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인간인가>와 <주기율표>의 작가 프리모 레비의 자전적 소설이 번역됐다. <지금이 아닌면 언제?>(노마드북스, 2010). 알려진 대로 레비는 아우슈비츠 생존작가이며 지난1987년 자살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는 1982년에 발표된 작품이다. 그의 저작 가운데 개인적으로 기다리고 있는 책은 <익사한 자와 구조된 자>(1986)이다. 2008년에 다른 아우슈비츠 작가들과 엮어서 마이리스트를 만들어놓은 적이 있는데, 이번 기회에 프리모 레비만을 위한 리스트를 따로 만들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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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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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 아니면 언제?- 투신자살한 아우슈비츠 생존작가 프리모 레비의 자전적 장편소설
프리모 레비 지음, 김종돈 옮김 / 노마드북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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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Not Now, When? (Paperback, Reprint)
Levi, Primo / Penguin Classics / 199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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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주기율표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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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0-08-14 00:48   좋아요 0 | URL
안그래도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를 로쟈님이 소개해 주신 <생존자>와 함께 읽고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그 극한의 체험을 과장하지 않고 담담하게 그리는 그 모습이 더 인상적이었어요. 주기율표가 어떤지 궁금합니다.

로쟈 2010-08-14 11:10   좋아요 0 | URL
덜 인상적이지 않습니다.^^

파고세운닥나무 2010-08-14 11:22   좋아요 0 | URL
돌베개에서 다음 달에 <휴전>을 발간한다고 하던데요. 이 책 기다리다 중간에 <지금이 아니면 언제?>가 발간되어 무척 반갑습니다^^

로쟈 2010-08-14 11:31   좋아요 0 | URL
반가운 소식이네요. 이 리스트는 내달에 한번 더 써먹어야겠네요.^^

파고세운닥나무 2010-09-13 22:20   좋아요 0 | URL
<휴전>이 출간 되었네요. 구입해 읽어 보렵니다^^

로쟈 2010-09-14 13:31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어제 알았습니다.^^

lo초우ve 2010-09-14 22:09   좋아요 0 | URL
저도 로쟈님께서 소개해주신 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열흘에 걸쳐 다 읽었답니다.
금방 이삼일이면 읽을듯 생각했는데..
제가 겁이 많거든요 ^^
이 책 읽으며 얼마나 많이 놀랐는지..
정말 잔인 그 자채더라구요
어찌 말로 다 표현을 하겠는지요.
그저 한숨만 나옵니다.
휴~~~~~~~~~ ㅡ,.ㅡ;;

 

집안일로 지방에 다녀왔다. 직행버스를 타고 올라오는 길에 들른 대천휴게소에서 잠시 바람에 실려온 바다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올여름 바다와의 '인연'은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일 듯싶다. 하긴 가뭄과 산불로 '생지옥'이라는 모스크바에서 '휴가'를 보내지 않은 것만도 다행으로 여겨야 할는지 모른다. 내일자 리뷰기사들을 보다가 <하버드, 철학을 인터뷰하다>(돌베개, 2010)의 오역 지적이 기사화된 걸 읽었다. '인문학 가뭄'으로 편집자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출판계 현실을 문제 삼고 있다. 역자와 출판사쪽에서 번역을 재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으로 '번역시비'는 일단락짓는다.  

경향신문(10. 08. 14) ‘인문학 가뭄’이 부른 오역 홍수

묵직한 인문·사회과학서를 전문으로 내고 있는 한 출판사는 지난해 말쯤 외국 유명 학자의 두툼한 책을 번역해 출간했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어느 전문가가 원서와 대조해서 읽고 번역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한 것이다. 번역자는 대체로 이 지적들을 수긍했다.

일부를 고치는 수준이 아니라 번역문을 전체적으로 재검토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남아 있는 책들, 그리고 이미 팔린 책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초판을 적게 찍긴 했지만 재고가 꽤 많이 남아있는 상태였다.

출판사는 재고를 폐기하고 품절시켰다. 그리고 이미 팔린 책들은 구매자를 파악해 새로 책이 나오면 교환해 주기로 약속했다. 다행히 인터넷 서점을 통해 팔린 경우가 많아 서점을 통해 구매자를 찾는 데는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이 출판사 관계자는 “적지 않은 부담이었지만 그간 쌓아온 출판사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당연한 결정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였다. “인문학 전공자의 층이 엷어지면서 심도 있는 책들을 번역할 사람도, 교정·교열 및 편집 능력을 제대로 갖춘 출판 편집자도 갈수록 줄어들고 있습니다. 특히 출판사들이 편집자들에게 전문성보다는 ‘실적’을 강조하는 문화가 정착되고 편집자들의 이직이 잦아지면서 당연히 걸러졌어야 할 오·탈자나 비문, 오역이 방치되는 사례가 늘고 있습니다.” 다른 출판사의 편집주간도 비슷한 얘기를 했었다. “편집진이 자주 교체되고 젊어지면서 예전의 꼼꼼함과 치열함이 덜하다고 여겨지는 건 대부분의 출판사들이 가진 고민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나눈 지 얼마되지 않았는데 번역에 관한 시비가 또 붙었다. 활발한 강연과 저술·번역, 그리고 날선 비평으로 유명한 철학자 강유원씨가 다른 한 명의 공역자와 번역해 최근 출간한 책에 여러가지 오류가 있다는 지적이 공개적으로 제기된 것이다. 전부터 오역 사례를 많이 지적했던 서평가 ‘로쟈’는 이 책을 원문대조해 곳곳에서 문제점을 찾아냈다며 그 내용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다. 강씨는 자신이 운영하는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라온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그가 지적한 것 중에서 명백한 오역은 쇄를 거듭할 때 고치려 한다”고 밝혔다. 몇몇 문장은 고치겠다고도 했다. 이 책을 출판한 돌베개출판사 역시 “강씨가 번역문을 재검토한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오자와 탈자, 비문 등은 책이건 신문이건 활자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체로선 숙명과 같은 것이다. 아무리 글쓰기를 업으로 삼은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인간인 이상 오·탈자와 비문은 발생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번역 역시 마찬가지다. 굵직한 번역서가 나올 때마다 의역이네, 직역이네, 오역이네 하는 시비가 붙곤한다. 이 또한 번역서의 숙명이라면 숙명이다.

특정인과 특정 출판사를 면박주고 싶은 뜻은 결코 없다. 번역자와 편집자가 나눠질 책임의 무게도 저울질 해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이 이야기되고 곱씹어져야 하는 것은 앞서 소개한 우려 때문이다. 오죽하면 과거 이윤기씨로 하여금 <장미의 이름> 개역판을 내도록 만든 ‘고수’인 강씨와 차분하게 질좋은 책을 만든다는 평가를 받는 돌베개의 만남에서마저 이런 일이 벌어졌느냐는 안타까움과 우려 말이다.(김재중 기자) 

10. 08. 13.  

P.S. 참고로 기사의 서두에서 언급된 책은 짐작에 조반니 아리기의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길, 2009)일 텐데, 공개적인 리콜이 이루어졌던 것일까? 내가 갖고 있는 초판본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알아봐야겠다(나는 알라딘을 통해 구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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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 2회

자음과모음의 연재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2회를 발췌해놓는다. 전문은 링크해놓았다. 어제 3회분 원고를 쓰려고 했지만 컨디션 난조로 아직 보내지 못했는데, 오늘은 매듭을 지어야겠다. 2회에서는 2003년 지젝의 방한 기억과 함께 '피상적' 만남의 의의를 다뤘다. 3회에선 '실재계'(혹은 '실재')라는 말과 '사라진 잉크'에 대해서 다룰 계획이다.

 

지난 2003년 가을에 방한하여 다섯 차례의 강연을 가진 바 있는 지젝은 또 생각이 달라서 “한국과 슬로베니아 두 나라가 깜짝 놀랄 만큼 서로 유사한 상황에 처해 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의 강연문을 담은 책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이데올로기>(철학과현실사, 2005)의 머리말에 나오는 내용이다.(...)

지젝은 이런 질문을 던진다. “이국 땅에 있으면서 또한 고국에 있다는 야릇한 이 동시적인 체험 속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어떤 오래된 물음과 부딪혀야 했다. 어떻게 해야 우리는 자신의 장벽을 넘어 타자에게 이르고, 특히 다른 인종에게까지 손을 건넬 수 있는 것일까?” 지젝은 세 가지 만남의 사례를 든다. 

첫 번째는 유럽문학에서 진정한 전쟁 체험으로 치켜세워진다는 참호전에서의 조우다. 적군 병사의 얼굴을 직접 대면한 상태에서 상대방을 찔러 죽이는 것을 말한다. 이런 종류의 ‘신비한 피의 성찬식’은 싸움이 더 이상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막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영적으로’ 정당화하기까지 한다. 대표적으로 들 수 있는 사례가 독일의 작가이자 사상가 에른스트 융어(1895-1998)의 회고록이다. 이 책은 아직 우리말로 번역돼 있지 않아서 내가 대신 떠올리게 되는 건 레마르크가 1차 세계대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해 쓴 <서부전선 이상 없다>(1929)이다. 개인적으론 고등학교 때 삼중당문고로 읽었던 작품인데, 여기에도 주인공 파울 보이머의 참호전 경험이 묘사돼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참호가 아니라 포탄 구덩이에 빠져 있던 주인공이 어둠 속에서 같은 구덩이에 굴러 떨어진 적군을 죽이게 된 경험이다.   

“나는 생각이 마비되어 아무런 결심을 할 여유도 없이 미친 사람처럼 그자를 쿡 찔러본다. 몸이 움찔움찔하다가 축 늘어져서는 푹 꺾이는 느낌만 들 뿐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손이 끈적끈적하고 흥건히 젖어 있다.” 

하지만 적군의 숨이 금방 끊어지진 않아서 보이머는 한동안 그와 대면하게 된다. 공포로 응집된 그의 시선을 보면서 보이머는 ‘아니야, 아니야’라고 속삭인다. 그는 상대방의 공포를 누그러뜨리고는 흙탕물이지만 입술에 물을 적셔주고 상처에 붕대를 감아주려고 애쓴다. 보이머의 휴머니즘? 하지만 보다 실상에 가까운 것은 포로로 잡힐 경우를 대비한 계산이었다. “나는 어쨌든 이 일을 해야 한다. 내가 포로로 잡힐 경우 이들이 내가 그를 도와주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를 총살시키지 않도록 말이다.” 부상당한 적군 병사는 한나절 이상을 신음하다가 결국 숨을 거둔다. 아마도 그가 결정적인 부상을 입지 않았더라면 포탄 구덩이 속에서 둘은 서로의 눈을 마주보면서 가차 없이 상대방을 죽여야 하는 운명에 처하지 않았을까. 그것이 ‘레알 전쟁’이니까. 하지만 우리가 기대하는 만남은 아니다.   

두 번째로 지젝이 드는 사례는 살인의 체험을 숭고한 경험담으로 고양시키는 몽매주의 이데올로기보다는 조금 고상한 쪽이다. 1942년 12월 31일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에 러시아의 배우와 음악가들이 위문공연차 도시를 찾았다. 스탈린그라드는 독일군에 포위된 상태였는데, 바이올린 연주자 골드슈타인이 연주를 시작하자 사격은 돌연 중단됐다. 연주가 끝나자 러시아쪽 진영은 정적에 휩싸였고, 얼마 후 독일군 진영의 확성기에서 더듬거리는 러시아어가 흘러나왔다. “바흐를 더 연주해주시오. 쏘지 않겠소.” 골드슈타인은 다시 바이올린을 집어들고 바흐의 가보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물론 연주가 진행되는 동안은 독일군과 러시아군은 상대방을 쏘지 않았다. 하지만 연주가 끝나자마자 사격은 다시 시작됐다. 이 연주가 궁극적으로 양측의 사격을 막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지젝은 그 연주가 너무 고상하고 심오했기 때문은 아닐까라는 의문을 던진다. 왜 그런가. “어떤 일이 이루어지는 데 필요한 것은 그보다 훨씬 더 표면적이고 피상적인 어떤 것이라는 점” 때문이다. 반면에 보편적 인간성을 발견하게 해주는 좀더 효과적인 체험은 시선의 교환이라는 보다 단순한 모양새를 취할 수도 있다. 사실 <서부전선 이상 없다>에서도 파울 보이머는 상대방의 시선을 정면으로 응시하자 ‘아니야, 아니야’라며 살해할 의도가 없다는 걸 내비쳤는데, 그 경우에도 그의 ‘보편적 인간성’이 ‘계산’보다 먼저 작동한 것은 아니었을까.  

지젝이 세 번째로 드는 사례는 바로 그와 관련된 것이다. 얼마 전 월드컵이 개최됐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예전에 일어난 일인데, 반인종차별 시위 도중에 백인 경찰이 흑인 시위자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던 때였다. 한 경찰관이 곤봉을 손에 들고 흑인 부인을 뒤쫓아 가고 있었는데, 예기치 않게도 부인의 신발 한 짝이 벗겨졌다. 그러자 경찰관은 자동적으로 ‘깍듯한 예의(good manners)’를 지켜 신발을 주워 그녀에게 건넸다. 그 순간 두 사람은 시선을 교환하고 자신들이 처한 상황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깨닫는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예의를 차린 다음에는 다시금 그 부인을 쫓아가 곤봉으로 내리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경찰관은 그래서 가볍게 목례를 한 다음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이 일화에서 지젝이 끌어내는 교훈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 경찰관이 갑자기 자신의 선한 본성을 발견했다는 데 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 즉, “그래, 인간의 본성은 원래 선한 거야!” 따위의 깨달음은 이 일화와 무관한 또 다른 몽매주의다.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로 그 경찰관은 전형적인 인종주의자였을 가능성이 더 높다. 하지만 그러한 자신의 생각이나 신념에 대해 승리를 거둔 것은 그가 받은 ‘피상적인’ 예절 교육이라는 게 지젝의 판단이다. 백인 경찰관과 흑인 부인은 단지 신발을 건네주고 받으며 눈빛만을 교환했을 뿐이지만, 이 ‘피상적인’ 접촉에 의해서 두 사람이 살고 있는, 서로 전혀 소통되지 않는 두 사회적-상징적 세계의 장벽이 일시적으로 중지됐다. “그것은 마치 어떤 또 다른 세계, 유령적인 세계로부터 손 하나가 불쑥 삐쳐 나와 그들의 일상적 현실로 들어온 듯한 사건이다.” 이것을 지젝은 달리 ‘마술적 마주침’이라고도 부른다. 그의 기대는 물론 오늘날의 세계에서 그러한 마주침이 더 많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 마주침이 ‘리얼한 만남’이나 ‘고상한 만남’이 아닌 ‘피상적인 만남’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이 요점이다.    

나는 ‘교양’의 경우에도 사정은 비슷하지 않은가 싶다. 우리가 깊은 예술적 교양, 인문학적 교양을 갖추지 못해서 서로 마음의 장벽을 쌓고 사회적 분리벽을 만들며, 서로 무시하고, 곤봉으로 패고 칼로 찌르는 것은 아닌 듯싶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깊이’가 아니라 ‘넓이’다. 피상적이더라도 널리 공유될 수 있는 제스처(눈짓)와 의무적인 예절이 필요하다. 더불어, 피상적인 교양이 필요하다. 가령, 지하철에서 지젝의 책을 손에 들고 있는 사람을 만났을 때 내가 느끼는 ‘피상적인’ 친밀감이 우리에겐 더 많이 필요하다. 그 옆에 평소 지젝을 많이 읽었고 나름대로 비판적인 식견까지 갖춘 대학교수가 앉아 있다고 치더라도 우리의 친밀감은 어제 처음 지젝의 책을 사들고 오늘 전철간에서 들춰보고 있는 사람을 향한다. 우리가 아무 대화 없이 눈짓만을 교환한다손 치더라도 그 피상성은 우리를 하나로 묶어줄 수 있다.(...) 

10. 0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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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2 15: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2 2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faai 2010-08-12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쪽'에 댓글 달았던 사람입니다. 저쪽 글에는 원래 글에 없던 오타가 생겼기에 비밀 댓글로 제보했죠. 지금은 수정이 되었네요. 좋은 글 잘 읽고 있습니다. 앞으로 어떤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될지도 기대가 크고요. ^^

로쟈 2010-08-12 21:33   좋아요 0 | URL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2010-08-12 23: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3 23: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8-14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화가 참 흥미진진합니다.고상함보다는 피상적인 것에 가치를 두어야 한다...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하는군요.

레마르크 소설 중에 독일과 소련의 막바지 전투를 다룬 '사랑할 때와 죽을 때'가 재미있었습니다.레마르크는 '서부전선 이상없다'보다 2차대전을 다룬 작품들의 구성이 더 나은 것 같아요.

로쟈 2010-08-14 11:12   좋아요 0 | URL
저는 <서부전선>이 더 재미있었는데, 아마 제 또래가 주인공이어서였겠지요...

노이에자이트 2010-08-14 18:33   좋아요 0 | URL
그래요... '서부전선 이상없다'를 좋아하는 이들이 참 많군요.저는 레마르크 소설 중에서 '사랑할 때와 죽을 때'가 제일 재미있었어요.
 

프랜시스 베이컨의 작업실에 비하면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지만 책으로 가득 차 있기에 나름 지저분한 방에서 혼자 책을 읽고 있으면 '독서가'로선 소원을 성취한 게 아닌가 하지만, 사정이 또 그렇지만은 않다. 이유선 교수의 표현을 빌면, 이런 게 '아이러니스트의 사적인 진리'인지도 모른다. 매일 책을 읽으면서도 책을 좀 읽었으면 하고 바란다는 것. "네가 곁에 있어서 나는 네가 그립다"라는 시구절이 있었던가. 고백의 사연은 이렇다.  

"나는 거의 일년내내 책을 읽으면서도 항상 책을 읽으면서 살았으면 하는 꿈을 꾸면서 산다. 아마도 나는 책을 읽으면서도 그 책이 내가 진정으로 읽고 싶은 책은 아니라고 생각하거나, 책을 읽는 대부분의 상황이 내가 꿈꾸었던 여유 있는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럴지 모르겠다. 내가 읽는 책들은 강의를 하기 위해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이거나, 거의 아무도 읽지 않을 논문을 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읽어야 하는 책들이다. 그리고 늘 시간에 쫓겨서 읽는다."(<아이러니스트의 사적인 진리>, 16-17쪽) 

새로 나온 <역사가들>(역사비평사, 2010)에서 러시아사가 쉴라 피츠패트릭 편을 들추다가 떠올린 대목이다. 스탈린시대의 일상사 연구로 유명한 피츠패트릭의 명성은 익히 알고 있고 여러 권의 책을 구해놓았지만 정작 읽을 시간이 없는 게 또 현실이다. 찾아보니 국내엔 <러시아혁명>(대왕사, 1990)이 소개된 바 있다. 책은 기억이 나는데, 얇은 책이어서 완역본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원서는 현재 3판까지 나와 있다. 간단한 설명은 이렇다.

  

1980년대 초에 피츠패트릭은 볼셰비키혁명에 대한 매우 흥미로운 저서 <러시아혁명>을 출간했다. 그녀는 다양한 관점으로 혁명을 두루 관찰하고 1917년 사건의 전체 조건과 함께 볼셰비키 집권 이후의 사회변화를 묘사했다. 그녀는 이 책에서 중국의 문화혁명에 견줄 만한 소련의 인텔리겐치아 탄압을 스탈린이 아닌 평범한 공산당원들이 주도했다고 주장해 학계에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녀는 스탈린 노선이 사회적 기반에 기초해 있었으며, 이러한 인민의 급진주의가 1930년대 정권과 사회가 부분적으로 합의할 수 있었던 기반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한 주장을 제시할 수 있었던 근거는 스탈린시대 일상에 대한 면밀한 연구이다. <스탈린의 농민들>, <일상의 스탈린주의> 등이 그녀의 대표적 저작이다. 말하자면, 연구의 초점이 '아래로부터의 사회사'에 두어졌다.   

   

<일상의 스탈린주의>에 대해 한 서평자는 이렇게 말했다. "피츠패트릭은 독자들에게 스탈린이라는 군주의 지옥과도 같은 끔찍한 서커스 속에서 사는 것이 실제로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러시아사 연구에서 이러한 입장은 '수정주의'라 불리는데, 쟁점은 이런 것이다. 

보수주의 학파는 소비에트 사회의출현을 '역사의 논리가 적용되지 않는 역사의 일탈'로 간주했지만, 피츠패트릭을 비롯한 수정주의자들은 1970년대와 1980년대 보수주의 학파가 사용한 '전체주의'라는 용어를 비학술적인 용어로 공포했다. 수정주의자들은 스탈린과 그의 정치국을 사악한 존재로 보면서도, 소비에트 정치 엘리트들에 대해서는 "다른 평범한 정부에 존재하는" 상층부와 유사하다고 인식했다.

   

20세기 러시아문학을 공부하려면 아무래도 당시의 일상에 대한 자세한 연구가 요긴하다. 그래서 관심을 갖게 된 러시아사가 중 한 사람이 피츠패트릭이지만, 요는 아직 읽을 시간이 없다는 것. 현재 읽는 책들을 그렇다고 '억지로' 읽는 건 아니지만, 필요에 의해 제약을 받는 건 사실이다. 멀리 가지는 못하는 것이다. 피츠패트릭의 러시아사 연구에 대한 소개를 읽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다시금 떠올라 몇 자 적었다.   

참고로, 피츠패트릭은 1941년 호주 태생으로 주로 시카고대학에서 소련사를 강의했다... 

10. 0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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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0-08-11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유선 교수의 글...완전 공감합니다~~ 그나저나 전, 러샤의 문학과 철학에 문외한이라서욤..문학에는 관심이 없구 러샤 철학자들은 관심이 많은데 아는게 하나도 없습니다..작년에 엔날 고려원에서 나온 러샤철학사를 발견해서 기쁜 맘에 데리고 오긴 했지만 역시 아직 읽지는 못한 상태구요..단지 실존철학자 베르자예프는 관심이 많은데, 이 사람 저서를 구하기가 힘들다는 거에요~ 혹시 번역 출간 된 책이 있는지요?

로쟈 2010-08-11 18:41   좋아요 0 | URL
'베르댜에프'로 검색하시면 발췌번역서들이 몇 권 뜹니다. 예전에 <러시아사상사>, <러시아지성사>들이 번역됐었는데, 지금은 구하기 어렵죠. 이사야 벌린의 <러시아 사상가>도 좋은 책입니다. 그리고 러시아는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가 '철학자'입니다. '철학' 개념이 서구와 좀 다릅니다...

yamoo 2010-08-11 23:09   좋아요 0 | URL
엔날에 종로서적에서 나온 베르댜예프의 <러샤지성사>를 보고 다른 저서들을 찾고 있는데, 아예 책이 없어서 넘 아쉬워하고 있는 중입니다..벌린의 <러샤 사상가> 입수하도록 하겠습니다^^ 문학으로 철학을 했군요..러샤는..ㅎ 여튼 넘 감사합니다~

미지 2010-08-11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러시아의 철학 개념... 흥미롭네요.

헌내 2010-08-11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양인 출판의 문제적 인간 시리즈 '스탈린'과 트로츠키의'배반당한 혁명'이 생각나네요. ^^
(국내 '배반당한 혁명'은 책 번역이 엉망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영어 원서가 아예 절판이라는 겁니다.ㅋ)

2010-08-12 03: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2 2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내일자 경향신문에 실리는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무엇을 칼럼의 소재로 삼을까는 언제나 고민거리인데, 그냥 오늘 낮에 떠오른 주제를 적었다. 물론 즉석에서 떠올린 건 아니고 여러 아이템 중의 하나로 머리속에서 궁굴리던 것이긴 하다.  

경향신문(10. 08. 10) 남성과 여성 그리고 소통 

여성의 언어와 남성의 언어가 따로 있는가? 사회언어학자들에 따르면 그렇다. 언어에도 성차가 있다. <당신은 이해하지 못한다>의 저자 데보라 태넌에 따르면, 여성들은 남성보다 부드러운 감탄사를 사용하며 ‘귀엽다’ 같은 별다른 의미없는 형용사를 더 많이 쓴다. 그리고 자기 주장 끝에다 “그렇지 않니?”라는 질문을 자주 덧붙인다. 남성보다 주장을 다소 완곡하게 표현하며 더 정확한 문법을 구사한다. 밋밋한 표현을 피하기 위해 다양한 음역과 억양을 사용하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같은 공손한 표현을 즐겨 쓴다. 이런 것이 말하는 방식의 차이라면 더 중요한 차이는 대화의 목적에 있다. 간단히 말하면, 남자는 ‘독립’을 원하는 데 반해서 여자는 ‘친교’를 원한다. 저자는 이런 예를 든다.

남편 조쉬가 옛날 고등학교 동창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비즈니스 문제로 조쉬가 사는 도시에 내려올 예정이라는 말에, 조쉬는 대뜸 주말에 자기 집으로 오라고 초대했다. 하지만 그 말을 전해들은 아내 린다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자신도 출장을 갔다가 주말에 돌아올 예정인데 한마디 상의도 없이 혼자 결정을 내리고 일방적으로 통고해도 되느냐고 따졌다. 그러자 조쉬가 버럭 소리를 지른다. “어떻게 친구와 약속을 하면서 마누라한테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말을 해!”

조쉬를 ‘K씨’로, 린다를 ‘부인 L씨’로만 바꾸면, 우리 자신과 주변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 아닌가. 남편은 아내와 상의하는 일을 ‘허락’을 구하는 일로 보아 자신의 ‘독립성’에 대한 침해로 간주한다. 그는 마누라 앞에서 벌벌 떠는 못난 사내란 평을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반면에 아내는 가급적 모든 일은 상의해야 하며 그것이 서로에 대한 존중이라고 생각한다. 부부란 가장 ‘친밀한’ 관계이기에 그렇다. 태넌의 주장대로, 친교가 “우리는 아주 밀접해서 똑같다”는 뜻이고 독립이 “우리는 떨어져 있는 만큼 각각 다르다”는 뜻이라면 둘을 조화시키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은 문제다. 이들은 각기 다른 두 개의 ‘세계’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각각 세상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이 두 세계 사이에서 과연 연대와 소통은 어떻게 가능할까? 가장 흔한 대증요법은 서로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물론 상대방의 입장이 돼볼 수 있는 기본적 상상력이 이 경우엔 요구된다. <정의론>의 철학자 존 롤스라면 ‘원초적 입장’이란 걸 대안으로 제시할 법하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각자의 편파적 입장에서 벗어나 ‘성별 없음’이란 입장에서 문제를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즉 각자가 자신의 성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가정한 상태에서 공정한 합의를 모색한다. 원리적으로는 그럴 듯해 보이는 주장이지만, 모두가 동의하는 건 아니다. <남자다움에 관하여>를 쓴 정치철학자 하비 맨스필드는 우리가 자기 성별을 알고 있을 때의 선택과, 알고 있지 못할 때의 선택은 별개라고 주장한다. 게다가 ‘성별 없음’이란 입장은 어떤 결정에서 성이 중요하지 않다는 판단을 전제로 하는데, 성이 중요하지 않다는 걸 우리가 어떻게 아느냐는 것이 그의 반론이다. 오히려 남자는 남자답게, 여자는 여자답게 행동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그는 본다. 성별 간의 자연적 차이를 부인할 수 없다면 언어적 차이 또한 부인해서는 안 된다는 쪽이다.

그런 경우 해법은 우리가 감수해야 할 불편을 경탄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당신은 어떻게 혼자서 다 결정하고 통보만 하실 수 있지요? 너무 귀여운 거 아녜요?” “어떻게 모든 걸 당신 허락을 받으라는 거요? 가슴이 떨려서 매번 그렇겐 못하오!” 아무래도 날이 너무 더운가 보다. 

10. 08. 09.  

P.S. 칼럼에서 언급한 데보라 태넌의 <당신은 이해하지 못한다>는 <남자를 토라지게 하는 말, 여자를 화나게 하는 말>(한언출판사, 2001)로 번역돼 있다. 처음엔 <남자의 말, 여자의 말>(한언출판사, 1999)이란 제목으로 나왔던 책이다.   

하비 맨스필드의 <남자다움에 관하여>(이후, 2010)는 알다시피 얼마전에 출간된 책이다. 데보라 태넌에 대해선 이 책에서 남성의 언어와 여성의 언어를 다룬 대목에서 알게 됐다. <하버드, 철학을 인터뷰하다>(돌베개, 2010)에 실린 그의 인터뷰도 참고했다. 칼럼에서 언급한 내용이 역시나 부정확하게 번역돼 있다. 자세한 건 나중에 <남자다움에 관하여>를 다룰 기회가 생기면 지적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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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10-08-09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토요일에 많은 알라디너들(모두 여자였지만)과 만나서 이 주제에 대한 얘기를 했어요. 화성 남자와 금성 여자. 읽으면서 고개 많이 끄덕였습니다.^^

로쟈 2010-08-09 23:35   좋아요 0 | URL
맨스필드의 말대로 '스테레오타입'이지만 서로를 이해하는 데는 도움을 주는 듯합니다...

2010-08-10 0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0 08: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자꾸때리다 2010-08-10 0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들 읽으면 연애할 수 있나요? ㅜ.ㅜ 저 차였거든요.ㅜ.ㅜ

로쟈 2010-08-10 08:06   좋아요 0 | URL
왜 차였는지는 말해줍니다.^^;

穀雨(곡우) 2010-08-10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번 옆지기랑 소통이 탁 막히면 화성인, 금성인 이야기로 윤을 굴리지만 그게 마음처럼 잘 안되더군요. 전 동굴로 기어들어가고 무엇보다 여자의 상황을 지배하는 무기, 눈물이..ㅠ.ㅠ
분명 잘 못한 일이 아닌데, 어느새 나쁜넘으로 상황돌변...켁
관점과 상황을 인식하는 지점의 차이가 아닐까 생각만 많아집니다. 여자는 말로 호응하고 인정받고 남자는 풀어 나열하고 앞뒤를 가리는 것에 있다는 차이가 안드로메다은하보다 멀게 느껴집니다. 고로 남자는 눈치라도 빨라야 생존하며 가정의 평화가....^^

로쟈 2010-08-10 11:28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디폴트값을 소통불가능에 두고 시작하면 그래도 좀 낫지 않나 싶어요. 기대를 좀 낮추는 것이죠.^^;

yamoo 2010-08-10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류의 책을 부지기수로 읽었는데요...첨엔 재밌어서 읽었는데, 좀 읽다 보니 식상하더라구요..근데, 최근에 사람을 이해하는 관점에서 보니 새롭게 보이더군요~ 인간을 공부한다는 차원에서 보면 비슷비슷 한 책들이 주는 공통적인 사항을 추릴 수 있고, 그게 바로 알고 실천해야할 인간에 대한 공부같습니다..<남자다움에관하여>는 아직 못봤지만 비스무리 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다시 한 번 이런 류의 책들을 독파해 봐야 겠습니다~^^

헌내 2010-08-10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향신문에 칼럼도 쓰시는군요 ^^

자꾸때리다 2010-08-10 1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정말 궁금한 것이... 여자한테 지젝, 데리다 이런 이야기하면 '일반적으로' 싫어하나요?

yamoo 2010-08-10 20:52   좋아요 0 | URL
어렵게 얘기하면 아주~ 싫어합니다...시큰둥하구요..상황에 따라서 아주~ 쉽게 얘기해야 합니다..그럼 좀 듣는 거 같습니다. 근데, 지젝 데리다..먼저 관심을 보이기 전에는 저얼대 먼저 얘기하지 않는 게 좋아보입니다 ^^

빵가게재습격 2010-08-10 22:54   좋아요 0 | URL
남자들도 싫어하지 않을까요?^^ 전에 술자리에서 정치철학 어쩌구 하며 이야기를 꺼낸적이 있는데, 친구들 반응이 이렇더군요.

'너 왜 그래', '슬럼프냐? 왜 철학책을 읽어?' '집사람이랑 싸웠니?' '살다 보면 다 그럴때 있어 자식아, 자, 술 받아!'
........
'야, 쟤 다음부터 부르지마. 술 맛 떨어져'

로 마무리 되었답니다. 친구 다 끊어집니다. 인문학. 댓가가 크죠...

Anton 2010-08-11 00:55   좋아요 0 | URL
지젝과 데리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말고 여부를 학력도 아니고 성별로 따진다는 게 어쩐지.. '여자'는 '어려운' 이야기 듣는 거 싫어하나요? 이렇게 읽히네요. 하하. 제 생각은 그냥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싫어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뭐 정확한 상황은 모르겠지만 공통 관심사가 아닌데 일방적으로 자기 지식/생각을 전달하려하는 태도는.. '여자'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도 환영받기 어렵지 않을까요..

송연 2010-08-10 1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어서 로그인하고 글 남깁니다.
지젝, 데리다 이런거 이야기한다고 싫어하거나 차이지는 않는것같습니다...^^
진실된 사람이라 느낄때, 다정하고 세심한 배려가 느껴질 때... 그땐 오히려 여성쪽에서 적극적일 것 같아요...^^

2010-08-11 0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4 16: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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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4 16: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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