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주간경향(1392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지젝의 <팬데믹 패닉>(북하우스)의 메시지에 대해서 적었다. 리뷰를 작성하기 전에 검색해보니 한겨레 최재봉 기자의 리뷰기사 말고는 별다른 리뷰가 보이지 않았다. 특이한 일이지만 예사로운 일이기도 하다...

















주간경향(20. 08. 31) 현재 재난 상황은 새 공산주의 발명 절호의 기회


아직 가을의 문턱에 불과하지만 2020년은 단연코 코로나19가 세계를 뒤흔든 해로 기억될 것이다. 여전히 진행 중인 팬데믹 상황은 우리뿐 아니라 전 세계에 미친 영향이 그만큼 크다. 아직 때 이른 관심이긴 하지만 과연 세계는 코로나19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견해가 갈리지만 그렇게 되기 어렵다는 쪽이 우세하다. 우리 시대의 대표 철학자 가운데 한명인 슬라보예 지젝은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현재의 재난적 상황을 새로운 공산주의의 발명을 위한 절호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재난은 과연 어떻게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인가.


몇 년 전 100주년을 맞았던 러시아혁명의 사례를 보자. 1917년 러시아에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혁명이 일어났지만, 볼셰비키를 주축으로 한 혁명세력은 러시아 전역을 장악할 만한 충분한 역량을 갖지 못했다. 당시 수도 페트로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손에 넣었음에도 곧바로 반혁명세력의 반격을 받게 되었다. 공산주의 유토피아를 건설하겠다는 포부를 당차게 품었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예기치 않게 혁명군과 반혁명군 사이의 내전이 전개되었고, 이때 탄생한 것이 ‘전시 공산주의’다. 생필품을 포함한 물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시기라 이를 징발하고 배분하는 데 매우 혹독한 통제가 이루어졌다.

현재의 팬데믹 상황은 또 다른 의미에서 전쟁 상황이다. 다만 이번에는 러시아뿐 아니라 전 세계가 코로나바이러스와 벌이는 전쟁이다. 러시아는 당시 사회주의혁명이 확산될까 두려워하던 자본주의 국가들에 포위돼 있었고, 이는 전시 공산주의라는 기형적 체제를 낳았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전 지구적 자본주의에 의해 하나로 통합된 세계에서 팬데믹은 국경봉쇄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트럼프의 “미국 먼저!”라는 주문도 아무 소용이 없다. 킹 목사의 말을 지젝이 다시 인용하는 것은 그래서이다. “모두 다른 배를 타고 왔을 수는 있지만, 우리는 지금 같은 배를 타고 있다.”

같은 배를 타고 있다는 운명공동체로서의 자각은 현재 상황이 전 지구적 협조와 협력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는 주장에 동의하도록 해준다. 팬데믹은 전 지구적 문제이기에 개별 국가적 수준의 대응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국수주의적 포퓰리즘도 시장 메커니즘도 해결의 방책이 될 수 없다. 조건 없는 전면적 연대와 전 지구적으로 조율된 대응이 필요하고 정보의 공유와 그에 따른 계획의 조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지젝이 말하는 공산주의란 바로 그러한 새로운 협력체제를 가리킨다. 이조차도 낭만적으로 들린다면 현실적인 대안은 무엇인가? 연대와 협력을 축소하거나 포기함으로써 봉착하게 될 한계상황을 영국의 저널리스트는 이렇게 상상한다.

영국에서 코로나19 집단감염이 진행되어 병원마다 환자들이 넘쳐나는 의료 마비현상이 발생한다면 ‘세 명의 현자’ 지침에 따라 각 병원의 세 명의 선임상담자가 산소호흡기와 병상의 배분을 결정해야 한다. 과연 그러한 상황에서 상담자들은 어떤 기준으로 환자들에게 기회를 배분할 수 있을까. 과연 누가 생존의 권리를 박탈당하게 될 것인가. 그러한 선택과 배제가 과연 어떤 명목으로 정당화될 것인가. 지젝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아무리 문명의 외피를 쓰고 있더라도 그것은 야만이라고. 그렇다면 지젝의 주장은 이상적인 것도, 낯선 것도 될 수 없다. 이 양자택일은 지극히 현실적이며 냉정하다. 곧 “우리 앞의 선택은 야만이냐 아니면 어떤 형태로든 재발명된 공산주의냐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로쟈 > 카프카를 찾아서

6년 전에 쓴 칼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로쟈 > "돌이켜 생각해보니 왜 그가 그 일을 맡았던지"

14년 전에 쓴 페이퍼다. 지젝 읽기의 난점을 짚어본 것 가운데 하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로쟈 > '먹기 좋은 고기'들이 읽어야 할 책

12년 전에 쓴 리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인간은 사회성 동물이다. 군말을 덧붙일 것도 없는데, 이 자명한 사실이 갖는 의미는 그러나 충분히 음미되고 있지 않다. 그게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적절한 안내서가 없어서였다면, 마크 모펫의 <인간 무리, 왜 무리지어 사는가>(김영사)가 공백을 채워줄 만하다. 처음 소개되는 저자이지만, 에드워드 윌슨의 제자라고 하니까 왠지 친근하다(최재천 교수 역시 윌슨의 제자이니 동학이다). 개미와 같은 사회성 곤충 연구에서 인간의 행동진화에 대한 연구까지, 궤적도 윌슨과 비슷하다(책의 헌사에서도 윌슨을 언급하고 있다). 
















"이 책에선 곤충과 포유동물, 수렵채집인 사회를 통해 어떻게 친족사회에서 더 큰 사회가 출현하는지, 국가는 어떻게 건설되고 붕괴되는지, 집단 간의 동맹과 충돌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 끼리끼리 뭉치고 외부자를 배제하거나 포용하는 것은 어떤 조건에서 이루어지는지를 밝힌다."


인간의 무리성, 내지 사회성은 다르게는 '초사회성' '초유기체성'이라고도 표현될 수 있는데, 그와 관련한 책들도 나와 있다. 스승인 윌슨의 공저로 <초유기체>(사이언스북스), 국내서로 정연보 교수의 <초유기체 인간>(김영사)이 그에 해당한다. 
















장대익 교수의 <울트라 소셜>(휴머니스트)도 마찬가지. 우리 대 그들이라는 무리짓기 본성은 사회학 책들에서도 분석거리다(부족주의 정체성에 관한 책들까지 포함하면 더 늘어난다). 
















무리로서의 인간이라고 하니까 '인구'라는 주제도 떠올리게 되는데, 인구학자 폴 몰랜드의 <인구의 힘>(미래의창)도 참고할 만하다('인구학' 분야는 프랑스가 앞서가는 모양이다). 그러고보니 언젠가 '인구'를 주제로 한 책들을 소개한 적도 있다. 대니 돌링의 <100억명>(알키)도 그때 읽은 것 같기도 하다. 그 정도면 '인구의 힘'이 아니라 '인구의 공포'라고 해야겠지만...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0-08-25 09: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8-26 06: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8-26 19: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8-26 23:2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