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데리다> 상영전

엊그제 한겨레교육문화센터에서의 현대철학 강의에서 데리다를 다루면서 다큐영화 <데리다>(2002)에 관해 조금 자세히 얘기했는데('입문'용으로 가장 좋을 듯하다는 판단에서였다), 개인적으론 이 영화의 자막 작업을 하고 간단한 소개강의도 한 바 있다. 찾아보니 2007년 봄이었다. 그때 영화 내용을 간추린 자료를 이번 강의에서도 사용했는데, 다시 둘러보니 서재에는 옮겨놓지 않았다. 혹 이 영화를 보신 분이나 보실 분들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서 옮겨놓는다(유튜브에서도 절반 이상은 찾아볼 수 있다).    

감독: 커비 딕(Kirby Dick), 에이미 지어링 코프만(Amy Ziering Kofman)
음악: 류이치 사카모토(<마지막 황제>)


#1. 미래(future)와 도래(l'avenir; to come)의 문제
-미래: 예측, 예견, 계획, 예언할 수 있는 시간.
-도래: 전혀 예측/예견/계획/예언할 수 없는 시간(진정한 미래), 타자(Other)의 도래.  

#2. 데리다 부부의 외출 준비 모습 - 폴란드방송(“데리다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 한 사람이다”) - BBC방송(“디컨스트럭션을 제창한 세계적인 철학자 데리다”) - 프랑스방송(“데리다의 철학은 갱도를 떠받치는 들보들을 폭파하는 광부들의 작업과 같다”) 

#3. 거리를 걸어가는 데리다 일행 - 2주간 카메라와 동행하는 생활(‘미국적인 삶’ 혹은 ‘찍거나 찍히거나’)  

#4. 철학자의 삶과 전기(biography)(뉴욕대학교 강의) - 하이데거 왈, “아리스토텔레스는 태어났고 사유했고 죽었다.” - 권위 있는 전기에 의한 고착적인 이미지 vs 텍스트의 한 문단에 대한 혁신적인 읽기  

#5. 데리다의 삶(에피소드) - 데리다의 트라우마(서플먼트에 포함된 내용) - 어머니와의 분리 장애(밤마다 울어댐, 4살 유치원, 19살 때 파리에서의 대학준비반) - 제도(학교)에 대한 공포와 혐오(서플먼트) - 초등학교 때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학교에서 쫓겨남. - 소년시절의 꿈은 축구선수. 

#6. 전통철학에서의 전기/자서전에 대한 비하적 태도 - 미용실의 데리다 

#7. 디컨스트럭션(해체, 탈구축, 탈구성)에 대한 설명 - 인터뷰 상황과 기술적 조건에 대해서 먼저 상기시킴(지금 자연스러운 게 전혀 아니라는 점). “디컨스트럭션이란 자연스럽지 않은 걸 자연스럽게 만들지 않는 것, 즉 역사적, 제도적, 사회적으로 규정된 것을 자연적인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 것.” - 디컨스트럭션은 모든 작품/텍스트에 ‘언제나, 이미’ 작동하고 있음. 

#8. 프랑스에서의 강의 - 기록과 아카이브(문서보존)의 문제 - 전화통화 - 평소라면 외출이 없을 경우 파자마 차림으로 지냄(하지만 카메라 때문에 정장을 입고 있음) - 리얼리티(현실)와 허구(가상)의 문제. 

#9. 시각(seeing)과 촉각(touching)의 문제 - 눈과 손의 문제 - “눈은 우리 신체의 일부분이지만 나이를 먹지 않는다.” - 눈과 손은 서로를 인지하고 확인하는 자리 - 나르시시즘의 문제 - 우리를 더 잘 보는 것은 타인(타자)들이다.  

#10. 초상화 전시회에서의 데리다 - “나는 받아들인다(I accept.') - 자기 이미지와 대면할 때의 당혹스러움과 두려운 낯섦(uncanny). - 데리다는 사진에 대해서 결벽이 있었음(1969년까지 일체의 사진이나 복제 이미지를 허용하지 않았음. 서플먼트)   

#11. 나르시시즘의 문제 - “사랑은 나르시시즘적이다.” 

#12. 데리다와 마르거리트(아내, 정신분석의) - 1952년 고등사범 재학시 스키장에서 처음 만남(친구의 여동생) - 1957년 미국에서 결혼 - 식사를 차려먹는 데리다 부부. 

#13. 다시 철학자의 삶 - “나는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지만 이야기하는 방법을 모른다”(언제나 부족하고 어긋나게 이야기함) - 공개적인 인터뷰에서 사생활에 대한 언급에 신중할 수밖에 없는 이유 - 필름으로 기록된 부부간의 대화를 다시 확인하는 데리다 - 거리를 걸어가는 두 사람. 

#14. 사랑에 대하여 - 사랑 일반론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음 - 사랑은 ‘who'와 ’what'의 문제(누구를 사랑하느냐 vs 누군가가 가진 무엇을 사랑하느냐) - “정조(충실성)는 ‘who'와 ’what' 사이의 차이에 의해서 위협 받는다”     

#15. 데리다의 가족 - “누이와는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다”- 친구 부부의 방문 - 데리다 어머니의 신장결석(47-90세까지 하나의 신장으로 삶). - 어머니에 대한 기억(말년에 치매). 

#16. 인종주의, 반유대주의에 대한 입장 - 비시정부의 반유대주의 정책에 따라 1940년 10살 때 학교에서 쫓겨남 - “가장 고통스러웠던 건 학교의 행정적인 결정이 아니라 ”더러운 유태인!“이라는 일상에서의 모욕 - 어른이 아닌 또래의 급우들이 폭력과 돌팔매질.  

#17. 남아공의 데리다 - 만델라가 수감돼 있던 감옥을 둘러봄 - 1998년 8월 남아공의 여러 대학에서 ‘용서’를 주제로 강연 

#18. 순수한 용서의 필요성과 불가능성(순수한 용서는 용서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용서이며 따라서 불가능. 하지만 용서할 수 있는 것을 용서하는 것은 용서가 아님) - 화해와 용서를 구별해야 함 

#19. 미국 시트콤과 디컨스트럭션 - “TV 그만 보고 책을 읽으시오!” 

#20. 즉흥적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일(improvising)의 어려움(특히 카메라나 녹음기 앞에서) - 우리는 언제나 얼마만큼 불가피하게 상투적인 말을 하고 행동함 - 나 자신 되기의 어려움  

#21. 에코와 나르키소스 신화 - 나르키소스에게서 시각 이미지(sight)와 에코에게서 목소리(voice)의 문제 - 에코와 나르키소스는 서로를 사랑하는 두 장님, 어떻게 이 두 사람이 사랑하느냐는 게 문제. 

#22. 데리다의 서재 - “여기 있는 책들을 나는 다 읽지 않았어요.” - 아들 피에르의 방. 

#23. “어머니와 같은 철학자가 있다면?”이란 질문에 “철학은 어머니가 될 수 없다. 철학자는 언제나 남성 형상이기에.” - “따라서 철학자는 아버지이지 어머니가 아니다.” - “어머니가 될 수 있는 철학자는 디컨스트럭션 이후의 철학자, 곧 나 자신이거나 나의 아들. 혹은 나의 손녀 철학자”(디컨스트럭션은 남근중심적 철학에 대한 해체의 시도) - 사유와 철학은 구별해야. 

#24. 철학의 죽음(종언)과 사유의 미래 - 데리다의 데뷔 - 아비탈 로넬의 회고(‘디페랑스’가 사전에 등재되던 날) - 데리다의 어머니 왈, “재키, 네가 ‘디페랑스’라고 쓴 거냐?” - 형의 증언(“걔가 어떻게 철학을 하는 건지 아주 커다란 수수께끼예요.”) - 가계에 ‘철’자도 안 들어가 있음(“우린 지적인 것과 무관한 집안입니다.”).  

#25. 데리다 아카이브는 파리에 있음 - 1995년 캘리포니아대학(어바인)에서도 아카이브가 만들어짐 - 개소식에서의 데리다(“납골당 같군요.”) 

#26. 아카이브의 문제 - “아카이브는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미래의 문제이고 책임과 약속의 문제이다”   

#27. “철학자들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는다면 무얼 보고 싶으냐?”는 질문에 “그들의 성생활”이라고 답함 - “나는 그들이 말하고자 하지 않았던 것을 듣고 싶다.” - “그들은 왜 자신의 책에서 사생활은 다 지우고 개인적인 것들은 말하지 않았는가?” - “당신도 그런 질문을 받고 싶은가?”란 질문에 “이미 여기저기서 말했다. 숨겨진 형태로, 다른 방식으로.” 

#28. 비밀스런 나와 내 안의 비밀 - “나는 누구인가?” - 촬영되는 데리다의 일거수일투족과 그가 말하지 않는 비밀 - 아카이브 이후의 데리다 - 데리다의 죽음 이후의 데리다.  

10. 05. 08.

 

P.S. 참고로 영화의 대본과 관련자료를 모아놓은 책도 나와 있다. <데리다>(2005). 입문서로 소개되면 좋을 듯싶다. 개인적으론 번역에 참여할 용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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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 2010-05-08 0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로쟈님, 아카이브에 대한 데리다의 생각을 좀더 자세히 살피고 싶습니다. 데리다가 아카이브에 대해서 따로 쓴 글이 혹시 있는지요?

로쟈 2010-05-08 09:44   좋아요 0 | URL
저도 읽어보진 않았지만 'Archive fever: A Freudian Impression'란 얇은 책이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읽고 싶어지네요.^^

미지 2010-05-08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찾아봐야겠네요, 감사합니다^^!

2010-05-09 15: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5-09 18: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교수신문에서 공화주에 관한 책 두 권에 대한 서평을 옮겨놓는다. 번역서인 <공화주의와 정치이론>(까치, 2009)와 조승래 교수의 <공화국을 위하여>(길, 2010)이 그 두 권의 책인데, 모두 관심도서로 포스팅한 적이 있다. 아래 서평은 독서에 유익한 길잡이가 될 만하다.   

교수신문(10. 05. 03) ‘더불어 사는 삶’을 위한 비판적 대안 … 所有와 共有 관계도 조명 필요  

두 책의 출판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환영한다. 『공화주의와 정치이론』(까치, 2009)을 번역한 곽준혁 고려대 교수(정치외교학) 팀의 노력과 『공화국을 위하여-공화주의의 형성과정과 핵심사상』(도서출판 길, 2010)의 저술을 위해서 ‘사반세기’에 걸친 인고의 세월을 책들과 씨름하며 서양의 사상가들과 맞대결한 조승래 청주대 교수(정치외교학)의 학자적 뚝심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이 책들의 출판을 환영하는 이유는 다음에 있다.

단적으로 ‘공동체’와 ‘공화국’에 대해서 제대로 소개하는 우리말 저술이 없었기 때문이다. 두 책의 출판을 계기로 ‘공화주의’에 대한 많은 논쟁과 담론이 촉발되기를 희망한다. 공화주의 논의가 활성화돼야 하는 이유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구성원들을 묶어주는 공통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해하는 일이 ‘더불어 사는 삶’을 가능케 하는 선결 요건이기 때문이다. 즉 공동체와 개인 사이의 관계 설정 문제와 관련해서 권리와 의무 설정 문제와, 개인과 개인 사이의 관계 설정 문제에 대한 기본적인 합의와 동의 문제야말로 소위 지배와 예속에 의해서가 아닌 ‘더불어 사는 삶’의 핵심 요건이기 때문이다. 이 두 저술의 출판이 의미 있는 또 다른 이유는 ‘더불어 사는 삶’의 문제와 관련해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적 대안으로 공화주의 담론을 제안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신 자유주의의 거센 물결 앞에서 무기력한 개인으로 전락한 시민들의 삶, 비효율적이고 무능력하다고 낙인 찍힌 민주주의 그리고 여전히 집단적 안도와 정치적 동원의 대상으로 남아있는 민족주의에 대한 우려와 반성이다.”(곽준혁, 역자서문, 14쪽)  

“하이에크는-함께 검토한 벌린도-전체주의에 맞서기 위해 개인의 존엄성을 강조한 나머지 인간 사회의 공동체적 기반을 허무는 우를 범했다.”(조승래, 321쪽)

그러니까 이 책들은 신자유주의에 의한 사회 양극화 시대의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적 모색으로 제안된 새로운 형태의 공화주의를 주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일종의 정치-경제 기획 프로그램인 셈인데, 자유로운 개인의 독립성과 개체성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모든 구성원의 공통성을 공화국의 기초로 간주하되 사회, 경제, 교육, 복지 등의 구체적인 차이와 격차가 발생할 수 있는 영역에서의 최소 공통성의 수립이라는 공화국의 이념에 대한 담론과 논의가 요청되는 시점에서 이 책들이 제기하는 문제 의식은 의미 있고 중요하다 하겠다.

그러면 이 두 저술이 제기하는 문제의식과 공화주의 담론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소개해보자. 이와 관련해서 아마도 공화주의 담론의 역사적 맥락에서 이 두 저술이 자리한 위치를 살피는 것도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서양 역사에서 공화주의가 주목 받은 적은 크게 세 번 있었다. 먼저 고대 그리스의 민주정 시대와 로마의 공화정 시대이다. 이 시대의 담론을 학자들은 소위 아리스토텔레스 공화주의라 부른다. 아리스토텔레스 공화주의의 특징은 폴리스(공적인 것)와 오이코스(사적인 것)의 엄격한 분리에 있다(『형이상학』 IX장, 8, 1050 a 4~9). 공적인 것을 다루는 원리와 사적인 것을 다루는 원리는 서로 다른 것이며, 사적인 영역에 대해 공적인 영역이 인륜적인 우월성뿐만 아니라 존재론적 우월성도 가진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이다.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공화주의의 현대적 대표자로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를 들 수 있다. 『인간 조건(The Human Condition)』(1996)에서 그녀는 신 로마 공화주의의 영향으로 인해 두 영역의 엄격한 분리가 점차 해소됐고 공적인 것의 우위가 사라진 시대가 됐다고 개탄한다. 아리스토텔레스 공화주의의 특징은 공공적인 것의 우위 속에서 정치 사회와 경제 사회를 분리하고 정치 사회를 덕성 있는 시민들의 폴리스로 되돌리려는 시도로 연결된다.

共同體와 公同體의 관계 설정
나의 讀法이 맞다면 조승래 교수는 위의 인용에서도 보았듯이 개인에 대한 공동체의 우위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전통의 고전적 공화주의를 선호하는 것으로 보인다. 조 교수의 『공화국을 위하여-공화주의의 형성과정과 핵심사상』은 논의의 출발을 키케로가 생각한 공동체와 공화정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공화주의를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한 사람은 플라톤이다. 공(public)적인 것과 사(private)적인 것의 구분에 대한 논의를 읽어낼 수 있는 작품이 플라톤의 『국가』이기 때문이다. 물론 칼 포퍼가 플라톤을 비판했을지라도, 그의 비판은 플라톤의 ‘국가’의 논의가 共同體에서 公同體를 끌어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무제한적 욕망으로 부풀고 부어 오른 아테네 정치 共同體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공(public)의 영역에서 다시 公적 체계와 체제에 대한 생각이 『국가』 저술의 기본적인 의도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조승래 교수에게 후속 연구로 共同體에서 公同體의 관계 설정 문제를 따져줄 것을 부탁 드린다. 또한 후속 연구로 인간성(humanitas)에 들어 있는 여러 성격 가운데에서 共同體와 개인 문제 및 公同體와 개인의 관계 설정 문제의 분석을 부탁하고자 한다. 아마도 공화주의 담론이 더욱 풍성하고 의미 있는 논의로 연결될 것이다.

다음으로 르네상스 시대에 등장한 마키아벨리의 신 로마 공화주의이다. 그는 시민의 ‘덕성’을 강조한다. 학자들은 마키아벨리의 공화주의를 ‘시민적 덕성의 공화주의’라고 부른다. 아리스토텔레스 공화주의의 핵심이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구분에 있고 전자의 후자에 대한 우위를 강조하는 반면, ‘시민적 덕성의 공화주의’에서는 공적인 것의 우위가 존재론적 우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마키아벨리는 폴리스의 우위를 설명하기 위해 철학이 아닌 실제 역사에 기댄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역사가 리비우스의 중심 개념인 인민(populus)이 아니라 근대의 개인(individuum)을 중심 개념으로 설정한다는 것이다. 근대적 개인 개념의 출발점이 여기에 있다 하겠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 개념으로서의 폴리스 개념의 해체를 의미한다. 마키아벨리는 다른 방식으로 공적인 것의 우위를 주장한다. 공적인 것은 덕성이라는 개별 시민의 주관적 행위규범 및 동기와 결부돼 우위를 확보하기 때문이다. 즉 개인은 유리함과 불리함에 따른 합리적 선택을 하지만 시민은 정치공동체를 향하는 덕성에 의해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 두 개의 행위 규범에서 전체를 향한 덕성은 개별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합리성에 대해 우위를 가진다는 말이다. 개인에 대한 폴리스의 우위는 개체적인 합리성에 대한 시민적 덕성의 우위로 변형된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조승래 교수는 공화주의 논의의 시작점으로 키케로의 res publica 문제를 상정했는데, 나는 특히 개인의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원자주의적 individuum으로 보는 접근이 아닌, 요컨대 civis(시민)와 civitas(公同體)의 관계 설정과 humanitas(인간)과 res publica(共同體)의 관계 설정으로 나누어 접근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얻을 것이라는 조언을 드리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근대이다. 이 시대에 다뤄진 정치 담론은 루소와 칸트와 같은 철학자들의 근대 공화주의이다. 근대 공화주의는 17세기의 홉스와 로크에 의해서 수행된 反아리스토텔레스주의 지평에서 비롯된다. 루소도 칸트도 모두 개인의 자유 의지에서 출발하는데, 이러한 출발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폴리스적 동물’이라는 인간 정의의 재고를 의미한다. 루소나 칸트가 노정하는 전제는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이다. 특히 칸트의 개인은 공적 원리에 의해 철저히 脫개인화된 존재이다. 탈개인화의 대표적인 예로 칸트의 정언 명령을 따르는 소위 특정화되지 않는 3인칭 단수로서의 개인을 제시할 수 있다. 이러한 개인들은 사회계약, 이른바 ‘원천적 계약(contractus originarius)’의 주체로서 공적 개인(persona publica)이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서 탈개인화된 개인이 공적 개인으로 자리매김된다. 하지만 이러한 공적 개인도 마찬가지로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구분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런 구분에 입각해서 근대 공화주의를 보편적 고전 공화주의라 부르기도 한다.

철학적·경제적 공화주의 논의 필요
어떤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식의 고전 공화주의와 근대의 보편 공화주의는 원리적으로 하나의 뿌리를 가진 것으로 봐야 한다. 그러나 고전 공화주의와 보편 공화주의가 다른 이유는 각각의 입론 방식이 다른 토대에 서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근대의 공적 개인은 공적인 원리에 의해서 분리된 인격체이기 때문이다. 이를 토대로 철학적 공화주의에 대한 추가 논의를 조승래 교수에게 부탁하고자 한다. 이와 관련해서 『공화주의와 정치이론』의 제8장에 소개된 제임스 보머의 ‘비지배와 초국적 민주주의’는 칸트의 보편적 공화주의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한계가 있어 보인다.

그러니까 인류 차원에서의 정치적 공화주의 문제는 사실 세계 각국의 경제적 문제와 직결된 것이고, 다시 말해 경제적 공화주의 문제의 맥락에서 함께 검토돼야 하는 문제이다. 즉 개인의 所有와 인류의 共有의 관계에 대해서 따져야 하는데, 이에 대한 뚜렷한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정치적 공화주의와 경제적 공화주의의 관계 설정, 혹은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 민주주의의 관계 설정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해야 할 때가 지금이 아닌가 싶다. 그것도 인류 차원에서 말이다.(안재원 서울대·철학)  

10. 05.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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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 2010-05-06 23:25   좋아요 0 | URL
위의 아리스토렐레스 리퍼런스가 맞나요? 넘버링도 이상한 것 같고....

로쟈 2010-05-06 23:28   좋아요 0 | URL
확인해보진 않았습니다. 오기됐나요?..
 

지난주에 나온 책 가운데 화제작은 가장 두툼한 책이기도 한 박성관의 <종의 기원, 생명의 다양성과 인간 소멸의 자연학>(그린비, 2010)이었다. 하지만 당장엔 읽을 여유가 없어서 책을 구해놓고도 리뷰기사를 옮겨놓는 것마저 생략했었다. 인터뷰기사를 포함해서 리뷰기사가 많이 나왔기 때문에 굳이 거들지 않아도 됐고.  

원래 같이 묶어서 다루려고 했던 책은 앤드류 니키포룩의 <대혼란: 유전자 스와핑과 바이러스 섹스>(알마, 2010)였다. '21세기를 위협하는 생물학적 유행병에 대한 보고서'이기에 최근의 구제역 파동과 관련해서라도 크게 다루어질 만한 책이었지만 아직까지 리뷰가 뜨지 않고 있다. 아마도 이번 주말에나 다루어지는 모양이다.    

그런 식으로 아직 주목받지 못한 책 가운데 개인적인 관심도서가 몇권 더 있다. 프랑스의 정신분석가 시몬느 코르프소스의 <아버지들에 대한 찬사>(해피스토리, 2010)도 그중 하나다. 필리프 쥘리앵의 <노아의 외투>(한길사, 2000)와 견주어볼 만한 책이라고 생각하지만, 소개기사가 뜨지 않고 있고 알라딘의 책소개도 목차만 나와 있는 형편이다(저자에 대해서 '뒷조사'까지 해두었지만 바쁘기도 해서 포스팅은 미뤄두고 있다). 내달에 카뮈의 <최초의 인간>(열린책들, 2009)을 강의에서 다룰 기회가 있는데, '아버지'란 주제에 대해서는 그때쯤 포스팅을 할까 한다.  

생물학과 정신분석학을 거쳐서 시선을 경제학쪽으로 옮기면, 지난주 관심도서는 리처드 윌크와 리사 클리젯 공저의 <경제 인류학을 생각한다>(일조각, 2010)이다. 찾아보니 필립 커튼의 <경제인류학으로 본 세계무역의 역사>(모티브북, 2007)란 책도 이미 나와 있다. '경제인류학'은 물론 칼 폴라니 덕분에 관심을 갖게 된 분야인데(폴라니의 책은 조마간 더 나오는 것으로 안다), 신간은 이 분야에 대한 계보도를 그려줄 것으로 기대된다. 크게 주목받지는 않은 책인데(학술적인 성격의 책이어서인가 보다) 그래도 거의 유일한 소개기사를 늦게나마 스크랩해둔다. 학술서라고 해서 제쳐놓지는 않으니까...  

 

서울신문(10. 04. 28) 경제학계 마이너리티 칼 폴라니 금융위기 이후 그의도덕경제 다시 깨어났다

미국 금융사 리먼 브러더스 파산과 함께 불어닥친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때 뜻밖의 일은 또 하나 있었다. 금융자본주의의 폐해가 드러났음에도 사람들은 위기와 공황이 화두였던 칼 마르크스를 찾지 않았다. 대신 불려 나온 사람은 ‘시장경제 따위는 존재할 수도 없고, 존재한 적도 없는, 일종의 유토피아적 망상’이라고 선언한 경제인류학자 칼 폴라니(1886~1964)였다. 오래 전 절판된 폴라니의 책 ‘거대한 전환’이 새로 번역되어 나오기도 했다.

●시장경제도 결국 잘살기 위한 도구
아마 시장이 사회를 지배하는 상황을 끝내고 사회가 시장을 통제해야 한다는 폴라니의 주장이 마르크스보다 더 현실적으로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동시에 “마켓 프로세스 자체가 목적”이라는 하이예크식 자유시장 논리보다 시장경제도 결국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도구’에 불과할 뿐이라는 상식도 작용했다. 



이번에 출간된 ‘경제인류학을 생각한다’(리처드 윌크·리사 클리젯 지음, 일조각 펴냄)는 폴라니로 상징되는 경제인류학적 논의에 대한 입문서다. 냉정하게 말해 경제학계에서 경제인류학적 논의는 그다지 발언권이 없다. 기존 분과학문 체계에 잘 들어맞지 않는 데다 복잡한 수학 모델을 즐겨 쓰는 현대 경제학 흐름 속에서, 문화와 역사 운운하는 것은 뜬구름 잡는 얘기처럼 비쳐질 수 있어서다.

“경제인류학 연구를 수행하고 글을 쓰는 사람도 자신이 경제인류학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저자의 언급이나, 척박한 토양 때문에 “이 책과 상호보완해서 읽을 수 있는 문헌이 지극히 적은 현실이 안타깝다.”는 번역자(홍성흡 전남대 교수)의 언급은 이런 현실을 반영한다.

대형마트보다 동네슈퍼의 생존이 더 중요
경제인류학의 핵심은 ‘시장경제가 현대 인간사회의 핵심이라는 얘기는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가령 폴라니는 경제활동을 교환(exchange)·호혜성(reciprocity)·재분배(redistribution)로 나눈 뒤, 시장경제는 교환의 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시장경제를 옹호하는 이들은 호혜성이나 재분배 같은 전근대적 경제활동을 ‘도덕경제’(Moral Economy)라 부르며 이미 끝난 것으로 취급한다.

그러나 이런 도덕경제적 요소는 아직까지도 교환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고 있고, 또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게 폴라니의 주장이다. 이는 경제학의 정교한 수학모델 대신 주변을 잠시만 둘러봐도 알 수 있다. 대기업들은 준조세라며 우는 소리를 하면서도 자발적으로 사회공헌활동을 벌인다.

대형마트의 경쟁력보다 동네 슈퍼마켓의 생존이 더 중요한 것 아니냐는 주장도 나온다. 폴라니식 표현에 따르면 시장경제는 독자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에 ‘묻어가는(embedded)’는 것이고, 시장경제가 제 분수를 잊고 점령군처럼 나대면서 ‘악마의 맷돌’이 인간과 사회를 갈아버린 것이다. 



고전경제학에서 문화경제학까지 두루 다뤄
무엇보다 책의 장점은 그간 경제에 대한 논의가 알기 쉽게 총망라되어 있다는 점이다. 미시경제학적 흐름에 대해서는 애덤 스미스로부터 고전경제학을 거쳐 최근 논의되는 제도경제학, 행동경제학, 실험경제학까지 두루 건드린다. 또 사회·정치경제학적 흐름에 대해서는 마르크스와 종속이론가들은 물론, 정반대 입장에 서 있는 에밀 뒤르켕이나 구조기능주의자들까지 다뤘다.

문화경제학에서는 사회학자 막스 베버, 인류학자 브로니슬라브 말리노프스키, 민족지학자 프란츠 보애스, ‘증여론’으로 유명한 마르셀 모스, ‘두꺼운 서술’(thick description)을 언급한 클리퍼드 기어츠 등이 등장한다. 종착역인 결말에서는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까지 끌어들인다. 경제인류학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서구 사회과학 전반을 훑어볼 수 있다는 뜻이다.(조태성기자) 

10. 05.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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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술 2010-05-06 22:11   좋아요 0 | URL
제 무식함을 드러내는 물음일 수도 있는데 원제가 Economies & Cultures 니까 경제인류학보다는 경제문화학이라고 옮기는 게 더 알맞을 거 같은데요.

로쟈 2010-05-06 23:29   좋아요 0 | URL
'문화학'이란 말은 용례가 또 달라서요. 저자 서문 같은 봐야 좋을 듯해요. 한데, 책은 어지간한 서점엔 없더군요...

로쟈 2010-05-08 10:16   좋아요 0 | URL
아, 부제가 '경제인류학의 토대'입니다...
 

한겨레신문사에서 발행하는 새 경제월간지 <이코노미 인사이트> 창간호가 나왔다(http://www.economyinsight.co.kr/). 급하게 청탁을 받고 <제1권력>(프로메테우스, 2010)과 <부의 제국 록펠러>(21세기북스, 2010) 등에 대해 쓴 서평을 옮겨놓는다. 론 처노의 전기들을 참고하여 주로 히로세 다카시의 주장을 재구성한 글이다. 참고로, 북리뷰란에는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고용, 이자, 화폐의 일반이론>(필맥, 2010), 프레드릭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법>(21세기북스, 2010)이 더 다루어졌다.    

이코노미 인사이트(10년 5월 창간호) '강도 귀족'은 어떻게 등장했는가?

“세상 사람들이 내가 하는 일에 대해 비난하고 있다는 걸 잘 안다. 하지만 화려한 비즈니스를 하고 있는 놈들은 다른가? 그들이 하는 짓거리가 멋있다고 생각한다면 정말 큰 착각이다. 이 세상에 합법적인 사업이란 결코 있을 수 없다!” 

1920년대 미국 ‘암흑가의 대통령’ 알 카포네의 말이다. 합법적인 사업이란 있을 수 없으므로 자신의 ‘불법적인 사업’ 또한 죄가 되지 않는다는 변론이겠지만, 일본의 반핵운동가이자 논픽션 작가 히로세 다카시는 거꾸로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합법적인 사업’이란 ‘합법을 가장한 사업’이며, “화려한 비즈니스를 하고 있는 놈들” 또한 카포네와 마찬가지로 불한당일 뿐이라는 것이다. 미국의 재벌가문 모건과 록펠러가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유지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미국 사회를 지배하고 세계를 조종했는지 추적하는 <제1권력>(프로메테우스출판사, 2010)은 말하자면 이 ‘불한당들의 세계사’다.    

'사자' JP모건 - '구렁이' 록펠러
거슬러 올라가면 시작은 미국의 남북전쟁이었다. 모건 가문의 원조 JP 모건은 아서 이스트먼이란 사람이 북군으로부터 구식 카빈소총을 구입하여 되파는 수상한 거래를 할 때 자금 지원을 담당했다. 북군이 무기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이스트먼은 소총 5천 정을 한 정당 3.5달러에 사들여서 중개인에게 12.5달러에 팔았고, 이 중개인은 북군의 프레몽 장군에게 한 정당 22달러를 받고 다시 팔아넘겼다. 문제의 소총이 정부의 무기고에서 나와 다시 정부의 군대로 돌아가는 데 불과 3개월이 걸렸지만, 이 거래는 6배의 차익을 남겼다. 보기에 따라선 대단한 사업수완이겠지만, “한마디로 영악하기 짝이 없는 사기꾼 일당”이다. 이때 모건의 나이 24살이었고, 그는 남북전쟁에서 마련한 사업자금을 바탕으로 JP모건사(社)를 설립해 키워나간다.   

모건 가문의 전모를 파헤친 <금융제국 J.P. 모건>(플래닛, 2007)의 저자 론 처노에 따르면,  남북전쟁 당시 소총거래에 모건이 얼마나 개입했는지는 논란거리라고 한다. 하지만, 론 처노도 인정하는 것은 모건이 남북전쟁을 국가에 봉사할 기회가 아니라 돈 벌 기회로 보았다는 점이다. 게티스버그 전투 이후에 모건 또한 징집을 받았지만 그는 부유층의 관례대로 300달러를 주고 다른 사람을 사서 군대에 보냈다. 대신에 전황에 따라 가격이 급하게 등락하던 금을 대량으로 매집해 당시 화폐로 16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히로세 다카시의 환산으론 2천억 원이 넘는 액수다. 이를 바탕으로 모건은 부자 은행가로 등장했고 ‘귀족 자본가 시대’를 열었다. 금융시장이 부실하고 원시적인 상황에서 은행가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며 사업을 확장해나갔고 한 지역의 ‘영주’처럼 군림했다. ‘강도 귀족’(robber baron)이란 말은 그래서 생겨났다.  

1901년 당시 백수의 왕 ‘사자’라고도 불린 JP 모건에게 필적할 만한 거대한 구렁이 ‘아나콘다’가 나타났으니 그가 바로 석유사업가 록펠러였다. 남북전쟁 때 군수물자의 운반과 판매로 막대한 수익을 올린 록펠러는 “타인에게 결코 이익을 나눠주지 말 것”이란 철칙을 갖고 있던 인물이었다. 모건이 철도왕 밴더빌트로부터 거대 철도회사를 넘겨받은 시점에 록펠러는 스탠더드오일이라는 회사의 정유탱크에 미국 전체 석유의 95%를 빨아들였다. 이 유례없는 독점의 이면에는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교활한 수법이 숨어있었다. 스탠더드오일의 독점에 대항하기 위해서 지역의 여러 석유업자들이 다른 회사로 힘을 모아주고 보니 그 회사가 스탠더드오일의 자회사더라는 식이다. 가히 ‘자본가의 원형’(막스 베버)이라 부를 만한 초상이 아닐 수 없다.    

론 처노가 <부의 제국 록펠러>(21세기북스, 2010)에서 묘사한 바에 따르면, 록펠러와 모건 두 사람은 마치 금욕주의자와 향락주의자 혹은 의회파와 왕당파처럼 정반대되는 성향을 지녔다. 록펠러가 보기에 모건은 자만과 사치, 오만 등 모든 죄악의 화신이었고, 모건이 보기에 록펠러는 너무 무미건조하고 점잔이나 빼는 인물이었다. 둘은 서로를 싫어했지만 그런 사적인 감정이 이익을 키우기 위한 거래에 장애가 될 수는 없었다. 19세기말까지 미국의 주요 산업을 장악한 양대 자본가 가문은 그리하여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미국 자본주의를 지배하는 ‘골드 핑거’가 된다.  

미 각료 79% 모건 록펠러 수족
사실 미국을 지배하는 ‘제1권력’이라면 미국 패권주의 하에서 전세계를 쥐락펴락하는 권력이기도 하다. 일본인 저자가 이들의 숨겨진 지배를 폭로하는 데 발 벗고 나선 이유일 것이다. 히로세 다카시의 주장은 간명하다. 이 양대 자본가가 대통령을 비롯한 주요 각료직에 자신의 충견들을 앉혀서 암암리에 미국을 지배해왔으며, 이 구조는 현재에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 그는 20세기의 첫 대통령 올린 매킨리부터 레이건까지 내각의 366개 각료 자리를 면밀하게 조사하여 그 중 290개 자리, 즉 79%가 모건-록펠러연합의 수족이라는 사실을 든다. 그가 보기에 미국 대통령은 국민의 눈을 속이기 위한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덧붙여 1983년 기준으로 미국의 매출 10위권 기업, “1위 액슨, 2위 GM, 3위 모빌, 4위 포드, 5위 IBM, 6위 텍사코, 7위 듀폰, 8위 인디애나 스탠더드오일, 9위 소칼, 10위 GE” 순위도 각 기업의 진짜 주인으로 바꿔서 나열하면 “1위 록펠러, 2위 모건, 3위 록펠러, 4위 모건-록펠러, 5위 모건, 6위 모건-록펠러, 7위 모건, 8위 록펠러, 9위 록펠러, 10위 모건”이 된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모건과 록펠러의 천하라는 것이다.  

비록 자본의 인맥도를 꼼꼼하게 제시하고는 있지만 히로세 다카시의 주장 역시 유대자본이나 프리메이슨 같은 비밀결사체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음모론의 재판이 아닌가 의심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의 강점은 석유파동처럼 중동석유의 이권을 미리 장악한 상태에서 오일머니를 긁어모은 모건-록펠러연합의 성공 사례보다 ‘실패’ 사례를 제시할 때 더 잘 발휘된다. 가령 1920년대에 미국과 독일 그리고 이탈리아의 금융가와 파시스트는 대연합을 이루고 있었다. 공산주의라는 악에 맞서기 위해서 “미국은 독일 군국주의와 손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였다. 그래서 2차 세계대전이 터진 이후에도 모건-록펠러연합은 미국의 참전을 막았다. 하지만 1941년 12월 예상치 못하게도 일본군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미국의 참전이 불가피해졌고 미국 자본가와 파시스트의 대오는 무너졌다. 물론 모건-록펠러연합은 곧바로 반히틀러주의로 돌아서서 전쟁기간 동안 막대한 이익을 챙겼지만 그들이 애초에 기획했던 시나리오는 아니었다.     

베트남전 숨은 승자
1950년대 매카시즘 광풍의 종말도 모건-록펠러 연합의 본질을 알게 해주는 사례다. 모건과 록펠러의 하수인으로 ‘빨갱이 사냥’에 앞장섰던 조셉 매카시는 당시 육군장관 로버트 스티븐스마저 빨갱이로 몰아붙이다가 역공을 받아 몰락을 자초했다. 흔히 미국 사회가 마침내 양심에 눈을 떴기 때문이라거나 매카시에게 염증을 냈기 때문이라고 이해하지만 히로세 다카시는 다르게 본다. 문제는 스티븐스가 모건-록펠러연합의 중심인물이었다는 점이고, 따라서 매카시가 ‘실수’를 했다는 것이다. 매카시는 빨갱이 사냥꾼으로서 자기 역할에 충실한 파시스트였지만 모건과 록펠러 같은 ‘투기꾼’에게 빨갱이 사냥 자체는 목적이 아니었다. 그들이 필요로 한 건 ‘빨갱이’의 위협을 조장해서 전쟁을 고무하고, 그를 통해서 자기 소유의 기업이 거대한 이익을 올리는 것뿐이다(저자는 심지어 원폭과 수폭 예산을 끌어내기 위해 미국에서 기획한 것이 한국전쟁이었다고 주장한다). 즉 파시즘 자체가 목적이 아니며 그것은 단지 하나의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카포네는 알카트라즈 감옥에 투옥되고, 히틀러는 자살하고 무솔리니는 총살되고 오펜하이머는 해고되고 매카시는 추방당했지만, 그들을 교사한 자들, 무엇보다 모건과 록펠러는 점점 비대해졌다. 파시스트나 행동대원은 투기꾼들에 의해 교묘하게 이용당할 뿐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히로세 다카시는 그런 시각으로 케네디의 암살과 닉슨의 워터게이트 사건도 다시 들여다보며, 이 모든 사건의 배후에서 모건과 록펠러의 손길을 감지한다. 베트남전에서도 미국이라는 국가는 패배했지만 모건-록펠러연합은 떼돈을 벌었다. 그것이 그들의 ‘전쟁 비즈니스’이다. 때문에 저자는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베트남전쟁의 범인은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것처럼 ‘군산복합체’도 아니고, ‘월가’도, ‘재벌’도, ‘죽음의 상인’도, ‘미제국주의’도, ‘대기업’도, ‘독점자본’도 아니다. 이러한 추상적인 언어의 범람이 결국 우리 머릿속에서 범인의 모습을 지워내고야 말았다. 따라서 이제 고유명사를 사용해서 말해야 한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고유명사는 물론 ‘모건과 록펠러’이다.   

히로세 다카시는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재산이 계속 불어나는 사람과 아무리 일해도 돈이 없는 사람이다”(<미국의 경제 지배자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럴 듯하게 들린다면 록펠러 2세의 유명한 경구가 섬뜩하게 다가올 것이다. “최고의 아름다운 장미는 주변의 어린 봉오리들이 희생되어야만 비로소 향기롭고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게 됩니다.”  참고로, 그 장미의 이름이 ‘American Beauty Rose’이고, 미국 수도 워싱턴의 상징이라 한다. 

10. 05. 05.  

P.S. 개인적으로 강조하고 싶었던 건 "매카시는 빨갱이 사냥꾼으로서 자기 역할에 충실한 파시스트였지만 모건과 록펠러 같은 ‘투기꾼’에게 빨갱이 사냥 자체는 목적이 아니었다. 그들이 필요로 한 건 ‘빨갱이’의 위협을 조장해서 전쟁을 고무하고, 그를 통해서 자기 소유의 기업이 거대한 이익을 올리는 것뿐이다... 파시스트나 행동대원은 투기꾼들에 의해 교묘하게 이용당할 뿐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라는 대목이다.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다. 우리에게도 너무나 친숙하기 때문('안보상업주의'란 말이 가리키는 바이기도 하다). 세상은 '파시스트'들이 아니라 '투기꾼들'이 움직인다는 게 히로세 다카시의 핵심적인 전언이다(그러니 '행동대원'들이여, 오버하지 말지어다!). 남한 사회라고 다르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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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바다 2010-05-05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이트헤드는 <과학과 근대세계>를 다음과 같은 말로 끝마칩니다.

"알렉산더에서 케사르에 이르는, 또 케사르에서 나폴레옹에 이르는 위대한 정복자들은 후대의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 영향으로 나타난 결과 전체는, 탈레스에서 현대에 이르는 장구한 계열을 이루는 사상가들이 만들어낸 인간의 습관과 인간 정신의 완전한 탈바꿈에 비한다면 미미하기 짝이 없다. 이 사상가들은 개인적으로는 무력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세계를 지배한 것이다."

위에 요약된 표현은 그의 또다른 저서 <관념의 모험>에서 '무분별한 작인'과 '설득의 작인'으로 상세히 논구됩니다. '무분별한 작인'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듯 보여도 궁극적으로 인류를 이끄는 건 '설득의 작인'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무력하나마 하루하루 노력하며 살아가야 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로쟈 2010-05-05 22:26   좋아요 0 | URL
평상시에는 그런데, 전쟁이나 원폭이 문제라면 사정은 또 달라지니까 문제입니다. 히로세 다카시가 반핵운동가인 게 이유가 있는 거 같아요. 모건이나 록펠러 인맥을 캐는 게 그에겐 반핵운동의 연장인 것이죠...

푸른바다 2010-05-05 22:42   좋아요 0 | URL
히로세의 책을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그의 정교한 폭로 작업 역시 '설득의 작인'에 대한 신념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pw0607 2011-02-28 11:11   좋아요 0 | URL
나중에 기회되시면 히로세 다카시의 책을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무분별한 작인'과 '설득의 작인'이 정확하게 무슨 의미인지 알기 위해 저 역시 <관념의 모험>을 읽어보겠습니다. 푸른바다님의 눈엔 히로세 다카시의 작업이 과연 어떻게 비춰질지 갑자기 궁금해졌거든요 ^^
 

푸르죽죽한 5월에 그나마 낙이 될 만한 것은 홍상수, 이창동 감독의 신작들이 개봉된다는 점이다. 홍상수의 <하하하>와 이창동의 <시>를 두고 하는 말이다. 어제 구입한 이번주 <씨네21>은 아예 파격적인 분량의 홍상수 특집호를 만들었는데, 그의 영화를 기다리는 나의 마음도 그와 다르지 않다(언제쯤 나도 '하하하'라고 웃어볼 수 있을까?). 순전히 그런 기대의 표시로 리뷰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대신에 읽지는 않는다. 영화를 본 다음에 읽겠다.    



한겨레21(10. 04. 30) 넉살 좋게 허허허, 속물스럽게 하하하  

홍상수 감독의 10번째 장편영화 <하하하>의 무대는 경상남도 통영이다. 이번엔 남자들이 떠나고 돌아온 자리에서 영화가 시작된다. 문경(김상경)은 선배 중식(유준상)과 함께 청계산에 오르는데, 이들은 얼마 전에 상대도 통영에 다녀왔음을 알게 된다. 둘은 통영에서 각자 겪었던 “좋은 얘기만 하자”며 술잔을 기울인다. <하하하>는 홍상수의 전작처럼 대구와 중첩을 이루며 하나의 점으로 모인다. 문경과 중식은 끝내 모르지만 이들은 실은 그곳에서 같은 식당을 드나들고 같은 사람들을 만났다.

‘잘 알지 못하면서’ 만나고 얽히고
영화감독 지망생 문경은 캐나다 이민을 앞두고 고향 통영에 들렀다. 거기서 이순신 장군 유적지 관광해설을 하는 성옥(문소리)에게 끌린다. 예의 그렇듯, 여기에 더해지는 삼각관계. 성옥에겐 좋아하는 시인 정호(김강우)가 있다. 또다시 얽히는 관계의 실타래. 다시 정호를 좋아하는 선박회사 여비서 정화(김규리)가 있다. 이들이 서로 밀고 당기고 다가가고 멀어지는 과정에 영화 <하하하>가 있다. <하하하>의 또 다른 축은 유부남 중식과 애인 연주(예지원)가 통영에서 벌이는 “서로를 죽도록 예뻐하는” 애정 행각이다.

‘홍상수 극장’의 10번째 상영작도 이전 작품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여행을 떠난 남자가 여행지의 여자를 만나고 삼각관계에 얽히고, 화내고 술 마시며 밀고 당기고 하다가 결국은 섹스에 성공하지만, 그렇게 만난 관계가 계속 이어질지는 모호한 채로 남는다. “좋은 얘기만 하자”고 시작하는 문경의 얘기가 이전 작품 남자 주인공 얘기에 견줘 관계의 지속 여부와 별개로 좀더 따뜻한 기운은 남긴단 차이는 있다. 그것에선 나이가 들면서 세상에 조금 따뜻한 시선을 던지는 감독의 변화도 느껴진다. 그러고 보면 이러한 기운은 <하하하>에서 반복되는 대사인 “어둡고 슬픈 것 안에 제일 나쁜 것이 있으니 조심하라” “좋은 것만 보도록 노력하라”와 이어진다.

홍상수 영화엔 변하지 않는 가운데 변하는 무언가 분명히 있었다. 갈수록 유머가 늘어가는 경향은 10번째 영화에서도 지속된다. 저마다 신경증을 지닌 인물들이 버럭 화를 내거나 삐치는 장면에선 예외 없이 웃음이 터진다. 홍상수 영화의 관전 포인트 중 하나인 남녀관계. 남자들은 갈수록 툭하면 울음을 터트리는 아이가 돼간다. 남자는 이제 젊은 여자와 관계에서만 아이가 아니다. 문경은 어머니(윤여정)에게 종아리를 맞으며 징징댄다. 여자들은 여전히 이상한 종류의 신경증을 가진 존재지만, 남자에 견주면 성숙한 존재다. 

홍상수 영화의 남자들은 갈수록 귀여운 ‘찌질이’가 되고, 여자들은 성숙한 속물이 되어간다. 성옥이 바람을 피우다 들킨 정호를 “마지막으로 한번 업어주고 싶어”라고 하며 정말로 업어주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처럼 <하하하>의 남녀관계는 여자들이 저만치 가면 남자들은 주춤주춤 쫓아가는 모양새다. 그것은 연주와 중식이 관계에서도 다르지 않은데, 연주의 사랑이 저만치 질주하면 중식이 허겁지겁 따라가는 형국이다. 대신 남자들도 이전 영화에서보다 망설임이 줄었다.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잔머리를 쓰는 대신 상황을 ‘허허허’ 하며 받아들이는 남자 주인공 중식의 캐릭터는 이전 영화에서 보기 힘들었다. 결혼제도의 틀에서 보자면, 불륜인 중식과 연주의 관계가 홍상수 영화의 이전 남녀관계와 달리 안정적으로 보이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거처’가 점점 영화의 중심으로
역시 배우들의 연기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생김새도 홍상수 감독과 닮은 김상경은 허허실실 나사가 조금 풀려 보이는 문경을 넉살좋게 연기한다. 그는 <생활의 발견> <극장전>에 이어서 홍상수 영화의 세 번째 주연을 맡은 이유를 시종일관 증명한다. 통영 사투리를 쓰는 성옥을 연기한 문소리는 짜증내고 흔들리고 소리치는 연기로 여러 차례 객석에 큰 웃음을 안겨준다. 성옥의 캐릭터엔 모성애가 스며 있어야 설득력이 있는데, 문소리는 ‘불안한 모성애’로 부를 만한 복잡한 성격을 자연스레 소화한다. 여기에 문경의 어머니로 나오는 윤여정의 연기는 마치 소리 없이 강한 엔진 같다. 철없는 중식을 맡은 유준상은 적당히 과장하고 처절히 망가지는 캐릭터를 온몸으로 연기한다. 예지원, 김규리 등 <하하하>에 등장하는 배우 대부분이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을 인상을 남긴다.

홍상수 영화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몇 가지 메시지가 있다. <하하하>에서 유난히 반복되는 대사는 “머릿속의 남의 생각으로 보지 말고 네 눈을 믿고 네 눈으로 보아라”. 홍상수의 전작에선 “네 머리로 생각해라” 등으로 변주됐다. 이 대사가 왜 거기에 있고, 왜 자꾸만 나오는지 곱씹으며 <하하하>를 보는 것도 하나의 관람법이 되겠다. 이번에도 마지막엔 빈 아파트로 대표되는 집의 문제가 나온다. 누군가에겐 동굴 같은 그곳이 누군가에겐 소중한 보금자리가 된다. 그렇게 여행을 떠난 이들이 돌아가 머무를 ‘거처’가 점점 그의 영화의 중심으로 들어오고 있다. 5월5일 개봉한다.(신윤동욱 기자) 

10. 05.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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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03 23: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5-04 00: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른바다 2010-05-04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자는 모습이 홍상수 영화에 나오는 인물 답군요.^^ 유준상인가요?

로쟈 2010-05-04 09:23   좋아요 0 | URL
문소리, 김상경, 유준상입니다. 씨네21 특집호를 챙겨두시길. 온라인에 뜨지 않는 꼭지도 많다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