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3대 권력세습에 관한 논란이 이어지고 있는데, 개인적으론 나도 칼럼에서 다뤄야 할지 아직 정하진 못했지만(아직 두 주의 여유가 있다) 몇몇 기사와 칼럼을 주목해서 읽어보았다. 그 중 인터넷 논객 한윤형의 칼럼을 한겨레 훅(hook)에서 옮겨놓는다(http://hook.hani.co.kr/blog/archives/13785). '코미디'가 아닌 '상식'을 담고 있어서다.     

한겨레 훅(10. 10. 12) 황장엽과 리콴유, 어떤 반민주주의자들의 판타지 

공교롭게도 황장엽은 노동당 창건 65주년 되는 날에 세상을 떠났다. 적국으로 망명 온 (전향도 하지 않은) ‘주체사상의 창시자’의 죽음은 한반도 이북에 있는 권력집단의 정체를 의심하게 만든다. 조선노동당은 황장엽과 함께 욕실에서 사망했고, 저 텔레비전 화면 속의 열병식의 주최자는 그저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회의하게 되는 것이다. 러시아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온 황장엽은 주체사상의 체계화에 기여를 했지만, 조선노동당이 ‘맑스-레닌’을 벗어던지고 ‘김일성의 당’임을 선포하게 되는 시대 변화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어찌됐건 황장엽의 망명은 북한 체제가 그들이 말하는 ‘우리식 공산주의’에서도 이탈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황장엽 전 조선노동당 비서의 장례는 ‘통일사회장’으로 치러지고 있고, 정부는 그를 대한민국을 위해 몸바쳐 싸운 이들이 묻혀 있는 대전 현충원에 안장하고 싶어 한다. 남한 망명 후 여생을 암살의 위협 속에서 살아온 그에게 인간적 정리가 있을 수는 있겠으나, 이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황장엽이 대한민국을 위해 무엇을 공헌했는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황장엽은 수십 년의 생애를 대한민국을 절멸하려는 욕망을 가진 저 북쪽 ‘공화국’의 ‘리론가’로써 호의호식하며 살았다. 그가 망명 후 북 권력집단의 추악한 실체를 폭로한 ‘공로’는 있겠으나, 그렇다고 자신의 과거를 반성한 것은 아니다. 반성하기는커녕 자신이 만든 주체사상은 문제가 없는 아름다운 사상이었는데, 김일성이 이것을 개인적인 우상숭배에 활용하면서 북한이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는 식의 주장을 해왔다. 안기부는 황장엽이 망명한 직후 ‘황장엽의 주체사상’에 대해 설명하는 해설서까지 내주었다.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 



황장엽에 대한 한국의 자칭 ‘보수 우파’들의 반응은 그들의 머릿속에 ‘자유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한다. 그들은 곧잘 자신들을 ‘자유민주주의자’라고 칭하지만, 이때 그들이 말하는 것은 이념으로서의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북한 체제를 부정한다는 차원에서의 ‘자유민주주의’다. 그들은 대체로 ‘밥 먹이는 독재자’를 찬양의 대상으로 삼고, ‘밥 굶기는 독재자’를 경멸하려 든다. 이것이 그들이 박정희/전두환과 김일성/김정일을 변별하는 방식인 것이다. 따라서 황장엽이 북쪽에서 가지고 내려온 ‘주체사상’이 지도층에 대한 인민의 희생을 강요하는 전체주의적 이념이란 것은 이들에게 큰 문제는 아니다. 이들에게 문제는 김정일이 밥을 굶기고 있다는 것이고, 밥을 굶기지 않으려면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수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인민들이 사유재산을 늘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동하면서 북한 김정일 체제를 규탄하는 정부의 입장에 무비판적으로 동조하는 “자본주의와 결합한 주체사상 이념의 정권”이 한국 사회의 ‘보수 우파’들의 바라는 사회상이라 볼 수 있겠다.

그런데 이들에게 반대하는 소위 민주화 세력, 김대중과 노무현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바라는 사회는 어느 정도에 와 있는가? 황장엽이 사망하던 날의 열병식과 함께 공식화된 북한 체제의 ‘3대 세습’ 문제는 이미 그 이전부터 남한 ‘진보 세력’의 화두가 되어 있었다. 북한 체제에 대한 내정간섭이 부당하다는 민주노동당의 논평에 대한 경향신문 사설의 비판이 있었고, 이에 맞서 이정희 민주노동당 대표가 ‘국가보안법의 논리’로 사태를 재단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몇몇 지식인들이 갑론을박했지만 그중 가장 놀라운 것은 프레시안에 실린 역사학자 김기협씨의 글이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한국 현실에 맞는 ‘진보’를 추구했다고 주장하면서, 한편으로는 ‘노무현이 보수면 뭐 어떠냐?’라는 앞뒤가 안 맞는 질문으로 참여정부를 비판하는 ‘좌파’들을 질타했던 이 노무현 지지자는, 싱가포르 리콴유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세습은 절대악이 아니기 때문에 북한의 권력세습 문제를 우리 잣대로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한다.

김기협의 주장은 좌파나 진보주의자들은 물론, 김대중·노무현 지지자들의 일반적인 정서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발언에 경악을 금치 못한 것으로 안다. 하지만 김기협의 발언은 ‘인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킨 리콴유의 권력세습’으로 ‘인민을 굶기는 김정일의 권력세습’을 옹호할 수는 없다는 기본적인 오류 이상의 큰 의미를 지닌다. 이를테면 소위 ‘민주화 세력’이 한국 보수 우파들이 독재자를 변별하는 방식과 다른 방식의 잣대를 가지고 있는지가 의문시 되는 것이다. 대체로 리콴유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이들은 박정희 역시 긍정적으로 평가해왔다. 박정희의 ‘위인전’을 완성한 월간조선 전 편집장 조갑제씨 같은 경우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리콴유와 박정희는 ‘지도자’를 좋아하는 아시아인들이 흔히 내세우는 ‘위대한 지도자’들이다. 우익들이 박정희/전두환과 김일성/김정일을 변별하는 방식이 ‘밥’이라면, 김기협에겐 무엇이 있는가?

차라리 김기협이 아예 박정희까지 긍정해 버린다면 그의 발언을 ‘소신있는 것’으로 치부할 수 있다. 박정희의 경제성장의 공로를 인정하되 그의 방식이 경제성장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사회에선 통용될 수는 없고 이제 우리에겐 제대로 된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런데 김기협은 <뉴라이트 비판>에서 이승만과 박정희를 긍정 평가하는 뉴라이트 역사학자들을 매섭게 쏘아붙인 사람이다. 뉴라이트를 비판한다고 박정희를 전면 부정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나는 김기협의 저술에서 박정희의 경제성장의 공로를 인정하는 구절을 찾지는 못하였다. 더구나 다른 것도 아니고 리콴유의 ‘세습’을 옹호하는 것은 박정희의 경제성장의 공로를 옹호하는 것보다도 훨씬 독재자에게 친화적이다. 언론자유를 부정하고 도시의 청결함에 과잉집착하는 그의 통치행위는 전두환의 3S정책보다도 더 이전에, 장발족과 미니스커트를 단속하던 박정희 시대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싱가포르는 “발전된 자본주의와 결합한 박정희식 ‘한국적 민주주의’의 체제”라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적어도 한국 사회는 3S 시대를 넘어 문화산업 정책을 펼쳐낸 지난 ‘잃어버린 10년’ 동안 싱가포르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자생적인 대중문화를 보유한 국가가 되었다. 어떤 진보주의자들은 이 대중문화의 자본친화성에 눈살을 찌푸릴지도 모르겠지만, 이 대중문화가 김기협이 그렇게 신봉하는 ‘삶의 질’을 높여주는 있다는 점도 사실이다. 김대중은 1990년대 후반 ‘아시아적 특수성’을 주장한 리콴유에 맞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동반발전’이 가능하다고 주장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더랬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어느 노무현 지지자의 리콴유 찬양은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세력이 어떠한 지반 위에 서 있는지도 모를만큼 몰역사적인 거다.

이 두 개의 반민주주의적 판타지의 실상을 들춰보니 현기증마저 느껴진다. 주체사상과 한국적 민주주의의 대립, 한반도의 1970년대를 남북으로 가르던 그 대립이 한반도 남부를 동과 서로 가르며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웃긴 것은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이들이 ‘주사파’들을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해야 한다고 믿는 그 집단인 것이고, ‘한국적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이들이 ‘독재자의 딸’에 이를 벅벅가는 그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앞서 지적했듯 김기협의 논리는 김대중·노무현 지지자들의 일반적인 논리가 아니고, 김대중·노무현을 지지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서적으로라도 박정희를, 리콴유를, 그리고 박근혜를 싫어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안심할 일이 아니다. 김기협이 가지고 있는 1970년대의 환상은 우리가 말했던 ‘민주화’가 민주주의 이론을 제대로 체현한 것이 아니라, 독재자들의 ‘무능함’을 민주화 세력이 대체할 수 있다는 차원의 논리였다는 사실을 폭로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정희와 리콴유를 규탄할 때라도, 김대중과 노무현을 예찬할 때 우리는 은연 중에 그런 관점을 가지고 그들을 과거의 독재자들과 비교한다. 그리고 두 민주화 세력의 지도자들이 독재자들보다 ‘유능’했던 점은 역시 ‘시장자유’를 더 제대로 인정했다는 점에 있는 바, 우리의 민주화는 곧바로 ‘신자유주의’를 향해 돌진하게 되는 것이다. 김기협의 ‘오버’는 그가 속한 집단의 일반적인 정서를 대변하지 못하지만, 어째서 민주화 세력의 지지자들이 ‘신자유주의 개혁’을 앞장서서 추진하고 지지하게 되었는지를 드러내는 외설적인 대상이다. 그리하여, 2002년에 노무현을 지지했던 이들은 2007년엔 이명박을 지지하게 되었던 것이고, 오늘날엔 다시금 한국 사회의 모든 문제를 이명박에게 떠넘기고 있는 것이다.(한윤형)  

10.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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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12 14: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13 08: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13 15: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자꾸때리다 2010-10-12 17:15   좋아요 0 | URL
도대체 무슨 당을 찍어야 하는지 모르겠네요. 한나라당은 일단 열외로 하고, 민주당은 권력욕에 눈이 먼 철새 신자유주의자가 대표랍시고 뽑혔고(도대체 그에게 한나라당 시절과 사상적 변화가 생겼다는 건지 노무현 비석에 무릎을 꿇더군요...당적 바꾼거?) 민노당은 김정은에게 충성할 기세.jpg이고 진보신당은 존재감도 없는데 자기들끼리도 갈피 못잡고 있고. 얼마 전에는 진중권이 김규항하고 싸우다 삐쳐서 탈당했더군요. 이건 뭐 "멍하니 그냥 가만히 보다보면은 이거는 뭔가 아니다 싶어"요...

로쟈 2010-10-13 08:10   좋아요 0 | URL
민노당이 그 정도로 '호의적'인 줄은 몰랐습니다...
 

지난주 출간도서 가운데 한권을 더 챙겨놓는다. 당연한 말이지만, 매주 쏟아지는 책을 다 구입할 수도 없고, 주요 관심도서만 일독하는 것도 (전업 독서가가 아닌 다음에야) 불가능에 가까울 만큼 벅찬 일이다. 리뷰라도 챙겨두는 것은 그런 사정을 고려한 방책이다. 개정판이 나온 클라이브 폰팅의 <녹색세계사>(그물코, 2010)는 장서용으로라도 구해놓아야겠다. '진보'와 '승리'에 대한 비판이란 점에서는 존 그레이의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이후, 2010)에 이어서 읽어도 좋겠다. 클라이브 폰팅의 20세기사 <진보와 야만>(돌베개, 2007)도 이 참에 챙겨놓고.    

한국일보(10. 10. 09) 인간의 승리는 곧 '환경의 패배'를 말한다 

남미 서부 해안에서 3,200km 떨어진 외딴 섬 이스터. 1722년 부활절에 네덜란드의 로프헤펜 제독이 이 섬을 찾았을 때, 3,000명가량의 주민들은 갈대집이나 동굴에서 원시인처럼 살며 날만 새면 싸움질을 하고 서로 잡아먹기까지 하는 끔찍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 섬이 유명해진 것은 섬 전역에서 600여개나 발견된 최대 높이 10m의 거대한 석상 '모아이' 때문이다. 



야만의 섬에서 발견된 문명의 흔적을 놓고 온갖 해석이 난무했다. 영국의 역사학자 클라이브 폰팅은 수수께끼의 모아이 석상에 대해 "돌이킬 수 없이 환경을 파괴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섬뜩한 일례"라고 말한다. 씨족마다 고유의 종교와 세련된 의례를 갖고 번성했던 이스터 섬 사람들이 경쟁적으로 석상을 만들고 이를 해안의 제사 장소까지 굴려 옮기기 위해 나무를 마구잡이로 베어내면서 결국 몰락을 맞았다는 것이다.

"과연 우리가 이스터 섬 사람들보다 더 잘 살아왔을까"라는 물음으로 시작하는 <녹색세계사>는 인류 출현 이후 지금까지 200만년의 역사를 생태적 관점에서 기술한 걸작이다. 1991년 첫 발간 후 13개국어로 번역되며 환경 분야의 고전으로 자리잡았다. 이번 번역판은 3년 전 새로운 연구성과를 반영해 고쳐 쓴 원서 개정판(원제 'A New Green History')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책을 관통하는 화두는 "사람 또한 지구 생태계의 일부"라는 것이다. 사람이 생존을 위해, 더 나은 삶을 위해 벌이는 활동은 어떤 형태로든 지구 생태계에 변화를 줄 수밖에 없고, 이는 인간 사회의 변화를 초래하는 부메랑으로 되돌아온다. 저자는 이런 관점에서 현생 인류가 출현해 각 대륙으로 퍼져나가고, 농경을 계기로 정착사회가 생겨나고, 고대문명과 수많은 제국이 흥망성쇠한 과정 등을 인간사회와 자연의 '관계성'을 중심으로 세밀하게 그려나간다.

수렵 채취 시절에 대한 일반적 견해는 토머스 홉스의 말처럼 "구역질 나고 짐승같이 단명한" 생활이라는 것이지만, 최근 연구들에 따르면 인류사의 99%를 차지하는 이 시대 인간들은 환경과 조화를 이루면서도 충분한 식량을 얻을 수 있었다. 수렵 채취에서 농경으로의 전환을 흔히 '진보'라고 생각하지만, 땅을 개간하고 씨를 뿌려 수확하려면 엄청난 노동이 필요한 반면 식량 부족이나 기근의 우려는 더 높아졌다.

저자는 인간의 눈에는 '진보'나 '승리'로 여겨진 변화들이 지구 환경에서 보면 '손실'과 '파괴'일 수 있음을 역설한다. 나아가 산업사회 등장 이후 지난 200년 동안 발생한 환경 문제는 "역사에 유례가 없고 해결책을 생각해내기에 어려울 정도로 복잡"해서, 과연 산업사회가 환경적으로 지속가능한지를 판단하기에는 이르다는 비관론을 내놓는다.

그러나 저자는 비판을 위해 목청을 높이거나 화려한 수식으로 감정에 호소하지 않는다. 오히려 다소 지루할 만큼 차분하게 사실들을 촘촘히 엮어간 글에서 품위가 느껴진다. 일반적인 요즘 책들에 비해 빽빽하게 글자를 인쇄하고도 500쪽이 넘어(재생종이를 써서 그리 무겁지는 않다) 가볍게 읽을거리는 아니지만, 읽을수록 빠져드는 매력도 그런 품격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환경 문제를 공부하면서 환경운동에도 참여해온 번역자들의 공들인 번역도 깔끔하다.(이희정기자) 

10. 10. 10.   

P.S. 생태학 관련서로는 미국의 좌파저널 <먼슬리 리뷰>의 편집장 존 벨라미 포스터의 <마르크스의 생태학>(인간사랑, 2010)도 최근에 나온 책이다. 여러 권 소개된 그의 책들 가운데, 몇 권은 묶어서 같이 읽어봐도 좋겠다. 어느 세월에 읽을 것인가는 또 별개의 문제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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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11 02: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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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12 08: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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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19 00: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번주 관심도서 중 하나는 미국의 법학자 앨런 더쇼비츠의 <선제공격>(바이북스, 2010)이다. 이미 주문해놓은 책이기도 한데, 무엇보다도 미국 최고 수준의 법학자가 '선제공격'이란 걸 어떻게 정당화하는지가 관심거리. 의외로 언론리뷰에선 관심권 밖으로 밀려난 듯한데, 예외적인 기사가 있어서 스크랩해놓는다.     

동아일보(10. 10. 09) 잠재적 테러주의자 체포 법적으로 과연 정당한가 

최근 유럽의 도시들은 알카에다의 테러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 프랑스에서 테러가 발생한다면 파리의 에펠탑, 노트르담 성당 등에 대한 공격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이런 위협에 직면한 프랑스 경찰은 최근 마르세유, 아비뇽, 보르도 등에서 알카에다와 연계된 것으로 의심되는 10여 명을 체포했다. 여기에서 법적으로 따져봐야 할 문제가 발생한다. 테러 예방 차원에서 이들을 체포, 구금하는 것이 정당한가라는 문제다. 저자는 이 같은 테러 대책을 ‘선제(preemptive) 공격’의 일종으로 본다. “테러 계획이 있었는지 그 사실이 밝혀질 때까지 특정 용의자를 예방 차원에서 일정 기간 구금하는 것을 지지하겠는가”라고 그는 묻는다.

미국 하버드 로스쿨 역사상 최연소 교수 발탁 기록의 주인공인 저자는 세계사에 나타나는 ‘선제공격’의 예를 든다. 1967년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시작된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 간의 ‘6일 전쟁’이 그 하나다. 두 차례의 중동전쟁 이후 이스라엘은 아랍 게릴라의 근거지가 된 시리아에 먼저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 적군의 공격이 임박했다는 판단에 따라 자국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선제적으로 공격했다는 게 이스라엘의 주장이었다.

9·11테러를 당한 미국이 2003년 이라크에 공격을 가한 것과, 알카에다를 노리고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 역시 테러를 막기 위한 선제적 공격으로 볼 수 있다. 이 책은 1981년 이라크의 핵무기 원자로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격을 또 다른 선제공격의 예로 들었다. 이 사례들에서도 쟁점은 이 같은 선제공격이 과연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가라는 점이다. 저자에 따르면 6일전쟁 때는 전 세계가 대부분 이스라엘이 취한 선제공격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라크 핵 원자로에 대한 공격에는 비난이 쏟아졌다.

여기서 보듯 선제공격의 정당성에 대한 판단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국제사회는 경우에 따라 예방적 차원의 선제공격을 비난한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재무장을 막지 못한 유럽 국가들에 대해선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며 책임을 물었다. 법률가인 저자가 이 같은 사실들에서 이끌어내는 핵심 주장은 “각 나라가 이런 예방적 또는 선제적인 행위를 지배할 만한 협의된 법률 체계를 갖추고 있지 않으며 논의를 전개시킬 생각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위협이 닥치면 필요에 따라 대처할 게 아니라 합의된 법률적 근거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테러의 위협이 일상화되고, 아동 성폭력 같은 강력 범죄가 더욱 기승을 부리는 오늘날 이 같은 저자의 문제 제기는 진지하게 논의할 가치를 갖는다. 그러나 선제공격의 정당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점, 그 결과 강대국 편에 기운 채 논리가 전개되는 점은 눈에 걸린다. 이 책을 번역 출간한 출판사도 이런 사실을 의식한 듯 국내 법학자의 ‘반론’을 부록으로 실었다. 반론에서 원혜욱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타인을 침해하는 행위는 엄격한 요건에서만 정당화될 수 있으며 ‘예방’을 이유로 정당화될 수는 없다. 국가 간에 정당방위를 이유로 선제공격이 이뤄진다면 상대국의 수많은 시민은 생명을 잃거나 부상을 당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개인 간의 관계에서보다 국가 간의 관계에서는 정당화될 수 있는 공격을 더욱 엄격하게 해석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금동근 기자) 

10. 10. 09.  

P.S. 아마도 '로스쿨 관련서'로 묶어야 할 듯싶은데, 더쇼비츠의 책은 절판되긴 했지만 <최고의 변론>(이미지박스, 2006)이 출간된 바 있고, <미래의 법률가에게>(미래인, 2008)도 그의 책이다. <하버드, 철학을 인터뷰하다>(돌베개, 2010)에는 그의 인터뷰가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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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ai 2010-10-09 16:27   좋아요 0 | URL
기사 마지막 문단이 눈에 띄네요. 관계자-_-에게서 이 시리즈 전반에 나름의 색깔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색깔이 원색일지 무채색일지는 시리즈가 더 나와보면 밝혀지겠네요.

로쟈 2010-10-10 09:19   좋아요 0 | URL
네, 이 시리즈는 딱 1년에 한권씩만 책이 나오네요...

2010-10-09 22: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10 09: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10 09: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10 0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10 09: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10 13: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12 08: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호모 라피엔스의 사랑과 결혼

격주간 <기획회의>(281호)에 실은 전문가리뷰를 옮겨놓는다(잡지는 아직 이미지가 뜨지 않는다). 매달 원고지 16매 분량의 서평을 싣고 있는데, 현재 정기적으로 쓰고 있는 서평이나 칼럼 가운데는 가장 긴 편에 속한다. 마감이 닥치면 부담스러운 건 여전하지만, 마음대로 고른 책에 대해서 비교적 충분한 분량을 쓸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이번에 고른 건 존 그레이의 <하찮은 인간, 호로 라피엔스>(이후, 2010)로 원고는 지난달 연휴기간에 쓴 듯싶다.    

기획회의(10. 10. 05) 우리시대 쇼펜하우어의 제안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서구식 합리주의와 휴머니즘을 대변하는 인물 이반 카라마조프는 ‘휴머니즘’에 대해 “멀리 있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고 정의한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는 일반적인 정의를 보다 엄밀하게 규정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자신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휴머니즘’을 의문에 부친다는 점이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사랑할 수 없다는 그의 정직한 고백은 휴머니즘의 한계에 대한 자인으로도 읽힌다. 도스토예프스키가 그러한 서구식 휴머니즘과 대비시키고자 한 것은 그리스도가 말한 ‘이웃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는 합리적․무신론적 휴머니즘 대신에 기독교적 휴머니즘을 내세웠다. 요컨대, 휴머니즘에도 ‘나쁜 휴머니즘’과 ‘좋은 휴머니즘’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의 저자 존 그레이에겐 그러한 구분 자체가 미심쩍게 여겨질 만하다. 런던 정경대학에서 유럽사상 교수로 재직한 그는 휴머니즘을 아예 통째로 부정하고 거부하기 때문이다. 인간중심주의로서 휴머니즘은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지지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기본 입장이다. 그것은 책의 원제 ‘짚으로 만든 개(Straw Dogs)’에 극명하게 반영돼 있다. ‘짚으로 만든 개’는 <도덕경>에 나오는 ‘추구(芻狗)’의 번역이다. <도덕경> 5장의 문구 “천지는 어질지 않아 만물을 추구와 같이 여긴다”에 나오는 것으로, 제사를 지낼 때 쓰던 제물을 가리킨다. 제사가 끝날 때까지는 최고의 예우를 받지만 제사가 끝나면 바로 내팽개쳐지는 존재다. 그렇게 내팽개침은 천지의 ‘어질지 않음(不仁)’에서 비롯한다. 영어로는 ‘무자비하다(ruthless)’로 번역된다.  

‘만물’은 물론 인간과 동물을 구별 없이 가리킨다. 자유의지를 가졌다는 점에서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특별한 동물’ 혹은 ‘예외적인 동물’로 간주하려는 것이 휴머니즘의 기본 태도이지만, 그것은 인간만의 착각이고 오류이다. 더불어, 그러한 휴머니즘의 핵심이라고 할 ‘진보에 대한 믿음’ 또한 한갓 미신에 불과하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진보에 대한 믿음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발달하는 과학지식이 주는 새로운 힘을 사용해서 동물은 벗어나지 못하는 제약을 벗어 버릴 수 있다는 믿음”이다. 얼핏 탈종교적으로 보이는 이 믿음은, 그러나 ‘과학에 대한 신념과 종교적 희망의 혼합품’에 지나지 않는다. 저자는 “인간만이 자기 삶을 선택할 능력이 있다는 신념을 과학 결정론과 결합하기 위해 애쓰는 것도 기독교를 경험한 문화권에서만 있는 일”이라고 꼬집는다. 단적으로 말해서, 휴머니즘은 과학이 아니라 종교이며 인류가 이제까지 존재해왔던 세상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 ‘기독교 시대 이후의 신앙’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의 반휴머니즘은 기독교적 세계관 비판을 더 급진화한 것이기도 하다.  

 

저자가 변장한 종교로서, 기독교 신앙의 세속 버전으로서 휴머니즘과 맞세우는 것은 역사에 대한 고대적 견해다. 즉 “역사란 궁극의 의미를 갖지 않은 채 흘러가는 일련의 순환과정”이라고 보았던 통념적 입장이다. 인류도 ‘인간이라는 동물(human animal)’에 불과함을 입증해보인 다윈의 가르침과 함께 이러한 입장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그레이는 제임스 러브록의 가이아론을 든다. 그가 ‘가장 철저한 과학적 자연주의’라고 부른 가이아적 관점에서는 인간의 삶이 곰팡이 균의 삶보다 더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지구에 더 유해한 암종으로 분류된다. 현재 60억 명인 세계인구는 2050년까지 적어도 72억 명까지 늘어날 것으로 예측되는데, 지구는 이러한 인구 증가 추세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때문에 “가이아는 파종성 영장류 질환이라고 칭할 만한 상황, 즉, 인간이라는 유해 동물의 이상 대량 발생으로 고통 받고 있다”는 진단은 더이상 과장이 아니다.  

어떤 해결책이 있을까. 새로운 테크놀로지 개발이 방안으로 떠오르지만, 저자의 생각은 비관적이다. 인류가 테크놀로지를 통제할 수 있다고 보지 않을 뿐더러, 애당초 테크놀로지란 것이 통제할 수 있는 대상도 아니라는 판단에서다. 인간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가 이러한 판단에는 깔려 있는데, 그는 ‘약탈하는 자’란 뜻을 갖는 ‘호모 라피엔스(Homo rapiens)라고 불러 마땅할 만큼 유독 파괴적인 종이 지구를 책임지는 것만큼 대책 없는 일도 없다고 본다. “지구를 아끼는 사람들이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려면, 지구 자원을 세심하게 살피는 인류가 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중요하지 않은 시대가 와야 한다”는 것이 그의 핵심 주장이다.      

그렇다면, 그렇듯 비관적인 인간론의 출처는 무엇인가. 아마도 그러한 입장을 저자는 ‘비관적 견해’라기보다는 ‘제몫 찾아주기’로 간주할 듯싶다. “동물들은 태어나 짝을 찾고 음식을 구하다 죽는다. 그게 다다.”라고 한다면, 인간이란 동물에게서도 다른 걸 기대할 수 없다는 쪽이다. 그것이 말하자면 ‘제몫’이다. 하지만 우리는 개개인이 ‘인격체(person)’이며 우리의 행동은 저마다 스스로 내린 선택의 결과라고 믿는다. ‘의식’과 ‘자아’와 ‘자유의지’에 대한 믿음을 견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믿음은 과학적으로 지지되지 않는 기만일 뿐이다. 가령, 신경과학에선 ‘0.5초 지연’ 현상이라는 걸 말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의 행동을 유발하는 내부의 충동은 의식적인 결정을 내리기 0.5초 전에 일어난다. 즉 의식적으로 먼저 생각하고 그 다음에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뇌가 먼저 행동할 준비를 갖춘 다음에 우리는 그 행동을 경험한다.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 것은 의식의 대역폭이 적기 때문인데, 일상생활에서 초당 1,400만 비트 정도의 정보를 처리한다면 의식에 감지되는 것은 그 백만 분의 1에 불과한 18비트 정도다.   

우리는 자신을 통합적이고 의식적인 주체라고 생각하지만, 최근의 인지과학과 고대 불교는 통상적인 자아 개념이 환상이라고 일러준다. 우리의 자아도 ‘생명 조직상의 패턴’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발견은 우리가 ‘인간 종 중심주의’에서 탈피할 필요가 있다는 걸 말해준다. 더불어,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도 다른 동물의 욕구가 추상적인 모습을 취한 것일 뿐이란 사실을 직시하도록 해준다. 시인 브로드스키를 인용하여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 대한 진리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진리가 아니어야 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좋은 삶이란 진보를 꿈꾸는 삶이 아니라 삶의 비극적 우연성을 헤쳐 나가는 삶이다. 그것은 목적 없는 삶, “어떠한 의미도 존재하지 않는 사실들”을 그저 바라보는 삶이다. ‘우리시대 쇼펜하우어’의 제안이다. 

10. 10.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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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10-10-09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예쁜 여학생을 따라서 <보건의료진보포럼>이란 곳을 갔죠.(염불보단 잿밥ㅋ) 그 쪽에선 꽤나 유명하다는 하종강이라는 분이 강연을 하는데 말미에 '여러분 희망을 가지세요. 이제 다윈 탄생 200주년이죠. 과학적으로도 세상이 진보한다는 건 증명되어 있습니다.' 하시더군요. 씁쓸한 웃음이 나왔죠. 오히려 과학적으로 세상이 진보하지 않는다는 것이 입증되었다면 진보 정치를 어떻게 할 수 있냐는 고민을 해야할 상황일텐데...

자꾸때리다 2010-10-09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재미있던 건 아무도 그 이야기에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는 사실... 명색이 의대생, 간호대생인 사람들이 진화론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는 거...ㅋㅋㅋ 더군다나 나름대로 인문 사회 쪽에 관심도 많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물론 구태여 진화는 진보가 아니라고 말해봐야 알아들을 것 같지도 않았지만요.

로쟈 2010-10-10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보'도 신앙이니까요.^^

드팀전 2010-10-11 0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노>에 보면 마지막에 배신하는 양반이 있습니다.첨부터 노비들을 속이기 위한 음모였다지요.그가 마지막 자기의 정체를 드러내며 한 말이 '냄새'였습니다. 너희들의 냄새가 역겹다는...전 그 장면을 볼 때 벤야민이 <일방통행로>에서 말한 '모든 혐오감은 접촉에 대한 혐오감이다'라는 말과 까라마조프의 이반이 말한 '멀리 있는 휴머니즘'을 생각했습니다.
책의 향기는 거부감이 없어 책읽는 사람들은 다들 좋아하지만 사람의 향기는 늘 그런 것 만은 아니지요. 그럼에도 어디를 더 향해야 할지는...
새 책을 사봐야할텐데...10월은 눈코뜰새없군요. 늦었지만 새책나온거 축하드려요

로쟈 2010-10-12 08:49   좋아요 0 | URL
네, 감사합니다. 모든 접촉이 혐오감을 낳는 것은 아닌데(에로스적인 접촉도 있으니까요), 여하튼 가장 어려운 건 이웃사랑이지요.^^;

파고세운닥나무 2010-10-14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존 그레이의 책이 잇따라 번역된다는데 좀 더 만나볼 일입니다. <호모 라피엔스>는 제겐 거부감을 일으켰던 책이구요. 러브록의 가이아 이론은 <녹색평론> 쪽에서 에콜로지를 중심으로 소개했던 터라 공감할 부분이 많았지만요.

로쟈 2010-10-16 08:55   좋아요 0 | URL
저는 진보나 휴머니즘에 낀 거품을 빼는 책으로 좋게 읽었습니다. 그레이의 책은 두 권이 나와 있었는데, 더 나오나요? 기대가 되네요...

파고세운닥나무 2010-10-16 21:57   좋아요 0 | URL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환상]이 이미 번역되어 있군요? 절판되었지만요.

책 뒤 날개를 보니 [Black Mass]가 근간이라 적혀 있네요.

2010-10-16 1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귀족온달 2011-02-13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의외로 재밌더군요. <악의번영>이라는 책과 같이 읽고 있는데, 서구중심적인 개념에 대한 탈피의 모색이랄까요? 특히 과학자들도 신비주의적인 성향이 많았다는 지적이 흥미로웠습니다. '가이아에게 인류는 파종성영장류질환'이라는 표현이 기억에 남네요...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우학모)에 관한 기사를 오랫만에 옮겨놓는다. 이유야 물론 한글날 맞이다. '남의 말' 대신에 '우리말'로 학문하자는 주장에 직접 공감하기보다는 '외국어' 대신에 '한국어'로 학문하자는 정도로 눅여서 받아들이는 편이지만, 여하튼 '학문어'의 문제에 대해선 관심과 자각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한겨레(10. 10. 07) “남의 말 아닌 우리말로 학문합시다” 

우리 역사에서 말과 글이 일치했던 시기는 해방 뒤 지금까지 단 두 세대 동안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우리 생활에 오래 뿌리박은 한자어와 일본어의 영향으로 말글의 일치를 제대로 이뤄냈다고 자랑하긴 어렵다. 남의 것을 받아들여 지식으로 삼아왔던 학문 영역이 특히 그렇다. 개념을 가리키는 말들은 외래어투성이고 이를 해석하고 풀이한 말들은 한자어투성이라, 쉽게 이해할 수 없다는 지적이 많았다.

지난 5일 서울 강남역 근처에서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우학모) 소속 네명의 학자들을 만났다. 2001년 만들어진 우학모는 ‘남의 말’을 우리말로 고쳐 그 뜻을 제대로 새기고, 우리말에서 비롯되는 학문을 펼치기 위한 노력을 주로 기울여온 단체다. 현재 회장을 맡고 있는 최봉영 한국외대 교수(철학)는 철학과 한국학을 접목한 새로운 인문학 찾기에 몰두해왔으며, 전 회장인 정현기 세종대 교수(국문학)는 우리말로 된 비평이론을 연구해왔다. 유재원 한국외대 교수(그리스어)는 국내에 독보적인 그리스 연구가로서 학문의 주체성을 강조해왔으며, 구연상 숙명여대 교수(철학)는 철학이란 말을 ‘슬기 맑힘’으로 풀이하는 등 우리말로 된 개념어 찾기에 초점을 맞춰왔다.

우리말로 학문하기에 대한 이들의 고민은, 단지 ‘한국사람이면 당연히 한국말을 써야 한다’와 같은 당위적인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말은 생각을 규정하는 프로그램과 같기 때문에, 말을 따지는 문제는 학문의 본질을 따지는 문제와 맞닿는다고 한다. 서양인들은 근대로 넘어오면서 제나라 말을 바탕으로 삼아 생각의 세계를 묻고, 따지고, 풀어서 학문의 세계를 열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들이 만든 것을 받아서 쓰느라 제 나라 말로써 생각을 다듬지 못했다는 것이다.

최봉영 교수는 “남의 말로 할 때에는 흐릿하던 생각이, 우리말로 할 때에는 뚜렷해지기 마련”이라며 ‘배울 학’(學)을 사례로 들었다. ‘배우다’라는 말이 ‘배다’(스며들다, 버릇이 되어 익숙해지다)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따진 뒤에야, 학문·학습 등 추상적이기만 한 한자어의 뜻을 제대로 새길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우리말은 독창적인 생각을 다듬게 한다. 겉으로는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알아내는 행위를 뭐라고 해야 할까? 껍데기를 ‘깨어서’ 본질에 ‘닿는다’는 뜻으로 ‘깨닫다’라는 탁월한 표현이 있다. 독창적인 우리말인 ‘화병’이 서양 의학계의 관심을 모았던 것처럼, 우리말에 바탕을 둔 생각들을 더욱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말로 학문하기는 학문의 주체성 회복과 연관된다. 그리스어로 박사 논문을 쓴 유재원 교수는 “말은 ‘누구를 위한 학문이냐’를 결정한다”고 말했다. 한국인인 자신이 그리스어로 쓴 논문은 그리스어를 생활어로 쓰는 사람들을 위한 학문이 되지만, 한국어로 쓴 논문은 한국어를 쓰는 사람들을 위해 쓰인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한문이 지배계층인 사대부를 위한 학문으로 쓰였고, 일제 강점기 때 일본어가 제국주의를 위한 학문으로 쓰였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라고 한다.

한자어나 일본어가 아직도 우리 학문언어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현상에 대해 정현기 교수는 “우리 학문이 우리말을 생활언어로 쓰는 민중들을 위한 학문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라며 “기득권층의 노예의식을 깨야 한다”고 비판했다. 우리말을 제대로 써보지도 않고 우리말에 대해 ‘개념어가 빈약하다’, ‘학문에 적합하지 않다’ 등의 왜곡된 평가를 내리는 습관 역시 그런 노예의식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지금 우학모의 가장 큰 걱정은 우리 사회에 몰아닥치고 있는 ‘영어 광풍’이다. 영어로 쓰여진 국제학술지 등재 논문이 아니면 아예 제대로 취급도 하지 않는 국내 학계의 풍토가 학문어로서 우리말을 사라지게 만들 것이란 걱정이다. 대학사회에 영향력이 큰 <조선일보>가 영국의 대학평가 회사인 큐에스(QS)와 함께 지난해부터 펼치고 있는 대학평가의 내용을 보면, 한국어 논문은 아예 점수를 받지 못하는 구조로 이뤄져 있다. 유재원 교수는 “영어를 쓸 줄 아는 지배계층과 그렇지 않은 피지배계층이 나뉘고 있다”며 “조선시대 한자를 아는 사대부와 그렇지 않은 민중들이 갈렸던 것과 무엇이 다르냐”고 반문했다.

구연상 교수는 “영어로 쓰는 논문은, 학문 자체의 필요성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업적을 평가받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며 “진정한 국제화를 바란다면, 영어로 논문을 쓰라고 강요할 것이 아니라 우리말 학문과 그에 걸맞은 번역을 제대로 대접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우리말 강조를 국수주의로 몰아갈 것이 아니라, 우리말을 통해 누굴 위해 어떤 학문을 할지 돌아보자는 얘기다. 또 지난 9년 동안 우학모가 스스로의 공부에 치중했다면, 앞으로는 대중적으로 우리말 학문의 확산에 앞장설 것이라고 밝혔다.

우학모는 9일 한국외대에서 ‘한글날 기림 말나눔잔치(학술대회)’를 연다. 우리말의 힘과 생산성을 주제로 삼아, 학술어와 일상어 그리고 외국어가 제대로 어울리는 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다.(최원형 기자) 

10. 10. 09.  

P.S. 전에 한번 다룬 적이 있는데,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에서 펴낸 책은 세 권 정도인 듯싶다. '사무침'에서 '고마움'을 거쳐 '용틀임'까지. 다음 차례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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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10-10-09 00:22   좋아요 0 | URL
전 가끔 이런 주장을 접할 때마다 일종의 언어적 순혈주의가 아닌가 싶어요. 철학이란 단어를 슬기 맑힘으로 쓰자는 식의 주장은 오히려 학문을 일반 대중과 소통 불가능하게 몰아넣는 아이러니를 연출할 수 있지 않은지

자꾸때리다 2010-10-09 00:31   좋아요 0 | URL
의학도 돌창자니 빈창자니 하는 용어로 공부하다 보면 배우는 사람도 골치아프고 일반인에게도 그저 생경하죠. 그냥 차라리 jejunum, ileum 쓰고 말지. 그리고 병원에서는 어차피 공장, 회장이라고 환자에게 설명할 거면서.

로쟈 2010-10-09 08:03   좋아요 0 | URL
이공계에서 한국어는 이미 학문어의 역할을 상실한 거 같고, 인문사회과학쪽도 절반은 그래 보입니다. 저는 '우리말'보다는 '한국어'에 방점을 찍고 싶어요...

2010-10-09 22: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10 09:2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