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편의점에 갔다가 신문판매대에 걸려 있는 중앙일보 1면에 최장집 교수의 사진이 크게 실려 있는 걸 보고 인터넷으로 찾아봤다. 현재 후마니타스출판사에서 진행하고 있는 '최장집 교수의 정치철학 강의'와 관련한 인터뷰기사였다. 자료삼아 스크랩해놓는다('최장집 정치철학'의 핵심이 무엇인지 알게 해준다). 오마이뉴스의 관련기사는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420838 참조. 

중앙일보(10. 07. 24) 최장집 “마르크스 이론 치명적 결함은 정치의 역할이 없다는 것이죠” 

진보학계의 거장 최장집(67) 고려대 명예교수. 대학 교수직을 정년퇴임한 그가 요즘 새롭게‘열공 모드’에 들어갔다. 특별한 약속이 없으면 점심 시간도 잊은 채 독서 삼매경이다. 아예 약속 자체를 안 하는 분위기다. 60대 후반에 다시 시작하는 ‘최장집의 새로운 도전’이다. 독서야 평생 해온 일. 하지만 이번엔 뭔가 좀 다르다. 주제가 달라졌다. 민주주의론에서 정치철학으로.

7월 16일 오후 그의 연구실. 세트로 짝을 맞춘 책꽂이의 목록이 싹 바뀌었다.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그 자리엔 민주주의와 비교정치 관련 책이 주인 노릇을 했다. 지금은 다른 종류의 도서가 그 자리를 채웠다. 마키아벨리·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홉스·베버…. 고대에서부터 근대에 이르는 서양 정치철학 책이 가득하다. 책상 위에도 중간중간 메모지를 끼워놓은 10여 권의 정치철학 책이 펼쳐 있다. 왜 정치철학일까. 



7월 21일 오후 4시 서울 지하철 합정역 근처. 후마니타스 출판사가 있는 건물의 강의실을 찾았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강의가 한창이다. 계단에 붙은 ‘최장집 교수의 정치철학 강의’라는 타이틀이 눈에 띈다. 7월 7일 개강한 그의 정치철학 강연이다. 이미 개강 첫날 플라톤의 『공화국』을, 14일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을 주 교재로 강의했다. 앞으로도 매주 수요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서양 정치철학의 대표선수들을 통사적으로 쭉 훑을 작정이라고 한다.

#‘마키아벨리=사악한 권모술수’ 오해 풀어야

● 왜 갑자기 정치철학입니까.

“한국 사회에 만연돼 있는 정치에 대한 오해를 교정하고 싶어서입니다. ‘정치의 부재’야말로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의 최대 적입니다.”

● 우리 국민 대부분이 정치 전문가일 정도로 정치가 활성화돼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잘 보세요, 정치에 대한 턱없는 기대와 폄하가 교차하는 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과도한 유토피아의 낭만적 정서가 퍼져 있어요. 실현 불가능한 기대치를 정해놓고 그에 미달했다고 정치를 폄하하곤 하지요. 그러곤 정치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가려고 합니다. 정치를 배제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은 결과에 무책임한 것입니다.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의 몫이죠. 정치는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길을 찾는 행위입니다. 거기엔 실천적 지혜가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결과가 좋아야 다 좋은 것은 물론 아니지만, 결과까지 책임지는 행위, 그것이 바로 이 시대 우리 사회에 요청되는 사려 깊은 분별력의 정치 행위입니다.”

● 전공이 비교정치이지요.

그렇습니다. 나의 전공은 비교정치고, 정치사회학이며 경험적으로는 한국정치를 집중적으로 공부해 왔어요. 그렇다고 내게 정치철학이 완전히 낯선 분야는 아닙니다. 석사학위 논문을 홉스의 정치철학으로 썼고, 미국 시카고대 유학할 때도 정치철학을 틈틈이 수강하거나 청강했어요. 정치철학에 대한 문제 의식은 오래됐습니다.” 

 

● 그런데 왜 마키아벨리인가요. 뜻밖입니다. 마키아벨리는 온갖 권모술수 정치의 대명사인데.

“영국의 극작가 셰익스피어도 ‘잔학한 마키아벨리’라는 부정적 평판을 내린 것으로 유명합니다. 사악함과 부도덕·무도덕의 정치를 마키아벨리와 연결짓는 게 일반적이죠. 그러나 그게 다는 아닙니다. 마키아벨리를 그렇게 해석하지 않는 이도 적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후자 쪽의 마키아벨리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키아벨리에 대한 오해를 푸는 것이 오늘 한국 정치의 문제를 푸는 데 요긴하다고 생각합니다.”

● 마키아벨리의 어떤 점이 우리 정치에 도움이 된다는 겁니까.

마키아벨리의 정치학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정치 현실을 초월한 이상적 윤리규범이나 신앙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마키아벨리를 최초의 근대적 정치철학자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왜 그럴까요. 권력과 폭력, 그리고 악의 문제를 현실적 차원에서 생각한 최초의 인물이라고 본 겁니다. 마키아벨리는 권력·폭력·악과 같은 것들을 정치의 영역에서 배제돼야 하는 것으로 보지 않았어요. 정치의 기준을 윤리규범으로 본 것이 아닙니다. 권력이라는 현실은 정치의 출발점입니다. 폭력과 악을 정치를 실천하는 하나의 조건으로 간주했지요. 그 조건들을 다루는 게 정치고, 정치를 통해 공공선을 이룩해 가는 것입니다. 애초에 현실을 초월한 유토피아를 설정해 놓고 그리로 몰고 가는 것은 혁명이지 정치가 아닙니다. 마키아벨리는 도덕이나 규범에서 좋은 정치를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플라톤을 한번 보세요, 정치와 윤리가 혼합돼 구분되지 않습니다. 마르크스는 플라톤 계열이지요.”

최 교수의 강의에서 흥미로운 점이 발견된다. 그는 크게 두 개의 흐름으로 정치철학을 분류했다. 하나는 ‘이상의 정치’이고, 다른 하나가 ‘현실의 정치’다. ‘이상의 정치’ 그룹엔 플라톤·로크·루소를 배치했다. ‘현실의 정치’ 그룹엔 마키아벨리·아리스토텔레스·몽테스키외·토크빌·베버가 자리 잡는다. 전자를 대표하는 인물이 플라톤이고, 후자는 마키아벨리가 대표한다. 그의 강의는 두 흐름을 포괄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후자의 흐름, 즉 마키아벨리류의 ‘현실 정치철학’에 비중을 뒀다. 거기에 정치의 본질이 있다고 보는 것이며, 무엇보다 그 현실의 정치가 오늘 우리 사회에 가장 취약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 마르크시즘 아닌 좋은 정치 이끌 실력 필요

● 그러고 보니 정치철학 강의 목록에도 과학적 사회주의의 창시자인 마르크스가 보이지 않습니다.

“일부러 뺐어요. 마르크스 이론은 이미 한국 사회에서 충분히 읽혔고 진보파들에게는 ‘유일한 지식’이라 할 정도로 보편화되었죠.”

망설임 없는 즉답이 돌아왔다. 이 정도 강의안을 짜려면 적어도 올 초엔 준비를 마쳤을 터다. 그의 생각이 급조되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그는 계속 이어 이렇게 답했다.

“마르크스 이론의 치명적 결함은 정치의 역할이 없다는 점이지요. 마르크시즘이 현실 속에서 작동을 못하고 실패한 이유는 거기에 있어요. 정치는 없이, 이상과 규범만 강요됐기 때문에 권력의 문제를 잘 다룰 수 없었지요. 그런 이상과 당위의 논리는 우리에게 넘쳐요. 오늘 한국 사회에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그런 규범이 아니라 좋은 정치를 이끌 실력이라고 봐요.”

● 마르크스보다 마키아벨리가 더 필요하다는 말로 들립니다.

그래요. 지금 한국 정치에 절실히 요청되는 것은 마르크스가 아니라 마키아벨리라고 보는 겁니다. 오해는 마세요, 바로 오늘날 한국의 현실에 대한 진단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마키아벨리에 대한 오해부터 풀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한국 사회에서 정치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는 길이라고 보는 겁니다.”

● 이명박 정부 초기 ‘광우병 촛불시위’ 때 최 교수님은 ‘직접 민주주의’의 한계를 지적했고, ‘대의 민주주의’를 성숙시켜야 한다고 말하셨죠.

“독재와 민주가 대립하던 시절, 윤리적 도덕성이 최고 덕목이었던 시절에 정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깊어만 갔습니다. ‘이상의 정치’와 ‘운동의 정치’는 함께 갑니다. 군부 독재에 저항하는 ‘운동의 정치’는 그 나름의 정당성을 확보했습니다. 그런데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고민해야 할 오늘에도 여전히 운동과 이상의 정치가 지속되어도 좋은가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상의 정치가 아니라 ‘현실의 정치’라고 저는 보는 것입니다. 현실주의 정치철학자로서 마키아벨리를 재평가하자는 것은 일종의 대증요법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최 교수님의 베스트셀러입니다. 말씀을 듣다 보니,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의 문제의식을 마키아벨리의 입을 빌려 심화시켜 나가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백악관에 입성하며 했던 말을 기억하나요. ‘나는 워싱턴을 바꾸러 온 것이 아니라 정치를 하러 왔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대통령이 되는 순간 정치를 안 하지요. 정치의 가치를 잘 이해하는 정치인이 결국 중요합니다. 다른 의견, 다른 세력과 대화하고 타협하고, 정치적 목적을 정치를 통해 설득하고 뭔가 의미 있는 일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배양해야 합니다.”

# ‘정치와 통치의 기술’에 눈 떠야

● 이상과 윤리규범을 전제로 한 정치학의 전통은 오래돼 왔는데요.

“정치적 실천을 개척하는 지혜라고 할까요, 이젠 현실 정치의 얽히고설킨 것을 푸는 실력이 필요합니다. 그런 지혜나 정치적 실력은 선악의 이분법에선 나오지 않아요. 리얼한 정치의 본질과 역할을 직시해야 합니다. 한국 정치의 수준을 높이는 일은 정치와 철학에 대한 바른 이해에서부터 출발합니다. 폭력과 악을 배척만 할 것이 아니라 정치의 중심에 놓고 정면으로 대화해야 합니다. ‘저항의 정치학’만으로는 이제 안 됩니다. ‘정치와 통치의 기술’에 눈을 떠야 합니다.”

● 좀 더 구체적으로 적시하신다면.

“가치나 이념의 주장만 난무하고 정치는 없는 현실. 세종시가 그렇고, 4대 강이 그러하며, 천안함도 예외가 아닌 것 같습니다. 정치에 대한 오해, 강한 유토피아 지향성, 정치철학의 부재 등등…. 윤리규범으로서의 이념만이 과도하게 큰 소리를 내는 현상은 이제 마감할 때입니다.”  

듣고 보니 좌나 우, 진보와 보수 모두가 생각해 봐야 할 지적이었다. 최장집 교수는 인터뷰에서 최근의 지방선거 결과 등 주요 정치 현안에 대한 나름의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 6·2 지방선거 결과를 어떻게 보나요.

2007년 대선, 2008년 총선의 결과가 보수 한나라당의 일방적 승리였습니다. 민주주의에서 일방적으로 힘의 균형이 무너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요. 이번 지방선거는 그 균형을 제도 안에서 이룬 결과로 봅니다. 한국 유권자의 투표 패턴이 최소한 민주주의의 규범을 중요한 가치로 수용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지요.”

● 무상급식이 핵심 이슈였는데.

“복지 이슈가 선거에 영향을 미친 것은 의미 있는 변화이자 발전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체 복지의 측면에서 하나의 단편적 이슈였지요. 나는 교육의 문제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교육을 통한 계층적 상향 이동이 상당히 어려워졌어요. 옛날엔 있던 상향 이동의 사다리가 없어져서 경쟁은 비교할 수 없이 강해졌지만 혼란과 불확실성이 크다고 봅니다. 우리 사회를 불안정하게 하고 예측 가능하지 못하게 하는 거죠.”

● 진보 성향 교육감도 많이 당선됐습니다.

한국의 교육이 보수적 틀로 강하게 짜여 있었어요. 그 속에서 부패도 자랐습니다. 이번 선거를 통해 보수의 독점체제가 진보와의 경쟁체제로 들어간 것은 바람직합니다. 하지만 교육의 내용을 너무 과격하게 바꾸려고 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봅니다. 해결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바꿀 수 있는 것을 제대로 바꾸는 것이 중요하지요.”

● 지방선거에서 승리한 야당의 역할은.

“지방선거 결과는 야당을 긍정적으로 본 게 아니라 이명박 정부에 대한 반발로 보입니다. 야당에 대한 적극적 지지가 아니라 소극적 지지입니다. 야당이 여기에 안주하면 희망이 없을 겁니다. 이익집단적 성격에서 벗어나 좀 더 넓은 계층으로 기반을 넓혀야 합니다.”

● 정부·지자체의 세금 운용이 문제되고 있습니다.

그동안 누굴 뽑고 임명하는 데만 관심이 높았습니다. 그들이 국가 예산을 어떻게 쓰는지를 이젠 정밀하게 감시해야 합니다. 이것만큼 중요한 정치적 이슈도 없지요. 광화문광장을 걸어다니면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세금을 이렇게 써선 안 됩니다. 세종시·4대 강·천안함 문제 등을 모두 세금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 최 교수의 대표작인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24쇄가 최근 출간됐습니다. 개정판을 더 내지 않겠다고 한 이유는 뭔가요.

“진보·보수 정부를 다 경험하면서 이제 정권의 변화를 따라가지 않고도 일반화할 수 있는 한국 정치의 특징을 짚어낼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 그렇게 정리해 낸 한국 정치의 특징은 뭔가요.

정당 체계가 다른 부문의 발전에 비해 극히 지체돼 있다는 점이지요. 한국 민주주의를 발전시키지 못하게 하는 장애 요인입니다. 엘리트가 아닌 서민대중, 소외계층 같은 사회적 약자들이 정치적으로 대표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민주화는 되었지만 민주화 이전의 구질서, 즉 한국사회가 만들어졌던 구조는 변화하지 않고 있지요. 이 말은 좌파 정당이 새로 만들어져야 한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하나의 사회적 세력으로는 존재하는데 정치적으로는 대변되지 못하는 구조, 거기서부터 발생하는 문제가 많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보수정당의 실력도 문제가 많습니다. 사회의 다양한 요구를 수렴하고 통합해 내는 데 편협하고 무능력한 겁니다. 실력을 갖춘 미래의 정부로서 정당이 발전해야 합니다.”

● 후학들을 위한 조언은.

“한국의 엘리트들은 너무 바쁩니다.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있지요. 각종 자문회의나 프로젝트 등의 사회적 참여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제 지식인들은 공부에 더 열심이어야 합니다. 교수는 교수로서의 자기 직분에 충실해야 합니다.”

j 칵테일 >> 마키아벨리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16세기 르네상스기 이탈리아의 정치이론가이자 역사학자다. 그를 기점으로 정치철학은 근대와 전근대로 나뉜다. 대표작 『군주론』을 통해 그는 근대 정치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핵심은 도덕과 정치의 분리다. 정치를 윤리 규범과 다른 영역으로 파악했다. 그 이전엔 신앙과 윤리가 정치의 자리를 대신했다.

마키아벨리만큼 평가가 극명하게 갈리는 인물도 없다. 특히 우리에게는 권모술수와 동의어로 쓰일 만큼 나쁜 이미지가 퍼져 있다. 그러나 꼭 그렇게 볼 것만은 아니다. 동기가 선하다고 해서 결과도 선한 것일까. 역사는 그렇지 않은 사례를 많이 보여준다. 고상한 목적이 권력과 결탁돼 전혀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중세 종교재판, 프랑스 혁명기의 자코뱅 테러, 근대의 공산주의 혁명이 그렇다. 오히려 ‘더러운 손’이 실제로는 깨끗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아이러니가 일어나는 게 정치 현실이다. 



그의 이론이 쉽지만은 않다. 『군주론』의 키워드인 ‘비르투(virtu)’ 같은 용어부터 간단하지 않다. 최장집 교수는 ‘비르투’를 단순히 ‘덕성’으로 번역할 수 없다고 했다. 용기·대담성·결단력·의지·능력·교활함·위용 등으로 그때그때 다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배영대기자) 

10. 07. 25.   

P.S. 인터뷰를 읽으며 든 단상은 두 가지다. 하나는 레오스트라우스와 최장집. 짐작에 "미국 시카고대 유학할 때도 정치철학을 틈틈이 수강하거나 청강했어요."라고 할 때 그가 수강하거나 청강한 강의는 레오스트라우스나 그 제자들의 강의였을 것이다(부시 행정부 시절 레오스트라우스는 네오콘의 이론적 지주로 자주 도마에 올랐다). 마침 레오스트라우스가 엮고 공저자로 참여한 <서양정치철학사>(인간사랑) 1권이 절판됐다가 최근에 다시 나왔는데, 이 시리즈의 '마키아벨리' 편은 의당 레오스트라우스가 집필했다. 최장집 교수의 강의가 책으로 묶여 나오면 비교해서 읽어봐도 좋겠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최장집과 강유원. <인문 고전 읽기>에도 <군주론> 읽기가 포함돼 있지만, 강유원의 <서구 정치사상 고전읽기>가 비슷한 '프로젝트'이기 때문이다. 마저 나오게 되면 역시나 최장집 교수의 강의와 비교해볼 수 있겠다. 사실 두 사람은 오래 전에 <춘아, 춘아, 옥단춘아, 네 아버지 어디 갔니?>(민음사, 2001)에서 대담을 나눈 바 있기에 구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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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10-07-25 18:04   좋아요 0 | URL
레오 슈트라우스의 영향을 받았다면...ㅎㄷㄷ... 니체 철학이 이렇게도 공포스럽게 변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는데....

로쟈 2010-07-25 18:49   좋아요 0 | URL
마키아벨리나 니체나 레오스트라우스나 엘리트주의란 점에선 다 공통적이죠...

Daniel 2010-07-26 00:33   좋아요 0 | URL
선생님 글 덕분에 춘아, 춘아~ 책에 최장집 교수님 관련 글이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습니다.

최장집 교수님 책은 구입할 수 있는 것은 되도록이면 다 구입하려고 노력하는데; 강유원 선생님과의 대담을 전에 인터넷에서만 봤고 출처가 어딘지를 몰랐던 기억이 납니다. 이번에 덕분에 알게 되어 감사합니다.

그런데 책을 구입할까 하고 검색해봤는데 절판이군요... 출판사에 전화하면 재고라도 있을런지 모르겠네요.

하나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절판된 책들 중에서는 출판사에 전화하면 반품되었던 재고라고 있는 경우가 가끔 있더군요. 물론 상태는 완전 새것(?)일 순 없지만 경우에 따라선 반품이라고 믿겨지지 않는 좋은 상태의 책들도 더러 있던데...
보통 절판되었다고 나오면 언제까지 출판사 창고(?)라든지 본사에 반품 등 재고가 남아 있을까요. 여쭤보는 이유는 당장에 돈은 없는데 책은 절판되었고... 그런데 출판사에는 이렇게 반품 명목으로 들어온 재고가 있는 경우에 고민을 좀 하게 되거든요... 당장 그거라도 구입하지 않으면 다시는(?) 혹은 당분간은(?) 못구할텐데;;; 뭐 이런 심리인데 반품 등 재고의 생명주기(?)를 알게 되면 조금 여유를 가지고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여줘봅니다. 감사합니다.

로쟈 2010-07-26 00:39   좋아요 0 | URL
제가 아는 내용이 아닌데, 짐작엔 출판사마다 다 다를 겁니다. 창고 사정이 다 다를 테니까요. 절판된 책은 요즘은 (인터넷)중고서점이나 헌책방을 알아볼 수밖에 없고, 저 같은 경우는 도서관에서 대출해봅니다(필요한 부분은 복사하고요). 어렵게 구한 책인데 또 개정판이 나오는 경우도 없지 않기 때문에 너무 매달리진 않아도 될 듯해요...

Daniel 2010-07-26 00:4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물론 복사가 좋긴 한데(절판되었으니 합법적으로(?) 복사...) 복사해두면 이상하게 더 보질 않게 되고 보관하기도 힘들고...
아무튼 너무 매달리지는 않도록 하겠습니다^^. 마이리스트가 바뀌어서 바로 들어와봤더니 이리 빨리 답을 얻게 되어 감사합니다. 평안한 밤 되십시오.

노이에자이트 2010-07-28 15:55   좋아요 0 | URL
최장집 씨가 영향을 받았다면서 자주 언급하고 권하는 저서는 아담 쉐보르스키,E.E.샤츠슈나이더,로버트 다알 등 주로 자본주의하에서 민주주의는 어떻게 작동하는가,민주정치와 정당정치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탐구한 정치학자들입니다.저도 이들 중 앞의 두 사람은 최장집씨 덕에 알게 되었지요.최장집 씨가 마키아벨리를 언급한 것은 요즘 우리나라의 진보주의자들이 너무 운동권 정서에서 못벗어나고 있다는 문제의식 때문에 정치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좀 더 뿌리부터 탐구해 보자는 뜻에서 한 것 같습니다.요즘 신문사와의 대담에서 부쩍 진보주의의 교조주의 성향을 지적하고 있기도 하구요.이 대담도 평소 최장집 씨의 그런 지론을 반복하고 있군요.
 

'하늘전쟁'이란 제목 때문에 조금이라도 낭만적인 걸 기대한다면 큰 오산인 책이 노벨 평화상 후보로도 지목되는 반핵운동가와 우주 문제 전문가가 합작해 쓴 <하늘전쟁>(알마, 2010)이다. 부제는 '우주에서의 군비경쟁'. 제목도 '우주전쟁'이었다면 의미가 조금 더 분명할 뻔했다. 물론 이 전쟁은 지구인 대 외계인의 전쟁 따위가 아니라 지상에서의 군비경쟁이 그대로 우주(하늘)에까지 옮겨간 것일 뿐이다. 이 또한 '핵전쟁'이나 '기후위기' '금융위기' '양극화' 등과 함께 21세기 묵시록의 한 구성소라 할 만하다. 이대로는 왜 안되는지를 우리에게 말해주는. 1957년 소련이 처음으로 인공위성을 쏘아올린 후 불과 50년만의 일이다(원저는 2007년에 출간됐다). 물론 우주전쟁을 '선도'하고 있는 나라는 미국이다. 어째 하는 짓이 다 그런지.

  

두 저자의 '여는 글'을 읽다 보니 그들의 경각심이 전달된다(답답하고 안타깝고 한심하고 두려운). 나도 뭔가 '전달'해야 할 듯싶어서 한 대목씩 옮겨놓는다. 

"오늘날 미국이 우주의 무기화를 추진하는 이 시기에 나는 50년 전에 생각했던 질문들을 다시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이미 지상과 해상, 상공을 무장했던 것처럼 우주에도 무기를 배치할 것인가? 우리는 이 신세계에서 전쟁을 향한 길을 걷고 있는가? 이 책은 이 질문들이 제기하는 도덕적, 정치적 문제들을 생각해보려는 일종의 시도다. 우주의 군사화가 세계의 안보를 강화할 것인가? 우주를 무기화할 필요가 있는가? 결론에서 우리는 우주의 군사화가 세계를 지금보다 더 큰 위험에 빠뜨릴 걸고 주장한다. 우리의 안보는 우주 무기가 없을 때보다 있을 때 훨씬 더 위험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우주에 무기를 배치하는 것은 분명 우주에서 군비경쟁이 벌어지게 만들며, 어쩌면 가공할 전쟁을 촉발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와 같은'스타워즈'를 피하고 싶다면 지금 행동에 나서야 한다. 하늘에 무기를 보내지 말고 그것을 평화적 목적으로 사용하며 항상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위안과 경이의 대상으로 남겨놓아야 한다."(크레이그 아이젠드래스) 

 

"1999년, 나는 미 공군 조종사이자 전 공화당원이었던 브루스 개그넌의 초청을 받아 플로리다에서 열린 한 모임에 참석했는데, 모임의 주제는 우주의 무기화였다.(...) 나는 또한 과도하게 찬양을 받고 있는 미사일방어체제가 무기화된 우주 공간과밀접하게 통합되고, 모든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똑같은 회사들에 의해 생산되며, 전부 합쳐 수천억 달러의 비용을 미국 납세자들에게 청구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모임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나는 몸도 제대로 가눌 수 없었다. 그리고 미국통합우주군과 관련 기업들의 무모한 계획으로 재앙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다시 대중 홍보사업에 참여하기로 결심했다."(헬렌 캘디컷) 

그래도 절망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다. 두 저자의 '서문'은 이렇게 끝맺는다.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권력은 지식과 열정을 갖춘 대중에게 있으며, 대중은 자신의 정치적 대리인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과 자녀들을 위해 세상을 좀더 안전한 곳으로 만들도록 압력을 가할 수 있다. 이 책의 목표는 우주의 무기화가 초래할 엄청난 위험을 대중에게 알리는 데 있다. 이책은 대중의 의견을 자극하여 우주의 무기화를 중단시키고 인류의 협력과 공익을 위한 기반으로서 우주의 잠재력을 구현할 길을 모색한다. 우리가 오늘 행동해야만 내일 하늘의 전쟁을 막을 수 있다.(20쪽)

10. 07. 24.  

P.S. 참고로, 반핵운동가로서 활발한 저술활동을 하고 있는 헬렌 캘디컷(칼디코트)의 책은 <원자력은 아니다>(양문, 2007)도 출간돼 있다. 가장 최근에 나온 건 <당신이 지구를 사랑한다면>의 증보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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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25 11: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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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25 12: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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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25 11: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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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25 12: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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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이론과 지구의 미래

이번주에 눈길을 끄는 책으로 게임이론 관련서 두 권을 꼽았는데, 두 권이 더 있다(이 주제에 관심을 가진 독자에게는 기억할 만한 주이다). '인간행동 예측이론 책'으로 깔끔하게 정리해놓은 기사가 있어서 스크랩해놓는다.    

경향신문(10. 07. 24) 나는 네가 할 일을 손바닥 보듯 알고 있다 

철학자 칼 포퍼는 1959년에 쓴 에세이에서 “인류의 가장 오래된 꿈이 바로 예측의 꿈이다. 우리는 일식을 아주 정확히, 그것도 아주 한참 전부터 예측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혁명을 예측하는 것도 혹시 가능하지 않을까?”라고 물었다. 포퍼는 곧바로 인간이 관련된 문제에서는 예측이 불가능하므로 괜히 고민할 가치조차 없다고 답했다. 그러나 포퍼가 말한 꿈의 실현이 눈 앞에 와 있다고 믿는 이론들이 있다. 대표적인 게 게임이론이다. 인터넷 네트워크의 확산과 함께 발달하고 있는 네트워크 이론도 인간행동의 과학적 예측에 관한 연구 결과들을 내놓고 있다. 이처럼 인간행동의 법칙규명을 모토로 내건 이론들의 과거·현재·미래와 이런 이론들을 바탕으로 현실 정치와 정책결정에 깊숙이 관여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들이 나란히 출간돼 눈길을 끈다.   

게임이론을 통하여 
구 소련 태생의 미국 생화학자이자 유명한 공상과학소설가였던 아이작 아시모프(1920~92)가 1950년대에 발표한 공상과학소설 <파운데이션> 시리즈에는 ‘심리역사학’이 중요한 테마로 등장한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심리역사학은 인간행동을 지배하는 법칙을 하나의 수학방정식으로 집대성한 것으로, 정치·경제·사회적 사건들을 예측할 수 있게 해주는 것으로 묘사된다. 한마디로 인간 역사의 미래를 보여주는 학문인 것이다. 여기서 예측은 단순한 짐작이 아니라 수학공식을 통해 계산된 것이다.

당신은 ‘인간행동을 지배하는 법칙’ 또는 ‘인간행동을 지배하는 비밀코드’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가? 여기서 법칙은 ‘배가 고프면 밥이 먹고 싶어진다’는 유의 생물학적 법칙이 아니다.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행동함에도 특정한 상황에서 반드시 특정한 행동을 한다는 것을 말한다. 어떤 물이건 온도가 0도 아래로 내려가면 얼음이 되고, 100도 이상 올라가면 기체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쉽게 그렇다고 말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일례로 선거만 봐도 정치학자들이 아무리 분석과 가설을 내세워봤자 빗나가기 일쑤다. 그래서 자연과학과 달리 정치학·경제학·사회학 등은 명색이 사회 ‘과학’이라고 불리면서도 계량적 정확성이나 미래 예측력이 떨어진다는 조롱을 받아왔다.

그런데 자연계의 물리적 법칙과 마찬가지로 인간행동에도 법칙이 있다고 굳게 믿는 사람들이 있다. <게임하는 인간 호모루두스>의 지은이 톰 지그프리드도 그 가운데 하나다. 저명한 과학저술가인 그는 언젠가는 게임이론이 모든 과학의 문법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게임은 대표적으로 많이 알려진 ‘죄수의 딜레마 게임’이나 ‘치킨 게임’과 같은 것이다. 게임이론은 규칙이 정해진 게임에서 두 명 혹은 다수의 ‘선수’가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하는 전략적 행동을 연구하는 것이다. 지은이는 폰 노이만과 존 내시를 중심으로 현대 게임이론의 기원을 소개하고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을 막론하고 다양한 분야에서 적용되고 있는 게임이론의 실태를 살폈다.

냉전시절 미국은 소련에 대한 대응전략을 게임이론에 기대 개발했고, 경제학도 주가예측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 게임이론을 적극 수용했다. 현대의 진화론도 게임이론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워낙 취재가 조밀해 게임이론에 관한 최첨단 지도라고 보면 된다.

그럼에도 과연 인간의 행동을 과학적으로 이해하고 예측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은 남는다. 지은이는 게임이론이 아직도 진행 중이며 논란이 많은 분야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가능성에 대한 믿음은 버리지 않는다. 지은이의 믿음에 동참할지 말지는 독자의 몫이다. 그러나 게임이론이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영향력을 더욱 키워가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 같다.(김재중기자)    

우선순위를 엿봐서
2002년 국내에 소개돼 ‘네트워크 이론’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킨 <링크>의 지은이가 2010년에 쓴 최신작이다. 네트워크 이론은 ‘아무리 멀리 떨어진 두 사람도 6단계만 거치면 연결된다’는 가설로 유명하다. 지은이는 <링크>에서 세포에서부터 인터넷에 이르기까지 여러가지 네트워크의 구조와 작동원리를 밝혀 학계에서도 큰 주목을 받았다.

<링크>는 전형적인 크기가 없는, 다시 말해 크기의 분포에 제한이 없는 네트워크는 ‘멱함수 분포’(극소수만 크기가 크고 나머지는 크기가 작은 분포)를 보인다고 밝혔다. 인터넷에서 구글, 야후 같은 엄청나게 많은 링크를 보유가 사이트가 몇개 있고 나머지는 다 고만고만한 링크를 보유하고 있는 것을 상상하면 된다. 새 책에서 바라바시는 인간의 행동에도 같은 패턴이 발견된다고 밝혔다. 부제가 말해주듯 인간의 행동 속에 숨겨진 법칙이 있다는 것인데 이름하여 ‘인간역학’(Human Dynamics)이다.

그는 ‘인간행동은 긴 휴지기가 이어지다가 갑자기 격렬히 활동하는 짧은 기간이 오는 패턴이 반복된다’고 말한다. 이메일 발송을 예로 들어보자. 평소 이메일 발송을 거의 하지 않거나 한두건 발송하다가 어느날엔 수십통의 이메일을 발송하는 패턴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독자 여러분 자신의 ‘보낸 편지함’을 열어 보낸 시각을 한번 체크해 보기 바란다. 지은이는 마찬가지로 휴대전화 사용, 프린터기 사용, 학생과 교직원의 도서관 대출에서도 비슷한 ‘폭발성’(burst)이 발견된다고 주장했다. <링크>에서 보여준 네트워크의 특징이 공간적 요동 현상에 따른 것이라면, <버스트>에 등장하는 현상은 시간적 요동 현상에 따른 것이다. 주식 가격의 폭등 또는 폭락, 어느날 갑자기 터지는 네티즌의 댓글, 예기치 않게 터져나온 촛불시위 등도 버스트의 예이다.

만약 인간의 행동이 철저히 무작위적이라면 이런 패턴은 발견될 수 없다. 그럼 이런 폭발성을 낳는 이유는 무얼까? 지은이가 찾은 답은 인간의 우선순위 설정이다. 인간은 한정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늘 우선순위를 설정한다. 우선순위가 개입되는 순간 행동이 폭발적으로 몰리는 시기가 등장하고 어처구니 없이 큰 예욋값이 나타난다.

한편 바라바시는 이런 식으로 나간다면 내가 일주일 뒤 어느 식당에서 밥을 먹을지부터 한달 뒤 오전 10시에 어디에 있을지까지 남이 예측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과거에 대한 정교한 데이터만 있다면 말이다. 우리는 이미 인터넷, 스마트폰, CCTV가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이런 기기들은 축적한 개인의 행적에 관한 데이터를 분석하면 지금도 특정인의 미래 행동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 지은이는 이런 체제가 ‘빅 브러더’ 사회가 될 우려를 제기하면서 ‘미래의 프라이버시권’이라는 흥미로운 개념을 제시하기도 했다. 누적된 데이터를 가지고 누군가가 나의 미래행동을 들여다보는 것 역시 프라이버시 침해라는 것이다. 이 책은 형식도 특이하다. 지은이는 헝가리 태생인데 16세기 십자군을 이끌었던 비운의 헝가리 장군의 인생행로를 팩션 형식으로 삽입해 넣었다. 역사의 무작위성과 인간 행동의 예측성을 교차해서 보여주기 위한 의도에서다. <링크>를 재밌게 읽은 독자라면 꼭 챙겨봐야 할 책이다.(김재중기자)  

과학집단의 머리로
아마도 게임이론에 가장 관심이 높은 집단은 군부일 것이다. “핵공격을 하게 된다면….” “핵 억지력을 가지려면 얼마나 많은 탄두가 필요할까?” 이런 가상 질문을 통해 군부는 군사전략을 세우게 마련이다. 그러나 군인들 스스로가 게임이론에 매달려 연구하기는 어렵고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고,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것은 과학자일 수밖에 없다. 미국의 랜드연구소가 그런 역할을 맡아왔다. 전쟁전략 수립뿐 아니라 경제·사회분야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을 끼쳐왔다.

책은 랜드연구소의 탄생과 걸어온 길을 통해 이들이 어떻게 세상을 바꿔왔는지를 분석했다. 랜드연구소는 1948년 창립된 이래 28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으며 정계와도 끈끈하게 연결돼있다. 수학자 존 내시를 비롯해 케네스 애로, 폰 노이만, 프란시스 후쿠야마, 브루스 호프먼, 잘마이 칼릴자드 등이 이 연구소 출신이다. 럼스펠드와 곤돌리자 라이스 전 장관도 연구소 이사를 역임했다.

문제는 랜드연구소가 내놓은 이론이 전쟁에서의 승리만을 앞세우는 강경일변도의 핵 경쟁을 가속시키기도 했다는 것이다. 보수적이고 강경한 군인들에 의해 탄생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구소련을 무너뜨릴까 연구해온 군인들이 2차대전 중 야전의 지휘참모부를 성공적으로 도왔던 것 같은 과학집단을 만들기 위해 연구소를 세웠다. 미 공군의 전신인 육군항공대의 커티스 르메이 장군의 주도 아래 해병대 출신의 콜 붐 같은 보수주의자들이 주축이 됐다. 당시 군부는 구소련이 공산주의를 확산시키기 전에 미국이 핵공격을 해야한다고 공공연하게 주장했다.

랜드연구소의 연구 결과는 군사적 측면을 넘어 신자유주의의 확산에도 기여했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항해 만든 애로의 합리적 선택이론은 심리현상을 아예 무시하고 모든 행위를 수치화함으로써 공공의 이익보다는 개인의 이익을 강조하게 된다. 이는 작은 정부를 추구하는 레이건 정부의 방향과 맞아떨어져 신자유주의의 이론적 토대가 됐다. 핵선제공격의 이론적 바탕을 제시했던 체계분석이론은 복잡한 계산의 필요성 때문에 컴퓨터 개발을 앞당기기도 했다. 죄수의 딜레마 이론은 핵 전쟁을 당연시했다. 이 밖에 패킷 이론은 인터넷의 모체가 되기도 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위험성을 경고한 군산복합체의 주체는 바로 랜드연구소다. 랜드연구소는 베트남 전쟁에서 ‘더러운 전략’을 제시했고, 이는 내부 분석가 엘스버그에 의해 뉴욕타임스에 그 내용이 폭로되기도 했다. 연구소는 정의를 희생하면서까지 미국의 이익을 위해 일해왔다. 게임이론에는 정의와 도덕보다 승리가 더 중요할 수밖에 없다.(최병준기자) 

10. 07.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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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세알 2010-07-24 10:00   좋아요 0 | URL
이런 서평들을 보니까 좀 헷갈립니다. -.-;; 근대에 들면서 인간은 인간의 자유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고민했다고 생각하거든요. 즉 근대과학혁명이후로 인간은 '원인과 결과'의 고리 속에 들어있을 수 밖에 없고 그러니 그런 인과속의 인간이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예를 들면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을 쓴 이후에 실천이상 비판에서 내어놓았다던가 하는 식으로요. 인간을 예측할 수 없는 것은 인간이 무작위로 행동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인과고리의 작동하는 변수가 사실은 너무 많아서 그것을 다 카운팅 할 수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얼마전에 '브레인섹스'인가 하는 책을 보면서도 생각했는데 아무리 남녀 호르몬이 여자와 남자의 차이를 만드는데 기여한다고 해도 호르몬만으로 환원하는 것은 너무 나이브한 생각이며 과학이 아니라 점성술에 가깝다는 느낌이 들더라구요.

콩세알 2010-07-24 10:18   좋아요 0 | URL
심지어 현대과학은 우리가 변수를 동시에 측정해 내어 값을 정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고 그것을 확률로 처리해야 하는 경우가 있으며 이런 미시세계의 현상과 거시세계를 조화시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도 확실히 결정하지 못했다고 하잖아요. 제가 아는 물리학자분 고백하시길 자신이 전공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빛이 파동이며 동시에 입자이다'라는 말이 정확히 뭘 뜻하는지도 알 수 없다고 하시더라구요. 그런데 저 위의 이야기처럼 저렇게 인간를 예측할 수 있다면 완전 '새로운 혁명'이 올 것 같아요. 물리학자들도 분발해야 할 듯...^^;;

로쟈 2010-07-24 21:53   좋아요 0 | URL
예측이란 게 어디까지 확률론적인 예측이죠.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행동함에도 특정한 상황에서 반드시 특정한 행동을 한다는 것"이니까요. 저는 '반드시'까지는 아니고 '랜덤'도 아닌 어떤 성향이 작동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걸 규칙(이나 행동법칙)을 이해하는 게 우리의 '자유'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뿐더러 필수적이라고 생각하고요...

미지 2010-07-25 14:12   좋아요 0 | URL
문제는 게임이론의 정치성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가 확률론적 예측가능성에 우리 삶을 맡길 때, 예측가능성에 노출되는 수동적 그룹과 예측가능성을 극대화해서 권력 강화에 활용하려는 그룹으로 양분될 것이고, 그 양자 간의 초월이 불가능해지는 단계가 오리라는... 어쩌면 벌써 온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도 문제의식으로만 품고 있었는데 텍스트들을 직접 봐얄 것 같네요.
 
다음 세대를 위한 인문교양지

엊저녁에 '다음 세대를 위한 인문교양지'를 표방한 청소년 잡지 <자음과모음R> 창간호 출간 기념 모임에 다녀왔다. 햇병아리 같은 새책도 받아온 김에 게재한 글을 90% 옮겨놓는다. ''청소년 권장도서에 대한 몇 가지 생각'을 적었다.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고심만 거듭하다가 원래 청탁받은 분량도 채우지 못했지만, 지나고 나니 그나마 '펑크'는 아니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목차를 일별하면 알 수 있지만 다른 내용이 풍부하기에 관심을 가져보셔도 좋겠다.   

자음과모음R(10년 7/8월 창간호) 청소년 권장도서에 대한 몇 가지 생각 

<자음과모음R>로부터 내가 받은 ‘미션’은 ‘청소년 선정도서에 담긴 이데올로기와 선정도서가 청소년 독서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봐달라는 것이다. ‘선정도서’란 ‘권장도서’를 말하는 것인 듯하다. ‘청소년이 선정한 도서’가 아니라 ‘청소년에게 권장하는 도서’란 뜻으로 새겨야겠지. ‘인터넷 서평꾼’ 노릇은 하고 싶지만(*있지만) 청소년 독서에 남다른 관심을 쏟아온 건 아니어서 내가 이 일에 적격일 리는 없다. 그럼에도 청탁을 거절하지 못한 것은 나의 성벽 탓이다. 성-벽. 굳어진 성질이나 버릇. 덧붙여, 어떤 주제건 ‘조사’하고 ‘탐구’하는 일을 그다지 마다하지 않는 것도 나의 고질이다. 고-질. 오랫동안 앓고 있어 고치기 어려운 병. 고치기 어려운 건 또 고치지 않는 것이 나의 성벽이다. 따라서 이 글은 나의 고질과 성벽이 빚어낸 합작품일 공산이 크다.   

어디에서 무얼 어떻게 시작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관내도서관에 가서 이런저런 책들을 둘러보고 복사하기도 했다. 그럴 땐 흡사 사르트르의 소설 <구토>에 나오는 독학자의 모습을 닮지 않았을까. 주인공 로캉탱이 도서관에서 자주 보게 되는 독학자는 모든 책을 알파벳순으로 다 읽으려는 욕망을 갖고 있다.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요즘 도서관이라면 그가 읽어나가는 책보다 새로 들어오는 책이 더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르트르가 한창 때는 1년에 300권씩 책을 읽었다고 하지만, 어지간한 도서관에 매년 새로 입고되는 책은 사실 그 몇 배가 될 것이다. 아무리 대단한 독서가라 할지라도 세상엔 그가 읽지 않은 책 천지다. 그래, 이토록 많은 책들과 상대하려면 뭔가 지침이 주어지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미리 읽어본 사람이 이 책은 이렇고, 저 책은 저렇다는 소개를 해준다면, 나중에 읽을 사람에게 요긴한 참고가 되지 않겠는가. 길을 먼저 가본 사람이, 음식을 먼저 먹어본, 혹은 인생을 먼저 살아본 사람이 ‘가이드’가 될 만한 조언을 해주는 건 당연한 일이면서 권장할 만한 일이다. 애당초 ‘선정도서’ ‘권장도서’ ‘추천도서’가 갖는 의미란 그런 것일 터이다. 그런데 그게 왜 문제가 되는가? (...)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에서는 ‘대학신입생을 위한 추천도서’라는 것도 해마다 발표하고 있고, 각 대학에서 ‘권장도서 100선’(서울대)라는 식으로 권장도서 목록을 학생들에게 제시하고 있지만, 그러한 목록이 반발을 사거나 논란의 대상이 된 일은 드문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권장도서 해제집> 같은 책을 사서 읽는 쪽은 대학생이 아니라 보통 입시를 준비 중인 고등학생이 대부분이다. ‘대학생 권장도서’라기보다는 ‘예비 대학생’으로서의 ‘청소년 권장도서’라고 해야 더 정확할 듯싶다. 소위 입학사정관제가 본격적으로 도입된다면, ‘권장도서’ 목록이 학생들에게 주는 부담은 더 커질 것이다. 과연 한국에서는 “독서 또한 입시 과목의 하나”라는 비판에서 얼마만큼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렇다고 해서 거꾸로 독서는 입시와 무관해야 한다고만 말할 수 없는 것이 이 문제가 갖는 딜레마다. 일본의 교육심리학자 사이토 다카시가 <독서력>에서 주장한 바이기도 한데, 그에 따르면 “대학, 특히 문과 계열의 공부는 책을 읽는 것이 핵심이다. 설사 이과 계열이라도 논리적인 사고를 단련하는 데 독서는 필수다.” 따라서 “대학에서 가르치는 입장에서 보면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때 높은 수준의 독서력을 갖추고 있으면 그만이다.” 그런 관점에서 그는 독서가 부정되는 입시에 대해 강한 불만을 토로하며, 아예 독서력을 묻고 평가하는 것이 입사시험이나 대학입시의 중요한 전형방식이 돼야 한다고까지 주장한다. 그러니까 (역설적이지만) 문제는 독서가 변죽만 울릴 뿐 핵심적인 입시과목이 아니라는 데 있다는 것이다. 독서가 공부와는 별개로 간주된다는 점에서 일본도 사정은 우리와 비슷한 것 같다. 어떤 사정인가?  

“너는 그렇게 책만 읽다가 공부는 언제 할 거니?” 책을 좋아하는 자녀를 둔 학부모들이 가끔씩 던질 만한 잔소리다. ‘공부=독서’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 기이한 ‘한국식’ 잔소리는 문법적으론 맞는 말이더라도 의미론적으론 비문, 곧 틀린 말이다. “너는 그렇게 공부만 하다가 공부는 언제 할 거니?”라고 말을 바꿔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일단은 이런 ‘부조리’가 한국 청소년 독서에서 무엇이 문제인가를 말해주는 지표이다.  

우물 안 개구리’식 착각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미리 확인해둘 것은 모든 나라의 청소년이 그렇게 공부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일본 여학생이 핀란드식 교육 경험담을 담은 <핀란드 공부법>이란 책에는 이런 얘기가 나온다. 핀란드 학생들은 시험 전에 ‘공부한다’는 말 대신에 ‘읽는다’는 말을 쓴다. 엄마는 자식에게 “내일 시험이지? 많이 읽어.”라고 격려하고, 학생들끼리는 “이제 곧 시험이네. 많이 읽었어?”라고 대화를 나눈다고. 일본에서도 공부법은 우리처럼 ‘암기’ 하나이지만 핀란드에서는 오직 ‘읽기’뿐이다. ‘공부=독서’라면 ‘공부하다’란 말이 따로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읽다’로 충분한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청소년들이 책 읽는 모습은 어떤가? <선생님들이 직접 겪고 쓴 독서교육 길라잡이>에 실린 ‘고등학생의 눈으로 본 좋은 책과 나쁜 책’이란 체험적 독서론이 참고할 만하다. 10년쯤 전 사례이긴 하나 요즘과 크게 차이가 날 것 같진 않다. 일단 “선생님들이 우리에게 읽으라는 책들은 모두 다 삶에 도움이 된다고, 또 공부에 도움이 된다고들 이야기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책은 거의 읽지 않는다.”라는 서두부터가 ‘권장도서’에 대한 학생들의 태도를 집약해준다. 글의 필자는 한창 놀고 싶어할 청소년기에 하루에 거의 7-8시간의 ‘노동’을 해야 하는 것이 한국 학생들의 현실에 대한 푸념을 잊지 않는데, 물론 여기서의 노동은 ‘공부’라는 노동이다. 곧 한국에서는 ‘공부=독서’가 아니라 ‘공부=노동’이다. 그런 만큼 공부(노동)의 연장으로서의 독서를 학생들이 즐길 리 없다.  

‘좋은 책’의 기준으로 “우선 재미있는 책”이 고려되는 것은 독서만큼은 공부에서 분리시키고 싶은 욕구의 표현일 것이다. 그가 고른 두 번째 기준은 “야해서는 안된다”이고 세 번째가 “장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야하고 선정적인 책은 혈기 방장한 고등학생으로선 감당하기 어렵다는 게 기피하는 이유이고, 장편 선호는 ‘나에게 딱 맞는 책’이 한 권으로 끝난다면 너무 황당할 거라는 게 이유다. 여기서 어김없이 작동하고 있는 것은 독서의 쾌락원칙이다. 고통은 최소화하고 쾌락을 최대화하려는 원칙 말이다. 이런 기준에 부합하는 책은 자연스레 판타지 대작들 쪽으로 기운다. 특이하게도 필자는 국내 판타지물인 <가즈나이트>나 <드래곤 라자> 등을 좋아하는 책으로  꼽았는데, 거기에는 고등학생 특유의 ‘애국심’도 한몫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학생들이 판타지 소설을 선호하는 이유는 “선생님들이 이야기하는 교훈이나 삶의 지혜” 등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가즈나이트>를 가장 좋은 책으로 꼽은 고등학생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세상을 삐딱하게 보는지는 몰라도, 나는 교훈과 삶의 지혜는 스스로 터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여기에 문제의 핵심이 있는 것 같다. 지식과 함께 소위 ‘교훈과 삶의 지혜’를 전수하는 것이 교육의 핵심이라면, 학생들은 자신을 ‘스스로 터득하는 주체’로 간주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서, 사회적으로는 ‘미성년’일는지 몰라도 정신적으로는 ‘성인’으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태도와 상관적인 것이 청소년기가 갖는 문제적 위상이다. 프랑수아 스퀴텐과 브누아 페테르스의 그래픽 노블 대작 ‘어둠의 시리즈’에 나오는 한 주인공처럼 청소년은 ‘기울어진 신체’를 갖고 있다. 그들은 어른들과는 다른 의미에서 ‘성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작용하는 것은 ‘또 다른 중력’이다.  

“선생님, 좋은 책 좀 소개해 주세요.”라고 달라붙지만, 한편으론 “내가 읽을 책을 다른 사람이 정해줄 수 없다.”는 것이 청소년들의 또 다른 계산 아닐까. ‘책따세’를 주도하고 있는 허병두 교사가 <푸른 영혼을 위한 책읽기 교육>에서 털어놓고 있는 경험담은 그런 의미에서 시사적이다. 국어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읽을 만한 책을 자주 소개해주지만 나중에 점검해보면 정작 책을 찾아 읽는 아이들은 별로 많지 않았다는 것. “왜 아이들은 읽을 만한 책을 소개해 달라고 그렇게 간절히 부탁하고서 정작 찾아 읽지는 않는 것일까.”란 것이 허 교사의 의문이었다. 거기서 그는 교사들이 제시하는 일방적인 추천도서 목록이 학생들의 정서적․심리적 상황을 고려하는 데 미흡했다는 자각으로 책 소개 또한 철저하게 ‘학생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들의 예민한 감수성과 지적 수준, 그리고 청소년기의  특성까지 고려해야 하기에 아무리 훌륭한 책이라도 청소년들에게 추천할 때는 한 번 더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범적으로 ‘상황별 권장도서목록’을 제안하고 있는데, 이것이 실제 교육현장에서 어떤 효과를 발휘할지는 더 관찰해볼 일이다.   

다만 나로선 ‘보다 효과적인’ 권장도서목록을 제시하는 것과는 별도로 ‘권장도서 패러다임’ 자체에 대해서 한번쯤 의문을 품어봄직하다는 생각이 든다. 허 교사는 “‘청소년 도서’라는 게 정말로 존재할 수 있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는 반문에 대해 “그렇다면 이 세상의 모든 책이 청소년들에게 적합하다는 말인가? 아니면 이 세상의 모든 책이 청소년들에게는 적합하지 않다는 말인가?”라고 반박하는데, 사실 더 근원적인 물음을 던지자면 ‘과연 이 세상이 청소년들에게 적합한가?’라고 물어야 할 것이다. 허 교사가 드는 사례지만, 가령 황석영의 단편소설 <삼포 가는 길>이 훌륭한 문학작품으로서의 조건을 다 갖추고 있다 하더라도 등장인물인 술집 작부 백화의 “내 배 위로 연대 병력이 지나갔어.”라는 대사 때문에 청소년에게 ‘유해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관점을 고수하는 교사들도 있다고 한다. 물론 청소년을 교육의 대상으로만 간주할 때 가능한 태도다. ‘교육의 대상’이란 돌봄의 대상이면서 훈육의 대상이다. 아직 자립적인 사고와 판단능력이 부족하기에 적극적인 보호와 관리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라고 따져 묻기 전에 궁금한 것은 과연 ‘통제’가 가능한 것인가다. 과거 노출 수위가 높은 장면들만 ‘가위질’하고 상영하던 영화들처럼, 문제가 될 만한 대사와 장면을 삭제한 ‘안전한 문학작품’들만 청소년들에게 읽히는 것이 가능할까? 학생들은 청소년 권장도서에 포함돼 있지 않으면 대다수 한국문학전집에 포함돼 있는 <삼포 가는 길>을 과연 읽지 않는 것일까? 사실 술집 작부의 말보다도 청소년들에게 더 유해한 것은 ‘스폰서 검사’ 스캔들, 곧 일부 검사들에 대한 향응과 성접대 관련 보도이지 않을까? 더구나 전자가 픽션이라면 후자는 TV뉴스에 나오는 현실이다. 초등학생 납치․성폭행과 여중생 성폭행․살해사건 등은 또 어떤가? 참혹한 국지전의 참상과 난민들의 기아를 보여주는 국제뉴스들은 어떤가? 너무나도 유해할 듯한 이런 ‘현실’을 과연 청소년들로부터 완전하게 분리시킬 수 있는지? 그러니까 ‘청소년 권장도서’를 제시하는 기본 취지에 대한 동의 유무와 무관하게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실효성이다. 그런 문제에 대한 고려 없이 ‘청소년 권장도서’의 의의를 강변한다면 그건 권장도서에 담긴 ‘이데올로기’ 이전에 ‘알리바이’ 같다. 청소년들을 위해서 우리가 이만큼 애를 쓰고 있지 않느냐는 알리바이 말이다.    

허병두 교사가 “두 번 세 번 고민하여, 청소년들이 읽으면 좋을 법한 책들”이라고 고른 책 가운데는 제롬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도 포함돼 있는데, 사실 국내에서는 많은 청소년 권장도서목록에 포함돼 있지만 미국에서조차도 일부 학교에서 한때는 ‘금서’로 지정됐던 책이다. 잘 알려진 대로 “문제아 홀든 콜필드가 학교에서 퇴학당한 후, 집에 돌아오기까지 2박3일 동안 겪은 방황을 그려낸 소설”이다. “이 땅의 10대들도 자신의 이야기로 착각할 정도로 공감할 이야기”라고 허 교사는 추천이유를 밝혔지만, 이 작품에는 호텔에 투숙한 홀든이 엘리베이터 보이의 꼬드김으로 창녀와 하룻밤을 보낼 뻔한 장면도 나온다. 또 가장 자상한 조언을 해준 선생님을 잠자고 있는 자신을 성추행하려는 ‘변태’로 오인하고 급하게 도망가는 장면도 들어 있다. 공감할 수는 있지만 한국의 10대들이 ‘자신의 이야기’로 착각할 정도는 아닌 듯싶다. 그렇다고 하여 나는 이 작품이 ‘청소년 권장도서’에서 빠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그건 다른 한편으로 ‘권장도서’의 힘과 의의를 승인하는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권장도서이거나 아니거나’가 아닐까. 그것이 학생들의 독서에 미치는 실질적인 영향이란 건 지극히 미심쩍다는 게 나의 판단이다. 그 영향이 권장도서를 둘러싼 당사자들 간의 이해관계나 입시와의 연관 속에서 파악될 수는 있을지언정 학생들과는 무관해 보인다.      

청소년 권장도서가 ‘섬기는’ 이데올로기라는 게 있다면, 그것은 청소년기 독서가 교육과 긴밀한 연관성을 갖는다는 것이겠다. 교육이란 무엇인가? 독일의 철학자이자 교육학자 오토 볼노브가 <실존철학과 교육학>에서 제시한 견해를 빌리자면, 원래 수공업적 작업에서  ‘재료의 가공’이란 뜻으로 사용되던 라틴어 'formatio animae'의 독일어 번역이 ‘빌둥(Bildung)’이었다. 우리말로는 ‘교육’, ‘교양’, ‘도야’ 등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한 기원적 의미를 갖는 교육에 대한 이해는 두 가지로 갈라지게 된다. 하나는 기계적인 이해로, 교육을 외부로부터의 기계적인 주조로 간주한다. 다른 하나는 유기체적 이해는 교육을 내부로부터의 유기체적인 성장이라고 정의한다. 서로 상반되는 듯싶지만 이 두 가지 교육관은 인간의 ‘가소성’을 전제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연속적인 형성이든 혹은 연속적인 발달이든 간에 두 경우 모두 점진적으로 인간의 교육을 성취해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 교육관에서는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연속성과 가소성에 기반한 인간관은 공통적이라는 지적이다.  

하지만 그와는 다른 인간관도 엄연히 가능하며 또한 존재한다. 가령 실존주의 철학에 따르면 근본적으로는 어떤 연속적인 삶의 경과도 있을 수 없다. 점진적인 발전이란 없으며 어느 한 순간에 집결된 힘으로 이루어지는 하나의 비약이 있을 뿐이다. 교육이 가능하다는 것은 인간이 교육을 통해서 뭔가를 형성해 갈 수 있다는 ‘가소성’을 전제하지만 실존철학은 그러한 가소성에 대해 부정적이다. 거창하게 실존적인 인간학까지 꺼낸 것은 권장도서의 이데올로기가 전제하는 것이 역시 똑같이 인간의 가소성이 아닌가란 판단 때문이다. 물론 그런 면도 없지 않을 것이다. 제 때에 잘 먹은 학생들의 영양이나 성장이 좋은 것처럼 주위에서 어떻게 돌봐주느냐에 따라서 아이의 장래가 달라질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독서의 경우라면, 학생들은 ‘재료’가 아니다. 권장도서의 조합으로 학생들을 원하는 방향으로 우리는 인도할 수 없다. 그게 역설적이지만 독서의 효과다. 독서는 생각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고 기성의 가치관이나 통념에 저항할 수 있는 역량을 키워준다. 그렇다면 문제는 ‘독서력’이지 ‘권장도서’가 아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나는 아픈 인간이다……. 나는 심술궂은 인간이다. 나란 인간은 통 매력이 없다. 내 생각에 나는 간이 아픈 것 같다.”란 진술로 시작한다. 주인공의 자학적 페시미즘이 시작부터 도드라진다. 그리고는 ‘의식 자체가 병’이라는 결론까지 도출해낸다. 세계문학전집에 포함돼 있더라도 이런 작품은 가뜩이나 자의식이 민감한 청소년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는 어려울 듯싶다. 그래서 이시이 요지로라는 도쿄대 교수는 ‘읽어서는 안 되는 책 15권’에 꼽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런 건 일반론이며 모든 독서는 특수한 사례가 될 수 있다. <지하로부터의 수기>가 ‘불온한’ 혹은 ‘유해한’ 책이라는 데 현혹되어 또 이 작품을 읽으려는 청소년들이 반드시 있다. 대부분은 읽다가 포기하거나 집어던지겠지만 한둘은 도스토예프스키 문학에 ‘입문’할 수도 있다. 이제까지의 가치관이 흔들리는 걸 경험할 수도 있고, 인생의 진로를 재조정할 수도 있다. 독서는 그런 것이며, 그것이 또한 독서의 힘이고 본성이다. 그러니 아무도 말릴 수 없다. 그건 권장도서로도 역부족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10. 07.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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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스크랩]청소년 권장도서에 대한 몇가지 생각 -로쟈
    from 실낱처럼 2010-07-24 08:33 
    적어도 독서의 경우라면, 학생들은 ‘재료’가 아니다. 권장도서의 조합으로 학생들을 원하는 방향으로 우리는 인도할 수 없다. 그게 역설적이지만 독서의 효과다. 독서는 생각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고 기성의 가치관이나 통념에 저항할 수 있는 역량을 키워준다. 그렇다면 문제는 ‘독서력’이지 ‘권장도서’가 아니다. http://blog.aladin.co.kr/mr
 
 
2010-07-24 08: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24 09: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반딧불이 2010-07-25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받고 창간사와 로쟈님의 글을 가정 먼저 읽었어요. '문제는 독서력이지 권장도서가 아니다'라는 말씀이 와 닿았습니다.

로쟈 2010-07-25 16:54   좋아요 0 | URL
읽어보셨군요.^^ 잡지는 반응이 어떨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책을읽는다 2020-07-25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권장도서 선정이라는 문제에도 생각지 못했던 다양한 objective가 있군요. 취미로 읽어볼만한 책을 추린다던가, 삶의 방향을 발견한다던가, 사고능력을 확장시켜준다던가 하는 효과들 각각의 영향력을 측정하기 힘드니 문제가 더욱 어렵다고 느껴지네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어쨌거나 날씨는 정말로 완벽했다”

문학동네 블로그에 연재하는 '로쟈의 스페큘럼' 네 번째 이야기를 옮겨놓는다. '네 번째'라고는 하지만, 지난번에 다룬 캐서린 맨스필드의 <가든파티>에 대한 내용의 연장이다. 이야기는 이 글에서 완결되지 않기 때문에 '중간다리' 정도라고 해야겠다. 작품에 흥미를 느끼다 보면 다시 읽게 되고, 다시 읽다 보면 또 다른 흥미가 생기기 때문에 오래 붙들고 있게 된다. 계획엔 '타자로서의 이웃'이란 테마까지 다루고 나서야 '파티장'을 빠져나갈 수 있을 듯싶다. 역시나 글의 전문은 http://cafe.naver.com/mhdn/16606 를 참조하시길.  

 

다시 날씨 얘기부터 시작해보자. 지난번에 캐서린 맨스필드의 <가든파티> 첫 문장을 “어쨌거나 날씨는 정말로 완벽했다.”고 옮겼는데, 세계단편문학 영국편 <가든파티>(창비, 2010)에서는 보다 원문에 충실하게 “그리고 어쨌든 날씨는 이상적이었다.”(And after all the weather was ideal.)라고 옮겼다. ‘충실하다’고 한 건 ‘And’를 ‘그리고’로, ‘ideal’을 ‘이상적’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누구나 문맥과 관계없이 단어만 접한다면 일감으로 떠올릴 만한 번역이다. 그리고 그게 때로는 작품 분석에 더 유용하다. 이 경우에는 특히 좀 예외적인 서두인 ‘그리고’란 말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준다.   

상식적인 사실을 확인해두자면, ‘그리고’란 접속사는 앞에 무엇인가의 존재를 전제한다. 한데, ‘그리고’가 텍스트의 시작이므로 그 ‘앞’은 텍스트의 ‘바깥’이다. 텍스트의 바깥을 텍스트 안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이 작품에서 ‘텍스트의 경계’는 모호해진다. 사진에 비유하자면 이것은 사진에 직접 드러나지 않는, 화면 바깥의 화면, 곧 외화면(外畵面)을 보여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실상 “사진은 회화와는 달리 반드시 실제로 지각되는 풍경에서 일정 부분을 따온 것”인데, 그것을 사진의 ‘인용성’이라 부르기도 한다.

“사진의 인용성은 사진의 외화면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도록 한다. 보이는 화면이 보이지 않는 화면을 끌고 들어와 한데 결합됨으로써 사진의 전체 화면이 형성된다. 이때 화면이 의식의 영역이라면, 외화면은 무의식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은 무의식적인 외화면이 없이는 사진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오히려 회화적인 성격을 갖게 된다.”(조광제, '철학으로 본 매체', <미술관에서 인문학을 만나다>, 199쪽)

‘외화면=무의식의 영역’이라는 주장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우리는 사진의 인용성이 어떤 것인지 이 인용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가든파티>에서 ‘그리고’는 이 인용성의 지표라 할 만하다. 그리고 첫 문장에 이어서 바로 “설령 그들이 미리 주문을 했더라도 이보다 더 완벽하게 가든파티에 어울리는 날을 누리지는 못했을 것이다.”라고 화자는 서술하고 있는데, 여기서도 ‘그들’이라는 3인칭 대명사는 일반인칭(‘사람들’)이 아니라 곧 등장하는 셰리던 씨 가족을 가리킨다(둘 다 가능할 것 같지만 나는 그렇게 보고 싶다). 곧 가든파티 주최측이다. 1인칭 소설이 아닌 이야기의 서두에서, 고유명사보다 3인칭대명사가 먼저 등장하는 것 역시 일종의 파격이다. ‘그’ ‘그녀’ ‘그들’이란 3인칭 대명사는 1인칭과 2인칭(청자 혹은 독자)을 미리 전제해야 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차이는 같은 대목을 다르게 옮긴 번역본들과 비교해보면 식별할 수 있다.

“날씨는 기가 막히게 좋았다. 가든파티에 적당한 날씨를 미리 주문한다고 하더라도 이보다 더 완벽한 날씨를 구하진 못했을 거다.”(<가든파티>, 강)

“어쨌거나 날씨는 더할 나위 없었다. 가든파티를 위해 특별히 날씨를 주문했다 해도 그보다 완벽한 날은 없었을 것이다.”(<가든파티>, 펭귄클래식)

이 번역들에서 원작의 ‘인용성’은 지워지거나 최소화됐다. 그래서 깔끔하다. 외화면을 거느린 원작의 ‘사진성’을 ‘회화적’으로 처리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콘텍스트를 배제한 만큼 텍스트의 자기완결성이 더 높아지긴 했지만, 맨스필드의 원작은 좀 불안정하며 시작부터 ‘완벽’하지 못하다. 물론 이 ‘완벽하지 못함’은 작가적 의도의 소산이다. (...)

그렇다면, 작가가 단편소설의 미적 자질로서 ‘자기완결성’까지 훼손해가면서 ‘그리고’란 접속사로 작품을 시작한 이유는 무엇일까? 어째서 “날씨는 이상적이었다.”(The weather was ideal.)란 평범하지만 순탄한 서두 대신에 파격을 선택한 것일까? 나는 그러한 ‘인용성’이 갖는 효과에 주목하고 싶다. 사진의 인용성은 외화면을 화면 안으로 끌고 들어옴과 동시에 화면을 외화면으로 끌고 나간다. 마찬가지로 텍스트의 인용성은 콘텍스트를 텍스트 안으로 끌어들임과 동시에 텍스트를 콘텍스트로 데리고 나간다. 그럼으로써 텍스트의 지시성이 강화된다. 텍스트의 경계, 곧 텍스트와 콘텍스트 간의 경계가 흐려지는 만큼 텍스트에서 제기된 문제는 텍스트 바깥으로 쉽게 번져나간다. 그에 따라 주인공의 물음은 독자의 물음으로 전이된다.  



<가든파티>의 번역자 김영희 교수는 짤막한 해설에서 이 작품이 “어른들이 대변하는 중산층적인 계급적 가치와 어린아이다운 순진한 심성 사이에서 동요하는 어린 소녀 로라의 시선을 통해 삶과 죽음, 계급과 윤리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했다. 나는 로라의 시선을 통해 죽음과 노동자계급이라는 ‘타자’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정리하겠다. 크게 두 가지가 해명되어야 한다. 어째서 로라의 시선이 필요한가? 그리고 ‘죽음’과 ‘계급’이라는 타자와의 조우는 이 작품에서 어떻게 처리되고 있으며, 그 의미는 무엇인가?

‘로라의 시선’이 필요한 이유는 간단히 답해질 수 있다. 로라가 제일 처음 호명되는 대목에서 암시되기 때문이다. 가든파티를 위한 천막을 치기 위해 인부들이 도착했을 때 인솔자로 한 명이 나서야 했는데, 이 셰리던 씨 집안의 네 남매 가운데 로라가 낙점된다(로라와 메그, 조스, 로리라는 이름은 루이자 메이 울컷의 <작은 아씨들>에서 차용한 것이다).

“네가 가봐야겠네, 로라. 예술가 타입은 너잖아.”(창비)
“네가 가야겠다, 로라. 네가 감각이 있잖아.”(강)
“로라, 네가 가봐야겠다. 네가 예술적이잖니.”(펭귄클래식)
“You'll have to go, Laura; you're the artistic one."

이것이 이야기의 본격적인 시작이다. 예술적 감각을 갖춘, ‘심미적 주체’로서의 로라는 곧 ‘윤리적 주체’로서의 책임도 떠안게 될 것이다(그러니까 ‘심미적 주체=윤리적 주체’라는 것이 <가든파티>의 한 가지 메시지다). 이 윤리의 문제는 좀 더 길게 이야기해야 할 듯싶다...   

10. 0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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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라의 공통감각과 윤리적 주체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7-27 20:54 
    문학동네 블로그에 연재하는 '로쟈의 스페큘럼'을 옮겨놓는다. 캐서린 맨스필드의 <가든파티>를 일단 마무리하는 내용이다(다음 회에 약간 더 부연될 수 있다). 어젯밤과 오늘 오전에 쾌적하지 않은 컨디션 상태에서 쓴 글인데, 블로그에는 깔끔하게 정리돼 올라와 있다. 전문은 http://cafe.naver.com/mhdn/16720 를 참고하시길.     잠시 철학사 상식을 들추자면, 칸트를 ‘독단의 잠에서
 
 
2010-07-23 15: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24 0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23 19: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24 00: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미지 2010-07-25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석이 점점 흥미진진해지는데요...^^ 다음 글이 기대됩니다!

로쟈 2010-07-24 21:54   좋아요 0 | URL
주말까지 다음글을 써달라는 독촉을 받아놓은 상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