놓은 돈을 국가예산으로 찾아서 합법적으로 세탁까지 해준” 특검 수사 결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런 수사 결과를 보고 믿을 국민이 있을까요?” 하지만 걱정도 많다. “한달 뒤에 누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겠습니까? 앞으로 어떤 사건을 구속 수사할 수 있겠습니까? 제헌절쯤 되면 벌써 집행유예 판결이 나지 않았을까요?”

그는 이건희 회장 일가와 삼성을 세속의 법정이 아닌 ‘역사의 법정’에 세우겠다고 했다. 불씨가 남으면 더 큰 불로 번지기 마련이다. “인생을 걸 만한 일을 진짜로 찾은 겁니다. 저나 사제단, 다른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분들이 동참할 것입니다.” 수사 결과가 발표되던 날 밤 사제단 신부들은 김 변호사에게 “명예를 함께 지키자”고 했다고 한다. “사제단과 제가 제기한 의혹들이 거짓이라면, 세상을 이렇게 시끄럽게 한 죄는 엄청납니다. 거짓말이라면 허위사실로 세상을 흔든 죄를 물어 저를 구속시켜야 합니다.”(김남일 기자)



한국일보(08. 04. 19) 삼성 재판 맡은 민병훈 부장판사

조준웅 삼성 특별검사가 불구속 기소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등 전ㆍ현직 삼성 경영진 10명에 대한 재판을 서울중앙지법 형사23부가 맡게 되면서 이 부의 민병훈(47ㆍ사시26회) 부장판사에게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민 부장은 짧은 기간이라도 실형을 선고하고 수시로 법정구속을 할 정도로 양형이 엄중하다. 또 논리에 맞지 않는 검찰 주장에는 잇달아 무죄를 선고할 정도로 법 판단이 깐깐하다. 이에 따라 민 부장이 이번 사건을 맡은 게 삼성 측에 독이 될 지, 특검팀에 올가미가 될 지 그 향배가 주목된다.
18일 서울중앙지법 등에 따르면 당초 삼성 사건은 경제 전담 재판부인 형사 24부나 25부에 배당될 것으로 예상됐다. 그러나 법원은 “24부,25부에 사건이 많다”며 사건을 부패 전담 재판부인 형사23부에 배당했다.

민 부장은 개인적으로 삼성 사건에 상당한 관심과 의욕을 보여온 것으로 알려졌고, 법원이 이번 사건에 적극적인 민 부장에게 배당했다는 분석도 있다. 법원의 한 관계자는 “경제,사회적으로 파장이 큰 사건인데다 치열한 법리 공방이 예상되는 만큼 믿고 맡길 수 있는 재판장을 고른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민 부장은 일단 유죄가 인정되면 집행유예보다는 단기라도 실형을 선고하고, 자주 법정구속을 하는 등 양형이 엄중하기로 유명하다. 민 부장은 최근 사건의뢰인의 투자금 13억여원을 가로채 불구속 기소된 이모 변호사에게 징역 3년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다. 그는 또 지난해 12월 제이유그룹에서 2억여원을 받아 불구속 기소된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원에 대해 “국회의원을 3차례나 지낸 사람이 공무원의 직무와 관련해 2억원이라는 거금을 받아 죄질이 나쁘다”며 징역 2년을 선고하고 역시 법정구속했다.

그렇다고 민 부장이 무조건 검찰의 기소 내용을 수용하는 판사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민 부장은 2006년 말 대검 중수부가 유회원 론스타코리아 대표에 대해 청구한 구속영장을 4차례나 기각, 법원과 검찰의 갈등을 촉발시킨 주인공이다. 이로 인해 당시 검찰은 민 부장을‘공공의 적 1호’로 꼽기도 했다. 그는 또 지난해 10억원 상당의 대출 사례금을 받아 기소된 상호저축은행 회장 사건에서 검사가 공소장에 도장만 찍고 실수로 서명을 빠뜨리자 “공소의 효력이 없다”며 공소기각 판결해 검찰을 경악케 했다.

이에 따라 삼성 사건에서 기소 내용이 받아들여질 경우 이 회장 등에 대한 처벌이 강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2억원의 뇌물수수를 ‘나쁜 죄질’이라고 판단하는 민 부장에게 1,128억원의 양도소득세 포탈과 에버랜드 등에 끼친 2,500여억원 가량의 손실(배임)은 큰 범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꼼꼼하게 법리를 따지는 스타일상 특검팀 기소 내용이 전부 인정될 것이라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이 회장은 에버랜드 전환사채(CB) 헐값 발행 사실을 보고만 받았을 뿐, 지시 부분은 부인하고 있다.

특검팀도 물증 없이 정황증거로만 기소한 것이어서 자칫 무죄가 선고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민 부장은 특검법에 따라 1심 재판을 3개월 내에 끝내야 하는 만큼, 앞으로 석달간 서초동 법정은 치열한 공방으로 뜨겁게 달궈질 예정이다.(고주희기자)

08. 04. 19.

P.S. 흠 오늘이 4.19기념일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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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8-04-19 12:46   좋아요 0 | URL
4.19인데 4.19 기사는 찾아보기 힘들고, 삼성은 멀리 도망가고... (둘이 무슨 관계인거야) ( '')

로쟈 2008-04-20 10:08   좋아요 0 | URL
잊혀진 4.19란 기사는 보이더군요.--;

노이에자이트 2008-04-19 23:28   좋아요 0 | URL
대통령은 임기가 있는데 재벌총수나 언론사주는 임기가 무제한이라서...중앙일보는 김용철을 노리고 있더니 결국 일제사격 시작했더군요.

로쟈 2008-04-20 10:08   좋아요 0 | URL
요즘은 다들 너무 '노골적'이예요.--;

2008-04-21 08: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4-21 1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Koni 2008-04-21 09:27   좋아요 0 | URL
세상은 참 읽기 어려워요.

로쟈 2008-04-21 10:15   좋아요 0 | URL
읽기는 어렵지 않지만, 너무 꼬여 있는 거 같습니다. 그럴 때는 그냥 끊어버려야 하는데...
 

주중에 읽어보려고 했던 기사를 시간을 내 옮겨놓는다. 안톤 체홉의 희곡 <세자매> 공연에 대한 리뷰인데, 이번 작품은 특히 이윤택 연출이어서 눈길을 끈다. 공연을 직접 관람할 여유는 없지만 리뷰만으로도 감은 잡아볼 수 있겠다(http://www.culturenews.net/read.asp?title_up_code=004&title_down_code=002&article_num=9160).

컬처뉴스(08. 04. 16) 희망과 절망을 담아낸 통속성

19세기 사실주의 연극의 거장 안톤 체홉은 반복되는 일상에 무기력하게 매몰되어가는 인생의 모습을 특유의 연민어린 시선으로 그려낸 것으로 유명하다. 일면 비극적인 작품으로 ‘오독’되곤 하는 그의 희곡들은, 사소한 것들에 집착해 결국 생의 진수를 놓쳐 버리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폭로한다는 측면에서 일종의 블랙코미디와 같은 강한 희극성을 지니고 있다. 오는 4월20일까지 게릴라 극장에서 공연되는 <세자매>는 선이 굵은 중견 연출가로 이름난 이윤택 씨가, 이러한 원작의 희극성을 증폭시켜 ‘대중통속극’의 맥락으로 재해석한 이색적인 작품이다.

어린 시절을 모스크바에서 보낸 올가, 마샤, 이리나는 장교인 아버지를 따라 러시아 변방에 위치한 작은 소도시로 내려왔다. 예기치 않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더 이상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없었던 이들 자매는, 원치 않은 현실을 견디며 늘 아름다웠던 도시 ‘모스크바’를 꿈꾸며 살아간다. 자신에게 맞지 않은 직장 때문에 늘 갈등하는 맏딸 올가, 결혼하면서 처음 품었던 기대와 너무나 다른 남편의 모습으로 인해 불행해 하는 마샤, 그리고 암울한 현실 가운데서도 꿈꾸기를 단념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막내 이리나의 모습은 실상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다지 낯설지 않은 청춘의 모습이다. 사방이 가로 막혀 있는 갑갑한 현실의 벽 앞에서,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세 자매는 그녀들의 구원으로서 ‘모스크바’를 외친다. 하지만 꿈꾸는 것과,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결단하고 실천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꿈을 꾼다. 견디기 힘든 현실을 견디기 위해서, 혹은 정말 그런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자신이 원하는 삶을 꿈으로 그리며 살아간다. 하지만 거기까지이다. 비루할지언정 너무나 안정되어 버린 일상을 걷어차고,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불안한 미래의 꿈을 이루기 위해 미지의 시간 속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선택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심한 시간은 흐르고, 1막에서 ‘모스크바’를 외치던 세 자매는 2막과 3막 그리고 4막에서도 여전히 그 곳에 머물러 있다. 교사직을 그만두려고 하던 올가는 교장이 되고, 마샤는 마찬가지로 불행한 결혼 생활로 고통스러워하는 ‘베르시닌’ 중령과 동병상련의 힘겨운 사랑에 빠지며, 이리나는 무의미한 직장 생활에 어떻게든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리고 세 자매에게 희망과 같았던 남동생 ‘안드레이’는 동물적인 본능에 충실한 ‘나타샤’의 유혹에 빠져, 너무 쉽게 교수가 되려던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현실에 안주하고 만다.

그렇게 멈추어 서 있는 세 자매의 삶은 점점 더 감당할 길 없는 가혹한 현실에 질식당해 간다. 오직 자신이 낳은 아이들의 안녕 밖에는 관심이 없는 나타샤에 의해 자신의 방을 빼앗기는 순간, 이리나는 깨닫게 된다. 이제 더 이상 ‘모스크바’를 꿈꿀 수 없다. 정말 그 곳에 갈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렇듯 체홉은 그저 멈추어 서 있었기에 좌절된 꿈을 읊조릴 수밖에 없었던 세 자매의 모습을 통해 역설적으로 말한다. 갔어야 했다. 떠났어야 했다. 더 늦기 전에 결단했어야 했다. 하지만 늘 대개의 인생이 그러하듯 깨달음은 뒤늦게 찾아오고, 일과 기회 그리고 사랑은 어느 덧 희미한 자취만을 남긴 채 추억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꿈이 사라져 버린 공간에 무엇이 남을 수 있을까? 군대의 이동과 함께 텅 비어버린 도시에 남겨진 세 자매 곁에는 속물스런 시의회 의원이 된 안드레이와 이기적인 욕망의 화신으로 변해 버린 그의 아내 나타샤 만 남아있을 뿐이다. 생존 본능을 위한 이해타산에 밝은 나타샤의 세계는 점차 꿈의 흔적을 부여잡고 위태롭게 서 있는 세 자매의 세계를 거침없이 침식해 들어온다. 이런 이유로 서로를 힘겹게 의지한 채 삶의 의미와 미래의 희망을 애써 부르짖는 세 자매의 마지막 모습은 보는 이들의 마음을 더욱 안쓰럽게 만든다. 

간다, 간다 하면서도 결국에는 가지 못하고 현실을 맴돌고 주저앉고 마는 허다한 인생의 모습을 섬세한 시선으로 포착해 그린 체홉의 <세자매>에서, 이윤택 연출은 그 이면에서 꿈틀대고 있는 격렬한 욕망을 포착한다. 그리고 그는 원작에 대한 전통적인 접근방식으로서 은유와 절제의 방식을 파하고, 도리어 노골적인 표현 방식으로 등장인물들의 본심을 폭로한다.

당시 사회 통념상 은밀한 방식으로 묘사되었던 나타샤의 유혹은 안드레이를 거의 덮치는 식의 본능에 충실한 모습으로 형상화 되고, 원작에서 서로에 대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고통스러워하는 마샤와 베르시닌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격렬한 키스와 포옹을 주저하지 않는다. 군의 이동으로 인해 무기력하게 떠나는 베르시닌의 등에 뛰어 올라 머리채를 움켜쥐는 마샤의 파격적인 모습은 이전의 어떠한 <세자매> 공연에서도 볼 수 없는 ‘통속적인’ 동시에 한국적인 정한의 표현 방식이었다.

사실 이전의 전통적인 방식의 공연들에서 <세자매>의 등장인물들은 비록 내면에는 인생의 고뇌와 욕망이 꿈틀대고 있을지언정, 겉으로는 세련되고 예의바른 태도로 각자의 진심을 감추곤 했다. 하지만 이윤택 연출은 이런 등장인물들의 모습이 지극히 ‘속물적인’ 보통 사람들의 그것에 다름 아니라고 해석한다. 베르시닌은 불행한 결혼 생활을 감추기 위해 늘 인류나 조국의 미래에 관한 멋진 장광설을 늘어놓는 한심한 사람이며, 그런 베르시닌의 번지르르한 겉모습에 빠진 마샤는 그와 헤어지는 마당에도 자신의 신발을 챙기는, 말 그대로 ‘아줌마’다.

안드레이는 점차 몰락해 가는 집안의 현실은 물론, 아내 나타샤의 공공연한 외도를 애써 외면한 채 다만 안정만을 추구할 뿐이며, 그의 아내 나타샤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주위에 대한 영향력을 장악해 성공하려는 탐욕스런 신자유주의 시대의 화신과 같은 존재이다. 이윤택 씨는 이번 작품을 통해 체홉의 매력이란 지극히 속물적인, 그런 까닭에 우리와 같이 평범한 보통 사람의 희망과 절망, 욕망과 좌절을 담아낼 수 있는 특유의 통속성에 있다고 주장한다.

체홉 작품 특유의 침묵과 절제의 미학을 포기하고, 통속극 방식의 자극과 도발의 독법을 선택한 이윤택 연출의 <세자매>는 분명 쉽고 재미있는 대중적인 작품으로 다시 태어났다. 하지만 그만큼 원작이 지닌 정서, 곧 가고 싶고, 말하고 싶고, 드러내고 싶었지만, 결국 끊임없는 망설임 속에 인생을 놓쳐버린 세 자매의 회한어린 정서는 느끼기 힘들어졌다. 어떤 방식의 해석이 원작 또는 관객의 취향에 보다 적합한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이제 관객의 몫으로 남아있다. 다만 과거 전통적인 방식의 해석과 차별화 된 방식의 새로운 <세자매>가 체홉의 작품 보는 즐거움을 더하게 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한 듯 보인다.(박준용_연극평론가)

08. 04. 18.

P.S. 로렌스 올리비에가 감독한 영화 버전의 <세자매>(1970)는 http://www.youtube.com/watch?v=saiH6HJH2Zw 참조. 도입 장면에서 암시되지만 세자매는 세월에 흐름에 맞서고자 하는 운명의 세 여신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윤택 버전에서는 너무 '속물'로만 그려놓은 것이 아닌가도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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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4-20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홉의 소설은 재밌는데 희곡은 아직...왜 희곡은 읽기가 싫은지 모르겠어요.그래서 셰익스피어 전집도 사놓은지 5년이 되었는데 아직도 안보고 있어요.

로쟈 2008-04-20 00:25   좋아요 0 | URL
독서일기를 내려면 읽어주셔야 할 거 같은데요.^^

노이에자이트 2008-04-22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주중에 서점에 몇 차례 들러본 탓인지 주말 북리뷰에 올라온 책들 가운데 낯선 책은 눈에 띄지 않는다. 다만 실물을 만져보지 못한 책이 하나 있는데 알렉상드르 마트롱의 대작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그린비, 2008)가 그것이다. 제목부터 사실 학위논문 타입인데, 실제로도 그런 것으로 안다(원저는 1969년에 나왔다). 마치 들뢰즈의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가 그렇듯이(이 책도 박사학위 부논문으로 제출되었던가 그렇다). 

저자인 마트롱은 평생을 스피노자만 파고 들어간 소위 '전문가'이다. 당연히 이 책 또한 '교양서'라기보다는 '전문서'로 분류되어야겠지만 '스피노자 붐'에 고무되어 서가에 꽂아놓을 수는 있겠다. 역시 최근에 나온 피에르 프랑수아 모로의 <스피노자>(다른세상, 2008) 같이 얇은 책으로 먼저 워밍업을 한 다음에 내처 몇 장 들춰볼 수도 있겠고(모로는 마트롱의 제자인 듯하다). 개인적으론 저자가 획기적인 스피노자 연구서를 썼다는 사실이 아니라 이런 학술서가 전격적으로 번역돼 나왔다는 사실이 놀랍다(다른 분야의 연구자들이라면 부럽기도 하고 좀 뜨끔한 일이기도 하겠다). 이런 기세라면 <신학 정치학 논고>도 조만간 번역돼 나올지도 모르겠다. 일단은 리뷰기사를 옮겨놓는다(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82743.html).   

한겨레(08. 04. 19) '윤리학’ 스피노자에서 ‘정치학’ 스피노자로

‘스피노자 부흥’은 20세기 후반에 일어난 지적 사건 가운데 하나다. 그 사건이 발생한 지역은 프랑스이고, 발생 시점은 1960년대 말이다. 1969년을 전후해 마르시알 게루의 <스피노자>, 질 들뢰즈의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그리고 알렉상드르 마트롱의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가 거의 동시에 출간됐다. 스피노자가 헤겔-마르크스의 지위를 위협·대체하며, 인간·사회·정치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철학적 준거 가운데 하나로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그 사건을 일으킨 저작 중에서도 특히 마트롱의 저작은 철학 전문 연구자들에게 깊은 충격을 주었고, 그 충격은 긴 잠복기를 거쳐 1990년대 이후 대중적 파급 효과를 낳았다. 현대 스피노자주의의 탄생을 알린 이 책이 스피노자 전공자들의 번역 작업을 통해 우리말로 나왔다.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1632~1677·사진)는 현대적으로 재해석되기 전까지는 ‘생계를 위해 안경알을 깎은 은둔의 현자’ 아니면 ‘범신론을 주창한 신비주의자’라는 이미지로 통용됐다. 종교에 대한 도전적 해석으로 일찍이 유대 공동체로부터 파문당하고, 또 <신학-정치학 논고>가 17~18세기 정치적 지배세력에게 공포의 대상이 됐을 정도로 당대 현실과 깊이 연루돼 있었는데도, 그는 오랫동안, 탈속세적 은자로 묘사됐다. 그의 사상에 관한 연구도 주저인 <윤리학>(에티카)에 집중됐고, 정치철학 저술인 <신학-정치학 논고> <정치론>은 논외로 밀려나거나 <윤리학>과 무관한 부차적 저술로 간주됐다. 그러나 마트롱에 이르러 스피노자는 ‘윤리학’의 스피노자를 넘어 ‘정치학’의 스피노자로 재탄생했다. 특히 마트롱의 저서는 윤리학에서 정치론까지 스피노자 사상을 수미일관한 통일적 전체로 다시 세움으로써 스피노자 연구에 관한 한 완전히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책의 가장 현저한 특성은 ‘방법론적 엄밀성’이다. 스피노자 <윤리학>이 수학적 추론과 논증의 방식을 따르듯이 마트롱의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도 하나의 명제에서 이후의 명제가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빈틈없는 논리적 방식으로 서술된다. <윤리학>에서부터 <정치론>까지 스피노자의 모든 텍스트가 그 내적 논리를 따라 배치되면서 한편의 드라마처럼 펼쳐져 논리의 건축물로 일어서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의 또다른 특성은 ‘정치 문제’야말로 스피노자의 진정한 철학적 문제였음을 입증한다는 데 있다. 옮긴이들은 말한다. “스피노자와 정치라는 문제는 이후 네그리나 발리바르에 의해 한층 급진적으로 제시되지만, 그럼에도 처음으로 정치의 문제를 스피노자의 ‘진정한 K제기했다는 점이야말로 이 책의 의의라 할 수 있다.”

번역본으로 900쪽에 이르는 이 방대한 저작의 첫 문장은 스피노자 <윤리학>의 유명한 명제로 시작한다. “각 사물은 자신의 존재역량에 따라 자기 존재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코나투스 테제’로 불리는 이 명제에 대해 마트롱은 “스피노자의 정념론·정치학·도덕론 전체를 아우르는 단일한 출발점”이라고 단언한다. 스피노자 철학의 모든 것이 이 명제를 뿌리로 삼아 거대한 수목으로 자라오른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코나투스’(conatus)란 ‘어떤 개체 안에 존재하는 자기 보존의 무의식적 의지 또는 욕망’이라고 풀어쓸 수 있는 개념이다. 어떤 개체든, 그것이 사람이든 자연이든, 동물이든 사물이든, 이 코나투스를 가지고 있다고 스피노자는 본다.

이 코나투스에서 ‘정념’의 문제가 뒤따른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정념은 기쁨·슬픔, 사랑·미움과 같은 정서적 양태들을 가리킨다. 기쁨이란 “정신이 자기 코나투스와 같은 방향으로 작용하는 외적 원인의 영향 하에서 더 큰 완전성으로 이행할 때 느끼는 정념”이다. 반면에 슬픔이란 “정신이 자기 코나투스와 대립하는 외적 원인의 영향 하에서 더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할 때 느끼는 정념”이다. 풀어쓰면, 기쁨이란 자기보존 욕망이 실현돼 자기가 더 커질 때 느끼는 감정이며, 반대로 슬픔이란 자기보존 욕망이 방해받아 자기가 더 작아질 때 느끼는 감정이다. 또 사랑이란 기쁨의 정서를 일으키는 대상에 대한 긍정적 집중이며, 반대로 미움은 슬픔의 정서를 일으키는 대상에 대한 부정적 집중이다.

그런 정념적 존재로서 ‘개체’는 ‘개인’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공동체’도 하나의 집합적 개체를 이룬다. 그렇다면 그 집합적 개체로서 공동체 안에도 코나투스와 거기에 뒤따르는 기쁨·슬픔, 사랑·미움의 정념이 있을 것이다. 여기서 기쁨과 사랑이 커진다면 그 공동체는 완전에 더 가까워진다. 마트롱은 바로 이 지점에 스피노자 철학의 핵심적 중요성이 있다고 말한다. 스피노자 철학은 ‘해로운 정념’을 줄이고 ‘유용한 정념’을 키울 정치체제를 어떻게 하면 만들 수 있을지를 논구하고 있다는 것이다.(고명섭기자)

08. 04. 18.

P.S. 마트롱이란 이름이 아주 낯설지는 않은데, 알고 보니 알튀세르 저작들을 주로 편집한 이가 프랑수와 마트롱이기 때문이다. 서로 인척 관계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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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08-04-19 01:51   좋아요 0 | URL
번역서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는 우리말 제목에 문제가 있습니다. 다른 게 아니라, 부사격 조사 “~에서”를 위와 같은 명사구에서처럼 쓰는 것은 오류입니다. 관형격 조사 “~에서의”로 고쳐야 합니다. 혹은 그냥 『스피노자 철학의 개인과 공동체』로 하는 것이 올바를 것입니다.

예컨대, 〈번역에서 오독과 오역〉, 〈한국어에서 조사의 문법적 성격〉, 〈이명박 정부에서 대운하 건설 계획의 시대착오적 성격 고찰〉, 〈한국 대학원생들에서 우리말 문장 구사 실태 연구〉 따위의 논문 제목이나 책 제목이 있다고 칩시다. 모두 얼마나 어색하고 이상합니까? 관형격 조사를 쓸 자리에 부사격 조사 “~에서”를 잘못 갖다 붙였기 때문입니다.

바로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의 제목도 이런 사례와 똑같이 어색하고 잘못된 오류를 저지른 사례입니다. 요즘 한국의 대학원생들이나 젊은 교수들 사이에 “~에서 뭐뭐” 식의 제목 붙이가 성행하고 있는데요, 올바른 우리말 구사에 대한 개념을 결여한, 말 그대로 개념 없는 대학원생들이나 교수들의 오류에 지나지 않습니다.


qualia 2008-04-21 13:04   좋아요 0 | URL

juin 님, 토론 감사합니다. 몇 가지 사항에 대해 답변드립니다.

① juin 님 : 기존의 용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의미를 혼동하게 할 위험이 크지 않다면 기존의 문법적 분류에 의해서 '완전하지 않은' 문장이 통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콸리아qualia 답변 : 저도 기본적으로는 juin 님의 위 의견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경우에도 몇 가지로 나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 첫째, 위와 같은 허용 사항을 둔다고 해도, 무엇보다도 먼저 문법적으로 올바른지 아닌지 따지는 분석 작업이 반드시 선행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많은 사람들이 불완전한 말글 유형들을 현재 폭넓게 쓰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적법성 검토가 반드시 있어야 하고, 또 그에 대한 최종적 허용 · 수용은 일종의 제도적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언중의 일상적 · 탈문법적 · 시류적인 언어 사용이나 글쓰기에 대한 그와 같은 정리 작업 혹은 길잡이 작업이 없다면, 우리의 말글 생활에 엄청난 혼란을 불러올 것입니다.

㉡ 둘째, 고급 교양서나 학술서나 논문 따위에서 ‘완전하지 않은’ 문장을 (그것이 언중에서 통용된다고 해서) 갖다 쓴다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입니다. 적어도 출판계의 편집자, 번역가, 저술가 분들은 가능하다면(!) 단 하나의 오류도 저지르지 않도록 주의하고 주의해야 할 줄로 압니다.

㉢ 셋째, 제가 아래의 댓글에서 이미 밝혔듯이 부사격 조사 “~에서”를 관형격 조사처럼 사용하는 것은 문법적으로 적법성이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부사격 조사 “~에서”를 관형격 조사로 변칙 전용해도 된다는 법칙이나 규정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말의 미묘한 어감(말느낌)에 비춰볼 때도 그런 오용은 매우 어색합니다. 따라서 문법적으로 오류임이 분명한 것을 대중서도 아닌 학술서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에서처럼 사용한다는 것은 잘못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② juin 님 : 이 경우, '에서의'가 '에서'에 비해 더 무엇인가를 분명히 밝혀주는 것 같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 콸리아qualia 답변 :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이미 말씀드렸듯이, 우리말에서 조사는 의미의 미묘한 차이와 분화를 아주 다양하게, 따라서 아주 세밀하게, 따라서 훨씬 더 ‘분명하게’ 드러내주는 기능을 합니다. 한 문장에서 똑같은 조사 하나 가지고 붙였다 떼었다 하면서 180도 다른 의미를 전달할 수도 있는 게 우리말입니다. 또 그 똑같은 조사를 문장 성분의 어디에 어떻게 붙이느냐에 따라 한 문장의 의미가 변화무쌍하게 바뀝니다. 바로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과도 상통하는 얘기입니다. 따라서 “~에서”와 “~에서의”가 함축해줄 수 있는 의미의 차이는 매우 분명하다고 하겠습니다. 게다가 하나는 부사격, 다른 하나는 관형격이므로 기능도 다르고요. 기능이 다르면 당연히 함축하는 의미도 다르잖습니까? (이에 관한 내용은 너무나 평범하고,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기 때문에 구체적 용례는 생략하겠습니다).

③ juin 님 : '에서'로 멈춤으로써 겪는 미완의 느낌, 불안한 느낌은 적응의 문제가 아닐까 하는데, 혹자가 '에서의'에서 느낄 껄끄러움도 그에 못지 않게 강한 감정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 콸리아qualia 답변 : 비문법적이지만, 어감으로는 오히려 매끄럽고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말글이 분명 있습니다. 이와는 정반대로 문법적으로는 올바르지만, 어감으로는 껄끄럽고 덜컹대는 느낌으로 다가오는 말글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사실은 말글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데에 말느낌 혹은 어감의 문제는 본질적이기보다는 이차적 · 부차적이라는 것을 말해준다고 봅니다. (물론 어감의 문제가 이차적 · 부차적이라고 해서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따라서 ‘~에서의’가 껄끄러운 느낌을 준다고 해서 쓰지 못할 까닭이 전혀 없습니다. (참고로 저는 껄끄러움이나 어색함을 그다지 느끼지 않습니다. 다른 분들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에서'로 멈춤으로써 겪는 미완의 느낌, 불안한 느낌은 적응의 문제가 아닐까] 하고 말씀하셨는데요, 거듭 말씀드립니다만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와 같은 사용례는 분명 잘못이므로 적응의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관형격 조사로서 그 적법한 역할을 적법한 위치에서 제대로 하는 “~에서의”나 “~의”가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 굳이 잘못된 조사를 일부러 사용해가면서까지 적응을 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qualia 2008-04-26 17:02   좋아요 0 | URL

juin 님, 재반론 감사합니다. 답변이 늦어 매우 죄송합니다. 크게 두 가지로 나눠 답변 드리겠습니다.

① juin 님 → 그러나 qualia님의 답변으로도 아직 회의가 해소되지 않습니다. '에서의'라는 형태가 확신하시는 것처럼 정말 문법적으로 올바른 것인가, 즉 '에 있어서(의)'와 대동소이한 유래가 아닌가 해서 말입니다. 만약, 제 회의가 정당하다면, 문법적으로 바르지 않은 혹은 정통적이지 않은 '에서의'를 사용하는 것과 '에서'를 부사격에서 관형사격으로 확장적용하는 것, 두 대안이 생깁니다(이견이 없는 '(스피노자 철학)의' 를 제외할 때).

⇒ 콸리아qualia 답변 : 문법적으로 옳은 것은 확실합니다. 우리말은 “교착어”라고 하지 않습니까. 즉, “실질적인 의미를 가진 단어 또는 어간에 문법적인 기능을 가진 요소가 차례로 결합함으로써 문장 속에서의 문법적인 역할이나 관계의 차이를 나타내는 언어”라는 것이죠(네이버 사전 인용). 여기서 문법적 기능을 가진 요소란 바로 어미, 조사, 혹은 조사 상당 어구 따위를 가리킵니다.

우리말에서는 이 조사가 단독으로 쓰일 수도 있고, 서로 다른 조사 여러 개가 결합하여 하나의 복합 조사처럼 쓰일 수도 있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얼마든지 3중, 4중, 5중, 혹은 그 이상의 결합 조사가 쓰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실제로는 대체로 3중 조사까지만 쓰이지만).

아시다시피 “~에서의”는 〈에서 + 의〉로 분석할 수 있는 것이죠. 우리말 문법에서 완전히 정당한 조어법입니다. 사전을 살펴보면, “~에서”는 장소 · 출발점 · 기준점 따위를 나타내는 부사격 조사로 나와 있고, “~의”는 소유 · 소속 · 귀속 · 인과 따위의 관계를 나타내는 관형격 조사로 나와 있습니다. 따라서 “~에서의”는 두 개의 조사가 결합된 이중 조사인 것이죠.

사전을 보면 이와 같은 이중 조사가 많이 올라와 있습니다. 예컨대, “~에서라야”, “~에서부터”, “~에서야말로”, “~에서처럼”, “~에서조차” 따위는 모두 두 개의 조사가 결합된 이중 조사들입니다. 여기에서 파생되는 3중 조사도 흔히 쓰이는 것이 많죠. “한국에서조차도”, “한국에서부터도”, “한국에서까지도”와 같은 예를 들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조사들끼리 서로 결합해서 아주 다양한 의미의 분화를 산출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미묘한 의미 생성 능력 혹은 기능이 우리말 조사의 특징입니다. 이것이 곧 우리말의 뛰어난 장점 가운데 하나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우리말 조사의 기능 · 속성을 놓고 볼 때, “~에서의”의 기원은 바로 우리말 조사 자체의 조어 능력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사들끼리 자유롭게 결합해 세밀한 의미의 차이를 생성하는 원초적인 능력 말입니다. 이 사실을 부정할 논거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에 있어서”는 우리말 기원 자체가 없습니다. 이수열 선생님께서는 “~에 있어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십니다.

일본어 ‘~いお(於)て’를 직역한 것으로 우리말에는 전혀 필요없는 기형인데 일본어를 모르는 사람들도 굳이 써서 공연히 시간과 공간, 노력을 낭비하고 우리말의 위상을 훼손한다. [이수열 (1999).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말 바로 쓰기』. 현암사. 325쪽.]

예문을 들어서 설명해보죠. 〈번역에 있어서는 외국어 실력보다 우리말 실력이 더 중요하다〉를 봅시다. 〈번역에 있어서(는)〉 부분을 억지로라도 분석한다면 다음처럼 말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즉, “번역을 하는 상황에 있을 때는” → (축약해서) → “번역에 있어서는”으로 분석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말 그대로 억지 분석이죠. “번역에 있다”??? 도무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말이 되지 않으므로 분석도 불가능한 것입니다. 즉 우리말에서 그 기원을 처음부터 아예 찾을 수 없는, 일본말투를 흉내낸 기형어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냥 자연스런 우리말답게 〈번역에는 외국어 실력보다 우리말 실력이 더 중요하다〉라고 하면 얼마나 깔끔한가요. 혹은 〈번역을 할 때는 외국어 실력보다 우리말 실력이 더 중요하다〉라고도 할 수 있겠죠.

그러므로 “~에서의”와 “에 있어서”를 같은 범주로 다룰 수는 없는 것이죠. 하나는 완전한 우리말이고, 하나는 본디 우리말법에는 없는 일본식 말투를 무분별하게 흉내낸 기형어이니까요. 이것으로써 어느 정도 충분한 답변을 드렸다고 생각합니다.

② juin 님 → 그리고 오해를 무릅쓰고 약간 군말을 달아야 될 것 같습니다. '에 있어서(의)'나 '에서'의 확장에 대한 qualia님의 입장에 비추어 볼 때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보여서요. 예컨대 아래 로쟈님에 대한 답글에서 '직역 개념 아래에서'라고 쓰셨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뭐뭐 '아래에서' 혹은 뭐뭐 '위에서'라는 표현도 '에 있어서'만큼이나 정체가 모호한 말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그러면서 저도 불가피하게 쓰곤 합니다만). '아래에서' '위에서'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이신지요?

⇒ 콸리아qualia 답변 : “~아래에서”라는 말은 그 정체가 결코 모호한 말이 아닙니다. 아주 흔히 쓰는 말이고, 우리말법에도 전혀 어긋날 것이 없는 완전한 우리말 관용어입니다. 주인(juin) 님의 위와 같은 오해는 명사 “아래”의 표면적 의미만을 생각하시고 그 비유적 · 은유적 ·상징적 의미 따위를 고려하지 않은 까닭인 듯합니다.

아시다시피 “아래”는 본래의 공간적 · 수량적 의미말고도 (예컨대 “한 지붕 아래에서”, “서른 살 아래” 따위) 상황 · 조건 · 환경이라는 의미로 쓰일 수도 있는 낱말입니다. 예컨대, 〈한국과 같은 지적 풍토 아래에서 비판 행위는 자살 행위와 마찬가지다〉, 〈엄하신 아버지 아래에서 자라왔다〉 따위가 그런 사례이죠.

따라서 “직역 개념 아래에서”라는 표현은 전혀 모호한 말도 아닐 뿐만 아니라, 우리말법에도 전혀 어긋나지 않는 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으로써 제 답변은 어느 정도 됐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번 토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qualia 2008-04-19 05:20   좋아요 0 | URL

번역서 제목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에서 부사격 조사 “~에서”의 적용이 왜 잘못인지 간단하게 제 의견을 밝히겠습니다.

① 본디 “~에서”는 주로 장소, 영역, 분야, 출발점, 기준점 따위를 나타내는 부사격 조사로 쓰거나, 주어 구실을 하는 단체명에 붙여 주격 조사로도 쓰는 형태소입니다. 이를테면, 〈나는 이명박이라는 인간에서 위선, 기만, 비양심의 극치를 발견한다〉거나, 〈경제개혁연대와 참여연대에서 삼성 특검의 기만적 수사 결과 발표에 대해 강력한 항의를 하였다〉와 같은 예가 그렇습니다.

이때, 부사격 조사 “~에서”가 붙은 부사어는 서술어와 호응하여 하나의 완전한 문장(즉 구가 아닌 절)을 구성해야 자연스럽습니다. 이와 달리,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와 같이 서술어가 없는 명사구에서처럼 쓰게 되면, 문장이 완결되지 않아 불완전한 표현이 되고 맙니다. 코도 풀다가 중간에 그만둔 것처럼, 느낌이 영 개운치 않은 불완전한 구문입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만, “스피노자 철학에서의 개인과 공동체” 혹은 그냥 “스피노자 철학의 개인과 공동체”와 같은 완전한 명사구로 표현해야 올바를 것입니다.

② 이수열 선생님께서는 저서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말 바로 쓰기』(1999, 현암사, 182-200쪽 참조)에서 “~에서의”, “~에로의”, “~로부터의”, “~에의”, “~으로서의” 따위와 같은 이중 삼중 조사가 일본어 직역투에서 유래한 것이므로 올바른 우리말을 좀먹는 오류라고 비판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말본에는 맞지 않으므로 쓰지 말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저는 이수열 선생님의 기본적인 비판 취지에는 충분히 공감하고 동의합니다만, 위와 같은 이중 삼중의 조사들이 순전히 일본어 (번역투)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우리말의 매우 뛰어난 특징이자 장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조사들이 지닌 유연하고 무궁무진한 활용성과 결합성과 적응성이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말에서 조사는 문장의 어떤 성분, 어떤 품사, 어떤 형태에라도 자유롭게 가서 붙어, 다양하게 기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미묘하고 변화무쌍한 의미의 분화를 가능하게 합니다. 즉 위와 같은 이중 삼중의 조사들은 원초적으로 한국어가 지니고 있는(있었던) 무궁무진한 활용성, 결합성, 적응성에서 유래한다고 보는 것이 훨씬 더 타당하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위와 같은 이중 삼중의 조사들을 일본어 번역투라 규정하고 우리말에서 모조리 제거한다면, 그것은 가장 우리말다운 우리말의 장점이자 특징을 거세해버리는 매우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수열 선생님께서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말 바로 쓰기』에서 주장하신 다른 내용들은 대부분 타당하다고 봅니다. 몇몇 가지 논란점은 여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러나 저는 우리말 바로 쓰기에 힘쓰시는 이수열 선생님을 존경합니다).

따라서 위 번역서의 제목을 “스피노자 철학에서의 개인과 공동체”로 고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③ 이미 다 드러난 사실이지만,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라는 제목에서 “철학에서”는 부사어입니다. 그러나 보시다시피 이 부사어에 호응하는 단어는 제목 안에 없습니다. 즉 부사어는 관형어나 서술어를 수식하는 성분인데, 제목 안에 그와 호응하는 관형어나 서술어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므로 위 제목은 완결되지 못한 채 어정쩡한 구문에 머문, 불완전한 표현이라는 것이죠. 따라서 부사어 “철학에서”는 “개인과 공동체”라는 명사구를 꾸며주는 관형어 “철학에서의”나 “철학의”로 고쳐야 올바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완전한 명사구의 제목이 됩니다.

④ 이상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사소한 내용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소한 오류들이 너무나 많이 난무하기에 뻔한 내용을 중언부언했던 것입니다. 예컨대, 영어나 프랑스어를 가르치거나 배울 때 문법적으로 얼마나 자잘하게 따집니까? 그런 자잘한 사항들 가지고 토익이니 토플이니 하는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따려고 그렇게들 맹렬히 공부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우리말은 그냥 슬슬 대충 넘어간다? 바로 이런 태도들이 개념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로쟈 2008-04-20 10:02   좋아요 0 | URL
"우리말의 매우 뛰어난 특징이자 장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조사들이 지닌 유연하고 무궁무진한 활용성과 결합성과 적응성"이라고 하셨는데, 사실 '-에서'를 '-에서의'로 대체하는 게 어감상 더 타당한 것인지는 의문입니다. 둘다 어색하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이죠. 기본적으론 chez/in Spinoza 같은 표현을 번역하려다 보니 만들어진 것이고, 말씀대로 '스피노자의 개인과 공동체' 같은 우리말로는 가장 자연스럽다는 생각입니다. 자연스러움이 척도가 되어야 한다면...

qualia 2008-04-21 13:25   좋아요 0 | URL
제가 위에서 juin 님께 답변드렸듯이, 로쟈 님의 어감 문제에 관한 언급에 대해서도 위와 같이 답변드릴 수 있습니다. 즉 문제의 핵심은 문법적인 옳고 그름이라는 것입니다. 어감 문제는 이차적인 것이고요.

(직역 개념 아래에서) “chez/in Spinoza”와 같은 원문에 너무 얽매여 우리말 문법을 그르칠 수는 없는 노릇이죠. 저도 “스피노자 철학의 개인과 공동체”로 하면 좋다고 생각합니다.

승주나무 2008-04-19 16:13   좋아요 0 | URL
한때는 세상에 철학자가 스피노자만 존재하는 것처럼 빠져들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다소 정적인 나의 인식은 경험론보다는 대륙의 합리론에 더 어울리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들뢰즈의 <표현의 문제>는 사실 소화하기 너무 어렵더군요. 로쟈 님이 올리신 글을 보니 <표현의 문제>에 못지 않은 심도 있는 책이 것 같은데~
찜했다가 스피노자를 떠올릴 때 다시 꺼내 읽어야겠습니다.
좋은 안내글 잘 봤습니다^^

로쟈 2008-04-20 10:05   좋아요 0 | URL
국내 '스피노자 붐'은 좀 과장된 면이 있는데, 전공자들이 불만스러워하는 <에티카> 번역만이 하나 있었을 뿐이니까요. 학계 최고수준의 고급 학술서들이 '교양서'처럼 번역되고 읽히는 건(누가 읽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좀 특이한 현상입니다. 다른 분야와의 형평성을 고려한다면 말이죠...

노이에자이트 2008-04-19 23:50   좋아요 0 | URL
이오덕 선생도 에서의,에 있어서의...이런 표현 되게 싫어하더라구요.음...어떻게 해야 하나...
저는 스피노자에 대해 잘 몰랐는데 요즘 스피노자 르네상스로군요.음...

로쟈 2008-04-20 10:07   좋아요 0 | URL
번역투이긴 한데, 말이란 게 유기체 같은 것이서 일률적으로 '단죄'할 수 있는 건지는 의문입니다. 어법에 맞지 않는 인터넷 언어들도 그렇구요...

qualia 2008-04-21 14:15   좋아요 0 | URL

노이에자이트 님, 좋은 사례를 지적해주셨네요. 고맙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에 있어서” 혹은 “~에 있어서의” 하는 투는 전형적인 일본어 직역투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용례에 관해서는 이수열 선생님께서도 일본어 직역투라고 강하게 비판하셨죠.

저는 글을 읽다가 이런 표현과 마주치면 읽는 글 전체가 보통 천박 · 조잡해 보이는 게 아닙니다. 친일파 계통의 닳고 닳은 정치인들이나 언론인들이 걸핏하면 “~에, 또” 하는 어투와 함께 즐겨쓰던/쓰는 일본어식 말투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에 있어서” 혹은 “~에 있어서의”, “~에 있어서는” 하는 투는 우리말 문법으로는 제대로 분석할 수 없는 기형이라고 봅니다. 이 말투들은 아예 우리말 기원부터가 없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뭐가 있기는 있다는 것인지 툭하면 갖다 붙이는 “~에 있어서”라는 이상한 말투, 정말 읽기도 듣기도 싫더군요.

예컨대, 〈번역에 있어서는 외국어 실력보다 우리말 실력이 더 중요하다〉라는 사례를 봅시다. 이것은 그냥 〈번역에서는 외국어 실력보다 우리말 실력이 더 중요하다〉 혹은 〈번역을 할 때는 외국어 실력보다 우리말 실력이 더 중요하다〉라고 하면 아주 우리말답게 되죠. 번역에 있어서는??? 이런 기형적 표현이 전혀 필요가 없음을 알 수 있죠. 이제 이런 따위 일제의 찌꺼기 같은 말들은 우리말글에서 모두 몰아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4-22 00:20   좋아요 0 | URL
이오덕 책은 구수한데 이수열 책은 학습 참고서 같았어요.여하튼 우리글 우리말 공부할 땐 필독서죠.물론 다 받아들이진 않죠.
예전 박영문고에 에티카 번역본이 있던 기억이 나네요.요즘은 절판...싸고 좋았는데...책세상 것은 문고판 치곤 좀 비싸고요.

로쟈 2008-04-22 19:43   좋아요 0 | URL
<에티카>도 추천 번역본이 없는 고전 중의 하나죠...

누굴까 2008-04-22 12:30   좋아요 0 | URL
서광사에서 나온 에티카 개정판은 개정판이 아니라 오자,탈자 정도만 수정한 거라는 댓글이 달려있던데 .... 로자님.. 번역이 믿을만 한 것인지 조언 부탁드려도 될까요 ?

로쟈 2008-04-22 19:44   좋아요 0 | URL
개정판은 제가 안 갖고 있습니다. 번역에 대한 건 스피노자 전문가들에게 문의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우리 밥상과 먹거리에 관한 책들이 출간되고 있다. 물론 갑작스러운 건 아니지만 두툼한 저작들이 연이어 출간되면서 뭔가 '트렌드'가 되어 가는 듯도 하다. 최근 출간된 피터 싱어의 <죽음의 밥상>(산책자, 2008)과 같이 읽어볼 만한 책들을 꼽아본다...


15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죽음의 밥상- 농장에서 식탁까지, 그 길고 잔인한 여정에 대한 논쟁적 탐험
피터 싱어.짐 메이슨 지음, 함규진 옮김 / 산책자 / 2008년 4월
20,000원 → 18,000원(10%할인) / 마일리지 1,0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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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해방
피터 싱어 지음, 김성한 옮김 / 인간사랑 / 1999년 11월
15,000원 → 14,250원(5%할인) / 마일리지 430원(3%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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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사육과 육식- 사육동물과 인간의 불편한 동거
리처드 W. 불리엣 지음, 임옥희 옮김 / 알마 / 2008년 4월
25,000원 → 22,500원(10%할인) / 마일리지 1,250원(5% 적립)
2008년 04월 16일에 저장
절판
잡식동물의 딜레마
마이클 폴란 지음, 조윤정 옮김 / 다른세상 / 2008년 1월
25,000원 → 22,500원(10%할인) / 마일리지 1,2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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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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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장미 2008-04-17 14:03   좋아요 0 | URL
피터싱어의 책밖에 읽은 게 없네요. (긁적) 트렌드가 되고 있는 것 같아요.
곡물 값이 올라서 지구 저 편에서는 살인도 일어나고 있으니깐요.
우리에게도 그런 날이 오지 않을까. 두렵네요. ㅠ_ㅠ

로쟈 2008-04-17 23:06   좋아요 0 | URL
저도 직접 읽은 건 별로 없습니다. 리뷰들만 열심히 읽었죠.^^;

Joule 2008-04-17 23:20   좋아요 0 | URL
존 로빈스의 '육식 혁명'이 빠졌어요. 괜찮은 책인데.

로쟈 2008-04-17 23:39   좋아요 0 | URL
추가했습니다. 다이어트에 관한 책으로 알았습니다.^^

무해한모리군 2008-04-18 08:38   좋아요 0 | URL
요즘 웰빙이다 하며 무지 비싼 유기농 음식을 먹으며 운동하는게 유행이더군요.. 개인적으로는 동물과 식물이 살만하면 사람도 잘 살 수 있을 거 같은데요.. 기름 잔뜩 들여 기계로 생산하고 비행기로 운반해온 수입산 농산물을 먹으며, 주변 자연 다 죽이고 세운 골프장에서 운동한다고 사람이 잘 살 수 있지 않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긴해요.. 전 고기가 너무 좋아서 채식을 할 수 없을거 같아요 ㅠ.ㅠ 사실 몇번 시도는 해봤습니다만 ㅎㅎ 표지가 마음에 드는데 한번 읽어보고 싶네요 ^^
존로빈스는 베스킨라빈스31의 상속자라지요?

로쟈 2008-04-18 13:56   좋아요 0 | URL
먹거리와 관련해서 딜레마스러운 건 사실입니다.--;

moonrise 2008-05-10 11:00   좋아요 0 | URL
<육식의 성정치>와 <프랑켄슈타인>은 같은 책인데, 이후에 나온 걸 구입하시는 게 가격면에서나 내용면에서나 나을 듯합니다. 참, <로컬 푸드>와 <희망의 경계>를 추가할 수 있지 않을까요? ^^
그나저나, 저는 <죽음의 밥상>이라는 제목이 왜 이렇게 싫을까요?

로쟈 2008-05-10 11:14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알려주셔서 감사. <죽음의 밥상>은 아마도 원제에 '윤리학'이 들어가 있어서 출판사에서 바꾼 것 같고요, '자극적'이긴 하나 요즘 '광우병' 파문과는 잘 맞아떨어지는 듯합니다. 덕분에 많이 읽힌다면 묻히는 것보다는 낫지 않나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