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만 보고 새책이 나왔나 했는데, 아니었다. 야나부 아키라의 <프리덤, 어떻게 자유로 번역되었는가>(AK케뮤니케이션즈). 앞서 두 차례 나왔던 책이고 나는 모두 갖고 있는데, 여자가 같은 것으로 보아 번역에도 변동이 없을 듯싶다. 일본어 원제대로 초판 <번역어 성립 사정>(일빛)이 나온 게 2003년이고, 이후에 <번역어의 성립>(마음산책)이란 제목으로 한번 더 나왔었다.

이번에 나온 건 ‘이와나미 시리즈‘. 일본의 ‘이와나미 문고‘를 번역해내는 시리즈다. 일본의 간판 시리즈인 만큼 신뢰할 만한 총서다. 특히 <번역어 성립 사정>은 우리에게도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데, 바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용어들의 탄생사를 다루고 있어서다. 나열하자면, 사회, 개인, 근대, 미, 연애, 존재, 자연, 권리, 자유 등이다. 이런 개념어들을 빼놓고 생각이란 걸 할 수 있을까? 문제는 이 개념어들이 모두 번역어로서 발명된 것이라는 사실. 이에 대한 감각과 의식은 인문학도뿐 아니라 교양독자들에게도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책이 여러 차례 나오되, 매번 출판사가 바뀐 건 시사점이 있다. 베스트셀러는 아니라는 것. 그렇지만 꽤 끌리는 책이라는 것. 출판계에서나 주목하는 책일는지는 두고봐야겠다. 하기야 이 책과 유관한 개념사 책들이 별로 주목받지 않은 걸 보면 국내 독자들과는 인연이 안 닿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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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주간경향(1368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주요 정치철학자들의 공저 <민주주의는 죽었는가?>(난장)을 오랜만에 읽고서 알랭 바디우의 민주주의론을 간추렸다. 총선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는 이론적인 문제를 숙고할 여유가 없지만, 총선 이후에는 여러 모로 생각해볼 문제들을 던져주는 책이다. 알랭 바디우의 공산주의론(바디우는 민주주의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현단계에서는 그가 정의하는 공산주의를 통해서만 민주주의가 가능하다고 본다)을 이해하는 데 요긴한 글이기도 하다. 바디우가 번역한(번안한) <국가>도 소개됨 직하다...
















주간경향(20. 03. 16) 세계 자체가 실종된 민주주의 세계


<민주주의는 죽었는가?>는 번역본의 제목이고, 원제는 ‘민주주의, 어떤 상태에 있는가?’에 가깝다. 미국과 유럽의 간판 철학자 아홉 명이 제출한 현재의 민주주의에 대한 보고서를 한데 모은 책이다. 10년 전에 나왔지만 지금 시점에서도 문제의식은 전혀 퇴색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주목해서 읽어봐야 할 글이 많지만, 국내에도 많은 책이 소개된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의 민주주의론을 간추려본다. 그의 글 ‘민주주의라는 상징’에서 상징은 ‘엠블럼’의 번역인데, 바디우가 겨냥하는 것은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민주주의 비판이다. 민주주의가 ‘현대 정치사회를 지배하는 상징’이라는 것은 바디우만의 견해가 아닐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명분으로 우리는 모든 것을 비판의 도마에 올려놓을 수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 자체는 그 비판에서 제외된다. 곧 우리는 민주주의라는 가림막 뒤에 숨을 수 있다. 바디우는 그 민주주의를 건드리고자 한다. 왜냐하면 오늘날 민주주의는 ‘소수의 사람만이 누리며, 살고 있다고 믿는 성벽의 성벽지기이자 상징’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시도하며 바디우가 버팀대로 삼는 것은 플라톤의 주장이다. 플라톤에게 민주주의란 특정한 국가 형태(정체)만을 지칭하는 이름이 아니었다. 민주주의는 그것이 만들어내는 주체의 유형과 분리 불가능하다. 민주주의가 만들어내는 주체, 혹은 ‘민주주의적 인간’은 어떤 주체인가? 그것은 하찮은 향락을 추구하는 이기적 욕망의 주체다. 민주주의는 젊은이들에게 디오니소스적 격정을 심어주며 68세대의 아나키스트가 그랬듯이 “구속받지 말고 즐겨라”라고 말한다. 그리고 노년에게는 모든 가치가 똑같다고 가르친다. 모든 가치가 동질화되면 가치의 표준으로서 돈만이 숭배되고 노인들은 차츰 구두쇠가 된다. 민주주의적 인간이란 탐욕스러운 청년과 구두쇠 노인을 접붙인 인간이다. 

바디우가 보기에 민주주의 세계에서는 세계 자체가 실종된다. 플라톤주의자로서 바디우에게 모든 세계는 차이에 의해서만 구축된다. 세계는 먼저 진리와 의견의 차이에 의해 구축되고, 이어 서로 다른 진리 간의 차이를 통해 구성된다(바디우에 따르면 진리는 사랑과 정치, 예술과 과학, 네 영역에서 발명되고 생산된다). 그런데 만물의 등가성을 통해서 모든 차이가 지워지고 배제된다면 논리상 세계는 출현할 수 없다. 이것은 일종의 무세계이고, 무정부 상태다. “이 무정부 상태는 무가치한 것에 기계적으로 부여된 가치와 다름없다. 보편적 대체 가능성의 세계는 고유한 논리를 갖지 않은 세계이며, 그래서 세계가 아니다.” 

이러한 무세계, 혹은 무정부 상태에서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는가. 바디우는 플라톤이 귀족에게만 한정했던 역할을 모든 인간에게 확대 적용하려고 한다. 알려진 대로 플라톤은 <국가>에서 생산자 계급과 달리 수호자 계급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에게는 공통적인 것과 공유만이 존재했다. 이러한 수호자 계급의 일반화를 바디우는 “모두를 귀족이 되게 하기”라고 표현한다. 덧붙여 그는 모두의 귀족 되기가 공산주의에 대한 최고의 정의라고 말한다. ‘인민이 스스로에 대해 권력을 갖는’ 진정한 민주주의는 우리가 그러한 공산주의자가 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것이 바디우의 주장이다. 우리의 선거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잠시 생각해보게 한다.


20. 0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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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맘 2020-03-11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치적 철학이 부족하다보니 이론들 앞에서 항상 혼동이 생깁니다 칼포프 열린사회 에서 플라톤주의를 비판할때는 그것에 매료되었었는데 쌤이 정리해주신 위글을 보니 또 흔들흔들 합니다ㅎㅎ 마스크5부제 실시를 보며 우리가 사회주의냐라고 쓴소리를 하는 사람들을 보며 머리에서 김이 날정도로 화가 나는데, 이럴때는 모든 인간에게 확대한 플라톤의 국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ㅎ

로쟈 2020-03-11 21:18   좋아요 0 | URL
최소한 바디우의 정치철학을 이해하는 데 유용합니다. 바디우의 민주주의 비판은 자본주의 비판과 연계돼 있어서 자세히 다루긴 복잡하구요..

Comandante 2020-04-02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법치주의와 자유시장경제에 뿌리를 둔 현대 대의제 민주주의에 대한 당연하고도 멋진 비판이 아닐까 싶습니다. 대의민주주의에 어떤 당위를 부여하려는 시도도 우린 단호히 거부해야 합니다...
 
 전출처 : 로쟈 > <누명 쓴 사나이> 혹은 '맞는 남자와 틀린 여자'

14년 전에 올려놓은 글이다. 히치콕 영화에 대한 레나타 살레츨의 독해 따라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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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움베르토 에코와 추의 역사

11년 전에 쓴 리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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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의 ‘안티오이디푸스‘ 읽기>(그린비)가 나온 김에 서가에서 <안티오이디푸스>(민음사)를 찾았지만 실패하고 대신 <차이와 반복>(민음사)을 손에 들었다. 2004년에 번역본이 나왔고 책을 구한 건 2005년. 머리말만 읽은 흔적이 있다. 당연하게도 긴 호흡으로 읽을 여유가 없었고 마땅한 가이드북도 나오기 전이어서다.

이후에 두 권의 가이드북이 차례로 나왔다. 제임스 윌리임스의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라움)과 조 휴즈의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입문>(서광사). 두권 다 책상에 올려놓고 있는데 알라딘 구매에는 뜨지 않는다(어디서 샀단 말인가?). <차이와 반복>을 포함해서 모두 원서 내지 영어본을 갖고 있어서 독서준비는 다 갖춰진 셈. 그간에 시간적, 심리적 여유가 없었을 뿐인데 더 미룰 수도 없지 않느냐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원저는 1968년에 나왔으니 이제 52년이 된 책이다. 들뢰즈는 1969년에 가타리와 만나서 새로운 단계로 진입한다. 그 대표 성과물이 빅히트작 <안티오이디푸스>(1972)와 <천개의 고원>(1980)이다.

알려진 대로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서양철학사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독해하고 재구성한다. 키워드로 표현하면 ‘재현‘에 대한 비판이 그가 시도하는 과업이다. 그걸 따라가는 일이 만만치는 않다. 조 휴즈가 한국어판 서문에 적어놓은 바에 따르면, ˝들뢰즈는 엄밀하고 독창적이며 종합적인 독서를 하는 철학자였으며, <차이와 반복>이 주는 가장 큰 어려움 가운데 하나는 독자들에게 저자와 마찬가지로 광대한 철학의 역사를 가로질러 엄밀하고 정확하며 독창적인 독해를 하도록 요구한다는 사실에 있다.˝

15년 전에는 그런 요구를 감당하기 어려웠지만 지금은 사정이 나아졌는지(그래도 조금은 나아졌으리라고 기대한다) 테스트해볼 수도 있겠다. ‘들뢰즈와 문학‘에 관한 책들도 많이 나와있는지라 나의 관심사와 동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 들뢰즈의 칸트론과 니체론에도 조만간 다시 손이 갈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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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11 21: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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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11 21: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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