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신문에서 인터넷 번역비판과 관련한 기사를 옮겨놓는다(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6461). 나 자신도 관련돼 있고 지난주에는 기자의 간단한 이메일 설문에 답을 하기도 했다. 아마도 기자는 지난번 한국일보 기사에 힌트를 얻은 듯하다(http://blog.aladin.co.kr/mramor/2144892). 인터넷 번역비판과 논쟁의 장을 조금씩 열어가는 일에 이 블로그도 한몫하고 있다는 사실을 '공적'으로 확인하게 된다(사실 주변에서는 무슨 '뻘짓'이냐는 시선을 더 많이 받고 있지만)...    

교수신문(08. 06. 30) '장미밭에서 춤추기’를 더 긴장케 하는 블로거의 힘

인터넷이 번역 비판과 논쟁의 장을 조금씩 열어가고 있다. 다른 매체에 비해 분량, 형식, 시기 등의 제한이 없으며 많은 사람들과 소통 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 인터넷 서점 블로그는 오역 제기의 근원지로 톡톡히 한몫하고 있다.

파리8대학 명예교수인 자크 랑시에르의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인간사랑, 2007)의 오역 비판은 명예 훼손 고소 사건으로까지 번진 케이스다. 도저히 읽지 못할 번역이라는 게 ‘번역 비평 누리꾼’들의 한결같은 비판이었고, 이 책의 번역자 백승대씨가 알라딘 서점에서 활동하고 있는 ‘로쟈’, ‘FTA반대balmas’, ‘람혼’ 등을 고소한 것. 이들 중 ‘로쟈’, ‘FTA반대balmas’는 ‘이유없음’으로 현재 고소가 기각된 상태이고 ‘람혼’은 그 이후 다시금 자신의 블로그에 이 책 서론 전체에 대한 장문의 번역 정밀 독해를 올렸다. 지금 이 책은 전량 회수돼 판매 중지에 들어간 상태다.  



오역 정밀 지적해 번역서 전량 회수
백씨가 공개한 이력에 따르면, 그는 2001~2002년 교보증권에 근무했으며 2002년부터 프리랜서로 활동하면서 주식투자에 대해 연구했고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그는 “프랑스 철학에 대해 공부해본 적은 없지만, 인터넷에서 번역할 만한 책을 찾아보다 제목이 특이해서 저자를 알아보니 유명한 사람이라서” 번역하게 됐고 “불어 실력은 그다지 없지만, 사전 보고 한글로 옮기는 수준은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워낙 논쟁할 상대들이 아니라서 응대를 하지 않았다. 번역 문제라기보다 그들이 나를 음해하려 했기 때문”에 고소한 것이라고 밝혔다. 문제가 불거지자 인간사랑 출판사 편집부 홍성례씨는 “비전공자에게 번역을 맡긴 것에 대해 책임을 느낀다”며 “번역자와 합의가 되면, 새로 번역자를 모색할 계획”이라고 입장을 정리했다.



앞선 사례처럼 거센 반발도 있지만, 대부분은 역자나 출판사측이 침묵으로 일관한다는 게 ‘번역 비평 누리꾼’들의 중론이다. 니클라스 루만의 『사회체계이론1·2』(한길사, 2007)에 대한 번역 비판을 <연세대 대학원신문>(제157호)에 기고하고, 분량 상 지적하지 못한 오역들을 인터넷에 올린 블로거 ‘바다라네’는 출판사나 역자에게서 “전혀 반응이 없었다”고 전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Gesellschaft’를 ‘공동체’로 옮긴 것은 최악의 번역어 선택이었고 그 외에도 납득하기 어려운 번역어들이 많을 뿐만 아니라 문장 오역도 2권 후반부에 이르면 거의 한 단락에 하나 이상씩 나온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번역자 박여성 제주대 교수(독일학과)는 “(오류를) 잡아내지 못한 부분이 일부 있었지만, 번역 용어상의 차이 부분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답했다. 더불어 한길사 편집부 배경진씨는 “이후 역자와 상의해 잘못된 부분은 고칠 것”이라고 밝혔다.



인터넷의 장점인 상호 소통력이 번역 논쟁에 활력을 불어 넣기도 한다. 지난달 말께 콜럼비아 대학에서 미학을 가르치는 아서 단토의 『일상적인 것의 변용』(한길사, 2008)의 번역 몇 구절을 놓고 ‘노이에자이트’, ‘qualia’, ‘제레카폴’, ‘규’, ‘carboni68’ 등의 블로거들이 댓글을 통해 논쟁에 참여했다. 50여개가 넘는 댓글이 이어지다 ‘qualia’가 세 가지 쟁점을 간추려 아서 단토 교수에게 메일로 질문을 보내 답신을 받아냄으로써 논쟁은 마무리 됐다. 그 결과, 역자가 ‘하찮은 대상들’로 번역한 ‘these unedifying objects’는 ‘미적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대상들’로, ‘가장 가당치 않은 곳(the least likely places)’의 ‘places’도 역자가 선택한 ‘전시장’이 아니라 ‘qualia’가 지적한 것처럼 ‘전시물’로 이해하는 게 올바른 것으로 판정났다. 



흔치 않은 일이기는 하지만, 인터넷 상의 오역 제기로 인해 번역서가 재출간 돼 ‘책 리콜’에 들어간 사례도 있다. 새뮤얼 이녹 스텀프, 제임스 피저의 『소크라테스에서 포스트모더니즘까지』(열린책들, 2004)는 지난해 11월말께 ‘히드라’라는 블로거에 의해 오자, 오역이 900여 군데 넘게 지적당했다. 예전 종로서적에서 출판된 것(2판)을 다시 출판사 열린책들에서 재출간하는 과정에서 새로이 번역 저본으로 삼았다고 한 7판 내용을 전혀 반영하지 않은 결과였다. 얼마 전 개역된 이 책은 그간 출간된 1쇄~9쇄까지의 책들을 대상으로 지난 23일부터 교환에 들어갔다. 열린책들측은 “많은 독자들이 읽어 주셨던 만큼, 모른 척 할 수 없었다. 이번 책 리콜은 출판사로서 당연한 조처였다”고 밝혔다. 자세한 교환방법을 알려면, 이 출판사의 홈페이지(http://www.openbooks.co.kr)를 참고하면 된다.
 
번역비평에 관한 인식 개선돼야

그간 인터넷을 통해 번역 비평을 해온 누리꾼들은 번역 질 향상을 위해 인터넷의 장점을 보다 적극적으로 살려야 할 필요를 강조했다. 이를테면, 번역 문제를 다루는 전문 매체를 인터넷상에 운영해 서평을 겸하면서 번역 문제를 검토하거나 저작권이 없는 고전들의 경우 공동 번역과 비평을 인터넷을 통해 활성화 하는 방안도 모색해 볼만하다는 의견을 줬다. ‘바다라네’는 “출판사로서는 모험이겠지만, 오역 지적이 이루어지고 역자와 직접 논쟁을 가능케 하는 공간을 인터넷상에 마련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말했다. 출판사를 통한 ‘오역 공개 접수처/논쟁장’에 미치지 못하지만 자신의 역서에 대한 정오표를 인터넷 상에 스스로 공개한 번역자들도 있다.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등을 번역한 ‘FTA반대balmas’와 마르크스의 『경제학-철학 수고』 등을 번역한 강유원씨가 그들이다. 

물론, 인터넷이 ‘오역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그 전에 번역 출판·비평에 대한 인식 전환과 토대 구축이 시급하다. ‘로쟈’는 “역자, 편집자, 독자가 서로 생산적인 긴장관계를 유지하면서 저마다의 몫과 역할을 인정해주는 문화가 정착되면 좋겠다. 인문 번역자에 대한 사회적 대우가 나아져야겠고, 번역비평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도 개선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FTA반대balmas’는 “번역물의 향상을 위해서는 선진국처럼 ‘총서’ 체제를 도입하는 게 시급한 과제다. 학계의 유능한 학자들이 전공과 관련된 ‘총서’를 맡아서 운영하면 번역의 질도 향상될 수 있을 것이다”고 밝혔다.

자신이 번역한 ‘역자 후기’만을 모은 두 번째 책을 지난달 펴낸 번역가 김석희씨는 번역 작업을 고통과 쾌락이 공존하는 ‘장미밭에서 춤추기’라고 표현 한 바 있다. 번역자가 장미 가시에 많이 찔릴수록 그 번역서를 읽는 독자들은 장미 향기를 보다 진하게 맡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인터넷을 통한 번역 비판과 논쟁에도 장미의 가시와 향기가 공존하고 있다.(김창한 객원기자)

08. 07. 01.

P.S. 기사에서 언급된 루만의 <사회체계이론> 번역비판은 최근 출간된 <니클라스 루만으로의 초대>(갈무리, 2008)의 역자이자 루만 전공자인 정성훈씨의 것이다. 루만의 대저를 읽을 계획이 있는 독자라면, 미리 이 '입문서'부터 읽는 게 좋을 듯하다...


댓글(17)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마늘빵 2008-07-01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산적인 '뻘짓'을 하고 계신 ^^ 로쟈님이 좋습니다. 위에 언급된 발마스님과 다른 분들도. 돈도 안되고 고생은 고생대로 하지만 의미있는 일을 하고 계신 건 분명한 사실이니까요. :)

로쟈 2008-07-01 17:06   좋아요 0 | URL
뻘짓을 하더라도 '생산적'이려고 애는 쓰고 있습니다.^^;

주니다 2008-07-01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정보 감사드립니다.^^ 저도 『소크라테스에서 포스트모더니즘까지』 교환해야겠습니다.『일상적인 것의 변용』은 원서도 복사해놨는데, 읽을 시간과 정신적 여유가 없네요. 로쟈님의 여름방학은 언제나처럼 바쁘시겠죠?^^

로쟈 2008-07-01 17:05   좋아요 0 | URL
단토의 책 자체가 후기 저작들보다 읽기 까다롭더군요. 사실 오늘부터야 방학이긴 한데(계절학기가 있지만) 밀린 일들이 '쓰나미' 수준으로 덮쳐오고 있습니다. 살아남아야 할 텐데...

노이에자이트 2008-07-02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서 단토 논쟁에서 저는 별로 댓글 분량도 많지 않았는데 첫번째로 참여했다고 이런 기사에 나오는군요.

로쟈 2008-07-02 00:13   좋아요 0 | URL
^^

람혼 2008-07-02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가운 기사로군요.^^

로쟈 2008-07-02 00:49   좋아요 0 | URL
람혼님이 더 반갑습니다.^^

열매 2008-07-02 0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수신문같은데서 이런 이슈를 상세히 다루어줘야 하는데 이제라도 공론화될 수 있게 되어서 다행입니다. 학술계의 다양한 첨예한 이슈들이 학술계 내에서의 자정작용으로 걸러져야 하는데 그런 필터링의 기능을 할 곳도 마땅히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런 일을 해야할 곳이 딴짓만 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니 답답합니다.
<철학과 현실>이라는 철학자들이 내는 잡지를 보면 무슨 보수우파들의 집산지같습니다.
한국 기성의 철학과 교수들의 현실 파악이 얼마나 나이브하고 우파적이며 기성권력에 굴종적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학술적 기능이라도 제대로 하면 좋으련만 그렇지도 못하니 '철학'을 잡든 '현실'을 잡든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해주십사 부탁드리고 싶은 심정으로 한번씩 도서관가면 훑어봅니다. 볼 때마다 실망하구요.

로쟈 2008-07-02 01:11   좋아요 0 | URL
저도 안본 지 오래됐는데, 점점 얇아지고 있더군요...

Kitty 2008-07-02 0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랑스 철학에 대해 공부해본 적은 없지만, 인터넷에서 번역할 만한 책을 찾아보다 제목이 특이해서 저자를 알아보니 유명한 사람이라서” 번역하게 됐고 “불어 실력은 그다지 없지만, 사전 보고 한글로 옮기는 수준은 된다” <- 눈을 믿을 수가 없네요. 이게 정말 번역자가 한 말인가요? 대담하다고 해야할지 솔직하다고 해야할지 어떤 의미에서는 존경스러운(?) 분이네요. 출판사는 또 뭐랍니까...

로쟈 2008-07-02 19:18   좋아요 0 | URL
좀 어이없는 경우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7-02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을 둘러싼 논쟁이 법정까지 가다니...무서워요.

아열대 2008-07-03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밥벌이가 바빠서 확인을 못한 사이 기사까지 나갔군요. ;;
그나저나 기사는 'places'를 전시장이 아니라 전시물이라고 못을 박아 놓았네요. 저는 아직까지도 전시장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
단토의 답장을 보아도 - once we set the object at an aesthetic distance, i.e., once we cannot use it, then we might begin to see that the object is beautiful. The urinal that Duchamp tried to exhibit in 1917 might have been set at an aesthetic distance by virtue of its placement in an exhibition space, like a gallery-라고 되어 있는데 이 구절의 어디를 보아 'places'를 전시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인지 요령부득이로군요. 단토의 설명은 변기라는 오브제가 뒤샹에 의해 전시장에 놓였기 때문에 오직 '사용'의 관점이 담길 뿐인 일상의 눈으로는 발견하지 못할 미적 거리가 생겨나는 것이라는 것이 아닙니까?

로쟈 2008-07-19 11:02   좋아요 0 | URL
덕분에 다시 읽어보니 모호함이 다 가시는 건 아니군요...

김상호 2008-07-14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랑스 철학에 대해 공부해본 적은 없지만, 인터넷에서 번역할 만한 책을 찾아보다 제목이 특이해서 저자를 알아보니 유명한 사람이라서” 번역하게 됐고 “불어 실력은 그다지 없지만, 사전 보고 한글로 옮기는 수준은 된다”와 정말 대단하네요 @.@

로쟈 2008-07-19 11:03   좋아요 0 | URL
'올해의 번역자' 후보입니다...
 

사제단 ‘대통령의 힘과 교만을 탄식함’ 강론 전문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탈을 쓰고 너희에게 나타나지마는 속에는 사나운 이리가 들어 있다. 너희는 행위를 보고 그들을 알게 될 것이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딸 수 있으며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딸 수 있겠느냐?”(마태 7,15)

▶대한민국 민주주의 심각한 위기 맞고 있어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국민을 상대로 마구 저지르는 오늘의 폭력상과 거짓들을 지켜보며 우리는 분노합니다. 주권재민을 힘껏 외치는 시민들의 고뇌를 마음에 품고 오로지 기도에 집중하기 위하여 사제들이 오늘까지 이렇다 할 의견표명과 행동 없이 침묵 중에 지냈으나 이제 그런 절제도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었습니다. 국민이 그토록 간절하게 호소했건만 정부가 미국의 압박에 자진 굴복하여 문제의 쇠고기와 위험한 부속물 수입을 전면 허용해버렸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들끓는 국민여론을 제압하기 위하여 몽둥이와 방패로 시민들을 패고 내려찍으며 무참히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이로써 촛불에 담겼던 간곡한 뜻은 짓밟혔고 우리는 대통령과 정부의 존립근거에 대하여 묻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이명박 대통령과 정부 각료들 그리고 한나라당의 교만과 무지를 탄식하면서 그들의 병든 양심을 교회의 이름으로 엄중하게 꾸짖고자 합니다. 아울러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선포해야 하는 사제의 양심에 따라 오늘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는 점을 경고합니다.

▶조중동의 표변과 후안무치는 가히 경악할 일

먼저 보수언론의 폐해를 지적합니다. 참여정부 시절 광우병의 위험성을 무섭게 따지고 들다가 현 정부가 출범하자마자 미국산 쇠고기의 절대 안전을 강론하는 조선, 중앙, 동아일보의 표변과 후안무치는 가히 경악할 일입니다. 정론직필의 본분을 버리고 이해득실에 따라 말을 뒤집는 언론의 실상이 널리 알려진 것은 만시지탄이나마 다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대통령이 국가정책의 많은 부분에 대하여 국민을 속이고 있는 현실은 더욱 큰 불행입니다. 대통령은 국민이 순진하다고 착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대다수 국민은 그의 궤적을 잘 알면서도 혹시 경제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까 싶어 지난 대선의 결과를 빚어낸 것뿐입니다. 대통령은 국민의 기대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금번 쇠고기 협상에서 드러난 정부의 무능도 울분을 터뜨릴 일이지만, 높이 받들고 깊이 새겨야 할 천심을 폭력으로 억누르는 정부의 교만한 태도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대통령이 국가정책 많은 부분 속이고 있는 현실 더 큰 불행

그저 미국에 충성하려드는 맹목적 사대주의도 딱한 일이거니와 오늘 우리 사회에 불어 닥친 재앙은 무엇보다도 돈을 위해 정신의 가치를 값싸게 여기는 정부의 경박한 물신숭배에서 비롯했음을 지적합니다. 국민이 바라는 것은 값싸고 질 좋은 외국산 쇠고기가 아니라 모두가 공생 공락하는 드높은 자존감입니다. 국제적 망신을 일으킨 졸속협상이나마 정부의 주장대로 이에 복종하는 것이 한미 FTA 체결 조건에 유리하고, 그래서 자유무역이 혹시 경제지수를 끌어올릴 것이라는 억측이 설령 옳다고 가정해도 그 결과는 이미 굳어질 대로 굳어진 양극화 현상을 더욱 극단으로 몰고 갈 것이라는 게 교회의 판단입니다. 결국 정부는 불행한 미래를 강요하는 수단으로 공권력을 악용하여 국민의 통곡과 신음을 억지로 틀어막고 있는 것입니다.

▶경찰의 폭력에 숭고한 촛불의 뜻 꺼지지 않도록 지키겠다

우리는 “어둠이 빛을 이겨 본 적이 없다”(요한 1,5)는 성경말씀을 묵상하면서 오늘까지 촛불을 지켰던 민심을 지지하고 격려합니다. 우리 사제들은 청정한 수도자들과 전국의 모든 교우들과 함께 무장경찰들의 폭력에 숭고한 촛불의 뜻이 꺼지지 않도록 지켜드리고자 합니다. 정부는 원천봉쇄와 강경진압 그리고 오늘 아침에 벌어진 광우병 국민대책회의 압수수색과 체포 따위로 진실을 어둠에 가두려고 하겠지만 이런 모진 마음 때문에 국민이 받은 상처와 모욕은 더욱 깊어만 갈 것입니다. 이에 우리는 대통령에게 호소합니다.

1. 국민은 너그럽습니다. 대통령은 우선 쇠고기 협상의 실패를 인정하고, 국민 앞에 겸손하게 사죄를 청하는 뜻으로 장관고시를 폐하고 쇠고기 전면재협상을 선언하길 바랍니다. 

2. 먼저 들으셔야 합니다. 소통을 강조하는 대통령은 먼저 국민의 소리를 들으시고 그 진실을 깊이 헤아린 다음 국민과의 대화에 나서길 바랍니다.

3. 국민은 현명합니다. 문제의 핵심은 국민 건강의 안전성과 이를 보증할 검역주권입니다. 일부 언론이 쇠고기 문제를 친미와 반미, 진보와 보수의 이념갈등으로 몰아감으로써 핵심을 왜곡하지 말아야합니다.

4. 과잉 폭력진압을 지시한 어청수 경찰청장을 해임하고 시위 중 연행된 사람들과 대책회의 구속자들을 전원 석방하십시오. 그리하여 존엄을 바라는 국민의 상처를 씻어주길 바랍니다.

5. 국민 여러분에게도 호소합니다. 촛불은 평화의 상징이며 기도의 무기이며 비폭력의 꽃입니다. 우리가 비폭력의 정신에 철저해야만 폭력의 악순환을 끊어 버릴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신앙인에게 호소합니다. 촛불은 안으로는 내면의 욕심을 불태우고, 밖으로는 어둠을 밝히는 평화의 수단입니다. 저마다 마음을 비우고 맑게 하여 지친 세상을 위로하고 서로에게 빛이 됩시다.

2008년 6월 30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댓글(4) 먼댓글(1)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1. 웨쥬의 생각
    from ways' me2DAY 2008-07-01 14:31 
    마지막으로 모든 신앙인에게 호소합니다. 촛불은 안으로는 내면의 욕심을 불태우고, 밖으로는 어둠을 밝히는 평화의 수단입니다. 저마다 마음을 비우고 맑게 하여 지친 세상을 위로하고 서로에게 빛이 됩시다.
 
 
마노아 2008-06-30 23:55   좋아요 0 | URL
신부님이 '이명박 대통령님, 사랑합니다!'라고 선창 시켰는데, 차마 그 말은 안 떨어지더라구요. 원수를 사랑하라 하셨지만..;;;;

로쟈 2008-07-01 00:11   좋아요 0 | URL
이명박은 국민을 사랑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요.--;

에링 2008-07-01 00:15   좋아요 0 | URL
로쟈님도 촛불집회에 참여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로쟈 2008-07-01 12:20   좋아요 0 | URL
글이나 보태고 있습니다. 한데 요즘 같아선 연장전에 페널티킥까지 대비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네요...
 

이번주 시사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356). 가라타니 고진의 <역사와 반복>에 대한 것이며, 소개기사는 미리 옮겨놓은 적이 있다(http://blog.aladin.co.kr/mramor/2138329). 가라타니가 한국어판에 붙인 서문 등도 읽어볼 만한데, 분량상 리뷰에서는 '서설'만을 정리했다.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 브뤼메르 18일>에 대한 가라타니식의 '비평'이다.

시사인(08. 07. 05) 역사는 왜 반복되는가

비평이란 무엇일까? “내가 이 책 읽은 거 맞아?”라는 질문을 던지게 하는 것으로 정의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두 번 읽도록 자극하고 권유하는 것이 ‘비평’이라면, 가라타니 고진이야말로 일급의 비평가다. 물론 일본을 대표하는 비평가이자 사상가라는 평판을 이미 얻고 있는 처지이므로 ‘일급의 비평가’란 평은 중언부언이다. 하지만, 말 그대로 ‘이렇게도 읽을 수 있구나!’란 경탄을 매번 불러일으키는 비평가는 그리 많지 않다. 이번에 출간된 <역사와 반복>(도서출판b 펴냄) 또한 예외가 아니다.

책은 ‘역사와 반복’ ‘근대 일본에서의 역사와 반복’ ‘불교와 파시즘’, 3부로 구성돼 있는데, 표제가 된 첫 번째 에세이에서 그가 시범적으로 다시 읽는 것은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이다. “헤겔은 어디에선가 모든 세계사적 사건과 인물은 두 번 나타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렇게 덧붙이는 것을 잊었다. 처음엔 비극으로, 두 번째는 소극으로”라는 도입부로 유명한 글이다. ‘프랑스 혁명사 3부작’ 중 한 꼭지를 이루는 이 정치 팸플릿에서 마르크스는 1789년과 1848년의 프랑스혁명을 다룬다. 그가 보기에 1848년부터 3년간은 1789년 혁명에서 나폴레옹의 쿠데타까지를 반복하고 있다. 즉,  보통선거를 통해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가 스스로 쿠데타를 일으켜서 다시 황제가 되는 루이 보나파르트(나폴레옹 3세)는 나폴레옹 1세의 행적에 대한 ‘소극’적 반복이다.  

가라타니가 <브뤼메르 18일>을 다시 문제삼는 것은 그러한 역사적 반복에서 어떤 패턴을 읽기 때문이다. 역사의 반복에서 중요한 것은 되풀이되는 사건(내용)이 아니라 그러한 반복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어떤 형식(구조)이다. 그리고 그러한 형식에 주목하게 한다는 점에서 <브뤼메르 18일>은 특권적이다. 가라타니는 아예 <자본론>과 동급의 의의를 갖는다고 말해놓을 정도다. “<자본론>이 경제를 표상의 문제로서 파악하고자 한다면, <브뤼메르 18일>은 정치를 그와 같이 파악하고 있다. <자본론>이 근대경제학 ‘비판’이라면, 마찬가지로 <브뤼메르 18일>은 근대정치학 ‘비판’이다.”

가라타니가 다시 읽는 <브뤼메르 18일>은 1870년대 이후의 제국주의, 1930년대 파시즘뿐만 아니라 1990년대 이후의 새로운 정세에 관해서도 본질적인 통찰을 가능하게 해준다. 흥미로운 것은 이 통찰이 정치적 대의(代議)의 문제와 연관된다는 점이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대표제라는 상징적 형식은 이중적이며 입법권력으로서의 의회와 행정권력으로서의 대통령은 크게 다르다. 의회제는 토론을 통한 지배라는 의미에서 자유주의적이고, 대통령은 일반의지(루소)를 대표한다는 의미에서 민주주의적이다. 때문에, 독재형태는 자유주의를 배반하지만 민주주의를 배반하지는 않는다.

가라타니에 따르면, 이러한 차이는 근대 인식론의 각기 다른 사고방식에도 대응한다. 즉, 한편에는 진리를 선험적인 명증성에서 연역할 수 있다는 데카르트적 사고방식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진리란 타자와의 합의에 의한 잠정적인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는 앵글로색슨적인 사고방식이 있다. 전자의 경우 ‘일반의지’는 서로 대립하는 사람들이나 여러 계급을 넘어선 존재에 의해 대표되며, 후자의 경우는 토론을 통한 합의에 의해 결정된다. 역사의 반복에서 확인하게 되는 것은 의회(대표제)를 부정할 경우 도달하게 되는 정치적 위기가 흔히 그것의 상상적 지양으로 귀결된다는 점이다. 1848년 혁명 이후 루이 보나파르트가, 그리고 1930년대에는 히틀러가 ‘결단하는 주권자’로 출현하게 되는 것과 같이 말이다. 혹은 가까이에서 예를 찾자면 4.19 혁명이 5.16 쿠데타와 10월 유신으로 귀결된 것과 같은 과정을 우리는 떠올려볼 수 있겠다.

민주주의의 대표제는 절대주의 왕을 죽임으로써 출현하지만, 거기에는 메울 수 없는 구멍이 있으며 ‘황제’ 혹은 ‘결단하는 주권자’는 그러한 구멍을 메워야 한다는 ‘반복 강박’의 산물이다. 이것이 ‘우스꽝스런 보통 사람’으로 하여금 ‘영웅’으로 행세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준다. 그러한 소극은 지금 우리에게도 반복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08. 06. 30.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몽당연필 2008-06-30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웃는 이유가 뭐죠? --;;

로쟈 2008-06-30 15:27   좋아요 0 | URL
좋은가 봅니다.--;

사량 2008-06-30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분의 썩소를 여기서도 보고 말았군요.ㅠ

로쟈 2008-06-30 15:28   좋아요 0 | URL
'소극'이죠. 이 경우엔, 썩소극!

종이 2008-06-30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사진 절묘합니다.

로쟈 2008-06-30 15:29   좋아요 0 | URL
이 정도면 '작품'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7-01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르크스가 이번 강경진압을 보면 나폴레옹1세를 흉내내려는 나폴레옹 3세의 소극을 박정희 전두환을 흉내내려는 이명박의 소극과 비교하는 소품을 쓸 것 같아요.제목은 <명박의 5,16>?

로쟈 2008-07-01 00:12   좋아요 0 | URL
네, 제 생각이 그렇습니다...

2008-07-01 09: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7-01 12:21   좋아요 0 | URL
문제는 그 주변들까지 그 모양이라는 것이죠...
 

'국민주권과 국가폭력'(http://blog.aladin.co.kr/mramor/2160267)이란 페이퍼에서 언급된 '마르크스주의적 국가이론'이 내게 떠올려주는 이름은 니코스 풀란차스(1936-1979)이다(알튀세르, 그람시와 함께 한동안 자주 언급되다가 국내에서는 '잊혀진' 이론가이다). 얼마전 한 대학원신문에 관련기사가 게재된 것이 그를 상기하는 데 도움을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래전 일이지만 '국가이론'에 관한 책들이 앞다투어 나왔던 적이 있다. 사회과학 서적들이 여전히 대학가에서 읽히던 때의 일이다. 나는 풀란차스를 직접 읽은 적은 없고, 2차 문헌에서만 주로 보았지만 아래 기사를 읽으면서 새롭게 관심을 갖게 된다. 물론 최근의 시국과 무관하지 않다. 기사는 학술저널 담비에서 옮겨놓는다(http://www.dambee.net/news/read.php?section=&rsec=&idxno=10089).

고려대 대학원신문(146호) 인용만 될 뿐 읽혀지지는 않는 이론가 풀란차스

이른바 ‘혁명의 시대’였던 1980년대를 지나면서 한국에서 ‘자본주의 국가이론’에 대한 논의는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추었다. 물론 간간히 정치경제학이나 발전사회학에서 ‘개발국가론’을 필두로 국가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기는 했었다. 하지만 이는 상당부분 네오 베버리안들의 이론적 공헌에 힘입은 것으로, 이전 시대와는 질적으로 구분되는 ‘자본주의’의 뚜렷한 속성 및 그것의 속살을 형성하는 계급관계에 주목하는 ‘자본주의 국가이론’이라 지칭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없지 않았다.

문제는 이처럼 ‘자본주의 국가이론’에 대한 학문적 관심은 소멸되었을지언정, 한국의 자본주의 국가는 여전히 왕성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민주화 이후 ‘국가’의 역할, 운영, 그 외형에 투사된 다채로운 계급관계의 중요성은 더욱 더 커졌다. 과거 권위주의 시절에는 민주주의가 정착한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에 관한 이론들을 외우다시피 학습하다가, 정작 우리가 민주화되고 민주주의가 나름대로 작동하게 된 현 시점에 와서는 ‘국가이론’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서구에서 더 이상 많이 논의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덩달아 관심 없어하는 한국 학문의 고질적인 문제점은 여기서도 예외없이 나타난다.



민주화이후, 외환위기 이후 10년에 걸쳐 민주세력들의 정부가 실패하는 것을 경험한 지금, 그리고 ‘노동’의 무기력함과 ‘삼성’으로 대변되는 자본의 전방위적 위력을 모두가 실감하고 있는 지금, 그리스 태생의 맑스주의 이론가 니코스 풀란차스의 저작『국가, 권력, 사회주의』는 우리에게 ‘자본주의 국가’에 대해서 많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인문,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이들은 이른바 ‘상대적 자율성’의 이론가로서 혹은 알튀세르와 함께 ‘구조주의 맑스주의자’로서 풀란차스의 이름에 매우 친숙할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해설서내지 논문에 언급된 ‘밀리반드와 풀란차스 논쟁’,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의 개념을 습득하는 데에 주력할 뿐, 그의 저작을 직접 읽는 이들을 주변에서 보기는 쉽지 않다. 기자역시 글을 쓸 때, ‘자본주의 국가’나 ‘상대적 자율성’을 언급하면서, 몇 해 전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떠듬떠듬 읽은 그의 초기저작 『정치권력과 사회계급』의 영문판을 기계적으로 '(Poulantzas, 1973)'으로 인용했던 기억이 있다.



영역이론에서 관계이론으로
하지만 누구나 알고 있듯이, 한 이론가의 이론내지 사상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주저들을 꼼꼼히 읽어내야 한다. 풀란차스 역시 예외가 아니다. 지금 소개하는 그의 저작『국가, 권력, 사회주의』에서 전개되고 있는 풀란차스의 이론은 우리가 흔히 그의 이론이라고 알 던 것과 사뭇 다르다. 뛰어난 국가이론가이자 풀란차스에 대한 권위있는 해설서를 집필한 밥 제숍의 개념화처럼 풀란차스는 기존 자신의 ‘영역이론’이 ‘관계이론’으로 진화했음을 이 책에서 확연히 보여주고 있다.

과거 그의 출세작인 『정치권력과 사회계급』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 국가라는 정치적 상부구조를 분석하기 위한 개념들의 복잡한 위계체계를 만들어 내려는 시도, 즉 특수한 생산양식에서의 국가의 영역이론을 만들어내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제숍의 지적처럼 국가는 자신을 위해 다양한 계급으로부터 권력을 빼앗아 권력을 획득하는 주체가 아니며, 국가를 초월해 자리잡고 있는 지배적 계급주체에 의해 장악되어 있는 도구적인 권력의 저장소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국가는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조직하는 전략적 장이라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풀란차스는 권력은 관계적이라는 푸코의 지적을 상이한 인식론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수용한다. 계급갈등과 모순에 많은 방점을 둔 그는 책의 상당부분을 할애하여 국가는 헤게모니 분파의 정치적 책략에 유리하도록 구성되어 있는 권력네트워크의 교차를 통해 형성되는 전략적 장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계급관계의 물질적 응축인 국가
예의 자본주의의 고유한 특징인 ‘국가’와 ‘경제’의 공간사이의 상대적 분리로(즉 정치와 경제의 형태분리) 논의를 시작하는(21p) 풀란차스는 먼저 자본주의 국가의 제도에 있어서 물질적 틀을 이루고 있는 요소들인 정신노동과 육체노동간의 분업, 개체화, 법, 민족에 대해서 논술한다(61~162p). 맑스 특유의 ‘물신주의 비판’과 유사한 방식으로 사회적 분업에 따라 사람들을 계급이 아닌 법적-정치적 ‘민주시민들’로 개체화하면서도 민족의 이름으로 이들의 통일성을 구현하는 메커니즘을 분석한 후 그는 앞서의 물질적 틀을 만들어내면서도, 그에 영향받기도 하는 계급들과 계급분파들 사이의 세력관계를 고찰한다(162~204p). 자본주의 국가는 독자적인 정치현상으로 고찰되어야 하며, 상이한 국면에서 정치적 계급투쟁의 특유성과 관련지워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계급투쟁은 역동적 과정을 거치면서 국가장치내에서 재생산되고 변화되기 때문이다.



‘구조편향적이다’, ‘정치편향적이다’, ‘기능주의적이다’라는 풀란차스에 대한 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의 저작은 현대의 우리에게도 많은 함의를 제공한다. 또한 그의 후기저작까지 고려했을 때, 비판의 일정부분은 수긍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공부를 하는 학생의 입장에서 그의 저작이 갖는 난점은 무엇보다도 ‘지독한 난해함’이라고 할 수 있겠다. 뭐 고전이 쉽게 읽힌다면 그것도 좀 이상하다 할 수 있겠지만, 풀란차스 저작의 난해함은 도가 지나치다는게 기자의 판단이다. 일단 독해가 가능해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 텐데 그게 쉽지가 않다. 하지만 설령 기자처럼 글의 절반 정도만 이해하더라도 지금 ‘한국의 국가’를 분석하는데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번역본의 절판’이라는 극한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원우들에게 소개한다.(김경필 기자)

08. 06. 29.


댓글(7)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노이에자이트 2008-07-01 00:24   좋아요 0 | URL
풀란차스가 왜 자살했는지 아시면 알려주세요.위키피디아에는 그건 안 나와 있네요.

로쟈 2008-07-01 13:17   좋아요 0 | URL
저도 모르는 일입니다. 찾아보시면 알려주시길.^^;

소경 2008-07-01 08:55   좋아요 0 | URL
"오히려 국가는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조직하는 전략적 장이라는 것이다."는 오늘 사회를 꼭 찝어주는 군요. 응당 받아야할 민주주의에 대한 교육 내용을 불식되고, 납득이 되지 않을 사항들을 정당화되게 하는 구도는 역시 국가의 전략적인 장에서 발효가 되는게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네요......

로쟈 2008-07-01 13:18   좋아요 0 | URL
'민주주의론'만 가지고 현정부를 이해하려고 하면 애로가 많다는 뜻도 되겠죠...

han86866 2008-07-01 14:14   좋아요 0 | URL
카더라통신수준의 얘기라 올리기 민망하지만 풀란차스가 자살을 한것은 68이후 70년대를 거치면서 전통적인 맑시즘적 계급분석의 한계(사회계급스펙트럼의 다양화)와 계급혁명에대한 좌절과 회의때문이라 들었습니다

로쟈 2008-07-01 17:07   좋아요 0 | URL
이론가답게 자살 이유 치곤 좀 추상적이군요.^^;

노이에자이트 2008-07-01 23:57   좋아요 0 | URL
그것 참...알 듯 모를 듯 하네요.70년대 들어서 스페인의 프랑코.폴투갈의 살라자르 등 파시스트 지도자들이 다 죽어서 기쁠 듯한데...그리스 군사정권 때문인지...음...
 

주말 북리뷰를 훑어보다가 놓친 '대작'이 있다. 토니 주트의 <포스트워 1945-2005>(플래닛, 2008)이 그 '대작'인데, 1,2권을 합한 분량이 1500쪽에 이른다. 해마다 이맘때 등장하던 한국전쟁 관련서가 뜸하다 싶었는데, 이 전쟁 '이후사'는 그런 기대를 단숨에 뛰어넘는다. 서점에서도 보고 무심코 지나쳤던 책이지만 리뷰를 읽어보니 '문제작'이다. 장서용으로라도 꽂아둘 만하다.  

경향신문(08. 06. 28) 그들의 60년속에 ‘미래의 대안’이 숨어있다

최근 유럽에는 좋은 소식과 나쁜 뉴스가 겹쳤다. 좋은 뉴스는 유럽 경제가 20년 만에 미국과의 격차를 최소화하고 일자리를 더 많이 만들어냈다는 발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유럽의 만성적 저성장·고실업이 민주제도를 위협할 수 있다는 자신들의 경고를 받아들여 구조개혁을 한 덕분에 되살아난 것이라고 생색을 내고 있지만 말이다. 나쁜 소식은 유럽연합(EU)의 마지막 통합 작업인 리스본 조약을 아일랜드가 국민투표로 거부한 일이다.

통합 유럽은 이처럼 곡절을 헤쳐가며 자신들의 역사는 물론 세계사를 바꿔 나간다. ‘유럽 통합의 아버지’ 장 모네가 없었다면 전쟁 이후 유럽 이념은 정말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고 했던 장-바티스트 뒤로젤의 지적처럼 고비마다 좌절을 뛰어넘는 지혜가 등장하는 게 유럽의 힘인 듯하다. 논쟁적인 저작 ‘문명의 충돌’의 지은이 새뮤얼 헌팅턴 하버드대 교수가 갈파했듯이 하나로 통합된 유럽연합의 등장은 미국 패권에 반대하는 전 세계적 반작용 가운데 단일 움직임으로서는 가장 중대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며 진정한 의미의 다극화한 21세기를 만들어낼 중요변수임에 틀림없다.



유럽 역사의 최고 권위자 가운데 한 사람인 토니 주트는 온갖 광석을 용광로에 녹여 새로운 조형물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전후 유럽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거대한 조감도를 탄생시켰다. 수많은 세계적 언론이 주트의 대작 ‘포스트워 1945-2005’(원제 POSTWAR: A History of Europe Since 1945)를 2005년 ‘올해의 책’으로 선정하기에 이른 것은 망원경으로 보는 거시적 통찰과 현미경으로 관찰하는 듯한 미세 분석이 동시에 담긴 유럽현대사 오디세이로 평가하기 때문인 것 같다.

지은이는 전후 60년의 유럽 역사가 위대한 점을 ‘미국식 생활양식’에 맞서 ‘유럽식 사회모델’을 창조한 것에서 찾는다. 그는 연이은 세계대전의 폐허 속에서 주저앉고 말 것 같던 유럽이 특유의 사회모델로 우뚝 선 과정을 정밀하게 추적해 파노라마처럼 보여준다. 복지국가 모델이 거저 생겨난 게 아니라는 사실을 하나씩 거증해 나간다.



핍진한 전후의 일상생활 속에서 복지제도는 최소한의 정의나 공정함에 대한 보증서였다는 게 첫 번째 원인이다. 복지제도가 전시의 레지스탕스가 꿈꾸던 정신적·사회적 혁명에는 못 미치지만 전쟁 이전 시기의 절망과 냉소에서 벗어날 수 있는 첫걸음이었다는 데 밑줄을 먼저 긋게 한다. 서유럽의 복지국가가 정치적인 분열을 초래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두 번째 이유로 꼽힌다. 복지국가의 전반적인 취지가 사회적 재분배였지만 전혀 혁명적이지 않아 사회갈등 요소가 끼어들 여지가 거의 없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당장 가장 큰 혜택이 돌아갔지만 장기적으로는 전문직과 사무직, 상인을 비롯한 중간계급의 복지가 몰라보게 향상된 덕분이다.

유럽의 과도한 복지제도가 경제의 효율성과 성장에 심각한 결함을 낳았다는 비판이 한국 땅에서는 여전히 유효한 주장이지만 저자는 이를 일축한다. 해마다 실시되는 유로바로미터의 여론조사 결과 절대 다수의 유럽인들이 빈곤의 원인을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사회적 환경 탓이라는 인식을 버리지 않고 있는 점을 든다. 대부분의 유럽인들에게 직업의 안정과 누진세, 대규모 사회적 이전지출에 대한 약속이 시민 상호간의 약속인 동시에 정부와 시민 사이의 약속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미국인들보다 더 나은 교육을 받았고, 더 안전한 생활을 누렸으며, 더 오래 더 건강하게 살았다는 통계도 이를 입증한다는 것이다.

전후 과거사를 5~6년이라는 이른 시일 안에 깔끔하게 정리한 것도 유럽 각국들이 개혁과 발전의 발걸음을 가볍게 한 요인 가운데 하나라고 비교적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지은이는 유럽적 가치 창조와 더불어 유럽의 위축과 지리적 축소, 이데올로기와 지식인의 영향력 쇠퇴도 주요한 역사적 흐름의 하나로 제시한다.

책은 2차 세계대전 후 유럽의 거의 모든 것을 아우른다. 전쟁의 유산과 과거 청산, 유럽 제국주의의 종말과 식민지 해방, 냉전의 도래, 유럽경제공동체의 탄생과 확대 발전, 서유럽의 경제적 번영과 불만, 소련의 동유럽 지배와 소비에트 블록의 몰락, 발칸 반도 전쟁, 최근의 난민과 불법 이민 노동자, 유럽인들의 일상적 삶에 이르기까지.

요슈카 피셔 전 독일 외무장관이 유럽의 새로운 변신이 가능했던 두 가지 역사적 결정으로 손꼽았던 것에 대해서도 주트는 대부분 동의한다. 미국이 유럽에 잔류하기로 한 일, 프랑스와 독일이 우선 경제적 유대부터 시작하는 통합의 원칙을 충실히 따르기로 한 결정이 그것이다.



책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지은이의 주장이 강하게 배어 있다는 점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지 않았다면 최근 유럽사의 윤곽은 매우 달라 보였을 것”이라는 대목이 그중의 하나다. 역사에서 가정은 의미가 없지만 그는 이 경우를 ‘합리적인 반사실적 가정’이라고 주장한다. 북한의 남침을 지원한 스탈린의 결정이 가장 중대한 오산이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유럽의 역사가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유럽 정치 질서가 ‘배제의 정치’가 아닌 ‘포함의 정치’라는 게 우리에게 주는 또 다른 시사점이기도 하다.

총 1446쪽에 이르는 방대한 이 책은 현대유럽사에서 미래의 선택지를 찾도록 세계인들에게 권한다. 초강대국 미국과 미래의 잠재적 초강대국 중국도 보편적으로 모방하고 싶은 유용한 모델을 갖지 못했으며, 유럽 모델이 가장 근접한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김학순 선임기자)

08. 06. 29.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열매 2008-06-29 23:02   좋아요 0 | URL
32천원짜리 책 두권이라는 가격의 압박도 장난이 아니군요.
방금 mbc2580에서 방송된 고교서열화의 문제 지적을 보니, 강북의 방과후 공부방 초등생과 강남의 영어학원수강 초등생들로 나누어 인터뷰를 하니 그 어린아이들이 꾸는 미래의 꿈에서부터 서열이 확연히 드러나네요.
책 가격을 보니 이런 책은 사서 보지 못할 사람도 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값이 그나마 다른 것보다는 싼 편이겠지만 이런 식으로 정보에 대한 접근도 점점 양극화되겠구나라는 생각까지 말입니다. 저 역시 동네도서관에 주문을 넣을 수 밖에 없으니.
영어책은 페이퍼백으로 3만원도 안되는데 불과한데 말이죠.

로쟈 2008-06-29 23:21   좋아요 0 | URL
원서의 알라딘 판매가는 21,000원 정도니까 거의 3배 차이네요. 약간의 악순환인데, 인문서의 독자가 줄어들다 보니 책의 단가는 점점 더 올라가는 식입니다. 그럼, 독자는 더 줄어들고...

aisms 2008-10-29 20:23   좋아요 0 | URL
플래닛 출판사입니다.... 가격이 좀 높지요.... 고민 많이 했습니다. 로쟈님의 의견도 일부 맞는 말씀이지만, 원서 가격과 비교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그 분량을 번역하는 데 드는 비용과 편집비 등을 고려하면 그 정도 가격을 매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영어 양장본도 처음 나왔을 때는 45달러 정도였고, 이 책이 영미권 독자들을 대상으로 초판 4만부를 찍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고작 2,000부를 찍고 경향신문과 한겨레21 등에 전면 광고 등을 하고도 4개월이 지난 지금도 초판의 3분의 2 정도밖에 소화하지 못한 게 현실입니다. 제작비에 대비해서도 그렇게 비싼 가격은 아닙니다. 대충 계산해 보시면 아시겠지만 (소설책을 제외하면) 그렇게 비싸게 매긴 것도 아닙니다. 아무튼 이 책은 아직 제가 낸 책 중에서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저자가 최근 포린 폴리시 선정 세계 100대 지성에 들기도 했고, 아마도 제가 내지 않았으면 오랫 동안 국내에 출간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영미권에서 올해의 책을 석권할 정도로 화제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오랜 기간 동안 책을 계약하겠다고 나선 출판사가 전혀 없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가격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으실 거라고 믿습니다. 화제가 되는 대부분의 책들이 미국에서도 아직 책으로 나오기 전에 원고 상태에서 계약이 이루어지고 있는데도 말이지요. 쓰고 보니 쑥스럽군요. 일부 메이저 출판사들을 제외하고는 최근 대부분의 출판사들은 아주 어렵습니다. 언제 무너지질 모르겠다는 공포감에 짓눌려 있다고나 할까요? 뭐, 그렇다는 말씀이고요. 관심을 가져주신 데 열매 님과 로쟈 님께 감사드립니다.

로쟈 2008-10-29 22:32   좋아요 0 | URL
책값에 대해서는 저도 이해하는 편입니다. 물론 전체적으론 지난 몇년간 급상승한 것도 맞고요. 문제는 수요 같습니다. 아시겠지만, 같은 분량이라면 소설이 인문서보다 단가가 낮은 건 독자층이 더 넓은 탓이죠. 인문서 독자층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는 인문 출판계 전체의 숙제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