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호모에렉투스
박동환 지음 / 길(도서출판)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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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환 교수의 이름을 처음 (들어)본 것은 오래전 연대 다니던 동생이 들춰보던 <서양의 논리, 동양의 마음>이란 책에서였다. 나는 대학에 좀 다녀본 나이였고, 그런 식의 이분법에 매력보다는 거부감을 느끼던 터여서,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다만, 논리적이라기보다는 아포리즘적인 책이었던 것 같은 기억만 남아 있다.

그리고 어쩌다 집어든 책이 <안티호모에렉투스>이다. 책의 겉모양새는 그다지 책다운 품새를 갖추고 있지 않은데, 유감스러운 것은 내용 또한 그렇다는 것이다. 저자는 책머리에 '이것은 책으로 엮을 만한 것이 아니다.'라고 적고 있는데, 이건 정말 겸양의 말이 아니다. 그가 보기에 동서양의 철학사 2500년, 혹은 약 3000년은 '고고학자들이 가리키는 적어도 백수십만 년전 호모에렉투스의 출현과 그 증명된 생존 양식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래서 이 '호모에렉투스로부터 현대철학자에 이르기까지 나타나는 하나의 긴요한 생명행태로서 탐구행위가 '해답의 논리'로 (이 책에는?) 간추려져 있다.' 이것은 아마도 가장 방대한, 그리고 유일무일한 철학적 스케일을 자랑할 만한 프로젝트일 것이다. 하지만, 그 프로젝트가 하나의 책으로 육화되어 있지는 못하다. 그것이 유감의 이유이다. 적어도 그러한 프로젝트가 육화되기엔 (질문과 응답을 빼고) 150쪽 남짓한 분량은 가소로울 수 있다. 선문답이 아니라면.

동서양의 철학사 전체를 '고생태학으로 함몰하는 철학사'로 간단하게 처리하는 것은 장자를 떠올리게 할 만큼 대범하지만, 그것은 도통한 사람의 일이지 철학자의 일은 아닐 듯싶다(나는 저자가 철학을 왜 천문학과는 대질시키지 않는지 의아할 따름이다). 그렇듯 대범하게 철학사를 주무르는 저자가 독자에 대해 그다지 배려하고 있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영어로 된 두 편의 논문을 포함해서 한문(중국어)과 희랍어 등이 본문과 주석에 어지럽게 펼쳐져 있어 어지간한 교양 정도는 아주 난감하게 만든다. 굳이 본문의 논리를 따라가는 건 논외로 하더라도.

제자들과의 '질문과 응답'은 그래도 책에서 가장 읽을 만한 부분인데, '상식적인' 제자들의 첫 질문은 이렇다. '문제는 과연 그것을(저자의 3표 철학) 학이라 할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학문이란 상호간의 의사소통을 전제로 하는 것'인데,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 ]로의 함몰'에는 다른 탐구주체와의 만남 내지 의사소통에 대한 고려가 결여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126쪽) 하지만, 스승은 개의치 않는다. 그래서 '선생님의 철학은 이제 알았다 싶어서 다시 뵈면 또 저만치 가 계시고 그런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156쪽)

그것은 아마도 제자들의 격이 너무 낮은 데서 비롯한 듯도 하다. 저자는 돌아가신 성철 스님이나 혜암 스님 정도의 분들과 삶과 철학을 논함이 마땅할 것이기에. 득도하지 못한 사람은 도인들의 경지를 그저 질투할 따름이다. 따라서 이 책에 별 하나만을 주는 것은 나의 정당한 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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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대한민국 1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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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의 마지막날에 쫓기듯이 책을 읽는다. 이 해가 가기 전에, 그리고 새해를 맞기 위해서. 월드컵의 해라고도 하고, '전쟁의 해'가 되리라고도 한다. 그리고 아마 선거의 해가 되리라. 지난 대선에서의 감격이 5년 동안 하강곡선을 그려왔지만, 새해에 그것이 다시 상승곡선을 그리리란 보장은 별로 없어 보인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다급하게 책을 읽는다. 박노자가 그린 '한국사회의 초상'을 읽는다. 장담하지만, 이 '초상'은 좀 뒤늦게 등장한 올해의 책으로서 손색이 없다.

러시아인 블라디미르 티호노프에서 현재는 귀화하여 한국인이 된 그의 책을 읽으며(나는 그의 책을 꽤나 고대했었다), 나는 책의 부제가 말해주는 대로, '서로 잡아먹기를 탐내는' 이 전근대적이고 국가주의적인, 아주 돼먹지 않은 나라, 대한민국에 사는 것이 속상하고 부끄러우면서도 한편으론 자랑스럽다. 그가 보기에 남한 사회는 권위주의와 차별의식으로 똘똘 뭉쳐진, 북한보다 그다지 나을 것도 없는 사회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그의 시각이 냉소가 아니라 뜨거운 비판이라는 데 있다. 그것이 뭔가 치부를 들킨 듯한 우리를 부끄럽게 하고 낯뜨겁게 한다. 하지만, 좀 있으면 목구멍이 뜨끈해진다.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거대한 뿌리>)라고 비숍 여사와 '연애'를 하고 난 시인 김수영은 뜨끈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어서 '버드 비숍 여사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고도. 왜? 그것은 그에겐(=우리에겐)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 낯선 러시아계(?) 한국인(!)의 책에서 나는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비판' 정신을 본다. 그리고 아직 그런 정신이 우리 사회에 살아있구나 하는 대견함과 안도감에서 나온 자랑스러움을 느낀다. 그것은 이창동의 영화 <박하사탕>을 몇 번씩 되돌려 보면서 속으로 흐느끼다가도 한편으로 이 감독과 영화가 대견스러워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과 같은 종류의 것이다.

가령 그의 비판은 이렇다. '대공분실에서 '통닭구이'나 재계에서 돈 뜯어먹기밖에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우리의) 정치인에게 남은 생존방식은 딱 하나다. 바로 '핫바지'나 '우리가 남이가' 같은 '화두'를 들어 '전라도 빨갱이'를 때려잡는 무용담을 나누는 것이다.'(95쪽) 그런 비판이 우리 사회에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이만한 진폭과 열기를 동반한 비판은 드물었다.(택시 운전사 홍세화와 'B급 좌파' 김규항 정도를 떠올릴 수 있을까?) 아마도 그래서 눈에 띄었을 것이다. 몇 년전 한겨레 지면에 낯선 필자의 칼럼이 연재됐을 때부터 나는 그의 글들을 주의깊게 읽어왔다. 한국의 사회와 역사에 대해 나보다 박식한 그에게 주눅들기도 하면서. 이제 그 감동을 여러 사람과 공유할 수 있어서 반갑고 다행스럽다.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 세대들이 읽었으면 싶다. 특히, 남한도 북한도 다 싫지만, 이민갈 생각은 없는 사람들은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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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진리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39
김선욱 지음 / 책세상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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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진리'란 제목으로 미루어 매력적이면서도 광범위한 주제들이 다루어질 거란 예측을 하게 되지만, 실제로 그렇지는 않다. 부제를 '한나 아렌트의 정치철학'이라고 했으면 보다 분명했을 듯하다. 하이데거와의 스캔들(?)로도 유명한 금세기의 손꼽히는 유태계 여성 철학자가 한나 아렌트이다.

아렌트의 주저인 <인간의 조건>이 이미 번역돼 있지만(저자가 이 번역을 인용하지 않는 걸로 봐서 그다지 신뢰할 만한 번역은 아닌가 보다.), 또 <폭력의 세기>와 <아렌트와 하이데거> 같은 책들도 이미 소개돼 있지만, 이 중요한 정치철학자가 지명도만큼의 호응은 얻고 있지는 못한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왜 아렌트가 중요한가, 그녀가 얘기하고 있는, 혹은 복권시키고자 하는 '정치적인 것'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요긴한 안내서가 되고 있다.

아렌트에게 있어서 '철학은 확실한 진리의 준거를 가지고 정치 영역으로 들어오지만, 정치는 그러한 준거가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79쪽) 만약에 진리의 준거와 기준이 존재하는 한 인간의 복수성(plurality)는 존중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정치의 실종이라는 말로 지적해야 하는 것이 바로 그 복수성의 실종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철인왕(=진리의 인간!)의 통치를 주장했던 플라톤이나 그의 계보를 따르는 정치가/정치철학자들이 실제로 한 것은 '정치의 목조르기'였던 셈이다. 정치란 진리의 영역이 아니기에, 그것은 언제나 떠들썩한 난장이어야 합당하다. 저마다의 의견이 활발하게 개진되고, 공감할 만한 합의점들이 모색되는 장이 바로 정치이기 때문이다.

이 떠들썩한 난장으로서의 정치는 그래서 두 얼굴을 갖는 듯하다. 그것은 '축복'이면서도 동시에 '저주'일 수 있기에. 그러나 정치의 축복이란 건 정치의 저주를 통과해가면서 얻어지는 지혜의 산물은 아닐까? 여기서 지난 60년대초 4.19에 의해 촉발된 정치의 장이 바로 군부(=확신의 인간들!)에 의해 짓밟혔던 사례를 떠올려보게 된다. 그리고 이어진 30여년 간의 정치의 공백을 회고해 보게 된다. 그러면서 생각하게 되는 것은 정치의 두 가지 조건이다. 무엇이 정치를 살아있게 하는가? 첫째는 생활의 여유, 즉 경제력이다.(그리스 민주주의는 노예제를 기반으로 했다.) 그리고 둘째는 정치를 책임지는 시민들의 활발한 '활동'이다. '정치가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시민의 대표이기 때문이다.'(101쪽)

아렌트는 분명 기존과는 다른 시각에서 정치 현상을 해명하고 또 복원하고자 한다. 다가오는 선거의 계절에 우리가 축복의 공간으로서의 정치를 맞이하기 위해서라도 그러한 시각은 한번쯤 되새겨 봄직하다. 그녀의 또다른 책 <칸트의 정치철학 강의>도 빠른 시일내에 우리말 번역본을 얻었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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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42
홍기빈 지음 / 책세상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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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부터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의 일부 교수들이 교육 내용을 하버드의 경제학과와 똑같이 만들자고 주장하는 믿기지 않는 소문이 있다고 한다. 저자가 전하고 있는 소문이다. 저자는 왜 그런 주장이 터무니 없으며 무책임한 주장인지(더불어 무식한 주장인지) 이 책을 통해서 설득력있게 밝혀놓고 있다. 그 일부 교수들에겐 아마도 '다른 경제학'에 대한 상상력이 부족했던 것이리라.

비교문학과에 재직중인 철학자 로티의 출세작 <철학과 자연의 거울>(왜 <철학 그리고 자연의 거울>이란 어색한 제목을 달고 출간됐는지 모를 일이다)을 읽으며, '철학이 가지 않은 길'에 생각이 미친 일이 있다. 인식론 중심의 철학, 즉 철학을 자연의 거울로 정향시키고자 했던 근대 철학의 기획이 필연적인 것이 아니었다면, 그래서 전혀 다른 철학이 가능했다면, 그 다른 철학은 어떤 것이었을까라는 생각 말이다. 그 생각은 즐거움과 씁쓸함을 동반한 것이었는데, '이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라는 것이 즐거움의 내용이라면, '근데, 이렇게 되고 말았어!'라는 게 씁쓸함의 내용이었다.

그런 즐거움과 씁쓸함을 신진 경제학도의 도발적인 문제제기를 담은 이 책을 읽으면서도 다시 한번 느꼈다. 그리고 그 가지 않은 길을 떠올렸다. 이번엔 경제학이 가지 않은 길! 그 길은 어떤 길인가? '경제학의 근본적 재구성'(10쪽)의 길이다. 그리고 그 길은 '경제 발전, 대량 소비, 산업 고도화, 자본 축적 등을 신봉하고 있는 현대의 경제적 패러다임이 주관적, 객관적 한계에 직면할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징후가 도처에 나타나고 있다'(162쪽)는 진단에서 떠올려지는 길이다. 저자는 그 길의 안내자로서 '경제학자' 아리스토텔레스를 내세운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르면, 인간 욕망의 무한성과 재화의 희소성이라는 현대 경제학의 두 전제는 상대화된다. 즉 전혀 다른 경제학이 가능한 것이다!

그 다른 경제학을 프락시스의 경제학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을까? 아리스토텔레스가 '무언가를 생산하는 행위'라고 정의한 포이에시스가 가치합리성이 배제된 목적합리적 행위라면, 프락시스는 '행위 그 자체를 목표로 하는 행위'로서 그 자체로 즐거움을 지향하는 행위이다. 즉 행복한 생활을 구성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단적으로 말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 '인생은 포이에시스가 아니라 프락시스이다'(112쪽) 그런데 그동안 우리는 포이에시스, 포이에시스적 경제학(=돈벌이 경제학)에 얽매여 살아왔던 것이다(우리는 시적인 삶을 살아왔던가?!). 그것이 저자가 부추기는 반성의 내용이다.

책의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후예들을 간략하게 거론한다. 거기엔 마르크스와 베블린, 폴라니, 그리고 케인스 등의 이름이 등장한다. 그리고 물론 저자 자신이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저자에 대한 기대의 표시이다. 경제사상사의 윤곽이 아닌, 박진감 있는 프락시스 경제학의 그림을 마저 완성할 책임이 그 후예들에게는 있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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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 도시에 가다
이득재 지음 / 문화과학사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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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M 쿳시의 소설 <페테르부르크의 대가>에서도 암시된 바 있지만,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는 무엇보다도 '페테르부르크'란 도시 공간의 작가이다. 그때의 페테르부르크는 근대 러시아의 모순과 운명을 집약하고 있는 상징적 공간이기도 하다. 저자가 이 책에서 제안하고 있는 것들도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비롯한다. 요컨대 '페테르부르크를 알아야 도스토예프스키를 이해한다'는 것.(저자가 왜 '레닌그라드'란 명칭을 고집하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레닌그라드의 현재 명칭은 페테르부르크이고, 도스토예프스키 시대에도 물론 페테르부르크였는데 말이다.)

책에서 주로 다루어지고 있는 작품은 <죄와 벌>이다. 그리고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저자에 의해서 도시계획가로 변신 혹은 격상된다. 물론 이러한 관점이 작가와 작품에 대한 기존의 이해에 더 보탬이 된다고 주장한다면 별 문제는 없어 보인다. 다만, 거기에 한정하여 작가와 작품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새로운 이해가 아닌 새로운 축소주의라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할 듯하다.

그것은 도스토예프스키와 영화를 다룬 4장에서 수많은 영화들을 제쳐놓고, 유독 마틴 스콜세지의 <택시 드라이버>와 <죄와 벌>을 비교하고,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 두 편과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두 편만을 대조시키고 있는 데서도 드러난다.(이왕 브레송 영화를 다룬다면, <백치>에 영감을 받았다는 <당나귀 발타자르>에 대한 분석은 왜 빠졌을까?) 그래서 아쉬움이 남는다. 그것은 저자의 문제의식에 공감하면서도, 그 주제들에 걸맞는 내용이 부피있게 다루어지지 않은 데서 느껴지는 아쉬움이다.

아마도 책을 급하게 준비한 탓인 듯한데, 내용들간의 유기적인 연관성이 부족한 한편으로 오타들도 눈에 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온순한 여인>(147쪽)은 <부드러운 여인>(151쪽)과 혼용되고 있고, '니끼타 미할코프'의 형인 영화감독 '안드레이 곤찰롭스끼'(콘찰롭스키가 맞다)는 그 아들로 잘못 소개되어 있다(122쪽). 타르코프스키의 책 <봉인된 시간>도 굳이 <시간 안에 새기기>(143쪽)란 제목으로 바뀔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다.
어쨌든 '위대한'작가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국내 저작이 매우 드문 형편에서 도스토예프스키란 이름만으로도 반가움을 갖게 해주는 책이다. 더구나, 저자는 그 '위대함'이란 꼬리표를 떼어내고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어보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그러한 시도가 위기에 처한 인문학을 넘어서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말한다.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는지 저자는 '책머리에'의 끄트머리에다 이렇게 적어 놓는다: '아무쪼록 본서가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단순한 깐죽거림이거나 냉소주의로 비쳐지질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니 이 서평도 절대로 깐죽거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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